[리뷰] <터널>
계속되는 인재의 향연 속에서 꿋꿋이 버텨 낸 한 인간, 아니 두 인간의 이야기 ⓒ쇼박스
재난은 해마다 반복된다. 자연재해나 천재지변은 인간의 손으론 어찌해볼 도리가 없는 바,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한 노력이 수반될 뿐 피해를 생략할 수도 원천적으로 예방할 수도 없다. '인재'라 불리는 재난이 있다. 이는 얼마든지 예방할 수도 피해를 생략할 수도 있다. 물론 인간이 하는 모든 일에 실수가 없을 수 없고 완벽할 수도 없다. 하지만 거의 모든 '인재'는 하나같이 너무도 어이 없는 실수나 부주의 때문에 일어난다.
문제는 인재를 해결하는 과정에서도 어김없이 인재가 계속된다는 데 있다. 태초의 원인이 되는 인재가 발목을 잡는 경우도 있고, 또 다른 인재가 일어나기도 한다. 차라리 이런 건 양반이다. 종종 인재를 양산시키기도 하니, 새삼 인간이 참으로 대단한 존재구나 싶다.
계속되는 인재, 무너지는 대한민국
영화 <터널>은 계속되는 인재의 향연 속에서 꿋꿋이 버텨 낸 한 인간, 아니 두 인간의 이야기다. 한 인간, 즉 터널에 갇히게 된 한 인간만의 이야기였다면 생각나는 영화가 몇몇 있다. 톰 행크스의 <캐스트 어웨이>, 제임스 프랑코의 <127시간> 등, 오로지 고립된 한 인간의 사투를 다루었다.
비슷한 설정이지만 <터널>과 더 가까운 영화들은 멧 데이먼의 <마션>, 라이언 레이놀즈의 <베리드> 등이 있겠다. 고립된 한 인간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그를 구출하려는 누군가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문제는 앞엣것보다 뒤엣것에서 생긴다.
대한민국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린다. 정수와 대경이 선사하는 씁쓸한 웃음 속에 무너진 대한민국의 울음이 있다. ⓒ쇼박스
"안전한 곳에 대피해 있으십시오."
무너진 터널 속에서 119에 전화한 정수(하정우 분), 안전이 무너진 곳에서 안전한 곳을 찾으라는 119 대원. 씁쓸한 웃음을 짓지 않을 수 없는 장면이다. 영화는 시종일관 이런 류의 웃음을 선사한다. 그 웃음 속에는 무너진 대한민국의 울음이 있다.
한편 일생일대의 특종을 놓칠 수 없는 기자들이 어김없이 출현한다. 정수의 유일한 생존수단이나 마찬가지인 휴대폰 배터리엔 전혀 관심이 없고 목소리에만 관심이 있는 그들은, "지금 심정이 어떠십니까?" 따위로 정수를 더욱 사지로 몰아 넣는다. 그의 목숨에만 관심이 있는 119 대원 대경의 제지가 있기 전까지는. 정녕 치가 떨린다.
영화는 한 발 더 나간다. 국민의 안전을 책임지는 장관께서 하시는 말씀이 "알아서 하세요"이고, 하시는 행동이 고작 사진 찍기라니. 대한민국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린다. 사고를 당한 사람이나 가족들만 재수 없는 거라는 생각을 안 할 수가 없다.
영화 속 현실과 비현실이 바뀌었으면...
수많은 현실의 반영일 이 영화에서 가장 비현실적인 부분이자 인물은 정수와 대경이다. 가장 인간적인 그들이 아이러니하게 가장 비현실적이라니, 내가 말하고 내가 어이없다. 끝없이 이어지는 인재들이야말로 비현실적인 게 아닌가. 비현실적이어야 하지 않은가. 그런데 그런 일들이 실제로 벌어지고 있으니 지극히 현실적이다.
정수와 대경이 영웅이 되길 바라는가? 영웅이 되길 바라지 않으면서도 바랄 수밖에 없는 아이러니 속에 우린 살고 있다. ⓒ쇼박스
정수는 극한의 상황 속에서도 웃음은 잃었을 지언정 유머는 잃지 않는다. 사람의 온기 또한 잃지 않는다. 큰 고민 없이 자신의 목숨을 나눠준다. 나라면 그럴 수 있을까? 왠지 그럴 것 같다. 그래야만 할 것 같다. 대경 또한 마찬가지다. 그는 웃음도 유머도 잃지 않는다. 그래야만 정수에게 믿음과 용기를 줄 수 있지 않은가.
무너진 시스템 속에서 한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 시스템도 할 수 없는 일을 어찌 시스템의 부속품이라 할 수 있는 개인이 한단 말인가. 그런데 꼭 개인이 일을 낸다. 시스템이 할 수 있는 게 따로 있고 개인이 할 수 있는 게 따로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우연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무엇이든 상관 없이 일단 구하고 보면 좋을 거다. 하지만 우린 안다. 그건 개인이 아닌 시스템이 해야 할 일이라는 걸. 우린 바란다. 시스템이 해결해주기를. 그게 현실적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그런 연속성에서 영웅도 바라지 않는다. 현실이 지극히 현실적이기만 한다면 왜 영웅이 필요하겠는가? 정수와 대경이 영웅이 되길 바라는가. 그들이 영웅이길 바라지 않으면서도 바라는 아이러니를 느끼지 않게 해주길.
2016년을, 아니 최소 차후 몇 년을 관통한다
영화는 분명 많은 재난 영화의 문법을 비껴 간다. 어떤 전조도 없이 시작부터 재난을 당하고, 주인공이 직접 난국을 헤쳐나가지도 않으며, 누군가 명쾌하게 나서서 그를 구출해주지도 못한다. 그래서 답답하기 짝이 없다. 영화가 그렇게 보이진 않는다. 영화는 답답하기 짝이 없는 현실을 명쾌하게 보여준다.
명쾌하게 보여주려다 보니 곳곳에 헛점이 보인다. 헛점이라기보다 어색하다고 해야 할까. 충분히 손쉽게 해결 할 수 있었는데 어째서 그렇게밖에 할 수 없었냐는 것이다. 그런데, 그게 다름 아닌 현실이라면? 현실이 아닌 비현실을 옮겨놨다면 영화적 장치로 볼 수 있겠지만, 현실이라면 그건 극도의 리얼리티로 봐야하겠다. 영화적으로 손해를 감수하면서까지 보여주려 한 현실 말이다. 굳이 '세월호'라고 말하지 않아도, 굳이 '대통령'이라고 말하지 않아도.
마냥 즐기기 힘들 것이다. 인간들의 행태에 눈살을 찌푸릴 것이고, 절망하는 이들을 보고 한숨을 내쉴 것이며, 웃음조차 씁쓸하기 짝이 없을 것이다. ⓒ쇼박스
단점을 찾기 힘들다. 헛점이나 어색한 점조차 의도의 산물이라면 말 다했다. 그냥 즐기면 될 듯하다. 생각지 못한 웃음보따리도 선사해주니 즐기는 데 충분할 것이다. 다만, 마냥 즐길 수 없다는 게 흠이다. 시종일관 다양한 인간들의 행태에 눈살을 찌푸릴 것이고, 절망하는 이들을 보고 한숨을 내쉴 것이며, 웃음조차 씁쓸하기 짝이 없을 것이다. 마음이 긴 터널을 지나는 것처럼 어두울 것이다.
재난 영화다운 블록버스터급의 비쥬얼과 영웅 서사시에서나 볼 법한 전개, 그리고 마음이 뻥 뚫리는 시원한 해결을 보고 싶다면 이 영화는 추천하지 않는다. 반면 진실을 마주볼 용기가 있다면 그래야 한다고 느낀다면, 꼭 볼 것을 권한다. 후회하지 않을 거고, 계속 생각날 것이다. 2016년을 관통하는, 아니 차후 몇 년 간을 관통하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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