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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시작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나는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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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나는 기억한다>


<나는 기억한다> 표지 ⓒ모멘토



글이란 게 시작과 끝이 가장 어렵고 그만큼 중요하다. 일단 어떻게든 시작하면 만들어지는 게 글이고, 어떻게든 끝을 맺으면 일단은 자리를 털 수 있는 게 글이다. 그 중에서도 더욱 어렵고 중요한 게 시작이다. 시작을 해야 끝을 맺을 수 있을 게 아닌가. 그래서 수많은 글쓰기 교본들에서 글쓰기 시작 비결을 전한다. 


글쓰기 책을 많이 접하지 않았거니와 글쓰기 시작 비결은 거의 들어본 적이 없는데, 최근 읽은 책에서 괜찮은 비결을 얻었다. 이남희 소설가가 내놓은 <나의 첫 번째 글쓰기 시간>(아시아)에서 글쓰기를 아주 쉽게 시작하는 방법 중 하나로 '나는 기억한다'를 제시했다. 


"'나는 기억한다'고 쓴 다음 마침표를 찍지 말고 잠시 기다려본다. 다음 말이 나오지 않으면 소리 내어 몇 번이고 중얼거린다. 아마도 뒤따라 이어지는 말이 있을 것이다. 그것을 글자로 옮기면 된다. 쓰다가 막히면 다시 '나는 기억한다'고 중얼거린다. 그리고 뒤따라 나오는 말을 기다려 무조건 쓴다. 이렇게 몇 번 되풀이하다 보면 어느덧 회상기 같은 글이 되어 있을 것이다." ('나의 첫 번째 글쓰기 시간' 26~27쪽 중에서)


글이 시작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이런 식이라면 글이 시작되지 않을 도리가 없다. 내가 기억하는 건 무수히 많으니까. 그냥 생각나는 대로 쓰면 된다. 반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걸 써도 좋을 것 같다. 무엇을 쓰든 글쓰기 자체로는 더할 나위 없는 방법이다. 아마도 이남희 소설가는 40년 전 미국에서 출간된 이 책을 참고하지 않았을까, 싶다. 화가이자 그래픽 디자이너로 유명한 조 브레이너드의 <나는 기억한다>(모멘토)이다. 


이 책의 모든 문장은 '나는 기억한다'로 시작한다. 대부분이 한 문장으로 끝나고, 아무리 길어도 한 페이지를 넘기지 않는다. 우리의 기억은 시간순서로 되어 있지도 않고 정확하지도 않고 장황하지도 않다. 대부분이 순간순간이다. 그래서 그 성의 없는 것 같은 한 문장이 가장 정확하고 알맞은 것 같다. 사실 그 한 문장 한 단어 안에 무수히 많은 것들이 담겨져 있는 것이다. 


작가가 이런 문장을 썼다. '나는 기억한다, 메릴린 먼로가 죽던 날을'. 이 한 문장으로 말할 수 있는 게 무수히 많다. 메릴린 먼로의 죽음에 관한 수많은 추측이 존재하지만, 1962년 8월 5일에 신경안정제 과다복용으로 죽었다는 설이 유력하다. 작년에는 전 CIA 요원이 조국을 위해 먼로를 살해했다고 폭로하기도 했다. 당시 미국의 존. F. 케네디 대통령뿐만 아니라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와도 내연 관계에 있었던 먼로가 국가 기밀을 누설할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단편의 기억, 순간의 기억으로 만들어진 아무것도 아닌 듯한 한 문장이 가지는 위력이 이 정도이다. 고스란히 '나는 기억한다'라는 문구가 가진 힘으로 옮겨간다. 반면, 이런 문장도 그 위력이 충분하다. 아니, 오히려 위력은 훨씬 강력할 것이다. '나는 기억한다, 창밖으로 보이던 비오는 날들을' 이 문장은 위의 문장처럼 누군가는 기억하고 누군가는 기억할 수 없는 종류가 아니다. 모든 이들을 위한 기억이자 문장이다. 지극히 평범하고 지극히 보편적이다. 


창밖으로 보이던 보이는 날들이 누군가에는 애절하게 누군가에는 짜증나게 누군가에는 기분좋게 누군가에는 섬뜩하게 다가왔을 것이다. 비가 오면 생각나는 사람이 있는지 왠지 쓸쓸해지기도 하고, 출퇴근하면서 비에 젖은 우산에 이리저리 치일 생각을 하니 짜증나기도 하며, 오랫동안 비가 오지 않아 쩍쩍 갈라지는 땅을 보며 시름시름 앓았을 농부들에겐 기분좋게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홍수로 큰 피해를 봤던 누구는 비오는 것만 봐도 모골이 송연해지지 않았을까. 


'나는 기억한다'가 곧 신이다


'나는 기억한다'는 그 뒤에 무엇이 따라오든, 하나하나가 모두 다른 종류의 글이다. 기억하는 사람이 다르고, 장소와 시간이 다르고, 느낌이 다르고, 생각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토록 탁월할 수가 있을까, 싶다. 지난 수십 년간 미국 전역의 글쓰기 교실에서 수많은 문인과 교사들이 활용해온 형식이 바로 이 '나는 기억한다'라는 게 당연하게 느껴진다. 내가 쓰기도 쉽거니와 가르치기도 쉬울 것 같다. 


이 형식은 결코 글쓰기를 쉽게 시작하는 방법이 아니다. 글쓰기를 시작해서 끝내는 것까지, 글쓰기의 모든 걸 가능하게 해준다. 믿기지 않겠지만, '나는 기억한다'를 쓰는 순간 이미 글쓰기는 시작되었고 끝을 향해 가고 있다. 마치 주문같다. 주문만 외우면 '뿅'하고 원하는 것이 눈앞에 나타나는 것처럼, '나는 기억한다'만 쓰면 눈앞에 완성된 글이 '뿅'하고 나타날 것이다. 


이 책은 이 문구 하나만 알아도, 그 위력을 조금이라도 실감할 수 있어도, 충분한 가치를 지닌다. 그 자체로 완벽하다. 많은 생각하지 말고 읽어보시라. 그리고는 한 번 '나는 기억한다'라고 써 보시라. '내가 글을 쓰고 있는 게 아니라 마치 나로 인해 글이 써지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될 것이다. 언제나 신이 어깨에 내려 앉길 기다리고 있을 필요가 없다. '나는 기억한다'가 곧 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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