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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의 예술, 만화

병역특례 3년 반, 그 공장에선 무슨 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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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일상을 이루는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 만화 <남동공단>

매주 일요일 오후 10시 55분이면 어김없이 찾아와 가슴을 촉촉이 적셔주는 프로그램이 하나 있다. 프로그램 이름은 <다큐멘터리 3일>(KBS 2TV). 대부분 너무나도 익숙하고 친숙한 곳에서의 3일을 보여주는데, 항상 낯선 것은 왜일까. 겉으로 화려해 보이는 곳이 속은 너무나 평범하다는 것을, 평소에는 무심코 지나쳐 버리곤 했던 곳이 사실은 어느 곳보다 바쁘게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나와는 아무런 관련도 없는 그곳에서도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은 아닐까. 또는 관심이 없을지도. '나와는 상관없다'고 생각하거나 너무 동떨어져 있거나, 혹은 너무 평범하거나.

군대를 다녀온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군대 또한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곳이라는 것을. 군인이라는 하나의 대명사 안에는 몇십만 명의 수많은 개체 명사가 존재한다. 그 속에 속한 모든 개체 명사들이 동일한 일을 하고 동일한 삶을 살아가기에 아무도 알려고 하지 않는 것 같지만, 누구나 알고 싶어한다. 그들 개개인의 삶을 말이다. 군인은 그렇게 위로받곤 한다. 자신들 또한 개체라는 사실을 자각하며. 

노동자 또한 마찬가지다. 지극히 활동적이거나 매일, 매주, 매달, 매년 완전히 다른 일을 하지 않는 이상, 그들이 속한 집단이 하는 일은 거의 같다. 지겹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현대 사회에서 노동자에게 이름은 '없는 것'과 같다. 그냥 노동자라고 통칭할 뿐이다. 나를 포함한 그들은 알고 싶어한다. 자신이 누군지를, 익숙하지만 낯설기만 한 자신을 말이다.

그들은 매 순간 살아있다


ⓒ 새만화책

마영신 작가의 만화 <남동공단>(새만화책)은 작가 자신이 2002년도부터 3년 반 동안 인천 남동공업단지(남동공단) 내 병역특례 업체에서 일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공장 노동자들의 지극히 일상적인 삶을 담고 있다. 아무도 관심 두지 않고 거들떠보지 않는 그곳의 삶은 어떨까. 평범할까 특별할까.

한마디로 단언할 수는 없지만, 그들의 삶 또한 평범한 듯하다. 공장에서 일어나는 사건이나 사고들은 다른 직장에서 일어나는 사건·사고와는 다소 거리가 멀지만, 그들에게는 일상적일 것이 아닌가. 당사자들의 눈으로 보자면 어디든 다 평범할 것이다. 

작가는 종민이라는 이름의 캐릭터를 자신의 분신으로 내세운다. 그리고 같이 일하는 사람들과의 첫대면에서 이름과 얼굴을 일일이 대조시키며 확실한 눈도장을 찍는다. 노동자라는 이름 하에 이름을 잊어버린 그들의 존재를 되새기게 해주는 장치다. 마지막 장을 넘길 때까지 독자가 그들의 얼굴과 이름을 잊지 않을 수 있게끔. 

종민은 낯선 그곳에서 3년이라는 시간을 보내야 한다. 3년. 첫날 만나게 된 고참의 위로어린 충고가 그 시간을 설명해준다. 우리의 일상 속 생각을 설명해주는 듯하다. 

"월요일은 그래도 시간 잘 가는 날이야. 아침에 예배 드리면 오전 금방 가고 점심 먹고 오후 슬슬 마치면 다음날 화요일, 여기 수요일 날은 맛있는 거 나오는 날인데 화요일은 다음날 뭐 나올까 생각하면서 보내고, 수요일은 맛있는 거 나오는 날이니까 기분 좋아서 시간 금방 가고, 목요일은 다음날 금요일이니까 그 생각에 시간 금방 가고, 금요일은 마지막 일하는 날이니까 기분 좋아서 금방 가버리지, 그렇게 하면 시간 금방 가."(본문 속에서)

그는 매일 똑같은 일을 반복한다. 굳이 그의 일을 나열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하지만 사람들과의 이야기는 매번 다르다. 언뜻 무한 반복되는 동일한 일에 파묻혀 자신을 잃어버릴 것만 같지만 그렇지 않다. 그들은 매 순간 살아 있다.

진득하니 사람 냄새나는 만화 그려주길


ⓒ 새만화책



작가 마영신의 전작들을 살펴보면 공통점이 있다. 인간을 그린다는 것. 담백하게 그린다는 것. 평범한 일상을 과장이나 왜곡없이 그린다는 것. 이번 작품 <남동공단>에서도 이런 특징은 그대로 이어진다. 다른 누가 아닌 마치 나의 얘기를 조곤조곤 들려주고 있는 것만 같다. 그만큼 책장을 넘기는데 속도가 붙어 짧은 시간 안에 다 보게 되지만, 곧 다시 한번 읽게 되는 묘한 매력이 있다.

그림체 또한 평범하기 그지없다. 개인적으로 미술에 대한 감각은 형편없기에 섣부른 판단을 할 수 없지만, 최소한 요즘 스타일은 아니라는 것만은 알 수 있을 정도다. 반면에 보기에 전혀 부담감이 없다.

만화가 어쩔 수 없이 지녀야 할 거의 필수적인 요소인 판타지성을 내용·외형에서 모두 벗어던져 버린 듯하다. 평범하다 못해 뒤떨어진다고 생각했던 것이 오히려 특별하게 다가온다. 작가의 스타일인지 작가가 노린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만화에 대한 고정관념을 조금은 깨뜨리는 데 일조했다.

이 작가가 앞으로도 진득하니 사람 냄새나는 만화를 그려주길 바란다. 내가 나로서 존재하지 못한 것처럼 느껴질 때, 화려함 속에 파묻혀 평범함이 그리울 때, 다른 곳에서 열심히 살아가는 또 다른 나의 이야기를 듣고 싶을 때 언제든 펴볼 테니.



"오마이뉴스" 2013.4.18일자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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