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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 열전/신작 도서

돈 주니까 심장 맡긴다? 지금은 얼마나 달라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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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보잘것없이>귄터 발라프는 1983년 3월, 신문에 광고를 낸다. 튼튼한 '외국인'이라며 보수가 적은 거에 상관없이 일자리를 구한다고. 르포기자인 그는 엄연한 독일인이지만, 터키인 알리로 완벽히 변신을 하고 '가장 더러운 쓰레기'가 돼 '가장 낮은 곳'으로 들어간다. 

처음에는 실험삼아 일을 해본다. 터무니없는 돈을 받으며 승마교습소 보수작업·원자력발전소 근교의 농장에서 일을 했다. 하지만 참지 못하고 곧 도망을 치곤 했다. 닥치는대로 일을 했지만, 돌아오는 건 갖은 멸시와 분노뿐. 

터키인 알리는 드디어 '맥도날드'에 취직을 한다. 세계적인 초거대기업인 '맥도날드'. 그곳이라면 외국인 노동자인 알리를 잘 대해주지 않을까? 이런 문구를 보니 뭔가가 다를 것 같다. 

"맥도날드는 여러분이 즐겁고 부담 없이 식사할 수 있는 패밀리레스토랑입니다. 편안하고 즐거움을 주는 매우 청결한 환경에서 맥도날드를 체험해보십시오. (중략) 저희 회사와 함께 일하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하며 여러분이 저희 팀에서 즐거움과 성공을 이루시길 바랍니다."(40쪽)

어리석은 생각이었나 보다. 첫날부터 자연스레 초과근무를 하게 된 터키인 알리. 끊임없이 울리는 벨로 인해 한시도 쉴 수 없고, 모순 덩어리인 매니저의 말은 너무나 어이가 없다. 더러운 건 둘째치고, 성희롱과 놀림은 일상이 돼 버렸다. 노사협의회 따위는 아예 없다.

알리(귄터 발라프)는 건설 현장을 찾아간다. 뒤셀도르프 시에 있는 하청회사 GBI. "이 회사는 고용인들을 합법적으로 신고합니다!"라고 칠판에 쓰여 있지만, 근로증명서에 대한 어떤 언급도 없다. 알리가 속한 작업팀은 "병신 같은 터키 놈" "터키 놈들 모조리 죽어라" 따위의 말을 들으면서도, 돈을 주기 때문에, 일자리를 주기 때문에 이 같은 모욕을 감수해야 한다. 감수해야 할 게 이리도 많은 건지... 외국인 노동자는 개돼지만도 못한가 보다. 

'개돼지'만도 못한 사람들의 이야기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보잘것없이>는 르포기자인 저자 귄터 발라프가 터키인 알리로, 즉 외국인 노동자로 변신해 각종 인권 사각 지대에 잠입, 실태를 고발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우리나라에도 훌륭한 이주 노동자 이야기가 있어 소개해본다. 2004년부터 <오마이뉴스>에서 연재 중인 '고기복의 이주노동자 이야기'가 바로 그것. 이주인권 전문 저널리스트이자 한국해외봉사단원연합회(KOVA) 이사장인 고기복 시민기자가 이주노동자 운동을 하며 겪었던 일들을 옮겨 놓은 것이다. 최근 기사인 "통계청 '2012 외국인고용조사', 노동부는 보고 있나?" 중 몇 단락을 옮겨본다. 

"통계청이 지난 22일, '2012년 외국인 고용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외국인 취업자 수에 대한 공식적인 통계가 나온 건 이번이 처음이다. (중략) 조사 결과에 따르면 2012년 6월 기준으로 국내 상주 15세 이상 외국인은 111만4000명이며, 취업자는 총 79만1000명으로 조사됐다. (중략) 즉 이번 통계는 외국인 취업자들이 과도한 노동을 하고 있고, 부당한 노동력 착취에 무방비로 노출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들의 열악한 취업 환경 개선의 시급성에 대한 당위성을 말하고 있다."

30여 년 독일에서의 현실과, 21세기 대한민국의 현실이 겹쳐진다. 최근에는 유명 작가 공지영이 <의자놀이>를 출간하며 쌍용자동차 사태를 다뤘는데, 재능기부 프로젝트라는 점과 저작권 관련 논란으로 이슈가 돼 아쉬움 점이 남는다. 

"떠나지 않으면 경찰 부르겠소!"... 어디서 많이 본 풍경

터키인 알리가 된 귄터 발라프는 1여 년 간 패스트푸드점·건설현장·공장·핵발전소 등에서 외국인 노동자가 돼 '죽도록' 일을 하지만 돌아오는 건 적디 적은 임금과 해고뿐이었다. 세례를 받으려 했지만 거절당하고, 심지어 돈을 벌기 위해 '실험용 인간'이 되기도 했다. 

"여기는 난민수용소가 아니오. 당장 떠나지 않으면 경찰을 부르겠소!" 나는 무릎을 꿇고 손을 모아 애원하면서 마지막으로 그의 그리스도교적 양심과 직업적 사명을 환기시키려고 애썼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그러자 대답 대신 문이 꽝 닫혔다.(본문 69~70쪽) 

"질문 하나 있어요. 원해요. 세례 그리고 그리스도인 되려고요. 터키 사람이에요." 그는 넋이 나간 사람처럼 우리를 쳐다보았다. "안 돼, 어림없어. 난 할 수 없소. 안 돼요."(본문 70~71쪽)

3년 전부터 실업 상태인 어느 실험용 인간(39세)은 내게 이렇게 말했다. "난 훨씬 더 심한 실험도 견뎌봤어. 중환자실에서 온몸에 튜브를 연결한 상태로 말이야. 거기서는 우리 그룹 모두가 질질 끌려다녀야 했고 몇 사람은 침대에 실려 갔어." 그는 특히 위험한 실험은 밤에 실시한다는 뮌헨의 한 연구소에 관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인간이 견딜 수 있는 고통의 한계를 넘어서지. 그들은 언제나 실험대상자들을 찾고 있었어." 다른 한 사람은 뮌헨 근교에 있는 '심리검사 지하실'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곳에서 때로는 4주 내내 완전히 컴컴한 상태에서 실험을 했다는 것이다. 열여덟 살 된 또다른 피실험자는 뮌헨의 심장센터에서는 대단히 위험한 실험을 하는데도 사람들은 "돈을 많이 주기 때문에 자기 심장을 맡긴다"고 말했다.(본문 199쪽)

저자 귄터 발라프는 이 책이 출간된 후, 수많은 소송에 휘말린다. 세계적인 대기업 맥도날드, 거대 철강기업 티센 등과의 지리한 소송. <타게스차이퉁>은 이를 두고 "가장 높은 자"를 상대로 했다고 썼다. 

1987년 2월 23일, 뒤셀도르프 지방법원은 드디어 발라프를 상대로 한 티센의 소송에 대해 판결을 내렸다. 재판부는 티센 사가 제소한 총 일곱 건의 사안 중에서 한 건에 대해서만 승소 판결을 내렸다. 다른 한 건에 대해서는 3분의 2 승소와 3분의 1의 기각 결정을 내렸으며, 나머지 다섯 건에 대해서는 모두 기각 결정을 내렸다. 또한 소송비용의 24퍼센트는 발라프와 출판사가 부담하고, 나머지 76퍼센트는 티센이 부담하라는 판결도 내렸다. 이로써 철강 대기업이 실제적으로 패소한 것이나 다름 없었다. 아울러 이미 출간된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보잘것없이>도 계속 판매할 수 있게 되었다.(본문 370~371쪽)

한국에 있는 이주노동자가 마주한 현실은 어떨까

대부분의 소송에서 승리한 후, 많은 변화가 있었다. 대대적인 압수 수색작업으로 불법적인 행위들이 확인됐고, 언론 보도로 인해 모든 사람들이 알게 됐다. 정부는 노동자 용역에 대한 조건들을 강화하겠다는 뜻을 피력하기도 한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한 권의 책이 이토록 정치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세상을 바꾸고, 무엇인가를 움직이게 했다는 사실 자체가 주는 감동은 차원이 다른 감동이다. 

책은 굉장히 흥미진진하다. 개인적으로 외국에서 1여 년 간 일을 한 적이 있는데, 마음이 아프고 한없는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 걸 느꼈다. 터키인 외국인 노동자 알리가 된 귄터 발라프는 매일매일 멸시와 적대감·증오를 온몸으로 받으며 그래도 자신은 독일인이라는 사실을 인지했기에 버틸 수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진짜 외국인 노동자들은 어떻게 버틸 수 있는 것일까. 

저자는 들어가는 말에서 "19세기에 관한 역사책에서나 기술될 만한 상황을 나는 독일연방공화국 한가운데서 (이나라의 민주주의 안에서) 경험했다"고 했는데, 당시는 지금으로부터 30여 년 전인 20세기였다. 21세기인 지금, '자유 민주주의' 대한민국에서는 어떨까.


"오마이뉴스" 2012.12.31일자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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