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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 열전/신작 도서

아버지의 스크랩북을 통해 '나'의 역사를 들여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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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고경태 기자의 <대한국민 현대사>얼마 전 외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셨을 때 그동안 보기 힘들었던 수많은 친척 분들을 만날 수 있었다. 작은외고숙 할아버지(어머니의 작은고모부)도 그 중 한 분이셨다. 대찬 성격에 확고한 삶의 신조를 가진 분이셨다. 정치적 견해 또한 확고하셨다. 당신이 보수적이라는 걸 인정했고 거기에 한 점 부끄러움이 없으셨다. 모든 걸 파괴한 전쟁을 전후해서 태어났고, 총체적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분들 대부분이 자신도 모르게, 너무도 당연하게 보수적인 사람이 된 것이다. 

그런데 의외로 다른 사람의 말을 들으려 하셨다. 보수라고 하면 꽉 막혀 있다는 나의 고정관념을 깨뜨린 사건(?)이었다. 나의 정치적 견해를 물으시며 요즘 젊은이들은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궁금해하셨다. 나는 버릇없다고 혼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솔직한 정치적 견해를 말씀드렸다. 이에 할아버지께서는 인정할 부분은 인정해주시며 당신의 의견을 말씀해주셨다.

평소 아버지나 고모부의 보수적인 견해에 반하는 의견을 말씀드릴 때 나오는 반응과는 사뭇 달랐다. 이것이 진짜 대화이고 소통이라고 느꼈다. 자신의 의견을 말하되 상대의 의견을 존중하고,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시키기 위해 사실을 왜곡하지 않는 대화. 생전 처음으로 느껴보는 대화다운 대화였다. 

오래된 신문기사를 두고 나누는 아버지와 아들의 대화

<대한국민 현대사> 표지 ⓒ 푸른숲



한국 최고의 편집기자, <한겨레> 토요판 에디터 고경태가 <대한국민 현대사>(푸른숲)를 펴냈다. 그의 아버지 고 고봉성 목사가 50여 년 전부터 34년간 스크랩한 신문 기사들을 한 권으로 묶었다. 총 25권으로 이루어져 그 방대함과 꼼꼼함을 자랑한다고. 스크랩북 속 과거의 신문 기사들을 오늘의 시사문제와 연결해본다는 구상에서 출발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아버지와 주거니 받거니 대화를 이어나가게 되었다.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말이 있다. 역사를 대할 때 대표적인 통설로 자리매김한 이 말은, 절대적으로 객관적인 역사란 있을 수 없고 상대적일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현재와 과거를 연결하고 현재에 비추어 과거를 되새기며 과거에 비추어 현재와 미래를 본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통찰과 신념, 상대적인 시선이 필요하다. 과거와 현재, 미래에 대한 통찰, 즉 사실의 이면을 들여다볼 줄 알아야 한다. 나름의 절대적인 신념과 시선이 필요하지만,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인정할 줄 아는 상대적인 시선 또한 필요하다. 

저자 고경태는 아버지 생전 어색하고 서먹해서 건네지 못했던 말들을 늘어놓는다. 다분히 그만이 가지고 있는 신념과 시선이 투영된다. 그러며 있는 사실을 그대로 전하려는 신문기사 너머의 이면에 접근하고자 한다. 

아버지와 대화를 하면서, 신문기자와도 대화를 한다. 주장하며 비꼬기도 하고, 정리하며 받아들이고 인정하기도 한다. 상대적인 시선을 잃지 않는다. 그는 이 시대가 인정하는 편집기자임과 동시에, 훌륭한 역사가의 능력을 가졌다.

선, 의, 사랑, 진실, 소망, 믿음이라는 단어들을 발음해보며 아버지를 놀리고 싶다. 참 순백의 마음을 가지셔서 좋겠어요? 저는 도덕과 종교의 냄새가 풍겨서 조금 못마땅하거든요? 요 부분만 좀 고치시면 안 될까요? 1972년 겨울을 떠올려본다. 무지 추웠을 것 같다. 가도 가도 끝이 안 보이는 긴 터널이었다. 빠져나오려면 한참 남았다. 아버지의 우울을 상상해본다. 괜히 나의 마음도 우울해진다.(본문 속에서)

또 스크랩북에는 아버지의 생각도 고스란히 묻어있다. 저자가 생각하기에 보수적이라는 아버지.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고 했던가? 아버지 또한 꽉 막힌 분이 아니다. 으레 생각되는 보수와는 달리, 인정할 건 인정하고 반대할 건 반대한다. 

절대적인 신념과 상대적인 시선을 두루 갖췄다. 아버지 또한 훌륭한 편집기자이다. 기가 막힌 편집으로, 단순한 스크랩북이 또 하나의 훌륭한 기사가 되었다. 단순 팩트를 너머 그 이면을 보며 자신의 생각을 시로 표현했고, 가위질과 풀질로 표현했다. 아이디어가 톡톡 튄다고 느끼는 부분도 있다. 

아버지가 흥분했다. 2011년 인기 폭발했던 팟캐스트 <나는 꼼수다>는 "가카는 절대 그러실 분이 아니다"라는 말을 유행시켰다. 아버지 역시 절대 그러실 분이 아니다. 전혀 다른 차원에서 그렇다. 아버지는 보수적인 분이었다. (자주 있는 일은 아니었으나) 아들이 세상 돌아가는 일에 열을 내면 걱정스러운 눈길로 "나쁜 쪽으로만 보지 말라"고 충고하셨다. 늘 조심스러웠다. 여느 아버지와 다를 바 없었다. 그런 분이, 이렇게나 흥분하시다니!(본문 속에서)

여과 없는 일반 국민의 시선, '나의 역사'

일본 최고의 소설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작품을 원작으로 일본 최고의 감독 구로사와 아키라가 만든 영화 중 <라쇼몽>이라는 영화가 있다. 자그마치 60년이 훌쩍 넘은 이 영화는 일본을 넘어 세계적인 영화로 남아있다.

부부가 길을 가다가 도적을 만나 남편은 살해당하고 부인은 겁탈당하는 동일한 사건을 접한 네 사람의 각기 다른 네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도적의 입장, 아내의 입장, 무당의 입을 빌린 죽은 남편의 입장, 그리고 숨어서 이를 지켜본 나무꾼의 입장. 그런데 이들 중 어느 누구도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조금씩 사실을 왜곡해서 말하고 있다. 거기에 대화나 소통은 없다. 거짓에 의한 일방적인 주장만이 있을 뿐이다. 

저자와 저자의 아버지 또한 동일한 사건을 마주 본다. 역사적으로 유명한 사건들과 두루 알려진 사건, 소소한 사건들에 이르기까지 이들 부자는 다른 의견을 제시한다. 하지만 거기에 거짓된 주장은 없다. 다른 시대의 다른 환경에서 형성된 자아가 역사를 통해 부딪치고 있을 뿐이다. 그들은 구심체 없고 깨지기 쉬운 유리가 아니라, 언제나 분열과 합체가 가능한 원자이다. 그러면서도 핵을 잃지 않는다. 신념은 그 자리에 있는 것이다. 

이들의 대화로 우리는 진실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비록 한 명의 지금 목소리를 들을 순 없지만, 사건들을 직접 맞대면했던 순간의 생각들이 고스란히 남겨져 있기에 부족함이 없다. 한 명은 오랜 시간이 지나 결론이 서고 재해석 된 사건들을 다루고 있다. 섣부른 판단 없이 20여 년 동안 쌓은 나름의 공력을 쏟아냈기에 역시 부족함이 없다. 

역사가의 관점을 배제한 채 대화다운 대화, 소통다운 소통을 하고 있다. 아들과 아버지가 있고, 독자도 거기에 쉽게 편승할 수 있다. 여과 없는 일반 국민의 시선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국민 개개인의 신념이 부딪치고 한바탕 장(場)이 일어선다. 누군가의 역사가 아닌, 누군가의 눈으로 보는 역사가 아닌, '나'의 역사가 펼쳐지는 것이다. 내가 보는 역사가 펼쳐지는 것이다. 저자의 말을 들어본다. 

'내가 역사다.' 너와 나는 역사다. 우리는 역사다. 최소 단위인 '나'의 기억과 경험으로부터 시작할 때 역사는 우리의 살갗을 스치며 풍만하게 다가온다고 믿는다.(본문 속에서)


"오마이뉴스" 2013.5.27일자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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