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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염병에 대처하는 치명적인 자세 <네메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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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네메시스>



<네메시스> ⓒ문학동네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인 1944년 미국 뉴저지의 뉴어크 지역, 폴리오 바이러스가 발병한다. 이 치명적인 전염병은 주로 열여섯 이하의 아이들에게 걸리며, 마비로 인해 기형적인 불구자가 되거나 죽음에 이르게 했다. 백신이 없는 상태였기에 발병하지 않도록 예방하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감염된 사람에게 가까이 있기만 해도 옮을 수 있었기에 쉽지 않았다. 동네는 불안에 사로잡혔고 평화는 깨졌다. 아이를 보호하는 최선의 방법은 도시를 벗어나 산이나 시골의 여름 캠프에 보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메르스 사태와 흡사한 라인을 가진 이 이야기는 필립 로스의 마지막 소설이라 일컬어지는 <네메시스>의 초반부이다. '네메시스'라 하면 '보복'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로,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보복의 여신이다. 그렇다면 이 소설은 바이러스와 복수에 얽힌 이야기를 할 것인가? 일단 제목의 뜻풀이와 소설 배경의 조화가 합격점. 문제는 필립 로스가 마지막으로 던지는 메시지는 과연 무엇인가 이다. 


훌륭한 만큼 죄책감에 시달린 청년


소설은 놀이터 감독인 이십삼 세 청년 버키 캔터를 중심으로 진행된다. 버키는 키는 작지만 단단한 몸에 운동선수로서 능력이 출중하고 강인한 의지로 가득 차있는 인물이었다. 그는 전쟁터에 싸우러 나가지 않은 극소수의 청년 중 하나였는데, 치명적으로 시력이 약했기 때문이었다. 버키는 자신이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을 두고 하염없이 죄책감에 시달렸다. 그런 자신을 용납하기 힘들었다. 


그래서 그가 택한 방법이 놀이터 감독으로서 아이들을 폴리오에게서 방어하는 것이었다. 폴리오 방어를 제2차 세계대전과 버금가는 전쟁으로 생각하고서 말이다. 버키는 자신이 있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한테서 받은 따뜻하고 다감하며 강인하고 건전한 몸과 마음의 균형이 그를 지탱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의 형편없는 시력이 그로서는 어쩔 수 없는 것이었듯이, 폴리오가 아이들을 위협하는 것도 그가 어찌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가 관리하는 놀이터에 폴리오가 침투하기 시작한다. 


어떤 일을 수행함에 있어 완벽함을 추구하며 과도한 스트레스를 받는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이 완벽하게 일을 수행하지 못했을 때 받게 되는 죄책감은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충분히 할 수 있는 건데 하지 못했고, 나 때문에 일을 수행하지 못했다. 나는 정말 못난 사람이고, 가치가 없는 사람이다. 이런 경우 파국으로 치닫기 쉽다. 그렇지만 그는 누가 봐도 강인하고 훌륭한 사람이다. 


계속되는 죄책감 퍼레이드, 그리고 최악의 결과


훌륭한 젊은이 버키도 이와 비슷하다. 그는 그 훌륭함에 버금가는 죄책감을 지니고 있다. 폴리오에게서 아이들을 지켜내지 못했을 때 그가 괴로워하며 죄책감을 느낀 이유는 그가 그만큼 훌륭한 생각을 가진 사람이기 때문이다. 아이러니도 이런 아이러니가 없다. 


그의 죄책감 퍼레이드는 놀이터를 떠나 파라다이스에서도 계속된다. 그는 폭염의 뉴어크를 떠나 약혼녀가 있는 인디언 힐 여름 캠프로 간다. 그곳의 물놀이 감독이 징집 되어 그 자리를 이어받기 위해서 였다. 약혼녀 마샤의 입김이 많이 작용했는데, 그녀는 버키가 폴리오 때문에 위험한 뉴어크를 떠나 안전한 인디언 힐로 왔으면 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선택은 최악의 결과를 낳고 만다.


폴리오는 인디언 힐도 덮친 것이다. 문제는 이번에도 버키의 죄책감이었다. 버키는 인디언 힐에 폴리오를 옮긴 사람이 자신이라는 판단을 스스로 해버렸고, 나아가 뉴어크 놀이터에 폴리오를 옮기게 한 사람도 자신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 놀이터에 이탈리아인이 찾아왔을 때 제대로 대응을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사실 그는 누구보다도 그들의 행패에 잘 대응했었다. 버키는 그런 사람이었다. 


의무와 죄책감과 의지 그리고 두려움


소설은 뒷부분에 반전을 숨겨두고 있다. 그 반전으로 소설은 훌륭하게 균형을 잡으며 끝을 맺는다. '그런 사람'인 버키는 아마도 쉬운 길을 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남들이 보기엔 이해할 수 없는 생각과 행동을 하며 살아갔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올바른 삶은 산 것일까? 올바르지만 멍청한 삶을 산 것일까? 어떻게 사는 게 맞는 것일까? 


소설은 사망에 이르게 하는 무서운 전염병인 폴리오를 주요 소재로 그리고 있다. 생각만 해도 등골이 서늘해지며 오싹함과 두려움을 감추기 힘들다. 메르스에 공포가 확산일로에 있는 현재, 폴리오에 대한 감정이입이 훨씬 쉽기 때문이다. 죽지는 않을 지라도 평생 불구로 살아가게 될 거라는 무시무시한 전언은 덤이다. 하지만 버키에게 그보다 더 두려웠던 건 다른 데 있었다. 


버키의 심경은 다음과 같이 변해 간다. 아이들을 지켜야 한다는 의무, 아이들을 지키지 못한 죄책감, 신을 향해 포효하며 현실에 대해 분개하는 의지, 자신에게 들이닥칠지 모르는 알 수 없는 병에 대한 두려움. 버키는 자신이 두려워하는 걸 두려워했다. 그런 자신을 용서할 수 없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의무와 죄책감 그리고 분노만 쌓여갔다. 두려워하면서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지 못했고 파국으로 치달았다. 


그렇지만 버키가 보여준 일련의 심경은 국민을 지켜야 하는 수장의 그것과 동일하다. 아니, 수장이 버키의 심경과 동일해야 한다. 그 자신을 파국으로 몰고 가라는 게 아니라, 그때까지 심경이 같아야 한다는 것이다. 의무와 죄책감과 분노 그리고 의지를 보여줘야 하는 게 수장이 아닐까. 버키가 뉴어크에서 인디언 힐로 갈 때 놀이터의 관리자가 버키에게 한 치명적인 말을 옮겨 본다.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응? 당연히 선택할 수 있지. 자네가 지금 하고 있는 걸 바로 선택하는 거라고 해. 자네는 지금 폴리오한테서 도망치는 거야. 일을 하겠다고 계약을 했는데 폴리오가 발생하니까 일 같은 건 난 모르겠다, 약속 같은 건 난 모르겠다, 하고 있는 힘을 다해 미친듯이 달아나는 거야. 자네가 하는 건 그저 달아나는 것일 뿐이라고." (본문 중에서)


네메시스 - 8점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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