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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이 권력과 순수에서 기인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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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권력과 거짓순수>생명이 존재하는 모든 곳에서 
권력 의지가 있음을 나는 깨닫는다. 
-프리드리히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니체는 '권력'을 내면에서 솟아나는 활동적 생명의 힘, 즉 자기실현과 자기성취의 관점에서 보았다. 반면 작금의 경쟁 사회에서의 '권력'은 굉장히 부정적인 의미로 자리매김했다. 권력하면 떠오르는 단어가 대체로 '폭압'과 '강압' '폭력'까지 이어지는 이유이다. 돈으로 권력을 거머쥔 권력자의 행태나 강력한 법으로 무장한 국가의 권력이 보여주는 폭력이 뇌리에 깊이 박혀 있기 때문에, 권력을 다르게 생각해보는 건 결코 쉽지 않다. 선과 악을 나누게 된다면, 권력은 악의 맨 앞자리를 다투는 여러 가지 개체 중 하나일 것이다. 

<권력과 거짓순수> 표지 ⓒ 문예출판사

롤로 메이는 <권력과 거짓순수>(문예출판사)를 통해 이런 권력에의 일반적인 생각을 달리 본다. 권력을 선과 악의 개념으로 보지 않아야 하고, 권력에서 부정적인 이미지를 불식시켜야 한다고 말한다. 

또한 살아 있는 모든 존재는 권력이 필요하며, 인간에게 있어 권력이 전부는 아니지만 굉장히 중요하고 자연스럽게 추구하는 대상이라는 것이다. 그러며 외려 '순수'를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권력의 부정적인 이미지 틀에 대신 넣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순수라 함은 전혀 다른 것의 섞임이 없는 무채색의 느낌을 주는데, 이것이 어찌 폭력을 양산할 수 있다는 것인지 선뜻 감이 잡히지 않는다. 어느 것에도 때 묻지 않은 백색의 도화지에 낙서를 하는 것이, 더러운 도화지에 낙서를 하는 것보다 더욱 부정적인 의미로 다가올 수 있다는 걸 뜻하는가? 그것이 아니라면 순수가 지닌 약함 또는 착함의 상징이 외려 발목을 잡을 수 있다는 걸 뜻하는 것인가?

저자의 말에 따르면 '순수'라는 건 존재하지 않는다. 순수는 무기력, 무력감, 절망감, 나약함의 다른 말일 뿐이다. 그리고 이런 것들이 폭력을 불러온다고 보았다. '거짓 순수'라는 말로 수렴될 수 있다. 폭력이란 게 권력을 잡고 능동적으로 휘두르는 개념이 아닌, 무기력과 나약함에서 비롯된 수동적인 개념이라는 것이다. 즉, 권력과 순수의 재정립이다. 

이에 저자는 순수를 두 가지로 권력을 다섯 단계로 분류하고 있다. 먼저 순수에 대해 첫 번째로 상상력의 한 특징인 순수를 말한다. 예를 들어 시인과 예술가의 순수 말이다. 이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순수라고 할 수 있겠다. 두 번째 순수가 문제인데, 저자는 이를 '거짓순수'라 칭하며 나약하고 무기력한 '어린아이 같음'이라고 칭한다. 더 나아가 '유치함'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거짓순수'를 '순수'와 혼동하지 말고 경계해야 한다는 것이다. 

"원자폭탄 투하와 같이 생각하기에 너무 크거나 무서운 문제를 직면하게 될 때, 우리는 이러한 거짓순수 속으로 움츠러든 채 무기력과 연약함, 무력함을 미덕으로 여긴다."(본문 속에서)

사람은 위기에 처했을 때 그 본성을 드러낸다고 했던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듯 움츠러든 채 가만히 있을 것이다. '순수'라는 가면을 쓴 채로 말이다. 그러며 그들은 앞으로 나아간 권력을 욕할 것이 아닌가? 언제부턴가 약함이 착함이 되고 착함이 최고의 미덕이 된 사회에 살고 있다. 

저자는 이어서 권력을 다섯 단계로 분류하고 있다. 첫째는 유아기의 권력인 '존재하기 위한 권력'이다. 세상에 태어나자마자 젖 달라고 울면서 팔을 휘젓는 아기를 보면 권력이 출현해서 변천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두 번째는 자존감 즉, 스스로에 대한 존중을 위한 '자기긍정'이다. 세 번째는 자기긍정이 부정당했을 때 자기를 더 강력하게 표현하는 '자기주장'이다. 스스로에 대한 존중에 침해를 받았기에 자칫 공격적인 성향을 띨 수도 있다. 네 번째는 자기주장도 부정당했을 때 행하는 '공격성'이다. 계속해서 부정당하는 자연스런 권력의 추구가 결국은 공격성을 불러왔다. 마지막 다섯 번째는 공격성을 죽이려 해도 실패했을 때 폭발하는 '폭력'이다. '권력→폭력'이 되기까지는 이처럼 많은 단계에서 계속적인 권력의지의 거부가 필요한 것이다.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권력은 인간이 자연스럽게 추구해야 할 대상이다. 이를 계속해서 막는다면 앞서와 같이 공격성을 보이며 폭력으로 귀결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애초에 권력을 추구하지 않아야 하는 것인가? 세상은 권력을 증오하는데, 권력을 어떻게든 막을 텐데, 결국은 폭력으로 치닫는 것이 아닌가? 아무리 권력이 인간이 자연스레 추구하게 되는 것이라도 말이다. 

이에 저자는 공격성이나 권력에도 종류가 있다고 말한다. 파괴적 공격성과 권력 그리고 건설적 공격성과 권력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순수가 사실은 '거짓순수'이니 조심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처럼, 권력에도 두 가지가 있으니 파괴적 권력이 아닌 건설적 권력을 지향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건설적 권력은 어떻게 만들어지고 추구되어야 하는가. 저자는 경쟁적, 자양적, 통합적 권력을 예로 들며 이를 건설적으로 잘 조화시켜야 한다고 말한다. '경쟁적 권력'이라 함은 타인에게 대항하는 권력이다. 전쟁과 같은 파괴적인 경쟁도 있고, 스포츠와 같은 건설적인 경쟁도 있을 것이다. 악질적인 경쟁보다 선의의 경쟁이 필요할 것이다. '자양적 권력'이라 함은 타인을 위하는 권력이다. 이타적인 행동을 할 수 있는 권력의 통칭이다. '통합적 권력'이라 함은 타인과 함께 하는 권력이다. 협동의 이미지를 상상된다. 

파괴적 권력을 지양하고 건설적 권력을 지향할 때, 거짓순수의 가면이 벗겨지고 진정한 의미의 권력이 제자리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책을 읽기 전, 대부분의 독자들은 권력과 순수에 대한 이미지가 이미 확고하게 자리 잡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책을 읽을 때 유의해야 할 점이 있다면 바로 이와 관련된 것이다. 자칫 책이 전하려 하는 권력과 순수에 대한 재정립에, 오히려 더욱 격한 반응을 보일지 모른다는 점이다. 꽤나 파격적인 주장을 하고 있기에 역반응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것. 열린 마음으로 책을 대해주시길 바란다. 

또 하나의 유의할 점은 권력에 대한 무비판적인 수용일 듯하다. 만약에라도 이 책을 완전히 읽지 않거나 완벽히 이해하지 못해, 권력에 대한 무조건적인 옹호로 읽을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겠다. 즉 위에서 말한 파괴적 권력(착취적·조작적 권력, 즉 전체주의로써의 권력을 의미)을 옹호해도 된다고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절대 그렇지 않다는 걸 미리 밝혀둔다.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인간에 있어서 자연스런 권력과 (거짓순수의 가면을 벗기고 폭력으로 치닫는 걸 방지하기 위해) 계속적으로 추구해야만 하는 권력은 건설적 권력이다. 

법을 앞세운 국가의 파괴적인 권력 습성에 브레이크를 걸기 위해서는, 획일화되지 않은 창조적인 의견을 내놓고 건전한 경쟁 하에 서로를 돕는 권력을 이행하는 건전한 공동체가 필요해 보인다. 그런 권력이라면 언제든지 환영이다.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도 이와 같지 않을까. 책을 덮고 나니 권력과 순수, 나아가 틀에 박히게 이미지화되어 있던 개념들을 다시금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마이뉴스" 2013.4.9일자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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