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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간 책 다시읽기

<나는 전설이다> 종말이 휩쓸고 간 자리에... 혼자 남겨진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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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간 책 다시읽기] 리처드 매드슨의 <나는 전설이다>



<나는 전설이다> 표지 ⓒ황금가지



지난 2012년 수많은 키워드들 중에서도, 전 세계를 휩쓴 것은 '종말'이었다. 고대 마야 달력이 2012년 12월 21일에서 끝나는 것을 보고, 종말론자들이 지구의 종말을 주장한 것이다. 비록 지금은 2015년이고 지구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어떤 식으로든 종말이 실현되었다면? 그래서 모두 죽고 나 혼자 살아남았다면? 


이런 상상력을 두고 펼쳐지는 소설은 많이 나와 있다. 그 중에서도 원조 격이 있다. 리처드 매드슨의 <나는 전설이다>(황금가지). 1954년에 출간되어 60년 여의 역사를 가진 이 소설은, 아직까지도 SF 공포 소설의 전설로 추앙 받고 있다. 그런데 SF 공포라니? 


거기엔 이유가 있다. 이 소설은 흡혈 좀비 소설인 것이다. 하지만 단순한 오락 소설이라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소설은 정상과 비정상, 신화와 현실, 존재가치에 대해 철학적으로 접근한다. 나 혼자 살아남았지만, 나 아닌 다른 '종족'이 존재한다. 그게 흡혈 좀비인데, 어쨌건 소설 속 주인공이 생각하는 이 세상에서 존재하는 '정상'적인 존재는 나 하나 뿐이다. 


영화 <나는 전설이다>와 소설 <나는 전설이다>


2007년 12월에 개봉한 윌 스미스 주연의 영화 <나는 전설이다>는 영화 <지상최후의 남자>(1964), <오메가맨>(1971)에 이어 리처드 매드슨의 소설 <나는 전설이다>를 원작으로 했다. 극 중 주인공은 로버트 네빌로, 원작과 같았다. 과학자라는 설정은 달랐지만. 핵전쟁으로 전 인류가 멸망하고, 어쩌다보니 네빌 혼자만 살아남는다. 아마도 특수한 면역 체계를 갖추고 있지 않았을까 스스로 추측하면서. 이는 소설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여기서 그냥 넘어가면 안 되는 중요한 존재가 있다. 흡혈 좀비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나는 '개'라고 생각한다. 극 중에서는 애초에 개도 같이 살아남는다. 나중에 그 개가 자신을 위해 흡혈 좀비에게 물려 좀비화되어 가는데, 네빌은 어쩔 수 없이 개를 죽인다. 더 이상 살 가치가 없어진 네빌은 막무가내로 흡혈 좀비에게 덤비고, 죽을 고비에서 알 수 없는 이에게 구출이 된다는 전개이다. 


반면에 소설에서는 네빌 혼자이다. 미칠 듯한 고독과 외로움, 분노와 슬픔으로 하루하루를 보내는 그의 모습을 절절히 그려내며, 영화와 완전히 다른 주인공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히키코모리의 모습과 겹쳐진다. 그러던 중 '정상'적이라고 생각이 되는 개를 만나게 되고, 주체할 수 없는 기쁨을 뿜어낸다. 그 장면을 보고 있노라면, 누구라도 감동의 쓰나미를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이후에 만나게 되는 '정상'적인 인간 여자의 설정은 비슷하다. 단지 주인공이 느끼는 감정의 고리가 완전히 다를 뿐. 영화에서 네빌은 '정상'적인 인간을 만났다는 기쁨을 만끽하고 전형적인 할리우드 스토리 라인으로 끌고 가면서, 그가 만들고 있던 백신을 흡혈 좀비가 코앞까지 쳐들어오는 기막힌 타이밍에 완성한다. 그는 백신을 그 여자에게 주어 탈출시키고 자신은 흡혈 좀비와 폭사한다. 그 여자에게는 아이가 있었는데, 같이 살아남은 자들의 도시로 간다. 네빌은 그들에게 백신을 주고 앞날을 준 '영웅'이자 '전설'이 된 것이다. 


반면 소설은 어떤가? 인간 여자로 인해 충격적인 반전에 점점 다가간다. 인간 여자를 끊임없이 의심하는 주인공 로버트 네빌의 내적 갈등은 반전을 위한 필수 요소이다. 그동안 그만의 공간이었던 집안에 이질적인 존재가 침입해 평화를 깨버린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사랑을 느낀다. 이에 네빌은 그녀가 무엇이든 상관하지 않기로 작정하고, 그녀를 검사하려 하는데... 그녀의 정체는 과연 무엇인지? 


종말과 시작 사이에서 전설이 되다


주인공 로버트 네빌은 어쨌든 전설이 된다. 하지만 결코 영화에서처럼 '영웅'의 이미지는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구시대 '신화'와 '전설'에서의 전설을 말하는 것인가? 여기서 알아야 할 것이 그녀의 정체이다. 그녀는 일종의 '신인류'였던 것이다. 그 종족은 변종 흡혈귀로, 갑자기 등장해 흡혈 좀비를 죽이고 이 세상 '유일'의 생존자였던 로버트 네빌도 죽여 버린다. 


소설에서 '전설'의 의미는 여기서 보여 진다. 로버트 네빌이 낮에 돌아다니며 흡혈 좀비 때문에 밤에는 집구석에 박혀 있을 때 그는, 많은 연구를 통해 흡혈 좀비가 결코 '전설'이 아닌 눈앞에 보이는 '현실'임을 자각하게 된다. 그러며 극도의 고독과 외로움으로, 차라리 저 '더럽고' '무식하고' '괴물 같은' 흡혈 좀비의 무리에 끼고 싶어 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고귀한 존재가 어떻게 저 더러운 괴물이 될 수 있단 말인가? 그가 결코 삶을 포기할 수 없는 이유였다. 


하지만 네빌이 여자에 계략에 의해 잡혀간 '신인류'의 도시. 그곳에서는 어떨까? 네빌은 과연 '고귀한 존재'일까? 아니다. 그는 소설의 마지막에서 깨닫는다. 자신이 속했던 '인류'의 종말과 눈앞에 보이는 수많은 '신인류'의 시작을 보면서. 자신이야말로 이들에게 '이방인'이자 이질적인 존재라는 것을. 신화에나 나올 법한 '전설'적인 존재라는 것을. 


수백만 년 전, 기후 변화나 운석 충돌로 한 인류가 종말을 기하고 새로운 인류가 나왔을 때가 있었을 것이다. 자연스러운 진화의 결과가 아니고 말이다. 그때 종말을 기했던 인류의 마지막 남은 한 존재가, 수많은 신인류의 모습을 보고 느꼈을 감정이 이렇지 않았을까. <나는 전설이다>의 마지막 부분을 옮겨본다. 


그들은 창백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그들로부터 시선을 돌렸다. 문득 자신이야말로 비정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상이란 다수의 개념이자 다수를 위한 개념이다. 단 하나의 존재를 위한 개념이 될 수는 없다.


그러한 깨달음은 그들의 표정에 나타난 감정과 오버랩 되었다. 경외, 두려움, 형언할 수 없는 공포. 그렇다. 그들은 그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들에게 그는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천벌이고 천형이었다. 자신들이 끼고 살아가야 하는 질병보다도 더 흉측한 존재였던 것이다.


로버트 네빌은 이 땅의 신인류를 내다보았다. 그는 처음부터 그들에게 속할 수 없는 존재였다. 흡혈귀와 마찬가지로 그 역시 파괴돼야 할 아나테마(가톨릭에서의 저주)이자 검은 공포였다.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그는 고통 속에서도 기쁘다는 생각이 들었다.(2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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