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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으로 가는 이주의 계절> 나아가야 할까, 돌아가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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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북으로 가는 이주의 계절>


<북으로 가는 이주의 계절> ⓒ아시아

세계는 여전히 남과 북, 동과 서가 분리되어 고질적인 불균형 속에 있다. 남반부보다 북반구가, 동양보다 서양이 전반적으로 더 높은 수준의 생활을 영위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아프리카 흑인들의 경우는 더 심각하다 할 수 있다. 그들은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불균형의 한 가운데에 처럼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이 불균형의 상징은 '식민주의', '인종주의'라고 할 수 있는데, 많은 콘텐츠에서 이를 다루었다. 소설로 보자면, 윌리엄 셰익스피어는 <오셀로>를 통해서, 조셉 콘래드는 <암흑의 핵심>을 통해서 이를 다루었다. 학자들로 보자면, 에드워드 사이드는 <오리엔탈리즘>으로, 프란츠 파농은 <검은 피부, 하얀 가면>으로 이를 다루었다. 그리고 얼마전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번역 소개된 소설인 타예브 살리흐의 <북으로 가는 이주의 계절>(아시아)가 이를 다룬 대표적 콘텐츠이다. 


이 소설은 <오셀로>, <암흑의 핵심>과 비견된다고 하는데, 특히 소설의 주인공이 '오셀로'를 많이 언급하는 바 <오셀로>와 많은 연관이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주인공 무스타파 사이드는 아프리카 수단의 작은 마을 출신으로, 탁월한 영어 실력으로 이집트 카이로를 거쳐 영국의 런던까지 진출한다. 그곳에서 그는 영국인을 능가하는 영어 실력과 유럽 여성이 느끼는 아프리카인이 갖고 있는 신비로움 등을 앞세워 유럽 백인 여성들을 공략한다. 


여성들을 차례차례 파멸시킨다. 자살까지 이르는 여성들도 있었고, 무스타파가 직접 살해한 이도 있었다. 무스타파는 재판에서 이 행동을 변호하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에게 사형을 언도할 것을 요구한다. 하지만 그의 변호사는 그를 적극적으로 변호한다. 결국 그는 7년 형을 언도받는다. 


소설은 이 내용이 주를 이루고, 이 내용을 무스타파가 수단의 한 마을에서 화자에게 이야기해주는 형식을 취한다. 이 소설은 읽는 재미도 출중하지만, 해석을 통해 얻는 학문적 가치가 매우 크다. 그래서 이 소설의 앞에는 가장 '재밌는'이 아닌 '중요한'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것이다. 아랍을 넘어 서양에서도 매우 중요하게 받아들여져 왔다. 그래서 학문적 해석에 치중할 필요가 있다. 


자, 무스타파는 왜 유럽 백인 여성들을 파멸에 이르게 한 것일까. 무스타파는 재판 내내 자신은 오셀로가 아니라고 말하며 사형을 원하고 있다. 오셀로가 누구인가. 무어인 출신의 장군으로, 베니스에서 성공가도를 달렸다. 그는 비록 검은 피부를 가졌지만, 백인이 되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되지 못했다. 


무스타파는 오셀로처럼 런던에서 성공가도를 달렸다. 비록 검은 피부를 가졌지만, 사실상의 백인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목적은 그것이 아니었다. 그가 백인 여성들을 농락하고 파멸에 이르게 한 행위는, 유럽이 아프리카를 침략하여 폭력을 가한 행위에 대한 복수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가 사형을 원하며 자신의 행위를 시인한 이유는, 그 폭력적인 '인종주의'와 '식민주의'가 잘못된 것임을 드러내려 한 것이다.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스스로를 던져 증명하려 하였다. 


"배들은 처음에는 빵이 아닌 포탄을 싣고서 나일 강 물살을 가르며 나아갔고, 철도도 원래는 군인들을 실어 나를 목적으로 세웠다. 그들은 학교를 세워서 자기네 말로 '네'하는 법을 우리에게 가르치려 했다. 그들은 세계가 일찍이 솜과 베르단에서 보았던 것과 같은 광포한 유럽의 병균을 우리에게 옮겨 주었다. 이미 천 년 전부터 그들이 감염되었던 치명적인 병균이다. 바로 그렇다. 이봐! 나는 침략자로서 바로 당신들 집에 들어왔다. 당신들이 역사의 동맥에 주사한 한 방울의 독약과도 같은 존재로서 말이다. 나는 오셀로가 아니다. 오셀로는 거짓이었다." (본문 속에서)


하지만 이런 무스타파가 사실은 거짓이었다는 것이 드러난다. 오셀로가 아니라고, 오셀로는 거짓이라고 외치며 자신을 사형시켜 달라던 무스타파가 말이다. 그는 죽기 전 화자에게 비밀의 방 열쇠를 맡기는데, 그 비밀의 방에는 엄청난 것들이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아무렇지도 않은 것이겠지만,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겠지만 말이다. 


그 비밀의 방에는, 무스타파의 진실이 들어 있었다. 아랍어 책은 단 한 권도 없이 모조리 유럽의 것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중에서도 도서목록은 치명적이었다. 그의 진면목은 오셀로를 능가하는 '검은 백인'이었던 것이다. 몰론 이 모습이 그의 전부는 아니다. 그의 정체성은 분열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 모습은 비유럽인, 비서양인의 모습을 상당 부분 정확히 대변하고 있다. 


한편 화자가 보여주는 모습 또한 커다란 상징성을 띄고 있다. 화자는 마지막 장면에서 분노에 차 나일 강에 뛰어 들어 북쪽 강가에 도달하기 위해 헤엄친다. 하지만 강물의 파괴적인 힘이 그를 잡고 놓아주지 않는다. 그는 한순간 망망대해의 한 가운데에서 길을 잃은 존재가 되고 만다. 


"두 팔과 다리가 마비되어 왔다. 지금, 갑자기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 모르겠다는 느낌이 강하게 일었다. 나는 물속에서 몸을 일으켰다. 물결이 출렁이는 소리와 펌프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럴 수가. 내가 있는 곳은 남쪽과 북쪽의 중간 지점이었다. 이제는 계속해서 나아갈 수도, 그렇다고 돌아갈 수도 없다." (본문 중에서)


검은 흑인으로 남아 있을 수도, 그렇다고 검은 백인으로 살아갈 수도 없는 이의 모습이다. 이는 비단 흑인뿐만이 아닐 것이다. 황인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백인이 지배하는 이 세계에서, 황인 또한 누구보다 백인처럼 생각하고 행동하고자 노력해왔다. 그 결과 오히려 백인이 따라오는 부분도 많다. 목적을 이룬 것이다. 


그렇지만 남은 게 무엇인가? 이분법을 타파한다는 미명 하에, 고질적 불균형을 타개한다는 미명 하에 벌인 일을 통해 남은 것은 잃어버린 정체성이다. 우린 앞으로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지금까지는 나아가는 일만 해왔다. 돌아가거나 물러서는 일 따위는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이 옳은 일일까? 옳다 그르다를 말하기 전에, 맞는 일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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