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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내가 뭘 바꿔... 무슨 수를 써도 이길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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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돼지의 왕>

애니메이션 영화 <돼지의 왕> ⓒ KT&G 상상마당

15년여 전 중학교 3학년 시절, 그곳엔 엄연히 '계급'이 존재했었다. 계급은 힘의 논리로 나뉘어졌다. 그건 부모님의 재력이나 권력일 수도 있었고, 스스로의 힘(power) 일 수도 있었다. 학교였기에 공부도 월등하면 힘이 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모든 걸 가진 이가 제일 위에 군림하였다. 나는 셋 중 어느 하나도 월등하지 못했기에 그다지 높지 않은 곳에서, 아니 낮다고 말할 수 있는 곳에서 생활하였다.

그들은 모든 이들에게 시비를 붙여보며, 전투력와 담력 등을 시험했다. 전투력보다 담력을 중시하였던 것 같다. 전투력은 담력없이 발휘될 수 없는 것이기에. 나는 덩치도 왠만큼 컸고 공부도 잘하는 편에 속했지만, 결정적으로 담력이 부족했다. 이런 나를 가만히 두지 않은 것은 당연하다. 기억하기 싫은 그때 그 시절이다.

누군가는 반문할지 모른다. 다 치고박고 하면서 크는 거라고. 하지만 일방적으로 당한 사람한테 그런 말을 할 순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 '가해자'들이 성인이 되고 나서도 여전히 이 시대의 가해자로 군림하고 있다면 얘기는 달라질 것이다. 그것도 합법적 가해자라면 말이다.

이건 더 이상 교실의 모습이 아니다

애니메이션 영화 <돼지의 왕>은 15년만에 만난 두 친구 경민과 종석이 옛 추억을 말하면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그런데 그 '추억'이라는 게 자못 심각하다. 그때 그 시절 중학교 교실이 '계급사회'였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들은 그 다지 높지 못한 계급에 속해 있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로 한 발자국씩 다가간다.

그러던 중 어김없이 '정의의 사도' 철이가 나타나 어린 양들을 구해준다. 그러며 또한 어김없이 말한다. 정의의 사도이지만 힘을 숭배하는 캐릭터. 학교 폭력의 전형적인 스토리 아닌가.

"우리가 힘을 가지려면 착하게 살면 될까? 아니야 악을 가져야돼. 병신처럼 살고 싶지 않으면 괴물이 되어야 해."

그렇지만 이 영화가 단순히 현재 팽배해있는 학창 시절의 폭력을 말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영화는 진일보한 '일진'의 정체를 정의하며, 학교의 배경을 빌려 이 시대를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의의 사도 철이는 무식하게 힘만 쎌 뿐, 실질적인 힘이 없다. 즉, 기득권층이 아닌 것이다. 하지만 기득권층이자 가해자 학생들은 공부 잘하고, 싸움 잘하고, 부모님의 재력까지 갖춰 완벽하다. 철이는 철지난 싸움꾼일 뿐이다. 예전의 순수한 시절에서는 먹혔을지 몰라도, 지금 그 또한 희생자 중 하나일 뿐이다. 그는 그다지 위치가 높지 않은 계급의 왕일 뿐이었다. 돼지의 왕.

괴물이 되고자하는 돼지의 왕. 그리고 달갑지 않지만, 그를 따르는 경민과 종석. 그 위에 절대적으로 군림하는 개들. 결정적으로 소수 돼지들의 투쟁에 아무런 관심을 두지 않고 조용히 개들을 따르는 다수 돼지들. 이건 더 이상 교실의 모습이 아니다. 무한 양육강식의 세계 그 자체인 것이다.

차가운 세상에서의 잔혹한 스릴러

영화는 대한민국 애니메이션 최초의 잔혹 스릴러를 표방하고 있다. 어린 중학생들의 이야기가 어찌 잔혹할 수 있겠냐만은, 분위기부터 심상치 않다. 진짜 잔혹한 것은 중학교 때의 끔찍한 일들이 평생 따라다니며 괴롭힌다는 사실이다. 끔찍한 일들은 돼지들에게만 일어났다. 누군가는 그때 죽었고, 누군가는 지금 죽는다. 그리고 그들은 서로를 죽였고, 서로를 죽이려 한다. 공포에 떨며 아주 비참하게.

그렇다면 그들은? 높은 곳에서 군림하던 그들은? 훗날 그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단지 비참하게 살고 있는 과거 낮은 계급이었던 이들의 모습만 보여준다. 그리고 "평생 잊을 수 없는 무서운 광경을 눈 앞에서 보여주겠다는" 철이의 계획이 성공하였음에도 전혀 달라지지 않은 모습을 보여준다. 계급은 바뀌지 않는다는 차가운 사실에 더해, 무슨 짓을 하든 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잔혹함을 선사해주고 있는 것이다.

철이의 말처럼 힘을 가지려면 악을 가져야 할까? 아니면 외려 착하게 살아야 할까? 그것도 아니라면 여기저기 할퀴고 찢겨도 조용히 살아야 할까? 이에 대해 영화는 말하지 않는다. 아니 말해주지 못한다. 악을 가져도 바뀔 수 없고, 착하게 살려해도 바뀌지 않는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 뿐인가. 바꿀 수 없다는 걸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것.

전학와서 윗계급에 도전해보려다가 호되게 당해 마음을 완전히 돌려 먹은 손석응의 말을 옮겨본다. 그의 담담한 고백이 무엇보다 잔혹하게 다가온다.

"내가 뭐 바꿀 수 있겠나. 야, 이 개새끼들아, 응 그러면서 저주라도 하면서 뒤지뿔까? 흐흐. 그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무슨 수를 써도 금마들 이길 방법은 없다. 맘 상하는 데 이건 뭐 당연한 거 아니겠나."


"오마이뉴스" 2013.5.7일자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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