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간 책 다시 읽기] <대위의 딸>
<대위의 딸> 표지 ⓒ 열린책들
위대한 시인의 유일한 장편 소설은 어떤 느낌일까. 시적 은유로 가득 차 낭만적이기 그지없을까? 그렇다면 반대로 소설가의 시는 어떨까. 산문 형식의 대서사시일까? 소설과 시, 시와 소설은 문학의 대표 격으로 항상 같이 언급되곤 하지만, 사실 많은 부분에서 다르다. 소설에서나 시에서나, 수많은 종류와 성향이 있듯이 말이다.
19~20세기에 걸쳐 세계적인 대문호들을 다수 배출한 러시아는 사실 18~19세기 초반까지만 해도 소설, 즉 산문에 대해서 황무지나 다름없었다고 한다. '푸시킨'이라는 존재가 있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러던 중 1830년대에 들어서 산문에 대한 관심이 급증했고, 이미 위대한 시인의 반열에 오른 푸시킨은 <벨킨 이야기> <스페이드의 여왕>에 이어 <대위의 딸>이라는 소설을 집필한다. 이 중에서 <대위의 딸>은 그의 유일한 장편(중편) 소설로, 러시아 산문(소설)의 초석이 되었다.
<대위의 딸>은 완성된 해는 1836년이지만, 1770년대 초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 당시 러시아에서는 큰 반란 사건이 있었는데, 일명 '푸가초프의 반란'이다. 이 소설의 절반이상이 이 반란 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푸가초프의 반란'은 당시 예카테리나 여왕의 잔혹한 압제에 대항해 농부 출신의 푸가초프가 농민들을 이끌고 반기를 든 사건이다. 2년에 걸쳐 커다란 세력을 형성하고 정부에 큰 위협을 줬지만, 결국 실패해 푸가초프가 처형당하면서 막을 내린다.
푸시킨은 이 반란 사건에 대한 역사서를 집필하면서 이 소설을 썼다고 한다. 그 사실성에 매료됐는지 러시아 사실주의를 대표하는 대문호 고골은 '리얼리티보다 더 리얼하고 진실보다 더 진실된' 소설이라 격찬하기도 했다. 어떠한 내용인지 자못 궁금해진다.
푸시킨의 역사 읽기
귀족의 자제 표트르 그리뇨프는 아버지의 명에 따라 군인이 되어 구석진 곳에 있는 요새로 향한다. 가는 도중 눈보라를 만나게 되어 오가지도 못하고 있을 때, 어떤 농부가 나타나 길을 안내해 준다. 하인의 반대에도 그리뇨프는 그에게 감사의 표시로 토끼 가죽 외투를 내어준다. 요새에 도착한 그리뇨프는 허름하기 그지없는 요새의 모습과 무능하기 짝이 없는 사령관과 군사들을 보고 실망한다. 반면 사령관의 딸, 즉 대위의 딸을 사랑하게 됐지만 쉬바브린이라는 장교의 질투를 받아 결투를 하기도 한다.
그런데 뜻밖의 사건이 일어난다. 푸가초프의 반란군이 들이닥쳐 사령관 부부를 포함한 모든 이들을 죽이고 요새를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알고 보니 푸가초프는 그리뇨프가 토끼 가죽 외투를 내어준 바로 그 농부였으니, 우연의 일치라고 하기엔 너무나도 극적이었다. 쉬바브린은 그의 편이 됐고, 그리뇨프와 대위의 딸인 마리아는 은혜 갚은 푸가초프 덕분에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이 소설은 분명 푸가초프의 반란을 소재로 하고 있다. 그럼에도 소설의 전편에 흐르는 어조나 느낌에서는 전혀 그 기류를 발견할 수 없다. 시인의 풍모가 새겨져 있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너무나 가볍고 서정적이고 때론 우습기까지도 하다. 그래서 너무 잘 읽히는 게 흠이라면 흠이랄까.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죄와 벌>과 같이 거대한 담론이나 이념을 그리고 있다기 보다, 개인의 소소한 인생사를 그리고 있다고나 할까.
제목인 <대위의 딸>에서 풍기는 느낌만 보아도 지극히 개인의 삶에 집중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천박하거나 이류의 느낌이 들지 않는다. 균형 잡힌 소설이다. 작가는 왜 이런 장치 아닌 장치, 즉 거대한 사건을 배경으로 거대한 담론이나 이념이 아닌 개인의 소소한 인생사를 그렸을까.
쉽게 떠오르는 게 한 가지 있다. 푸시킨에게 역사란 거대한 덩어리가 아닌 작은 것들의 집합이지 않았을까. 우리가 배우는 거대한 역사의 줄기, 역사소설에서 흔히 다루는 거대한 사건. 푸시킨에게 있어서 역사란 이런 것들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푸가초프'나 '예카테리나'라는 러시아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인물들도 한 개인과 다를 바 없이 표현하고 있다. 이름 없이 사라져 간 역사 속 개인들을 살려내, 소소한 의미일지 모르지만 누군가에겐 리얼한 역사의 의미를 찾아내려고 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흥미로운 소설 속 장치
한편 반란이 진압되고 체포된 쉬바브린이 법정에 서게 되었다. 이때 쉬바브린은 거짓 증언을 해 그리뇨프를 또 다시 위기에 빠뜨리게 한다. 반역자의 낙인이 찍힌 그리뇨프는 시베리아로 유배를 떠나게 되고, 그런 그리뇨프의 사면을 위해 대위의 딸, 마리아는 모스크바로 가서 예카테리나 여왕에게 간언하여 그리뇨프를 구출해낸다. 이후 두 사람은 결혼을 했고 행복하게 살았다.
작가는 비록 개개인의 소소한 인생사들로 소설을 채우며 거대한 사건을 전했지만, 그 사건이 왕조의 정통성을 부정하려는 반란 사건이었다는 것만은 분명히 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작가는 소설의 마지막에 상큼한(?) 장치를 넣었는데, 이 소설이 주인공인 그리뇨프의 수기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의 자손들이 출판을 하는 화자(단행본 발행인)에게 원고를 보내와서 출판하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반전이라면 반전이라고 할 수 있는 센스 있는 장치라고 할 수 있겠다. 또한 위에서 언급했던 소설의 전반에 흐르는 (어찌 보면 배경에 어울리지 않는) 희극적 분위기도 이 장치에 속한다고 할 수 있겠다. 물론 그 자체로 소설의 맛을 한껏 살리는 장치로도 사용되었지만.
푸시킨은 언젠가 반란에 가담하려다 못한 적이 있었다. 대신 반란을 주도한 비밀 결사대의 소지품에서 그의 정부에 반하는 시가 발견되었고, 이에 정부는 푸시킨의 저술을 감시하기 위해서 검열관을 배치시켰던 것이다. 검열을 피하기 위해서는 위와 같은 장치가 필요했을 것은 자명하다. 그럼에도 곳곳에 자신의 흔적을 남기려 한 그의 모습을 보며, 푸시킨의 한계와 고충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검열을 피하기 위한 장치는 <대위의 딸>을 비롯해 다른 소설가의 소설들에서도 종종 나타난다. 염상섭의 <삼대>에서는 일본의 검열을 피하기 위해 일본에 대항하는 모습을 연극적 요소를 투입해 희화화했고, 엘리오 비토리니의 <시칠리아에서의 대화>라는 이탈리아 소설은 파시스트 당국의 검열을 피하기 위해서 일부러 굉장히 추상적이고 모호한 분위기를 연출했다고 한다. 문학 속에서 내용과는 상관없는 장치를 넣고 때로는 그 장치를 문학적 요소로 승화시켰던 문학가들의 면모를 보니, 존경의 눈빛만이 초롱초롱 빛날 뿐이다.
푸시킨의 당대 평가
역자의 말을 빌리자면, 푸시킨은 <대위의 딸>을 통해서 당대 전제 정치에 대해 통렬한 비난을 하고 있다. 예카테리나 여왕과 푸가초프를 거의 동등하게 표현하고 있다는 이유는 그 중 하나인데, 예를 들어 본 구절을 옮겨 본다.
"예카테리나 여제의 인상은 통통하고 혈색 좋고 위엄과 평온함을 갖춘 것으로 그려진다. (중략) 그리뇨프가 관찰한 바의 푸가초프는 이목구비가 번듯한 것이 꽤나 서글서글해 보였고 흉악한 점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었다. 뿐만 아니라 두 사람의 성격도 유사하다. 두 사람 다 한없이 관대하고 한없이 자비로울 수 있지만 사소한 반발에도 얼굴을 붉히며 화를 낼 정도로 격한 일면을 가지고 있다. (중략) 푸가초프는 스스로 죽은 여재의 남편 표트르 3세라고 칭함으로써 여제와 자신이 동등함을 강조한다. 결국 가장 고귀한 절대 군주 예카테리나와 가장 비천한 강도 두목 푸가초프는 역할과 외모와 성격과 명칭에 있어서 동등하다는 사실이 독자에게 암암리에 전달되는 것이다." (<푸시킨의 삶과 작품 세계> 중에서)
러시아 예카테리나 2세(좌)와 푸카초프(우). 푸시킨은 <대위의 딸>에서 황제 예카테리나 2세와 역적 푸카초프를 동일 선상에서 그려냄으로써, 당시 러시아의 전제 정치에 대해 사실상의 혁명적 비판을 하고 있다. ⓒ 빈 미술사 박물관, 위키미디어 공용
검열과 책임에서 자유롭기 위해서 자잘한 장치들을 삽입시킨 것이다. 그러는 동시에 당대에 대한 평가를 내리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모든 이의 최상위에 있는 존재와 보잘것 없는 농부에서 역적 반란 괴수가 된 이를 동일 선상에서 바라보고 있으니, 이는 작가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몸부림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이 밖에도 여러 실존 인물들의 실명을 거론하며, 그들의 행위를 모두 고발하고 있다. 이는 위에서 언급한 바 있는 그가 집필한 역사서 <푸가초프의 역사>에서 많은 도움을 받았을 것이다.
일제 시대, 독립선언서를 목 놓아 부르짖었던 사람들 중 상당수가 변절을 했고, 가감 없이 자신들의 의견을 피력하였다. 반면 검열을 피하기 위해 독하게 쓰지 못하고 어떤 상징을 위한 장치를 넣을 수밖에 없었던 몇몇 소설들은, 한낱 연애·로맨스 소설로 치부되기 일쑤다. 하지만 분명 그 껍질을 까고 안을 들여다보면 소박하고 조곤조곤하게 할 말을 하고 있는 작가의 말 주머니가 숨어 있을 것이다. 사실 상당한 정치적 역학 장치가 들어 있다는 것을 알고 나면 새롭게 읽을 수 있을 듯.
푸시킨의 <대위의 딸>은 겉모습만 봤을 때 철모르는 어린 아이 같은 느낌의 소설일 뿐이다. 하지만 작가의 인생사를 들여다보고 작품의 배경을 찬찬히 곱씹어보고 그 속에 숨겨진 작은 장치들을 해체해보면, 철모르는 아이의 모습은 어느새 성숙한 어른의 모습으로 변해있을 것이다. 지금 우리네 작가들은 푸시킨의 <대위의 딸>에서 그의 서정적인 필체와 패러디적 요소가 짙은 희극적 분위기와 어조를 일고 감탄하고 본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가 진짜 말하고 싶었던 게 무엇인지를 알아차리고 그 분명한 한계와 고충을 같이 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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