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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간 책 다시읽기

<밤으로의 긴 여로> 50여년 전에 쓰인 '명품 막장 드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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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간 책 다시 읽기] <밤으로의 긴 여로>


칼로타에게. 열두 번째 결혼기념일을 맞이하여


사랑하는 당신,

눈물과 피로 쓴 오랜 슬픔의 드라마 원고를 당신에게 드리오. 행복을 축하해야 하는 날에 이 무슨 서글프고 어정쩡한 선물인가 싶을지도 모르겠소. 하지만 이해해 주오. 당신의 사랑과 따뜻함을 기리는 선물이라오. 그로써 나는 사랑을 믿을 수 있게 되었고, 마침내 내 죽은 가족을 맞대면하여 이 극을 쓸 수 있었소. 이것은 유령에 쫓기는 네 명의 타이런 가족에 대한 깊은 슬픔과 이해와 용서로 쓰인 글이라오. 


사랑하는 이여, 지난 열두 해는 빛과 사랑으로 가는 여로였소. 

내가 얼마나 감사하고 또 사랑하는지, 당신은 알 거요!


<밤으로의 긴 여로> 표지 ⓒ 열린책들

위의 글은 유진 오닐의 희곡 <밤으로의 긴 여로> 서문이다. 그가 행복한 결혼기념일을 맞이해 눈물과 피로 쓴 오랜 슬픔의 드라마 원고를 선물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내 덕분에 그는 마음이 치유되었고, 그의 가족을 맞대면할 수 있는 용기를 얻게 된 것이 아닐까. 그 결과물을 선보이며 고마움을 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 서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나아가 이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작가 '유진 오닐'의 삶을 반추해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


유진 오닐의 암울한 삶


유진 오닐은 연극 배우 아버지와 피아니스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굉장히 유명했지만 한 가지 배역에만 몰두하다보니 발전이 없었고 점점 잊혀졌다. 어머니는 그를 낳고 후유증으로 고생하다 마약 중독자가 되었다. 첫째 형은 명석한 두뇌를 가졌음에도 뜻대로 되지 않는 삶에 치여 여자와 술을 탐닉하며 살아갔다. 둘째 형은 어릴 때 홍역으로 죽고 만다.


그 자신의 삶 또한 녹록치 않았다. 어찌보면 제일 암울했다. 뉴욕 브로드웨이의 한 호텔방에서 태어났고 이후 아버지가 속해 있는 유랑극단을 따라 다니면서, 극단과 호텔을 전전했다. 명문 대학에 진학했지만 견디지 못한 오닐은 선원 생활을 하기도 했고 여기저기를 떠돌며 부랑자 생활을 하기도 했다. 자살 기도를 시도했다고도 한다. 뉴욕에 돌아왔을 땐 폐병에 걸려 있었다.


이후 스트린드베리, 입센 등의 영향을 받아 희곡을 쓰기 시작했고, 대박이 났으며, 1922년에는 퓰리처상을 받기에 이른다. 이후 1924년, 1928년에 잇따라 퓰리처상을 수상했고 급기야 1936년에는 미국인으로써는 1930년 싱클레어 루이스 이후 두 번째로, 극작가로써는 미국에서 처음으로 노벨문학상을 받는다. 명실공히 최고의 작가가 된 것이다.


하지만 그의 불운은 계속된다. 잘 나가던 그에게 평론가들의 집중 포화가 시작되었고, 점점 잊혀져갔다. 그는 결혼을 세 번했는데, 그의 아내와 자식들 중 몇몇이 자살로 삶을 마감하는 불행을 겪기도 하였다. <밤으로의 긴 여로>는 혹평으로 힘든 시기를 지내고 있던 1941년에 쓰였지만, 출간하지는 않았다. 그는 유언으로 이 작품을 사후 25년 간 출간하지 말라고 하였지만, 캘로타는 사후 3년 후인 1956년 출간하였다. 이 작품으로 그는 네 번째 퓰리처상을 받았다.


타이런 가족의 1세대


삶은 드라마이고 세상은 무대라고 한다. 작품에 나오는 이들 타이런 가족의 삶을 보자하니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 더구나 작가의 개인적인 가족사와 거의 흡사하다고 하지 않았는가? 위에서 언급했던 유진 오닐의 다섯 식구와 타이런 가족의 다섯 식구는 완벽한 대칭을 이룬다.


아버지 타이런은 과거 굉장히 유명했던 셰익스피어 전문 연극 배우였다. 가난으로 일찍 학업을 중단하고 생업전선에 뛰어들었는데, 우연한 기회에 배우가 되었고 어린 나이에 스타가 되었다. 어린 나이에 너무나도 많은 돈을 만지게 된 그. 그만 그 삶의 안주해버렸고, 그 많은 돈은 어느새 온데간데 없없다. 그는 돈 밖에 생각하지 않는 구두쇠가 되어버렸다. 아픈 아내를 치료하는 데에도 돈을 아껴 돌팔이 의사를 소개시키는...


타이런: 인생이 나를 멋대로 가지고 논거야... 당시로선 대단한 수익이었지... 난 그 많은 돈으로 무엇을 사려고 했던 건지...뭐, 상관없지. 후회해도 늦었어.(본문 속에서)


어머니 메리는 과거 피아니스트가 꿈이었던 수녀 수제자였다. 그녀에겐 무궁무진한 미래가 있었던 것이다. 뭐라도 할 수 있었던 것 같았던 그 시절, 타이런에게 반하고 말았다.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덜컥 결혼을 하게 된 그들. 절망이 시작되었다. 첫째 제이미를 낳았고 잘 키웠다. 그렇지만 그들이 신경을 써주지 못했기에 커서 말썽꾼이 되고 말았다. 둘째 유진을 낳았는데, 빨리 죽고 말았다. 정신적으로 너무 힘들어진 그녀. 의사는 그녀를 치료함에 있어 마약성분이 짙은 약만 주었기에, 그녀는 그 약에 점차 취해갔다. 셋째 에드먼드가 태어났지만 너무나 심약했기에 많이 아팠고 커서도 계속 아팠다. 그녀는 마약에 손을 댔고 어느샌가 마약쟁이가 되어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처지를 비하하며, 가족에게로 그 비난의 화살을 돌렸다.


메리: 제이미는 어디 있지? 아, 물론 제이미는 술값이 남아 있는 한 절대로 집에 들어오지 않지... 지금의 제이미를 보면 그 아이가 한때 아기였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어요...  유진도 마찬가지였죠. 건강하고 잘 웃고. 내가 방심해서 그 아이를 죽게 놔두기까지 2년 동안 말이에요...제이미가 커서 집안의 말썽꾼이 되리라고 누가 생각했겠어요?

타이런: 그래, 그 게이른 녀석이 술주정뱅이가 된 게 내 탓이란 말이오? 

에드먼드: 엄마가 마약쟁이란 사실이 가끔 견디기 힘들어요!


타이런 가족의 2세대


첫째 제이미는 어린 시절 아무 이상 없이 잘 컸다. 건강하고 잘 웃었다. 명민하기까지 했다. 그런데 타이런과 메리가 둘째와 셋째에 온 신경이 쏠려 있는 동안, 점차 삐뚤어져 갔다. 결국은 여자와 술에 탐닉하는 난봉꾼이 되어버렸다. 그 역시 어머니 메리처럼 자신의 처지를 비하하며, 가족에게로 그 비난의 화살을 돌렸다.


제이미: (에드먼드) 너 지금 나를 비난하는 거냐? 날 가르치려 들지 마라! 난 네가 상상도 못할 만큼 인생을 많이 배운 놈이야! 고상한 문학 작품을 더 많이 읽었다고 해서 나보다 잘났다는 생각은 버려! 넌 덩치만 큰 꼬마일 뿐이야!


둘째 유진은 태어나지 얼마 안되어 죽고 말았다. 어머니 메리는 그때문에 정신과 치료를 받게 되었고 그 와중에 마약에 손을 대게 되었다.


셋째 에드먼드는 어릴때부터 심약했고 커서도 아팠다. 폐결핵에 걸려 가족 모두에게 크나큰 상처를 남기게 되었다. 그로 인해 어머니 메리는 마약쟁이가 되었고 그때문에 제이미는 난봉꾼이 되었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이 작품은 1912년 타이런 가족의 어느 날 하루 동안의 일로, 별장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극의 시작은 여느 가족극과 다를 바 없다. 화목해 보이는 가족들의 모습. 하지만 뭔가가 맞지 않는 듯한 느낌이 곳곳에서 풍긴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감춰져 있던 모습들이 드러난다. 밤이 찾아오고... 이들 가족은 '막장'으로 치닫는다.


이 '막장 드라마'의 끝은 '삶은 드라마'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현실적이다. 타이런은 여전히 구두쇠로 아들이 아픈데도 돈을 쓰기를 망설인다. 메리는 증세가 더욱 악화되어 이제는 과거와 현재를 구분하지 못할 정도이다. 제이미와 에드먼드는 서로를 원망하고 부모를 원망함을 멈추지 않는다. 지금의 드라마들이 불륜, 근친상간, 겹사돈 등의 비현실적인 모티브로 '막장'의 타이틀을 획득했다면, <밤으로의 긴 여로>는 가족들의 지극히 현실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술과 마약, 여자, 돈 얘기가 난무하는 이 가족 드라마야말로 '막장'이 아닐까. 독자나 관객으로 하여금 먹먹하고 기분이 좋지 않은 감동과 공감이 들게 하는 명품 막장 드라마.


세상은 여러 비현실적 요소들로 우리를 속이고 있다. 현실은 너무 아프고 진실은 때로 감춰져 있는 게 낳을 것이기에. <밤으로의 긴 여로>는 그런 통념을 과감히 버리고 현실을 보여준다. 더 나아가 작가 자신의 현실을 그대로 투영해 말 그대로 현실 그 자체를 보여주기에 이른다. 이 가족극이 미국 연극계를 새롭게 정립했다는 평을 듣는 이유일 것이다.


행복은 멀리있지 않다. 둘러볼 필요도 없다. 바로 옆에 있다. 그리고 그곳에는 어김없이 가족이 있을 것이다. 이 가족에게 시 한소절을 들려주고 싶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설움의 날을 참고 견디면

기쁨의 날이 오고야 말리니

-알렉산드르 푸쉬킨의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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