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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간 책 다시읽기

<용의자 X의 헌신> 동양 추리소설의 백미를 느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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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간 책 다시읽기] 히가시노 게이고의 <용의자 X의 헌신>


<용의자 X의 헌신> ⓒ현대문학

10년 전쯤 우연한 계기로 추리소설의 세계에 빠지게 되었다. 그 계기가 된 작품은 <장미의 이름>(열린책들)이었는데, 너무나 어려워 프롤로그를 이해하는 데만 한 달여가 걸렸던 기억이 난다. 겨우겨우 끝을 보고 다른 추리소설을 찾아 헤매기 시작했다. 조금은 덜 어려운걸로다. 


흔히들 말하는 세계 3대 추리소설('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Y의 비극', '환상의 여인')을 다 섭렵했고, 그 밖에 수많은 추리소설들을 훑었다. 추리소설만 보다보니 이것저것에 궁금증이 생겼는지, 나의 독서 편력에 대해 질문을 해보았다.


"왜 동양 추리소설은 읽지 않는 거지? 아니면 없는 건가? 조사해보자."


(개인적으로) 중국과 한국에서는 제대로 된 추리소설을 찾기 힘들었다. 반면에 일본에는 '마쓰모토 세이초'가 있었다. 그의 <점과 선>(모비딕)을 읽었다. 절묘한 트릭은 물론이고, 사회성 짙은 내용이 일품이었다. 심리적이고 비현실적인 내용이 상당히 가미되곤 하는 동양의 추리소설에서 조금은 더 글로벌해진 느낌이었다고나 할까. 


이 분의 사회성 짙은 내용을 이은 작가가 얼마 전 화제를 불러일으킨 <화차>(문학동네)의 '미야베 미유키'라고 할 수 있을테고, 절묘한 트릭과 글로벌해진 느낌을 이은 작가가 '히가시노 게이고'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나의 추리소설 독서 편력은 서양에서 시작해 동양으로 왔고, 그 중에서도 일본의 마쓰모토 세이초를 지나 미야베 미유키를 살짝 경유해서 히가시노 게이고에 이르렀다. 그의 대표작 <용의자 X의 헌신>(현대문학)은 추리소설에서 발을 떼려한 나의 발길을 돌려 비록 한동안이지만 다시금 순수한 욕망으로 가득 차게 해주었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용의자 X의 헌신>를 내놓기 전, 천재 물리학자 유가와와 형사 구사나기 콤비의 두 단편집을 내놓은 바 있다. <탐정 갈릴레오>(재인), <예지몽>(재인)이라는 작품인데, 천재 물리학자 유가와의 추리를 앞세워 초자연적인 사건을 과학적으로 풀어나갔다. 


그런 그들에게 현실의 인물에 의한 현실의 사건이 등장한다. 사건 해결이 결코 쉽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암시하는 바, 단편집이 아닌 장편소설인 점도 이에 한몫한다. 그들의 대학교 동창이자 천재 수학자인 아시가미 테츠야의 살인 사건이었다. 수학을 제외한 어떤 것도 건드릴 수 없었던 그의 욕망에 과연 무엇이 다가갈 수 있었을까?


양립할 수 없는 창과 방패


그 시작은 기막힌 우연이었다. 한 연립주택으로 이사를 온 모녀(야스코와 미사토)가 옆집으로 인사를 간다. '딩동' 하는 벨소리에 하던 일을 멈춘 남자가 나왔다. 그는 막 목을 매 자살을 하려고 하던 중이었기에 심드렁했다. 그런데 이게 웬걸? 그 모녀에게 눈을 빼앗기고 말았다. 수학만이 유일한 즐거움이었던 그에게 수학과 본질적으로 같은 아름다움이 눈 앞에 나타난 것이었다. 더 이상 수학의 길을 가지 않아 삶을 포기하려 한 그에게 또 다른 삶의 이유가 나타난 것이었다. 


그렇게 그의 삶은 완전히 바뀌었다. 자살충동은 사라졌고 세상은 다시 밝아졌다. 그 모녀를 돕는 것은 이시가미에게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고 그게 어떤 일이든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그들이 없었다면 자신도 없는 것 아닌가? 그는 은혜를 갚기 위해 그 모녀의 죄를 대신 뒤집어쓰려 한다. 그것도 살인죄를. 


어느날 그 모녀에게 전 남편이 찾아왔고 소란 끝에 야스코와 미사토는 힘을 합쳐(?) 죽이고 말았던 것이다. 이시가미는 이를 알아차리고, 천재적인 수학 실력을 발휘해 범행의 은폐를 도와준다. 너무나도 논리적이고 빈틈없는 알리바이에 구사니기 형사는 유가와에게 도움을 청하게 되고, 천재와 천재는 20여년 만에 조우한다. 창과 방패의 대결이 시작된 것이다. 


"수학의 새로운 문제 하나가 생각났어. 시간 날 때 좀 생각해주지 않을래."

"뭔데?"

"사람이 풀기 힘든 문제를 만드는 것과 그것을 푸는 것 중 어느 쪽이 어려운지. 단, 해답은 반드시 있어. 어때, 재미있지 않나?"

"흥미로운 문제야. 생각해보지."(본문 중에서)


여기서 이기게 되는 이는 누구일까. 모녀를 위해 대신 희생을 하려하는 이시가미는 오히려 지게 되길 바라고 있을까? 친구이기 이전에 천재인 이시가미를 잃게 되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이 내재된 유가와의 추리는 어떻게 끝을 맺을까? 그들이 갖고 있는 묘한 욕망의 대결을 지켜보는 것도 이 소설의 재미이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사실, 소설의 초반에서 범인의 정체가 밝혀진다. 결정적인 트릭을 제외한 다양한 트릭들도 이미 제시된다. 이런 설정은 추리소설을 보는 재미를 반감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설정이 오히려 독자로 하여금 이 외에 것에 더욱 집중하게 한다. '인간'을 그리는 작가의 붓끝을 쫓아가다 보면 알 수 있다. 


이시가미는 혼자였다. 그것도 소설 속 인물 중에서 유일하게 말이다. 야스코는 전 남편과 헤어지고 미사토와 둘이 살았다. 또 그녀에게 다가서는 한 남자 구도가 있었다. 유가와에게는 구사나기 형사가 있었고 말이다. 그들에게는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잘 끌고 나갈 수 있는 조력자들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시가미에게는 아무도 없었다. 마침 수학에 쏟았던 욕망의 에너지도 고갈되고 말았다. 그런 그에게 야스코와 미사토는 새로운 욕망의 에너지원이었다. 완전히 망가져버린 이시가미의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는 다시 태어났다.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살아가는 의미를 잃고 있었다. 수학만이 유일한 즐거움인 자신이 그 길을 가지 않는다면 자신은 이미 존재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정말 깨끗하고 아름다운 눈을 한 모녀였다. (중략) 수학의 문제가 풀려서 느끼는 아름다움과 본질적으로 같은 아름다움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본문 중에서)


그 순수한 욕망이 윤리적으로 정당하지 못한 일에 관련되었을 때 그 주인은 이를 간파하지 못했다. 너무나 순수했기에. 백지에 검정색을 칠하든 빨간색을 칠하든 노란색을 칠하든 그에게는 아무런 상관도 없었다. 칠하는 행위 자체에 감사했으므로. 


인간을 그린다는 것은 곧 욕망을 그리는 것과 같다. 사랑과 배신, 우정, 삶과 죽음은 모두 욕망에 기인하는 것이다. 추리소설의 형식을 빌린 이 휴먼드라마에도 이 모든 것들이 들어있다. 더불어 재미와 감동도 얻어가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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