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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간 책 다시읽기

'파이 이야기'가 '노인과 바다'를 넘을 수 없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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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간 책 다시읽기] <노인과 바다>


<노인과 바다> ⓒ 문예출판사

20세기가 낳은 최고의 작가라 칭하는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후기작 <노인과 바다>는 자연에 맞서는 한 인간의 사투를 그렸다. 그리고 거기에서 불굴의 정신, 포기하지 않는 희망 따위를 얘기한다. 아니, 그렇게 알려져 있고 정설로 굳혀졌다. 굳이 부인하고 싶지는 않다. 맞는 말이다. 단지 조금은 다른 시선으로 볼 필요도 있다는 걸 말해주고 싶다. 조금 더 시선을 확장해보면, 이 소설에서 더 많은 걸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인간 vs 자연이 아닌 인간 and 인간, 인간 and 자연, 자연 and 자연으로서의 시선.  


인간 and 인간


노인 산티아고는 왕년에 잘나갔던 어부였다. 힘이 장사였고, 무지막지하게 큰 물고기를 잡는 것은 식은죽 먹기였다. 당대 최고의 야구 선수 조 디마지오도 그런 물고기를 잡을 수는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나이가 먹으니 힘이 빠지고 물고기 잡기도 수월치 않았다. 그래도 그는 어부였기에 물고기를 잡아야 했다. 그것도 큰 물고기로. 84일째 잡히지 않는 이놈의 물고기. 그는 85일째 되던 날에도 어김없이 출전한다. 전쟁이나 다를 바 없다.


노인에겐 마놀린이라는 꼬마 친구가 있다. 그와 함께 같이 배를 타고 고기를 잡으러 가곤 했다. 일종의 수제자인 것이다. 그의 부모님은 마놀린이 제대로 된 어부에게 제대로 된 수업을 받아서 그야말로 제대로 된 어부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100일이 다 되도록 제대로 된 물고기 하나 못 잡아오는 늙은 어부한테서가 아니고 말이다.


그렇지만 마놀린은 산티아고에 대한 무한한 애정과 배려, 존경의 마음을 품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산티아고가 언젠가는 꼭 큰 물고기를 잡아올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노인으로서의 한계가 너무나 명확히 보이는 그가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마놀린을 위해서라도 산티아고는 꼭 잡아와야 했다. 이 부분이 소설의 핵심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마놀린을 위해서. 그의 믿음을 져버리지 않기 위해서.


인간 and 자연


부모님의 성화에 못 이겨 결국 다른 배를 타게 되고 마는 마놀린. 어쩔 수 없이 혼자서 고독한 싸움을 하게 된 산티아고. 바야흐로 인간과 자연의 싸움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노인은 성공할 수 있을까.


다행인지 불행인지 노인은 출항 첫날부터 엄청난 크기의 물고기를 잡게 된다. 상상을 초월하는 크기와 그에 비례하는 힘. 노인은 그 힘을 이기지 못하고 물고기에게 끌려 가기에 이른다. 그는 버티고 버텨서 물고기가 지치길 바라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물고기가 지쳐서 조류에 몸을 실어야만 하는 것이었다.


노인은 두 가지의 어려운 목표를 달성해야 했다. 한 가지라면 쉬웠지만 두 가지라 어려웠다. 물고기를 죽여서 돌아가야 했지만, 꼭 자신의 손으로 죽여야만 했다. 다른 무엇에 의한 죽음은 용납되지 않았던 것이다. 지칠 때까지 죽으면 안 되었다. 그건 노인도 마찬가지였다. 노인은 그 물고기를 형제라 칭하며 그 순간 누구보다 사랑한다고 말한다. 이는 빈말이 아닐 것이다. 이들은 그 순간 '함께'였다. 노인으로 대변되는 인간의 청새치로 대변되는 자연에 대한 '사투'라기 보다는, 인간과 자연이 함께 하는 '여정'이라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일종의 스톡홀름 증후군이라고 할까?


"이 녀석아, 나는 마지막까지 견딜 수 있단다. 그러니까, 너도 끝까지 견뎌야만 해. 하긴 그건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지." (본문 속에서)


작년 영화로도 만들어져 다시 한번 큰 이슈가 되었던 <파이 이야기>(작가정신)가 <노인과 바다>를 넘을 수 없는 점이 있다면 바로 이 점이다. 인간과 자연의 공존을 노골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파이 이야기>와는 달리, <노인과 바다>에는 인간 내면의 알 수 없는 오묘한 감정을 보여준다.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곳에서의 모순의 합. 그것을 솔직하고 실질적으로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자연 and 자연 


노인은 3일 밤낮을 청새치와 싸우고, 달래고, 이야기하고, 화내며 보낸다. 마침내 지친 청새치를 작살로 죽이게 된 노인. 이제 조류와 순풍을 타고 집으로 돌아갈 일만 남았다.


하지만 피 냄새를 귀신같이 맡고 찾아오는 불청객 상어. 노인은 오랜 경험으로 이미 알고 있었지만, 알기 싫었다. 자신이 이길 가능성은 거의 없었기에. 두세 마리씩 끊임없이 오는 상어 떼에 맞서, 노인은 온갖 종류의 무기를 동원한다. 그렇지만 청새치가 눈 앞에서 점점 사라지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노인은 상어를 보며 욕지거리를 하고 자신이 인위적으로 얻게 된 청새치를 빼앗기지 않으려 용을 쓰지만, 자연은 자연으로 돌아갈 수 밖에 없었나 보다. 그는 많은 수의 상어를 죽였음에도 결국은 청새치를 모조리 빼앗기고 말았다. 뼈만 남긴 채.


그렇지만 상어는 노인을 공격하지 않았다. 아니, 못한건가? 여하튼 자연은 자연만을 취했고 인위적인 취함은 행하지 않았다. 죽은 상어들 또한 자연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노인 또한 물질적으로는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채 집으로 돌아간다.


다시 인간 and 인간


기진맥진한 상태로 거대한 청새치의 뼈 만을 가지고 항구로 돌아온 산티아고. 그 뼈를 보고 항구의 어부들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한다.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이것을 가리켜 인간 승리라 하지 않고 뭐라 말하겠는가? 산티아고는 이런 말을 한다.


"인간은 패배하기 위해 태어나진 않았어. 죽을 수는 있지만 패배할 수는 없어." (본문 속에서)


맥아더가 이런 말을 했던가.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단지 사라질 뿐." 누구는 죽을 수는 있지만 패배할 수는 없다고 하고, 누구는 죽지 않고 사라질 뿐이라고 한다. 누구의 말이 맞을까? 한 번 생각해 볼 일이다.


쓰러지듯 잠이 든 노인이 깨어났을 때 그의 곁에는 마놀린이 있었다. 다른 배를 타서도 큰 물고기들을 잡은 그지만, 노인 걱정만 앞설 뿐이다. 청새치의 뼈로 증거를 제시한 노인의 모습에, 그는 자신의 믿음을 지킬 수 있어 기쁘다. 다음에는 꼭 같이 배를 타기로 약속한다. 그는 노인을 위해 갖은 굳은 일을 마다하지 않고, 노인을 위해 울어주기까지 한다. 인간의 인간에 대한 한없이 배려와 믿음이 묻어 난다.


이 소설을 보니 종종 '인간'이라는 단어 앞에 붙곤 하는 '고독'을 빼버려도 되지 않나 싶다. 인간과 자연의 고독한 사투가, 실은 인간과 인간의 진실된 믿음과 사랑이었으니 말이다. 헤밍웨이가 진정 그리고자 했던 바는 산티아고(인간)와 청새치(자연)가 아니라, 산티아고(인간)와 마놀린(인간)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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