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간 책 다시읽기] <평행과 역설>
<평행과 역설> ⓒ생각의 나무
우리나라가 해방을 맞이한 후 미국과 소련으로 인해 남과 북이 갈라서고, 우리에게 '다름'은 곧 '틀림'이었다. 한 민족이라는 유사성(평행)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완전히 반대의 이데올로기(역설)를 가졌기에. 우리와 다른 이데올로기는 없애버려야 했다. 다를 뿐인데 왜 없애야 하는가? 그래서 나온 논리가 틀림이었다. 틀린 건 바로 잡아야 하니까 말이다.
이 논리는 중동의 두 나라에서도 통용되고 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그들의 쟁점은 애매하다.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 지역에 이스라엘을 건국 하면서 벌어지는 분쟁이다. 그렇게 되면서 이스라엘인(유대인)은 돌아오고, 팔레스타인인은 쫓겨나게 되었다. 이들은 과연 친구가 될 수 있을까? 누가 보아도 그럴 수 없다고 할 것이다.
이런 통념을 깨뜨려 버리려 하는 사람이 있다. 현재 베를린 국립 오페라 음악 감독이자 종신 지휘자이자 '현대 음악계의 거장'이라 불리는 피아니스트 겸 지휘자 '다니엘 바렌보임'이다. 그는 위에서 언급한 '돌아온 유대인'이다. 그는 음악으로 큰 전체를 꿈꾸며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화합을 이끌어내려 노력 중이다.
지난 1999년에는 그의 절친한 친구인 에드워드 사이드와 함께 '서동시집 오케스트라'를 창단해 분쟁 지역에서 공연을 해왔다. 이 오케스트라에는 이스라엘인과 팔레스타인인을 비롯해 이집트, 이란, 요르단, 레바논 등의 다국적 연주자로 구성되어 있다고 한다. (지난 2011년 8월 15일에는 우리나라 임진각에서 평화 콘서트를 개최하기도 했다. 이 자리에는 고인이 된 에드워드 사이드의 부인 마리엄 사이드 여사가 동행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이 있다면 다니엘의 절친한 친구인 에드워드 사이드이다. 그는 <오리엔탈리즘>을 통해 유럽 중식 편견과 제국주의적 음모를 파헤치며 세계적인 센세이션을 일으킨 바 있는 세계적 석학이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가 팔레스타인인이라는 사실이다. 즉, 위에서 언급한 '쫓겨난 팔레스타인인'이다. 그런 그가 '돌아온 유대인' 다니엘 바렌보임과 절친한 친구라니, 역설적이지 않은가? 그럼에도 그들은 같은 곳을 바라본다고 한다.
<평행과 역설>(생각의 나무)은 이런 역설적이고 복잡하게 중첩된 문화적 배경을 가지고 있는 '다니엘 바렌보임'과 '에드워드 사이드'의 대담집이다. 이들은 1990년대 초에 런던의 한 호텔 로비에서 우연히 만나 우정을 키워, 둘 도 없는 친구가 되었다고 한다. (에드워드 사이드는 이 책이 이 책이 나온 후 2개월 후인 2003년 9월에 세상을 떴다. 하지만 이 기사에서는 이 사실을 더 이상 언급하지 않을 것이다.) 이후에 수차례에 걸쳐 공식 대담을 가졌고, 이를 구젤리미안이 엮어 책으로 나오게 되었다. 그 중에서 1995년 10월 콜롬비아 대학교의 밀러극장에서 이루어진 대담과, 1998년과 2000년에 뉴욕에서 이루어진 총 6차례의 대담을 담고 있다.
각각의 전문 분야인 음악과 사회, 정치, 문화 등을 훌쩍 뛰어넘어 다양한 곳에서 생각지 못한 대화를 진행한다.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역사, 음악에 대한 심층적인 해석, 그리고 바그너와 나치즘에 대해 기탄 없는 의견을 말하고 비판하고 취합하고 긍정한다. 그 다양함 속에 다름이 존재하지만 끝은 같다.
"우리는 가능한 모든 종류의 걱정거리를 공유하는 친한 친구로서 우리들 각각, 즉 이스라엘 사람인 다니엘과 팔레스타인 사람인 내가 오슬로 평화협정의 이행 과정을 서로 다른 기대치를 가지고 상이하게 바라본다는 사실과 적어도 처음에는 서로 다른 전망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은 전혀 걱정거리가 되지 못했다."(본문 중에서)
에드워드 사이드가 한 말로, 그 또한 큰 전체를 바로보는 한 사람으로써 다니엘과 같은 지점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평행)을 알 수 있다. 다만 팔레스타인 문제와 오슬로 평화협정의 이행 과정에 관해서는 어긋난 견해(역설)를 가지고 있다.
이스라엘인과 팔레스타인이 통합된 민주주의 국가에서 함께 살기를 원했던 사이드는 팔레스타인 독립을 위해서도 평생을 바쳤고, 미국과 이스라엘을 강력히 비판하기도 했다. 또한 1993년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열린 오슬로 평화협정에서 야세르 아라파트가 협상 내용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이스라엘측에 끌려다니며 팔레스타인에게 불리한 협정을 맺었다며 그를 비판했던 것이다. 이에 반해 다니엘은 오슬로 평화협정에 대한 기대가 있었던 것 같다.
그럼에도 흔들림 없는 이들의 관계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건 일방적인 포용이나 받아들임이 아닐 것이다. 이들이 살아온 배경이나 현재 위치한 환경을 보면 우리나라와 북한 못지 않은 적대감 혹은 이질감이 존재한다. 또는 옛날 식민지 시대의 국가들 사이에 남아있는 뿌리 깊은 적대감이 존재할 것이다. 이들은 그런 '하찮은' 것들에게 자신을 뺏기지 않는 것 같다.
"복합적인, 다중의 정체성을 가지는 것이야말로 가능할 뿐 아니라, 오히려 성취해야 할 대상이라고까지 말하고 싶습니다. 서로 다른 문화에 속한다는 감정은 우리의 삶을 더욱 풍요롭게 해줄 수 있습니다.(본문 중에서)"
"다니엘과 내가 동의하지 못하는 한 가지 분야는 우리가 태어난 고국의 역사에 대해 서로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다니엘은 팔레스타인인과는 분명히 다른 견해를 가지고 역사를 조망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서로 다른 역사관을 하나로 뭉뚱그리지 않고 서로 다른 상태로 유지하는 것은 분명 가치 있는 일입니다. 나는 서로 다른 견해에서 오는 긴장이 오히려 사회를 건강하게 만드는 힘이라고 생각합니다."(본문 중에서)
우리들 사회엔 언제쯤에야 '서로 다른 문화'와 '서로 다른 견해'가 삶을 풍요롭게 하고 사회를 건강하게 한다는 생각이 자연스러움으로 정착될 수 있을까. 어느 삶, 어느 사회, 어느 국가에서나 평행과 역설은 존재한다. 하지만 이 둘을 다름이 아닌 틀림으로 인식하는 순간, 그 조화는 여지없이 깨지고 만다.
사람들은 평행이 일직선이 되길 원할 것이다. 획일된 생각과 행동들을 원할 것이다. 역설은 더없이 커지고 광포해질 것이다. 그 힘은 옆에 평행하게 가는 사람들을 내 뒤 혹은 내 앞으로 끌어올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없어지게 만들 것이다.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서로에게 생산적인 말과 행동을 하기란 참으로 어렵다. 이 책의 저자 들은 그 유명함의 정도를 떠나, 진정 위대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그 생각을 실천하기 위해 누구보다도 앞장서 왔다. 그런 이들의 만남이라, 어떤 사람들의 만남보다 더 큰 영향력을 발휘했을 바가 자명하다. 이들의 대담이 풍성하고 생산적이고 합당한 것이 아닌, 단지 자신을 앞세우는 담론에 불과했다면 절대 책으로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예를 들어 제목에도 언급하는 평행 혹은 역설의 어느 한 축의 테두리 안에서만 오고 갔다면 말이다.
한 분야에서 최고의 자리에 오르고 다른 모든 것들을 배제한 채 그 자리에만 있어도 분명 위대한 인물일 것이다. 세상은 그런 사람을 칭송하고 받들기도 한다. 이들은 분명 최고의 자리에 올랐다. 굳이 자신이 쌓아 놓은 높은 장벽을 허물고 넘어갈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들은 굳이 장벽을 허물고 서로 만났다. 다른 역사와 다른 전망과 다른 의견을 가졌음에도, 큰 전체를 위해 어찌 보면 자신들을 희생한 그들의 만남과 더불어 감히 그들의 사상을 칭송한다.
이 책이 비록 그들의 사상을 전부 보여줄지는 못할지라도, 그들이 함께한 상징적인 결실은 충분히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좁은 방에 갇혀 있지 말고 나와 이 책을 집어 들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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