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간 책 다시읽기] <전쟁의 슬픔>
<전쟁의 슬픔> ⓒ아시아
전후 세대에게 전쟁은 고통, 슬픔, 분노, 아픔 등과는 거리가 멀다. 그것은 아마도 전쟁마저도 상품으로 팔아 먹으려는 자본주의의 첨병들 때문이다. 그들은 전쟁을 겪어 보지 못한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려는 듯, 전쟁을 게임, 영화, 드라마, 소설 등의 각종 콘텐츠부터 레크레이션이나 일일 체험으로까지 발전시켰다.
아무리 기술이 발달하여 실제와 거의 흡사한 체험을 할 수 있다고 하지만, 전쟁을 겪어 보지 못한 이로 하여금 전쟁의 진면목을 겪게 할 수는 없다. 이는 오히려 전쟁을 이용하려는 자들에게는 잘된 바, 전장에서의 긴장감은 스릴로, 죽고 죽이는 고통은 쾌감으로, 전쟁의 시작과 끝에서 겪는 아픔과 허무함은 각각 설렘과 영웅적 자부심으로 바뀌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즉, 전쟁의 고통, 슬픔, 분노, 아픔 등이
더욱 될수록 간접 경험을 하는 이들에겐 더할 나위 없이 '재미'있게 다가 오게 된다.
또한 전쟁의 시작에는 정치적 입김이 다분히 작용하는 바, 전쟁을 일으킨 정치 권력자들은 이념 또는 정치의 방향을 선전하는 도구로 전쟁을 이용한다. 자연스레 전쟁 자체에 시선을 돌리지 못하고, 전쟁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도 모자라 전쟁을 위해 목숨을 바쳐야 한다고 생각하게끔 한다. 그 때문에 무고하게 희생된 수많은 사람들의 삶은 그들에게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못하는 것이다.
필자 또한 비교적 어릴 때부터 전쟁에 대한 수많은 콘텐츠들을 접하며, 어느새 전쟁을 '동경'하기까지 했다. 국가를 위해 몸을 바치는 그들이 숭고하고 멋있고 닮고 싶으며 나도 전쟁에 참여해 영웅이 되고 싶기까지 하였다. 특히 남자라면 상당 부분 동조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겪은' 전쟁은 그런 것이었다. 그래서 영화 <지옥의 묵시록>이 '반전(反戰)'이라는 메시지를 남기려고 할 때, 왜 그렇게 화끈한 전투 장면이 계속되지 않는지 불만만 늘어 놓곤 했다.
알 수 없는 그러나 매우 명백한 슬픔과 공존하다
그렇게 '전쟁광'적인 측면에 매몰되어 가고 있을 때 <전쟁의 슬픔>(아시아)이라는 작품을 접하였다. 전쟁에 당연히 슬픔이 동반된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렇고 그런 반전 소설이겠거니 생각하며, 정치적이며 화끈하지 않은 원론적인 이야기를 예상했다. 다만 작가 바오 닌이 실제로 베트남 전쟁에 출전한 경력이 있으며, 자그마치 6년 동안 최전선에서 싸웠다는 사실이 전투 장면들의 실제적인 묘사를 기대하게 했을 뿐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예상했던 것과 소설 간의 괴리는 너무나 컸다. 소설 내적(내용)으로, 기대했던 실제적인 묘사는 기대 이상이었고 원론적인 이야기가 아닌 실제적인 이야기로 반전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예상 외로 이 반전으로의 주장을 함에 있어 '사랑'이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컸다. 지독한 전쟁 뿐만 아니라 지독한 사랑도 이 소설에서의 슬픔에 크게 작용했다.
한편 소설 외적(기법)으로, 문체에 슬픔이 뚝뚝 묻어 났다. 경험해본 자만이 쓸 수 있는 지독한 슬픔의 글이었다. 또한 그 슬픔을 가장 잘 표현해 내는 구성이었다. 시간과 공간을 어지럽게 오가는 구성은 그 자체로 주인공이 느끼는 슬픔이 독자에게도 느끼게끔 하였다. 책을 읽는 내내 알 수 없는 그러나 매우 명백하게 느낄 수 있는 슬픔과 공존했다.
"그를 괴롭히며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주요한 상념들이 희미해질 만큼 모든 생각이 뒤죽박죽되고, 어떤 맥락도 없이, 모든 감정과 사고가 뒤섞이는 듯했다. 물론 그는 알고 있었다. 끊긴 생각, 두서없는 이야기, 보이는 대로 생각하는 것이 바로 상상력의 한계에 고통스러워하는 영혼을 해방시켜 주는 것들이었다." (본문 중에서)
결국 아무것도 잊을 수 없다
주인공 끼엔은 17살의 어린 나이에 평생을 함께할 여인과 불미스러운 일로 헤어지며 입대한다. 그렇게 전쟁의 시작에서 끝까지 함께 하며 10년을 전쟁터에서 보낸다.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과 지독한 운으로 생존한 그는 10년 전 헤어진 연인 프엉을 찾아간다. 하지만 그도 알고 있었듯, 이미 그녀와의 관계는 파탄이 난 상태였다.
이번에는 거꾸로 프엉이 끼엔을 떠나게 된다. 이후 끼엔은 그 슬픔과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하루하루를 술로 지탱하며 소설을 씀으로써 소용돌이치는 감정을 순화 시킨다. 그가 쓰는 소설은 그가 겪었던 전쟁의 슬픔, 시대의 슬픔, 사랑의 슬픔에 대한 이야기들이다. 그의 마음은 이미 갈가리 찢겨 봉합할 수 없을 지경이 되었지만, 과거의 그 슬픔들을 다 끄집어 내서 다시금 자신의 마음을 찢지 않고서는 버틸 수 없는 것이다.
그는 운명이, 시대가, 국가가, 사회가, 그리고 이 전쟁이, 이 사랑이 슬픔의 원인이라 말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그리고 결국 그는 어쩌면 영원히 고통스러울 것이었다. 늘 어둡고, 고통스러운 가운데 악몽과 현실 사이에서 남은 인생을 높고 가파른 절벽 위를 오가듯 살아야 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는 10년 전에도, 지금도, 10년 후에도, 20년 후에도 계속 살아가야 할 것이었다.
"결국 아무것도 잊을 수 없다. 슬픔과 고통은 어린 시절부터 시작되어 전쟁을 거치고 지금까지 이어지면서 하나로 커다랗게 뭉쳐진 응어리가 되었기 때문이다. 사람이 고통을 받아들여야 세상에 태어날 수 있듯이, 또한 삶을 다하는 날까지 고통 때문에 살아야 하며 행복을 추구하고 사랑을 하고 예술을 하고 즐기고 견뎌야 하리라." (본문 중에서)
전쟁의 슬픔에 사랑을 녹여낸 탁월한 선택
이 소설의 미덕은 이렇게 모든 슬픔을 있는 그대로 끄집어냄으로써, 어떠한 과장도 하지 않는 다는 점이다. 특히 전쟁에 관해서는 개인이 간직해 왔던, 결코 꺼낼 수 없었던 치욕적인 부분을 내보이고 이는 사회도 마찬가지이다. 예를 들어, 자신이 살기 위해 눈 앞에서 동료가 처참하게 강간을 당하고 결국 죽임을 당하는 장면을 숨죽인 채 지켜보는 장면. 그리고 전쟁에서의 승리로 인해 영웅적일 것만 같은 참전 용사들의 추잡하기 그지 없는 모습(술로 삶을 지탱하고, 죽은 자들이 나오는 악몽을 꾸며, 망가진 몸과 마음으로 망가진 인생을 살아가는)까지.
한편 망가진 인생을 표현함에 있어 망가진(정연하지 못한) 구성은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표현 방식이지만, 이런 뒤죽박죽의 느낌은 자칫 작가의 능력을 잘못 파악하게 만들 수 있다. 오롯이 서사를 따라 진행되었다면, 이 슬픔을 더욱더 깊이 받아들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사랑과 우정, 그리고 전쟁의 슬픔, 전후의 아픔까지 그린 전쟁 대서사시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통속적인 느낌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우를 범했을 지도 모르기에 단언할 수는 없을 듯하다.
마지막 부분의 반전(反轉)에 이르러서야 절실히 깨닫고 눈물 흘리지 않을 수 없게 되었을 때 비로소 깨닫지만, 전쟁의 슬픔에 사랑의 절절함을 녹여 낸 건 정말 탁월한 선택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렇게 함으로써 전쟁의 슬픔이 단순히 전쟁에 따른 슬픔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생의 슬픔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실로 슬픔, 고통, 아픔의 3중주를 가뿐히 넘어서는 사랑의 힘이다. 하지만 전쟁의 포화는 사랑마저 휩쓸어 버렸다. 사랑은 전쟁이 잉태한 부정을 이길 수 있었지만, 전쟁 자체를 이길 수 없었다.
"정의가 승리했고, 인간애가 승리했다. 그러나 악과 죽음과 비인간적인 폭력도 승리했다. 들여다보고 성찰해보면 사실이 그렇다. 손실된 것, 잃은 것은 보상할 수 있고, 상처는 아물고, 고통은 누그러든다. 그러나 전쟁에 대한 슬픔은 나날이 깊어지고, 절대로 나아지지 않는다." (본문 중에서)
'지나간 책 다시읽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평행과 역설> 꽉 막힌 분들께 한 부 권해드립니다 (2) | 2014.04.16 |
---|---|
<경성천도> 일본의 수도가 서울에 들어선다면? (3) | 2014.04.09 |
<남왜공정> 일본과의 전쟁은 현재진행형, 2045년에 재침한다? (3) | 2014.03.26 |
<인형의 집> 여성의 날, 이 책 꼭 읽어보세요 (6) | 2014.03.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