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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간 책 다시읽기

<인생>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이 책을 바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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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간 책 다시읽기] 위화의 <인생>


위화의 <인생> ⓒ푸른숲

우리나라와 중국의 근현대사 사이에는 은근히 공명하는 부분들이 많다. 특히나 일반 민초들이 겪어온 삶은 그 사건의 내막이나 미세한 부분이 다를 뿐, 느꼈던 바는 거의 같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외세의 침략과 내부의 압력, 시달림과 저항과 부역과 버티기, 배고픔과 슬픔과 분노와 포기, 계속되는 정국과 정책의 변화에 의한 혼란 등을 공통분모로 두고 살아왔다고 할 수 있겠다. 그들의 모습에서 우리를 보고, 우리의 모습에서 그들을 볼 수 있다. 일반 민초들의 삶은 그래서 인류적 보편성을 띠고 있나 보다.


'운명의 소용돌이'라는 말이 있다. 이는 동아시아 근현대사를 표현하는 가장 정확한 말일 것이다. 모든 것을 지배하는 초인간적인 힘이라기 보다는, 생사나 존망에 관한 처지라고 해석하는 게 맞지 않나 싶다. 즉, 한 치 앞도 분간할 수 없는 처지에서 살아온 것이다. 그럴 때는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 것일까. 영웅과도 같은 기개로 운명을 치열하게 헤치고 돌파해야 하는 것인가, 조용히 내 앞가림이나 하며 때론 엎드리고 때론 숨으며 살아가야 하는 것인가. 


하지만 격하게 소용돌이 치는 운명 앞에 놓였을 때 해야 하는 행동이 꼭 이 두 가지만 있는 건 아니다. 운명에 대항하거나 운명에 굽실대지 않고, 운명을 인정하며 같이 살아가는 방법도 있지 않겠는가. 그 안에는 다양한 이야기들과 희노애락이 진하게 겹쳐 있을 것이다. 분노와 초조함과 혼란만 있지도 않을 것이고, 기쁨과 환희와 즐거움만 있지도 않을 것이며, 슬픔과 무력감과 비참함만 있지도 않을 것이다. 그야말로 인생에 있어 가질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모든 것들이 거기에 있다. 


운명을 인정하며 살아가다


중국의 소설가 위화를 세계적인 작가의 반열에 오르게 해준 소설 <인생>(푸른숲)은 바로 이런 삶과 인생을 그리고 있다. 주인공은 운명을 인정하며 같이 살아온 노인이다. 그는 공교롭게도 중국 근현대사의 굵직한 사건들을 모두 다 겪어온 인물이다. 사실 중국은 물론 우리나라에서도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인물인 것이다. 운명의 소용돌이의 한 가운데를 헤쳐나오면서, 딱히 어떤 행동을 하지도 그렇다고 어딘가에 바짝 엎드려 숨지도 않았던. 


푸구이라는 이름의 노인은 열심히 일하는 도중 쉬는 시간에 작중의 '나'에게 옛 이야기를 해준다. 신세타령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야기들이 '나'에게는 굉장히 유용하다. 4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본다. 


어찌 하든 살아가고야 마는 모습


푸구이는 지체 높은 부잣집 아들이었지만, 그에 걸맞는 행동거지를 하지 않았다. 매일같이 여자와 도박을 일삼았다. 그의 아버지 또한 소싯적에 그러하였기에, 시간이 지나 철이 들면 돌아올 것이었다. 하지만 도박이 그의 집안을 파멸로 이끌었다. 도박으로 모든 것을 잃은 푸구이의 집안. 그들은 허름한 초가집으로 쫓겨나고, 얼마 안가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며, 부인 자전은 장인 어른이 강제로 데리고 가고 말았다. 푸구이에게 남은 건 어머니와 딸 펑샤뿐이었다. 그래도 덕분에 철이 들었다. 


분량에 상관없이 이 소설을 둘로 나누라면, 바로 푸구이가 지체 높은 부잣집에서 가난한 농민이 되는 장면을 기준으로 하겠다. 아무도 못말리던 망나니에서 착실한 농민으로의 재탄생 과정은, 비록 큰 희생을 치렀지만 성공적이다. 살아간다는 게 무엇인지 그 대단원의 시작을 알리고 있다. 이 과정에서 결국 성공하고야 마는 즉, 어찌 하든 살아가고야 마는 주인공의 모습에서 위로를 받고 희열까지 느끼게 된다. 나의 부모님, 조부모님들께서 그렇게 사셨으니까. 


억울하고 극적인 가족과의 생이별


그렇게 열심히 살아가는 푸구이 앞에 아내 자전과 막내 아들 유칭이 돌아온다. 기쁨이 용솟음친다. 하지만 그 기쁨도 잠시, 푸구이는 국공내전이라는 운명의 소용돌이에 휩싸인다. 영문도 모른 채 그리고 가족들에게 알리지도 못한 채, 푸구이는 국민군 산하로 전쟁에 참가한다. 죽음의 문턱을 넘기고 공산군에 의해 풀려난 푸구이는 가족들 품에 돌아온다. 하지만 어머니는 돌아가셨다.


이런 생이별 장면이야말로 우리네 근현대사에서 부지기수로 봐왔다. 한국전쟁 당시 뿐만 아니라, 군부독재 아래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영문도 모른 채 가족과 생이별을 하게 되니 말이다. 민초들의 삶에서 이보다 더 억울하고 극적인 장면은 없을 것이다. 나라를 위하려는 행동이 결국 국민을 해하게 되는 행동으로 변하는 아이러니. 덕분에 더 애뜻한 관계가 되었다고 하면 위로가 될까?


운명이라고 받아들이기엔 너무나도 힘든 죽음들


푸구이 가족은 계속해서 운명의 소용돌이에 휩싸인다. 1950년대와 60년대를 거치며, 대약진 운동과 문화 대혁명과 직간접적으로 대면한다. 그 사이 막내 아들 유칭과 딸 펑샤가 어이없게 죽어간다. 차라리 중국 전토를 뒤흔든 사건에 휘말려 죽었으면 그나마도 덜 억울하지 않을까. 이 또한 운명이라며 받아들이기가 너무 힘들다. 이어 아내 자전도 죽고 만다. 이제 남은 건 푸구이와 사위 얼시 그리고 외손자 쿠건... 그들의 운명 또한 다를 바 없다. 그래도 푸구이는 이 모든 게 운명이려니 하고 무던히 살아간다. 현명한 처사인지 냉혹한 처사인지는 아무도 판단할 수 없다. 그는 사회가, 국가가 떠맡긴 짐을 결코 내려놓지 않았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재, 21세기에 들어선지도 상당한 시간이 흘렀지만, 과연 푸구이는 짐을 내려놓을 수 있을까? 우리네 민초들의 삶은 반 세기 전과 달라졌을까? 달라진 건 분명하다. 대부분이 타의에 의한 배곪음을 느껴본 적이 없고, 전쟁 등에 의한 파리 목숨의 경험도 거의 없다. 하지만 그때보다 훨씬 더 불안에 떨고 있으며, 훨씬 더 불만족스러운 느낌으로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빈부격차는 더더욱 벌어졌으며, 인지 하기 싫은 불평등에서 오는 상대적 박탈감은 비교할 수 없다.


하지만 이 소설을 보고 있으려니, 주인공 푸구이의 삶의 굴곡을 고스란히 듣고 있으려니, 세상에 대한 불평·불만·불안이 스르르 사라지는 느낌이다. 믿기지 않을 정도로 힘겨웠을 그의 삶이 위로를 주기 때문이다. 그 삶을 두 발로 굳건히 살아 왔다는 것이 고맙기 때문이다. 반세기의 역사의 보편적인 면을 그가 대표해주고 있기에 자랑스럽기 때문이다. 그의 삶을 힘겹게 살아왔던,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싶다. 


"내 한평생을 돌이켜보면 역시나 순식간에 지나온 것 같아. 정말 평범하게 살아왔지. 아버지는 내가 가문을 빛내기를 바라셨지만, 당신은 사람을 잘못 보신 게야. 나는 말일세, 바로 이런 운명이었던 거라네. 젊었을 때는 조상님이 물려준 재산으로 거드름을 피우며 살았고, 그 뒤로는 점점 볼품없어졌지. 나는 그런 삶이 오히려 괜찮았다고 생각하네. 사람은 그저 평범하게 사는 게 좋은 거야."

(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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