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리뷰] <복수의 립스틱>
미국 뉴욕, 말을 못하는 데니는 패션 스튜디오에서 일하는 젊은 재단사다. 그녀는 허름한 아파트에서 기거하는데, 어느 날 대낮에 복면 쓴 남자에게 강간을 당한다. 그는 총으로 위협하며 다시 찾아올 거라 했다. 몸을 겨우 추스르고 집에 왔는데, 권총 든 남자가 돈을 내놓으라고 위협한다. 데니가 말을 않자 남자는 그녀를 강간한다.
데니는 남자가 절정에 이를 때를 기다려 다리미로 쳐 죽이고 욕조에 놔둔 채 출근한다. 아무렇지도 않게 행동하려 하지만 그럴 수가 없다. 그녀는 환각이 보이기 시작한다. 집으로 돌아가선 죽은 남자를 토막내 보관했다가 따로 버리기 시작한다. 이후 각성한 데니는 죽은 남자의 45구경 권총을 가지고 길을 나선다.
그녀가 보기에 악당 같은 남자들을 하나둘 쏴죽인다. 처음에는 얼떨결에 죽였고 다음에는 생각을 하며 죽였지만 점점 더 무자비해졌다. TV 뉴스와 신문에서 슬슬 다중 살인 얘기가 나오고 있었다. 그녀는 점점 살인의 늪으로 빠져 들고 있었는데… 이 비극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
지금과 전혀 딴판으로 1970~80년대 뉴욕은 자타공인 무법지대였다. 본래 마피아의 본거지이기도 했지만 경제 불황이 겹치며 법죄율이 치솟았다. 강도, 강간, 마약, 부패 등으로 최악의 치안을 자랑했다. 1981년에 개봉한 <복수의 립스틱>은 정확히 그때 그 시절의 뉴욕을 배경으로 한 범죄 액션 스릴러다.
이 작품을 앞뒤로 아벨 페라라 감독은 뉴욕을 배경으로 한 엽기적 범죄 스릴러를 내놓았는데, 시대적 상황에 편승 또는 시대적 상황을 표현한 결과물이겠다. 이 작품은 연속된 무자비한 성폭행으로 자기 존재를 잃어간 한 여자의 무자비한 복수극을 그렸다. 그녀는 자신뿐만 아니라 여느 여자에게 집적거리거나 막 대하는 모든 남자를 적으로 봤고, 처단해야 할 대상으로 봤다.
말을 못하는 그녀이기에 그들에게 말을 하지도 않고 그들의 말을 들으려 하지도 않는다. 그저 45구경 권총을 들어 죽여 버리는 것이다. 영제가 <Ms. 45>인 이유가 여기에 있을 텐데, 감독은 이 작품을 처절한 복수극이라기보다 통쾌한 액션 스릴러로 포장하려 한 것 같다. 하지만 그녀가 총을 쏴서 남자들을 죽일수록 애절하다.
그녀에겐 애초에 잘못이 없었다. 대낮에 길을 가다가 성폭행을 당했고, 안정을 되찾아야 할 집에서 또다시 성폭행을 당했다. 그러다가 정당방위로 사람을 죽였다. 경찰에 신고하는 게 맞았겠지만, 누군든 그때 제정신을 차리고 맞는 생각으로 행동에 옮길 수 있었겠는가. 그녀의 잘못이 아니라, 그런 시대를 만든 권력자들과 그런 짓을 저지른 악마들의 잘못이다.
45년 만에 국내 최초 개봉에 성공한 <복수의 립스틱>은 ‘남성에게 유린당한 여성의 복수극‘의 원조 격이다. 이 작품 이후 할리우드에선 하나의 장르로 포섭될 만큼 많이 또 자주 나왔는데, <프라미싱 영 우먼>이 최신 대표작일 것이다. 참혹한 성범죄의 후과를 톡톡히 치르는, 그래서 통쾌하지만 슬픈 이야기들.
다만 이 작품에서 논란의 여지가 있을 만한 지점이 있다면, 데니가 죽이는 남자들이 과연 ‘죽을 만한 짓을 했느냐’일 것이다. 그 지점은 영화적으로 치환할 수 있는 바, 그들이 그런 짓을 서슴 없이 해댈 수 있게 만든 세상을 향해 총을 쐈다고 하는 편이 맞겠다. 그녀는 말을 못한 채 환각 속으로 빠져든 만큼, 이후의 일들을 곧이곧대로 바라볼 순 없는 노릇이다.
<복수의 립스틱>을 재밌게 봤다고 할 순 없겠다. 처참한 비극, 뒤로 갈 수 없이 앞으로만 가야 하나 더 큰 비극으로밖에 갈 수 없는 상황을 보여 주고 있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그녀의 총부림은 통쾌하기 이를 데 없으니 그 쾌감이 주는 재미가 없다고 할 수도 없다. B급 인디 느낌이 물씬 풍기는 만큼 더더욱.
이런저런 이야기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시대를 한참 앞서간 선도적인 복수극임에 분명하다. 지금 이런 영화가 나와도 파격적이라며 논란의 중심에 설 것이다. 지금보다 훨씬 더 보수적일 테고 또 성범죄에 둔감하며 성감수성이 하찮은 수준이었을 1980년대 초반을 생각하면, 대단하다 못해 위대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 <복수의 립스틱>은 위대한 영화다.
'신작 열전 > 신작 영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일본 사회파 걸작, ‘왜’에 집착한 추리의 정수 (0) | 2026.05.12 |
|---|---|
| 국민 코미디 배우의 고민, 웃음 뒤에 숨은 진짜 얼굴 (1) | 2026.04.24 |
| 리부트 찍으러 갔다가 생존 게임… 이 영화 뭐지? (1) | 2026.04.17 |
| 완벽한 도둑의 마지막 한탕, 그러나 어딘가 어긋났다 (2) | 2026.04.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