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리뷰] <모래그릇>

1971년 6월 24일 이른 아침의 일본 도쿄 국철 카마타 조차장 구내, 마른 체형의 60세 전후 신원 불명 남자가 전두부 두개골 함몰의 치명상을 입고 살해당한 채 발견된다. 경찰은 즉각 수사본부를 설치하고 현장에서 발견된 술집 성냥갑을 단서로 수사를 시작한다. 그렇게 알아낸 '카메다'라는 단어, 피해자가 했다는 말이다.
이마니시는 피해자의 신원을 쫓는 한편 '카메다'의 정체를 찾아 동분서주한다. 그야말로 일본 열도 전역을 둬지는데, 허탕 치기 일쑤다. 아주 조금씩 원하는 바에 조금씩 다가갈 뿐이다. 와중에 일본을 대표할 만한 작곡가 에이료가 눈에 밟힌다. 그는 자신을 후원하는 권력가의 딸과 결혼하기로 내정되어 있지만, 술집 여인과 바람을 피워 임신시키기까지 했다.
이마미시의 노력과는 별개로 수사본부는 해체되고 마는데, 명석하고 끈질긴 후배의 노력에 힘입어 다시 수사가 시작된다. 에이료는 협주곡 <숙명>을 작곡해 만방에 자신의 능력과 성공을 알리지만, 경찰의 수사망은 다름 아닌 그로 향하고 있었다. 과연 그는 범인일까? 그가 범인이라면 왜 그런 짓을 저질렀는가?
범인이 아닌 ‘이유’를 향한 수사
일본 사회파 추리 소설의 태두 마츠모토 세이초는 1960년대를 전후로 활발하게 활동했는데, 작품들 중 10편 가까이를 영화화했고 그중 <모래그릇>이 일본 영화사에 전무후무한 걸작으로 남아 있다. 오랫동안 우리나라에서 정식 개봉하지 않았다가 52년 만에 개봉했다. 하지만 별다른 화제를 끌지 못하고 있다.
영화는 보통의 수사물로 시작한다. 단서가 없다시피 한 살인 사건에 경찰이 특유의 집요함과 세심함을 발휘해 진상에 조금씩 다가가는 것이다. 하지만 중반까지 범인을 특정하긴커녕 피해자가 분명 원한을 살 만한 사람이어야 하는데 너무나도 정의롭고 정이 깊은 사람이라는 것만 확인한다.
그렇게 2시 20여 분의 러닝타임에서 2시간 가까이 지난 시점부터 더 이상 사건은 중요하지 않게 된다. 범인도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그가 도대체 '왜' 그에게 그런 범죄를 저질렀는지가 중요해진다. 그로선 꼭 그래야만 했던 이유가 있는 것인데, 그만의 개인적인 사연이나 이유에서 그치지 않는다.
이 지점이 마츠모토 세이초의 위대한 점이자 이 영화 <모래그릇>의 위대한 점이다. 범인이 '누구'인지는 더 이상 아니, 애초부터 중요하지 않았으니 말인데 에이료가 범인이다. 그는 누구나 알 만한 작곡가로 성공한 삶을 살고 있으나, 과거 한센병 환자의 아들로 일본 전역을 떠돌며 극도의 차별을 받았다. 그는 그 시절을 철저히 지우고 이 자리에 서 있는 것이었다.
무너지는 모래성, 지워지지 않는 과거
제목 '모래그릇'은 영제 'the catle of sand'로 '모래성'을 의미하는 바, 겉으로는 엄연히 성의 형태를 띠고 있지만 아주 작은 충격으로도 완전히 무너져 내릴 수 있다. 극 중 에이료도 다르지 않다. 겉으로는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성공의 길에 올라탄 것 같지만, 실상은 숙명을 뒤로한 채 새롭게 태어나려 발버둥 칠 뿐이다. 매우 위태로운 상태인 것이다.
피해자는 유일하게 그와 아버지의 과거를 아는 자였다. 과거를 완전히 지웠다고 생각한 그로선 피해자를 세상에서 지워 버려야 했다. 단서 하나 남지 않게, 살인 동기를 헷갈리게 은폐한 건 부수적이다. 그렇게 에이료는 과거로부터 도망치는 피해자에서 과거를 지워 버리는 가해자가 되었다.
사회적으로 넓혀 볼 때 이 이야기는 제2차 세계대전 후 일본이 경제적으로는 한없이 치고 올라갔지만 정신적으로는 무르익지 못했으며 무엇보다 역사적으로 제대로 된 청산 작업 없이 달려와 버렸다는 점과 겹친다. 에이료가 과거를 부정하고 삭제해 버리려는 것처럼 일본도 과거를 부정하고 삭제하며 때론 조작하려 했다. 그런가 하면 과거 일본 사회가 행한 지난한 차별의 역사가 에이료의 과거와 맞닿아 있기도 하다.
하지만 에이료, 아니 누구도 과거를 완전히 지울 수 없고 부정할 수도 없으며 두 발을 아무것도 지지하지 않는데 바로 설 수 없다. 과거를 제대로 들여다보고 청산한 후에야 현재를 살고 미래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에이료의 사연이 안타까우나 그에게도 기회는 있었고 그는 그 기회를 잡을 능력도 있었다. 정녕 안타까운 건 바로 그 지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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