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사이드웨이>
영화 <사이드웨이> ⓒ폭스서치라이트
살다보면 숱한 벽에 부딪혀 좌절하고 절망하고 아파하곤 한다. 그럴 때면 주위에서 여행을 가보라고 한다. 쳇바퀴 돌 듯 계속되는 일상에서 벗어나 자신에게 일종의 일탈을 선물해보라는 조언일 것이다. 하지만 결코 쉽지 않다. 일탈 뒤에 밀려올 또 다시 시작되는 일상에의 압박, 여행이 아니라 도망을 치고 있는 것 같다는 죄책감 등.
다른 이유가 필요하다. 내가 아닌 다른 누구를 위로하기 위한 여행, 내가 아닌 우리의 미래를 위한 여행 등. 이런 여행이라면 슬쩍 끼어서 나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 듯하다. 영화 <사이드웨이>의 주인공 마일즈(폴 지아마티 분)는 20년 친구인 잭(토마스 헤이든 처치)의 총각파티를 이유로 일주일간의 여행을 떠난다. 사실 그도 많이 지쳐있던 상태. 친구를 빌미로 삼아, 친구를 여행의 주인공이라고 치켜세우며 자신의 여행을 떠나게 된 것이다.
달콤 쌉싸름한 와인과 함께 하는 여행
특별할 것 없는 외모, 보통보다 작은 것 같은 키, 조금씩 벗겨지기 시작하는 머리, 무료하기 짝이 없는 직업이라고 생각하는 영어교사를 가지고 있는 남자 마일즈이다. 그에겐 누구보다 자신 있는 취미인 ‘와인’과 누구한테고 자랑하고 싶지만 이뤄지지 않는 특기인 ‘소설’이 있다. 왠지 취미와 특기가 바뀐 것 같다. 그의 인생도 이번 여행에서 바뀔 수 있을까? 친구인 잭, 그리고 와인과 함께 하는 이 여행에서.
반면 잭은 내주 토요일에 결혼식을 앞두고 일요일에 마일즈와 함께 와인여행을 표방한 총각파티 여행을 떠난다. 그에게 이번 여행은 총각의 마지막을 불사르는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여기에서 총각파티라하면 저질 코미디를 표방한 영화 <행오버> 시리즈를 생각하면 되겠다. 한물 간 배우이자 지금은 광고로 먹고 사는 잭. 그는 스스로가 말하길 “본능 없으면 시체”인 사람이다.
영화 <사이드웨이>. 마일즈와 잭, 잭의 와인여행을 표방한 총각파티 여행을 떠나다. ⓒ폭스서치라이트
여행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이들은 각자 여자를 만나게 된다. 마일즈는 전부터 알고 지내던 웨이트리스 마야(버지니아 매드센 분). 잭은 와인 시음실에서 일하는 자유분방한 스테파니(산드라 오 분). 이들은 와인과 함께 둘이 또는 넷이 어울려 좋은 시간을 보낸다. 잭과 스테파니가 몸으로 대화하는 사이, 마일즈는 마야와 와인으로 대화한다. 이들의 대화가 일품이다. 마일즈와 마야는 각자 와인을 좋아하는 이유를 말해준다. 자칫 진부할지 모르는 이들의 대화는 이 영화의 풍미를 한껏 높여주기에 충분하다. 더불어 와인도 마시고 싶어지게 만들고.
“마일즈 : (피노는) 재배가 힘든 품종이잖아요. 껍질은 얇지만 성장이 빠르고, 아무 환경에서나 못 자라서 끊임없이 보살펴줘야 하고, 오염되지 않은 청정 지역에서만 잘 자라고, 인내심 없인 재배가 불가능한 품종이죠. 시간과 공을 들여서 돌봐줘야만 포도알이 굵어지고 그렇게 잘 영글면 그 맛과 오묘한 향이 태고적 아름다움을 느끼게 해줘요.”
“마야 : 전 와인의 삶을 찬미해요. 한 생명체가 포도밭에서 익어가는 모습. 비가 내리고 따사한 햇살이 내려쬐고. 와인이 만들어지고 숙성되는 오랜 세월동안 죽어간 사람들. 또 와인은 변화무쌍하죠. 따는 시기에 따라 그 맛이 제각각이잖아요. 생명력을 가졌기에 끊임없이 변화를 거듭하죠. 제 맛을 한껏 뽐내곤 삶을 마감하죠. 최고의 맛을 선사한 후에.”
별다를 것 없는 우리네 인생
누구나 특별한 인생을 꿈꾼다. 하지만 특별할 것 같은 인생의 내면을 들여다봐도 보통의 인생의 내면을 들여다봐도, 비슷비슷하다. 딱히 별다를 것 없는 인생들이다. 여행도 마찬가지이다. 여행이라는 것 자체가 주는 특별함에 매료되어 떠나지만 별다를 것이 없다. 어딜 가도 사는 게 비슷비슷하니까.
마일즈와 잭의 여행은 어땠을까? 그들은 여행에서 특별한 인연들을 만나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웃음이 절로 나온다. 그러다가 문뜩 일상이 생각난다. 일상이 놔주지 않는다. 마일즈에게는 이혼한 전 부인에 대한 생각 그리고 자신의 소설, 잭에게는 결혼할 아내에게서 오는 연락이 그렇다. 그런데 조금 이상하다. 잭에게 결혼할 아내는 일상과 현실 그 자체이다. 반면 마일즈에게 이혼한 전 부인이 일상이 될 수 있는가? 그에게 전 부인은 과거에 머물러 있는 일상이고, 현실은 보잘 것 없는 영어교사, 지향하는 미래는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쓴 소설이다.
영화 <사이드웨이>. 마일즈와 잭, 각각 특별한 인연들을 만나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폭스서치라이트
영화 제목인 ‘사이드웨이’는 샛길을 뜻한다. 살아가다보면 의도치 않게 샛길로 빠지기 일쑤인데, 마일즈와 잭도 그렇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인생이다. 별다를 것 없는 우리네 인생. 잘 살든 못 살든 상관없이 그들 나름의 추구하는 바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누구나 샛길로 빠지기 마련이다.
마일즈와 잭은 이미 샛길로 빠져본 경험이 있고, 여행을 하는 도중에도 수시로 샛길로 빠진다. 마일즈는 이혼을 했지만 전 부인을 잊지 못한다. 영어교사로의 삶에 만족하지 못하고 소설가로서의 길을 가려하지만 여의치 않다. 전 부인을 애써 잊고 새로운 여인을 맞이하려 하지만 이 또한 쉽지 않다. 잭은 한 때 잘 나가는 배우였지만, 지금은 별 볼일 없다. 결혼을 코앞에 두었지만, 다른 여자를 탐하며 결혼을 다시 생각해보려 한다. 하지만 그는 안다. 이 결혼을 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마찬가지로 마야 또한 이혼을 했고, 스테파니는 아이만 있고 남편은 없다.
여행의 전(前), 중(中), 후(後)
개인적인 경험으로 비춰볼 때, 여행은 가기 전의 설렘이 제일이고 현지에서의 여행은 제이이고 다녀온 뒤의 느낌이 제삼이다. 설렘이 점차 허무함으로 변해가기 때문일 것이다. 반면 이 영화에서는 여행 도중 느끼는 감정이 최악이다. 잭은 결혼할 것이라는 사실을 숨겼다가 들켜 봉변을 당하고, 마일즈는 같이 도매급으로 팔린다. 아울러 그의 소설 또한 사실상 폐기처분된다. 이때 그가 느끼는 감정은 인생은 살아가다 느낄 누군가의 감정과 똑같다.
“세상은 내 글에 관심이 없다고. 반평생 살고도 내세울 게 없어, 아무것도. 난 창문에 묻은 지문 신세야. 하수구를 통해 바다로 흘러갈 똥 묻은 휴지 신세라고.”
그렇지만 여행을 떠나기 전까지만 해도 그들은 분명 설렘으로 가득 차 들떠 있었다. 와인 마시고 골프치고 맛있는 음식 먹으면서 총각시절에 작별을 고하는 여행에 대한 기대. 이는 비단 여행뿐이 아니다. 앞으로 펼쳐질 인생에 대한 기대와 동일할 것이다. 그렇다고 미리 겁먹을 필요는 없다. 영화가 너무 사실적이라서, 연기가 너무 실제와 같아서, 스토리가 너무 나의 얘기와 같아서 꼭 똑같이 되리란 보장은 없으니까.
영화는 일상의 치부를 다루며 모든 인생이 다 비슷비슷하다고 말하는 듯하지만, 마지막에 ‘희망’이라는 동아줄을 내려준다. 그러며 알게 모르게 변한 자신을 발견한다. 결국 잭은 결혼에 성공했고 마일즈는 전 부인과의 대면에서 심정의 변화를 느껴 그동안 그토록 애지중지하던 1961년산 샤토 슈바 블랑을 하찮은 햄버거와 함께 마신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 보니 남겨진 메시지. 마야의 메시지이다. 마일즈에게는 무엇보다 절실한 희망의 메시지인 것이다.
“마일즈, 저 마야예요. 일찍 전화하고 싶었지만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어요. 또 다른 이유는 당신 소설을 다 읽느냐 구요. 단어 선택이 탁월하더군요. 출판 안 되면 어때요? 삶의 회한을 잘 그려냈어요. 이쪽으로 올거면 미리 연락 줘요. 포기하지 말고 글 계속 써요. 잘 지내요.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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