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리뷰] <쇼잉 업>
리지는 다가올 월요일 전시를 준비 중이다. 작품을 만드는 데 여념이 없다. 집중에 집중을 해도 모자랄 판이다. 그런데 보일러가 고장 나 온수가 나오지 않는다. 집주인이자 동료인 조에게 물어보니 그녀 자신도 곧 전시가 있다며 당장 해 줄 수 있는 게 없다고 한다. 당황스럽지만 리지로서도 어찌해 볼 방도가 없다.
아버지한테 전화해 전시에 오라고 한다. 그런데 아버지 집에 웬 중년 커플이 들어앉았다. 1년에 두어 번 해외를 꽤 오랫동안 돌아다닌단다. 그러는 와중에 아버지 집에 왔는데 언제 나갈지 알 수 없다. 리지는 그들이 꼴 보기 싫지만 아버지는 흥미로워하는 듯 별생각 없는 듯하다. 리지로선 전시가 코 앞인데 여간 신경 쓰이는 일이 아니다.
그런가 하면 리지가 다니는 예술 학교의 학과장인 어머니는 이혼한 전 남편을 증오할 뿐이라 정신에 문제가 있는 오빠는 리지 혼자 들여다보고 살펴야 한다. 반려묘도 키워야 하고 말이다. 그런 와중에 전시에 출품할 가장 중요한 작품이 가마에서 타 버려 검게 그을리고 마는데… 리지는 전시회를 제대로 치를 수 있을까?
켈리 라이카트와 미셸 윌리엄스 콤비
미국 독립영화계의 보물과도 같은 존재인 켈리 라이카트 감독은 데뷔한 지 30년이 되었지만 국내에는 2021년(북미 개봉 2019년)이 되어서야 <퍼스트 카우>로 처음 선보였다. 당시 봉준호 감독, 이동진 평론가 등이 극찬하며 소소한 반향을 일으켜 15,000여 명의 관객이 들어 흥행에 성공했다. 영화는 좋았으나 너무나도 정적이고 느리고 소소했기에 힘들어하는 관객이 적지 않았다.
그리고 꽤 시간이 흘러 <쇼잉 업>이라는 작품으로 돌아왔다. 북미에선 2022년에 개봉했으나 3년 만에 우리를 찾아왔으며, 그녀의 페르소나 미셸 윌리엄스가 이번에도 함께했다. 여느 예술가의 소소한 일상, 크고 작은 일상의 일들과 맞닥뜨린 예술가의 초상이 주된 내용이다. 자극적인 재미는 덜하겠으나 영화적 성취는 탁월할 거라 기대된다.
<퍼스트 카우> 이후 그녀의 전작들이 차례차례 정식으로 소개될 거라고 예상했으나 들어맞지 않았다. 아무래도 자극적인 이야기, 소소함 이면의 파괴적인 이야기 등에 길들여진 관객을 극장으로 오게끔 하기에 그녀가 전하는 이야기들이 터무니없이 소소하고 평범했을까 싶다. 외형상 그렇다, 하지만 들여다보면 풍부하고 입체적이다.
특별한 예술과 지난한 일상 사이
보통 사람들이 보기에 리지는 그 자체로 특별한 예술가다. 남들은 볼 수도 느낄 수도 없는 걸로 작품을 만든다. 그리고 그녀의 작품을 보러 오는 이들을 설득시킨다. 그런데 그녀의 삶은 지난하기 이를 데 없다. 특별하긴커녕 너무나도 평범해서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다. 예술 활동과 삶 사이의 갭이 너무 크다고 할까.
이를테면 그녀가 가족 사이, 친구 사이, 일터, 집에서 겪는 일들은 하나같이 너무 소소해서 자세하게 열거하기에도 저어 될 정도다. 전시를 앞두고 예술 활동에 전념에도 모자랄 판에 일상 속 하찮은 일들이 그녀를 괴롭히는 것이다. 그렇다고 무시할 수 없는 게, 삶은 순간순간 계속되기 때문이다. 전시는 그렇지 않지만.
결국 삶은 일상의 측면에서 누구나에게 공평하다. 제아무리 돈이 많거나 권력이 드높거나 일상과 가장 거리가 멀어 보이는 예술 활동을 한다 해도 그 자체로 지극히 평범하고 소소하고 하찮기까지 한 일상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 영화는 그 지점을 예리하게 포착했다. 삶이, 일상이 예술이 되는 순간까지 나아간다. 비로소 리지는 스스로를 구할 수 있다.
고장 난 보일러와 다친 비둘기
보일러가 고장 나 온수가 나오지 않는 건 큰일이라 하기에 애매하다. 고치면 되는 일이니까. 그런데 고치지 않으면 일상에 균열을 일으키기에 충분하다. 먹고 씻고 자는, 일상의 가장 기본적인 일에 차질이 있을 수 있으니까 말이다. 리지가 애를 먹고 있는 일인데 동료이자 친구이자 집주인 조가 고쳐 주지 않으니 난감할 뿐이다.
그런가 하면 조는 다친 비둘기를 데려와선 리지에게 돌봄을 맡긴다. 사실 그 비둘기는 야밤에 집에 들어왔다가 반려묘한테 당해 집 밖으로 쫓아 보는 터였다. 리지로선 비둘기가 너무 귀찮았지만 은근히 신경이 쓰인다. 세심하게 신경 쓰는데 오빠 숀이 날려 보낸다. 다쳐서 날 수 없을 것 같았건만 훌훌 날아가 버린 것이다.
고장 난 보일러와 다친 비둘기, 리지의 일상에 균열을 일으키는 것들인데 너무 손을 놓고 있거나 너무 많은 관심을 두는 건 일상을 영위하는 데 맞지 않은 것 같다. 일상이란 동일한 관심이 지속될 때 탈 없이 이어나갈 수 있는 것이리라. 말이 쉽지 결코 쉽지 않다는 걸 아는 바 일상의 위대함이 드러나는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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