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리뷰] <페이퍼맨>
아시안게임 금메달리스트 출신의 인목, 어느 날 집에서 쫓겨난다. 하여 절에 들어가 스님이 되려는데 쉽지 않다. 당장 돈도 많지 않아 모텔은커녕 찜질방에서 지내기도 어렵다. 지하철을 둘러보다가 굴다리 밑을 발견한다. 사람들 눈도 웬만큼 피하고 잠을 청하기에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냅다 잠부터 자고 있으니 말소리가 들린다.
중년 노숙자에게 꽤나 어려운 책을 읽어주는 청년 기동, 발달장애인처럼 보이는 그는 초코파이 하나면 뭐든 다 해준다. 인목은 폐지를 주우러 다니는 중년 노숙자, 즉 할배(라고 인목이 부르는)를 참고 삼아 폐지를 주우러 나서지만 노인들의 저항에 여의치 않다. 전략적으로, 시간의 사각지대를 이용해 접근하는 인목은 오래지 않아 인근 폐지를 싹쓸이하다시피 한다.
기동을 초코파이 몇 개로 부려 먹고 할배가 삶을 영위할 유일한 수익원을 차단하다시피 한다. 한편 인목은 우연히 옛 후배를 만나는데, 그는 돈이 절실히 필요한 젊은이들을 착취해 돈을 벌고 있었다. 그에게 착취당하는 이들 중 하나인 서연은 인목이 기거하는 굴다리 밑에서 함께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오래지 않아 인목이 탄탄하게 만들어 가고 있는 폐지의 성이 무너질 위기에 처하는데…
정감과 무자비가 교차하는 굴다리 밑 생태계
영화 <페이퍼맨>은 2022년에 개최된 제27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다음 소희> <너와 나> <괴인> 등과 함께 화제작으로 이름을 올린 바 있는데, 일찍이 극장 개봉으로 그 화제성을 이어간 다른 영화들의 전철을 따르지 못했다. 부국제의 화제성을 2년 뒤에 이을 수 있었다. 다른 영화들보다 훨씬 더 작은 영화였지 않나 싶다. 하지만 작품성과 재미 등은 뒤지지 않는다.
과거의 영광을 뒤로할 생각이 없는 인목이 하루아침에 길거리로 내몰렸지만 이내 기지를 발휘해 굴다리 밑에 자신만의 소왕국을 세운다. 비록 폐지로 만든 것이지만 마치 집처럼 생긴 거대한 박스 집이 그 상징이다. 하지만 젊은 기동을 착취하고 할배가 살아갈 기반을 없애다시피 했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위기가 덮쳐온다.
대한민국에서 집도 절도 없는 이들이 남녀노소 부지기수다. 그들이 몸을 맡기는 곳은 비슷한데 그나마 눈비, 바람을 피하고 사람들 눈에서 빗겨 난 곳이다. 그런데 그런 곳에서도 서열이 나뉘고 계급이 정해진다. 누가 더 눈치 빠르게 악착같이 악랄하게 구는가에 따라 나뉘는 것이다. 소소하게 각자 자기 것만 챙길 것 같은데 그렇지 않나 보다.
영화가 보여주는 굴다리 밑의 생태계, 나아가 폐지 생태계는 정감이 넘치기도 하지만 무자비하기도 하다. 지극히 보통의 또는 저 높은 곳의 삶과 다르지 않아 보인다. 그런가 하면 누가 악이고 누가 선인지 분간하기 어렵다. 선이라고 하기엔 괘씸하고 악이라고 하기엔 가엽다. 어떻게 될까 지켜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노인, 청년, 낀 세대까지 처참한 한국 사회
할배를 위시로 보여주는 고령화 사회의 비애가 씁쓸하다. 정녕 수많은 노인이 도시에서 자신의 손으로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을 찾아 폐지를 주우러 다니고 있다. 엄연한 돈벌이이기에 그들을 동정해선 안 될 것이고 동정할 필요도 없지만 애잔한 마음이 따라오는 건 어쩔 수 없나 보다. 누군가가 버린 걸 주워 팔아 돈을 벌고 있으니 말이다.
한편 기동과 서연을 중심으로 보여주는 청년 세대의 현 상태가 심각해 보인다. 둘 다 보란 듯이 행해지는 착취의 대상이다. 그들은 가진 것도 없고 할 줄 아는 것도 없다고 생각하니 어른들이 부려먹기 딱 좋은 먹잇감으로 전락했다. 최소한의 것만 주면서 젊음이 가진 최대한의 것을 내놓으라 하니 말이다. 그거라도 거절했다간 먹고살 갈이 막막하다.
그런가 하면 인목을 위시로 보여주는 X세대, 즉 낀 세대의 애매한 상황에 연민이 간다. 사회 전체가 노인 시대와 청년 세대에 관심을 갖는 사이 그 사이에 낀 세대는 이전보다 빠르게 은퇴를 당하고 더 이상 자신의 쓰임새를 입증하기 힘들다. 경제적, 육체적, 정신적으로 무너질 수밖에 없다. 이른바 리즈 시절을 추억하는 데 열을 올리는 이유다.
명명백백 블랙코미디 장르로 시종일관 낄낄거리지 않을 수 없는데, 하나하나 짚어보면 처참하게 흔들리고 무너져 내리는 한국 사회가 보여 웃을 수 없을 때가 온다. 길지 않은 러닝타임으로 많은 것을 어긋남 없이 엮어내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다. 한국 영화의 미래가 밝다는 걸 다시금 깨닫는데, 한국 사회의 미래가 밝다는 걸 깨닫는 날이 올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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