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신작 열전/신작 영화

그땐 알지 못해 너무 늦어 버린 것들을 반추하며...

반응형

 
[영화 리뷰] <애프터썬>

 

영화 <애프터썬> 포스터. ⓒ그린나래미디어

 

11살 소피는 젊은 아빠 30살 캘럼과 함께 튀르키예 여행을 왔다. 캘럼은 곧 31살이 된다. 그런데 캘럼과 아내, 그러니까 소피의 엄마는 이혼한 상황이다. 그런가 하면 캘럼은 친구와의 동업이 잘 되지 않았고 소피의 엄마이자 캘럼의 전 부인은 새롭게 약혼한다고 한다. 캘럼으로선 굉장히 힘든 시기일 텐데, 그런 와중에 부녀 둘만의 해외여행이니 의미가 남다르다 하겠다.

이 여행은 현재가 아니다. 31살이 된 소피가 캠코더 영상으로 20년 전 튀르키예 여행을 회상하고 있는 것이다. 현재의 소피는 동성 커플과 함께 지내고 있는데, 어딘가 짙은 우울이 감돌고 있는 것 같다. 영상 속 20년 전 여행, 그리고 아빠 캘럼과 연관이 있는 것으로 느껴진다. 하지만 영상 속 11살 소피는 한없이 순수하다.

튀르키예 여행에서 부녀는 평온하기 이를 데 없는 시간을 보낸다. 소피로선 아빠와 조금 더 가까워지는 계기로 작용했고 11살 나이쯤이면 눈을 뜰 성애의 면면을 감지한다. 이를테면 몇 살 차이 안 나는 언니오빠들이 부둥켜안고 키스하는 모습에서 뭔지 모를 감정을 느끼고, 또래 남자아이와 가볍지만은 않은 키스를 한다. 캘럼은 천진난만하고 순수한 소피에게만큼은 환하게 웃어 주려 하지만 혼자 있을 때면 여지없이 힘들어한다. 부녀는 여행을 잘 마칠 수 있을까. 

 

소피의 시선

 

영화 <애프터썬>은 2022년 혜성처럼 등장해 전 세계 영화계를 뒤흔들었다. 자못 조용한 영화인데 뒤흔들었다는 표현이 맞지 않다고 생각할 수 있겠으나 그리 틀리지 않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이른바 '올해의 영화'이자 '시네필 필람 영화'라는 평이 자자했으니 말이다. 우리나라에는 이듬해 초에 개봉했는데 개인적으로 당시 이 작품을 접하지 못했다가 이번에 1년 반 만에 재개봉한다고 하여 접하게 되었다.

재개봉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코로나가 기승을 부릴 때 개봉해 안타까운 성적을 기록했으나 영화 자체는 좋은 경우가 있을 테고 이 영화처럼 관객들의 바람이 재개봉으로까지 이어진 경우도 있을 테다. 특히 <애프터썬>의 경우 더위가 꺾일 것 같지 않은 올해 여름에 다시 보고 싶은 배경을 지녔다. 늦여름의 휴가 말이다. 물론 다분히 일차원적인 외향의 이유다.

이 영화를 바라보는 시선은 크게 두 개가 있을 것이다. 소피 그리고 캘럼. 여행 당시 소피가 어리고 아무것도 몰랐다고 일차원적이라 할 순 없을 테다. 20년 후 아빠의 나이가 된 소피가 회상하는 형식이라 그렇게 보일 뿐이다. 소피도 나름 힘들다. 부모는 너무나도 어렸을 때 결혼해 자기를 낳았는데 이혼했고, 아빠는 하는 일이 잘 안 되며 엄마는 새롭게 약혼한다니 말이다.

그런 와중에 아빠랑 단둘이 멀리 여행을 와서 최대한 즐겁게 지낸다니 그것만으로도, 즉 다분히 소피의 시선만을 다뤄도 꽤 괜찮은 영화가 나올 것이다. 아울러 그녀는 나름 새로운 세상에서 처음 보는 사람들과 부대끼며 성에 조금씩 눈을 뜨고 관계를 형성해 나가니, 알게 모르게 성장하고 있다. 모르긴 몰라도 그때의 경험이, 기억이 그녀에게 크게 작용했으리라. 누구라도 똑같을 것이다. 어린 시절의 특별한 경험들이 지금의 나를 만든다.

 

캘럼의 시선

 

그런데 이 영화는 한 발 더 나간다. 이른바 캘럼의 시선이다. 어른이 된 소피가 캠코더 영상을 곱씹으며 들여다보니 보이는 것들, 특히 아빠 캘럼에 관한 것들. 아빠의 행동, 표정, 말투 등에서 짙게 묻어나는 우울. 그때 알았다면 우울의 총량을 조금이나마 덜어내고자 뭐라도 할 수 있었을까. 우울의 조그마한 덩어리라도 가져올 수 있었을까. 우울의 한 면이라도 가릴 수 있게 힘을 북돋을 수 있었을까.

사람은 모두 자기가 아니고선, 아니 때론 자기도 어찌할 수 없는 기쁨과 슬픔을 각자 지니고 있다. 감히 알 수 없지만 우울도 그러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어느 누구도, 가장 사랑하는 가족조차 대신해 줄 수 없겠으나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은 분명 천지 차이일 것이다. 몸뿐만 아니라 마음으로도 같이 있을 수 있으니 말이다.

그렇다, 이 영화는 너무나도 아름답고 수수하고 평온하기까지 한 어느 부녀의 늦여름 여행을 보여주고 있지만 그 자체가 누군가의 기억 또는 영상 속 장면들의 모음에 불과하다. 가끔 아스라이 떠올랐다가 금방 사라지고 마는 추억 속 저편의 순간들일 뿐인 것이다. 그러니 굳이 캘럼의 남모를 사연을 내세우지 않아도 왠지 모를 슬픔, 아련함, 애처로움, 안타까움, 신산함 등의 복합적인 감정이 밀려오며 한숨과 울음을 동반할지 모른다.

제목 'aftersun'을 유념해 볼 필요가 있다. 자못 의미심장한데 '햇볕에 탄 피부에 바르는 크림'을 말한다. 흔히 말하는 햇볕을 차단하고자 피부에 바르는 크림이 아니다. 이미 햇볕에 타버린 피부인데 너무 늦은 게 아닌가 싶은 것이다. 소피의 입장에서 20년이나 지나버렸기에 너무 늦은 게 아닌가 싶은 것이다. 캘럼의 입장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는 선택을 되돌리기에 너무 늦은 게 아닌가 싶은 것이다. 한없는 안타까움을 자아내는 제목이라 아니할 수 없다.

아무런 정보 없이 처음 보고, 모든 걸 안 상태에서 반드시 또 보시라. 처음에 안 보이던 것들이 보일 것이다. 마치 11살의 소피가 보지 못한 걸 31살의 소피가 보는 것처럼 말이다. 그게 재미 요소로 다가온다기보다 삶을 지탱해 주는 요소로 다가올 것이다. 그러니 이 작품을 최고라고 추켜세우는 게 아닐까.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