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작 영화 리뷰] <드림 시나리오>
폴 매튜스는 딸의 꿈에 나왔다. 그런데 딸이 위험에 처했는데도 아무런 제스처도 취하지 않았다. 조금 의아했지만 꿈이려니 하고 넘어갔다. 레스토랑에 갔는데 카운터 직원이 폴을 알아본 듯하다. 조금 이상하지만 그냥 지나간다. 오슬러 대학교의 진화심리학과 종신 교수 폴 매튜스는 굉장히 심심하고 또 재미없으며 지루하기까지 한 인간이다. 이웃집 사람들이나 학생들 모두 그를 피한다.
그런 폴에게 고민이 하나 생겼다. 오랜만에 만난 옛 동료가 논문을 냈는데 그가 대학원 시절에 냈던 아이디어라는 게 아닌가. 폴은 옛 동료의 논문에 기여자로 이름이 올라가길 원한다. 어느 날 폴은 아내와 연극을 보고 나오던 중 옛 연인과 재회한다. 그녀의 꿈속에 폴이 자주 나온다나 뭐라나. 얼마 후에 커피를 마시며 폴의 이야기를 자신이 운영하는 온라인 잡지에 올려도 되겠냐고 묻는다. 그게 뭐 대수랴 싶어 폴은 흔쾌히 수락한다.
폴은 하루아침에 스타덤에 오른다. 수많은 사람들의 꿈속에 폴이 나온다는 이유였다. 옛 연인이 온라인 잡지에 올린 폴의 이야기가 여기저기 퍼진 것이었다. 급기야 셀럽과 브랜드를 연결하는 스타트업 'Thoughts?'가 그를 찾기에 이른다. 쉽게 돈을 벌어보자는 심산. 폴은 싫은 내색을 비추다가 이내 수락한다. 하지만 곧 문제가 터지는데, 수많은 이의 꿈속에서 폴이 폭력적이고 잔인하게 변한 것이었다. 사람들이 이내 폴을 경멸하고 피하기 시작하는데...
현대 사회의 정신병리학적 문제
2022년 노르웨이 현지에서 개봉한 후 이듬해 국내 개봉에 성공해 소소한 화제를 뿌렸던 영화 <해시태그 시그네>의 감독 '크리스토퍼 보글리'가 1년 만에 <드림 시나리오>로 돌아왔다. 전작과 비슷한 결로, 현대 사회의 정신병리학적 문제를 블랙코미디로 풀어냈다. 여전히 탁월한 통찰력이 빛나고 짧은 러닝타임에도 생각할 거리를 풍부하게 던진다.
크리스토퍼 보글리의 반짝이는 재능을 알아봤는지, 미국 굴지의 독립예술영화 제작배급사 'A24'가 제작하고 배급했다. 아울러 <유전> <미드소마> 등으로 유명한 아리 애스터와 니콜라스 케이지가 제작에 참여했다. 니콜라스 케이지는 주연으로도 참여해 작품의 후광을 자처했다. 그의 N차 전성기가 언제까지 계속될지 지켜보게 된다.
자의가 아닌 그렇다고 타의도 아닌 뭔지 모를 이유로 사람들의 꿈에 출몰하는 중년 남자, 그렇게 꿈과 현실을 잇는 인플루언서가 되었고 그는 유명세를 즐긴다. 나름 종신 교수로서 사회적 위치가 있고 또 그가 진정으로 원하는 건 자신의 전문 분야 관련 책을 쓰는 거라, 남의 꿈속에 나온 걸로 유명세를 떨치긴 저어 되지만 삐져나오는 웃음을 주체하지 못한다. 사람들이 알아봐 주니 그 자체로 즐겁다.
중년의 위기에서 가족의 해체까지
폴이 보이는 일련의 행동은 '중년의 위기'로 읽힌다. 외견상 이룰 건 다 이룬 걸로 보이지만 저 마음 한구석에 너무나도 이루고 싶은 게 있다. 어디 가서 말하기도 좀 그런, 그렇다고 거기에 매달려서 반드시 이루려는 것도 딱히 아니다. 아무도 관심이 없지만 관심을 받고 싶다. 옛 동료에게 매달려서라도 꼭 이루고 싶은 꿈이기도 하다. 아주 복잡다단한 심정인 것이다.
그래서 중년에는 자기 자신에게 빠져들기 쉽다. 여유가 생겨 가족을 돌보며 타인을 챙기고 주위를 돌아볼 것 같지만 뭔가에 꽂혀 그것만 들여다보기 일쑤다. 인생 후반기에는 꼭 꿈을 이뤄내리라는 다짐이랄까. 폴은 자신이 원하는 일과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에만 몰두해 가족을 챙기지 않는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이대로라면 곧 가족 해체의 위기가 들이닥칠 것 같다.
폴에게 어느 날 갑자기 들이닥친 일은 종류와 강도만 다를 뿐 누구나 맞닥뜨릴 수 있다. 문제는 그로선 정체를 전혀 알 수 없고 의도하지도 않았다는 것인데 어떻게 대처하는지가 중요하겠다. 세상은 그를 이리저리 휘두르려 할 것이다. 그때 그 휘두름에 장단을 맞춘다면 행복한 미래를 장담할 수 없다. 그럴 땐 세상과 거리를 둘 필요가 있다. 두문불출해도 된다.
영화가 보여주는 폴의 개인적 이야기는 상당히 와닿았다. 그 자신도 재미없고 심심한 중년으로 세상 사는 것도 지루한데 갑자기 모두가 알아본다면, 도파민이든 아드레날린이든 뿜어져 나오지 않겠는가. 그런 흥분 상태에서 이런저런 실수를 하고 집에 와서 이불킥을 시전하는 모습이 현실적으로 보였다.
일약 스타덤에서 빠르게 나락으로 떨어지다
폴이 의도하지 않게 불특정 다수의 꿈에 출몰해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가 그 때문에 파멸한다는 이야기는 그 자체로 흥미롭다. 꿈이란 게 너무나도 밝혀내기 힘든 신비로운 부분이 아닌가. 그런데 이 이야기는 작금의 파국적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 시스템을 정면으로 비꼰 것 같다. 누구나 스타가 되는 세상, 하지만 도대체 어떻게 스타가 되었는지 알기 힘들고 언제 나락으로 떨어질지 알 수 없다. 예전에도 '자고 일어나니 스타가 되어 있었다'는 이야기는 많았지만 지금은 그 속도가 너무 빠르고 소소하게 스타가 되었다가 빠르고 가파르게 나락으로 떨어지는 경우가 너무나도 많다.
0에서 99가 되는 건 너무 쉬운 것 같고 또 너무 행복한 일이다. 그런데 99에서 0이 되는 건 인생이 송두리째 사라지는 것 같은 일이다. 0이 아니라 -99인 것처럼 느껴진다. 외견상으론 제자리로 돌아온 것뿐인데 말이다. 상승의 행복과 하락의 좌절감은 비례하지 않는가 보다. 아무래도 하락할 때 가속도가 붙어서일까.
폴은 자신이야말로 이 일련의 사건 피해자라고 본다, 그가 수많은 이의 꿈에 나와 잔인한 짓으로 잠을 앗아가는 건 둘째 치고. 그가 의도하지 않았으니 일견 맞는 말이나, 그가 꿈으로 스타덤에 올랐을 때 그 유명세를 즐기고 또 이용했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좋았을 때는 한 번이라도 더 보고 싶다가 안 좋아지니 등을 돌려 버리는 대중이나, 좋았을 때는 즐기고 이용하려 했다가 안 좋아지니 피해자라고 말하는 폴이나 별반 다르지 않다는 말이다. 옳고 그름을 떠나 불확실한 현상에 보편적이고 일반적으로 대처했을 뿐이다.
영화는 폴의 개인적 이야기와 더불어 사회문화적 이야기를 매우 유려하게 버무렸다. 블랙코미디의 외형을 띄고 있지만 들여다보면 심리스릴러이기도 하다. 몇 번 보면서 곱씹어 보면 우리를 뒤흔들 뭔가가 더 나올 것이다.
'신작 열전 > 신작 영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름의 이유로 생을 이어가기 힘든 뱀파이어와 인간이 만났을 때 (0) | 2024.07.08 |
---|---|
일본을 뒤흔들 만한 욕망의 찬가... 올바른 욕망이란 무엇인가 (0) | 2024.07.05 |
이 영화가 최대한 무심하게 그리는 가해자가 된 피해자 (0) | 2024.06.24 |
마음을 움직이는 '괜찮아'라는 말 한마디의 힘 (0) | 2024.06.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