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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 오리지널

최악의 락 페스티벌이 남긴 생지옥 <우드스톡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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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 오리지널 리뷰] <난장판이 된 사건사고: 우드스톡 1999>

 

넷플릭스 오리지널 다큐멘터리 <난장판이 된 사건사고: 우드스톡 1999> 포스터.


올해 2023년 7월 말, 한탄강 둔치에서 '우드스톡 뮤직 앤 아트페어(이하, '우드스톡') 2023'이 14년 만에 미국 외 외국에서 최초로 열린다고 한다. 6.25전쟁 휴전 70주년을 맞아 평화 페스티벌로 기획되었는 바, '자유와 평화, 그리고 사랑'을 표어로 한다. 우드스톡 페스티벌의 원조이자 락 페스티벌의 원조 '우드스톡 69'의 정신을 잇는다.

우드스톡 1969는 1969년 8월 미국 뉴욕주 농장에서 3일간(비공식적으로 4일간) 진행된 락 페스티벌로, 당시 미국을 위시해 세계적으로 흔들린 평화를 음악으로 바로 잡고자 '평화와 음악'의 표어를 내걸었고 완벽하게 성공시켰다. 이후 우드스톡은 1994년(25주년), 1999년(30주년), 2009년(40주년)에 후속 페스티벌이 개최되었지만 1969년 때의 근본 정신을 되살리진 못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특히 '우드스톡 99'는 우드스톡의 정신을 계승하기는커녕 수많은 사건사고와 폭동까지 유발한 역대 최악의 락 페스티벌로 우뚝 섰다. 그나마 '우드스톡 94'가 나름의 성과를 냈는데, 그 성과에 고무되어 5년 뒤에 제대로 '돈'을 벌어보고자 시작한 게 '우드스톡 99'였다. 시작하기도 전부터 문제점을 안고 있던 우드스톡 1999의 전말을 넷플릭스 오리지널 다큐멘터리 시리즈 <난장판이 된 사건사고: 우드스톡 1999>가 파헤쳤다.

 

우드스톡 정신을 되살리고자

 

아무리 '평화'니 '사랑'이니 하는 다분히 공익적인 기치를 내건 페스티벌이라고 해도 '돈'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을 테다. 족히 수십 만 명을 수용해선 아무런 걱정 없이 오롯이 즐기고 놀고 먹고 마시고 자게끔 해야 하니, 얼마나 많은 돈을 투입해야 할까? 엄연히 사업의 일환이니 투자 대비 이익을 봐야 한다고 생각하는 게 이상한 생각은 아닐 것이다.

'우드스톡 99'는 우드스톡 69를 기획·개최·총괄했던 ‘마이클 랭’이 당시 메트로폴리탄 엔터테인먼트의 존 셰어와 함께 개최했다. 1994년과 2009년을 원조 우드스톡과 같은 궤로 취급하지 않고 1999년만을 취급하는 이유는 마이클 랭의 존재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애초에 우드스톡을 되살릴 뜻이 없었다고 한다. 그런 와중에 1999년 4월에 미국 콜로라도에서 '콜럼바인 고등학교 총기난사 사건'이 일어났고 젊은이들에게 우드스톡 정신을 알리고자 페스티벌을 개최하기로 한 것이다.

취지는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평화가 깨지고 있던 시기에 평화를 노래하는 락 페스티벌, 그것도 원조 '우드스톡'을 되살린다니 모두가 반기지 않았을까. 그런데 존 셰어의 존재를 가볍게 본 게 아니었을까. 그는 기획자 마이클 랭과 다르게 엄연한 사업가, 이익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게 선정된 개최지는 미국 뉴욕주 롬의 폐쇄된 '그리피스 공군기지'였고, 라인업은 하드록과 뉴메탈 위주였다. 개최지에서 돈을 최소화하고 라인업은 소위 '돈이 되는' 밴드들 위주였다. 애초의 취지와 맞지 않는, 선동적이고 분노에 가득 찬 분위기의 밴드들이 대다수였던 것이다.

 

우드스톡 99의 시작

 

결과론적인 문제점들은 뒤로 하고, 우드스톡 99의 시작으로 가 보자. 수십 만 명의 젊은이가 몰려들며 큰 성공을 기대케 하는데, 그들을 반긴 건 너무나도 더운 날씨(그늘이 될 만한 곳이 턱 없이 부족했다)와 말도 안 나올 정도로 바가지를 씌운 물가(심지어 3일 간의 행사 도중에 물가가 오르기도 했다)였다. 첫인상부터 불만이 심각한 수준으로 치솟기 시작했다.

더불어 이정도의 행사에서 당연히 뿜어져 나올 쓰레기와 오물 처리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점도 크게 작용했다. 돈을 아끼고자 외주 계약을 했기 때문에 주최 측에서 아예 손을 떼고 있었던 때문이다. 행사장 내 물가 문제도 역시 외주 계약 때문이었다. 그리고 턱 없이 부족하고 또 전문적이지 못한 경비 인력도 큰 문제였다. 주지한 모든 게 주최 측의 100% 잘못이었다.

과연 그게 전부였을까? 야간에 격납고에서 이뤄진 레이브 파티는 '지옥'의 시작이었다. 낮 동안에 여흥이 덜 풀린 수천 명이 광란의 파티를 즐기러 왔는데, 마약과 난교가 판을 쳤다. 진정한 문제는 강간이었으니, 아무리 정신을 가누지 못하는 와중이었더라도 하지 말아야 할 건 하지 말아야 하는 게 아닌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최악의 락 페스티벌

 

드스톡 99의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주최 측에서 작정하고 초청한 당대 최고 밴드들(콘, 림프 비즈킷, 레이지 어게인스크 더 머신, 키드락, DMX, 레드 핫 칠리 페퍼스 등)이 관중을 그야말로 흥분의 용광로로 몰아갔다. 그들로선 비싼 돈을 주고 자신들의 공연을 보러 온 관중에게 최선·최고의 무대를 성사해야 하는 의무가 있었으니, 그렇게 하는 게 당연했을 테다. 그런데 마이클 랭이나 존 셰어의 말을 들어보면 그들이 잘못했다는 것이다. 관중의 흥분 상태를 살피고 무대에 섰어야 했다는 것. 말도 안 되는 변명이다.

마지막 날이 되자 많은 관람객이 행사장을 떠난다. 더위, 고물가, 미숙한 진행, 관람객을 무시하는 태도 등을 더 이상 좌시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수많은 이가 남아 있었던 건 초거물급 아티스트가 방문할 거라는 헛소문 또는 헛된 희망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희망은 산산조각 난다. 허무하게 끝나 버린 페스티벌, 많은 관객이 폭도로 변해 폭동을 일으킨다. 불을 지르고 구조물을 무너뜨리고 약탈한다. 결국 긴급출동한 뉴욕 기동대에 의해 사태는 마무리된다.

우드스톡 99는 단순히 역대 최악의 락 페스티벌로만 남아 있지 않다. 당시 영상을 보면 '생지옥'이라는 단어가 자연스레 떠오른다. 누구의 잘못일까? 1차적이고 총체적으로 마이클 랭과 존 셰어를 위시한 주최 측의 잘못이다. 물론 그들의 말마따라 대다수가 아닌 소수의 '미친' 관객들이 벌인 '미친짓'도 큰 잘못을 저질렀다.

그런데 아무리 들여다봐도 '꼬리 자르기'라고밖에 보이지 않는다. 나아가 일부러 '숲을 보지 않고 나무를 보려는' 수작으로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자신들의 책임을 회피하려고만 한다. 우드스톡 99는 지금까지처럼 앞으로도 영원히 회자되지 않을까 싶다. 얽히고설킨 논란이 끊어질 것 같지 않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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