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오리지널 리뷰] <글라트베크 인질극>
88 서울 올림픽이 열리기 직전이자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 1년여 전, 1988년 8월 독일 사상 초유의 인질극이 펼쳐진다. 시작은 8월 16일 오전 7시 40분경 글라트베크의 도이체방크 은행이다. 복면을 쓴 이인조 무장 강도가 은행에 들이닥쳐 30대 남성 지점장과 20대 여성 경리과장을 인질로 붙잡은 채 경찰과 대치했다. 그들은 인질극 2시간여가 지난 뒤 30만 마르크와 금고 열쇠, 도주용 차량을 요구했다. 다른 곳으로 향할 모양이었다.
인질극은 여러 언론사들에 의해 서독 전역에 생중계되고 있었는데, 심지어 인질범 중 한 명은 뉴스 앵커와 직접 전화 통화를 하기도 했다. 인질극이 14시간여 경과된 시점에 인질범들은 두 명의 인질과 함께 은행을 나와 도주를 시작한다. 20시간 넘게 달려 그들이 도착한 곳은 브레멘이었다. 한편, 경찰 당국은 기자회견을 열어 인질의 안전을 위해 언론사가 사건 보도를 중단해 줄 것을 간곡히 부탁한다. 언론사가 과연 그 부탁을 들어 줄지는 미지수였다. 그러는 사이 여성 인질범이 합류하고 수십 명의 시민이 타고 있는 버스를 탈취한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다큐멘터리 <글라트베크 인질극>은 참으로 오묘한 시기에 서독에서 벌어진 기묘한 인질극의 전말을 당시 촬영된 원본 영상으로만 재구성한 작품이다. 사건 관계자 또는 전문가의 인터뷰나 내레이션이 일체 첨부되지 않은 원본 영상으로만 만들어졌다는 특장점을 가진다. 나아가 작품을 보고 있노라면, 사건의 세 주체가 떠오르는데 악랄한 언론과 무능한 경찰 그리고 영악한 인질범들이다. 최우선적으로 들여다봐야 할 인질들은 철저히 가려졌다.
악랄한 언론
'글라트베크 인질극'에서 가장 눈에 띄었던 건 단연 언론의 활약(?)이다. 인질극이 시작된 글라트베크의 도이체방크에서부터 결국 인질범들이 붙잡힐 때까지 54시간여 동안 생중계를 펼쳤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다. 인질범의 동선을 완벽히 파악해 뒤쫓기도 하고 경찰보다 한 발 더 빠르게 입수해 미리 가 있기도 했다. 국민에게 알릴 의무를 충실히 따른 걸까, 다신 없을 것만 같은 대특종이기 때문일까.
언론의 악랄함은 인질범들이 브레멘에서 버스를 탈취한 다음 극을 달리기 시작한다. 믿기 힘든 광경이 연이어 펼쳐지는데, 총 든 인질범을 불러 맞담배를 피우고 하하호호 하며 인터뷰를 하지 않나 언제 목숨을 잃을지 모를 인질과 속 편하게 인터뷰를 하지 않나 추후 계획을 물어보며 중재까지 하는 등 범죄에 가담 아닌 가담까지 한다.
그런가 하면, 퀼른에서는 족히 수백 명이 인질범과 인질 들이 탄 차를 둘러싸며 구경하고 인터뷰를 이어갔는데 어느 타블로이드지 편집장은 직접 차에 타 인질범과 동행하며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그 모습을 보고 분노에 치를 떠는 시민들도 많았지만 아무 생각 없이 재밌는 구경 거리로 생각하는 이들도 많았다. 언론이 만들어 놓은 판이 아니었다면 그러지 않았을 것이다.
수십 명의 목숨이 경각에 달린 심각한 인질극을 수수방관하는 것도 모자라 사실상 부추긴 것이나 다름 없는 언론의 짓거리가에 뭐라 달리 할 말이 없을 정도다. 보고도 믿기지 않는다. 영화라고 해도 코웃음 쳤을 것만 같은 행태다.
무능한 경찰
이상하게도 이 작품엔 경찰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거의 언론의 생중계 영상으로만 채워졌기 때문이기도 할 텐데, 중간중간 경찰이 나와서 하는 게 너무 못미더워서 눈 뜨고 봐 주기가 힘들 정도다. 물론, 인질의 목숨을 제일선에 둬야 하기에 인질범의 말을 잘 듣는 정도로밖에 사건을 다룰 수 없지만 언론도 통제하지 못했고 현장도 통제하지 못했으며 사건 자체도 통제하지 못했다.
특히, 브레멘이나 퀼른에서 인질범들이 그야말로 관종끼를 마음껏 발산하며 언론과 함께 짝짜꿍 날뛰고 있을 때 경찰은 수수방관할 뿐이었다. 물론 인질범들이 경찰에 극도로 예민하게 반응했기에 멀찌감치나마 감시하며 저격병도 배치했겠지만 사실상 범죄 현장을 방치한 것이나 다름없다. 협상 전문가를 데려와 협상하려 하지도 않았고 특수 기동대가 인질범들의 방심을 틈 타 진압하지도 않았다.
이 인질극으로 무고한 인질이 두 명 희생되었는데, 한 번은 경찰이 앞뒤 없이 여자 인질범을 붙잡았다가 술과 마약에 취한 남자 인질범이 미쳐 날뛰며 15살 남자아이를 죽이는 걸 막지 못했다. 다른 한 번은 최종 진압 때였는데, 다수 경찰과 인질범들 그리고 인질들이 부상을 입는 와중에 18살 여자아이가 죽고 말았다. 그런가 하면, 경찰 한 명은 교통사고로 세상을 등졌다.
언론의 믿기 힘든 악랄함과 더불어 경찰의 믿기 힘든 무능함이 이 사건이 최악의 최악으로 흐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아니 할 수 없을 것이다. 처참하기가 이루 말할 데 없었다.
영악한 인질범
이 역대급 인질극의 주인공(?)은 단연 인질범이다. 한스 위르겐 뢰스너와 디터 데고르스키, 그리고 뢰스너의 여자친구 마리온까지. 특히 한스 위르겐이 아주 영악했는데, 주지했다시피 관종끼를 유감 없이 발휘하며 수많은 언론사와 서슴 없이 인터뷰를 진행했다. 언론과 친하게 지내며 언론의 악랄함을 최대한 자기에게 유리하게 가져온 행위다.
그런가 하면, 경찰은 극도로 멀리했는데 경찰이 보이기만 해도 인질을 쏴 죽이겠다며 협박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러며 경찰에게 끊임없이 요구했는데, 주로 돈과 도주용 차량이었다. 덕분에 인질범들은 인질들을 데리고 아무 꺼리낌 없이 독일 북서부를 유랑하다시피 할 수 있었다. 경찰의 무능함을 최대한 자기에게 유리하게 가져온 행위다.
인질극의 목적이 인질을 헤치는 것도 아니고 돈을 갈취하는 것도 아닌 세상을 향한 더할 나위 없는 분노이니 만큼 '분노 범죄'의 일환이라고 할 수도 있겠으나, 언론과 경찰을 대하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무모함과 계획의 경계에서 세심하게 줄타기를 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결국 그들은 인질을 죽이고 붙잡혔지만 마리온과 디터는 석방되었고 뢰스너만이 계속 감옥에 있다.
그들은 세상을 향해 하고 싶은 모든 말을 쏟아냈고 진짜 하고 싶었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유례없는 인질극을 펼쳤다. 그러며 자신들은 삶과 죽음에 관심 없다고 떠벌렸지만 결국 살았고 지금도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수많은 사람의 인생에 트라우마를 남겼고 몇몇은 세상을 등졌다. 정작 무고한 이들을 책임져 줄 장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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