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오리지널 리뷰] <말하지 못한 이야기: 케이틀린 제너의 순간들>
1976년 캐나다 몬트리올에서 열린 제21회 몬트리올 올림픽, 한 남자가 미국의 국민 모두에게 열화와 같은 응원을 받고 있었다. 그가 누군가 하니, 모든 올림픽 경기가 인간의 극한을 다루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힘들고 그래서 가장 대단한 종목 육상 10종 경기 선수 '브루스 제너'였다. 그와 더불어 강력한 우승 후보가 소련 선수였으니 시대상에 비춰 더더욱 스포트라이트가 쏟아졌을 테다.
이틀에 걸쳐 행해지는 10종 경기, 첫째 날에선 1위와 불과 35점 차가 나는 3위에 위치한 제너는 둘째 날의 다섯 종목 중 네 종목이 가장 자신 있는 종목이었다. 가장 잘하는 종목이기도 했다. 그리 자신 있진 않은 종목들에서 선방한 제너는, 후반부의 종목들에서 압도적인 기량을 선보이며 1위로 올라가더니 8600점 이상의 성적으로 올림픽 신기록이자 세계 신기록을 수립하며 챔피언의 자리에 오른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컬렉션 '말하지 못한 이야기'의 <케이틀린 제너의 순간들>은 1970년대를 대표할 만한 미국의 영웅 브루스 제너의 익히 알려져 있지만 또 진솔하게 말하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전한다. 제목만 봐도 의구심이 드는 바, 올림픽 챔피언이자 구국의 영웅 '브루스 제너'가 왜 '케이틀린 제너'가 된 것인지 가장 궁금할 수밖에 없다. 그는, 아니 그녀는 어떤 삶을 살아온 것일까?
성정체성 혼란의 소년, 운동하다
우리는 브루스 제너를 <4차원 가족 카다시안 따라잡기>라는 리얼리티 프로그램에서 봤기에 익히 알고 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셀럽 킴 카다시안을 중심으로 그녀의 막장 가족 이야기를 진짜와 가짜를 넘나들며 보여 주는데, 2007년부터 자그마치 20시즌까지 제작되었다. 작년 2021년에 대망의 막을 내렸고, 현재 우리나라에선 넷플릭스로 8시즌까지 볼 수 있다. 여하튼, 브루스 제너는 당연히 여자가 아닌 남자로 알려져 있는 것이다.
하지만, 제너는 작품에서 밝히길 아주 어렸을 때 그러니까 8살 즈음부터 성정체성에 혼란이 왔다고 한다. 그녀는 1949년에 태어났으니 1950년대에 그런 생각을 가진다는 것 자체가 죄악시되었을 테다. 제너는 남몰래 여장을 하며 혼란을 달래 보려 했고, 타고난 재능인 달리기에 천착해 혼란을 잠재우고자 했다.
누구보다 열심히 달리기, 그리고 운동 전반에 매달렸고 조금씩 두각을 나타냈다. 학교에서 1등 하고, 지역에서 1등 하고, 주에서 1등 하며 어느새 전국구가 된 것이다. 운동 하나로 대학교에 들어간 제너, 그곳에서 크리스티를 만나 결혼한다. 크리스티는 제너가 성공하기까지 정신적인 지주가 되어 준다.
올림픽 영웅, 속이 시커멓게 타들다
브루스 제너는 2015년 미국을 넘어 세계를 잠시나마 떠들썩하게 한 결정을 내리고 실행에 옮긴다. 성전환 수술을 받은 것이다. 그리고 이름도 케이틀린 제너로 바꿨다. 곧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트랜스 젠더가 되었다. 그 유명세가 어느 정도였냐 하면, 작품에도 나오지만 성전환 수술을 받은 직후 트위터 계정을 오픈하고 정식으로 커밍아웃을 했는데 채 5시간도 안 되어 100만 팔로워를 불러온 것이었다. 버락 오바마의 종전 신기록을 훨씬 앞당기며 기네스북에 올랐다고 한다.
전국구 유망주로 우뚝 선 제너는 1972년 뮌헨 올림픽에 당당히 미국 대표로 출전한다. 하지만, 세계의 벽은 높았다. 특출 난 노력 없이 특출 난 실력으로만 도전해서는 챔피언 근처에도 갈 수 없었던 것이다. 그는 10위에 그쳤고 좌절하지만 곧 마음을 추스르고 심기일전해 4년 후를 기다리며 특출 난 노력을 시작한다. 그의 곁에 항상 크리스티가 있었다.
근 몇 년간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8시간여를 훈련한 제너, 1975년에 열린 팬아메리칸 게임 10종 경기에서 챔피언의 자리에 오르며 기량을 점검하고 올림픽에 임한다. 자신감 충만, 본래 실력만 오롯이 내 보이면 챔피언의 자리에 오를 수 있을 거라 모든 이가 예상하고 있었다. 스스로의 기대와 모두의 기대에 부응해 챔피언이 된 제너, 하지만 그의 속은 시커멓게 타들어 가고 있었다.
내면의 혼란과 싸우다가, 트렌스 젠더가 되다
1972년 올림픽 10종 경기 금메달리스트이자 1976년 올림픽에서도 유력한 챔피언 후보였던 이가 다름 아닌 소련 선수였기에 그를 따돌리고 챔피언이 된 브루스 제너는 스포츠 스타, 아니 전국구 스타이자 영웅으로 추앙받는다. 1970년대를 대표하는 미국인 중 하나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의 위상을 떨친 것이다. 하지만, 그럴수록 그의 내면은 황폐화되어 갔다.
내면의 혼란을 잠재우고자 누구보다 열심히 운동에 매진해서 최고의 자리에 올랐지만, 이후 어디로 가야 할지 뭘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이제 더 이상 혼란을 달래고 잠재울 수단이 없었던 것이다. 그는 한창 잘나가고 있던 어느 순간 모든 걸 뒤로 하고 잠적한다. 그녀는 그때를 회상하며 인생 최악의 시기를 보냈다고 한다. 내면의 혼란과 치열하게 싸웠지만 이길 수 없었던 게 아닌가 싶다. 그렇다고 인정하고 트렌스 젠더의 길을 걷기엔 세상이 가만 놔 두지 않을 터였다.
그렇게 인생 후반이 한창이었던 60대 중반 성전환 수술로 트렌스 젠더의 길을 걸어간 케이틀린 제너, 젠더는 바뀌었지만 여전히 화려한 여성편력을 자랑하며 스캔들을 뿌리고 4차원 가족의 일원으로 할리우드 역사에 길이 남을 막장을 시전하며 아마도 죽을 때까지 화제의 중심에 서 있지 않을까 싶다.
결코 호감이 가는 사람이 아닐 뿐더러 차라리 외계인이 더 가깝다고 생각할 정도로 나와는 하등 거리가 먼 사람이기도 하지만, 응원하지 않을 수 없다. 내가 누구인지 알 수 없어 헤매고, 내가 결코 나일 수 없었으며, 내 속에 또 다른 나를 만들어 그가 마치 나인 양 살아왔으니 말이다. 케이틀린 제너의 앞날을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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