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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 오리지널

'나의 집은 어디인가'는 곧 '나는 누구인가' <나의 집은 어디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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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 오리지널 리뷰] <나의 집은 어디인가>

 

넷플릭스 오리지널 다큐멘터리 <나의 집은 어디인가> 포스터. 

 

지난 3월 <뉴욕타임스>가 미국 주택도시개발부 통계를 받아 전한 바에 따르면, 미국의 노숙인이 최근 4년 동안 계속해서 증가세를 보였다고 한다. 조사 시점이 코로나19 팬데믹 이전이었다는 점을 비춰 볼 때, 현시점의 노숙인 수는 훨씬 증가했을 거라고 유추할 수 있다. 심각성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이지 않을까 싶다.

그런가 하면, 지난 2007년부터 2020년까지의 노숙인 수가 60만 명 언저리에서 크게 변동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미국 발 세계금융위기 때 폭발적으로 증가한 이후 의미 있는 증가세를 보이지 않고 답보 상태에 있다는 건, 나쁘지 않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노숙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는 걸 보여 준다는 게 맞는 것 같다. 세계 최강대국 미국이니 말이다.

지난 5년간 미국 서부의 주요 도시들인 로스앤젤레스, 샌프란시스코, 시애틀은 노숙 문제로 비상사태를 선포했다고 한다. 이들 도시는, 최악의 노숙인 도시라 할 만한 뉴욕을 제외하곤 미국 노숙 문제에서 아주 큰 비중을 차지하는 곳들이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단편 다큐멘터리 <나의 집은 어디인가>는 위의 도시들에서 2017년부터 2020년까지의 촬영을 바탕으로 했다.

 

미국 대도시의 노숙인

 

<나의 집은 어디인가>는 로스앤젤레스, 샌프란시스코, 시애틀이라는 미국 서부와 미국 전체를 넘어 전 세계적으로도 손꼽히는 유명 대형 도시의 화려하고 높고 큼직큼직한 외향을 비추며 시작한다. 누구나 선망할 만한 이 시대의 대도시, 미국이 자랑하는 서부의 아름다운 도시, 미국의 현재이자 미래라고 할 만한 유려한 도시 말이다.

그리고 집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실루엣을 비춘다. 하지만, 카메라는 이내 집밖 길 한복판에 텐트를 치고 살아가는 노숙인 한 명을 비춘다. 그러곤 비루하기 짝이 없는 텐트촌을 비추고 다시 늠름하기만 한 대도시의 높은 빌딩촌을 비춘다. 지금 이 시대의 인간사에서 이보다 더 직접적으로 대조되는 면면을 보기 힘들 테다.

작품은 카운티 노숙인 지원 프로그램의 일환을 영상화한 듯, 노숙인 몇몇을 인터뷰하며 취약성 평가를 한다. 노숙 전력을 듣고 상황을 파악하는 것이다. 어떤 도움이 필요하냐는 질문에 지낼 곳이 필요하다는 이가 대부분이었고, 노숙을 하게 된 지 얼마나 되었냐는 질문에 몇 년 이상 되었다는 이가 대부분이었다. 어떤 이유로든 노숙을 하게 되면 지낼 곳을 찾기가 매우 어렵다는 것이다.

 

노숙인 논쟁

 

카운티에서는 범죄와 위생 문제 등을 내세워 노숙인 구역을 정리하고자 한다. 그곳에 사는 노숙인들을 노숙인 쉼터 또는 다른 주거 형태의 시설에 연결해 주는 형식이다. 하지만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고 있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라고 한다. 기본적으로 노숙인이 너무 많고 또 증가세도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주민들의 논쟁에 있다. 노숙인 쉼터, 나아가 노숙인 재활 센터를 어딘가에 지어야 할 텐데 누군가는 지역의 모든 동네에 재활 센터를 세워야 한다고 하는 반면 누군가는 곳곳에 퍼져 있는 엄청난 노숙인들을 모이게 해 지역에 막대한 피해를 줄 것이라며 반대한다. 팽팽하게 갈리는 건, 둘다 확고한 이유가 나름의 합리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 테다.

거시적으로 바라보는 차원과 미시적으로 바라보는 차원의 대립이라 할 만한데, 국가 입장에선 노숙인들도 함께 가야 하기에 어떻게든 노숙인 구역을 없애고 재활 센터를 지어야 하는 것이고 대다수 지역 주민 입장에선 음지에 있던 노숙인들이 양지로 나와 유무형의 피해를 가져올 거라고 판단해 그들은 그들끼리 우리는 우리끼리 지금까지 해 왔던 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미국을 향한 일침

 

40여 분의 길지 않은 러닝타임이기에 근본적인 차원에서 논쟁의 핵심을 찾아 해결책 또는 대안을 보여 주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대신, 이 작품이 택한 건 노숙인들의 삶을 지극히 사실적으로 가감 없이 보여 주는 것이다. 거기에 약간의 논쟁 거리를 던져 주며 대도시와의 직접적인 대조를 계속해서 보이려 한다. 얼마나 효과적인지는 잘 알지 못하겠으나 어떤 의도인지는 알겠다. 그만큼 노숙 문제가 풀기 힘들다는 방증이기도 하고, 그나마 노숙인의 삶을 보여 주는 게 이 문제를 푸는 데 가장 효과적일 수 있다는 판단일 것이다.

<나의 집은 어디인가>가 향하는 일침은 노숙인이나 지역 주민에 있지 않다. 미국이라는 국가 자체에 있다고 본다. 노숙인이 급증하고 또 길거리에서 살다가 죽어 나가는 건 결국 '국가의 실패'이기 때문이다. 거기엔 그 어떤 변명의 여지가 없다. 더군다나, 미국은 여러 면에서 세계 최강대국이 아닌가. 그런 나라가 노숙인 비율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니 앞뒤가 안 맞는 현실이 아닌가 싶다. 역시 미국은 막연히 살고 싶은 나라이지 실질적으로 살기 좋은 나라가 아니다.

문제의 근본이나 대안 또는 해결책에 대해선 아직 잘 모르겠다. 그러나, 작품 속 여성 노숙인의 사례를 보면 많은 얘기가 달리지고 논쟁을 보는 눈도 달라질 수 있다. 그녀는 단지 노숙인이라는 이유로, 즉 아무것도 가진 게 없다는 이유로 폭력을 당하고 또 당했다. 아마 그녀는 경찰에 신고도 할 수 없는 처지일 것이다. '나의 집이 어디인가'라는 말은 곧 '나는 누구인가'로 직결된다. 지금 이 시대, 이 사회에서 내가 나일 수 있는 근본이 집에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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