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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의 왕' 비기, 그의 진짜 이야기를 들어 볼래? <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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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 오리지널 리뷰] <비기: 할 말이 있어>

 

넷플릭스 오리지널 다큐멘터리 <비기: 할 말이 있어> 포스터. ⓒ넷플릭스

 

미국 오하이오주 클리블랜드에 기념관이 하나 있다. 이름하야, '로큰롤 명예의 전당'으로 로큰롤 역사에 길이 남을 공언자들을 기리기 위한 기념관이자 대중음악계 최고의 영예 중 하나인 전당이다. 박물관은 1995년에 생겼지만 재단은 1983년에 만들어졌고, 1986년부터 헌액하기 시작했다. 4가지 부문 중, '공연자' 부문이 우리가 흔히 아는 '로큰롤 명예의 전당'인데 가장 까다로운 심사를 거친다. 

 

올해는 아직 발표되지 않았고, 작년엔 4팀과 2명이 헌액을 받았다. 이중 2명이 우리에게 아주 익숙한데, 한 명은 '휘트니 휴스턴'이고 다른 한 명은 '노토리어스 B.I.G.'이다. 휘트니 휴스턴이야 자타공인 역사상 최고의 여성 디바로, 출중한 실력과 인기를 한몸에 받았다. 비교적 단명하고 말았지만 말이다. 그런가 하면, 노토리어스 B.I.G. 일명 '비기'는 누구인가. 할 말이 참 많은 인물이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다큐멘터리 영화 <비기: 할 말이 있어>(이하, '비기')는 비기의 너무나도 짧지만 너무나도 강력했던 인생의 단면을 집중 조명한다. 그를 두고, 힙합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고 위대하기까지 한 아티스트라던가 미국 힙합 황금기의 '동부의 왕' 또는 '뉴욕의 왕'이라고 한다. 그런가 하면, 천재는 단명한다는 말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불과 24세 나이로 피살당해 삶을 마친 비운의 상징으로 보기도 한다. 그가 살해당하기 6개월 전에 '서부의 왕' 투팍 샤커가 25세 나이로 피살당한 사건과 엮일 수밖에 없다. 

 

천재의 탄생, 하지만...

 

비기는 1972년 미국 뉴욕 브루클린에서 자메이카 이주 가족의 외동아들로 태어났다. 아빠는 일찍 집을 나갔고, 엄마 혼자 그를 키웠다. 어린 시절, 동네 이웃이자 유명 재즈 연주가 도널드 해리슨에게 음악적으로 많은 걸 배웠는데 덕분에 비기는 재즈 연주가가 되는 꿈을 꿨다고 한다. 하여, 힙합 뮤지션이 되어 대중 앞에 나갔을 때도 재즈 감성을 듬뿍 입힌 곡을 선보일 수 있었다.

 

비기의 데모 테이프는 훗날 유명 힙합 뮤지션이자 거물 프로듀서가 되는 퍼플 대디의 눈에 띄는데, 그는 '이게 뭐지?'라는 생각과 함께 신께 감사를 드렸다고 한다. 전례 없던 음악을 들고 왔기 때문인데, 비기가 그때까지의 힙합 신을 답습하지 않고 모국인 자메이카 음악과 재즈 음악 등에서 자유롭게 또 자연스럽게 메시지나 라임이나 플로우를 가져와 습득해서 자신만의 것으로 만들어 내놓은 덕분이지 않을까 추측해 본다. 

 

하지만 일사천리로 풀리지만은 않는 게 일이라는 것이다. 그 아무리 듣자마자 전무후무한 천재의 탄생을 확신한다고 해도, 신인은 신인이지 않은가. 비기에겐 당장 책임져야 할 사람들이 있었다. 엄마가 갑자기 유방암에 걸렸고, 이미 결별한 여자친구와의 사이에서 딸을 갖게 된 것이다. 그는 엄마와 딸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다시 예전의 '불법'적인 일에 손을 대기 시작한다. 

 

'뉴욕의 왕'으로의 험난한 길

 

비기가 태어나 자란 곳은 아주 험악한 동네로, 폭력과 약물과 매춘이 난무했다. 특히 그곳의 흑인들은 거의 모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불법적인 일로 먹고살 수밖에 없었다. 마약 말이다. 비기도 마약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물론, 마약 일은 위험한 만큼 어마어마한 돈을 만질 수 있다. 그야말로 떵떵거리며 살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 끝엔 감옥이 있거나 죽음이 있을 뿐이었다. 다른 길은 없었다. 비기에게도 어쩔 수 없이 두 길밖에 없었다. 

 

그런데, 비기에게는 신이 내린 재능이 있었다. 뛰어난 랩핑 실력 말이다. 10대부터 길거리에서 마약을 팔기 시작한 그가 함께한 게 있었으니, 마약하는 친구들과 함께 '주니어 마피아'라는 그룹을 결성해 리더로서 힙합 활동을 한 것이다. 하여, 비기는 일찍이 거리에서 유명해지고 데모 테이프로 레코드사의 눈에 띄었으며 중간에 포기하려다가 퍼프 대디의 간곡한 설득으로 다시 시작하게 된 것이다.

 

업타운 레코드를 나온 퍼프 대디는 직접 배드 보이 레코드를 세우고 본격적으로 비기와 함께 작업하기 시작한다. 피쳐링과 객원가수 활동으로 나름의 소소한 유명세를 치르고, 1994년 싱글을 통해 빌보드 차트에 오르며 충분한 성공을 치렀으며, 같은 해 첫 정규앨범 'Ready to die'로 초대박을 이룬다. 곧바로 비기는 '뉴욕의 왕'으로 불리게 된다. 

 

영화는 비기를 둘러싼 비교적 소소한 이야기들이 주를 이룬다. 누구도 이룩하기 힘든 뒷골목 마약상의 단기간 성공을 두고 신화적으로 포장하지 않는 것이다. 대신, 살아생전 비기의 솔직한 속 얘기와 현재의 비기 지인들이 건네는 비기의 음악 아닌 삶에 천착한 얘기들이 전해진다. 특히, 신화적으로 내려오는 비기의 죽음을 두고 오가는 설왕설래를 거의 다루지 않은 점이 신선하다. 

 

비기를 둘러싼 층들

 

비기를 두고 '동부의 왕'이라든가 '뉴욕의 왕'이라고 하는 건 물론 역대 최고의 영향력과 실력이 뒷받침되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속내는 투팍 샤커의 소속사 데스 로우 레코드와 비기의 소속사 배드 보이 레코드의 힘겨루기와 홍보 그리고 마케팅이 얽히고 설킨 거대한 '판'이었다. 투팍 샤커와 비기는 최고의 전성기 때 괴한으로부터 살해당했지만, 과열된 힙합 신의 판에서 희생당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멋대로 '왕'을 부여하고 서로 싸움을 붙이고는 알아서 의심하고 디스하고 싸우면 사람들이 열광할 게 아닌가. 

 

하여, 비기의 '죽음'은 뒤로 하고 다음으로 그를 둘러싼 층의 하나는 '음악'이다. 그는 살아생전 한 개의 앨범을 냈고 사후 두 개의 앨범이 내졌는데, 첫 번째 사후 앨범은 그가 살아생전 완벽하게 만들어 놓은 것이기에 통상적으로 비기는 2개 앨범을 냈다고 한다. 그런데, 그 두 앨범 모두 미국의 음악 잡지 <롤링 스톤> 선정 500대 명반에 들어간다고 하니 음악성에서 타의추종을 불허하는 건 명백하다. 그렇다면 인기는? 빌보드 핫 100 1위 두 곡과 2위 두 곡이 있다. 빌보드 200 1위를 하기도 했다.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할까. 

 

하지만 이조차 비기를 완전히 설명할 순 없겠다. 그의 짧은 인생 중 태반을 차지하는 건 따로 있기 때문이다. 그가 더 오래 살았다면 달라졌을 테지만 말이다. 그를 둘러싼 층 중에 그와 가장 밀접한 건, '길거리'가 아닌가 싶다. 그가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내며 생계를 꾸리고 평생 함께한 친구들까지 만난 그곳 말이다. '길거리 출신'에서 '길거리'가 주는 의미는 남달라야 한다. 단순히 공간적인 의미의 길거리가 아닌, 삶이 통째로 담긴 곳이니 말이다. 

 

이 영화가 비기를 온전히 담을 순 없었다. 시리즈도 아닌 것이, 그렇다고 길지도 않은 영화이니까. 하지만, 큰 역할을 했다. 비기를 아예 모르거나 대충 아는 이들이, 비기라는 사람의 삶에 관심을 가지고 조금이라도 가까이 다가갈 수 있게 물꼬를 터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후 비기는 다른 방면으로 재조명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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