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오리지널 리뷰] <크라임 씬: 세실 호텔 실종 사건>
미국 LA 시내 한복판에 우뚝 솟은 '세실 호텔', 2013년 1월 31일 한 투숙객이 갑자기 연락두절된다. 그는 중국계 캐나다인으로 캐나다 밴쿠버의 브리티시컬럼비아 대학교의 학생으로, 홀로 캘리포니아 여행을 하던 '엘리사 램'이었다. 그 어디에서도 그녀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던 경찰 당국은 기자회견까지 하며 제보를 받았지만 허사였다. 그러던 2월 19일, 엘리사 램은 호텔 옥상의 물탱크에서 알몸 상태의 시체로 발견된다. 이루 말할 수 없는 충격, 그 전말은 무엇일까.
다큐멘터리, 그중에서도 범죄 다큐멘터리의 명가라고 할 만한 넷플릭스에서 새로운 '범죄 다큐멘터리' 시리즈를 기획해 선보였다. 일명 '크라임 씬' 시리즈로, 사건을 달리하여 시즌제로 이어갈 것으로 예상된다. 물론, 시즌 1에 해당되는 <세실 호텔 실종 사건>이 잘 되어야 할 것이다. 세실 호텔에서 일어난 엘리사 램의 실종 후 변사 사건을 다룬 이 작품은, 넷플릭스에서 상당히 공을 들인 것 같다.
관계자들의 면면만 봐도 알 수 있는데, 테디 번디 전문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넷플릭스와 함께 다큐멘터리 시리즈 <살인을 말하다: 테디 번디 테이프>와 영화 <나는 악마를 사랑했다>를 연출한 조 벌링거 감독의 작품으로 할리우드 최고의 제작자 브라이언 그레이저와 역시 할리우드 최고의 감독이자 제작자 론 하워드가 제작자로 참여한 것이다. 명가와 명감독과 명제작자들의 만남이라니, 기대하지 않을 수 없다. 어떤 이야기를 전해 주는지 따라가 보자.
LA 시내 '세실 호텔', 그 무시무시한 실체
부제이지만 사실상 제목인 '세실 호텔'부터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엘리사 램 실종 사건'이 아니라 '세실 호텔 실종 사건'이지 않은가. 1927년, 대공황 직전에 LA 시내 한복판에 당시로선 엄청난 거금인 100만 달러를 들여 세워진 세실 호텔은 화려하기 그지 없는 로비부터 시선을 끈다. 초창기 잘나가던 호텔은 대공황으로 금방 폭삭 망한다. 이후, 세실 호텔은 '호텔'이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는 명성을 이어간다. 숙박비를 대폭 낮춰선 그야말로 아무나 받았던 것이다.
그 주요 고객은 다름 아닌 세실 호텔을 포함한 LA 다운타운의 빈민 지역 '스키드 로(skid row)' 홈리스들이었다. 대공황 직전까지 일자리를 찾아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사람들을 수용하던 세실 호텔은, 고스란히 홈리스로 전락한 이들을 수용한 것이다. 이후 스키드 로는 LA 당국과 경찰 당국도 포기해 버린 폭력, 범죄, 매춘이 난무하는 무법지대가 되었다. 세실 호텔에선 하루도 끊이지 않고 범죄가 일어났다. 그 유명한 연쇄살인마 '나이트 스토커' 리처드 라미레즈가 살인을 저지르고 집처럼 돌아와 쉬곤 했던 곳이기도 했다.
아는 사람은 잘 알 테지만, 이 호텔의 실체를 모르는 이도 당연히 많다. LA 시내에 있다는 점, 터무니 없이 저렴한 숙박비, 화려한 외관 등이 젊은 여행객들을 유혹했다. 엘리사 램도 그중 한 명이었다. 그녀가 이 말도 안 되는 호텔을 선택한 걸 나무랄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나아가 그녀가 이 호텔에서 묵고 있을 때 실종되어 결국 시체로 발견된 것도, 이 호텔의 역사를 들여다보면 크게 이상할 것도 없다. 세실 호텔 밖이든, 세실 호텔 안이든 안전한 곳은 없었기 때문이다.
앨리사 램의 죽음을 둘러싼 의심과 의혹들
세실 호텔이든, 세실 호텔이 속한 무법지대 스키드 로든 의심의 시선을 잔뜩 품은 채 엘리사 램의 사건을 들여다보면 모든 게 다르게 보인다. 이 사건과 관련해 가장 유명한 건 엘리사 램의 엘리베이터 CCTV 비디오일 텐데, 유튜브를 통해 공개된 영상이 족히 수천 만 조회수를 보이며 수많은 이들의 관심을 끌었고 자칭 타칭 웹 탐정들이 득달같이 달려들어 수십 수백 건의 분석 영상을 올려 또한 엄청난 조회수를 얻으며 관심을 증폭시켰다.
엘리사 램이 사라지기 직전의 영상으로, 그녀는 엘리베이터를 타서는 모든 층의 버튼을 누르고 누군가로부터 숨는 것 같은 행동을 보이며 보이지 않는 누군가와 대화하는 것 같은 행동을 취하기도 한다. 표정은 한껏 긴장되어 있는 듯하고, 오랫동안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지 않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영상의 시간이 잘 보이지 않고 또 조작되어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웹 탐정들은 의심하기를, 엘리사 램은 살해되었고 세실 호텔 측과 경찰까지 연루되어 뭔가를 숨기고 있다는 것이었다. 일리가 있는 듯하면서도, 일면 웃기는 얘기 같기도 하다.
엘리사 램 관련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그녀가 호텔 옥상의 물탱크에서 알몸 상태의 시체로 위를 본 채 발견된 사실도 웹 탐정들의 의심을 사기에 충분했다. 그녀의 시체에서 그 어떤 (성)폭행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는 와중에, 그녀는 왜 물탱크에 가게 되었을까? 발견 당시 물탱크 문이 닫혀 있었다고 하는데, 혼자였다면 어떻게 물탱크 문을 닫을 수 있었을까? 누군가에 의해 살해당했다고 한다면, 그녀의 몸엔 어떻게 흔적이 남지 않았고 범인은 그녀를 죽여서는 어떻게 옥상의 물탱크까지 끌고 올 수 있었을까?
엘리사 램의 죽음을 둘러싼 수많은 의심과 의혹을 불식시킬 한 가지는 '사고사'였다. 그녀는 평소 양극성장애를 앓고 있었는데, '사고'가 일어나기 전 세실 호텔에서 지낼 때 이상한 행동을 보였다는 것이었다. 부검 결과, 그녀가 최근 들어 약을 먹는 양을 줄였다는 것도 밝혀졌고 말이다. 결국, 오랫동안 지속된 의혹들을 뒤로 하고 검시관은 그녀의 죽음을 사고사로 판명한다.
'범죄 다큐멘터리'가 해야 할 이야기와 던져야 할 메시지
<크라임 씬: 세실 호텔 실종 사건>은 넷플릭스가 그동안 보여 왔던 명작 범죄 다큐멘터리들과는 조금 궤를 달리하는 듯하다. 사건의 이면에 숨겨진 인류학적·사회병리학적·정치학적 분석과 메시지를 전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기보단, 흥미진진한 사건의 서스펜스에 초점을 맞췄기 때문이다. 물론 세실 호텔의 역사와 LA 스키드 로 지역의 역사를 훑으며 나름의 분석과 메시지를 곁들이고자 했는데, 그 자체로 주체가 되지 못하고 사건을 얘기하는 객체로 활용될 뿐이었다.
사건 자체만을 다루더라도 충분히 깊이 있는 이야기와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다. 넷플릭스의 많은 범죄 다큐멘터리들이 성공적으로 수행해 오기도 했다. 하지만 이 작품은 일명 '웹 탐정'들의 증거 없는 추측뿐인 의심을 있는 그대로 계속해서 내보내 헷갈리게 한다. 물론 그 덕분에 쫄깃한 심장으로 보는 맛을 느낄 수 있긴 했지만 남는 게 하나도 없다. 모두 다 허황된 이야기들 뿐이니까 말이다. 문제는, 이들의 이야기가 사건을 다루는 한 방면으로 활용된 게 아니라 사건을 다루는 주체에 가깝게 보여 줬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또 한 가지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는 건, 엘리사 램이다. 그녀가 세상을 등진 건 2013년으로 10년도 채 되지 않은 시점이다. 비록 미제로 남지 않고 공식적으로는 사고사로 마무리되었다지만, 사건 당시에도 그렇고 사건 후에도 그렇고 너무나도 많은 이들의 쓸데없는 관심을 받았다. 그녀를 진정 걱정하는 이들도 있었겠지만 대다수는 그녀가 아닌 그녀의 죽음을 둘러싼 미스테리에 관심을 두었을 것이다. 뭇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에 아주 좋은 이야기일 테니까 말이다.
이 작품도 그 정도 수준에서 조금 더 나아갔을 뿐 별반 다를 바 없는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닌가 싶게 비춰진다. 황망하게 세상을 떠난 엘리사 램에 대한 진정한 애도가 선행되는 건 바라지도 못할 정도이지만, 그녀가 주체가 되는 게 아니라 철저히 객체가 되어 사건의 소품으로 전락시켜 버렸다는 느낌을 지우기 힘들다. <크라임 씬> 시리즈가 계속 나오게 된다면, 흥미 위주로만 빠지지 말고 지킬 건 지키면서 '범죄 다큐멘터리'가 해야 할 이야기와 던져야 할 메시지가 뭔지 잘 생각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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