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리뷰] <블랙머니>
영화 <블랙머니> 포스터. ⓒ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정지영, 75세의 적지 않은 나이임에도 여전히 현역으로 활동하는 노장 감독으로 1970년대 영화계에 발을 들여 1982년 장편 연출 데뷔를 했다. 80년대에 꾸준히 각본·연출작을 내놓았지만 큰 빛을 보지 못하다가 90년대가 시작하는 해에 <남부군>으로 흥행과 비평 양면에서 성공한다. 그의 제1 페르소나 안성기가 주연을 맡고 또 다른 페르소나 최민수가 주연급으로 활약한다. 이후 1994년까지 세 작품을 내놓는데,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 <하얀 전쟁>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가 그것들이다. 그의 또 다른 페르소나 이경영을 비롯 안성기와 최민수 등이 출연했다.
하지만, 90년대 후반에 내놓은 두 편의 영화로 그는 충무로를 떠난다. <블랙잭>은 백상예술대상과 대종상에서 감독상을 받았을 만큼 연출력을 인정받았지만, 흥행에선 실패한다. <까>는 괴작 판명을 받고 흥행과 비평 양면에서 망한다. 그렇게 2000년대 영화계에서 정지영 감독을 찾아볼 수 없었다. 14년 후 페르소나 안성기와 함께 <부러진 화살>로 돌아와 흥행과 비평 양면으로 화끈하게 성공한다. 같은 해 말 또 다른 문제작 <남영동1985>를 들고 와 '사회파 감독'으로서의 입지를 공고히했다.
이후 그의 행보는 연출이 아닌 기획과 제작이었다. 문제작들인 <천안함 프로젝트> <직지코드> <국정교과서 516일>을 진두지휘했다. 논쟁적인 사회 현안으로 자신만의 목소리를 내는 데 성공했다고 볼 수 있을 듯하다. 그리고 그는 다시 메가폰을 잡는다. 2019년에는 '론스타 게이트'를 다룬 <블랙머니>를 선보였고, 2020년에는 '삼례 나라슈퍼 사건'을 다룬 <소년들>이 크랭크인했다는 소식을 들렸다. 최신작인 <블랙머니>, 누구나 알 만한 거대 사건을 어떤 시각을 가지고 어떤 방식으로 풀어 냈을지 기대된다.
미약한 시작, 창대한 끝
2011년, 서울중앙지검 형사3부 소속 양민혁 검사는 출근하자마자 뉴스를 보고 황당해 한다. 그가 얼마전 심문했던 피의자 박수경이 자살했는데, 그 이유가 담당검사가 그녀를 심문하는 과정에서 성추행을 저질렀고 그 수치심을 이기지 못해 자살했다는 것이었다. 양 검사는 억울함에 주변 검사들과 상부에 항변하지만 먹혀들지 않고 징계를 받을 위기에 처한다. 이에 직접 해결할 것을 천명하고 박수경의 죽음을 둘러싼 내막을 파헤치기 시작한다. 그러던 중 그녀가 대한은행 헐값 매각 사건의 주요 증인이었다는 걸 알게 된다.
양 검사는 대한은행 헐값 매각 사건을 수사 중인 친구 최 검사에게 자초지종을 엿듣고, 몇 년 전 스타펀드라는 회사가 70조짜리 자산가치의 대한은행을 불과 1조 7천 억에 샀었고 이제 수조 원의 수익을 남기며 조건 없는 단순 매각하려 하고 있다는 사실을 파헤친다. 선배이자 대한은행 단순 매각 반대 공동대책 위원회 소속 서권영 변호사를 찾아가 보다 자세한 자초지종을 엿듣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스타펀드의 법률대리인 CK로펌의 김나리 변호사를 알고 그녀로 하여금 시선을 바꾸게 한다.
자신이 맡은 일에 결코 불법이 끼어들지 않다고 굳게 믿고 있던 김 변호사는 흔들리고, 그녀의 도움으로 양 검사는 사건의 핵심에 조금씩 더 깊이 다다른다. 그 과정에서 도청, 자택 침입, 신변 위조 등의 불법을 저지르지만 상대하는 자들이 너무 거대한 불법을 저지르고 너무 거대한 힘을 갖고 있기에 어쩔 수 없다고 말한다. 과연 그는 성추행 검사라는 억울한 누명을 벗을 수 있을까? 대한은행 헐값 매각 사건의 실체를 밝히고 대한은행이 단순 매각되는 사태를 막을 수 있을까?
금융사기극 실화로 메시지를 던지다
<블랙머니>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인 만큼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스타펀드(론스타)는 대한은행(외환은행)을 단순 매각하여 막대한 수익을 얻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허면, 정지영 감독은 왜 이 영화를 만들었을까. 개인적인 신념에 따른 사명감도 있었을 테지만, '영화보다 더 영화같은' 스토리에 매료되었을 테다. 그동안 그가 내놓은 이른바 '사회파 영화'들을 보면, 하나같이 사회적 논쟁을 촉발시킨 사건들을 가져와 확실한 메시지를 던지는 동시에 못지 않게 재미와 흥미 또한 확실했다.
이 영화도 우선 확실한 사회적 메시지를 던진다. 드러난 권력자 위에서 세상을 주무르는 진짜 권력자들이 해외 펀드 회사와 국내 로펌과 금육감독원과 대형 은행 등과 결탁해 '금융사기극'을 벌여 성공했다고 하는 실화를 가져와 묵직하게 전하는 것이다. 드러난 실체는 그렇고, 그 때문에 구속되어 죗값을 치른 사람들은 누구들이지만, '진짜' 실체는 이랬을지 모른다고 말이다. 또는 이랬을 거라고 말이다. 영화적 상상력으로 음모론을 구체화한 것이겠지만, 한편으론 픽션 매체만이 할 수 있는 일이자 해야만 하는 일을 한 것이겠다.
한편 영화에서 우리가 눈여겨 봐야 할 대상은 양민혁 검사이다. 그는 '막 프로'라는 별명을 가질 정도로 거침없이 돌진하는 게 특징인데, 그러다 보니 불법을 넘나들기 일쑤이다. 물론 그의 말마따라 상대하는 이들이 너무나도 큰 불법을 무기로 막강한 권력과 힘을 휘두르고 있기에 어쩔 수 없지만 말이다. 그렇지만, 그건 틀린 논리이자 방식이다. 불법을 불법으로 상대하다가는 세상이 어떻게 되겠는가.
거시적으로 보면 틀렸다고 단언하기가 힘들다. 그 비중과 무게가 크든 작든 똑같이 '불법'이라는 걸 저질러놓고, 누구는 벌을 받고 누구는 벌은커녕 돈과 권력과 힘을 더욱 공고히 하니 말이다. 누구라도 극 중 양 검사처럼 생각하고 행동하지 않는다고 확신할 수 있겠는가? 자기 한몸 희생해 나도 벌을 받을 테니 그들도 벌을 받게 해 달라고 한다면, 옳고 그름의 논리가 통용되지 않는 게 되지 않겠나. 정지영 감독이 영화를 통해 던진 작은 논쟁적 의제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절대적으로 단언하기가 쉽지 않다.
영화적 재미를 잡다
메시지만으로 <블랙머니>를 말하기엔 어폐가 있다. 이 영화는 충분한 영화적 재미도 갖추고 있으니 말이다. 그 중심엔 단연 '막 프로' 양민혁 검사가 있는데, 유쾌통쾌상쾌한 성격을 앞세워 막무가내로 들이대는 게 재밌다. '뭐 이런 놈이 있어?'라고 황당해 할 만하지만, 실제로 있을 법한 캐릭터임에 분명하기에 위화감이 거의 없다시피 하다. 조진웅 배우 특유의 허당인 듯 말랑한 듯 빈틈없이 돌직구 날리는 스타일에 부합한다.
영화는, 이런 류의 여타 한국영화들처럼 무게를 잡지 않는다. 긴장감 조성하는 OST, 카메라 워킹, 대사, 표정, 행동 등을 거의 배제한 채 관객으로 하여금 최대한 사건 자체에 빠져들어 집중할 수 있게 한다. 하여, 영화적 재미는 '충분할 정도'로만 그치고 더 나아가지 않되 주객이 전도되지 않게 궁극적으로 하려는 말을 하게 되는 것이다. 설득력 있게 전달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주 정확히 전달되었다는 건 확실하다.
사회적 논쟁 사건을 통해 메시지를 던지면서도 충분한 재미를 보장하는 영화를 보는 건 축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영화를 보는 다양한 이유 중 아주 큰 한 축을 차지하고 있으니 말이다.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의 '실체'일 거라고 생각되는 부분을 영화로 재미있게 들여다보는 기회. 부디 정지영 감독이 앞으로도 오랫동안 그 작업을 해 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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