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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 열전/신작 영화

시스템 자체를 바꾸고는 '연대'의 목소리를! <더 플랫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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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 영화 리뷰] <더 플랫폼>


영화 <더 플랫폼> 포스터. ⓒ 더쿱



'수직 자기관리 센터'라는 이름의 수직 모양 수감 시설, 가장 윗층인 레벨 0부터 끝을 알 수 없는 레벨까지 내려가 있다. 각 레벨당 2명이 배정되고 각각 원하는 것 하나씩을 소지할 수 있다. 하루에 한 번 때가 되면 '플랫폼'이라는 거대한 식탁이 레벨 중앙을 관통해 위에서 아래로 내려간다. 즉, 윗 레벨에서 먹다 남긴 걸 아래에서 먹는 것이다. 다만, 한 달에 한 번씩 레벨이 랜덤으로 바뀌어 배정된다. 


고렝은 큰 생각 없이 담배를 끊고 책 <돈키호테>를 읽고 싶어서 <돈키호테>를 들고 들어 왔는데, 같은 레벨에 수감된 노인 트리마가시는 정신병원 대신 이곳을 선택했다고 한다. 그는 칼을 들고 왔다. 이상주의자 고렝과 현실주의자 트리마가시의 첫 만남은 레벨 48로 괜찮은 수준이었다. 고렝은 '자발적 연대'라는 이름의 선한 의지를 믿는 반면, 트리마가시는 제한된 환경이 불신과 갈등과 죄를 만든다고 믿는다. 


한 달 뒤 그들이 눈 뜬 곳은 레벨 171, 고렝은 온몸이 꽁꽁 묶인 채 트리마가시의 먹잇감으로 전락할 위기에 처한다. 그는 과연 이곳에서 살아나갈 수 있을까? 그의 이상 어린 신념은 칼 앞에서 아무것도조차 될 수 없는 지경인데, 그럼에도 그는 '연대'의 신념을 저버리지 않는다. 누구도 죽지 않고 전체가 다 살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 시스템 자체를 전복할 기회를 만들고자 하는 것이다. 성공할 수 있을까?


패기와 영리함이 돋보이는 스페인 스릴러


영화 <더 플랫폼>은 스페인에서 건너온 정통 스페인 스릴러로, 큰 영화들이 모조리 개봉을 미루거나 개봉 형태를 바꾼 '코로나 시국'의 가장 큰 수혜자 중 하나이다. 해외 대부분에선 넷플릭스로 안방 극장을 찾았는데 크나큰 인기를 얻었다고 한다. 하여, 국내에 극장 개봉 형식으로 수입하였고 시국에 비해 청소년관람불가 등급에 비해 높은 흥행 성적을 이루었고 이루고 있는 중이다. 


90여 분의 짧은 러닝타임, 배경이 되는 곳 말고는 친절하기는커녕 설명과 이유를 거의 알 수 없게 한 편집, <설국열차>의 세로 버전이라고 할 만한 구조 등이 영화를 보기 전부터 눈길을 끌기 시작해 시종일관 눈을 떼지 못하게 한다. 가더 가츠테루-우루샤 감독의 장편 데뷔작다운 패기와 영리함이 물씬 엿보이는 작품으로, 작년 공개되자마자 전 세계 평단의 극찬을 받았다. 


일례로, 아카데미의 바로미터 중 하나로 일컬어지거니와 세계 4대 영화제로 우뚝 선 '토론토영화제'에서 미드나잇 관객상을 수상하고 세계 3대 장르영화제 중 하나인 시체스영화제에서 최우수작품상 등 4관왕을 차지했으며 이외에도 유수의 영화제에서 정통 SF영화가 받을 만한 특수효과상들을 받았다. 생각거리를 던지면서도 영화적 요소를 극대화하는 걸 소홀히 하지 않았다는 걸 알 수 있다. 


노골적인 상징과 사회철학적 메시지


영화는 전체적으로 단출한 형태를 띄지만 상당히 사회철학적인 메시지를 던진다. 종종 우리를 찾아와 반강제적으로 생각할 시간을 갖게 하는, 잘 만들어진 SF 스릴러를 연상시킨다. 어느덧 20년이 넘은 <큐브>가 대표적이겠다. 인간 존재를 상징하는 캐릭터들이 '큐브'라는 알 수 없는 공간을 탈출하는 이야기에서 노골적으로 정형화된 철학적 질문과 해석을 엿볼 수 있었다. 


<더 플랫폼>도 주요 캐릭터들에서 노골적으로 상징화된 사회철학의 한 단면을 볼 수 있다. 고렝은 자발적에서 폭력적 '연대'의 이상을 실현시키려는 인물이고, 트리마가시는 피할 수 없는 불신과 갈등이야말로 '현실'이며 살아가는 동력이라고 말한다. 그런가 하면, 이모구리는 본인이 시작한 동일한 배분 과정이 계속 이어질 거라고 믿고 앞뒤 없이 시도하는 인물이며 바라핫은 죽음을 불사하면서도 현자의 말을 따른다. 


극한의 상황에서 믿을 건 무엇인가, 믿어야 하는 건 누구인가, 믿고 싶은 건? 정녕 소름끼치는 건, 이 '수직 자기관리 센터'의 구조가 전하는 다분히 영화적인 상황이 우리네 평범한 삶과 세상의 구조와 별반 다를 바 없다는 깨달음이다. 물론 영화가 극단적이지만 하지만, 본질은 같다. 사방이 한없는 낭떠러지 같은 곳에서 누구 하나 믿을 수 없이 살아가며, 결정적으로 '위'에서 먹다 남긴 걸 '아래'에서 받아먹지 않는가. 경제활성화라든가, 기부라든가, 고용이라는 이름의 부림이라든가...


이 시대를 꿰뚫는, 자본주의와 개인주의


노골적인 상징과 사회철학적 단면 그리고 사회시스템의 메시지를 걷어내도 남는 게 있을까. 얼핏 가장 추상적일 수 있는 '인간 본성'이 남을 것이다. 극한 상황으로 가면서 선택하는 유일무이한 소지품, 극한 상황에 처해 행하는 짓... 칼, 책, 동물은 차라리 낫다. 무수한 돈다발을 가져온 이도 있다. 이는 다시 영화가 던지는 메시지적 '상징'으로 수렴된다. '자본주의'적 본성의 무용과 무가치를 향해 날리는 일침이다. 그런가 하면, 영화 말미로 가면서 고렝이 이상주의적 발상으로 행하는 '반(反)개인주의' 연대를 향한 몸부림도 중요하게 다가온다. 


자본주의나 개인주의나, 지금 이 시대를 정확히 꿰뚫는 두 사상이다. 필요한 사상이 아닌, 사장되어야 할 사상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겠다. 21세기 세계 최강대국 중 하나인 중국에서 시작되어 미국에서 최악의 결과를 낳고 있는 '코로나 19'의 역대급 퍼포먼스 앞에서 '자본'이 무슨 소용이겠는가. 자본만이 가장 중요하다고 외쳐온 인류에게 내린 형벌이라고 하면 너무할까? 


코로나 시대를 살아가며 가장 많이 듣고 있는 말이 '사회적 거리두기'이다. 4차 산업혁명이 한창인 디지털 초연결 시대에, 이 말은 큰 영향을 끼칠 것이다. 디지털 초연결을 가속화시키는 한편, 아날로그적 '개인주의'도 가속화시킬 게 자명하다. 지금까지 그래왔고 앞으로 더욱 심화될 당연한 이 현상이 과연 옳은지 되새겨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다. 헤어나올 수 없는 빈부격차를 더욱 가속화시켜 돌이킬 수 없게 되지 않을까. 


우린 어디로 가고 있을까. 유례없는 팬데믹으로 세상이 혼란한 가운데,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목소리를 내지 않으면 제대로 된 변화는 이루어지지 않고 세상은 더욱더 살기 힘들어질 것이다. 영화 속 고렝처럼 자기희생을 강요할 순 없지만, 그의 신념인 '연대'의 목소리는 드높여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높은 레벨로 올라가고 낲은 레벨로 내려가기 싫은 마음의 발현이 아니라 시스템 자체를 옳게 바꾸는 방법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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