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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 열전/신작 영화

재미와 메시지를 만족시키는, 세련된 오락영화 <벌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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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 영화 리뷰] <벌룬>


영화 <벌룬> 포스터. ⓒ세미콜론 스튜디오



1976~88년까지 38,000여 명의 동독시민이 서독으로 탈출하려다 실패했고 그중 460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1979년 독일민주공화국(동독) 청소년 헌신의 날 포즈넥 시, 평범해 보이는 피터네 가족은 하늘로 날아간 풍선이 서쪽으로 향하는 걸 보고는 퀸터를 만난다. 벌룬(열기구)도 준비되어 있으니 타기만 하면 독일연방공화국(서독)으로 탈출할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 하지만, 퀸터는 모든 걸 다 계산해봤는데 너무 위험하다는 결론에 다다른다. 결국 퀸터네는 남고 피터네는 탈출을 계획한다. 


어렵지 않게 벌룬을 타고 하늘로 오른 피터네, 문제 없이 탈출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국경을 얼마 남겨두지 않고 추락하고 만다. 아쉬움을 뒤로 하고 빠르게 대처해 뒷수습 후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하지만, 낌새를 눈치챈 비밀경찰이 움직인다. 피터네로서는 시시각각 조여오는 비밀경찰의 수사망을 피해 어떻게든 탈출을 해야 한다. 미국 대사관을 통해 접선해 보지만, 실패하고 만다. 


정말에 빠져 있던 피터네, 언제 찾아올지 모를 비밀경찰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시안부 인생인 것이다. 그때 큰아들이 용기를 불어넣는다. 시간은 턱 없이 부족하지만, 다시 할 수 있다고 해야 한다고 말이다. 늦었지만 늦지 않았다고 말이다. 그들은 퀸터를 다시 찾아가 설득한다. 이번에는 다 같이 탈출하자고. 퀸터는 군에 징집되어 함께 갈 수 없지만, 밤낮 없이 벌룬을 만들어 아내와 아들을 피터네 가족과 함께 탈출시킬 거라 공언한다. 비밀경찰의 좁혀 오는 수사망을 피해 불가능에 가까운 시간 내에 벌룬을 만들어 탈출할 계획을 세워야 한다. 과연 가능할까?


이 영화가 지금 다시 돌아온 이유


독일에서 건너온 영화 <벌룬>은 실화를 바탕으로 한다. 1979년 동독에서 벌룬을 이용해 서독으로 탈출을 시도한 이들이 있었다. 명백한 스포일러가 될 테지만, 극적으로 탈출에 성공하지 않았다면 영화가 만들어지진 않았을 테다. 이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가 이미 40여 년 전에 있었으니, 영화 역사상 유일무이한 칸 황금종려상과 미국 아카데미 작품상 동시 석권의 델버트 맨 감독 작품 <심야의 탈출>이 그것이다. 


이 영화가 지금 다시, 독일 영화로 돌아온 이유가 있을 것이다. 독일에선 2018년에 개봉했고 한국에선 2020년에 개봉했지만, 의미 있는 건 2019년이다. 영화 배경이 되는 해가 1979년이니 만큼 40주년이겠고, 독일 통일의 상징적 사건인 베를린 장벽 붕괴가 1989년에 있었던 만큼 30주년이 되겠다. 독일에선 가장 중요한 사건이었고, 세계 현대사에서도 가장 극적인 사건이었다. 


영화로 들어가 보면, 정치 사상적 메시지를 내보이려는 우를 범하지 않고 지극히 영화적으로 자연스럽게 내보이려 했다. 제목이 '벌룬'인 게 잘 어울리고 또 잘 통한 것인데, 자유를 위해 탈출하는 모습에 포커스를 맞추고 조여오는 비밀경찰의 수사망과 교차하는 모습에 집중하게끔 하였다. 영화적 재미를 최우선으로 했다는 걸 명백히 하였고 관객은 잘 알아차렸으며 서스펜스 듬뿍 담긴 스토리를 즐길 수 있었다.


충분히 세련된 오락영화


영화는 투박할 거라 지레짐작해도 충분할 독일과는 거리가 먼 세련됨을 자랑한다. 이야기를 천천히 탄탄하게, 하여 예상 가능하고 지루할 수 있는 계단식 단계를 밟지 않는다. 시작부터 벌룬을 이용한 동독 탈출을 시도한 것도 모자라 실패해 돌아와버린 것이다. 그리고는 불안과 절망 속에서 다시 절치부심, 영화 중반에 보다 심각하게 다시 시작된다. 


'쌈박한' 탈출 영화를 두 편 연달아 본 느낌이다. 비밀경찰의 용의주도한, 또는 연출과 편집으로 만들어낸 용의주도함으로 실패와 성공을 가늠하지 힘들게 한다. 시종일관 긴박감 넘치는 배경음악, 긴박감을 배가 시키는 주변인물들의 의심화, 의심을 현실로 만드는 분위기 조성, 손에 땀을 쥐게 만드는 교묘한 교차 편집 등 알게 모르게 영화적 기술을 총동원했다. 


문제는, 이렇게만 보면 영락없는 오락영화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목숨 걸고 탈출을 시도한 실화를 가져와, 긴장감과 긴박감과 쫄깃함 등을 오락적 요소로만 사용했을까 하는 점이다. 영화를 보는 흥미를 위해 메시지를 최대한 배제시킨 건 부인하진 않겠다, 아니 부인할 순 없다. 하지만, 곳곳에서 메시지를 발견할 수 있다. 제목부터 자유를 갈망하지 않는가. 


자유, 진실, 희망


오직 국가를 위한 충실한 일꾼으로 살아가며, 국가가 모든 이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있다는 걸 알아야 한다. 당시 동독의 전체주의 사상이다. 개인과 사조직의 권리는 없다. 하지만 인간이라면 본능적으로 자유를 갈망하지 않는가, 의무를 실행하는 만큼 권리도 가지고 싶지 않는가. 일반인들에겐 민주주의라든지, 사회주의라든지 하는 개념이 하등 필요하지 않았을 테다. 


자유를 향한 갈망과 곁가지로 뻗어나가는 개념이 있다. 그들의 탈출에 결정적 계기가 되는 것들, 진실과 희망이 그것들이다. 그들이 사는 나라는, 국가의 통제 아래에서 만들어진 진실이 진실한 진실을 대체한다. 인지하고도 남으면서도 폭거 앞에서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한편, 진실을 알고 또 말하고 싶고 자유를 만끽하고 싶은 희망이 그들을 부추긴다. 갈망과 열망이 지대해도 희망이 없다면 실행에 옮기지 못한다. 


올바른 건 끊임없는 되새김이 필요하다. 지금도 올바름은 제대로 작동되지 않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충분히 보여주었다고 생각한다. 메시지 전달에 힘 쓴 영화들보다 오히려 더 잘 와 닿았다고 본다. 간간이 찾아오는, 미국 아닌 제3세계 영화들을 기대해본다. 훌륭한 재미와 메시지의 두 마리 토끼를 잡는 데 충분한 결실을 본 영화들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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