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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위대한 소설을 잘 살리지 못한 영화 <위대한 개츠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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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위대한 개츠비>


영화 <위대한 개츠비> 포스터. ⓒ워너브라더스코리아



이제는 고유명사가 되다시피 한 저 유명한 '예술 작품' 영화 <물랑루즈>를 내놓은 바즈 루어만 감독, 일찍이 1992년 <댄싱 히어로>로 크게 성공하며 데뷔했지만 지금까지 30여 년 동안 내놓은 작품은 5편에 불과하다. 일면 믿기 힘든 과작(寡作)의 주인공인데 그의 스타일 때문인 것 같다. 하나같이 화려하기 그지없는 그의 영화들, <물랑루즈>에서 정점을 찍고 <오스트레일리아>에서 바닥을 찍었다. 그리고 가장 최신작이지만 6년 전에 내놓은 <위대한 개츠비>도 큰 반향을 일으키진 못했다. 


수많은 위대한 소설들이 영화로 재탄생 되는 과정에서 그 가치가 명멸했다. 소설과 영화가 훌륭한 시너지를 발휘하면서 함께 더 높은 곳으로 나아간 케이스도 있고, 여전히 소설만 고고히 자리를 지키고 영화는 나락으로 떨어진 케이스도 있다. 반면, 소설 본연의 지위가 떨어진 경우는 없다 하겠다. 다만, 원작으로서의 가치는 심히 훼손되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저런 케이스를 막론하고, 위대한 소설은 끊임없이 재탄생 되기 마련이다. <위대한 개츠비>도 그러했다. 


1974년 로버트 레드포드가 개츠비 역을 맡은 <위대한 개츠비>가 나온 적이 있다. 원작에 충실했다는 평을 들으며 호불호가 갈렸다. 물론 호불호 면에선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개츠비 역을 맡은 2013년작 <위대한 개츠비>에 비할 바가 아니다. 원작 충실 재연의 미션보다 감독 본인의 스타일에 몰두한 이 영화는, 극 중 개츠비의 극단성을 묻어버릴 혹은 살려줄 정도의 극단성을 자랑한다. 누군가는 그 황홀함과 화려함에 취해 한없이 좋아할 테고, 누군가는 정신없고 지루하다고 싫어할 테다. 


개츠비와 데이지, 그리고 닉


영화 <위대한 개츠비>의 한 장면. ⓒ워너브라더스코리아



줄거리는 소설 원작과 대동소이하다. 1922년 미국 뉴욕 외곽 웨스트에그, 월스트리트에서 일하는 닉 캐러웨이(토비 맥과이어 분)는 이웃집 대저택에 사는 개츠비(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분)와 친구가 된다. 그는 호화로운 저택에서 허구헌 날 호화로운 파티를 벌이는 베일에 싸인 인물로, 다들 정체를 궁금해 한다. 친구가 되어 그의 믿을 수 없는 이력을 들어 보니 알 만하다. 한편, 맞은편 이스트에그 해변엔 닉의 먼 친척뻘인 데이지와 톰 부부가 산다. 전통의 상류층을 형성하는 그곳과 개츠비를 오가며 닉은 진실에 다가간다. 


닉은 데이지네 파티도 개츠비네 파티도 모두 참석했는 바, 빠지게 되는 한편 경멸해 마지 않게 되었다. 와중에 개츠비는 그 이해할 수 없는 파티의 이유가 데이지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미 톰과 결혼한 지 5년이 지났고 아이까지 있는 데이지이건만, 개츠비는 데이지를 여전히 지극히 사랑하고 있다. 그들은 개츠비가 아무것도 없던 시절 잠깐 만났는데, 이후 개츠비의 삶은 오직 데이지를 향한 것이 되었다. 하지만 데이지는 개츠비를 사랑하는 이상으로 전통의 상류층으로서의 지위와 속물 근성을 버리지 못했다. 


개츠비는 데이지의 눈에 띄어 다시 만나 영원히 함께 하게 될 날을 기대하며 아무도 이해할 수 없지만 본인으로선 완벽한 계획을 짜서 시행해왔다. 이스트에그 해변 맞은편 웨스트에그에 대저택을 구입해, 멀리서도 소문을 듣고 찾아올 만큼 호화로운 파티를 열어 눈길을 끄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무일푼 개츠비가 어떤 짓을 해왔을지 상상도 가지 않는다. 결국 닉이 다리를 놔주어 개츠비와 데이지는 다시 만나게 되지만, 개츠비의 실체를 아는 톰이 가만히 두고 보고 있지만은 않는데...


외향에만 천착한 영화 <위대한 개츠비>


영화 <위대한 개츠비>의 한 장면. ⓒ워너브라더스코리아



20세기 최고의 미국소설로 추앙받는 F. 스콧 피츠제럴드의 소설 <위대한 개츠비>, 1929년 대공황 직전의 호화로운 1920년대 '재즈시대' 단면을 예리하게 파헤쳤다. 하지만 이 소설이 주는 섬뜩함은 당대를 넘어 계속되는 인간 욕망과 역사의 되물림 또는 반복에 있다 하겠다. 멀리 갈 필요도 없다. 지난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 직전이나 1997년 IMF 사태 직전이나 1980년대 일본 거품경제 직전을 떠올려 보라. 그 어느 때보다 호황의 날갯짓에 파묻혀 흥청망청 소비하며 놀지 않았는가. <위대한 개츠비>는 영원히 유효할 것이다. 


그런데, 영화 <위대한 개츠비>는 깊이 있는 시대상 관찰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은 듯하다. 호화로운 저택과 파티를 비롯 상류층의 기막힌 행각을 자연스레 시대와 조우시키지 못한 것이다. 그저 닉 개인의 깨달음에서 그치거나 개츠비 개인의 사사로울 수 있는 행동의 이유 정도로 그칠 뿐이다. 그런가 하면 오히려 그러한 소재들이 바즈 루어만 감독 특유의 화려한 스타일을 살리는 데 일조할 뿐, 반대로 화려한 스타일이 영화가 주려는 궁극적 메시지를 부각시키는 데 활용되지 않았다. 


이 영화에서 가장 큰 '영화적' 볼거리가 다름 아닌 화려한 스타일의 색감과 배경 등인 게 아이러니하다. 개인적으론 가장 아쉬운 부분이기도 하다. 누군가는 바로 그런 볼거리야말로 소설 아닌 영화만의 이유거니와 영화로만 즐길 수 있는 집합점이라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영화의 가장 큰 패착이라고 단언한다. 외향에의 힘을 빼고 스토리에 보다 천착했다면 완전히 다른 명작이 나왔을지도 모른다. 


확실한 캐릭터성, 그럼에도...


영화 <위대한 개츠비>의 한 장면. ⓒ워너브라더스코리아



영화 속으로 들어가 보자. 제3자 입장의 닉은 사실상 극을 이끌고 있지만 주인공이라 할 순 없다. 개츠비, 데이지, 톰 정도가 주인공일 것이다. 영화를 보다 보면, 소위 '나쁜 놈' 혹은 '불쌍한 놈'이 계속 바뀐다. 개츠비와 데이지는 서로 사랑했지만 이어지지 못했고, 데이지는 톰과 결혼한다. 바람둥이 톰 때문에 데이지는 괴로워 하지만, 대부호 톰의 아내로 만족하지 않을 수 없다. 개츠비와 데이지는 다시 조우해 예전과 같은 사랑을 이어가려 하지만, 개츠비의 실체를 알게 된 이상...


개츠비는 불쌍한 놈에서 나쁜 놈이 되었다가 다시 불쌍한 놈으로 귀환한다. 한 여자를 향한 사랑의 지극성이 그가 해왔던 파렴치한 짓의 함량을 뛰어넘은 것이리라. 물론 그 상대성은 개츠비가 상대하고 있는 데이지와 톰 부부를 위시한 전통 상류층이 해왔을 거라 짐작되는 짓과의 비교에서 비롯된 것이다. 일반적으로라면 개츠비가 한 짓을 용서하긴 쉽지 않다. 


데이지는 불쌍한 놈에서 나쁜 놈이 된다. 개츠비와의 사랑을 뒤로 하고 톰과의 불행한 결혼생활을 하는 데이지, 너무 불쌍해 보이지만 개츠비와 조우하고 나서야 비로소 알게 된 사실은 그녀도 어쩔 수 없는 속물이라는 것이었다. 속물에서 그치면 될 것을, 결국 자신을 지극정성 사랑한 개츠비를 이용해 먹고 처참하게 버린다. 애초에 나쁜 놈이었던 톰보다 더 나쁘다. 


톰은 나쁜 놈이다. 격조 높은 전통 가문의 일원으로,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돈을 쓰는 것도 모자라 천하의 바람둥이 행세를 한다. 그 사실을 데이지도 알고 닉도 안다. 하지만, 정작 데이지가 개츠비를 다시 만나는 건 참을 수 없다. 개츠비가 근본 없는 졸부이기 때문이다. 그가 자신과 격이 맞지 않기 때문에 데이지가 바람 필 대상이 되지 않는다고 보는 것이다. 


확실한 캐릭터성을 부여해 시대를 들여다보는 대신 개인에게 천착한 의도는 나쁘지 않았다. 나름 평면적이지 않고 입체적이었기에, 그들의 롤러코스터 같은 관계의 재정립과 그에 따른 캐릭터 호감도의 오르내림을 괜찮게 즐긴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 영화의 구조적 패착을 돌리기엔 터무니 없이 부족했다. 소설 <위대한 개츠비>를 봤다면 한 번쯤 볼 만하지만, 소설을 보지 않고 영화만 보는 건 강력하게 반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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