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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 열전/신작 영화

권력, 사랑, 여성을 앞세운 요르고스 란티모스식 불편한 비틀기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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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


영화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 포스터. ⓒ이십세기폭스코리아



18세기 영국, 프랑스와의 전쟁을 계속 해야 하는지 화친해야 하는지를 두고 국정이 둘로 나뉘어 치열하게 대립 중이다. 절대권력 여왕 앤(올리비아 콜맨 분)은 죽 끓듯 하는 변덕을 내뿜을 뿐 국정에 이렇다할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고 조력자에게 전적으로 의지하고 있다. 


여왕의 조력자 사라(레이첼 와이즈 분)는 어릴 적 앤 여왕을 구해준 후 궁전에 들어와 여왕과 우정을 나누며 비선실세로 사실상 권력의 최정점에서 군림하고 있다. 그녀의 당면한 과제는, 프랑스와의 전쟁을 계속하여 사령관인 남편 말버러 공작에 힘을 실어주는 것이다. 


사라에게 친척이라며 몰락한 귀족 여인 애비게일(엠마 스톤 분)이 찾아온다. 궁전 하녀부터 시작하는 그녀, 사라 몰래 여왕의 통풍을 완화시켜줄 약초를 캐와 눈에 들고는 사라의 전속 하녀가 된다. 이후 애비게일은 차츰 본색을 드러내 사라 아닌 여왕의 눈에 들고자 발악하는데... 


영화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이하, '더 페이버릿')는 한 나라, 아니 한 세계를 좌지우지하는 궁전에서 벌어지는 치열하고 치졸하고 치밀한 세 여인의 암투를 담았다. 거기에는 국정, 권력, 사랑, 진실, 질투, 욕망, 거짓 등의 온갖 것들이 판을 친다. 


'불편'이 깔려 있는 비틀기


요르고스 란티모스 특유의 '불편'이 기저에 깔려 있는 비틸기가 십분 발휘되었다. 영화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의 한 장면. ⓒ이십세기폭스코리아



<더 페이버릿>은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의 신작이다. 또 요르고스 란티모스다. 불과 몇 개월 전 <킬링 디어>로 찾아와 '역시 역시는 역시다'라는 말을 할 수밖에 없는 깔끔한 각본으로 명성을 잇더니, 그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찾아와 전 세계 시네필을 열광시켰다. 


그런데 이 영화, 이때까지의 란티모스 작품들과는 조금 다른 듯하다. 아니, 상당히 다르다. 란티모스 하면, 특유의 상상력을 극대화해 완벽한 신화적 비틀기를 완성시킨 대가가 아닌가. 그래서 영화보다 연극에 더 알맞는 듯한 영화들을 선보여 왔었다. 


반면 <더 페이버릿>은 스토리 라인 자체로는 별 얘깃거리가 되지 않는 권력 치정기를 내세우는 대신, 수많은 단편적 메시지들과 영화라는 형식으로만 활용될 수 있을 듯한 상상력 충만 비틀기를 시도했다. 그동안의 작품들과 다르지 않은 게 있다면, 기저에 '불편'이 깔려 있다는 점이다. 


스토리 내적으로 들어가기 전, 외적인 요소들인 카메라 구도, 카메라 렌즈 활용, 슬로우 모션, OST, 문자 정렬 등만 봐도 알 수 있다. 인물을 아래에서 위로 비추는 구도, 광각과 어안 렌즈를 활용한 화면 비틀기, 슬로우 모션 후 동일한 장면을 제대로 된 플레임으로 보여주기, 신경을 긁는 듯한 현악기 위주의 OST, 영화의 제목과 챕터 제목과 엔딩 크레딧을 장식하는 '균등 분할'의 문자 정렬 방식까지 하나 같이 불편하기 그지없다. 감독은 왜 굳이 그런 선택을 한 것일까. 


권력


'권력'이라는 키워드. 영화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의 한 장면. ⓒ이십세기폭스코리아



스토리 외적인 영화 장치적 요소들의 불편한 비틀기는, 자연스레 스토리 내적으로 이어져 숨막히고 내밀하고 불편하기 짝이 없는 '궁전' 공간의 실상을 보여주는 데 일조한다. '여기는 이런 곳이고 이런 사람들이 이런 짓을 하며 살고 있어.' 


영화는 '권력'이라는 키워드에서 시작한다. 당면한 가장 큰 과제인 프랑스와의 전쟁은 수단일 뿐이다. 이 과제를 놓고 여당인 휘그당과 야당인 토리당이 격전을 벌이는 와중, 앤 여왕과 조력자 사라는 당연히 여당과 긴밀하게 조우하고 있다. 


하지만, 앤은 죽 끓는 듯하는 변덕을 국정에서도 가감없이 흩뿌리곤 하는데 사라의 조언과 협박도 통하지 않을 때가 있다. 앤도 사람인 바, '절대권력'이라는 수식어에 걸맞는 권력을 휘두르고 싶을 것이다. 언제나 그녀의 곁에서 나라를 위한 조언이라는 미명 하에 '실질권력'을 휘두르는 사라 대신 말이다. 그때 나타난 애비게일의 존재는 앤에게 특별할 수밖에 없다. 


애비게일은 욕망의 화신이다. 귀족에서 천민으로 굴러떨어진 후 제자리를 찾으려는 욕망은 누구도 주체할 수 없다. 앤은 허울 뿐인 절대권력 대신 진실한 실질권력을 갖고자 애비게일을 이용하고, 애비게일은 사라를 대신해 실질권력의 자리에 오르고자 한다. 얼핏 둘의 합은 굉장히 잘 맞을 것 같은데, 여기에 또 다른 키워드 '사랑'이 있기에 쉽지만은 않다. 


사랑


'사랑'이라는 키워드. 영화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의 한 장면. ⓒ이십세기폭스코리아



앤과 사라는 사랑하는 사이다. 사라의 앤에 대한 사랑은 권력과 맞바꾼 필요조건처럼 보이지만, 우여곡절 끝에 어릴 때 왕이 되어 변덕과 후회와 슬픔만 남은 앤에게 사라는 사랑적 필요조건이다. 


그렇다고 사라의 앤에 대한 사랑이 권력으로만 치환될 순 없는 것이, 군사령관으로서 항상 멀리 떠나 죽음을 옆에 두고 사는 말버러 공작을 남편으로 둔 사라에게도 앤은 유일무이하게 모든 걸 나눌 수 있는 대상이라 하겠다. 역시 사랑적 필요조건이다. 


서로 사랑적 필요충분조건이 충만한 앤과 사라 사이에 애비게일이 껴들 수 있는 요소는 사랑 아닌 권력이 먼저겠다. 그녀는 그 둘 사이를 내외적 권력 요소로 흔들고는 이후에 사랑으로 다가간다. 물론 오직 욕망으로 점철된 거짓 사랑이라는 게 함정. 


사라는 앤에게 '화장한 얼굴이 오소리 같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다. 비록 권력이라는 어쩔 수 없는 등가교환 요소가 언제나 따라붙었지만, 그들 사이는 오랜 우정에의 믿음과 진실에 바탕한 냉정이 함께 했는데 말이다. 권력이 먼저인가 사랑이 먼저인가, 그것이 문제로다. 


여성


'여성'이라는 키워드. 그리고... 영화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의 한 장면. ⓒ이십세기폭스코리아



자세히 들여다볼 것도 없이 <더 페이버릿>을 지배하는 건 남성 아닌 '여성'이다. 극을 좌지우지하는 세 명의 여인, 앤과 사라와 애비게일이 그들이다. '그밖에' 휘그당 당수이자 총리인 고돌핀과 토리당 당수 할리와 애비게일을 따라다니는 마샴 대령이 있다. 


국정과 욕망의 암투가 판 치는 권력에의 향연, 진실과 질투의 치정적 요소 충만한 사랑, 그리고 이 모든 걸 아우르는 궁전을 오직 이 세 명의 여인만이 판을 짜고 휘두르고 좌지우지하고 있다. 또한 할 수 있다. 


이를 가장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사가 몇몇 있다. 앤 여왕의 '난 여왕이야', 할리의 '남자는 항상 예뻐야 해.', 사라의 '(할리를 향해) 마스카라 번졌네. 화장 고치고 올래요?', 애비게일의 '사내새끼가 어딜 감히 여자를 놀려요?' 


영화는 여성을 전면에 내세워 18세기 영국 궁전의 고증을 완벽히 해냈다. 궁전에서 생활하는 이들의 복장은 물론, 궁전 내의 공간과 가구들에서 전혀 이질감을 느낄 수 없었다. 어떨 땐 그 완벽함이 인물들을 집어삼킬 듯, 즉 인물들이 공간의 일부인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었다. 


권력과 사랑을 가지고 사투를 벌이는 여성들, 남성들을 앞도하는 절대권력을 향한 그들만의 인생을 건 치열함은 그러나 궁전이라는 한 나라의 한 세계의 역사 일부일 뿐이다. 이 나라와 이 세계가 그들로 인해 돌아가고 그들이 없으면 돌아가지 않을 것 같지만, 누구든 그 자리를 대체할 수 있고 대체할 것이다. 역사를 움직인 게 아니라 역사가 움직인 일부분으로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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