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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 열전/신작 도서

100년 전 탄생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흔적을 따라서... <임정로드 4000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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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임정로드 4000km>


<임정로드 4000km> 표지 ⓒ필로소픽



2019년 새해가 밝았다. 올해는 국가적으로 아주 중요한 한 해이다. 대한제국 고종 황제 승하 100주년, 3.1운동 100주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의열단 결정 100주년... 대한민국 근현대사 100년을 좌우할 큰 일들이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1919년에 일어났던 것이다. 


그런가 하면 100년 전 세계사적으로도 많은 일들이 있었다. 나치가 결성되었고 파리강화회의가 개최되었고 코민테른이 설립되었고 5.4운동이 있었고 중국 국민당이 결성되었다. 1919년은 그야말로 근현대 세계사의 분기점이었다. 


이중에서도 3.1운동 100주년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은 2019년 우리나라에 있어 가장 중요한 의제라 하겠다. 지난 2006년 서울대 이영훈 교수가 <동아일보>에 '우리도 건국절을 만들자'라는 칼럽을 기고하며 공론화되기 시작한 '건국절 논쟁', 1948년 8월 15일 민주독립국가 대한민국 재건일을 건국일로 보는 견해이다. 


견해는 견해일 뿐이라지만, 견해가 주장이 되어 어느 공고한 권력층에 받아들여지곤 사실이자 진실인 것처럼 탈바꿈해버린 면모가 심히 불편하고 걱정스럽다. 하지만, 대한민국 헌법 제10호에 '3월 1일 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과 4.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라고 명시되어 있는 만큼 사실 논란은 논란에서 그칠 뿐이어야 한다. 


그런데, 우린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잘 모른다. 아니, 거의 모른다. 김구, 안창호, 이승만 등의 아주 유명한 몇몇 독립운동가들의 면면과 상하이, 충칭 등에 위치해 있었다는 것 정도만 알 뿐이다. 조금 찾아보니 나온다. 임시정부 위치가 상하이부터 서울까지 9번 바뀌었다는 것, 국가 원수가 대통령, 국무령, 주석 체제로 바뀌었다는 것 등의 사실이. 


따라가보고 싶어지고 눈시울이 붉어지며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체험


2019년 대한민국 탄생 100주년을 앞두고 수많은 기획들이 우리를 찾아올 것이다. 지난해 8월 <오마이뉴스> 오마이 TV에서는 '로드다큐 임정'이라는 기획물을 선보였는데, 대한민국 임시정부 발자취를 좇아 6000km 이상 달린 이 다큐가 책으로 나왔다. <임정로드 4000km>(필로소픽), 책을 온전히 읽으면 직접 따라가보고 싶어지고 눈시울이 붉어지며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체험을 할 것이다. 


따라가보고 싶어지는 건, 이 책이 투철하게 임정로드 가이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오직 1919년부터 1945년까지 임정의 이동경로를 따라가며 QR코드에 공용지도를 넣어두어 쉽게 따라갈 수 있게 하였다. 여기가 어디인지, 어떻게 가는지 자세하게 알려주고 주의사항과 팁을 전하는 모양새를 취한다. 


눈시울이 붉어지는 건, 이 책이 전하는 임정투사 흔적의 기막힌 현재 모습 때문이다. 서울에 있는 효창원, 본래 왕가의 무덤이었던 이곳을 일제는 강제로 이장했고 효창공원으로 탈바꿈시키고는 골프장을 지어버린다. 해방 후 김구 선생은 세 의사와 세 임정 요인의 유해를 이곳으로 모시는데, 김구 선생이 돌아가시곤 이승만 정권은 묘역 입구에 효창운동장을 짓고 박정희 정권은 골프장 공사를 시도했다가 반대로 무산되어 반공투사위령탑을 세웠다. 이 애국지사들의 성지를 우린 잘 모른다. 이밖에도 수많은 임정투사 흔적들이 현재 표식 하나 없이 방치되어 있다.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체험을 하는 건, 이 책 곳곳에 소개되는 임정투사들의 기백과 용기 때문이다. 윤봉길 의사, 1932년 4월 29일 홍커우 의거를 일으켜 대한민국 독립운동의 역사를 바꾸었다. 의거가 성공하든 성공하지 못하든 자신은 반드시 죽을 수밖에 없다는 걸 알고 있었음에도, 위기에 처한 독립운동을 하나로 모으고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며 전 세계에 알리기 위한 사실상 유일 계책이었다. 그 전, 김구 선생과 마지막 식사를 함께 하고 서로 시계를 교환했던 장소로 유명한 곳이 상하이 원창리 13호이다. 


잘 알려지지 않은 임정투사들


모든 임정투사, 애국지사들의 흔적을 살피고 하나하나 자세히 설명하고 싶다. 그러긴 힘드니 만큼, 이 책 <임정로드 4000km>를 직접 읽을 것을 추천드리며 여기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은 임정투사 흔적의 기막힌 현대 모습과 임정투사들의 기백과 용기 사례를 소개해보겠다. 


임정의 기틀을 마련한 사람, 예관 신규식 선생은 잘 알려지지 않은 것 같다. 육군 출신의 그는 을사늑약과 경술국치 때 불의에 항거하기 위해 두 번이나 자살 기도를 했지만 기적적으로 살아 돌아온다. 그럼에도 망국을 피할 수 없었고 중국 상하이로 망명, 중국 혁명가들과 친분을 쌓고 한국 독립운동가와 잡지 발간 등 활동을 이어갔다. 한국과 중국 독립운동의 가교 역할을 한 것이었다.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세우는 데 구심점이 되어 법무총장, 외무총장, 국무총리에까지 올랐고 정식 외교사절로 중국의 국부 쑨원의 광동 호법정부를 방문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가 상하이 시절 거주했던 상하이 남창로 100농 5호 2층 단칸방에는 아무런 흔적도 남아 있지 않다. 반면, 건너편 집에 살던 중국 공산당 창시자 천두슈 선생은 확실한 표식으로 기리고 있다. 


백범 김구 선생과 더불어 대한민국 독립운동의 태산북두 약산 김원봉 장군, 그는 김구 선생보다 현상금이 컸던 유일한 인물이었다. 지금 가치로 320억 원이 넘는 금액. 하지만 우린 그를 여전히 잘 모른다. 그동안 수십 년 동안 의도적으로 그의 존재를 숨겨왔다. 그는 의열단을 창설하고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를 세웠으며, 조선의용대를 창설해 총대장을 맡았다. 이후 조선민족혁명당의 총서기도 맡았고, 조선의용대가 광복군에 편입된 뒤에는 광복군 부사령관을 역임했으며, 임시정부에서는 군무부장을 맡았다. 하지만 그도 갑작스레 찾아온 해방을 맞아 추스리기 힘들었고, 김구 선생에 이어 2진으로 귀국한다. 해방된 조국, 상상을 초월하는 현실, 1947년 여운형 선생이 피살당하고 김원봉 장군은 '남로당이 주도한 파업에 연루됐다'는 죄목으로 악질 친일경찰 노덕술에 끌려가 얻어맞고 1948년 스스로 북으로 넘어갔으며 1949년에는 김구 선생이 피살당한다. 그 사이 1948년 대한민국 남한 단독정부가 수립되는 것이다. 


여기는 중국 아닌 대만, 목숨을 바쳐가며 일제 왕족을 처단했지만 이름도 몰랐던 청년이 있다. '조명하', 그는 1928년 5월 14일 대만 타이중에서 단도 한 자루를 던져 의거에 성공했다. 일본에서 어렵게 공부하다가 상하이 임정에 투신하기 위해 길을 떠났다. 중간 기착지인 대만에 들렀는데 여비가 없어 상점에서 잠시 일했다. 그때 일왕의 장인이자 당시 육군 대장이었던 구니노미야 구니요시가 온다는 소식을 접했고 중국인에게 칼 쓰는 법을 연마했다. 그야말로 혈혈단신, 독을 바른 칼 한 자루로 그를 처단했다. 현장에서 사망하지 않았던 구니노미야는 이듬해 1월 패혈증으로 사망했다. 조명하는 그 사실을 모른 채 의거 5개월 뒤 타이베이 형무소에서 사망했다. 


개인적으로, 생일이 8월 29일이다. 8월 29일은, 다름 아닌 1910년 일제가 조선을 강제로 병탄한 날이다. 해방을 맞이한 8월 15일 만큼 의미를 두어야 하는 날이지만, 역사를 좋아하고 잘 안다고 자부하는 필자임에도 비교적 최근에야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무도 35년의 일제 강점기, 그 시작점에 대해서 알고 싶어 하지 않았고 당연히 알려주지도 않았다. 2019년은 주지했다시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3.1 운동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대한민국 독립운동사에서 큰 족적이 되는 해인 것이다. 그럴수록 잊혀졌던 인물과 흔적, 잊고 싶던 사건, 잊을 수밖에 없었던 시기를 잘 살펴봐야 하겠다. 부디 2019년을 계기로 진정한 대한민국 역사 바로 세우기를 실천했으면 하는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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