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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의 허위와 여성 삶의 본위를 폭로하다, 소설 <네 이웃의 식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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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구병모 소설가의 <네 이웃의 식탁>


소설 <네 이웃의 식탁> 표지. ⓒ민음사



나라에서 젊은 부부 대상으로 마련한 꿈미래실험공동주택, 편의 시설 하나 없는 고즈넉한 산속에 지은 열두 세대 규모의 작은 아파트로 깨끗하고 구조도 좋고 평수도 적당했다. 까다로운 입주 조건에 20여 종의 서류 항목을 갖추어야 했고, 경쟁률은 20:1에 달했다. 서류 항목엔 자필 서약서도 있었는데, 이곳에 들어갈 유자녀 부부는 자녀를 최소 셋 이상 갖도록 노력하겠다는 것이었다. 


이곳은 효내가 보기에 공동이라는 이름이 유난히 강조되는 느낌이 큰 반면 실험은 어디에 있는지 잘 알 수 없었다. 그녀는 '집'에서 일하는 프리랜서로 아이까지 돌보느라 너무 바빴다. 한편 요진은 홀로 집안 경제를 책임지고 있는데, 약사인 육촌 언니가 차린 약국에서 보조원으로 일하고 있다. 교원은 집에서 전업주부로 '일'하며 아이를 돌보고 있었고, 단희는 천성으로 장착된 활발함도 그렇고 이것저것 섬세하게 살피거나 돌보기를 즐기는 부녀회장 스타일이었다. 


이들 네 이웃, 정확하게는 네 아내의 크고 작은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부부, 아이, 이웃, 공동체, 자연... 단희의 남편 재강이 접촉 사고로 차를 센터에 맡기고 당분간 요진과 함께 카풀로 출근하면서 일어나는 일, 겉에서 보는 일과 안에서 일어나는 일의 차이가 너무나도 큰 효내의 경우, 제 몫으로 주어지고 대부분 스스로 선택했던 모든 일과 그것의 결과들에 환멸을 느끼는 교원의 이야기가 뒤따른다. 


공동체의 허위


소설 <네 이웃의 식탁>(민음사)은 데뷔 10년 차에 불과함에도 10권의 책을 쏟아낸 다작 소설가이자 판타지적인 이야기에 시니컬한 문체로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소설가 구병모의 신작이다. 소설은 '공동체'의 허위와 '여성 삶'의 본위를 폭로한다. 이 지극한 현실은 처음부터 끝까지 답답하게 만드는 동시에 서늘하게 만들 것이다. 


언젠가부터 공동체를 향한 로망이 생긴 것 같다. 행복지수가 한 없이 낮아진 데 대한 주요 원인 중 하나로 개인주의와 이기주의와 지역주의 팽배가 급부상하고 그 대안으로 공동체가 떠오른 이유 때문이리라. 더욱이 가족이 해체되고 1인 가구가 30%에 육박한 상황에서 공동체를 향한 선망은 더해갔다. 시민, 지역, 마을, 교육 등의 수많은 종류의 공동체가 만들어져 잘 운영되고 있다. 


세상을 일방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것들에 반해 자리를 잡아 가고 있는 공동체라는 개념. 드라마 <응답하라 1988>처럼 예전부터 자연스레 존재해왔지만 이젠 시스템적으로 만들어지고 관리되고 있다.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이유로 시작되어 선순환을 계속하고 있지만 완벽할 순 없을 것이다. 이 소설이 파고드는 건 바로 그 지점, 공동체의 단점 또는 약점과 개인주의의 장점 또는 강점이 만나는 지점이다. 


공동체에는 서로 간의 의무와 유대가 필수이고 공동으로 공유해야 할 이해관계 또한 필수이다. 그렇지만 공동체에 속한 모든 사람들이 성향과 성격과 환경이 다르기에 조율이 힘들 때가 다분하다. 그중 많은 것들이 절대적일 때가 있다. 즉, 의무와 유대를 지키지 못하고 이해관계를 공유하지 못할 때가 있는 것이다. 


그건 사소하다면 사소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경우가 많다. 재활용품 수거 차량이 왔을 때 한 군데 안 흩어지게 잘 모아서 담아 놓는 '공동의 일'을 함에 있어 누구는 하고 누구는 하지 않는다. 그것도 몇 번이나. 이럴 때 한 사람은 하지 않은 사람을 하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하지 않은 사람은 자신이 하지 '못했'다고 말한다. 거기에는 결코 서로 이해할 수 없고 이해하려고도 하지 않는 자신만의 이유가 있다. 


여성 삶의 본위


소설은 나아가 여성 삶의 실제를 낱낱이 파고든다. 소설가 구병모 자신이 두 아이의 엄마인데, 그래서 누구보다 잘 알 수 있지 않을까. 위에서 언급했다시피 소설의 주요 배경이 되는 꿈미래실험공동주택은 유자녀 부부만 입주할 수 있다. 고로 이곳에 들어와 있는 모든 부부에게는 자녀가 있고, '당연히' 자녀는 엄마의 손에 키워진다. 그런데 이곳의 네 아내 중 두 아내는 경제적 일도 하고 있다. 그리고 집에서 아이를 돌보고 집안일을 하는 것도 엄연한 '일'이다. 


여성의 삶은 곧 육아이다. 소설은 거기에 다름 아닌 공동체를 붙인다. 내 아이, 네 아이 할 것 없이 네 부부 모두 서로의 아이들 부모가 되어 육아 전쟁을 치른다. 이 얼마나 환희로운 생각이고 광경인가. 그 어떤 공동체보다 실체적이거니와 많은 도움을 주고 받을 수 있을 것 같다. 공동체의 의미를 가장 잘 구현해낼 수 있을 것 같다. 


소설이 규현해내는 육아 공동체의 실체는 마냥 환희롭지 않다. 99%를 만족시켰다고 해도 1%를 만족시키지 못하고 피해를 준다면 그건 과연 옳은 걸까? 완벽하다고 할 수 있을까? 훨씬 다수가 만족하였으니 괜찮을 걸까? <네 이웃의 식탁>이 주목하는 건 공동체에 속하게 된 개개인의 사정이다. 그건 개인주의도 이기주의도 아닌, 살다 보니 처하게 된 사정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육아라는 건 아마도 인간이 행하는 일 중 가장 고되고 어려운 일일 터, 더군다나 인간 한 사람이 지니는 성향이 모두 다른 만큼 개개인에 맞는 방법이 모두 다를 터, 공동 육아 또는 육아 공동체는 그 사랑과 책임의 강도가 훨씬 더 강하지 못할 시 가장 심한 부작용을 야기할 수 있다. 공동체의 허위와 여성 삶의 본위는 이렇게 만나 뒤엉킨다. 


아이를 가진 부부 간의 공동체는 세상이 아무리 바뀌었다지만 여성이 주가 될 수밖에 없는 구조, 그곳에서 여성의 삶은 오히려 더 피폐해질 수 있는 법, 피폐의 여파는 공동체의 균열로 이어지고 그 원인을 다시 여성에게 돌리는 순환. 공동체를 만능이라고 우러를 것이 아니라, 여성의 삶부터 그 구조적인 문제와 스스로를 옭아매게 되는 순환을 해결해야 한다. 이는 공동체가 아니라 여성의 삶에 문제가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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