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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 열전/신작 영화

세상에 나온지 얼마 되지 않은 아기, 그리고 제대한 나 <아기와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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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아기와 나>


이제 갓 제대한 도일 앞에 있는 건 아기 예준, 그리고 아내가 될 순영. 갑자기 순영이 사라졌다? ⓒCGV아트하우스



군대 전역을 앞두고 말년 휴가를 나온 도일, 엄마와 아내가 될 순영과 이제 갓 세상에 나온 아기 예준이 있는 집으로 향한다. 고아 출신인 순영이 엄마와 모녀지간처럼 지내는 건 좋은데, 합세해서 날라오는 잔소리는 듣기 힘들다. 도일은 결혼도 해야 하고 아이도 키워야 하는 가장인 것이다. 


엄마와 순영이 일을 나간 사이 예준이가 아파 병원에 갔다가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듣는다. 예준이의 혈액형이 자신과 순영 사이에서 절대 나올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도일은 이 사실을 순영에게 차마 얘기하지 못하지만, 운은 뗀다. 다음날 갑자기 순영이 사라졌다. 전화도 안 되는 건 물론, 평소 친하게 지내던 친구들까지 모른댄다. 


아는 사람들한테 부탁을 해 예준이를 하루이틀씩 맡기고 도일은 순영을 찾아 삼만리를 감행한다. 순영이에 대해 몰랐던 사실들을 하나둘씩 알게 되고, 마음은 조금씩 차가워진다. 예준이를 보는 스킬은 늘어나지만, 현실적으로 생각할 때 이대로 계속 지낼 수는 없다는 생각도 한다. 도일은 순영이를 찾을 수 있을까? 예준이는?


아기를 통해 성장해가는 나


세상에 갓 나온 아기, 역시 세상에 갓 나온 얼마전까지 군인이었던 나. 이 조합은? ⓒCGV아트하우스



영화 <아기와 나>는 단편영화계에서 인정 받은 손태겸 감독의 장편데뷔작이다. 엄마 뱃속에 있다가 세상에 나온지 얼마 되지 않은 '아기', 그리고 역시 군대라는 울타리 안에 있다가 세상에 나온지 얼마 되지 않은 '나'의 조합이 의미심장하고 또 자못 흥미진진하게 다가오는 영화다. 


10여 년 전쯤 나온 장근석 주연의 아기와의 명량동거를 다룬 영화 <아기와 나>, 20여 년 전쯤 나온 부모님을 잃은 주인공이 아기인 동생을 돌보며 일어나는 그린 애니메이션 <아기와 나>가 자연스레 생각나기에, 말 그대로 세상에 아기와 나뿐만 남은 암울한 와중에 현실을 헤쳐나가는 코믹&드라마를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영화는 아기와 '함께' 성장해가는 주인공의 이야기라기보다 아기를 '통해' 성장해가는 주인공의 이야기라고 하겠다. 이제 갓 군대를 전역한 어린 나이임에도, 자신이 '저질러놓은' 일을 자신이 직접 책임져야 한다는 엄혹한 현실. 아니, 그건 엄혹한 게 아니다. 세상에 나온 건 자신의 선택이 아니지만, 그 이후부턴 수많은 선택의 연속일 뿐이다. 현실은 그 선택과 결과일 뿐이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최악의 상황, 어른이 되는 통과의례


최악의 상황에서 맞이한 결혼, 출산, 육아의 어른이 되는 통과의례. ⓒCGV아트하우스



영화의 포커스는, 감독의 시선은 도일에게로 맞춰져 있다. 특히 제목과 조금 맞지 않는듯한, 그래서 으레 그러려니 했던 식상한 기대와는 달리, 도일이 사라진 순영을 찾는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물론 그 사이에, 그 와중에 예준이가 차지하는 비중이 커지는 게 사실이다. 결국 도일은 예준이를 택하게 될 거라는 결말이 눈에 선하고 말이다. 


흔히,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고 직접 길러봐야 비로소 어른이 된다고 말한다. 일종의 통과의례라고 할까. 그만큼 결혼과 출산과 육아가 인간에게 가장 무게감 있게 다가오고 가장 막중한 부담감으로 짓눌려 오거니와 가장 처절하게 힘든 순간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오직 그것만이 어른이 되는 방법은 아닐 테지만 말이다. 


영화는 그 힘든 통과의례를 그야말로 최악의 상황에 처한 어른아이 한 명이 어떻게 헤처나갈 것인지 함께 기대하고 절망하고 응원하고 답답해 하며 보여준다. 확실한 감정이입을 선사하는 동시에, 절대 주인공처럼은 되기 싫거니와 되지 말아야겠다는 교훈(?)도 선사한다. 


아기가 없더라도 살아가기 힘든 막막한 현실, 앞날이 창창한 청춘이기에 무서울 게 없을 것 같지만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청춘이기에 무섭지 않은 게 없기도 하다. 그 옆에 아기란 차라리 판타지의 영역이다. 자신을 버리고 아기를 위해 살아가는 인생이 되는 건 가능하지만, 그럼에도 진정 아기를 생각한다면 자신의 손에서 떠나보내야 하지 않겠는가? 하고 생각하게 만드는 또다른 냉혹한 현실 앞에서 치를 떨며 무릎을 꿇는다.


수작은 아닐지언정 기대감은 들게 한다


기대감을 들게 하는 게 수작이라고 인정받는 것보다 좋을지도? ⓒCGV아트하우스



저예산 독립영화 중에 유난히 수작이라고 평가맞는 것들이 많다. 지극히 감각적이고 시대와 소통하는 작가와 연출자의 시각이 고스란히 담겨있기 때문일 테다. <아기와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길이남을 수작, 한 해 또는 한 시대를 대표하는 수작 독립영화라 말할 순 없다. 많은 생각을 하게 하지도 않는다. 


대신, 감독이나 배우들에게 기대감을 들게 한다. 수많은 감독들과 배우들이 길이남을 명작 한 작품만을 남기고 홀연히 자취를 감추는 경우가 다반사인데 반해, 이들은 앞으로도 자주 또는 종종 모습을 드러내 이전보다 더 좋은 모습을 보일 것 같은 기대를 주는 것이다. 그런 기대감을 가장 확실하게 심어준 장면이 마지막 장면인데, 그 프로페셔널한 롱테이크가 기억에 남는다. 


인생에 길이남을 큰일로 세상을 이제 막 경험한 이들의 마지막 장면은, 그 뒤에 이어질 수없이 많은 질곡들을 암시한다. 개인적으로 얼마전에 큰일을 저질렀고 누군가의 도움 아닌 도움으로 간신히 저지할 수 있었지만 아직 완전히 해결된 건 아니다. 엄청난 압박이었는데, 실현할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배운 게 많다. 


누구나 이렇게 살아간다. 겪고 겪고 또 겪으면서. 그 와중에 뭐라도 얻으면 좋으련만 대부분 남는 건 상처 뿐이다. 그래도 잊어서는 안 되는 건, 그 자체가 성장의 일면이라는 것이다. 이 영화가 수작(秀作)이 아니라도 좋다. 이 영화는 나에게 손수 경험해보지 못한, 경험해보지 못할 경험을 건네준 수작(手作)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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