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리뷰] <머니볼>


영화 <머니볼> ⓒ소니



2014년 프로야구 정규 시즌이 어느새 끝나가고 있다. 9월이면 가을 야구에 출전할 수 있는 팀들이 정해질 것이다. 이 와중에 눈에 띄는 팀이 있다. 지난 2009년부터 (2011년 6위를 제외한) 꼴찌를 도맡아 하고 있는 '한화'이다. 한화 팬이 아닌 이도 응원하게 된다는 비참한 행로의 이유는 무엇일까. 


프로 스포츠의 세계에서 자본은 절대적이다. 많은 자본은 좋은 선수와 감독, 코치진을 영입하고 좋은 시설을 확보하며 좋은 복지를 제공할 수 있게 해준다. 이는 곧바로 좋은 성적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한화라는 팀은 절대 자본이 부족하지 않다. 이는 자본이 절대적으로 중요하지만, 한편 자본을 뛰어넘는 무엇이 존재하고 있다는 얘기도 된다. 


영화 <머니볼>은 자본을 뛰어넘는 그 무엇을 찾아내고 그 무엇으로 자본이 상대적으로 턱없이 부족한 팀을 일으켜 세워야 했던 메이저리그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의 단장 '빌리 빈'의 실화를 다루었다. 만년 최하위에 그치고 마는 오클랜드를 2000년 이후 매년 포스트시즌에 오르는 강팀으로 변모 시킨 그 무엇은 무엇이었을까? 


빌리 빈(브래드 피트 분)은 현역 시절 유망주로만 전전하다가 오클랜드에서 현역을 은퇴한 후 단장에 임명된다. 그가 단장이 되었을 때 오클랜드는 만년 최하위에 그치고 마는 팀이었다. 그는 구단주를 찾아가 돈을 요구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언제나 '우리 팀에는 돈이 없다' 였다. 그는 돈이 없는 구단의 성적을 올려야 하는 과제를 떠안게 되었다. 하지만 코치진 및 스카우터들과의 회의는 실망 그 자체였다. 돈이 없어 좋은 선수를 떠나보내고 후임 건을 물색하는 회의랍시고 그들이 하는 말들은 다음과 같았다. 


"덩치도 크고 빠르고 재능도 있고 인물도 좋아. 턱도 멋지지. 스윙도 근사하잖아. 방망이 끝이 공에 맞는 순간 그 경쾌한 파열음이 온 구장에 울려 퍼지지. 타석에 400번만 서면 좋아질 거야. 훈련이 필요하지만 눈 여겨 볼만해. 애인이 못생겼어. 자신감이 없다는 증거지. 아냐, 딱 보기만 해도 카리스마가 물씬 풍긴다고. 인물도 훤하고."


이따위 수다를 듣고 팀의 미래를 결정할 수는 없었다. 빌리 빈은 직접 나선다. 그리고 그 첫 번째 시도가 예일대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피터 브랜드의 영입이었다. 그는 야구에 경제학을 접목시키기 시작한다. 모든 걸 하나의 숫자로 요약해 그 수치를 오클랜드의 방식으로 해석, 선수의 진짜 가치를 평가하는 시스템이다. 기존의 코치진이 회의를 통해서 다양한 이유로 선수들을 평가했던 것과는 다르게 오로지 실력에 관한 통계 만으로 평가했다. 



영화 <머니볼>의 한 장면. ⓒ소니



영화는 지금부터 어느 정도 예상된 시나리오대로 움직인다. 모두의 반대에 부딪힐 것이 뻔한 이 시스템을 이용해 좋은 성적을 보여줘야 한다. 반드시 처음에는 좋은 성적을 보여주지 못할 것이다. 그럴 때 단장 빌리 빈이 나서서 팀을 바로 잡을 것이 분명하다. 그가 어떻게 새로 찾아온 이 위기를 넘기는 지를 감상하는 게 이 영화의 포인트 중 하나이다. 


오래된 스카우터가 그의 혁신적인 전략을 반대하며 떠나는 장면에서 남긴 말은 퍽 인상적이다. 절대 틀린 말이 아니다. 그의 말대로 메이저리그는 오랜 세월 동안 그렇게 해왔다. 수많은 사람들이 '혁신'이라는 '허황' 아래에서 전략을 짜왔지만 실패하고 말았을 것이다. 


"야구가 숫자나 과학이었다면 누구나 할 수 있지. 하지만 우린 일반인들에겐 없는 우리만의 경험과 직관이 있어. 쟨 예일대에서 경제학을 전공했지만, 우린 야구계에 29년을 몸담아왔어. 쟤 말을 들어선 안 돼. 야구인들만 아는 설명 못 할 뭔가가 있다고! 자넬 포함한 우리 스카우터들이 150년 간 해온 걸 못 믿나?"


팀은 믿을 수 없는 패배를 당하고 해체되며 빌리 빈도 단장에서 해고되어 메이저리그에서 영원히 추방 당할 것인가? 아니면 그의 모든 것을 건 승부가 팀을 믿을 수 없는 연승으로 이끌 것인가? 이 영화는 많은 감동을 준다는 것만 일러둔다. 



영화 <머니볼>의 한 장면. ⓒ소니



그리고 그 감동의 대미를 장식하는 이는 역시 빌리 빈이다. 그는 보스턴 레드삭스에서 파격적인 대우의 조건으로 스카우트 제의를 받는다. 그는 성인이 아니다. 세계 프로 스포츠 중에서도 가장 많은 돈이 오가는 미국 메이저리그의 한 팀의 단장인 것이다. 영화의 극후반부는 그의 고민으로 채워진다. 그때 그의 마음을 흔드는 딸의 노랫소리.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네. 인생은 미로, 사랑은 수수께끼. 어디로 갈까? 떠나려 해봤지만 혼자서 자신 없어. 왜 그럴까? 난 길을 잃은 작은 소녀. 두려움을 남에게 보이긴 싫어. 인생은 너무 어려워. 그래서 난 우울해. 이제 걱정은 떨쳐버릴래. 그냥 쇼를 즐길 거야. 늦춰야만 해. 멈춰야만 해. 안 그러면 심장이 터질 테니까. 내가 아닌 그 무엇이 되려고 애쓰는 건 너무 힘들어. 나는 사랑에 목마른 바보. 언제나 사랑을 원하고 또 원하지."


이 영화는 야구 영화의 형식을 띠고 있지만 경영에 관한 영화이며 휴먼 드라마이다. 야구계의 스티브 잡스라는 타이틀을 갖고 있는 빌리 빈의 혁신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과정을 실화와 거의 동일하게 그려내고 있다는 점에서 페이스북의 설립자 마크 주커버그를 그린 <소셜 네트워크>가 생각나기도 한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머니볼>이 더 가슴에 와 닿는 이유는 '스포츠'라는 소재 때문일 것이다. 그건 사람들이 스포츠에 열광하는 이유가 동일하다. 스포츠를 통해 대리 만족을 느낄 수 있고 결정적으로 스포츠에 자신의 인생을 투영할 수 있다. 실패와 성공, 오르막과 내리막, 땀과 눈물, 환호와 야유. 그리고 잊을 수 없는 짜릿함. <머니볼>은 이런 스포츠의 면면까지도 놓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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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굿 윌 헌팅>



<굿 윌 헌팅> ⓒ미라맥스 필름



옛말에 '한 명의 진정한 스승과 열 명의 진정한 친구, 그리고 백 권의 좋은 책'을 말할 수 있으면 성공한 삶이라고 하였다. 그만큼 인생에서 진정한 스승을 만나기란 정말 힘든 법이다. 그런데 이 옛말에서 간과하고 있는 것이 있다. 바로 부모의 존재이다. 부모를 '두 명의 진정한 스승'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부모의 교육은 한 사람의 평생을 좌우한다. 


부모라는 최고의 스승에게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했다면, 아니 오히려 부모에게서 어마어마한 정신적 육체적 피해를 입었다면 어떤 인격이 형성될 것인가? 그에게는 진정한 스승과 친구, 그리고 사랑이 누구보다도 필요하다. 영화 <굿 윌 헌팅>은 진정한 스승과 친구, 그리고 사랑을 만난 어느 불운한 천재 청년의 이야기를 그린다. 이 이야기를 따라가 보자. 


미국 보스턴 남부 빈민촌, 그리고 MIT. 양립할 수 없을 것 같은 이 둘이 한 청년에 의해 엮어진다. 

윌 헌팅(맷 데이먼 분)은 남부 빈민촌에서 살며 MIT에서 청소부로 일하고 있다. 어느 날 그는 게시판에 적어 놓은 수학 문제를 아무렇지도 않게 풀어 버린다. 사실 그 문제는 수학과 학생들 중에서 그 누구도 풀 수 없는 어려운 문제였다. 수학과는 발칵 뒤집히고 램보 교수는 그 학생을 찾아낸다. 


헌팅이 천재라는 걸 알게 된 램보는 그를 본격적으로 키워보려 하지만, 헌팅은 그의 뜻대로 행동하지 않는다. 매일같이 사고를 치는 건 둘째 치고 너무나 어려운 문제를 너무나 쉽게 풀어버리는 게 문제였다. 헌팅에게는 그 어려운 문제들이 아무런 가치가 없었다. 그보다 그의 닫힌 마음을 여는 게 먼저였다. 램보는 오랜 친구이자 라이벌 숀 맥과이어 교수(로빈 윌리엄스 분)를 찾아간다. 


헌팅에게는 아픈 과거가 있다. 어렸을 적 당한 심한 가정 폭력의 피해자인 것이다. 그로 인해 그는 어느 누구도 믿지 않고, 어느 누구에게도 마음을 열 수 없게 되었다. 그와 비슷한 아픔을 안고 살아가는 비슷한 처지의 친구들이 있을 뿐이다. 척키 슐리반(벤 애플렉 분)은 진정한 친구이다. 



<굿 윌 헌팅>의 한 장면. ⓒ미라맥스 필름



언젠가부터 스승의 개념이 '멘토'라는 개념으로 대체된 것 같다. 스승은 아무래도 다가가기 힘들고 일방적인 가르침의 개념이 있는 반면, 멘토는 상대적으로 동등하고 일방적으로 가르친다는 개념보다 상담이나 조언에 더 힘이 실린다. 천재 헌팅은 스승보다는 멘토가 필요했던 것 같고, 램보는 헌팅에게 멘토가 될 수 없었다. 과연 맥과이어 교수는 헌팅에게 멘토가 될 수 있을까?


헌팅은 맥과이어를 램보와 다를 바 없는 사람이라 생각하고 맹공을 퍼붓는다. 상담 시간에서 자신의 얘기를 해보라는 맥과이어의 말에 천재적 지식을 자랑하기에 바쁘다. 상담은 아무런 진척도 없이 끝나기 마련이고 서로 지쳐간다. 


"너는 모든 것을 다 아는 척하면서 내 그림을 통해 내 삶을 망쳐버렸어. 너는 고아야. 만약 내가 '올리버 트위스트'를 읽었기 때문에, 고아로서 겪었던 너의 어려움과 고아인 네가 어떻게 느끼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고 떠들면 어떻겠느냐?... 개인적으로, 나는 네가 떠들어 대는 얘기에 하나도 관심이 없다. 그런 얘기들은 엿 같은 책만 들추면 다 나오는 얘기들이니까. 그런 것으로부터는 '너'에 대해서 아무 것도 알 수가 없어... 나는 '너'를 알고 싶어. 네가 누구인지, 어떤 사람인지. 바로 그런 얘기들이 내 마음을 확 잡아 끌지. 그러나 넌 그런 얘기를 하지 않아."


맥과이어의 진정한 마음을 알게 된 헌팅은 그동안 숨겨왔던 자신의 이야기를 끄집어낸다. 맥과이어라면 모든 걸 이해해줄 거라 믿었기 때문에. 그리고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길을 인도해줄거라 생각했기 때문에. 천재 헌팅은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에게 결여된 것은 엄청 많았다. 하필 그것들이 삶에 있어서 정말 중요한 것들이라는 것. 사랑, 우정, 믿음, 신의...



<굿 윌 헌팅>의 한 장면. ⓒ미라맥스 필름



"내 생애 최고의 날이 언젠지 알아? 내가 너희 집 골목에 들어서서 네 집 문을 두드려도 네가 없을 때야. 안녕이라는 말도, 작별의 말도 없이 네가 떠났을 때라고. 적어도 그 순간 만은 행복할 거야."


헌팅의 진정한 친구 슐리반의 대사는 심금을 울리기에 충분하다. 친구의 앞날을 축복해주는 것이 진정한 친구의 덕목이라는 걸 안다고 해도 실행에 옮기는 게 쉬운 일인가? 한편 맥과이어 교수는 헌팅과의 인생 상담을 마무리 지으며 마지막 당부를 잊지 않는다. 사랑을 찾아 나서라고 말이다. 


"그때 말을 걸지 않았으면 난 평생 후회했을 거다. 낸시와의 18년 결혼 생활도, 아내가 아파서 6년이나 일을 관뒀던 것도, 또 병상을 지켰던 2년도 난 후회하지 않아. 그깟 시합 못 본 건 아무 것도 아냐, 후회하지 않아."


헌팅은 사랑, 우정, 믿음, 신의와 같은 보이지 않는 무형의 인생 필수품들을 얻을 수 있을까? 또는 되찾을 수 있을까? 이 영화는 헌팅이 성장해가는 과정을 섬세하게 그려낸다. 자칫 이런 류의 영화가 가질 수 있는 '오글거림(?)'이 전혀 없다. 진지한 말은 진부하지 않은 명언이 되고, 그들이 흘리는 눈물은 내게서도 흐르고 있다. 그리고 그의 인생을 응원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지난 2월 '필립 세이모어 호프만'을 떠나보내고 6개월 만에 '로빈 윌리엄스'를 떠나보냈다. 언제나 환하게 웃으며 영화 안팎에서 누군가의 멘토가 되어줄 것만 같았던 그가 말이다. 비록 전성기는 지났을 지 몰라도 <익스펜더블>의 오래된 영웅들처럼 언제나 건재함을 과시할 것만 같았는데, 솔직히 믿기지 않는다. 그가 안녕이라는 말도 작별의 말도 없이 떠나가 버린 지금, 그 순간 만은 전혀 행복하지 않았다. 그는 우리에게 '진짜' 그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던 것일까? 안타깝고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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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아마데우스>



<아마데우스> ⓒ워너브라더스



중학교 음악 수업. 음악 선생님께서 뜬금없이 영화를 보여주신다. 음악 수업 시간에 영화를 보여주는 건 절대적으로 어떤 이유가 있을듯. 아마도 음악 관련된 다큐멘터리 정도가 아닐까? 수업 시간이 한 시간 정도이니 이번 시간과 다음 시간, 그리고 더 시간을 들여 영화가 끝날 때까지 보여준다고 하신다. 도대체 어떤 영화기에?


일단 다큐멘터리는 아니고 그냥 영화이다. 분위기는 우중충하고 배경은 중세 이후의 서양 같아 보인다. 다 죽어가는 할아버지가 나오고 신부가 그를 면회한다. 그는 신부에게 고해성사를 하듯 옛일을 회상한다. 그러기 전에! 그는 능숙한 솜씨로 피아노를 치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신부에게 물어본다. 이 멜로디를 아시는가? 모릅니다. 그럼 이건? 흠... 몰라요. 그래요? 그렇다면 이건! 아...아... 이건 알아요! 앞의 두 개는 내가 작곡한 거라오. 그리고 당신이 아는 그건 이제부터 내가 얘기할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짜르트'가 작곡한 것이라오. 



영화 <아마데우스>의 한 장면. ⓒ워너브라더스



영화 <아마데우스>는 지금으로부터 30년 전인 1984년 세상에 나왔다. 그리고 이후 지금까지 나온 수많은 음악 관련 영화 중에서 최고로 남아 있다. 15년 전 중학교 음악 수업 시간 때 아무런 사전 정보나 기대 없이 보게 된 이 영화는 나에게는 최고의 영화로 남아 있다. 음악 장르 영화의 한계를 넘어섰다는 것이다. 정말로 좋은 영화이며 완벽한 영화이다. 스토리, 캐릭터, 배경. 그리고 음악까지. 


영화를 이끌어 가는 화자이자 초반의 다 죽어가는 할아버지는 살리에르(머레이 에이브러햄 분)이다. 그는 음악에 대한 사랑과 자질, 성공에 대한 열망으로 그 누구보다 노력해 궁중음악장의 위치까지 오른다. 천재는 아니지만 노력 하나로 그 자리에까지 오른 그의 모습은 인간적으로 끌린다. 하지만 어김없이 그에게 찾아오는 위기. 인간의 노력으로는 한계가 있는, 신의 대리인 천재 작곡가 모짜르트(톰 헐스 분)의 출현이다.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는 전 인류적 천재. 지금까지 인류사에 수많은 방면에서 수많은 천재가 출현했지만 그만큼 유명하며 압도적인 천재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모짜르트의 출현으로 살리에르의 위치는 흔들리며 결정적으로 왕의 관심이 그에게로 쏠린다. 요즘 말로 모짜르트는 살리에르에게 '넘사벽(넘을 수 없는 사차원의 벽)'이라고나 할까. 



영화 <아마데우스>의 한 장면. ⓒ워너브라더스



그런데 살리에르를 더욱 비참하게 만드는 건, 모짜르트가 음악 외적으로는 굉장히 자유분방하고 순수하다는 점 때문이다. 가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고 세상물정을 모르며 음악적 재능을 음악 외적으로 끌어오지 못하는 것이었다. 살리에르가 보기엔 그런 모짜르트가 굉장히 오만방자해 보이고, 오히려 가식적으로 보였다. 살리에르는 모짜르트를 증오하고, 신을 증오한다. 


"나는 그때부터 신을 믿지 않았소. 당신의 도구로 그런 오만방자한 녀석을 선택하시고선 나에겐 그것을 인정할 수 밖에 없는 능력만 줬기 때문입니다. 그건 부당하며 매정해. 맹세코 당신(신)을 매장시키겠소." 


이 영화가 갖는 가장 큰 매력은 두 가지라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 음악 영화다운 출중한 음악이다. 이 영화의 OST는 유명한 지휘자인 '네빌 마리너'의 지휘로 완성되었는데, 클래식 애호가들 사이에서도 명반으로 뽑힐 정도이다. 모짜르트에 대한 가장 적확한 해석과 연주를 영화에서 들을 수 있는 기회는 없을 것이다. 


모짜르트와 살리에르의 캐릭터 충돌은 이 영화가 갖는 가장 큰 매력 두 번째 요소이다. 신의 대리인이자 신이 낳은 최고의 천재 모짜르트. 하지만 그는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 재능을 가졌는지 알지 못한다. 아니, 알 수가 없다. 반면 인간의 노력으로 성취할 수 있는 최고의 재능 살리에르. 그는 죽었다 깨어나도 모짜르트를 이길 수 없다. 그리고 그는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어서 괴롭다. 



영화 <아마데우스>의 한 장면. ⓒ워너브라더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고 했던가. 살리에르에게 모짜르트는 그 반대이다. 살리에르는 모짜르트는 미워하되 그의 음악을 미워할 수 없었다. 살리에르는 모짜르트의 음악을 사랑했다. 그의 음악을 갖고 싶었고 계획을 짠다. 그는 어떻게 모짜르트의 음악을 뺏을 것인가? 그의 재능과 반비례하는 가난을 이용하면 될 터였다. 평범한 그가 할 수 있는 건 그것 뿐이었다. 


"난 평범한 이들의 대변인이라오."


이 영화는 처음 볼 때 영화를 보고, 두 번째는 음악을 듣고, 세 번째는 살리에르의 입장에서 봐야 한다. 그 이후에는? 계속 곱씹어 보며 우리네 인생을 되돌아 봄이 좋을 것이다. 영화도 인생이라 말하며 음악도 인생이라 말한다. 그렇다면 인생은 무엇이라 말할 수 있을까? 평범하기 그지 없는 우리 인생을 무엇이라 표현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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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장이머우(장예모) 감독의 <황후화>


중국은 무협, 역사 영화를 매년 발표해왔다. 1980~90년대에의 무협 영화는 엄연히 ‘홍콩’이 지배해왔고, 홍콩이 반환된 뒤에는 중국이 바통을 이어받았다. 그리고 전혀 다른 스타일의 무협 영화들을 탄생시킨다. 홍콩 무협 영화가 스토리와 배우의 액션 위주에 조악한 장치들이 주를 이루었다면, 2000년대 이후의 중국 무협 영화는 역사와 조우하며 ‘대작(大作)’의 면모를 풍겼다. 엄청난 물량 공세 앞에 다른 것이 끼어들 수 없었다.


그 뿌리는 장예모 감독의 2002년 작 <영웅>이라 할 수 있다. 그 전 해인 2001년에 나온 이안 감독의 <와호장룡>이 굉장히 절제되고 섬세한 스토리와 아름다운 액션 신으로 기존의 무협 영화 스타일을 계승하면서 한편으로 수준을 월등히 끌어올렸다면, <영웅>은 아름다운 영상미와 어마어마한 물량 공세로 사람들의 눈을 사로잡았다.


개인적으로 중국 무협 영화의 정통성 면에서나 스토리, 영화적 측면에서조차 <와호장룡>에 더 높은 평가를 주고 있지만, 아쉽게도 시간이 지나 이런 스타일은 거의 사장(死藏)되어버리다시피 하였다. 반면 <영웅>의 스타일은 무협역사 장르로 개발되어 중국 무협 영화의 맥을 이어가고 있다.


장예모 감독은 2004년에 <인연>으로 자신 만의 스타일을 공고히 한다. 이어 2005년에 첸카이거 감독이 <무극>, 2006년에 펑샤오강 감독이 <야연>을 선보이며 물량공세 무협역사 영화의 힘을 과시했다. 그리고 2006년에 장예모 감독은 450억 원의 <황후花>로 찾아온다. 1000억 원은 우습게 여기는 할리우드에 는 비할 바가 못 되지만, 당시까지 중국 영화 역사상 최고의 액수였다. 물론 여기에는 주윤발, 공리, 주걸륜 등 초호화 배우들의 몸값이 상당 부분 차지할 것이다. 


초호화 배우와 명장의 만남... 역대 중국 영화 최대 제작비까지


영화 <황후花> ⓒ CJ 엔터테인먼트


영화 <황후花>는 돈을 들인 만큼 화려함의 극치를 자랑한다. 때는 당나라 후기, 3년간의 국경 수비를 뒤로 하고 황제(주윤발 분)는 둘째 아들 원걸(주걸륜 분)을 데리고 귀환한다. 이에 황후(공리 분)는 황금빛 찬란한 황제 귀환식으로 맞이하려 한다. 하지만 황제는 급작스러운 귀환에도 모자라 급작스러운 귀환식 취소를 단행한다. 뭔지 모를 위화감과 불안감이 팽배하는 황궁.


한편, 황후는 3년 사이에 첫째 아들 원상(루예 분)과 정을 쌓았다. 외로워서일까. 아니면 황제와의 사이에서 어떤 문제가 있었던 것일까. 황제가 황실 주치의에게 명해 황후에게 계속 독약을 먹게 해 죽이려는 한다는 사실에서, 둘 사이에 어떤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점점 미쳐가는 황후와 이를 보고만 있을 수 없는 원걸. 사실 원걸 만이 그녀의 진짜 아들이었다. 다른 두 명의 왕자 원상과 원성에게는 죽은 생모가 있었다.


어느 날, 황후는 밀정에게 시켜 독약의 정체를 알게 된다. 그리고 뜻하지 않게 밀정의 사정과 정체를 알게 된다. 그 밀정의 정체는 원상과 원성의 생모였다. 그녀는 황제에게 배신당해 일가가 몰살당하고 자신만 겨우 살아났던 것이다. 이를 덮으려고 그녀를 죽이려는 황제와 그녀를 살리려는 황후.


결국 그녀는 죽고 말지만, 죽기 전에 황제 가족이 모여 있는 9월 9일 중양절 전야 황궁에서 모든 사실을 폭로한다. 이 폭로로 원상과 원성 형제는 각각 원성과 황제에게 죽임을 당하고, 원걸은 사전에 준비했던 반란을 시도한다. 금빛 찬란한 갑옷으로 무장한 반란군은 황후가 열성을 다해 장만한 국화꽃 모양의 스카프(?)를 메고 황궁으로 돌진한다.


황제가 보내는 마지막 경고였던 황제의 깃발을 쓰러뜨리는 원걸. 10만 명의 황금빛 갑옷 반란군은 계속 전진한다. 검정빛 갑옷의 황제군은 성(城)과도 같은 엄청난 크기의 방패로 황궁을 막은 후, 빠져나갈 문을 막고 반란군보다도 훨씬 많은 수의 병사가 활시위를 당긴다. 그 엄청난 기세는 한 순간에 무너진다. 뭔가를 보여줄 것만 같았던 엄청난 대규모 전투신도 속절없이 끝나버리고 만다. 그리고 영화도 곧 끝난다.


<황후花>는 참으로 허무한 영화다. 계속보고 있으면 질릴 정도로 너무나 화려한 배경에 비해, 막장과도 같은 스토리 그리고 너무나 허무한 결말은 실망을 불러일으킬지 모른다. 장예모 감독은 <영웅>, <연인>으로 이미 색채와 이미지에서 일가견이 있음을 증명했다. <영웅>에서는 장면마다 달라지는 갖가지 색깔로 인물의 심리를 표현했고, <연인>은 주로 자연을 상징하는 초록색의 이미지로 영화에 영감을 불어넣었다. 


'물량공세'밖에 안 보이네... 여운 아닌 아쉬움만 남는 영화


영화 <황후花>의 한 장면. 금빛과 검정의 선명한 대비. ⓒ CJ 엔터테인먼트


<황후花>는 중국 역사상 가장 화려하고 한편으로 대단했던 당나라의 화려함을 상징하듯이, 모든 걸 황금으로 칠해놓았다. 반면 황제군과 황제의 비밀암살단은 검정 일색이다. 이는 무너져가는 당나라 말기를 상징한다 하겠다. 막장 대서사시의 끝을 장식한 건 황금색이 아니라 검정색이었던 것이다.


아마도 장예모 감독은 이 모든 걸 계획한 것 같다. 영화를 보고 난 후의 허무함을 당나라 말기의 국가적 허무함에 치환시키려는 의도인 듯하다. 그 중심엔 황제의 허무함이 있다. 배신을 하여 황제의 자리에 올랐건만 한 시도 편하지 않은 생활. 다시 돌아온 배신의 칼 끝. 그리고 자신의 손으로 죽여야만 했던 아들. 그 어느 것 한 개도 허무하지 않은 것이 없다.


그럼에도 이 영화는 장예모 감독의 패착이다. 허무함을 표현하려고 일부러 화려함의 극치를 선보이려 함은 이해할 수 있으나, 오히려 이도저도 아닌 것이 되어 버렸다. 어떤 깨달음을 얻기 전에 막장 스토리에 매몰되어 버렸다. 막장 스토리와 더불어, 음악과 연기 등 어느 한 곳에서도 명작의 면모를 풍기지 못했다.


전작과 차별화를 꾀하려 했다는 의도가 보이나 분명 장예모 감독의 스타일에 맞지 않았다. 그의 스타일에 분명 거대한 신과 물량공세적인 면이 있지만, 세밀한 스토리와 색채로 표현되는 그만의 감정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의 영화 특유의 여운이 아닌 아쉬움 가득한 여운이 남는 영화였다.


현재 무협역사 장르의 영화는 비슷한 스타일로 계속 나오고 있지만, 장예모 감독은 <황후花>를 마지막으로 더 이상 찍지 않고, 또는 찍지 못하고 있다. 영화 내용이 고스란히 투영된 것 같은 느낌마저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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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오래된 리뷰]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 ⓒ워너브라더스


1965. 일리노이주 박람회가 열렸던 때, 남편과 함께 두 남매가 박람회에 가게 된다. 아내는 4일 간의 휴가를 즐기기 위해 이들이 어서 떠나주기를 바란다. 너무나 단조로운 아이오와 생활. “조용하고 사람들도 참 착하다.” 이게 전부인 삶이다.

 

그녀가 꿈꿨던 미국에서의 삶은 결코 아니다. 교사 일을 하다가 남편과 아이들 뒷바라지를 위해 그만두었지만 후회가 밀려온다. 남편은 무뚝뚝의 전형이고, 아들은 엄마의 부탁을 잔소리로 들으며, 딸은 제멋대로다.

 

전설적인 명배우 클린트 이스트우드와 메릴 스트립이 열연한 1995년 작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는 이렇게 시작된다. 반복되는 지루하기 짝이 없는 일상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게 되는 부인. 잔잔한 일상에 파문이 일어날 시간이다. 그런데 시간은 4일 밖에 없다. 과연 그녀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까?


내셔널 지오그래픽 사진작가 로버트 킨케이드(클린트 이스트우드 분)는 아이오와에 있는 로즈먼 다리를 향하던 중 프란체스카 존슨(메릴 스트립 분)의 집에 들렀다가, 길을 묻고는 같이 다리로 향한다. 그들은 돌아와 같이 저녁 식사를 한다.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의 한 장면. ⓒ워너브라더스



담배도 피고 술도 마시는 여자. 꽃을 꺾어주고 은근슬쩍 스킨십을 하는 남자. 농담을 주고 받으며 마음껏 웃는 남과 여. 운명적 사랑에 빠진 남과 여. 그들의 감정선을 따라가다 보면, 나도 모르게 중년의 사랑(불륜)을 옹호하게 된다. 


그 어떤 판단이나 도덕이 개입되지 않아요. 그저 그대로...있는 그대로죠. 정말 아름다워요."

 

그녀는 꼭 이성과의 사랑이 아닌, 변화가 필요 했다. 일종의 일탈을 꿈꾸었다고 할까. 다른 세계의 새로운 사람과의 대면으로 설렌 것이다. 그녀는 그와 대화하고 속마음을 털어놓고 같이 요리를 하고 밥을 먹고 차를 마시고 술 한 잔 하고 산책을 하고 사진을 찍고 블루스도 추고 키스하고 목욕하고 그의 몸을 탐닉한다. 그녀는 그렇게 한 명의 여자가 된 것이다. 그 두려움이 동반된 설렘과 떨림이 싫지 만은 않다. 


모든 곳이 자신의 집처럼 느낀다는 남자의 말. 이것은 내 것이 여자, 이 남자는 내 것. 그런 경계선이 너무 많죠.” “모든 사람이 가족을 이루어야 하는 건 아니잖아요?” “미국의 가족 윤리에 불만이에요. 온 나라가 최면에 걸린 것 같아요.” “자신을 속이지 말아요, 프란체스카. 당신은 단순한 여자가 아니에요.”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의 한 장면. ⓒ워너브라더스



불안해하고 초조해하고 죄스러움을 느끼는 여자에게 남자는 "괜찮아요. 나쁜 짓을 하는 게 아니에요. 자식들에게 숨길 일이 아니에요"라고 말한다. 둘 간의 확고한 차이가 발견되는 대화가 계속되지만 그 둘은 서로를 향한 사랑을 느낀다. 


이제는 헤어져야 할 시간이다. 짧은 만남을 뒤로 하고 남자는 떠난다. 하지만 여자는 참지 못하고 새벽에 로즈먼 다리를 찾아가 그에게 보내는 편지를 남겨 찾아오게끔 한다. 이후 그들은 4일 간의 여행을 떠난다. 그 둘 만의 여행. 동네에 있으면 어떤 수모를 당할 지 알 수 없다. 

 

초원과 다리... 낯익은 사람들과 아픈 기억에서 벗어나기로. 그 하루가 원하는 곳으로 우릴 데려가게 뒀다.”


여자는 전에 없이 여성스러워진다. 그들은 그 몇 일 간의 휴가로 평생을 살아갈 힘을 얻는다. 하지만 여자가 남자의 모든 걸 알고 싶고 자신 만의 것으로 만들고 싶어 하는 것과 다르게 남자는 그걸 구속으로 생각한다. 남자는 모든 사람들을 알고 싶어 하는 것이다. 남자에게 있어 그 여자는 지나 가는 사람에 불과할지 모른다. 


“당신이 떠나고 나면 난 평생 여기 앉아서 무슨 일이 있었나 하겠죠. 당신은 또 어디 가서 멋진 친구들과 얘길 하고 있겠죠. 내 얘기까지."


그들은 함께 떠날 것을 결심한다. 남자도 여자의 진심을 받아들이고 삶의 방향을 바꾼 것이다. 여자는 여행용 짐을 싸고 그 날 밤으로 바로 떠날 준비를 한다. 많은 생각을 하게 되는 저녁 식사. 결국 여자는 같이 갈 수 없다. 그녀에게는 자신의 삶보다 남편과 아이들, 가족의 삶이 더 중요하다. 그녀는 나름의 방식으로 사랑을 선택한다. 그와 함께 가면 평생 죄를 짓는 마음으로 살아가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남자와의 사랑은 더 이상 사랑이 아니게 된다. 그를 사랑하기에 보낸다.


다음 날 돌아온 가족들. 아내이자 엄마로 돌아온 여자. 집안일을 하며 그에 대한 생각을 떨쳐낸다. 어느 비 오는 날, 남편과 함께 외출을 하게 된다. 도중에 남자를 보게 된 여자. 남자가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그녀를 찾아온 것이다.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의 한 장면. ⓒ워너브라더스



비를 맞고 서 있는 남자, 터져 나오는 울음을 멈추지 못하는 여자. 당장이라도 자동차 문을 열고 그에게 가고 싶지만 결국 가지 못한다. 그렇게 그들은 서로 다시 만나지 못할 길을 가고, 평생 추억 만을 간직한 채 살아간다. 훗날 늙었을 때 남편이 말한다. 


"당신 꿈이 있었다는 거 알아. 그걸 못 이뤄줘서 미안해. 당신을 정말 사랑해."


남편은 직감적으로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녀의 숨겨온 옛 일을. 안정과 모험. 정착과 방랑. 자신의 삶과 가족의 삶. 확실한 느낌은 일생에 딱 한 번 오는 것이지만, 우리는 대부분 그 느낌을 애써 외면한 채 살아간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르다고 그 누구도 판단할 수 없다. 다만 서로를 조금만 더 알아주고 이해해주고 보듬어주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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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타인의 삶>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 5년 전인 1984년, 독일 민주 공화국(이하 '동독')은 국가보안부 비밀경찰(이하 '슈타지(stasi)')의 감시 하에 있었다. 이들은 정식 직원만 10만 명에 이르는 대형 조직을 갖췄고, 명확한 목적을 가지고 행동하였다. 사회주의의 적이자 국가의 적을 색출하기 위해 1600만 명의 동독 시민들에 관한 모든 것을 알아야 한다는 목적이었다.


전체주의 하에서의 시민들은 자유와 인권을 보장받지 못하였던 것이다. 감시와 미행, 도청은 일상이 되었고, 그로인해 누군가는 타인의 삶을 살았고 누군가는 타인에게 삶을 빼앗겼다. 영화 <타인의 삶>의 배경이다. 



<타인의 삶>의 한 장면. 슈타지는 모든 것을 알아야 했다. 비즐러는 드라이만 부부를 감시 도청하는 임무를 맡았다. ⓒ SYcomad



"Be human"


비즐러(울리히 뮤흐 분)는 슈타지의 대위이다. 그는 비인간적인 고문의 대가이자 당을 위해서 맹목적으로 신념을 고수하는 냉혈한이다. 그는 장관의 명령을 받은 친구이자 상사인 그루비츠의 명령으로 유명한 극작가 드라이만(세바스티안 코치 분)을 감시·도청하기 시작한다. 또 하나의 중요한 목적은 드라이만의 아내이자 배우인 크리스타(마르티나 게덱 분)을 감시하는 것. 그녀는 장관의 내연녀이기도 했다. 비즐러는 이 사실을 알지 못했다. 


어느 날 크리스타는 집으로 오는 길에 장관에게 붙잡혀 성을 상납하고 만다. 장관의 차에서 내리는 크리스타를 보고 비즐러는, 이 사실을 드라이만이 알게 하기 위해 벨을 조작한다. 이 사실을 알게 되었음에도 드라이만은 그녀를 추궁할 수 없었다. 단지 떨고 있는 그녀를 꼭 끌어안아 줄 뿐이었다. 냉혈한 비즐러는 이 모습에 생전 겪어보지 못한 연민을 느낀다. 


드라이만의 스승인 예르스카가 자살로 삶을 마감했을 때, 그 충격을 피아노 연주로 삵히려 한다. 이 슬픈 피아노 소리를 듣고 비즐러는 급기야 눈물을 흘리고 마는 것이었다. 이후로 그는 차츰 변해간다. "인간적으로" 어느 꼬마와의 대화를 엿들어보자. 그의 변한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아저씨, 슈타지 맞죠? 우리 아빠가 그러는데 슈타지는 나쁜 사람이래요. 막 사람들도 잡아 간대요."

"너네 아…(빠)니, 공 이름이 뭐냐?"

"아저씨 바보예요? 공에 무슨 이름을 붙여요?"

"…." 



<타인의 삶>의 한 장면. "네...공 이름이 뭐니?" 비즐러는 변해가고 있었다. "인간적으로" ⓒ SYcomad



영화는 자칫 잘못하면 동독 전체주의의 상징인 슈타지를 옹호하고 있다고 비춰질 수도 있는 내용을, 슈타지 전체가 아닌 한 인간에 초점을 맞춰 잘 피해가고 있다. 그로인해 더욱 극대화되는 감동을 느낄 수 있고 화합의 메시지를 받을 수 있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쉰들러 리스트>를 떠올려 보자. 주인공 오스카 쉰들러는 유태인이 운영하는 공장을 인수하기 위해 나치 당원이 되어 온갖 비리를 서슴지 않게 저지른다. 유태인을 노예처럼 부려먹더니 유태인 회계사 스턴을 만나 눈을 뜬다. 온갖 비리를 유태인을 수용소로부터 구해내는 데 쓴 것이다. 나치 당원을 옹호하고 있다고 비춰질 수 있는 내용을, 한 인간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잘 피해가면서 감동으로 승화시킨 것이다. 냉혈한 비즐러와 기회주의자 오스카 쉰들러가 변해가는 모습을 비교하는 것도 재미있을 듯하다. 



<타인의 삶>의 한 장면. 드라이만은 크리스타를 추궁할 수 없었다. 단지 떨고 있는 그녀를 안아줄 수 밖에... ⓒ SYcomad



예술가의 고뇌


드라이만에게는 그를 포함한 반체제 예술가들에게도 스승과도 같은 존재인 예르스카가 있었다. 그는 연출금지를 당해 "밀가루 없는 방앗간처럼 아무것도 아닌 삶"을 살아가고 있었는데, 모두들 그를 싫어했다. 그 또한 모두를 싫어했다. 진정한 반체제 예술가라면 자신처럼 연출금지를 당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 잘 살고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드라이만은 예르스카의 정신을 받들었지만, 예술을 계속 하고 싶었다. 그는 반체제의 연극을 올리지 않으며 자신은 아무런 잘못이 없다는 것을 천명하지만, 외려 당당히 서양 서적을 읽으며 의심을 사기도 한다. 


크리스타는 장관과의 내연관계가 지속되지 않는 한 자신이 더 이상 무대에 설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녀는 자신의 예술가적 기질을 믿지 못하고 불법으로 신경정신과 약물을 복용하고 있기도 한다. 계속되는 장관과의 관계와 약물 복용으로 지칠 대로 지쳐가는 그녀. 드라이만은 그녀에게 장관과의 관계를 알고 있다는 사실을 털어놓고 가지 말라고 붙잡는다. 그와의 관계를 끊더라도 충분히 혼자 힘으로 무대에 설 수 있다고 하면서 말이다. 이에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당신은 예르스카와 같은 종말을 원치 않아요, 그리고 저도 원치 않고요. 그리고 그 때문에 지금 전 나가는 거고요."


그녀 앞에 나타난 비즐러. 오랜 시간 그들의 삶을 도청하면서 이미 상당히 동화된 상태였다. 그는 그녀에게 "전 당신의 관객이거든요. 당신의 최고의 예술가예요."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긴다. 그녀는 장관이 아닌 드라이만에게로 간다. 이 때문에 그녀는 어떤 결말을 맞이하게 될지….


예술 자체에 대한 사랑을 견지하는 예술가와 예술의 목적을 탐구하는 예술가가 있다고 하면, 크리스타는 전자에 속할 것이다. 우리나라의 역사를 봐도 수많은 예술가들이 존재했고, 불행하게도 그들은 몇몇은 외부의 압력에 시달렸다. 외국의 침략 속에서, 독재 속에서 그들은 각자의 신념에 맞게 행동했다. 누군가는 자신이 올바르지 않은 행동을 한다는 걸 알면서도 그렇게 할 수 밖에 없게 만드는 시대를 원망했을 것이다. 예술가의 고뇌가 읽힌다.


휴머니즘은 살아 있다


목숨이 오가는 서슬 퍼런 압재속에서도 휴머니즘을 견지한 사람들은 여전히 존재한다. 비즐러는 급기야 보고서를 조작하고 상관에게 거짓말을 일삼는다. 누군가가 익명으로 반체제를 옹호하는 기사를 써서 동독을 발칵 뒤집어 놓았는데, 그가 드라이만이라는 의심을 품은 상관이 드라이만의 집을 두 번에 걸쳐 압수수색하자 중요 증거인 타자기를 빼돌리기도 한 것이었다. 대신 그의 경력은 거기서 끝나고 말았다.


한편 크리스타는 계속되는 예술가로써의 고뇌와 남편인 드라이만을 사랑하는 마음 사이에서 어쩌지 못해하다가 장관에게 불법 약물 복용죄로 붙잡히고 만다. 거기서 크리스타는 비즐러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고 풀려난 것이었다. 이에 비즐러는 자신을 희생해 크리스타를 살리고 동시에 드라이만을 살리려 했다.


그는 드라이만을 구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결국 크리스타를 구하지는 못했다. 크리스타는 혼란한 정신을 주체하지 못하고 뛰쳐나갔다가 차에 치여 죽고 만 것이다. 자신이 살아 있으면 언젠가는 또 남편 드라이만을 궁지 속으로 몰아넣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비록 그녀는 죽었지만 그녀의 휴머니즘은 살아남아 드라이만에게로 전달되었다. 


이 영화의 휴머니즘은 마지막에 그 결실을 맺는다.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고 비즐러는 "굴 같은 지하에서 편지들을 증기 다림질하는 일"을 그만두고 편지배달부로 일한다. 반면 드라이만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나날들이 계속된다. 어느 날 드라이만은 장관을 만나 자신의 집이 완벽하게 감시・도청 당했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전해 듣고, 비즐러의 존재를 자각한다. 


비즐러를 만나려 했지만 돌아서는 드라이만. 얼마 후 성공한 작가가 된 드라이만. 길을 가다가 서점에 들어서는 비즐러. 책의 제목은 "선한 이들의 소나타"였다. 예르스카가 선물해준 악보의 제목이자, 드라이만의 연주를 듣고 비즐러가 눈물을 흘렸던 그 소나타였다. 책의 앞면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이 책을 HGW XX/7에게 바칩니다."


HGW XX/7은 비즐러의 프로젝트 코드 명이었다. 그 책은 비즐러를 위한 책이었던 것이다. 누군가가 죽기 전에 준 선물이 누군가를 울렸고 누군가의 삶을 변화시켰고 다시 일어나게 해주는 힘이 되어줬으며 그 선물이 모티브가 되어 책을 지었고 그 책은 누군가와 누군가를 이어주는 휴머니즘의 매개체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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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미드나잇 인 파리>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 ⓒ소니픽쳐스



이런 말을 자주하는 지인이 있다. “1930년대에 태어나고 싶다. 모던걸과 모던보이가 거리를 활보했던 그 낭만적인 시대에.” “조선 시대에 태어나고 싶다. 그때 태어났으면 뭐가 되어도 되었을 텐데.” “중세시대 유럽에서 태어나고 싶다. 산 속에서 세상 모르게 소박한 삶을 살 수 있을 텐데.” 끝없이 이어지는 과거 지향적 발언에 두 손 두 발 다 들곤 한다. 그래도 어느 정도 이해는 간다. 조금은 다른 의미로 나도 과거 지향적이니까.

 

나는 역사를 좋아하는 편이다. 한국 역사 교육의 폐해인지는 몰라도, 연도나 인물 그리고 사건 등의 역점을 두고 있다. 그래서 몇 년도에 누가 어떤 사건을 일으켰거나 휘말렸는지 그 자체가 너무나 재미있고 흥미롭다. (물론 머리가 커짐에 따라, 그 의미를 해석하려는 경향이 있지만 말이다.) 그렇지만 그때에 태어나고 싶거나 하지는 않는다. 나는 단지 유명한 무엇에 대한 갈증이 있나 보다.

 

파리를 사랑하고 과거를 동경하는 한 남자

 

우디 앨런의 2011년 작 <미드나잇 인 파리>는 파리를 사랑하고 과거를 동경하는 한 남자의 이야기이다. 영화는 시작과 동시에 3분을 할애해 파리의 아침부터 밤까지의 하루 전경을 달달한 음악과 함께 보여준다. 그리고 바로 주인공의 파리에 대한 예찬, 예찬, 예찬.

 

끝내주네! 저길 봐! 이런 아름다운 도시는 세상에 다시 없을 거야. 파리에 자주 못 오니까, 비 내리는 이 도시가 얼마나 멋진지 사진 한 장 찍자. 1920년대의 이 도시를 상상해봐. 20년대 파리를. 빗속에 작가들과 화가들을.”

 

전 시나리오 작가이자 소설가 지망생인 주인공 길(오웬 윌슨 역)은 파리를 예찬하며 약혼자 이네즈(레이첼 맥아담스 역)에게 파리에서 살 것을 권한다. 하지만 이네즈는 미국으로 돌아가 살 것을 확고히 한다.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의 한 장면. ⓒ소니픽쳐스


 

사실 이 첫 장면에서 영화의 거의 모든 것을 설명하고 있다. 성공한 시나리오 작가를 그만두고 소설가가 되려하는 길이 못마땅한 이네즈인데, 더군다나 파리라는 이상에 사로잡혀 있다니 말이다. 더욱이 1920년대의 과거를 사랑한다니. 영화의 줄거리는 안 봐도 뻔하고, 이 둘의 끝 또한 좋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이 영화, 예정된 결말까지의 과정이 너무나도 재미있고 환상적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가 가지고 있을 법한 보편적 생각을 끄집어내 이야기에 버무리고 있어 결코 가볍지는 않다. 그 이야기는 길이 현실에 지친 어느 날, 자정이 지난 골목에서 클래식 푸조를 타고 어디론가 떠나면서 시작된다.

 

그를 지치게 한 현실이라 하면, 그의 약혼녀 이네즈가 있다. 이네즈는 낭만이라고는 없는 지극히 현실주의적이고 속물이다. 또 그녀의 부모는 어떤가? 역시 속물이다. 그리고 그들은 잘 나가는 시나리오 작가였던 길은 환영해도 소설가 지망생 길은 못마땅해 한다. 여기에 이네즈의 친구들도 가관이다. 그 중에서도 길이 사이비지성인이라 칭하는 폴은 풍부한 지식을 자랑하는 아주 재수 없는 녀석이다. 길은 모든 사람들이 그를 무시해 현실에서 도망치려 하는 것일까? 어느 정도는 맞지만, 그건 그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모든 인간은 어느 정도 과거 지향적이지 않던가.

 

환상적이고 재미있는 과거 여행

 

여하튼 길의 비현실적인 과거 여행은 그렇게 시작된다. 클래식 푸조를 타고 도착한 곳은 어느 파티 현장. 그곳에서 길은 스콧 피츠제럴드 연인을 만나고, 헤밍웨이를 만나게 된다. 그 파티는 장 콕토가 주최한 것이었고, 시종일관 울려 퍼지는 피아노 소리는 콜 포터가 피아노치는 소리였다. 그는 꿈에 그리던 1920년대 파리에 와 있던 것이었다. 현실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그는 황홀경에 빠져 이 시간을 즐기고 매일 자정에 어김없이 클래식 푸조를 타고 1920년대 파리를 누빈다.

 

가는 곳마다 역시나 전설적인 명사들이 즐비하다. 피카소, 찰스톤, 벨 몬테, 달리, 부뉴엘, 레이, 앨리엇, 거트루드 스타인 등. 이 밖에도 셀 수도 없을 정도로 많은 명사들이 나온다. , 1920년대 파리를 보여주는 장면에서 나오는 거의 모든 이들이 명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이는 말이 되지 않는 설정이지만, 이미 말이 되지 않는 설정 위에서의 설정이므로 웃으면서 흥미롭게 그리고 자연스럽게 넘어갈 수 있는 부분이다. 이 영화의 큰 흥미거리 중 하나가 이 전설적인 명사들의 면면인 것이다.

 

그러던 중 길은 아드리아나(마리옹 꼬띠아르 역)을 알게 된다. 당시 그녀는 피카소와 염문을 뿌렸지만, 곧 헤어진 뒤 헤밍웨이와 떠나기도 한다. 하지만 이 역시 오래가지 못했고 돌아온다.(이는 영화적 설정이 많이 가미된 부분이다. 실존 인물이고 헤밍웨이와 관계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지만, 그 시기가 맞지 않고 피카소와의 관계는 없었다.) 길은 아드리아나와의 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 타이밍에 그들은 1890년대로 가는 마차에 오른다.

 

1890년대로 가자 더욱 더 어마어마한 사람들을 보게 된다. 로트렉, 고갱, 드가... 아드리아나는 이 시대를 황금시대라 칭하며 1920년대로 돌아가지 않을 것을 선언한다. 자신이 사는 1920년대는 너무 지루하다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길은 1920년대야말로 완벽한 황금시대인걸? 그때 불현 듯 깨달음을 얻게 된 길. 그는 아드리아나와의 사랑이 지속될 수 없음을 직감한다. 그러며 미래에서부터 왔다는 사실을 고백하며 그녀에게, 그리고 자신에게 말한다.

 

이 사람들을 봐요. 이 사람들의 황금기는 르네상스에요. 이들은 황금시기를 버리고 미켈란젤로와 같이 그림을 그리고 싶어 해요. 또 그때 사람들은 쿠빌라이 칸 시기를 동경할걸요?... 아드리아나, 당신이 여기 살면 여기가 현실이 되는 거요. 그럼 당신은 또 다른 세계를 동경하게 돼요. 진짜 황금시기를요... 현실은 그런 거예요. 항상 불만족스럽죠. 인생은 그런 거니까요... 저도 당신처럼 현실에서 도피하고 싶었어요. 황금시기로... 하지만 이건 진짜가 아니에요. 내가 진정한 글을 쓰고 싶다면 내 환상을 없애야 해요. 과거가 더 좋았다는 환상을.”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의 한장면. ⓒ소니픽쳐스



이 영화가 더욱 환상적으로 느껴지는 이유는 음악가이면서 음악애호가이기도 한 우디 앨런 감독의 음악적 취향이 듬뿍 담겨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파리를 가본 적도 없거니와 그 실체를 모르는 사람이라도 이 영화를 보면, 자연스레 파리에 대해 우호적인 감정을 품게 될 것이다. 극단의 과거 지향적 성향에 대해서는 결국은 비판의 형식을 취하고 말지만, 파리에 대해서는 끝까지 우호적인 감정을 유지한다.

 

이 영화를 즐기는 방법은 상당히 많다. 우디 앨런 감독에 대해 알고 있는 분이라면 그의 색다른 취향을 즐길 수 있을 것이다. 음악과 함께 등장하는 파리의 기막힌 전경을 감상하는 것도 한 방법이 되겠다. 또한 위에서도 주지했듯 수없이 등장하는 전설적인 명사들을 보는 재미가 무엇보다도 쏠쏠하다. 마지막으로 현실에서의 도피와 과거에 대한 동경에 대한 생각을 정리해보는 차원에서도 의미가 있는 영화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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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에일리언>


<에일리언> ⓒ21세기폭스



35년 된 영화가 있다. 어릴 때부터 TV에서 수없이 봐왔던 이 영화는 언젠가부터 전설의 반열에 올랐다. 볼 때마다 느꼈던 건 이 영화가 지니고 있는 여러 특성 중 지니고 있는 대표성이 아무리 높다 하더라도 극히 일부분이었던 바, 제대로 된 감상을 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지금에 와서 새삼스레 다시 감상한다 한들 그때의 그 범위에서 크게 벗어나진 못하겠지만, 그래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이 영화는 크게 SF 장르로 분류되고 있지만, 자세히 감상해보면 SF를 비롯해 공포, 액션, 스릴러, 어드벤처, 드라마까지 다양한 장르를 아우른다. 제목은 누구나 익히 들었을 법하다. 에일리언 시리즈의 시초, <에일리언 1>이다. 북미에서는 1979년에 개봉했고, 우리나라에는 1987년에 비로소 개봉한다. 8년의 세월이 무색할 만큼 생명력이 있는 영화라 할 수 있겠다. 그리고 그 생명력은 지금까지 이어지거니와, 앞으로도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상업용 우주선 노스트로모호는 광석을 싣고 지구로 귀환 중이다. 그런데 어떤 문제 때문에 궤도를 상당히 벗어나게 되었고, 그 와중에 외딴 행성에서 알 수 없는 신호를 보내온다. 분석 결과, 구조 신호라는 결론을 도출하였고 규정에 의해 행성에 착륙하여 3명의 선원이 탐험에 나선다.


<에일리언>의 한 장면. ⓒ21세기폭스



정보가 전무한 상태에서의 탐험은 필히 좋지 못한 결과를 낳을 것임을 인지하고 있음에도, 눈앞에 펼쳐지는 미지 세계와의 조우는 사람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다. 하지만 과유불급이라고 했던가. 알 수 없는 것에 대한 과도한 호기심과 열정은 자신을 포함한 모두를 위기에 빠뜨리게 하고 만다. 결국 나머지 두 명이 한 명을 부축해서 돌아온다. 그 한 명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외계 생명체에게 얼굴을 뒤덮인 채였다. 


그런데 이 장면에서 드러나는 사람마다 다른 위기 대처 행동을 살펴 본다. 크게 3가지의 입장을 보인다. 부상 당한 1명을 부축해서 온 2명은 의무실로 어서 빨리 보내야 한다는 이유로 문의 개방을 요구한다. 이에 3등 선임 장교 리플리(시고니 위버 분)은 검역 절차를 따라야 한다고 대답한다. 비록 그로 인해 1명이 죽게 될지라도, 자칫 잘못하면 모두 죽을 수도 있다는 이유였다. 하지만 과학 장교 애쉬가 스스로의 판단 하에 문을 열어버린다. 그 역시 1명의 목숨을 살리기 위한 어쩔 수 없는 판단이었다고 말한다. 모든 비극의 시작점이다.  


이 딜레마는 그동안 무수히 많은 이론과 주장과 사례를 통해 제기되어 왔다. 누구의 말이 옳은지 그른지 판단하기가 결코 쉽지 않다. 영화에서는 하필 1등 장교와 2등 장교가 동시에 탐험을 나갔는지 이해할 수 없다손 치더라도, 규정을 어겨 놓고도 큰 소리를 치는 이도 이해할 수 없다. 한 사람을 희생해서 모든 이를 '더' 좋은 쪽으로 인도하는 건 말도 되지 않는 억측이라고 생각되지만, 한 사람을 살리기 위해 모든 사람이 죽음의 위기를 맞이하게 되는 건 생각해봐야 할 일이다. 물론 모두가 죽게 되는 결과를 알고 말하는 결과론적인 얘기지만 말이다. 


<에일리언>의 한 장면. ⓒ21세기폭스



영화는 급격히 공포 장르로의 전환을 꾀한다. 부상 당한 1명이 다행히 깨어나지만, 얼마 되지 않아 또 다른 외계 생명체(이하 "에일리언")가 배를 뚫고 튀어 나온 것이다. 그는 죽었고, 그 에일리언은 도망간다. 이후 어째서 인지 혼자 남게 되는 선원이 어마어마하게 커진 에일리언에게 죽고 마는 사건이 발생한다. 그리고 연달아 혼자 처리하려다가 죽게 되는 1등 장교. 상황은 급박하게 흘러 간다.  

사실 이 모든 건 과학 장교 애쉬의 음모였다. 그는 사실 로봇이었고, 프로그램 되어진 바에 따라 엄청난 전투 능력을 자랑하는 에일리언을 지구로 가져가 이용하려는 수작이었던 것이다. 이를 간파한 리플리는 그것을 부셔 버리고 탈출을 꾀한다. 하지만 그러는 도중에도 선원들은 계속해서 죽어 나가고 결국은 그녀밖에 남지 않는 상황이 된다. 


모두 함께 대처해도 가능할까 말까 인데 왜 혼자서 대응하려 하는지 도통 이해할 수 없다. 물론 죽임을 당한 선원을 제외하고 아무도 그 실체를 알 수 없기 때문에 만만히 봤을 수도 있겠다. 그럼에도 살인까지 당한 마당에 어떻게 그런 무모하고 어설픈 대응을 할 수 있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위기란 실체를 완전히 파악했을 때는 이미 때가 늦는 법이다. 위험의 징후를 알아차리고 그에 맞는 대처를 하는 것이 중요하다. 사실 위기나 위험에 대한 시스템은 갖춰져 있기 마련이다. 문제는 이를 제대로 지키지 않음에 있지 않을까 싶다. 평소보다 조금 더 빠른 판단과 기본에 입각한 대처를 실행하기만 해도 어느 정도는 타파할 수 있는 것이다. 


<에일리언>의 한 장면. ⓒ21세기폭스



영화는 시리즈의 시작을 알리며 많은 궁금증들을 증폭 시켜 놓은 채 끝난다. 에일리언의 정체와 에일리언이 사는 행성은 무엇인지, 이 에일리언을 이용하려는 조직의 실체는 무엇인지, 과연 리플리는 무사히 지구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인지. 무엇보다 이 강렬한 충격이 시리즈 내내 계속될 수 있을 것인지. 


한편 리플리 역의 시고니 위버를 위시해 낯익은 얼굴이 보여 반가웠다. 제일 먼저 죽은 2등 장교 케인은 <설국열차>에서의 '길리엄' 존 허트였고, 과학 장교 로봇 애쉬는 <반지의 제왕>과 <호빗> 시리즈에서의 '빌보' 이안 홈이었다. 가히 명불허전이라 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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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오래된 리뷰] <바이센테니얼 맨>


영화 <바이센테니얼 맨> ⓒ소니/콜럼비아 픽쳐스


리처드 마틴(샘 닐 분)은 가족들을 위한 깜짝 선물로 획기적인 '가전 제품'을 구입해 선보인다. 그 가전 제품은 다름 아닌 '로봇'. 정확한 명칭은 로봇 NDR-114. 말 그대로 가정의 모든 일을 해결할 수 있는 가전 제품이다. 그것은 로봇 3 원칙에 입각해, 인간에게 피해를 입히지 않고 인간에 명령에 절대 복종하며 스스로를 보호해야 한다.  


가족들의 놀라움을 뒤로 한 채, 그것은 착실히 해야 할 일을 한다. 언제나 '봉사는 저의 기쁨이죠'라는 말과 함께. 그런데 그것은 가끔 기계 답지 않은 모습을 보이곤 한다. 예를 들어, 인간들이 하는 식사나 체스 게임에 관심을 가진다든지, 인간이 창조한 음악을 듣고 명상에 잠겨 있다든지 하는 행동들 말이다. 


결정적으로 어느 날 그것은 실수로 리처드 마틴의 막내가 제일 아끼던 말 모형 인형을 부수게 된다. 슬퍼하는 막내 아씨의 모습을 보고 그것은 연구를 통해 막내 아씨가 좋아할 만한 목각 인형을 직접 만들어낸다. 모방이 아닌 창조를 한 것이다. 그리고 이를 목격한 리처드 마틴은 그것을 '그'로 격상 시킨다. 그를 한 가족으로 생각하며,  '특별한 로봇'으로 취급했다. 그리고 그는 '앤드류 마틴' (로빈 윌리엄스 분)이 된다. 바야흐로 200년을 살게 되는 <바이센테니얼 맨>의 진정한 시작이다.


영화 <바이센테니얼 맨>의 한 장면. ⓒ소니/콜럼비아 픽쳐스

 


"계획을 세우자. 우선, 하루 몇 시간은 창작에 몰두해. 너무 예술적이면 인간이 시기하니까, 적당한 걸 찾아보자. 시계 같은 걸로. 그리고 저녁 땐 나랑 공부하는 거야. 자네에게 프로그램 되지 않은 세상을 보여주고 싶어. 자네는 특별해. 인간은 시간의 지배를 받지만 넌 우리와 완전히 달라. 네게 시간은 영원해."


영화 <바이센테니얼 맨>은 엔지니어의 실수로 신경 계통에 이상이 생겨 인간이 되고자 하는 마음이 생긴 로봇의 이야기이다. 그것은 그가 되고, 그는 인간처럼 조금씩 성장해 나간다. 그리고 종국에는 인간의 역사, 적어도 미국의 역사를 의미하는 생각과 행동까지 한다. 


'바이센테니얼'은 200년이라는 뜻이다. 극 중에서 앤드류 마틴(로봇 NDR-114)은 리처드 마틴의 증손녀와 결혼하고 함께 죽음을 맞게 되는데, 그때까지 200년이라는 세월이 걸렸다. 그는 인간처럼 죽음을 맞게 될 때까지 투쟁과 쟁취를 계속해왔다. 


최초의 가전 제품에서 앤드류라는 이름을 얻고 리처드 마틴 가족의 일원이 되었으며 그의 이름을 명의로 통장을 만들어 시계를 판돈으로 돈을 벌어 들였다. 그리고 그는 인간의 명령을 받지 않기 위해 '자유'를 원했고 쟁취했다. 이후 자신의 동족(인간이 되고자 하는 불량 로봇)을 찾아 여행을 하던 도중, 자신을 창조한 이의 아들을 만나게 되어 인간의 가죽을 얻게 된다. 그는 '자유'를 원했을 당시 이미 자신이 인간임을 선언하는 것이나 다름 없다. 이후의 행동은 더 나은 인간으로 진화하고자 하는 욕망에서 나온 것이다. 


영화 <바이센테니얼 맨>의 한 장면. ⓒ소니/콜럼비아 픽쳐스



"인간의 역사를 통틀어... 수백 만의 사람들이 죽음을 불사하고 쟁취하려 한 것은, 자유예요.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걸 만큼... 너무나 소중한 것."


이는 미국의 역사를 관통하는 한 단면인 '흑인 민권 운동'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인다. 1776년 문을 연 미국에서 흑인은 인간이 아니었다. 백인에게 피해를 입히지 않고 무조건 복종해야 하는 가전 제품과 다를 바 없었다. 위에서 언급한 로봇 3 원칙의 '로봇은 스스로를 보호해야 한다'조차 해당되지 않는 삶이었다. 


이후 흑인들의 분노와 저항은 1960년대 대규모로 증폭된다. 그 중심에는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있었다. 그는 1963년 8월 워싱턴의 링컨 기념관 앞에서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태어났다는 자명한 진리의 의미를 깨달으며 살아가는 그런 날이 언젠가 오리라는 꿈입니다.'로 시작되는 역사적인 연설을 펼친다. 결국 1965년에는 흑인들에게도 투표권이 인정되어 적어도 정치적 평등이 실현되었고, 2009년에는 최초의 미국 대통령이 탄생해 재선까지 성공하였다. 


한편 앤드류는 인간의 피부를 얻었지만, 인간일 수 없었다. 그에게는 인간의 감정이 없었던 것이다. 작은 아씨의 죽음 앞에서 슬퍼할 수 없었고, 결국 그는 혼자 남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완전한 인간이 되기 위해 한 발자국 더 내디딘다. 모든 의학지식을 총동원해 기계를 생명체로 바꾸는 프로젝트를 실현한다. 


죽지 않는 것만 빼고 완전한 인간이 된 앤드류. 그는 작은 아씨의 손녀인 포샤와 사랑에 빠지고 그녀와 결혼하게 된다. 하지만 여전히 그는 법적으로 인간일 수 없었다. 비록 그의 겉모습이 인간이고 그의 마음이 인간이며 인간들도 그와 같이 인공적인 장기를 달고 살아가기에 그도 인간이라고 말할 수 있는 자격이 있었지만, 전자 두뇌로 인해 그는 영원히 죽지 않았다. 


영화 <바이센테니얼 맨>의 한 장면. ⓒ소니/콜럼비아 픽쳐스



결국 앤드류는 진정한 인간이 되기 위한 최후의 도전을 하기에 이른다. 진일보된 기술을 이용해 그에게 유한한 시간을 선물하는 것이다. 그는 인간처럼 죽을 수 있게 되었다. 과연 그는 법적으로 완전한 인간으로 인정받게 될까?


"전 항상 모든 걸 이해하고 싶었죠. 저의 존재 이유 같은 거 말입니다. 전 점점 늙어서 쇠약해지고 있어요. 곧 기능이 정지 할 겁니다. 로봇이라면 영원히 살 수 있죠. 하지만 저는 영원히 기계로 사느니, 인간으로 죽고 싶습니다. 저는 인정받길 원해요. 제가 누구인가에 대해, 있는 그대로. 찬사나 평가가 아니라 단순한 진실을 인정받는 것, 이것이 제 목표입니다. 그걸 이루기 위해 전 택했습니다. 고귀하게 죽는 길을."


이 영화를 보며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생각이 떠오르는 건 지극히 당연하다. 그리고 앤드류를 통해 단순히 겉모습만 인간이 진정한 인간은 아니라는 것을 역설적으로 설파한다. 엄청난 논란이 일 수 있는 사안이지만 이 영화를 보고 인간의 기준을 다시금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영화에서와 같이 멀지 않은 미래에 로봇이 인간과 굉장히 가깝게 지내게 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때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기본적으로 '생명'이라고 이름 붙일 수조차 없는 그것을 말이다. 


앞으로는 점차 모든 기준이 철폐되고 정해져 있는 것들이 해체될 것이 분명하다. 계속되는 변화는 우리네 삶과 생각과 행동을 어떻게 바꿀 지 아무도 모른다. 인간과 로봇의 관계 또한 그 한가운데에 위치해 있다.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기계 없이는 삶을 영위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고, 시간이 갈수록 그것은 더욱 심해질 것이다. 그리고 이 기계의 역사는 '바이센테니얼'이다. 머지않아 기계는 역사는 사라지고 '바이센테니얼 맨'의 역사가 시작될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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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양들의 침묵>


영화 <양들의 침묵> ⓒ오라이온 영화사


86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주요 4개 부분(최우수작품상, 감독상, 남우주연상, 여우주연상)을 석권한 작품은 단 3개에 불과하다. 일찍이 1934년의 <어느 날 밤에 생긴 일>, 1975년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 그리고 1992년 <양들의 침묵>이다. 


이 중에서도 특히 <양들의 침묵>은 절대로 영화화 될 수 없을 것이라는 '토머스 해리스'의 원작을 완벽하게 스크린으로 옮겼고, 그에 더해 남녀 주연 배우인 '안소니 홉킨스'와 '조디 포스터'의 연기가 화룡정점을 찍었다. 이 영화의 수식어로 흔히 붙는 말이 '수준 높은 스릴러'인데, 피가 낭자 하지 않으면서 그 분위기만으로도 보는 이를 들었다 놨다 하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크게 세 가지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겠다. 먼저 한니발 렉터(안소니 홉킨스 분). 그는 정신과 의사 출신의 식인을 즐기는 연쇄 살인마이다. 영화는 그의 괴상한 이력에 대한 어떤 이유나 사전 정황을 말해주지 않는다. 다만 그는 여주인공인 FBI 교육생 클라리스 스탈링(조디 포스터 분)가 사람의 피부를 벗기고 살해하는 연쇄 살인범 버팔로 빌을 잡으려는 데 조력을 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면서 정신과 의사답게 스탈링의 어린 시절을 파헤치며 '멘토' 역할까지 수행하고 있다. 


영화 <양들의 침묵>의 한 장면. ⓒ오라이온 영화사


FBI 교육생 클라리스 스탈링은 렉터 박사와의 면담을 통해 연쇄 살인범 버팔로 빌을 잡는 데 단서를 잡아보라는 상관의 명령에 의해 렉터 박사와 면담을 시작한다. 하지만 그와의 면담을 통해 알게 되는 건 애써 묻혀두었던 어린 시절의 불행. 자신의 어린 시절을 말해주지 않으면 아예 면담 자체를 하지 않겠다는 렉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덕분에 그녀는 아픔과 고통을 이겨내고 성숙해나간다. 그리고 성장해나간다. 


한편 연쇄 살인범 버팔로 빌은 변태 성욕자이다. 그는 젊은 여성의 등피부만 수집해 벗긴 후 살해한다. 그리고 그 피부를 옷처럼 만들어 직접 입을 계획을 세우고 있다. 즉, 그는 여성이 되고자 한다. 렉터 박사의 말에 의하면, 그는 '사회가 낳은 괴물'이다. 그는 성전환 수술을 원했지만 여러 병원에서 거절을 당한다. 하지만 그는 여성이 되고 싶었고 그와 같은 행각을 벌이게 된 것이다. 사회 병리학적 폐해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영화 <양들의 침묵>의 한 장면. ⓒ오라이온 영화사


영화는 이 세 개의 큰 이야기를 줄기로, 종횡무진하는 스탈링이 이끌어 나간다. 버팔로 빌을 잡을 요량으로 렉터 박사의 말을 듣고 이궁리 저궁리하며 여기저기 돌아 다닌다. 그러며 자신의 어린 시절을 이야기 해주되, 정작 렉터 박사 자신의 이야기는 듣지 못한다. 


그녀는 어린 시절 경찰관이었던 아버지를 잃고, 얼마 되지 않아 어머니도 잃는다. 이후 친척 농장에서 살았는데, 어느 날 양들의 울음소리를 듣게 된다. 삼촌이 양을 도축 했기 때문이다. 이에 그녀는 양을 한 마리라도 살릴 요량으로 양 한 마리를 들고 집을 뛰쳐나왔지만, 결국 그 한 마리조차 죽고 만다. 그는 아버지, 어머니는커녕, 양 한 마리조차 지키지 못했던 것이다. 그녀의 깊은 곳에 트라우마로 작용하고 있는 이것을 렉터는 꿰뚫어본다. 


프로이트의 초기작 <과학적 심리학 초고>(1896)에는 프로이트를 찾아가 상담을 하는 부인 이야기가 나온다. 그녀는 옷가게에 들어가는 것을 겁내는 공포증에 시달리고 있다. 그녀는 일찍이 8살 때 상점 주인에게 추행을 당한 적이 있다. 하지만 그 사건은 성적 분별력이 완전히 발달하지 않은 시기였기 때문에 기억에서 은폐 되었다. 그런데 12살 때 유사한 사건이 일어난다. 어떤 상점에서 점원들이 자신의 옷을 보고 웃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은폐 되었던 8살 때의 기억이 환기되었고, 이 두 사건이 인자가 되어 '트라우마'로 탄생 되었다. 


이 영화는 '트라우마'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렉터 박사를 프로이트 박사로 비유할 수 있고, 스탈링과 버팔로 빌은 상당한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는 환자들이다. 하지만 한 사람은 이를 좋게 발전시켰고, 다른 한 사람은 이를 이겨내지 못하고 나쁜 쪽으로 가고 말았다. 그리고 어떤 사연이 있을 것이 분명한 렉터 박사의 트라우마는 <한니발>과 <레드 드래곤>으로 표현된다. 


영화 <양들의 침묵>의 한 장면. ⓒ오라이온 영화사

영화의 결말에서 렉터 박사가 스탈링에게 하는 질문 "양의 울음소리는 그쳤는가?"에 스탈링은 답하지 못한다. 그건 아마도 그녀가 자신의 트라우마를 해결하기 위해, 다른 사람이 트라우마를 해결하려는 행동을 봉쇄했기 때문이다. 스탈링을 잡아 피부를 벗기려는 버팔로 빌을 죽인 그녀. 그로 인해 그녀는 살면서 또 다른 트라우마가 될 가능성을 열어두게 되었다. 


인생에서는 수많은 사건과 사고들이 벌어지기 마련이다. 영화에서처럼 양을 그 사건과 사고들이라 한다면, 양들이 침묵할 때는 영원히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스탈링은 비록 한 단계 성숙하고 성장했지만, 양의 울음소리가 그쳤다고 말하지 못한다. 이 사건을 통해 그녀는 비로소 깨닫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 깨달음이야말로 진짜 성숙이고 성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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