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영속패전론>


<영속패전론> 표지 ⓒ이숲



우리의 역사인식에서 '일본'은 절대 떼려야 뗄 수 없다. 조선이라는 나라의 운명을 바꿀 만한 초유의 전쟁인 임진왜란은 그렇다 치더라도, 19세기말에서 20세기, 나아가 21세기에 이르는 일본에 의한 한반도 침략과 수탈과 망언의 역사는 지겹도록 계속되고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변함없이 말이다. 


그래, 침략과 수탈까지 다 좋다. 인류 역사상 수많은 나라들이 침략과 수탈을 자행했다. 그런데 여전히 계속되는 망언의 이유는 무엇인지, 왜 이해할 수 없고 납득하기 힘든 언행을 반복하는 것인가. 잊을 만하면 튀어나오는 망언들은 이젠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정도가 되었다. 그래도 궁금하다, 그 메커니즘이. 도대체 왜?


일본의 젊은 정치사상가 시라이 사토시 교수의 <영속패전론>(이숲)은 정녕 허무할 정도로 속시원하게 그 궁금증을 해소해준다. 그건 일본(의 내셔널리즘)의 제2차 세계대전 '패전 부인'에서 시작된다. 저자는 이것이 전후 일본의 핵심이라고 단언한다. 여기엔 '평화와 번영'이라는 전후 일본의 본래 핵심의 종언이 자리잡고 있다. 그리고 이어지는 미국에의 종속...


일본 왈, '우리는 전쟁에서 패하지 않았다'


이 책은 다분히 학술적인 면모를 풍기는데, 워낙 시원시원하게 그러면서도 꼼꼼한 자료와 논리를 바탕으로 주장을 밀고 나가기에 지루하지 않다. 분명히 어려운 내용인데 어렵다고 느껴지지 않고 오히려 재밌다고 느껴지기까지 한다. 저자의 주장 흐름이 굉장히 서사적이기 때문이기도 하겠다. 


2차 대전에서 무참히 패하며 초토화가 되었음에도 이후 일본은 대번영의 길을 걷는다. 그런 한편 비록 겉으로만 일지라도 평화주의를 표방한다. 하지만 1980년대 유례없는 버블 경제 대붕괴를 겪고 90년대 이후 '잃어버린 20년'의 장기침체에 돌입한다. 번영이 사라지니 평화도 사라진다. 기존의 전후가 사라진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기조가 자리잡는다. 그 옛날의 '대일본제국', 그리고 영속패전. 


문제는 미국이다. 대일본제국에의 긍정은 곧 미국과의 전쟁을 의미한다. 하지만 그건 말도 안 되는 일. 이미 일본 깊숙이 들어와 있는 미국이다. 그래서 일본은 미국에의 종속을 영위하는 대신 자국을 비롯 아시아를 향해 울부짖는 것이다. 자신들은 전쟁에서 패하지 않았다고 말이다. 저자는 말한다. 결국 그 끝에 있는 건 전쟁이라고, 그리고 종국엔 패배하고 말 거라고. 패전 부인은 다시 패전을 부른다는 것, 영속패전이다. 


정녕 깔끔한 논리의 기막힌 결론이라 아니할 수 없다. 단번에 현재 일본의 정치군사적 상황과 앞으로의 방향, 가장 궁금했던 원인과 이유를 알 수 있게 한다. 또한 지난 2011년 3.11의 의미도 명백해진다. 번영과 평화라는 전후의 확실한 종말로, 어느 누구도 이 대참사에 책임을 지지 않는 모습이 전쟁 패전을 부인하는 모습과 겹쳐진다. 


일본의 패전 부정, 한국의 식민지 부정


저자는 오에 겐자부로가 나카노 시게하루의 표현을 인용한 "우리는 모욕 속에 살고 있다"를 재인용하며 3.11 이후 일본이 놓여 있는 상황을 적확하게 표현했다. 지난 날을 돌아보자. 우리도 2014년 4.16의 대참사를 당했다. 이후 정부의 움직임은 실로 기괴했다. 3.11에 대한 일본의 '무책임'과 상당히 겹친다. 


우린 그로부터 2년반 후에 시민혁명을 이룩하며 4.16 이후로 계속되어온 무책임에 대한 책임을 물었다. 그러며 숱하게 당해왔던 모욕을 어느 정도 풀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보라. 저들의 '영속패전'이 그리 이질적으로 느껴지지 않지 않는가. 우리네 내셔널리스트들도 똑같이 미국에 종속되어 있으면서 국내에서는 식민지를 부정하고 있지 않은가. 저들이 패전을 부정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저자는 이대로라면 결국 또다시 전쟁이 시작되어 불보듯 뻔한 패전의 길로 나아갈 거라 말하는데, 그걸 그대로 우리의 경우에 이식해볼 수 있다. 일본에 의한, 미국에 의한 식민지가 모두 우리를 위해서라고, 덕분에 우리 삶의 질이 더욱더 향상될 수 있었다고 주장하는 이들의 바람은 결국 또다시 식민지이다. 그래야 그들은 그들 자리를 계속 유지할 수 있다. 그들은 그들 자신 이외의 것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 이 나라는 목적을 위한 수단일 뿐이다. 


이 얇은 책 한 권으로 속속들이 완벽히 알긴 힘들 것이다. 하지만 '명백히' 알 순 있었던 것 같다. 일본이나 한국이나 모두 모욕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 말이다. 정권이 바뀌고 '우린 해냈다!'고 자평한 지 100일이 훌쩍 지났다. 하지만 우리에게 모욕을 준 이들의 목소리는 여전히 크고 우렁차다. 또다시 모욕 속에서 살지 않기 위해선 명백히 알거니와 속속들이 알아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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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리뷰]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사일런스>


영화계의 거장 마틴 스콜세지가 일본이 낳은 거장 엔도 슈사쿠의 소설 <침묵>을 스크린으로 옮겼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메인타이틀 픽쳐스



17세기 중반 일본, 천주교 박해가 한창이다. 그 한가운데에서 떨고 있는 페레이라 신부(리암 니슨 분). 그의 표정을 보니 흔들리는 것 같다. 그렇게 그의 소식은 끊겨버렸다. 몇 년이 흘렀다. 페레이라 신부의 제자들인 로드리게스(앤드류 가필드 분)와 가르페(아담 드라이버 분)가 스승의 부정적 소문을 두 눈으로 확인하고자 일본으로 떠난다. 물론 복음 전파의 목적도 있었다. 


페레이라 신부의 부정적 소문은 다름 아닌 '배교'였다. 불교로 개종하고는 일본 여자와 결혼해 아이를 낳고 살아간다는 것이었다. 두 신부는 마카오에서 일본인 안내책 키치지로를 만나 함께 일본으로 향한다. 그들을 맞이한 건 철저히 종교적 신념을 숨기며 살아가는 독실한 천주교도들이었다. 모두 일본인으로, 두 신부를 철저히 숨기며 극진히 대접한다. 두 신부의 복음 전파 목적은 이룰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이를 두고볼 일본 정부가 아니었다. 그들에게 위기가 다가오고 있었다. 


세계적인 거장 마틴 스콜세지가 <더 울프 오브 월 스트리트> 이후 3년 만에 <사일런스>로 신작 나들이를 했다. 러닝타임은 20분이나 줄었지만, 묵직함은 족히 20배는 늘었다. 일본이 낳은 거장 엔도 슈사쿠의 1966년작 <침묵>을 원작으로, 스콜세지가 1988년부터 30여 년을 준비했다고 한다. 무슨 말이 필요할까. 그저 두 거장이 만든 침묵 속으로 조용히 들어가면 될 일이다. 


'믿음'과 '배신'의 아이콘, 그저 '인간'일 뿐


'믿음'의 로드리게스 신부. 하지만 그는 끝없이 의심한다. 침묵하는 신의 존재를. 그것도 응답의 일종일까. ⓒ메인타이틀 픽쳐스



영화에는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출현한다. 포르투갈 출신의 두 신부, 그들이 찾고자 하는 페레이라 신부를 제외하면 전부 일본인이다. 모두 독실한 천주교도. 그 중에서도 로드리게스 신부와 키치지로가 극 전체를 이끈다. 절대적 믿음의 아이콘 로드리게스, 배신의 아이콘 키치지로. 


이 둘의 모습은 예수와 베드로 또는 유다를 연상시킨다. 정작 우리가 그들을 통해 보게될 인상 깊은 모습은 '믿음'과 '배신'이 아니다. 로드리게스는 눈앞에 펼쳐지는 지옥에서 믿음 못지 않은 의심을 품는다. '이 고통의 순간에 신은 왜 침묵하십니까.' 키치지로는 오직 살기 위해 몇 번이고 신을 배신하지만 그때마다 로드리게스를 찾아와 고해성사를 한다. '신부님, 용서해 주십시오.' 


그럴 때마다 그들에겐 '인간'의 본능이 선한다. 나 때문에 누군가가 죽는 걸 볼 수 없다. 천주교 박해의 중심에 있는 일본인 총독은 로드리게스는 놔둔 채 일본인 신자들만 죽인다. 그들이 살 수 있는 방법은 로드리게스의 신의 부정. 즉, 일본인 신자들은 로드리게스 때문에 죽어가는 것이다. 도대체 어떻게 하란 말인가. 


신을 부정하지 못하고 죽어가는 수많은 일본인 신자들 옆에서 간단히 신을 부정하고 살아서 도망치는 키치지로. 그 나름대로 마음 속에선 끊임없는 신을 향한 의지가 불타지만 겉으로는 살기 위해 신을 부정할 뿐이다. 그 누구도 그를 무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죽고 싶은 인간이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은 세상이었다. 삶이 곧 지옥이 그들은 죽어서 천국에 가길 원할 뿐이다. 


믿음과 믿음, 신념과 신념의 가학적 충돌


참으로 무섭다. 종교의 우산 아래에서 믿음과 믿음, 신념과 신념이 충돌하는 모양이. 그 모양새란 게 정말 잔인하다. ⓒ메인타이틀 픽쳐스



로드리게스를 분한 앤드류 가필드의 열연이 돋보인다. 지난 2월 22일에 개봉한 <핵소 고지>에서도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종교에 입각한 기적의 신념을 보여준 데스몬드 의무병을 연기한 그다. 고통과 절망에 빠진 이들 앞에서 데스몬드는 자신 한 몸을 던지는 의지를 선보이고, 로드리게스는 신을 찾아 울부짖으며 기도를 드린다. 


영화는 박해 받는 천주교도의 여러 군상들을 그저 보여준다. 장황한 설명보다 직접적인 행동과 나름의 생각들을 앞세운다. 죽음 앞에서 초연한 이들, 그들은 현세의 지옥보다 사후의 천국을 원한다. 불교 행세를 하는 독실한 신자들, 대다수를 차지하는 그들은 정부의 단속을 피해 자신의 믿음을 이어가고자 한다. 


그리고 키치지로를 위시한 배교·배신과 복귀·믿음을 반복하는 자들. 적어도 완전한 배교·배신은 없는 것처럼 보인다. 이 점이 조금 거슬리는 부분인 바, 어떻게 한 명도 완전한 배교·배신을 시행하지 않는 것인지? 키치지로가 가롯 유다를 상징하는 거라면, 그는 회개가 아닌 지극히 인간적인 후회를 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베드로를 상징하는 거라면, 후회가 아닌 회개가 맞을 것이다. 이 부분을 애매하게 보여주었기에 조금의 아쉬움이 남는다. 


반면 당시 일본의 국교인 불교에 대해선 로드리게스의 통역관과 총독이 그야말로 장황하게 설명을 가한다. '우리는 우리만의 종교가 있다. 왜 여기에 너네 종교를 퍼트리려 하느냐.' '일본 땅에 천주교를 선교하려는 이기심 때문에 일본인들이 죽어가는데, 그걸 바라느냐.' 등이다. 이 또한 절대적으로 맞는 말인 것 같다. 


믿음과 믿음의 충돌. 단순히 생각하면 선교를 포기하면 될 일이다. 하지만 그건 종교적 신념에 어긋나는 일.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면 될 일이다. 하지만 그건 국가적 신념에 어긋나는 일. 불가능하다. 어떤 신념이 옳고 어떤 신념이 그르다고 말할 수 없는 상황. 그저 그렇게 사람이 죽어갈 뿐이다. 


의아한 모습들, 그럼에도 침묵에 응답하려는 신앙의 위대함


논란의 요지가 여기저기 산재해 있지만, 신앙인만이 보일 수 있는 모습엔 논란의 여지가 없다. 위대하다. ⓒ메인타이틀 픽쳐스



천주교 미화 영화로 비춰질 요지가 다분하다. 신의 침묵에 의심을 품고, 신의 침묵을 질타하고, 신을 부정하고 살아남는 것도 괜찮다고 말하고 있는 것 같지만, 결국 신은 다 괜찮다고 말한다. 그 모든 게 다 신이 그린 큰 그림 안에 있다. 이 지옥보다 더 한 고통과 절망, 죽음조차도 말이다. 


몇몇 장면들에서는 의아한 모습들이 포착된다. 적어도 기독교 입장에서는 말이다. 예수가 그려진 판은 밟지만 마리아가 그려진 판에는 침을 뱉지 못하고 죽음을 당하는 모습. 일본인 신자들이 신부를 보자 환호하며 그를 마치 신처럼 떠받드는 것 같은 모습. 그리고 오로지 신부를 통해서만 자신의 죄를 뉘우치는 고해성사를 할 수 있는 모습. 


그럼에도 영화가 주는 메시지는 숭고하다. 모든 의구심과 논란을 뒤로 하고, 로드리게스 신부에 집중해보자. 신앙인이 아닌 이도 '신앙'이 같는 위대함을 조금은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정확히는 신앙을 갖는 '신앙인'의 위대함이라고 해야 할까. 믿음의 근본인 신이 '침묵'함에도 불구하고, 그 침묵에조차 충실히 '응답'하려는 의지 말이다. 침묵에 대한 응답에의 의지는, 그 자체로 '믿음'에 다름 아닌 것이다. 비록 거기에 끝모를 '의심'이 함께 한다고 해도. 


실망하지 않은 대단한 영화, 또 보긴 싫다


참으로 어려운 영화였다. 어느 한 쪽으로만 생각을 치우칠 수 없게 만드는 바, 만든 이들의 숙고와 노력이 각인되어 오래토록 지워지지 않을 것 같다. 대단한 '의미'를 동반한 반면, 대단한 '재미'는 동반하지 못했다. 완벽한 배경과 연기와 연출에도 불구하고, 기억에 남는 영화가 되진 않을 것 같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영화는, 언제든 다시 보고 영화에 대해 꺼리낌 없이 말하고 계속해 재해석할 수 있는 영화이다. 


실망을 했다는 차원과는 전혀 다르다. 오히려 마틴 스콜세지 감독과 앤드류 가필드에 대한 호감도는 상승했고, 그들의 차기작도 기대된다. 이런 류의 영화를 이 정도로 찍고 연기할 수 있다면 상대적으로 일반적인 영화에서는 어떤 모습을 선보일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렇지만 일견(一見)을 권하진 못하겠다. 완벽한 연출과 연기와 배경보다 신앙과 종교가 더 많이 다가올 수밖에 없는데, 다름 아닌 그 부분이 거슬릴 요지가 다분하다. 영화를 포함한 모든 콘텐츠엔 '장르'가 존재하지만, 거기에 종교와 신앙이 앞세워지면 모든 것들을 흡수해버린다. 예를 들어 '전쟁 영화'는 엄연히 장르를 구분하는 용어가 아니다. 소재를 나타내는 용어이지만, '전쟁'이 모든 걸 흡수해버린다. 정확히는 액션, 드라마 정도일 것이다. 종교와 신앙도 마찬가지라고 보면 된다. 이 영화도 거기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애초에 그걸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상관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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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쿠보와 전설의 악기>


단 세 편의 애니메이션으로 '스톱모션'의 강자로 발돋움한 '라이카 스튜디오'. 2016년에도 <쿠보와 전설의 악기>로 돌아왔다. 기존의 세 편과 대동소이할까? 진보했을까? ⓒ포커스 피처스



작품 퀄리티와 흥행이 항상 비례하진 않는다. 외려 퀄리티가 좋은 만큼 흥행에서 멀어지는 경우가 허다하다. 퀄리티를 높이기 위해 대중적인 면모를 저멀리 두곤 하기 때문이다. 흥행으로 옳고 그름이 판가름나는 상업 시장에서 봤을 땐 참으로 안타까운 광경이다. 그 대표격이 여기에 있다. 


2005년 미국에서 탄생한 '라이카 스튜디오'. 단 세 편의 영화로 '스톱모션'의 강자로 발돋움했다. 그중 첫 번째 작품인 <코렐라인 - 비밀의 문>은 작품 그 자체로서도 빛을 발해, 절대적인 지지와 찬사를 받았다. '스톱모션'은 프레임마다 촬영 대상의 움직임에 미세한 변화를 주어 촬영한 다음 그 이미지들을 연속으로 재생하는 방식으로, 사람이나 동물 또는 기계 등에 센서를 달아 대상의 움직임 정보를 인식해 영상에 재현하는 방식인 '모션캡쳐' 방식과는 또 다른 맛이 있다. 


라이카 스튜디오는 항상 스톱모션을 이용한 애니메이션을 선보여 왔는데, 그 퀄리티와 계속되는 새로움으로 전 세계 애니메이터들의 신망과 기다림을 한몸에 받고 있다고 한다. 반면, 마니아적이고 실험적이기에 아직까지는 대중들한테 신망은 존재할지언정 기다림은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 그렇지만 모기업에 해당하는 회사가 다름 아닌 세계적인 대기업 '나이키'이기에 돈걱정(?)은 없어 보인다. 그래서 그런 영화를 만드는 것일까? 여하튼 재미있는 사실이다. 


어김없이 돌아온 라이카 스튜디오의 스톱모션 애니메이션


항상 동일한 제작비, 비슷한 수익을 올리는 라이카 스튜디오의 스톱모션 애니메이션들. 이번엔 북미를 제외한 전 세계에서 망하고 말았다. '일본 중세'라는 배경때문이었을까. ⓒ포커스 피처스



2년 주기(3년 주기 한 번), 6천만 달러의 제작비, 1억 달러 언저리의 수익, 스톱모션. 라이카 스튜디오가 그동안 내놓은 3편의 애니메이션이 갖는 공통된 특징이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박스트롤> 이후 2년 만에 <쿠보와 전설의 악기>로 돌아왔다. 제작비도 동일하고 스톱모션인 것도 똑같지만, 북미를 제외한 전 세계에서 터무니 없이 낮은 수익을 얻은 점이 다르다. 그건 아마도 일본 중세라는 특이한 배경이기 때문일 것이다. 


쿠보는 기억을 잃은 어머니와 함께 절벽 끝에 있는 동굴에 기거한다. 낮에는 장터에 나가 마을 사람들에게 악기로 마술을 부려 종이로 전설 이야기를 해주곤 한다. 다름 아닌 위대한 사무라이 한조와 달왕의 싸움이다. 어느 날 쿠보는 해가 지고 나면 절대로 나가 있지 말고 들어와야 한다는 어머니의 말을 어긴다. 여지없이 달왕의 쌍둥이 자매의 습격을 받아 위기에 처하는데, 어머니가 그를 살리며 전설의 무구를 찾아 떠나게 한다. 


어딘가에서 정신을 차린 쿠보는 달왕의 저주에 걸렸던 원숭이와 함께 길을 떠난다. 달왕과 쌍둥이 자매가 반드시 습격을 해올 것이기에 빨리 전설의 무구를 찾아야 한다. 조만간 그들은 역시 달왕의 저주에 걸린 딱정벌레를 만난다. 한조의 부하였다고 자신을 밝히는 그, 쿠보에게 충성을 맹세한다. 


쿠보는 다름 아닌 한조의 아들이었던 것. 그리고 그의 기억 잃은 어머니는 달왕의 딸이자 쌍둥이 자매의 언니였던 것. 애초에 쿠보의 어머니는 한조를 습격했다가 한조와 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런 그들을 달왕이 죽이려하자 한조는 자신을 희생하며 쿠보와 아내를 피신시킨 것이었다. 대를 이어 위협하는 할아버지 달왕의 위협으로부터 쿠보와 친구들은 벗어날 수 있을까?


만점에 가까운 평점을 부여하고 싶은 애니메이션


전 세계적으로 기존의 애니메이션보다 훨씬 수익이 적음에도, 그 자체로 완벽에 가깝다고 말할 수 있겠다. 완벽한 비쥬얼과 미장셴과 목소리. 다만 캐릭터와 스토리와 분위기가 좀 거슬렸다. ⓒ포커스 피처스


흥행 여부를 떠나 만점에 가까운 평점을 부여하고 싶은 영화가 바로 이 <쿠보와 전설의 악기>다. 개인적으로 라이카 스튜디오의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을 처음 접하는데, 그 앞의 세 작품인 <코렐라인> <파라노만> <박스트롤> 모두가 보고 싶어진다. 


어디 하나 흠잡을 데가 없는 듯하다. 비쥬얼와 미장셴은 단연 최고이다. 장인정신이 빛나는 스톱모션 애니메이션만의 정교함과 리얼리티를 극도로 올려주는 거친 느낌이 잘 어우러져 극강의 비쥬얼을 만들어냈다. 디즈니에 길들여져 있는 이들도 푹 빠질 수밖에 없는 퀄리티이다. 거기에 장면 하나하나에도 완벽함을 추구한 듯한 미장셴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모든 걸 만들어내야만 하는 비실사 애니메이션이기에 장면 하나의 소품 하나의 움직임에도 신경을 쓴 모습이 참으로 아름답다. 


애니메이션에서 굉장히 중요하게 작용하는 목소리는 정말 매력적이다. 특히 원숭이 목소리를 맡은 샤를리즈 테론의 중후함과 딱정벌레 목소리를 맡은 매튜 맥커너히의 발랄함이 훌륭하게 균형을 잡는다. 목소리만으로도 어떤 캐릭터인지 알 수 있고, 어떤 운명에 처할지까지 짐작이 간다. 영화 전체의 중심을 잡아주며 진행까지 도맡아할 수 있을 정도인 것이다. 거기에 쿠보가 들려주는 악기 연주는 동양적 매력이 물씬 풍겨 귀를 간질인다. 한이 서려 있는 한국과 중국의 연주와는 다른, 발랄함과 날카로움이 묻어 있는 일본의 연주다. 여운이 남는다기 보다 생생함이 남아 있다. 


다만, 배경과 캐릭터가 거슬렸고 스토리와 분위기가 별로였다. 일본 중세의 어느 시대 어느 곳을 배경으로, 다분히 일본적인 캐릭터가 주를 이룬다. 사무라이와 원숭이, 사무라이의 아들. 그들이 찾으러 가는 건 전설의 사무라이 무구. 여기까지는 거슬리는 부분이다. 주인공을 앉혀 놓고 차근차근 뒷이야기를 해주는 방식으로 풀어내는 스토리와 밑도 끝도 없이 밝혀지는 캐릭터들의 실제 모습, 그리고 짜증나게 무섭고 불편하게 만드는 쌍둥이 자매와 달왕. 완벽에 가까운 이 영화에서 상당히 별로인 부분이다. 


기억을 되살리고 기억을 저버리지 않고 살아가자


'기억'은 이 애니메이션에서 가장 중요한 소재이자 주제이다. 더불어 일본을 배경으로 하는 만큼, 일본에게 특별한 것이 '기억'인 것이다. '기억'이라는 소재를 기억하고 영화를 접하면 와닿는 게 많을 것이다. ⓒ포커스 피처스



영화에서 사실 그 어느 것보다 일본적인 것을 느낄 수 있는 부분이 '기억'이다. 기억을 잃은 쿠보의 어머니. 그녀는 기억을 잃었기에 살아 있어도 살아 있는 게 아니다. 산송장이나 다름 없이 지내는 것이다. 그런 어머니에게 남아 있는 유일한 기억인 한조의 전설을 쿠보는 매일같이 마을 사람들에게 선보인다. 어머니가 살아 있다는 증거다. 


쿠보와 함께 모험을 떠나는 원숭이와 딱정벌레도 사실 기억을 잃었다. 아니, 잃었다기보다 잘못 기억하고 있다는 게 맞다. 그런 그들이 자신의 진짜 정체를 알게 되었지만, 진짜 기억을 되찾게 되었지만, 그 기억을 계속해서 이어나갈 수 없게 된다. 다만 쿠보만이 그 기억을 간직하고 이어나갈 수 있을 뿐이다. 그들이 살았었다는 증거다. 


일본은 죽은 이들을 향한 애정이 유별나다. 일본의 고유 종교인 신도에서 신령을 부르는 곳 또는 신령을 모시는 곳이 신사인데, 거의 모든 마을에 있을 것이다. 영화에도 나오지만, 산 사람들이 죽은 사람과 이야기하는 게 자연스럽다. 유별난 게 아니고 특별한 것도 아니다. 당연한 것이다. 


쿠보가 아버지, 어머니, 딱정벌레, 원숭이의 기억을 지니고 살아가는 한 그들은 멀리 있지 않다. 눈에 보이지만 않을 뿐 항상 곁에 있는 것과 다름 없다. 쿠보도 그걸 아주 잘 알고 있기에 슬퍼하지 않는다. 일본만이 가지는 그런 특징을 알고서 영화를 접하면 와닿는 게 많을 것이다. 모른다면 이 기회에 조금은 알아가는 것도 좋겠다. 여러 모로 기억을 되살리고 기억을 저버리지 않고 살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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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중국을 만들고 일본을 사로잡고 조선을 뒤흔든 책 이야기>


<중국을 만들고 일본을 사로잡고 조선을 뒤흔든 책 이야기> 표지 ⓒ천년의상상



'삼국지'는 나에게 특별하다. '책'이라는 존재를, 나아가 '이야기'라는 존재를 각인시켜 준 장본인이니까. 책이 나에게 특별해졌기에 삼국지가 더욱 특별하게 다가온다. 잊지 않고자 주기적으로 삼국지 콘텐츠를 접하려 한다. 장편으로, 축약본으로, 게임으로, 만화로, 영화로, 드라마로, 그리고 고사로. 이는 실제로 내가 삼국지를 접한 순서다. 고사가 가장 마지막인 이유는 이런저런 고사들이 삼국지에서 나온 거라는 사실을 늦게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삼국지를 접하지 않을 수 없다. 


이문열 평역 삼국지가 시작이었다. 1988년 출간되어 20여 년 간 2000여 만 권이 팔린 한국 출판 역사상 초유의 베스트셀러 중 하나인 바로 그 책이다. 다름 아닌 '이문열 평역 삼국지'는 나에게 책 읽는 재미와 함께 중국 역사의 재미를 선사했다. 중국의 역사가, 나아가 역사가 이리도 재미있는 것이구나. 이 책을 읽었던 당시 내 장래 희망이 '역사학자'였던 건 다른 이유가 아니었다. 그야말로 지금의 나를 만들고 사로잡고 뒤흔든 책이 아닐까. 


문제는 한참 나중에 발생했다. 문제라기보단 실망이랄까, 불신이랄까. '이문열 평역 삼국지'가 실제 역사와 많이 다르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수많은 삼국지 콘텐츠를 접하며 달달 외우다시피 한 그 이야기들, 당연히 역사 속에 실제로 존재하는 이야기라고 생각하며 내 마음 속에서 중국의 다른 시대 역사와 어깨를 나란히 했다. 그런데, 그게 <삼국지연의>라는 '소설'이란다. 그것도 '나본'을 한 차례 각색한 '모본'을 다시 평역했다고 하니,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도 헷갈리는데 당시에는 어땠을까. 


삼국지 '외' 이야기를 다루다


'이문열 평역 삼국지'가 역사적 사실과 상당히 다르고 오류도 많다는 건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심지어 '이문열이 다시 쓴 소설이지, 삼국지가 아니다'라는 말도 있을 정도이다. 나에게 너무나도 큰 영향을 끼친 만큼 '삼국지'를 사랑하지만, 어디 가서 자신 있게 말할 수 없는 건 바로 그 때문이다. '삼국지'하면 '이문열 평역 삼국지'를 떠올릴 것 같기에. 그렇다고 굳이 진수의 '정사 삼국지'를 읽고 싶진 않다. 너무 재미 없을 게 불보듯 뻔하다. 오래된 딜레마다. 


삼국지에 대해선 할 말이 참 많다. 은근 알고 있는 것도 많다. 다만, 그건 삼국지 '내'이고 삼국지 '외'는 전혀 모르다시피 하다. 무슨 말인고 하면, '삼국지'라는 책이 어떻게 생겨났고 어떻게 읽혀왔고 어떻게 변해왔냐는 모른다는 것이다. 솔직히 알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하지만 그걸 모르고 삼국지 콘텐츠를 접하다 보면 오래된 딜레마는 절대 해결하지 못할 거라는 걸 안다. 


<중국을 만들고 일본을 사로잡고 조선을 뒤흔든 책 이야기>(이상 '중국, 일본, 조선 책>은 삼국지 '외' 이야기를 다루었다. 그렇기에 '와~ 삼국지 책이네'하고 덤벼들었다가는 '삼국지 책인데, 뭐 이리 재미없냐'하고 중도에 포기할 수 있음을 미리 말해둔다. 삼국지를 사랑하는 이라면 반드시 알아야 할 사실들이 꽉꽉 채워진 책이라는 것도 미리 말해둔다. 


책은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삼국지가 중국, 일본, 조선(한국)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쓰이고 읽혔는지 알려준다. 공통적으로 시대에 따라 다르게 받아들여지고 쓰이고 읽혔다. 거기엔 지금까지도 여전히 의견이 분분한 두 대립 요소가 있는데, 유비와 조조 즉, '촉한정통론'과 '조위정통론'이 그것이다. 전한 시대 경제의 후손 유비가 한나라의 정통이라는 이론과 시대가 낳은 간웅이자 중국 역사를 통틀어 최고의 능력자 조조야말로 중국의 새로운 중화 정통이라는 이론의 대립이다. 누가 맞을까. 


삼국지는 중국, 일본, 조선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쓰이고 읽혔을까


'촉한정통론'과 '조위정통론'은 중국, 일본, 조선이 다 다르게 받아 들였다. 나라보다는 시대마다 다르게 받아들였다는 게 맞을 것이다. 당연히 중국에서 만들어진 '삼국지'는 오히려 중국을 만들었다. 진수의 '정사 삼국지'부터 시작해 삼국지연의의 최종개정판인 '모종강평본삼국지연의'까지 계속해서 바뀐 삼국지다. 


진수는 위나라로부터 정권을 물려받은 진나라(서진) 사람이기에 위나라를 정통으로 기술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후 북방 오랑캐에 쫓겨 내려간 진나라(동진)에 이르러 자신들이 유비의 촉나라와 같다고 생각해 촉한 정통론을 내세운다. 송나라 때 이르러 더욱 대조되었는데, 평화로운 송나라(북송) 시대 때는 위나라를 정통으로 내세우는 게 일반적인 통념이었다. 하지만 금나라에 의해 쫓겨 내려간 송나라(남송)에 이르러 다시금 자신들이 촉나라와 같다고 생각해 촉한 정통론을 내세운다. 


이번엔 '주희'라는 희대의 인물이 사마광의 <자치통감>을 비판한 <통감강목>까지 지어 촉한 정통론을 확고히 정립시킨다. 다름 아닌 모종강이 바로 이 <통감강목>에 맞추어 기존의 삼국지를 바로잡았다고 한다. 이때에 와서 '삼국지'는 더 이상 소설이 아니었다. 민족주의를 고취시키는, 중국인의 염원을 담은, 중국을 만든 영원한 텍스트가 된 것이다. 


일본의 경우는 어떨까. 에도 시대 초기에 유입되어 '역사서'로 분류되었다고 한다. 진수의 '정사 삼국지'가 아닌 '삼국지연의'가 말이다. 그러던 것이 남북조 시대 흥망성쇠를 그린 군기 소설 <다이헤이키>의 유행과 맞물려 향락적 소설로 변해갔다. 거기에 지극히 일본풍의 삽화까지 더해 더 이상 삼국지라 부를 수 없는 새로운 소설로 되어 갔다. 일본 전통 연극 가부키로 공연되면서 일본풍이 한껏 고조된 것이 결정타였다. 일본에서 삼국지는 일본 것이나 다름 없었다. '기무치'가 생각나는 건 왜 일까. 


일본판 삼국지는 어떻게 이용되었을까. 일제 시대 삼국지는 전쟁을 독려하는 도구로 쓰였다. 대표적인 것이 일본의 대표하는 소설가이자 우리나라에서도 인기가 드높은 요시카와 에이지의 삼국지다. 그의 삼국지는 중일전쟁 당시 시대적 배경과 맞물려 들어가는데, 촉한 정통론보다 조조를 긍정하는 태도를 취했다. 이는 조조가 혼란한 시대를 평정한 인물이라고 인식하게 하였고, 자신들의 침략 전쟁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수단으로 작동했다. 이전 시대부터 이어진 무사적 충의를 전시에 맞게 고쳐 더욱 부각시키기도 했다. 무사적 충의가 애국이 되고 애국은 군국주의로 이어졌다. 


조선은 삼국지를 괴탄하고 잡스럽고 경박한 책으로 받아들였다. 일본처럼 역사서로 분류했기 때문이다. 이후 양란을 거치면서 삼국지는 유행하기 시작한다. 관우를 군신으로 모시며 전쟁을 치렀기 때문이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수많은 판본이 만들어졌고, 대청복수론이 대세를 이루며 극에 달했다. 조선 후기의 소설 유행에 '소설' 삼국지도 함께했다. 필사하고 낭독하고 빌려 읽었고, 내용을 바꾸거나 새롭게 창작하기도 했다. 일본과는 다른, 중국에 가까운 반응이다. 


일제 시대 일본이 전쟁을 독려하는 도구로 삼국지를 이용하려 했다면, 조선은 식민지 조선인에게 희망을 주는 도구로 삼국지를 이용하려 했다. 대표적인 것이 <조선일보>에 연재한 한용운의 삼국지다. 그는 '삼국지를 한 번씩 읽도록 한다는 것은 다만 재미있는 소설 한 편을 소개한다는 좁은 범위가 아니라 실로 귀중한 한 개의 사업으로 지목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했다. 여기서 '사업'은 식민지 조선인의 염원과 민족주의를 결합해 조선인의 마음을 다독이는 것이었을 테다. 그래서 한용운은 <조선일보>가 일제에 의해 강제 폐간당했을 때 울본을 토한 한시를 쓰기도 했다. 


비로소 '삼국지'를 알게 되다


위에서 말한 걸 취소해야 할 것 같다. 재미 없어서 중도에 포기해야 할 지도 모른다는 말. 삼국지 내에 흐르는 형용할 수 없는 수많은 인물들의 삶과 나라들의 역사 못지 않게, 삼국지라는 텍스트의 삶과 역사도 흥미롭다. 재밌다고 할 순 없을지라도. 어찌 그리 각기 다르게 받아들일 수 있는지 신기하고, 하나의 텍스트에 불과할진데 어찌 그리 엄청난 영향을 끼칠 수 있었는지 정녕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저자는 나라마다 변용되어 읽힌 삼국지를 통해 한중일 문화사를 보여주고자 했다지만, 필자는 덕분에 비로소 삼국지가 무엇인지 조금 알게 되었다. 그런 삼국지를 통해 무엇을 얻는 건 조금 더 훗날의 일이다. 한 권의 책이지만 이제는 당당히 '삼국지가 나를 만들고 사로잡고 뒤흔든 최초이자 최고의 책'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나뿐만 아니라 많은 이들이 그럴 줄 안다. 또한 삼국지뿐만 아니라 많은 텍스트가 그럴 줄 안다. 진실을 알게 되면 즐기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지만, 진짜로 사랑하는 콘텐츠라면 그럴 때 비로소 제대로 즐길 수 있지 않을까. 나에겐 삼국지가 그러하다. 내 인생에 이런 콘텐츠가 또 있을까, 한중일 역사상 이런 콘텐츠가 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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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고양이 눈으로 산책>



<고양이 눈으로 산책> ⓒ북노마드


동네에 고양이가 많은 편이에요. 하루에 한 번은 마주치는 것 같아요. 예전에는 고양이에게 관심이 딱히 없어서 보이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네요. 요즘엔 고양이랑 참새가 어찌나 귀여운지 눈에 띄기만 해도 웃음이 나요. 개와는 달리 차분한 몸짓으로 쳐다보는 그 눈빛은 저로 하여금 몸 둘 바를 모르게 만들어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요? 가끔은 말을 거는 것 같아요. 안녕? 오늘도 수고했어. 


고양이는 참으로 몸이 유연해요. 골목마다 그들만의 아지트가 있겠죠. 사람의 눈에 절대 띄지 않을 곳일 거예요. 능력이 되면 한 번 따라가 보고 싶어요. 얼마나 아늑하고 포근한 보금자리를 만들어 지내는지. 아니면 데려와서 같이 지내고 싶어요. 대체적으로 똑똑하다는 고양이랑 지내는 건, '집사'라는 말까지 있는 걸 보면 고양이 기르기가 생각보다 훨씬 어려울 듯하지만, 그래도 즐거운 일일 것 같아요. 


일본은 대만과 함께 고양이 천국이라 불려요. 그만큼 지천에 고양이가 있고 사람들 또한 고양이를 좋아하며 자연스레 고양이에 관련된 문화가 잘 발달되어 있지요. 몇몇 곳은 사람 반 고양이 반일 정도로 많은 고양이들이 살고 있기도 해요. 참 신기하죠. 어떤 동물도 그런 식으로 자체적인 모임이 이루어지지는 않을 텐데 말이에요. 한국 고양이는 일본 고양이를 부러워할까요?


지극히 개인적인 취미 수준의 도쿄 산책


일본엔 고양이 문화가 잘 발달되어 있다고 했죠? 아사오 하루밍이라는 일러스트레이터이자 에세이스트가 있는데, 그녀는 고양이에 관련된 저작을 굉장히 많이 남겼다고 해요. 우리나라에는 <3시의 나>라는 작품이 소개되었는데, 1년간 매일 오후 3시에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를 그림과 글로 기록한 책이라고 해요. 고양이에 관련된 책은 아니죠. 그녀의 고양이 관련 저작 중 유명한 건 <나는 고양이 스토커>가 있는데, 제목 그대로 고양이 스토커가 되어 골목길을 순례하는 내용이라고 하네요. 


이번에 출간된 그녀의 책은 <고양이 눈으로 산책>(북노마드)이라고 해요. 고양이 스토커인 그녀에게 고양이가 들어와 앉아(?) 함께 도쿄를 사부작사부작 누비는 내용이에요. 그리 귀엽지는 않은 일러스트와 함께 오밀조밀하게 소개하고 있어요. 도쿄를 가본 적이 있어 반가운 마음이었는데, 읽어갈수록 정반대의 마음만 들더군요. 전혀 들어본 적도 가본 적도 없는 곳으로 데려 갔기 때문이에요. 


정말 지극히 개인적인 취미 수준의 도쿄 산책이었어요. 그리고 주(主)는 도쿄라는 도시가 아니라, 자신과 고양이였고요. 도쿄라는 도시를 다른 눈, 즉 고양이의 눈으로 새롭게 살피고자 하는 마음에 이 책을 들었다면 상당한 실망감이 들었을 게 분명해요. 비교적 친절하게 지도를 그려 놓았지만, 그마저도 제대로 된 것인지 의문이 들기까지 하니까요. 후지산을 도서관보다 작게 그렸으니 말 다했죠. 다른 후지산일까요?


고양이와 도쿄의 두 마리 토끼를 다 놓치다


그럼에도 마음에 드는 건 다름 아닌 '고양이'예요. 비록 상당히 이상해서 가끔 거북하기까지 했지만, 종종 나오는 또 다른 나(?)인 고양이가 말하는 게 재밌었어요. 고양이 특유의 그 시크함과 애교, 이 정반대의 조화가 이끌어내는 시너지를 잘 표현한 것 같아요. 역시 고양이 스토커라고 불릴 만하더군요. 


그렇지만 내 안으로 고양이가 들어왔다는 설정은 정말 아니었어요. 판타지적인 설정을 하고자 했다면, 말하는 고양이와 함께 하는 도쿄 산책을 그리는 게 훨씬 낫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고양이 눈으로 세상을 보려는 의지의 표명이었겠지만 말이에요. 그만큼 고양이를 사랑한다는 뜻이겠죠. 


고양이 눈으로 보는 세상은 잘 표현되었을까요? 나쁘지 않았다 정도로 말할 수 있을 것 같네요. 서로 맞물려 있는데요. 위에서도 말했듯이 제대로 된 도시 산책이 되지 않았다는 점이에요. 한편으로는 이게 바로 고양이 눈으로 보는 도쿄라는 것이죠. 사람 눈으로 볼 때는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아 보이지만, 고양이 눈으로 보면 작가가 표현한 도쿄가 맞을 지 몰라요. 그런 면에서는 완벽히 표현해냈다고 할 수 있겠네요. 물론 전 고양이 눈으로 본 도쿄가 뭔지 잘 모르지만요. 


이것저것을 감안할 때 책 자체로 큰 메리트가 있진 않아 보여요. 에세이가 반드시 남겨야 할 거라고 생각하는 '여운'도 거의 남아 있지 않고요. 그건 아마도 이상한 설정 때문이 아닌가 생각되네요. 문제는 '공감'에 있었던 것 같아요. 공감이 되지 않았던 것이죠. 문체가 달달하다 못해 사차원적이기 까지 한데요. 그것이 도시 산책이라는 어떤 큰 느낌의 콘텐츠에 부합되지 못하는 느낌이었어요. 도시 산책이 아니라 동네 산책이었다면 딱 알맞았을지 모르겠네요. 


어떤 면에서는 성의 없이 보이기도 했고요. 글이 제대로 끝맺음을 못하는 느낌도 받았어요. 고양이 하나 믿고 읽기엔 모자란 점이 상당하지 않나 생각해요. 고양이와 도쿄의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다 두 마리 토끼를 다 놓친 것 같아 아쉽네요. 둘 중 하나에 힘을 실었으면 어땠을까요. 


고양이 눈으로 산책 - 6점
아사오 하루밍 지음, 이수미 옮김/북노마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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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진격의 거인: 홍련의 화살>



<진격의 거인: 홍련의 화살> 포스터 ⓒ BoXoo 엔터테인먼트



정체를 알 수 없는 거인의 출현으로 파멸의 직전까지 직면한 인류. 가까스로 거인을 물리친 후 거인보다 훨씬 큰 높이의 50m 방벽을 아주 두텁게 쌓는다. 이후 100년 간 거인의 침공을 받지 않은 채 평화가 지속된다. 얼마나 더 오래 계속될지 아무도 모르지만, 100년이라는 짧지 않은 시간 동안 계속 되어 왔기에 앞으로도 계속 될 거라는 믿음이 팽배해 있다. 


하지만 두텁고 높은 방벽만 믿고 있을 수는 없기에, 방벽 밖은 거인 뿐이 없는 위험하기 짝이 없는 곳이라는 걸 알면서도 조사병단을 꾸려 탐사한다. 결과는 처참할 때가 많다. 현존 인류 최고의 병사들로 꾸려진 이들이지만 거인에게 대항하는 건 쉽지 않다. 


그러던 어느 날, 초대형 거인이 출현한다. 기존의 거인에 대비해 만든 방벽을 훨씬 상회 하는 크기의 거인이다. 단 한 마리의 힘으로 지난 100년 간 인류를 지켜왔던 방벽이 한순간에 무용지물로 변한다. 그러고는 수많은 거인들이 방벽 안으로 밀고 들어온다. 인류는 또다시 파멸의 위기에 처한다. 



<진격의 거인: 홍련의 화살>의 한 장면 ⓒ BoXoo 엔터테인먼트



이 만화가 인기 있는 이유, '단순함'


만화 <진격의 거인>은 2009년 연재를 시작해 6년 동안 약 4500만 부를 팔아 치우는 괴력을 발하고 있다. 인류와 거인이라는 단순 명쾌한 대립 구조, 어떤 누구를 대입하든 아귀가 들어 맞는 해석력을 지닌 구조, 한 아이의 성장담으로 읽힐 수 있을 만큼 소년 친화적이면서도 다분히 정치철학적으로 읽힐 수 있을 만큼 어른 친화적인 스토리, 극우적 성적을 띄는 발언으로 수없이 구설수에 오르내리고 있는 원작자 등 수없이 많은 요소들이 자리 잡고 있다. 


애니메이션, 그리고 극장판으로 오면 한 가지가 더 붙는데 '퀄리티'이다. 화면 하나하나에 최선을 다한 듯한 극강의 퀄리티는 원작을 압도하고도 남는다. 액션적인 요소가 상당하고 그게 주로 빠르다 보니 눈이 더 호강하는 듯하다. 반면 스토리는 극장판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다. 원작을 요약해 놓은 듯하다. <진격의 거인: 홍련의 화살>은 2부작으로 나뉘는 시리즈 중 1부에 해당한다. 


영화는 거시적으로 시작한다. 거인에 대비해 방벽을 쌓고 평화를 가장한 채 살아가는 인류를 전체적으로 조망한다. 그러다가 초대형 거인이 출현한 후 방벽을 뚫리면서 미시적으로 접근해 간다. 조사병단을 선망하며 거인이 언제 침공할지 걱정하는 주인공 소년 엘렌. 하지만 정작 거인이 출현하자 속수무책으로 눈 앞에서 엄마를 잃고 도망친다. 이후 그는 군대에 들어가 거인으로부터 인류를 지키는 일을 수행한다. 


초대형 거인은 급기야 3개의 방벽 중 2번째 방벽마저 뚫어버린다. 엘렌을 비롯한 군인들은 어떻게 하든 거인을 맞아야 한다. 그게 말처럼 생각처럼 쉽지 않다는 건 오래지 않아 깨닫는다. 점점 패퇴하는 만다. 와중에 엘렌은 거인에게 잡혀 먹히고 마는데... 제일 성적이 좋았던 엘렌마저 그 지경이라면, 다른 소년들은 어떠했는가? 인류는 그야말로 파멸의 직전까지 몰리고 만다. 



<진격의 거인: 홍련의 화살>의 한 장면 ⓒ BoXoo 엔터테인먼트



이 영화는 인류 대 거인이라는 너무나 단순한 구조에, 막지 못하면 파멸 한다는 역시 단순한 명제를 바탕으로 전개된다. 스토리가 전개되기 위해서는 인류가 거인을 전멸 시키지는 못하겠지만 가까스로 막고 다시 평화를 찾아와야 한다. 그리고 그 사이에 어떤 숨겨진 이야기가 있어야 하겠다. 그건 물론 주인공에 관련된 것일 테고. 또한 주인공은 위험에 빠질 테고, 그 위험을 어떻게 하든 헤쳐 나올 것이다. 이처럼 영화는 단순한 구조와 명제에 예측 가능한 스토리를 지니고 있다. 그렇다면 이 영화(만화)의 인기는 그 '단순함'에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인류 대 거인' 여기에 누구라도 대입할 수 있다


'인류 대 거인'. 위에서 말한 것처럼 여기에 누구라도 대입할 수 있다. 일본의 입장에서 말이다. 먼저 일본을 인류에 대입해보자. 거인은 아마도 중국이 아닐까. 중국은 세계금융위기를 전후해 이른바 '슈퍼차이나'로 부상해 세계 경제를 부양하고 있다. 한때 세계 최고의 경제 대국 중 하나로 호령했던 일본은 지금도 물론 세계적인 경제 대국이지만 이빨 빠진 호랑이 그 이하의 존재가 되었다. 


일본은 극우적인 성향을 지닌 아베 총리가 국수주의 정책으로 오직 일본 만을 생각하는 경제 정책으로 경제 부양에 안간힘을 쓰고 있지만, 중국의 발밑에도 미치지 못하는 게 사실이다. 중국이 두려운 건 미국도 마찬가지여서 미국과 일본이 한 패거리를 이루어 대항 아닌 대항을 하고 있는 실정인 것이다. 영화 속에서 100년 간의 평화가 깨진 것처럼, 실제로도 일본의 중국에 대한 평화가 깨졌다. 


인류에 일본의 불안정한 젊은이들을 대입 시킬 수도 있다. 일찍이 버블의 붕괴로 경제가 파탄 났으며 세계금융위기를 겪고 이어 동일본 대지진과 같은 대재앙까지 겪으며 나라 꼴이 말이 아니게 된 일본. 더욱이 세계 최고의 고령화가 진행 중이며, 그에 비례해 노동력은 급감하고 있다. 직격탄을 맞은 일본 젊은이들. 그들 중 일부는 극우적인 성격을 띄며 외국인들을 배격한다. 그들이 자신들의 일자리를 빼앗아 간다는 논리이다. 이는 우리나라에서도 유럽에서도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외국인이 와서 특혜를 받으며 손쉽게 일자리를 얻어 살아가는 모습이, 거인이 침공해와 삶의 터전을 무차별적으로 파괴하는 모습과 달라 보이지 않을 수 있다. 문제는 그런 생각이 극단적으로 흐를 수 있다는 점이다. 경제가 한순간에 좋은 모습을 보일 리가 없기 때문에 그들의 불안정함은 계속 될 테고, 끝 모를 불안감은 결국 다른 것으로 표출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진격의 거인: 홍련의 화살>의 한 장면 ⓒ BoXoo 엔터테인먼트



현재까지는 일본에 국한된 거라 할 수 있겠지만, 거인을 동일본 대지진과 같이 언제 어디서 일본을 덮칠 지 모르는 자연재해에 대입할 수 있다. 물론 자연재해는 세계 어디서 사람들을 덮칠지 모른다. 하지만 일본은 경우가 다른 게, 세계 최고의 재해 방비책을 마련해 놓고 있음에도 그를 훨씬 상회 하는 재해가 들이닥치기 때문이다. 이미 수차례 겪어본 지라 그에 대한 두려움을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영화에서 아무리 높은 방벽을 쌓아 거인을 방어한다 한들 그보다 훨씬 큰 초대형 거인이 출현해 무용지물로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그 어떤 것보다 훨씬 큰 불안 요소라고 할 수 있겠다. 2011년 동일본 대지진은 총체적 난국 일본에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겼다. 복구를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지만 쉽지 않은 실정이다. 


아포칼립스 이후의 세계, 눈앞에 두려움에 총력을 기울일 뿐


시대를 반영하는 콘텐츠는 장르를 떠나 인기를 끌기 마련이다. 요즘처럼 좋은 소식 하나 없는 시대에는 그런 콘텐츠 또한 암울하기 짝이 없을 것이다. 2010년대 초반부터 시작된 진격의 거인 신드롬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그 아포칼립스 이후의 세상을 이야기하는 만화가 말이다. 그 미래에 대한 희망 없이 눈 앞의 방어를 위해 수많은 목숨을 바치는 스토리가 말이다. 


일본에 아포칼립스가 들이닥친 지 오래되었다. 비단 일본 뿐만이 아닐 것이다. 세계 최고의 경제 대국 일본이 그러하다면, 아시아 나아가 전 세계에 그 파급력이 상당할 것이다. 희망은 딱히 보이지 않는다. 아무도 장밋빛 미래를 예견하지 않는다. 다만 눈앞의 두려움을 상쇄하는 데 총력을 기울일 뿐이다. 지금은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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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심야식당>



영화 <심야식당> 포스터 ⓒ영화사 진진



신주쿠 뒷골목, 남들은 퇴근해서 집으로 발걸음을 옮겨 잠자리에 들 때쯤인 12시에 문을 여는 곳이 있다. 이름하야 '심야식당'. 7시까지 문을 여는데 은근히 사람이 많다. 손님들이 원하는 메뉴는 뭐든 만들어주기 때문일까? 음식이 맛있기 때문일까? 이성이 잠들고 감성이 깨어나는 새벽녘 시간이기 때문일까? 안 가봐서 안 먹어봐서 알 순 없지만, 매력 하나는 철철 넘치는 것 같다. 


우리나라도 이런 식당이 있는 걸로 아닌데, 모르긴 몰라도 대부분 술장사를 하지 않을까 싶다. 새벽에 집이 아닌 밖에 있으면 술밖에 찾을 게 더 있겠나. 요즘엔 24시간 하는 가게들도 많던데, 그런 곳에는 어떤 특별함을 느끼지 못하겠다. 반면 '심야식당'은 정확히 12시부터 7시까지 '음식'을 만들어준다. 언제나 사람이 있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지 않을까. 


영화 <심야식당>은 '심야식당'을 배경으로 한다. 그곳엔 여러 사연을 가진 사람들이 드나드는데, 아무래도 새벽이다보니 지극히 평범하다고는 할 수 없을 듯하다. 늙은 부자의 세컨드였던 여자, 그 여자와 사랑에 빠졌다가 차인 가난한 월급쟁이, 고향을 떠나 가난한 타향살이를 하고 있는 젊은 처자, 동일본 대지진으로 아내를 잃은 이, 그 사람을 동정했다가 그 사람의 갑작스런 사랑 고백을 받고 고민하는 젊은 처자 등. 각각 '나폴리탄', '마밥', '카레라이스' 세 가지 음식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영화 <심야식당>의 한 장면 ⓒ영화사 진진



세 가지 음식, 그리고 사람들 이야기


이들과 같이 심야식당에 거의 상주하다시피 하는 이들이 있는데, 스트립댄서, 게이바 마담, 조폭, 요정 주인 처럼 평범하지 않은 이들이 그들이다. 또 평범한 중년 남자, 청년, 세 여인 등도 같이 한다. 평범하지 않은 이들과 평범한 이들이 자연스럽게 둘러 앉아 위화감 없이 이야기할 수 있는 곳은 심야식당 밖에 없을 거다. 누구도 차별하지 않는 마스터의 존재, 뒷골목에 자리잡은 위치, 새벽에만 문을 여는 시간, 서로 얼굴을 맞댈 정도로 상당히 좁은 크기 등이 작용한다. 


이들의 겉모습은 참으로 평범하다. 그러나 그 안은 말 못할 사정과 함께 상당한 고난 그리고 잔인함이 자리잡고 있다. 일본의 특징이기도 한대, <심야식당> 속 인물들도 그러하다. 담담하고 따뜻하게 그 고난과 잔인함을 들어주고 음식으로 위로해준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여다보자. 


돈 많은 부자의 세컨드였던 타마코. 그녀는 유언도 없이 갑자기 죽어버린 부자의 장례식을 다녀온 뒤 어김없이 심야식당을 찾는다. 마스터는 그녀에게 일본식 파스타 '나폴리탄'을 선사한다. 그걸 먹고는 행복에 젖는 타마코. 그녀에게 젊은이가 다가온다. 그 둘은 생각지 않게 좋은 인연으로 발전한다. 과연 그들의 행복은 계속될까?


돈이 없어서 제대로 씻지도 먹지도 못하는 미치루는 우연히 심야식당을 지나가다 들러 많은 음식을 시키곤 허겁지겁 먹는다. 그러곤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며칠 뒤 다시 찾아와선 백번 사과를 하고 돈이 없으니 대신 일을 시켜달라고 간청한다. 마침 손에 무리가 온 마스터는 그녀를 받아들이고, 그녀에게 마밥을 선사한다. 너무 행복한 미치루. 그녀는 이후 뜻밖의 솜씨로 마스터와 손님들을 감동시킨다. 마스터의 손이 나아가는데, 미치루는 어찌 될까?



영화 <심야식당>의 한 장면 ⓒ영화사 진진



대지진으로 힘겨워하는 이들을 위해 후쿠시마로 봉사를 떠나곤 하는 아케미. 그런데 요 몇 주 째 가지 않는다고 한다. 알고 보니, 그녀에게 사랑을 느끼고 프러포즈까지 한 사람이 있다고 한다. 대지진으로 아내를 잃고 힘겨워 한 켄조가 그다. 급기야 켄조는 그녀를 보기 위해 도쿄까지 왔는데, 아케미는 그에게 사랑이 아닌 동정을 느끼고 있을 뿐이다. 마스터는 그에게 카레라이스를 선사한다. 그 카레라이스는 다름 아닌 아케미가 후쿠시마에 가서 켄조를 비롯해 많은 이들에게 선사한 음식이었다. 켄조는 깨달았을까?


죽음과 맞닿아 있는 듯한 일본 사회


그들의 이야기는 상당히 동떨어져 있는 듯보인다. 일견 서로 전혀 관련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하지만 그 이면엔 이 시대를 관통하는 무엇이 있다. 먼저 처음부터 끝까지 에피소드들을 관통하는 소품이 있는데, 누군지 모를 이의 '납골함'이다. 죽음의 상징과도 같은 납골함. 마스터는 이 납골함을 2층에 올려 놓고 매일 같이 모시며 기도를 드린다. 


작금의 일본은 사회 자체가 죽음과 굉장히 맞닿아 있는 분위기다. 영화는 에피소드를 통해 그런 사회 분위기를 에둘러 말하고 있는데, 첫 번째 에피소드 시작부터 돈 많은 부자의 죽음이 나온다. 그 죽음은 그렇다 치자. 두 번째 에피소드에서 미치루는 돈이 없어 '굶어 죽을' 지경이다. 젊은이가 돈이 없다는 건 일자리가 없다는 뜻일 거다. 


우리나라에서는 '삼포세대'라고 해서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한 젊은이들이 '대세'를 이루고 있다. '대세'. 요즘엔 다시 인간 관계, 내집 마련 2개를 늘려 '오포세대', 거기에 다시 취업, 희망 2개를 늘려 '칠포세대'로까지 발전했다. 그야말로 달관의 경지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미치루는 달관의 경지에 도달하기 직전 마스터가 동아줄을 내려준 사례라 하겠다. 


하지만 이건 우리나라의 경우이고, 일본의 경우는 더 심각하다. 다름 아닌 '동일본 대지진' 때문이다. 모든 것을 앗아간 미증류의 대재앙이 눈앞에서 벌어진 걸 본다는 건 상상을 초월한 경험일 것이다. 일본은 그런 자연 재해를 평생 안고 갈 운명이지만, 원자력 발전소까지 폭발해 끊임없이 피해를 받아야 하는 경험을 해본 적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것도 안전하다고 믿었던 현대 사회에서 말이다. 죽음의 사회이다. 



영화 <심야식당>의 한 장면 ⓒ영화사 진진



말로 위로해주는 대신 입을 감동시킨다


영화는 젊은 세대의 아픔과 동일본 대지진의 아픔을 넣어 뒤로 갈수록 죽음의 그림자를 더하는 수순을 밟고, 그동안 숨겨놓았던 납골함을 등장시켜 마무리를 시킨다.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는 죽음의 공포를, 일본에서의 죽음이 가지는 특유의 따뜻한 감성으로 치유하는 것이다. 


그건 심야식당이 모토로 삼고 있는 바와 일치한다. 물러서지 않고 피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어루만져 주거나 다독여주지 않는다. 다만 정성을 다해 만든 요리를 대접할 뿐이다. 말[口]로 상대방을 위로해주는 대신, 상대방의 입[口]을 감동시키려는 생각이 따뜻하게 다가온다. 


여러 가지로 마음 따뜻해지는 영화이지만, 그 위로 받는 영혼들의 아픔을 들여다보려니 마음이 따뜻해지기 전에 먼저 아픔을 각오해야 한다. 말로 위로하는 대신 입을 감동시키려는 생각, 따뜻해기지 전에 아픔을 각오해야 하는 상황, 죽음으로 죽음을 치유하는 방법으로 이 사회의 한 모퉁이를 책임지고 있는 심야식당이 있어 언제나 가슴 한편이 따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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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서평] <동아시아, 해양과 대륙이 맞서다>



<동아시아, 해양과 대륙이 맞서다> 표지 ⓒ메디치



임진왜란. 1592년(임진년)에 왜나라에서 난을 일으켜 조선을 쳐들어온 사건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자그마치 이후 7년 동안이나 계속되었고 명나라까지 출전한 국제적 전쟁인데, 왜 전쟁이 아니라 '난(란)' 이라 하는지? 일각에서는 7년 전쟁, 조일전쟁, 임진전쟁 등으로 부르고 있지만, 통상적으로 임진왜란이라 한다. 이는 그 당시 조선의 왜에 대한 생각에 다름 아니다. 


16세기 말 조선은 왜가 침략해 올 거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김성일이 어쩌고 황윤길이 어쩌고 해도, 국가적으로 왜 쪽의 해양은 거의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이는 비단 당시의 상황 만은 아니었다. 오래전부터 왜는 한반도 세력에게 한 단계 낮은 세력이었다는 인식이 팽배했다. 실제로도 그랬고 말이다. 삼국 시대 때 백제에서 문화를 전파해준 사례만 봐도 알 수 있다. 


한편 북 쪽의 대륙 세력은 언제나 한반도를 위협했다. 부여, 고구려, 발해 등의 나라가 만주를 지배했지만 영원할 수는 없었고, 언제나 한반도의 나라는 북쪽을 최전방으로 생각하고 모든 신경을 기울였다. 고려 때는 서희가 외교력으로 강동 6주를 차지하고, 조선 때는 세종 대왕이 여진족을 물리치고 4군 6진을 설치했다. 그럼에도 원나라, 청나라 등에게 유린 당하기도 했다. 


그런 와중에 일본의 침략은 조선에게 있어 뒷통수를 제대로 맞은 격이었다. 인정하기는 싫지만 말이다. 그렇지만 '임진왜란' 덕분에(?) 한반도가 비로소 동아시아의 지정학적 요충지가 되었다고 한다면? 괜찮은 건가? 


임진왜란으로 한반도가 동아시아의 요충지가 되다


<동아시아, 해양과 대륙이 맞서다>(메디치)의 저자 김시덕 교수는 임진왜란 당시 해양의 일본이 대륙으로 나아가기 위해 한반도를 정복하려 했으며, 대륙의 중국이 해양의 일본을 막기 위해 한반도를 완충 지대로 이용하려 했다고 말한다. 즉,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까지 한반도는 결코 동아시아의 지정학적 요충지가 아니었지만, 임진왜란으로 비로소 그렇게 되었다는 것이다. 해양 세력이 득세하기 전까지 대륙 세력에게 한반도는 견제의 대상이었을 뿐 최종 목표는 아니었다. 


그렇다면 여기서 임진왜란의 의미는 달라진다. 일면으로만 판단할 수 없게 되었다. '일본의 침략으로 조선이 엄청나게 피해를 보았다.' 정도 이상의 의미, 일본에게 2번이나 역사적인 침략을 당함으로써 엄청난 트라우마를 안겨준 고난 이상의 의미가 있지 않을까. 


저자는 그 의미를 '지정학적 요충지'라는 말에서 찾는다. 한반도 세력, 즉 조선은 임진왜란을 계기로 비로소 대륙 세력과 '협상'을 할 수 있는 위치로 올라서게 되었다는 말이다. 해양 세력과 대륙 세력 간의 힘겨루기에서 균형을 유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제 한반도는 이득을 얻어야 할 때다


현대에 들어서는 해양 세력에 일본과 미국이, 대륙 세력에 중국과 러시아가 포진 되었는데, 임진왜란 때처럼 대륙 세력은 한반도를 해양 세력의 세력 팽창 저지를 위한 '완충 지대'로 생각해 보호하려 하고 해양 세력은 대륙으로 세력을 팽창하기 위한 '교두보'로 생각해 진출하려 한다. 이 힘겨루기는 몇 백 년 간이나 계속 되었고, 한반도는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는 격이 될 때가 대부분이었다. 


저자는 말한다. 이제 고래 싸움에 새우 등 그만 터지고, 황새와 조개 싸움에 어부가 이득을 얻을 때가 되지 않았느냐고.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부터 해야 할까? 임진왜란 때부터 현재까지의 400년 역사를, 아니 임진왜란이 일어나기까지의 과정도 알아야 하니 대략 500년의 동아시아 역사를 직시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저자의 500년 동아시아 역사 일별은, 그것도 해양(일본, 미국)과 대륙(중국, 러시아)의 대결과 그 사이의 한반도 상황을 자세히 기록하고 분석한 일은 진실로 필요한 일이라 하겠다. 


저자의 역사 분석은 그야말로 재밌기까지 하다. 퍼즐을 하나하나 맞추는 듯한 동아시아 각국의 역사 나열은 신빙성 있게 전개된다. 한 예로, 임진왜란 이후 연쇄적으로 일어난 200년의 동아시아 역사이다. 먼저 임진왜란인데, 임진왜란을 단순히 도요토미 히데요시 한 사람에게 맞춰 생각하면 도무지 답이 안 나온다. 그가 왜 조선을 침략했는지 신빙성 있는 해답을 찾을 수 없는 것이다. 


임진왜란으로 인한 200년의 연쇄반응


대륙 세력이 되고자 한 일본의 대륙을 향한 세 번의 시도가 있었다는 걸 알 필요가 있다. 일본은 삼국시대 때 백제 부흥군을 지원해 수당 연합군과 한반도에서 싸웠다. 결과는 패배. 그리고 13~14세기에 왜구로써 한반도를 침략하기도 했다. 그리고 100년 간의 전국시대 분열을 끝낸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침략. 그는 세계 정복을 꿈꾸며 대륙 침략의 교두보로서 조선을 침략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죽음으로 끝난 임진왜란. 이 임진왜란은 '누르하치'에게 기회를 주었고, 기어코 누르하치는 여진족을 통일한 데 이어 그의 뒤를 이은 청나라는 명나라까지 멸망 시키기에 이른다. 임진왜란 때문에 명나라와 조선이 관심을 한반도로 완전히 돌린 사이에, 그 틈을 타 누르하치가 힘을 기를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두 나라, 세 나라의 역사 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나아가 세계 역사를 바꾼 임진왜란이다. 이 뿐만 아니다. 


그렇게 청나라에게 멸망 당한 명나라. 그 와중에 정성공이라는 사람이 장기전을 대비한 진지를 마련하기 위해 타이완으로 넘어갔는데, 명나라가 멸망당하자 정성공 일족은 타이완에서 독립 국가를 수립하고 네덜란드 세력을 쫓아낸다. 하지만 20년 만에 바다를 건너온 청나라군에 항복하고 멸망한다. 이때가 1683년이었다. 


이렇게 1500년대 일본의 전국시대, 1592년의 임진왜란, 1616년 누르하치의 여진 통일, 1636년 홍타이지의 청나라 건국, 1627년의 정묘호란과 1636년의 병자호란, 1683년의 타이완의 정성공 세력 멸망, 그리고 강희제의 중국 완전 통일까지. 200년 간 이어진 임진왜란의 연쇄반응이 끝난 것이다. 


역사를 단면적으로 보지 말고 미래를 대비해야


저자의 역사 분석은 이 사례 하나라도 충분히 신빙성을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는 말한다. 동북아시아의 위기 상황이 지구의 여타 위험 지역의 위기 상황보다 더 하다고 할 수 없다고 말이다. 그리고 지금의 동북아시아의 상황이 100여 년 전과 마찬가지라고 하는데, 그런 해석은 굉장히 위험한 것이라고 말이다. 


역사를 살펴 미래를 대비하되, 역사를 단면적으로 직시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통사적으로 길게, 얽히고 설킨 여러 국가의 역사들을 자세하게 살펴봐야 한다. 그렇게 해야 그나마 작은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한반도의 역할을 다시 한 번 통감할 수 있다. '지정학적 요충지'의 역사적 의미와 현재적 의미를 알고, 우리가 어떤 전략으로 미래를 설계해야 하는 지 알 수 있다. 


한반도는 어떤 길로 나아가야 하는가? 우리가 쓸 수 있는 카드는 점점 없어지고 있다. 그런 와중에 제2의 가쓰라-태프트 밀약으로 까지 불리는 '미일 방위협력을 위한 지침 개정'으로 한반도 주위 세력들 간의 알력이 심화되는 가운데, 언제까지 정치인들은 표를 얻기 위한 싸움만 계속할 것인가? 그 배후에 있는 국제적인 상황을 알지도, 알려고도 하지 않은 채 말이다. 한반도의 미래가 심히 걱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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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게다를 신고 어슬렁어슬렁>



<게다를 신고 어슬렁어슬렁> ⓒ정은문고



참으로 빠르게 변하는 세상이다. 우리는 어떻게 해서든 그 변화를 따라가기 위해 항상 뛰어다닌다. 걸어다니는 건 열정이 없는 것이고 무능한 것이며 '반역'에 가까운 것이다. 이 시대에서 변화 그리고 빠름이란 진리이자 지상 최대 목표가 되었다. "따라올테면 따라와봐"라며 '빠름, 빠름, 빠름'을 외치는 이들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내 자신이 한없이 초라해 보인다. 따라갈 수 없을 것 같으니까. 


그런 와중에 '느림'을 말하고 '옛 것'을 입에 올리면 지리멸렬한 보수주의자 딱지를 맞기 십상이다. 무능력한 사람이 되는 건 당연지사이다. 지식인이라면 응당 빠르게 변해가는 세상에 발맞춰 새로운 담론을 형성하는 주체가 되어야 하는데, 옛 것이나 전통을 말하고 있나니 한심해 보일 만하다. 


<게다를 신고 어슬렁어슬렁>(정은문고)에서 보여지는 저자 나가이 가후의 모습이 딱 그렇다. 제목에서도 느껴지듯이 그는 20세기 초 어마어마한 속도로 변하는 도쿄를 '어슬렁어슬렁' 산책한다. 말끔한 정장 차림에 어울리지 않는 게다(나막신 같이 생겼다)를 신고, 지팡이 대용인지 모를 박쥐우산(우산을 펼치면 박쥐가 날개를 펼친 것 같다)을 든 채. 


당대 최고의 탐미주의 문학가,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를 조우하다


나가이 가후는 당대 최고의 탐미주의 문학가로 알려져 있다. 사실 더 유명한 건 화류계 여인을 사랑했다는 이력이다. 예술가의 기질이 다분해서 인지, 미를 탐하는 탐미주의자로서의 모습인지 알 길은 없다. 다만 단지 그런 모습으로만 기억되기에는 너무 아쉬운 측면이 있다. 책 한 권으로 모든 걸 판단할 수는 없겠지만 말이다. 


책이 지어진 공간적 배경은 주지 했다시피 일본 도쿄이고, 시간적 배경은 1915년 전후이다. 일본 군국주의가 동아시아를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가 수많은 나라들의 역사에서 온갖 치욕으로 깊이 아로새겨질 시기이다. 하지만 저자가 말했다시피 당시 일본의 입장에서는 역사상 유례 없는 번영과 평화의 시기였다. 


그 중에서도 1915년을 전후한 도쿄는 철도가 개통되어 넓어졌고, 컬러 영화가 개봉하고 대형 백화점이 개장해 풍요를 직접적으로 느낄 수 있었으며, 기차역까지 들어섰다. 그야말로 추후 100년 동안 도쿄를 지탱할 것들이 이때 만들어진 것이다. 이 변혁의 시기 한복판에 탐미주의 문학가의 최고봉 나가이 가후가 살았다. 그에게 빠르게 변화하는 도쿄는 어떻게 다가왔을까?


변화하는 도쿄를 비판적으로, 그럼에도 소소한 것들에는 사랑을


먼저 말해두고 싶은 건 100년 전의 위와 같은 변화가 지금의 변화보다 그 폭이 훨씬 크다는 것이다. 지금의 변화, 그 빠르기와 폭이 인류 역사 전체의 변화의 그것보다 더 하다고 하지만, 우리들은 그 변화에 익숙해질 대로 익숙한 상태이다. 반면 19~20세기의 변화는 가히 혁명적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 변화를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했을 것이다. 나가이 가후도 그 중 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듯. 


저자는 변화하는 도쿄를 그리 좋게 바라보고 있지 않다. 아니, 비판적으로 굉장히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있다. 공장이니 다리니 건물이니 철도니 하는 현대적인 것들. 100년이 지난 지금의 서울에서도 여전히 많은 것들을 지워버리며 현대적인 건물들이 지어지고 있다. 


"전선을 잇는 데 불편하다는 이유로 아무 거리낌 없이 길가의 나무를 베고, 사랑받아온 풍광이든 유서 깊은 나무든 전혀 개의치 않고 붉은 벽돌집을 높다랗게 지어버리는 오늘날 작태는 실로 자국의 특색과 예부터 계승해온 문명을 뿌리부터 파괴하는 난폭한 행위다." (본문 속에서)


그러며 한편으로는 일상의 소소한 측면들을, '훅'하고 지나가 버릴 작고 볼 품 없는 것들을 사랑스러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사당이니 나무니 절이니 골목이니 석양이니 하는 옛 것들. 불과 십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볼 수 있었던 것들인데, 지금은 찾아볼 수 없어 유적 같이 되어 버렸다. 


"순수하면서도 미천하기 그지없는 어리석은 백성들의 습관은, 남사당패의 익살스런 탈춤이나 수수께끼 혹은 에마 속 서투른 그림처럼 한없이 내 마음을 위로한다." (본문 속에서)

부디 옛 것과 새로운 것이 조화를 이루길


우리가 이렇게 잘 먹고 잘 살고 편하게 사는 데에 현대 문명은 거의 모든 면에서 기여했다. 그러하기에 현대 문명을 비난하고 그 존재를 부정하는 것은, 내가 선 이곳의 거의 모든 것을 부정하는 것과 같다. 누워서 침 뱉기 격이 아닌가. 


하지만 어릴 적 소중했던 것들이 하루가 다르게 사라져가고 있다. 내 부모님 세대를 형성했던 것들이 자취를 감추고 있다. 그렇다면 그것들을 부정하고 다른 무엇으로 대체하려는 것 또한 나를 부정하는 처사가 아닌지? 그렇다면 어느 것 하나 홀대하지 않고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 게 아닌지?


다른 무엇보다 슬프고 공허할 것 같다. 새로움이 뿜어내는 활기와 열정, 그것에 대한 설렘도 크게 다가오지만, 사라지는 것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파 못 견딜 때가 있다. 너무 그리워서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가 있는 것이다. 저자의 생각과 시선은 그런 이들의 마음을 위로해주고 공감해주며 대변해준다. 부디 따뜻한 감성과 날카로운 이성이, 옛 것과 새로운 것이 조화를 이루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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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간 책 다시읽기] <조선, 1894년 여름>


<조선, 1894년 여름> 표지 ⓒ책과함께

19세기 중반, 조선은 무엇을 하고 있었나? 한마디로 말해 세상물정 모르는 청맹과니에 지나지 않았다. 개방이든 패쇄든 그건 중요하지 않다. 아마 당시의 기득권층들은 이와 같은 세상물정을 모르지 않았을 것이다. 단지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백성들의 눈과 귀를 막고 싶었을 뿐. 


<조선, 1894년 여름>(책과함께)를 통해 120년 전 조선으로 가보자. 우리나라의 시선이 아닌 외부인, 서양의 시선이다. 책의 저자는 오스트리아인이다. 부제도 그에 걸맞게 '오스트리아인 헤세 바르텍의 여행기'이다. 저자는 위대하거나 유명한 사람이라도 될까? 글쎄, 작가이자 여행가라고 한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다. 저자가 머리말에서도 밝히고 있듯이 그가 조선을 다녀가서 이 책을 내기 전까지는 조선에 관한 책들은 직접 방문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보고를 읽고 책을 썼기 때문에, 조선의 진짜 

모습을 발견할 수 없었다. 이 책은 조선의 진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가?


먼저 1894년에 조선의 상황부터 간략히 집고 넘어가야겠다. 저자가 조선 땅을 밟은 1894년에는 공교롭게도 새해 벽두부터 거대한 사건이 터진다. 1월에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 12월까지 계속된 것이다. 민비와 흥선대원군, 그리고 고종의 삼각관계가 한창 무르익어가고 외세의 손길은 국내 깊숙이 들어와 있을 때였다.


그 뿐인가? 6월에는 제1차 갑오개혁이 실시되고, 앞의 두 사건과 굉장히 밀접한 관련이 있는 국제 전쟁인 청일전쟁이 8월에 터지기에 이른다. 한마디로 격랑의 1894년이었던 것이다. 역시나 저자의 조선 국토 남북 종단 계획에도 차질이 생겼다. 


"개인적인 관찰이 이루어질 수 없는 곳에 대해서는 조선 주재 외교관과 관료, 상인, 선교사는 물론이고 조선인에게서도 정보를 얻어들었다. 조선의 왕과 대신들의 정책과 사법 진행, 그리고 궁궐과 백성들의 생활과 풍속에 관한 구체적인 사례를 풍부하게 담고 있는 조선 정부의 연도별 신문 간행본은 새롭고 유익한 정보의 보고 였다."(본문 중에서)


실제 관찰과 현지 자료의 절묘한 조화를 이룬다고 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조선의 문서를 번역한 것을 이 책을 통해서 다시 한국어로 번역한 것이 되니, 번역자와 감수자께서 많은 수고를 하셨음이 자명하다. 


저자는 세계 일주를 하던 중이었다. 1894년 여름까지 일본에 있던 저자는 위험을 무릎 쓰고 조선으로의 여행을 시도한다. 부산으로 들어온 저자에게 "항구는 생각했던 것보다 아주 괜찮고 더 예쁘며 친근해 보였다"고 한다. 하지만 그 이유는 한국 사람이 나에게 실망으로 다가왔다. 저자도 겉모습을 보고 괜찮고 예쁘다고 했을 뿐, 그 속사정을 아는 사람에겐 실망으로 다가올 것이라고 한마디 해주는 걸 잊지 않는다. 


"여행자가 보게 되는 부산은 조선이 아니라 철저하게 일본의 항구이기 때문이다. 이곳에는 이웃 쓰시마와 규슈에서 건너온 5천 명 가량의 갸름한 눈을 가진 작은 키의 남자와 여자들이 거주하고 있다"(본문 중에서)


"조선 땅과 그곳에 사는 사람들을 알기 위해 이 나라를 찾은 여행자에게 부산은 엄청난 실망을 안겨준다. 그 이유는 조선에서 두 번째로 큰 항구가 조선의 영토라는 것을 제외하고는 조선과 아무런 연관도 찾아볼 수 없는 철저한 일본 도시이기 때문이다."(본문 중에서)


당시의 부산은 거의 일본의 소유나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부산을 떠나 수도 서울을 방문한 저자. 그는 서울의 모습에 엄청난 실망을 했는지, 몇 페이지에 걸쳐 묘사와 감탄, 실망을 하고 있다. 한 번 들여다보자. 


"수도라! 나는 그곳에서 15분도 채 떨어져 있지 않았지만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중략) 도시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중략) 내 눈에는 시나이 반도의 호렙 산처럼 보이는, 황량하게 하늘로 솟은 바위들 사이에 있는 것은 아닐 텐데?"(본문 중에서)


실망한 만큼 구석구석 돌아보고 각종 자료와 함께 요목조목 체크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그 중에는 120년이 지난 지금도 그대로 남아 있는 모습들이 눈에 띈다. 세월이 변해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기에 이처럼 옛모습을 보고 신기해 하며 지금의 우리를 돌아볼 수 있지 않겠는가?


저자는 여행가답게 기본적인 지리에 관한 서술을 정확하게 함과 더불어, 거의 취재에 가까운 조선 문화 답사를 한다. 걔 중에 흥미로운 몇몇 파트를 뽑아보자면, '조선인의 오락', '(조선) 여성들의 삶', '조선의 독특한 점들' 등이다. 이를 간략히 살펴보자. 


"조선인들은 음악과 카드놀이, 야외 놀이, 권투, 씨름, 연날리기, 활쏘기 등을 열정적으로 좋아한다. (중략)음악적 관점에서 볼 때 조선인은 중국인보다 훨씬 앞서 있고, 20년 전 일본인의 상황보다 나은 것처럼 보인다."(본문 중에서)


비록 경제력이나 군사력에서는 양국에 밀릴지 몰라도 문화적으로는 전혀 밀리지 않을 뿐더러 오히려 많이 앞서 있었던 것이다. 당시에는 문화의 가치가 다른 가치보다 상대적으로 떨어져 있었기에, 조선은 후진국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 맥이 지금까지 이어져 왔기에, 지금 우리는 문화선진국 반열에 올라있다. 


위에서 언급한 파트에 속하지 않는, 아마도 지금의 우리가 보기에 제일 흥미로운 부분이 있어 소개해본다. 책에는 '조선의 세계 지도'라는 제목으로 둥그런 지도가 그려져 있는데, 약간 웃기고 기괴한 명칭을 뽑아 보았다. '날개 달린' 혹은 '깃털 달린'(남아프리카), '뻣뻣한 털이 난 회색의'(아메리카의 회색 곰이 사는 지역), '검은 발'(북아메리카 인디언), '커다란 북쪽'(러시아), '중화'(중국) 등이다. '중화'라고 표시한 중국 정도를 제외하고는 죄다 이런 식이다. 이 지도를 실제로 백성들이 즐겨 썼는지, 누가 만들었는지 알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그 당시 조선의 세계를 보는 눈이라고 생각하면 되지 않을까 싶다. 마지막으로 책의 마지막 부분을 옮긴다.


"위에서 언급한 교역 상황은 이 나라의 규모로 볼 때 아주 형편없는 수준이다. 하지만 10년 전만 해도 전혀 교역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사실과, 오늘날의 교역이 단 10년간의 결과라는 사실을 염두해 두어야 한다. 조선은 최근의 전쟁을 통해 이제 잠에서 깨어났다. 동아시아 열강들 사이의 경쟁심이 이 아름답고 부유한 나라가 앞으로 발전해나가는 데 더 이상 방해가 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본문 중에서)


저자의 생각을 읽어보니, 아마도 우리나라의 위치가 이곳이 아니었다면 지금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강국의 반열에 올랐지 않을까 싶다. 저자가 다녀간 후로 더욱더 가열찬 열강들의 방해가 있었던 조선. 보잘 것 없었던 조선의 지금은 결코 그렇지 않다. 조선의 잠재력을 높이 평가한 저자의 안목에 감탄을 금치 못하며, 100년이 훌쩍 지난 지금의 조선땅을 저자가 다시 밟는다면 어떤 생각이 들지. 자신의 안목에 감탄을 금치 못하지 않을까.


같이 읽으면 좋은 책[책의 뒷날개에 언급]

·스웨덴 기자 아손, 100년 전 한국을 걷다 - 을사조약 전야 대한제국 여행기

(아손 그렙스트 지음, 김상열 옮김, 2005년 1월)

· 영국화가 엘리자베스 키스의 코리아 1920~1940

(엘스펫 K. 로버트슨 스콧 지음, 송영달 옮김, 2006년 2월) 

·독일인 겐테가 본 신선한 나라 조선, 1901 

(지그프리트 겐테 지음, 권영경 옮김,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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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genv

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