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행복의 나라>


영화 <행복의 나라> 포스터. ⓒ인디스토리



지하철역 플랫폼, 어떤 남자 한 명이 철로로 뛰어든다. 자살을 하려는 것 같다. 옆에 있던 남자가 가방을 집어던지고 곧바로 뛰어든다. 자살하려는 남자를 구하려는 것 같다. 곧이어 열차가 들이닥치고, 구하려는 남자는 죽고 죽으려는 남자는 산다. 그로부터 8년이 지났다. 산 남자 민수는 결혼도 했고 아내가 임신도 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자신을 구하고 죽은 남자 진우의 제삿날 그의 집으로 향한다. 


아들 진우가 죽고 진우가 구한 민수를 아들처럼 생각하는 희자, 그녀의 민수를 향한 애정과 행동은 모두가 이해하지 못하고 이해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가장 꺼려하는 이는 민수이다. 그곳엔 자신을 구하고 대신 죽은 진우의 가족들이 있고, 그때마다 오는 진우의 여자친구였던 세희도 있다. 


민수는 결심한다. 더 이상 진우의 제삿날에 희자네 집으로 오지 않기로. 희자가 말한다. "아직은 이르다고 생각하지 않아?" 아들을 끔찍히도 생각했던 희자는 자신이 죽은 후엔 민수가 진우의 제사를 챙겨야 한다고 생각한다. 민수는 말한다. "그럼 제가 언제까지 와야 되요?" 그동안 할 만큼 했다고 생각하고, 결혼도 했고 아이도 생겼으니 민수도 더 이상 진우가 아닌 민수로 살고 싶다. 


죽고 싶었지만 살게 된 한 남자


영화 <행복의 나라>의 한 장면. ⓒ인디스토리



영화 <행복의 나라>는 죽고 싶었지만 강제로 살게 된 한 남자의 이야기다. 문제는 그를 대신해 죽고 싶지 않았던 한 남자가 죽게 되었다는 것. 그건 민수가 원하지도 않았고 행하지도 않았지만, 죽음보다 절대적으로 우위에 있는 삶 때문에 그는 죄의식을 짊어지고 살아야 한다. 


민수는 살고 싶다. 이렇게 사는 건 죽음보다 못한 것이기에. 민수는 행복하고 싶다. 하지만 희자는 그가 행복하는 걸 바라지 않는 것 같다. 비록 그를 진우의 대신으로 생각하지만 그는 진우가 아니기에. 영화는 삶과 죽음의 충돌, 민수의 죄의식과 삶에의 욕망의 충돌, 민수와 희자의 충돌, 희자의 민수를 향한 진우에 대한 충돌이 주를 이룬다. 


짧고 굵은 이 영화에서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하는 건 희자보다 민수이다. 시종일관 답답하고 축 처진 모습, 그것도 절반 이상 뒷모습만 보이는 그를 통해 죽음보다 더한 삶의 고통과 힘듦을 엿볼 수 있다. 그저 살아가는 것도 힘든데, 죽지 못해 사는 것 이상의 죽을 수도 없는 삶을 살아가는 건 무엇일지 가늠도 되지 않는다. 


생각해본다. 내가 '민수'라면이 아닌 내가 '희자'라면. 단순히 죽고 싶다라는 생각이 아닌 실제로 죽으려고 했던 민수의 생각을 따라가는 건 아무리 해도 힘들다. 감히 생각할 수도 없다. 반면,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세상을 떠났고 그를 대신해 살아난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는 건 가능은 할 것 같다. 


나라도 희자처럼 할 것 같다. '죽으려면 곱게 죽을 것이지 왜 하필 내 아들 앞에서 죽으려고 했느냐'고, 강제로 살려진 죽으려고 했던 이의 입장 따위는 생각하고 싶지도 생각하려고도 하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그게 솔직한 심정이고, 그게 지극히 인간적인 면모가 아닐까 싶다.


내가 '민수'라면. 자살하려는 생각을 따라가는 건 불가능할 테지만, 강제로 살려진 이후의 생각을 따라가는 건 가능은 할 것 같다. 너무나도 억울할 듯하다. 죽고자 했는데 강제로 살려진 것도 모자라 죄의식 속에 살아도 산 게 아닌 삶을 살아가고 있으니. 누가 살려달라고 했나... 희자는 뭘 바라는 걸까, 민수가 어떻게 하길 바라는 걸까. 


누구도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다


영화 <행복의 나라>의 한 장면. ⓒ인디스토리



우린 이 영화의 큰 두 축인 민수와 희자 모두 각각의 입장에 철저히 이해하고 공감하지만, 민수와 희자가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건 절대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럴 땐 한쪽이 사라져야 한다. 외부에서 보면 파국일, 그들이 보면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그 모습이어야 하는 것이다. 


영화 <해바라기>가 묘하게 겹쳐진다. 자신의 개차반 아들을 죽인 오태식이 철저히 교화되어 가석방되자 덕자는 그를 친아들 이상으로 따뜻하게 맞아준다. 태식은 그들과 함께 희망으로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 한다. 하지만, 세상은 그를 가만히 놔두지 않고 결국 파국으로 치닫는다. 그게 그의, 그들의 제자리인 것인가?


<행복의 나라>는 엄연히 다르다. <해바라기>의 태식과 덕자의 파국은 그들 간의 관계가 아닌 외부에서의 공격에 의한 것이지만, <행복의 나라>의 민수와 희자의 파국은 그들 간에 뿌리내려진 피할 수 없는 숙명의 관계에 의한 것이다. 


어느 누가 이들을 구원할 수 있을까. 서로 연락을 끊고 보지 않으면 되지 않느냐고 하지만, 민수가 평생 속죄하며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희자 입장에선 절대 그럴 수 없고 살고 싶고 행복해지고 싶은 민수 입장에선 안 보는 게 능사가 아닌 것이다. 


행복할 수 없는 곳에서, 행복할 수 없는 입장들이 양립하고, 행복할 수 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그들이 그저 불쌍할 뿐이다. 살아있는 그들 중 어느 누구도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다. 그들을 그렇게 만든 건 서로가 아닌, 죽고자 했던 민수를 살리고 죽은 희자의 아들 '진우'가 아닌가... 하지만 진우는 잘못은커녕 영웅적인 일을 했기에 탓할 수 없는 게 아닌가. 살아있는 한 행복이란 요원한 것인가. 그들은 행복할 자격이 없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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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킬링 디어>


영화 <킬링 디어> 포스터. ⓒ오드



아이스킬로스, 소포클레스와 함께 고대 그리스의 3대 비극작가 중 한 명 에우리피데스, 그의 최고 작품 중 하나로 <아울리스의 이피게네이아>가 전해진다. 그리스 연합군 총사령관 아가멤논은 아울리스 섬에서 함대를 출발시켜 트로이로 진격해야 했는데, 바람이 멎는 바람에 그러지 못하고 있었다. 


예언자 칼카스를 통해 수호신 아르테미스의 노여움을 풀어야 한다는 신탁을 듣는다. 아가멤논이 아르테미스의 사슴을 죽이는 실수를 저질렀기 때문이었다. 그는 큰딸 이피게네이아를 제물로 바친다. 그렇게 아가멤논은 트로이전쟁을 승리로 이끈 그리스의 영웅이 된다. 


<송곳니>, <더 랍스터> 등으로 전 세계 평론가들과 씨네필들의 열열한 지지를 받은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은 <아울리스의 이피게네이아>를 모티브 삼아 신작 <킬링 디어>를 만들었다고 한다. 운명, 딜레마, 가부장제 등의 이야기와 질문과 비판을 곁들였다. 가히 고대 그리스 최고 작품에 비견될 만한 각본의 성취를 인정받아 제70회 칸영화제에서 각본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 치밀함을 엿보자. 


가족 중 한 명을 골라 죽여야 한다


영화 <킬링 디어>의 한 장면. ⓒ오드



외과의 스티븐(콜린 파렐 분)에겐 젊은 친구가 한 명 있다. 마틴(배리 케오간 분)이라는 이름의 그 친구는 스티븐의 큰딸 학교 친구로 스티븐처럼 심장병 전문의가 되고 싶다고 한다. 병원에도 들르고, 산책도 같이 하고, 서로의 집도 오간다. 마틴의 집에 갔을 때 마틴 엄마의 유혹을 뿌리치고 나온 후 스티븐은 마틴의 연락을 피한다. 


집착적인 행동을 보이는 마틴, 얼마 지나지 않아 스티븐 가족들에게 이상 징후가 발견된다. 먼저 작은아들 밥이 두 다리를 쓸 수 없어진다. 육체, 정신, 심리 검사를 다 해보았지만 아무런 문제가 없다. 머지 않아 밥은 밥도 먹지 않게 되고, 큰딸 킴도 두 다리를 쓸 수 없어진다.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마틴이 스티븐에게 설명한다. 사실상 협박이다. 마틴의 아빠가 스티븐에게 죽었다는 것이다. 그가 맡은 환자였던 마틴의 아빠는 수술대 위에서 죽었다. 마틴은 스티븐이 자신의 아빠를 죽인 것처럼 스티븐이 자기 가족 중 한 명을 죽여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야 균형이 맞는 게 아니냐고. 


만약 스티븐이 직접 죽이지 않는다면 모두 병들어서 죽을 거라는 것이다. 밥이 죽고 킴이 죽고 스티븐의 부인 안나(니콜 키드만 분)도 죽을 거란다. 수족이 마비될 것이고, 먹는 걸 거부해서 기아에 허덕이게 될 것이며, 급기야 눈에서 피가 흐를 거고, 결국 죽을 거라고 말이다. 이 믿을 수 없는 예언을 믿을 수밖에 없는 스티븐은 과연 어떻게 할 것인가? 정말 가족 중 한 명을 직접 죽일 것인가, 죽인다면 누굴 죽일 것인가. 


종교적 운명과 우연적 딜레마


영화 <킬링 디어>의 한 장면. ⓒ오드



아가멤논이 아르테미스 신의 노여움을 사서 결국 큰딸 이피게네이아를 제물로 바칠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스티븐은 마틴의 분노를 사서 결국 자기 가족 중 한 명을 직접 죽일 수밖에 없게 될 운명에 처한다. 거스를 수 없는 운명처럼 눈앞에서 벌어지는 믿을 수 없는 일들 때문에 우연으로 치부할 수도 없다. 


신의 힘에 의해 이미 정해진 처지를 바꿀 능력 따위는 인간에게 없다. 특히 과학의 세계에서 살고 있는 인간에게 들이닥친 초자연적인 힘에 의한 모습엔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할 수 있는 건 모조리 해보겠지만, 그저 지켜보고 있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다. 종교라는 게 그런 것인가, 종교인들이 할 수 있는 게 그런 것인가. 


영화는 운명의 굴레에 종속되어버린 한 가족의 모습을 통해 종교의 한 면모를 통렬하게 비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 한편, 이미 운명의 굴레 속에 들어간 또는 들어갈 수밖에 없게 된 일개 인간이 겪는 끔찍한 딜레마도 보여준다. 과연 당신이라면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말이다. 


운명이 신의 영역이라면 딜레마는 인간의 영역이다. 운명이 선택되어지는 거라면 딜레마는 선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옳고 그름, 선과 악이 나뉘어져 있지 않기 때문에 치명적이고 어렵기 그지없다. 그럴 때 찾는 게 아이러니하게도 운명이다. 절대로 선택할 수 없는 난제에 부딪혔을 때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타개하려는 게 그것이다. 영화는 딜레마에 처한 한 인간의 나약함과 무책임한 모습을 통해 종교를 비꼬고 운명을 무시하는 이들도 통렬하게 비꼬고 있는 것 같다. 


가부장제


영화 <킬링 디어>의 한 장면. ⓒ오드



자, 우리 스티븐의 얼굴을 보자. 얼굴을 뒤덮다시피 하는 '털'의 존재를 볼 수 있다. 밥은 마틴에게 겨드랑이 털을 보여줄 것을, 마틴은 스티븐에게 겨드랑이 털을 보여줄 것을 청한다. 이 세 남자 사이에서 나이순대로 보여지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은 털로 상징되는 권력, 그 본능적이고 동물적인 모습이다. 


극중에서 안나는 말한다. 왜 남편이 잘못한 걸 가지고 남편 아닌 가족들이 피해를 봐야 하느냐고 말이다. 신의 대리인 마틴의 논리는 스티븐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다. '스티븐'이 마틴의 아빠를 죽였으니, '스티븐'이 자신의 가족 중 한 명을 죽여야 한다는 것. 등가교환이라면 스티븐이 죽어 마땅하나, 신은 '가부장제'라는 절대적 법칙을 만들어 내렸으니 가장인 스티븐이 주체가 되어 가족을 죽이는 '고통'을 맞보아야 한다는 것.


이 진중하고 으스스하고 가슴 졸이게 하는 영화에서 가장 우스꽝스러운 모습이다. 당연한 듯 하나하나 실행되고 실행에 옮기려고 하지만,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행태이기도 하다. 아마도 그렇게 느끼면 느낄수록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게 그만큼 철처히 들어맞았다고 할 수 있겠다. 가부장제에 대한 통렬한 비꼼. 


여러 가지 것들을 통렬하게 비꼬는 와중에 그에 걸맞지 않아 보여 그 비꼼의 수위가 더욱 강해지게 만드는 분위기 연출에는 OST의 역할이 지대했다. 클래시컬한 OST들은 영화를 굉장히 날카롭고 불편하게 만든다. 모든 배우들이 발성하는 높낮이 없는 낮고 무성의한 목소리톤과 기묘하게 어울린다. 두 번 다시 보기 싫은 영화이지만, 여러 가지 의미로 두 번 이상 봐야 할 것 같은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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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간 책 다시읽기] 김훈 작가의 <칼의 노래>


김훈 작가의 소설 <칼의 노래> 표지 ⓒ문학동네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위대한 위인 세 명을 뽑자면, 고구려의 광개토대왕과 조선의 세종대왕, 이순신을 뽑지 않을까 싶다. 광활한 만주 대륙을 정복하고, 길이 남을 한글을 창제하였으며, 백전 백승으로 나라를 지켰다. 이 세 위인은 드라마(태왕사신기, 뿌리깊은 나무)와 영화(명량)은 물론 소설(뿌리깊은 나무, 칼의 노래)로 잘 알려져 있다. 


두 왕에겐 정치적 내홍이 없었다. 큰아버지 소수림왕이 국가의 틀을 완벽히 잡고 아버지 고국양왕이 잘 이은 와중에 뒷탈 없이 정복 전쟁에만 힘을 쏟은 광개토대왕, 아버지 태종이 대대적 숙청으로 완벽하게 왕권을 강화한 와중에 백성들을 위해 힘을 쏟은 세종대왕. 이러나 저러나 그들은 '왕'이었던 것이다. 


반면, 이순신에게는 평생 정치적 내홍이 뒤따랐다. 나라가 통째로 넘어가게 생긴 마당에 오직 이순신밖에 없을 정도의 위기 상황에서 이순신으로만 향하는, 향할 수밖에 없는 민심을 두려워한 왕(선조)과 왕을 따르는 무리들의 시기와 질투. 이순신은 외부의 적을 절대적으로 막아내야 하는 의무를 수행하는 동시에 내부의 적도 절대 무시할 수 없는 상황을 전쟁 내내 겪어야 했다. 


그는 역사에 길이 남을 절대적 영웅임에 분명하지만, 그러하기에 더더욱 이리저리 휘둘리고 고민하고 자책하고 그러면서도 앞뒤를 막아야 하는, 철저히 발가 벗겨진 인간 이순신을 알아야만 한다. 이 말도 안 되는 사면초가의 상황에서 이순신은 어떻게 해야 했을까. 어떻게 하고 싶었을까. 어떻게 했을까. 김훈 작가의 명작 소설 <칼의 노래>는 영웅 이순신이 아닌 인간 이순신을 알게 하는 좋은 기회를 선사한다. 


이순신이 감당해야 했던 것, 삶과 죽음


소설은 이순신의 백의종군으로부터 시작된다. 때는 1597년 4월 초, 같은 해 1월 일본군을 공격하라는 선조의 명령에 불복한 죄로 파직되어 서울로 압송된 후 고된 신문을 받은 후 3개월 만에 풀려난 것이다. 7월에 칠천량 해전으로 조선 수군이 궤멸되고, 8월 초에 이순신은 삼도수군통제사로 복귀한다. 그에게 남은 함선은 12척뿐이었다. 그는 12척으로 명량해전의 기적을 일으킨다. 


명량의 기적 이전에도 이후에도 그에겐 참으로 비현실적인 고민이 따라다녔다. 어디서, 어떻게 죽어야 하는지. 항상 사지(死地)를 물색했다. 전쟁을 치르며 이순신에겐 가족이 하나둘 죽어갔다. 당시 조선 어느 누가 그러지 않았겠냐마는, 머나먼 곳에서 나라의 명운을 홀로 짊어지고 있는 그에게 가족의 죽음을 생각하고 슬퍼하는 건 일종의 사치와 다름 아니었던 것이다. 


또한 수많은 적들을, 적들이지만 누군가의 가족임에 분명한 그들을 죽음으로 내몰기도 하였고 그 때문에 수많은 백성과 아군들도 죽어나갔다. 그에게 이 세상은 더 이상 유의미한 게 아니었다. 무의미한 세상을 살아가는 이유는 오직 하나였다. '내가 죽으면 조선은 끝장이다'.


사지를 물색한 건 당연한 것일 수도 있다. 적의 완벽한 궤멸과 절대적인 철수를 지켜본 후에야 눈을 감을 수 있었을 테고, 혹시라도 모를 그 이전의 죽음으로 조선 전체가 피로 물들지 않게 또는 덜 물들게 전라도 해안이 아닌 경상도 해안에서 죽어야 했다. 그에게 삶은, 죽음은 무엇이었을까. 


김훈은 이순신을 짓누르는 그 무게를 온전히 느낄 수 있게 1인칭 시점으로 그려낸다. 분명 이순신이라는 무게에, 이순신이 느꼈을 삶과 죽음의 무게에 처참하게 짓눌렸을 텐데, 그것들을 온전히 글로 승화시켜 우리에게 보여준다. 이순신이 감당했어야 할 모든 것들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참으로 많이 힘들고 아팠겠다. 


영웅 아닌 인간 이순신


시종일관 이순신이 염두에 두는 건 적만큼 알 수 없는 임금 선조의 의중이다. 임금은 이순신을 죽여야 사직을 보존할 수 있다고 믿었다. 조선의 국토가 유린당하는 와중에 백전 백승의 그에게로 쏠리는 민심이 두려웠다. 하지만 임금은 이순신을 살려야 사직을 보존할 수 있다는 걸 알았다. 임금은 적에게서 사직을 보존하고 싶었다. 이순신은 살았고 적 덕분에 적 앞에 섰으며 적을 무찌르고 나서는 임금의 손에 죽을 것이었다. 


진정한 절망은, 현재의 좌절에서 오지 않는다. 미래의 희망없음에서 오는 것이다. 이순신에게 미래 따위는 없었다. 결정된 죽음만이 있을 뿐. 그가 할 수 있는 건 그래서 사지를 물색하는 일뿐이었다. 그가 싸운 건 외부의 적(왜)과 내부의 적(임금), 그리고 무의미한 이 세상 그 자체였다. 


이순신은 세상에 칼로 베어버릴 수 없는 것들이 너무 많음에 절망했다. 오직 적들만 베어버릴 수 있었고, 그래서 그는 벨 수 있는 걸 벴다. 하지만 임금을 벨 수 없었고, 무의미를 벨 수 없었다. 악몽도, 끼니도, 자책도, 그 어느 것도 칼로 벨 수 없었다. '인간' 이순신에게 칼로 벨 수 없는 것들은 참으로 힘겹게 다가왔다. 그는 괴로웠다.  


<칼의 노래>에서의 이순신은 인간 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심지어 유약하다고 표현할 수도 있다. 맹렬히 진격하는 적의 칼끝을 피해 물러서기만 반복하다가 매복한 아군과 함께 적을 섬멸하고, 뭍의 적군 포탄이 닿지 않는 곳에서 정박되어 있는 적군 배를 섬멸하고, 물길과 뭍지형을 살펴 적이 스스로 섬멸되게 하고... 그가 행했던 백전백승 전투는 화려하지 않았고, 그의 전쟁은 그 전투들에 있지 않았다. 


이 소설을 기점으로 이순신은 더 이상 절대무력으로 적에게서 완전한 승리를 쟁취한 영웅전설의 주인공이 아니게 되었다. 이순신은 절대적으로 이겨야 하는 상황에서 화려하지 않은 완벽한 승리만을 원해야 했던 망국의 마지막 희망이었다. 완벽과는 거리가 너무도 멀었던 그, 그래서 역설적으로 이순신은 역사상 그 어느 위인보다 추앙받아 마땅하다. 이 책은 완벽히 수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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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슬로우 웨스트>


영화 <슬로우 웨스트> 포스터. ⓒ더 픽쳐스



1870년 미국의 콜로라도 깊숙한 곳, 16살 짜리 소년 제이(코디 스밋 맥피 분)는 사랑하는 애인 로즈를 찾으러 멀고 먼 스코틀랜드에서 왔다. 로즈는 제이의 귀족 친척을 실수로 죽인 아버지와 함께 도망쳤다. 신대륙에서 제이가 처음 마주친 건 마을을 잃고 피신 중인 듯 보이는 원주민들, 그리고 얼마 못 가 마주친 건 인디언 사냥꾼이다. 


발사되지도 않는 총을 가지고 다니는 제이는 그야말로 무방비 상태, 그때 나타난 현상금 사냥꾼 사일러스(마이클 패스벤더 분)가 인디언 사냥꾼을 죽이고는 제이에게서 돈을 받고 '서쪽'으로의 여정을 함께 한다. 미국 서부는 제이에게 희망과 착한 마음이 가득한 곳이고, 사일러스에겐 돈에 눈 먼 악당이 튀어나와 칼을 꽂는 곳이었다. 


이 둘의 여정은 쉬운듯 쉽지 않다. 느긋하기 짝이 없는, 느릿느릿한 속도와 분위기이지만, 가는 곳마다 위협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참으로 다양한 종류의 사람들을 마주친다. 인디언, 인디언 학살자, 현상금 사냥꾼으로 보이는 백인, 굶어 죽기 직전의 스웨덴계 가족, 학자 같아 보이는 독일계 사기꾼, 그리고 한때 사일러스가 몸 담았던 현상금 사냥꾼 패거리까지. 어려움이란 어려움을 다 뚫고 제이는 로즈를 다시 만날 수 있을까? 그저 생존하는 게 목적인듯 보이는 사일러스는?


'아름다운' 웨스턴 영화


영화 <슬로우 웨스트>의 한 장면. ⓒ더 픽쳐스



영화 <슬로우 웨스트>는 독특한 웨스턴 영화이자, 버디 로드 영화이자, 성장 영화이다. 이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장르를 한데 모은 것 자체가 충분히 독특하다 할 만하지만, 이 장르들 모두의 정통 문법에서 조금씩 빛나가거나 어긋나면서도 그것이 '파격의 부미(不美)'의 길을 가지 않는 묘미가 있다. 


즉, 이 영화는 영화 외적으로 파격의 길을 택했다는 측면에서도, 영화 내적으로 폭력과 고통이 기본 장착(?)되어 있는 곳이 배경이라는 점에서도, 결코 아름다울 수 없음에도 또 아름다움과는 하등 거리가 멀어보임에도 시종일관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유지하며 흔적을 남기고 영향을 끼친다. 


그건 다분히 허무맹랑하고 대책 없는 제이 덕분일 것이다. 생존이 전부인 것 같은 곳에서 생존이 전부는 아니라고 하고, 총칼보다 책을 더 소중히 여기고, 남을 죽이지 못하면 자신이 죽는 와중에 남을 죽이고서 죄책감을 느끼고, 보편적인 죽음이 일상화된 곳에서 죽음과 사랑을 동일시하고... 


실제였다면 진작 죽음을 면치 못할 게 분명한 제이는, 아름다운 동화처럼 반짝반짝 빛나는 이 웨스턴 영화에서 그 누구보다 눈에 띈다. 그리고 여러 면에서 파격을 택한 영화 또한 제이를 중심에 두고 제이의 여정과 그로 인한 성장을 기본 축에 둔 것처럼 보인다. 마치 소행성 B612에서 지구로 찾아와 가히 그 순수한 영혼으로 여행 중 많은 이들에게 영향을 끼치는 어린왕자처럼 말이다. 하지만 이 영화의 진정한 주인공은, '성장'의 주인공은 제이가 아닌 사일러스이다. 


산전수전 다 겪은 사일러스의 성장


영화 <슬로우 웨스트>의 한 장면. ⓒ더 픽쳐스



성장에는 필연적으로 변화가 수반된다. 생각해보면, 맹목적인 사랑과 희망, 착한 마음에의 찬가를 고수하는 제이에게 성장이 필요한가? 물론 폭력과 고통과 고난이 지배하는 곳에서 가장 필요없는 것들일지 모른다. 여기서 우린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려 다른 생각을 할 필요가 있다.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고는 총칼로 '침공'해 무차별로 빼앗고 죽인 백인들, 미국 서부 개척은 곧 과거 수백 년 동안 자행된 학살의 반복이다. 그런 배경 하에서 오직 생존에의 길은 수정되고 변화되어야 하는 성질의 것이 아닌가. 즉 성장이 필요하지 않은가 말이다. 그 모습이 당연하다고 하지만, 당연한 게 되어서는 안 되지 않은가. 


사일러스는 제이와의 여정으로 당연하지만 당연해서는 안 되는 자신의 길을 수정한다. 생존이 전부가 아니라는 깨달음을 얻는다. 이곳에서 생존이 전부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깨달음인 것이다. '당연히' 어리고 어리숙하고 어울리지 않는 제이의 성장 스토리라고 생각했지만, 산전수전 다 겪은 사일러스의 성장 스토리라고 생각하니 많은 것들이 보인다. 많은 것들을 생각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여기서 한 발짝 더 들어가볼 필요도 있다. 총칼을 앞세운 무단 통치로 기반은 다질 수 있지만 강력한 저항이 따르는 법, 이후엔 필수적으로 문화 통치가 필요하다. 그렇다면, 총칼 대신 사랑과 희망과 책의 문화로 서부를 개척해야 하는 것인가. 영화는 제이를 통해 그래야 했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인가. 역사적 배경까지 섭렵하여 성장의 주체 반전을 훌륭히 시도한 영화는, 그 때문에 새로운 논란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는 점을 인지할 필요도 있었다고 본다. 


삶과 죽음의 얇팍함


영화 <슬로우 웨스트>의 한 장면. ⓒ더 픽쳐스



영화에서 삶과 죽음은 제이와 사일러스의 여정에 따로 또 같이 한다. 가장 중요하게 다뤄지는 주제이기도 하다. 삶은 짧고 죽음은 길다고 했던가. 하지만 이곳에선 삶은 길고 죽음은 짧은 것 같다. 그저 살아가는 것뿐인 생존이야말로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기 때문인데, 모든 죽음이 하나 같이 허망하거니와 순간이다. 


<슬로우 웨스트>의 죽음은 그래서 전혀 '슬로우'하지 않다. 빠르고 간결하며 피가 난무하는 파티가 벌어지지 않는다. 대신 두 주인공마저 웃음 짓게 하는 죽음도 있다. 그런 죽음은 이곳과 어울리지 않는데, 그런 죽음들은 이곳의 선입견을 바꿔버리기에 충분하다. 죽음을 불사하는 개척정신과 문명을 확대시키려는 탐험정신의 위대함이 사실은 별 게 아니라는 것. 


죽음의 얇팍함은 삶의 얇팍함으로 이어진다. 당연히 이곳에서의 삶을 규정하는 생존 또한 얇팍하기 그지없다는 걸 말한다. 얇팍한 생존을 그저 영위하기 때문에 삶이 길어보인다. 이곳만의 삶을, 생을 지어올려야 한다. 타인을 죽이고 타인에게 죽임을 당하는 와중에 생존에의 삶이 되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이 영화의 대리인 제이가 곳곳에 흔적을 내고 영향을 끼치고 남은 이들에게 부여하려는 것이 다름 아닌 삶이다. 생존 그리고 생존과 대비되는 얇팍한 죽음이 판을 치는 곳의 삶이 아닌, 삶과 죽음 그리고 사랑의 보편적 진리 말이다. 그것들을 다시금 이곳에 뿌리내리는 건 굉장히 느릴 테지만, 반드시 성취될 것이다. 그 주체와 방법과 방향까지 영화가 제시하진 않는다. 혹은 못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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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영화 <수성못>


영화 <수성못> 포스터. ⓒ인디스토리



대구 수성구 수성유원지 수성못에서 오리배 아르바이트를 하며 편입 공부를 병행하는 오희정(이세영 분), 그녀는 집안의 도움 없이 홀로 치열하게 분투한다. 어떻게든 이곳을 떠나 서울에 있는 대학으로 가기 위해서다. 그러던 비가 쏟아지던 어느 날, 손님도 없고 해서 쏟아지는 잠을 감당 못하는 사이 중년 남성 한 명이 무단으로 오리배를 탈취해 수성못으로 나아간다. 그러곤 곧 투신자살을 시도한다. 


희정은 오리배 담당자로서 당연히 지급해야 했던 구명조끼를 조느냐고 깜빡했다는 걸 사장이 알게 되면 잘리게 된다는 사실에 질겁한다. 당일 야밤에 몰래 구명조끼를 수성못에 버리려다가 때마침 촬영을 하고 있던 차영목(김현준 분)에게 들킨다. 그는 자살시도자들을 촬영하고 있었던 것. 영목은 희정의 비밀을 빌미로 그녀를 자살센터로 끌어들여 자살시도자 촬영을 도우게 한다. 


한편, 희정에겐 오빠 오희준(남태부 분)이 있다. 그는 아무런 생산적인 일도 하지 않고 아무도 만나지 않은 채 집에서 책만 들여다보고 있다. 그러며 희정에게 '하고 싶은 일도 있어서 좋겠다'고 푸념한다. 그는 자살충동에 못이겨 정신병원을 다니고 있는데, 군대에 가지 않으려는 수작 같기도 하고 군대를 못 가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KAFA 출신 감독의 장편 데뷔작 <수성못>


영화 <수성못>의 한 장면. ⓒ인디스토리



영화 <수성못>은 한국의 영화 사관학교라 불리는 한국영화아카데미(KAFA) 출신의 유지영 감독 장편 데뷔작이다. 이 작품은 KAFA의 2017년 장편데뷔작 기획전에 출품되었는데, 장편제작연구과정 9기의 대표 완성작 중 하나이다. 지난 2009년 시작된 이 과정의 기획전 대표작들을 들여다보면, 입이 떡 벌어진다. 


2010년엔 개인적으로 2000년대 한국 독립영화 중 최고라 할 만한 <파수꾼>이, 2013년엔 <잉투기>와 <들개>가, 2015년엔 <소셜포비아>와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 등을 선보였다. 출중한 데뷔작 이후 이렇다 할 활동을 하지 않는(못하는) 감독들이 상당한 게 마음에 걸리지만 KAFA의 능력에 의문을 품게 하진 않는다. 


<아기와 나> 등과 함께 2017년에 선보인 <수성못>. 3명의 주인공을 통해 보여주는 시선과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두루뭉술한듯 선명하고 식상한듯 신선하다. 청춘의 삶과 죽음, 삶과 죽음에의 치열함, 지방에서 여성으로 살아가는 것 등의 주제가, 수성못이라는 소재로 집결하고 수성못이라는 소재에서 비롯된다. 


'삶'도 '죽음'도, '치열하지 않음'도 치열한 청춘들


영화 <수성못>의 한 장면. ⓒ인디스토리



정녕 '삶'을 치열하게 살아가는 희정, 돈도 열심히 벌고 공부도 열심히 하고 운동도 열심히다. 이 시대, 바로 지금 가장 청춘다운 청춘의 모습이다. 그녀에게로 한 발자국 더 들어가보면, 지방과 여성이 보인다. 지방에선 성공할 수 없다는, 즉 이곳에서 살아선 안 된다는 열망과 함께 여성으로 살기 힘들다는, 즉 더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열망이 합쳐진다. 일반적인 청춘의 치열함보다 더 목적적이다. 


영목이 자살시도자를 촬영하고 그들의 말을 듣는 건 알고보니 사회봉사의 일환이었다. 그는 다름아닌 동반자살클럽회장으로, 동반자살을 주도했다가 실패한 경력이 있다. 정녕 '죽음'을 치열하게 치르려는 영목이다. 그 치열함에서 희정의 치열함이 떠오른다. '그들'의 '목적적'인 치열함 말이다. 그들은 대구를 떠나 서울로 가든 이승을 떠나 저승으로 가든, 지긋지긋한 '이곳'을 떠나 '그곳'으로 가려 한다. 


장강명 작가의 히트작 <한국이 싫어서>(민음사)가 겹쳐진다. '헬조선'을 탈출해 호주로 가려는 청춘들, 하지만 호주도 또 다른 '헬'일 뿐이라는 교훈 아닌 교훈을 던진다. 이 소설이 주로 탈출 이후까지의 이야기를 그리는 반면, <수성못>은 주로 탈출하기까지의 이야기를 그린다. 


삶이든 죽음이든 정녕 쉽지가 않다. 그러다 보니, 그들은 공중에 붕 떠 있는 것 같다. 영화는 그 모습을 수성못에 떠 있는 오리배라고 보았다. 하염없이 떠 다니지만, 절대 수성못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오리배들 말이다. 그 어떤 치열함으로도 대구를, 이승을 떠나지 못하는 그들이 애처롭다. 


그렇다면, '치열하지 않음'을 치열하게 내보이는 희정 오빠 희준은 어떨까. 우리 안에 희정과 영목의 결이 다른 치열함이 공존할 텐데, 당연히 희준의 치열하지 않음의 치열함도 존재할 것이다. 희정과 영목이 애처로운 개인들의 형상이라면, 희준은 그 개인들에게 있는 또 다른 형상이 아닐까. 혹은 있으면 하고 바라는 형상. 


광범위하게 그저 보여준다


영화 <수성못>의 한 장면. ⓒ인디스토리



영화는 삶과 죽음, 무엇을 지향하고 무엇을 지양하라고 가르치지도 가리키지도 않고 설교하지도 선언하지도 않으며 판단하지도 재단하지도 않는다. 그저 보여준다. 때론 우스꽝스러움 속의 진지함으로, 때론 흐리멍덩함 속의 적나라함으로. 


그 모든 모습이 우리의 모습이고 우리 주위의 모습이고 우리 사회의 모습인 게 맞다. 그래서 이 영화 <수성못>은, 독립영화가 흔히 추구하는 '사회의 한 단면'을 적나라하게 작가적 시점으로 파고드는 게 아니라 의외로 꽤나 광범위하게 들여다보고 있다. 


그러다 보니 파괴적인 영화적 재미에선 조금 떨어질 우려가 있는데, 자살이라는 소재와 더불어 극초반에 벌어진 자살미수 사건에서 비롯되는 소소한 미스터리를 흥미 유발의 원천으로 사용한다. 


대체로 적절하고 적정하고 적재적소한 이 영화, 감독의 능력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다만, 더욱 기억에 남는 영화를 남기기 위해선 오히려 이 영화의 장점이었던 적절함과 적정함을 버리고 한 곳을 파고드는 집요함이 필요해 보이기도 한다. 이제 갓 데뷔한 감독한테 흔히 보이는 패기 대신 노련함이 엿보이는 유지영 감독, 오히려 다음 작품에서 패기있는 모습을 보이면 좋겠다는 생각과 함께 그래서 더 기대가 되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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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래빗 홀>


영화 <래빗 홀> 포스터. ⓒ프리비전 엔터테인먼트



조용하고 한적한 교외의 큰 집에서 남부럽지 않게 살아가는 베카(니콜 키드먼 분)와 하위(아론 에크하트 분). 하지만 그들에겐 불과 8개월 전 크나큰 일이 있었다. 네 살 된 아들 대니가 달려가는 개를 따라가다가 차에 치여 세상을 등진 것이다. 그들은 애써 밝은 척 괜찮은 척 하고 비슷한 일을 당한 부부들 모임에 나가 위안을 받으려 한다. 


쉽지 않다. 아니, 너무 어렵다.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모르겠다. 베카는 대니에 대한 흔적을 지워나가며 과거를 뒤로 한 채 나아가려는 것처럼 보이는 반면, 하위는 매일같이 대니의 살아생전 동영상을 보며 과거에서 위안을 찾으려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 차이 때문인지 그들 사이는 알게 모르게 점점 벌어진다. 


문제만 일으키던 베카의 여동생이 임신을 해 남자친구와 함께 엄마 집에 머무르게 된다. 한편, 베카 하위 부부와 절친했던 데키 릭 부부, 하위와 릭은 여전히 잘 만나고 대니를 포함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지만 베카와 데키는 연락이 끊긴 상태다. 


베카는 다른 사람이 아닌 대니를 치인 장본인 제이슨을 만나 위안 아닌 위안을 받고자 하는데, 아들을 잃었던 엄마와 아이를 갖게된 여동생과는 계속 부딪힌다. 하위는 모임에서 알게된 개비를 만나 동질감에서 오는 위안을 받고자 한다. 여기서 방식의 옳고 그름은 의미가 없다. 그들은 서로 각자만의 방식으로 위안을 찾아야만 하는 것일까?


죽음이라는 아픔


영화 <래빗 홀>의 한 장면. ⓒ프리비전 엔터테인먼트



영화 <헤드윅>과 <숏버스>를 통해 자못 파격적인, 그만의 언어로 고민을 드러내고 편견을 부수고자 했던 존 카메론 미첼이 <래빗 홀>을 통해서 '아픔'을 말했다. 아픔을 대하고 견디고 이겨내는 방식을 고민하고 또한 편견을 부수고자 한다. 지루하다 할 만큼 정적인 대응일지 모르지만, 죽음이라는 아픔을 대하는 방식으론 파격적이다. 


누군가를 잃는다는 것, 가족을 잃는다는 것, 살아갈 날이 창창한 나의 자식을 잃는다는 것. 죽음에 차등이 있일 수 있겠냐마는, 남겨진 이가 가장 아픈 건 아마도 자식 잃은 부모의 사례가 아닐까. 영화는 죽음에 관한 최고 수위의 아픔을 받고 견뎌내야 하는 한 부부를 정면으로 바라본다. 


누구나 누군가를 잃지만 이런 류의 끔찍한 상실을 겪어본 이는 많지 않다는 것과 그로 인해 이 영화를 완전한 몰입 하에서 볼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는 것과 그럼에도 상실의 아픔을 공유하고 그 이상의 위로와 위안 없이도 그 자체로 더할나위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으면 좋겠다는 것을 미리 말해둔다. 


자식 잃은 아픔에 대항하는 방식


영화 <래빗 홀>의 한 장면. ⓒ프리비전 엔터테인먼트



영화는 자식 잃은 아픔에 대항하는 두 부부의 방식 차이를 우리에게 내보인다. 베카가 미래지향적이고 하위가 과거지향적이어서, 베카는 대니의 흔적을 지우려 하고 하위는 지니려고 하는 것일 수 있다. 베카가 과거의 인연을 끊으려 하면서 자신 안으로 천착해 들어가려고 하는 반면 하위는 과거의 인연을 계속 이어나가며 같은 경험을 가진 사람들과 함께 동질감 어린 위안을 받고자 한다. 


한편, 현재 대니는 떠나고 없다. 베카는 대니의 흔적을 지움으로써 도망치려고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제이슨이라는 아픔의 가장 큰 축을 대면하는 용기도 보인다. 그의 잘못이 아니라는 걸 아주 잘 알지만, 그걸 인정하는 것과 그를 만나서 대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차원이 다른 차이가 있다. 그녀의 행동은 정녕 위대하다.


하위가 보이는 행동은 지극히 정상적이다. 또한 지극히 일반적이고 인간적이다. 누구라도 자식을 상실하면 그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고 도망치고 싶다. 아니, 도망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시시때때로 상실의 때 이전으로 돌아가버리고 마는 것이다. 제이슨과 마주하는 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두려움이다. 그의 모습에서 또 다른 내가, 또 다른 우리가 보인다. 


영화는 말한다. 그럼에도 베카와 하위는 모두 힘들다고 말이다. 위대한 베카와 일반적인 하위 모두 이 속절없는 상실과 아픔과 슬픔 앞에서 한없이 힘들다고 말이다. 과연 이 앞에 '어떻게'를 붙일 수 있을까. '어떻게 이 아픔을 이겨내야 하는가' 따위의 물음이 존재할 수 있을까, 존재하는 게 맞긴 할까. 


영화가 건네는 답


영화 <래빗 홀>의 한 장면. ⓒ프리비전 엔터테인먼트



답을 주진 않지만, 아니 답을 줄 수 없지만, 답을 찾아보자. 제목에서 찾을 수 있고, 뜻밖에 베카 엄마의 경험에서 묻어나오는 무심한듯 진정어린 말에서도 찾을 수 있다. 영화 내내 스치듯 지나가는, 제이슨이 그리는 만화책 '래빗 홀'. 다른 세계가 존재하고 래빗 홀을 통해 가게 된 그곳에 나의 다른 버전이 존재한다는 내용이다. 


고통은 베카와 하위 부부를 단 한 순간도 놔두지 않을 것이다. 출구는커녕 작은 빛조차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 있는 것처럼 그들은 평생을 살아가야 한다. 이 영화를 통해서만이 아니더라도 단언할 수 있지만, '래빗 홀'에 대한 상상이 순간이나마 견딜 수 있게 해주는 건 분명하다. 영화가 건네는 답 아닌 답이다. 


베카 엄마에겐 아들이 있었다. 서른 살에 헤로인 과용으로 죽은 아들이. 베카에게 '아들의 죽음'이라는 동질감으로 비교하며 위로 아닌 위로를 건네려 하지만 반감만 살 뿐이다. 그럼에도 '아들의 죽음'이 주는 치명적 아픔은 같은 것, 베카는 엄마에게서 위안을 받는다. 그녀의 말이 영화가 건네는 또 다른 답이 되지 않을까. 


"언제부터인가 견딜 만해져. 결국은 밖으로 나와 주머니에 넣고 다닐 작은 조약돌만 하게 되지. 때로는 잊어버리기도 해. 그러다 또 문득 생각나서 보면 거기 있는 거야. 그래, 그런 거야. 끔찍할 수도 있지. 하지만 늘 그런 건 아니야. 그건 뭐랄까, 아들 대신 너에게 주어진 무엇, 그냥 평생 가슴에 품고 가야 할 것, 그리고 사라지지 않는... 그렇지만... 사실,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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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코코>


<코코> 포스터.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픽사, 디즈니, 혹은 픽사&디즈니는 거의 매해 우리를 찾아와 거의 실망을 안기지 않았다. 세상이 점점 디지털화 되어가는 만큼 최첨단 디지털 기술로 나날이 완벽해가는 애니메이션을 선보이는 동시에, 살아가는 데 기본 중에 기본이 되는 지극한 아날로그적 가치를 선보인다. 그 조화는 가히 환상적이다. 


픽사&디즈니의 애니메이션이 아이들보다 어른들에게 더 와닿는 연유가 역설적으로 거기에 있다 하겠다. 조금이라도 더 어른일수록 조금이라도 더 아날로그적인 습성이 남아 있지 않겠는가. 그걸 접해본 사람이라면 그리워하지 않을 수 없고 말이다. 영화 <코코>의 기본은 '가족' '사랑' '우정' '화해' '기억' 등의 가치이다. 


<코코>는 멕시코라는 이질적이라면 이질적이고 친숙하다면 친숙한 곳의 '죽은 자의 날'이라는 멕시코 전통 명절을 배경으로, 현실과 비현실이 만나고 삶과 죽음이 모이며 흩어진 가족과 멀어진 사랑이 다시 만난다. 그 가장 중요한 키를 '코코'가 지니고 있지만, 그 사이사이를 이어주는 이들은 따로 있다. 


죽은 자의 날, 미구엘의 모험 아닌 모험


죽은 자의 날, 미구엘의 모험 아닌 모험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아빠가 음악가인 한 가족이 있었다. 그들은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즐거운 나날을 보냈다. 하지만 아빠는 꿈을 이루기 위해 가족을 뒤로 하고는 떠나버린다. 홀로 남은 엄마는 살기 위해 신발을 만든다. 그녀는 신발 만드는 법을 온가족에게 퍼뜨리고 집안 자체가 신발 만드는 기업이 된다. 여기 그 아빠와 엄마를 고조할아버지와 고조할머니로 둔 미구엘이 있다. 하지만 그는 음악을 좋아라 한다...


미구엘의 고조할아버지 때문에 멕시코에서 유일하다시피 음악을 멀리하게 된 미구엘의 집안, 그럼에도 그는 멕시코 최고의 음악가 에르네스토 델라 크루즈의 '기회를 잡아라'라는 말을 듣고는 꼭 음악가 광장에서 연주를 하려고 한다. 할머니가 부셔버린 기타 대신 그가 택한 기타는 델라 크루즈 납골당에 전시해놓은 기타. 


하필 그 날은 '죽은 자의 날', 미구엘은 그 기타를 훔쳐 한번 튕기는 순간, 죽은 자의 세계로 가버리고 만다. 미구엘은 다시 산 사람의 세계로 돌아가고자 하는데, 이멜다 고조할머니는 음악을 절대 하지 않는다는 조건 하에 그의 저주를 풀어주고자 한다. 하지만 미구엘은 그런 조건이라면 사절! 우연한 기회에 자신의 고조할아버지라고 믿게된 델라 크루즈에게 축복을 받고자 길을 떠난다. 


기억, 사랑, 통섭...


기억, 사랑, 통섭...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죽은 자의 날'은 스페인의 침략 이전부터 이어져 내려온 멕시코의 전통 명절이다. 해골과 뼈 모양의 조형물이나 사탕을 만들고, 죽은 사람의 사진과 이름을 제단에 올리고는, 여러 종류의 축제를 연다. 이승과 저승이 이때만큼은 한 곳에 모여 어울리는 것이다. 영화에서도 굉장히 중요하게 비치는 바, 제단에 사진과 이름이 올라가 있지 않으면 저승에 있는 이가 이승으로 갈 수 없다. '기억'의 소중함...


멕시코에서 음악은 곧 삶이다. 멕시코인들은 비록 고단한 삶이지만 와중에 '사랑'을 최고의 가치로 치며 스페인 등의 풍습과 문화가 혼합된 특유의 낭만과 열정이 이를 뒷받침한다. 음악은 사랑을 표현하기 위한 최고의 수단인 것이다. 한편 잘 드러내려고 하진 않지만 이면에 항상 있는 슬픔 또한 음악만큼 잘 표현해낼 수 있는 수단이 없다. 미구엘의 가족이 음악으로 흩어졌다지만 반드시 음악으로 다시 뭉칠 수밖에 없을 거다. 


<코코>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가치는 픽사&디즈니가 추구하는 가치와 일맥상통하는 '통섭'이 아닐까 한다. 서로 소통하고, 전체 또는 부분들을 하나로 잇는 것 말이다. 미구엘과 그의 강아지 친구 단테는 참으로 꼬이고 꼬여 대대로 끊어져버린 태초의 끈을, 음악이라는 그 끈을 다름 아닌 음악으로 잇고자 한다. 그 와중에 가족이 있고 사랑이 있고 화해가 있고 기억이 있다. 그 작업은 쉽지 않지만 반드시 해내고 말 것이다. 


삶과 죽음이 하나되는 시간


삶과 죽음이 하나되는 시간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아쉬운 부분도 없지 않아 있다. 가족이라는 명제를 다시 생각해야 하는 시대에 전통적이기 짝이 없는 케케묵은 가족 개념을 선보이고 있다는 점, 살아생전 얼마나 잘 살았냐에 따라 죽어서도 계급이 나뉘어 지는 듯한 모습 등 말이다. 보편적이고 아날로그적인 가치를 전하기 위해 희생할 수밖에 없었다고 하지만, 조금 더 신경 써 주었으면 하는 부분들이다. 


그럼에도 영화는 급기야 20년이 넘은 기억부터 5년 전 기억까지 불러낸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증조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외삼촌이 돌아가셨을 때... 어떤 건 희미해져 한 장면 정도밖에 기억나지 않고, 어떤 건 여전히 생생하기 그지 없어 가슴이 아리고 쓰린 그 기억들이 차례로 떠오른다. 그들이 기억하는 게 그들로 하여금 저승에서조차 사라지지 않게 한다는 영화 속 깨달음. 


한편, 충격이라면 충격일 수 있지만 따뜻하기 그지 없게 다가온 부분도 거기에 있다. 삶과 죽음이 하나되는 장면,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이 한 곳에 모여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며 삶과 죽음 모든 것들을 축복한다. 우리에게 죽음은 너무나도 먼, 무섭고 두려운 무엇이 아닌가. 우리도 제사를 지내며 조상님을 모시지만 그건 굉장히 엄숙한 자리가 아닌가. 멕시코가 부러워지는 것이다, 이 영화 한 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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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의 <히어애프터>


클린트 이스트우드답지 않은 소재를 클린트 이스트우드답게 풀어낸 작품 <히어애프터>. ⓒ워너브라더스코리아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의 수많은 작품 중에서 단연 튀는 작품이 있다. <히어애프터>가 그 작품이다. 그의 연출 특징상 어떤 사건을 다루든 특별할 것 없는 일상에서 벗어나지 않는 느낌을 드러내곤 하는데, 그래서인지 SF나 초자연적인 소재를 다루는 건 상상하기 힘들다. 현실과 비현실 사이에는 건너기 힘든 강이 있지 않은가. 


<히어애프터>는 죽음 이후를 다룬다는 점에서, 다른 누구도 아닌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작품이라는 점에서 특이하다 하겠다. 더 눈길이 가는 건, 비현실적인 소재임에도 마치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한 현실적인 연출이라는 데 있다. 어떻게 비현실에서 현실을 끄집어낼까 자못 궁금하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답지 않은 소재를 가져와 클린트 이스트우드답게 풀어낸 것이리라. 


그의 필모에서 <설리> <아메리칸 스나이퍼> <그랜 토리노> 등의 다분히 문제적이고 약간은 정치적인 성향의 작품 또는 <미스틱 리버> <체인질링> 등의 이야기 중심의 드라마가 아닌, <히어애프터>는 <밀리언 달러 베이비> <인빅터스> 등의 인생 감성을 노래하는 드라마와 결을 같이 한다.


'죽음'이라는 질문에 직면하다


죽음과 직간접적으로 직면한 주인공들. 죽음은 분명 삶과 맞닿아 있다. 하지만 죽음과 삶은 멀디 멀다. ⓒ워너브라더스코리아



마리(세실 드 프랑스 분)는 프랑스에서 휴가를 보내다가 거대한 쓰나미에 쓸려 죽는다. 아니, 죽음의 문턱에 이르렀다가 다시 살아난다. 사지를 헤맨 것이리라. 그곳에서 마리는 믿기 힘든 광경을 목격한다. 흔히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들이 봤다는 광경 말이다. 그녀는 그 광경에서 헤어나오기 힘들고, 사람들은 그녀를 이상하게 생각한다. 


조지(멧 데이먼 분)는 미국에서 공장 노동자로 생활한다. 사실 그는 사후세계를 보고 느끼고 그곳의 사람들과 대화할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영매로 전천후 활동을 했었다. 하지만 그로 인해 무너지는 삶 때문에 환멸을 느끼고 그만두었다. 그때문에 알지 말아야 할 사실들을 알게 되고, 사람들은 그를 멀리한다. 


마커스는 영국에서 술중독자 편모 슬하에서 쌍둥이 형과 함께 생활한다. 형은 그에게 세상 무엇보다 중요한 사람인데, 어느 날 그를 대신해 심부름을 갔다가 교통사고로 비명횡사한다. 믿기 힘든 일을 당한 마커스는 아직 형을 떠나보내지 못했다. 형도 마찬가지일 거라 생각한 그는 거기 어딘가에 있는 형과 말하고 싶다. 


전혀 다른 곳에서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가는 셋은 '죽음'이라는 공통된 질문에 직면한다. 죽음에 다다랐던 사람이나 죽음 이후의 세계를 들여다볼 수 있는 사람이나 눈앞에서 분신을 잃고 죽음 이후의 세계와 대화하고 싶은 사람이나 모두 죽음을 대하는 게 힘들다. 그들은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삶과 죽음은 단절되어 있지 않지만, 서로 건너기 힘든 강을 마주보고 있다. 


'죽음'을 보여주지만 '삶'을 말하다


영화는,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죽음을 통해 삶을 말하고자 한다. ⓒ워너브라더스코리아



영화는, 그러나 죽음을 말하려는 게 아니다. 분명 세 주인공의 세 이야기는 사후, 즉 죽음 이후를 바라보고 향하고 그곳에 다다르려 하지만 그렇게 해서 얻고자 하는 건 결국 '삶'이다. 영화가 우리에게 다다르기 힘들고 상상하기 힘든 '히어애프터'를 단번에 보여주는 건 죽음과 죽음 이후까지 아우르는 삶의 확대를 꽤하기 위해서인 것이다. 


우리는 선천적으로든 의도적으로든 삶에서 죽음을 지워버린다.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 삶을 살아가지만 죽음을 살아갈 순 없기 때문에 자연스레 지워진 것일 테고, 한순간도 경험해보지 못했기 때문에 애초에 생각조차 하기 힘들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죽음을 향해 살아간다. 이 순간에도 계속 죽어간다. 모두들 알고 있다. 


우리 모두 영화의 세 주인공 또는 세 이야기와 어떤 식으로든 연관되어 있다. '사후 세계를 보고 살아 돌아온 사람' 이야기는 은근 수없이 들어왔을 테고, 죽어서 옆에 없는 소중한 사람과 이야기하고 싶지 않은 사람을 없을 테며, 살면서 소중한 사람이 죽지 않은 사람도 없을 거다. 그럼에도 우리 모두 잘 살고자 한다. 


영화가 '웰다잉'을 말하려는 건 아니다. 삶의 연장선상에서 죽음을 직시하고 죽음에 좀 더 관심을 두고자 하는 건 같지만, 죽음을 잘 대비하는 등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말하지는 않는다. 그런 면에서 영화는 오히려 삶에 더 천착한다. 죽음에 가까이 있는 만큼 삶에 감사하게 된 것이다. 


소외된 사람들의 이야기


영화는 한편 소외된 사람들, 즉 죽음에 직면해 삶에서 멀어진 사람들을 조명한다. ⓒ워너브라더스코리아



그럼에도, 삶에서 죽음을 말하는 건 외롭고 고독하다. 경험해보지 않은 것을 머리로는 받아들이되 가슴으로는 받아들일 수 없다. 궁금하고 흥미롭지만 곁에 두고 싶지는 않다. 세 주인공은 하나같이 혼자다. 외롭고 고독해 죽음 이후에서 길을 찾고자 한다. 하지만 그들은 살아 있지 않은가. <히어애프터>는 그래서 생각지도 못한 소외된 사람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마리와 조지는 특별한 경험을 했고 특별한 능력도 가지고 있지만 결국 혼자가 된다. 혼자가 될 수밖에 없는 경험이고 능력이다. 그게 지금 이 세상의 한계일지 모른다. 반대로 그게 이 영화의 특별한 점일 것이다. 특별한 걸 특별한 연출이 아닌 담담한 연출로 다루어 일상에 편입시킨 뒤 소외의 개념으로 치환시킨 점 말이다.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만의 드라마 스타일이 만들어낸 이야기, 캐릭터, 소구점이다. 


이 영화로 삶을 다시 보았는가, 이 영화로 죽음을 다시 생각했는가, 이 영화로 사후 세계에 흥미가 생겼는가. 모두 그랬을지도, 모두 그러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중요한 건 생각의 전환, 시각의 확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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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오래된 리뷰] <열두살 샘>


공고롭게도, 열두살 때 백혈병으로 친구를 잃었다. 영화 <열두살 샘>은 백혈병으로 죽음을 앞둔 열두살 샘의 이야기이다. ⓒ㈜미디어데이



어린 시절, 친구 몇 명을 잃었다. 12살 때 반 친구가 백혈병으로 하늘나라로 갔고, 13살 때 동네 친구가 교통사고로 세상을 떴다. 중학생 때는 함께 놀던 다른 반 친구가 무슨 연유 때문인지 기억내지 않는 이유로 죽었다. 12살 때는 증조할머니도 돌아가셨던 것 같다. 그보다 어렸을 땐 외할머니이 돌아가신 모습도 봤고. 그때마다 충격으로 울음을 감추지 못했었다. 그런데, 그 울음은 슬픔이 아닌 공포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 사람을 다신 볼 수 없다는 슬픔이 아닌, 내가 죽음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는 공포 말이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그 공포는 중학생이 되기도 전부터 나를 괴롭혀 온 것 같다. '죽음이 뭐지, 죽으면 어떻게 되지, 죽으면 어디로 가지' 등, 그 어린 나에게 그보다 두려운 건 아무것도 없었다. 


12살 때 백혈병으로 앓다가 세상을 떠난 친구는 아직도 생생하다. 반에서 함께 공부하던 친구가 어느 날 갑자기 백혈병으로 학교에 나오지 못했고 상태가 호전되지 않는다는 소식을 들었으며 결국 영원히 우리 곁을 떠났다는 소식까지. 우리 반 전체는 친구를 기리며 묵념하고 울었다. 그 친구의 자리에는 꽃이 놓였다. 


죽음을 앞두고도 '용기' 있는 열두살 샘


샘에겐 상상 못할 '용기'가 있다. 삶보다 죽음이 가깝지만, 누구보다 삶과 가까이 있는 듯하기 때문이다. ⓒ㈜미디어데이



영화 <열두살 샘>은 백혈병에 걸려 죽음을 앞둔 12살 샘의 이야기다. 너무 공교롭게도 나의 경험이 반쯤 완벽하게 투영되어 있어 놀라기도 했는데, 한편 그 불편한 기억을 조금은 좋은 쪽으로 희석시킬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이 영화는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죽음과 처절히 싸워 이기는 내용이 아니라, 죽음에 직면해 오히려 삶에 더 가까이 가고자 하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 용기가 영화의 포인트다. 


열두살에 불과한 샘, 백혈병으로 시한부 선보를 받은 상태다. 85%의 완치 확률을 자랑하는(?) 백혈병이지만 샘은 세 번이나 재발했고 두 번 항암치료를 받았다. 그는 완치되지 못했고 1년 안에는 이 세상에 없을 것이다. 샘은 병원에서 만난 절친 펠릭스와 죽기 전에 꼭 해보고 싶은 버킷리스트를 만든다. 


세계 신기록 깨기, 에스컬레이터 거꾸로 올라가기, 공포영화 보기, 담배 피기, 술 마시기, 진하게 키스하기, 여자친구 사귀기, 과학자 되기, 비행선 타기, 귀신 보기, 우주선 타고 별 보기. 샘은 펠릭스와 함께, 혼자서, 아빠와 함께, 여자친구와 함께 결코 쉽지 않을 것 같은 이 모든 버킷리스트를 실행에 옮긴다. 


한편, 가장 마음에 걸리는 건 다름 아닌 '아빠'. 아빠는 아픈 샘을 마치 외계인 보듯이 한다. 아빠의 투철한 이성이 반드시 죽음으로 치닫는 백혈병에 걸린 샘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거기엔 이성이 아닌 감성이 필요한 부분이 있을 텐데 말이다. 과연 샘과 아빠는 선을 넘을 수 있을까? 그리고 먼저 세상을 떠나게 된 펠릭스, 죽음 앞에서도 명랑했던 샘에게 위기가 찾아온다. 잘 이겨내고 끝까지 용기를 지닐 수 있을까?


핵심을 찌르는 한마디, "신파는 아니겠지?"


이 영화, 신파가 아니다. 통통 튀기까지 하는데, 그게 감동을 자아낸다. 묘하다. ⓒ㈜미디어데이



죽어가는 자신의 이야기로 일기를 쓰고 영상으로 남기는 샘, 그 사실을 알게된 아빠와의 단문단답이 의미심장하면서 영화의 핵심을 찌른다. 이런저런 얘기가 끝나고 방을 나가기 전에 아빠가 묻는다. "사랑 무지개로 가득 찬 질질 짜는... 신파는 아니겠지?" 샘이 질색하며 "아니에요."라고 답하니, 아빠가 씨익 웃으며 "다행이다."라고 하고는 나간다. <열두살 샘>은 신파가 아니라는 거다. 


12살 어린 나이의 아이가 죽어가는 데 신파가 아닐 수 있다? 가장 우선적으로 당사자가 대단한 용기를 지녀야 한다. 그런데, 12살이면 나도 그랬듯이 죽음에 대한 공포를 충분히 느낄 수 있는 나이다. 공포로 벌벌 떨며 잠 못이룰 수 있는 나이인 것이다. 그런데 샘은 어찌 죽음에 초연하다 못해 유머러스할 수가 있을까? 영화라서?


먼저, 시간적으로 영화가 시작되기 전에 이미 세 번의 재발과 두 번의 항암치료를 겪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항암치료는 차라리 죽고 싶을 정도로 극심한 고통을 동반한다고 알려져 있기에, 그걸 뚫고온 샘에게 죽음은 차라리 친숙한 존재일수도 있는 것이다. 그건 펠릭스도 마찬가지. 그래서 옆에서 지켜보는 부모님들이 더 힘들어 한다. 


그리고 학교를 가지 못하는 그들을 위해 특수교육가정교사가 주기적으로 오는데, 그 시간이 그들에게 크게 작용한다. 버킷리스트를 작성하고 실행에 옮기는 것도, 샘이 자신의 이야기를 책으로 쓰고 영상으로 옮기는 것도 다 그 시간 덕분인 것이다. 교사는 그들에게 조심스럽지만 결코 숨기지 않고 말해준다. 삶과 죽음에 대해서 말이다. 


"결국 인류는 영원한 삶이란 불가능하단 걸 깨달았지. 하지만 우리는 뭔가를 영원히 남길 수 있단다. 바로 예술 작품이야."


'죽음'이 아닌 '삶'으로의 강한 끌림


결국, '삶'이다. 죽으면 모든 게 끝나니 사랑도 뭣도 필요 없다고 할지 모르지만, 샘은 첫사랑에 설렌다. 내가 나일 수 있는... ⓒ㈜미디어데이



영화는 일종의 파트가 나뉘어져 있는데, 샘이 던지는 정답이 없는 문제와 그에 대한 나름의 답에 따라서다. 죽음에 대해서 어린 아이답지만 굉장히 원론적이고 진지한 질문이다. 예를 들면, '죽으면 아플까?' '사람은 왜 죽어야 할까?' 등이다. 과학적으로 또는 종교적으로 접근하면 나름의 답을 찾을 수 있는 문제들이다. 하지만 정작 죽음에 직면했을 때 그런 답들이 무슨 소용 있겠는가. 그럼에도 답을 찾으려는, 정답이 없는 줄 알면서도 답을 찾으려는 샘의 행동은 삶으로의 강력한 끌림 때문이겠다. 


우린 이 영화로 '죽음'이 아닌 '삶'을 본다. 어린 아이의 치기어린 호기심으로 별 의미 없고 허접한 죽음 이야기를 듣는 게 아니라, 어엿한 인간의 진심어린 고민과 치열하고 고등한 삶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다. 그 어디서도 얻을 수 없는 고귀한 삶의 투쟁을 지켜볼 수 있다. 


그렇다고 이 영화를 보고 삶 또는 죽음에 대한 정답을 찾을 수는 없다. '정답은 없다'는 정답만 찾을 수 있을 뿐이다. 다만, 방향은 어렴풋이 짚어볼 수 있을 것 같다. 일종의 균형 감각이라고 할까. 삶과 죽음, 죽음과 삶을 그 어느 것도 멀리 하지 않고, 모두 끌어안되 내가 나일 수 있는 방법을 계속 강구하고 실행에 옮기는 것이다. 


삶에도 죽음에도 매몰되지 않고 '나'를 이어나간다는 게, 추상적이기도 하거니와 인지한다고 해도 굉장히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영화를 보면, 그게 무엇인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어렴풋이나마 알게 되지 않을까 싶다. 막상 죽음이 닥치면 그게 가능할까 심히 의문이 들지만, 또 못할 게 무언가 싶기도 하게 만드는, 그런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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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철학은 어떻게 삶이 되는가>


<철학은 어떻게 삶이 되는가> 표지 ⓒ책세상



'철학'은 어렵고 멀게 느껴진다. 어려운 건 어쩔 수 없을지 몰라도, 굳이 멀어야 할 필요는 없겠지마느 그 어떤 학문보다 우리와 먼 게 사실이다. 문사철(문학, 역사, 철학)을 아우르는 인문학이 맹위를 떨치고 있는 와중에도 철학은 그 고고함을 꺾지 않는다. 가까이 오라 손짓해도 선뜻 가까이 가지 못한다. 


철학이 생겨난 고대, 철학은 삶에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한다. '어떻게 해야 잘 살 수 있을까'하는 문제가 곧 철학이었다는 것이다. 지혜 추구가 주요 목표였다. 하지만 17~18세기 자본주의 형성과 시민사회 성립으로 근대가 시작되며 함께 등장한 근대 학문 하에서 철학은 삶에서 멀어졌다. 근대 철학자들은 학문과 기술과 경제로 삶의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철학은 지금 우리가 인지하고 있는 지극한 '학문'이 된 것이다. 


이에 반기를 든 위대한 철학자 칸트는 '철학이 치료제로 작용해야 한다'고 했다. 20~21세기의 '아픈 시대'에 이보다 더 정확하게 철학이 가야할 길을 제시한 말이 있을까. 이 말은 전언과 다름 없었다. 많은 철학자들이 이에 동의하고 활발한 논의를 전개했다. 철학은 학문에서 다시금 삶으로 돌아와야 한다는 것. 직접적으로 삶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 


'삶의 기술'로서의 철학, 철학의 전통으로의 회기


삶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걸 삶을 다스리는 기술이라 한다면, 이는 '삶의 기술'로 요약할 수 있겠다. 혹자에게는 이 움직임이 철학을 삶의 기술의 하나로, 즉 '삶'이라는 하찮은 것을 위한 수단으로 축소하려는 걸로 보일 수 있겠다. 사실이다. 하지만 철학이 살기 위해선 필요하지 않을까. 그리고 이는 철학의 전통으로의 회기이다. 


삶의 기술 철학 권위자 빌헬름 슈미트는 오랫동안 이를 천착해왔다. 그의 주요 저서 또한 <삶의 기술 철학>이라는 책인데, 우리는 그 요약판인 <철학은 어떻게 삶이 되는가>(책세상)으로 손쉽게 그 정수를 접할 수 있다. 앞의 책에선 18개 장을 통해 15개의 기술을 선보였던 바, 이 책에선 3개의 기술을 추가했다. 


"철학적 숙고는 삶의 기술에서의 기술에 대해, '숙련된 삶'에 대해 그리고 의식적인 삶의 운영을 위해 한몫을 할 수 있다. 근거와 논증을 탐구하고, 개념들을 해명하고, 구조와 그것에 근본적으로 연관되는 사항들을 발견하고, 조건들을 숙고하고, 가능성들을 분석하는 것은 철학적인 행위이다. 이런 의미에서 철학은 삶이 처한 상황을 해명하는 데 보조 역할을 할 수 있다."(11쪽)


저자가 주장하는 삶의 기술들, 그중 공감되는 것


저자가 주장하는 삶의 기술들은 일관성 있게 나열되어 있지만, 격렬히 공감되는 것들이 있기도 하고 받아들이기 힘들기도 하다. '습관'을 삶의 기술을 지속적으로 수련하고 의식적으로 실행하는 기법 중 하나로 본 것도 그 중 하나이다. 그동안 습관에 자기계발 요소를 듬뿍 담아 참으로 많은 저서들이 나왔는데, 철학적으로 접근할 수 있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다. 애초에 저자가 주장하는 바가 철학의 자기계발화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삶의 기술의 주체는 수련과 테크닉이 필요하고, 그 가장 기초적인 기법으로 습관을 들며, 타율적 습관이 아닌 자율적 습관이 진정 의미 있는 형식의 습관이라 말한다. 탁월한 능력을 양산하는 습관, 모든 게 완벽하지만 주의할 점이 있다면 칸트가 모든 습관의 위험한 적대자로 삼은 '관성의 법칙'이다. 정착된 습관은 아무런 수고 없이 탁월한 효과를 발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멜랑콜리'를 바라보는 시선이 독특한대, 가장 공감이 가는 부분이다. '우울증'으로 불리며 '치료'해야 하는 '질병'으로 인식된 멜랑콜리를 삶의 기술 철학 중 하나로 본 것이다. 재독 철학자 한병철이 주장하는 '피로사회'와 닿아 있는 면이 있다. 심하게 낙관적인 보편적 정보와 소통의 문화에서 의미가 생긴 세계에 대한 무상함의 의식으로서의 멜랑콜리, 활동의 과잉이 낳은 활동사회 또는 성과사회에서 느끼는 피로감과 정반대에 위치한 무력감 충분한 멜랑콜리. 


한때 멜랑콜리가 트렌드처럼 젊은 층을 휩쓴 적이 있었는데, 다분히 반(反)세계적인 생각에서 기인했다고 본다. 세계가 한없이 오르막일 때에도, 한없이 내리막일 때에도, 다를바 없는 무한 활동과 긍정이 모두를 압박할 때였다. 아마 이전까지 찾을 수 없는 막강한 압박이었을 테다. 그 반대급부로 생겨난 질병인 멜랑콜리. 이제는 당당히 '어떻게 삶을 살아야' 하는지 고민할 때 반드시 필요한 기술 중 하나로 자리매김 해야 한다. 


저자가 주장하는 삶의 기술들, 그중 받아들이기 힘든 것


끝간데 없는 긍정이 아무리 철폐되어야 한다고 해도, 일부러라도 부정적으로 사고해야 한다는 저자의 주장을 완전히 받아들이긴 힘들다. 현대적 인간이 행복에 대한 강박관념으로 힘들어 한다는 건 알고 있다. 그렇지만, 항상 가장 좋지 않은 경우를 생각하고 있어야 한다는 저자의 주장은 조금 유치한 감이 없지 않아 있다. 같은 주장을 하는 한병철의 접근과 성찰과는 차이가 있다. 


주도권을 쥐려고 하는 주체가 통제할 수 없는 일 앞에서 좌절하며 얻는 병리현상을 말하기 위해, 한병철은 긍정의 폐해을 주장했지 그저 부정을 말하진 않았다. 반면, 저자가 주장하는 부정은 부정을 위한 부정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멜랑콜리는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자는 주장은 하나의 시각으로 바라볼 요지가 있지만, 부정적으로 사고하라는 건 인생 자체를 바꾸라는 말과 다름 없다. 함부로 해야 하는 말이 아닌 것이다. 거기에 어떤 깊은 접근이 있다고 해도 말이다. 


죽음을 동반하는 삶을 살라는 주장은 머리로는 받아들이지만 가슴으로는 받아들이기 힘들다. 삶이 있으면 반드시 죽음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이 누가 있겠으며, 죽음을 상정함으로서 삶이 더욱 풍부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이 누가 있겠는가. 누구나 다 알고 있지만, 아직 삶 속에 온전히 죽음을 받아들이기 힘든 게 사실이다. 


죽음의 재발견이 꾸준히 이루어지고 있다. 가슴으로도 받아들여지게 지속적으로 활동을 하고 있다. 간접적으로라도 죽음을 체험한다. 궁극적으로 죽음에의 집착을 없애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고자 한다. 


"삶의 기술은 죽음의 기술과 결부되어 있다. 또한 삶의 지식 역시 죽음의 지식과 결부되어 있다. 죽음은 삶을 그늘지게 하지 않는다. 죽음은 삶의 한 구성요소이다." (106쪽)


'아름다운 삶'과 '나의 삶'


열거된 관점들로 저자가 추구하는 삶의 기술의 목적은 무엇일까. '아름다운 삶'이라고 한다. 아름다운 삶은 무엇일까. 명명백백히 밝히지는 못하고 있지만, '긍정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름답다고 한다. 얼핏 저자가 앞서 주장한 바와 상반되는 것 같은데, 이에 저자는 쾌적한 것과 즐거운 것 등의 '긍정적인 것'과는 다른, 불쾌한 것, 고통스러운 것, 추악한 것, 부정적인 것 등을 포함한 '긍정적인 것'을 뜻하다고 밝혔다. 


저자가 주장하는 바가 삶의 기술의 자기계발화일지 모른다고 했는데, 정정해야 할 것 같다. 그는 삶의 기술을 미셸 푸코의 '실존의 미학'과 맞닿아 있는 개념으로 상정하고, 이를 위해 아름다움의 개념을 새롭게 규정했기 때문이다. 여기에 이르면 '삶의 기술의 자기계발화'가 아닌 '성찰적 삶의 기술'이 형성 된다. '인간'과 '삶'을 위한 철학적 접근, 그 일환인 '삶의 기술'.


오히려 지극히 철학적인 접근이 주를 이루기에, 명백한 기술이 명명되고 방법이 상세히 설명되고 있음에도 편하고 쉽게 읽어내려갈 수 없다. 철학을 '지식'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방법과 '지혜'적으로 성찰할 수 있는 해석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방법론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되, 그 안을 깊이 들여다보는 해석을 손수 살펴야 한다. 그 끝에 다름 아닌 '나의 삶'이 있다는 것만 잊지 않으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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