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목소리의 형태>


<목소리의 형태>는 현재 일본 애니메이션 주류의 한 정점임에 분명하다. ⓒ디스테이션



일본 애니메이션이 굉장히 철학적이라는 건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방대하고 집요하다. 선악의 경계를 무너뜨린 대우주 서사시 <건담> 시리즈나 일관되게 자연과 인간의 대결과 화해의 주제를 내놓는 미야자키 하야오 애니메이션들, 거기에 <공각기동대>를 필두로 하는 사이버 펑크 애니메이션의 철학으로의 집요한 접근이 대표적이다. 


그렇지만 일본 애니메는 미국 그래픽 노블이 선보이는 '작화보다 텍스트'를 추구하진 않는다. 대단히 철학적인 주제로 나아가는 만큼 일본이 자랑하는 극도의 비현실적 '예쁜' 작화와 대중적인 소재를 채택한다. 자칫 조화롭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오래 전부터 그토록 상반된 모습을 보이려 노력했기에 정립이 되어 있다고 하겠다. 


우린 올해 초에 그 한 정점을 보았다. 신카이 마코토의 <너의 이름은.>이다. 예쁘기 그지 없는 작화와 여기저기에서 많이 봐온 대중적이고 자극적인 소재 안에 범상치 않는 주제를 담았다. 그리고 4개월 만에 찾아온 또 다른 정점 <목소리의 형태>. 홍보는 두 애니메가 비슷한 것처럼 했는데, 이 둘은 완전히 다른 결을 두고 있다. 개인적으로 <목소리의 형태>가 더 좋았던 것 같다. 훨씬 더 나의 일상과 맞닿아 있어 공감이 갔다. 


치기어렸던 학창 시절의 이야기?


따돌림과 괴롭힘은 학창 시절에 으레 겪는 그렇고 그런 이야기가 '아니다' ⓒ디스테이션



쇼야는 고등학생에 불과한 어린 나이이지만 무슨 이유인지 삶의 끈을 놓으려 한다. 하지만 실행에 옮기지 못한다. 대신 그는 수화학교를 찾아간다. 그리곤 거기서 쇼코를 만난다. 엉겹결에 너와 친구가 되고 싶다고 말한다. 시점은 과거로 가 초등학교 6학년 쇼야의 반으로 쇼코가 전학오는 때다. 쇼코는 귀가 들리지 않는다고 한다. 쇼야는 그런 쇼코를 놀린다. 처음에는 그저 장난으로, 나중에는 집단 따돌림으로 발전한다. 그럼에도 쇼코는 그저 미안하다면서 싱글벙글 웃을 뿐이다. 


그런 쇼코의 유일한 친구였던 사하라, 하지만 그녀는 어느 날 사라진다. 그러곤 쇼코도 버티지 못하고 전학을 간다. 곧 쇼야는 이지메 주범으로, 함께 쇼코를 따돌리는 데 앞장섰던 친구들에게 역으로 집단 따돌림을 당한다. 이후 중학교와 고등학교로 가는 와중에도 이지메 주범이 꼬리표로 달려와 항상 '왕따'로 있는 그다. 그런 와중에 다시 만나게 된 쇼코다. 


쇼야는 쇼코와 친구가 되고자 수화를 배우는 등의 노력을 한다. 하지만 쇼코 곁에 항상 붙어 있는 유즈루라는 친구 때문에 다가가기 쉽지 않다. 아무래도 절친 같다. 그러며 감히 '친구'라는 걸 만들고 싶어 하는데, 그런 그에게 나가츠카가 마음을 연다. 이후 예전에 쇼코를 따돌림하는 데 일조했던 우에노를 만나고, 쇼코의 유일한 친구였던 사하라도 만나며, 이쪽도 저쪽도 아니었던 카와이도 만난다. 과연 쇼야는 친구를 만날 수 있을까? 쇼야와 쇼코는 친구가 될 수 있을까?


<목소리의 형태>는 얼핏 치기어렸던 학창 시절의 이야기를 담은 듯하다. 머리가 크고 돌이켜보니 '내가 그때 왜 그랬을까?'하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누구라도 지나왔을 그때 그 시절의 안타깝지만 웃으면서 얼버무리며 지나갈 수 있는 이야기라고 치부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그저 그렇게만 흘러가면 이 애니메를 볼 이유가 없겠다. 


원죄와 구원의 측면에서 바라보기


가해자라는 원죄, 그리고 속죄로 이어질 구원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디스테이션



우린 이 애니메를 원죄와 구원, 존재라는 거창하기까지 한 측면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학창 시절의 치기 어린, '누구나 그땐 그럴 수 있어'라고 넘길 수만은 없다는 것이다. 제대로 돌아봐 직시하고 풀 수 있는 건 풀어야 한다. 쇼야가 자살까지 생각하게 된 이지메는 자신이 저지른 이지메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나쁜 짓을 했으니 똑같이 나쁜 짓을 당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말하고자 하는 건 아니다. 


그는 자신의 원죄를 직시하고 당사자에게 용서를 구한다. 그러며 '친구의 자격'이라는 씁쓸한 단어로 구원받으려 한다. 이에 당사자인 쇼코는? 그녀보다 그 주위 사람들이 더 반대한다. 특히 그녀의 어머니는 그가 한때나마 그녀에게 한 짓을 아주 잘 알기에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다. 나라면 어떻게 할까?


난 약한 아이였다. 초등학교 6학년 때와 중학교 3학년 때 따돌림이 아닌 괴롭힘을 당했다. 20여 년이 지났어도 생생한 기억들은, 나로 하여금 그를 다시 만나면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상태에 있게 만든다. 솔직히 모르겠다. 지금 만나면 어떤 복수를 해줄지. 그런 한편 고등학교 2학년 때인가는 오히려 내가 누군가를 괴롭힘이 아닌 따돌린 기억이 어렴풋이 있다. 어떤 식이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뭔가를 했던 건 확실하다. 


아마 이 피해자와 가해자로서의 경험들이 뒤죽박죽되어 이후 오랫동안 새로운 사람들을 잘 사귀지 못했었던 것 같다. 극 중 쇼야는 고등학생이 되고 사람들 얼굴을 잘 쳐다보지 못하거니와 얼굴에 'X'표가 달려져 있게 되었는데, 그게 다 그가 저지른 가해자로서의 경험과 그가 당한 피해자로서의 경험이 합쳐져서일 것이다. 애니메이션으로서의 장점을 극대화시키며 애니메이션으로만 구현이 가능한 이 표현은, 쇼야의 복잡한 극도의 심정을 잘 표현해냈다. 


원죄와 존재의 측면에서 바라보기


스스로 생각하기에 태어나지 않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원죄와 그럼에도 세상에 꼭 존재해야 한다는 부정과 합의 이야기다. ⓒ 디스테이션



결국은 쇼코가 쇼야를 용서해줄 줄 안다. 어떤 식으로? 거기엔 원죄와 구원이라는 키워드 외에 '존재'의 키워드가 중요하게 작용한다. 이번엔 쇼야가 아닌 쇼코다. 누가 봐도 쇼코는 잘못한 게 없지만, 그녀는 항상 미안하다고 한다. 그건 청각장애인이라는 쇼코의 존재 자체에 대한 부정에 기인한다고 하겠다. 그녀는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며 자신만 사라지면 모든 것들이 원만할 거라 생각한다. 


이 세상은 피해자가 도망가야 하는 상황이 두루 존재한다. 결은 다르지만, 영화 <한공주>를 보면 한공주는 피해자일 뿐더러 잘못이 없는데 가해자로부터 도망다녀야 한다. 그러며 언제든 존재의 사라짐을 준비한다. 결코 삶의 끈을 놓을 생각은 없지만 언젠가는 그렇게 될 것만 같기 때문이다. 그래서 쇼코는 자신을 괴롭힌 당사자였던 쇼야가 수화를 배워와 자신과 친구가 되고 싶다고 말했을 때 말 못할 감동을 느꼈던 것이다. 다른 사람이 아닌 쇼야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쇼야와 쇼코는 단순히 가해자와 피해자로서의 도식이 아닌, 원죄와 존재 그리고 구원으로서 서로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도식으로 바라볼 수 있다. 아무리 쇼야의 첫 번째 절친 나가츠카, 쇼코의 수호천사 유즈루가 있다 해도 그들은 서로가 있어야 한다. <목소리의 형태>는 초중반부의 일반적 차원에서 후반부의 철학적 차원으로 넘어가며 이 도식을 직접적으로 내보인다. 생각지도 못한 깨달음을 얻는다. 


한편 우린 이 작품을 통해 아픈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죽을 만큼 아픈 사람들을 말이다. 그런데 아직 세상을 제대로 접하지 못하고 알지 못한 아이들이다. 쇼야의 경우, 어른들이 생각하기에 터무니 없는 이유로 세상을 등지려하는 것처럼 보일지 모른다. 바로 그 점이다. 누구나 겪었을 만한 아픈 이야기를 어른이 되면 잘 거들떠 보려 하지 않는다. 그저 '그땐 그럴 수 있어' 하며 넘어가려 할 뿐이다. 그 어느 것 하나 그냥 넘어가면 안 되는 것이다. 들여다보자. 그들이 말하려는 목소리의 형태를. 


세상의 아름다움, 그리고 나의 이야기


<목소리의 형태>는 아름답다, 그것으로도 충분하다. 그리고 누구나의 이야기다. 그것으로도 충분한 것 같다. ⓒ디스테이션


<그의 이름은.>의 신카이 마코토가 '빛의 작가'라는 수식어를 얻을 만큼 빛의 섬세함을 일상과 접목시켜 치밀하게 보여주는 데 천재적인 능력을 발휘하는 반면, <목소리의 형태>는 세상을 등질 만큼 심각한 상황에 맞지 않는 것 같은 자연의 신비를 통해 세상의 아름다움을 선보이려 하는 것 같다. 


우린 이 작품에서 아름다운 벚꽃, 귀여운 잉어, 예쁜 다리 밑 개울가 풍경을 수시로 볼 수 있다. 현실은 시궁창인데 보이는 풍경은 이리도 아름다우니 만큼 시궁창 현실을 미화하려는 수작인가 생각하기 쉽지만, 그 일원인 자신의 존재 가치를 다시금 생각하게 해주는 데 크게 일조한다고 생각하는 게 좋을 것 같다. 그들은 아직 어리다. 


의외로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작품이었는데, 어느 정도 내 이야기 같다고 느낀 측면도 클 것 같다. 그렇지만 학창 시절의 이런저런 일들, 상당히 심각한 게 분명하지만 '그땐 그럴 수 있지'라며 넘기기 일쑤인 일들은 그야말로 누구나 한 번쯤 겪을 것이기에 나말고도 나처럼 느낀 이들이 많을 줄 안다. 


그 모든 일들이 절대 그저 그렇지만은 않다는 걸 말해주고 싶다. 그렇지만 그 어떤 일도 용서하고 구원받지 못할 건 없다는 것도 말해주고 싶다. 물론 여기엔 단서가 따른다. 다른 누가 끼어들 수 없는 당사자들끼리의 원죄의 대한 속죄와 용서에 따른 구원이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절대 허투루 행해져서는 안 된다는 것도. 이는 비단 학창 시절의 상대적으로 강도가 덜한 일들만이 아니다. 나아가 국가, 인류의 절대적 강도의 일들에도 해당된다. 쇼야가 쇼쿄에게 하는 진심어린 속죄와 사과를 듣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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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랜드 오브 마인>


제2차 세계대전에 수많은 입장들이 존재한다. 전쟁 전, 중, 후에도 마찬가지. <랜드 오브 마인>은 전쟁 후의 어떤 입장이다. ⓒ싸이더스




영화 <랜드 오브 마인>은 제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한 만큼, 전쟁영화의 외형을 띠고 있다. 정확히는 전쟁을 반대하는 반전영화겠다. 거기엔 가해자와 피해자가 뒤바뀌는 세상살이의 도식이 존재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오직 피해자만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피해자만 양산하는 전쟁 따위를 왜 해야 하는가.


수많은 제2차 세계대전 관련 영화가 미국, 영국, 소련의 손에 만들어졌다. 승전국이자, 피해자라 할 수 있는 입장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물론 패전국이자 가해자인 독일, 일본 입장에서도 만들어졌다. 가해를 정당화하거나 반대로 가해 사실을 공표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진 않는다. 일본은 종종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여 비난 받아왔다. 많은 경우, 진정한 가해자의 손에 피해를 입은 자국민들이나 성숙하기 전에 전쟁에 투입되었던 소년병들을 다루곤 한다.


그렇게, 제2차 세계대전은 수많은 입장들을 대변하는 수많은 콘텐츠를 양산해 왔고 앞으로도 계속 양산할 것이다. <랜드 오브 마인>은 그동안 종종 보아왔던 독일군 소년병 포로들의 이야기를 조심스럽게 다룬다. 그것도 종전 후의 이야기이다. 종전 70년이 지나가는 시기에서, 전쟁 '중'의 이야기가 아니라 전쟁 '후'의 이야기가 나오고 있는 것 같다.


전쟁의 잔해를 제거하는 임무를 맡은 소년들


패전국 나치독일, 그들이 전쟁 중에 남긴 치명적인 잔해들을 소년병들이 목숨 걸고 치운다. ⓒ싸이더스



1939년 9월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발발한 제2차 세계대전, 이듬해 4월에는 덴마크와 노르웨이를 침공한다. 덴마크는 즉시 항복, 독일은 덴마크 서해안 전역에 방어선을 구축한다. 연합군의 상륙을 저지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연합군의 상륙은 프랑스였고, 덴마크 서해안 방어선은 종전 후에도 그대로 남는다.


나치독일이 저지른 전쟁의 잔해, 덴마크는 나치독일 포로들에게 지뢰 제거 임무를 맡긴다. 그 중 상당수가 소년병이었다고 하는데, 영화는 다름 아닌 소년병들의 지뢰 제거 임무를 주로 삼는다. 그 어떤 도구도 사용할 수 없는, 맨손과 막대기 하나에 의존한 지뢰 제거. 그야말로 목숨과 바꾼 임무다.


엄청나게 위험한 작업인 만큼 사전 연습부터 철저해야 한다. 사전 연습도 실전처럼, 연습에서도 죽고, 실전에서도 죽어 나간다. 이 임무를 맡은 덴마크군의 칼 상사는 처음에는 눈도 깜짝하지 않지만, 시간이 갈수록 계속해서 죽어 나갈수록 느낀다. 이 아이들은 전쟁에 투입되어 명백한 죄를 저질렀지만, 지뢰 제거 임무를 맡아야 할 건 최소한 이 아이들은 아니라고.


그렇지만, 그런 생각은 누구한테건 씨알도 안 먹힐 것이다. 그들이 전쟁 중에 저지른 '짓'을 보면 그런 생각을 할 수 있겠는가? 아무리 그들이 성숙하지 못한 상태에서 오로지 명령에 따라 한 행동이었다고 해도 말이다. 그들이 저지른 짓을 합당화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그들의 총탄에 쓰러진 수많은 이들을 생각해서라도.


그런 식의 '방법'과 그런 '방향'은 잘못 되었다


복수를 하는 건 좋다. 승전국이니만큼 어느 정도의 것들은 예상된다. 하지만 명백히 방법과 방향이 틀린 게 존재한다. 이 영화는 그걸 보여준다. ⓒ싸이더스



여기서, 단순히 가해자와 피해자는 없고 그저 고통만 있었다는 식으로 풀어갈 순 없다. 이 나치독일 소년병 포로들이 가해자였다는 걸 부정할 수 없다. 종전 후의 모습만, 그것도 포로가 된 모습만 보여주기 때문에 선량해보일 수 있을지 모르지만, 전쟁 중에 그들이 잔악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고 말 못할 것이다. 미성숙을 앞세워, 잔악한 명령을 그 누구보다 앞서 실행했을지 모를 일이다.


문제는 그들이 아닌 그들에게 말도 안 되는 일을 시킨 이들의 모습이다. 감독이 의도한 것일 수 있겠는데, 종전 후 나치독일 포로들에게 덴마크군이 보이는 행동은 나치독일이 보여준 잔악함 못지 않았다. 그들의 행동은 '방향'과 '방법'이 잘못된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최소한 소년병 포로들에게 그런 일을 시키면 안 되는 것이었고, 아무런 제대로된 도구 없이 굶어 죽을 듯이 일을 시키면 안 되는 것이었다.


범죄에는, 주범이라는 게 존재한다. 주도하고 기획하고 결정하고 명령을 내리고 책임지고 가장 많은 것들을 얻을 수 있는 존재 말이다. 제2차 세계대전의 경우, 종전 후 주범 중 상당수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전쟁 중에 혹은 내분으로 인해 죽었다. 물론 많은 주범들이 사형 당했다. 그렇지만 그 바로 밑의 이들에겐 아마 정치적일 거라 예상되는 이유로 무죄 판결이 내려지기도 했다.


누구는 주범이 아니라는 이유로 무죄 판결을 내려 잘 살아가고, 누구는 종전 후에도 전쟁 중보다 더 죽음에 직면한 작업을 계속해 나가야 하는 게 말이 되느냐고 말하려는 게 아니다. 각각 저지른 짓에 따른 각각의 속죄가 필요할 테니까. 그리고 결정적으로 세상은 불공평하니까. 문제는 그렇게 내려온 죄의 무게를, 왜 가장 '인간'에 가까울 이들이 짊어져야 하느냐는 것이다. '악마' 같은 이들이 해결해야 할 사항이 아닌가. 설사 그들이 짊어져야 한다고 쳐도, 그런 식으로라면 얘기가 되지 않는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으로 맞대응하면 똑같이 된다는 건 너무도 당연한 얘기가 아닌가. 더욱이 덴마크는 저항 한 번 하지 않고 곧바로 항복했다.


그들을 인간으로 대해야만, 그들은 뉘우칠 수 있다


마냥 인간적인 차원에서 그들을 인간으로 대해줘야 하는 건 아니다. 그들을 인간으로 대해주어야만, 그들은 스스로를 인간이 아닌 병사라고 생각한다. 그래야만 뉘우칠 수 있다. ⓒ싸이더스



감정적으로 이해는 한다. 누구라도 그 상황이었다면 그렇게 대응했을 것이다. 내 국토와 내 가족를 무참히 짓밟은 이들. 대상의 구체적 물상을 들여다볼 필요도 없이 대상이 속해 있는 집단의 악마성에 분노를 터뜨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게 인간이니까. 그렇지만 그 시간이 지나고 들여다볼 수 있는 상황이 되었을 때, 보여야 한다. 용서할 순 없더라도 인정은 해야 한다는 걸. 그들도 우리와 같은 인간이라는 걸 말이다.


영화는 인간을 보여주려 애쓴다. 아니, 애쓸 필요도 없다. 인간이라 할 수 없는 나치독일이 남긴 잔해를 인간들이 처리하고 있는 것과 다름 없다. 아름다운 해안을 뒤로 하고 무참하게 죽어가는 건 광포에 휩싸인 병사들이 아닌 두려움과 배고픔에 벌벌 떨고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인간들 뿐이다. 그들을 그렇게 대하는 순간, 과거는 사라지고 없는 것이다.


만약 그들을 포로답게 대했다면 오히려 그들을 인간이 아닌 병사로 생각했을 듯하다. 이런 비인간적인 처사를 통해 그들의 인간성을 발현시키지 않았다면, 그들은 자신의 잘못을 계속해서 떠올렸을 것이다. 잘못을 뉘우치던가 계속해서 광기에 휩싸였던가 하는 건 그 이후의 일이겠다. 그것이 오히려 '이쪽'을 위한 길이 아니었을까, 싶다.


매우 힘든 일이었겠지만 이성적으로 대처했다면 방향과 방법을 달리했을 것이고, 그들은 자신의 죄 이상으로 지독했던 전쟁 이후의 기억이 아닌 자신이 저지른 죄를 생각하며 살아갔을 테다. 그들을 병사가 아닌 인간으로 인정하고 인간으로 대할 수밖에 없게 한 파렴치한 짓은 정말 바보 같았다.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고 가해자가 피해자가 되는 도식을 넘어, 미성숙한 이들에게 저지른 잔혹한 행위의 부당위성을 넘어, 그들도 인간이라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는 점까지 넘어, 즉 선악의 개념을 넘어 그들에게 행한 행위의 무뇌아적 지점을 지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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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한공주>


압도적일 게 없을 것 같은 연출로 그 어느 영화보다 압도적인 힘을 보여주었다. 영화가 갖는 소재도 소재이지만, 그 소재를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무비꼴라주



"전 잘못한 게 없는데요."


어른들에게 둘러싸인 한 소녀, 꾹꾹 눌러왔던 말 한마디를 애써 웃음 띤 얼굴로 내뱉는다. 그런데 이내 그녀는 선생님과 전학 수속을 밟으러 다른 학교를 찾는다. 잘못한 게 없다는 그녀가 떠나는 것이다. 명백한 모순이 아닌가, 이 상황은. 무서워서 피하는 건가, 더러워서 피하는 건가. 아직까진 알 수 없다. 그녀의 앞날을 지켜보는 수밖에. 


그녀의 이름은 '한공주', 하필 공주다. 그녀의 시련은 전 인생에 걸쳐 있다. 부모님은 이혼해서 엄마는 다른 이와 살림을 차렸고 아빠는 일 때문에 몇 달에 한 번 볼까 말까이다. 그래도 알바와 학업을 병행하며 씩씩하게 살아가는 그녀, 편의점 사장 아들, 딸과 친하게 지내며 의지도 되어준다. 이겨낼 수 있을 정도의 시련이다. 


알 수 없는 이유로 전학을 가게 된 공주, 분위기가 전과는 완연히 다르다. 뭔가 얼이 빠진 느낌이랄까. 그녀에게 남은 건 오직 음악뿐인 듯하다. 음악 덕분에 친구도 생긴다 또 수영을 배우는 그녀, 이유가 살고 싶어질 때를 대비해서란다. 뭔가 그 사이에 크나큰 일이 있었던 것 같다. 전 학교 담임 선생님 집에서 선생님의 엄마와 지내게 된 공주, 운영하는 마트 일도 도와주며 호감을 얻는다.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실날 같은 희망을 자신도 모르게 품게 된 공주, 하지만 학교로 찾아온 어른들로부터 도망치는데... 이제 어디로 가야 할까. 왜 도망쳐야 할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피해자가 도망치는 현실, 이게 현실이다


왜 공주가 도망쳐야 할까, 왜 피해자인 공주가 도망쳐야 하는 것일까, 왜 급기야 공주가 가해자처럼 되어버린 것일까. 우리 모두의 책임이다. ⓒ무비꼴라주


지난 2014년 4월 17일, 세월호가 침몰된 지 하루 뒤에 개봉한 영화 <한공주>는 국민적인 공분을 사며 뛰어난 연출과 연기에 힘입어 흥행과 비평에 성공했다. 독립영화의 영역을 뛰어넘은 것이다. 개인적으로 이 작품을 당시 보지 못한 건, 대략의 내용을 알고서 도저히 볼 용기가 나지 않았던 탓이었다. 또한 그동안 생각해왔던 가해자와 피해자의 뒤바뀐 양상을 또 다른 시각으로 완벽하게 보여준 탓이겠다. 


영화는 가해자가 될 수밖에 없는 피해자의 어쩔 수 없는 상황을 보여주었던 기존의 독립영화론에 일종의 반기를 든다. 그동안 피해자는 세상으로부터 사회로부터 개인으로부터 받은 끔찍한 피해를 '가해자'가 되어 되돌려주려 했다. 아니,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다른 방도를 찾을 수 없는, 끊임없이 되풀이 되는 폭력의 뫼비우스 띠. 


이 영화는 어떤가. 공주가 당한 건 끔찍하다 못해 악마적인 행위. 입으로도 손으로도 언급하기 역겨운 43명에 의한 집단 성폭행. 피해자 공주는 어떤가. 홀로 강하게 큰 그녀이지만, 한없이 약한 그녀이기도 하다. 그녀는 가해자가 되기는커녕 도망 치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 


또 다른 가해자들인 가해자들의 부모, 자기 아들 삶을 망가뜨리지 말라는 협박과 호소와 부탁 때문이다. 차라리 공주가 가해자가 되어 그 악마들에게 평생 씻을 수 없는 무엇을 남길 수 있다면, 그러면 내 마음이 덜 아플 것 같다. 하지만 알고 보니 그건 현실에서 불가능한 일이었던 것, 현실은 이렇다. 


끔찍한 와중에 다가오는 포근하고 아련한 감성


그 와중에 포근하고 아련한 감성을 선보인다는 건 거의 믿을 수가 없을 지경이다. 아... 공주가 가엽다. 공주가 하고 싶은 음악을 할 수 있게 도와주고 싶어진다. ⓒ무비꼴라주


이 영화가 대단한 이유는 비단 이것 뿐이 아니다. 마음이 뒤틀리는 공주의 상황을 알게 됨에도 불구하고, 순간순간 지극히 감성적으로 될 수 있다는 데 있다. 그건 공주가 진정 하고 싶었지만 이제 다시는 할 수 없는 '음악'에서 기인된다. 공주가 음악과 함께 일 때 느껴지는 감성은 한없이 포근하고 아련하다. 


이 감성은 <파수꾼>에서 기태가 함께이고 싶었지만 다시는 그럴 수 없는 친구들과의 즐거운 시간, <해에게서 소년에게>에서 시완이 계속되길 원했지만 다시는 그럴 수 없게 된 가족들,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수남이 열심히 일해서 장만하고 싶었지만 결국 빛으로 사게 된 집과 궤를 같이 한다. 


그렇지만 <한공주>에서 공주가 보여주는 감성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바, 그녀가 당한 짓이 그만큼 강렬하다는 반증일 것이다. 극은 극으로밖에 해결하지 못한다는 걸 말하고자 하는 걸까. 영화를 다 보고 난 후엔 아이러니 하게도 공주의 괴로운 모습이 아니라 즐거운 모습이 뇌리에 남는다. 


우린 공주를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을까. 공주의 괴로움을 뒤로 하고 즐거움을 취하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대수롭지도 않게. 그러면서 그녀 안에 영원히 없어지지 않을 괴로움을 조금씩 치료해주면서 말이다. 아마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공주가 전학 간 학교에서 큰 관심을 보이는 은희도 결국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지 않았는가. 이게 현실이라는 말을 다시금 하게 된다. 


'혼자'라는 사실보다 더 잔혹하고 가혹한 게 있을까


공주의 모든 걸 알고 온전히 그녀를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적어도 영화에선 아무도 없었던 것 같다. 그 아픔이 너무도 큰 탓에 나도 휩쓸릴 것 같기 때문일 테다. 그렇지만 현실은... 현실도 마찬가지일 터. 과연 나는? ⓒ무비꼴라주


이 영화가 보여주는 현실은, 생각해보고 들여다보면 너무나도 잔혹하고 가혹하다. 백도 없고 집도 없고 부모님도 없고 친구도 없는 어린 여고생이 할 수 있는 게 무언가. 뭐라도 해서 희망의 불씨가 있다는 걸 보여주어야 하지 않겠나, 싶은 게 개인적인 바람이다. 하지만 그건 공염불에 불과하지 않나. 실상은 이런데.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그녀에게는 그녀의 아픔을 가슴 절절히 공감하고 외치고 기억해줄 이가 아무도 없다. 누군가는 다수의 가해자가 한 목소리로 외치는 '개소리'를 듣고 가해자를 옹호하고, 누군가는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며, 누군가는 한순간의 망설임으로 그녀를 떠나보낸다. 그녀는 혼자다. 


많고 많은 사람이 사는 이 크나는 세상에 '혼자'라는 사실보다 더 잔혹하고 가혹한 게 있을까. 더욱이 잘못한 게 없는데, 오히려 피해를 당했는데, 누군가에게는 가해자로 인식되기까지 하다니. 숨이 턱턱 막히고 알 수 없는 소름이 덮친다. 가만히 있기가 힘들다. 세상이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하는 것도 귀찮다. 그저 사라지고 싶다.


그런데, 공주는 수영을 배운다. 다시 살고 싶을까봐, 다시 시작하고 싶을까봐. 그러면 너무 억울하니까. 그녀는 알고 있는 것이다. 언젠가 마지막을 선택하게 될 거라는 걸. 그때를 대비해 수영을 배운 것이다. 이건 치를 떨지 않을 수 없다.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다. 무너져 내리지 않을 수 없다. 


이 영화를 보고 결심한 게 있다. 받아들이겠다고 말이다. 타의에 의해 세상으로부터 버려져 혼자가 된 이들을 받아들일 것이다. 정녕 어려운 일이다. 그래도 누군가는 해야 한다. 다름 아닌 내가 하고 싶다. 이 영화 <한공주>를 보고 난 후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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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지나간 책 다시읽기] 최고의 데뷔작 <13계단>


최고의 데뷔작 <13계단> 표지 ⓒ황금가지



우리나라는 1997년 이후 사형 집행을 하지 않아 '실질적 사형제도 폐지' 국가이다. 하지만 여전히 사형 판결은 내려지고 있는 바, 유형철, 강호순, 조두순, 김길태 등 최악의 흉악 범죄가 벌어질 때마다 사형 제도 존폐 논쟁이 뜨겁게 달아오르기 때문이다. 첨예한 대립 속에서 집행을 하지도 폐지를 하지도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판결은 내리고 집행을 하지 않는 양상이 20년 동안 계속되어 왔다. 


그 와중에 가까운 나라 중국은 물론이거니와 일본도 사형을 집행하고 있다. 2012년 아베의 재집권 이후 17명의 사형수에게 사형 집행을 내렸다. 당연히 첨예한 논란과 대립이 있지만, 피해자 측의 손을 들어주면서 가해자의 인권보다 사회 정의 발현 목소리에 초점을 맞춘 것이겠다. 


개인적으로 사형 집행을 찬성하는 바, 여기서 또 다른 문제가 발생한다. 아무리 살인 이상의 흉악 범죄를 저지른 '인간 이하'의 목숨을 앗아가는 일이로서니, 누가 그 일을 할 수 있을 것인가. 누가 사형 판결이 아닌 '사형 집행' 명령을 내릴 수 있을 것인가. 돌이킬 수 없는 '집행'(또는 판결)을 한 후에 누명인 게 밝혀지면 누가 어떻게 책임질 수 있을 것인가. 고의가 아닌 살인은 어떻게 할 것인가. 살인을 저지르고는 회개하고 뉘우치며 피해자와 유족에게 진심어린 사죄를 하는 경우엔? 유족이 받아들인다면?


사형 제도를 둘러싼 첨예한 대립과 논란을 소설적 재미로


일본의 유명 추리 소설가 다카노 가즈아키의 최고의 데뷔작이자 문제작 <13계단>은 사형 제도를 둘러싼 첨예한 논쟁 속에서 펼쳐지는 기가 막힌 이야기를 담았다. 그 이야기에는 가해자와 피해자, 유족은 물론이거니와, 사형 집행 실행자, 그리고 사형 집행 명령 절차가 출현한다. 무엇보다 그 중심에는 다양한 유형의 가해자, 즉 사형수가 있다. 고의에 의한 흉악 살인, 합당한(?) 이유에 의한 살인, 미심쩍은 살인, 정당방위 살인, 살인 누명 등이다. '사형 집행'이 필요하되, 반드시 철저한 규명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한편 소설 자체는 극강의 재미를 선사한다. 첨예한 대립과 논란이 될 만한 요소를 가져와 소설적 재미를 극대화시키는 데 쓰이게 한다. 주요 인물들의 면면을 살펴보는 것과 그들이 행하는 바를 들여다보는 것으로도 충분하다. <13계단>은 이런저런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사형 집행을 기다리는 사형수의 피말리는 모습을 그리며 시작된다. 멀리서부터 들려오는 간수의 발자국 소리, 그 저승사자가 멈추는 그곳에 헤아리기 힘든 죽음의 공포가 스며드는 것이다. 이 짧은 프롤로그로 독자는 이미 소설 속으로 빨려들어갔다. 다른 이의 목숨을 앗아간 이들이 느끼는 죽음의 공포를 통해 '죽음'이란 무엇인지 '사형'이란 무엇인지 뼈져리게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이어 두 명의 주인공이 등장한다. 한 명은 교도관 난고. 오랫동안 이어온 교도관 생활을 청산하고 가족과 재회해 제2의 인생을 꿈꾸고 있다. 그러기 위해선 거금이 필요한대 우연히도 때마침 의뢰가 들어온다. 사건 당시 교통사고로 기억상실증에 걸린 사형수 사카키바라 료의 무죄를 입증하라는 것. 몇몇 석연치 않은 점들과 그가 교통사고로 기억상실증에 걸렸다는 점, 그리고 최근 우연히 돌아온 기억 속의 '계단'이 전부다. 


다른 한 명의 주인공은 전과자 준이치. 다툼 도중에 상대방을 죽이게 해 상해 치사죄로 2년을 복역하다 얼마 전에 출소했다. 그는 부모님이 엄청난 거금을 피해자 유족에게 지불해 어려움에 처한 걸 알고는, 난고의 제의를 받아들인다. 거금을 받으며 난고가 하려는 일을 도우라는 것. 료의 무죄를 입증하고 진범을 찾아내 바로 그를 사형에 처하게 만드는 게 목표였다. 하지만 남은 시간은 3개월 남짓. 그 이후엔 료의 사형 집행이 거의 확실시된다. 그러면 아무 소용이 없지 않은가. 


속출하는 다양한 유형의 피해자들


기억을 잃은, 즉 자신이 살인을 저질렀는지 알 수조차 없는 이가 사형 판결을 받아 사형 집행을 앞두고 있다. 당연히 그에게서는 잘못을 뉘우칠 기미가 보이지 않으니, 사형 집행은 기정사실화되어 있는 거나 다름 없다. 사형 제도의 첨예한 논쟁 속에서, 또 다른 논쟁을 불러일으킬 만한 게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는 그렇게 죽어도 괜찮은가. 


최근 '삼례3인조' 사건의 사법피해자들의 무죄가 확정되었다. 17년 만에 누명을 벗은 것이다. 그에 이어 '약촌오거리 택시기사 살인사건'이 재심에서 무죄가 확정되었고, 진범으로 추정되는 이가 잡혔다. 16년 만에 누명을 벗은 것이다. 소설 속에서 사형수 료는 7년 째 복역 중이며 사형 집행이 코앞으로 다가온 상황이었다. 이야기의 정황 상 그의 무죄가 드러날 텐데, 그 억울함은 누가 보상해줄 수 있을 것인가. 


그렇지만 그 무죄가 드러나기 전까지, 그 억울함과는 별개로 피해자 유족의 억울함은 어떠한가. 가해자가 사형을 당한다 해도 피해당사자가 살아돌아오지 못한다. 평생 지옥같은 나날을 보내야 하는 것이다. 그들에겐 그나마 가해자의 사형이 유일한 안식일지 모른다. 어느 누가 그들을 욕하랴? 어느 모로 보나 가해자는 죽어 마땅하다. 


그 와중에 또 다른 피해자가 존재한다. '사형'은 국가의 입장에서 보면 사회 정의를 실현하는 행태의 하나지만, 사형을 집행하는 한 개인의 입장에서 보면 '살인'에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할 테다. 누군가는 손으로 직접 행해야 하는. 그야말로 가해자 아닌 가해자, 피해자 아닌 피해자로서, 경계에 서서 괴로워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비록 자신이 하고 싶어서 한 일이지만, 누가 그 마음을 헤아려 줄 수 있을 것인가. 


피해자는 속출한다. 실질적으로 가해를 행한 이들 중에도 피해자가 있다. 아니, 있다고 확정적으로 말할 순 없고 있을 거라 생각한다. 누명을 쓴 이들은 제쳐두고, 비록 살인을 저질렀지만 그 이유가 합당하다고(?) 생각되는 경우다. 이 또한 첨예한 논쟁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요소가 다분한대, 생각해볼 여지는 있다. 그렇지만 아마 직접적으로 의견을 입 밖에 내진 못할 것이다. 그래서 영화나 소설 속에 등장하는 것이리라. 


무엇보다 공분을 살 '사형 집행 절차'의 황당함


<13계단>에서 무엇보다 공분을 살 내용은 '사형 집행 절차'에 있다. 황당하기 짝이 없는 절차. 곳곳에서 드러나는데, 열거하는 것만으로도 이 소설이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여실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사형 제도 찬반 논쟁은 여기서 큰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 거대하고 그칠 줄 모르는 그 논쟁 속에 존재하는 실질적이고 문제 많고 가려진 문제들이 훨씬 더 많다. 그리고 더 중요할 수 있다. 


"160번은 법이 지켜야 할 이익, 법익을 침해했기에 처형당한다. 난고는 유족의 편지를 다시 읽었다. 이 여성은 가족을 모두 살해당하고도 피고인의 사형을 원치 않는다. 내일의 처형은 누구를 위해 진행되는가. 피해자 유족의 의지와는 달리 범죄자에게 절대 응보를 과하는 것은 더 더욱 범죄 피해자에게 상처를 입히는 행위가 아닐까." (본문 186~187쪽 중에서)


"난고는 휴,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얄궃은 미소를 띠었다. 같은 해에 체포된 사키카바라 료가 이미 사형 집행을 기다리는 상황에서 이 오하라는 아직 확정도 되지 않았다. 이는 일본의 재판 제도가 지닌 문제였다. 사형에 해당하는 사건을 범한 경우, 한 명이라도 많은 사람을 죽인 쪽이 심의 과정이 지체되면서 오래 살 수 있다." (본문 215~216쪽 중에서)


"역대 법무 장관 중에는 자신이 믿는 종교를 방패 삼아 사형 집행 명령을 거부한 장관이 있었다. 또한 이유를 명언하지 않더라도 명령서에 서명하지 않은 장관도 몇이나 있다. 그러한 행동은 사형 제도 반대론자들에게는 환영받을지 몰라도 명확한 직무 유기였다. 집행 명령이 법률에 장관의 직무로 규정된 이상, 그게 싫으면 장관 취임을 거절해야 마땅하다. 법을 무시해 가면서까지 하기 싫은 일은 하지 않고 권력의 자리에만 앉으려 하는 것은 법무 당무에 있는 자로서 납득할 수 없다." (본문 240쪽 중에서)


"누가 이것을 보상해 줄까요. 민사 재판이 성사되었더라도, 위자료라는 이름의 푼돈으로 유리의 마음을 다시 사 들일 수는 없습니다. 육체의 상처에만 상해죄가 적용되고, 망가진 사람의 마음은 방치되는 것입니다. 법률은 옳습니까? 진정 평등합니까? 나쁜 인간은 범한 죄에 걸맞게 올바르게 심판받고 있는 것입니까?" (본문 367쪽 중에서)


추리소설과 사회파 소설의 조합 그 이상


<13계단>은 추리 소설다운 서스펜스와 사회파 소설이 가지는 문제제기가 굉장히 훌륭하게 버무러져 있는 소설이다. 거기에 군더더기 없는 문체와 영화를 보는 듯한 전개, 그리고 정녕 관련 논문 이상 가는 정보와 이론과 주장과 실제는 환상적이라 할 만하다. 사형 제도와 관련해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균형의 서술 또한 이 소설이 단순한 추리 소설 이상가는 소설이라는 점을 입증해주기에 충분하다. 


작가의 다른 소설을 읽어 보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데, 지금은 그의 또 다른 걸작이자 대작 <제노사이드>를 읽고 있다고 살포시 고백한다. 일반 대중을 위시한 재미, 평단 제위를 위시한 메시지와 소설다움, 그 사이 어딘가를 위시한 '있어 보이는, 실제로 뭔가 있는' 소설로서의 매력까지 두루 갖춘 소설을 본 후인 만큼 기대하지 않을 수 없다. 


소설의 주요 등장 인물들은 모조리 가해자다. 그런 면에서도 굉장히 특이한 이력을 지닌 이들이라 할 수 있는데, 또 그들은 모조리 피해자이기도 하다. 이런 류의 '가해자'와 '피해자'의 얽히고설킴을 볼 때마다 생각하는 것인데, 모든 인간이 그러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우리는 거기에서 많은 걸 느낄 수 있다. 아니 반드시 느껴야 한다. 


살인을 하여 사회에 큰 물의를 일으킨 자가 사회를 위해 다른 이를 위해 무엇인가를 할 수 있을까? 무엇을 하게끔 허락해야 하는가? 그들은 교화의 대상인가, 응보의 대상인가. '가해를 위한 가해'는 애초에 생각의 대상이 아니다. 여지가 없다. 반면 가해와 피해의 경계에서 서 있다가 어쩔 수 없이 가해 쪽으로 발을 딛게 된 이들은 대상이 되지 않을까. 여지는 있지 않을까. 알 수 없다. 내 곁에 그런 이들이 있다면, 그들을 도와줄 수 있을까? 그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까? 극 중에서 사키카바라 료가 무죄로 방면되면 어떻게 할 것이냐는 물음에 막힘 없이 대답하는 친구의 대답이 일품이다. 


"그때는 또 녀석과 함께 열심히 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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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히가시노 게이고의 <천공의 벌>


<천공의 벌> 표지 ⓒ재인



지난 9월 12일 경주에서 역대 최대 규모인 5.8 지진이 발생했다. 무엇보다 걱정이었던 건, 2011년 동일본 대지진을 연상케 하는 '원전 사고' 여부였다. 이번 대지진의 진앙지인 경주에서 불과 27km 떨어진 곳에 월성 원전이 있었기 때문이다. 월성 원전은 이번 지진으로 가동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발생한 사건이다. 월성 원전은 규모 6.5를 견딜 수 있도록 설계되었는데, 우리나라에서 5.8 정도의 지진이 일어날 거라는 건 전혀 염두에 두지 않은 설계라 할 것이다. 그래서였을까. 일이 터지고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 원전 사고는 더 이상 남의 나라 이야기가 아니다.


지난 1995년 일본 고베에 규모 7.0을 넘어서는 대지진이 발생했다. 이는 일본 역사 70년 만에 최악의 피해를 주는데, 수천 명이 죽고 수만 명이 부상당했으며 당시 일본 GDP의 2.5%에 달하는 돈이 허공으로 날아갔다. 같은 해 12월에는 '꿈의 원자로'라 불린 고속 증식로 '몬주'의 나트륨이 유출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사실 방사능이 유출된 건 아니었지만, 사고 후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게 많은 비난을 샀다. 일은 언제든 터질 수 있다. 제대로 대처하는 게 중요한 것이다. 


지진과 원전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지진이라는 게 예측하기 힘든 사고라서 원전처럼 절대적 안정이 필요한 것에 상극인 것이다. 원전을 주체로 둔다면, 위험한 건 지진뿐만 아니다.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일에 제대로 대처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수많은 지진으로 그에 대한 대비라면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하는 일본이, 2011년 동일본 대지진으로 속절없이 무너졌다. 후쿠시마 원전 주위는 아무도 살지 못하는 폐허가 되었단 말이다. 이건 이제 우리 모두에 해당하는 이야기가 되었다.


최고의 안전성이 필요한 원전에 테러 위협이 가해지다


일본 추리 소설가 히가시노 게이고는 데뷔 10년 후인 1995년, 한신 대지진과 고속 증식로 몬주의 나트륨 유출 사건 사이에 소설 <천공의 벌>(재인)을 내놓는다. 다름 아닌 '몬주'를 모델로 한 고속 증식로 '신양'을 무대로 한 테러 스릴러다. 소설이 나온지 얼마 되지 않아 실제 모델에서 그런 사건가 발생했으니 그야말로 '예언'이나 다름 없는 '소설'이었는데, 16년 후엔 소설에서 내보인 '경고'가 실체화되었으니 씁쓸하기 그지 없다 하겠다. 추리 스릴러 소설에서조차 경고를 보인 원전 사고가 실제로 터졌으니 기가 막힐 따름이다. 


소설은 그 어떤 일에도 제대로 대처해야 하는 최고의 안정성이 필요한 원전에,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룬다. 극비리에 일본 자위대에 납품할 예정인, 어마어마한 크기를 자랑하는 헬기 '빅 B'. 최종 비행만을 남겨두고 있는 때에 누군가에 의해서 접수당한다. 헬기는 테러범에 의해 무선 조종으로 고속 증식로 '신양' 상공으로 가 호버링 한다. 시간이 지나면 연료가 떨어져 대량의 폭발물과 함께 추락하게 될 것이었다. 그럼 원전 대폭발이 일어날 건 자명한 일, 남은 시간은 8시간이다. 


테러범이 전국민이 알게끔 하는 걸 전제로 요구한 건 다음과 같다. 현재 가동 중인 모든 원전을 사용 불능 상태로 만들 것, 현재 건설 중인 원전은 건설을 중지할 것, '신양'은 정지하지 말 것. 헬기를 이동시키려 하지 말 것. 일본 정부를 비롯해, 자위대, 원전 관계자, 경찰들이 총출동하는데, 그들은 과연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테러범의 요구대로 모든 원전을 정지할까? 엄청난 혼란을 감수하고서라도? 아니면 주민들을 대피시키며, 헬기가 추락해 원전이 폭발할 것을 감수하고 테러범과 협상에 들어갈까?


소설은 다분히 문제의식을 표출하며, 실수로 헬기에 아이가 타게 되는 사고를 넣어 서스펜스를 극대화 하는 한편, 일찌감치 범인의 정체를 보여 주고는 각각 다른 지방의 경찰이 범인의 윤곽을 서서히 좁히는 과정을 긴장감 있고 치밀하게 서술한다. 무엇보다 압권이자 소설의 중추는 '원전'이다. 혹여 어마어마한 사고가 터질지도 모르는 '신양'을 둘러싸고 여러 이해관계자들이 벌이는 설전과 암중모색, 대책강구 등이 이 소설을 보는 최대 묘미이다. 정녕 선택이 쉽지 않은 딜레마다. 이는 곧 어떤 일이 터졌을 때 제대로 된 대처를 할 수 없는 원전의 실체와 같다.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사람들의 경각심을 깨워라!


"원전이 대형 사고를 일으키면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도 피해를 입게 돼. 말하자면 나라 전체가 원전이라는 비행기에 타고 있는 셈이지. 아무도 탑승권을 산 기억이 없는데 말이야. 하지만 사실은 그 비행기를 날지 않도록 하는 게 불가능한 일은 아니야. 그럴 의지만 있다면. 그런데 그런 의지가 보이지 않아. 승객들의 생각도 모르겠고. 일부 반대파를 제외하곤 대부분 말없이 좌석에 앉아 있을 뿐 엉덩이조차 들려고 하지 않아. 그러니 비행기는 계속 날 수밖에 없잖아. 그리고 비행기가 나는 이상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 비행기가 잘 날도록 최선을 다하는 것밖에 없어." (본문 423쪽 중에서)


소설에서 사람들 눈을 속이며 자연스레 행동하는 범인이 피력하는 주장이다. 그는 비록 테러를 일으키고자 하는 악질일지 모르지만, 그가 말하는 바는 원전 사고의 핵심을 정확히 찌른다. 이번 경주 '대지진'이 일어났을 당시 나는 어떤 생각을 했는지, 그때 내가 원전을 걱정했을리는 없다. 내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으니까. 동일본 대지진 때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범인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나라 전체'가 원전에 관련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원전은 위험하기 짝이 없기에 모두가 한목소리를 내면 없애버릴 수 있지만 그렇지 않는다. 관심조차 없기 때문에. 그렇다면 원전을 안전하게 잘 돌아가게끔 하면 될 일이다. 그것도 가능하지 않다. 역시 관심조차 없기 때문이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경각심을 갖고 원전을 대할 수 있을까. 방법은 하나뿐일 거다. 계속해서 원전 사고가 일어나는 것. 일은 일어나고 대처하는 거라고, 사고가 일어나야 그나마 경각심을 갖지 않을까? 범인은 그런 논리 하에 이와 같은 초유의 테러 위협 범죄를 저지른 것이다. 개인적으론 '모순에 부딪혀 돌파구 없는 분노' 때문일 것이고. 그 분노가 사람들 무관심의 발로에 다름 아니다.


지금 우리들에게, 이 소설은 더 이상 소설이 아니다


"결국 료스케의 고통이나 도모히로의 죽음이나 그 원인은 같은 것에 있지 않을까. 둘 다 피해자이기는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그 피해의 근원은 무엇인가... (중략) 집단 괴롭힘이 있었는지 확인하기 위해 도모히로와 같은 반이었던 아이들을 만났을 때 보았던 그 가면 같던 얼굴들. 아이들만 그런 얼굴을 하고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그는 깨달았다. 다수의 사람들이 어른이 돼서도 가면을 벗지 않는다. 그리고 그들은 '침묵하는 군중'을 형성한다. (본문 632쪽 중에서)


범인이 그와 같은 범죄를 저지르게 된 결정적 사건은 아마도 아들의 죽음일 것이다. 아들의 죽음에는 반 친구들의 따돌림과 괴롭힘이 있었을 거라 추측된다. 하지만 그들도 피해자다. 범인의 아들은 원전 관계자의 아들이라는, 아들을 괴롭힌 아이들의 리더는 반원전 관계자의 아들이라는 꼬리표가 달려 있었다. 더 큰 문제이자 분노의 진정한 발화점은, 그 사건을 확인하면서 보게 된 '가면 쓴 얼굴'들. 그 얼굴은 곧 '침묵하는 군중'에 다름 아니다. 침묵은 원전 사고라는 크나큰 대재앙 앞에서도 그 위력을 톡톡히 발휘해 그 자신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을 위험으로 몰아간다. 그들은 명백한 피해자이지만, 또한 명백한 가해자이기도 하다. 피해 자각이 없는 피해자, 가해 자각이 없는 가해자. 어찌 이럴 수 있는 것인지. 


지금 우리들에게, 이 소설은 더 이상 소설이 아니다. 아니, 소설로 읽었다면 다시 읽어야 한다. 그리하여 우리가, 침묵하는 군중은 아닌지, 자각 없는 피해자 혹은 가해자가 아닌지, 국민을 속이려 드는 정부 관계자는 아닌지, 제대로 대처하지 못해 우왕좌왕하는 원전 관계자는 아닌지, 자문해 보아야 한다. 


지진은 더 이상 남의 나라, 남이 당한 불가항력의 사고가 아니라, 내 주변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이자 다른 누구도 아닌 내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아직 원전에 이상이 생길 정도의 지진은 일어나지 않았다. '아직'일 뿐이다. 5.8이 일어났으니, 우리나라 원전 평균 내진 설계 기준인 6.5가 일어나지 않을리 없지 않겠는가.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그에 관한 한 '침묵하는 군중'임에 분명하다. 침묵하는 군중은 '침몰하는 배'를 절대 끌어올리지 못한다. 함께 침몰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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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머니 몬스터>


세계 금융시장의 중심가, 미국 뉴욕의 '월 스트리트'. 월 스트리트를 좌지우지 하는 버라이어티 경제쇼 '머니 몬스터'. 그곳에 괴한이 출현해 진행자를 위협하는데... ⓒUPI코리아



세계 금융시장의 중심가, 미국 뉴욕의 '월 스트리트'. 월 스트리트를 좌지우지 하는 버라이어티 경제쇼 '머니 몬스터'. 머니 몬스터는 세계 금융시장을 쥐락펴락하는 TV 프로그램이다. 진행자 리 게이츠는 정신이 제대로 박혀 있진 않지만, 진행 하나는 최고다. 현장을 완벽히 컨트롤 하는 프로듀서 패티 펜이 있기 때문. 


그날도 어김 없이 생방송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택배 기사로 보이는 남성이 카메라에 잡힌다. 생방송의 묘미를 살려 남성을 이용해 보려는 리와 패티. 하지만 남성은 다자고짜 총을 꺼내 들고는 천장으로 쏘며 진행자를 위협한다. 그러며 하룻밤 만에 8억 달러를 날려 버린 'IBIS'의 진실을 폭로하고 회장이 사과하는 걸 요구한다. 


새로울 게 없는 설정, 아쉽다


어디서 본 듯한 설정, 2013년에 개봉한 하정우 주연의 <더 테러 라이브>가 스친다. 생방송 도중에 걸려온 장난 전화, 하지만 장난이 실제가 되면서 이야기는 급박하게 흘러간다. 그 모든 걸 생중계하여 시청률을 올려보겠다는 심산까지. <머니 몬스터>와 <더 테러 라이브>를 모두 본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을 듯하다. 


다만, <머니 몬스터>가 조금 더 스케일이 크다. 보여지는 건 <더 테러 라이브>가 더 화려하고 스펙터클하고 심장을 쫄깃하게 만들 텐데, <머니 몬스터>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더 크다. 다만, 하룻밤 만에 증발해버린 유망 기업의 주식 8억 달러의 실체를 밝혀라. 사실 그 뿐이다. 다양한 면에서 잘 살리지 못했다. 발만 담궜을 뿐이다. 


가해자와 피해자의 얽히고설킴, 여기저기에서 많은 접해온 클리셰다. 새로울 게 없는 설정이다. 그걸 뛰어넘는 무엇이 있을까? ⓒUPI코리아



피해자가 가해자로 둔갑할 수밖에 없는 상황, 불쌍한 가해자를 이해하고 진정한 가해자를 응징하는 데 힘을 보태는 피해자, 그렇지만 그 피해자 또한 가해자와 동조해 왔으니 가해자다. 거기에 또 다른 넓은 의미의 가해자도 있다. 우린 이런 류의 클리셰를 많은 영화, 뿐만 아니라 다양한 콘텐츠를 통해 접해 왔다. 더 이상 새로울 게 없는 설정이다. 이 중 한 개라도 집중해 치명적인 딜레마와 안타까운 파국을 보여줬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든다. 


영화 같은 영화, 재미는 어디로?


2008년 '미국 발' 금융 위기 이후 할리우드에서 경제 영화, 그중에서도 특히 금융위기 당시를 생각나게 하는 '주가 조작' 영화가 자주 출몰한다. 얼핏 기억나는 영화만 해도 <월 스트리트> <인사이드 잡> <마진 콜> <더 울프 오브 월 스트리트> <빅 쇼트> 등, 일 년에 최소 한 편 이상은 만들어지는 것 같다. 와중에 <머니 몬스터>는 별종이다. 위엣것들이 현실 그 자체를 그렸다면, 이 영화는 영화 같은 영화다. 


문제는 재미가 있는가 하는 점이다. 다큐멘터리까지는 아니더라도 지극히 진지하게, 지극히 풍자적으로 심각한 상황을 전했었다. 이 영화는 어떤가? 조금 더 다층적으로 접근한다. 하룻밤 만에 어마어마한 돈이 증발해버리는 영화 같은 상황에, 생방송 도중 괴한이 침입해 총과 폭탄을 들고 진행자를 위협한다는 영화 같은 설정을 넣은 것이다. 초첨을 어디에 맞추는 지가 굉장히 중요해진다. 


이 영화의 괴한은 어수룩하다. 그는 일종의 딜레마를 상징한다. 죽음도 없고 영웅도 없다. 재미는 있을까? ⓒUPI코리아



90년대 스타일이라면 괴한이 두뇌 회전이 빠르고 눈치도 빠르고 잔혹하고 만반의 준비까지 한 인물일 것이다. 몇 명이 죽을 것이고, 심장은 한 없이 쫄깃해질 것이고, 영웅 한 명이 어떤 수를 써서든 괴한을 무찌를 것이다. 반면 이 영화는? 괴한이 어수룩하다. 왜? 그도 원래는 피해자니까. 일종의 하소연을 하러 온 거니까. 요즘 나오는 많은 영화의 특징이기도 하다. 딜레마. 죽음도 없고 쫄깃도 없고 영웅도 없다. 재미도 없다. 


예전 스타일처럼 만들 게 아니라면, 또는 비주얼적으로 뭔가 보여줄 만한 게 조금이라도 있는 게 아니라면 왜 이런 영화를 만들었는지 의문이다. 재미가 있을 것처럼 시작만 했을 뿐, 가면 갈수록 당최 알 수가 없지 않은가. 재미가 없지 않은가. 다층적이고 색다른, 현대적인 접근이 오히려 내용도, 재미도, 감동도 담보하지 못했다. 


시종일관 짙게 묻어나는 아쉬움


1990년대 최고의 탑스타 조지 클루니와 줄리아 로버츠, 거기에 떠오르는 신성 잭 오코넬, 그리고 조디 포스터 감독. 이들은 꿍짝이 잘 맞았을까? ⓒUPI코리아



미덕을 찾아보자. 주연 3인방, 조지 클루니, 줄리아 로버츠, 잭 오코넬의 이름값. 안타깝지만 눈요기 감도 안 되었다는 말을 전한다. 조지 클루니는 2010년대 이후 <디센던트>에서 정점을 찍고 한 없이 추락하는 중이고, 줄리아 로버츠는 굳이 필로그래피를 언급하지 않아도 극 중에서 전혀 빛을 발하지 못했다. 잭 오코넬은 피해자 코스프레를 연상시키는 만큼 지질한, 즉 괜찮은 연기를 펼쳤지만 극 중 역할 자체가 너무 매력적이지 않았다. 아쉽지만 영화와 배우가 꿍짝이 잘 맞지 않았다. 


까메오나 단역, 조연의 역할이 영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칠 때가 많다. 이 영화에도 감초 같은 조연이 나오는데, 이 심각한 국면에서 코믹에 가까운 역할을 부여받았다. 잘 들어 맞았다면 영화의 급 자체를 끌어 올렸을지 모른다. 진중함과 코믹함을 자유자재로 옮겨가니 말이다. 


그런데 정말 아쉽게도 그 역할이 영화 내내 헛돌았다. 전혀 아무런 감흥을 주지 못했다. 차라리 없었으면 하는, 나름 진중한 분위기에 쉬어가는 페이지가 아니라 찬물을 쫙 끼얹는 느낌이랄까. 그리 생각하니 다양한 느낌을 형성하는 역할들이 곳곳에 자리 잡았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감독의 역량이 부족하다 해야 할까. 


100분이 채 안 되는 짧은 러닝 타임이 미덕이라면 미덕일까. 마음 놓고 킬링타임 용으로 즐길 만한 영화가 안 되는지라, 그것조차 미덕이 아닐 수 있다는 게 정말 너무나도 안타깝다. 차라리 여타 영화보다 조금이라도 더 길어서 더 많은 이야기를 전해주었으면 어땠을까... 나름 전달하는 메시지에 의미 부여를 하고 미덕을 찾을 수 있을까 싶었지만, 그조차 너무 식상하지 않나 싶다. 끝까지 아쉬움만 남는다. 미덕을 찾아보는 재미는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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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멧 데이먼의 <리플리>


우연히 상류층의 일원으로 보여진 '톰' 그는 특출난 재능으로 빠르게 상류층의 일원이 된다. 그렇지만 그건 분명 거짓된 삶이었으니... 그는 어떻게 될까? ⓒ미라맥스



아름다운 피아노 선율과 소프라노의 노랫소리가 울려 퍼지는 어느 파티석상. 연주가 끝나자 선박 회사를 운영하는 부호 그린리프 부부가 다가와 톰 리플리에게 칭찬을 건넨다. 그러곤 그가 프리스턴 재킷을 입은 걸 보고 자신의 아들 이야기로 넘어간다. 톰은 '디키, 잘 있죠?'하며 아는 척 하고 그린리프 부부의 환심을 산다. 


톰은 피아니스트도 아니고 프리스턴을 졸업하지도 않았다. 그는 피아노 선율사이자 호텔 보이일 뿐이다. 다만, 그때는 친구를 대신해 돈을 받고 프리스턴 대학교를 나온 피아니스트인 척했던 것이다. 그린리프는 톰에게 1000달러를 보장하며 이탈리아로 가서 디키를 설득해 들어오게끔 한다. 톰은 디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전혀 모르는 재즈를 공부하고는 이탈리아로 날아간다. 


상류층이 되고 싶은 '재능'의 거짓된 삶


톰이 동경해 마지 않는 상류층의 삶 그자체인 디키. 톰은 차원이 다른 그의 사고와 행동과 여유와 씀씀이를 따라할 수 있을까? ⓒ미라맥스



영화 <리플리>는 이런저런 부차적 설명을 과감히 생략하고 본론으로 넘어간다. 톰이 어떤 삶을 살아 왔는지를 단 몇 장면으로 보여주고는 곧바로 새로운 거짓된 삶이 나오는 것이다. 영화가 이야기하려는 건 톰의 거짓된 삶에 있다. 비천한 삶이 상류층의 삶으로 둔갑하면서 톰은 헤어나올 수 없는 늪에 빠졌다. 숨어서 동경해왔던, 언제든 준비가 된, 그러나 거짓되었다는, 그래서 불안하기 짝이 없는 삶. 


재능이 출중하지 않다면 일련의 일을 벌이지 못했을 거다. 그렇다. 톰은 상류층이 되기에 충분한 '재능'이 있었다. 뭐든 금방 따라해서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재능 말이다. 물론 뿌리 깊은 상류층의 의식과 행동과는 근본적으로 이질감이 느껴지긴 하겠지만. 


그렇지만 그가 절대 가질 수 없는 게 있었다. 출신 성분이라고 해야 할까. 머나먼 윗세대부터 내려오는 뿌리 깊은 가문의 성분 말이다. 거기에는 여러 가지가 필요하다. 가문, 학력, 돈, 명예, 지위 등. 디키는 선박 부호를 아버지로 두었고 돈은 엄청나게 많으며 프리스턴 대학교 출신이었다. 여기에 상류층다운 여유와 씀씀이, 차원이 다른 스케일을 소유하고 있다. 톰이 이런 것들까지 따라할 수 있을까?


시대가 낳은 괴물이자 피해자일까, 사이코패스이자 미친놈일까


'초라한 현실보단 멋진 거짓이 낫다'는 생각으로 끔찍한 짓을 하고 끔찍한 현실을 버티는 톰. 그는 시대가 낳은 괴물이자 피해자일까, 사이코패스이자 미친놈일까. ⓒ미라맥스



톰(멧 데이먼 분)은 디키(주드 로 분), 디키의 연인 마지(기네스 팰트로 분)와 즐겁고 행복한 시간을 보낸다. 디키와 마지가 톰을 잘 대해주고 톰은 그들을 동경하며 잘 따랐다. 무엇보다 톰에게는 평생 다시 없을 상류층의 삶을 맛보는 나날이었으니 더 말해 무엇하랴. 마치 자신이 진짜 상류층이 된 듯한 착각에 빠졌을 것이다. 


어느 날 상류층 친구 프레디가 찾아온다. 그는 디키와의 친분을 과시하며 빌붙어 사는 게 좋냐고 톰을 놀려댄다. 톰은 적의에 불탔지만 이내 좌절하고 프레디는 그런 톰을 계속 놀려대고 디키는 톰을 조금 멀리하고 마지는 그런 톰을 위로한다. 그린리프 씨와의 계약 만료가 다가오고 디키와 톰은 함께 여행을 떠난다. 바다 한 가운데에서 디키는 톰에게 강력하게 전달한다. 따분하고 싫증났다고, 가난뱅이 빈대에 찰거머리라고, 계집애 같다고. 다툼 끝에 톰은 돌이킬 수 없는 짓을 저지르고 만다...


영화의 또 다른 시작을 알리는 사건이다. 이 모든 게 시작되었을 때처럼 우연치 않게 디키로 오해받은 톰은 아예 디키 행세를 한다. 그렇게 그는 디키가 되어 '진짜' 상류층이 된다. 영화는 더욱 긴박하게 돌아간다. 몇몇 장면은 심장을 쫄깃하게 만든다. 톰이 누군가에겐 톰이고 누군가에겐 디키이기 때문인데, 그 누군가들이 전부 상류층으로 서로 잘 알고 있다. 톰이 원하는 건 뭘까. 


톰은 '초라한 현실보단 멋진 거짓이 낫다'는 생각을 하며 살아 왔고 멋진 거짓을 현실로 옮겼으며 끔찍하지만 멋진 현실을 버텨 왔다. '배부른 돼지보다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낫다'를 생각나게 하는 이 생각은, 그러나 결국 진짜 상류층, 그가 바라는 멋진 삶을 주진 못한 것 같다. 그는 시대가 낳은 괴물이자 피해자일까. 흔히 있는 사이코패스이자 미친놈일까.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고, 나를 온전히 드러낼 수 있는 사회라면...


상류층만이 상류층을 인정하는, 참으로 슬픈 풍토다. 영화에서 그들은 어쩔 수 없다고 말한다. 상류층만이 상류층을 이해할 수 있고, 말이 통한다고. 이같은 풍토를 바꿀 순 없을까? ⓒ미라맥스



"과거를 창고에 꼭꼭 숨겨 두고 자물쇠를 채우고픈... 그 안은 어둡고 더러워. 그 추잡함을 들키면..." 


누구나 거짓된 삶을 사는 건 아니겠지만, 많은 거짓과 비밀을 마음속 깊이 묻어두고 산다.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알려주고 싶지만, 그 더럽고 추잡한 사실을 들키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다. 그렇게 평생을 사는 것이다. 톰 리플리, 그는 우리 모두의 또 다른 모습이다. 너도 될 수 있고 나도 될 수 있고 어느 누구라도 될 수 있다. 미친놈이라기보단 괴물에 가깝지 않을까. 


때는 1950년대 미국, 위기와 전쟁을 지나 자본주의 최대 호황의 시대를 맞이했다. 빈부격차가 심화되며 상류층의 삶의 양식이 정착되었다. 비천한 이가 감히 상상하기 힘들지만 기회가 주어진다면 마다하기 쉽지 않을 거다. 누가 그에게 돈을 던질 수 있을까? 상류층이라면 돈을 던질 수 있을까. 오르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라고. 


이 영화가 원작으로 삼은 <재능 있는 리플리씨>에서 나온 '리플리 증후군'은 톰이 잘 보여준 반사회적 인격장애의 일종인데, 참으로 애잔하고 슬프기까지 하다. 만약 현실이 비참하지 않다면? 자신이 비참하다고 느끼는 건 누군가와 차별되는 삶을 살고 있다는 건데, 그런 차별이 없는 사회라면? 영화에서처럼 상류층만 상류층을 인정하는 풍토가 없다면? 리플리 증후군 따위는 없을 거다. 


자만심으로 풍만한 상류층과 자격지심으로 똘똘 뭉친 하류층의 더럽고 슬픈 합작품. 누구나 그것에 노출되어 있고 빠지기 쉽다는 게 안타깝고 두려울 뿐이다. 나도 그런 경험이 있고 아마 지금도 그런 삶을 살고 있을 거다. 내가 의도했거나, 나도 모르게. 


사회를 바꿔가는 수밖에 없다. '나'라는 중심을 확고히 세우고 '나'를 사랑하고 '나'만의 길을 걸어가려는 노력이 필요하겠다. 그렇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나만 노력한다고 될 수 있는 건 아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관심을 갖는 게 필요하다. 자칫 서로에 대한 무관심으로 나아갈 수 있는데, 역효과를 불러올 것이다. 적어도 사랑하는 사람에겐 나를 온전히 드러낼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지금은 그것조차 허락되지 않는 사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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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아이 인 더 스카이>


영화 <아이 인 더 스카이>는 작금 전 세계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테러와 그에 따른 무고한 피해를 눈 앞에서 보고 있는 우리들에게 답을 찾기 힘든 딜레마적 상황을 던진다. 영화 <아이 인 더 스카이> 포스터. ⓒ엔터테인먼트 원



케냐의 수도 나이로비. 한 여자 아이가 평화롭게 훌라후프를 돌린다. 그러며 시내에 나가서 빵을 팔기도 한다. 지극히 평범하고 평화로운 아이의 모습이 왠지 을씨년스럽다. 무슨 일인가 벌어질 것만 같다. 


소말리아의 극단주의 테러 조직 알 샤바브의 수장급들 생포를 위해 미국, 영국, 케냐가 합동 작전을 펼친다. 그들이 모인 곳은 케냐의 수도 나이로비의 한적한 곳. 생포 작전에 돌입하려던 찰나, 최첨단 초소형 드론의 활약으로 그들이 자살 폭탄 테러를 하려는 사실을 알아낸다. 우여곡절 끝에 생포 작전은 사살 작전으로 바뀐다. 사살 작전을 위해선 드론 미사일 투하가 필요하다. 


답을 찾을 수 없는 딜레마 상황


도무지 답을 찾을 수 없는 딜레마가 있기 마련이다. 반드시 수많은 인명 피해가 수반될 자살 폭탄 테러를 사전에 제거하기 위해 어느 정도의 부수적 피해를 감수해야 하는가. 아니면 아직 벌어지지도 않은 일로 부수적 피해를 감수할 수는 없는 것인가. 영화 <아이 인 더 스카이>는 작금 전 세계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테러와 그에 따른 무고한 피해를 눈 앞에서 보고 있는 우리들에게 답을 찾기 힘든 딜레마적 상황을 던진다. 


사살 작전을 위한 미사일 투하 진전 한 여자 아이가 중상 이상의 피해가 확실시되는 곳으로 와서 빵을 판다. 총리, 장관, 장군, 작전지휘관, 미사일 조종사 등 작전에 관련된 그 누구도 판단을 내리기 힘들다. 영화 <아이 인 더 스카이>의 한 장면. ⓒ엔터테인먼트 원



급기야 사살 작전을 위한 미사일 투하 진전 한 여자 아이가 중상 이상의 피해가 확실시되는 곳으로 와서 빵을 판다. 총리, 장관, 장군, 작전지휘관, 미사일 조종사 등 작전에 관련된 그 누구도 판단을 내리기 힘들다. 법적으로, 정치적으로, 도덕적으로, 완벽한 결정이 있을 수 없다. 어떻게 해야 할까. 


도덕과 법, 누구의 선택과 결정이 옳은가?


영화는 미사일 투하에 대한 논쟁과 선택과 결정이 주를 이룬다. 작전에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지휘관과 장군은 자살 폭탄 테러로 입게될 엄청난 인명 피해를 사전에 없애기 위해 반드시 미사일을 투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에 반해 내무장관, 법무장관, 국무장관, 국방장관들은 정치적 후폭풍을 두려워 하면서 결정을 서로 미룬다. 이해는 되지만 정녕 비열하고 저열한 행태가 아닐 수 없다. 


한편 작전의 직접적 지휘관은 그 어떤 정치적, 도덕적 판단 없이 오로지 법적인 판단을 앞세우며 '임무 완수'에만 매달린다. 물론 추후 입게 될 수 있는 엄청난 인명 피해를 사전에 제거한다는 명분이 확고하다. 그렇지만 부수적 피해를 조작하면서까지 임무를 완수해야 할 이유는 뭘까. 결국 임무 완수에 따른 자신의 위신과 영달이 아닌가. 


작전 지휘관은 어떤 정치적, 도덕적 판단 없이 법적인 판단을 앞세우며 '임무 완수'에만 매달린다. 부수적 피해를 조작하면서까지 임무를 완수해야 할 이유는 뭘까. 자신의 위신과 영달이 아닌가. 영화 <아이 인 더 스카이>의 한 장면. ⓒ엔터테인먼트 원



이 딜레마에서 가장 큰 문제는 어느 누구의 선택과 결정은 옳고 어느 누구의 선택과 결정은 그르지 않다는 점이다. 전부 다 옳다고 할 수도 있고 전부 다 그르다고 할 수도 있다. 보는 이에 따라서, 처한 상황에 따라서, 신념과 환경에 따라서. 그래서 장관들의 비열하고 저열한 행태와 지휘관의 막무가내 임무 완수의 이유를 무조건 그르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 누구라도 그때 그 자리에 있다면 그렇게 했을 수 있다. 


사태를 바라보는 넓은 시야가 필요하다


영화는 직접적 피해자(폭탄 테러 조직)의 입장은 아예 다루지 않은 채 직접적 가해자와 간접적 가해자, 간접적 피해자를 다룬다. 사실 간접적 피해자도 입장 서술이 전혀 되지 않고 일방적으로 당하기 때문에 다뤄지지 않는다고 보면 맞겠다. 그렇게 볼 때 오로지 가해자의 입장만 서술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간접적 가해자의 입장이 애매하다. 다름 아닌 조종사인데, 미사일 투하 버튼을 누르는 이로서 윗선의 결정에 따라 실행만 할 수 있다. 그 결정에 따라 무고한 생명의 목숨을 빼앗게 되더라도 실행을 해야 하고 그 심리적 피해는 고스란히 실행자에게 돌아온다. 가해자이자 피해자이다. 그렇지만 아무도 그들의 피해는 보상해주지도 보살펴주지도 않는다. 


영화가 가해자의 입장만 서술한 건 영화적으로 괜찮은 선택이었다. 피말리고 답답하고 한숨 나오는 결정의 시간을 긴박감있게 보여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어설프게 폭탄 테러의 당위성을 보여주며 스케일을 확장시켰다면 자칫 이도저도 아니게 될 수 있었다. 그들이 테러를 하려는 이유를 아예 배제함으로서 가해자의 딜레마에 더 집중할 수 있었고, 이 사태의 한 면을 거의 완벽하게 들여다볼 수 있었다. 


사태를 바라볼 땐 더 넓은 시야가 필요하다. 맹목적이고 절대적인 사고를 지양해야 한다. 극단적 사고와 행동을 보이는 그들을 극단적으로 제압하려고 할 때는 심사숙고가 필요하다. 영화 <아이 인 더 스카이>의 한 장면. ⓒ엔터테인먼트 원



그렇지만 모든 일에는 양면이 있다. 영화는 영화고, 사태 자체를 바라볼 땐 더 넓은 시야가 필요하다. 맹목적이고 절대적인 사고를 지양해야 한다. 극단적 사고와 행동을 보이는 그들을 극단적으로 제압하려고 할 때는 심사숙고가 필요하다. 물론 그것이 필요한 것과 그것이 가능하다는 건 또 다른 얘기다. 누구라도 필요하다는 건 알겠지만 가능할지는 모르지 않을까. 그래도 해야하는 건,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된 건지 태초의 연유부터 따져보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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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드라이빙 미스 데이지>


깐깐하고 꽉 막힌 상류와 서글서글하고 활달한 하류의 잘못된 만남과 영원한 우정 또는 사랑 이야기는 굉장히 흔하다. <드라이빙 미스 데이지>도 그 흔한 이야기의 하나다. 영화 <드라이빙 미스 데이지> 포스터 ⓒ워너 브라더스



깐깐하고 꼬장꼬장한 전직 교사 출신 유태인 70대 할머니 데이지, 어느 누구도 그녀를 어찌 할 수 없다. 공장을 운영하고 있는 아들 불리, 그의 깐깐하고 성깔 있는 아내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그렇게 살아 왔고, 바뀌지 않을 거고, 굳이 바뀔 필요도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소소한 사고가 난다. 차를 끌고 장을 보러 가려다가 기어를 잘못 조작해 사고를 낸 것이다. 불리는 곧 흑인 기사 호크를 고용한다. 


가난했던 옛생각만 하며 부자가 된 현재의 모습을 뽐내길 싫어하고, 자신도 유태인으로 차별을 당하면서 흑인에 대한 나쁜 선입견을 가지고 있고, 종교에 대한 지나치게 확고한 신념으로 다른 종교(기독교)를 깍아내리는 데이지가 호크를 아니꼽게 보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가 뭘하든 사사건건 참견하며 하지 못하게 하고 그가 운전하는 차에 타지 않으려 한다. 동네 사람들의 시선 때문에 어거지로 차에 탄다. 



깐깐하고 꼬장꼬장한 전직 교사 출신 유태인 70대 할머니 데이지, 어느 누구도 그녀를 어찌 할 수 없다. 그녀는 그렇게 살아 왔고, 바뀌지 않을 거고, 굳이 바뀔 필요도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소소한 사고가 나 불리는 곧 흑인 기사 호크를 고용한다. 영화 <드라이빙 미스 데이지>의 한 장면 ⓒ워너 브라더스



인생의 황혼기에 완전히 바뀌는 특별한 경험


깐깐하고 꽉 막힌 상류와 서글서글하고 활달한 하류의 잘못된 만남과 영원한 우정 또는 사랑 이야기는 굉장히 흔하다. 모르긴 몰라도 인류 역사를 관통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드라이빙 미스 데이지>도 그 흔한 이야기의 하나다. 다만 이 영화만 같는 특장점이 있다. 


인간은 30세가 넘어가면 잘 바뀌지 않는다고 한다. 자신이 의도하지 않아도 그동안 체화한 것들이 겉으로 드러날 정도라는 것이다. 공자가 말씀하시길 30세면 '이립'이라 하여 '마음이 확고하게 도덕 위에 서서 움직이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는가. 하물며 70세라야? 70세면 뜻대로 행해도 어긋나지 않는 경지다. 


데이지 여사는 살아 왔던 대로 계속 살아가면 되는 나이에 있었다. 아무도 그녀를 탓하지 않는다. 그냥 그런 사람인가보다 하고 말 것이다. 그런 그녀가 180도 바뀐다. 성격이 아니라 세상을 대하는 눈이 달라진다. 거의 불가능에 가깝지는 그녀는 '해낸다'. 인생의 황혼기에 다달아 완전히 바뀌는 특별한 경험은, 보는 이에게도 특별한 경험으로 다가온다. 


데이지 여사는 살아 왔던 대로 계속 살아가면 되는 나이에 있었다. 그녀가 180도 바뀐다. 성격이 아니라 세상을 대하는 눈이 달라진다. 인생의 황혼기에 완전히 바뀌는 특별한 경험은, 보는 이에게도 특별한 경험으로 다가온다. 영화 <드라이빙 미스 데이지>의 한 장면 ⓒ워너 브라더스



그녀는 유태인이다. 자신도 미국의 백인 사회에서 알게 모르게 차별을 당한다. 사실상 흑인인 호크와 다를 바가 없다. 호크와 함께 삼촌 댁에 가는 도중 잠시 길 옆에 차를 세워두었을 때 경찰 두 명이 와서 '이 고급차를 왜 너같은 흑인이 타고 있냐'는 식으로 얘기한다. 그녀는 알지 못한다. 그들이 그녀에게도 유태인이라는 이유로 차별의 시선을 날린 것을. 그녀가 가던 회당이 KKK로 예측되는 이들에게 폭탄 테러를 당하는 일까지 당하게 된다. 흑인에 대한 나쁜 선입견으로 호크를 도둑으로 몰았던 일도 있다. 


그녀는 자신이 피해자라는 걸 몰랐을까. 아니면 피해자라는 걸 애써 감추고 살았을까. 알면서도 모른 채 살았을까. 그녀의 머릿속엔 유태인이라는 단어가 그런 식으로 비춰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대신 다른 게 들어 있다. 과거의 가난과 현재의 부자. 그녀가 흑인 가정부를 아끼는 이유가 힘들었던 지난 날을 함께 해왔기 때문인 것과 같은 맥락이다. 그런 시절을 함께 하지 않은 호크는 그녀에게 그냥 흑인일 뿐이다. 


괜찮은 삶, 끊임없이 부딪히고 깨닫고 성장하는 삶


영화는 20년의 세월을 그린다. 이미 초로의 노인인 데이지 여사는 치매에 걸려 요양원에서 지내고 호크는 운전을 할 수 없어 손녀딸이 태워주는 차에 타고 다니게 된다. 아이델라는 세상을 떠났고, 아들도 늙고 바빠 잘 챙기지 못하며, 며느리는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말로만 안부를 전하니, 그녀에게 남은 이는 호크밖에 없었다. 한순간 정신을 차린 데이지 여사는 호크에게 진심을 전한다. 


"자네는 나의 친구야, 가장 친한 친구."


보다시피 영화는 의외로 성장 영화다. 초로의 여인 데이지 여사의 성장기. 그 성장에 차별 철폐, 우정, 화해, 진심이 담겨 있다. 그 성장을 죽을 때까지 멈추지 않는다. 흔하디 흔하지만 특별한, 그래서 특별함을 많은 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었다. 어떤 사건사고 없이 몇몇의 대화로만 이루어진 이 단조로운 영화가 와 닿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그런 사실을 인지하게 되었을 때 직시하고 올바른 쪽으로 바꿔나가는 것이야말로 괜찮은 삶이고 잘 산 삶일 것이다. 그들이 부러운 듯 '운이 좋았다'고 말한 아이델라의 삶이 아니고. 영화 <드라이빙 미스 데이지>의 한 장면 ⓒ워너 브라더스



그들은 죽은 아이델라를 두고 '운이 좋았다'라고 표현한다. 왜 그렇게 말했을까. 그녀가 좋아하는 드라마를 보다가 죽음을 맞이해서? 고통스럽지 않게 자신도 모르는 새 죽음을 맞이해서? 말년의 비참한 꼴을 보지 않고 죽음을 맞이해서? 생각해봐도 그들이 그렇게 말한 정확한 이유를 모르겠다. 다만 영화의 맥락을 통해 이해해 볼라치면, '흑인의 삶치곤 괜찮은 삶이었다' 정도겠다. 씁쓸하다.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 자신이 차별 당하고 있는 사실을 이해하려고도 하지 않고 이해하지도 못한 채 '분수에 맞는' 삶을 사는 게 괜찮은 삶이고 잘 산 삶일까. 물론 그런 사실을 인지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체념한 채 살아가는 것보다는 괜찮은 삶이겠다. 여기서는 '아는 게 힘'이라기보다 '모르는 게 약'이지 않을까. 


그렇다면 그런 사실을 인지하게 되었을 때 체념하는 게 아니라 정확히 직시하고 올바른 쪽으로 바꿔나가는 것이야말로 괜찮은 삶이고 잘 산 삶일 것이다. 데이지 여사, 그리고 호크의 삶이 바로 그런 삶이다. 그들이 부러운 듯 '운이 좋았다'고 말한 아이델라의 삶이 아니고. 그녀의 삶은 '충실했다'고 표현하는 게 맞지 않을까. 결이 조금 다른. 


많은 사람들이 아이델라의 삶을 살아간다. 그저 살아가는 데 충실한 삶, 그 또한 어떤 의미에선 위대한 삶이다. 데이지 여사의 삶도, 호크의 삶도, 많은 이들에겐 상당히 다른 차원의 삶이다. 나는 아직 정하지 못했다. 어떤 삶을 살아갈지, 또 어떤 삶을 살 수 있을지. 부러운 삶은 아이델라의 삶일 것이다. 하지만 살고 싶은 삶은 데이지 여사와 호크의 삶이다. 끊임없이 부딪히고 깨닫고 성장하는 삶 말이다. 괜찮은 삶이길 바란다. 괜찮은 삶이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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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서평] <예민해도 괜찮아>

<예민해도 괜찮아> 표지 ⓒ북스코프


직장 내 성희롱 피해자로 삼성을 상대로 싸워 이긴 후 로스쿨에 진학해 변호사로 돌아온 이은의 변호사가 쓴 책 <예민해도 괜찮다>(북스코프), 삼성과 로스쿨 시절에 겪었던 이야기와 변호사로 살아가며 보고 듣고 경험한 이야기들을 책으로 엮어냈구나 하는 짐작이 가능하다. 이 짐작이 맞긴 맞되, 본질은 완전히 다르다. 단순히 여성의 성희롱과 성폭행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저자는 현재 변호사 일을 하고 있다. 그 전에는 37살 늦은 나이에 전남대학교 로스쿨에 들어갔다. 이전에는 몇 안 되는 대졸 여사원으로 대기업 삼성에 들어가 제법 잘나가는 해외영업 사원으로 일했다. 그녀의 경력을 보면 일명 '엄친딸'이라고 할 만하다. 능력 있고 운도 좋고 자신감과 자존감까지 갖춘 완벽한 여자라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그녀가 어째서 이런 책을 썼을까?

그녀의 경력을 조금만 더 자세히 들여다보자. 그녀는 '피해자 편에 서서' 변호사 일을 하고 있고, 늦은 나이에 법학을 전공하지 않은 채 로스쿨에 들어가 많은 '서러움과 차별'을 받았으며, 12년 넘게 일한 대기업 삼성에서는 '4년 넘게 회사와 전쟁을 했기 때문에' 그 생활이 평탄하지 않았고 나아가 불행하기까지 했다. 이를 관통하는 게 여성으로서 받게 되는 성차별과 성피해다. 

그런데 저자는 그런 것들이 단순히 성 문제가 아니라  갑을 관계, 즉 권력 관계의 문제라고 말한다. 남성과 여성의 성 문제가 아니다. 인간 대 인간의 문제이고 가해자든 피해자든 주변인이든 그런 시선으로 바라보고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제목 '예민해도 괜찮아'에서 예민해야 할 주체는 오로지 여성 만이 아니고, 대상은 오로지 남성이 아니다. 여성이 그 주체가 되기 쉬우며 대상이 남성이 되는 경우가 많을 뿐이다. 주체는 인간이며, 대상은 권력이라고 할 수 있겠다. 

생상한 체험을 바탕으로 성 문제를 다루다

그럼에도 이 책에서 저자가 천착하는 건, 천착할 수밖에 없는 건 여성을 대상으로 한 남성의 성희롱, 성추행, 성폭력 등의 성 문제이다. 저자는 자신의 생생한 체험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이끌어 간다. 자신을 찾아온 수많은 성범죄 피해자들의 이야기, 그 이야기들에서 핵심을 뽑아 정보를 전하고 교훈을 전하고 담론도 생성한다. 

성범죄 사건에서는 피해자와 가해자, 그리고 주변인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말한다. 우리 대부분은 가해자나 피해자가 아닌 주변인이 될 확률이 높은데, 성범죄 사건에서 '처리가 어떻게 되느냐'는 실상 주변인들의 시선과 태도에 달려 있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지나치게 가해자의 시선에 동일시되어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주변인이 존중과 배려, 그리고 피해자의 시선에 동일시하고자 노력해야 한다고 말한다. 

데이트폭력에 대한 새로운 해석도 흥미롭다. 아니, 엄밀히 새로운 해석은 아니다. '재인지'라고 하는 게 맞겠다. 저자는 데이트폭력을 '폭력'으로 바라봐야 한다고 말한다. 데이트는 그저 폭력을 행사하기 위한 장치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러하기에 데이트폭력을 근절하기 위해서는 '데이트+폭력'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폭력 자체로 바라보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게 인지해야 발생 초기에 관계를 차단하거나 신고 절차를 밟을 수 있다. 폭력 앞에 사랑 없고, 폭력 뒤에도 사랑은 있을 수 없다. 

보이지 않는 차별과 피해자들의 용기

저자는 '여자들이 살기 편해진 세상'이라며 여성 차별이 존재하지 않게 된 것처럼 되어 버린 세상이라, 오히려 더 무섭다고 한다. 바로 잘 보이지 않는 차별 때문이다. 여전히 기업에서 채용한 인재의 남녀의 성비는 평등과는 거리가 멀고, 상위 직급으로 갈수록 여성이 희소 해지는 게 사실이다. 젊음이 소진된 여성 인력은 교체해야 하는 대상인 양 생각하기 일쑤다. 

"여성들에게 유리해진 부분은 여성이란 존재에 대한 우리 사회의 존중 의식이 높아져서가 아니다. 우선은 IMF 이후 가족의 부양의무를 가장에게만 떠안기기가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성 인력을 필요로 하는 수요 역시 늘어나면서 맞벌이를 하는 것이 자본주의의 입맛에 더 맞았기 때문이다." (136쪽)

한편 저자는 피해자들이야말로 사회를 바꿀 수 있다고 말하며 용기를 내야 한다고 말한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100% 동의하기 힘들다. 용기를 내라고 강요할 수 만은 없는 부분이 아닌가 싶다. 물론 용기를 내어 세상이 바뀌는 큰 결과를 얻어냈다고 하더라도 그 과정은 더할 나위 없이 힘들었을 게 아닌가. 이런 사건의 경우, 각자의 판단에 맞기는 게 맞지 않은가 생각한다. 오히려 당사자들이 아닌 주변인들이 조심스럽게 나마 나서야 할 것이다. 피해자들 만의 연대가 아닌 피해자와 주변인의 연대가 필요하다. 

이 시대에 충분한 울림을 주다

저자가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바는 '힘희롱'이다. 이 힘희롱 안에 성 문제가 크게 자리 잡고 있다. 즉, 보다 근원적인 문제인 것이다. 이 프레임이 반드시 옳다고 말할 수 없겠다. 하지만 저자는 이런 시선으로 바라 보아야만 근본적으로 다가갈 수 있고, 근본적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보았다. 성 문제를 성의 프레임으로만 바라보고 접근한다면 대다수를 차지하는 주변인들에게 큰 울림과 변화를 줄 수 없다. 

이 책은 어떻게 보든 상당히 여성 중심적이다. 그래서 필자 같은 남성이 보기엔 조금 거북할 수 있다. 아무리 남녀 문제나 남녀 간의 성 문제가 아니라 소수자 문제이자 권력 관계 문제라고 봐야 한다고 말하고 있더라도 말이다. 저자는 여자들끼리 손잡고 여성 피해자들이 뭉쳐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남자와 여자를 떠나, 개인적으로는 저자의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남자와 여자의 완전한 평등을 지향하고, 평등을 전제로 사고를 펼치는 것. 그러기 위해선 남자 뿐만 아니라 여자의 생각과 행동도 변해야 한다는 것. 똑 소리 나는 현실 판단과 과감한 비판, 믿음직하고 의지가 되는 이론의 정립과 방향 제시. 저자의 존경할 만한 생각의 지도는 이 시대에 충분한 울림을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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