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프랑수아 오종 감독의 <프란츠>


파격적 행보를 계속 해왔던 프랑수아 오종 감독의 영화 경력 전환점이 될 만한 작품 <프란츠>. ⓒ찬란



프랑수아 오종은 프랑스가 낳은 작금 세계적인 작가주의 감독이다. 갓 20살이 넘은 1980년대 후반부터 활동했지만 2002년 <8명의 여인들>에 이르러 그 이름을 알렸다. 그 이전까지 그의 작품이 국내에 개봉된 적이 없고, 그 이후로 그의 모든 작품이 국내에 개봉된 사례만 보아도 어림직잠할 수 있다. 물론 하루아침에 뛰어 오른 건 아니고, 1990년대부터 비평계에 그 이름을 드높여 왔다. 


그는 매 작품마다 파격적 소재를 기본 장착하고 개성있는 상상력과 풍자를 선사했다. 비평가들이 좋아마지 않는 영화를 만들었다고 할까. 그렇지만 무엇보다 오종을 상징하는 건 섹슈얼리티 기반의 욕망이다. 한국에 처음 소개된 그의 작품 <스위밍 풀>이 당대를 대표할 만한 섹슈얼 미스터리라는 점도 크게 작용할 것이다.(<8명의 여인들>이 먼저 만들어졌지만, 국내에서는 <스위밍 풀>의 개봉 이후 그 성공으로 <8명의 여인들>이 개봉했다.) 그 전후로도 그는 섹슈얼리티에 천착했다. 


그런 프랑수아 오종 감독이 <프란츠>로 우리를 찾아온 건, 영화가 파격과는 조금 거리가 있기에 또 다른 느낌의 파격으로 다가온다. 영화는 제1차 세계대전 후의 독일과 프랑스를 배경으로 사랑과 용서, 거짓말과 진실, 외면의 정적과 내면의 격동 등에 휩싸인 인간상을 내보인다. 인간은 수많은 감정과 욕망의 소용돌이에 휩싸이면서도 꿋꿋이 살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프랑수아 오종 감독의 영화 경력의 전환점과 같다. 


전쟁 미망인 앞에 나타난 비밀스런 적국민 남자


전쟁으로 약혼자 프란츠를 잃고 아파하는 안나 앞에 적국민 남자가 찾아온다. 무슨 이유로? ⓒ찬란



1919년, 제1차 세계대전 패전 직후의 독일. 안나(폴라 비어 분)는 전쟁으로 약혼자 프란츠를 잃고 실의에 빠져 지내고 있다. 그녀가 버틸 수 있었던 건 아들을 잃고서도 그녀를 딸처럼 생각하고 보살핀 프란츠의 부모님 덕분이다. 아니, 프란츠의 부모님이 그녀 덕분에 버틸 수 있었던 것일 테다. 그런 독일 한복판의, 그것도 프란츠의 묘지에, 한 프랑스인이 나타난다. 


그는 아드리앵(피에르 니네이 분), 전전(戰前)부터 프란츠와 절친한 친구 사이였다고 한다. 프란츠의 마지막도 잘 알고 있는 그는, 프랑스인을 향한 적대감에도 불구하고 프란츠 부모님의 신뢰를 얻는다. 안나도 그에게 차츰 마음을 연다. 하지만 아드리앵의 눈은 자주 흔들리고 프란츠 부모님과 안나와 함께 있을 때 종종 불안해 한다. 알 길 없는 불안한 연유, 비밀을 간직하고 있는 것 같다. 


아드리앵은 돌연 고향인 파리로 돌아간다. 그 직전 더이상 버틸 수 없었던 그는 안나에게 비밀을 털어놓는다. 다소 충격적인 그 비밀은, 그가 프란츠의 오랜 친구가 아니라 전쟁 중에 프란츠를 죽인 독일군 출신이었다는 것이었다. 아드리앵은 프란츠 부모님과 안나에게 용서를 구하고 싶었던 거였다. 


이제 그만 안나가 자신의 삶을 살았으면 하는 마음과 이왕이면 아드리앵과 잘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던 프란츠 부모님은, 안나에게 아드리앵을 찾으라고 조언한다. 안나는 아드리앵의 비밀을 말씀드리지 않고 혼자만 간직한 채 파리로 향한다. 마치 1부가 끝나고 2부로 향하는 느낌이다. 그녀는 그를 찾을 수 있을까? 그녀와 그에게는 어떤 일이 기다리고 있을까? 


아름다운 정적, 영화 전반부


영화의 전반부는 흑백과 컬러를 오가는 와중에 아름다운 정적이 주를 이룬다. ⓒ찬란



비록 적국이지만, 비록 자식을 죽였을지 모를 적국민이지만, 모두 전쟁이 낳은 피해자들이라는 깨달음과 함께 용서를 넘은 포용이 영화의 전반부를 이룬다. 영화 외적인 요소들이 주를 이루기에 지루한 면이 없지 않아 있는데, 아름다운 슬픔과 역설적인 서정이 주는 감정적 호소가 깊이 있다. 영화를 다 본 후에 느낄 수 있는 점이지만, 격정적인 후반부의 느낌과 대조를 이루는 장치였다고 할 수 있겠다. 


감독의 의도가 잔뜩 들어 있는 흑백과 컬러의 조화가 눈길을 끈다. 영화는 흑백이 거의 전부를 차지하고 짧은 순간들만 종종 컬러로 내보이는데, 공통적으로 환희의 순간들이다. 문제는, 그 순간들이 암울한 현실에 비춰 당사자들은 모르지만 상황 상 현실을 더 암울하게 만들 순간들이라는 것이다. 아드리앵이 흔들리는 눈빛에도 불구하고 프란츠와의 거짓된 즐거운 한때를 말하고, 안나가 쓸쓸함이 잔뜩 묻은 목소리로 프란츠와의 즐거운 한때를 회상한다. 


더불어 곳곳에 도사리고 있는, 후반부 연속되는 격정적 사건들의 복선들도 눈에 띈다. 주로 아드리앵의 행동과 눈빛과 대사 등에서 대략이나마 알아차릴 수 있다. 다분히 안나의 시선에서 영화를 보고 느낄 수밖에 없기 때문인데, 그것들을 하나 하나 풀어내고 전에 없는 감정에 흔들리는 안나와 일심동체 되는 나를 느끼게 될 것이다. 


다양한 사건과 격정적 내면, 영화 후반부


안나가 겪는 다양한 사건 중에 내면에 몰아치는 격정들. 영화 후반부를 차지하는 것들이다. 우린 안나와 더불어 참으로 많은 것들을 보고 느끼고 깨닫는다. ⓒ찬란



안나가 아드리앵을 찾아 파리로 떠나면서 시작된다고 할 수 있는 후반부는, 똑바로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놓칠 수 있는 많은 중요 요소들의 모음이다. 거의 모든 장면, 대사, 행동, 표정에 의미가 부여되어 있다.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도 거기에 있고, 영화를 이루는 재미 요소도 거기에 있다. 


아드리앵이 용서를 빌고자 독일을 찾아왔던 전반부는, 안 그래도 정적인 독일이라는 곳에 더해 겉으론 즐겁지만 속은 타들어가는 아드리앵의 정황이 겹쳐 자칫 우울할 정도로 정적일 수밖에 없었다. 반면, 후반부는 프랑스 파리라는 당대 최고의 도시에 더해 전승국이라는 프리미엄을 업고 안나가 겪는 다양한 외적 사건들과 오락가락하는 내면에 의해 격정적이기 짝이 없다.


안나가 겪는, 안나가 프란츠와 겼었고 프란츠 부모님과 겪었고 겪고 있으며 아드리앵과 겪는 모든 것들이 정신없이 휘몰아친다. 그 하나 하나가 모두 의미 있게 다가온다. 사랑, 용서, 거짓, 진실, 회한, 이 모든 걸 이루는 욕망, 그 안에서 외롭게 죽어가는 인간 그리고 그럼에도 살아가는 인간. 순간이 곧 전체이고, 전체가 곧 순간이다. 


영화는 말한다. 인간이 위대한 건 그저 살아 있는 것이라고. 살아갈 이유 따윈 바라지도 않지만 오히려 죽어야 할 이유를 찾았음에도 살아 가는 그들. 생각지도 않은 희망을 주었다고 획기적인 방법으로 절망을 선사해도 살아 가려는 그들. 나도, 우리도 그렇게 살아간다. 그럼에도 살아간다. 안나와 아드리앵, 그리고 프란츠 부모님. 모두 프란츠를 잊으려 하지 않아도 된다. 아니, 잊으면 안 된다. 하지만,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프란츠와만 살아갈 순 없다. 계속 살아가기 위해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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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서평] <나의 1960년대>


<나의 1960년대> 표지 ⓒ돌베개



대학, 정치, 사회 개혁을 목표로 학생이 주도하는 사회운동을 일컫는 '학생운동'. 우리나라에서는 주로 1980년대를 꼽는다. 물론 1960년 419 혁명도 학생의 손에 이룩한 것이니, 한국 현대사를 통틀어 활동했다고 할 수 있겠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학생운동에는 단연코 '68혁명'을 이끌어낸 프랑스학생운동이 있을 것이다. 프랑스뿐만 아니라 세계 역사를 뒤흔든 사회변혁운동이었다. 


일본학생운동도 이에 뒤쳐지지 않는다. 그 자체로 수많은 이야기거리를 양산해냈다는 측면에서는 단연 최고일 것이다. 우리 귀에도 익숙한 '전공투'나 '연합적군'은 많은 문화콘텐츠를 통해 소개·소비되었다. 일본이 자랑하는 세계적인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상실의 시대> <1Q84> 등 소설로 이것들을 다뤄 알게 된 측면도 크다. 그 자신이 1960년대 전공투 세대였던 것이다. 


일본학생운동, 전공투 하면 생각나는 게 이루 말할 수 없는 '과격함'이다. 1970년대 변질되어 끔찍한 일들을 저질렀기 때문이겠지만, 기본적으로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고 각목을 든 채 화염병을 던지며 가차없이 부숴버리는 이미지가 강한 것이다. 그 시작은 어땠을까. 매스컴이 만들어냈을 게 분명한 그 이미지 이면의 진짜 모습은 어떨까. 


<나의 1960년대>(돌베개)는 전공투를 만든 장본인 중 하나이자 일본 전공투를 상징하는 이들 중 하나인 '야마모토 요시타카'라는 재야 과학사가가 과거를 회상하며 쓴 일본 전공투 운동사이다. 그런 한편, 전공투가 궁극적으로 반대하고 투쟁했던 메이지 유신 이래 국책으로 추진되어 온 일본의 과학기술을 비판적으로 들여다본 인문과학비평서이기도 하다. 얼핏 전혀 관련 없을 것 같은 일본 전공투와 일본 과학기술, 이 둘을 하나로 엮어 흔하디 흔한 '옛 이야기' 따위를 타파한다. 


일련의 전공투 신화 회상


전공투, 전국학생공동투쟁회의의 약칭이다. 저자가 속했던 도쿄대와 니혼대, 즉 일본 최고 최대의 국립 사립 대학이 주축이 되었고, 역사에 길이남을 투쟁으로 이름을 드높였다. 1968년에 시작되었는데, 사실 그 이전 학생운동에 뿌리를 두고 있다. 저자는 그래서인지 대학 입학 직후인 1960년 '안보 투쟁'부터 시작된다. 동시에 1960년대 당시 일본의 비상식적 '풍요사회', 그 기원을 파고들기 시작한다. 


투쟁은 계속되어 62년 대학관리법 반대 투쟁, 66년 베트남반전회의 활동, 68년 미군 야전병원 철거 투쟁, 그리고 68년 대망의 도쿄대 투쟁까지 이어진다. 반미, 반대학, 반전을 거쳐 '반체제'까지 다다른다. 일본을 대표하는 대학의 학생들이 펼치는 '반체제' 투쟁의 파급력은 남달랐을 것이다. 더군다나 전공투운동은 이전 학생운동과는 차원이 다른 전략 전술적 움직임으로 긴 투쟁을 예고했다. 


그 정점에 있는 것이 저자가 책에서 자세히 설명하는 '야스다강당 점거 봉쇄 투쟁'이다. 야스다강당은 도쿄대의 권위를 상징하는 건물로, 대학 입장에서는 절대 그대로 놔둘 수 없었을 것이다. 1968년 6월에 시작된 야스다강당 투쟁은 이듬해 1월까지 계속되지만, 결국 대학 당국의 무력진압으로 무너진다. 그렇게 도쿄대 전공투는 해체되었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전공투는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것이다. 


일련의 전공투 신화는 어느 정도는 누구나 알 만한 내용이고 이 책이 아닌 어디에라도 조금만 찾아보면 나올 내용이다. 그래서 이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가 더 커진다. 그들이 그런 투쟁을 한 이유 말이다. 그건 당시 일본의 경제성장과 그를 뒷받침한 과학기술의 이면과 큰 관련이 있다. 50년이 지난 지금과도 결코 적지 않은 연관성을 띈다. 아니, 저자가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바는 다름 아닌 지금이겠다. 작금 일본의 모습과 나아가려는 방향이 50년 전 그때를 연상시키고도 남기 때문이다. 


일본의 경제성장, 그 이면


일본의 과학기술 찬양은 메이지유신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서양의 선진문물에 충격을 받고 '양이'를 기치로 내세운 만큼 어찌 보면 당연한 이야기겠다. 저자는 이후에도 2차 대전이 한창일 때와 전후 1960년대가 과학기술 찬양의 붐이 일던 시기였다고 말한다. 전쟁 시기는 그렇다 치고, 1960년대가 문제다. 그 이면에 도사리고 있는 무시무시하지만 터무니 없는 면모가 추악하다는 것이다. 


일본은 2차 대전 전범 국가임에도 제대로 된 반성 따윈 없고 자신들이 전쟁에서 패한 이유를 낮은 수준의 과학기술로 돌렸다다. 다만 전쟁 직후에 그런 기조를 드러내놓고 펼칠 순 없어 은근슬쩍 시행에 옮길 뿐이었다. 그렇게 1960년대 과학기술 붐이 인다. 곧 경제성장에 직결되고, 평화니 민주주의니 하는 겉만 번지르르한 전후 세계적 기조를 채택해 진짜 모습을 가린다. 저자는 다름 아닌 그런 기조의 최전선에서 만들어지고 유지되어온 도쿄대 이학부 학생이었던 것이다. 


정작 문제는 그게 아니다. 저자는 더 들어가 일본 과학기술의 이면까지도 파헤치는데, 거기에 '군(軍)'이 있었다. 사실 2차 대전이 일어나기도 한참 전부터 일본의 과학기술은 '군에 의해서' 만들어지다시피 했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전쟁 시기를 지나 전후 시기가 왔음에도, 군에 의한 과학기술은 여전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다만 1960년대는 경제성장의 시대이니 만큼, 자본주의 첨병인 기업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즉, 군산학 합동 메커니즘이다. 


결국 일본의 전쟁 DNA는 전후 1960년에도 계속되는 건 물론이거니와, 겉을 과학기술, 경제성장, 평화, 민주주의 따위로 칠해 진짜 모습을 알 수 없게 해놓은 것이다. 당시 전공투가 문제 삼은 건 다름 아닌 일본의 진짜 모습이었다. 그건 그 진짜 모습을 지탱하는 많은 것들 중 하나인 도쿄대 학생 자신들을 부정함에 다름 없었다. 나라 자체를 부정하고, 자신까지 부정하는 건 그 얼마나 어렵고 두렵고 외로운 일이겠는가. 


50년이 지나 반복되는 총력전체제


50년이 지난 지금, 일본의 움직임이 그때 그 시절을 연상케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이른바 일본 전체를 끌어들이는 '총력전체제'를 다시금 가동하려는 것이다. 밑바닥에 다다른 경제 상황을 빗대 경제성장을 말하고, 한편에서는 평화와 민주주의를 말함과 동시에 전쟁을 외치는 모습이 보인다. 결정적으로 3.11 대참사가 일어났음에도 반성 없이 그 원인을 낮은 과학기술로 돌릴 뿐인 것이다. 이쯤 되면 데자뷔 현상이다. 


아무리 역사는 돌고 돈다지만, 역사는 반복된다지만 이런 식이면 곤란하지 않을까. 일본의 경제성장 그 이면의 한 편에 다름 아닌 '전쟁 특수'가 도사리고 있다는 건 잘 알고 있는 사항이겠다. 일본은 다시금 그 길로 나아가려는 것인가? 


저자는 일본의 작금 모습을 살피고는 '그렇다'고 판단했다. 그러곤 그동안 입을 열지 않았던 50년 전 전공투 이야기를 돌아보며, 자신들이 투쟁한 이유를 상세히 펼쳐놓는다. 한편 과학사가로서의 특기와 이점을 잘 살려 투쟁 이유와 맞물린다. 우린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를 듣는 한편, 자신도 모르게 의미심장한 주장의 한복판에 서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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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드니 빌뇌브 감독의 <그을린 사랑>


포스터의 홍보문구가 이토록 와닿는 경우가 많지 않다. 이 영화는 '모든 것을 다 갖춘 영화'이자 '한 여인의 위대한 여정'을 그렸다. ⓒ티캐스트


완벽에 가까운 영화를 보고 난 후 느끼는 참혹함을 아는가? 그때만큼은 다른 어떤 영화도 보지 못할 것 같은 두려움이 엄습한다. 적어도 그때만큼은 '이제 영화를 졸업해야 하는 건가?' 같은 황당무계한 생각이 드는 것이다. 영화를 좋아하고 즐겨보는 이라면 한 번쯤 겪어봤을 테다. 


드니 빌뇌브 감독의 <그을린 사랑>이 나에게 그런 경험을 선사해주었다. 일찍이 느껴보지 못한 당혹감인데, 다름 아닌 감독의 면을 보니 어느 정도 이해가 되었다. 드니 빌뇌브는 불과 서른한 살의 나이에 첫 장편영화를 내놓는다. 전 세계적인 호평 일색. 이어 내놓은 작품들도 마찬가지. 2010년에 내놓은 <그을린 사랑>부터 본격적으로 국내에도 소개된다. 하나 같이 명감독의 걸작들이다.


2010년대에 <프리즈너스> <시카리오: 암살자의 도시> <컨택트>는 전 세계적으로 큰 호평을 받았고 슬슬 흥행에도 시동을 거는 느낌이다. 올해 말에는 고전 SF 명작 <블레이드 러너>의 속편 <블레이드 러너 2049>를 35년 만에 내놓아 정점을 맞이할 예정이다. 그럼에도 <그을린 사랑>이 준 충격과 전율은 무엇도 따라하지 못할 그 영화만의 것이 아니겠는가, 생각한다. 


역사와 전쟁과 운명의 아픔조차 품어내는 한 여인


일개 개인이 맞서기에는 너무나도 큰 것들, 역사와 전쟁과 운명. 그러나 이 영화에서 한 여인 나왈 마르완은 자신의 모든 걸 걸고 맞선다. 아니, 품는다. ⓒ티캐스트



영화의 시작은 황당하고, 이어지는 전개는 조금 지루하다. 진도가 팍팍 빠지진 않는 듯하다. 그럼에도 시종일관 눈을 떼지 못하는 건, 기막힌 연출력과 꽉 짜인 각본에 있는 것 같다. 쌍둥이 남매 잔느와 시몽, 공증인에게 어머니 나왈 마르완의 유언을 듣는다. 죽은 줄 알았던 아버지와 그 존재도 모르는 형제를 찾아 자신의 편지를 전하라는 것. 그전까진 절대 장례를 치르지 말라는 유언이자 약속이었다. 쌍둥이는 어머니의 뿌리와 흔적을 찾아 중동으로 향한다. 


한편 나왈 마르완의 충격적 옛일을 들여다본다. 중동에서 기독교와 회교도의 전쟁이 한창인 1970년대, 기독교 집안의 딸 나왈, 회교도 집안의 아들과 사랑에 빠진다. 나왈 집안의 오빠들은 절대 용서받지 못할 그 사랑의 댓가로 그를 죽이고 그녀 또한 죽이려 한다. 할머니의 중재로 살아난 나왈, 하지만 그녀는 그의 아기를 임신한 상태다. 그 또한 용서받지 못할 대죄, 결국 아기는 태어나자마자 고아원으로 보내진다. 그녀는 아기를 반드시 찾을 것을 다짐하고 약속한다. 


도시에 있는 친척네로 보내진 나왈, 그곳에서 기독교도임에도 불구하고 회교도 난민들의 입장에 서서 활동한다. 이내 탈출해 목숨을 걸고 아기를 찾아나서는데, 끝내 찾지 못한다. 돌아오는 길, 회교도인 척 하고 차를 얻어탄다. 하지만 기독교도 민병대에 습격당해 몰살 당하고, 나왈은 다시 기독교도로 돌아와 홀로 살아남는다. 여기서 나왈은 결심한 듯하다. 기독교를 용서치 않겠노라고. 


계속되는 비극의 고리는 그녀를 놔주지 않는다. 이미 충분히 참혹한 비극이 그녀를 찾아 왔다고 생각했지만, 더욱 더 원형적이고 원초적이며 지옥불 같은 비극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다. 파괴적인 역사와 전쟁의 소용돌이가 주는 아픔보다 그녀를 더욱 옥죄는 건 인간의 힘으론 털 끝 하나도 어찌할 수 없는 운명의 소용돌이다. 그럼에도 우린 역사와 전쟁과 운명의 아픔조차 품어내는 한 여인을 볼 수 있다. 


사랑과 약속에서 비롯되는 비극의 고리 끊기


끊임없이 계속될 것이 분명한 비극을 마주하고, 사랑과 약속이라는 더없이 순결무구하고 위대한 것들과 맹세한 바를 지키고자 한다. ⓒ티캐스트



영화는 대번에 오이디푸스 신화를 우리 앞에 불러온다. 왕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하리라는 신탁 때문에 버려지는 오이디푸스. 우여곡절 끝에 살아남아 이웃 나라의 왕자로 성장해 결국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한다. 이 영화의 주인공 중 한 명이 오이디푸스의 현현이라 하겠다. 


고로 이 영화를 역대급 반전이 주는 쾌감과 감동과 전율로 포장하는 건 너무나도 쉬운 일이다. 하지만 굳이 그럴 이유가 없는 건, 그렇게 하지 않아야 하는 건 과정에서 보여주는 한 여인의 위대함 때문이리라. 오이디푸스가 아닌 오이디푸스의 어머니에게로 시선을 돌려야 한다. 결과의 반전이 아닌, 과정의 서사에 천착해야 한다. 


그녀에게서 '비극의 고리 끊기'의 한 단면을 볼 수 있다. 형용할 수 없이 넓고 깊은 품과 지극한 자기 희생이 바탕되지 않으면 절대로 불가능한 이 결단은, 영화 <똥파리> <우리를 침범하는 것들> 등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엿볼 수 있다. 하지만 이 여인은 차원을 달리하는바, 인간의 존재가치와 존엄성 파괴의 한복판에서 이루어낸 업적이다. 


그 모든 건 태초의 '사랑'과 사랑에의 '약속'에서 비롯된다. 반드시 널 찾아내 내 사랑을 줄 것을 약속한 것이다. 중심에 이 두 요소를 자리잡고는 그 어떤 것에도 흔들리지 않고 나아간다. 일찍이 이런 사랑은 목격한 적이 없다. 이리도 숭악한 것들 사이에 피어난 이리도 숭고한 사랑의 꽃을 본 적이 없다. 그렇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사랑의 주체도 객체도 당사자도 되기 싫다. 너무 그을린 사랑은 너무 아프다. 


포용, 조화, 그리고 함께 하기


무조건적인 끌어안음, 그리고 역시 무조건적인 함께 하기. 이는 영웅이라면 할 수 없고, 무명의 개인에게는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려 있다. ⓒ티캐스트



영화는 다름 아닌 인간 역사의 가장 오래되고 가장 치열한 전쟁을 배경으로 한다. 혹자가 보기에는 가장 쓸데 없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종교'가 그것인데, 종교라고 하는 숭고한 존재가 내뿜는 잔혹한 파멸을 이해할 수 없다. 그 안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빨려들어가 허무하게 존재를 말살당한다. 나왈은 사랑과 약속에의 '약속'으로 종교마저 헤쳐나간다. 자신이 자신일 수 있게 하는 집안과 가문과 종족과 나라의 기반인 종교를 저멀리 치워버리는 것이다. 그래야만 그나마 나아갈 수 있다. 


그렇게 그녀는 누군가에게는 입에도 올리기 싫은 비겁자가 되고, 누군가에게는 치를 떠는 가해자가 되며, 누군가에게는 가장 잔혹한 짓의 대상이 되는 피해자가 된다. 그렇게 될 걸 모를리 없지만, 이 역사와 전쟁의 한복판에 던져진 일개 개인으로서 '살아남는' 방법이 그것밖에 없었을 것이다. 자신을 포함해 모든 걸 내려놓고 버림으로써 비로소 얻는 생존. 그리고 앞으로 얻게 될 날을 손꼽게 될 사랑. 


그녀가 궁극적인 얻고자 했던 건 무얼까. 감독이 말하고자 했던 건 무얼까. 나왈이 끝의 끝까지 손에 쥔 채 놓지 않았던 생존과 사랑과 약속으로 얻고자 했던 게 도대체 무엇일까. 포용, 조화, 함께 하기가 그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녀가 받아들였는데 어느 누가 받아들이지 않을 쏘냐. 그녀가 어울리고자 하는데 어느 누가 엇나가려 하겠는가. 그녀가 함께 하길 바라는데 어느 누가 등을 돌리겠는가 말이다. 


결국 영화는 수천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종교 대립과 전쟁을 비판하는 방법론으로, 한 여인의 파란만장하고 기가 막히고 잔혹하기 그지 없는 인생사를 택한 것이다. 자신의 모든 것이라 할 수 있는 종교와 자신 자체를 저버리면서까지 지켜낸 것을 빗대어, 종교 대립과 전쟁도 그만둘 수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아울러 영웅과는 거리가 한참 먼 일개 연약한 인간이 이토록 위대할 수 있구나를 말하며, 그런 인간도 행할 수 있는 포용과 조화와 함께 하기를 한 집단, 한 종족, 한 나라가 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야말로 완벽에 가장 가까운 영화 중 하나다. 영화 따위가 이런 깨달음을 주고 이런 메시지를 던질 수 있다는 걸 눈앞에서 목격하고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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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크리스토퍼 놀란의 <덩케르크>


나오는 작품마다 끝없는 기대를 불러일으킴과 동시에 그에 충족하는 작품을 들고 나오는 몇 안 되는 감독 크리스토퍼 놀란의 신작 <덩케르크>. ⓒ워너브라더스코리아



크리스토퍼 놀란은 작가주의 감독이 아니다. 분명 그의 영화엔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와 보여주고자 하는 바가 명명백백하게 담겨 있지만, 많은 부분들이 영화를 만드는 이와 영화를 보는 이에게 맞춰져 있는 듯하다. 영화 산업에 종사하는 이 중 하나로서, 놀란은 굉장히 사려 깊은 사람이라 할 수 있겠다. 


그래서 그의 영화들에는, 특히 그가 단독으로 각본을 맡은 영화들은 사실 이야기를 이야기답게 즐길 수 있는 요소가 많지 않다. 대신 그 빈자리를 제대로 된 영화적 감각으로 채워 모자람이 없게 한다. 배경, 촬영, 음악, 음향, 편집, 캐릭터, 상황 등 영화에는 수많은 요소들이 있지 않은가. 놀란은 누구보다 잘 활용할 줄 안다. 


그 와중에도 그는 반드시 무엇 하나를 던진다. 절대 장황하지 않게, 아주 짧은 한 문장 정도의 물음이나 명제를 우리에게 제시하는 것이다. 그게 영화 내적일 때가 더 많기에, 우린 정확히 놀란의 '이야기'보다 '영화'에 열광한다. 그의 영화를 소비하고 향유하다 보면, 자연스레 이야기가 수면 위로 올라오는 형태다. 


역사에 길이 남을 '덩케르크 철수 작전'


전쟁에서 '철수'는 곧 '패퇴'다. 불명예로 남을 게 분명하다. 하지만 '덩케르크 철수 작전'은 그 과정과 그 이후를 생각했을 때 정녕 위대한 철수다. ⓒ워너브라더스코리아



<덩케르크>는 그의 19년 경력 동안 불과 10번째 작품이다. 동시에 <미행>과 <인셉션>에 이은 3번째 단독 각본 작품이다. 그의 필모를 살펴보면 알겠지만, 그의 1번째 실화 바탕 작품이기도 하다. 사실 그의 전작들에서 어떤 작품에서도 비슷한 결을 찾을 수 없지만, 그나마 <인셉션>과 <인터스텔라>가 비슷하다 하겠다. 인간 존재를 훨씬 초월하는 상황에서의 인간을 그렸다는 점에서 말이다. 


한국에서라면 알 만한 사람이 그리 많지 않지만, 영국에서라면 모르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을 제2차 세계대전 초기의 '덩케르크 철수 작전'. <덩케르크>는 이 작전을 기반으로 한다. 제2차 세계대전 발발 후 독일군과 영프 연합군은 꽤 오래 대치만 한다. 그러던 1940년 5월 독일군의 대대적인 공격이 시작된다. 연합군은 독일군의 기만에 속아 프랑스 북동부 해안에 갇혀 포위당하고 전멸될 위기에 처한다. 그리고 다른 항구들은 모두 독일군이 점령, 덩케르크만 남은 상황이 된다. 


영화는 덩케르크만 남은 상황에서 처절한 철수작전이 시작되고 있던 시점에서 시작된다. 덩케르크에는 자그마치 영국군과 프랑스군이 자그마치 34여 만 명이 남은 상황, 어떻게 해서든 영국으로 철수해야 한다. 이제 곧 독일군의 총공세가 시작될 상황이었다. 남아 있는 이들만으로는 절대 철수가 불가능한대, 어떻게 철수할 것인가?


윈스턴 처칠 수상은 그 유명한 연설, “우리는 자신감과 힘을 길러내어 하늘에서 싸울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영국을 지켜낼 것입니다. 우리는 해변에서 싸울 것입니다. 우리는 상륙지점에서 싸울 것입니다. 우리는 들판에서, 또 거리에서 싸울 것입니다. 우리는 언덕에서 싸울 것입니다. 우리는 절대로 항복하지 않을 것입니다”를 덩케르크 철수 작전이 성공한 직후 했다고 한다. 


놀란은 이 작전에서 영화의 모티브를 얻었을 게 분명하지만, 다름 아닌 이 연설에서 영화의 얼개를 얻었을 게 분명하다. 영프 연합군 보병들의 생존 투쟁을 그린 육지 해안에서의 일주일, 영국 어부들의 목숨 건 연합군 철수 도움을 그린 바다에서의 하루, 영국 공군의 독일 공군과의 필사적인 전투를 그린 하늘에서의 한 시간. 영화가 덩케르크 철수 작전을 바라본 시간과 공간과 사람들이다. 여기에 이 영화의 모든 것이 담겨 있다. 


전쟁과 재난의 상관 관계


<덩케르크>는 전쟁영화의 꼴을 한 재난영화다. 전쟁 자체가 재난이라는 말이기도 할 것이다. 재난은 전쟁의 비인간적인 면모를 부각시키기 위한 역수단이다. ⓒ워너브라더스코리아



<덩케르크>를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마디씩 했음직한, '이 영화는 전쟁영화가 아니다. 재난영화다'. 누구보다 전쟁영화를 많이 봤다고 자부할 수 있는 필자의 눈에도 완벽한 재난생존영화 그 자체였다. 대부분의 전쟁영화는 '전쟁'이라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엄연히 실제해 눈에 보이고 예상이 가능한 위협을 주는 상황 하에 놓인 여러 인간 군상을 말하고자 한다. 아니면 부조리하고 무의미한 '전쟁' 그 자체를 논하거나. 


반면 이 영화는 도무지 예측불가능하고 예외없이 무차별적이며 상황은 미시적으로 보여주지만 상황에 처한 인간들은 거시적으로 보여주는 등 전형적이고 실제적인 재난재해의 무서움을 역설한다. 보병들의 육지 해안에서의 생존 투쟁이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데, 오히려 결국 말하고자 하는 건 재난재해가 아닌 전쟁이 아닌가 싶다. 전쟁을 수단으로 재난을 보여주고, 다시 재난을 역수단으로 전쟁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전쟁에 처한 말단 병사들의 생각(집에 가고 싶다)과 행동(그저 살고 싶을 뿐)이 재난재해에 처한 사람과 똑같다고 말함으로써, 전쟁의 비인간적이고 무차별적인 면모를 부각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 와중에 영국의 일반인 어부가 목숨을 걸어가면서 지옥이 펼쳐지는 덩케르크로 향하여 '아이들'을 구하고자 하는 마음이, 전쟁의 비인간성을 폭로하는 데 크게 작용하고 있다. 


너무나도 휴머니즘적인 요소들의 향연, 자칫 감상적인 전쟁으로서의 역주행 가능성을 놀란은 한스 짐머의 음악으로 완전히 급반전 시킨다. 신디사이저를 이용해 귀는 물론 가슴을 꾸준히 묵직하게 짓누르는 음악으로 생존 투쟁과 죽음의 한복판의 전장에 몰입하게 만드는 것이다. '여기는 전쟁의 한 가운데다'라는 걸 깊이 새길 수밖에 없게 만드는 음악들, 이 영화의 태반을 차지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비인간적인 전쟁을 이기는 건 인간적인 숭고함


결국 '인간'이다. 가장 무자비하고 비인간적인 폭력인 전쟁 앞에서도 무너지지 않고 오히려 숭고함을 더하는 인간이란... <덩케르크>를 보면 알 수 있다. ⓒ워너브라더스코리아



전쟁의 비인간성을 폭로함과 동시에 인간 존재를 부각시키고자 한 게 <덩케르크>의 목표인 듯하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그저 철수만 기다리고 있는 수많은 이름 없는 연합군 병사들의 겉모습과 툭툭 던지는 말엔 한없는 자기혐오의 그림자가 어려 있다. 그들은 자타공인 패전병이기 때문이다. 


반면 독일군은 총소리, 대포소리, 폭탄소리로만 대변될 뿐 그 모습조차 잘 찾아볼 수 없다. 이는 재난재해에 빗댈 정도의 비인간적이고 무차별적인 전쟁의 면면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처참할 정도로 힘없는 연합군에 반해 당시 최강최악의 힘을 자랑하는 독일군의 대단함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철수할 수밖에 없는 상황 하에서 철수하는 자의 비참함과 살고 싶어하는 자의 비애감을 동시에 보여준다. 이 극대화된 모순의 자장 안에서 '철수'가 '패퇴' 아닌 '생존'으로 이어진다. 곧 '감성'이 '이성'으로 '감성적인 승화'를 이룩하는 순간이다. 질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든 건, 생존 투쟁을 한 이들이 아닌 덩케르크에서는 볼 수도 없는 이들이다. 그런 사실상의 사면초가 상황에서 살아 돌아온 건 위대한 승리라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영화는 그런 면면들까지도 우리가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게, 친절하다면 친절하게 보여준다. 비인간적인 전쟁을 이기는 건, 더욱 비인간적인 무기와 역시 철두철미하게 비인간적인 작전이 아닌, 지극히 인간적인 숭고함이 아닌가. 영화는 그런 인간성들을 곳곳에 뿌리째 박아 놓는다. 절대 흔들리지 않는 그 뿌리들은 육지에서, 바다에서, 하늘에서 수많은 이들을 생존으로 이끈다. 영화를 보고난 후 한동안 우리의 오감은 오롯이 그곳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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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손자병법, 동양의 첫 번째 철학>


<손자병법, 동양의 첫 번째 철학> 표지 ⓒ서해문집



일본 전국시대, 전국 통일의 밑거름을 닦은 파천대마왕 오다 노부나가를 위협한 최강의 무장 '다케다 신겐'은 <손자병법 '군쟁편'>에서 유래한 '풍림화산'을 기치로 내걸고 천하를 호령했다. 뜻을 풀이하면 다음과 같다. 바람처럼 빠르게(풍), 숲처럼 고요하게(림), 불길처럼 맹렬하게(화), 산처럼 묵직하게(산). 상황에 따라 그때그때 군사를 운용하는 방법을 달리해야 한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잘 알고 있는 '풍림화산'를 비롯해, 대중적으로 '손자병법'하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두 가지는 '지피지기 백전백승'과 '삼십육계 줄행랑'이다. 하지만 '풍림화산'은 손자병법에 그대로 적혀 있는 반면, '지피지기 백전백승'과 '삼십육계 줄행랑'은 손자병법에 없다. 정확히는 '지피지기 백전불태'이고, 삼십육계 줄행랑은 <손자병법>이 아닌 <36계>라는 병법서에 나온다. 


이는 우리가 <손자병법>를 이해하는 데 가장 큰 영향을 끼치는 것들이지만, 잘 못 이해하거나 알고 있는 대표적인 예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사실 <손자병법> 자체에 대한 이해가 잘 못 되어 있다고 보는 게 맞다. <손자병법>을 단순히 병법서, 즉 군사를 운용하여 전쟁하는 방법에 관한 책으로만 알고 있다는 것이다. 


동양철학의 또 다른 원류, 손자 그리고 <손자병법>


<손자병법, 동양의 첫 번째 철학>(서해문집)을 지은 젋은 철학자 임건순은 손자병법이야말로 동양의 첫 번째 철학서라고 말한다. 동양을 논하기에 앞서 서양을 보자. 서양의 첫 번째 철학은 무얼까. '플라톤'이 서양철학의 출발점이라 일컬어진다. 이에 반론을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반면 동양철학, 그 중에서도 중국철학의 시작은 '제자백가'라는 여러 학자와 학파들이다. 그 중 가장 유명하면서도 많은 영향을 끼친 학자가 '공자'이고 그의 학파가 '유가'이다. 그래서 공자와 유가를 동양(중국)철학의 시작과 끝이라고들 많이 한다. 


'손자'가 낄 자리는 없어 보인다. 하지만 임건순은 공자 이전에 손자가 있었고, 그야말로 노자, 한비자 등 많은 학자와 학파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동양철학의 출발점이라고 주장한다. 노자와 한비자는 공자와 더불어 제자백가를 이룬 여섯 개의 조류 중 한 개의 시조들이다. 어찌 하여 철학서나 사상서가 아닌 병법서 따위(?)를 지은 손자가 위대한 성인들이 이룩한 철학 사상의 원류인가, 어찌 그렇게 주장할 수 있는가. 


'손자'가, <손자병법>이 중국인의 의식에 끼친 거대한 영향이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겠다. 단적으로 말해서 공자보다 손자가 중국인의 현실적·실용적 의식에 끼친 영향이 크다. 중국인의 현실적·실용적 의식은 나날이 그들의 중심 의식이 되어가고 있으니, 공자보다 손자의 영향력이 증대하고 있는 것이겠다. 손자를 다시 봐야 할 이유이다. 여담으로, 2016년 후반기만 해도 '손자병법' 관련 책이 쏟아졌는데, 이에 대한 반증이 아닐까 싶다. 


나아가 손자의 위업은 또 다른 면에서 빛을 발한다. 특히 동양철학의 원류라는 점에서 말이다. 정확히는 원류 중 하나. 그가 살았던 시대는 춘추시대 말. 전국시대가 시작되기 직전이다. 그는 시대의 변화를 정확히 꿰뚫고 선각자·선지자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춘추시대의 '전투'에서 전국시대의 '전쟁'으로의 변화를 꿰했고, 그 기본에 '국가'라는 단위를 설정한 것이다. 국가의 전쟁에 필요한 건 '전략', 여기서의 전략은 전쟁의 전략이 아닌 국가 운용의 전략이다. 그렇다. 그가 위대한 가장 큰 이유이자 우리가 손자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부분이 바로 이 부분, '국가 운용'이다. 그는 전쟁을 치름에 있어, 소규모 전투, 대규모 전쟁, 나아가 경제, 군사, 문화, 정치, 외교를 아우르는 국가의 운용 전략까지 생각한 최초의 인물인 것이다.


흔히 손자를 전쟁의 신이자 전쟁광으로 아는데, 그 또한 잘 못 인식하고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엄연히 '전쟁의 신'은 맞지만(그 정도로 전쟁에 관련된 모든 것을 완벽히 습득하고 인식하고 있다는 뜻이다) '전쟁광'은 절대 아니라는 것이다. '국가로서의 전략'에서 파생된 개념인데, 국가 운용이 가장 중요한 만큼 전쟁은 하지 않고 이기는 게 가장 좋은 것이고 전쟁을 하게 되더라도 신중하고 또 신중하고 또 조심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 부분을 인지하고 이해하지 못하면 <손자병법>과 손자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과 같다. 


너무 완벽한 인간, 손자


선각자·선지자로서의 손자, 철학자·사상가로서의 손자, 분명 우리가 생각해보지 못한 손자다. 전투·전쟁의 신으로서의 소인(小人) 손자가 아닌 대인(大人)으로서의 손자 말이다. 저자는 순자, 묵자, 오기 등 역사에 길이 빛날 위대한 이들이지만 세간에 잘 알려지지 않았거나 잘 못 알려진 이들을 발굴해냈는데, 이번엔 손자를 발굴해냈다. 


문제는 너무 완벽한 인간이 된 손자다. 저자는 손자를 전쟁광이자 전쟁신에서 끄집어 내 다양한 자리에 앉힌다. 춘추시대 말기에 활약하며 전국시대의 시작을 예견하며 전쟁의 패러다임을 바꿔버린 위대한 선각자이자 선지자. 항구적인 안전과 생존을 지키는 것이 모든 행위의 시작이자 이유여야 한다는 이론을 정립시키며 노자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친 철학자. 철저한 공리주의와 실용정신이 지배하는 중국, 이득이 따르는 길을 취하려 하고 당장 이야기되는 것부터 논의를 시작하고자 하는 중국인, 이 가치관과 사유의 뿌리인 사상가. 


이 완벽한 현자이자 거목을 설명하기 위해서 저자는 '중언부언'을 선택한다. 500쪽이 넘는 긴 분량 안에서, 했던 말을 무한반복함으로서 손자의 위대함을 설파한다. 족히 수백 번은 나왔음직한 '국가의 전략' '신전론'과 '무슨 짓을 해서든 이겨라'는 주문, 그리고 '고구려 이야기'까지. 때론 위대함으로 그의 위대함을 설파하기도 한다. 


분명 저자는 '계' '지' '무' '세' 등 손자가 내세우는 주요 이론들을 나눠 설명하고 있는데, 어찌 이리도 중언부언을 하고 있는지 알 도리가 없다. 너무나 중요한 개념들인 건 알겠지만, 책 중반 이후가 넘어가면 중간 중간 건너뛰게 되는 불상사를 겪는다. 문단 자체가 이전에 말했던 말인 경우가 점점 많아 지는 것이다. 작은 챕터 하나 전체를 큰 챕터를 요약하는 데 할애하는 건, 이 책이 강의를 기반으로 한 것이기에 봐줄 만하다. 


시도 때도 없이 나오는 고구려 이야기의 예는 얼핏 이해하기 힘들다. 수많은 예 중에서 하필 고구려였을까. 고구려가 <손자병법>을 완벽히 이해해 전쟁을 수행한 경우가 많다고 하더라도, 이토록 계속해서 예로 드는 경우는 거의 없는데 말이다. 실제 <손자병법>에 이토록 무한히 반복되는 주장과 주문이 있었을까. 도대체 <손자병법>에는 어떤 말들이 있을까. 과연 저자의 생각이 맞을까. 글이 아닌 말이 기반인 강의를 옮긴 만큼 어쩔 수 없었던 부분일까, 고구려 이야기처럼 누차 강조함으로써 주장이나 설파에 힘을 실으려 했던 것일까. 여하튼 이 책에는 <손자병법>을 읽어보고 싶게 하는 묘한 힘이 있다. 


이 책을 손자의 '전략'으로 바라보자


이실직고 말하되, <손자병법>을 거들떠 본 적도 없다. 그런 깜냥으로 <손자병법>과 손자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시도하려는 저자와 책에 이런 식의 비판은 가소로울 수 있다. 해석에 대한 비판이 아닌 책 자체에 대한 비판이었던 바, 막돼먹은 짓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그만큼 나는 <손자병법>을 잘 모르고, 아마도 우리는 <손자병법>을 잘 모를 게 확실하다. 거기에 해설서를 드리 밀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아마 절대 <손자병법>을 찾아보려 하지 않을 거다. 저자가 노린 게 바로 그 점이 아니었을까. <손자병법>을 찾아보게끔 하려는 의도가 저변에 깔려 있지 않았을까. <손자병법>을 잘 모르거니와 잘 못 이해하고 있는 이에게, 새로운 해석까지 전하려면 어쩔 수 없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손자가 생각하는 전쟁이 단순한, 당면한 전쟁 그 이상의 '국가로서의 전쟁'이니 만큼, 저자가 생각하는 책읽기는 단순한, 당면한 책읽기 그 이상의 '원전 찾아 읽기'일 것 같다. 이 생각은 아니 이 전략은 여타 고전 해설서가 지향하는 '원전 찾아 읽지 않아도 돼, 이 책만 읽어도 충분해.'와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저자가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노력과 열정을 보다듬어 줄 수 있는 통찰력'을 이런 식으로 발휘해보았다. <손자병법>과 손자, 그리고 고전을 통한 현재의 삶을 향한 저자의 노력과 열정, 그리고 통찰력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는 말을 하고 싶다. 남과 다른 고전 이야기를 부탁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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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대표 소설 읽기] <어둠의 혼>



<어둠의 혼> 표지 ⓒ아시아



남북 분단은 한국 근현대사를 규정하는 가장 큰 줄기이다. 해방의 기쁨을 제대로 맞이하기도 전에 찾아 왔기 때문에, 오히려 해방보다 더 크고 깊게 그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을 것이다. 그 이면에는 단연 '이데올로기'가 자리 잡고 있다. 남한과 북한, 미국과 소련(중국), 우익과 좌익,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등에서 비롯된 이데올로기의 첨예한 대립이 한반도에서 폭발했다. 


대폭발의 결과는 분단이었고 미국과 소련 정권은 분단된 남북을 손아귀에 쥐고 완전 고착화를 실행에 옮기려 했으며 남한과 북한 정권은 그 대치 상태를 이용해 독재 체제를 구축하였다. 그러고는 문제의 핵심을 '분단'에서 다른 것으로 옮기려 했다. 이런 상황을 지식인, 소설가들이 그냥 지나칠 수 없었느니, 곧 '분단 소설'의 탄생이다. 


분단 소설이라 하면 굉장히 고루하고 진부하다고 생각할 수 있겠다. 그 초점이 분단을 그리는 '소설'에 있든 소설에서의 '분단'에 있든 지금에 와서는 그러지 않다고 말 할 수 없겠지만, 우리가 발을 딛고 선 현실이 여전히 분단이기 때문에 그 이상의 가치가 있을 것이다. 감히 말하지만, 남북 분단이 한국 근현대사를 규정하는 가장 큰 줄기인 만큼, 분단 소설 또한 한국 근현대 문학사에서 가장 큰 줄기라고 생각한다. 


10대 안팎에 겪은 이데올로기의 아픔


분단 소설은 분단과 전쟁을 직접적으로 체험한 세대와 직접적이지만 간접적에 가깝게 체험한 세대, 그리고 간접적으로 체험한 세대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김원일 소설가의 <어둠의 혼>은 두 번째에 해당한다. 즉, 소설가 본인이 분단을 직접 체험하긴 했지만 체험할 당시의 나이가 많지 않았던 것이다. 아직 전쟁이 무엇인지 이데올로기가 무엇인지 정확히 인지하지 못할 10대 안팎의 나이 말이다. 


소설은 한국 전쟁이 일어나기 일 년 전인 1949년을 배경으로 한다. 주인공인 갑해의 시점으로 보자면, 좌익 운동에 가담했던 아버지가 체포되어 총살 당한 모습을 직접 목격하게 되기까지의 하루를 그렸다. 갑해는 아버지가 돌아가신다는 게 슬플 뿐 당장 해결해야 할 지독한 배고픔에 괴롭다. 그는 아버지가 왜 좌익 활동을 하게 되었는지, 무엇을 하려고 했는지 알지 못하고 궁금하지도 않다. 현실이 괴로울 뿐이다. 


분단 소설이라 하면 으레 분단을 직시하고 안타까워하며 그에 대한 어떤 메시지를 던져야 할 것이다. 노동 소설이 노동자들의 억울함을 대변하는 것처럼, 농촌 소설이 무너져 가는 농촌과 화려해지기만 하는 도시를 대비해 어떤 메시지를 던져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반면 이 소설 <어둠의 혼>은 아이의 시선을, 아이의 상황을 따라 '모르쇠'로 일관한다. 다만 현 시대에 대한 부당함을 드러낸다. 이는 이데올로기니 전쟁이니 하는 것들 때문에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까지 불안과 공포에 떨게 하는 시대를 고발하는 것이다. 


이 소설이 가지는 기막힌 문학적 균형


그렇다면 아버지가 갑해에게 했던 말은 무엇인가? 빨갱이고 좌익이고 알지 못하지만 그 일을 한 아버지가 죽어야만 한다면, 아버지가 말씀하셨던 '모두에게 행복과 평등을 가져다주는 길'은 무엇이냐 말이다. 이해할 수 없고 알 수 없는 것들 투성이인 세상이다. 작가가 본 해방 직후의 세상 또한 갑해와 다르지 않은 것이다. 그 알 수 없는 두려움. 


소설의 마지막, 갑해는 두려움과 함께 어떤 깨달음을 얻는다. 살아가는 데 용기를 가져야 하고 어떤 어려움과 슬픔도 이겨내야 한다는 내용의 깨달음. 이 급작스러운 희망에의 역설은 무엇인가. 이 희망이야말로 이 소설이 가지는 기막힌 문학적 균형이며, 이 소설만이 던질 수 있는 메시지이다. 


이는 '아이의 시선'이라는 한 뿌리에서 시작한다. 아이가 아무것도 모르는 무의 상태이기에 쉽게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것이고, 그러하기에 시대에 휩쓸리지 않고 또 자기 무력감이나 자신을 망치는 신념에 휘둘리지 않고 앞으로 나가며 성장할 수 있는 것이다. 그야말로 반전에 가까운 배치이다. 절망에서 갑자기 쏟아 오른 희망에의 메시지. 하지만 무의 상태이기에 절망에서 희망을 쉽게 낚아 올릴 수 있다. 


아이의 시선은 작가의 어쩔 수 없는 의도이기도 했던 것 같다. 소설이 쓰인 1970년대는 서슬 퍼런 독재 시대였다. 직접적으로 분단을 이데올로기를 전쟁을 이야기할 수 없었다. 그러하기에 어른도 아닌 아이의 시선을 통해 우회적으로 메시지를 전달하려 했던 게 아닐까. 그 탁월한 선택은 40년이 훌쩍 지난 지금까지 생생하게 남아 당시의 상황을 전해주고 있다. 


아시아 출판사에서 후원하는 '한국 대표 소설 읽기'의 일환입니다. 

'바이링궐 에디션 한국 대표 소설'과 함께 앞으로 계속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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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수양제>



<수양제> ⓒ역사비평사



민중의 역사, 그 중요성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역사를 보면 거의 최고 통치자, 즉 일인자에 따라 천하가 좌지우지 되곤 했다. 그건 민주주의가 확립된 현대에 와서도 마찬가지 아닌가? 그만큼 그 사람들의 사상과 행위가 중요하다. '최고'와 '최악' 나뉘기 마련이다. 최고의 사상과 행위는 본받고, 최악의 사상과 행위는 다시 행해지지 말아야 함은 당연하다. 하지만 최악은 항시 반복되는 것 같다. 


중국 역사상 최악의 일인자는 누구일까? 수도 없이 많겠지만, 주로 왕조의 마지막을 함께한 이들일 것이다. 예를 들면 하나라 걸왕, 주나라 주왕, 당나라 애제, 청나라 푸이 등이 있다. 물론 오롯이 이들의 잘못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 이전부터 이미 멸망으로의 길을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을 능가하는 인물들도 있다. 그 자신의 잘못으로 나라를 멸망 시켰다고 할 수 있겠다. 대표적으로 진나라 시황제, 수나라 양제가 있다. 진나라는 시황제가 1대 황제로 있었고 이후 3대에서 망한다. 수나라도 역시 3대에서 망하는데, 양제는 2대 황제였다. 이 두 나라가 멸망하는 데에는 이 두 황제가 지극히 큰 역할을 하였다. 이 중에서도 특히 수양제는 아주 구체적인 일들을 통해 멸망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다. 


전쟁과 대운하에 미친 중국 최악의 폭군


일본의 저명한 학자였던 미야자키 이치사다는 바로 이 수양제를 다룬 책 <수양제>를 내놓은 바 있다. 이번에 초판본이 나온 지 50년 만에 재출간 되었다. 부제가 '전쟁과 대운하에 미친 중국 최악의 폭군'인데, 사실 이 한 문장에서 학생 때 배웠던 수양제에 대한 거의 모든 걸 알 수 있다. 말 그대로 그는 전쟁(수·고구려 전쟁)과 대운하(그리고 만리장성)에 미쳐 천하와 백성들을 돌보지 않다가 비참하게 생을 마감했을 뿐만 아니라 수나라의 명을 극도로 짧게 만든 인물이다. 그는 원래 그런 사람이었을까? 아니면 그 시대가 그로 하여금 그렇게 할 수밖에 없게끔 만들었을까? 


"주의해야 할 것은 수양제가 근본부터 악한 인물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그는 아주 평범하면서도 동시에 여러 가지 약점을 지닌 인간이었다. 그를 둘러싼 시대 환경은 사회 자체에 아무런 이상도 존재하지 않았고, 모든 사람이 각자 다투면서 권력을 숭배하고 추구하며 남용하는 세상이었다." (본문 중에서)


저자의 시선이다. 역사상 최악의 인물이라도, 모든 걸 개인에게 돌릴 수 없다는 입장이다. 그래서 저자는 책을 시작하면서 남북조 시대의 천자들을 하나하나 읊어준다. 알고 보니 하나같이 음란하고 포악하고 난폭한 천자들로 수양제 못지 않다. 100여 년간 계속된 남북조 시대에는 수양제 같은 천자가 예사로 존재했고, 아이러니하게도 중국 역사상 최고의 명군 중 하나로 칭송되는 수문제가 이를 통일했으며, 반대로 그의 아들이자 최악의 폭군인 수양제로 인해 망하게 되는 것이다. 


수양제는 도대체 무슨 짓을 저지른 것일까?


그는 도대체 무슨 짓을 저질렀을까? 위에서 말한 전쟁, 대운하, 만리장성에 대해 좀 더 살펴보자. 수양제는 수문제의 둘째 아들이었기에, 애초에 천자의 자리에 오를 수 없는 운명이었다. 하지만 황태자 폐위 음모를 꾸며 결국 형을 태자의 자리에서 끌어내리고 자신이 황태자가 된 뒤, 부친이 죽자 마침내 황제의 자리에 오른다. 싹수가 노랗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지만 인류 역사상 이런 일을 벌였던 천자들이 수도 없이 많기에 큰 오점이라고 할 순 없겠다. 


천자의 자리에 오른 후 수양제는 곧바로 운하의 개수에 착수한다. 아버지 수문제 때 축적된 막대한 재정으로 모든 면에서 펼친 적극적인 정책의 일환이었다. 뚫는 것보다 개통하고 나서가 문제였다. 대형 시연 행사를 열었는데, 배를 젓는 일에만 군인 8만여 명이, 그 가운데 장교들만 9천여 명이 동원되었다고 한다. 이 배들의 행렬 길이는 90km에 다다랐다. 가는 곳마다 지방관들은 그 많은 사람들에게 식량을 제공해야 했다. 이 행사에서 죽도록 고생하는 이들은 주로 하급 군인들이었다. 하지만 더욱더 고통스럽고 힘들었던 사람들은 다름 아닌 일반 백성이었다. 문제는 이런 행사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대운하 건설은 계속 이어진다. 전체 길이가 1,500km나 된다. 전국이 통일된 이상 누군 가는 했어야 하는 일일 수도 있지만, 거기엔 막대한 희생이 뒤따른다. 그야말로 수백 만에 이르는 백성들이 징발 되었다. 남자로도 부족해 여자까지 징발 하기에 이르렀는데, 이는 역사상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남북조 시대의 내부 대립으로 외부 침략에 대한 대비가 미약해졌다. 이에 수양제는 만리 장성 보수·개축을 실시한다. 100만 명 이상의 노동력을 사용했다. 이 또한 이후의 행렬이 어마어마했다. 사치의 끝을 보여주었다. 백성들은 물자를 징발 당하거나 운반에 동원되는 등 수많은 고통을 당했는데, 수양제와 조정 대신들은 백성의 고통과는 전혀 상관없다는 듯 행동했다고 한다. 어떤 외국 상인은 이런 말도 했다. 


"나는 중국을 여행하면서 도시, 시골 할 것 없이 가난한 사람들을 굉장히 많이 봤습니다. 그들은 입을 옷이 없는지 거의 반나체 상태였습니다. 이런 식의 장식은 아무 쓸모도 없습니다. 차라리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 주어 옷으로 만들어 입히는 편이 좋다고 생각됩니다만." (본문 중에서)


수양제 폭정의 대망을 장식하는 건 수·고구려 전쟁이다. 사실 선대 수문제 때 한 차례 맞붙은 적이 있다. 당시에는 고구려 영토에는 내딛지도 못하고 모두 철수하는 웃지 못할 상황이 연출 되었다. 이후 수양제는 대운하가 개통되자마자 남쪽의 군사들을 집결시켜 고구려 침공을 세 차례에 걸쳐 진행한다. 


첫 번째 침공은 그 유명한 을지문덕 장군에게 최악의 패배를 당한다. 우리에겐 살수대첩으로 잘 알려져 있다. 30만 명이 넘는 인원에서 3000명도 살아남지 못했으니, 1/100도 살아 오지 못한 것이다. 이처럼 최악의 패배를 당했음에도, 수양제는 이듬해 재차 침공을 실시한다. 수양제도 수양제이지만 그 이상으로 치적을 뽐내려 한 상급 장교들도 문제였다. 이들은 무슨 일이 있어도 다시 한 번 전쟁을 일으켜 지난번의 치욕을 갚고자 했다. 하지만 내부에서 크게 일어난 반란 때문에 철수해야 했다. 


이 평범하기 그지 없는 수양제는 아주 인간적이게도(?) 실패를 만회하기 위한 3차 침입을 시행한다. 이때 이미 곳곳에서 반란 및 봉기가 일어나고 있었다. 여유가 없었지만 고구려도 약화되었기에 계속해서 맞설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마침내 고구려는 항복을 청한다. 하지만 고구려 왕도 수양제도 입조하지 않는 지극히 형식적인 항복식이었다. 도대체 무엇을 위한 전쟁이었는지... 백성들만 고통 받는 전쟁이 아닌가. 


누군가를 생각나게 하는 그 이름


수양제는 결국 아랫사람에 의해 죽음을 당한다. 그리고 얼마 후 수나라는 멸망하고 만다. 아무리 당시의 환경이 만든 괴물이라고 하지만, 모든 걸 환경 탓이라고 하기엔 그가 저지른 행각이 너무 커 보인다. 혼란한 시대에 오히려 걸출한 인물이 나온다는 말도 있는데 말이다. 


"수양제는 남북조 시대의 혼란스러운 역사에 종지부를 찍었지만 낡고 고루한 천자였다. 그는 낡은 방식으로 권력을 잡고, 낡은 방식으로 그 권력을 쥐고 흔들었으며, 마지막에는 낡은 방식으로 살해 당했다." 

(본문 중에서)


저자는 역사는 끊임없는 노력에 따라 새로움을 쌓아나가는 것이라고, 노력을 게을리하면 역행 하는 일조차 생긴다고 말한다. 보수도 새로움을 쌓아나갈 수 있고, 진보도 역행 할 수 있다. 그건 이념과 상관없는, 한 시대가 마땅히 행해야 할 바가 아니겠는가. 누군가를 생각나게 하는 그 이름, 수양제. 역사는 돌고 도는 것이기에 그 미래가 보여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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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퓨리>



영화 <퓨리> 포스터 ⓒ소니픽쳐스 릴리징 월트디즈니 스튜디오 코리아(주)



<인터스텔라>의 태풍 속(북미와 중국에 이어 한국은 <인터스텔라> 전세계 3위 흥행 국가이다.)에서 살아남은 영화가 과연 존재할까 싶은 요즘, 조용하게 자신의 존재 가치를 보이고 있는 영화가 있다. 한국이 사랑해 마지 않는 배우인 '브래드 피트'를 앞세운(주연에 제작까지) 전쟁 영화 <퓨리>이다. 


하반기 기대작 중 한국 영화 <나의 독재자>, <빅매치> 해외 영화 <헝거게임> 등이 추풍낙엽처럼 나가 떨어지거나 기대 이하의 성적을 보이는 가운데, <퓨리>의 흥행은 의외다. '브래드 피트'의 힘인 것인가, 탱크 '퓨리'의 힘인 것인가. 앞의 것은 여성의, 뒤의 것은 남성의 지지를 받는다고 할 수 있는데 그렇다면 여성과 남성 모두의 마음을 훔친 것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이 영화에 다른 무엇이 존재하는가?


제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이른 1945년 독일, 최고의 무훈을 세운 주인공 '워대디'(브래드 피트)와 탱크 '퓨리'는 여전히 살아 있다. 전쟁이 계속 되고 있는 와중에 계속해서 살아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 이미 수많은 죽음을 헤쳐 나왔다는 의미다. 그들은 죽거나 전쟁이 종료될 때까지 싸울 수밖에 없는 운명이기도 하다. 영화 <퓨리>는 이 사실에 기반한다. 


알고 보면 알콩달콩 '가족 영화'?


워대디에게는 3명의 가족 같은 부하들이 같이 한다. 큰 아들 격인 부대장이자 포수 바이블. 그는 굳건한 신념과 완벽한 실력으로 워대디를 도운다. 둘째 격인 운전병 고르도. 탁월한 운전 솜씨와 책임감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셋째 격인 장전병 쿤 애스. 다혈질적이고 거칠지만 실력 하나는 최고이다. 탱크인 퓨리라는 '집'의 보호 아래에서 먹고 자고 싸우고 나아간다. 삶을 공유한다. 그들은 이 탱크를 절대적으로 믿으며, 자신들이 탱크와 함께 하는 것이 깊은 자부심을 느낀다. 나아가 '최고의 직업'이라고 까지 말한다. 


그런 그들 앞에 8주 밖에 안 된 새파란 애송이 노먼이 나타난다. 배운 거라고는 타자기 밖에 없는 그는, 아무것도 모른 채 아무런 정신적 무장 없이 전선에 배치된다. 이 막내 아들의 모습을 본 워대디. 이대로 라면 얼마 후에 죽을 것이 뻔하다. 정신 무장을 단단히 시켜야 한다. 그는 마구 때리면서 까지 하면서 노먼을 가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이려는 노력을 마다하지 않는다. 노먼은 차라리 자신을 죽이라며 고집을 부리지만, 그 때문에 눈앞에서 동료가 죽자 정신이 번쩍 든다. 독일군 죽이는 거 아무것도 아니다. 



영화 <퓨리>의 한 장면 ⓒ소니픽쳐스 릴리징 월트디즈니 스튜디오 코리아(주)



이 영화는 전쟁에 정확히 말해서 전투를 소재로 하고 있는 영화이지만 이처럼 '가족 영화'이기도 하다. 가족을 책임지기 위해서 권위적이고 강한 모습을 보이고자 하지만, 때론 눈물도 흘리는 가장 '워대디'. 지지고 볶고 티격태격 하지만 서로에 대한 믿음과 신뢰, 그리고 집(?)과 같은 탱크 퓨리에 대한 깊은 자부심까지 지니고 있는 3명의 부대원들. 그리고 새로 들어온 막내 신입을 살리기 위해 일부러 혹독하게 대하는 모습까지. 일면 노먼의 성장 영화로 보일 수 있겠지만, 가족 영화로 보이는 면모가 더 크다. 


아기자기한(?) 스케일에서 보여주는 극도의 리얼리티


이들 무적의 5인방과 퓨리는 계속해서 무훈을 드높이며 나아간다. 한번은 적진에 발이 묶인 아군 보병들을 구출해내기 위한 작전에서 멋지게 성공한다. 드넓은 평지에서 무지막지하게 포탄을 날리는 탱크들의 위용은 가히 어마어마하다. 


그렇지만 여지없이 위기에 맞닥뜨린다. 퓨리를 비롯해 다른 3대의 셔먼 탱크가 진군 하던 중, 독일군의 티거를 만난 것이다. 티거 한 대면 셔먼 탱크 4~5대를 상대할 수 있었다. 죽음을 각오한 혈투. 다른 3대의 셔먼 탱크들이 폭사 당하고, 워대디의 퓨리는 상대적으로 가볍고 이동이 용이한 셔먼 탱크의 장점을 살려 겨우 이길 수 있었다. 



영화 <퓨리>의 한 장면 ⓒ소니픽쳐스 릴리징 월트디즈니 스튜디오 코리아(주)



이번에는 <퓨리>가 남성 관객을 사로잡을 차례다. 전쟁 영화가 갖는 미덕 중 하나는 바로 '리얼리티'인데, 이 영화의 리얼리티는 탱크의 탱크에 의한 탱크를 위한 맞춤이다. 감독 '데이비드 에이어'는 2012년 작인 <엔드 오브 왓치>로 리얼리티의 극치를 보여준 바 있는데, 이번에도 그 미덕을 발휘한다. 흔히 전쟁 영화에서 보이곤 하는 어마어마한 스케일 대신, 아기자기한(?) 스케일에서의 리얼리티라 더욱 실감이 난다. 


아쉬운 점도 있지만, 이를 커버하고도 남는 연기력!


이게 전부라면 얼마나 좋을까? 오랜만에 찾아온 전쟁 영화를 색다르게 봤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 영화가 갖고 있는 결함들도 눈에 띈다. 너무나 예상 가능한 진부하기 짝이 없는 스토리 라인과 마지막 전투 때문이다. 도대체 워대디는 왜 도망가지 않았을까? 그나마 빈약한 스토리를 더욱 빈약하게 만들 수는 없기에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말할 수는 없지만, <라이언 일병 구하기>가 생각난다고 말해둔다. 노먼은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서 겁쟁이 '업햄'이 생각나고, 마지막 전투의 양상도 비슷하다. 


마지막으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 이들 5명의 '연기'다. 과거 '꽃미남 스타'에서 진정한 배우로 거듭나고 있는 브래드 피트는 제쳐 두고서 라도, 바이블 역의 샤이아 라보프는 예전 <트랜스포머>에서 보여줬던 촐싹 맞고 안정적이지 못한 면모를 완전히 지워냈다. 고르도 역의 마이클 페나는 <크래쉬>에서 인상적인 연기로 남우주연상을 휩쓸며 연기파 배우로 우쑥 선 배우답게 안정적인 연기를 보여주었다. 


쿤 애스 역의 존 번탈은 미국 최고의 드라마 <워킹데드>에서 보여줬던 모습에서 크게 달라지지 않았지만 그 자체로 워낙 잘 어울리는 역이라서 전혀 이질감 없이 다가왔다. 마지막으로 노먼 역의 로건 레먼은 그동안은 '포텐'이 터지지 않아 아쉬운 모습이었지만 이 영화에서는 자신의 매력을 유감 없이 발휘했다. 노먼 역이야말로 로건 레먼이 아니었으면 할 사람이 없을 것 같은 그런 느낌이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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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강철 폭풍 속에서>


<강철 폭풍 속에서> ⓒ뿌리와이파리

2차 세계 대전을 그린 최고의 역작 <밴드 오브 브라더스>는 10부작 드라마이다. 그 중에서 7번째 챕터는 미국군 공수부대가 숲 속에서 독일군의 대포격을 받는 장면이 주를 이룬다. 참호를 파고 무작정 버티고 지키는 미국군과 이를 뚫고자 무차별 포격을 가하는 독일군. 수많은 희생자를 낳는다.  


산전 수전 공중전까지 겪은 최고의 공수부대조차 이 무차별 포격 앞에서는 속수무책이다. 안 그래도 추위와의 싸움으로 녹초가 되어가는 그들이었다. 이 와중에 포격으로 인한 불빛과 쓰러지는 나무를 보고 어이 없는 웃음을 짓는 이가 있다. 그는 어떤 연유로 그런 웃음을 짓는 것일까. 


"파다 만 참호 안에서 생각나는 거라곤 꼬마 때 1월 4일 뿐이었다. 난 딱총이나 폭죽을 만드는 걸 즐겼다. 그걸로 흙더미나 병을 날려버리는 게 그렇게 신 날 수 없었다. 그날 포격처럼 무시무시한 광경은 내 생애 처음이었다. 조 토이 일을 알았다면 웃진 못했을 거다."


무시무시한 포격을 영상으로 보여주며 역설적으로 웃고 있는 그 모습을 잊을 수 없다. 마치 현장에 있는 듯 내 몸의 떨림이 아직도 생생하다.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 이 드라마도 이 포격 장면을 위해서 이 소설을 참고했을 것이 분명하다. 1차 세계 대전을 독일군의 시각에서 그린 에른스트 윙거의 <강철 폭풍 속에서>(뿌리와이파리)이다. 


소총, 기관총, 수류탄, 박격포 등이 쉴 새 없이 오고 가는 전장에서의 '강철 폭풍' 중에서 단연 압권은 박격포의 포격이다. 이 소설에서 이에 관한 단어와 묘사가 족히 수백 번은 나오는 듯하다. 그만큼 이 전쟁에서 포격은 반복되는 일상과 다름 아니다. 


"밤에는 사납게 빗발치는 한여름 뇌우처럼 맹렬한 포격이 머리 위로 떨어졌다. 그러고 나면 나는 아무런 근거도 없이 이상하게도 안전하다는 느낌에 빠져서, 싱싱한 풀을 풀을 푹신하게 깔아둔 침대에 누워 사방에서 포탄이 터지고 벽에서 흙모래가 줄줄 흘러내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곤 했다... 그런 순간에는 그때까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기분이 엄습했다. 짐작할 수 없을 만큼 오랜 기간 동안 낭떠러지 끝에서 격한 삶을 살아낸 뒤에 오는 엄청난 심경의 변화 같았다." (321쪽)


이 소설은 작가가 화자인 만큼 투철한 사실성을 담보하고 있다. 작가는 다름 아닌 1차 세계 대전 참전 장교이고 종전 후 훈장까지 받은 사람이다. 그가 직접 겪은 전쟁을 일기 형식으로 담아냈다. 수많은 전쟁 영화와 소설을 접한 필자의 시각으로 보자면, 이 소설의 미덕은 확실하다. 그건 정녕 전쟁 그 자체를 그렸다는 점이다. 어떤 영웅주의, 반전주의, 이데올로기, 철학 따위의 첨부 없이 전쟁 만을 있는 그대로 그려냈다. 


이런 작품을 그려내기 위해서는 일단 전쟁에 참여해 실제로 수많은 전투에 임했던 사람이어야 한다. 그리고 그 지옥에서 살아남아야 하며, 그 와중에서 철저히 객관적인 기록을 남길 수 있어야 하고, 글을 잘 써야 한다. 정치적으로 중립 또는 애매모호함을 지닌 사람이어야 한다. 이 소설의 작가는 이런 불가능할 것 같은 이력을 지닌 사람이다. 


소설은 시종일관 무심한 듯 끊임없이 반복되는 전장에서의 일상을 그린다. 포격이 오가고, 가스전이 시작되고, 소총과 기관총이 불을 뿜고, 기어코 백병전에 다다른다. 그리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수많은 사람들이 다치고 죽는다. 작가가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지경이다. 실제로 작가도 14번의 크고 작은 부상으로 죽을 고비를 몇 번이나 넘겼다고 한다. 


이 소설은 우리가 제대로 접해본 적이 없는 1차 세계 대전을 그리고 있다는 점을 차치하고라도 매우 낯설다. 미국식 영웅주의 또는 반전주의에 익숙한 지금 시대의 사람들에게는 이런 류의 글이 익숙하지 않을 것이다. 전쟁 콘텐츠에서 보여주는 사실적인 묘사는 비슷할 지 모르지만, 이렇게 전쟁 '외(外)'가 아닌 '내(內)'만 보여주는 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충실하다 못해 지독하기까지 하다. 


"그는 전쟁의 정당성을 분석하거나 그 결과의 타당성에 의문을 표시하지 않는다. 그저 자신이 참가한 전투 그 자체를, 날마다 군인의 의무를 충실히 수행하면서 그가 본 것과 그가 한 행동을 있는 그대로 묘사할 뿐이고, 그 점에서 이 작품을 따를 1차 대전 문학은 없다." (책의 뒤 표지)


이 소설에서 묘사하고 있는 무심하게 반복되는 일상은, 반복과 무심함으로 인해 너무나 당연하게 넘어가고 있지만 사실 끔찍한 '폭력'이다. 폭력으로 인해 다치고 죽고, 폭력을 사용해 상대를 다치게 하고 죽인다. 이것이 끊임없이 되풀이되다 보니 어느 순간 예전의 내가 아니게 된다. 폭력에 길들여지는 것이다. 작가가 이를 의도하고 쓴 것이라면 정녕 위대하다 할 수 있겠다. 


개인적으로 레마르크의 <서부 전선 이상없다>를 이미 접하고 <강철 폭풍 속에서>를 읽었다. 취향은 후자의 전쟁 그 자체 만을 투철하게 그린 것을 좋아하지만, 전자의 스토리텔링이 훨씬 재미있고 잘 읽혔다. 문학적 위대함은 후자가 훨씬 높을 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스토리텔링이라는 미명 하에 재미있고 잘 읽히는 문학 만을 찾는 이 시대에 이런 문학의 출간은 뜻 깊은 일이다. 최소한 '전쟁의 시대'라는 불명예 만은 피하고 싶은 21세기 초에 이런 순수 전쟁 문학은 어떻게 읽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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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히틀러에 붙이는 주석>


<히틀러에 붙이는 주석> ⓒ돌베개

'희대의 악마', '악의 화신', '악마의 자식' 이 모든 수식어들이 단 한 사람을 위한 것이라면 믿어지는가? 누구나 그 이름만 들어도 치를 떨 사람. 아돌프 히틀러다. 그는 독일을 넘어, 당대를 넘어, 인류까지 넘어, 지구 역사상 가장 유명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물론 나쁜 의미로 말이다. 


한때 히틀러를 생각하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단어가 '독재자'였다. 이후 탁월한 '연설가'였다가,  '학살자'가 되었고, 언젠가 '미치광이'가 되었다가, '불우한 사람'이 되기도 하였다. 현재는 '중요한 세계사적 인물'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이는 '히틀러'를 히틀러 개인에게 한정 시키기에는 너무나 큰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히틀러는 하나의 현상인 것이다. 


그렇다면, 히틀러에 대해 잘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어설프게 알았다가는 그 마성에 이끌려 빠져들거나, 밑도 끝도 없는 무조건적인 부정을 행사할 수가 있다. 이는 히틀러 본인이 원했던 바이기도 하다. 그가 생의 마지막에서 원했던 바는 '히틀러'에 관련된 거대한 무덤을 만들고 그 근처에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다. 일종의 복수 행위였다고 한다. 특히 독일에 대한 복수. 


이런 해석은 <히틀러에 붙이는 주석>(돌베개)의 마지막 부분에 상세히 기술되어 있다. 이 책은 제바스티안 하프너라는, 독일에서는 많은 사랑을 받는 역사 교양서 작가이지만 한국에는 최초로 소개되는 이가 35년 여 전에 지었다. 독일이 통일되려면 아직 한참이나 남은 시점이며, 히틀러가 죽은 지 33년 밖에 되지 않았다. 많은 연구가 진행되지 않았을 거라 생각되지만, 지금 읽어도 전혀 기시감이나 이질감이 느껴지지 않는 수작이다. 


히틀러에 관한 최고의 책 몇 권 중에 하나라고 전해지는 만큼 히틀러에 대한 모든 것을 담고 있지만, 굉장히 얇다. 히틀러에 관한 최고의 정전이라 평가 받는 요하임 페스트의 <히틀러 평전>(푸른숲)이 1400쪽이 넘는 양을 자랑하는 반면, 이 책은 230여 쪽이다. 그렇지만 그 안에 히틀러의 전체가 들어 있다. 저자의 탁월한 능력이라고 밖에 설명할 길이 없다. 


책은 히틀러의 생애, 성과, 성공, 오류, 실수, 범죄, 배신의 파트로 나뉘어져 있다. 히틀러의 삶에서 '성과와 성공'을 볼 수 있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이 부분만 체득해도 충분한 가치가 있을 듯하다. 평소에 절대로 볼 수 없는, 그리고 생각할 수도 없는 부분들이니 말이다. 저자에 따라 간략히 서술하자면, 히틀러는 경제 기적과 군비 확장이라는 성과를 이룩하였다. 그리고 그는 오스트리아 합병, 주데텐 지역 합병, 보헤미아와 모라비아 지역에 대한 보호령, 메멜 점령, 그리고 폴란드 점령 이후 전 유럽 대륙 지배 등의 현기증 나는 성공 행진을 이어 나갔다. 앞뒤 볼 것 없이 이 부분 만을 놓고 보면, 히틀러의 '성과와 성공'은 지극히 당연할 것이다. 


하지만 이어지는 그의 부정들은 치가 떨린다. 히틀러가 평생 희망했던 두 가지 목표가 있다. '독일의 세계 지배'와 '유대인의 근절'. 그는 민족에 기반을 둔 '큰 독일'이 홀로 종족 개선과 반유대주의를 동원하여 세계 패권을 성취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기 위해서 정복 전쟁을 벌여 유럽을 독일의 패권 하에 두고, 궁극적으로 '생존공간'인 러시아를 지배하려는 목적이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생명체의 자기 보존 충동과 지속적 보존의 욕구는 무한한데, 그에 비해 이 전체 생명의 과정이 이루어지는 공간은 유한하다. 생존공간의 이런 한계가 바로 생존전쟁을 강요한다."라고 말하며 파괴적 전쟁을 진행했다. 한편 그는 유대인이 '민족의 지식인'을 멸종시킬 뿐만 아니라 인류 전체를 멸종시키려 한다며, 전 인류가 그들을 멸종시키기 위해 힘을 합쳐야 한다고 보았다. 이는 곧 인류 역사상 가장 끔찍한 재앙을 불러 온다. 


히틀러가 일으킨 제2차 세계대전. 초반의 압도적인 모습. 러시아를 공격하는 패착. 그리고 이어진 연합군 측의 반격과 무너지는 히틀러. 이후 히틀러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을 수행한다. 더 이상 점령을 위한 그리고 지배를 위한 전쟁을 수행하지 않게 된 것이다. 다만 방어를 위한 파괴 전쟁이 시작되며 2막이 올랐다. 그 이유는 다른 데에 있었다. 


이렇게 시간을 계속 끄는 이유는 바로 유대인의 근절에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을 전쟁의 소용돌이에 밀어 넣어버리며 능력 이상의 군사적 재능을 발휘한 히틀러의 모습 이면에는, 그 시간을 벌어 유대인을 전멸 시키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이다. 홀로코스트는 그렇게 시행되었다. 


또한 전쟁 막바지에 이르러 히틀러가 이해할 수 없는 서부전선 총공격을 시행한 이유도 히틀러 다웠다고 할 수 있을까. 그의 결심에는 독일 국민들에 대한 분노가 있었다. 러시아가 쐐기 공격을 해올 것을 알았음에도 동부전선의 모든 병력을 다 끄집어 내어 서부전선을 공격한 것에는, 독일 국민들이 러시아보다 서방 연합군을 원했던 이유가 있었다. 히틀러는 독일 국민들을 러시아의 분노에 찬 무자비한 공격에 고스란히 노출되게 하였던 것이다. 그러며 독일을 초토화 되게 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독일 국민들은 독일군을 더 무서워했다고 한다. 그야말로 철저하면서도 처절한 노림이다. 


단편적으로만 알고 있었던 히틀러의 악마의 행동들, 그리고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히틀러의 성과와 성공들, 책을 보면 알 수 있을 히틀러의 이해가 되면서도 절대 이해할 수 없는 복잡한 생각들을 상세히 그리고 깊게 무엇보다도 객관적으로 보여준 책이었다. 


적을 이기려면 먼저 적을 알아야 한다고 하였다. 히틀러를 단순히 적이라고 규정하기엔 뭔가 아귀가 맞지 않을 테지만, 적어도 미래에 절대 그런 사람이 나와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에 대해서 먼저 정확히 알고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많은 친일파들이 극일(克日)을 위해서 지일(知日)을 해야 한다고 말하곤 했다. 즉, 일본을 극복하기 위해서 일본을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말이 좋아 극일이고 지일이지, 실상은 일본을 잘 알아 일본과 친해지고 결국 자신에게 이득이 되기 위한 행동으로 나타났을 테다. 하지만 그 말 자체는 절대 틀린 말이 아니다. 아주 정확한 말이다. 문제는 얼만큼 아는 것에 있지 않다. 문제는 아는 만큼 보일 때, 그 보이는 것을 대하는 태도에 있는 것이다. 


이 책 <히틀러에 붙이는 주석>은 히틀러에 대해 많은 것을 보여줄 것이다. 그리고 보이는 것들을 올바르게 대하는 태도도 어느 정도 정해준다. 그렇지만 주관적이지 않고 객관적이다. 이렇게 마성적인 인물에 대해 객관적으로 보게 해주면서 어떻게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게 해주는 지 신기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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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genv

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