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손자병법, 동양의 첫 번째 철학>


<손자병법, 동양의 첫 번째 철학> 표지 ⓒ서해문집



일본 전국시대, 전국 통일의 밑거름을 닦은 파천대마왕 오다 노부나가를 위협한 최강의 무장 '다케다 신겐'은 <손자병법 '군쟁편'>에서 유래한 '풍림화산'을 기치로 내걸고 천하를 호령했다. 뜻을 풀이하면 다음과 같다. 바람처럼 빠르게(풍), 숲처럼 고요하게(림), 불길처럼 맹렬하게(화), 산처럼 묵직하게(산). 상황에 따라 그때그때 군사를 운용하는 방법을 달리해야 한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잘 알고 있는 '풍림화산'를 비롯해, 대중적으로 '손자병법'하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두 가지는 '지피지기 백전백승'과 '삼십육계 줄행랑'이다. 하지만 '풍림화산'은 손자병법에 그대로 적혀 있는 반면, '지피지기 백전백승'과 '삼십육계 줄행랑'은 손자병법에 없다. 정확히는 '지피지기 백전불태'이고, 삼십육계 줄행랑은 <손자병법>이 아닌 <36계>라는 병법서에 나온다. 


이는 우리가 <손자병법>를 이해하는 데 가장 큰 영향을 끼치는 것들이지만, 잘 못 이해하거나 알고 있는 대표적인 예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사실 <손자병법> 자체에 대한 이해가 잘 못 되어 있다고 보는 게 맞다. <손자병법>을 단순히 병법서, 즉 군사를 운용하여 전쟁하는 방법에 관한 책으로만 알고 있다는 것이다. 


동양철학의 또 다른 원류, 손자 그리고 <손자병법>


<손자병법, 동양의 첫 번째 철학>(서해문집)을 지은 젋은 철학자 임건순은 손자병법이야말로 동양의 첫 번째 철학서라고 말한다. 동양을 논하기에 앞서 서양을 보자. 서양의 첫 번째 철학은 무얼까. '플라톤'이 서양철학의 출발점이라 일컬어진다. 이에 반론을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반면 동양철학, 그 중에서도 중국철학의 시작은 '제자백가'라는 여러 학자와 학파들이다. 그 중 가장 유명하면서도 많은 영향을 끼친 학자가 '공자'이고 그의 학파가 '유가'이다. 그래서 공자와 유가를 동양(중국)철학의 시작과 끝이라고들 많이 한다. 


'손자'가 낄 자리는 없어 보인다. 하지만 임건순은 공자 이전에 손자가 있었고, 그야말로 노자, 한비자 등 많은 학자와 학파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동양철학의 출발점이라고 주장한다. 노자와 한비자는 공자와 더불어 제자백가를 이룬 여섯 개의 조류 중 한 개의 시조들이다. 어찌 하여 철학서나 사상서가 아닌 병법서 따위(?)를 지은 손자가 위대한 성인들이 이룩한 철학 사상의 원류인가, 어찌 그렇게 주장할 수 있는가. 


'손자'가, <손자병법>이 중국인의 의식에 끼친 거대한 영향이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겠다. 단적으로 말해서 공자보다 손자가 중국인의 현실적·실용적 의식에 끼친 영향이 크다. 중국인의 현실적·실용적 의식은 나날이 그들의 중심 의식이 되어가고 있으니, 공자보다 손자의 영향력이 증대하고 있는 것이겠다. 손자를 다시 봐야 할 이유이다. 여담으로, 2016년 후반기만 해도 '손자병법' 관련 책이 쏟아졌는데, 이에 대한 반증이 아닐까 싶다. 


나아가 손자의 위업은 또 다른 면에서 빛을 발한다. 특히 동양철학의 원류라는 점에서 말이다. 정확히는 원류 중 하나. 그가 살았던 시대는 춘추시대 말. 전국시대가 시작되기 직전이다. 그는 시대의 변화를 정확히 꿰뚫고 선각자·선지자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춘추시대의 '전투'에서 전국시대의 '전쟁'으로의 변화를 꿰했고, 그 기본에 '국가'라는 단위를 설정한 것이다. 국가의 전쟁에 필요한 건 '전략', 여기서의 전략은 전쟁의 전략이 아닌 국가 운용의 전략이다. 그렇다. 그가 위대한 가장 큰 이유이자 우리가 손자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부분이 바로 이 부분, '국가 운용'이다. 그는 전쟁을 치름에 있어, 소규모 전투, 대규모 전쟁, 나아가 경제, 군사, 문화, 정치, 외교를 아우르는 국가의 운용 전략까지 생각한 최초의 인물인 것이다.


흔히 손자를 전쟁의 신이자 전쟁광으로 아는데, 그 또한 잘 못 인식하고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엄연히 '전쟁의 신'은 맞지만(그 정도로 전쟁에 관련된 모든 것을 완벽히 습득하고 인식하고 있다는 뜻이다) '전쟁광'은 절대 아니라는 것이다. '국가로서의 전략'에서 파생된 개념인데, 국가 운용이 가장 중요한 만큼 전쟁은 하지 않고 이기는 게 가장 좋은 것이고 전쟁을 하게 되더라도 신중하고 또 신중하고 또 조심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 부분을 인지하고 이해하지 못하면 <손자병법>과 손자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과 같다. 


너무 완벽한 인간, 손자


선각자·선지자로서의 손자, 철학자·사상가로서의 손자, 분명 우리가 생각해보지 못한 손자다. 전투·전쟁의 신으로서의 소인(小人) 손자가 아닌 대인(大人)으로서의 손자 말이다. 저자는 순자, 묵자, 오기 등 역사에 길이 빛날 위대한 이들이지만 세간에 잘 알려지지 않았거나 잘 못 알려진 이들을 발굴해냈는데, 이번엔 손자를 발굴해냈다. 


문제는 너무 완벽한 인간이 된 손자다. 저자는 손자를 전쟁광이자 전쟁신에서 끄집어 내 다양한 자리에 앉힌다. 춘추시대 말기에 활약하며 전국시대의 시작을 예견하며 전쟁의 패러다임을 바꿔버린 위대한 선각자이자 선지자. 항구적인 안전과 생존을 지키는 것이 모든 행위의 시작이자 이유여야 한다는 이론을 정립시키며 노자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친 철학자. 철저한 공리주의와 실용정신이 지배하는 중국, 이득이 따르는 길을 취하려 하고 당장 이야기되는 것부터 논의를 시작하고자 하는 중국인, 이 가치관과 사유의 뿌리인 사상가. 


이 완벽한 현자이자 거목을 설명하기 위해서 저자는 '중언부언'을 선택한다. 500쪽이 넘는 긴 분량 안에서, 했던 말을 무한반복함으로서 손자의 위대함을 설파한다. 족히 수백 번은 나왔음직한 '국가의 전략' '신전론'과 '무슨 짓을 해서든 이겨라'는 주문, 그리고 '고구려 이야기'까지. 때론 위대함으로 그의 위대함을 설파하기도 한다. 


분명 저자는 '계' '지' '무' '세' 등 손자가 내세우는 주요 이론들을 나눠 설명하고 있는데, 어찌 이리도 중언부언을 하고 있는지 알 도리가 없다. 너무나 중요한 개념들인 건 알겠지만, 책 중반 이후가 넘어가면 중간 중간 건너뛰게 되는 불상사를 겪는다. 문단 자체가 이전에 말했던 말인 경우가 점점 많아 지는 것이다. 작은 챕터 하나 전체를 큰 챕터를 요약하는 데 할애하는 건, 이 책이 강의를 기반으로 한 것이기에 봐줄 만하다. 


시도 때도 없이 나오는 고구려 이야기의 예는 얼핏 이해하기 힘들다. 수많은 예 중에서 하필 고구려였을까. 고구려가 <손자병법>을 완벽히 이해해 전쟁을 수행한 경우가 많다고 하더라도, 이토록 계속해서 예로 드는 경우는 거의 없는데 말이다. 실제 <손자병법>에 이토록 무한히 반복되는 주장과 주문이 있었을까. 도대체 <손자병법>에는 어떤 말들이 있을까. 과연 저자의 생각이 맞을까. 글이 아닌 말이 기반인 강의를 옮긴 만큼 어쩔 수 없었던 부분일까, 고구려 이야기처럼 누차 강조함으로써 주장이나 설파에 힘을 실으려 했던 것일까. 여하튼 이 책에는 <손자병법>을 읽어보고 싶게 하는 묘한 힘이 있다. 


이 책을 손자의 '전략'으로 바라보자


이실직고 말하되, <손자병법>을 거들떠 본 적도 없다. 그런 깜냥으로 <손자병법>과 손자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시도하려는 저자와 책에 이런 식의 비판은 가소로울 수 있다. 해석에 대한 비판이 아닌 책 자체에 대한 비판이었던 바, 막돼먹은 짓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그만큼 나는 <손자병법>을 잘 모르고, 아마도 우리는 <손자병법>을 잘 모를 게 확실하다. 거기에 해설서를 드리 밀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아마 절대 <손자병법>을 찾아보려 하지 않을 거다. 저자가 노린 게 바로 그 점이 아니었을까. <손자병법>을 찾아보게끔 하려는 의도가 저변에 깔려 있지 않았을까. <손자병법>을 잘 모르거니와 잘 못 이해하고 있는 이에게, 새로운 해석까지 전하려면 어쩔 수 없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손자가 생각하는 전쟁이 단순한, 당면한 전쟁 그 이상의 '국가로서의 전쟁'이니 만큼, 저자가 생각하는 책읽기는 단순한, 당면한 책읽기 그 이상의 '원전 찾아 읽기'일 것 같다. 이 생각은 아니 이 전략은 여타 고전 해설서가 지향하는 '원전 찾아 읽지 않아도 돼, 이 책만 읽어도 충분해.'와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저자가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노력과 열정을 보다듬어 줄 수 있는 통찰력'을 이런 식으로 발휘해보았다. <손자병법>과 손자, 그리고 고전을 통한 현재의 삶을 향한 저자의 노력과 열정, 그리고 통찰력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는 말을 하고 싶다. 남과 다른 고전 이야기를 부탁드린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블로그 이미지

singenv

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한국 대표 소설 읽기] <어둠의 혼>



<어둠의 혼> 표지 ⓒ아시아



남북 분단은 한국 근현대사를 규정하는 가장 큰 줄기이다. 해방의 기쁨을 제대로 맞이하기도 전에 찾아 왔기 때문에, 오히려 해방보다 더 크고 깊게 그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을 것이다. 그 이면에는 단연 '이데올로기'가 자리 잡고 있다. 남한과 북한, 미국과 소련(중국), 우익과 좌익,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등에서 비롯된 이데올로기의 첨예한 대립이 한반도에서 폭발했다. 


대폭발의 결과는 분단이었고 미국과 소련 정권은 분단된 남북을 손아귀에 쥐고 완전 고착화를 실행에 옮기려 했으며 남한과 북한 정권은 그 대치 상태를 이용해 독재 체제를 구축하였다. 그러고는 문제의 핵심을 '분단'에서 다른 것으로 옮기려 했다. 이런 상황을 지식인, 소설가들이 그냥 지나칠 수 없었느니, 곧 '분단 소설'의 탄생이다. 


분단 소설이라 하면 굉장히 고루하고 진부하다고 생각할 수 있겠다. 그 초점이 분단을 그리는 '소설'에 있든 소설에서의 '분단'에 있든 지금에 와서는 그러지 않다고 말 할 수 없겠지만, 우리가 발을 딛고 선 현실이 여전히 분단이기 때문에 그 이상의 가치가 있을 것이다. 감히 말하지만, 남북 분단이 한국 근현대사를 규정하는 가장 큰 줄기인 만큼, 분단 소설 또한 한국 근현대 문학사에서 가장 큰 줄기라고 생각한다. 


10대 안팎에 겪은 이데올로기의 아픔


분단 소설은 분단과 전쟁을 직접적으로 체험한 세대와 직접적이지만 간접적에 가깝게 체험한 세대, 그리고 간접적으로 체험한 세대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김원일 소설가의 <어둠의 혼>은 두 번째에 해당한다. 즉, 소설가 본인이 분단을 직접 체험하긴 했지만 체험할 당시의 나이가 많지 않았던 것이다. 아직 전쟁이 무엇인지 이데올로기가 무엇인지 정확히 인지하지 못할 10대 안팎의 나이 말이다. 


소설은 한국 전쟁이 일어나기 일 년 전인 1949년을 배경으로 한다. 주인공인 갑해의 시점으로 보자면, 좌익 운동에 가담했던 아버지가 체포되어 총살 당한 모습을 직접 목격하게 되기까지의 하루를 그렸다. 갑해는 아버지가 돌아가신다는 게 슬플 뿐 당장 해결해야 할 지독한 배고픔에 괴롭다. 그는 아버지가 왜 좌익 활동을 하게 되었는지, 무엇을 하려고 했는지 알지 못하고 궁금하지도 않다. 현실이 괴로울 뿐이다. 


분단 소설이라 하면 으레 분단을 직시하고 안타까워하며 그에 대한 어떤 메시지를 던져야 할 것이다. 노동 소설이 노동자들의 억울함을 대변하는 것처럼, 농촌 소설이 무너져 가는 농촌과 화려해지기만 하는 도시를 대비해 어떤 메시지를 던져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반면 이 소설 <어둠의 혼>은 아이의 시선을, 아이의 상황을 따라 '모르쇠'로 일관한다. 다만 현 시대에 대한 부당함을 드러낸다. 이는 이데올로기니 전쟁이니 하는 것들 때문에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까지 불안과 공포에 떨게 하는 시대를 고발하는 것이다. 


이 소설이 가지는 기막힌 문학적 균형


그렇다면 아버지가 갑해에게 했던 말은 무엇인가? 빨갱이고 좌익이고 알지 못하지만 그 일을 한 아버지가 죽어야만 한다면, 아버지가 말씀하셨던 '모두에게 행복과 평등을 가져다주는 길'은 무엇이냐 말이다. 이해할 수 없고 알 수 없는 것들 투성이인 세상이다. 작가가 본 해방 직후의 세상 또한 갑해와 다르지 않은 것이다. 그 알 수 없는 두려움. 


소설의 마지막, 갑해는 두려움과 함께 어떤 깨달음을 얻는다. 살아가는 데 용기를 가져야 하고 어떤 어려움과 슬픔도 이겨내야 한다는 내용의 깨달음. 이 급작스러운 희망에의 역설은 무엇인가. 이 희망이야말로 이 소설이 가지는 기막힌 문학적 균형이며, 이 소설만이 던질 수 있는 메시지이다. 


이는 '아이의 시선'이라는 한 뿌리에서 시작한다. 아이가 아무것도 모르는 무의 상태이기에 쉽게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것이고, 그러하기에 시대에 휩쓸리지 않고 또 자기 무력감이나 자신을 망치는 신념에 휘둘리지 않고 앞으로 나가며 성장할 수 있는 것이다. 그야말로 반전에 가까운 배치이다. 절망에서 갑자기 쏟아 오른 희망에의 메시지. 하지만 무의 상태이기에 절망에서 희망을 쉽게 낚아 올릴 수 있다. 


아이의 시선은 작가의 어쩔 수 없는 의도이기도 했던 것 같다. 소설이 쓰인 1970년대는 서슬 퍼런 독재 시대였다. 직접적으로 분단을 이데올로기를 전쟁을 이야기할 수 없었다. 그러하기에 어른도 아닌 아이의 시선을 통해 우회적으로 메시지를 전달하려 했던 게 아닐까. 그 탁월한 선택은 40년이 훌쩍 지난 지금까지 생생하게 남아 당시의 상황을 전해주고 있다. 


아시아 출판사에서 후원하는 '한국 대표 소설 읽기'의 일환입니다. 

'바이링궐 에디션 한국 대표 소설'과 함께 앞으로 계속 됩니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블로그 이미지

singenv

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서평] <수양제>



<수양제> ⓒ역사비평사



민중의 역사, 그 중요성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역사를 보면 거의 최고 통치자, 즉 일인자에 따라 천하가 좌지우지 되곤 했다. 그건 민주주의가 확립된 현대에 와서도 마찬가지 아닌가? 그만큼 그 사람들의 사상과 행위가 중요하다. '최고'와 '최악' 나뉘기 마련이다. 최고의 사상과 행위는 본받고, 최악의 사상과 행위는 다시 행해지지 말아야 함은 당연하다. 하지만 최악은 항시 반복되는 것 같다. 


중국 역사상 최악의 일인자는 누구일까? 수도 없이 많겠지만, 주로 왕조의 마지막을 함께한 이들일 것이다. 예를 들면 하나라 걸왕, 주나라 주왕, 당나라 애제, 청나라 푸이 등이 있다. 물론 오롯이 이들의 잘못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 이전부터 이미 멸망으로의 길을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을 능가하는 인물들도 있다. 그 자신의 잘못으로 나라를 멸망 시켰다고 할 수 있겠다. 대표적으로 진나라 시황제, 수나라 양제가 있다. 진나라는 시황제가 1대 황제로 있었고 이후 3대에서 망한다. 수나라도 역시 3대에서 망하는데, 양제는 2대 황제였다. 이 두 나라가 멸망하는 데에는 이 두 황제가 지극히 큰 역할을 하였다. 이 중에서도 특히 수양제는 아주 구체적인 일들을 통해 멸망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다. 


전쟁과 대운하에 미친 중국 최악의 폭군


일본의 저명한 학자였던 미야자키 이치사다는 바로 이 수양제를 다룬 책 <수양제>를 내놓은 바 있다. 이번에 초판본이 나온 지 50년 만에 재출간 되었다. 부제가 '전쟁과 대운하에 미친 중국 최악의 폭군'인데, 사실 이 한 문장에서 학생 때 배웠던 수양제에 대한 거의 모든 걸 알 수 있다. 말 그대로 그는 전쟁(수·고구려 전쟁)과 대운하(그리고 만리장성)에 미쳐 천하와 백성들을 돌보지 않다가 비참하게 생을 마감했을 뿐만 아니라 수나라의 명을 극도로 짧게 만든 인물이다. 그는 원래 그런 사람이었을까? 아니면 그 시대가 그로 하여금 그렇게 할 수밖에 없게끔 만들었을까? 


"주의해야 할 것은 수양제가 근본부터 악한 인물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그는 아주 평범하면서도 동시에 여러 가지 약점을 지닌 인간이었다. 그를 둘러싼 시대 환경은 사회 자체에 아무런 이상도 존재하지 않았고, 모든 사람이 각자 다투면서 권력을 숭배하고 추구하며 남용하는 세상이었다." (본문 중에서)


저자의 시선이다. 역사상 최악의 인물이라도, 모든 걸 개인에게 돌릴 수 없다는 입장이다. 그래서 저자는 책을 시작하면서 남북조 시대의 천자들을 하나하나 읊어준다. 알고 보니 하나같이 음란하고 포악하고 난폭한 천자들로 수양제 못지 않다. 100여 년간 계속된 남북조 시대에는 수양제 같은 천자가 예사로 존재했고, 아이러니하게도 중국 역사상 최고의 명군 중 하나로 칭송되는 수문제가 이를 통일했으며, 반대로 그의 아들이자 최악의 폭군인 수양제로 인해 망하게 되는 것이다. 


수양제는 도대체 무슨 짓을 저지른 것일까?


그는 도대체 무슨 짓을 저질렀을까? 위에서 말한 전쟁, 대운하, 만리장성에 대해 좀 더 살펴보자. 수양제는 수문제의 둘째 아들이었기에, 애초에 천자의 자리에 오를 수 없는 운명이었다. 하지만 황태자 폐위 음모를 꾸며 결국 형을 태자의 자리에서 끌어내리고 자신이 황태자가 된 뒤, 부친이 죽자 마침내 황제의 자리에 오른다. 싹수가 노랗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지만 인류 역사상 이런 일을 벌였던 천자들이 수도 없이 많기에 큰 오점이라고 할 순 없겠다. 


천자의 자리에 오른 후 수양제는 곧바로 운하의 개수에 착수한다. 아버지 수문제 때 축적된 막대한 재정으로 모든 면에서 펼친 적극적인 정책의 일환이었다. 뚫는 것보다 개통하고 나서가 문제였다. 대형 시연 행사를 열었는데, 배를 젓는 일에만 군인 8만여 명이, 그 가운데 장교들만 9천여 명이 동원되었다고 한다. 이 배들의 행렬 길이는 90km에 다다랐다. 가는 곳마다 지방관들은 그 많은 사람들에게 식량을 제공해야 했다. 이 행사에서 죽도록 고생하는 이들은 주로 하급 군인들이었다. 하지만 더욱더 고통스럽고 힘들었던 사람들은 다름 아닌 일반 백성이었다. 문제는 이런 행사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대운하 건설은 계속 이어진다. 전체 길이가 1,500km나 된다. 전국이 통일된 이상 누군 가는 했어야 하는 일일 수도 있지만, 거기엔 막대한 희생이 뒤따른다. 그야말로 수백 만에 이르는 백성들이 징발 되었다. 남자로도 부족해 여자까지 징발 하기에 이르렀는데, 이는 역사상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남북조 시대의 내부 대립으로 외부 침략에 대한 대비가 미약해졌다. 이에 수양제는 만리 장성 보수·개축을 실시한다. 100만 명 이상의 노동력을 사용했다. 이 또한 이후의 행렬이 어마어마했다. 사치의 끝을 보여주었다. 백성들은 물자를 징발 당하거나 운반에 동원되는 등 수많은 고통을 당했는데, 수양제와 조정 대신들은 백성의 고통과는 전혀 상관없다는 듯 행동했다고 한다. 어떤 외국 상인은 이런 말도 했다. 


"나는 중국을 여행하면서 도시, 시골 할 것 없이 가난한 사람들을 굉장히 많이 봤습니다. 그들은 입을 옷이 없는지 거의 반나체 상태였습니다. 이런 식의 장식은 아무 쓸모도 없습니다. 차라리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 주어 옷으로 만들어 입히는 편이 좋다고 생각됩니다만." (본문 중에서)


수양제 폭정의 대망을 장식하는 건 수·고구려 전쟁이다. 사실 선대 수문제 때 한 차례 맞붙은 적이 있다. 당시에는 고구려 영토에는 내딛지도 못하고 모두 철수하는 웃지 못할 상황이 연출 되었다. 이후 수양제는 대운하가 개통되자마자 남쪽의 군사들을 집결시켜 고구려 침공을 세 차례에 걸쳐 진행한다. 


첫 번째 침공은 그 유명한 을지문덕 장군에게 최악의 패배를 당한다. 우리에겐 살수대첩으로 잘 알려져 있다. 30만 명이 넘는 인원에서 3000명도 살아남지 못했으니, 1/100도 살아 오지 못한 것이다. 이처럼 최악의 패배를 당했음에도, 수양제는 이듬해 재차 침공을 실시한다. 수양제도 수양제이지만 그 이상으로 치적을 뽐내려 한 상급 장교들도 문제였다. 이들은 무슨 일이 있어도 다시 한 번 전쟁을 일으켜 지난번의 치욕을 갚고자 했다. 하지만 내부에서 크게 일어난 반란 때문에 철수해야 했다. 


이 평범하기 그지 없는 수양제는 아주 인간적이게도(?) 실패를 만회하기 위한 3차 침입을 시행한다. 이때 이미 곳곳에서 반란 및 봉기가 일어나고 있었다. 여유가 없었지만 고구려도 약화되었기에 계속해서 맞설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마침내 고구려는 항복을 청한다. 하지만 고구려 왕도 수양제도 입조하지 않는 지극히 형식적인 항복식이었다. 도대체 무엇을 위한 전쟁이었는지... 백성들만 고통 받는 전쟁이 아닌가. 


누군가를 생각나게 하는 그 이름


수양제는 결국 아랫사람에 의해 죽음을 당한다. 그리고 얼마 후 수나라는 멸망하고 만다. 아무리 당시의 환경이 만든 괴물이라고 하지만, 모든 걸 환경 탓이라고 하기엔 그가 저지른 행각이 너무 커 보인다. 혼란한 시대에 오히려 걸출한 인물이 나온다는 말도 있는데 말이다. 


"수양제는 남북조 시대의 혼란스러운 역사에 종지부를 찍었지만 낡고 고루한 천자였다. 그는 낡은 방식으로 권력을 잡고, 낡은 방식으로 그 권력을 쥐고 흔들었으며, 마지막에는 낡은 방식으로 살해 당했다." 

(본문 중에서)


저자는 역사는 끊임없는 노력에 따라 새로움을 쌓아나가는 것이라고, 노력을 게을리하면 역행 하는 일조차 생긴다고 말한다. 보수도 새로움을 쌓아나갈 수 있고, 진보도 역행 할 수 있다. 그건 이념과 상관없는, 한 시대가 마땅히 행해야 할 바가 아니겠는가. 누군가를 생각나게 하는 그 이름, 수양제. 역사는 돌고 도는 것이기에 그 미래가 보여 안타깝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블로그 이미지

singenv

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리뷰] <퓨리>



영화 <퓨리> 포스터 ⓒ소니픽쳐스 릴리징 월트디즈니 스튜디오 코리아(주)



<인터스텔라>의 태풍 속(북미와 중국에 이어 한국은 <인터스텔라> 전세계 3위 흥행 국가이다.)에서 살아남은 영화가 과연 존재할까 싶은 요즘, 조용하게 자신의 존재 가치를 보이고 있는 영화가 있다. 한국이 사랑해 마지 않는 배우인 '브래드 피트'를 앞세운(주연에 제작까지) 전쟁 영화 <퓨리>이다. 


하반기 기대작 중 한국 영화 <나의 독재자>, <빅매치> 해외 영화 <헝거게임> 등이 추풍낙엽처럼 나가 떨어지거나 기대 이하의 성적을 보이는 가운데, <퓨리>의 흥행은 의외다. '브래드 피트'의 힘인 것인가, 탱크 '퓨리'의 힘인 것인가. 앞의 것은 여성의, 뒤의 것은 남성의 지지를 받는다고 할 수 있는데 그렇다면 여성과 남성 모두의 마음을 훔친 것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이 영화에 다른 무엇이 존재하는가?


제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이른 1945년 독일, 최고의 무훈을 세운 주인공 '워대디'(브래드 피트)와 탱크 '퓨리'는 여전히 살아 있다. 전쟁이 계속 되고 있는 와중에 계속해서 살아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 이미 수많은 죽음을 헤쳐 나왔다는 의미다. 그들은 죽거나 전쟁이 종료될 때까지 싸울 수밖에 없는 운명이기도 하다. 영화 <퓨리>는 이 사실에 기반한다. 


알고 보면 알콩달콩 '가족 영화'?


워대디에게는 3명의 가족 같은 부하들이 같이 한다. 큰 아들 격인 부대장이자 포수 바이블. 그는 굳건한 신념과 완벽한 실력으로 워대디를 도운다. 둘째 격인 운전병 고르도. 탁월한 운전 솜씨와 책임감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셋째 격인 장전병 쿤 애스. 다혈질적이고 거칠지만 실력 하나는 최고이다. 탱크인 퓨리라는 '집'의 보호 아래에서 먹고 자고 싸우고 나아간다. 삶을 공유한다. 그들은 이 탱크를 절대적으로 믿으며, 자신들이 탱크와 함께 하는 것이 깊은 자부심을 느낀다. 나아가 '최고의 직업'이라고 까지 말한다. 


그런 그들 앞에 8주 밖에 안 된 새파란 애송이 노먼이 나타난다. 배운 거라고는 타자기 밖에 없는 그는, 아무것도 모른 채 아무런 정신적 무장 없이 전선에 배치된다. 이 막내 아들의 모습을 본 워대디. 이대로 라면 얼마 후에 죽을 것이 뻔하다. 정신 무장을 단단히 시켜야 한다. 그는 마구 때리면서 까지 하면서 노먼을 가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이려는 노력을 마다하지 않는다. 노먼은 차라리 자신을 죽이라며 고집을 부리지만, 그 때문에 눈앞에서 동료가 죽자 정신이 번쩍 든다. 독일군 죽이는 거 아무것도 아니다. 



영화 <퓨리>의 한 장면 ⓒ소니픽쳐스 릴리징 월트디즈니 스튜디오 코리아(주)



이 영화는 전쟁에 정확히 말해서 전투를 소재로 하고 있는 영화이지만 이처럼 '가족 영화'이기도 하다. 가족을 책임지기 위해서 권위적이고 강한 모습을 보이고자 하지만, 때론 눈물도 흘리는 가장 '워대디'. 지지고 볶고 티격태격 하지만 서로에 대한 믿음과 신뢰, 그리고 집(?)과 같은 탱크 퓨리에 대한 깊은 자부심까지 지니고 있는 3명의 부대원들. 그리고 새로 들어온 막내 신입을 살리기 위해 일부러 혹독하게 대하는 모습까지. 일면 노먼의 성장 영화로 보일 수 있겠지만, 가족 영화로 보이는 면모가 더 크다. 


아기자기한(?) 스케일에서 보여주는 극도의 리얼리티


이들 무적의 5인방과 퓨리는 계속해서 무훈을 드높이며 나아간다. 한번은 적진에 발이 묶인 아군 보병들을 구출해내기 위한 작전에서 멋지게 성공한다. 드넓은 평지에서 무지막지하게 포탄을 날리는 탱크들의 위용은 가히 어마어마하다. 


그렇지만 여지없이 위기에 맞닥뜨린다. 퓨리를 비롯해 다른 3대의 셔먼 탱크가 진군 하던 중, 독일군의 티거를 만난 것이다. 티거 한 대면 셔먼 탱크 4~5대를 상대할 수 있었다. 죽음을 각오한 혈투. 다른 3대의 셔먼 탱크들이 폭사 당하고, 워대디의 퓨리는 상대적으로 가볍고 이동이 용이한 셔먼 탱크의 장점을 살려 겨우 이길 수 있었다. 



영화 <퓨리>의 한 장면 ⓒ소니픽쳐스 릴리징 월트디즈니 스튜디오 코리아(주)



이번에는 <퓨리>가 남성 관객을 사로잡을 차례다. 전쟁 영화가 갖는 미덕 중 하나는 바로 '리얼리티'인데, 이 영화의 리얼리티는 탱크의 탱크에 의한 탱크를 위한 맞춤이다. 감독 '데이비드 에이어'는 2012년 작인 <엔드 오브 왓치>로 리얼리티의 극치를 보여준 바 있는데, 이번에도 그 미덕을 발휘한다. 흔히 전쟁 영화에서 보이곤 하는 어마어마한 스케일 대신, 아기자기한(?) 스케일에서의 리얼리티라 더욱 실감이 난다. 


아쉬운 점도 있지만, 이를 커버하고도 남는 연기력!


이게 전부라면 얼마나 좋을까? 오랜만에 찾아온 전쟁 영화를 색다르게 봤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 영화가 갖고 있는 결함들도 눈에 띈다. 너무나 예상 가능한 진부하기 짝이 없는 스토리 라인과 마지막 전투 때문이다. 도대체 워대디는 왜 도망가지 않았을까? 그나마 빈약한 스토리를 더욱 빈약하게 만들 수는 없기에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말할 수는 없지만, <라이언 일병 구하기>가 생각난다고 말해둔다. 노먼은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서 겁쟁이 '업햄'이 생각나고, 마지막 전투의 양상도 비슷하다. 


마지막으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 이들 5명의 '연기'다. 과거 '꽃미남 스타'에서 진정한 배우로 거듭나고 있는 브래드 피트는 제쳐 두고서 라도, 바이블 역의 샤이아 라보프는 예전 <트랜스포머>에서 보여줬던 촐싹 맞고 안정적이지 못한 면모를 완전히 지워냈다. 고르도 역의 마이클 페나는 <크래쉬>에서 인상적인 연기로 남우주연상을 휩쓸며 연기파 배우로 우쑥 선 배우답게 안정적인 연기를 보여주었다. 


쿤 애스 역의 존 번탈은 미국 최고의 드라마 <워킹데드>에서 보여줬던 모습에서 크게 달라지지 않았지만 그 자체로 워낙 잘 어울리는 역이라서 전혀 이질감 없이 다가왔다. 마지막으로 노먼 역의 로건 레먼은 그동안은 '포텐'이 터지지 않아 아쉬운 모습이었지만 이 영화에서는 자신의 매력을 유감 없이 발휘했다. 노먼 역이야말로 로건 레먼이 아니었으면 할 사람이 없을 것 같은 그런 느낌이었으니 말이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블로그 이미지

singenv

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서평] <강철 폭풍 속에서>


<강철 폭풍 속에서> ⓒ뿌리와이파리

2차 세계 대전을 그린 최고의 역작 <밴드 오브 브라더스>는 10부작 드라마이다. 그 중에서 7번째 챕터는 미국군 공수부대가 숲 속에서 독일군의 대포격을 받는 장면이 주를 이룬다. 참호를 파고 무작정 버티고 지키는 미국군과 이를 뚫고자 무차별 포격을 가하는 독일군. 수많은 희생자를 낳는다.  


산전 수전 공중전까지 겪은 최고의 공수부대조차 이 무차별 포격 앞에서는 속수무책이다. 안 그래도 추위와의 싸움으로 녹초가 되어가는 그들이었다. 이 와중에 포격으로 인한 불빛과 쓰러지는 나무를 보고 어이 없는 웃음을 짓는 이가 있다. 그는 어떤 연유로 그런 웃음을 짓는 것일까. 


"파다 만 참호 안에서 생각나는 거라곤 꼬마 때 1월 4일 뿐이었다. 난 딱총이나 폭죽을 만드는 걸 즐겼다. 그걸로 흙더미나 병을 날려버리는 게 그렇게 신 날 수 없었다. 그날 포격처럼 무시무시한 광경은 내 생애 처음이었다. 조 토이 일을 알았다면 웃진 못했을 거다."


무시무시한 포격을 영상으로 보여주며 역설적으로 웃고 있는 그 모습을 잊을 수 없다. 마치 현장에 있는 듯 내 몸의 떨림이 아직도 생생하다.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 이 드라마도 이 포격 장면을 위해서 이 소설을 참고했을 것이 분명하다. 1차 세계 대전을 독일군의 시각에서 그린 에른스트 윙거의 <강철 폭풍 속에서>(뿌리와이파리)이다. 


소총, 기관총, 수류탄, 박격포 등이 쉴 새 없이 오고 가는 전장에서의 '강철 폭풍' 중에서 단연 압권은 박격포의 포격이다. 이 소설에서 이에 관한 단어와 묘사가 족히 수백 번은 나오는 듯하다. 그만큼 이 전쟁에서 포격은 반복되는 일상과 다름 아니다. 


"밤에는 사납게 빗발치는 한여름 뇌우처럼 맹렬한 포격이 머리 위로 떨어졌다. 그러고 나면 나는 아무런 근거도 없이 이상하게도 안전하다는 느낌에 빠져서, 싱싱한 풀을 풀을 푹신하게 깔아둔 침대에 누워 사방에서 포탄이 터지고 벽에서 흙모래가 줄줄 흘러내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곤 했다... 그런 순간에는 그때까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기분이 엄습했다. 짐작할 수 없을 만큼 오랜 기간 동안 낭떠러지 끝에서 격한 삶을 살아낸 뒤에 오는 엄청난 심경의 변화 같았다." (321쪽)


이 소설은 작가가 화자인 만큼 투철한 사실성을 담보하고 있다. 작가는 다름 아닌 1차 세계 대전 참전 장교이고 종전 후 훈장까지 받은 사람이다. 그가 직접 겪은 전쟁을 일기 형식으로 담아냈다. 수많은 전쟁 영화와 소설을 접한 필자의 시각으로 보자면, 이 소설의 미덕은 확실하다. 그건 정녕 전쟁 그 자체를 그렸다는 점이다. 어떤 영웅주의, 반전주의, 이데올로기, 철학 따위의 첨부 없이 전쟁 만을 있는 그대로 그려냈다. 


이런 작품을 그려내기 위해서는 일단 전쟁에 참여해 실제로 수많은 전투에 임했던 사람이어야 한다. 그리고 그 지옥에서 살아남아야 하며, 그 와중에서 철저히 객관적인 기록을 남길 수 있어야 하고, 글을 잘 써야 한다. 정치적으로 중립 또는 애매모호함을 지닌 사람이어야 한다. 이 소설의 작가는 이런 불가능할 것 같은 이력을 지닌 사람이다. 


소설은 시종일관 무심한 듯 끊임없이 반복되는 전장에서의 일상을 그린다. 포격이 오가고, 가스전이 시작되고, 소총과 기관총이 불을 뿜고, 기어코 백병전에 다다른다. 그리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수많은 사람들이 다치고 죽는다. 작가가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지경이다. 실제로 작가도 14번의 크고 작은 부상으로 죽을 고비를 몇 번이나 넘겼다고 한다. 


이 소설은 우리가 제대로 접해본 적이 없는 1차 세계 대전을 그리고 있다는 점을 차치하고라도 매우 낯설다. 미국식 영웅주의 또는 반전주의에 익숙한 지금 시대의 사람들에게는 이런 류의 글이 익숙하지 않을 것이다. 전쟁 콘텐츠에서 보여주는 사실적인 묘사는 비슷할 지 모르지만, 이렇게 전쟁 '외(外)'가 아닌 '내(內)'만 보여주는 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충실하다 못해 지독하기까지 하다. 


"그는 전쟁의 정당성을 분석하거나 그 결과의 타당성에 의문을 표시하지 않는다. 그저 자신이 참가한 전투 그 자체를, 날마다 군인의 의무를 충실히 수행하면서 그가 본 것과 그가 한 행동을 있는 그대로 묘사할 뿐이고, 그 점에서 이 작품을 따를 1차 대전 문학은 없다." (책의 뒤 표지)


이 소설에서 묘사하고 있는 무심하게 반복되는 일상은, 반복과 무심함으로 인해 너무나 당연하게 넘어가고 있지만 사실 끔찍한 '폭력'이다. 폭력으로 인해 다치고 죽고, 폭력을 사용해 상대를 다치게 하고 죽인다. 이것이 끊임없이 되풀이되다 보니 어느 순간 예전의 내가 아니게 된다. 폭력에 길들여지는 것이다. 작가가 이를 의도하고 쓴 것이라면 정녕 위대하다 할 수 있겠다. 


개인적으로 레마르크의 <서부 전선 이상없다>를 이미 접하고 <강철 폭풍 속에서>를 읽었다. 취향은 후자의 전쟁 그 자체 만을 투철하게 그린 것을 좋아하지만, 전자의 스토리텔링이 훨씬 재미있고 잘 읽혔다. 문학적 위대함은 후자가 훨씬 높을 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스토리텔링이라는 미명 하에 재미있고 잘 읽히는 문학 만을 찾는 이 시대에 이런 문학의 출간은 뜻 깊은 일이다. 최소한 '전쟁의 시대'라는 불명예 만은 피하고 싶은 21세기 초에 이런 순수 전쟁 문학은 어떻게 읽힐까?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블로그 이미지

singenv

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서평] <히틀러에 붙이는 주석>


<히틀러에 붙이는 주석> ⓒ돌베개

'희대의 악마', '악의 화신', '악마의 자식' 이 모든 수식어들이 단 한 사람을 위한 것이라면 믿어지는가? 누구나 그 이름만 들어도 치를 떨 사람. 아돌프 히틀러다. 그는 독일을 넘어, 당대를 넘어, 인류까지 넘어, 지구 역사상 가장 유명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물론 나쁜 의미로 말이다. 


한때 히틀러를 생각하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단어가 '독재자'였다. 이후 탁월한 '연설가'였다가,  '학살자'가 되었고, 언젠가 '미치광이'가 되었다가, '불우한 사람'이 되기도 하였다. 현재는 '중요한 세계사적 인물'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이는 '히틀러'를 히틀러 개인에게 한정 시키기에는 너무나 큰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히틀러는 하나의 현상인 것이다. 


그렇다면, 히틀러에 대해 잘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어설프게 알았다가는 그 마성에 이끌려 빠져들거나, 밑도 끝도 없는 무조건적인 부정을 행사할 수가 있다. 이는 히틀러 본인이 원했던 바이기도 하다. 그가 생의 마지막에서 원했던 바는 '히틀러'에 관련된 거대한 무덤을 만들고 그 근처에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다. 일종의 복수 행위였다고 한다. 특히 독일에 대한 복수. 


이런 해석은 <히틀러에 붙이는 주석>(돌베개)의 마지막 부분에 상세히 기술되어 있다. 이 책은 제바스티안 하프너라는, 독일에서는 많은 사랑을 받는 역사 교양서 작가이지만 한국에는 최초로 소개되는 이가 35년 여 전에 지었다. 독일이 통일되려면 아직 한참이나 남은 시점이며, 히틀러가 죽은 지 33년 밖에 되지 않았다. 많은 연구가 진행되지 않았을 거라 생각되지만, 지금 읽어도 전혀 기시감이나 이질감이 느껴지지 않는 수작이다. 


히틀러에 관한 최고의 책 몇 권 중에 하나라고 전해지는 만큼 히틀러에 대한 모든 것을 담고 있지만, 굉장히 얇다. 히틀러에 관한 최고의 정전이라 평가 받는 요하임 페스트의 <히틀러 평전>(푸른숲)이 1400쪽이 넘는 양을 자랑하는 반면, 이 책은 230여 쪽이다. 그렇지만 그 안에 히틀러의 전체가 들어 있다. 저자의 탁월한 능력이라고 밖에 설명할 길이 없다. 


책은 히틀러의 생애, 성과, 성공, 오류, 실수, 범죄, 배신의 파트로 나뉘어져 있다. 히틀러의 삶에서 '성과와 성공'을 볼 수 있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이 부분만 체득해도 충분한 가치가 있을 듯하다. 평소에 절대로 볼 수 없는, 그리고 생각할 수도 없는 부분들이니 말이다. 저자에 따라 간략히 서술하자면, 히틀러는 경제 기적과 군비 확장이라는 성과를 이룩하였다. 그리고 그는 오스트리아 합병, 주데텐 지역 합병, 보헤미아와 모라비아 지역에 대한 보호령, 메멜 점령, 그리고 폴란드 점령 이후 전 유럽 대륙 지배 등의 현기증 나는 성공 행진을 이어 나갔다. 앞뒤 볼 것 없이 이 부분 만을 놓고 보면, 히틀러의 '성과와 성공'은 지극히 당연할 것이다. 


하지만 이어지는 그의 부정들은 치가 떨린다. 히틀러가 평생 희망했던 두 가지 목표가 있다. '독일의 세계 지배'와 '유대인의 근절'. 그는 민족에 기반을 둔 '큰 독일'이 홀로 종족 개선과 반유대주의를 동원하여 세계 패권을 성취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기 위해서 정복 전쟁을 벌여 유럽을 독일의 패권 하에 두고, 궁극적으로 '생존공간'인 러시아를 지배하려는 목적이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생명체의 자기 보존 충동과 지속적 보존의 욕구는 무한한데, 그에 비해 이 전체 생명의 과정이 이루어지는 공간은 유한하다. 생존공간의 이런 한계가 바로 생존전쟁을 강요한다."라고 말하며 파괴적 전쟁을 진행했다. 한편 그는 유대인이 '민족의 지식인'을 멸종시킬 뿐만 아니라 인류 전체를 멸종시키려 한다며, 전 인류가 그들을 멸종시키기 위해 힘을 합쳐야 한다고 보았다. 이는 곧 인류 역사상 가장 끔찍한 재앙을 불러 온다. 


히틀러가 일으킨 제2차 세계대전. 초반의 압도적인 모습. 러시아를 공격하는 패착. 그리고 이어진 연합군 측의 반격과 무너지는 히틀러. 이후 히틀러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을 수행한다. 더 이상 점령을 위한 그리고 지배를 위한 전쟁을 수행하지 않게 된 것이다. 다만 방어를 위한 파괴 전쟁이 시작되며 2막이 올랐다. 그 이유는 다른 데에 있었다. 


이렇게 시간을 계속 끄는 이유는 바로 유대인의 근절에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을 전쟁의 소용돌이에 밀어 넣어버리며 능력 이상의 군사적 재능을 발휘한 히틀러의 모습 이면에는, 그 시간을 벌어 유대인을 전멸 시키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이다. 홀로코스트는 그렇게 시행되었다. 


또한 전쟁 막바지에 이르러 히틀러가 이해할 수 없는 서부전선 총공격을 시행한 이유도 히틀러 다웠다고 할 수 있을까. 그의 결심에는 독일 국민들에 대한 분노가 있었다. 러시아가 쐐기 공격을 해올 것을 알았음에도 동부전선의 모든 병력을 다 끄집어 내어 서부전선을 공격한 것에는, 독일 국민들이 러시아보다 서방 연합군을 원했던 이유가 있었다. 히틀러는 독일 국민들을 러시아의 분노에 찬 무자비한 공격에 고스란히 노출되게 하였던 것이다. 그러며 독일을 초토화 되게 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독일 국민들은 독일군을 더 무서워했다고 한다. 그야말로 철저하면서도 처절한 노림이다. 


단편적으로만 알고 있었던 히틀러의 악마의 행동들, 그리고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히틀러의 성과와 성공들, 책을 보면 알 수 있을 히틀러의 이해가 되면서도 절대 이해할 수 없는 복잡한 생각들을 상세히 그리고 깊게 무엇보다도 객관적으로 보여준 책이었다. 


적을 이기려면 먼저 적을 알아야 한다고 하였다. 히틀러를 단순히 적이라고 규정하기엔 뭔가 아귀가 맞지 않을 테지만, 적어도 미래에 절대 그런 사람이 나와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에 대해서 먼저 정확히 알고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많은 친일파들이 극일(克日)을 위해서 지일(知日)을 해야 한다고 말하곤 했다. 즉, 일본을 극복하기 위해서 일본을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말이 좋아 극일이고 지일이지, 실상은 일본을 잘 알아 일본과 친해지고 결국 자신에게 이득이 되기 위한 행동으로 나타났을 테다. 하지만 그 말 자체는 절대 틀린 말이 아니다. 아주 정확한 말이다. 문제는 얼만큼 아는 것에 있지 않다. 문제는 아는 만큼 보일 때, 그 보이는 것을 대하는 태도에 있는 것이다. 


이 책 <히틀러에 붙이는 주석>은 히틀러에 대해 많은 것을 보여줄 것이다. 그리고 보이는 것들을 올바르게 대하는 태도도 어느 정도 정해준다. 그렇지만 주관적이지 않고 객관적이다. 이렇게 마성적인 인물에 대해 객관적으로 보게 해주면서 어떻게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게 해주는 지 신기할 따름이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블로그 이미지

singenv

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지나간 책 다시읽기] <전쟁의 슬픔>


<전쟁의 슬픔> ⓒ아시아

전후 세대에게 전쟁은 고통, 슬픔, 분노, 아픔 등과는 거리가 멀다. 그것은 아마도 전쟁마저도 상품으로 팔아 먹으려는 자본주의의 첨병들 때문이다. 그들은 전쟁을 겪어 보지 못한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려는 듯, 전쟁을 게임, 영화, 드라마, 소설 등의 각종 콘텐츠부터 레크레이션이나 일일 체험으로까지 발전시켰다. 


아무리 기술이 발달하여 실제와 거의 흡사한 체험을 할 수 있다고 하지만, 전쟁을 겪어 보지 못한 이로 하여금 전쟁의 진면목을 겪게 할 수는 없다. 이는 오히려 전쟁을 이용하려는 자들에게는 잘된 바, 전장에서의 긴장감은 스릴로, 죽고 죽이는 고통은 쾌감으로, 전쟁의 시작과 끝에서 겪는 아픔과 허무함은 각각 설렘과 영웅적 자부심으로 바뀌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즉, 전쟁의 고통, 슬픔, 분노, 아픔 등이 

더욱 될수록 간접 경험을 하는 이들에겐 더할 나위 없이 '재미'있게 다가 오게 된다. 


또한 전쟁의 시작에는 정치적 입김이 다분히 작용하는 바, 전쟁을 일으킨 정치 권력자들은 이념 또는 정치의 방향을 선전하는 도구로 전쟁을 이용한다. 자연스레 전쟁 자체에 시선을 돌리지 못하고, 전쟁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도 모자라 전쟁을 위해 목숨을 바쳐야 한다고 생각하게끔 한다. 그 때문에 무고하게 희생된 수많은 사람들의 삶은 그들에게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못하는 것이다. 


필자 또한 비교적 어릴 때부터 전쟁에 대한 수많은 콘텐츠들을 접하며, 어느새 전쟁을 '동경'하기까지 했다. 국가를 위해 몸을 바치는 그들이 숭고하고 멋있고 닮고 싶으며 나도 전쟁에 참여해 영웅이 되고 싶기까지 하였다. 특히 남자라면 상당 부분 동조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겪은' 전쟁은 그런 것이었다. 그래서 영화 <지옥의 묵시록>이 '반전(反戰)'이라는 메시지를 남기려고 할 때, 왜 그렇게 화끈한 전투 장면이 계속되지 않는지 불만만 늘어 놓곤 했다. 


알 수 없는 그러나 매우 명백한 슬픔과 공존하다


그렇게 '전쟁광'적인 측면에 매몰되어 가고 있을 때 <전쟁의 슬픔>(아시아)이라는 작품을 접하였다. 전쟁에 당연히 슬픔이 동반된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렇고 그런 반전 소설이겠거니 생각하며, 정치적이며 화끈하지 않은 원론적인 이야기를 예상했다. 다만 작가 바오 닌이 실제로 베트남 전쟁에 출전한 경력이 있으며, 자그마치 6년 동안 최전선에서 싸웠다는 사실이 전투 장면들의 실제적인 묘사를 기대하게 했을 뿐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예상했던 것과 소설 간의 괴리는 너무나 컸다. 소설 내적(내용)으로, 기대했던 실제적인 묘사는 기대 이상이었고 원론적인 이야기가 아닌 실제적인 이야기로 반전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예상 외로 이 반전으로의 주장을 함에 있어 '사랑'이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컸다. 지독한 전쟁 뿐만 아니라 지독한 사랑도 이 소설에서의 슬픔에 크게 작용했다. 


한편 소설 외적(기법)으로, 문체에 슬픔이 뚝뚝 묻어 났다. 경험해본 자만이 쓸 수 있는 지독한 슬픔의 글이었다. 또한 그 슬픔을 가장 잘 표현해 내는 구성이었다. 시간과 공간을 어지럽게 오가는 구성은 그 자체로 주인공이 느끼는 슬픔이 독자에게도 느끼게끔 하였다. 책을 읽는 내내 알 수 없는 그러나 매우 명백하게 느낄 수 있는 슬픔과 공존했다. 


"그를 괴롭히며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주요한 상념들이 희미해질 만큼 모든 생각이 뒤죽박죽되고, 어떤 맥락도 없이, 모든 감정과 사고가 뒤섞이는 듯했다. 물론 그는 알고 있었다. 끊긴 생각, 두서없는 이야기, 보이는 대로 생각하는 것이 바로 상상력의 한계에 고통스러워하는 영혼을 해방시켜 주는 것들이었다." (본문 중에서)


결국 아무것도 잊을 수 없다


주인공 끼엔은 17살의 어린 나이에 평생을 함께할 여인과 불미스러운 일로 헤어지며 입대한다. 그렇게 전쟁의 시작에서 끝까지 함께 하며 10년을 전쟁터에서 보낸다.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과 지독한 운으로 생존한 그는 10년 전 헤어진 연인 프엉을 찾아간다. 하지만 그도 알고 있었듯, 이미 그녀와의 관계는 파탄이 난 상태였다. 


이번에는 거꾸로 프엉이 끼엔을 떠나게 된다. 이후 끼엔은 그 슬픔과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하루하루를 술로 지탱하며 소설을 씀으로써 소용돌이치는 감정을 순화 시킨다. 그가 쓰는 소설은 그가 겪었던 전쟁의 슬픔, 시대의 슬픔, 사랑의 슬픔에 대한 이야기들이다. 그의 마음은 이미 갈가리 찢겨 봉합할 수 없을 지경이 되었지만, 과거의 그 슬픔들을 다 끄집어 내서 다시금 자신의 마음을 찢지 않고서는 버틸 수 없는 것이다. 


그는 운명이, 시대가, 국가가, 사회가, 그리고 이 전쟁이, 이 사랑이 슬픔의 원인이라 말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그리고 결국 그는 어쩌면 영원히 고통스러울 것이었다. 늘 어둡고, 고통스러운 가운데 악몽과 현실 사이에서 남은 인생을 높고 가파른 절벽 위를 오가듯 살아야 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는 10년 전에도, 지금도, 10년 후에도, 20년 후에도 계속 살아가야 할 것이었다. 


"결국 아무것도 잊을 수 없다. 슬픔과 고통은 어린 시절부터 시작되어 전쟁을 거치고 지금까지 이어지면서 하나로 커다랗게 뭉쳐진 응어리가 되었기 때문이다. 사람이 고통을 받아들여야 세상에 태어날 수 있듯이, 또한 삶을 다하는 날까지 고통 때문에 살아야 하며 행복을 추구하고 사랑을 하고 예술을 하고 즐기고 견뎌야 하리라." (본문 중에서)


전쟁의 슬픔에 사랑을 녹여낸 탁월한 선택


이 소설의 미덕은 이렇게 모든 슬픔을 있는 그대로 끄집어냄으로써, 어떠한 과장도 하지 않는 다는 점이다. 특히 전쟁에 관해서는 개인이 간직해 왔던, 결코 꺼낼 수 없었던 치욕적인 부분을 내보이고 이는 사회도 마찬가지이다. 예를 들어, 자신이 살기 위해 눈 앞에서 동료가 처참하게 강간을 당하고 결국 죽임을 당하는 장면을 숨죽인 채 지켜보는 장면. 그리고 전쟁에서의 승리로 인해 영웅적일 것만 같은 참전 용사들의 추잡하기 그지 없는 모습(술로 삶을 지탱하고, 죽은 자들이 나오는 악몽을 꾸며, 망가진 몸과 마음으로 망가진 인생을 살아가는)까지. 


한편 망가진 인생을 표현함에 있어 망가진(정연하지 못한) 구성은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표현 방식이지만, 이런 뒤죽박죽의 느낌은 자칫 작가의 능력을 잘못 파악하게 만들 수 있다. 오롯이 서사를 따라 진행되었다면, 이 슬픔을 더욱더 깊이 받아들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사랑과 우정, 그리고 전쟁의 슬픔, 전후의 아픔까지 그린 전쟁 대서사시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통속적인 느낌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우를 범했을 지도 모르기에 단언할 수는 없을 듯하다. 


마지막 부분의 반전(反轉)에 이르러서야 절실히 깨닫고 눈물 흘리지 않을 수 없게 되었을 때 비로소 깨닫지만, 전쟁의 슬픔에 사랑의 절절함을 녹여 낸 건 정말 탁월한 선택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렇게 함으로써 전쟁의 슬픔이 단순히 전쟁에 따른 슬픔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생의 슬픔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실로 슬픔, 고통, 아픔의 3중주를 가뿐히 넘어서는 사랑의 힘이다. 하지만 전쟁의 포화는 사랑마저 휩쓸어 버렸다. 사랑은 전쟁이 잉태한 부정을 이길 수 있었지만, 전쟁 자체를 이길 수 없었다. 


"정의가 승리했고, 인간애가 승리했다. 그러나 악과 죽음과 비인간적인 폭력도 승리했다. 들여다보고 성찰해보면 사실이 그렇다. 손실된 것, 잃은 것은 보상할 수 있고, 상처는 아물고, 고통은 누그러든다. 그러나 전쟁에 대한 슬픔은 나날이 깊어지고, 절대로 나아지지 않는다." (본문 중에서)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블로그 이미지

singenv

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서평] 세계의 역사와 지도를 바꾼 물고기 <대구>


<대구> ⓒRHK

경제학 분야에서 유명한 말이 있다. 200여년 전, 애덤 스미스가 자원 배분의 효율성을 이루는 시장 기능을 '보이지 않는 손'이라고 설명한 것이다. 자유경쟁시장에서는 재화에 관련되어 계획하고 조정하는 사람 또는 시스템의 존재가 불필요하며, 시장 스스로가 조정을 한다고 보았다. 이는 오늘날 신자유주의의 작은 정부론의 중추가 되었다. 


그런데 이런 '보이지 않는 손'이 경제학 분야의 시장을 설명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세계 역사를 설명하는 데에도 통용되고 있다면? 더군다나 그것이 버젓이 실체를 띠고 있다면? 그럼에도 '보이지 않는 손'이라 칭하는 이유는, 이것이 실체를 띠고 있으면서도 사람들이 알아채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실체를 알아차린 몇몇 사람들이 역사를 바꾼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극작가, 어부, 항만 노동자, 법률가 보조원, 요리사, 제빵사의 직업을 거쳐 저널리스트이자 작가로 활동 중인 '마크 쿨란스키'는 <대구>(RHK)라는 책을 통해서 인간의 역사를 변화시킨 주인공이 바로 대표적 어류 중 하나인 '대구'라고 밝혀내고 있다. 작년에 <멸치 머리엔 블랙박스가 있다>(부키)를 펴낸 물고기 박사 황선도에 따르면, 대구(학명 Gadus macrocephalus. Cod)는 명태와 더불어 우리나라 대구과 어류를 대표한다. 참고로 명태에는 '왕눈폴락대구'라는 다른 이름이 있다. 


대구는 최대 크기가 1미터가 훌쩍 넘는 대형 어종인데, 2000년대 들어 어획량이 증가하고 있다고 한다. 본래 제일 흔한 어류임에도 맛이 일품이라 많은 사랑을 받았었는데, 어획량이 1990년대에 급감해서 침체기를 겪었다고 한다. 


마크 쿨란스키의 <대구>는 바로 이 대구의 어획량이 급감했던 1997년에 출간되었다. 그래서인지 이 책은 어획량이 급감한 1990년대 현재의 비루한 어부들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그들은 더 이상 예전의 자유경쟁시장으로서의 어업을 행하는 어부가 아니다. 이제는 정부의 보조를 통해, 대구를 잡아 파는 것이 아니라 대구를 잡아 정부 소속 과학자들에게 보고함으로써 대구 어족의 발달 여부를 측정하도록 보조 한다. 잡아도 잡아도 끝없이 잡힐 것만 같았던 대구. 이들은 지난 1000년간 흥청망청 이어진 대구 어업에서 하필이면 제일 끝물에 있었다. 


이 책의 시선은 처음부터 끝까지 '대구'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리고 이 책에 나오는 모든 것들은 결국 대구와 연관이 있다. 즉, 지난 1000년간의 세계가 '대구'의 영향 아래에 있었던 것이다. 그 안에는 인류의 역사를 바꾼 순간을 연출한 위인들, 전 세계를 호령했던 강대국들,  그리고 인류의 진보를 이끈 세기적 기술들까지. 보다 많은 대구를 낚기 위해 나선 사람들은 새로운 세계를 발견했고, 보다 많은 대구를 낚기 위한 방법을 강구하다 보니 항해와 관련된 기술이 수직으로 상승 발전했다. 또한 이 '대구' 때문에 전쟁과 혁명까지 일어나기도 했다. 


"중세 내내 유럽인이 막대한 양의 고래 고기를 먹을 때, 바스크 인은 머나먼 미지의 해역으로 나가 고래를 잡아왔다. 이들이 그처럼 멀리까지 다녀올 수 있었던 데에는 이유가 있다. 이들은 엄청난 대구 어족을 발견했고, 그걸 잡아서 소금에 절였다. 그래서 긴 항해에도 불구하고 상하지 않고 영양가도 높은 식품을 먹을 수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바스크 인이 사상 최초로 대구를 소금에 절인 것은 아니었다. 그보다 여러 세기 전에, 노르웨이에서 출발한 바이킹이 아이슬란드와 그린란드를 거쳐 캐나다에 도착했는데 이 경로가 대서양대구의 서식 범위와 정확히 같았던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었다." (본문 중에서)


대구와 관련된 대표적 전쟁으로, 20세기 중반 영국과 아이슬란드는 대구 어업권을 둘러싸고 벌였던 일명 '대구 전쟁'이 있는데, 그 결과 아이슬란드가 승리 아닌 승리를 거두었다. 또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18세기 아메리카 대륙에서 일어난 미국 독립혁명의 예를 들 수 있다. 당시 미국 식민지는 본국 영국의 과도한 세금 수탈 등으로 인해 불만이 터졌고, 이를 결정적 계기로 독립 전쟁을 치르게 되었다. 


그런데 여기서 미국 식민지가 영국에 대해 불만을 가진 점 중에는 과도한 세금 수탈 말고도 '대구 무역 제한 법'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더욱 결정적인 사항은, 독립 전쟁이 끝나고 협정을 맺을 때 가장 중점적으로 논의했던 사항이 바로 '대구잡이 권리' 였다는 사실이다. 생각해보면, 살아가는 데 일자리가 세금보다 중요하지 아니한가? 그들에게 있어 대구 어업은 생존과 직결된 사항이었던 게 아니었나 싶다. 


"아이슬란드의 200마일 영해가 전 세계의 승인을 얻은 이후로 대부분의 국가는 저마다 200마일 영해를 선언하고 나섰다. 전 세계의 기존 어장 가운데 90퍼센트는 최소한 한 나라의 해안에서 200마일 범위 안에 속했다. 이제 어민은 자연의 법칙에 따라야 할 뿐만 아니라 인간의 법률에도 따라야 했다. 이들의 주요 임무는 물고기를 가능한 한도 내에서 많이 잡는 것이 아니라 허락된 범위 내에서 많이 잡는 것으로 바뀌었다." (본문 중에서)


결국 이 책은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다. 즉, 대구의 위상이 땅바닥으로 떨어진 현실로 돌아와 1000년 왕국의 끝물을 얘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며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명확하다. 영원할 것만 같은 자연에 대한 재인식. 한 마리가 수백만 마리의 새끼를 낳을 정도로 엄청난 개체 수를 자랑하는 대구가 멸종을 향해 가고 있다면, 이 세상 어느 누가 멸종을 면할 것인가 하는 명확하고도 섬뜩한 메시지인 것이다. 


또한 인간에 의한 일방적인 자연에의 수탈 다시 보기. 끝물에 와서 비로소 인식하고 보호를 하려 하지만 이미 때가 늦어버린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이제 와서 자연과 소통하려 해보았자, 이미 너무 많은 것을 잃은 자연이 받아줄지 의문이다. 대지의 어머니 답게 언제든지 와서 모두 가져가고 언제 그랬냐는 듯 도움을 청하고 그 품 안에서 마음껏 뛰어 놀다가 무한으로 주는 것들을 받고... 그런데 고마워할 줄은 모르는 인간들. 인내심이 한계에 달하지 않았다면 이상한 일이 아니겠는가. 


저자는 이런 인간과 자연에 대한 해묵은 시선을 '대구'라는 흔하디 흔한 어류를 통해 형상화 시키고 있다. 1000년이라는 긴 세월을 돌아 왔듯이, 전하고자 하는 말도 돌고 돌아서 전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여타 인문서처럼 진중하게 그리고 지식욕이 충만하게 읽히면서도 소설처럼 재미있게 읽히기도 한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대구'를 정말 다양한 방법으로 즐기고 싶으신 분들은, 이 책의 부록 부분을 살펴보시길. 정말로 다양한 대구의 조리법이 50여 쪽에 걸쳐 실려 있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블로그 이미지

singenv

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오래된 리뷰] <칠드런 오브 맨>


<칠드런 오브 맨> ⓒUPI


전장에 울려 퍼지는 아이의 울음 소리는 전쟁의 폐해이자 전쟁으로 인한 절망을 상징한다. 전쟁으로 인해 모든 것을 잃고 할 수 있는 게 우는 것 밖에 없는 것이다. 이는 물론 어른에게도 통용되는 말이다. 그런데 영화 <칠드런 오브 맨>에서의 전장에 울려 퍼지는 아이의 울음 소리는, 이와는 완연히 다른 의미를 지닌다. 마지막 남은 단 하나의 '희망'. 아이의 울음 소리를 듣는 순간, 피 튀기는 전장의 모든 소음이 일순간 멈추는 기적을 연출하게 되는 것이다. 


<칠드런 오브 맨>은 어떤 특정한 서사적 줄거리를 갖추지 않은 채 오직 마지막 남은 '희망'인 아이의 구제를 위한 방향으로 따라가기만 한다. 주인공을 포함한 모든 인물들과 영화의 스토리와 심지어 카메라 워킹까지 그 아이에게 시선을 두는 것이다. 이는 감독의 철저한 연출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이 영화의 감독은 '알폰소 쿠아론'이다. <그래비티>로 2014년 아카데미에서 감독상을 포함해 7관왕을 수상한 바 있다. 그가 <그래비티>에서 보여준 연출은 상당 부분 <칠드런 오브 맨>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암울한 상황 설정, 스토리보다 캐릭터에게 초점을 맞추는 설정, 비록 영화는 전체적으로 정적이지만 순간적으로 굉장한 동적 연출을 시행하는 설정, 그리고 '희망'에 모든 것을 거는 설정까지. 그래서 <칠드런 오브 맨>은 알폰소 쿠아론에게도 터닝포인트이자 하나의 희망이기도 했을 것이다. 


<칠드런 오브 맨>의 한 장면. 전장에 울려 퍼지는 희망의 울음 소리. ⓒUPI



특히 감독의 연출력이 빛났던 장면이 있다. 영화 후반부 주인공들이 전투에 말려 들어간 장면이다. 이 씬에서 카메라는 주인공 테오를 따라가면서 '핸드헬드 촬영 기법'(카메라가 기계적 안전 장치에 부착되지 않아 불안정한 상태를 고스란히 전달할 수 있음)을 이용해 찍고 있다. 전투의 한 가운데에 있어 두렵지만 반드시 행해야 하는 바가 있는 주인공의 심리상태를 잘 표현하고 있다. 그러다가 아이가 울자 모든 전투가 멈추고 소음이 멎으며 한 마음으로 아이의 안녕을 바랄 때는 카메라의 워킹이 안정을 찾는 것이다.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집약적으로 보여줌과 동시에, 감독의 연출력이 빛났던 장면이다. 


영화의 배경은 2027년 영국 런던이다. 이 세계에는 '희망'이 없다. 인류는 더 이상 아기를 가질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지막 남아 있던 18세의 소년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미래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절망은 인류를 재앙과 자멸의 시대로 인도했다. 곳곳에서 테러가 발발하고, 무정부주의자들은 폭력으로 국가를 질책하며, 도처에 불법 이민자들이 넘처난다. 사람들은 평온한 죽음을 맞이 하기 위해 자살약을 섭취하곤 한다. 


<칠드런 오브 맨>의 한 장면. 곳곳에서 테러가 발발하는 재앙과 자멸의 시대. ⓒUPI



이런 와중에 테오(클라이브 오웬 분)는 관료주의자로 허송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어느 날 찾아온 옛 여인 줄리엔을 만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줄리엔은 과격한 무정부주의자로, 런던에서 악명을 떨치고 있었다. 그녀가 테오를 찾아온 이유는, 테오의 고위직 사촌의 힘을 이용해 한 소녀의 여행증을 구해달라는 것이었다. 이에 테오는 여행증을 구해주었는데, 뜻밖의 사실을 알게 된다. 그 소녀가 '임신'을 했다는 사실이었다. 


테오는 이 사실을 알고 '희망'의 안전한 운반을 위해 목숨을 거는 선택을 한다. 그녀가 흑인이든, 불법이민자든 그런 건 더 이상 중요하지 않은 사항이었다. 과 자신과 줄리엔의 아이가 죽어갔던 전력이 있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가 사회운동가 출신이기 때문일까. 둘 다 아닐 것이다. 영화는 테오의 선택이 모든 이들의 바람이자 선택이었다는 걸 보여준다. 


코맥 매카시의 소설 <로드>를 영화화한 존 힐코트 감독의 <더 로드>에서 아버지는 아들에게 말한다. "우리는 불을 운반하는 사람들이야" 하루 아침에 잿더미로 변해버린 세계에서 마지막 남은 (남을 것이라 생각되는) 이들은 마지막 남은 '희망'을 운반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결국 아버지는 죽고 아들이 살아남아 '희망'의 운반은 성공한다. <칠드런 오브 맨>은 이와 맥락을 같이 한다. 


그리스 신화를 보면, 제우스가 판도라에게 상자를 선물하며 절대로 열어 보지 말라고 말한다. 이에 판도라는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상자를 열고 만다. 그곳에서 나온 수많은 끔찍한 재앙들. 그녀는 황급히 상자를 닫는다. 그 때문에 빠져 나오지 못한 것이 하나 있었으니, '희망'이었다. 


혹자는 희망이 있어 절망 속에서도 살아간다고 하고, 혹자는 희망때문에 헛된 기대를 품고 결국 실망으로 귀결된다고 한다. 그런 면에서 이 영화는 전자에 해당된다. 후자는 아예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그 희망이 나중에 어떻게 발현되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영화는 단지 그 과정을 보여줄 뿐이다. 이 지독하게 절망적인 현실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희망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것이 부정적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영화에서 비춰지는 마지막 희망이 가지는 의미가 너무나도 뚜렷하고 어마어마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건 영화의 제목만 봐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인류의 아이'. 


<칠드런 오브 맨>의 한 장면. 인류의 마지막 희망을 잉태하다. ⓒUPI



"아이를 지켜. 무슨 일이 있던 남들이 뭐라 하던, 아이를 지켜"


한편, 이 영화는 너무나도 현실적으로 다가온다. 2027년이라는 멀지 않은 미래를 그린 것도 그렇지만, 영화의 세계에서 보여지는 면면들은 지금 이미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테러, 폭력, 불법, 전쟁, 기아, 바이러스 등. 그리고 무엇보다 출산율 저하는 3포 세대(취업, 결혼, 출산 포기)로 일컬어지는 현재의 문제점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이란 무엇인가. 이렇게 가다보면 2027년쯤 영화 속 세계처럼 되지 말라는 법이 없지 않은가. 아니, 그렇게 될 가능성이 높다는 걸 누구나 직감하고 있지 않은가.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 그리고 아마 여러 정답 중 하나는, 공존공생의 길이 아닐까 싶다. 그 방법론까지 논할 수는 없지만, 아이가 그 공존공생의 구심점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영화의 메시지는 충분한 설득력을 가진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블로그 이미지

singenv

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서평] <남자의 종말>


<남자의 종말> ⓒ민음인

'종말'이라는 단어는 참으로 흥미롭다. 인류 역사를 살펴보면, 이 단어가 상당히 많이 쓰였다. 대표적으로 노스트라다무스의 1999년 종말론이 있을 테고, 최신에는 2012년 12월 21일 종말론이 있었다. 마야달력에 이 날 이후가 없다는 논거이다. 비록 흔한 가십거리로 넘어간 느낌이 들지만, 그럼에도 그 단어에서 오는 파급력에 인간의 본성이 질 때가 많다. 


이런 힘을 이용해 유명해 지고 싶은 것이든,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어 다음 세대로 넘어가고자 하는 것이든, 그동안 '종말'이라는 단어를 쓴 거대 담론이 출현했던 것은 사실이다. 


종말 시리즈의 대표격인 제레미 리프킨은 <노동의 종말>, <소유의 종말>, <육식의 종말>, 호소력있는 현실 비판과 미래에 대한 전망을 내논 바 있다.

 

<빈곤의 종말>로 유명한 제프리 삭스는 경제 현실 비판으로, 진정한 인간적 가치 추구를 위한 경제적 실천을 강조해 왔다.

 

이밖에도 <역사의 종말>, <질병의 종말> 등의 책이 나와 있는데, 상당히 위험하고 폭발적인 주장이기 때문에 찬성과 반대가 극명하다. 지금 소개하는 책인 <남자의 종말>(민음인)도 미국 출간 후 여론의 반응이 찬성과 반대로 극명하게 갈렸다고 한다.

 

남성 우위 시대의 종언 선언


2009년은 미국에서 특별한 해라 아니할 수 없다. 최초로 미국 노동 인구 중 여성 비율이 남성을 넘어선 것이다. 20만년 동안 남성 위주였던 역사가 저물고 그 자리를 여성이 차지하게 된 것.

 

이듬해인 2010<애틀랜틱>'남자의 종말'이라는 자극적인 제목의 칼럼이 실린다. 이 칼럼은 미국의 대학 입학률, 이혼율 등을 예로 들며 남성 우위 시대의 종언을 냉정히 선언했다. 결과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고, 이 칼럼을 쓴 '해나 로진'은 관련된 칼럼, 주장, 취재 등을 종합해 책을 펴냈다.

 

이 책은 지극히 상식적인 얘기들, 거시적인 이론과 주장 같은 추상적이고 상투적인 콘텐츠를 제시하고 있지 않다. 방대한 양의 자료를 통한 분석하고, 사회 전반에 걸쳐 미치는 영향을 성찰하고 있다. 또한 억측이나 이데올로기에 얽매이지 않은 깊은 통찰력을 보여준다.

 

"지난 40년간 어떤 부분에서, 노동시장은 신체적 크기나 힘에 대체적으로 무관심해졌고, 그 이후 남자 노동자들은 더 이상 시장을 장악하지 못하고 있다. 새로운 서비스와 정보 경제에서 가치 있는 것은 사회적 지능과 열린 소통, 차분히 앉아서 필요한 자격증을 얻을 때까지 충분히 오래 집중하는 응력이다. 이 모든 영역에서 여자들은 남자들과 적어도 동등하며, 많은 부분에서 남자들을 능가한다. 기술은 남자에게 불리하게 작용하기 시작했고, 육체노동은 한물갔다고 여겨지며 경제학자들이 '대인관계 기술'이라고 부르는 것이 그 어느 때보다도 가치 있는 능력이 되었다."-본문 중에서

 

남성이 월등히 유리했던, 힘의 '전쟁''노동'의 시대는 퇴조하고 있다. 반면 '정보'와 서비스' 경제 시대에서 중요한 의사 소통력, 사회적 지능, 차분히 집중하는 능력은 동등하거나 많은 여성이 낫다고 말한다. 미래의 직업은 여자의 몫이 될 것이며, 남자들은 적응이라는 과제만 남아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 기준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앞으로의 전망이다. 현재의 상태가, 정상의 자리는 영원하고도 굳건히 남성의 차지로 남을 것임을 보여 주는 증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고, 혹은 곧 사라질 시대의 마지막 숨결을 드러내는 진실된 모습이라고 볼 수도 있다. 우리가 이 문제를 표현하는 방식조차도 최정상 권력을 움켜쥔 남성의 지배가 느슨해지고 있음을 분명하게 보여 준다."-본문 중에서

 

여성 우위 시대로의 전망 


분명한 건 있다. 적어도 비율로 따졌을 때, (평균적으로) 현재까지는 남성의 임금이 여성보다 높고 최고경영자, 국가원수, 국회위원 등 각계각층의 고위급 성비율에서도 남성이 더 높다는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미래에 대한 전망이다. 최근 몇 년 사이에 앞서 언급했던 요직의 여성 비율이 꾸준히 증가하고 있고, 앞으로는 더욱 급격히 증가할 전망이다. '남성 위주'는 이미 구시대의 유물이 되어가고 있다.

 

교육에서는 이미 여성이 우위를 차지하고 있다. OECD 국가 중 27개국에서 여성 대졸률이 남성보다 높다고 한다. 소위 여성의 눈이 높아져 멀지 않아 '시소 결혼', 즉 지금의 통념 상에 있는 결혼 모델이 반대로 바뀔 수 있다는 것이다.

 

남성이 전유물이다시피 던 주요 직업에서도 여성의 비율이 절반에 가까워지고 있다고 한다. 아이러니 하게도 상당히 가부장적인 한국이 가장 심한 나라 중 하나란다. 추락을 거듭하는 남자는 어떻게 해야하는가?

 

"최근에 베스트셀러에 오른 저서 <남자의 물건>에서 저자는 한국 남성에게 습관을 바꾸라고 조언한다. 그들의 가부장적인 형태는 사라져 가는 유물이다."-본문 중에서

 

남자와 여자, 그 본연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현실을 직시하게 만드는 책이다. 언제나 나오는 비판인 몇몇 사례로 성급한 일반화를 한다는 비판이 가능할지 모르겠다. 그럼에도 '종말'이라는 과감한 제목을 들어나온만큼 새로운 시대를 열어젖힐 거대담론 조성을 기대해 본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블로그 이미지

singenv

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티스토리 툴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