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는 좋아하지만 극장을 잘 가는 편은 아니다. 아니, 영화를 보는 횟수에 비해선 거의 안 가는 편이라고 하는 게 맞겠다. 일주일에 영화를 최소 2편 이상 보지만, 극장에 가서 영화를 보는 건 일년에 고작 몇 번 되지 않는다. 블록버스터를 즐기지 않고 작은 영화를 즐겨보기에 굳이 극장에서 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축인 것 같다. 


간혹 극장에 가면 남다르게 설렌다. 누군가에겐 허구헌 날 가는 연인과의 데이트 장소, 누군가에겐 수많은 사람들에게 치이는 일터, 누군가에겐 심심하면 들락거리는 놀이터인 극장이 말이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몇몇 극장에서의 일이, 그것도 꽤나 오래전 일이 아직도 생생하다. 많은 기억이 없는 게 이런 식으로 유용하기도 한가 보다. 


극장에서 영화를 본 첫 기억은 중학교 2학년 때 <여고괴담>이다. 찾아보니 1998년 5월 말에 개봉했다고 하는데, 98년에 중학교 2학년이었으니 기억이 정확하다. 학교에서, 우리반 전체가 가서 봤었다. 전체적인 스토리는 기억나지 않고, 충격적인 몇몇 장면만 기억난다. 그 유명한 최강희의 점프컷...


왜인지 몰라도 그때 그 기억, 극장에서 영화를 처음으로 봤던 기억이 그리 좋지는 않다. 지금 나에게 극장은 완벽한 혼자만의 영화 보기가 가능한 공간인데, 그때 기억을 떠올려보면 개판도 그런 개판이 없다. 중2 친구들이 모였으니 오죽하겠는가. 떠들고 소리지르고 욕하고 액션을 취하고. 


대지극장에서의 <쥬라기 공원 3>




그 이후 기억에 크게 남는 건 고등학교 2학년 때 <쥬라기 공원 3>이다. <쥬라기 공원 3> '따위' 때문에 기억에 남는 건 아니고, 지금은 없어진 '대지극장'과 가족들끼리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극장에서 영화를 본 기억 때문이다. 아, 아빠는 없었고 엄마랑 나랑 동생이랑 가서 봤다. 동생은 당시 중3이었다. 


당시가 2001년, 2003년에 없어진 대지극장의 마지막 즈음이었다. 대지극장은 미아삼거리(지금은 '미아사거리역'이 된 '미아삼거리역' 주위를 통칭)의 자랑이자 상징이었다. 지금은 주위에 백화점이 두 개, 종합쇼핑몰이 두 개, 이마트가 한 개 있는 강북의 중심가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발전했지만, 당시에는 대지극장이 전부였다. 


서대문의 화양극장, 영등포의 명화극장과 더불어 홍콩영화 3대장이었다고 하는데, 정작 나는 그곳에서 홍콩영화를 본 적은 없다. 수없이 많은 사람들에게서 대지극장에 관한 말을 들었고, 수없이 자주 대지극장을 지났으며, 수없이 대지극장을 갈 수 있었지만, 정작 나는 딱 한 번 <쥬라기 공원 3>을 보러 대지극장에 갔었던 것이다. 


동생이 <쥬라기 공원> 시리즈를 좋아했다. 1, 2탄은 집에서 비디오로 봤었을 텐데, 3탄만은 극장에서 보고 싶다고 했었을 테다. 당시 우리집은 아빠, 엄마가 교대로 보시는 조그마한 구멍가게를 운영했다. 평일은 고사하고 주말조차 온가족이 외부에 나가서 뭘 해본 기억이 없다. 세 가족이라도 극장 나들이를 한 건 굉장한 것이었다. 


엄마와의 영화 데이트




1965년에 생겼다는 대지극장은 2003년에 없어졌다. CGV가 우리나라 최초의 멀티플렉스 극장을 1993년 강변에 열고, 롯데시네마가 1999년 일산점에서 시작해 폭발적인 성장을 구가하고, 메가박스가 동양 최대 규모의 코엑스점을 2000년에 오픈했으니 오래 그 자리를 버텼다고 볼 수 있다. 


대지극장이 사라진 곳에는 복합쇼핑몰 트레지오가 생겼다. 그리고 그곳에 CGV가 들어섰다. 2007년의 일이다. 순전히 내 생각이지만 그곳은 망했다. 북적이던 옛 느낌, 상징과도 같았던 옛 명성이 없어졌다. 물론 영화를 보러 가면 사람들이 많은 편이다. 여느 영화관 건물처럼 엘리베이터를 이용할 수 없을 정도이니 말이다. 


<쥬라기 공원 3>을 보러 간 이후에도 엄마와 두 번을 더 극장에 갔다. 당연하게도 극장은 그곳, 옛 대지극장 자리에 들어선 CGV 미아였다. 두 번 모두 조조로 봤는데, <인셉션>과 <관상>이었다. 엄마도 아주 재밌고 알차게 보았다고 하셨으니, 엄마의 영화보는 눈썰미도 괜찮았던 것 같다. 그 이후에는 함께 가보지 못했다. 


영화를 보고 나서는, 한 번은 서로 갈 길을 갈 수밖에 없었고 한 번은 근처 아웃백스테이크하우스에 갔다. 그 또한 엄마, 나아가 가족과 처음 가보는 패밀리레스토랑이었는데, 아주 맛있게 먹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 아웃백스테이크하우스도 없어졌다. 여러 모로 아쉬움 가득 남는 엄마와의 영화 데이트다. 


하고 싶은, 해야 하는 것들


더 늦기 전에 엄마, 아니 가족들과 극장에 가보고 싶다. 아빠는 영화를 즐기지 않는다지만, 영화를 보진 않더라도 극장이란 델 함께 가보고 싶다. 그건 어찌 보면 당연히 한 번쯤 했어야 하는 수순이 아닌가 싶다. 나도 나지만, 부모님도 부모님이었다. 무심한 걸까, 무심할 수밖에 없었던 걸까. 


정말 무섭게 빠르다. 나의 만만했던 미아사거리역이 말이다. 빠르게 바뀌고 있다. CGV 미아도 도태되면 어느새 없어져버릴지 모른다. 그러면 가족들과 가고 싶어도 못 가는 게 아닌가. 꼭 그곳이어야만 하는 이유는 없지만, 이왕이면 그곳이면 좋겠다 싶다. 그곳에서 오래 산 사람들에게 '대지극장'은 특별하니까. 


무엇이든, 누구든, 사라지기 전에 해야 한다. 해야 하는 것들이 있을 테고, 함께 해야 하는 사람들이 있을 테다. 나에겐 그게 가족들과 함께 옛 대지극장 자리에 있는 CGV 미아로 영화를 보러가는 거다. 소박하다면 한없이 소박하지만, 나에겐 참으로 오랜 세월 동안 미뤄온 일이고 결코 실행에 옮기기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도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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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킬링 디어>


영화 <킬링 디어> 포스터. ⓒ오드



아이스킬로스, 소포클레스와 함께 고대 그리스의 3대 비극작가 중 한 명 에우리피데스, 그의 최고 작품 중 하나로 <아울리스의 이피게네이아>가 전해진다. 그리스 연합군 총사령관 아가멤논은 아울리스 섬에서 함대를 출발시켜 트로이로 진격해야 했는데, 바람이 멎는 바람에 그러지 못하고 있었다. 


예언자 칼카스를 통해 수호신 아르테미스의 노여움을 풀어야 한다는 신탁을 듣는다. 아가멤논이 아르테미스의 사슴을 죽이는 실수를 저질렀기 때문이었다. 그는 큰딸 이피게네이아를 제물로 바친다. 그렇게 아가멤논은 트로이전쟁을 승리로 이끈 그리스의 영웅이 된다. 


<송곳니>, <더 랍스터> 등으로 전 세계 평론가들과 씨네필들의 열열한 지지를 받은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은 <아울리스의 이피게네이아>를 모티브 삼아 신작 <킬링 디어>를 만들었다고 한다. 운명, 딜레마, 가부장제 등의 이야기와 질문과 비판을 곁들였다. 가히 고대 그리스 최고 작품에 비견될 만한 각본의 성취를 인정받아 제70회 칸영화제에서 각본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 치밀함을 엿보자. 


가족 중 한 명을 골라 죽여야 한다


영화 <킬링 디어>의 한 장면. ⓒ오드



외과의 스티븐(콜린 파렐 분)에겐 젊은 친구가 한 명 있다. 마틴(배리 케오간 분)이라는 이름의 그 친구는 스티븐의 큰딸 학교 친구로 스티븐처럼 심장병 전문의가 되고 싶다고 한다. 병원에도 들르고, 산책도 같이 하고, 서로의 집도 오간다. 마틴의 집에 갔을 때 마틴 엄마의 유혹을 뿌리치고 나온 후 스티븐은 마틴의 연락을 피한다. 


집착적인 행동을 보이는 마틴, 얼마 지나지 않아 스티븐 가족들에게 이상 징후가 발견된다. 먼저 작은아들 밥이 두 다리를 쓸 수 없어진다. 육체, 정신, 심리 검사를 다 해보았지만 아무런 문제가 없다. 머지 않아 밥은 밥도 먹지 않게 되고, 큰딸 킴도 두 다리를 쓸 수 없어진다.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마틴이 스티븐에게 설명한다. 사실상 협박이다. 마틴의 아빠가 스티븐에게 죽었다는 것이다. 그가 맡은 환자였던 마틴의 아빠는 수술대 위에서 죽었다. 마틴은 스티븐이 자신의 아빠를 죽인 것처럼 스티븐이 자기 가족 중 한 명을 죽여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야 균형이 맞는 게 아니냐고. 


만약 스티븐이 직접 죽이지 않는다면 모두 병들어서 죽을 거라는 것이다. 밥이 죽고 킴이 죽고 스티븐의 부인 안나(니콜 키드만 분)도 죽을 거란다. 수족이 마비될 것이고, 먹는 걸 거부해서 기아에 허덕이게 될 것이며, 급기야 눈에서 피가 흐를 거고, 결국 죽을 거라고 말이다. 이 믿을 수 없는 예언을 믿을 수밖에 없는 스티븐은 과연 어떻게 할 것인가? 정말 가족 중 한 명을 직접 죽일 것인가, 죽인다면 누굴 죽일 것인가. 


종교적 운명과 우연적 딜레마


영화 <킬링 디어>의 한 장면. ⓒ오드



아가멤논이 아르테미스 신의 노여움을 사서 결국 큰딸 이피게네이아를 제물로 바칠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스티븐은 마틴의 분노를 사서 결국 자기 가족 중 한 명을 직접 죽일 수밖에 없게 될 운명에 처한다. 거스를 수 없는 운명처럼 눈앞에서 벌어지는 믿을 수 없는 일들 때문에 우연으로 치부할 수도 없다. 


신의 힘에 의해 이미 정해진 처지를 바꿀 능력 따위는 인간에게 없다. 특히 과학의 세계에서 살고 있는 인간에게 들이닥친 초자연적인 힘에 의한 모습엔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할 수 있는 건 모조리 해보겠지만, 그저 지켜보고 있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다. 종교라는 게 그런 것인가, 종교인들이 할 수 있는 게 그런 것인가. 


영화는 운명의 굴레에 종속되어버린 한 가족의 모습을 통해 종교의 한 면모를 통렬하게 비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 한편, 이미 운명의 굴레 속에 들어간 또는 들어갈 수밖에 없게 된 일개 인간이 겪는 끔찍한 딜레마도 보여준다. 과연 당신이라면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말이다. 


운명이 신의 영역이라면 딜레마는 인간의 영역이다. 운명이 선택되어지는 거라면 딜레마는 선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옳고 그름, 선과 악이 나뉘어져 있지 않기 때문에 치명적이고 어렵기 그지없다. 그럴 때 찾는 게 아이러니하게도 운명이다. 절대로 선택할 수 없는 난제에 부딪혔을 때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타개하려는 게 그것이다. 영화는 딜레마에 처한 한 인간의 나약함과 무책임한 모습을 통해 종교를 비꼬고 운명을 무시하는 이들도 통렬하게 비꼬고 있는 것 같다. 


가부장제


영화 <킬링 디어>의 한 장면. ⓒ오드



자, 우리 스티븐의 얼굴을 보자. 얼굴을 뒤덮다시피 하는 '털'의 존재를 볼 수 있다. 밥은 마틴에게 겨드랑이 털을 보여줄 것을, 마틴은 스티븐에게 겨드랑이 털을 보여줄 것을 청한다. 이 세 남자 사이에서 나이순대로 보여지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은 털로 상징되는 권력, 그 본능적이고 동물적인 모습이다. 


극중에서 안나는 말한다. 왜 남편이 잘못한 걸 가지고 남편 아닌 가족들이 피해를 봐야 하느냐고 말이다. 신의 대리인 마틴의 논리는 스티븐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다. '스티븐'이 마틴의 아빠를 죽였으니, '스티븐'이 자신의 가족 중 한 명을 죽여야 한다는 것. 등가교환이라면 스티븐이 죽어 마땅하나, 신은 '가부장제'라는 절대적 법칙을 만들어 내렸으니 가장인 스티븐이 주체가 되어 가족을 죽이는 '고통'을 맞보아야 한다는 것.


이 진중하고 으스스하고 가슴 졸이게 하는 영화에서 가장 우스꽝스러운 모습이다. 당연한 듯 하나하나 실행되고 실행에 옮기려고 하지만,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행태이기도 하다. 아마도 그렇게 느끼면 느낄수록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게 그만큼 철처히 들어맞았다고 할 수 있겠다. 가부장제에 대한 통렬한 비꼼. 


여러 가지 것들을 통렬하게 비꼬는 와중에 그에 걸맞지 않아 보여 그 비꼼의 수위가 더욱 강해지게 만드는 분위기 연출에는 OST의 역할이 지대했다. 클래시컬한 OST들은 영화를 굉장히 날카롭고 불편하게 만든다. 모든 배우들이 발성하는 높낮이 없는 낮고 무성의한 목소리톤과 기묘하게 어울린다. 두 번 다시 보기 싫은 영화이지만, 여러 가지 의미로 두 번 이상 봐야 할 것 같은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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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어느 가족>


영화 <어느 가족> 포스터. ⓒ티캐스트



영화감독 누구 좋아하냐고 물을 때 '고레에다 히로카즈를 좋아한다'고 말하면 대부분 고개를 끄덕인다. 그럴 만한 감독이라는 인정과 함께, 내가 그 감독을 좋아할 거라는 예상의 적중이 내포된 끄덕임이다. 고레에다의 영화들은 일상적이고 일관적이고 안정적이고 파격적이다. 그의 영화를 관통하는 건, 일본의 우익화를 극구 비판하는 그의 성향에 빗대어 아이러니하게도 '일본'이 아닌가 싶다. 


나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영화를 좋아하지만 많이 접하진 않았다. 아니, 그의 필모를 들여다볼 때 안 본 게 더 많으니 어디 가서 그의 영화를 잘 안다고 할 입장이 아니다.  물론 앞으로 그의 영화를 빠짐없이 섭렵하려 하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알 것 같다. 그리고 감히 다다랐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의 영화들에.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1995년 <환상의 빛>으로 장편영화 연출에 데뷔하면서부터 세계 유수 영화제가 가장 사랑하는 감독 중 하나가 되었다. 그중에 눈에 띄는 건 단연 칸영화제로, <DISTANCE> <아무도 모른다> <바닷마을 다이어리>가 황금종려상 후보에 올랐었고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는 심사위원상을 차지했다. 그리고 대망의 2018년 4수 끝에 <어느 가족>으로 '당연히' 황금종려상을 수상했다. 


좀도둑 가족의 기이한 이야기


영화 <어느 가족>의 한 장면. ⓒ티캐스트



영화 <어느 가족>은 제목에서도 유추할 수 있겠는데, 가족 영화다. 그런데 어디에서나 흔히 볼 만한 그런 '어느' 가족의 이야기는 아니고, 일본 원작 영화의 제목인 '만비키(좀도둑) 가족'에서 알 수 있듯 좀도둑질을 하며 살아가는 가족의 이야기다. 일본의 수치를 전 세계 만방에 알렸다는 이유로 일본에서 관람거부 사태에까지 이르렀지만 대대적인 흥행을 이룩한 이 영화, 들여다보자. 


아빠 오사무와 아들 쇼타는 많이 해본 듯한 익숙한 솜씨로 가게를 털고 집으로 향한다. 골목 끝에 자리 잡은 작디 잡은 집에서 할머니 하츠에, 엄마 노부요, 큰딸 아키가 그들을 당연한듯 반긴다. 집으로 오는 길에 밖에 혼자 있는 여자 아이가 측은해보여 데리고 온다. 유리라고 하는 그애를 금방 데려다 주려고 했지만, 집에서 부모들이 싸우며 유리를 낳지 않으려 했다고 소리치는 말을 듣고는 다시 집으로 데리고 온다. 


이 집의 모든 이들이, 즉 가족들 모두가 유리를 반기지만 그들은 이 행동이 엄연한 유괴라는 걸 인지하지 않고 있는 것 같다. 한편 이 집이 오사무와 쇼타의 좀도둑질로만 연명되진 않는다. 오사무는 일용노동직으로 일하고, 노부요는 세탁공장에서 일하고, 아키는 유흥업소에서 일한다. 그리고 하츠에는 전 남편으로부터 꼬박꼬박 받는 연금으로 이 집이 연명하는 데 큰 도움을 주고 있다. 


알고 보니, 구성원 중 혈연으로 이어진 이는 단 한 명도 없는 이 가족, 연금과 좀도둑질로 연명해야 할 운명인 이 가족. 면면과 외양은 단죄해야 마땅한 측면이 다분하지만, 서로가 서로를 순간순간 진심으로 대하는 모습은 이 좀도둑 가족을 사랑스럽게 바라보지 않을 수 없게 한다. 그럼에도 아슬아슬한 이 가족이 어떻게 될지 궁금한 한편, 가슴 졸이며 바라보게 된다. 


가족이란 무엇인가


영화 <어느 가족>의 한 장면. ⓒ티캐스트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어느 가족>을 통해 '가족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여과없이 진지하게 던진다. 물론, 나름의 확고한 답을 같고서. 그의 '가족'에 대한 물음은 2008년 <걸어도 걸어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는데, 이후 10년 동안 꾸준히 천착해왔다. 그렇게 얻은 답은 '선택하는 가족'이라는 한마디로 축약할 수 있지 않을까. 


작금의 일본은 어떤가. 살 만 한가. 1990년대 잃어버린 10년을 지나 2000년대 잃어버린 20년까지 지났지만, 2010년대가 되어도 여전히 되찾지 못하고 있다. 결국 일본이 꺼내든 건 일명 '아베노믹스'라 불리는 경기부양책, 화폐가 무제한으로 찍히고 있다. 일어선 건 무너져가던 기업들, 무너진 건 역시 무너져가던 개인들과 개인들이 이룬 가족들. 이들은 어디로, 어떻게 가야 하는 것인가. 


고레에다는 그동안 가족을 말하면서 안으로 안으로 천착해왔다. 가족의 안팎을 함께 구성하는 것들과의 연계를 함께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가족에 대해서 말이다. <어느 가족>에 이르러 밖으로 확대하려 한다. 그래서 우린 이 영화에서 이미 무너지고 해체되어버린 가족, 그 이후의 이야기를 본다. 들여다보면 '돈' 때문일, '진짜' 가족의 폭력으로 버려진 이들의 연대가 이 좀도둑 가족의 실체다. 


'혈연은 천륜이다'라는 가족의 전통적 정의 내지 불문률은 이 영화의 이 가족들에게는 통용되지 않는다. 이들은 비록 그 이유가 잔인할 정도로 현실이성적이지만 서로 간의 필요로 뭉쳤다. 불쌍해서 데려온 유리조차도 '워킹쉐어'라는 이름으로 쇼타에게 좀도둑질을 배우는 것이다. 


그럼에도 우린 고레에다가 하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해보고 또 답을 내놓지 않을 수 없다. 이들은 가족인가? 이런 기이하기 짝이 없는 모습의 공동체를 가족이라고 할 수 있다면, 국가와 사회가 하지 못하는 걸 가족이 한다는 이유로 이들의 '나쁜 짓'들이 정당화된다는 것인가? 반대로 '진짜' 가족에게 버려진 이들이 모여 진짜 가족이 주지 못한 관심과 사랑과 그 무엇을 주었음에도 가족이라고 할 수 없다면, 이보다 못한 진짜 가족들은 모조리 해체되어야 마땅한 것이 아닌가?


버려진 이들을 지킬 이 누구인가


영화 <어느 가족>의 한 장면. ⓒ티캐스트



이 좀도둑 가족의 정의를 심각하게 생각해보며 아울러 생각하게 되는,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는 게 '버려진 이들'이다. 이 가족에는 가족에게서 버려진 이들이 있다. 하지만 이 가족 자체가 국가와 사회와 기업으로부터 버려졌다는 걸 생각해보아야 한다. 국가와 사회 전체의 동시 마이너스 성장에서 벗어나기 위해 오로지 위를 향하고 있는 일본, 저 아래는 쳐다보고 싶지도 않고 쳐다볼 여력도 없다. 


이 가족이 직면한 건, 그 누구한테도 아무런 도움을 받지 못한 경제적 어려움 즉 최소한의 사회보장망에서도 멀리 떨어져 있는 막막함과 더불어 자신들을 외양으로만 판단하면서 내면과 진실에 대해선 들여다보고 알고 생각하고 싶지도 않아 하는 데에서 오는 합리적 차별이다. 


우린 여기서 또 한 번 딜레마에 직면한다. 이 기이한 가족를 정의할 때 느꼈던 아득한 혼돈과 이성, 감성 사이를 어지럽게 오가는 딜레마를 말이다. 이들은 유리를 '유괴'한 걸, 부모가 버린 이를 주워왔다고 표현한다. 유추해보면, 유리와 달리 쇼타는 부모가 '유기'한 걸 오사무와 노부요가 주워왔을 가능성이 크다. 그들은 이 두 경우를 동일선상에서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생각해보자. 쇼타를 이들이 데려오지 않았다면 아마도 오래지 않아 죽었을 것이다. 유리를 이들이 데려오지 않았다면 부모의 계속된 폭력 밑에서 잘못 컸을 것이다. 적어도 다분히 영화적인 설정 하에서만이라도, 데려오는 게 '인간적'으로 '올바른' 처사가 아니었을까. 어느 누가 그들에게 돌을 던질 수 있겠는가. 어느 누가 이 가족에게 진짜 가족을 운운할 수 있겠는가. 


현실적 웃음과 현실적 막막함이 동시다발적으로 덥치는 이 영화 <어느 가족>, '가족'이라는 소재를 중심으로 확대해 나가는 '일본' 현실의 주제는 가히 치명적이다. 반드시 생각해야 할 것들은 지금의 나로서는, 아마도 우리로서는 쉽게 답을 내리지 못하는 것들이다. 이 영화는 그 답을 내릴 때까지, 그리고 어떤 식으로든 답을 내리고 나서도 남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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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인크레더블>


<인크레더블> 포스터. ⓒ월트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전 세계 영화판을 뒤흔들며 전례 없는 전성기를 맞이한 '슈퍼히어로', 1930년대 대공황 때 시대적 탈출구로서의 영웅으로 처음 만들어진 후 80년 동안 사랑받고 있다. 1970년대 후반의 슈퍼맨과 1980년대 후반의 배트맨이 크게 성공한 후 1990년대까지 슈퍼히어로는 DC가 책임졌다고 보면 되겠다. 


2000년대 들어서 마블이 득세한다. 2000년대 초 엑스맨과 스파이더맨, 2000년대 후반 아이언맨, 2010년대 어벤져스로 이어지는 라인업은 매우 공고하다. 하지만 조금만 들여다보면 슈퍼히어로도 부침이 있었다는 걸 알 수 있다. 1990년대 중반 이후다. 사실 2000년대 초중반까지도 슈퍼히어로는 존재의 이유가 크게 있지 않았다. 


주지했다시피 영웅은 혼란스러운 암흑기에 탄생한다. 1990년대 중반 이후부터 2000년대 중반까지 전 세계는 대체적으로 활황기였다. 위기가 와도 오래지 않아 자가재생이 가능했다. 영웅이 필요치 않았다. 


2008년 세계 경제 위기 후 거짓말처럼 아이언맨과 인크레더블 헐크를 위시해 수많은 슈퍼히어로 영화들이 쏟아져 나오는 건 우연이 아니다. 2004년에 나온 픽사의 6번째 장편 애니메이션 <인크레더블>은 슈퍼히어로가 필요치 않은 시대의 슈퍼히어로 이야기이다. 은퇴 후 일반인처럼 살아가야 하는 슈퍼히어로 가족이 주요 소재다. 


슈퍼히어로 인크레더블과 평범한 직장인 밥


<인크레더블>의 한 장면. ⓒ월트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인크레더블은 세상 모든 이에게 존경받는 슈퍼히어로다. 사소한 도움이 필요한 곳에서부터 국가적인 도움이 필요한 곳까지 모든 곳에 나타나 해결해준다. 어느 날 뜻하지 않은 일이 연달아 생긴다. 그 날은 그가 엘라스티걸과 결혼하는 날이었는데, 자살하려는 사람을 살려주고 인크레디보이라는 꼬마팬을 살리려다가 밤 보이지를 놓친 것도 모자라 기차선로를 부셔먹는 바람에 기차를 억지로 세워야 했다. 


근데 자살하려던 사람이 인크레더블을 고소한다. 살고 싶지 않았는데 살려놓았고 부상까지 당했다고 말이다. 또 기차 사고 부상자들도 그를 고소한다. 이를 시발점으로 슈퍼히어로를 상대로 한 소송이 쏟아지고 결국 정부는 그들에게 히어로 일을 그만둔다는 맹세를 받기에 이른다. 


그렇게 15년이 흘렀다. 인크레더블은 밥이라는 본래 이름으로 보험일을 하고 엘라스티걸은 헬렌이라는 본래 이름으로 전업주부가 되었다. 그들은 세 아이를 기른다. 그중 두 아이는 그들처럼 초능력이 있다. 막내는 아직 알 수 없고. 밥은 하루하루가 고역이다. 평범하게 살아가는 게 힘들 뿐 아니라 재미도 없고 감동도 없다. 


어느 날, 정부기밀기관에서 일한다는 미지의 여인으로부터 연락이 온다. 그에게 많은 돈을 주고 슈퍼히어로의 힘으로 처리해주었으면 하는 일을 제안한 것이다. 그는 회사를 때려치고 당장 그 일에 착수한다. 하지만 알고 보니 15년 전 그에게 가차 없이 퇴짜를 받았던 인크레디보이가 슈퍼히어로를 척살하고 그 자리를 본인이 차지하려는 수작의 일환이었으니... 인크레더블의 앞날은? 그리고 그의 가족들은?


슈퍼히어로를 향해


<인크레더블>의 한 장면. ⓒ월트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인크레더블>은 대체로 슈퍼히어로 영화의 범주에 속하진 않는 것 같다. 그저 픽사에서 만든, 그것도 아주 잘 만든 애니메이션 중 하나로 치부하는 인상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2000년대 초반 다시 시작된 슈퍼히어로 전성 시대, 그 초창기에 큰 역할을 했거니와 지금까지 수없이 나온 슈퍼히어로 영화들 중 단연 으뜸으로 쳐야 마땅하다. 


이 영화는 독특하다. 대다수 슈퍼히어로 영화들이 '슈퍼히어로에 의한' 것인데 반해 이 영화는 '슈퍼히어로를 향한' 것이다. 그들이 무엇을 어떻게 하는지보다 그들이 누구인지가 중요하다. 슈퍼히어로라는 '일'을 하지 않을 때 우리와 다름 없이 밥 먹고 싸고 씻고 자는 것 아닌가. 행동주체로서가 아닌 대상주체로서의 슈퍼히어로라고 해야 할까. 


원작으론 '최고'라는 수식어가 영원히 따라다닐 것이지만 영화로선 혹평과 흥행실패를 면치 못했던 <왓치맨>이 어른 거린다. 반면 흔치 않은 소재와 주제를 코믹과 진중함의 탄탄한 조화로 내보인 이 영화는 호평과 흥행성공을 쟁취할 수 있었다. 


우리에게 슈퍼히어로를 들이대는 건 각종 위기에 봉착한 전 세계의 일원으로서 알게 모르게 탈출구를 찾고 있는 심리를 이용하려는 수작이라고 하자. 그렇다면 우리가 슈퍼히어로를 찾는 이유는 무엇일까.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도 있을 텐데, 일종의 대리만족이다. 다름 아닌 내가 슈퍼히어로가 되고 싶은 마음의 발로인 것이다. 평범한(?) 슈퍼히어로 가족이 주인공인 <인크레더블>은 그 지점까지도 나아갔다. 


가족의 의미, 가족의 소중함, 가족과 함께 


<인크레더블>의 한 장면. ⓒ월트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정작 이 영화의 미덕은 다른 곳에 있을 것이다.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2편이 나오길 학수고대하고 있는 팬들의 바람도 '슈퍼히어로'의 그것이 아닌 다른 곳에 있을지 모른다. '가족'이다. 영화 시종 일관 내보이고 있는 '가족의 의미'. 밥이 다시금 슈퍼히어로라는 '꿈'이자 '지나간 영광'이자 '위험한 짓'을 꿀 때 헬렌이 말하는 '가족의 소중함'.


영화는 얼핏 헬렌을 두둔하고 있는 듯하지만 밥의 행동을 폄하하지 않는다. 그의 허황된 꿈은 남을 돕는 것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꿈을 꾸지 말고 살아가라는 말 또한 일면 허황된 것이기 때문이다. 현실과 꿈은 옳고 그름의 범주에 들어가지 않는 것이다. 양자택일의 범주에 들어갈 테지만 그리 되면 너무 가혹하지 않는가...


'가족과 함께' 꿈을 꾸면 어떨까. 당연히, 다함께 망하자는 건가 하는 말이 나올 테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가족이라는 공동체의 힘을 얕잡아보는 것이다. 헬렌이 말하는 가족의 소중함이 '돈 많이 벌어 오세요'가 아닌 '혼자 모든 걸 짊어지려 하지 마세요'로 들리는 건 나뿐일까. 가족이란 건 그런 게 아닐까. 


영화의 하이라이트로 가는 길, 강력한 적을 맞아 밥은 헬렌에게 아이들을 맡기고 홀로 가려 한다. 헬렌은 당신은 내 남편이니 죽으나 사나 같이 있을 거라 말한다. 밥은 자신이 강하지 않다고 얼버무리더니 "당신을 또 잃기 싫어. 다신... 절대! 난 그걸 견딜 만큼 강하지 못해."라고 고백한다. 이 대화야말로 이 영화의 핵심이다. 가족의 소중함, 그 의미를 되새기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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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홈>


영화 <홈> 포스터. ⓒ리틀빅픽처스



열네 살 준호는 축구를 좋아하는 평범한 중학생이다. 하지만 학교에서는 괴롭힘을 당하고 집에서는 그리 예쁨을 받진 못하는 것 같다. 준호에게는 어린 동생 성호가 있다. 귀엽고 똘망똘망한 동생을 돌볼 때면 이런저런 시름을 잃는다. 아빠는 없는 듯하고 엄마 선미는 있다. 보험일에 치여 집안을 잘 돌보지 못한다. 


그런 엄마마저도 준호와 성호의 눈앞에서 교통사고로 의식이 없다. 그녀와 함께 사고를 당한 이는 그녀가 바람핀 유부남 강원재의 부인이다. 원재는 보살펴줄 이 없는 성호를 딸 지영이 있는 자기 집으로 데려간다. 성호는 준호와 성호의 엄마와 강원재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이다. 준호의 아버지는 따로 있다. 


이 세상에 홀로 남겨진 준호다. 선미는 상태가 좋지 않고, 원재는 준호를 보살필 법적 의무는 없다. 심적 의무는 더욱 없어보인다. 하지만, 성호의 성화에 못이기는 척 당분간만 함께 살고자 한다. 점점 가족의 형태를 띄어가는 그들이지만, 선미만 세상을 떠나고 강원재의 부인은 살아날 기미를 보이며 더 이상 영위해나갈 수 없을 것 같다. 원재는 어떤 판단을 내릴까, 준호의 앞날은 어떨까. 


독립영화 제작사 아토ATO의 야심작


영화 <홈>의 한 장면. ⓒ리틀빅픽처스



영화 <홈>은 지난 2016년 <우리들>과 2017년 <용순>에 이은 관계&성장 3부작의 마지막이다. 한국 최고의 독립영화 제작사로 우뚝 서고 있는 '광화문시네마'와는 다른 시선의 독립영화를 내놓고 있는 '아토ATO'의 세 번째 야심작이기도 하다. 아토ATO는 한국예술종합학교 대학원 동창끼리 합심해 만든 광화문시네마처럼,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기획 전공 출신 프로듀서들이 모여 만든 제작사라고 한다. 


김종우 감독은 이 영화 이전의 두 단편을 통해 끔찍한 상황에 처한 이들의 이야기를 내보였다. 소외된 이들이라고 할 수도 있을 텐데, 한국 독립영화 계보에서 가장 특출난 이야기를 양산해내는 소재와 주제가 바로 소외이다. <홈> 또한 끔찍한 상황에 처한 소외된 이의 이야기일 것이다. 


주지했다시피 아토ATO가 내놓은 작품들은 모두 관계와 성장을 주요 테마로 내세웠다. <홈>도 그 범주 안에 있는데, <우리들>이 '권력'을 <용순>이 '심리'를 또 하나의 주요 테마에 상정한 것처럼 <홈>은 '가족'을 또 하나의 주요 테마에 상정했다. <우리들>이 대대적인 성공을, 그에 반해 <용순>에 실패에 가까운 퍼포먼스를 선보였는데, <홈>은 어떨까? 


아이들과 어른들


영화 <홈>의 한 장면. ⓒ리틀빅픽처스



러시아의 대문호 레프 톨스토이의 대표작 <안나 카레니나>의 유명한 첫 구절은 다음과 같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고만고만하지만 무릇 불행한 가정은 나름나름으로 불행하다." 그래서 가족이나 가정을 콘텐츠화시켜 보여줄 때는 행복이 아닌 불행으로 점철된 이야기를 만드는가 보다. 


영화 <홈>은 열네 살 준호가 주인공으로 그의 순수한 두 동생들과 함께 천진난만한 세계를 구축하며 더할 나위 없는 행복한 가정을 영위하려 한다. 엄마 선미의 무관심에 가까운 행태에도 성호를 잘 보살펴온 준호다. 그런 그에게 우유부단하지만 착한 면이 있는 원재, 그리고 동생들의 존재는 그 자체로 충분한 것이다. 


하지만 그들을 그렇게 만든 어른들의 세계는 그야말로 막장이다. 선미는 결혼해 준호를 낳았고 바람을 펴 원재와의 사이에서 성호를 낳았고 원재는 부인과의 사이에서 지영을 낳았다. 준호의 아빠는 떠났고 선미 혼자 준호와 성호를 키우는 와중 원재의 부인이 찾아와 함께 어디론가 가는 도중 동반 교통사고가 나 의식불명이 된 것이다. 


그럼에도 원재와 준호와 성호와 지영은 한 가족을 이룰 수 있을까? 영화의 제목이 'house' 아닌 'home'이라는 점에 어떤 방점이 찍히는 것일까? 단순한 객체로서의 '집'이 아닌 가족이 사는 주체로서의 '집' 말이다. 막장과 천진난만함 사이에서 길을 잃고 방황하는 준호가 아닌, 이어질 수 없을 것 같은 이 둘 사이를 잇는 유일한 끈으로서의 준호가 되길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이런 가족도, 이런 집도 있는 법이다. 


관계와 가족


영화 <홈>의 한 장면. ⓒ리틀빅픽처스



어른들과 아이들, 가족과 가족, 학교와 집, 준호는 그 사이 어딘가에서 끊임없이 맴돌 뿐이다. 열네 살이라는 어른도 아닌 아이도 아닌 나이, 죽어가는 엄마 선미 하나로 이어질 뿐인 가족의 끈, 자기를 괴롭히는 친구들이 있는 학교와 자기가 보살펴야 하는 동생들이 있는 집. 그 경계에서 준호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게 별로 없다.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관계'란 준호라는 경계인이 겪는 사면초가 상황에서의 끔찍한 관계 형성인 것이고,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관계 외의 또 다른 메인 테마인 '가족'은 막장이라는 지반 위에 또는 막장 뒤에 숨겨진 천진난만함에 있다. 


찰리 채플린이 말했던가.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고. 이 가족의, 이 아이들의 천진난만함은 분명 희극처럼 보일 수 있다. 보기만 해도 웃음꽃이 피어나는 모습이 희극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하지만 조금만 더 들여다보면 비극도 이런 비극이 없다. 희극의 장본인인 이 아이들이야말로 비극의 씨앗인 것이다.


비극의 씨앗이 두루두루 잉태한 불행한 가족, 하지만 이 가족은 겉으로는 또는 멀리서 보면 희극이자 행복이다. 희극이자 행복은 천진난만의 아이들의 것이어야 하고, 비극과 불행은 막장의 어른들이 감당해야 할 몫이다. 그 경계에 있는 준호라고 하지만, 최소한 그에게 어른들이 비극과 불행의 끄트머리에라도 경험하게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건 그가 조금이라도 감당해야 할 몫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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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간 책 다시읽기] 천명관 소설가의 <고령화 가족>


소설 <고령화 가족> 표지 ⓒ문학동네



쫄딱 망한 영화감독에 아내와 이혼한 후 혼자 사는 마흔여덟의 중년 남자 '나'는 죽기보다 싫은 일을 감행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칠순이 넘는 엄마 집에 얹혀살게 된 것. 칠순이 넘은 엄마는 별말 없이 나를 받아 주었고 이후에도 아무것도 묻지 않은 채 그저 묵묵히 나를 챙겨줄 뿐이다. 뿐만 아니라 엄마는 그 연세에도 화장품을 팔러 밖으로 부지런히 돌아다닌다. 아버지는 교통사고를 당해 돌아가셨다.  


엄마 집에는 쉰두 살이 된 형 '오한모', 일명 '오함마'가 얹혀살고 있었다. 그는 백이십 킬로그램, 폭력과 강간, 사기와 절도로 얼룩진 전과 5범의 변태성욕자, 정신불구의 거대한 괴물... 한마디로 인간망종이다. 교도소를 오가고 사업을 말아먹은 후 엄마 집에 삼 년째 눌어붙어 있다. 얼마 안 가 셋째 미연이까지 딸 민경이를 데리고 엄마 집에 들어왔다. 개 같은 인간인 두 번째 남편이 툭하면 술을 처먹고 들어와 개 패듯 하여 집을 나와버렸다는 것이다. 


몇십 년만에 다시 모인 삼 남매는 평균 나이 사십구 세에 칠순 넘은 엄마 집에 얹혀살게 되었다. 굳이 속을 들여다볼 필요도 없이 이미 콩가루 집안임에 분명해 보이는 이 집안, 그 와중에도 나는 믿기 힘들고 믿기 싫은 집안의 과거사와 속사정을 하나하나 알게 된다. 이놈의 집구석... 안 그래도 밑바닥인 나를 어둠의 심연까지 밀어넣는구나... 우리 삼 남매와 엄마 그리고 민경이는 어떻게 될까? 어떻게 해야 할까?


이야기꾼 천명관


소설 <고령화 가족>(문학동네)은 이 시대 대표적 이야기꾼 천명관 작가가 지난 2010년에 두 번째로 내놓은 장편소설이다. 여러 직업을 전전하다 서른 줄에 이르러 영화판에 뛰어들었고 몇몇 시나리오는 영화화되었지만 마흔 줄까지 메가폰을 잡지 못해 문학판으로 와 지금에 이른 천명관 작가의 파란만장 인생이 담겨 있는 듯하다. 


사실 <고령화 가족> 이후에 내놓은 소설들, 특히 장편소설들 <나의 삼촌 브루스 리>(예담)나 <이것이 남자의 세상이다>(예담)에도 그만의 향기가 진하게 풍긴다. 영화판과 문학판을 오가며 어느 한 곳에 온전히 발 붙이지 못하는 그의 애환 또는 속성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것이다. 공통적으로 밑바닥 인생을 그리고 있고 말이다. 


그는 그 스스로도 말하듯 문학에서 인정 받았지만 영화에 적을 두고 싶다고 하는데, 그래서인지 그의 소설들에서는 문학 아닌 영화쪽 냄새(?)가 진하게 풍긴다. 그것도 아주 노골적인 대중영화. 그의 소설은 너무너무 재밌고 너무너무 잘 읽힌다. 더불어 진한 페이소스를 느낄 수 있다. 


이 소설은 소소할 수 있는 누구나의 가족 이야기이지만, 웃지 않고 못 배길 요소들이 곳곳에 깔려 있지만, 개인의 인생이나 사회를 관통하는 감당못할 메시지가 담겨져 있는 것도 아니지만, 그래서 선뜻 '아끼는' 소설이라고 말하기 힘들 수 있지만, 다름 아닌 천명관의 소설이기에 '아껴 읽는' 소설이라고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다. 


막장 가족


소설은 '막장' 가족의 의미와 '밑바닥' 인생들을 말하고 있을 테다. '가족'과 '인생'은 누구를 막론하고 자신을 이루는 가장 큰 개념들이다. 그래서 가장 중요하고 가장 공을 들인다. 하지만 제대로 꾸려 나가기가 가장 힘들기도 하다. 가족과 인생은 필연적으로 이 '세상'과 맞물려 돌아가기 때문이다. 세상이 내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지 않은가. 


막장이 되어버린, 아니 이미 되어버렸던 이 가족은 다시 모이받니 콩가루가 되어버린다. 도무지 답이 없는 구제불능의 이 가족이지만, 주요 구성원 삼 남매는 쉽게 저버리지 못한다. 그래도 이 세상에 나를 받아줄 곳은 여기 뿐이라서. 그리고 쉽게 저버리지 않는다. 그래도 이 세상에서 이들을 받아줄 사람은 나밖에 없으니. 


가족의 의미가 더 이상 혈연에 의한 천륜에 전적으로 의지하고 기대는 데 있지 않다. 가족에 있어 '관계'가 중심이 되어야 하는 시대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소설에서 보이는 막장 콩가루 가족의 모습은 혈연에 의한 천륜이 아닌 관계로 비춰지기에 충분하다. 거기엔 서로에 대한 의무와 책임보다 차라리 서로에 대한 노력과 학습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물론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힌 상황 연출이 선행되어 있었지만 말이다. 작가가 메시지를 그런 식으로 전달한 것일 테다. 


밑바닥 인생


일본의 나오키상 수상자 나카지마 교코의 장편소설 <어쩌다 대가족, 오늘만은 무사히!>(예담)를 보면 사회에서 낙오된 밑바닥 인생들이 가족의 품으로 돌아와 대가족을 이뤄 살게 되는데, <고령화 가족> 또한 얼핏 비슷해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이 소설에서의 가족은, 가족의 구성원들은 마냥 받아주지 않는다. 그렇다고 나갈 때 나간다고 말하지도 않는다. 


세상에 둘도 없는 따뜻한 보금자리도 아니거니와, 한 번 발 디디면 절대 나갈 수 없는 감옥 같은 곳도 아니다. 어찌 보면 굉장히 이성적이다 못해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들의 집합소처럼 보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가족은 다시 쓰여져야 한다. 그래야 한다고 믿는다. 


이 소설은 그런 메시지를 한 축에 놓고 천명관 작가만의 세계관을 구축하는 주요한 키워드인 '밑바닥 인생'을 한 축에 놓아 나아간다. 이 '비정상적인' 이들이 아니었다면 사실은 비정상적일 수 있는 작금의 '정상적인' 가족의 행태에 따끔한 일침을 놓지 못했을 것이 자명하다. 참으로 건들기 힘든 부분을 이토록 예리하면서도 수려하게 돌리도 돌려서 말할 수 있는 작가의 능력에 정녕 감탄의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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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온리 더 브레이브>


영화 <온리 더 브레이브> 포스터. ⓒ코리아스크린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에는 여러 유형이 있다. 모티브만 따오고 완전히 다른 내용으로 각색한 유형, 그리 유명하지 않지만 그 사건 안에 충분한 내러티브와 메시지가 있다고 판단한 경우가 많다. 내용은 같은데 재해석한 유형, 유명하지만 논란의 여지가 많은 사건을 다룬 경우가 많다. 


그리고 모티브도 내용도 메시지도 캐릭터도 모두 거의 그대로 가져오되 큰 틀이 바뀌지 않게 영화적 요소들만 가미한 유형, 유명하거니와 논란의 여지도 없고 충분한 내러티브와 메시지와 감동까지 있는 실화를 다룬 경우라 하겠다. 전무후무한 사건에 휘말린 사람(들)이 더할 나위 없는 인간 승리의 모습을 선사하면 100%이다. 


영화 <온리 더 브레이브>는 전무후무한 사건에 휘말린 사람들의 실화를 다뤘다. 불과 5년 전, 미국 애리조나주의 주도인 피닉스에서 북서쪽으로 80마일 떨어진 야넬힐에서 발생한 산불을 진화하던 소방대원 19명이 몰살한 사건이다. 이 산불로 9.11 테너 이후 가장 많은 소방대원이 사망했다고 한다. 


그래닛 마운틴 핫 샷


영화 <온리 더 브레이브>의 한 장면. ⓒ코리아스크린



크루 7 소방팀, 실력 좋은 소방대원들로 구성되었지만 '핫 샷'이 아니기에 매번 뒷전이다. 실력을 보여줄 기회조차 없다. 팀장 에릭(조슈 브롤린 분)은 단장 두에인(제프 브리지스 분)을 통해 시장에게 직접 부탁해 '핫 샷' 승급 심사를 요청한다. 가까스로 얻은 기회, 에릭은 신입 소방대원들을 모집한다. 


브렌든(마일즈 텔러 분)은 일전에 잠깐 소방대원의 꿈을 꿨지만 지금은 마약에 찌들어 사는 약쟁이일 뿐이다. 그는 딸이 생긴다는 말을 듣고 개과천선의 기회로 크루 7의 소방대원 모집에 지원한다. 에릭은 대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를 받아들이고, 그는 남들보다 수십 배는 지옥일 훈련과 동료들의 질타를 묵묵히 또 성실하게 이겨낸다. 


우여곡절 끝에 '그래닛 마운틴 핫 샷'이 된 크루 7 소방팀, 실력을 인정받고 전국 방방곡곡으로 지원을 나간다. 그들은 여지없이 수많은 산림과 집과 사람들을 살려낸다. 그러면 그럴수록 가족들에게서 멀어지는 아픔을 겪는 그들이다. 한편, 애리조나주 야넬힐에서 발생한 산불에 투입되는 그들, 별 거 아닐 거라 생각했던 불은 상상을 초월하는 엄청난 불길로 번지고 마는데... '핫 샷' 크루 7 소방팀은 이를 어찌 돌파할까?


액션보다 드라마


영화 <온리 더 브레이브>의 한 장면. ⓒ코리아스크린



'핫 샷'은 산불 초기에 방어선 구축을 위해 투입되는 최정예 소방대원팀을 말하는데, 그들은 땅을 파고 나무를 잘라 경계선을 만들고 맞불을 놓아 산불이 더 이상 번지는 걸 막는 임무를 맡는다. 즉, '핫 샷'은 불을 끄는 소방팀이 아니라 불을 막는 소방팀인 것이다. 정녕 최정예만이 해낼 수 있는 일이다. 


영화는 얼핏 액션을 기반으로 한 재난 영화로 비춰지기 쉽다. 예를 들면, 상상을 초월하는 초대형 산불이 엄청난 피해를 입히지만 그에 대항해 획기적인 방법으로 진압에 성공하는 최정예들의 이야기 말이다. 하지만 <온리 더 브레이브>는 그런 방법을 크게 비껴간다. 이 영화는 '드라마'인 것이다. 


우리는 이 영화로 소방대원의 일상을 들여다볼 뿐이다. 그저 그들의 일이란 게 매순간 죽음을 각오하고 있기 때문에, 스펙타클하게 보이고 느끼는 것이다. 그들은 수많은 산불 화재에 투입되어 자신의 일을 한다. '핫 샷'이 되기 위해 수없이 훈련을 받는다. 전장에 투입된 군인들의 전우애 버금가는 우정과 가족들 간의 갈등도 크게 다가온다. 


영웅들의 비극


영화 <온리 더 브레이브>의 한 장면. ⓒ코리아스크린



실화이기에 이미 잘 알려져 있다시피, 야넬힐 산불에 투입된 '그래닛 마운틴 핫 샷' 팀은 20명 중 브렌든만 제외한 19명이 현장에서 몰살했다. 에릭 팀장이 '휩쓸고 지나가면 세상의 종말 같을 거다. 하지만 숨만 쉬면 산다'고 하며 철저히 방어 훈련을 했음에도, 그들은 살아남을 수 없었다. 그야말로 생각지도 못한 비극적 실화의 결말이다. 


영화는 사실을 알고 봐도 생각지 못한 타이밍에 홀연히 떠나버리고 만 대원들에 대비해, 살아남은 브렌든과 몰살한 대원들의 가족들에게 불어닥친 거대한 재앙 같은 슬픔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그게 이 영화를 만든 또 하나의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인간으로선 이길 수 없는 대재앙에 스러져 간 영웅들의 살아생전 모습을 보여주는 것뿐 아니라 그들을 제대로 기리고 기억하는 것. 


영화 자체는 비록 '전형적'이라는 용어의 큰 개념에서조차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하지만, 그런 하자라면 하자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을 슬그머니 옆으로 치워버리게 만드는 힘이 있다. 묵직하고 진지하며 올곧게 나아가는 느낌이랄까, 최소한 '볼 만하다'는 타이틀 정도는 충분히 가질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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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미스 리틀 선샤인>


영화 <미스 리틀 선샤인> 포스터 ⓒ이십세기폭스코리아



여기 가족 3대가 있다. 헤로인 상습 복용으로 양로원에서 쫓겨난 할아버지, 15살 손자에게 가급적 많은 여자와 자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의 아들 리차드는 9단계 성공의 법칙으로 강의를 하고 책도 팔아 대대적인 성공을 하려 하지만, 집에서도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하다. 리차드의 아내 쉐릴은 그런 리차드를 못마땅해 하면서도, 기대를 거는 한편 집안을 챙기느라 정신이 없다. 저녁은 매일같이 닭튀김이다.


쉐릴의 남동생 프랭크는 자칭 전미 최고의 프루스트 학자이지만, 사랑을 잃은 게이이자 전미 최고의 프루스트 학자 자리를 빼앗기고 자살 시도 끝에 살아 돌아왔다. 리차드와 쉐릴의 큰 아이 15살 드웨인은 공군사관학교를 갈 때까지 묵언 수행 중인데 9개월 째이고, 작은 아이 7살 올리브는 똥똥한 배와 특출날 것 없는 외모를 지녔지만 유독 미인대회 출전에 집착한다. 


이 각기 너무 다른 개성을 지닌 6명은 이런저런 이유로 올리브가 겨우겨우 출전하게 된 '미스 리틀 선샤인' 대회를 향해 함께 간다. 대회가 열리는 곳은 캘리포니아, 그들이 사는 알버커키에서는 너무나도 먼 거리가 떨어져 있다. 여유가 안 되니 비행기로는 갈 수 없고, 결국 그들은 폭스바겐 마이크로 버스로 1박 2일의 여정을 떠난다. 이 가족 같지 않은 가족의 여정은 순탄할까?


가족 로드 무비


영화 <미스 리틀 선샤인>의 한 장면. ⓒ이십세기폭스코리아



영화 <미스 리틀 선샤인>은 완벽한 가족 로드 무비이다. 100분의 러닝타임 중 20여 분을 캐릭터 설명에 투자하고, 60여 분을 가족의 여정에 투자하며, 20여 분을 미스 리틀 선샤인 대회에 투자한다. 즉,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그들의 미스 리틀 선샤인 대회를 향한 여정인 것이다. 


로드 무비에는 사람을 설레게 하는 무엇이 있다. 목적이 불분명하거나 없을 때보다 분명한 목적이 있을 때 더 다양하고 깊은 재미를 느낄 수 있는데, 이 영화는 그 기대에 완벽히 부합하고 있다.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왜 해야 하는지 정확하게 인지한 상태에서 출발한 여정이기 때문이다. 우린 그들에게 감정을 이입할 수밖에 없다.


문제는, 아니 이 영화가 해결해야 하는 건, 무조건 이 콩가루 가족을 한 데로 뭉치게 하면서도 절대 오그라들지 않아야 하며 너무 진지하지도 너무 코믹하지도 않아야 한다는 점이다. 그건 연출이나 연기보다 각본이 좋아야 할 텐데, 이 영화는 영화의 구성요소 중에서 각본이 가장 훌륭했다. 


코미디와 페이소스


영화 <미스 리틀 선샤인>의 한 장면. ⓒ이십세기폭스코리아



작년에 개봉해 괜찮은 평을 들었던 <빌리 진: 세기의 대결>의 감독 커플이기도 한 조나단 데이턴과 발레리 페이스 부부는 광고, 뮤직비디오, 다큐멘터리를 찍다가 이 영화로 유명세를 떨쳤다. 그들의 특기는 몇 편 되지 않는 연출작에서 보이듯이 코미디와 페이소스가 결합한 드라마인 듯하다. 


이 콩가루 가족을, 각각의 개성이 너무나도 뚜렷해 굳이 하나로 합칠 필요까지 있나 싶은 가족을 한 데 합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그들이 힘을 합치지 않을 수 없는 일이 터져야 하겠다. 그 일들의 과정은 제법 진지하지만 코믹하고 그 일들의 결과에는 자못 은은히 풍겨 나오는 페이소스가 묻어 있다. 


영화는 6명 하나하나에 관심을 두고 사려깊게 들여다본다. 처음에는 일일이 보여주다가, 리차드와 쉐릴, 할아버지와 올리브, 프랭크와 드웨인으로 짝을 짓고는, 마지막에서는 그야말로 멋지게 한 데 뭉친다. 뭉치지 않아도 가족은 가족이라고? 물론이다. 하지만, 다른 누구도 아닌 가족이 서로가 서로를 위해 뭉치는 건 좋아 보이지 않나. 


너무나도 웃겨서 웃음을 참을 수 없게 되는 타이밍을 지나, 자신도 모르게 눈물 한 방울이 주르륵 흘러 내리는 타이밍이 도래한다. 그러고 나서는 나를 돌아보고, 나의 가족을 돌아본다. 우리도 여행 한번 떠나볼까?


때묻지 않은 위안을 선사하다


영화 <미스 리틀 선샤인>의 한 장면. ⓒ이십세기폭스코리아



<미스 리틀 선샤인>은 종종 대놓고 영화적이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캐릭터들이고, 누구나 한 번쯤 해봤을 여행이거니와, 온갖 문제에 직면하면서도 어떻게든 헤쳐나가는 건 우리 모두의 삶이 아닌가 말이다. 이 영화는 그래서 영화적이다. 우리 삶은 언제나 코믹하지도 않고 페이소스를 뿜어내지도 않는다. 아주 가끔, 아주 순간적으로 그럴 뿐이다. 영화는 그 한순간을 포착해 확대재생산 해낸 것이다. 


그래서 우린 이 영화에서 어떤 교훈이나 인생에 두고두고 남을 만한 메시지를 얻지 못할 수 있다. 충분히 그럴 만한 요소가 있을 것 같은데 말이다. 대신 힘들 때나 우울할 때 뭔가 잘 풀리지 않을 때 언제고 찾을 만하다. 그때마다 <미스 리틀 선샤인>은 때묻지 않은 위안을 선사할 것이다. 그 여운이 길지는 않을 지라도. 


이혼, 파산, 자살, 좌절, 죽음, 실패에 직면한 이들의 모습과 프랭크가 존경해 마지 않은 완벽한 패배자 프루스트의 삶 그리고 한 마디가 결합한 위안도 적절하다. 프루스트는 진짜 직업을 가져본 적도 없이 짝사랑만 한 동성애자로, 아무도 읽지 않는 책을 20년에 걸쳐 썼다. 하지만 셰익스피어 이후 최고의 작가로 칭송받고 있다. 


그런 그가 말년에 자신의 삶을 되돌아 보며 '힘겨웠던 시절들이 삶에서 가장 좋았던 시기'라고 했다고 한다. 그게 자신을 만들었니까 말이다. 반면 행복했던 시절에는 아무것도 배운 게 없다는 것이다. 이 말은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주요 개념이자 우리에게 수줍게 보내는 유일한 메시지일 수 있다. 하지만 그게 아니더라도 영화 자체로 의미다운 의미를 지닌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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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리뷰] <코코>


<코코> 포스터.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픽사, 디즈니, 혹은 픽사&디즈니는 거의 매해 우리를 찾아와 거의 실망을 안기지 않았다. 세상이 점점 디지털화 되어가는 만큼 최첨단 디지털 기술로 나날이 완벽해가는 애니메이션을 선보이는 동시에, 살아가는 데 기본 중에 기본이 되는 지극한 아날로그적 가치를 선보인다. 그 조화는 가히 환상적이다. 


픽사&디즈니의 애니메이션이 아이들보다 어른들에게 더 와닿는 연유가 역설적으로 거기에 있다 하겠다. 조금이라도 더 어른일수록 조금이라도 더 아날로그적인 습성이 남아 있지 않겠는가. 그걸 접해본 사람이라면 그리워하지 않을 수 없고 말이다. 영화 <코코>의 기본은 '가족' '사랑' '우정' '화해' '기억' 등의 가치이다. 


<코코>는 멕시코라는 이질적이라면 이질적이고 친숙하다면 친숙한 곳의 '죽은 자의 날'이라는 멕시코 전통 명절을 배경으로, 현실과 비현실이 만나고 삶과 죽음이 모이며 흩어진 가족과 멀어진 사랑이 다시 만난다. 그 가장 중요한 키를 '코코'가 지니고 있지만, 그 사이사이를 이어주는 이들은 따로 있다. 


죽은 자의 날, 미구엘의 모험 아닌 모험


죽은 자의 날, 미구엘의 모험 아닌 모험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아빠가 음악가인 한 가족이 있었다. 그들은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즐거운 나날을 보냈다. 하지만 아빠는 꿈을 이루기 위해 가족을 뒤로 하고는 떠나버린다. 홀로 남은 엄마는 살기 위해 신발을 만든다. 그녀는 신발 만드는 법을 온가족에게 퍼뜨리고 집안 자체가 신발 만드는 기업이 된다. 여기 그 아빠와 엄마를 고조할아버지와 고조할머니로 둔 미구엘이 있다. 하지만 그는 음악을 좋아라 한다...


미구엘의 고조할아버지 때문에 멕시코에서 유일하다시피 음악을 멀리하게 된 미구엘의 집안, 그럼에도 그는 멕시코 최고의 음악가 에르네스토 델라 크루즈의 '기회를 잡아라'라는 말을 듣고는 꼭 음악가 광장에서 연주를 하려고 한다. 할머니가 부셔버린 기타 대신 그가 택한 기타는 델라 크루즈 납골당에 전시해놓은 기타. 


하필 그 날은 '죽은 자의 날', 미구엘은 그 기타를 훔쳐 한번 튕기는 순간, 죽은 자의 세계로 가버리고 만다. 미구엘은 다시 산 사람의 세계로 돌아가고자 하는데, 이멜다 고조할머니는 음악을 절대 하지 않는다는 조건 하에 그의 저주를 풀어주고자 한다. 하지만 미구엘은 그런 조건이라면 사절! 우연한 기회에 자신의 고조할아버지라고 믿게된 델라 크루즈에게 축복을 받고자 길을 떠난다. 


기억, 사랑, 통섭...


기억, 사랑, 통섭...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죽은 자의 날'은 스페인의 침략 이전부터 이어져 내려온 멕시코의 전통 명절이다. 해골과 뼈 모양의 조형물이나 사탕을 만들고, 죽은 사람의 사진과 이름을 제단에 올리고는, 여러 종류의 축제를 연다. 이승과 저승이 이때만큼은 한 곳에 모여 어울리는 것이다. 영화에서도 굉장히 중요하게 비치는 바, 제단에 사진과 이름이 올라가 있지 않으면 저승에 있는 이가 이승으로 갈 수 없다. '기억'의 소중함...


멕시코에서 음악은 곧 삶이다. 멕시코인들은 비록 고단한 삶이지만 와중에 '사랑'을 최고의 가치로 치며 스페인 등의 풍습과 문화가 혼합된 특유의 낭만과 열정이 이를 뒷받침한다. 음악은 사랑을 표현하기 위한 최고의 수단인 것이다. 한편 잘 드러내려고 하진 않지만 이면에 항상 있는 슬픔 또한 음악만큼 잘 표현해낼 수 있는 수단이 없다. 미구엘의 가족이 음악으로 흩어졌다지만 반드시 음악으로 다시 뭉칠 수밖에 없을 거다. 


<코코>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가치는 픽사&디즈니가 추구하는 가치와 일맥상통하는 '통섭'이 아닐까 한다. 서로 소통하고, 전체 또는 부분들을 하나로 잇는 것 말이다. 미구엘과 그의 강아지 친구 단테는 참으로 꼬이고 꼬여 대대로 끊어져버린 태초의 끈을, 음악이라는 그 끈을 다름 아닌 음악으로 잇고자 한다. 그 와중에 가족이 있고 사랑이 있고 화해가 있고 기억이 있다. 그 작업은 쉽지 않지만 반드시 해내고 말 것이다. 


삶과 죽음이 하나되는 시간


삶과 죽음이 하나되는 시간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아쉬운 부분도 없지 않아 있다. 가족이라는 명제를 다시 생각해야 하는 시대에 전통적이기 짝이 없는 케케묵은 가족 개념을 선보이고 있다는 점, 살아생전 얼마나 잘 살았냐에 따라 죽어서도 계급이 나뉘어 지는 듯한 모습 등 말이다. 보편적이고 아날로그적인 가치를 전하기 위해 희생할 수밖에 없었다고 하지만, 조금 더 신경 써 주었으면 하는 부분들이다. 


그럼에도 영화는 급기야 20년이 넘은 기억부터 5년 전 기억까지 불러낸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증조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외삼촌이 돌아가셨을 때... 어떤 건 희미해져 한 장면 정도밖에 기억나지 않고, 어떤 건 여전히 생생하기 그지 없어 가슴이 아리고 쓰린 그 기억들이 차례로 떠오른다. 그들이 기억하는 게 그들로 하여금 저승에서조차 사라지지 않게 한다는 영화 속 깨달음. 


한편, 충격이라면 충격일 수 있지만 따뜻하기 그지 없게 다가온 부분도 거기에 있다. 삶과 죽음이 하나되는 장면,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이 한 곳에 모여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며 삶과 죽음 모든 것들을 축복한다. 우리에게 죽음은 너무나도 먼, 무섭고 두려운 무엇이 아닌가. 우리도 제사를 지내며 조상님을 모시지만 그건 굉장히 엄숙한 자리가 아닌가. 멕시코가 부러워지는 것이다, 이 영화 한 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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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초행>


2017년 마지막을 장식한 독립영화 <초행>. ⓒ㈜인디플러그


결혼한 지 만 2년에 다가간다. 적어도 나에게는 꿈꾸던 결혼생활과 크게 다르지 않는 것 같아, 당연하게 생각되어지기 시작한 이 생활에서 때때로 신기함을 느낀다. 여기서 절대적으로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내가 '남자'라는 것, 내가 아닌 남자가 꿈꾸던 결혼생활에 가깝다는 건 여자에겐 정반대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우린 연애 7년 차에 결혼에 다다랐다. 나는 결혼이라는 걸 꼭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항상 옆에 있고 싶었다. 무엇을 하든 함께 하고 싶었다. 부부인 건 물론, 친구이자 동반자이자 또 하나의 나였다. 그러나 쉽지 않은 게 있다. 모든 면에서 균형을 유지하는 게 말이다. 


영화 <초행>은 연애 7년 차에 접어든 30대 커플의 이야기이다. 우리나라에선 자연스러운 일일까, 이 정도 시간 동안 만난 30대 커플이면 '결혼'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이 또한 자연스러운 일일까, 이들의 관계에 있어 '가족'이 차지하는 비중은 절대적이다. 그들의 이야기는 곧 우리의 이야기이다. 


모든 삶의 길은 초행길이고 또한 가시밭길이기에...


모든 길이 초행길일 것이다. 그리고 모두 가시밭길일 것이다. ⓒ㈜인디플러그



연애 7년 차 커플 수현(조현철 분)과 지영(김새벽 분), 그들은 동거 중이고 지영이 생리 끊긴 지 2주째라 걱정하고 있다. 임신의 가능성이 있다는 걸 모를 리 없는 수현은 좋아하는 반응도 걱정하는 반응도 없이 그저 '진짜로?'만 되풀이하며 더 이상의 생각을 하기 싫어하는 눈치다. 자연스레 걱정은 지영에게로 집약된다. 


수현과 지영은 인천에 있는 지영네 집과 강원도 삼척에 있는 수현네 집을 차례로 방문한다. 편안하고 무난한 지영네 집에서의 일일, 다만 엄마가 지영이에게 결혼 압박을 가한다. 남들처럼 결혼한 딸 자랑도 하며 손주 또는 손녀도 돌보고 싶다는 것이다. 지영은 이 집에서 내 의견은 없다며 반발한다. 


한편, 수현 아버지 환갑 잔치 겸사 처음 수현네 집에 방문하는 그들. 지영은 곧바로 수현 엄마와 일을 하고 수현은 하릴없이 돌아다닌다. 저녁이 되어서 수현 엄마가 운영하는 횟집에 모이는 일가족. 말 한 마디 없던 수현 아빠가 취하더니 돌변하고 만다. 그렇게 잔치 아닌 잔치를 파하고 만다. 


어느 집을 가도 마음 편할 길 없는 수현과 지영, 더군다나 그들은 각각 좌절의 미술 강사이고 불안의 방송국 계약직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의지하고 보살펴주는 것만으로는 온전하기 힘든 삶의 양태가 아닌가. 그렇지만 그 또한 삶, 모든 삶의 길들은 누구나에게 초행길이기에 또한 가시밭길이기에 누구에게 묻기도 누구를 탓할 수도 없다. 


초행길의 어려움에, 현실의 부정적 작태


영화는 현실의 부정적 작태를 예리하게 포착한다. ⓒ㈜인디플러그



영화에서 단연 중요한 모티브는 제목과 같은 '초행길'이다. 수현과 지영이 연애에서 결혼으로 가는 길이나, 서로의 집으로 찾아가서 생전 처음보는 어른들과 너무나도 깊은 인생의 선택을 종용받는 일 모두 마찬가지이다. 그들은 그 길을 따라 내비게이션 없는 차를 타고 간다. 길을 잃기도 하고 헤매기도 하는 건 당연한 일. 


여기서 왜 내비게이션도 없이 길을 나서는가 하는 건 중요하지 않다. 내비게이션 없이 길을 나서는 건 참으로 위험하고 고된 일이지만, 어쩔 수 없이 나서야 하는구나 하는 상황 자체가 중요하다. 아니, 중요하게 다루어진다. 그것이야말로 이 영화의 핵심적 장치. 그들은 영화의 시작부터 끝까지 길을 헤매지 않는 법이 없다. 


영화는 참으로 현실적이다. 여기서 현실적이라는 건 주연 배우들의 연기가 연기 같지 않다는 것에서 기인하기도 하지만, 수현과 지영이 투영하는 '남자'와 '여자'의 모습에 있다. 단 한 장면만으로도 남자와 여자의 차이를 알 수 있는데, 수현이 지영네 집에 갔을 때 가장 처음 한 건 안마의자에 앉아보는 일이었고 지영이 수현네 집에 갔을 때 가장 처음 한 건 수현 엄마와 함께 수현 아빠 환갑 잔치를 준비하는 일이었다.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라고 주장할 생각이라면 일찌감치 접어두는 게 좋을 것이다. 이밖에도 이 영화에서만 수없이 많은 장면을 근거로 댈 수 있거니와, 굳이 이 영화를 볼 필요도 없이 실생활에서 몇몇 장면들만 생각해보아도 훨씬 더 다양하고 적확한 근거를 댈 수 있지 않겠는가. 잔잔하고 오밀조밀하게 초행길의 어려움을 표현하는 와중에, 세심한 날카로움으로 현실의 부정적 작태를 보여주니 감복할 따름이다. 


이 시대, 청춘의 길이란


결국, 이 시대를 조망하는 영화이다. 청춘의 길이란 무얼까. ⓒ㈜인디플러그



결국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건 이 시대상이다. 그중에서도 이 시대의 청춘. 행복하지 않았던 과거, 좌절하는 현재, 불안한 미래를 떠앉고 살아가는 청춘의 길이란, 그게 초행길이라서 힘들고 헤매는 것 따위와는 비교할 수 없는 어려움이다. 거기엔 넘어야 할 산들이 너무나 많다. 


특히 이 영화가 집중하는 건 '지영'일 텐데, 그래서 더 특별하게 다가온다. 2016년 말에 나와서 지난해 초유의 베스트셀러에 등극한 소설 <82년생 김지영>이 생각나게 하는 이름으로, 청춘의 물리적이고 정신적인 힘듦을 지나 다음 '단계'에 진입하려 할 때 그녀에게만 짓누르는 엄청난 압박들. 그 압박에는 가장 힘이 되어주어야 할 수현의 압박 또한 있으며 그것이 가장 견디기 힘들다. 


그들이 어떤 길로 나아가 어떤 결과를 도출할지는 모른다. 헤어질 수도 결혼할 수도, 아기를 낳을 수도 낳지 않을 수도, 그들의 직장에서 그저 현실에 안주하며 때론 좌절하고 때론 불안에 떨 수도 뭔가 다른 길을 찾을 수도 있다. 남들이 가는 길을 따라갈 수도, 자신들이 정한 기준에 따라 길을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자, 우린 이 영화로 충분하고도 넘치는 공감을 받는다. 저건 내 이야기니까. 그렇다면 위로는 받을 수 있을까, 좋은 방법을 얻을 수 있을까. 아니, 그러지는 못할 것 같다. 본래 공감과 위로는 함께 따라오는 법인데, 이번 경우는 그러지 못할 것이다. 저런 수많은 어려움이 계속해서 우리를 따라올 거라는 확신만 생길 뿐이다. 


영화는 더할 나위 잘 만들어진, 나무랄 데 없는 수작이다. 군더더기 없지만, 수많은 생각들이 들게 만들며 아련한 여운까지 남긴다. 몇 번이고 다시 봐도 지루함 없이 헤아릴 요소들을 이러저리 굴려볼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일말의 판타지적 요소를 찾을 수 없는 칙칙한 현실에 씁쓸해지는 걸 막을 길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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