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온리 더 브레이브>


영화 <온리 더 브레이브> 포스터. ⓒ코리아스크린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에는 여러 유형이 있다. 모티브만 따오고 완전히 다른 내용으로 각색한 유형, 그리 유명하지 않지만 그 사건 안에 충분한 내러티브와 메시지가 있다고 판단한 경우가 많다. 내용은 같은데 재해석한 유형, 유명하지만 논란의 여지가 많은 사건을 다룬 경우가 많다. 


그리고 모티브도 내용도 메시지도 캐릭터도 모두 거의 그대로 가져오되 큰 틀이 바뀌지 않게 영화적 요소들만 가미한 유형, 유명하거니와 논란의 여지도 없고 충분한 내러티브와 메시지와 감동까지 있는 실화를 다룬 경우라 하겠다. 전무후무한 사건에 휘말린 사람(들)이 더할 나위 없는 인간 승리의 모습을 선사하면 100%이다. 


영화 <온리 더 브레이브>는 전무후무한 사건에 휘말린 사람들의 실화를 다뤘다. 불과 5년 전, 미국 애리조나주의 주도인 피닉스에서 북서쪽으로 80마일 떨어진 야넬힐에서 발생한 산불을 진화하던 소방대원 19명이 몰살한 사건이다. 이 산불로 9.11 테너 이후 가장 많은 소방대원이 사망했다고 한다. 


그래닛 마운틴 핫 샷


영화 <온리 더 브레이브>의 한 장면. ⓒ코리아스크린



크루 7 소방팀, 실력 좋은 소방대원들로 구성되었지만 '핫 샷'이 아니기에 매번 뒷전이다. 실력을 보여줄 기회조차 없다. 팀장 에릭(조슈 브롤린 분)은 단장 두에인(제프 브리지스 분)을 통해 시장에게 직접 부탁해 '핫 샷' 승급 심사를 요청한다. 가까스로 얻은 기회, 에릭은 신입 소방대원들을 모집한다. 


브렌든(마일즈 텔러 분)은 일전에 잠깐 소방대원의 꿈을 꿨지만 지금은 마약에 찌들어 사는 약쟁이일 뿐이다. 그는 딸이 생긴다는 말을 듣고 개과천선의 기회로 크루 7의 소방대원 모집에 지원한다. 에릭은 대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를 받아들이고, 그는 남들보다 수십 배는 지옥일 훈련과 동료들의 질타를 묵묵히 또 성실하게 이겨낸다. 


우여곡절 끝에 '그래닛 마운틴 핫 샷'이 된 크루 7 소방팀, 실력을 인정받고 전국 방방곡곡으로 지원을 나간다. 그들은 여지없이 수많은 산림과 집과 사람들을 살려낸다. 그러면 그럴수록 가족들에게서 멀어지는 아픔을 겪는 그들이다. 한편, 애리조나주 야넬힐에서 발생한 산불에 투입되는 그들, 별 거 아닐 거라 생각했던 불은 상상을 초월하는 엄청난 불길로 번지고 마는데... '핫 샷' 크루 7 소방팀은 이를 어찌 돌파할까?


액션보다 드라마


영화 <온리 더 브레이브>의 한 장면. ⓒ코리아스크린



'핫 샷'은 산불 초기에 방어선 구축을 위해 투입되는 최정예 소방대원팀을 말하는데, 그들은 땅을 파고 나무를 잘라 경계선을 만들고 맞불을 놓아 산불이 더 이상 번지는 걸 막는 임무를 맡는다. 즉, '핫 샷'은 불을 끄는 소방팀이 아니라 불을 막는 소방팀인 것이다. 정녕 최정예만이 해낼 수 있는 일이다. 


영화는 얼핏 액션을 기반으로 한 재난 영화로 비춰지기 쉽다. 예를 들면, 상상을 초월하는 초대형 산불이 엄청난 피해를 입히지만 그에 대항해 획기적인 방법으로 진압에 성공하는 최정예들의 이야기 말이다. 하지만 <온리 더 브레이브>는 그런 방법을 크게 비껴간다. 이 영화는 '드라마'인 것이다. 


우리는 이 영화로 소방대원의 일상을 들여다볼 뿐이다. 그저 그들의 일이란 게 매순간 죽음을 각오하고 있기 때문에, 스펙타클하게 보이고 느끼는 것이다. 그들은 수많은 산불 화재에 투입되어 자신의 일을 한다. '핫 샷'이 되기 위해 수없이 훈련을 받는다. 전장에 투입된 군인들의 전우애 버금가는 우정과 가족들 간의 갈등도 크게 다가온다. 


영웅들의 비극


영화 <온리 더 브레이브>의 한 장면. ⓒ코리아스크린



실화이기에 이미 잘 알려져 있다시피, 야넬힐 산불에 투입된 '그래닛 마운틴 핫 샷' 팀은 20명 중 브렌든만 제외한 19명이 현장에서 몰살했다. 에릭 팀장이 '휩쓸고 지나가면 세상의 종말 같을 거다. 하지만 숨만 쉬면 산다'고 하며 철저히 방어 훈련을 했음에도, 그들은 살아남을 수 없었다. 그야말로 생각지도 못한 비극적 실화의 결말이다. 


영화는 사실을 알고 봐도 생각지 못한 타이밍에 홀연히 떠나버리고 만 대원들에 대비해, 살아남은 브렌든과 몰살한 대원들의 가족들에게 불어닥친 거대한 재앙 같은 슬픔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그게 이 영화를 만든 또 하나의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인간으로선 이길 수 없는 대재앙에 스러져 간 영웅들의 살아생전 모습을 보여주는 것뿐 아니라 그들을 제대로 기리고 기억하는 것. 


영화 자체는 비록 '전형적'이라는 용어의 큰 개념에서조차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하지만, 그런 하자라면 하자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을 슬그머니 옆으로 치워버리게 만드는 힘이 있다. 묵직하고 진지하며 올곧게 나아가는 느낌이랄까, 최소한 '볼 만하다'는 타이틀 정도는 충분히 가질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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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미스 리틀 선샤인>


영화 <미스 리틀 선샤인> 포스터 ⓒ이십세기폭스코리아



여기 가족 3대가 있다. 헤로인 상습 복용으로 양로원에서 쫓겨난 할아버지, 15살 손자에게 가급적 많은 여자와 자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의 아들 리차드는 9단계 성공의 법칙으로 강의를 하고 책도 팔아 대대적인 성공을 하려 하지만, 집에서도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하다. 리차드의 아내 쉐릴은 그런 리차드를 못마땅해 하면서도, 기대를 거는 한편 집안을 챙기느라 정신이 없다. 저녁은 매일같이 닭튀김이다.


쉐릴의 남동생 프랭크는 자칭 전미 최고의 프루스트 학자이지만, 사랑을 잃은 게이이자 전미 최고의 프루스트 학자 자리를 빼앗기고 자살 시도 끝에 살아 돌아왔다. 리차드와 쉐릴의 큰 아이 15살 드웨인은 공군사관학교를 갈 때까지 묵언 수행 중인데 9개월 째이고, 작은 아이 7살 올리브는 똥똥한 배와 특출날 것 없는 외모를 지녔지만 유독 미인대회 출전에 집착한다. 


이 각기 너무 다른 개성을 지닌 6명은 이런저런 이유로 올리브가 겨우겨우 출전하게 된 '미스 리틀 선샤인' 대회를 향해 함께 간다. 대회가 열리는 곳은 캘리포니아, 그들이 사는 알버커키에서는 너무나도 먼 거리가 떨어져 있다. 여유가 안 되니 비행기로는 갈 수 없고, 결국 그들은 폭스바겐 마이크로 버스로 1박 2일의 여정을 떠난다. 이 가족 같지 않은 가족의 여정은 순탄할까?


가족 로드 무비


영화 <미스 리틀 선샤인>의 한 장면. ⓒ이십세기폭스코리아



영화 <미스 리틀 선샤인>은 완벽한 가족 로드 무비이다. 100분의 러닝타임 중 20여 분을 캐릭터 설명에 투자하고, 60여 분을 가족의 여정에 투자하며, 20여 분을 미스 리틀 선샤인 대회에 투자한다. 즉,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그들의 미스 리틀 선샤인 대회를 향한 여정인 것이다. 


로드 무비에는 사람을 설레게 하는 무엇이 있다. 목적이 불분명하거나 없을 때보다 분명한 목적이 있을 때 더 다양하고 깊은 재미를 느낄 수 있는데, 이 영화는 그 기대에 완벽히 부합하고 있다.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왜 해야 하는지 정확하게 인지한 상태에서 출발한 여정이기 때문이다. 우린 그들에게 감정을 이입할 수밖에 없다.


문제는, 아니 이 영화가 해결해야 하는 건, 무조건 이 콩가루 가족을 한 데로 뭉치게 하면서도 절대 오그라들지 않아야 하며 너무 진지하지도 너무 코믹하지도 않아야 한다는 점이다. 그건 연출이나 연기보다 각본이 좋아야 할 텐데, 이 영화는 영화의 구성요소 중에서 각본이 가장 훌륭했다. 


코미디와 페이소스


영화 <미스 리틀 선샤인>의 한 장면. ⓒ이십세기폭스코리아



작년에 개봉해 괜찮은 평을 들었던 <빌리 진: 세기의 대결>의 감독 커플이기도 한 조나단 데이턴과 발레리 페이스 부부는 광고, 뮤직비디오, 다큐멘터리를 찍다가 이 영화로 유명세를 떨쳤다. 그들의 특기는 몇 편 되지 않는 연출작에서 보이듯이 코미디와 페이소스가 결합한 드라마인 듯하다. 


이 콩가루 가족을, 각각의 개성이 너무나도 뚜렷해 굳이 하나로 합칠 필요까지 있나 싶은 가족을 한 데 합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그들이 힘을 합치지 않을 수 없는 일이 터져야 하겠다. 그 일들의 과정은 제법 진지하지만 코믹하고 그 일들의 결과에는 자못 은은히 풍겨 나오는 페이소스가 묻어 있다. 


영화는 6명 하나하나에 관심을 두고 사려깊게 들여다본다. 처음에는 일일이 보여주다가, 리차드와 쉐릴, 할아버지와 올리브, 프랭크와 드웨인으로 짝을 짓고는, 마지막에서는 그야말로 멋지게 한 데 뭉친다. 뭉치지 않아도 가족은 가족이라고? 물론이다. 하지만, 다른 누구도 아닌 가족이 서로가 서로를 위해 뭉치는 건 좋아 보이지 않나. 


너무나도 웃겨서 웃음을 참을 수 없게 되는 타이밍을 지나, 자신도 모르게 눈물 한 방울이 주르륵 흘러 내리는 타이밍이 도래한다. 그러고 나서는 나를 돌아보고, 나의 가족을 돌아본다. 우리도 여행 한번 떠나볼까?


때묻지 않은 위안을 선사하다


영화 <미스 리틀 선샤인>의 한 장면. ⓒ이십세기폭스코리아



<미스 리틀 선샤인>은 종종 대놓고 영화적이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캐릭터들이고, 누구나 한 번쯤 해봤을 여행이거니와, 온갖 문제에 직면하면서도 어떻게든 헤쳐나가는 건 우리 모두의 삶이 아닌가 말이다. 이 영화는 그래서 영화적이다. 우리 삶은 언제나 코믹하지도 않고 페이소스를 뿜어내지도 않는다. 아주 가끔, 아주 순간적으로 그럴 뿐이다. 영화는 그 한순간을 포착해 확대재생산 해낸 것이다. 


그래서 우린 이 영화에서 어떤 교훈이나 인생에 두고두고 남을 만한 메시지를 얻지 못할 수 있다. 충분히 그럴 만한 요소가 있을 것 같은데 말이다. 대신 힘들 때나 우울할 때 뭔가 잘 풀리지 않을 때 언제고 찾을 만하다. 그때마다 <미스 리틀 선샤인>은 때묻지 않은 위안을 선사할 것이다. 그 여운이 길지는 않을 지라도. 


이혼, 파산, 자살, 좌절, 죽음, 실패에 직면한 이들의 모습과 프랭크가 존경해 마지 않은 완벽한 패배자 프루스트의 삶 그리고 한 마디가 결합한 위안도 적절하다. 프루스트는 진짜 직업을 가져본 적도 없이 짝사랑만 한 동성애자로, 아무도 읽지 않는 책을 20년에 걸쳐 썼다. 하지만 셰익스피어 이후 최고의 작가로 칭송받고 있다. 


그런 그가 말년에 자신의 삶을 되돌아 보며 '힘겨웠던 시절들이 삶에서 가장 좋았던 시기'라고 했다고 한다. 그게 자신을 만들었니까 말이다. 반면 행복했던 시절에는 아무것도 배운 게 없다는 것이다. 이 말은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주요 개념이자 우리에게 수줍게 보내는 유일한 메시지일 수 있다. 하지만 그게 아니더라도 영화 자체로 의미다운 의미를 지닌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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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코코>


<코코> 포스터.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픽사, 디즈니, 혹은 픽사&디즈니는 거의 매해 우리를 찾아와 거의 실망을 안기지 않았다. 세상이 점점 디지털화 되어가는 만큼 최첨단 디지털 기술로 나날이 완벽해가는 애니메이션을 선보이는 동시에, 살아가는 데 기본 중에 기본이 되는 지극한 아날로그적 가치를 선보인다. 그 조화는 가히 환상적이다. 


픽사&디즈니의 애니메이션이 아이들보다 어른들에게 더 와닿는 연유가 역설적으로 거기에 있다 하겠다. 조금이라도 더 어른일수록 조금이라도 더 아날로그적인 습성이 남아 있지 않겠는가. 그걸 접해본 사람이라면 그리워하지 않을 수 없고 말이다. 영화 <코코>의 기본은 '가족' '사랑' '우정' '화해' '기억' 등의 가치이다. 


<코코>는 멕시코라는 이질적이라면 이질적이고 친숙하다면 친숙한 곳의 '죽은 자의 날'이라는 멕시코 전통 명절을 배경으로, 현실과 비현실이 만나고 삶과 죽음이 모이며 흩어진 가족과 멀어진 사랑이 다시 만난다. 그 가장 중요한 키를 '코코'가 지니고 있지만, 그 사이사이를 이어주는 이들은 따로 있다. 


죽은 자의 날, 미구엘의 모험 아닌 모험


죽은 자의 날, 미구엘의 모험 아닌 모험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아빠가 음악가인 한 가족이 있었다. 그들은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즐거운 나날을 보냈다. 하지만 아빠는 꿈을 이루기 위해 가족을 뒤로 하고는 떠나버린다. 홀로 남은 엄마는 살기 위해 신발을 만든다. 그녀는 신발 만드는 법을 온가족에게 퍼뜨리고 집안 자체가 신발 만드는 기업이 된다. 여기 그 아빠와 엄마를 고조할아버지와 고조할머니로 둔 미구엘이 있다. 하지만 그는 음악을 좋아라 한다...


미구엘의 고조할아버지 때문에 멕시코에서 유일하다시피 음악을 멀리하게 된 미구엘의 집안, 그럼에도 그는 멕시코 최고의 음악가 에르네스토 델라 크루즈의 '기회를 잡아라'라는 말을 듣고는 꼭 음악가 광장에서 연주를 하려고 한다. 할머니가 부셔버린 기타 대신 그가 택한 기타는 델라 크루즈 납골당에 전시해놓은 기타. 


하필 그 날은 '죽은 자의 날', 미구엘은 그 기타를 훔쳐 한번 튕기는 순간, 죽은 자의 세계로 가버리고 만다. 미구엘은 다시 산 사람의 세계로 돌아가고자 하는데, 이멜다 고조할머니는 음악을 절대 하지 않는다는 조건 하에 그의 저주를 풀어주고자 한다. 하지만 미구엘은 그런 조건이라면 사절! 우연한 기회에 자신의 고조할아버지라고 믿게된 델라 크루즈에게 축복을 받고자 길을 떠난다. 


기억, 사랑, 통섭...


기억, 사랑, 통섭...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죽은 자의 날'은 스페인의 침략 이전부터 이어져 내려온 멕시코의 전통 명절이다. 해골과 뼈 모양의 조형물이나 사탕을 만들고, 죽은 사람의 사진과 이름을 제단에 올리고는, 여러 종류의 축제를 연다. 이승과 저승이 이때만큼은 한 곳에 모여 어울리는 것이다. 영화에서도 굉장히 중요하게 비치는 바, 제단에 사진과 이름이 올라가 있지 않으면 저승에 있는 이가 이승으로 갈 수 없다. '기억'의 소중함...


멕시코에서 음악은 곧 삶이다. 멕시코인들은 비록 고단한 삶이지만 와중에 '사랑'을 최고의 가치로 치며 스페인 등의 풍습과 문화가 혼합된 특유의 낭만과 열정이 이를 뒷받침한다. 음악은 사랑을 표현하기 위한 최고의 수단인 것이다. 한편 잘 드러내려고 하진 않지만 이면에 항상 있는 슬픔 또한 음악만큼 잘 표현해낼 수 있는 수단이 없다. 미구엘의 가족이 음악으로 흩어졌다지만 반드시 음악으로 다시 뭉칠 수밖에 없을 거다. 


<코코>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가치는 픽사&디즈니가 추구하는 가치와 일맥상통하는 '통섭'이 아닐까 한다. 서로 소통하고, 전체 또는 부분들을 하나로 잇는 것 말이다. 미구엘과 그의 강아지 친구 단테는 참으로 꼬이고 꼬여 대대로 끊어져버린 태초의 끈을, 음악이라는 그 끈을 다름 아닌 음악으로 잇고자 한다. 그 와중에 가족이 있고 사랑이 있고 화해가 있고 기억이 있다. 그 작업은 쉽지 않지만 반드시 해내고 말 것이다. 


삶과 죽음이 하나되는 시간


삶과 죽음이 하나되는 시간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아쉬운 부분도 없지 않아 있다. 가족이라는 명제를 다시 생각해야 하는 시대에 전통적이기 짝이 없는 케케묵은 가족 개념을 선보이고 있다는 점, 살아생전 얼마나 잘 살았냐에 따라 죽어서도 계급이 나뉘어 지는 듯한 모습 등 말이다. 보편적이고 아날로그적인 가치를 전하기 위해 희생할 수밖에 없었다고 하지만, 조금 더 신경 써 주었으면 하는 부분들이다. 


그럼에도 영화는 급기야 20년이 넘은 기억부터 5년 전 기억까지 불러낸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증조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외삼촌이 돌아가셨을 때... 어떤 건 희미해져 한 장면 정도밖에 기억나지 않고, 어떤 건 여전히 생생하기 그지 없어 가슴이 아리고 쓰린 그 기억들이 차례로 떠오른다. 그들이 기억하는 게 그들로 하여금 저승에서조차 사라지지 않게 한다는 영화 속 깨달음. 


한편, 충격이라면 충격일 수 있지만 따뜻하기 그지 없게 다가온 부분도 거기에 있다. 삶과 죽음이 하나되는 장면,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이 한 곳에 모여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며 삶과 죽음 모든 것들을 축복한다. 우리에게 죽음은 너무나도 먼, 무섭고 두려운 무엇이 아닌가. 우리도 제사를 지내며 조상님을 모시지만 그건 굉장히 엄숙한 자리가 아닌가. 멕시코가 부러워지는 것이다, 이 영화 한 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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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초행>


2017년 마지막을 장식한 독립영화 <초행>. ⓒ㈜인디플러그


결혼한 지 만 2년에 다가간다. 적어도 나에게는 꿈꾸던 결혼생활과 크게 다르지 않는 것 같아, 당연하게 생각되어지기 시작한 이 생활에서 때때로 신기함을 느낀다. 여기서 절대적으로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내가 '남자'라는 것, 내가 아닌 남자가 꿈꾸던 결혼생활에 가깝다는 건 여자에겐 정반대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우린 연애 7년 차에 결혼에 다다랐다. 나는 결혼이라는 걸 꼭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항상 옆에 있고 싶었다. 무엇을 하든 함께 하고 싶었다. 부부인 건 물론, 친구이자 동반자이자 또 하나의 나였다. 그러나 쉽지 않은 게 있다. 모든 면에서 균형을 유지하는 게 말이다. 


영화 <초행>은 연애 7년 차에 접어든 30대 커플의 이야기이다. 우리나라에선 자연스러운 일일까, 이 정도 시간 동안 만난 30대 커플이면 '결혼'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이 또한 자연스러운 일일까, 이들의 관계에 있어 '가족'이 차지하는 비중은 절대적이다. 그들의 이야기는 곧 우리의 이야기이다. 


모든 삶의 길은 초행길이고 또한 가시밭길이기에...


모든 길이 초행길일 것이다. 그리고 모두 가시밭길일 것이다. ⓒ㈜인디플러그



연애 7년 차 커플 수현(조현철 분)과 지영(김새벽 분), 그들은 동거 중이고 지영이 생리 끊긴 지 2주째라 걱정하고 있다. 임신의 가능성이 있다는 걸 모를 리 없는 수현은 좋아하는 반응도 걱정하는 반응도 없이 그저 '진짜로?'만 되풀이하며 더 이상의 생각을 하기 싫어하는 눈치다. 자연스레 걱정은 지영에게로 집약된다. 


수현과 지영은 인천에 있는 지영네 집과 강원도 삼척에 있는 수현네 집을 차례로 방문한다. 편안하고 무난한 지영네 집에서의 일일, 다만 엄마가 지영이에게 결혼 압박을 가한다. 남들처럼 결혼한 딸 자랑도 하며 손주 또는 손녀도 돌보고 싶다는 것이다. 지영은 이 집에서 내 의견은 없다며 반발한다. 


한편, 수현 아버지 환갑 잔치 겸사 처음 수현네 집에 방문하는 그들. 지영은 곧바로 수현 엄마와 일을 하고 수현은 하릴없이 돌아다닌다. 저녁이 되어서 수현 엄마가 운영하는 횟집에 모이는 일가족. 말 한 마디 없던 수현 아빠가 취하더니 돌변하고 만다. 그렇게 잔치 아닌 잔치를 파하고 만다. 


어느 집을 가도 마음 편할 길 없는 수현과 지영, 더군다나 그들은 각각 좌절의 미술 강사이고 불안의 방송국 계약직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의지하고 보살펴주는 것만으로는 온전하기 힘든 삶의 양태가 아닌가. 그렇지만 그 또한 삶, 모든 삶의 길들은 누구나에게 초행길이기에 또한 가시밭길이기에 누구에게 묻기도 누구를 탓할 수도 없다. 


초행길의 어려움에, 현실의 부정적 작태


영화는 현실의 부정적 작태를 예리하게 포착한다. ⓒ㈜인디플러그



영화에서 단연 중요한 모티브는 제목과 같은 '초행길'이다. 수현과 지영이 연애에서 결혼으로 가는 길이나, 서로의 집으로 찾아가서 생전 처음보는 어른들과 너무나도 깊은 인생의 선택을 종용받는 일 모두 마찬가지이다. 그들은 그 길을 따라 내비게이션 없는 차를 타고 간다. 길을 잃기도 하고 헤매기도 하는 건 당연한 일. 


여기서 왜 내비게이션도 없이 길을 나서는가 하는 건 중요하지 않다. 내비게이션 없이 길을 나서는 건 참으로 위험하고 고된 일이지만, 어쩔 수 없이 나서야 하는구나 하는 상황 자체가 중요하다. 아니, 중요하게 다루어진다. 그것이야말로 이 영화의 핵심적 장치. 그들은 영화의 시작부터 끝까지 길을 헤매지 않는 법이 없다. 


영화는 참으로 현실적이다. 여기서 현실적이라는 건 주연 배우들의 연기가 연기 같지 않다는 것에서 기인하기도 하지만, 수현과 지영이 투영하는 '남자'와 '여자'의 모습에 있다. 단 한 장면만으로도 남자와 여자의 차이를 알 수 있는데, 수현이 지영네 집에 갔을 때 가장 처음 한 건 안마의자에 앉아보는 일이었고 지영이 수현네 집에 갔을 때 가장 처음 한 건 수현 엄마와 함께 수현 아빠 환갑 잔치를 준비하는 일이었다.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라고 주장할 생각이라면 일찌감치 접어두는 게 좋을 것이다. 이밖에도 이 영화에서만 수없이 많은 장면을 근거로 댈 수 있거니와, 굳이 이 영화를 볼 필요도 없이 실생활에서 몇몇 장면들만 생각해보아도 훨씬 더 다양하고 적확한 근거를 댈 수 있지 않겠는가. 잔잔하고 오밀조밀하게 초행길의 어려움을 표현하는 와중에, 세심한 날카로움으로 현실의 부정적 작태를 보여주니 감복할 따름이다. 


이 시대, 청춘의 길이란


결국, 이 시대를 조망하는 영화이다. 청춘의 길이란 무얼까. ⓒ㈜인디플러그



결국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건 이 시대상이다. 그중에서도 이 시대의 청춘. 행복하지 않았던 과거, 좌절하는 현재, 불안한 미래를 떠앉고 살아가는 청춘의 길이란, 그게 초행길이라서 힘들고 헤매는 것 따위와는 비교할 수 없는 어려움이다. 거기엔 넘어야 할 산들이 너무나 많다. 


특히 이 영화가 집중하는 건 '지영'일 텐데, 그래서 더 특별하게 다가온다. 2016년 말에 나와서 지난해 초유의 베스트셀러에 등극한 소설 <82년생 김지영>이 생각나게 하는 이름으로, 청춘의 물리적이고 정신적인 힘듦을 지나 다음 '단계'에 진입하려 할 때 그녀에게만 짓누르는 엄청난 압박들. 그 압박에는 가장 힘이 되어주어야 할 수현의 압박 또한 있으며 그것이 가장 견디기 힘들다. 


그들이 어떤 길로 나아가 어떤 결과를 도출할지는 모른다. 헤어질 수도 결혼할 수도, 아기를 낳을 수도 낳지 않을 수도, 그들의 직장에서 그저 현실에 안주하며 때론 좌절하고 때론 불안에 떨 수도 뭔가 다른 길을 찾을 수도 있다. 남들이 가는 길을 따라갈 수도, 자신들이 정한 기준에 따라 길을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자, 우린 이 영화로 충분하고도 넘치는 공감을 받는다. 저건 내 이야기니까. 그렇다면 위로는 받을 수 있을까, 좋은 방법을 얻을 수 있을까. 아니, 그러지는 못할 것 같다. 본래 공감과 위로는 함께 따라오는 법인데, 이번 경우는 그러지 못할 것이다. 저런 수많은 어려움이 계속해서 우리를 따라올 거라는 확신만 생길 뿐이다. 


영화는 더할 나위 잘 만들어진, 나무랄 데 없는 수작이다. 군더더기 없지만, 수많은 생각들이 들게 만들며 아련한 여운까지 남긴다. 몇 번이고 다시 봐도 지루함 없이 헤아릴 요소들을 이러저리 굴려볼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일말의 판타지적 요소를 찾을 수 없는 칙칙한 현실에 씁쓸해지는 걸 막을 길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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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당신과 함께한 순간들>


단조로운 내레이션에 숨은 어려운 삶에의 철학이 돋보이는 영화 <당신과 함께한 순간들> ⓒ싸이더스



내가 태어나기도 훨씬 전에, 아버지조차 말도 못 할 아기 시절에 돌아가신 할머니를 내가 기억할리는 없다. 그런 할머니가 나는 익숙하고 그런 할머니의 형상이 그려지는 건 누군가로부터 전해들었을 할머니에 대한 기억을 아버지한테 전해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은 그렇게 누군가의 기억 속에 살아 있다.


하지만, 그 기억들이 모두 정확할리 만무하다. 머릿속 어딘가엔 정확한 기억이 있지만 능력 상 꺼내지 못하는 것이든, 애초에 걸러서 기억하거나 어느 한 순간 또는 마지막 순간만 기억하는 것이든, 원본의 기억이 아닌 편집본의 기억이라는 것이다. 마치 역사와 같지 않은가. 사실도출에의 노력을 추구하지만, 영원히 그렇게는 불가능하다.


영화 <당신과 함께한 순간들>은 기억의 취사선택과 기억의 이어짐이라는 다분히 추상적인 주제를 가장 앞에 둔다. 여기에 역시 추상적이기 짝이 없는 관계라든지, 가족이라든지, 사랑이라든지 하는 주제를 따르게 한다. 하지만, 한 사람에 대한 기억의 순간을 눈앞에 실증적으로 불러내는 인간 형상 홀로그램이, 이 잔잔한 이야기에 심심한 파동을 일으켜 많은 주제들의 추상이 형상화된다.


인간 홀로그램


인간 형상의 홀로그램에 기억을 심어 마치 그때 그 사람과 얘기하는 듯한 느낌. 이 영화의 주요 볼거리다. ⓒ싸이더스



여든다섯의 할머니 마조리(로이스 스미스 분) 곁에는, 원하면 언제든지 불러낼 수 있는 홀로그램이 있다. '그'는 15년 전 세상을 떠난 남편 월터(존 햄 분)의 젊은 시절 모습을 하고 있다. 기억을 심어주면 영원히 그 기억을 그대로 간직할 그는, 기억을 되살리거나 기억을 공유하며 마음을 달래주는 친구 또는 대체자로서 완벽한 존재다. 


그런 그를 마조리의 딸 테스(지나 데이비스 분)는 싫어한다. 자신보다 그를 더 찾고 그에게 더 의지하는 엄마가 싫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인간 아닌 존재가 인간을 아주 잘 대체하고 있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다. 반면, 테스의 남편 존(팀 로빈스 분)은 적극 찬성하는 쪽이다. 다른 모든 걸 제쳐두고 마조리의 상태를 호전시키는 데 아주 좋은 친구가 아닌가. 그건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이 아닌가. 


그렇게 잃어버린 형상들과 기억들 때문에 괴로웠던 마조리의 마지막 나날들은 다분히 월터의 홀로그램 덕분에 치유받는다. 월터의 형상이 눈앞에 있고 월터와 함께 했던 화려한 젊은날의 기억 또한 되살릴 수 있다. 


하지만, 그건 월터에게 날조된 기억, 사실이지만 기분 좋은 기억과 사실이 아닌 기분 좋은 기억을 심어준 덕분이다. 기억하기 싫은, 기억에서 지워버린 기억은 아예 심어주지 않았다. 예를 들어, 마조리가 세계 8위의 테니스 선수 대신 월터를 선택했다고 거짓말하고 자살로 생을 마감한 아들 데미안에 대한 기억은 아예 전해주지 않으려 한다. 


이 영화의 핵심, 기억


인간 형상 홀로그램이 이 영화의 주요 볼거리라면, 기억과 관계는 이 영화의 핵심 주제이다. ⓒ싸이더스



영화는 연극을 원작으로 한 만큼 굉장히 정적이다. 90% 이상의 장면이 그들이 기거하는 집안이며, 역시 90% 이상의 장면이 그들 중 2인 또는 3인의 대화이다. 그들의 대화가 즉 영화이기에, 대화를 깊숙이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거기에서 우린 '기억' '관계' 등의 핵심 주제를 찾아 엿볼 수 있다. 


존은 기억이란 뇌 안의 퇴적층과 같아서 기억하지 못할 뿐 거기에 있다고 말한다. 어떤 식으로든 꺼내어 되살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그가 홀로그램 월터의 존재를 옹호하며, 그로 하여금 마조리의 기억을 되살리게 하거나 마조리의 기억 한 부분을 차지하게 하는 게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은 이치겠다. 


반면 테스는 기억이란 우물이나 서랍장 같은 게 아니라고 말한다. 무언가를 기억할 때는 기억 그 자체가 아니라 기억한 마지막 순간을 기억하는 것뿐이라는 것이다. 복사본의 복사본처럼 계속 희미해질 뿐 절대 생생해지거나 선명해지지 않는다. 이는 홀로그램 월터의 존재가 마조리 기억을 되살리거나 생생하게 하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그녀의 주장을 뒷받침한다. 


아마도, 테스의 주장 또는 이론이 맞을 것이다. 기억은 점점 쇠퇴해 언젠가는 소실할 거라는 건 누구나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모두들 몸소 실천하고 있다. 하지만, 심정적으로 존의 말을 믿고 싶다. 할 수만 있다면 서랍장에 기억을 보관하고 언제든 꺼내 눈앞에 놓고 싶단 말이다. 인류가 낳은 최고 천재 아인슈타인도 그건 불가능하지 않을까. 


관계, 그리고 기억


모든 건 기억에서 비롯된다. ⓒ싸이더스



관계는 기억과 함께 한다. 기억들이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다. 기억이 사라지면 관계 또한 사라진다. 마조리로부터 받은 한없이 작은 사랑, 마조리로부터 받은 적이 없다시피한 사랑의 기억으로 괴로워하는 테스이지만 마조리는 모른다. 알지 못하는 것이다. 일방적인 기억이 아닌 서로 간의 기억이야말로 사실상 그(그녀)와 나의 전부다. 


시간을 어김없이 흐르고, 기억은 쇠퇴하여 사라지고, 생명은 죽어 자연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누군가에 대한 기억은 계속 남아 있다. 영화에서 홀로그램이 상징하는 건 바로 그 누군가에 대한 기억의 영속성이다. 이는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게, 영화가 좀 더 힘을 실어주는 주장이, 앞서 테스가 아닌 존의 말에 있다는 걸 증명한다. 


누군가에 대한 기억은 그동안 글, 그림, 사진, 영상 등으로 전해져왔다. 이젠 홀로그램이 가능해진 시대, 그 누군가를 눈앞에 데려와 함께 기억을 직접 공유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 영화는 미래형 SF적 요소가 있지만 SF영화라 칭할 수 없다. 인류는 그 무엇보다 우선적으로 기억, 기록을 남기는 데 전력을 다한다. 


비단 월터 홀로그램만 존재하진 않을 것이다. 마조리, 존, 테스의 홀로그램이 다른 산 사람을 위해 존재하게 될 것이다. 그 와중에 '나에겐 많은 시간이 있으니까'라고 말하는 월터 홀로그램과 '얼마나 좋아.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었다니'라고 말하는 마조리 인간, 그리고 마조리 홀로그램의 한 마디가 기억에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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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서평] <딸에 대하여>


소설 <딸에 대하여> 표지 ⓒ민음사



일찍 남편을 보내고 요양원에서 요양보호사로 일하는 '나', 남편이 유일하게 남긴 유산인 집에 서른을 훌쩍 넘었어도 제대로 자리 잡지 못하고 대학교 시간강사로 살아가는 '딸애'를 들인다. 딸애는 7년 간 사귀어 왔다는 '그 애'와 함께다. 나로선 정녕 상상하기도 싫고 어려운 그들과의 동거지만, 딸애의 부탁을 져버릴 순 없지 않은가. 서로를 그린과 레인으로 부르는 그들은 레즈비언 커플이다. 


딸애는 안 그래도 어렵게 살아가는 시간강사의 삶 위에 학교를 상대로 시위를 하는 삶을 얹혀 놓았다. 딸애처럼 레즈비언 시간 강사가 레즈비언이라는 이유로 학교에서 쫓겨났기 때문인데, 나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사람의 일로 딸애가 그러는 걸 이해할 수 없다. 그건 내가 요양원에서 보살피는 무연고 치매노인 '젠'을 보면서, 그녀의 삶을 돌아보면서 뼛속 깊이 느낀 것이다. 


젠은 젊은 시절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공부를 하고 한국계 입양아들을 위해 일해왔다. 한국에 돌아와서는 이주노동자들을 후원했다. 평생 자신과 하등 상관없는 이들을 위해 헌신해 왔지만, 지금은 치매에 걸려 요양원에서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아무도 그녀를 찾지 않는다. 


'나', '딸애'와 '그 애', '젠'의 이야기 <딸에 대하여>는 여성의, 여성에 의한, 여성을 위한 소설이다. 그 안엔 현시대를 가로지르는 첨예한 사항부터 시대와 상관 없이 오래도록 당연시 되어온 문제까지, 주로 소수자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동성애자 시간강사, 홀몸의 중년여인, 무연고자 치매노인, 모두 소수자이기에 앞서 모두 여성이기에 삶의 고단함을 향한 이중부과가 매겨져 있는 느낌이다. 


'딸에 대하여'보다 '여성에 대하여'


소설은 '딸에 대하여'라는 제목에서도 유추할 수 있듯이, 동성애자이자 시간강사로 '평범하고 제대로 된' 삶을 살지 못하는 딸에 대한 이야기를 중심에 놓고 있다. 아니, 제목을 앞세워 그렇게 포장한 것이리라. 실상, 딸보다 '나'와 '젠'에 대하여 즉 엄마와 여성에 대한 이야기인 게 맞다. 여기서 나에겐 젠이 딸애와 겹쳐 보이니, 결국 '여성에 대하여'가 궁극적으로 올바른 제목이라 하겠다. 


어떤 여성을 말하고자 함인가. 소설에선 남성이 주인공으로 일절 등장하지 않는다. 그래서일까? 전통적 보수의 전형과도 같은 나는 딸애가 남성으로서의 사회적 성공과 여성으로서의 결혼적 성공을 동시에 바란다. 소설은 그 정도에 머물러 있는 내가 여러 일들을 겪으면서 깨닫게 되는 깨달을 수밖에 없게 되는 '성장' 매커니즘을 따른다. 그 끝에는 '여성'이 아닌 '공동체'가 있다. 


한편, 소설에서 가장 첨예한 이슈가 될 수 있는 '퀴어' 소재의 주인공들인 딸애와 그 애는 그 이슈를 가슴으로는 생각조차 하지 않고 당연하게 받아들이지만 현실상 머리로는 항상 생각하고 있어야 하는 이중의 삶을 살고 있다. 그들은 왜 당연한 삶의 결정체로 물질적 정신적으로 직간접적 피해를 받아야 하는 것인가? 하지만 소설은 퀴어의 당위성에 집착하는 대신 객관적 사회문제로 격상시키는 묘수를 발휘한다. 


'젠'은 소설의 모든 것에 거리를 두고 있는 느낌으로 와서 소설의 모든 것에 가장 밀접한 관계가 있는 느낌으로 떠나간다. 그녀의 지난 젊은 시절은 딸애를 보는 것 같고, 그녀의 현 시절은 나의 미래를 보는 것 같다. 소설은 한국 모든 여성의 미래와 한국 늙은 여성의 현재, 그 한 단면을 젠을 통해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공동체를 향한 깨달음과 이해


남성은 여성의 삶을 상상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단순히 보이는 삶과 행동, 생각보다 훨씬 많은 것들이 그녀들을 감싸고 있고 그녀들을 향해 일방적으로 보내고 있으며 그녀들을 얽매기도 하면서 조종하기도 한다. 반면, 남성은 여성이 상상하는 딱 그 정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것이다. 


내가 종국에 만나게 되는 공동체란 상상할 수 없는 여성의 삶도 상상할 수 있는 남성의 삶도 뛰어 넘는 연대다. 자신의 일과 딸애의 일에서 겪게 되는 '나의 일이 될 수 있는, 아니 나의 일과 다름 없는 남의 일'의 정체를 깨닫고, 딸애의 성향을 이해할 순 없지만 딸애의 상상불가 위의 상상불가의 어려움은 이해하게 된 것이다. 


단 하나의 가족인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정도는커녕 혐오를 하는 딸애가, 나 아닌 다른 이들에겐 얼마나 크나큰 혐오와 배제의 대상이 될 것인지 불 보듯 뻔하지 않은가. 그런 매커니즘의 이해야말로 가족만이 할 수 있는 것이리라. 나의 깨달음과 성장이 거기서 멈추지 않기를 바란다. 


거기서 파생된 '가족 아닌 자'인 젠을 향한 마음 또한 크나큰 깨달음과 성장의 한 면이다. 가족만이 가능하다고 생각한 이해가, 가족이 아닌 자를 향하고 있지 않은가. 그 자체가 공동체의 발로다. 그 모든 게 '딸에 대하여' 생각한 끝에 나아가게 된 이 시대 평범 평균의 여성의 깨달음이다. 이제 '위대'라는 뜻의 수정이 필요할 때다. 위대라는 단어에 '보수로 대변되는 완벽'이 아닌 '진보로 대변되는 나아감'이 대신해야 하는 것이다. 이 여성들은 진실로 위대하다. 


딸에 대하여 - 10점
김혜진 지음/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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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몬스터 콜>


삶의 진리와 사랑으로 귀결되는, 인생에 대한 다양한 은유의 결정체 <몬스터 콜>. ⓒ롯데엔터테인먼트



2년 전 개봉해 찬사를 받은 명품 애니메이션 <칼릴 지브란의 예언자>. 무스타파라는 현자가 말하는 삶의 진리와 사랑 이야기를 9명의 아티스트가 참여해 최대한의 시너지로 풀어내었다. 직설적으로 전달되는 진리의 향연이 90여 분이라는 길지도 짧지도 않은 시간 내내 계속되기에 그저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다른 생각을 할 수 없다. 


애니메이션은 아니지만, 현자 같은 이(몬스터)가 이야기를 들려주고 그 이야기는 애니메이션화되어 이해를 도우며 결국 삶의 진리와 사랑으로 귀결된다는 점에서 <칼릴 지브란의 예언자>가 생각나게 하는 <몬스터 콜>은 다양한 은유의 결정체다. 현재를 기반으로 하되 다분히 판타지, 그것도 다크 판타지적인 세계관이 이를 가능케 한다. 


'성장'과 '가족'을 주요 키워드로, 인생과 작별과 마음 등의 키워드가 뒤를 받힌다. 데인 드한이 생각나게 하는 연기를 펼친 루이스 맥더겔이 주인공 코너를, 익숙한 이름들인 펠리시티 존스와 시고니 위버가 코너의 엄마, 할머니 역을 맡아 영화의 품격을 높혔다. 무엇보다 목소리만으로 극의 중심을 잡은 리암 니슨은 CG로만 이루어지지 않은 몬스터에 확실한 활기를 불어넣기에 충분했다. 


진실 뒤에 찾아오는 거대한 슬픔과 깨달음


어린 나이, 하지만 너무도 힘든 삶의 코너. 그는 진실을 말해야 한다. 그것이 성장통이자 통과의례다. ⓒ롯데엔터테인먼트



집에선 암에 걸려 죽어가는 엄마가 있고, 학교에는 사정없이 괴롭히는 놈들이 있다. 그 때문인지 코너는 자기만의 세계에 갇혀 있는 것 같다. 또래와는 뭔가 다른 표정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어느 날 믿기지 않는 일이 일어난다. 집에서 멀리 보이는, 공동 묘지 한가운데의 큰 나무가 몬스터로 변해 집으로 들이닥친다. 그러곤 세 가지 이야기를 들려줄 테니 다 듣고 나서는 코너보고는 진실된 네 번째 이야기를 해야 한단다. 


코너에게는 사이가 별로 좋지 않은 외할머니가 있다. 할머니는 코너를 데려가고자 한다. 아무래도 딸에게 큰 가망이 있는 것 같진 않다는 걸 인지하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코너는 그게 너무나 싫다. 엄마가 죽는다는 건 상상조차 하기 싫은 거다. 아니 그는 엄마가 금방 나을 거라는 굳은 믿음을 갖고 있다. 


밤 12시 7분이면 찾아오는 몬스터가 들려주는 세 가지 이야기는 코너의 일상과 묘한 병렬을 이룬다. 코너에게 깨달음을 주려는 걸까. 몬스터는 진짜일까 그저 꿈 속의 환상일까. 코너 안에 내재된 또 하나의 코너일까. 그런 와중에 엄마의 병은 악화되고 코너는 점점 엇나간다. 할머니는 물론 이혼한 아빠와도 멀어지는 느낌이다. 


그런 코너를 이끄는 건 할머니도 엄마도 아빠도 선생님도 친구도 아닌 몬스터다. 코너도 그걸 느꼈는지 몬스터를 만날 12시 7분을 기다리는 것도 모자라 시계를 돌려 몬스터를 억지로 불러낸다. 그리고 코너는 결국 네 번째 이야기를 꺼낼 수 밖에 없게 되는데... 거기엔 감당할 수 없는 슬픔과 그 후에 찾아오는 깊은 깨달음이 있다. 


불행이 우리를 덮칠 때


어마어마한 불행이 덮치려 한다. 헤어나올 수 없다. 마주볼 수 있을까? 마주보아야 한다. ⓒ롯데엔터테인먼트



불행이 우리를 덮칠 때, 불행은 다른 무엇도 아닌 불행 자체로 나타난다. 우린 대부분 저항할 생각도 못한 채 넋 놓고 불행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그리곤 곧 불행을 덮어둔 채 시선은 불행이 덮친 나를 향한다. 하지만 그건 이미 내가 아니다. 불행한 나일 뿐이다. 애초에 잘못된 것이다. 


불행이 우리를 덮칠 때 우선 불행을 마주보아야 한다. 나중에야 이미 불행한 나로 시선을 향하기 전에 말이다. 하지만 쉽지 않다. 아니, 일단 불행이 덮치면 모든 게 달라지므로 불가능에 가깝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럼 어떻게 하란 말인가. 훈련이라도 하란 말인가. 그건 너무 가혹하지 않은가. 


영화는 말한다. 자신과 대화하며 자신을 들여다보고, 다른 누군가와 대화하며 공유해야 한다고 말이다. 즉, 기쁨은 함께 하고 슬픔은 나누라는 말일 테다. 어렵기는커녕 지극히 쉬운 이 명제를 영화는 소년의 눈높이에 맞게, 그렇지만 유치하지 않게 그려낸다. 코너가 대화해야 하고 대화하게 되는, 슬픔을 나누어야 하는 대상들이 어른들이기 때문에 그 어른들 또한 나름의 성장을 하는 것이다. 


코너가 말해야 하는 네 번째 이야기는 영화의 하이라이트에 해당한다. 뭔가 크나큰 비밀이 있는 것일까. 절대 말할 수 없는 잔인하고 기가 막힌 비밀일까. 불행과 슬픔, 모순적 마음, 성장에 관련된 마음 속 깊숙히 숨겨놓은 코너만의 비밀이라고만 말해둔다. 당연히 죽어가는 엄마와 항상 불안에 떨고 불편하고 불만에 차 있는 코너의 표정과도 연관이 있을 것이다. 


그래도 살아가리라


불행은 곧 작별이다. 작별 뒤엔 무엇이 있을까. 그래도 저래도 '삶'이 있다. 우리는 살아가야 한다. ⓒ롯데엔터테인먼트



코너의 엄마는 죽어 간다. 죽는 게 확실하다. 그 자신도 알고 코너의 할머니도 알고 코너도 안다. 즉, (죽음에 의한) 영원한 작별이 멀지 않다는 걸 다들 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작별을 받아들이기 어렵다. 이미 누군가와의 작별을 해봤을 게 분명한 어른들도, 누군가와의 작별이 무슨 의미인지조차 잘 모르는 아이도, 마찬가지다. 


인생에서 반드시 당면하게 될 건 다름 아닌 '작별'이다. 분신과도 같은 사람과의 작별이라도 그건 명백한 진실, 하지만 맞닥뜨리면 외면하고 도망치고 싶은 진실이기도 하다. 몬스터는 그 모든 게 인간이 인간일 수 있게 하는 인간적인 마음에서 파생된 자연스러운 진실이라고 말한다. 


우린 사실 이 영화의 처음과 끝, 그리고 과정까지도 모두 꿰뚫을 수 있다. 아니, 이미 꿰뚫고 있을 것이다. 다양한 삶의 요소들이 변주되고 은유로 표현되는 장면 장면들은 이 영화의 것만도 코너의 것만도 아니다. 그럼에도 영화가 잔잔하게 그러나 묵직하게 그리고 새롭게 다가오는 건, 영화를 보는 우리들 현재 삶의 결이 영화 주인공들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래도 살아가야 한다. 잊지 않고 좋은 일 슬픈 일 모든 걸 기억해야 한다. 또한 그 기억을 공유해야 한다. 우린 혼자가 아니다. 그 기억을 공유하는 누군가와 함께 살아갈 것이다. 그렇지만 누구보다 자신을 들여다보는 일에 소홀히 해선 안 된다. 그곳엔 나에게 있어 무엇보다 중요한 '나'라는 우주를 구성하는 핵심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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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우리를 침범하는 것들>


상식 밖의 무리를 이끄는 부자(父子)의 여러모로 필수적인 듯보인다. 자신처럼 되었으면 아들, 그리고 아들은 그 아들이 자신처럼 되지 않았으면 한다. ⓒ그린나래미디어(주)



여기 상식 밖의 무리가 있다. 그들은 외곽에서 캠핑카에 생활하며 국가와 사회로부터 동떨어진 채 그 어떤 구속도 받지 않는다. 그 한 가운데에는 콜비(브렌단 글리슨 분)가 있다. 모든 걸 부정한 채 오로지 아버지의 말씀을 바탕으로, 마치 종교집단의 교주처럼 행동한다. 모두들 그의 말이 사실이 아니라는 걸 어렴풋이 느낄 뿐 따르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은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은 적이 없거니와 그곳이 아닌 곳에선 살 수 없다. 


콜비가 이 무리의 정신적 지주라면, 그의 아들 채드(마이클 패스벤더 분)는 이 무리의 실질적 리더다. 비록 그 또한 교육을 받은 적이 없고 그래서 글조차 모르지만, 예의 타고난 카리스마와 대범함은 이 무리가 살아가는 데 큰 도움을 준다. 그 도움이란 다름 아닌 절도 행각이다. 콜비에 의해서 '우리의 권리를 침해받지 않기 위한 대항 행위'라고 명명된 그 범죄는, 실상 이 무리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물질적 정신적 버팀목이다.


채드는 이제 그 짓거리를 그만두고 싶다. 콜비가 차기 리더로 키우고 싶어하는 그의 손자이자 채드의 아들 타이슨의 미래를 위해서이다. 비록 학교 교육을 받고 있는 타이슨이지만, 콜비의 '교육'으로 채드의 뒤를 잇기에 충분한 몸과 마음을 지니고 있는 중이다. 즉, 미래의 범죄자 말이다. 물론 그 와중에도 채드는, 비록 경찰에게 잡혀가지 않지만 범죄를 계속 저지른다. 배운 게 그것 뿐이기 때문에. 


그야말로 사면초가. 타이슨만은 자신처럼 되지 않길 바라면서도, 자신이 할 수 있는 게 범죄밖에 없기에 타이슨이 배우는 건 자연스레 범죄일 수밖에 없다. 그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이 비극의 고리를 끊기 위해선 그가 잡혀들어가는 수밖에 없지만, 그는 범죄의 프로이기 때문에 절대 잡혀들어가지 않는다. 그것 또한 그가 뼛속 깊이 배운 것. 그는 '잘못된' 교육과 본능을 이겨낼 수 있을까? 


몽상가적이고 감성적인 고민


이 영화를 보며 평소 하기 힘든 고민들을 해보았다. 굉장히 비현실적인 것들 같아 보이지만, 사실 굉장히 현실적이다. ⓒ그린나래미디어(주)



영화 <우리를 침범하는 것들>은 아버지와 아들, 시스템, 교육, 권리, 가족, 부정 등의 키워드를 중심으로, 우리가 저 멀리 놓아두곤 하는 몽상가적이고 감성적인 고민을 여기 앞으로 데려다 놓는다. 현실이 끼어들 자리는 일말도 없어 보이지만, 현실에 찌들수록 생각하게 되는 것들인 걸 보면 굉장히 현실적인 이야기 같기도 하다. 


우린 누구나 꿈꾸지 않는가? 히피, 집시의 생활을, 영원히 자유로울 것 같은 그들의 환상적인 일상을, 남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자급자족하며 세계를 돌아다니는 노마드의 기적을. 그 어느 때보다도 많은 사람들과 함께 점점 속박되어 지는 자유와 빠르게 돌아가는 세상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그런 삶은 정녕 꿈이다. 


한편, 영화는 할리우드의 완벽주의자로 유명한 에드워드 노튼 저리 가라 할 정도의 철저함을 자랑하는 마이클 패스벤더 주연으로도 충분한 믿음을 준다. 연기를 빼면 왠지 아무것도 못할 것 같은 그의 모습이, 범죄 행각을 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채드를 누구보다 잘 표현해낼 수 있을 것 같다. 


거기에 속을 알 수 없는, 무표정의 조직 보스와 같은 포스와 표정과 리더로서의 모습을 완벽하게 구현할 줄 아는 브렌단 글리슨의 출현은 영화의 중심을 잡아줌은 물론 영화로 자연스레 들어가게 만든다. 패스벤더가 정말 열심히 연기한다는 느낌을 주는 반면, 글리슨은 거기에 원래부터 있었던 듯하다. 


줄기 하나, 가족의 독립


가족에서 또 다른 가족이 탄생해 독립하는 건 숙명이다. 이 영화는 그 숙명을 따르려는 자와 거스르려는 자의 대결이기도 하다. ⓒ그린나래미디어(주)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묘하디 묘하다. 아들이 가장 절대적인 영향을 받는 대상이 다름 아닌 아버지이지만, 아들이 가장 증오하는 대상이 아버지가 될 수 있다. 새삼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꺼낼 필요도 없을 것이다. 아들이라면, 아버지라면 최소한 어렴풋이 알고 있다. 그럼에도 모성애 못지 않게 부성애 또한 인류의 가장 숭고한 사랑의 종류 중 하나이다. 


영화에서 이 관계가 지니는 파워는 절대적이다. 세상을 등진 채 한 무리를 이끌며 아버지의 말씀을 절대적으로 신봉하고 따르고 콜비, 자연스레 무리에게 강요하고 무엇보다 아들 채드와 손자 타이슨에게 강요한다. 아이러니는 여기서 발생한다. 그렇지만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적 아이러니는 아니다. 여기서 여성이 차지하는 비중은 적다. 


채드는 자신의 삶이 제대로이지 않다는 걸 인지하고 타이슨은 그런 삶을 살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자신이 아닌 아들을 위해, 자신의 삶 자체를 부정하고 고로 아버지를 부정하고 증오하는 아이러니. 정녕 위대하다 말할 수 있지 않은가. 우리나라 독립영화 <똥파리>가 겹쳐진다. 끝없이 이어질 고리를 끊기 위해, <똥파리>는 영화적 차원에서 희생을 보여주었고 <우리를 침범하는 것들>은 영화 속에서 희생을 택했다. 여기서 줄기 하나는 '가족'으로 빠진다. 


무리에 속한다는 건 독립과는 거리가 멀다는 걸 의미한다. 그렇지만 인간이라면 누구나 자신만의 가족을 이루어 독립해 살아야 한다. 콜비가 세상을 등진 채 '독립'해 무리를 이끌며 살아가듯이, 채드도 무리를 등지고 '독립'해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거기엔 갈등과 문제가 뒤따른다. 채드는 물론 타이슨도 마찬가지다. 채드는 이 모든 고리를 끊고 타이슨에게 가족을, 독립을, 삶을 선사한다. 


줄기 둘, 시스템과 교육


현 시대 문명을 지탱하는 시스템과 교육이 반드시 올바른 건 아니다. 하지만 영화에서 콜비가 행하는 반시스템과 반교육적 방법도 결코 옳지 않다. ⓒ그린나래미디어(주)



영화의 줄기는 시스템과 교육으로도 이어진다. 시스템의 중요성을 말하진 않지만, 교육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이 무리는 거대 시스템을 부정하고 반하면서도 '잘' 살아간다. 채드는 수없이 많은 범죄를 저지르면서도 절대 잡히지 않는 것이다. 시스템이 가진 반인간적인 면모를 부각해 머릿속에 인지시키고 시스템이 가진 맹점을 잘 이용하는 것이다. 반시스템에 대한 일종의 정신적, 육체적 훈련이 완벽한 것이다. 


그렇지만 교육은 그들도 어찌할 도리가 없는가 보다. 콜비가 아버지의 말씀이라며 무리를 이끄는 절대적 규범을 세우고, 되도 않는 기독교적 지식들을 버무려 사이비종교처럼 만들어 세뇌시키지만, 그건 절대로 교육이 될 수 없다. 거기엔 기본도 없고 도리도 없고 이성도 없고 기준도 없다. 채드가 그걸 깨달은 건 기적에 가깝다. 


영화 <캡틴 판타스틱>에서 가족 무리를 이끄는 아버지이자 '캡틴' 벤은 자신만의 확고한 철학을 가지고 아이들에게 혹독한 교육을 실시한다. 학교에서 받는 교육보다 모든 면에서 훨씬 앞서는 듯 보인다. 물론 반시스템적이지만 말이다. 우린 그 방법론을 이해한다. 그럼에도 벤은 결국 아이들을 학교에 보낸다. 그의 교육은 방과 후에. 


반면 콜비 무리에겐 교육 이전에 철학 비스무리한 것도 없다. 우린 거기에서 그 어떤 긍정적인 면도 찾을 수 없다. 오히려 누구나 어느 정도는 지니고 있을 반시스템, 반교육적 생각의 틀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낳기까지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반시스템, 반교육을 외치면 외칠수록 말이다. 


이들 무리는, 무리의 수장 콜비는 자신들을 침범하는 것들이 다름 아닌 이 국가, 이 사회, 이 시스템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제3자의 입장에서 보면, 그리고 채드는 그들(자신들)을 침범하는 것들이 다름 아닌 잘못된 생각이라고 생각한다. 그 기준이 어디에 있느냐고? 남에게 강요하고 피해를 주는 행위가 그 기준이다. 그 행위의 결과는 다른 어디도 아닌 자신들에게 돌아온다. 결국 내가 나를 침범하는 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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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에브리바디 올라잇>


이 영화는 '복잡미묘'하지만, 결코 '섹시 코믹 스캔들'은 아니다. ⓒ(주)화천공사



의사 닉(아네트 버닝 분)과 조경사 줄스(줄리안 무어 분)는 각각 낳은 아이들 조니(미아 바쉬이코브스카 분), 레이저(조쉬 허처슨 분)와 함께 평범하게 살아간다. 그렇다, 그들은 레즈비언 부부이다. 큰딸 조니는 일찍 철이 든 케이스로 엄마들을 이해하고 존중한다. 그녀는 똑똑하다. 반면 작은 아들 레이저는 사춘기의 한복판에 있어서인지 몰라도 의문과 함께 위화감을 지니고 있다. 그는 운동을 좋아한다. 


조니와 레이저는 아빠를 찾고자 한다. 그들은 누군가가 정자은행에 제공한 정자로 태어났는데, 공교롭게도 닉과 줄스는 한 명의 정자를 받아 임신해 그들을 낳았다. 생물학적 아빠 폴(마크 러팔로 분)을 찾은 그들, 조니는 좋은 느낌을 받은 반면 레이저는 그리 좋은 느낌을 받진 못했다. 이후 조니와 레이저는 번갈아 가면서 혹은 함께 폴과 시간을 보낸다. 서로가 끌리는 걸 그들이 막을 도리는 없다. 


그 사실을 알게 된 닉과 줄스의 시선이 그리 곱지는 않다. 함께 식사자리도 마련하는 등 노력하지만, 가장의 역할을 떠맡은 닉은 더욱 노심초사할 뿐이다. 그 와중에 줄스는 오랜만에 조경사 일이 들어오는데, 다름 아닌 폴의 의뢰였다. 급기야 줄스는 자신의 성정체성까지 의심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하는데... 


'평범한' 동성결혼 가족


동성결혼 가족이라는, 한국에는 법적으로 없는 가족 형태. 이 영화는 극히 평범하게 그려낸다. ⓒ(주)화천공사



수많은 영화를 통해 일반적이지 않은 가족 형태를 많이 봐왔는데, 영화 <에브리바디 올라잇>이 보여준 가족 형태는 또 새롭다. 특히 동성결혼이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는 우리나라에선 어설픈 상상은 가능하지만 실제에 기반한 현실적인 상상은 불가능하다. 그러하기에 허구에 기반한 영화에서도 비춰지기 힘들다. 


반면 이 영화에서 동성결혼에 의한 가족 구성은 아주 평범하게 보인다. 전혀 위화감이 없고 편안하다. 작은 아들 레이저가 지니는 의문과 위화감도 심각한 수준은 아니고 감성적인 면이 두드러진다. 아마 거기엔 레즈비언 부부를 연기한 두 베테랑 줄리안 무어와 아네트 버닝의 연기력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물론 거기에도 조금의 제약은 따른다. 사회의 시선으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할 보호막은 예전에 쳤을 테지만, 아이들 특히 레이저에겐 제대로 된 설명이 필요하다. 남들과 다른 가족 형태는 물론 남들과 다른 섹스 라이프까지도. 이런 것까지 말해야 하나 할 정도로 모든 사생활을 남김없이 말해주어야 이해가 가능한 것이다. 


그럼에도 우린 이 영화의 이 가족을 보며 하등 이상한 생각이 들지 않는다. 단, 생물학적 아빠 폴을 만나기 전까지. 두 아이들의 아빠 폴이 등장하면서 생각이 많아진다. 이를 삐딱한 시선으로 보자면, 즉 지극히 생물학적인 시선으로만 보자면 일부이처가 아닌가? 여기서 이처가 부부인 건 이상할 게 없다. 그런데 이처 중 하나가 일부와 다시 그렇고 그런 관계를 형성시킨다면... 모든 게 이상해지는 것이다. 


특수한 경우를 헤쳐나온 이들의 삐걱거림


특수한 경우를 수도 없이, 즉 산전수전 다 겪은 이들에게도 삐걱거림이 존재한다. ⓒ(주)화천공사



사실 이 영화는 초반 20분도 채 되지 않아 1막이 끝난 느낌을 들게 한다. 레즈비언 부부의 두 아이들이 생물학적 아빠를 만나 어색한 인사와 대화를 마무리하고 헤어진다. 더 이상 어떤 스토리가 있을까 싶다. 그리고 2막이 시작된다. 아이들이 생물학적 아빠를 계속 만나는 것이다. 그런 한편 닉과 줄스는 뭔가 삐걱대는 것 같다. 


여기서 주목할 건 아이들이 생물학적 아빠를 계속 만나는 게 아니라 닉과 줄스의 삐걱거림이다. 우리는 당연히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 레즈비언 부부라는 특수한 경우를 함께 헤쳐나온 이들이라면 살아가는 데 아무 문제도 없을 것 같다고 말이다. 그리고 둘 다 여자이니 남자와 여자로 이루어진 부부보다 서로가 서로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거라고 말이다. 그들에게 삐걱거림이라는 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그들에게도 똑같은 삐걱거림이 존재한다. 18년 동안 함께 한 닉과 줄스에게도 당연히 각자의 역할이 생겼을 것이고 완연히 다른 성격이 존재할 것이다. 그에 따른 갈등은 너무나도 당연하다. 그런 모습에서 우린 역으로 올라가 레즈비언 부부의 평범함과 비(非)이질성을 감지한다. 그들은 레즈비언 이전에 부부다. 


이 영화에선 닉이 더 돈을 잘 벌고 더 괄괄하며 더 가부장적이다. 반면 줄스는 일을 거의 안 하는 반면 아이들과 집안을 책임지다시피 한다. 그들이 합의 하에 정한 역할일 테지만, 여느 부부의 모습에서 볼 수 있는 모습이다. 2막에서 아이들이 폴과 가까워지는 모습이 아닌, 눈여겨 보아야 할 닉과 줄스의 삐걱거림에는 이런 연유가 있다. 


평범한듯 평범하지 않은듯, 이 가족


다른 누구도 아닌 이들의 삐걱거림은, 이들이 지극히 평범한 존재들이라는 반증이다. ⓒ(주)화천공사



영화의 3막 시작은 폴의 의뢰에 의해 줄스가 오랜만에 조경 디자인을 하게 되는 장면이다. 이내 그들은 어이 없게 한 몸이 된다. 그러며 닉과 줄스의 삐걱거림은 더 심해지고 그럴수록 줄스의 외도도 더 심해진다. 한편 아이들과 폴의 관계도 더 진전되어 어색함은 사라지고 의미있는 관계로 발전되는 기미가 보인다. 


결국 들킬 것이 분명한 폴과 줄스의 밀회, 이 황당하고 어이 없는 관계보다 우리가 이 3막에서 눈여겨 봐야 할 건 이 가족이다. 2막에서 닉과 줄스의 삐걱거림으로 이 레즈비언 부부의 평범함을 역설했듯이, 3막에서는 폴과 줄스의 밀회로 터져버린 네 가족의 삐걱거림으로 이 가족의 평범함을 역설한다. 


백 번 양보해 일반적이라고 할 순 없는 이 가족이, 거기에 폴이라는 생물학적 아빠의 출현으로 꼬여버린 듯한 이 가족이, 평범하다는 걸 역설하기 위해서 황당한 일을 겪었을 때 평범하게 대처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우린 생각한다. 일반적이지 않은 가족이라면, 일반적이지 않은 일을 겪었을 때 일반적이지 않은 모습을 대처할 거라고 말이다. 


하지만 이들은 지극히 일반적으로 대처한다. 당사자들을 욕하고 배척하고 몰아세운다. 누군가는 비뚤어진다. 그럼에도 진심어린 사과와 속죄, 받아들임과 시작이 이어진다. 그게 가족이다. 그리고 이 가족도 그런 모습을 보인다. 당연하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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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열전] '고레에다 히로카즈' 


'망해 가는' 일본 영화의 버팀목,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긴 역사, 엄청난 제작 편수와 관객수, 질 높은 작품성까지 겸비한 '일본 영화', 하지만 급격한 쇠락의 길로 접어든 지 꽤 되었다고 한다. 작품의 질보다 흥행에 더 초점을 맞춘 결과라 하겠다. 그래도 일본인들의 일본 영화 사랑은 높다. 단, 여기서 말하는 일본 영화는 여전히 일본의 세계적인 자랑거리인 만화 원작 위주다. 일례로, 그나마 일본이 자랑하는 현대 일본 영화 거장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특급작 <바닷마을 다이어리>가 일본에서 개봉했을 때 <러브라이브> 극장판에 밀려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하지 못하는 충격적인 결과를 낳기도 했다. 


그렇다.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현대 일본 실사 영화의 마지막 보루 같은 느낌을 준다. 모든 일본 영화인들이 그만 바라보고 있다는 걸 바다 건너서도 느낄 수 있다. 그는 지난 20년 넘게 그 기대를 충족시켜 왔다. 물론 부침이 없지 않았다. 스타일에 큰 변화가 없다는 점에서 은근히 욕을 먹기도 했을 테다. 여하튼 그는 일본 영화의 버팀목이다. 


충격적 데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충격적 데뷔작 <환상의 빛>. ⓒ씨네룩스



우린 영화 감독들의 충격적인 데뷔를 많이 접했다. 스티븐 소더버그의 <섹스, 거짓말 그리고 비디오 테이프>, 가이 리치의 <록 스탁 앤 투 스모킹 배럴즈>, 스파이크 존즈의 <존 말코비치 되기>, 홍상수의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이창동의 <초록 물고기>, 조지 밀러의 <매드 맥스>, 장이머우의 <붉은 수수밭> 등. 1970~90년대인데, 선입견일지 모르겠지만 2000년대 이후엔 많이 접하지 못한 것 같다. 


그리고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환상의 빛>이 있다. 1995년작으로, 자그마치 20년이 넘었다. 그는 명문 와세대학 문학부를 나온 문학수재인데, TV 다큐멘터리 연출을 하다가 이 작품으로 장편영화 데뷔를 한다. 그래서인지 문학 작품을 원작으로 하였고 다큐멘터리적 작풍이 다분하다. 


하지만 이때까지는 그보다 정적인 구도에 따른 미장셴에 집착했던 것 같다. 구로사와 아키라의 <카케무샤>가 보여주었던 구도가 일면 엿보인다. 거기에 상실과 기억의 소재가 주를 이룬다. 주인공 유미코는 계속되는 상실을 겪지만 그럼에도 살아간다. 하지만 문득문득 찾아오는 상실 전의 기억들이 그녀를 괴롭게 하는 것이다. 


그의 국제영화제상 수집은 이미 데뷔 때부터 시작되었는데, <환상의 빛>은 세계 3대 영화제 중 하나인 베니스영화제 제52회 촬영상을 수상한다. 이후 불과 수 개의 영화에서 족히 수백 개는 될 듯한 상들을 수집한다. 세계 3대 영화제 진출만 보아도, 제54회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후보 <디스턴스>, 제57회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후보 <아무도 모른다>, 제62회 칸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 진출 <공기인형>, 제66회 칸영화제 심사위원상과 경쟁부문 진출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제68회 칸영화제 경쟁부문 진출 <바닷마을 다이어리>, 제69회 칸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 진출 <태풍이 지나가고>. 즉, 그의 필모그래피 절반 이상이다. 


'가족'에 천착하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최근까지 계속 이어가고 있는 '가족' 천착의 진정한 시작 <걸어도 걸어도>. ⓒ영화사 진진



그의 영화가 조금 바뀌게 되는 건, 아이러니하지만 일면 이해가 가는 <하나>부터이다. 이 영화는 그의 영화 이력 중 가장 범작에 속한다고 볼 수 있는데, 사무라이의 복수극을 통해 '가족'을 말하고자 한다. 물론 소소하고 잔잔하게 행복을 이야기한 무난한 이 작품을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아닌 이가 만들었다면 충분한 호평을 받았을 것이다. 


여하튼 그는 이후 10여 년 동안 가족에 천착한다. <하나> 이후에 나와 고레에다 히로카즈를 대표하는 확실한 가족 영화로 자리매김한 <걸어도 걸어도>를 필두로,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바닷마을 다이어리> <태풍이 지나가고>까지 쭉 이어졌다. 그 사이에 <공기인형> 정도가 튀는데, 아마 가족이 아닌 소재를 새롭게 시작하려다가 실패한 케이스라 하겠다. 


그의 필모 상 가장 눈에 띄는 성과를 올렸음에도 불구하고 아쉬운 부분이 이 부분이다. 계속되는 천착은 그만의 세계를 확고히 하며 그에 걸맞는 거장의 칭호를 그에게 안겨주는 등 좋은 결과을 낳았지만, 이제는 바뀌어야 하지 않겠나 싶은 마음을 스멀스멀 올라오는 걸 모두가 아는 시기가 왔다. 개인적으로 작년에 나온 <태풍이 지나가고>가 그 분기점이어야 하고, 분기점이 되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과 기대감이 든다. 


밝은 소소함에 날카롭고 서늘한 게 깃들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스타일을 규정하는 '밝은 소소함과 날카롭고 서늘함의 조화와 공존', 그걸 잘 볼 수 있는 영화 <바닷마을 다이어리>. ⓒ티캐스트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20년 넘게 천착하고 있는 게 하나 더 있다. 이건 아마 누구도 쉽게 따라 할 수 없을 그만의 것인데, 밝은듯 쓸쓸한듯 유쾌한듯 서늘한듯 한 분위기이다. 대체로 그의 영화 분위기는 밝고 유쾌한 것에 가깝다. 소소하고 잔잔하기까지 하다. 그렇지만 내재되어 있는 혹은 드러내지 않는 사건사고는 가히 인생을 흔들 만하다. 상대적으로 괜찮은 영화일수록 이 구도가 극에 달하는 것 같다. 


굳이 열거할 필요도 없을 정도로 그의 필모 전반에 걸쳐 있다. 기억에 남는 건 <걸어도 걸어도>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바닷마을 다이어리>다. <공기인형>은 말할 것도 없겠다. 그 밝은 소소함엔 특별하고 날카롭고 서늘한 것이 있다. 그게 인생이라는 걸까? 그게 인간이 가진 면모들이라는 걸까? 이 기조는 그가 지난 10여 년간 천착하는 '가족'이라는 키워드와는 달리 앞으로도 계속 이어나가도 무방할 것 같다. 아니 그러길 바란다. 보편성이 담보되지 않는 특별함이니까.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신작이 나오면 주저 없이 보고 악착 같이 평할 준비가 되어 있다. 1~2년에 한 편씩 꾸준히 신작을 내고 있는 걸 보면, 내년 안에는 차기작이 나올 것 같다. 반드시라고 할 만큼 세계 유수 영화제에서 상영되고 수상 후보에 오르고 무수한 호평이 쏟아질 것이다. 모르긴 몰라도 나도 그 중 하나이지 않을까 싶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나는 바란다. 그의 변화를. 비록 그동안 실패에 가까운 모습을 보였지만, 결국 덕분에 더 나은 길을 걸어올 수 있지 않았나 반추해본다. 자기 혁신적 모습의 일환이라면, 무엇이라도 괜찮다. 기대와 설렘과 불안의 삼중주로 그의 다음 작품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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