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구병모 소설가의 <네 이웃의 식탁>


소설 <네 이웃의 식탁> 표지. ⓒ민음사



나라에서 젊은 부부 대상으로 마련한 꿈미래실험공동주택, 편의 시설 하나 없는 고즈넉한 산속에 지은 열두 세대 규모의 작은 아파트로 깨끗하고 구조도 좋고 평수도 적당했다. 까다로운 입주 조건에 20여 종의 서류 항목을 갖추어야 했고, 경쟁률은 20:1에 달했다. 서류 항목엔 자필 서약서도 있었는데, 이곳에 들어갈 유자녀 부부는 자녀를 최소 셋 이상 갖도록 노력하겠다는 것이었다. 


이곳은 효내가 보기에 공동이라는 이름이 유난히 강조되는 느낌이 큰 반면 실험은 어디에 있는지 잘 알 수 없었다. 그녀는 '집'에서 일하는 프리랜서로 아이까지 돌보느라 너무 바빴다. 한편 요진은 홀로 집안 경제를 책임지고 있는데, 약사인 육촌 언니가 차린 약국에서 보조원으로 일하고 있다. 교원은 집에서 전업주부로 '일'하며 아이를 돌보고 있었고, 단희는 천성으로 장착된 활발함도 그렇고 이것저것 섬세하게 살피거나 돌보기를 즐기는 부녀회장 스타일이었다. 


이들 네 이웃, 정확하게는 네 아내의 크고 작은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부부, 아이, 이웃, 공동체, 자연... 단희의 남편 재강이 접촉 사고로 차를 센터에 맡기고 당분간 요진과 함께 카풀로 출근하면서 일어나는 일, 겉에서 보는 일과 안에서 일어나는 일의 차이가 너무나도 큰 효내의 경우, 제 몫으로 주어지고 대부분 스스로 선택했던 모든 일과 그것의 결과들에 환멸을 느끼는 교원의 이야기가 뒤따른다. 


공동체의 허위


소설 <네 이웃의 식탁>(민음사)은 데뷔 10년 차에 불과함에도 10권의 책을 쏟아낸 다작 소설가이자 판타지적인 이야기에 시니컬한 문체로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소설가 구병모의 신작이다. 소설은 '공동체'의 허위와 '여성 삶'의 본위를 폭로한다. 이 지극한 현실은 처음부터 끝까지 답답하게 만드는 동시에 서늘하게 만들 것이다. 


언젠가부터 공동체를 향한 로망이 생긴 것 같다. 행복지수가 한 없이 낮아진 데 대한 주요 원인 중 하나로 개인주의와 이기주의와 지역주의 팽배가 급부상하고 그 대안으로 공동체가 떠오른 이유 때문이리라. 더욱이 가족이 해체되고 1인 가구가 30%에 육박한 상황에서 공동체를 향한 선망은 더해갔다. 시민, 지역, 마을, 교육 등의 수많은 종류의 공동체가 만들어져 잘 운영되고 있다. 


세상을 일방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것들에 반해 자리를 잡아 가고 있는 공동체라는 개념. 드라마 <응답하라 1988>처럼 예전부터 자연스레 존재해왔지만 이젠 시스템적으로 만들어지고 관리되고 있다.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이유로 시작되어 선순환을 계속하고 있지만 완벽할 순 없을 것이다. 이 소설이 파고드는 건 바로 그 지점, 공동체의 단점 또는 약점과 개인주의의 장점 또는 강점이 만나는 지점이다. 


공동체에는 서로 간의 의무와 유대가 필수이고 공동으로 공유해야 할 이해관계 또한 필수이다. 그렇지만 공동체에 속한 모든 사람들이 성향과 성격과 환경이 다르기에 조율이 힘들 때가 다분하다. 그중 많은 것들이 절대적일 때가 있다. 즉, 의무와 유대를 지키지 못하고 이해관계를 공유하지 못할 때가 있는 것이다. 


그건 사소하다면 사소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경우가 많다. 재활용품 수거 차량이 왔을 때 한 군데 안 흩어지게 잘 모아서 담아 놓는 '공동의 일'을 함에 있어 누구는 하고 누구는 하지 않는다. 그것도 몇 번이나. 이럴 때 한 사람은 하지 않은 사람을 하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하지 않은 사람은 자신이 하지 '못했'다고 말한다. 거기에는 결코 서로 이해할 수 없고 이해하려고도 하지 않는 자신만의 이유가 있다. 


여성 삶의 본위


소설은 나아가 여성 삶의 실제를 낱낱이 파고든다. 소설가 구병모 자신이 두 아이의 엄마인데, 그래서 누구보다 잘 알 수 있지 않을까. 위에서 언급했다시피 소설의 주요 배경이 되는 꿈미래실험공동주택은 유자녀 부부만 입주할 수 있다. 고로 이곳에 들어와 있는 모든 부부에게는 자녀가 있고, '당연히' 자녀는 엄마의 손에 키워진다. 그런데 이곳의 네 아내 중 두 아내는 경제적 일도 하고 있다. 그리고 집에서 아이를 돌보고 집안일을 하는 것도 엄연한 '일'이다. 


여성의 삶은 곧 육아이다. 소설은 거기에 다름 아닌 공동체를 붙인다. 내 아이, 네 아이 할 것 없이 네 부부 모두 서로의 아이들 부모가 되어 육아 전쟁을 치른다. 이 얼마나 환희로운 생각이고 광경인가. 그 어떤 공동체보다 실체적이거니와 많은 도움을 주고 받을 수 있을 것 같다. 공동체의 의미를 가장 잘 구현해낼 수 있을 것 같다. 


소설이 규현해내는 육아 공동체의 실체는 마냥 환희롭지 않다. 99%를 만족시켰다고 해도 1%를 만족시키지 못하고 피해를 준다면 그건 과연 옳은 걸까? 완벽하다고 할 수 있을까? 훨씬 다수가 만족하였으니 괜찮을 걸까? <네 이웃의 식탁>이 주목하는 건 공동체에 속하게 된 개개인의 사정이다. 그건 개인주의도 이기주의도 아닌, 살다 보니 처하게 된 사정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육아라는 건 아마도 인간이 행하는 일 중 가장 고되고 어려운 일일 터, 더군다나 인간 한 사람이 지니는 성향이 모두 다른 만큼 개개인에 맞는 방법이 모두 다를 터, 공동 육아 또는 육아 공동체는 그 사랑과 책임의 강도가 훨씬 더 강하지 못할 시 가장 심한 부작용을 야기할 수 있다. 공동체의 허위와 여성 삶의 본위는 이렇게 만나 뒤엉킨다. 


아이를 가진 부부 간의 공동체는 세상이 아무리 바뀌었다지만 여성이 주가 될 수밖에 없는 구조, 그곳에서 여성의 삶은 오히려 더 피폐해질 수 있는 법, 피폐의 여파는 공동체의 균열로 이어지고 그 원인을 다시 여성에게 돌리는 순환. 공동체를 만능이라고 우러를 것이 아니라, 여성의 삶부터 그 구조적인 문제와 스스로를 옭아매게 되는 순환을 해결해야 한다. 이는 공동체가 아니라 여성의 삶에 문제가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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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영화 <디트로이트>


영화 <디트로이트> 포스터. ⓒ㈜팝엔터테인먼트



지난 2010년 제82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진귀한 장면이 연출되었다. <허트 로커>의 캐서린 비글로우가 아카데미 82년 역사상 처음으로 감독상을 차지하였는데, 인류 역사상 최고의 흥행 역사를 쓴 <아바타>의 제임스 카메론을 제치고 얻은 수확이었다. 캐서린 비글로우는 오래 전 한때 영화감독으로보다 제임스 카메론의 아내로 더 명성이 높았다. 


그녀는 1981년에 장편 데뷔를 하여 지금까지 35년이 넘는 기간 동안 고작 10여 편의 영화를 연출했다. 대단한 과작인데, 90년대 초반 <폭풍 속으로>를 찍고 주가가 폭등한 뒤 내놓은 대작들을 연달아 실패하고 참으로 오랫동안 영화를 내놓지 못했던 이유도 있을 거다. 하지만 필모를 들여다보면, 그냥 과작의 면모를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캐서린 비글로우는 예전부터 선 굵은 액션과 압도적인 분위기를 세심하게 연출하는 데 정평이 나 있는 감독이다. 최근 들어서 그녀가 내놓은 영화들을 보면, 그런 면모에 있어서 현존 최고의 여성 감독 아니, 감독 반열에 올라섰다는 게 명백하다. 최근이라고 해봤자 2010년의 <허트 로커>와 2013년의 <제로 다크 시티>가 있을 뿐이지만. 


차별이 만연한 폭력 현장


영화 <디트로이트>의 한 장면ㅁ. ⓒ㈜팝엔터테인먼트



그녀가 5년 만에 돌아왔다. 기대를 하지 않을 수 없고, 접하지 않을 수 없다. 전작에 이어 그녀가 선택한 실화는 1967년 7월 닷새 동안 미국을 강타한 디트로이트 소요 사태이다. 영화 <디트로이트>는 이 사태의 전반을 들여다보기보다 그동안 있었던 수많은 사건 중 하나를 집중적으로 파고 든다. 명백한 메시지와 압도적인 연출. 


미국 미시간주 디트로이트, 1967년 7월 23일 시내 술집에서 흑인들 파티가 새벽까지 벌어졌다. 경찰이 무허가 술집 단속을 이유로 이곳을 덮쳐 손님 전원을 체포한다. 지나가는 흑인들이 모여들어 항의하자, 경찰차들은 황급히 자리를 피한다. 누군가가 인근 가게를 턴다. 겉잡을 수 없을 폭동이 시작된다. 엄청난 수의 군까지 투입된다. 


7월 27일 밤, 알제 호텔에서 총성이 울린다. 어느 흑인 투숙객이 장난감 총을 쐈던 것. 근처에 있던 경찰과 군인들은 알제 호텔에서 쏜 저격수의 총성이라 단정 짓고 알제 호텔을 급습한다. 그렇게 잡혀온 6명의 남자 흑인과 2명의 여자 백인, 장난감 총을 쏜 장본인은 탈출하려다 죽임을 당한다. 


모두 백인 남자로 이루어진 경찰과 군인들은 본격적인 추궁에 들어간다. 그들은 이렇게 된 이상 반드시 저격수가 쏜 총의 정체를 밝혀내야만 했다. 반면 잡혀온 이들은 총의 존재 자체를 모르는 이들과 장난감 총에 불과하다는 걸 아는 이들 뿐이다. 진짜 총은 없는 것이다. 그 와중에 근처 가게에서 경비로 일하는 흑인 한 명이 가세한다. 총의 정체를 둘러싸고, 죽음의 협박을 가하는 가해자와 사실을 말할 뿐인 피해자 그리고 그 모든 걸 보고만 목격자까지 함께 하는 차별이 만연한 폭력 현장이다. 


차별의 반복


영화 <디트로이트>의 한 장면ㅁ. ⓒ㈜팝엔터테인먼트



영화는 흑인에게 행해지는 백인의 무차별하고 다양한 폭력을 통해, 차별의 양상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시기도 시기였거니와, 장소도 장소였고, 분위기도 분위기였다. 토끼굴에 불을 지펴 토끼로 하여금 뛰쳐나올 수밖에 없게 만든 것이다. 뛰쳐나온 토끼는 잡히지 않게 도망가거나 발악을 할 수밖에 없다. 


전체적으로 일방적인 구도를 영화는 알제 모텔에서의 미시적 구도로 끌고 온다. 그곳에서 생각할 겨를 따위는 없다. 흑인 남자와 백인 여자들은 그저 벽을 보고 백인 남자들의 일방적인 죽음에의 협박에 떨고 있을 뿐이다. 그들에게 내려진 차별의 철퇴는 거시적으로, 미시적으로 또한 과거부터 현재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될 것 같다. 


백인 남자들이 전부인 경찰과 군인들은 그런 구도가 당연한 듯하다. 인간 대 인간이라는 구도 하에서 하물며 강력한 범죄용의자라고 해도, 심지어 범죄자라고 해도, 자신을 변호할 권리나 말하지 않을 권리가 있을진대 이건 막무가내다. 그들이 단지 흑인폭동이 한창인 곳에 있는 흑인들이라는 이유로, 그런 흑인들과 함께 놀고 있던 여자라는 이유로. 이 족쇄는 피부색이나 성(性)에만 채워져 있는가 보다. 


알제 호텔 1층 로비에서 펼쳐지는 단순 구도 하에 반복되는 협박과 무지에서 오는 당연한 반박의 시퀀스는, 영화 내적으로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장면 연출이면서 동시에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차별의 반복' 메시지의 핵심을 이룬다. 그들은 '차별'이라는 단어가 갖는 의미를 끊임없이 찾아낸다. 그렇게 구분하고 적을 만들고 군림한다. 


인간 군상


영화 <디트로이트>의 한 장면ㅁ. ⓒ㈜팝엔터테인먼트



떡 하니 '인종 차별'이라고 붙여 놓은 듯한 확고한 구도에서, 피해자 측의 여자 백인과 가해자 측의 백인 군인 그리고 목격자 측의 남자 흑인 경비가 눈에 띈다. 이들은 이 구도 하에서 드러나지 않는 또 하나의 피해자, 인종적 선의만 있을 뿐 차별 본질의 선의는 없는 방관자, 정녕 아무것도 할 수 없고 피해자도 가해자도 아닌 목격자이다. 


차별을 기반으로 하는 일대일 구도에서 당사자가 아닐 때 어떤 생각으로 어떤 행동을 하는지 영화는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나는 백인이나 흑인이 아니고 여자도 아니기에, 이들 중 어느 위치와도 맞닿아 있지 않다. 그러하기에 쉽게 생각하고 말하고 재단할 수 있을 것이다. 


차별에 있어서, 차별을 행하고 차별에 당하는 당사자들보다 더 중요한 건 그래서 차별의 바운더리 밖이지만 가까운 곳에 있는 사람들이다. 그 경계에 있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이다. 바운더리 안에 있는 이들이 쉽게 하면 안 되는 생각이나 행동들을 쉽게 할 수밖에 없거나 쉽게 할 수 있거나 쉽게 하고 싶은 것과는 다르게, 바운더리 밖에 있는 이들은 쉽게 하면 안 되는 생각이나 행동들을 말 그대로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디트로이트>이 보여주는 인종차별 양상의 일대일 구도와 더불어 기타 등등의 인물들 행동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는 인간 세계에 존재하는 수많은 인간군상들, 그 축소판이기도 한데, 그 다양성의 본질이 다름 아닌 다양성이 존재해서는 안되는 차별의 세계에도 존재하는 것이다. 차별의 세계엔 역설적으로 '차별도 존재한다'는 다양성 또는 상대성 대신 '차별은 절대 안 돼'는 획일성 또는 절대성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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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영화 <수성못>


영화 <수성못> 포스터. ⓒ인디스토리



대구 수성구 수성유원지 수성못에서 오리배 아르바이트를 하며 편입 공부를 병행하는 오희정(이세영 분), 그녀는 집안의 도움 없이 홀로 치열하게 분투한다. 어떻게든 이곳을 떠나 서울에 있는 대학으로 가기 위해서다. 그러던 비가 쏟아지던 어느 날, 손님도 없고 해서 쏟아지는 잠을 감당 못하는 사이 중년 남성 한 명이 무단으로 오리배를 탈취해 수성못으로 나아간다. 그러곤 곧 투신자살을 시도한다. 


희정은 오리배 담당자로서 당연히 지급해야 했던 구명조끼를 조느냐고 깜빡했다는 걸 사장이 알게 되면 잘리게 된다는 사실에 질겁한다. 당일 야밤에 몰래 구명조끼를 수성못에 버리려다가 때마침 촬영을 하고 있던 차영목(김현준 분)에게 들킨다. 그는 자살시도자들을 촬영하고 있었던 것. 영목은 희정의 비밀을 빌미로 그녀를 자살센터로 끌어들여 자살시도자 촬영을 도우게 한다. 


한편, 희정에겐 오빠 오희준(남태부 분)이 있다. 그는 아무런 생산적인 일도 하지 않고 아무도 만나지 않은 채 집에서 책만 들여다보고 있다. 그러며 희정에게 '하고 싶은 일도 있어서 좋겠다'고 푸념한다. 그는 자살충동에 못이겨 정신병원을 다니고 있는데, 군대에 가지 않으려는 수작 같기도 하고 군대를 못 가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KAFA 출신 감독의 장편 데뷔작 <수성못>


영화 <수성못>의 한 장면. ⓒ인디스토리



영화 <수성못>은 한국의 영화 사관학교라 불리는 한국영화아카데미(KAFA) 출신의 유지영 감독 장편 데뷔작이다. 이 작품은 KAFA의 2017년 장편데뷔작 기획전에 출품되었는데, 장편제작연구과정 9기의 대표 완성작 중 하나이다. 지난 2009년 시작된 이 과정의 기획전 대표작들을 들여다보면, 입이 떡 벌어진다. 


2010년엔 개인적으로 2000년대 한국 독립영화 중 최고라 할 만한 <파수꾼>이, 2013년엔 <잉투기>와 <들개>가, 2015년엔 <소셜포비아>와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 등을 선보였다. 출중한 데뷔작 이후 이렇다 할 활동을 하지 않는(못하는) 감독들이 상당한 게 마음에 걸리지만 KAFA의 능력에 의문을 품게 하진 않는다. 


<아기와 나> 등과 함께 2017년에 선보인 <수성못>. 3명의 주인공을 통해 보여주는 시선과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두루뭉술한듯 선명하고 식상한듯 신선하다. 청춘의 삶과 죽음, 삶과 죽음에의 치열함, 지방에서 여성으로 살아가는 것 등의 주제가, 수성못이라는 소재로 집결하고 수성못이라는 소재에서 비롯된다. 


'삶'도 '죽음'도, '치열하지 않음'도 치열한 청춘들


영화 <수성못>의 한 장면. ⓒ인디스토리



정녕 '삶'을 치열하게 살아가는 희정, 돈도 열심히 벌고 공부도 열심히 하고 운동도 열심히다. 이 시대, 바로 지금 가장 청춘다운 청춘의 모습이다. 그녀에게로 한 발자국 더 들어가보면, 지방과 여성이 보인다. 지방에선 성공할 수 없다는, 즉 이곳에서 살아선 안 된다는 열망과 함께 여성으로 살기 힘들다는, 즉 더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열망이 합쳐진다. 일반적인 청춘의 치열함보다 더 목적적이다. 


영목이 자살시도자를 촬영하고 그들의 말을 듣는 건 알고보니 사회봉사의 일환이었다. 그는 다름아닌 동반자살클럽회장으로, 동반자살을 주도했다가 실패한 경력이 있다. 정녕 '죽음'을 치열하게 치르려는 영목이다. 그 치열함에서 희정의 치열함이 떠오른다. '그들'의 '목적적'인 치열함 말이다. 그들은 대구를 떠나 서울로 가든 이승을 떠나 저승으로 가든, 지긋지긋한 '이곳'을 떠나 '그곳'으로 가려 한다. 


장강명 작가의 히트작 <한국이 싫어서>(민음사)가 겹쳐진다. '헬조선'을 탈출해 호주로 가려는 청춘들, 하지만 호주도 또 다른 '헬'일 뿐이라는 교훈 아닌 교훈을 던진다. 이 소설이 주로 탈출 이후까지의 이야기를 그리는 반면, <수성못>은 주로 탈출하기까지의 이야기를 그린다. 


삶이든 죽음이든 정녕 쉽지가 않다. 그러다 보니, 그들은 공중에 붕 떠 있는 것 같다. 영화는 그 모습을 수성못에 떠 있는 오리배라고 보았다. 하염없이 떠 다니지만, 절대 수성못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오리배들 말이다. 그 어떤 치열함으로도 대구를, 이승을 떠나지 못하는 그들이 애처롭다. 


그렇다면, '치열하지 않음'을 치열하게 내보이는 희정 오빠 희준은 어떨까. 우리 안에 희정과 영목의 결이 다른 치열함이 공존할 텐데, 당연히 희준의 치열하지 않음의 치열함도 존재할 것이다. 희정과 영목이 애처로운 개인들의 형상이라면, 희준은 그 개인들에게 있는 또 다른 형상이 아닐까. 혹은 있으면 하고 바라는 형상. 


광범위하게 그저 보여준다


영화 <수성못>의 한 장면. ⓒ인디스토리



영화는 삶과 죽음, 무엇을 지향하고 무엇을 지양하라고 가르치지도 가리키지도 않고 설교하지도 선언하지도 않으며 판단하지도 재단하지도 않는다. 그저 보여준다. 때론 우스꽝스러움 속의 진지함으로, 때론 흐리멍덩함 속의 적나라함으로. 


그 모든 모습이 우리의 모습이고 우리 주위의 모습이고 우리 사회의 모습인 게 맞다. 그래서 이 영화 <수성못>은, 독립영화가 흔히 추구하는 '사회의 한 단면'을 적나라하게 작가적 시점으로 파고드는 게 아니라 의외로 꽤나 광범위하게 들여다보고 있다. 


그러다 보니 파괴적인 영화적 재미에선 조금 떨어질 우려가 있는데, 자살이라는 소재와 더불어 극초반에 벌어진 자살미수 사건에서 비롯되는 소소한 미스터리를 흥미 유발의 원천으로 사용한다. 


대체로 적절하고 적정하고 적재적소한 이 영화, 감독의 능력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다만, 더욱 기억에 남는 영화를 남기기 위해선 오히려 이 영화의 장점이었던 적절함과 적정함을 버리고 한 곳을 파고드는 집요함이 필요해 보이기도 한다. 이제 갓 데뷔한 감독한테 흔히 보이는 패기 대신 노련함이 엿보이는 유지영 감독, 오히려 다음 작품에서 패기있는 모습을 보이면 좋겠다는 생각과 함께 그래서 더 기대가 되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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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아이, 토냐>


영화 <아이, 토냐> 포스터. ⓒ누리픽쳐스



아주 어렸을 때부터 피겨스케이팅에 관심을 갖고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토냐 하딩(마고 로비 분), 극악한 엄마(앨리슨 제니 분)의 폭력적인 관심과 가르침으로 두각을 나타낸다. 반면, 그 때문인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출중한 성적과 함께 성격과 행동의 돌출적이고 폭력적인 끼를 숨기지 못했다. 


토냐는 우연히 만난 제프 길롤리(세바스찬 스탠 분)와 격렬한 사랑에 빠져 결혼까지 한다. 하지만 그는 폭력적이기 짝이 없는 광인이었다. 지옥 같은 엄마와의 일상에서 빠져 나와서 정착한 곳이 또 다른 지옥이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그들한테서 사랑을 느꼈다. 문제는, 삶을 파괴할 게 분명한 그의 폭력이 끝없이 되풀이 된다는 것이다. 


세계선수권대회에서 미국 최초로 트리플 악셀을 성공시킬 정도의 출중한 실력은 대중의 사랑을 불러일으킨 반면, 클래식이 아닌 하드코어 음악을 틀고 점잖치 못한 의상을 입고서 무대에 오르는 이 선수를 심사위원들은 고깝게 보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녀는 미국을 대표하는 선수였고, 1992년 알베르빌과 1994년 릴레함메르 동계올림픽에 출전했다. 


1994년 릴레함메르 동계올림픽 직전 일어난 '그 사건'은, 그녀로 하여금 더 이상 피겨스케이팅을 타지 못하게 하였고, 그녀에게 '은반 위의 악녀'라는 지울 수 없는 낙인을 부여했으며, 미국 피겨스케이팅계 추락의 빌미를 제공했다. 


미국이 원하는 여성상


영화 <아이, 토냐>의 한 장면. ⓒ누리픽쳐스



영화 <아이, 토냐>는 1990년대 미국을 발칵 뒤집은 사건 중 하나인 '낸시 캐리건 습격 사건'을 주요 키워드이지만 루즈한 톤으로 깐, '토냐 하딩'의 삶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 거대한 사건에 가려진 토냐의 진짜 삶의 면면들 말이다. 거기에서 우리는 토냐의 모습을 통해 '그대로의 여성'과, 또한 미국과 대중과 미디어의 민낯을 들여다볼 수 있다. 


1980, 90년대 미국은 절제와 통제의 시대로 진입해 있었다. 신자유주의와 보수주의의 집합체는 여러 곳에 손을 뻗었고, 스포츠 종목 중 유독 예술적이고 여성적인 피겨스케이팅은 실력만큼 중요한 아니, 그보다 중요한 외모와 이미지가 순위를 결정하고 대표를 선발했다. 가난해서 '제대로 된' 의상을 입을 수 없었고, 치명적인 환경에서 자라와 '고상할' 수 없었던 토냐 하딩은 부적격자였다. 


그녀의 실력은 미국을 대표하고도 남았지만, 그녀의 이미지는 미국(의 심사위원)이 원하는 게 아니었던 것이다. 이전보다 훨씬 다양성과 개성이 추구되는 지금이라면 그녀의 다듬어지지 않은 거친 원석의 느낌도 충분히 강점이 되고도 남았겠지만, 그때는 더할 나위 없는 특급의 약점이 되고 말았다. 그녀는 그녀, 그대로의 여성으로 남아 있기 힘들었다. 만들어진 여성, 미국이 원하는 여성상, 보수적인 여성상이어야만 했다. 


토냐 하딩의 삶의 면면


영화 <아이, 토냐>의 한 장면. ⓒ누리픽쳐스



영화는 실화를 기반으로 하며 다큐멘터리 형식을 취하면서도 블랙 코미디 요소를 섞는 기발함을 발휘했다. 그때 그 시절의 느낌과 캐릭터를 최대한 그대로 가져와 토시 하나 바꾸지 않는 대사를 차용했지만 진지하지 않은 편집과 음악과 여러 영화적 기법을 통해 더 깊은 감정이입을 차단하기도 했다. 그러하기에 시종일관 비극적일 수밖에 없었던 토냐 하딩의 삶의 면면에 환멸과 냉소를 던지기도 한다. 


반강제적인 통합과 편입에는 필히 반발이 따를 수밖에 없다. 세계 패권 국가로서의 미국이라면 당연히 자기 입맛에 맞는 선수를 국가대표로 내보내려고 했을 터, 출중한 실력과 외모를 자랑하는 문제아 토냐는 골칫덩어리이자 고민덩어리였을 것이다. 그래서 문제 삼는 게 바로 그녀 삶의 면면들이다. 


그녀의 삶은 비극의 연속이다. 비극은 그녀의 모든 것인 피겨스케이팅에 거대한 명과 암을 선사한다. 명암은 미국에 고민을 던지고 고민 끝에 내린 결정은 다시 그녀에게 돌아와 또 다른 비극을 낳는다. 아무런 '잘못'이 없는 그녀, 자신은 아무런 '잘못'이 없다고 말하는 그녀, 그에 대한 고민을 또는 반론을 우리는 이 영화를 통해 조심스럽게나마 들어볼 수 있게 되었다. 적나라하게 내보이면서도 빠르고 단편적으로 쓸고 지나가는 듯한 영화의 면면들은 그런 조심스러운 들여다보기의 흔적들이다. 


토냐 하딩이고 싶었던 토냐 하딩


영화 <아이, 토냐>의 한 장면. ⓒ누리픽쳐스



토냐 하딩이 더 이상 피겨스케이팅을 할 수 없게 만든, 그리고 그녀에게 '은반 위의 악녀'라는 낙인을 찍어버린, 그 사건은 엉망진창이다. 하필이면 그 사건의 주인공(피해자) 낸시 캐리건은 토냐의 강력한 라이벌이자 미국을 대표하는, 미국이 원하는 여성상에 거의 완벽히 부합하는, 그야말로 토냐와 정반대의 인물이었던 것이다. 


더불어 하필이면 그 사건의 또 다른 주인공(가해자)인 괴한이 토냐의 남편과 토냐의 보디가드(라고 주장하는)와 연류되어 있던 게 아닌가. 미디어와 대중이 그런 스캔들과 가십거리를 가만히 놔둘리가 없다. 미디어로서는 그만큼 대중의 이목을 끌만한 사건이 더이상 있을 수가 없고, 대중으로선 그만큼 신나게 열광할 사건이 더이상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토냐 하딩과 낸시 캐리건은 당대 최고의 인기를 구사하던 미국 피겨스케이팅계에서 미국을 대표하는 최고의 라이벌이 아닌가. 어떤 식으로든 최고의 유명인의 속절없는 추락은 하릴없는 대중, 별 것 없는 일상을 살아가는 대중, 그런 대중에게 입맛 당기는 기삿거리를 찾는 미디어에게 가장 핫한 일이다. 


이 사건을 온전히 토냐 하딩의 불우한 비극의 삶의 연속적인 행태의 정점으로 치부해버릴 수도, 미국과 미디어와 대중이 한통속이 되어 토냐 하딩을 지옥으로 이끌어 버렸다고 할 수도, 토냐 하딩의 전 남편과 보디가드가 그녀 모르게 꾸민 범죄의 결과로만 생각할 수도 없다. 진실은, 중요한 것은, 이 모든 것들 어디에서도 정작 '토냐 하딩'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토냐 하딩은 그저 토냐 하딩이었을 뿐이고, 토냐 하딩이고 싶었을 것이다. 그녀는 그저 좋아하고 잘 할 수 있는 것, 피겨스케이팅을 타고 싶었을 것이다. 그저 남들처럼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나 자라고, 평범한 가정을 이루며 살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 그녀의 바람을 이해하고 동조하고 도와준 이는 이 세상에 단 한 명도 없었다. 자신조차도 말이다. 그녀는 '은반 위의 악녀'는커녕 세상으로부터 철저히 버림받고 이용당하고 조작당한 한 여자였다. 단순히 불쌍하다는 말로는 그녀를 설명할 수 없다. 차라리 악녀가 되는 게 나았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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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스티븐 스필버그의 <더 포스트>


영화 <더 포스트> 포스터. ⓒ20세기폭스코리아


<뉴욕 타임스> <월 스트리트 저널>과 함께 미국을 대표하는 일간지 <워싱턴 포스트>, 일명 <포스트>. <뉴욕타임스>가 1971년 미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를 발칵 뒤집은 '펜타곤 문서' 보도로 미국에 '치명적이고 회복할 수 없는 손실'을 입히며 명성을 떨친 것처럼, <포스트>는 이듬해 1972년 역시 전 세계를 뒤흔든 '워터게이트' 진상 보도로 명성을 떨쳤다. 영화 <더 포스트>는 어느 신문사의 어떤 보도를 다루는가. 


<더 포스트>는 큰 틀에서 투 트랙으로 진행된다. 명백한 메시지로 점철된 그것들은, 당연한 '언론'과 의외의 '여성'이다. 영화는 <타임스>가 아닌 <포스트>의 '펜타곤 문서' 보도를 다룬다. 왜 <포스트>의 '펜타곤 문서' 보도일까. 최초의 보도로 세상을 뒤집은 건 <타임스>인데 말이다. 또한 <포스트> 발행인 캐서린의 선택이 중요하다 못해 절대적이다. 그녀의 선택은 왜 특별히 중요한 것일까. 


할리우드의 신 '스티븐 스필버그'와 그의 페르소나 '톰 행크스', 그리고 연기의 신 '메릴 스트립'의 만남은 불꽃 튀긴다. 아니, 그럴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실상 그러진 않았다. 영화는 감독, 배우, 연기에서 힘을 빼고, 메시지에 거의 모든 힘을 쏟는다. 그래서 기대했던 영화가 아닐 수도 있을 것 같으나, 다른 어느 때도 아닌 지금 이 시대에 반드시 봐야 할 영화로 거듭났다. 그들의 이야기에 한 발 더 들어가보자. 


세계 역사를 바꾼 일


영화 <더 포스트>의 한 장면. ⓒ20세기폭스코리아



1971년, 베트남 전쟁에서의 미국 의사 결정 기록, 일명 '펜타곤 문서'가 <뉴욕 타임스>에 의해 세상에 드러난다. 펜타곤 문서 작성에 참여했던 댄 엘스버그가 몇 개월 동안 빼돌려 복사해 제보한 것이었다. 닉슨 정부는 이를 국가 안보에 심각한 위해를 초래하는 행위라며 후속 보도를 금지하였다. 


한편, <워싱턴 포스트>는 한낱 닉슨 대통령 딸의 결혼식 보도로 실랑이를 벌이는 중이었는데, 사태의 중요성과 심각성을 파악한 편집장 벤(톰 행크스 분)이 주도적으로 나서서 펜타곤 문서 입수에 사활을 건다. 천신만고 끝에 입수하지만, 발행인 캐서린(메릴 스트립)이 보도를 망설인다. 


'언론의 자유'라는 당연한 권리와 함께 국민에게 진실을 알려야 하는 언론의 사명으로 중무장한 벤, <워싱턴 포스트> 전통과 역사와 존폐, 그리고 자신뿐만 아니라 수많은 직원의 생존과 안전이 걸려 결정을 내리기 힘든 캐서린. 우리는 그녀의 선택이 무엇인지 이미 알고 있다. 


그녀는 언론의 자유와 사명 그리고 민주주의를 향해 모든 걸 걸고 나아간다. 그 위기를 기점으로 <워싱턴 포스트>는 더 이상 지역 일간지 수준이 아니게 되었고, 이어진 '워터 게이트' 취재 및 보도로 미국을 대표하는 일간지로 부상하게 된 것이다. 그들은 회사뿐만 아니라 미국, 나아가 세계 역사를 바꾼 일을 해냈다. 


언론


영화 <더 포스트>의 한 장면. ⓒ20세기폭스코리아



영화는 앞서 말했던 '언론'과 '여성'의 투 트랙을 중심으로, 그 명성 높은 감독과 배우들의 연출과 연기가 아닌 '메시지'에 중점을 둔다. 언론 윤리라는 게 있다. 진실을 추구하고 사회정의를 지향하고 인간적 연대 속에서 자유를 추구하며 인간을 존중해야 한다는 것 등이다. 미국의 베트남 참전 계기가 되는 사건이 조작이었고, 이길 수 없는 전쟁인 줄 알고도 지속했으며, 선거를 조작한 것도 모자라 거짓 선언으로 전 세계를 우롱했다는 사실을 속속들이 들어 있는 '펜타곤 문서' 폭로는 당연한 것이었다. 


그야말로 진실을 추구하고 사회정의를 지향하는 행동이 아닌가. 이길 수 없는 전쟁에 젊은이들을 계속해서 파병시켜 죽게 만든 행위는 인간을 존중해야 한다는 언론 윤리에 힘을 보탰고, 닉슨 정부의 보도 금지 압박은 자유를 추구하는 또다른 언론 윤리에 합당함을 부여했다. 문제는, 자본주의 세상에선 이 모든 게 말처럼 쉬운 게 아니라는 것이다. 신문사도 회사인 바, 후원과 투자로 돌아가는 게 아닌가. 


위대함의 많은 선행 사항 중에 가장 힘든 게 희생이다. 캐서린은 '언론'을 지키고 결국 <포스트>를 지키기 위해, <포스트>를 희생시킬 각오를 한 것이다. 언론이 있고 <포스트>가 있는 것이지, <포스트>가 있고 언론이 있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적중했다. 그녀는 위대한 일을 해냈다. 


이 영화를 상징하는 '우리가 보도하지 않으면, 우리가 지고 국민이 지는 겁니다'라는 대사는 나아가 언론의 총체적이고 궁극적인 존재 이유를 반영한다. 궁극적으로 '언론'이 아닌 '국민'을 지키는 게 언론의 의무이자 사명의 결정체라는 것. 국가가 국민을 지키지 못할 때, 지키려 하지 않을 때, 언론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여성


영화 <더 포스트>의 한 장면. ⓒ20세기폭스코리아



<워싱턴 포스트> 발행인 캐서린으로 집약되는 '여성'이라는 메시지는 이 영화가 던지는 또 하나의 중요한 화두다. '펜타곤 문서' 보도를 다루는 영화임에도 <타임스>가 <포스트>를 선택한 또 하나의 이유이기도 하다. 사건 자체보다 사건을 다루는 언론, 그리고 그 과정에서 소외당하고 잊힐 뻔한 한 여성의 성장 이야기가 이채롭다. 


캐서린의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포스트>를 물려준 이는 캐서린이 아닌 캐서린의 남편이었다. 하지만 남편은 갑작스레 자살로 생을 마감하고 아무런 준비도 되어 있지 않은 채, 그런 일을 하지 않아도 되었을 캐서린이 경영자가 된다. 가족 경영이라는 꼬리표도 떼지 못한 채 최초의 여성 발행인으로 회사를 이끌어야 하는 처지, 당연히 당당한 결정과 선택을 하지 못하고 휘둘리기 일쑤인 것이다. 


영화는 회사의 존폐가 달린 결정과 선택을 하기까지 <워싱턴 포스트>가 급박하게 돌아가는 모습을 포착함과 동시에, 그에 못지 않게 많은 비중을 캐서린이 여성으로서 겪을 수밖에 없었던 불편, 부당한 모습에 할애한다. 그 두 접점이 펜타곤 문서 후속 보도 결정이라는 클라이막스에서 만나 확신에 찬 메시지를 던지게 되는 것이다. 그 고색창연한 메시지들은 속이 뻥 뚫리는 환희를 선사하기도 한다. 


<더 포스트>는 비단 언론의, 언론을 위한, 언론에 의한 영화만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해야겠다. 또한 50년 가까이 지난 옛이야기를, 그것도 너무나도 유명한 이야기를 그저 역사를 계속해서 되새김질하는 당위성 차원에서 불러온 것도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해야겠다. 이 영화는 지금 여기 우리에게 보내는, 명백한 목적 하의 명백한 메시지이다. <더 포스트>는 분명 '기대보다 못 미치는 게' 아닌 '기대와는 다른' 영화지만, 어떤 면에선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 최고의 영화임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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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딸에 대하여>


소설 <딸에 대하여> 표지 ⓒ민음사



일찍 남편을 보내고 요양원에서 요양보호사로 일하는 '나', 남편이 유일하게 남긴 유산인 집에 서른을 훌쩍 넘었어도 제대로 자리 잡지 못하고 대학교 시간강사로 살아가는 '딸애'를 들인다. 딸애는 7년 간 사귀어 왔다는 '그 애'와 함께다. 나로선 정녕 상상하기도 싫고 어려운 그들과의 동거지만, 딸애의 부탁을 져버릴 순 없지 않은가. 서로를 그린과 레인으로 부르는 그들은 레즈비언 커플이다. 


딸애는 안 그래도 어렵게 살아가는 시간강사의 삶 위에 학교를 상대로 시위를 하는 삶을 얹혀 놓았다. 딸애처럼 레즈비언 시간 강사가 레즈비언이라는 이유로 학교에서 쫓겨났기 때문인데, 나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사람의 일로 딸애가 그러는 걸 이해할 수 없다. 그건 내가 요양원에서 보살피는 무연고 치매노인 '젠'을 보면서, 그녀의 삶을 돌아보면서 뼛속 깊이 느낀 것이다. 


젠은 젊은 시절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공부를 하고 한국계 입양아들을 위해 일해왔다. 한국에 돌아와서는 이주노동자들을 후원했다. 평생 자신과 하등 상관없는 이들을 위해 헌신해 왔지만, 지금은 치매에 걸려 요양원에서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아무도 그녀를 찾지 않는다. 


'나', '딸애'와 '그 애', '젠'의 이야기 <딸에 대하여>는 여성의, 여성에 의한, 여성을 위한 소설이다. 그 안엔 현시대를 가로지르는 첨예한 사항부터 시대와 상관 없이 오래도록 당연시 되어온 문제까지, 주로 소수자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동성애자 시간강사, 홀몸의 중년여인, 무연고자 치매노인, 모두 소수자이기에 앞서 모두 여성이기에 삶의 고단함을 향한 이중부과가 매겨져 있는 느낌이다. 


'딸에 대하여'보다 '여성에 대하여'


소설은 '딸에 대하여'라는 제목에서도 유추할 수 있듯이, 동성애자이자 시간강사로 '평범하고 제대로 된' 삶을 살지 못하는 딸에 대한 이야기를 중심에 놓고 있다. 아니, 제목을 앞세워 그렇게 포장한 것이리라. 실상, 딸보다 '나'와 '젠'에 대하여 즉 엄마와 여성에 대한 이야기인 게 맞다. 여기서 나에겐 젠이 딸애와 겹쳐 보이니, 결국 '여성에 대하여'가 궁극적으로 올바른 제목이라 하겠다. 


어떤 여성을 말하고자 함인가. 소설에선 남성이 주인공으로 일절 등장하지 않는다. 그래서일까? 전통적 보수의 전형과도 같은 나는 딸애가 남성으로서의 사회적 성공과 여성으로서의 결혼적 성공을 동시에 바란다. 소설은 그 정도에 머물러 있는 내가 여러 일들을 겪으면서 깨닫게 되는 깨달을 수밖에 없게 되는 '성장' 매커니즘을 따른다. 그 끝에는 '여성'이 아닌 '공동체'가 있다. 


한편, 소설에서 가장 첨예한 이슈가 될 수 있는 '퀴어' 소재의 주인공들인 딸애와 그 애는 그 이슈를 가슴으로는 생각조차 하지 않고 당연하게 받아들이지만 현실상 머리로는 항상 생각하고 있어야 하는 이중의 삶을 살고 있다. 그들은 왜 당연한 삶의 결정체로 물질적 정신적으로 직간접적 피해를 받아야 하는 것인가? 하지만 소설은 퀴어의 당위성에 집착하는 대신 객관적 사회문제로 격상시키는 묘수를 발휘한다. 


'젠'은 소설의 모든 것에 거리를 두고 있는 느낌으로 와서 소설의 모든 것에 가장 밀접한 관계가 있는 느낌으로 떠나간다. 그녀의 지난 젊은 시절은 딸애를 보는 것 같고, 그녀의 현 시절은 나의 미래를 보는 것 같다. 소설은 한국 모든 여성의 미래와 한국 늙은 여성의 현재, 그 한 단면을 젠을 통해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공동체를 향한 깨달음과 이해


남성은 여성의 삶을 상상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단순히 보이는 삶과 행동, 생각보다 훨씬 많은 것들이 그녀들을 감싸고 있고 그녀들을 향해 일방적으로 보내고 있으며 그녀들을 얽매기도 하면서 조종하기도 한다. 반면, 남성은 여성이 상상하는 딱 그 정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것이다. 


내가 종국에 만나게 되는 공동체란 상상할 수 없는 여성의 삶도 상상할 수 있는 남성의 삶도 뛰어 넘는 연대다. 자신의 일과 딸애의 일에서 겪게 되는 '나의 일이 될 수 있는, 아니 나의 일과 다름 없는 남의 일'의 정체를 깨닫고, 딸애의 성향을 이해할 순 없지만 딸애의 상상불가 위의 상상불가의 어려움은 이해하게 된 것이다. 


단 하나의 가족인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정도는커녕 혐오를 하는 딸애가, 나 아닌 다른 이들에겐 얼마나 크나큰 혐오와 배제의 대상이 될 것인지 불 보듯 뻔하지 않은가. 그런 매커니즘의 이해야말로 가족만이 할 수 있는 것이리라. 나의 깨달음과 성장이 거기서 멈추지 않기를 바란다. 


거기서 파생된 '가족 아닌 자'인 젠을 향한 마음 또한 크나큰 깨달음과 성장의 한 면이다. 가족만이 가능하다고 생각한 이해가, 가족이 아닌 자를 향하고 있지 않은가. 그 자체가 공동체의 발로다. 그 모든 게 '딸에 대하여' 생각한 끝에 나아가게 된 이 시대 평범 평균의 여성의 깨달음이다. 이제 '위대'라는 뜻의 수정이 필요할 때다. 위대라는 단어에 '보수로 대변되는 완벽'이 아닌 '진보로 대변되는 나아감'이 대신해야 하는 것이다. 이 여성들은 진실로 위대하다. 


딸에 대하여 - 10점
김혜진 지음/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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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레이디 맥베스>


고전적 캐릭터 '레이디 맥베스'가 기본 골자 위에 입체적으로 재탄생했다. ⓒ씨네룩스



온몸을 뒤덮는 베일을 쓴 한 소녀, 불안한 눈빛으로 두리번 거린다. 보이진 않지만 옆에는 남편될 사람인 듯하고, 뒤에는 늙은 남자와 흑인 여자가 서 있다. 결혼식이다. 뭔가가 빠져 있는 결혼식. 곧이어 첫날밤, 모습을 드러낸 남편은 소녀 캐서린(플로렌스 퓨 분)에게 벗으라고 명령하고는 혼자 침대로 들어가 몸을 돌려버린다. 이해할 수 없는 첫날밤. 일반적인 결혼식과 첫날밤의 모습이 아니다. 


19세기 영국, 알고 보니 캐서린은 탄광을 소유한 명가에 팔려온 이였다. 남편은 원하지 않았고 남편이 극도로 싫어하고 증오하는 아버지가 사온 것. 일련의 이상함들이 조금은 이해가 간다. 캐서린이 이 집에서 할 일은 없다. 집에서 나가지 말고 가만히 성경이나 읽고 있으면 된다. 여자로서의 본분을 지키면 되는 것이다. 더욱이 그녀는 이 집의 여주인이기 전에, 하인들과 마찬가지로 시아버지의 재산에 불과하다. 


무료함 때문인지 천성 때문인지 캐서린은 시아버지와 남편의 말에 고분고분하지는 않다. 무표정해 보이는 표정에서부터 알 수 있다. 어느 날 탄광이 폭발해 남편과 시아버지 모두 집을 비운다. 그 때문인지 집안 남자 하인들이 단체로 흑인 여자 하인 안나에게 몹쓸 짓을 한다. 이를 목격한 캐서린, 안나를 구해주는데 그중 한 명인 세바스찬에게 기묘한 욕정을 느낀다. 그렇게 흔하디 흔한 주인 마님-하인의 희비극 러브스토리가 펼쳐지는 듯하다. 


레이디 맥베스의 인물상


'욕망의 화신'을 둘러싼 다양한 은유들, 이 영화를 이루는 것들이다. ⓒ씨네룩스



영화 <레이디 맥베스>는 제목에서 알 수 있다시피 셰익스피어의 <맥베스>에서 충심으로 가득 찬 최고의 전사 맥베스에게 욕망으로의 결정적 속삭임을 건네는 레이디 맥베스가 생각나는데, 원작은 19세기 러시아의 니콜라이 레스코프 <러시아의 맥베스 부인>으로 사랑 때문에 3명을 엽기적으로 죽인 한 여인의 이야기다. 그 끝은 좋지 않다.


레이디 맥베스는 이처럼 욕망의 화신이다. 욕망에 사로 잡힌 그 끝에 남은 건 파국뿐이라는 걸 말해왔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레이디 맥베스는 단순한 욕망의 화신 그 이상이다. 그녀의 욕망 안에 담겨 있는 것들이 실로 다양하다는 뜻이거니와, 영화가 거기에서 끄집어내어 은유로서 말하고자 하는 바 역시 실로 다양하다. 


고로 레이디 맥베스의 인물상에 집중할 수밖에 없다. 여자의 본분을 잊은 채 자주 외출하고 부인의 본분을 잊은 채 하인과 사랑을 나누며 며느리의 본분을 잊은 채 시아버지에게 대들기도 한다. 급기야 살인으로까지 나아간다. 눈 하나 깜빡이지 않는 사이코패스적인 살인 행각, 그 순간들에는 안나와 세바스찬이 있다. 그들의 한없이 괴로워하는 모습에 비춰 캐서린의 무표정이 더욱 눈에 띈다. 


공교롭게도 살인 대상은 모두 남자들, 이쯤 되면 혁명이라 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욕망에 사로 잡혀 미쳐 날뛰는 이의 즉흥적인 살인이 아닌, 완벽하진 않아도 나름의 체계가 잡힌 조직적 살인일 수 있다. 권좌에 앉을 이는 다른 누구도 아닌 캐서린 그 자신이다. 


혁명과 체제 전복의 파편들


캐서린이 행하는 행각은 가히 엽기적이지만, 다분히 체제 전복의 성격이 담겨 있다. ⓒ씨네룩스



캐서린은 시각에 따라 살인보다 더 생각하기 힘든 행각도 벌인다. 재산에 불과한 하녀 안나를 자신과 한 식탁에 앉게 하기도 하고, 역시 재산에 불과한 세바스찬을 주인처럼 차려 입게 하고는 자신과 한 식탁에 앉히기도 한다. 주인 없는 곳에서 권력을 누릴 양으로 욕망 분출에의 욕망의 모습일지 모르지만, 은유로 자리잡기 충분한 모양새다. 


그건 곧 뜻했건 뜻하지 않았건 여성, 계급, 인종을 일거에 무너뜨리는 혁명과 체제 전복의 파편들이다. 최소한 캐서린은 뜻하지 않았을지 모르지만, 원작과 다른 길을 택한 영화로서는 완벽히 뜻한 모습이다. 그녀 자신이 여성으로서의 본분 따위를 던져버리고 한 인간으로서의 욕망을 분출하고 있고, 계급의 경계를 한순간이나마 무너뜨려버렸으며, 자연스레 인종 간에 가지는 높낮이를 수평으로 만들었다.


영화는 이 모든 것들을 지극히 캐서린의 입장에서, 캐서린의 생각과 행동 하에 집행함으로서 그 자체의 소구점이 드러나지 않게 하였다. 즉, 캐서린이라는 인물을 설명하는 다양한 선린들임과 동시에, 그리하여 캐서린이 입체적 인물이 되게끔 도와준다. 등장인물 모두, 사건들 모두, 요소들 모두 캐서린의 작품이자 캐서린을 이루는 것들이다. 


이뿐만 아니다. 영화에서 가장 대립적인 것은 다름 아닌 집안과 집밖이다. 정확한 좌우대칭의, 거기에 있어야 하는 것들이 반드시 거기에 있는, 절대 그곳에서 빠져나가선 안 되는 집안의 모습. 이에 반해 집밖으로 조금만 가면 펼쳐진 대자연의 정형화되지 않은 날 것의 모습은 탄성을 자아내기에 앞서 숨이 탁 트이는 한숨을 자아낸다. 캐서린은 집밖으로 도피하려는 것 같지만 무엇보다 집안을 가지려는 여인이다. 


시대를 지배하고 개개인을 억누르는 상(像)


지극히 단조롭고 정형화되고 제한적인 집에서 날 것의 바깥으로 나가는 것조차 해선 안 되는 일이었으니... ⓒ씨네룩스



영화가 다분히 캐서린을 따라가려 하다 보니 집밖의 날 것 느낌을 눈 씻고 찾아보려 해도 찾을 수 없다. 그녀가 집안에서 머리를 바짝 묶고 단색의 드레스를 입은 채 무표정으로 조신하게 앉아 있는 모습보다 머리를 풀어헤치고 집시풍(?)의 드레스를 입은 채 환하게 웃는 표정으로 바람을 맞는 강가의 모습이 훨씬 아름답지만, 안타깝게도 그건 잠시 잠깐의 일탈로 보일 뿐이다. 그녀는 어느새 집안을 더 중요시 한다. 


그러다 보니, 영화는 집안을 극도로 제한적으로 보여주며 시대를 지배하고 개개인을 억누르는 어떤 상(像)을 제시한다. 누군가는 그런 집에서 살고 싶다고, 아주 여유롭고 평화로운 삶이 될 것 같다고 생각하는 그런 집, 그런 상 말이다. 모든 걸 뒤엎을 수 있는, 찾아보기 힘든 캐서린조차 그 상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캐서린의 끝은, 즉 영화의 끝은 비극일까 희극일까. 돌이킬 수 없는 사건들을 겪어온 그녀에게 비극은 무엇이고 희극은 무엇일까. 원작처럼 그녀가 처참한 죽음을 맞이하는 게 비극이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살게 되는 게 희극일까. 그건 영화를 잘 지켜본 이에겐 아무래도 상관 없을지 모르겠다. 


그녀가 보여준 혁명적 생각과 행동들, 그리고 치명적인 사건들은 적어도 우리들에게 무언가를 남겼다. 가장 많은 신경썼을 게 분명한 화면적 미장센의 아름다움은 너무나 당연하거니와, 그 이상으로 신경썼을 것으로 생각되는 스토리적 미장센, 즉 군더더기 없는 역동성의 모순적 진행이 주는 대립의 아름다움이 눈을 확 트이게 하고 머리를 어루만져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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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디 아워스>


버지니아 울프의 <댈러웨이 부인>에 연관된 시공간을 달리하는 세 여인의 하루를 보여준다. ⓒ시네마 서비스


1923년 영국의 리치몬드 교외, 버지니아 울프(니콜 키드먼 분)는 소설 <댈러웨이 부인>을 쓰며 주인공에 대한 생각에 광적으로 가득 차 있다. 런던에서 언니네 가족이 놀러 왔다가 오래지 않아 돌아간다. 얼마 후 울프는 집을 뛰쳐나가 런던행 기차를 타기 위해 역에서 기다린다. 곧 남편이 그녀를 뒤따라 설득한다. 사실 그들은 울프의 정신병을 치료하기 위해 런던에서 리치몬드 교외로 왔던 것이다. 


1951년 미국의 로스앤젤레스, 둘째 아이를 임신한 로라 브라운(줄리안 무어 분)은 첫째 아들 리차드와 함께 남편 생일 파티를 준비하며 케이크를 만든다. 그녀가 버지니아 울프의 <댈러웨이 부인>을 즐겨 읽는 와중에, 친하게 진하는 친구가 놀러온다. 얼마 후 브라운은 리차드를 보모에 맡기고 자살하고자 호텔로 향한다. 하지만 결국 자살하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온다. 자살하려 한 것도 못 한 것도 <댈러웨이 부인> 때문이다. 


2001년 미국의 뉴욕, '댈러웨이 부인'으로 불리는 편집자 클라리사(메릴 스트립 분)는 죽어가는 옛애인 리차드의 문학상 수상 파티 준비를 하고자 한다. 리차드는 다름 아닌 1951년 미국의 로스앤젤레스 브라운의 첫째 아들 리차드이다. 그는 엄마에게 버림 받은 기억을 앉은 채 힘겹게 살아가다 죽음을 눈앞에 두게 된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파티 준비를 마치고 리차드를 찾아간 클라리사, 그녀의 눈앞에서 리차드는 자살한다. 


자살, 동성애 그리고 여성


세 여인 앞에 놓인 것들이 시공간을 초월해 그들을 괴롭히고 힘들게 한다. ⓒ시네마 서비스



영화 <디 아워스>는 시간과 공간을 달리하는 세 명의 여성을 차례대로가 아닌 교차로 보여준다. 단 하루를 보여줄 뿐이지만 여성의 인생을 함축적으로 엿볼 수 있다. 이는 버지니아 울프가 <댈러웨이 부인>을 쓸 때 고심했던 부분인데, 로라 브라운이 <댈러웨이 부인>을 읽고 삶을 다시 생각하고 클라리사가 '댈러웨이 부인'이라 불리는 것처럼 이 영화는 소설 <댈러웨이 부인>과 깊은 연관이 있는 것 같다. 


세 여인에게서 공통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부분은 이밖에도 '자살'이 있다. 버지니아 울프는 남편의 말대로 라면 두 번이나 자살을 시도했다. 그리고 이 영화 <디 아워스>가 버지니아 울프가 자살로 생을 마감하면서 시작되기도 한다. 브라운은 <댈러웨이 부인>을 읽고 자살을 하고자 했다가 철회한다. 그의 아들이자 클라리사의 옛 애인 리차드는 결국 자살하고 만다. 


소설 <댈러웨이 부인>, '자살', 그리고 남은 한 가지는 '동성애'다. 사실 동성애 코드야말로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에 가장 근접한, 또는 그 과정에서 가장 중요하게 작용하는 소재이다. 세 여인의 각각의 키스 장면에서 그 코드를 유추할 수 있는데, 그게 문제를 해소하는 기폭제가 아닌 문제를 키워버리는 기폭제가 될 때가 있어 안타깝다. 


사실 가장 중요한 게 남아 있다. 이 세 여성이 다름 아닌 '여성'이라는 점이다. 왜 하필 여성이었는지, 1923년부터 2001년까지 80여 년이 흐르는 세월 동안의 여성 삶이 무엇인지, 그 행간에 자연스럽게 스며 있고 짓눌려 있어 느낄 수 없는 무게를 우리는 면밀히 살펴야 한다. 


이들이 힘들어 하는 이유


이들이 힘들어 하는 건 사실 자살도 동성애도 아니다. 그들이 여성이기 때문이다. ⓒ시네마 서비스


실존인물 버지니아 울프는 적어도 영황에서만큼은 <댈러웨이 부인>을 쓸 당시 제 정신이 아니었다. 런던에서의 비극적인 삶을 뒤로 하고 한적한 교외로 요양을 와 마음의 병을 치료하고 소설쓰기에 전념한다. 하지만 그녀가 원하는 삶은 그게 아니었다. 그녀는 투쟁을 원했다. 남들이 보기엔 그녀의 투쟁이 정신병으로 보이고 속절없이 삶을 놓으려는 행동으로 보였을 것이다. 여자라면 응당 울프의 언니처럼 가정에 충실한 채 아이를 보살피며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소설 따위나 쓰고 앉아 있는 게 아니라...


로라 브라운은 아무 문제 없이 살아가는 것 같다. 건실한 남편에 좋은 집, 그리고 아들도 있다. 거기에 둘째까지 가졌으니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삶이다. 그런데 뭐가 아쉬워서 아들을 내팽겨치고는 뱃속의 아이와 함께 세상을 등지려 하는 것인가?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을 정도의 '여성으로서의' 삶을 영위하고 있는 그녀인데...


클라리사는 영화에서 앞의 둘보다는 덜 입체적인 인물처럼 보인다. 그녀보다 그녀가 챙기는 옛 애인 리차드의 모습이 워낙 강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직접 찾아온 리차드의 옛 '남자친구'와 대면한 후 대화를 하는 도중에 터진 눈물과 하소연, 그리고 그녀의 딸과 나누는 대화를 통해 우린 현대 여성의 삶을 엿볼 수 있다. 문제는 거기에서 어떤 '문제점'을 찾기 힘들다는 사실이다. 여성에게 당연히 부과된 수많은 의무들이 문제라고 인식되지 않기 때문에 일어나는 문제다. 


이들이 힘들어 하는 건 두 층위에서 볼 수 있겠다. 둘 다 '여성'이기 때문에 더 크게 다가오는 것일 텐데, 하나는 여성으로서 부과되는 의무와 거기에서 파생되는 엄청난 무게다. 이 의무와 무게를 볼 수도 느낄 수도 없다. 다만 본인들은 알고 있다. 그렇지만 헤어나기가 힘들다. 다른 하나는 자신의 진짜 모습인 동성애자를 감춘 채 살아가야 한다는 점이다. 1923년 영국이든 1951년, 2001년 미국이든, 여성의 동성애는 감춰져야 한다. 일례로 남자 리차드의 '남자친구'는 자신을 버젓이 밝히지 않는가? 울프와 브라운이 자살을 시도한 건 여기에서 연유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 영화의 전부, 니콜 키드먼, 줄리안 무어, 메릴 스트립


니콜 키드먼, 줄리안 무어, 메릴 스트립. 혼자서도 영화 한 편을 온전히 이끌 수 있는 이들이 한 데 뭉쳤으니 더 말해 무엇하랴? ⓒ시네마 서비스


<디 아워스>는 세 여성인 버지니아 울프, 로라 브라운, 클라리사가 전부다. 즉, 이들을 연기한 니콜 키드먼, 줄리안 무어, 메릴 스트립이 전부란 얘기다. 가장 먼저 이 영화의 진정한 주인공인 버지니아 울프 역의 니콜 키드먼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그녀를 지금의 그녀가 되게한 가장 중요한 영화는 단연 <물랑루즈>일 것이다. 가장 완벽한 뮤지컬 영화로 통하는 그 영화로 니콜 키드먼은 정점에 올라섰다. 


<디 아워스>는 그 다다다음 영화로, 같은 사람이 맞나 하는 생각을 시종일관 할 수밖에 없는 연기를 펼쳤다. 그에 앞서 겉모습이 버지니아 울프 그 자체인데, 가발은 물론 얼굴에도 특수분장을 한 것 같다. 또, 항상 어눌하고 불안한 채로 끊임없이 자기 자신 안으로 침참해 들어가면서도 자기 자신과 싸우는 울프의 모습을 재현해냈다. 완벽히.


그에 반해 로라 브라운과 클라리사 연기는 덜 튀고 덜 입체적이고 덜 눈에 띌 수 있다. 하지만 그 둘이 보여준 연기, 그중에서도 한두 장면들은 사실상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가장 함축적으로 보여주었다. 브라운이 자살을 하지 못하고 돌아와 아들과 대화하는 장면, 남편과 대화하는 장면이 그렇고 클라리사가 리차드의 옛 남자친구와 대화하는 장면, 리차드가 자살하기 직전 대화하는 장면이 그렇다. 그 짧은 대화 속엔 그녀들의 삶이 녹아들어 있다. 


이 영화를 오랫동안 보지 않다가 두 번을 연속으로 쉬지 않고 보았는데, 교차 편집으로 인해 이해가 조금 힘들었던 점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그녀들의 삶을 이해하고 싶었던 점이 크다. 그런데 쉽진 않았다. 왜 그녀들은 불안해 하고 주저앉아 울고 자살하려 하고 그러다가는 다시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하는 거지? 처음 볼 때는 이해하고자 했고 두 번째 볼 때는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고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당분간 또 볼 용기는 나지 않는다. 또 보게 된다면 그땐 행간의 더 깊은 곳을 들여다볼 것이다. '왜'가 아니라 '어떻게'를 맨앞에 둔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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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서평] <민주주의 잔혹사>


<민주주의 잔혹사> 표지 ⓒ창비



대학 시절, 1학년 때는 영문과였다. 당시 교육정책으로 1학년 때는 과를 고를 수 없었기에 임의로 그렇게 된 거였다. 2학년 때 비로소 과를 고를 수 있었다. 나는 중문과를 지원했다. 지원동기는 지금 생각하면 매우 황당하기 그지 없다. 중국의 황제가 그 이유였다. 황제라는 궁극의 존재가 멋져보였던 거다. 


사실 중학교 때부터 역사를 좋아했다. 역사상 수많은 나라의 흥망성쇠와 수많은 위인들의 분골쇄신이 내 마음을 사로 잡았다. 지금에야 깨닫고 있지만, 그건 완전히 '잘못된' 시선이다. 그저 알려진, 승리한, 주류의 이야기들만으로 역사를 좋아하고 잘 안다고 설치는 꼴인 것이다. 지금에라도 알았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그런 면에서 대학교 2학년 때 들었던 교양 수업이 큰 충격으로 남아 있다. 교수님은 우리에게 한국근현대사 비주류의 역사를 알려주셨다. 김산의 <아리랑>를 숙제로 내주셨는데, 그 책이 남긴 여운은 아마 평생 갈 것 같다. 그리고 이제 또 다른 곳을 보려 한다. 역사에서 배제된 주변부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겠다. 홍석률 교수의 <민주주의 잔혹사>(창비)라는 책을 통해서다. 


이 책으로 한국현대사의 그늘에 가려지고 서술에서 가려진 8개의 이야기를 들여다볼 수 있다. 저자는 평범한 사람들도 역사를 형성해가는 데 참여하고 기여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자신과 주변을 돌아보는 데 도움이 되기를 희망한다고 했다. 이 책 하나로 완전한 인식의 전환을 이룰 순 없었지만, 또 한 번의 큰 충격으로 남아 있을 것 같다. 주류와 비주류 도식을 넘어선, 배제와 그늘의 차원. 차별 말고 그곳을 주목하자. 


완벽히 가려진, 삼청교육대 박영두 사건


이 책에서 다루는 사건들은 워낙 잘 알려졌는지라 큰 의식 없이 지나치기 일쑤였다. 5.16쿠데타나 푸에블로호 나포 사건은 그저 박정희가 일으킨 군사 정변과 북한이 저지른 미국 군함 나포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저자는 이 사건에서 각각 5.16쿠데타를 일으킨 군인들이 주류가 아닌 주변부 군인이었으며, 푸에블로호 나포 사건 때 국제관계 면에서 한국이 주변부였다는 점을 부각시킨다. 흥미롭지만 이쯤에서 지나가자. 


저자의 보다 흥미로운 시선이 엿보이는 사건이 있다. 이는 보다 더 가려진 사건이라는 것이다. 삼청교육대다. 전두환이 정권을 잡은 후 사회정화 운동을 추진하며 불량배 소탕계획을 실시해 6만 여명의 사람들을 마구잡이로 잡아갔다. 그 와중에 잡혀온 이 중에 박영두라는 이가 있었는데, 장기화된 구금과 황당하기 그지 없는 보호감호 처분, 그리고 비인간적인 처우에 분노가 임계점을 넘었다. 


그는 저항했고 진압되었으며 교도소에 갇혔다. 어느 날 그는 몸이 아픈데도 의무과에 데려다 주지 않자 항의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고 외려 끌려나와 가혹행위를 당한다. 그러곤 얼마 가지 않아 죽었다. 2000년대 들어 삼청교육대 피해보상이 실시되고, 박영두는 민주화운동 공로를 인정받았다. 


이에 저자는 삼청교육대에 끌려간 절대다수 빈민들과 민주화운동의 절대다수 엘리트 학생들을 비교하며, 민주화운동의 두 중요 축이었던 학생과 빈민 사이에 존재하는 격차를 도출한다. 바로 앞 장에서 다뤘던 '박종철고문치사사건'이 가져온 거대한 영향력에 비추어볼 때,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고 아무런 영향력도 발휘하지 못한 빈민들의 항쟁을 끄집어냈다 하겠다. 


가장 생각하기 힘든 부분이었기에 신선하게 다가왔고, 가장 가려진 부분이었기에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내가 신봉해 마지 않았던 '국가' '황제' '위인' 등의 흥망성쇠는 역사에서 분명 이보다 훨씬 큰 물줄기이겠지만, 정녕 나와 우리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겠구나 당시에 살았어도 마찬가지였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역사를 대하는 완전히 새로운 시각을 선사한다. <모래시계> 따위의 소재로 쓰일 삼청교육대가 말이다. 


여성과 노인의 배제와 그늘, 동일방직 사건과 4월혁명


여성과 노인은 상대적으로 생각하기 쉬운 부분들이다. 배제와 그늘의 한가운데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선, 앞에 소개한 삼청교육대의 박영두보다는 많은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주류'에 가깝다고 할 수 있겠지만 이런 생각이야말로 넌센스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저자는 이에 동일방직 사건과 4월혁명을 들여다보았다. 


저자는 한국의 여성노동자들이야말로 1970년대 수출주도형 경제성장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이들이지만 가장 형편없는 대접과 보상을 받았고 또 역사 서술에서 소홀하게 취급받았고 여전히 취급받고 있는 존재들이라고 말한다. 동일방직 사건은 그 상징과도 같다. 그곳에서 여성 지부장이 탄생하는데, 다음 대의원대회에서 반대파들이 일방적으로 남성 지부장을 뽑아버린다. 이에 여성노동자들이 농성을 전개한다. 


나체시위까지 갔는데, 어찌 합의를 보고 몇 년이 흐른다. 다음 대의원대회에서 반대파들은 험악해진다. 급기야 노조활동에 열성적인 여성노동자들에게 똥물 테러를 가한다. 그들의 상급기관인 한국노총 섬유노조는 여성 지부장 반대파였다. 저자는 이 테러를 단순히 국가권력에 의한 노조 탄압이라고 보지 않고 세상의 중심에 진입해가는 여성노동자들에게 느낀 남성노동자들의 두려움과 열등감의 표출로 보았다.


그런가 하면, 4월혁명의 '할아버지 시위'와 '할머니 시위'도 있다. 할머니들이 들고 있는 플래카드에는 "죽은 학생 책임지고 리대통령 물러가라"라는 과감한 구호가 적혀 있었다니, 60여 년이 흐른 지금으로선 상상하기 힘든 모습이다. 누가 역사는 진보한다고 했던가? 더군다나 그들이 행한 시위의 날짜는 이승만 퇴진 하루 이틀 전이다. 젊은 세대가 일으켰다고 알고 있는 4월혁명의 완전히 새로운 모습이다. 


물론 대내외적으로는 4월 25일 대학교수들의 시국선언문 발표와 시위가 이승만 퇴진의 직접적인 발화선이 되었다. 그럼에도 저자가 할아버지·할머니 시위를 특별하게 보는 이유는 그들이 한참 전인 4월 11일 2차 마산항쟁 때부터 이미 이승만 퇴진 구호를 외쳤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때부터 여론을 자생적으로 형성했다고 본다. 야당도 엘리트 계층도 아닌 밑바닥 주변부의 사람들이 분위기를 저변에서 형성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주변부 사람들은 그 역량에 비해 제대로 평가받기는커녕 관심조차 끌지 못하고 기록·기억되지 못하며 가려지고 지워지기 일쑤이다. 그건 참으로 '바보' 같은 짓이다. 그 역량의 가능성을 차단하고 소진시켜 버리기 때문이다. 곧 역사 발전의 가능성까지도 차단하고 제약하는 것이겠다. 


주변부 사람들은 '대다수'이다. 즉, 우리들 말이다. 우린 알지 않은가. 혁명이 우리들 손으로 이루어졌다는 걸, 이루어지고 있다는 걸 말이다. 그렇지만 역사가 과연 우리를 알아줄 것인가? 다룰 것인가? 거기에서도 주변부는 배제되고 지워질 뿐이다. 우리가 가려진 이름들을 되새기고 계속 끌어올려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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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스텝포드 와이프>


과격한 프로그램으로 문제를 일으켜 해고 당하는 조안나, 그녀가 가족과 함께 간 스텝포드. 그곳엔 현모양처의 표본들이 즐비하다. ⓒCJ 엔터테인먼트



잘나가는 방송국 CEO이자 방송제작자 조안나 에버트(니콜 키드먼 분), 그녀는 예측불허의 자유인이다. 이번에도 역시 파격적인 페미니즘 프로그램으로 센세이션을 일으키며 크게 성공할 것 같다. 그런데 수많은 사람들을 초청해 열린 성대한 TV쇼 소개 자리에 한 남자가 출현해 총으로 위협한다. 조안나가 만든 페미니즘 프로그램의 피해자라는 것이었다. 


조안나는 곧 해고되고 정신병원으로 가게 되는데, 남편이 스텝포드라는 곳으로 이주해 새로운 삶을 시작하자고 제안한다. 그곳은 미국 북동부 코네티컷 교외에 있었는데, 평온하기 이를 데 없는 분위기에 친절한 사람들만 사는 것 같았다. 그런데 조안나가 보기에 그곳은 이상했다. 하나 같이 바비인형처럼 차려 입은 금발머리 여자들이 현모양처의 표본처럼 행동하고 있는 것이었다. 


어느 파티 자리에서 사단이 난다. 한 여자가 춤을 추다 말고 쓰러진 것이다. 조안나는 그녀를 당장 병원으로 데려가야 한다고 말하지만, 마을 사람들은 아무런 반응 없이 그저 괜찮다고만 할 뿐이다. 그런데 쓰러진 여자의 행동이 뭔가 이상하다. 사람이 아닌 로봇 같은 움직임. 그녀의 정체는 무엇일까. 그들은 왜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이 마을은?


남자는 이래도 되고, 여자는 이래야 한다?


하나같이 바비인형처럼 차려입고 금발을 한 그곳의 그녀들, 뭔가 이상하다... ⓒCJ 엔터테인먼트



영화 <스텝포드 와이프>는 시작과 동시에 '페미니즘'을 흘린다. 이 영화가 페미니즘을 말하고자 한다는 걸 초장부터 알리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주인공이 페미니스트라 할 수 있는 조안나라는 것과 무대가 스텝포드라는 걸 알린다. 그곳에 바비인형처럼 차려 입은 금발머리 현모양처들이 즐비하다는 건, 조안나와의 갈등이 심화될 거라는 영화의 앞날을 예고한다. 


'남자는 이래야 한다'는 전통과 '여자는 이래야 한다'는 전통은 상충하지 않고 조화를 이룬다. 이처럼 서로가 서로를 구속하는 형국이니 얼핏 보기엔 평등한 것 같다. 그런데 한 발만 들어가면 명백한 차원의 다름을 볼 수 있다. '남자는 이래도 된다'는 말은 있지만 '여자는 이래도 된다'는 말은 없고, 무엇보다 여자의 남자를 향한 순종과 복종이 남녀 조화의 주를 이루기 때문이다. 


하나 같이 바비인형 차림으로 차려 입은 금발머리 여자들의 모습은 '여자는 이래야 한다'의 정본과도 같다. 남자들이 원하는 모습 말이다. 겉모습에 그치지 않고 그녀들은 남편을 극진히 모신다. 완벽한 집안일은 물론 남편이 시키는 사소한 일 하나도 군말 없이 하며 남편의 캐디 역할도 한다. 이쯤 되면 아내가 아니라 비서 또는 하녀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남성 우월 사회는 파시즘일 수 있다


그녀들의 일방적인 모습은 남성 우월 사회의 파시즘을 역설한다. 그곳은 이상한 곳이 아니라 틀린 곳이다. ⓒCJ 엔터테인먼트



남편은 방송국 부사장, 자신은 방송국 CEO. 조안나는 단순히 잘나가는 방송인일뿐 아니라 남편보다 위에 군림하는 여성이다. 그녀는 그 사실을 아주 잘 알거니와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그러다 보니 아내가 남편을 모시는 모습을 용납할 수 없다. 더욱이 그녀는 갈색 짧은 머리에 검은색 계열의 옷을 주로 입고 다니니 만큼 바비인형 차림의 금발 머리도 용납할 수 없다. 


반면, 조안나의 남편 월터는 스텝포드에서 신세계를 경험한다. 남성 우월 사회에서 우월한 남성으로서의 지위를 한껏 드러내지 못한 자신을 스텝포드에서 드러내고자, 남성들만의 모임에 참석하고 조안나에겐 홧김에 이혼을 통보하기도 한다. 마을 전체가 똑같이 완벽한 남성 우월의 모습을 보이고 있는 이곳에 사실 조안나와 월터는 완벽한 이방인이다. 그들이 느끼기엔 이곳은 '이상한 곳'이고 '틀린 곳'일 것이다. 


그렇지만 파시즘적인 공동체에서 구성원 한두 명이 할 수 있는 일은 따로 없다. 그저 전체의 생각을 따르는 수밖에 없다. 그런 면에서 이 영화가 보여주는 가장 큰 깨달음이자 경고는, 남성 우월 사회가 파시즘적일 수 있다는 사실이다. '남성 우월'이라는 개념으로 개인 생활 전반을 통제하는 것이다. 


더욱 끔찍한 건, 여기서 여성의 의미가 퇴색되는 것에 더해 여성이라는 개인 또한 통제 된다는 점이다. 남성과 여성에서 여성만 퇴색되며, 통제되는 것도 남성이 아닌 여성뿐이다. 조안나와 월터가 힐링의 유토피아이자 파라다이스로 찾은 스텝포드가 그 어느 곳보다 비인간적인 디스토피아로 느껴지고 다가오는 건 이 사실을 깨달을 때다. 물론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하면 유토피아일 거다. 끔찍하기 짝이 없는 유토피아. 


극단적으로 치닫지 않았으면...


영화는 극단적이고 과격한 스토리로 중무장한 채 페미니즘을 외치고 남성 우월 사회에 경종을 날린다. 조금 자제가 필요해보였다. ⓒCJ 엔터테인먼트



영화는 이처럼 보여주고 또 말하고자 하는 바를 과격하게 보여준다. 과격한 스토리와 장면으로 보여주는 게 아니라, 투박하기 짝이 없이 직접적으로 보여준다는 뜻이다. 우린 영화를 본지 얼마 지나지 않아 스텝포드의 모든 여성들이 '로봇'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로봇처럼 자신의 생각 없이 명령에 따라 일사분란하게 동일한 행동을 한다는 비유와 상징의 개념이 아니라, 진짜 로봇이라는 사실. 


어떻게 그 많은 이들이 로봇이 될 수 있었는지, 또는 원래 로봇으로 만들어졌는지는 일단 알 길이 없다. 맥락상 사람이었던 이들을 로봇으로 만든 것 같은데, 영화의 전반적 만듦새만을 들여다볼 때 충분히 가능해 보인다. 영화가 말하려는 주제를 향해 그저 일직선으로 달려갈 뿐인 스토리에 그것들은 그저 수단일 뿐이기 때문이다. 


조안나처럼 능력있는 여성들을 데려와 로봇으로 개조해 충실한 현모양처로 살아가게 한다는 것. 이 모습은 이전까지 '당하고' 살았던 남자들이 일종의 복수를 하는 형국으로 비친다. 그 자체가 그들이 남성 우월 사회에서 왔다는 방증이다. 남녀 평등 사회였다면, 실력이 아닌 '성'의 차이로 비교할리가 없기 때문이다. 


영화는 극단적인 시작과 과정을 거쳐 끝까지 극단적으로 마무리한다. 선명하고 명명백백한 것과 극단적인 건 비슷한 듯하지만 완연히 다른 것. 영화는 자칫 여자와 남자를 홍해 가르듯 가를 조짐을 보인다. 그건 높지 않은 영화의 만듦새에서 기인한 게 클 것이다. 러닝타임도 평균보다 30분 정도 짧았던 점을 감안할 때 충분히 더 촘촘히 보여주어 극단적이 아닌 선명함을 선사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나마 조안나 혼자가 아닌 남편 월터가 끝까지 함께 해준 점이 눈에 띈다. 


우리 사회는 당연히 남녀 평등 사회가 아니다. 여권이 신장되었다고 하지만 평등과는 하등 거리가 멀다. 그렇다고 스텝포드처럼 기괴한 사회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과도기 또는 그 중간 어디라고 해도 될까. 아니, 과도기여야 하겠다. 그래야 언젠가는 평등이 실현된다는 뜻일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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