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딸에 대하여>


소설 <딸에 대하여> 표지 ⓒ민음사



일찍 남편을 보내고 요양원에서 요양보호사로 일하는 '나', 남편이 유일하게 남긴 유산인 집에 서른을 훌쩍 넘었어도 제대로 자리 잡지 못하고 대학교 시간강사로 살아가는 '딸애'를 들인다. 딸애는 7년 간 사귀어 왔다는 '그 애'와 함께다. 나로선 정녕 상상하기도 싫고 어려운 그들과의 동거지만, 딸애의 부탁을 져버릴 순 없지 않은가. 서로를 그린과 레인으로 부르는 그들은 레즈비언 커플이다. 


딸애는 안 그래도 어렵게 살아가는 시간강사의 삶 위에 학교를 상대로 시위를 하는 삶을 얹혀 놓았다. 딸애처럼 레즈비언 시간 강사가 레즈비언이라는 이유로 학교에서 쫓겨났기 때문인데, 나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사람의 일로 딸애가 그러는 걸 이해할 수 없다. 그건 내가 요양원에서 보살피는 무연고 치매노인 '젠'을 보면서, 그녀의 삶을 돌아보면서 뼛속 깊이 느낀 것이다. 


젠은 젊은 시절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공부를 하고 한국계 입양아들을 위해 일해왔다. 한국에 돌아와서는 이주노동자들을 후원했다. 평생 자신과 하등 상관없는 이들을 위해 헌신해 왔지만, 지금은 치매에 걸려 요양원에서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아무도 그녀를 찾지 않는다. 


'나', '딸애'와 '그 애', '젠'의 이야기 <딸에 대하여>는 여성의, 여성에 의한, 여성을 위한 소설이다. 그 안엔 현시대를 가로지르는 첨예한 사항부터 시대와 상관 없이 오래도록 당연시 되어온 문제까지, 주로 소수자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동성애자 시간강사, 홀몸의 중년여인, 무연고자 치매노인, 모두 소수자이기에 앞서 모두 여성이기에 삶의 고단함을 향한 이중부과가 매겨져 있는 느낌이다. 


'딸에 대하여'보다 '여성에 대하여'


소설은 '딸에 대하여'라는 제목에서도 유추할 수 있듯이, 동성애자이자 시간강사로 '평범하고 제대로 된' 삶을 살지 못하는 딸에 대한 이야기를 중심에 놓고 있다. 아니, 제목을 앞세워 그렇게 포장한 것이리라. 실상, 딸보다 '나'와 '젠'에 대하여 즉 엄마와 여성에 대한 이야기인 게 맞다. 여기서 나에겐 젠이 딸애와 겹쳐 보이니, 결국 '여성에 대하여'가 궁극적으로 올바른 제목이라 하겠다. 


어떤 여성을 말하고자 함인가. 소설에선 남성이 주인공으로 일절 등장하지 않는다. 그래서일까? 전통적 보수의 전형과도 같은 나는 딸애가 남성으로서의 사회적 성공과 여성으로서의 결혼적 성공을 동시에 바란다. 소설은 그 정도에 머물러 있는 내가 여러 일들을 겪으면서 깨닫게 되는 깨달을 수밖에 없게 되는 '성장' 매커니즘을 따른다. 그 끝에는 '여성'이 아닌 '공동체'가 있다. 


한편, 소설에서 가장 첨예한 이슈가 될 수 있는 '퀴어' 소재의 주인공들인 딸애와 그 애는 그 이슈를 가슴으로는 생각조차 하지 않고 당연하게 받아들이지만 현실상 머리로는 항상 생각하고 있어야 하는 이중의 삶을 살고 있다. 그들은 왜 당연한 삶의 결정체로 물질적 정신적으로 직간접적 피해를 받아야 하는 것인가? 하지만 소설은 퀴어의 당위성에 집착하는 대신 객관적 사회문제로 격상시키는 묘수를 발휘한다. 


'젠'은 소설의 모든 것에 거리를 두고 있는 느낌으로 와서 소설의 모든 것에 가장 밀접한 관계가 있는 느낌으로 떠나간다. 그녀의 지난 젊은 시절은 딸애를 보는 것 같고, 그녀의 현 시절은 나의 미래를 보는 것 같다. 소설은 한국 모든 여성의 미래와 한국 늙은 여성의 현재, 그 한 단면을 젠을 통해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공동체를 향한 깨달음과 이해


남성은 여성의 삶을 상상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단순히 보이는 삶과 행동, 생각보다 훨씬 많은 것들이 그녀들을 감싸고 있고 그녀들을 향해 일방적으로 보내고 있으며 그녀들을 얽매기도 하면서 조종하기도 한다. 반면, 남성은 여성이 상상하는 딱 그 정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것이다. 


내가 종국에 만나게 되는 공동체란 상상할 수 없는 여성의 삶도 상상할 수 있는 남성의 삶도 뛰어 넘는 연대다. 자신의 일과 딸애의 일에서 겪게 되는 '나의 일이 될 수 있는, 아니 나의 일과 다름 없는 남의 일'의 정체를 깨닫고, 딸애의 성향을 이해할 순 없지만 딸애의 상상불가 위의 상상불가의 어려움은 이해하게 된 것이다. 


단 하나의 가족인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정도는커녕 혐오를 하는 딸애가, 나 아닌 다른 이들에겐 얼마나 크나큰 혐오와 배제의 대상이 될 것인지 불 보듯 뻔하지 않은가. 그런 매커니즘의 이해야말로 가족만이 할 수 있는 것이리라. 나의 깨달음과 성장이 거기서 멈추지 않기를 바란다. 


거기서 파생된 '가족 아닌 자'인 젠을 향한 마음 또한 크나큰 깨달음과 성장의 한 면이다. 가족만이 가능하다고 생각한 이해가, 가족이 아닌 자를 향하고 있지 않은가. 그 자체가 공동체의 발로다. 그 모든 게 '딸에 대하여' 생각한 끝에 나아가게 된 이 시대 평범 평균의 여성의 깨달음이다. 이제 '위대'라는 뜻의 수정이 필요할 때다. 위대라는 단어에 '보수로 대변되는 완벽'이 아닌 '진보로 대변되는 나아감'이 대신해야 하는 것이다. 이 여성들은 진실로 위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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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리뷰] <레이디 맥베스>


고전적 캐릭터 '레이디 맥베스'가 기본 골자 위에 입체적으로 재탄생했다. ⓒ씨네룩스



온몸을 뒤덮는 베일을 쓴 한 소녀, 불안한 눈빛으로 두리번 거린다. 보이진 않지만 옆에는 남편될 사람인 듯하고, 뒤에는 늙은 남자와 흑인 여자가 서 있다. 결혼식이다. 뭔가가 빠져 있는 결혼식. 곧이어 첫날밤, 모습을 드러낸 남편은 소녀 캐서린(플로렌스 퓨 분)에게 벗으라고 명령하고는 혼자 침대로 들어가 몸을 돌려버린다. 이해할 수 없는 첫날밤. 일반적인 결혼식과 첫날밤의 모습이 아니다. 


19세기 영국, 알고 보니 캐서린은 탄광을 소유한 명가에 팔려온 이였다. 남편은 원하지 않았고 남편이 극도로 싫어하고 증오하는 아버지가 사온 것. 일련의 이상함들이 조금은 이해가 간다. 캐서린이 이 집에서 할 일은 없다. 집에서 나가지 말고 가만히 성경이나 읽고 있으면 된다. 여자로서의 본분을 지키면 되는 것이다. 더욱이 그녀는 이 집의 여주인이기 전에, 하인들과 마찬가지로 시아버지의 재산에 불과하다. 


무료함 때문인지 천성 때문인지 캐서린은 시아버지와 남편의 말에 고분고분하지는 않다. 무표정해 보이는 표정에서부터 알 수 있다. 어느 날 탄광이 폭발해 남편과 시아버지 모두 집을 비운다. 그 때문인지 집안 남자 하인들이 단체로 흑인 여자 하인 안나에게 몹쓸 짓을 한다. 이를 목격한 캐서린, 안나를 구해주는데 그중 한 명인 세바스찬에게 기묘한 욕정을 느낀다. 그렇게 흔하디 흔한 주인 마님-하인의 희비극 러브스토리가 펼쳐지는 듯하다. 


레이디 맥베스의 인물상


'욕망의 화신'을 둘러싼 다양한 은유들, 이 영화를 이루는 것들이다. ⓒ씨네룩스



영화 <레이디 맥베스>는 제목에서 알 수 있다시피 셰익스피어의 <맥베스>에서 충심으로 가득 찬 최고의 전사 맥베스에게 욕망으로의 결정적 속삭임을 건네는 레이디 맥베스가 생각나는데, 원작은 19세기 러시아의 니콜라이 레스코프 <러시아의 맥베스 부인>으로 사랑 때문에 3명을 엽기적으로 죽인 한 여인의 이야기다. 그 끝은 좋지 않다.


레이디 맥베스는 이처럼 욕망의 화신이다. 욕망에 사로 잡힌 그 끝에 남은 건 파국뿐이라는 걸 말해왔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레이디 맥베스는 단순한 욕망의 화신 그 이상이다. 그녀의 욕망 안에 담겨 있는 것들이 실로 다양하다는 뜻이거니와, 영화가 거기에서 끄집어내어 은유로서 말하고자 하는 바 역시 실로 다양하다. 


고로 레이디 맥베스의 인물상에 집중할 수밖에 없다. 여자의 본분을 잊은 채 자주 외출하고 부인의 본분을 잊은 채 하인과 사랑을 나누며 며느리의 본분을 잊은 채 시아버지에게 대들기도 한다. 급기야 살인으로까지 나아간다. 눈 하나 깜빡이지 않는 사이코패스적인 살인 행각, 그 순간들에는 안나와 세바스찬이 있다. 그들의 한없이 괴로워하는 모습에 비춰 캐서린의 무표정이 더욱 눈에 띈다. 


공교롭게도 살인 대상은 모두 남자들, 이쯤 되면 혁명이라 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욕망에 사로 잡혀 미쳐 날뛰는 이의 즉흥적인 살인이 아닌, 완벽하진 않아도 나름의 체계가 잡힌 조직적 살인일 수 있다. 권좌에 앉을 이는 다른 누구도 아닌 캐서린 그 자신이다. 


혁명과 체제 전복의 파편들


캐서린이 행하는 행각은 가히 엽기적이지만, 다분히 체제 전복의 성격이 담겨 있다. ⓒ씨네룩스



캐서린은 시각에 따라 살인보다 더 생각하기 힘든 행각도 벌인다. 재산에 불과한 하녀 안나를 자신과 한 식탁에 앉게 하기도 하고, 역시 재산에 불과한 세바스찬을 주인처럼 차려 입게 하고는 자신과 한 식탁에 앉히기도 한다. 주인 없는 곳에서 권력을 누릴 양으로 욕망 분출에의 욕망의 모습일지 모르지만, 은유로 자리잡기 충분한 모양새다. 


그건 곧 뜻했건 뜻하지 않았건 여성, 계급, 인종을 일거에 무너뜨리는 혁명과 체제 전복의 파편들이다. 최소한 캐서린은 뜻하지 않았을지 모르지만, 원작과 다른 길을 택한 영화로서는 완벽히 뜻한 모습이다. 그녀 자신이 여성으로서의 본분 따위를 던져버리고 한 인간으로서의 욕망을 분출하고 있고, 계급의 경계를 한순간이나마 무너뜨려버렸으며, 자연스레 인종 간에 가지는 높낮이를 수평으로 만들었다.


영화는 이 모든 것들을 지극히 캐서린의 입장에서, 캐서린의 생각과 행동 하에 집행함으로서 그 자체의 소구점이 드러나지 않게 하였다. 즉, 캐서린이라는 인물을 설명하는 다양한 선린들임과 동시에, 그리하여 캐서린이 입체적 인물이 되게끔 도와준다. 등장인물 모두, 사건들 모두, 요소들 모두 캐서린의 작품이자 캐서린을 이루는 것들이다. 


이뿐만 아니다. 영화에서 가장 대립적인 것은 다름 아닌 집안과 집밖이다. 정확한 좌우대칭의, 거기에 있어야 하는 것들이 반드시 거기에 있는, 절대 그곳에서 빠져나가선 안 되는 집안의 모습. 이에 반해 집밖으로 조금만 가면 펼쳐진 대자연의 정형화되지 않은 날 것의 모습은 탄성을 자아내기에 앞서 숨이 탁 트이는 한숨을 자아낸다. 캐서린은 집밖으로 도피하려는 것 같지만 무엇보다 집안을 가지려는 여인이다. 


시대를 지배하고 개개인을 억누르는 상(像)


지극히 단조롭고 정형화되고 제한적인 집에서 날 것의 바깥으로 나가는 것조차 해선 안 되는 일이었으니... ⓒ씨네룩스



영화가 다분히 캐서린을 따라가려 하다 보니 집밖의 날 것 느낌을 눈 씻고 찾아보려 해도 찾을 수 없다. 그녀가 집안에서 머리를 바짝 묶고 단색의 드레스를 입은 채 무표정으로 조신하게 앉아 있는 모습보다 머리를 풀어헤치고 집시풍(?)의 드레스를 입은 채 환하게 웃는 표정으로 바람을 맞는 강가의 모습이 훨씬 아름답지만, 안타깝게도 그건 잠시 잠깐의 일탈로 보일 뿐이다. 그녀는 어느새 집안을 더 중요시 한다. 


그러다 보니, 영화는 집안을 극도로 제한적으로 보여주며 시대를 지배하고 개개인을 억누르는 어떤 상(像)을 제시한다. 누군가는 그런 집에서 살고 싶다고, 아주 여유롭고 평화로운 삶이 될 것 같다고 생각하는 그런 집, 그런 상 말이다. 모든 걸 뒤엎을 수 있는, 찾아보기 힘든 캐서린조차 그 상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캐서린의 끝은, 즉 영화의 끝은 비극일까 희극일까. 돌이킬 수 없는 사건들을 겪어온 그녀에게 비극은 무엇이고 희극은 무엇일까. 원작처럼 그녀가 처참한 죽음을 맞이하는 게 비극이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살게 되는 게 희극일까. 그건 영화를 잘 지켜본 이에겐 아무래도 상관 없을지 모르겠다. 


그녀가 보여준 혁명적 생각과 행동들, 그리고 치명적인 사건들은 적어도 우리들에게 무언가를 남겼다. 가장 많은 신경썼을 게 분명한 화면적 미장센의 아름다움은 너무나 당연하거니와, 그 이상으로 신경썼을 것으로 생각되는 스토리적 미장센, 즉 군더더기 없는 역동성의 모순적 진행이 주는 대립의 아름다움이 눈을 확 트이게 하고 머리를 어루만져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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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디 아워스>


버지니아 울프의 <댈러웨이 부인>에 연관된 시공간을 달리하는 세 여인의 하루를 보여준다. ⓒ시네마 서비스


1923년 영국의 리치몬드 교외, 버지니아 울프(니콜 키드먼 분)는 소설 <댈러웨이 부인>을 쓰며 주인공에 대한 생각에 광적으로 가득 차 있다. 런던에서 언니네 가족이 놀러 왔다가 오래지 않아 돌아간다. 얼마 후 울프는 집을 뛰쳐나가 런던행 기차를 타기 위해 역에서 기다린다. 곧 남편이 그녀를 뒤따라 설득한다. 사실 그들은 울프의 정신병을 치료하기 위해 런던에서 리치몬드 교외로 왔던 것이다. 


1951년 미국의 로스앤젤레스, 둘째 아이를 임신한 로라 브라운(줄리안 무어 분)은 첫째 아들 리차드와 함께 남편 생일 파티를 준비하며 케이크를 만든다. 그녀가 버지니아 울프의 <댈러웨이 부인>을 즐겨 읽는 와중에, 친하게 진하는 친구가 놀러온다. 얼마 후 브라운은 리차드를 보모에 맡기고 자살하고자 호텔로 향한다. 하지만 결국 자살하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온다. 자살하려 한 것도 못 한 것도 <댈러웨이 부인> 때문이다. 


2001년 미국의 뉴욕, '댈러웨이 부인'으로 불리는 편집자 클라리사(메릴 스트립 분)는 죽어가는 옛애인 리차드의 문학상 수상 파티 준비를 하고자 한다. 리차드는 다름 아닌 1951년 미국의 로스앤젤레스 브라운의 첫째 아들 리차드이다. 그는 엄마에게 버림 받은 기억을 앉은 채 힘겹게 살아가다 죽음을 눈앞에 두게 된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파티 준비를 마치고 리차드를 찾아간 클라리사, 그녀의 눈앞에서 리차드는 자살한다. 


자살, 동성애 그리고 여성


세 여인 앞에 놓인 것들이 시공간을 초월해 그들을 괴롭히고 힘들게 한다. ⓒ시네마 서비스



영화 <디 아워스>는 시간과 공간을 달리하는 세 명의 여성을 차례대로가 아닌 교차로 보여준다. 단 하루를 보여줄 뿐이지만 여성의 인생을 함축적으로 엿볼 수 있다. 이는 버지니아 울프가 <댈러웨이 부인>을 쓸 때 고심했던 부분인데, 로라 브라운이 <댈러웨이 부인>을 읽고 삶을 다시 생각하고 클라리사가 '댈러웨이 부인'이라 불리는 것처럼 이 영화는 소설 <댈러웨이 부인>과 깊은 연관이 있는 것 같다. 


세 여인에게서 공통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부분은 이밖에도 '자살'이 있다. 버지니아 울프는 남편의 말대로 라면 두 번이나 자살을 시도했다. 그리고 이 영화 <디 아워스>가 버지니아 울프가 자살로 생을 마감하면서 시작되기도 한다. 브라운은 <댈러웨이 부인>을 읽고 자살을 하고자 했다가 철회한다. 그의 아들이자 클라리사의 옛 애인 리차드는 결국 자살하고 만다. 


소설 <댈러웨이 부인>, '자살', 그리고 남은 한 가지는 '동성애'다. 사실 동성애 코드야말로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에 가장 근접한, 또는 그 과정에서 가장 중요하게 작용하는 소재이다. 세 여인의 각각의 키스 장면에서 그 코드를 유추할 수 있는데, 그게 문제를 해소하는 기폭제가 아닌 문제를 키워버리는 기폭제가 될 때가 있어 안타깝다. 


사실 가장 중요한 게 남아 있다. 이 세 여성이 다름 아닌 '여성'이라는 점이다. 왜 하필 여성이었는지, 1923년부터 2001년까지 80여 년이 흐르는 세월 동안의 여성 삶이 무엇인지, 그 행간에 자연스럽게 스며 있고 짓눌려 있어 느낄 수 없는 무게를 우리는 면밀히 살펴야 한다. 


이들이 힘들어 하는 이유


이들이 힘들어 하는 건 사실 자살도 동성애도 아니다. 그들이 여성이기 때문이다. ⓒ시네마 서비스


실존인물 버지니아 울프는 적어도 영황에서만큼은 <댈러웨이 부인>을 쓸 당시 제 정신이 아니었다. 런던에서의 비극적인 삶을 뒤로 하고 한적한 교외로 요양을 와 마음의 병을 치료하고 소설쓰기에 전념한다. 하지만 그녀가 원하는 삶은 그게 아니었다. 그녀는 투쟁을 원했다. 남들이 보기엔 그녀의 투쟁이 정신병으로 보이고 속절없이 삶을 놓으려는 행동으로 보였을 것이다. 여자라면 응당 울프의 언니처럼 가정에 충실한 채 아이를 보살피며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소설 따위나 쓰고 앉아 있는 게 아니라...


로라 브라운은 아무 문제 없이 살아가는 것 같다. 건실한 남편에 좋은 집, 그리고 아들도 있다. 거기에 둘째까지 가졌으니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삶이다. 그런데 뭐가 아쉬워서 아들을 내팽겨치고는 뱃속의 아이와 함께 세상을 등지려 하는 것인가?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을 정도의 '여성으로서의' 삶을 영위하고 있는 그녀인데...


클라리사는 영화에서 앞의 둘보다는 덜 입체적인 인물처럼 보인다. 그녀보다 그녀가 챙기는 옛 애인 리차드의 모습이 워낙 강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직접 찾아온 리차드의 옛 '남자친구'와 대면한 후 대화를 하는 도중에 터진 눈물과 하소연, 그리고 그녀의 딸과 나누는 대화를 통해 우린 현대 여성의 삶을 엿볼 수 있다. 문제는 거기에서 어떤 '문제점'을 찾기 힘들다는 사실이다. 여성에게 당연히 부과된 수많은 의무들이 문제라고 인식되지 않기 때문에 일어나는 문제다. 


이들이 힘들어 하는 건 두 층위에서 볼 수 있겠다. 둘 다 '여성'이기 때문에 더 크게 다가오는 것일 텐데, 하나는 여성으로서 부과되는 의무와 거기에서 파생되는 엄청난 무게다. 이 의무와 무게를 볼 수도 느낄 수도 없다. 다만 본인들은 알고 있다. 그렇지만 헤어나기가 힘들다. 다른 하나는 자신의 진짜 모습인 동성애자를 감춘 채 살아가야 한다는 점이다. 1923년 영국이든 1951년, 2001년 미국이든, 여성의 동성애는 감춰져야 한다. 일례로 남자 리차드의 '남자친구'는 자신을 버젓이 밝히지 않는가? 울프와 브라운이 자살을 시도한 건 여기에서 연유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 영화의 전부, 니콜 키드먼, 줄리안 무어, 메릴 스트립


니콜 키드먼, 줄리안 무어, 메릴 스트립. 혼자서도 영화 한 편을 온전히 이끌 수 있는 이들이 한 데 뭉쳤으니 더 말해 무엇하랴? ⓒ시네마 서비스


<디 아워스>는 세 여성인 버지니아 울프, 로라 브라운, 클라리사가 전부다. 즉, 이들을 연기한 니콜 키드먼, 줄리안 무어, 메릴 스트립이 전부란 얘기다. 가장 먼저 이 영화의 진정한 주인공인 버지니아 울프 역의 니콜 키드먼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그녀를 지금의 그녀가 되게한 가장 중요한 영화는 단연 <물랑루즈>일 것이다. 가장 완벽한 뮤지컬 영화로 통하는 그 영화로 니콜 키드먼은 정점에 올라섰다. 


<디 아워스>는 그 다다다음 영화로, 같은 사람이 맞나 하는 생각을 시종일관 할 수밖에 없는 연기를 펼쳤다. 그에 앞서 겉모습이 버지니아 울프 그 자체인데, 가발은 물론 얼굴에도 특수분장을 한 것 같다. 또, 항상 어눌하고 불안한 채로 끊임없이 자기 자신 안으로 침참해 들어가면서도 자기 자신과 싸우는 울프의 모습을 재현해냈다. 완벽히.


그에 반해 로라 브라운과 클라리사 연기는 덜 튀고 덜 입체적이고 덜 눈에 띌 수 있다. 하지만 그 둘이 보여준 연기, 그중에서도 한두 장면들은 사실상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가장 함축적으로 보여주었다. 브라운이 자살을 하지 못하고 돌아와 아들과 대화하는 장면, 남편과 대화하는 장면이 그렇고 클라리사가 리차드의 옛 남자친구와 대화하는 장면, 리차드가 자살하기 직전 대화하는 장면이 그렇다. 그 짧은 대화 속엔 그녀들의 삶이 녹아들어 있다. 


이 영화를 오랫동안 보지 않다가 두 번을 연속으로 쉬지 않고 보았는데, 교차 편집으로 인해 이해가 조금 힘들었던 점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그녀들의 삶을 이해하고 싶었던 점이 크다. 그런데 쉽진 않았다. 왜 그녀들은 불안해 하고 주저앉아 울고 자살하려 하고 그러다가는 다시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하는 거지? 처음 볼 때는 이해하고자 했고 두 번째 볼 때는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고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당분간 또 볼 용기는 나지 않는다. 또 보게 된다면 그땐 행간의 더 깊은 곳을 들여다볼 것이다. '왜'가 아니라 '어떻게'를 맨앞에 둔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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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민주주의 잔혹사>


<민주주의 잔혹사> 표지 ⓒ창비



대학 시절, 1학년 때는 영문과였다. 당시 교육정책으로 1학년 때는 과를 고를 수 없었기에 임의로 그렇게 된 거였다. 2학년 때 비로소 과를 고를 수 있었다. 나는 중문과를 지원했다. 지원동기는 지금 생각하면 매우 황당하기 그지 없다. 중국의 황제가 그 이유였다. 황제라는 궁극의 존재가 멋져보였던 거다. 


사실 중학교 때부터 역사를 좋아했다. 역사상 수많은 나라의 흥망성쇠와 수많은 위인들의 분골쇄신이 내 마음을 사로 잡았다. 지금에야 깨닫고 있지만, 그건 완전히 '잘못된' 시선이다. 그저 알려진, 승리한, 주류의 이야기들만으로 역사를 좋아하고 잘 안다고 설치는 꼴인 것이다. 지금에라도 알았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그런 면에서 대학교 2학년 때 들었던 교양 수업이 큰 충격으로 남아 있다. 교수님은 우리에게 한국근현대사 비주류의 역사를 알려주셨다. 김산의 <아리랑>를 숙제로 내주셨는데, 그 책이 남긴 여운은 아마 평생 갈 것 같다. 그리고 이제 또 다른 곳을 보려 한다. 역사에서 배제된 주변부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겠다. 홍석률 교수의 <민주주의 잔혹사>(창비)라는 책을 통해서다. 


이 책으로 한국현대사의 그늘에 가려지고 서술에서 가려진 8개의 이야기를 들여다볼 수 있다. 저자는 평범한 사람들도 역사를 형성해가는 데 참여하고 기여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자신과 주변을 돌아보는 데 도움이 되기를 희망한다고 했다. 이 책 하나로 완전한 인식의 전환을 이룰 순 없었지만, 또 한 번의 큰 충격으로 남아 있을 것 같다. 주류와 비주류 도식을 넘어선, 배제와 그늘의 차원. 차별 말고 그곳을 주목하자. 


완벽히 가려진, 삼청교육대 박영두 사건


이 책에서 다루는 사건들은 워낙 잘 알려졌는지라 큰 의식 없이 지나치기 일쑤였다. 5.16쿠데타나 푸에블로호 나포 사건은 그저 박정희가 일으킨 군사 정변과 북한이 저지른 미국 군함 나포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저자는 이 사건에서 각각 5.16쿠데타를 일으킨 군인들이 주류가 아닌 주변부 군인이었으며, 푸에블로호 나포 사건 때 국제관계 면에서 한국이 주변부였다는 점을 부각시킨다. 흥미롭지만 이쯤에서 지나가자. 


저자의 보다 흥미로운 시선이 엿보이는 사건이 있다. 이는 보다 더 가려진 사건이라는 것이다. 삼청교육대다. 전두환이 정권을 잡은 후 사회정화 운동을 추진하며 불량배 소탕계획을 실시해 6만 여명의 사람들을 마구잡이로 잡아갔다. 그 와중에 잡혀온 이 중에 박영두라는 이가 있었는데, 장기화된 구금과 황당하기 그지 없는 보호감호 처분, 그리고 비인간적인 처우에 분노가 임계점을 넘었다. 


그는 저항했고 진압되었으며 교도소에 갇혔다. 어느 날 그는 몸이 아픈데도 의무과에 데려다 주지 않자 항의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고 외려 끌려나와 가혹행위를 당한다. 그러곤 얼마 가지 않아 죽었다. 2000년대 들어 삼청교육대 피해보상이 실시되고, 박영두는 민주화운동 공로를 인정받았다. 


이에 저자는 삼청교육대에 끌려간 절대다수 빈민들과 민주화운동의 절대다수 엘리트 학생들을 비교하며, 민주화운동의 두 중요 축이었던 학생과 빈민 사이에 존재하는 격차를 도출한다. 바로 앞 장에서 다뤘던 '박종철고문치사사건'이 가져온 거대한 영향력에 비추어볼 때,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고 아무런 영향력도 발휘하지 못한 빈민들의 항쟁을 끄집어냈다 하겠다. 


가장 생각하기 힘든 부분이었기에 신선하게 다가왔고, 가장 가려진 부분이었기에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내가 신봉해 마지 않았던 '국가' '황제' '위인' 등의 흥망성쇠는 역사에서 분명 이보다 훨씬 큰 물줄기이겠지만, 정녕 나와 우리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겠구나 당시에 살았어도 마찬가지였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역사를 대하는 완전히 새로운 시각을 선사한다. <모래시계> 따위의 소재로 쓰일 삼청교육대가 말이다. 


여성과 노인의 배제와 그늘, 동일방직 사건과 4월혁명


여성과 노인은 상대적으로 생각하기 쉬운 부분들이다. 배제와 그늘의 한가운데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선, 앞에 소개한 삼청교육대의 박영두보다는 많은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주류'에 가깝다고 할 수 있겠지만 이런 생각이야말로 넌센스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저자는 이에 동일방직 사건과 4월혁명을 들여다보았다. 


저자는 한국의 여성노동자들이야말로 1970년대 수출주도형 경제성장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이들이지만 가장 형편없는 대접과 보상을 받았고 또 역사 서술에서 소홀하게 취급받았고 여전히 취급받고 있는 존재들이라고 말한다. 동일방직 사건은 그 상징과도 같다. 그곳에서 여성 지부장이 탄생하는데, 다음 대의원대회에서 반대파들이 일방적으로 남성 지부장을 뽑아버린다. 이에 여성노동자들이 농성을 전개한다. 


나체시위까지 갔는데, 어찌 합의를 보고 몇 년이 흐른다. 다음 대의원대회에서 반대파들은 험악해진다. 급기야 노조활동에 열성적인 여성노동자들에게 똥물 테러를 가한다. 그들의 상급기관인 한국노총 섬유노조는 여성 지부장 반대파였다. 저자는 이 테러를 단순히 국가권력에 의한 노조 탄압이라고 보지 않고 세상의 중심에 진입해가는 여성노동자들에게 느낀 남성노동자들의 두려움과 열등감의 표출로 보았다.


그런가 하면, 4월혁명의 '할아버지 시위'와 '할머니 시위'도 있다. 할머니들이 들고 있는 플래카드에는 "죽은 학생 책임지고 리대통령 물러가라"라는 과감한 구호가 적혀 있었다니, 60여 년이 흐른 지금으로선 상상하기 힘든 모습이다. 누가 역사는 진보한다고 했던가? 더군다나 그들이 행한 시위의 날짜는 이승만 퇴진 하루 이틀 전이다. 젊은 세대가 일으켰다고 알고 있는 4월혁명의 완전히 새로운 모습이다. 


물론 대내외적으로는 4월 25일 대학교수들의 시국선언문 발표와 시위가 이승만 퇴진의 직접적인 발화선이 되었다. 그럼에도 저자가 할아버지·할머니 시위를 특별하게 보는 이유는 그들이 한참 전인 4월 11일 2차 마산항쟁 때부터 이미 이승만 퇴진 구호를 외쳤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때부터 여론을 자생적으로 형성했다고 본다. 야당도 엘리트 계층도 아닌 밑바닥 주변부의 사람들이 분위기를 저변에서 형성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주변부 사람들은 그 역량에 비해 제대로 평가받기는커녕 관심조차 끌지 못하고 기록·기억되지 못하며 가려지고 지워지기 일쑤이다. 그건 참으로 '바보' 같은 짓이다. 그 역량의 가능성을 차단하고 소진시켜 버리기 때문이다. 곧 역사 발전의 가능성까지도 차단하고 제약하는 것이겠다. 


주변부 사람들은 '대다수'이다. 즉, 우리들 말이다. 우린 알지 않은가. 혁명이 우리들 손으로 이루어졌다는 걸, 이루어지고 있다는 걸 말이다. 그렇지만 역사가 과연 우리를 알아줄 것인가? 다룰 것인가? 거기에서도 주변부는 배제되고 지워질 뿐이다. 우리가 가려진 이름들을 되새기고 계속 끌어올려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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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오래된 리뷰] <스텝포드 와이프>


과격한 프로그램으로 문제를 일으켜 해고 당하는 조안나, 그녀가 가족과 함께 간 스텝포드. 그곳엔 현모양처의 표본들이 즐비하다. ⓒCJ 엔터테인먼트



잘나가는 방송국 CEO이자 방송제작자 조안나 에버트(니콜 키드먼 분), 그녀는 예측불허의 자유인이다. 이번에도 역시 파격적인 페미니즘 프로그램으로 센세이션을 일으키며 크게 성공할 것 같다. 그런데 수많은 사람들을 초청해 열린 성대한 TV쇼 소개 자리에 한 남자가 출현해 총으로 위협한다. 조안나가 만든 페미니즘 프로그램의 피해자라는 것이었다. 


조안나는 곧 해고되고 정신병원으로 가게 되는데, 남편이 스텝포드라는 곳으로 이주해 새로운 삶을 시작하자고 제안한다. 그곳은 미국 북동부 코네티컷 교외에 있었는데, 평온하기 이를 데 없는 분위기에 친절한 사람들만 사는 것 같았다. 그런데 조안나가 보기에 그곳은 이상했다. 하나 같이 바비인형처럼 차려 입은 금발머리 여자들이 현모양처의 표본처럼 행동하고 있는 것이었다. 


어느 파티 자리에서 사단이 난다. 한 여자가 춤을 추다 말고 쓰러진 것이다. 조안나는 그녀를 당장 병원으로 데려가야 한다고 말하지만, 마을 사람들은 아무런 반응 없이 그저 괜찮다고만 할 뿐이다. 그런데 쓰러진 여자의 행동이 뭔가 이상하다. 사람이 아닌 로봇 같은 움직임. 그녀의 정체는 무엇일까. 그들은 왜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이 마을은?


남자는 이래도 되고, 여자는 이래야 한다?


하나같이 바비인형처럼 차려입고 금발을 한 그곳의 그녀들, 뭔가 이상하다... ⓒCJ 엔터테인먼트



영화 <스텝포드 와이프>는 시작과 동시에 '페미니즘'을 흘린다. 이 영화가 페미니즘을 말하고자 한다는 걸 초장부터 알리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주인공이 페미니스트라 할 수 있는 조안나라는 것과 무대가 스텝포드라는 걸 알린다. 그곳에 바비인형처럼 차려 입은 금발머리 현모양처들이 즐비하다는 건, 조안나와의 갈등이 심화될 거라는 영화의 앞날을 예고한다. 


'남자는 이래야 한다'는 전통과 '여자는 이래야 한다'는 전통은 상충하지 않고 조화를 이룬다. 이처럼 서로가 서로를 구속하는 형국이니 얼핏 보기엔 평등한 것 같다. 그런데 한 발만 들어가면 명백한 차원의 다름을 볼 수 있다. '남자는 이래도 된다'는 말은 있지만 '여자는 이래도 된다'는 말은 없고, 무엇보다 여자의 남자를 향한 순종과 복종이 남녀 조화의 주를 이루기 때문이다. 


하나 같이 바비인형 차림으로 차려 입은 금발머리 여자들의 모습은 '여자는 이래야 한다'의 정본과도 같다. 남자들이 원하는 모습 말이다. 겉모습에 그치지 않고 그녀들은 남편을 극진히 모신다. 완벽한 집안일은 물론 남편이 시키는 사소한 일 하나도 군말 없이 하며 남편의 캐디 역할도 한다. 이쯤 되면 아내가 아니라 비서 또는 하녀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남성 우월 사회는 파시즘일 수 있다


그녀들의 일방적인 모습은 남성 우월 사회의 파시즘을 역설한다. 그곳은 이상한 곳이 아니라 틀린 곳이다. ⓒCJ 엔터테인먼트



남편은 방송국 부사장, 자신은 방송국 CEO. 조안나는 단순히 잘나가는 방송인일뿐 아니라 남편보다 위에 군림하는 여성이다. 그녀는 그 사실을 아주 잘 알거니와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그러다 보니 아내가 남편을 모시는 모습을 용납할 수 없다. 더욱이 그녀는 갈색 짧은 머리에 검은색 계열의 옷을 주로 입고 다니니 만큼 바비인형 차림의 금발 머리도 용납할 수 없다. 


반면, 조안나의 남편 월터는 스텝포드에서 신세계를 경험한다. 남성 우월 사회에서 우월한 남성으로서의 지위를 한껏 드러내지 못한 자신을 스텝포드에서 드러내고자, 남성들만의 모임에 참석하고 조안나에겐 홧김에 이혼을 통보하기도 한다. 마을 전체가 똑같이 완벽한 남성 우월의 모습을 보이고 있는 이곳에 사실 조안나와 월터는 완벽한 이방인이다. 그들이 느끼기엔 이곳은 '이상한 곳'이고 '틀린 곳'일 것이다. 


그렇지만 파시즘적인 공동체에서 구성원 한두 명이 할 수 있는 일은 따로 없다. 그저 전체의 생각을 따르는 수밖에 없다. 그런 면에서 이 영화가 보여주는 가장 큰 깨달음이자 경고는, 남성 우월 사회가 파시즘적일 수 있다는 사실이다. '남성 우월'이라는 개념으로 개인 생활 전반을 통제하는 것이다. 


더욱 끔찍한 건, 여기서 여성의 의미가 퇴색되는 것에 더해 여성이라는 개인 또한 통제 된다는 점이다. 남성과 여성에서 여성만 퇴색되며, 통제되는 것도 남성이 아닌 여성뿐이다. 조안나와 월터가 힐링의 유토피아이자 파라다이스로 찾은 스텝포드가 그 어느 곳보다 비인간적인 디스토피아로 느껴지고 다가오는 건 이 사실을 깨달을 때다. 물론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하면 유토피아일 거다. 끔찍하기 짝이 없는 유토피아. 


극단적으로 치닫지 않았으면...


영화는 극단적이고 과격한 스토리로 중무장한 채 페미니즘을 외치고 남성 우월 사회에 경종을 날린다. 조금 자제가 필요해보였다. ⓒCJ 엔터테인먼트



영화는 이처럼 보여주고 또 말하고자 하는 바를 과격하게 보여준다. 과격한 스토리와 장면으로 보여주는 게 아니라, 투박하기 짝이 없이 직접적으로 보여준다는 뜻이다. 우린 영화를 본지 얼마 지나지 않아 스텝포드의 모든 여성들이 '로봇'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로봇처럼 자신의 생각 없이 명령에 따라 일사분란하게 동일한 행동을 한다는 비유와 상징의 개념이 아니라, 진짜 로봇이라는 사실. 


어떻게 그 많은 이들이 로봇이 될 수 있었는지, 또는 원래 로봇으로 만들어졌는지는 일단 알 길이 없다. 맥락상 사람이었던 이들을 로봇으로 만든 것 같은데, 영화의 전반적 만듦새만을 들여다볼 때 충분히 가능해 보인다. 영화가 말하려는 주제를 향해 그저 일직선으로 달려갈 뿐인 스토리에 그것들은 그저 수단일 뿐이기 때문이다. 


조안나처럼 능력있는 여성들을 데려와 로봇으로 개조해 충실한 현모양처로 살아가게 한다는 것. 이 모습은 이전까지 '당하고' 살았던 남자들이 일종의 복수를 하는 형국으로 비친다. 그 자체가 그들이 남성 우월 사회에서 왔다는 방증이다. 남녀 평등 사회였다면, 실력이 아닌 '성'의 차이로 비교할리가 없기 때문이다. 


영화는 극단적인 시작과 과정을 거쳐 끝까지 극단적으로 마무리한다. 선명하고 명명백백한 것과 극단적인 건 비슷한 듯하지만 완연히 다른 것. 영화는 자칫 여자와 남자를 홍해 가르듯 가를 조짐을 보인다. 그건 높지 않은 영화의 만듦새에서 기인한 게 클 것이다. 러닝타임도 평균보다 30분 정도 짧았던 점을 감안할 때 충분히 더 촘촘히 보여주어 극단적이 아닌 선명함을 선사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나마 조안나 혼자가 아닌 남편 월터가 끝까지 함께 해준 점이 눈에 띈다. 


우리 사회는 당연히 남녀 평등 사회가 아니다. 여권이 신장되었다고 하지만 평등과는 하등 거리가 멀다. 그렇다고 스텝포드처럼 기괴한 사회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과도기 또는 그 중간 어디라고 해도 될까. 아니, 과도기여야 하겠다. 그래야 언젠가는 평등이 실현된다는 뜻일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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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82년생 김지영>


소설 <82년생 김지영> 표지 ⓒ민음사



"김지영 씨는 우리 나이로 세른네 살이다. 3년 전 결혼해 지난해에 딸을 낳았다. 세 살 많은 남편 정대현 씨, 딸 정지원 양과 서울 변두리의 한 대단지 아파트 24평형에 전세로 거주한다. 정대현 씨는 IT 계열의 중견 기업에 다니고, 김지영 씨는 작은 홍보대행사에 다니다 출산과 동시에 퇴사했다. 정대현 씨는 밤 12시가 다 되어 퇴근하고, 주말에도 하루 정도는 출근한다. 시댁은 부산이고, 친정 부모님은 식당을 운영하시기 때문에 김지영 씨가 딸의 육아를 전담한다. 정지원 양은 돌이 막 지난 여름부터 단지 내 1층 가정형 어린이집에 오전 시간 동안 다닌다." (본문 9쪽)


소설 <82년생 김지영>(민음사)의 첫 단락이다. 이 소설의 축약이자 주인공 김지영 씨의 이때까지 삶의 축약이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현재를 살아가는 세른네 살 전후의 일반적 여성 삶의 축약이다. 지극히 평범한 삶인데, 점점 평범하기조차 쉽지 않아지는 이 시대의 세태를 반추해볼 때 많은 이들에게 부러움 또는 공분을 살 수 있는 삶인 것도 같다. 그러나 이 소설이 말하고자 하는 방향은 그것이 아니다. 


이 소설은 많은 삶을 아우르고 있지만 한편으론 많은 삶을 배제하고 있다. 그 점을 인지하고 읽는 게 좋겠다. 그렇지만 누구라도 김지영 씨의 삶에 교집합 하나는 있을 거고, 공감 하나쯤은 줄 것이다. 이 소설은 기존의 소설 문법을 파괴한다. 아니, 무시한다. 오랫동안 대세를 이루고 있던 소설 문법과 다르기 때문에 그렇게 느끼는 것일 테다. <82년생 김지영>은 다큐멘터리나 르포 또는 보고서 같다. 소설 같진 않다. 사회학을 전공하고 시사교양프로그램 방송 작가로 10년 동안 일한 경력을 잘 살린 것 같다. 


이 소설이 사랑받는 이유


김지영 씨는 어느 날 갑자기 이상증세를 보인다. 누군가가 그녀의 몸에 들어온 것 같다. 한두 번이면 몰라도 증세가 계속되자 결국 정대현 씨는 김지영 씨를 정신과에 데리고 간다. 김지영 씨의 삶을 돌아본다. 비로소 소설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데, 누군가가 김지영 씨의 삶을 보고서로 정리하는 것 같은 느낌이 난다 싶더니 소설 자체가 정신과 의사가 김지영 씨와 정대현 씨의 얘기를 바탕으로 정리했다는 콘셉트다. 


1982년에 태어난 여성들 중 가장 많은 이름이 '김지영'이라고 한다. 작가는 당연히 이 점을 인지했을 터, 김지영 씨의 삶이 지극히 보편적이라는 걸 못박아 두려는 의도다. 사실 굳이 그런 장치를 하지 않아도 김지영 씨의 삶은 수많은 보편들의 합집합이다. 마치 <전원일기>를 보는 듯한 현실적인 사실감도 느낄 수 있는데, 이렇게 보편적이고 사실적인 이야기가 나오고 또 많은 사랑을 받는 덴 이유가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이 소설을 페미니즘적인 시선으로 읽을 수 있다. 이는 김지영 씨로 대표되는 한국 현대 여성의 보편적이고 사실적인 삶의 궤적에서 당하는 '여성으로서의' 수많은 일들이, 사실은 특수한 것이어야 한다는 깨달음에서 기인한다. 김지영 씨에게 남은 가장 오래된 기억이 '남'동생과의 차별이고, 삶에서의 수많은 그때그때마다 입을 다물고 눈을 감고 대답을 삼키고 그만두었던 걸 보면 알 수 있다. 이는 특수한 상황이고 특수한 상황이어야 하지만, 우린 굉장히 보편적이었다고 생각해 왔던 것이다. 


그래서 이 소설을 그저 '우리 이야기구나' '우리 주위의 이야기구나' 하며 공감어린 시선으로만 보면 '안 된다'. 긴장 없이 읽기가 너무 쉽고 다음다음이 예측되서 딱히 기억에 남는 것도 없는 이 소설을, 딱 그만큼만 문제의식을 지니고 읽어야 하는 것이다. 그녀의 삶이 보편적으로 느껴지면 느껴질수록 이 사회는 바뀌어야 할 게 더 많다. 그녀의 삶에서 특수한 부분을 많이 느낄수록 이 사회는 바뀔 가능성이 높다.


이중잣대와 어설픈 페미니즘이 더 옭아맨다


김지영 씨는 치료를 잘 받고 남의 목소리가 아닌 자신의 목소리를 찾을 수 있을까? 삶의 순간순간에서 말하지 못했던 것들을 남의 목소리를 통하지 않고 자신의 목소리로 말할 수 있을까? 소설은 부정한다. 김지영 씨가 자신의 목소리로 피력한다는 것 자체를, 그런 시대의 도래 자체를 부정하는 것 같다. 소설은 끝나지만, 여전히 김지영 씨는 종종 다른 누군가로 빙의했다. 그러고는 아마 꼭꼭 숨겨놓았던 말, 여자로서 했어야 했지만 하지 못한 말을 했을 것이다. 


여기서 생각해봐야 할 건, 김지영 씨가 자신의 목소리를 찾는다는 것의 상징성이다. 김지영 씨가 목소리를 찾으면, 해야 할 말과 하고 싶은 말을 못할 게 뻔하다. 반면, 이대로 종종 다른 누군가로 빙의하면 해야 할 말과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다. 그 말 하나하나가 변화에 큰 일조를 한다는 걸 잘 알고 있기에, 차마 그녀가 자신의 목소리를 찾는 것에 응원을 보내기가 껄끄럽다. 그렇게라도 말을 하는 게...


그녀가 다른 누군가로 빙의해서 하는 말은, 비단 그녀뿐만 아니라 다른 여성의 말이기도 하다. 예를 들면, 그녀의 엄마가 그러한대, 시댁에 가서 김지영 씨에게 빙의한 그녀의 엄마가 "아이고 사부인, 사실 우리 지영이 명절마다 몸살이에요"라고 말하고 곧 "정 서바앙! 자네도 그래. 매번 명절 연휴 내내 부산에만 있다가 처가에는 엉덩이 한 번 붙였다 그냥 가고. 이번에는 일찍 와."라고 말하는 게 그렇다. 김지영 씨가 하고자 했던 말이기도 하거니와 그녀의 엄마가 하고자 했던 말이기도 하다. 나아가 거의 모든 여성들이 하고자 했던 말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살 수는 없는 법. 소설이 그 방도를 생각해내진 않는다. 오히려 비극적이고 암울한 상황으로 끝난다. 여성에 대한 일방적인 태도보다 더 여성을 옭아매는 '이중잣대'와 '어설픈 페미니즘'. 이 소설이 보여준 건 여기까지. 어떤 문제의식을 느끼고 어떤 깨달음을 얻고 어떤 방법을 생각해내는지는 수많은 김지영의 몫일 것이다. 김지영 씨가 자신의 '진짜' 목소리를 찾는 것도 방도이지 않을까 싶다. 


세상은 변하는 듯해도 변하지 않고, 여성의 삶은 나아지기는커녕 변형된 형태로 폐해가 잔존하는 것 같다. 수많은 김지영뿐만 아니라 수많은 정대현이 해야 할 일도 물론 많다. 많은 남성들이 소설의 마지막에서 보여준 김지영 씨 담당 정신과 의사가 보여준 어설픈 페미니즘을 지니고 있을 줄 안다. 어설플 바에야 차라리 멀찍이 떨어져 있는 게 낫다. 아니면 제대로 동조를 하던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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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멋진 하루>


하정우가 아직 신인이었을 당시, 베테랑 전도연과의 만남으로 많은 기대를 받은 작품 <멋진 하루>. 역시, 최고의 한국 영화 중 하나다. ⓒ스폰지 Ent



가끔 '한국 영화'가 보고 싶을 때가 있다. 다른 어느 나라 영화도 아닌 한국 영화가 말이다. 중국이나 일본 영화와는 달리 한국 영화는 '풍'이 확고하지는 않은 것 같다. 미국을 위시한 외세의 영향을 많이 받아서 일까. 굳이 뽑아보자면 한이 서려 있는 풍이 한국 영화의 풍이랄까. 그래서 일명 '국뽕' 영화가 많이 만들어 지고 또 많은 인기를 얻는 게 아닌가 생각해본다.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한국 영화의 풍은 섬세한 멜로를 기반으로 멜랑꼴리와 유머와 현실 감각이 조금씩 섞인 장르인 것 같다. 이 또한 영향을 받을 것일 수 있지만, 그래도 가장 한국 영화 같지 않을까. 내가 가끔 '한국 영화'가 보고 싶을 땐 바로 이런 풍의 영화가 보고 싶을 것을 게다. 


전도연과 하정우가 멋들어지게 연기한 2008년작 <멋진 하루>는 비록 원작은 일본 소설이지만 한국 영화 같은 느낌을 자아내는 영화다. 모르긴 몰라도 일본풍이 강할 수밖에 없을 단편 소설을 훌륭하게 재단해낸 각본의 힘이겠다. 이제 막 신인을 벗어난 하정우는 날아다니고, 베테랑 전도연은 자신을 낮추고 모든 걸 받아주었다. 이 둘의 서울에서의 하루를 멋지게 그려냈다. 다시 봐도 정녕 괜찮은 영화다. 


왠지 '멋진 하루'일 것 같은 이들의 하루


영화는 지나가는 행인들의 일상적 이야기를 포착하며 시작한다. 두 번째, 세 번째에 비로소 우리의 주인공 희수(전도연 분)가 등장한다. 카메라는 이제 그녀에게 집중한다. 여타 영화와는 다른, 신선한 시작이다. 희수가 있는 곳은 경마장이다. 그녀는 어슬렁거리며 누군가를 찾고 있는 듯하다. 어디선가 들리는 익숙한 목소리, 그에게로 가 반가워하는 그의 얼굴에 대해 대뜸 '돈 갚아'라고 한마디 한다. 


희수의 싸늘한 한마디와 병운(하정우 분)의 천연덕스러운 반응은 이 영화의 앞날을 예견한다. 시종 일관 계속될 이 둘의 티격태격이 눈 앞에 그려지는 듯하다. 희수가 병운에게 받아야 할 돈은 350만 원, 참으로 애매한 액수다. 병운은 당장 갚을 돈이 없어 빌리러 가야 한다고 말한다. 며칠 뒤에 붙여준다는 병운을 믿지 못하는 희수, 오늘 당장 받아야 한다고 하며 병운을 따라 나선다. '멋진 하루'의 시작이다. 


과연 멋진 하루일까. 굳이 끝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 같다. 멋진 하루는커녕 우울하기 짝이 없는 하루가 될 거라고. 꿔준 돈을 받기 위해, 돈 꾸는 현장을 따라나서야 하다니. 영어 제목인 'My Dear Enemy'에서도 풍기는 이 정반대 콤비의 모순적인 하루. 그런데 병운의 천연덕스러움, 그가 돈을 꾸러다니는 풍경,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가 생각나게 하는 OST까지, 마치 설렘 가득한 산책을 가는 기분이다. 왠지 이들의 하루가 '멋진 하루'일 것 같다. 싱숭생숭한 기분은 어딘가로 가버리고 설렘만 남는다.


여성에 대한 천착에서 인간에 대한 섬세한 시선까지


영화는 이윤기 감독이 오랫동안 천착해왔던 여성에 대한 천착을 간직한 채, 인간에 대한 섬세한 시선까지 보여준다. 한국 영화의 발전 양상을 보는 것 같다. ⓒ스폰지 Ent



그럴 때가 종종 있다. 정말 가기 싫은 곳을 어쩔 수 없이 억지로 따라 가서 시종 일관 인상을 쓰며 빨리 이곳을 빠져나가고 싶다는 생각만 하며 있었는데 막상 떠나면서는 뭔가 괜찮았다는 기분이 들 때가 말이다. 희수가 느낀 감정이 그렇지 않았을까 싶다. 내 돈 내가 돌려받겠다는데, 왜 내가 모르는 사람이랑 함께 말 같지도 않은 말을 듣고 있어야 하는지. 병운은 그게 다 너한테 돈 갚으려고 하는 거고 또 좋은 게 좋은 거 아니냐고 둘러대니 더더욱 마음에 안 들고 인상이 찌뿌려진다. 


와중에 이윤기 감독은 오랫동안 천착해왔던 여성에 대한 섬세한 시선을 놓치지 않는다. 형식은 두 남녀의 좌충우돌 로드무비지만, 병운이 돈을 꾸러 다니는 사람들이 하나 같이 여성이기 때문이다. 골프장을 운영하는 듯한 회장님, 이혼하고 홀로 딸을 키우며 마트 일을 하는 여자, 밤일 하는 여자, 주차요원으로 일하는 여자, 어디를 다쳤는지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는 듯한 여자 등, 그야말로 다양한 여성군이다. 


희수가 보기엔 병운이 여자들의 돈을 뜯어 먹는다기 보다 여자들이 병운에게 돈을 가져다 바치는 것처럼 보인다. 그게 역겨워 보였는지 밤일 하는 여자한테 해서는 안 될 말을 하고 만다. 곧 사과를 하는 희수, 그녀는 여자들을 향한 분노를 병운에게 돌린다. 반반한 얼굴과 사람 기분 좋게 하는 입담으로 여자들 돈 뜯어 먹는 놈. 


그렇지만 그녀가 그에 대해 무엇을 알겠는가. 그들은 그저 오래전 헤어진 연인일 뿐인데. 일 년 사이에도 몇 번이나 180도 바뀌는 게 인생 아닌가. 다시 보니 병운과 그녀들은 서로를 돕고 살아가고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해본다. 분명 그녀들이 어려울 때 병운은 두 발 벗고 도와줬을 것이다. 감독의 여성에 대한 천착은 이렇게 인간에 대한 천착, 인간에 대한 섬세한 시선으로 발전했다. 


내 영화 인생에 나타난 특별한 영화 한 편


잘 기억나진 않지만 아마 개봉한 지 오래지 않아서 이 작품을 봤을 것이다. 당시에는 별 생각 없이 두 주연 배우 때문에 봤을 텐데, 묘하게도 근 10년이 지나도록 가끔 생각이 났다. 이 영화가 풍기는 분위기가 정녕 어디 서도 느끼기 힘들기 때문일 텐데, 묘하게 위로해주는 기분이랄까. 거기에 병운으로 분한 하정우의 천연덕스러운 연기는 처음부터 끝까지 기분을 좋게 해준다. 더군다나 영화가 진행되면서 자연스러워지는 게 눈에 보이는데, 기특하다는 생각까지 들게 만드는 게 아닌가. 


자꾸 떠오르는 영화는 또 보게 마련이지만, 또 보게 되었을 때 실망할 여지가 많다. 그때 그 영화를 봤을 때 나의 상황과 나를 둘러싼 환경과 영화를 둘러싼 환경 등이 변했을 것이기 자명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이 세상이 변했을 테니 말이다. 하다 못해 예전의 것이기에 촌스럽고 유치하고 예상되고 지루하고 재미 없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기억 속 옛 연인을 다시 한 번 보고 싶은 마음은 알겠지만, 막상 보고 난 후 실망을 금치 못하느니 안 보는 게 낳다는 느낌이랄까. 


<멋진 하루>는 어땠나. 그런 기시감은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그때 못 봤던 것들(영화 스킬, 장면, 영화 제목의 반어법)이 보이고, 그때 느끼지 못했던 감정(병운이 돈 꾸러 다니는 여자들의 감정)이 보이는 게 아닌가. 그땐 참 '빈약한' 영화인 줄 알았는데, 이렇게 '풍부한' 영화일 줄이야. 살아가면서 보고 또 보게 될 영화인 것 같은데, 몇 년 뒤에 또 보게 되면 또 어떤 것들이 되살아나 내 눈 앞으로 다가올지 기대된다. 내 영화 인생에 특별한 영화 한 편이 나타났다. 


전도연과 하정우에게 특별하게 다가올 영화


영화의 두 주연배우 전도연과 하정우. 그리고 이윤기 감독. <멋진 하루>는 감독뿐만 아니라 두 배우에게도 큰 의미로 다가왔을 것이다. 그들의 조합을 다시 보고 싶다. ⓒ스폰지 Ent



이 작품은 무엇보다 두 주연 배우 전도연과 하정우에게, 특히 하정우에게 큰 의미로 다가올 것 같다. 전도연은 2007년 <밀양>으로 역사적인 '칸의 여왕'이 되어 한국 영화계에 깊은 족적을 남겼는데, 바로 다음 작품으로 이 <멋진 하루>를 선택했다. 전작에서 모든 걸 다 바친 듯한 연기를 선보였다면 이 작품에선 모든 걸 다 내려 놓고 후배 하정우에게 모든 걸 다 넘겨준 듯한 연기를 선보인다. 그녀의 필모그래피를 볼 때, 이 작품으로 말미암아 진정한 완성형 연기자가 된 듯한 느낌이다. 


한편 하정우는 2008년이 특별할 것이다. <추적자>로 필모 최고의 연기를 선보이고, <비스티 보이즈>로 윤종빈 감독과 다시 만나 열연을 펼쳤으며, <멋진 하루>로 비로소 '하정우표' 연기를 완성시켰다. 하정우표 연기의 시작이 <용서받지 못한 자>였다면, <멋진 하루>는 최근 <터널>까지 이어진 그의 연기의 정점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왠지 그도 이 작품에서의 병운이라는 캐릭터를 가장 좋아할 듯하다. 


연기를 잘하는 건 둘째 치고 배우 필모그래피 전체에서 터닝포인트가 되는 작품들이 있을 텐데, 전도연과 하정우 두 배우에게 <멋진 하루>가 상징하는 바는 남다를 것이 분명하다. 비단 두 주연 배우뿐만 아니라 이윤기 감독에게도 마찬가지이지 않을까. 2005년 <여자, 정혜>로 데뷔하자마자 많은 주목을 받았던 그, 계속해서 많은 사랑을 받다가 <멋진 하루>로 정점을 찍었다. 이후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로 비평과 흥행에서 참패, 작년엔 <남과 여>로 돌아왔지만 흥행에서 참패했다. 


물론 이윤기 감독의 작품들이 흥행에서 좋은 성적을 거둔 적은 없지만, 적어도 비평에선 좋은 점수를 얻었던 바 최근의 행보가 조금 아쉬운 건 사실이다. 연출도 연출이지만 그만의 색채가 묻어나는 각본을 다시 접하고 싶다. <멋진 하루>가 생각나는 멋진 이야기를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난해 11월에 개봉할 예정이었던 <어느날>의 개봉 소식이 들려오지 않는 게 아쉽다. 후반작업 때문이라고 하는데 하루 빨리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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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레이디 수잔>


다분히 '제인 오스틴' 사후 200주년(2017년)을 기해서 나온 듯한 영화 <레이디 수잔>. 더군다나 제인 오스틴의 미발표 첫 번째 소설을 처음으로 영화화했다. ⓒ㈜수키픽쳐스



2017년 사후 200주년을 맞는 영국의 소설가 '제인 오스틴'. 그녀의 작품들은 정전으로 추대되어 전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읽히고 있지만 개인적으로 거의 접해보지 않았다. 18~19세기 영국 귀족의 청춘 연애담을 위주로 하기에 성향 상으로 맞지 않기 때문일 테지만, 그게 하나의 편견으로 작용하고 있을 테다. 왠지 그렇고 그런 연애 이야기일 것 같은 느낌이랄까. 


당연히 그녀의 작품을 영화한 것들도 거의 접하지 않았다. 사실 그녀는 살아생전 많은 작품을 남기지 않았고 많은 인기를 끌었거나 좋은 평을 듣지도 않았다. 20세기 들어서야 대대적으로 재조명 되었다. 그래서인지 영화는 그녀의 작품뿐 아니라 <비커밍 제인>처럼 그녀의 인생으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그 정도임에도 거의 접하지 않았다는 건 어지간히도 관심이 없거나 편견에 사로잡혀 있는 게 아닐까 생각된다. 


그 와중에 최근 나왔다는 영화 <레이디 수잔>을 접했다. 제인 오스틴이 채 20살도 되지 않은 때에 지은 미완성·미발표 단편 습작 소설이 원작이라는 점, 제인 오스틴의 여타 소설들의 여주인공과는 다르게 당차고 속물적이고 이기적이고 도덕적이지 않기까지 하다는 점 등에 눈길이 갔다. 


레이디 수잔의 속물적이고 파렴치한 사랑 방식


기존의 제인 오스틴 작품과는 달리 여성의 속물적이고 파렴치한 사랑 방식을 중심으로 영국 귀족 사회의 연애담을 폭로한다. 거기엔 사랑에 대한 진지한 고민은커녕 사랑 자체가 없다. ⓒ㈜수키픽쳐스



남편과 사별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레이디 수잔, 그녀는 맨워링 경과 연애를 시도한다. 하지만 맨워링 부인의 반대에 부딪혀 뜻대로 되지 않자 급히 선회, 레지널드와 연애를 시작한다. 그는 다름 아닌 사별한 남편의 남동생의 부인의 남동생, 즉 동서의 남동생이다. 사돈이라는 얘기. 


하지만 레이디 수잔이 워낙 바람둥이로 악명이 높은 바, 레이디 수잔의 동서인 캐서린은 남동생을 그녀에게 장가가는 걸 싫어한다. 대신 그녀의 딸인 프레데리카와 잘 이어지길 바란다. 그건 캐서린과 레지널드의 아버지도 마찬가지다. '가문의 수치'라며 레지널드를 나무란다. 그래봤자 레지널드에겐 소 귀에 경 읽기. 그는 레이디 수잔에게 푹 빠졌다. 예쁘고 지적이고 품격 높은 레이디 수잔이 아닌가. 


영화는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초의 영국 귀족 사회로 예상되는 배경에 걸맞지 않게(?) 경쾌하다. 그 중심엔 레이디 수잔의 속물적이고 파렴치한 인생 지침 하의 사랑 방식이 자리하고 있는데, 그런 모습이 비단 그녀뿐만이 아니라는 게 중요하다. 다들 그런 그녀를 비방하고 조롱하지만 정작 그들도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 더군다나 그녀는 다 잘 되자고 그러는 거지 다 못 되자고 그러는 게 아니다. 새드 엔딩이 아닌 해피 엔딩이 그녀가 바라는 바다. 그런 그녀를 악녀라 치부하며 미워할 수가 있을까? 없다. 


더불어 영화 자체가, 즉 감독이 추구하는 바가 굉장히 유머스럽다. 영화 초반부에 주요 인물들을 각각 몇 초간 보여주며 자막으로 이름과 함께 유머스럽고 풍자적으로 설명해주는 게 매우 알맞게 재밌다. 즐거움을 준다. 여기에  '제임스 경'이라는 멍청하기 짝이 없지만 성격 좋고 활달한 귀족의 원맨쇼가 영화의 품격을 높인다. 품격 높은 코미디라고 할까. 기억에 남는 장면이 몇몇 있는데, 왠지 감독이 일부러 그가 출현하는 코믹한 장면을 더 넣지 않았나 싶을 정도다. 극 전체와 크게 부합되지 않는 장면이자 인물임에도 많은 분량을 소화한다. 


제임스 경이 프레데리카가 있는 '처칠'에 와서 하는 말, "여기 교회(처치)와 언덕(힐)이 어디 있나요? 아, 이곳 이름이 처칠이었나요. 저는 처치힐인줄 알았지요. 하하하." "12계명이 아니라 10계명이라고요? 그럼 12개 중 2개를 버려야 하는데, 뭘로 하면 좋을까요? '살인을 하지 마라' '네 이웃의 아내를 탐하지 마라'는 없어도 되지 않을까요? 하느님이 말씀하지 않으셔도 어차피 하면 안 되는 거고 하지 않을 건데. 하하하." 실제로 보면 박장대소하지 않을 수 없는 장면들이다. 


여성에게 요리조리 휘둘리는 남성들


여타 제인 오스틴 작품과 같은 점은, 여성이 주가 되어 남성을 요리조리 휘두른다는 점이다. 이 작품이 다른 작품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영화는 이 점을 아주 잘 살려냈다. ⓒ㈜수키픽쳐스



한편, 레이디 수잔은 딸 프레데리카가 돈 많고 가문 좋고 성격 좋지만 나이가 좀 있고 멍청하기 짝이 없는 제임스 경에게 시집가길 원한다. 미망인인 자신이 딸을 언제까지 보살펴 줄 수도 없거니와, 딸이 잘 살길 바라는 생각에서다. 그래서 교사가 되고 싶다는 딸의 꿈을 무참히 꺾어버리면서, 바보에게 시집가길 중용하는 것이다. 


그렇게 원하면, 나이도 비슷하게 자신이 제임스 경에게 시집을 가고 딸과 레지널드가 이어지면 되지 않을까. 어쩌면 그녀는 이 모든 걸 머리에 넣고 판을 짜서 자신의 의중대로 되게끔 조종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여성의 지휘가 땅을 뚫고 들어가는 당시, 여성이 남성을 조종하며 변화시키기까지 하는 모습이 신선하지 않은가. 


영화는 어김없이 제인 오스틴의 작품(을 영화한 작품)답게 당대 귀족 사회에 대한 신랄한 비판과 풍자를 그려냈다. 사실 레이디 수잔을 비롯해 그녀를 둘러싼 지난한 연애담 자체가 그러할 텐데, 전 세계를 제 집 앞마당에 가듯 드나들면서 온갖 나쁜 짓을 다 했던 대영제국의 한복판이 당시이다. 또한 그 중심에 귀족들이 있을 텐데 그들은 고작 얼토당토하고 어이 없는 연애나 하고 있는 것이다. 그 중심엔 사랑이 없다. 


적어도 이 작품엔 없다는 것이다, 사랑이. 제인 오스틴의 다른 작품에는 사랑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하는 이들이 주를 이룬다. 물론 그것도 귀족 사회에 대한 비판과 풍자가 될 수 있지만, 이정도로 신랄하진 않을 거다. 


한편, 남성이 주가 되는 게 아니라 부가 되어 여성에게 요리조리 휘둘리는 모습들은 속이 시원할 뿐 불편하지 않다. 심지어 제임스 경으로 대표되는 천하의 멍청이도 남성이고, 레이디 수잔에게 이리저리 휘둘리며 나중에는 일방적으로 차이는 허당 레지널드도 남성이다. 같은 남자가 보아도 멍청이고 허당이다. 재밌게 느껴졌다. 


이보다 더 '재미'있는 제인 오스틴 원작 영화는 없을 듯


연기와 스토리는 말할 것도 없이, 음악, 의상도 최상위급이다. 분위기가 워낙 코믹스러워 소품 정도로 치부하기 쉽지만, 웬만큼 이상의 꼼꼼함이 묻어난다. 결정적으로 '재밌다' ⓒ㈜수키픽쳐스



영화에는 클래식 음악이 상당히 나오는데 잘은 모르지만, 바흐보다는 헨델과 비발디, 베토벤보다는 모차르트 풍의 음악이었던 것 같다. 진중하고 고뇌에 찬 느낌이 아닌 발랄하고 사교적인 느낌. 영화의 느낌을 잘 살리는 동시에 그 자체로 빛이 났는 바, 모든 걸 떠나서 영화를 아주 즐겁게 볼 수 있었다. 


모든 시대극에서 빛이 나는 건 뭐니뭐니 해도 당시를 재현한 스타일일 것이다. 당시 스타일의 풍광이나 풍미도 그렇지만, 의상이 가장 빛난다. 그건 동서양이 모두 그렇다. 이 작품도 그것에 굉장히 공을 들인 듯, 기존의 제인 오스틴 영화들에게 보여주었던 스타일과는 사뭇 다른 스타일을 선보인다. 초기작을 바탕으로 하는 만큼 실제 시간의 격차가 있었던 것이다. 그저 그때쯤 입었을 만한 의상 스타일을 차용한 게 아닌, 꼼꼼한 조사가 뒷받침되었다는 걸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거의 처음으로 제인 오스틴 원작 영화를, 참으로 오랜만에 서양 시대극을, 그것도 진중하지 않은 코믹한 느낌으로 보게 되어 색다른 경험을 재미있게 했다. 솔직히 이 작품을 계기로 제인 오스틴 원작의 다른 영화를 볼 것 같진 않다. 이 영화보다 '좋은' 영화겠지만 적어도 '재미'있진 않을 것이기에. 재미를 찾는 게 조금 황당할지 모르지만 어쩌랴. 그녀의 작품으로 정녕 재미있는 영화를 만든 이가 여기 있고, 나는 그 작품을 입문작으로 봐 버린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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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줄리에타>


<줄리에타> 포스터의 두 여인은 사실 한 명이다. 젊을 때의 줄리에타와 중년의 줄리에타. 젊은 줄리에타를 분한 아드리아나 우가르테는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의 새로운 뮤즈로 손색이 없다. ⓒ(주)쇼미미디어앤트레이딩



줄리에타는 로렌조와 함께 마드리드의 삶을 청산하고 포르투갈로 떠나려 한다. 그러나 그녀의 얼굴엔 알 수 없는 수심이 가득한 바 어떤 사연이 있는 것 같다. 아니나 다를까 길을 가던 중 우연히 마주친 베아, 베아로부터 우연히 듣게 된 딸 안티아의 소식을 듣는다. 12년 만에 듣게 된 딸의 소식에 줄리에타는 포르투갈로의 이주를 취소하고 딸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한다. 쉽게 꺼낼 수 없었던 자신의 과거를 구구절절 풀어놓기 시작하는 것이다. 마치 그것이 딸을 향한 사죄의 시작인 양. 


스페인의 거장이라고 일컬어지는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의 신작 <줄리에타>는 줄리에타가 딸에게 쓰는 편지와 편지를 쓰는 현재가 교차되는 형식을 취한다. 당연히 그 중심에는 줄리에타가 있고 감독은 줄리에타의 삶을 통해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한다. '여성' '사죄' '욕망' 등과 과거와 현재, 문학과 신화가 뒤엉켜 상당히 복잡다단한 이 영화는, 상징으로 표출되는 메시지와는 다르게 이야기 자체는 그리 복잡하지 않다. 


여성으로서의 삶을 중심으로 주요 줄기들을 살펴보면 될 것이다. '이런 삶도 있구나' 하는 생각보다는 '삶에서 이런 층위를 발견할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이 더 들지 않을까, 싶다. 필자가 편지를 쓰며 과거를 회상하는 중년 여성도, 회상 속 20~40대 여성도, 그렇다고 줄리에타의 딸 안티아처럼 '여성'이 아니지만, 그녀들의 삶을 이해하고 싶은 이 중에 하나인 바 최선을 다해 들여다보고 싶다. 


줄리에타를 따라다니는 삶과 죽음의 운명


원색의 색채, 그리고 색채들의 선명한 대비는 삶과 죽음의 강렬한 대비를 전한다. 평생 줄리에타를 따라다닐 운명 말이다. 그녀는 그 속발을 풀 수 있을까. ⓒ(주)쇼미미디어앤트레이딩


때는 1980년대, 대학에서 고전문학 강사로 있는 젊은 줄리에타, 난해한 패션의 소유자이지만 미모는 가려지지 않는 그녀, 야간기차를 타고 여행 중이다. 그녀 앞에 난데 없이 나타난 나이든 남자가 말을 건다. 너무 싫었던 줄리에타는 그의 말을 무시하다시피 한 후 레스토랑 칸으로 자리를 피한다. 그곳에서 운명처럼 만나게 된 소안, 그들은 서로에 대한 호감 속에서 다양한 이야기를 나눈다. 아픈 아내를 몇 년 동안 간호해 왔다는 소안. 거기에 어떤 특별한 감정을 느끼는 줄리에타. 


얼마 후 일어나게 된 끔찍한 사고, 줄리에타가 무시한 나이든 남자가 자살을 한 것. 줄리에타는 죄책감에 시달리지만, 곧 소안과의 육체적 관계로 해소한다. 그렇게 일상으로 돌아왔지만 얼마 후 받게 된 소안의 편지로 그를 찾아가고 그들은 곧 함께 한다. 기차에서의 관계로 얻게 된 아이 안티아도 함께. 기차에서 겪은 죽음은, 새로운 생명과 삶으로 잊혀진다. 행복한 나날을 보낸다. 하지만 비극은 그녀를 빗겨가지 않는다.


영화 초반, 원색의 색채 그리고 색채들의 대비로 죽음과 삶의 강렬한 대비를 전한다. 그 둘이 줄리에타의 삶을 따라다니며 곧 그녀의 삶을 규정하는 바, 기차 장면은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볼 수 있겠다. 기차는 일상에서는 생각하기 어려운 여러 가능성들이 존재한다. 한정된 곳에서 타에 의해 정해진 사람과 함께 해야 하는 바, 운명적 요소가 굉장히 진하다. 줄리에타도 그 운명적 소용돌이에 휩싸인 것이다. 


그렇게 시작된 운명의 열차는 그녀를 계속 따라 다닌다. 누구라도 마찬가지다. '내가 어떻게 여기까지 와서 왜 이러고 있는 거지?' 하고 생각하며 유추해 따라 올라가다 보면 태초에 시작된 운명의 문이 거기 있다. 문이 여전히 거기에 있는 건 알겠는데, 찾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줄리에타는 운명이 선사한 지독히 속박에 갇혀 헤어나기 힘들어 하고 있다. 로렌조가 보낸 구원의 손길도 어쩌지 못한다. 스스로만 풀 수 있을 뿐.


일반적일 수 없는, 애증의 모녀 관계


개인적으로 이 영화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부분이 줄리에타와 안티아의 모녀 관계다. 일반적이지 않은, 일반적일 수 없는 애증의 관계. ⓒ(주)쇼미미디어앤트레이딩



비극은 느닷없이 찾아왔다. 줄리에타에겐 누워 지낸 지 오래된 엄마가 있다. 오랫동안 그녀를 보살핀 아빠도 있다. 그리고 엄마 대신 집안 일을 하게 된 여자도 있다. 줄리에타는 아이와 함께 부모님 댁을 방문하는데 아빠와 여자의 야릇한 분위기를 감지하고 모습도 목격한다. 역겨움을 느끼는 줄리에타, 하필 그때 즈음에 소안이 예전 아내가 아팠을 적에 그의 절친 아바와 적절치 못한 관계를 맺은 적이 있다는 걸 알게 된다. 


싸늘하게 소안을 물리는 줄리에타, 소안은 어부로서 할 일을 하러 나가지만 곧 폭풍우가 몰아친다. 소안은 싸늘한 주검으로 돌아오고, 줄리에타는 옛날 기차에서의 죽음이 겹쳐 죄책감이 되살아난다. 어느새 큰 안티아에게 그 사실을 알리고는 얼마 지나지 않아 우울증으로 어린 안티아에게 삶을 위탁하다시피 하는 신세를 진다. 참으로 오랫동안 신세를 지고는 정신을 차린 줄리에타. 어린 안티아는 이제 다 커서 18살, 부모 곁을 떠나야 하는 때가 되었다. 줄리에타에게 또 다른 시련이 찾아오는데...


새로운 생명과 삶으로 잊힌 죽음의 그림자가 다시 한 번 그녀를 덥친 건, 그녀로서는 어찌해볼 도리가 없는 것이었다. '잃음'의 트라우마, 그 트라우마는 간신히 회복한 그녀를 또다시 후려친다. 이번엔 딸의 독립으로. 그녀는 도무지 앞으로 나아가기가 힘들다. 현재는커녕 과거에 머무르기도 힘들다. 모든 것에서 벗어나고 싶은 것이다.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딸의 존재를 확인하는 것. 


개인적으로 <줄리에타>에서 기억에 남는 부부은 줄리에타와 안티아의 관계다. 자신으로 인해 저질러 졌다고 믿는 두 명의 죽음을 잊을 수 있게 해줄 정도의 존재가 그녀에게는 딸 안티아다. 우연치 않게 홀모 밑에 살았다는 딸의 말을 들어볼 기회가 있었는데, 그녀에게 엄마는 '애증'의 존재 그 자체라고 한다. 이 세상에서 없어선 안 될 단 하나의 존재처럼 인식하면서도, 이 세상에서 가장 멀리하고 싶은 단 하나의 존재처럼 인식한다는 것이다. 


그건 엄마에게는 해당되지 않을 거다. 일반적인 엄마와는 달리, 그녀에게는 이 세상 다 하는 날까지 함께 해야 하는 존재가 딸이다. 딸의 인생에 몹쓸 짓을 했다는 죄책감까지 더해진 최선의 사랑이자 모성애다. 하지만 딸에게는 최악의 사랑이 될 수도 있다. 그건 곧 엄마에게 돌아가 빙퉁그러진 모성애로 나타날 수 있다. 


문제는, 이런 경우 엄마와 딸은 서로의 감정을 너무 생각하기에 서로의 삶에 대한, 그리고 서로에 대한 진지한 대화를 해보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니, 못할 것이다. 어떤 말을 하든 상처가 될 것이기 때문에, 그걸 누구보다 서로가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침묵'은 갈수록 영화를 침식한다. 그리고 침묵은 '잠적'으로 확대된다. 잠적은 곧 '관계의 끝'으로 치닫는다. 더이상 어떤 인생이 남아 있나. 


줄리에타는 딸과 재회해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율리시스가 폰투스를 건너 이타카 섬으로 10년 만에 돌아와 아들과 재회한 것처럼, 줄리에타도 12년 만에 딸의 소식을 접하고는 재회할 수 있을까? ⓒ(주)쇼미미디어앤트레이딩



아무리 80년대라지만 이해하기 힘든 패션, 그럼에도 그녀가 '고전문학' 강사인 건 무슨 이유가 있을 것이다. 감독이 의도했다는 게 조금, 아니 상당히 드러나는 부분인데 그녀가 강의하는 내용이 그녀 자신의 삶에 대한 은유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다름 아닌 '율리시스' 이야기. 


율리시스는 망망대해를 헤매다가 여신 칼립소를 만나 살다가, 영원한 젊음과 영생을 주겠다는 제안을 뿌리치고 폰투스를 건너 이타카 섬으로 돌아왔다. 그렇게 율리시스는 10년 만에 아들과 재회한다. 영화에서 소안은 줄리에타와 만나 살지만, 바다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한편 줄리에타는 12년 만에 딸의 소식을 접하기도 한다. 복잡다단한 층위를 이루는 이 영화에서 '율리시스' 모티브는 단연 정점이다. 


줄리에타는 딸과 재회할 수 있을까?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아니, 만약 그녀들이 재회한다면 다신 예전으로 돌아가기 싫을 것이다. 또다시 불행해지기 싫을 테니까. 이제는 오랜 침묵을 깨고 서로를 알기 위해 노력할 게 분명하다. 12분 마다, 12시간 마다, 12일 마다, 최소한 12개월 마다는 재회하는 우리들은 어떨까. 서로에 대해서 잘 알까? 잘 알고 싶어나 할까? 상실을 경험해야 슬픔을 알까. 


줄리에타를 응원한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엄마와 딸을 응원한다. 이 시대의 모든 여성을 응원한다. 아니다, 사랑과 모성애는 엄마만, 여성만 느끼는 게 아니다. 그럼으로 이 시대의 모든 인간을 응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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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서프러제트>


지금은 당연한 것들 중 하나인 '민주주의’. 그리고 민주주의의 꽃 ‘선거’. 여성과 흑인의 참정권은 민주주의가 자리를 잡고 나서도 오랫동안 주어지지 않았다. 여성의 경우 그 어떤 참정권 운동보다 길었다. 결정적으로 과격했다. 영화 <서프러제트> 포스터 ⓒUPI코리아


영화 <서프러제트>는 일방적이다. 20세기 초 영국, 50년 동안 계속된 여성 참정권 운동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끄떡없다. 운동에 참여한 여성들은 과격해진다. 그들 말마따나 정부가 유일하게 이해하는 말이 폭력이기 때문이다. 돌을 던져 건물 유리창을 박살내는 걸 시작으로, 비어 있는 건물에 불을 지르고 유력 정치가에 폭력을 휘두르기도 한다. ‘말이 아닌 행동으로라는 급진적 구호를 내건 서프러제트의 주요 활동이었다.

 

가상의 인물 모드 와츠가 어떻게 서프러제트의 일원이 되어 과격한 폭력 활동까지 하며 여성 참정권 운동에 전력을 다하게 되었나를 앞뒤 가릴 것 없이 직진하는 식으로 그려낸 영화는, 심오한 고민이나 산재한 문제들을 뒤로 하고 현상에 집중한다. 엄연히 존재하는 역사의 한 면과 본질을 무시한 것인데, 하등 이상할 것 없는 괜찮은 선택이었다. 서프러제트를 이끈 전설적 인물 에멀린 팽크허스트가 아닌 그녀에게 감화된 수많은 여성 중 한 명을 가상의 인물로 내세운 점만 봐도 그렇다. 감독은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하고 싶은 얘기를 한다.

 

지금은 당연한 것들이 당연하게 될 때까지 수많은 시련이 있었다는 걸 안다. 그중 하나가 민주주의이고, 민주주의의 꽃 선거. 특히 여성과 흑인의 참정권은 민주주의가 자리를 잡고 나서도 오랫동안 주어지지 않았다. 여성의 경우 그 어떤 참정권 운동보다 길었다. 결정적으로 과격했다. 마틴 루터 킹 목사의 비폭력 투쟁과 결이 완전히 반대인바, 그녀들의 이야기를 어떻게 읽고 받아들여야 하는지 망설이지 않을 수 없다.


흔한 여성 노동자가 용기 있는 선택을 하기까지


영화는 세탁공장에서 일하는 흔한 여성 노동자인 모드 와츠(캐리 멀리건 분)가 남성 고용주의 부당한 심부름(남자가 해야 하는 일을 떠맡김)을 가는 도중 서프러제트에 의한 폭력 활동을 목격하며 시작된다. 이후 세탁공장에서 일어나는 여러 남녀차별에 차츰 눈을 뜬다. 우연히 엉겁결에 의회에서 증언을 하게 되는 모드, ‘인생을 바꿀 수 있을 것 같아서증언했다는 진심어린 말이 여기저기 회자된다. 때문에 정부에서 찍은 요주의 인물이 된다.



세탁공장에서 일하는 흔한 여성 노종다인 모드 와츠는 우연히 서프러제트의 폭력 활동을 목격한다. 이후 세탁공장에서 일어나는 여러 차별에 차츰 눈을 뜬다. 영화 <서프러제트>의 한 장면. ⓒUPI코리아



여성 참정권 가부 발표가 있던 날 현장에 참여했다가 체포되는 모드, 감옥에서 여성의 굴욕을 맛보고는 발을 빼려 한다. 하지만 더 심해진 차별을 보고 다시 현장으로 향한다. 그때 에멀린 팽크허스트의 연설을 듣고 감화된다. ‘물러서지 말아요, 끝까지 싸웁시다, 우리는 이길 거예요. 노예가 되느니 반역자가 됩시다!’ 한 번 더 잡혀갈 위기에 처한 모드, 그런데 감옥이 아닌 집 현관으로 끌고 가는 게 아닌가? 남편한테 맡기면 알아서 할 거란 말과 함께.


남편의 행동에서 여성 참정권 운동의 진정한 적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정부가 행하는 폭력에 비할 바가 아니다. 남편은 그녀를 쫓아내고는 아이를 혼자 키울 자신이 없다는 이유로 입장 보내 버린다. 남자인 남편의 머릿속에 뿌리박힌 사상, “‘아내이고 아이의 엄마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녀들이 맞서야 했던 건 참정권이 아니라 세상 거의 모든 남자, 나아가 여자들에게도 뿌리박힌 그와 같은 사상이었다.


그로부터 100년이 훌쩍 지난 지금은 달라졌을까. 지금은 물론 여성에게도 참정권이 있다. 그러나 문제는 그게 아니다. 참정권은 돌아갔지만, 뿌리 깊은 사상은 아직 인 것 같다. 여전히 여자를 남편의 아내이자, 아이의 엄마로만 생각한다. 아직 갈 길이 멀다.

 

가장 효율적으로 강한 목소리 내기, '폭력'

 

쫓겨난 모드가 갈 곳은 서프러제트 일원의 집뿐이다. 그녀를 온전히 이해하고 받아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가족에게까지 한순간에 내팽개쳐진 그녀는 서프러제트 활동에 매진한다. 아무도 그녀들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는 상황, 가장 뼈아픈 건 같은 여성들도 마찬가지라는 사실이다. 대다수 여성들은 위험을 무릎 쓰고 현실을 바꿀 마음이 없다. 그렇게 태어나 그렇게 살다가 가는 게 운명이니 하고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20세기 초 영국, 50년 동안 계속된 여성 참정권 운동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끄떡없다. 운동에 참여한 여성들은 과격해진다. 정부가 유일하게 이해하는 말이 ‘폭력’이기 때문이다. 서프러제트는 '말이 아닌 행동으로’라는 급진적 구호를 내걸고 활동한다. 영화 <서프러제트>의 한 장면. ⓒUPI코리아



남은 건 뭘까. 격렬히 시위하고 유리창을 깨고 의회에 청원해도 그녀들의 목소리는 속절없이 묻히지 않는가. 정부는 그 행위를 관심을 얻어 보려는수작으로 치부하고 만다. 그렇다면 남은 건 차원을 달리하는 행동이다. 그들이 행하는 짓보다 더한 행위, 힘없고 무능하다고 여기는 여성이 보여줄 수 있는 가장 유능한 행위인 폭력말이다. 그것도 생각하기 힘든 폭력.

 

폭력은 격렬한 고민을 수반한다. 아니, 반드시 수반해야 한다. 폭력이라는 건 인간이 하지 말아야 할 가장 악랄한 행동이기 때문이다. 서프러제트는 폭력을 목소리로 인지했다. 가장 효율적으로 강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방편으로 말이다. 그 대상이 다름 아닌 남성이었기에.

 

지금 한창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는 페미니즘과는 결이 다르다는 걸 말할 필요가 있겠다. 여성 참정권 운동이 페미니즘에 속해 있긴 하지만, 여성 참정권은 겉으로 드러난 활동이자 시작일 뿐이다. 거기서 끝나는 건 아무 것도 아닌 것과 다름없다. 진정 쟁취할 건 남녀평등에 있겠다. 아직 여러 면에서 남녀평등은 실현되지 않았다.

 

올바른 일이라면 행동하라

 

남녀평등에 대해 말할 때 굉장히 조심하는 편이다. 남성과 여성의 차이를 말할 때는 가끔 말을 더듬기도 할 정도다. 조심도 조심이지만, 스스로 남녀평등에 대해 절대적이리만치 선을 그어놓고 있기 때문이다. ‘남자는-’ ‘여자는-’이라는 말 자체가 나오지 않아야 하지 않겠냐는 생각 말이다. 그런데 그게 정말 쉽지 않다. 남자를 옹호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곤 한다. 특히 민감한 사항인 군대, 결혼 얘기가 나올 때가 그렇다.

 

여자들이 여자니까 ~일 수밖에 없다는 식으로 말할 때 받아들이기가 힘들다. 영화에서 남자들의 생각에 당연한 듯 동조하는 여자들의 심리처럼 말이다. 그런 이들이 남녀평등을 외치면서 남자는~’이라고 말하면 내 머릿속에서 남녀평등이 흔들리곤 하는 것이다.


요즘 페미니즘에 관해 수많은 논란이 오고간다. 이 영화는 그 시작이 성스러웠음을 보여준다. 비록 폭력을 동반했지만, 합당한 권리를 찾기 위한 그들의 행동은 지극히 당연했다. 영화 <서프러제트>의 한 장면. ⓒUPI코리아


 

영화는 그런 나의 고민을 붙들어 주었다. 다른 건 생각하지 않은 채 오로지 여성 참정권을 되찾기 위해 전진하는 그녀들의 모습이 성스럽게 다가왔다. 올바른 일이라면 행동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 같다. 물론 거기엔 많은 고민과 고충이 뒤따르겠지만, 실제로 뒤따랐겠지만 적어도 영화는 그렇게 보여주지 않았다. 행동만이 필요할 때가 있다는 걸 인정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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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genv

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