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리뷰] <열두살 샘>


공고롭게도, 열두살 때 백혈병으로 친구를 잃었다. 영화 <열두살 샘>은 백혈병으로 죽음을 앞둔 열두살 샘의 이야기이다. ⓒ㈜미디어데이



어린 시절, 친구 몇 명을 잃었다. 12살 때 반 친구가 백혈병으로 하늘나라로 갔고, 13살 때 동네 친구가 교통사고로 세상을 떴다. 중학생 때는 함께 놀던 다른 반 친구가 무슨 연유 때문인지 기억내지 않는 이유로 죽었다. 12살 때는 증조할머니도 돌아가셨던 것 같다. 그보다 어렸을 땐 외할머니이 돌아가신 모습도 봤고. 그때마다 충격으로 울음을 감추지 못했었다. 그런데, 그 울음은 슬픔이 아닌 공포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 사람을 다신 볼 수 없다는 슬픔이 아닌, 내가 죽음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는 공포 말이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그 공포는 중학생이 되기도 전부터 나를 괴롭혀 온 것 같다. '죽음이 뭐지, 죽으면 어떻게 되지, 죽으면 어디로 가지' 등, 그 어린 나에게 그보다 두려운 건 아무것도 없었다. 


12살 때 백혈병으로 앓다가 세상을 떠난 친구는 아직도 생생하다. 반에서 함께 공부하던 친구가 어느 날 갑자기 백혈병으로 학교에 나오지 못했고 상태가 호전되지 않는다는 소식을 들었으며 결국 영원히 우리 곁을 떠났다는 소식까지. 우리 반 전체는 친구를 기리며 묵념하고 울었다. 그 친구의 자리에는 꽃이 놓였다. 


죽음을 앞두고도 '용기' 있는 열두살 샘


샘에겐 상상 못할 '용기'가 있다. 삶보다 죽음이 가깝지만, 누구보다 삶과 가까이 있는 듯하기 때문이다. ⓒ㈜미디어데이



영화 <열두살 샘>은 백혈병에 걸려 죽음을 앞둔 12살 샘의 이야기다. 너무 공교롭게도 나의 경험이 반쯤 완벽하게 투영되어 있어 놀라기도 했는데, 한편 그 불편한 기억을 조금은 좋은 쪽으로 희석시킬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이 영화는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죽음과 처절히 싸워 이기는 내용이 아니라, 죽음에 직면해 오히려 삶에 더 가까이 가고자 하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 용기가 영화의 포인트다. 


열두살에 불과한 샘, 백혈병으로 시한부 선보를 받은 상태다. 85%의 완치 확률을 자랑하는(?) 백혈병이지만 샘은 세 번이나 재발했고 두 번 항암치료를 받았다. 그는 완치되지 못했고 1년 안에는 이 세상에 없을 것이다. 샘은 병원에서 만난 절친 펠릭스와 죽기 전에 꼭 해보고 싶은 버킷리스트를 만든다. 


세계 신기록 깨기, 에스컬레이터 거꾸로 올라가기, 공포영화 보기, 담배 피기, 술 마시기, 진하게 키스하기, 여자친구 사귀기, 과학자 되기, 비행선 타기, 귀신 보기, 우주선 타고 별 보기. 샘은 펠릭스와 함께, 혼자서, 아빠와 함께, 여자친구와 함께 결코 쉽지 않을 것 같은 이 모든 버킷리스트를 실행에 옮긴다. 


한편, 가장 마음에 걸리는 건 다름 아닌 '아빠'. 아빠는 아픈 샘을 마치 외계인 보듯이 한다. 아빠의 투철한 이성이 반드시 죽음으로 치닫는 백혈병에 걸린 샘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거기엔 이성이 아닌 감성이 필요한 부분이 있을 텐데 말이다. 과연 샘과 아빠는 선을 넘을 수 있을까? 그리고 먼저 세상을 떠나게 된 펠릭스, 죽음 앞에서도 명랑했던 샘에게 위기가 찾아온다. 잘 이겨내고 끝까지 용기를 지닐 수 있을까?


핵심을 찌르는 한마디, "신파는 아니겠지?"


이 영화, 신파가 아니다. 통통 튀기까지 하는데, 그게 감동을 자아낸다. 묘하다. ⓒ㈜미디어데이



죽어가는 자신의 이야기로 일기를 쓰고 영상으로 남기는 샘, 그 사실을 알게된 아빠와의 단문단답이 의미심장하면서 영화의 핵심을 찌른다. 이런저런 얘기가 끝나고 방을 나가기 전에 아빠가 묻는다. "사랑 무지개로 가득 찬 질질 짜는... 신파는 아니겠지?" 샘이 질색하며 "아니에요."라고 답하니, 아빠가 씨익 웃으며 "다행이다."라고 하고는 나간다. <열두살 샘>은 신파가 아니라는 거다. 


12살 어린 나이의 아이가 죽어가는 데 신파가 아닐 수 있다? 가장 우선적으로 당사자가 대단한 용기를 지녀야 한다. 그런데, 12살이면 나도 그랬듯이 죽음에 대한 공포를 충분히 느낄 수 있는 나이다. 공포로 벌벌 떨며 잠 못이룰 수 있는 나이인 것이다. 그런데 샘은 어찌 죽음에 초연하다 못해 유머러스할 수가 있을까? 영화라서?


먼저, 시간적으로 영화가 시작되기 전에 이미 세 번의 재발과 두 번의 항암치료를 겪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항암치료는 차라리 죽고 싶을 정도로 극심한 고통을 동반한다고 알려져 있기에, 그걸 뚫고온 샘에게 죽음은 차라리 친숙한 존재일수도 있는 것이다. 그건 펠릭스도 마찬가지. 그래서 옆에서 지켜보는 부모님들이 더 힘들어 한다. 


그리고 학교를 가지 못하는 그들을 위해 특수교육가정교사가 주기적으로 오는데, 그 시간이 그들에게 크게 작용한다. 버킷리스트를 작성하고 실행에 옮기는 것도, 샘이 자신의 이야기를 책으로 쓰고 영상으로 옮기는 것도 다 그 시간 덕분인 것이다. 교사는 그들에게 조심스럽지만 결코 숨기지 않고 말해준다. 삶과 죽음에 대해서 말이다. 


"결국 인류는 영원한 삶이란 불가능하단 걸 깨달았지. 하지만 우리는 뭔가를 영원히 남길 수 있단다. 바로 예술 작품이야."


'죽음'이 아닌 '삶'으로의 강한 끌림


결국, '삶'이다. 죽으면 모든 게 끝나니 사랑도 뭣도 필요 없다고 할지 모르지만, 샘은 첫사랑에 설렌다. 내가 나일 수 있는... ⓒ㈜미디어데이



영화는 일종의 파트가 나뉘어져 있는데, 샘이 던지는 정답이 없는 문제와 그에 대한 나름의 답에 따라서다. 죽음에 대해서 어린 아이답지만 굉장히 원론적이고 진지한 질문이다. 예를 들면, '죽으면 아플까?' '사람은 왜 죽어야 할까?' 등이다. 과학적으로 또는 종교적으로 접근하면 나름의 답을 찾을 수 있는 문제들이다. 하지만 정작 죽음에 직면했을 때 그런 답들이 무슨 소용 있겠는가. 그럼에도 답을 찾으려는, 정답이 없는 줄 알면서도 답을 찾으려는 샘의 행동은 삶으로의 강력한 끌림 때문이겠다. 


우린 이 영화로 '죽음'이 아닌 '삶'을 본다. 어린 아이의 치기어린 호기심으로 별 의미 없고 허접한 죽음 이야기를 듣는 게 아니라, 어엿한 인간의 진심어린 고민과 치열하고 고등한 삶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다. 그 어디서도 얻을 수 없는 고귀한 삶의 투쟁을 지켜볼 수 있다. 


그렇다고 이 영화를 보고 삶 또는 죽음에 대한 정답을 찾을 수는 없다. '정답은 없다'는 정답만 찾을 수 있을 뿐이다. 다만, 방향은 어렴풋이 짚어볼 수 있을 것 같다. 일종의 균형 감각이라고 할까. 삶과 죽음, 죽음과 삶을 그 어느 것도 멀리 하지 않고, 모두 끌어안되 내가 나일 수 있는 방법을 계속 강구하고 실행에 옮기는 것이다. 


삶에도 죽음에도 매몰되지 않고 '나'를 이어나간다는 게, 추상적이기도 하거니와 인지한다고 해도 굉장히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영화를 보면, 그게 무엇인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어렴풋이나마 알게 되지 않을까 싶다. 막상 죽음이 닥치면 그게 가능할까 심히 의문이 들지만, 또 못할 게 무언가 싶기도 하게 만드는, 그런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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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리뷰] <캡틴 판타스틱>


숲 속으로 들어간 '캡틴 판타스틱' 벤과 6명의 아이들, 그들에게서 대안적 삶과 교육의 완벽한 모습이 엿보인다. 이들에게 어떤 앞날이 펼쳐질까. ⓒ(주)더쿱



어딘지 알 수 없는 깊은 숲 속, 누군가가 사슴과 대치하고 있다. 달려들어 사슴의 목을 베는 그. 새카맣게 칠한 얼굴에 뭔가 이루었다는 표정이 읽힌다. 곧 근처에서 숨어 있던 사람들이 나온다. 다들 어리다. 그리고는 어른 남자 한 명이 나와 사슴의 심장을 빼낸다. 사슴을 쓰러뜨린 이의 얼굴에 피를 바르며 심장을 먹게 하곤 '이제 비로소 어른이 되었다'는 식의 말을 건넨다. 숲 속 부족의 성인식 같다. 


첫 장면만으로는 영화의 성격을 전혀 알 수 없는 이 영화, <캡틴 판타스틱>이다. 알고 보니 그들은 한 가족, 아버지와 아이들 6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숲 속 부족이 아닌, 숲 속으로 들어간 가족이다. 6명의 아이들은 아버지 '캡틴 판타스틱' 벤의 철처하고 완벽한 통제 교육 하에 훈련, 책읽기, 음악, 토론, 생존 등에서 한계 이상의 능력을 뽐낸다. 그 기저에는 현재 '바깥 세상'에 대한 깊은 불신과 좌파적 이상주의가 깔려 있다. 


아이들을 위한 대안 교육, 올바르고 제대로 된 인생을 위한 대안 삶의 완벽한 모습이 엿보인다. 아무래도 벤이 절대적인 신념 하에 기획하고 결정하고 실행에 옮긴 삶인 듯, 아이들도 군말 없이 힘들고 어렵고 격렬한 아버지의 교육 방식에 따른다. 첫째의 미국 유수 대학 합격 소식과 넷째의 반항아적인 기질이 불안하지만, 캡틴 판타스틱의 카리스마를 따르지 않을 도리가 없어 보인다. 이들에게 어떤 앞날이 펼쳐질까. 


누구나의 '인생 영화'가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재미, 메시지, 연기, 내용, OST, 그리고 결말까지 완벽한 영화 <캡틴 판타스틱>. '인생 영화' 리스트에 올리는 것에 주저함이 없을 줄 안다. ⓒ(주)더쿱


영화를 본격적으로 소개하기에 앞서 말하고자 하는 건, 이 영화가 누구에게나 '인생 영화'가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거다. 출중한 영화적 재미로 시간가는 줄 모르게 보고, 그리 어렵지도 그리 쉽지도 않은 메시지가 단번에 전해지고, 연기와 내용과 OST까지 완벽하며, 무엇보다 너무나도 '조화'로운 결말이 가슴을 치며 깊은 여운을 남길 것이다. 한 콘텐츠에서 파격의 불안감과 혁신의 환희를 엿볼 수 있다는 게 기적이다. 


완벽할 것 같은 이 가족에게도 큰 위기가 닥친다. 어느 정도 예견된 위기인데, 바로 엄마의 부재다. 3주나 넘게 돌아오지 않고 있는 엄마, 비록 아버지의 통제 하에 철저히 시간을 보내고 있기에 걱정 없어 보이지만 아이들은 엄마가 그립다. 벤은 시내로 가서 부인의 소식을 듣는다. 정신병에 걸려 동생 집에 지냈던 부인이 자살했다는 소식을. 


아이들에게 알리는 벤, 울부짓는 아이들, 급기야 넷째는 아버지가 엄마를 죽게 했다며 분노한다. 오랫동안 세상과 동떨어진 삶으로 미쳐서 자살을 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그래도 해야 할 일은 해야 한다. 다시 벤의 통제 하에 교육 받는 아이들. 기존의 한계를 넘는 힘듬에 불안, 불만, 그리움 등이 스며든다. 머지 않아 와해될 것 같은 흔들림이 보인다. 


와중에 부인의 유서를 읽는 벤, 딸의 장례식에 오면 경찰을 부르겠다는 분노 어린 장인어른의 말을 무시하고 아이들과 함께 장례식장으로 향한다. 바깥 세상의 횡포에 맞서, 엄마를 '구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서 엄마를 이해할 수 있는 이들은 그들 뿐이다. 이 행동은 그들의 삶에 턴포인트가 될 것이다. 유서는 '절대 매장은 안 된다. 불교식으로 화장해달라. 뼛가루는 변기에 내려달라'는 내용이었다. 그들은 엄마를 구하는 데 성공할까? 


'버릴 건 버리고 취할 건 취하는 것'의 어려움


완벽해 보이는 벤의 가족들이지만, 그들은 참으로 극단적이다. 바깥 세상 사람들도 그들의 방식을 '틀렸다'고 하지만, 그들 역시 바깥 세상 사람들의 방식을 '틀렸다'고 한다. 다를 바가 없지 않나? ⓒ(주)더쿱


멀고먼 길을 떠난 이 가족, 제대로 된 바깥 세상 구경이 처음인 듯하다. 많은 걸 보고 느끼고 겪는 아이들, 벤이 생각하지 못한 또 다른 교육의 시작이다. 현대인들의 삶과 교육에 대한 벤의 극단적인 대안 방식, 바깥에 나오니 그들이 '틀린' 것 같다. 가족들도 그들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들 또한 바깥 세상을 인정하지 못한다. 자신들이 훨씬 더 우월하고 또한 올바르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잘못된 삶을 살고 잘못된 교육을 받고 있는 것이다.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지 못한 채 더 심한 극단으로 치달을 것만 같다. 


세상에 완벽한 건 없다. 완벽하려고 노력하는 것, 완벽한 듯 보이는 것만 있을 뿐이다. 분명 벤의 가족은 완벽에 가깝다. 육체, 정신, 지혜, 지식 면에서 또래 아이들이 절대 따라올 수 없는 능력을 뽐내고 있는 것이다. 단적으로 첫째가 미국의 최고 대학들에 모두 합격하지 않았는가. 물론 아버지 몰래 따로 교육을 받았겠지만, 그 기반은 분명 아버지의 교육 덕분이지 않은가. 그런데 완벽하진 못하다. 


6명의 아이들 중에서도 모든 면에서 완벽에 가까운 첫째, 그의 바깥 세상 체험은 충격적이었다. 자신이 받은 교육으로는 바깥 세상을 설명할 수도, 바깥 세상에서 잘 살아갈 수도 없는 것이다. 그는 말한다. 책으로 모든 걸 설명할 순 없다고, 아니 정말 사소한 것조차 설명할 수 없을 때가 많다고, 자신은 우물 안 개구리조차 되지 못한다고. '다름'의 대안을 넘어선 '틀림'의 극단이 불러온 폐해다. 


'올바른' 극단이 '올바르지 못한' 극단을 만나 혼란에 빠진다. 곧 수습하고는 더욱더 확고한 올바름으로 나아간다. 하지만 발견해낸다. 아니, 발견해내야 한다. 자신들이 무조건 올바르지 않다는 걸. 올바르고, 올바르지 못한 건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정녕, 굳이, 그들이 올바르다는 걸 증명하려면 스스로 만든 프레임에서 벗어나 '다름'의 시선을 장착해야 한다. 그렇지만 참 어려울 거다. '버릴 건 버리고, 취할 건 취한다'는 게. 


이 영화가 전하려는 '조화'의 모습


이 영화의 위대한 점은 '조화'에 있다. 어느 모로 보나 완벽에 가까워 보이는 가족을 끌어내리는 꼴이 아니라, 성장의 방정식으로 더 완벽해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정녕 어려운 것일 텐데. ⓒ(주)더쿱



끊임없이 소용돌이 치는 머릿속, 어떤 교육이 필요할까.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 벤의 신념이 투영된 교육 방식이 정녕 완벽해 보인다. 비단 교육뿐 아니라 삶까지도. 문명 이전에, 인간 본성에 가까운 삶인 것 같다. 올바르고 훌륭해 보인다. 그런데, 이미 문명은 발달할 대로 발달해 있다. 너무나도 올바르고 훌륭하고 완벽한 그들은 바보가 될지 모른다. 그들은 '위대'하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이 완벽한 '정답'일 수 없다. 


그러면 우리의 삶은, 현대인 대다수의 삶은 어떨까. 누군가는 충만한 행복으로, 누군가는 불만어린 시선으로, 누군가는 회의와 만족의 모순으로 살아간다. 아마 공통적으로, 자신에게, 자신이 속해 있는 사회에게, 인류 문명 전체에게 비웃음을 날릴 것이다. 속물들이라고, 비인간적이라고, 형편없다고. 인류는 결코 만물의 영장일 수 없다고. 그렇지만, 그렇다고, '틀린' 건 아니다. 위대하지도 않고 정답하고는 한참 거리가 멀다고 해도 말이다. 오히려 수많은 사람들의 생각과 고민이 있기에, 극단을 멀리할 수 있다. 균형 감각과 다양성이 있다. 


오래 전부터 '상대적' '조화'라는 말을 신념 비슷한 걸로 삼아왔다. 이를 추구하고 이를 실행에 옮기려고 노력해왔다. 하지만 어떻게? 어떤 식으로? 내가 할 수 있는 게 있을까.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발견했다. 그 방법을, 그 모습을. 다름 아닌 영화 <캡틴 판타스틱>이 전하려는 '조화'의 모습이다. 


버릴 건 버리고 취할 건 취하고. 자신의 극단적 신념에서 '다름'을 '틀림'으로 인지하게 만드는 요소들을 버리고, 그 자리에 '다른 것'들의 괜찮은 요소들을 배치한다. 올바르고 훌륭하고 완벽해 보이는 것들은 가지고 가되, 그로 인해 출현하는 절대적이고 적대적인 배제와 자만심을 버리는 것이다. 그 반대도 가능하다. 특유의 균형 감각과 다양성에 올바르고 훌륭하고 완벽해 보이는 것들을 최대한 흡수하는 것이다. 추상적이고 이상적이라고? 그럼 여기에 디테일하고 회의적인 면을 장착하면 되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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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줄리에타>


<줄리에타> 포스터의 두 여인은 사실 한 명이다. 젊을 때의 줄리에타와 중년의 줄리에타. 젊은 줄리에타를 분한 아드리아나 우가르테는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의 새로운 뮤즈로 손색이 없다. ⓒ(주)쇼미미디어앤트레이딩



줄리에타는 로렌조와 함께 마드리드의 삶을 청산하고 포르투갈로 떠나려 한다. 그러나 그녀의 얼굴엔 알 수 없는 수심이 가득한 바 어떤 사연이 있는 것 같다. 아니나 다를까 길을 가던 중 우연히 마주친 베아, 베아로부터 우연히 듣게 된 딸 안티아의 소식을 듣는다. 12년 만에 듣게 된 딸의 소식에 줄리에타는 포르투갈로의 이주를 취소하고 딸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한다. 쉽게 꺼낼 수 없었던 자신의 과거를 구구절절 풀어놓기 시작하는 것이다. 마치 그것이 딸을 향한 사죄의 시작인 양. 


스페인의 거장이라고 일컬어지는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의 신작 <줄리에타>는 줄리에타가 딸에게 쓰는 편지와 편지를 쓰는 현재가 교차되는 형식을 취한다. 당연히 그 중심에는 줄리에타가 있고 감독은 줄리에타의 삶을 통해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한다. '여성' '사죄' '욕망' 등과 과거와 현재, 문학과 신화가 뒤엉켜 상당히 복잡다단한 이 영화는, 상징으로 표출되는 메시지와는 다르게 이야기 자체는 그리 복잡하지 않다. 


여성으로서의 삶을 중심으로 주요 줄기들을 살펴보면 될 것이다. '이런 삶도 있구나' 하는 생각보다는 '삶에서 이런 층위를 발견할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이 더 들지 않을까, 싶다. 필자가 편지를 쓰며 과거를 회상하는 중년 여성도, 회상 속 20~40대 여성도, 그렇다고 줄리에타의 딸 안티아처럼 '여성'이 아니지만, 그녀들의 삶을 이해하고 싶은 이 중에 하나인 바 최선을 다해 들여다보고 싶다. 


줄리에타를 따라다니는 삶과 죽음의 운명


원색의 색채, 그리고 색채들의 선명한 대비는 삶과 죽음의 강렬한 대비를 전한다. 평생 줄리에타를 따라다닐 운명 말이다. 그녀는 그 속발을 풀 수 있을까. ⓒ(주)쇼미미디어앤트레이딩


때는 1980년대, 대학에서 고전문학 강사로 있는 젊은 줄리에타, 난해한 패션의 소유자이지만 미모는 가려지지 않는 그녀, 야간기차를 타고 여행 중이다. 그녀 앞에 난데 없이 나타난 나이든 남자가 말을 건다. 너무 싫었던 줄리에타는 그의 말을 무시하다시피 한 후 레스토랑 칸으로 자리를 피한다. 그곳에서 운명처럼 만나게 된 소안, 그들은 서로에 대한 호감 속에서 다양한 이야기를 나눈다. 아픈 아내를 몇 년 동안 간호해 왔다는 소안. 거기에 어떤 특별한 감정을 느끼는 줄리에타. 


얼마 후 일어나게 된 끔찍한 사고, 줄리에타가 무시한 나이든 남자가 자살을 한 것. 줄리에타는 죄책감에 시달리지만, 곧 소안과의 육체적 관계로 해소한다. 그렇게 일상으로 돌아왔지만 얼마 후 받게 된 소안의 편지로 그를 찾아가고 그들은 곧 함께 한다. 기차에서의 관계로 얻게 된 아이 안티아도 함께. 기차에서 겪은 죽음은, 새로운 생명과 삶으로 잊혀진다. 행복한 나날을 보낸다. 하지만 비극은 그녀를 빗겨가지 않는다.


영화 초반, 원색의 색채 그리고 색채들의 대비로 죽음과 삶의 강렬한 대비를 전한다. 그 둘이 줄리에타의 삶을 따라다니며 곧 그녀의 삶을 규정하는 바, 기차 장면은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볼 수 있겠다. 기차는 일상에서는 생각하기 어려운 여러 가능성들이 존재한다. 한정된 곳에서 타에 의해 정해진 사람과 함께 해야 하는 바, 운명적 요소가 굉장히 진하다. 줄리에타도 그 운명적 소용돌이에 휩싸인 것이다. 


그렇게 시작된 운명의 열차는 그녀를 계속 따라 다닌다. 누구라도 마찬가지다. '내가 어떻게 여기까지 와서 왜 이러고 있는 거지?' 하고 생각하며 유추해 따라 올라가다 보면 태초에 시작된 운명의 문이 거기 있다. 문이 여전히 거기에 있는 건 알겠는데, 찾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줄리에타는 운명이 선사한 지독히 속박에 갇혀 헤어나기 힘들어 하고 있다. 로렌조가 보낸 구원의 손길도 어쩌지 못한다. 스스로만 풀 수 있을 뿐.


일반적일 수 없는, 애증의 모녀 관계


개인적으로 이 영화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부분이 줄리에타와 안티아의 모녀 관계다. 일반적이지 않은, 일반적일 수 없는 애증의 관계. ⓒ(주)쇼미미디어앤트레이딩



비극은 느닷없이 찾아왔다. 줄리에타에겐 누워 지낸 지 오래된 엄마가 있다. 오랫동안 그녀를 보살핀 아빠도 있다. 그리고 엄마 대신 집안 일을 하게 된 여자도 있다. 줄리에타는 아이와 함께 부모님 댁을 방문하는데 아빠와 여자의 야릇한 분위기를 감지하고 모습도 목격한다. 역겨움을 느끼는 줄리에타, 하필 그때 즈음에 소안이 예전 아내가 아팠을 적에 그의 절친 아바와 적절치 못한 관계를 맺은 적이 있다는 걸 알게 된다. 


싸늘하게 소안을 물리는 줄리에타, 소안은 어부로서 할 일을 하러 나가지만 곧 폭풍우가 몰아친다. 소안은 싸늘한 주검으로 돌아오고, 줄리에타는 옛날 기차에서의 죽음이 겹쳐 죄책감이 되살아난다. 어느새 큰 안티아에게 그 사실을 알리고는 얼마 지나지 않아 우울증으로 어린 안티아에게 삶을 위탁하다시피 하는 신세를 진다. 참으로 오랫동안 신세를 지고는 정신을 차린 줄리에타. 어린 안티아는 이제 다 커서 18살, 부모 곁을 떠나야 하는 때가 되었다. 줄리에타에게 또 다른 시련이 찾아오는데...


새로운 생명과 삶으로 잊힌 죽음의 그림자가 다시 한 번 그녀를 덥친 건, 그녀로서는 어찌해볼 도리가 없는 것이었다. '잃음'의 트라우마, 그 트라우마는 간신히 회복한 그녀를 또다시 후려친다. 이번엔 딸의 독립으로. 그녀는 도무지 앞으로 나아가기가 힘들다. 현재는커녕 과거에 머무르기도 힘들다. 모든 것에서 벗어나고 싶은 것이다.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딸의 존재를 확인하는 것. 


개인적으로 <줄리에타>에서 기억에 남는 부부은 줄리에타와 안티아의 관계다. 자신으로 인해 저질러 졌다고 믿는 두 명의 죽음을 잊을 수 있게 해줄 정도의 존재가 그녀에게는 딸 안티아다. 우연치 않게 홀모 밑에 살았다는 딸의 말을 들어볼 기회가 있었는데, 그녀에게 엄마는 '애증'의 존재 그 자체라고 한다. 이 세상에서 없어선 안 될 단 하나의 존재처럼 인식하면서도, 이 세상에서 가장 멀리하고 싶은 단 하나의 존재처럼 인식한다는 것이다. 


그건 엄마에게는 해당되지 않을 거다. 일반적인 엄마와는 달리, 그녀에게는 이 세상 다 하는 날까지 함께 해야 하는 존재가 딸이다. 딸의 인생에 몹쓸 짓을 했다는 죄책감까지 더해진 최선의 사랑이자 모성애다. 하지만 딸에게는 최악의 사랑이 될 수도 있다. 그건 곧 엄마에게 돌아가 빙퉁그러진 모성애로 나타날 수 있다. 


문제는, 이런 경우 엄마와 딸은 서로의 감정을 너무 생각하기에 서로의 삶에 대한, 그리고 서로에 대한 진지한 대화를 해보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니, 못할 것이다. 어떤 말을 하든 상처가 될 것이기 때문에, 그걸 누구보다 서로가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침묵'은 갈수록 영화를 침식한다. 그리고 침묵은 '잠적'으로 확대된다. 잠적은 곧 '관계의 끝'으로 치닫는다. 더이상 어떤 인생이 남아 있나. 


줄리에타는 딸과 재회해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율리시스가 폰투스를 건너 이타카 섬으로 10년 만에 돌아와 아들과 재회한 것처럼, 줄리에타도 12년 만에 딸의 소식을 접하고는 재회할 수 있을까? ⓒ(주)쇼미미디어앤트레이딩



아무리 80년대라지만 이해하기 힘든 패션, 그럼에도 그녀가 '고전문학' 강사인 건 무슨 이유가 있을 것이다. 감독이 의도했다는 게 조금, 아니 상당히 드러나는 부분인데 그녀가 강의하는 내용이 그녀 자신의 삶에 대한 은유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다름 아닌 '율리시스' 이야기. 


율리시스는 망망대해를 헤매다가 여신 칼립소를 만나 살다가, 영원한 젊음과 영생을 주겠다는 제안을 뿌리치고 폰투스를 건너 이타카 섬으로 돌아왔다. 그렇게 율리시스는 10년 만에 아들과 재회한다. 영화에서 소안은 줄리에타와 만나 살지만, 바다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한편 줄리에타는 12년 만에 딸의 소식을 접하기도 한다. 복잡다단한 층위를 이루는 이 영화에서 '율리시스' 모티브는 단연 정점이다. 


줄리에타는 딸과 재회할 수 있을까?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아니, 만약 그녀들이 재회한다면 다신 예전으로 돌아가기 싫을 것이다. 또다시 불행해지기 싫을 테니까. 이제는 오랜 침묵을 깨고 서로를 알기 위해 노력할 게 분명하다. 12분 마다, 12시간 마다, 12일 마다, 최소한 12개월 마다는 재회하는 우리들은 어떨까. 서로에 대해서 잘 알까? 잘 알고 싶어나 할까? 상실을 경험해야 슬픔을 알까. 


줄리에타를 응원한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엄마와 딸을 응원한다. 이 시대의 모든 여성을 응원한다. 아니다, 사랑과 모성애는 엄마만, 여성만 느끼는 게 아니다. 그럼으로 이 시대의 모든 인간을 응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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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리뷰] <포레스트 검프>


내 인생, 최초의 '제대로' 된 영화 <포레스트 검프>. 그전까지 영화가 그저 아무 의미 없는 영상이나 다름 없었던 내게, 이후로 '영화 세계'가 열렸다. ⓒ파라마운트



영화를 몰랐던 10대 시절에 우연히 주옥 같은 영화들을 만났다. 중학교 3학년 음악 시간에 선생님께서 보여주셨던 <아마데우스>, 고등학교 3학년 때 집에서 공부하다가 잠깐 쉬며 TV 채널을 돌리다가 마주한 <와호장룡>. 그들은 아마 영원히 나를 구성하는 중요한 기재로 작동할 것이다. 


'넌 언제부터 본격적으로 영화를 보게 되었니?'라고 누군가 물어 왔을 때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영화는 따로 있다. 때는 중학교 2학년 어느 주말이었던 것 같다. 큰 이모네가 놀러 왔다. 큰 이모 내외는 우리 부모님과는 다르게 영화나 음악에 일가견이 있었다. 큰 이모부가 나와 동생을 데리고 도서·비디오 대여점에 갔다. "너네 혹시 이 영화 봤니? 안 봤으면 오늘 빌려가서 꼭 봐야해"라며 건네는 영화, <포레스트 검프>였다. 


20여 년 전의 장면이지만 아직도 생생한 건 그 이후로 내게 '영화 세계'가 열렸기 때문이다. 그전까진 아예 존재하지 않던 세계였다. 큰 이모부의 추천 덕분이었는지, 영화가 너무 좋았기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다. 아마 둘 다 영향을 끼치지 않았을까. 영화라는 건 그저 보기만 하는 거였다. 가타부타 말을 할 이유도 없었고, 할 말도 없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나에게 영화는 그저 아무 의미 없는 영상이나 다름 없었다. 


달리기로 달라지는 인생


<포레스트 검프>는 1994년에 개봉했고 22년 만에 재개봉한다. 명장 로버트 저메스키 감독에 명배우 톰 행크스가 열연했다. 대대적인 흥행과 대대적인 호평, 그리고 대대적인 상복이 뒤따랐다. 명실상부한 90년대 최고의 영화 중 하나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 영화로 '영화 세계'에 입문하게 되었으니, 나는 참 복 받은 것 같다. 22년만에 재개봉을 하게 되었는데, 많은 이들에게도 이 영화가 특별했으면 좋겠다. 


선천적으로 걸을 수조차 없었던 포레스트 검프, 제니의 한마디 "달려! 포레스트!"로 달리기 시작한다. 이후 그의 인생이 달라진다. ⓒ파라마운트



IQ 75에 척추가 활처럼 휘어 걷지 못하는 아이 '포레스트 검프', "넌 남들과 다르지 않아, 명심하렴"을 주문처럼 아이에게 말해주는 엄마 덕분에 보통 학교에 들어간다. 등교 첫날, 스쿨 버스에서 아무도 자리를 함께 하려 하지 않을 때 "앉고 싶으면 앉아도 돼"라는 '제니'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이후 포레스트와 제니는 실과 바늘처럼 언제나 함께 다닌다. 


어느 날, 여지 없이 포레스트를 괴롭히는 아이들이 나타나 돌멩이를 던진다. 그때 포레스트의 인생을 바꾼 제니의 한마디가 울려퍼진다. "달려! 포레스트, 달려!" 포레스트는 자전거를 타고 쫓아 오는 아이들을 따돌리려 사력을 다한다. 불편한 다리는 어느 순간 불편하지 않게 되고, 자전거를 훨씬 능가하는 속도로 도망간다. 이후 달리기는 포레스트 삶의 큰 부분을 차지한다. 달리기로 인생이 달라지는 것이다. 


'인간 기관차'라 불리는 에밀 자토펙은 "새는 날고, 물고기는 헤엄치고, 인간은 달린다"라고 했다. 인간은 달리도록 태어났다는 거다. 포레스트의 우여곡절 인생역전은 달리기로 점철되어 있다. 더군다나 그는 원래 걸을 수 없었는데 누구보다 빨리 달릴 수 있게 되었으니, 가장 인간답지 못한 삶에서 그야말로 인간다운 삶을 살게 된 것이 아닌가. 그것은 포레스트의 정해진 운명이었을까, 포레스트가 개척한 운명일까. 


정해진 운명과 운명의 개척, 어떤 게 맞을까


포레스트 검프의 삶은 마치 그렇게 될 운명이었던 것처럼 흘러간다. 그러면서도 그가 주어진 상황에 최선을 다했기 때문이라는, 즉 운명을 개척했다는 생각도 든다. 무엇이 맞을까? ⓒ파라마운트



포레스트는 평생 엄마의 말씀들을 숙지하고 실행에 옮기며 산다. 그중에서도 "인생은 초콜릿 상자 같단다. 어떤 걸 집어 들게 될지 알 수 없으니까 말이야."를 특별하게 생각한다. 정해진 건 아무 것도 없으니, 어떤 기대나 실망 없이 그때그때 주어진 상황에 최선을 다하면 된다는 메시지를 우회적으로 던진 게 아닐까 싶다. 영화가 시작할 때와 끝날 때 바람에 흩날리는 깃털이 의미하는 바다. 


한편 포레스트의 삶은 그렇게 될 운명이었던 것처럼 흘러간다. 달리기를 너무 잘해 우연히 미식축구를 '하게 되고' 전미미식축구팀에도 뽑혀 스타가 되고 군대에 들어가게 '되고' 베트남전쟁에 출전해 달리기 덕분에 큰 공을 세워 훈장을 받아 영웅이 되고 우연히 탁구를 접해 탁구의 신처럼 '되고' 죽은 동기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새우배 선장이 '되어' 백만장자가 된다. 


제니와의 만남과 헤어짐은 '운명'이 아니고선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 많다. 포레스트는 첫만남 이후 그 어느 순간에라도 제니를 생각하지 않은 적이 없다. 또한 만날 때마다 변해 있는 제니에게 실망을 한 적도 없다. 첫만남 때의 기억과 느낌과 사랑을 간직하고 전한다. 정해진 운명에 순종하는 삶의 자세도 엿보이는 것이다. 


과연 어떤 게 맞는 걸까. 포레스트는 나름의 결론을 내린다. 둘 다 맞는 거라고. 정해진 운명과 개척하는 운명이 공존하는 거라고. 나의 생각도 같다. 이 세상을 생각해보면, 자연이 선택한 대로 만들어지고 진화해온 한편 신의 개입 없이 설명할 수 없는 부분도 있지 않을까. 포레스트의 삶도 다르지 않았다. 우리의 삶도 다르지 않을 거다. 


확실한 재미와 희열을 보장한다


마치 한 자리에 있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포레스트 검프와 케네디 대통령. 이것이 1990년대 초반의 CG란다. 엄청나다. 영화를 보면 믿을 수 없는 엄청난 CG들이 계속 나온다. 확실한 재미를 보장한다. ⓒ파라마운트



영화는 몇 번을 봐도 확실한 재미와 희열을 보장한다. 그런 부분들이 있다. 포레스트의 인생역전 그 자체. 어쩜 그리 인생이 우연의 연속으로 인해 우여곡절로 점철될 수 있는가. 하지만 그 가운데에서도 주어진 일에만 최선을 다하는 포레스트, 결코 우연이라고만 말할 수 없다. 그의 생각과 행동을 보면, 필연이라고도 할 수 있을 거다. 우리의 삶도 그처럼 '재미' 있을까, 아니면 우리의 삶이 아닌 그의 삶이기 때문에 즐길 수 있는 것일까. 막상 그처럼 살아보면 재밌다고 느낄 수 있을지?


그의 인생을 들여다보면 수많은 유명인들이 함께 한다. 모두 실존 인물들인데, 엘비스 프레슬리, 케네디를 비롯한 네댓 명의 미대통령들, 존 레논 등 60~80년대를 상징하는 인물들이 그의 인생에 종종 얼굴을 내민다. 하지만 그는 잘 모르는 듯, 그 간극에서 오는 재미가 쏠쏠하다. 우리 삶도 잘 복기해보면 그런 순간들이 종종 눈에 띄지 않을까?


무엇보다 '특수효과의 거장' 로버트 저메스키 감독의 손에 탄생한 CG들이 압권이다. 그저 서사에 압도되어 영화를 보고 있으면 느끼기 힘든 부분들인데, 모든 CG들이 너무도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1994년에 개봉했다고는 믿기 힘든 만큼 완벽한대, 60~70년대 활동했던 실존 인물들과 94년 당시 현재 인물을 마치 같은 공간에 있는 듯 효과를 낸 것이다. 차라리 실존 인물들인 것처럼 분장을 했다는 걸 믿고 싶을 만큼 완벽하다. 다만, 그가 <백 투 더 퓨쳐>를 연출했다는 사실을 알고 나니 수긍이 간다. 뿐만 아니라 <아바타> 이전에 이미 3D 혁명을 이룬 로버트 저메스키다. 


볼 때마다 감동은 줄어드는 것 같다. 아는 게 많아지니까. 포레스트의 제니를 향한 지고지순한 사랑이 답답하다. 그에 더해 필요할 때만 나타났다 사라지는 제니의 행동이 가증스럽기까지 하다. 그래도 포레스트의 사랑에서 유발되는 감동이 사라지진 않을 거다. 반면 재미는 더해지는 것 같다. 역시 아는 게 많아지니까. 웃음 포인트들이 눈에 더 많이 띈다. 


적절한 고전 음악 OST들과 여전히 황홀한 풍경들은 영화의 백미 중 하나다. 절대 지나치지 못할 것이니, 넋 놓고 감상하는 걸 추천한다. 미국 60~80년대 서사와 포레스트라는 한 인간의 서사가 훌륭히 어우러져 생각지 못한 감동을 줄 것이다. 최소한 이 감동은 줄어들지 않는다. <포레스트 검프>, 언젠가 반드시 무조건 꼭 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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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해피엔딩>


<해피엔딩> 표지 ⓒ엔자임헬스



10년도 훌쩍 넘은 것 같다. '웰빙'이라는 거의 모든 곳에서 쓰였던 적이 있다. 단순히 먹고 사는 시대를 지나 잘 먹고 잘 사는 시대에 진입했다는 뜻이기도 했을 것이다. 혹은 오로지 물질적인 풍요와 성공만을 강요하는 시대를 지나 정신적인 풍요와 성공이 삶의 진정한 척도로 부상했다는 뜻이기도 했을 거다. 


웰빙의 뜻은 점차 확대 되었다. 이제는 잘 먹고 잘 사는 문제만이 아닌 '잘 죽는 것'도 웰빙에 포함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게 말하기 시작한지도 10년이 넘은 줄 안다. 일명 '웰다잉'이다. 말이 쉬워 웰다잉이지, 누구도 쉽게 말할 수 있는 개체가 아니었다.  

우리나라에서 웰다잉이 사회적으로 퍼진 건 '고 김수환 추기경' 연명 치료 중단 판결 덕분이다. 2009년 선종한 그는 병세가 악화되기 시작한 2008년 말부터 기계적 치료에 의한 생명 연장을 거부해왔고, 법원은 환자의 연명 치료를 중단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이후 웰다잉과 관련된 중요한 논쟁인, '존엄사' '안락사'에 대한 말들이 오갔다. 


죽음에 조금 더 긍정적으로 접근해본다


'죽음'이라는 단어가 여기저기에서 들려 온다. 시류에 은근히 민감한 출판도 예외는 아니어서, 죽음을 주제로 하는 책이 많이 출간되고 있다. 제목에서 죽음이 물씬 풍기는 <해피엔딩>도 그중 하나다. 영화, 소설에서나 봤음직한 '해피엔딩' 즉, 행복한 죽음이 가능할까 싶다. 


죽음은 인간이 절대적으로 피할 수 없는 것들 중 하나라고 한다. 인간은 살기 위해서 반드시 음식을 섭취해야 하고 반드시 자야 한다. 그리고 반드시 죽는다. 문제는 죽음을 대하는 태도다. 죽음을 생각하면 오싹해지며 한기가 흐르고 온갖 부정적인 생각이 꼬리를 문다. 막연한 두려움이랄까. 


책은 죽음에 조금 더 긍정적으로 접근해보려 한다.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라는 격언이 여기에 해당할까, '어떻게 죽음을 맞이할 것인가'가 중요하다고 말한다. 나아가 '아름다운 죽음이 가능할까'까지 도출해보려 한다. 산증인이 필요하다. 아름다운 죽음을 실천한 이들이 있다면 가능하다 하겠다. 


김수환 추기경이 대표적이다. 그는 죽음에 저항하지 않고 '감사하고 사랑한다'는 말을 남기고 우리 곁을 떠났다. 책에는 그런 죽음들이 나온다. 죽음에 이르러서 화해하고 화합하는 현장. '사랑해요, 고마워요, 미안해요' 차마 하지 못했던 말을 죽음 앞에서 하는 것이다. 또한 죽음 앞에서 비로소 욕심 없이 모든 걸 비울 수 있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죽음이 축복이고, 행복한 죽음이 가능하다. 


죽음을 이야기하지만 결국 삶의 이야기


책을 보면서 내가 죽음 앞에 서게 되었을 때, 내 가족이나 지인이 죽음 앞에 서게 되었을 때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평소에는 생각지 못했지만, 내 가족이나 지인이 죽는 게 더 참지 못할 순간이 될 것 같다. 반면 내가 죽는 건, 너무 두렵지만 심적으로 이전보다 충분히 행복할 수 있을 것 같다. 제대로 된 삶을 살았다고 자부할 수 있다면. 


그렇다. 죽음은 삶의 연장선에 있기 때문에, 삶의 마지막이기 때문에, 죽음과 삶을 따로 떼어낼 수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따로 떼어낸 채 살고 있지만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있는 사람의 얘기를 들어보면 전혀 그렇지 않다. 그들은 죽음 앞에 와서야 비로소 삶을 후회하고 삶을 축복하고 삶을 찬양한다. 제대로 된 삶을 살아야 행복한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 


책은 죽음을 이야기하지만 결국 삶에 대한 이야기다. 어떤 삶을 살았는지가 죽음에 큰 영향을 끼친다는 거다. 그렇다고 괜찮지 않은 삶이 행복한 죽음을 막진 않는다. 누구나 행복한 죽음에 이를 수 있다. 다만, 삶의 '소중함'을 인지하고 정녕 후회 없이 살다가 마지막을 맞이하면 더 행복하지 않을까 싶은 것이다. 제대로 된 삶을 산다기 보다, 삶의 소중함을 아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게 맞지 싶다. 


책에는 행복하지 못한 죽음의 사례가 많이 등장한다. 예기치 않은 갑작스러운 죽음, 억울하기 그지 없는 죽음, 쓸쓸히 혼자 맞이하는 죽음 등. 삶을 돌아보고, 정리하고 죽음을 생각하기가 불가능한 죽음이다. 가족을 비롯해 그 죽음을 그나마 챙겨주고 보살피는 이들이 있어 다행이다. 


최후의 순간에 인간이 인간일 수 있게 하는, 존엄사


일명 '연명치료결정법'이 통과 되어 2018년부터 시행된다. 자세한 사항을 숙지할 필요가 있지만, 자신의 죽음을 자신이 결정하게 된 첫 걸음이다. 사전연명의료의향서가 그것인데, 더 이상 회생의 가능성이 없을 때 생명 연장 혹은 특정 치료 여부에 대한 본인의 의사를 사전에 서류로 작성해 놓는 것이다.  그건 곧 내 죽음을, 내 삶을 내 손으로 맞이하겠다는 표시이다. 


물론 여전히 연명치료와 존엄사에 대한 논란은 거세다. 함부로 말할 수 있는 개체가 아니다. 그러나 그런 인식 자체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의 발로가 아닌가 싶다. 그건 '똥밭에 굴러도 저승보단 이승이 낫다'라는 옛말이 무색하게, 회생불능의 환자에게 고통만을 가해 살게 할 때 할 말은 아닌 것이다. 존엄사를 자살과 동일시 하는 건 '틀린' 생각이다. 존엄사는 최후의 순간에 인간이 인간일 수 있게 하는 방법이다. 


책은 소개한다. 무한긍정 에너지로 마지막을 살다가 간 어느 할머니의 이야기를. 그녀는 살아생전 후회 없이 열심히 즐겁게 살았고, 죽음을 목전에 두고서도 여전히 열심히 즐겁게 '살았다'. 정말 큰 축볼인진데, 그런 '죽음'이 부러운 게 아니라 그런 '삶'이 부럽다. 그녀는 마지막까지 삶을 살았다. 


죽음에 대한 보다 깊이 있고 심오한 걸 원했다. 하지만 죽음 자체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은 상황에서 어찌 훨씬 나아간 고찰이 있을 수 있겠나 싶다. 죽음을 '홍보'하는 것만으로도 그 역할을 다 했다 하겠다. 죽음이 제대로 자리를 찾았으면 하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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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하와이언 레시피>


하와이의 작은 마을 호노카아, 태평하기 그지 없는 그곳에 젊은 청년 레오가 찾아온다. 무작정 쉬러 온 곳, 잘 적응할 수 있을까. 영화 <하와이언 레시피> 포스터 ⓒ㈜영화사 진진



하와이 섬 북쪽 끝의 작은 마을 호노카아, 나이 지긋한 미국계 일본인들이 모여 산다. 세상 어디에도 그런 곳은 없을 듯하다. 느리고 말 없고 태평하다. 딱히 뭘 하고 있는 사람이 없다. 그곳에 젋디 젊은 청년 레오가 찾아온다. 그 또한 느리고 태평한 듯하기에 큰 무리 없이 스며든다. 


마을에 하나밖에 없는 영화관에서 일하게 된 레오, 곧 동네사람들과 친해진다. 그들은 하나같이 천하태평하고 무미건조한 삶을 사는 것 같지만, 사실 누구나 부러워할 만한 여유롭고 안정된 삶이다. 여자를 밝히지만 파킨슨병에 걸린 아내만을 바라보며 사는 코이치, 팝콘 기계 옆에 앉아 기계가 돌아가기만 하면 잠을 자는 제임스, 먹는 걸 너무너무 좋아하는 영화관 주인 에델리, 과묵한 레오의 상사 버즈, 딱딱 맞는 말만 하는 미용사 미즈에, 그리고 천상 소녀같은 비이. 


명장면, 명대사, 명분위기의 향연


영화 <하와이언 레시피>는 명장면, 명대사, 명분위기의 향연이 펼쳐진다. 가본 적도 없는 하와이의 눈부신 하늘과 바다를 비롯한 거의 모든 장면들이 명장면이다. 그 장면들만으로도 '힐링'이 되는 듯하다. 느릿느릿하고 여유로운 삶의 모습들이 장면장면 짙게 배어 있다. '급할 수록 돌아가라'라는 말이 무색하게, '급할 게 뭐가 있나'를 보여준다. 처음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고 답답하고 짜증까지 났지만, 그게 곧 극도의 부러움이 표출된 거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된다. 나중엔 조금이나마 여유롭게 받아들일 수 있다. 


그곳에 의외로 '사랑' 있다. 아마 레오와 누군가의 사랑일 텐데, 나이가 지긋하신 분들밖에 없는 곳에서 어떻게? 영화 <하와이언 레시피>의 한 장면 ⓒ㈜영화사 진진



영화를 관통하는 스토리 라인에는 예상 외로 '사랑'이 있다. 누구와 누구의 사랑일까? 아마 레오와 누군가의 사랑일 것이다. 그런데 그곳에는 나이가 지긋하신 분들밖에 없다. 이 잔잔한 영화에서 그런 분위기를 연출하긴 쉽지 않을 듯한데, 어김없이 레오 또래의 여인 머라이어가 등장한다. 그들은 급속도로 친해지는데, 그들을 보고 비이가 심상치 않은 모습을 보인다. 비이는 50여 년 전 젊은 시절에 남편과 사별했다고 한다. 


딱히 이야기 선을 찾기 힘든 이 영화에서 레오와 머라이어와 비이의 삼각 관계는, 단순히 중심이 되는 이야기일 뿐만 아니라 중요한 상징으로 자리매김한다. 사실 머라이어는 중요하지 않다. 레오와 비이의 관계 때문이다. 비이의 입장에서 보면 이야기가 달라 보인다. 


사랑을 하는 사람의 욕망, 그리고 쉼의 위대함


노인은 '사랑'을 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할 수 없다고도 생각할 것이다.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경우도 있다. 여하튼 노인과 사랑은 한 통속으로 묶기 힘들다. 영화는 바로 그 지점을 건드린다. 그것도 노인들이 주를 이루는 작은 마을을 배경으로. 노인도 사랑의 감정을 느낄 수 있고 느끼고 싶고 느끼며 산다. 비이는 젊은 레오에게 '여자'이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그와 함께 있을 땐 목소리며 몸짓이며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진다. 천상 여자, 아니 소녀의 그것이라고 할까. 레오는 알 길이 없지만. 


그런 면에서 상당히 파격적인 설정일 테다. 분위기는 천지 차이지만, 영화 <은교>가 생각나기도 한다. 노인의 욕망을 그렸다는 점에서 말이다. 다만 <은교>에서 이적요가 '사랑'이 아닌 '욕망'의 화신이었다는 점에서는 다르다. 그는 은교의 '젊음'에 심취했던 것이다. 반면 비이는 자신을 변화시킨다. 그러며 레오에게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요리를 선사한다. '노인'의 욕망이 아닌 '사랑을 하는 사람'의 욕망인 것이다. 


쉼이야말로 살아 있는 것의 위대함을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모습일 거다. 영화 <하와이언 레시피>의 한 장면 ⓒ㈜영화사 진진



한편 비이를 비롯한 마을 사람들 모습에서 또 다른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대단한 일은커녕 아무런 일도 하지 않는, 얼핏 무지렁이 같은 이들의 집합소 같은 그곳에도 삶다운 삶이 생동하고 있다는 사실 말이다. 잘 보면 그들 모두 항상 무언가를 하고 있다. 음식을 만들고, 먹고, 졸고, 일하고, 멍 때리고, 앉아 있고. 


우린 삶을 오해한다. 무엇이든 열심히 해야 하고 쉬는 건 용납되지 않는다. 열심히 한 만큼 그에 비례해 쉴 수 있다. 그렇지만 쉼이 함께 하지 않는 삶은 지옥 같은 것이 분명하다. 그러지 않다고 반박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본능을 억제한 채 너무 오래 살아왔기 때문이라고 확신한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쉼이 함께 할 때 비로소 일의 능률이 오를 거라고 조언하고 싶다. 쉼이야말로 살아 있는 것의 위대함을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모습일 것이다. 


삶이 삶을 지탱하고, 사람이 사람을 지켜준다


"육체는 말과 생각의 이유에 지나지 않아"


극 중 코이치 할아버지의 말이다. 생각나는 여러 명대사 중 하나인데, 깊이 생각하게 만든다. 영화 중반부가 넘어가면서 코이치를 비롯해 동네 사람들이 하나둘 레오 곁을 떠난다. '레오 곁을 떠난다'고 말한 이유는, 그곳에선 당연한 '떠남'이 레오에겐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곳은 그런 곳이고, 우리 인생도 다를 바가 없다. 애써 외면하고 있을 뿐이다. 당연한 걸 당연하게 받아 들이지 못하고 있다. 


변한 건 없다. 그대로이다. 다만 그때 그 사람들만 없을뿐. 그게 인생 아닐까. 영화 <하와이언 레시피>의 한 장면 ⓒ㈜영화사 진진



결국엔 레오도 1년 동안 정든 그곳을 떠난다. 그러곤 1년 후에 다시 찾는다. 변한 건 없다. 그곳은 그곳에 그대로 있다. 다만 사람들만 없을 뿐. 그게 인생 아닐까. 너무도 당연한 진리. 만나고 설레고 사랑하고 헤어지고 아파하고 추억하고 성장하는, 그런 당연한 진리를 영화는 찬찬히 보여준다. 


영화가 끝나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호노카아 마을의 전경과 사람들이. 10여 년 전, 호주 브리즈번에서 지냈던 1년과 많은 것들이 겹친다. 그 분위기와 전경들, 나름 치열했던 궤적도 떠오른다. 그 모든 것이 삶이다. 다름 아닌 삶이 삶을 지탱하고, 사람이 사람을 지켜주는 게 아닐까. 레오의 앞으로의 삶에는 호노카아 마을 사람들이 함께 할 것이다. 모든 이들의 삶에 모든 이들이 함께 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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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본 투 비 블루>


위대한 예술가 '쳇 베이커'. 그는 재즈 음악 역사상 다시 없을 천재 뮤지션인 바, 외모도 출중해 '재즈계의 제임스 딘'으로 불릴 정도였다. 하지만 1950년대 말부터 자신이 대표하는 웨스트 코스트 재즈가 쇠퇴하고 그에 맞물려 마약 인생이 시작된다. 영화 <본 투 비 블루>는 쳇이 불행했던 그 시절에 대한 이야기다. 영화 <본 투 비 블루> 포스터 ⓒ그린나래미디어(주)



천재 예술가, 천사와 악마가 양 어깨 위에 앉아 삶을 조종한다. 천사는 신을 대리해 그에게 천재적인 능력을 주었다. 어느 누구도 감화되지 않을 수 없는, 예술적 능력이다. 그런데 예술가에겐 단순히 '잘'하는 수준을 넘어선 그 무엇이 필요하다. 예술가들은 그 무엇을 보여주기 위해 평생 계속한다. 


천사가 아닌 악마가 그 무엇을 충족시켜줄 수 있다. 천사가 준 능력으로는 감당하지 못할 때 악마의 속삭임에 귀를 기울인다. 악마가 주는 능력은 너무나도 강력하다. 그것이야말로 인간이 감당할 수 없기에 무언가가 필요하다. 술이나 마약, 악마를 대리한 것들이다. 


위대한 트럼펫 연주자 쳇 베이커의 불행했던 시절


모든 걸 잃고 다시 일어서려는 쳇 베이커 앞에 제인이 나타난다. 영화는 제인의 출현으로 극적인 변곡점을 맞는다. 임체감을 선사한 것이다. 영화 <본 투 비 블루>의 한 장면. ⓒ그린나래미디어(주)



위대한 트럼펫 연주자 '쳇 베이커'. 그는 재즈 음악 역사상 다시 없을 천재 뮤지션인 바, 외모도 출중해 '재즈계의 제임스 딘'으로 불릴 정도였다. 그는 재즈를 대표할 단 한 사람 '찰리 파커'의 사이드 맨으로 재즈계에 데뷔하며 찰리 파커의 영향을 다분히 받았다. 실력도, 삶도. 


찰리 파커가 약을 구하기 위해 친구의 악기까지 훔쳐 팔아먹었다는 일화는 유명한데, 쳇 베이커 또한 평생 동안 마약과 싸워야 했다. 그는 약을 구하기 위해 부인을 사창가로 보내기도 했었다. 1950년대 말부터 자신이 대표하는 웨스트 코스트 재즈가 쇠퇴하고 그에 맞물려 마약 인생이 시작된다. 영화 <본 투 비 블루>는 쳇이 불행했던 이 시절에 대한 이야기다. 


1960년대 중후반의 쳇은 마약으로 감옥을 들락날라하고 갱한테 테러를 당해 앞니가 다 부러지는 치명상을 당했으며 결혼 생활을 두 번이나 실패한 상태였고 '한 물 갔다는' 평이 퍼져 있었다. 정신적으로나 물리적으로나 연주를 하기 힘들었다. 그 와중에 그 자신의 전기 영화에 그가 출현하게 되었고 그 앞에 제인이 나타난다. 


영화는 뜻밖에 제인의 출현으로 극적인 변곡점을 맞는다. 다분히 쳇 중심으로 전기적 영화가 될 줄 알았건만, 제인이 입체감을 선사한 것이다.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이 여인은 쳇을 진심으로 사랑하여 그와 함께 살며 옆에서 극진히 보필한다. '인간 쓰레기'와 다를 바 없는 삶을 살았던 쳇, 그의 부활과 제인과의 사랑은 한 몸이다. 과연 그들의 사랑과 그의 부활은 함께 끝까지 갈 수 있을까. 아슬아슬하다. 


천사의 연주를 선사하는 악마의 속삭임 '마약'


쳇 베이커의 인생을 파탄나게 한 원흉인 마약. 하지만 그는 평생 동안 마약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비록 '악마의 속삭임'이지만 '천사의 연주'를 선사할 수 있게 도와주기 때문이다. 영화 <본 투 비 블루>의 한 장면. ⓒ그린나래미디어(주)



제인의 헌신과 본인의 피나는 노력으로 마약은 끊었지만 앞니가 없는 상태에서 제대로 된 연주를 하기는 불가능에 가깝다. 그런데 그가 할 수 있는 게 연주밖에 없고, 무엇보다도 연주를 너무나도 하고 싶었다. 제인을 비롯해 그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이들은 고통스럽기 짝이 없는 고행을 그만두라고 말한다. 


쳇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고 고통스럽고 지루한 고행을 계속한다. 피나는 노력 같은 말은 그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그러던 어느 날 그에게, 아니 그들에게 기회가 찾아온다. 사실 감옥에 다시 가지 않으려면 어떻게든 일을 얻어야 했다. 결과적으로 일자리를 잡으려는 것과 기회가 같이 찾아 온 것이다. 


우여곡절이 없을 수 없다. 연주 실력은 전에 없이 떨어졌다. 그러나 개성이 뚜렷하고 '좋은' 음악이었다는 것. 비로소 그는 실력이 출중한 예술가에서 예술혼 가득한 진짜 예술가가 되었다. '삶'을 살아보고 왔기에 들려줄 수 있는 음악이었다. 그는 제2의 전성기를 구사하며 상승가도를 달린다. 그러나 불행의 그림자는 다시금 그를 찾아온다. 


그가 재기하고 나서도 약을 끊지 못했다는 건 알려진 사실이다. 마약 없이는 그 중압감을 이길 수 없었고 마약이 있어야 진정한 연주를 선보일 수 있었다고 한다. 그야말로 '악마의 속삭임'. 누구라도 한 번쯤 겪어봤을 이 가혹한 딜레마는 그에게 너무 자주 찾아왔다. 영화에서 쳇은 어떤 선택을 했을까. 익히 알고 있지만, 영화이기에 다른 결말을 기대해본다. 기대하고 싶다. 


자신만을 상처 입혀 위대한 연주를 선 보일 수 있다면?


쳇 베이커는 '연주'와 '사랑'의 갈림길에서 일생일대의 고민을 한다. 다시 없을 절대 부활의 기회에서, 마약에 손을 대면 기회를 완벽히 잡을 수 있지만 그의 사랑은 영영 사라진다.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영화 <본 투 비 블루>의 한 장면. ⓒ그린나래미디어(주)



마약은 쳇의 가장 빛나는 순간들을 함께 해왔다. 지배했다는 표현이 맞을까. 그가 마약에 손대지 않았다면, 우린 그 순간들을 지켜보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에게 인생 굴곡도 없었을 것이다. 이름은 적당히 떨쳤을지 모르지만, '쳇 베이커'라는 콘텐츠는 남아 있지 않았을 테다. 그래서, 마약을 했어야 한다는 건가?


극 중에서도 나오지만, 그는 찰리 파커를 보고 '오로지 자신만을 상처 입히던 분'이라고 했다. 지독히도 약을 했던 찰리 파커를 옹호하면서 했던 말이라 언뜻 와 닿지 않는데, 거기에 '고독'과 '두려움'을 넣으면 이해가 된다. 찰리 파커나 쳇 베이커나 고독과 두려움에 맞서 싸웠으며, 그 때문에 약을 하면서 자신만을 상처 입혔던 것이다. 자신만 상처 입으면 신의 대리인으로서의 예술혼을 많은 이들에게 선보일 수 있었다. 


그렇다면, 극 중에도 나오는 반가운 전설적 인물들인 '마일스 데이비스'나 '디지 길레스피'를 비롯한 수많은 예술가들은? 그들 중에는 애초에 마약 같은 거에 의지하지 않고도, 마약에 빠졌지만 회복하고 나서 더 좋은 예술혼을 선보였던 이들이 많다.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여기서는 누가 잘했고 누가 잘못했다는 식의 공방은 불필요해 보인다. '어떻게'가 중요해 보이지 않나 싶다. 많은 논란이 있지만, 적어도 예술에서는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누구보다 파렴치 했지만 천재적이었던 그였기에 이 논란과 이 주장을 피해갈 수 없다. 누군가는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다. 마약을 해서 좋은 음악을 들려주는 걸 옹호한다고 쳐도, 그로 인해 그가 떵떵거리며 사는 건 볼 수 없다고 말이다. 하지만 절대적으로 그들은 불행하다. 예술과 삶을 바꾼 거라고 하면 이해가 되겠는가. 


오직 그 하나가 아니고서는 아무 의미도 없는 삶. 우리는 그런 그들을 두고 '위대한 삶'이라 말하지 않는다. 위대한 삶이란 지극히 일반적인, 끝없는 반복을 묵묵히 걸어가는 삶이다. 반면 그들의 삶은 '위대한 무엇'이라 해야 맞을 것이다. 쳇 베이커의 경우, 그것은 '위대한 연주'였다고 해야 할까. 그것이 '위대한 사랑'과 같은 길을 걸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불행한 그의 삶에 비추어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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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오래된 리뷰] <드라이빙 미스 데이지>


깐깐하고 꽉 막힌 상류와 서글서글하고 활달한 하류의 잘못된 만남과 영원한 우정 또는 사랑 이야기는 굉장히 흔하다. <드라이빙 미스 데이지>도 그 흔한 이야기의 하나다. 영화 <드라이빙 미스 데이지> 포스터 ⓒ워너 브라더스



깐깐하고 꼬장꼬장한 전직 교사 출신 유태인 70대 할머니 데이지, 어느 누구도 그녀를 어찌 할 수 없다. 공장을 운영하고 있는 아들 불리, 그의 깐깐하고 성깔 있는 아내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그렇게 살아 왔고, 바뀌지 않을 거고, 굳이 바뀔 필요도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소소한 사고가 난다. 차를 끌고 장을 보러 가려다가 기어를 잘못 조작해 사고를 낸 것이다. 불리는 곧 흑인 기사 호크를 고용한다. 


가난했던 옛생각만 하며 부자가 된 현재의 모습을 뽐내길 싫어하고, 자신도 유태인으로 차별을 당하면서 흑인에 대한 나쁜 선입견을 가지고 있고, 종교에 대한 지나치게 확고한 신념으로 다른 종교(기독교)를 깍아내리는 데이지가 호크를 아니꼽게 보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가 뭘하든 사사건건 참견하며 하지 못하게 하고 그가 운전하는 차에 타지 않으려 한다. 동네 사람들의 시선 때문에 어거지로 차에 탄다. 



깐깐하고 꼬장꼬장한 전직 교사 출신 유태인 70대 할머니 데이지, 어느 누구도 그녀를 어찌 할 수 없다. 그녀는 그렇게 살아 왔고, 바뀌지 않을 거고, 굳이 바뀔 필요도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소소한 사고가 나 불리는 곧 흑인 기사 호크를 고용한다. 영화 <드라이빙 미스 데이지>의 한 장면 ⓒ워너 브라더스



인생의 황혼기에 완전히 바뀌는 특별한 경험


깐깐하고 꽉 막힌 상류와 서글서글하고 활달한 하류의 잘못된 만남과 영원한 우정 또는 사랑 이야기는 굉장히 흔하다. 모르긴 몰라도 인류 역사를 관통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드라이빙 미스 데이지>도 그 흔한 이야기의 하나다. 다만 이 영화만 같는 특장점이 있다. 


인간은 30세가 넘어가면 잘 바뀌지 않는다고 한다. 자신이 의도하지 않아도 그동안 체화한 것들이 겉으로 드러날 정도라는 것이다. 공자가 말씀하시길 30세면 '이립'이라 하여 '마음이 확고하게 도덕 위에 서서 움직이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는가. 하물며 70세라야? 70세면 뜻대로 행해도 어긋나지 않는 경지다. 


데이지 여사는 살아 왔던 대로 계속 살아가면 되는 나이에 있었다. 아무도 그녀를 탓하지 않는다. 그냥 그런 사람인가보다 하고 말 것이다. 그런 그녀가 180도 바뀐다. 성격이 아니라 세상을 대하는 눈이 달라진다. 거의 불가능에 가깝지는 그녀는 '해낸다'. 인생의 황혼기에 다달아 완전히 바뀌는 특별한 경험은, 보는 이에게도 특별한 경험으로 다가온다. 


데이지 여사는 살아 왔던 대로 계속 살아가면 되는 나이에 있었다. 그녀가 180도 바뀐다. 성격이 아니라 세상을 대하는 눈이 달라진다. 인생의 황혼기에 완전히 바뀌는 특별한 경험은, 보는 이에게도 특별한 경험으로 다가온다. 영화 <드라이빙 미스 데이지>의 한 장면 ⓒ워너 브라더스



그녀는 유태인이다. 자신도 미국의 백인 사회에서 알게 모르게 차별을 당한다. 사실상 흑인인 호크와 다를 바가 없다. 호크와 함께 삼촌 댁에 가는 도중 잠시 길 옆에 차를 세워두었을 때 경찰 두 명이 와서 '이 고급차를 왜 너같은 흑인이 타고 있냐'는 식으로 얘기한다. 그녀는 알지 못한다. 그들이 그녀에게도 유태인이라는 이유로 차별의 시선을 날린 것을. 그녀가 가던 회당이 KKK로 예측되는 이들에게 폭탄 테러를 당하는 일까지 당하게 된다. 흑인에 대한 나쁜 선입견으로 호크를 도둑으로 몰았던 일도 있다. 


그녀는 자신이 피해자라는 걸 몰랐을까. 아니면 피해자라는 걸 애써 감추고 살았을까. 알면서도 모른 채 살았을까. 그녀의 머릿속엔 유태인이라는 단어가 그런 식으로 비춰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대신 다른 게 들어 있다. 과거의 가난과 현재의 부자. 그녀가 흑인 가정부를 아끼는 이유가 힘들었던 지난 날을 함께 해왔기 때문인 것과 같은 맥락이다. 그런 시절을 함께 하지 않은 호크는 그녀에게 그냥 흑인일 뿐이다. 


괜찮은 삶, 끊임없이 부딪히고 깨닫고 성장하는 삶


영화는 20년의 세월을 그린다. 이미 초로의 노인인 데이지 여사는 치매에 걸려 요양원에서 지내고 호크는 운전을 할 수 없어 손녀딸이 태워주는 차에 타고 다니게 된다. 아이델라는 세상을 떠났고, 아들도 늙고 바빠 잘 챙기지 못하며, 며느리는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말로만 안부를 전하니, 그녀에게 남은 이는 호크밖에 없었다. 한순간 정신을 차린 데이지 여사는 호크에게 진심을 전한다. 


"자네는 나의 친구야, 가장 친한 친구."


보다시피 영화는 의외로 성장 영화다. 초로의 여인 데이지 여사의 성장기. 그 성장에 차별 철폐, 우정, 화해, 진심이 담겨 있다. 그 성장을 죽을 때까지 멈추지 않는다. 흔하디 흔하지만 특별한, 그래서 특별함을 많은 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었다. 어떤 사건사고 없이 몇몇의 대화로만 이루어진 이 단조로운 영화가 와 닿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그런 사실을 인지하게 되었을 때 직시하고 올바른 쪽으로 바꿔나가는 것이야말로 괜찮은 삶이고 잘 산 삶일 것이다. 그들이 부러운 듯 '운이 좋았다'고 말한 아이델라의 삶이 아니고. 영화 <드라이빙 미스 데이지>의 한 장면 ⓒ워너 브라더스



그들은 죽은 아이델라를 두고 '운이 좋았다'라고 표현한다. 왜 그렇게 말했을까. 그녀가 좋아하는 드라마를 보다가 죽음을 맞이해서? 고통스럽지 않게 자신도 모르는 새 죽음을 맞이해서? 말년의 비참한 꼴을 보지 않고 죽음을 맞이해서? 생각해봐도 그들이 그렇게 말한 정확한 이유를 모르겠다. 다만 영화의 맥락을 통해 이해해 볼라치면, '흑인의 삶치곤 괜찮은 삶이었다' 정도겠다. 씁쓸하다.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 자신이 차별 당하고 있는 사실을 이해하려고도 하지 않고 이해하지도 못한 채 '분수에 맞는' 삶을 사는 게 괜찮은 삶이고 잘 산 삶일까. 물론 그런 사실을 인지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체념한 채 살아가는 것보다는 괜찮은 삶이겠다. 여기서는 '아는 게 힘'이라기보다 '모르는 게 약'이지 않을까. 


그렇다면 그런 사실을 인지하게 되었을 때 체념하는 게 아니라 정확히 직시하고 올바른 쪽으로 바꿔나가는 것이야말로 괜찮은 삶이고 잘 산 삶일 것이다. 데이지 여사, 그리고 호크의 삶이 바로 그런 삶이다. 그들이 부러운 듯 '운이 좋았다'고 말한 아이델라의 삶이 아니고. 그녀의 삶은 '충실했다'고 표현하는 게 맞지 않을까. 결이 조금 다른. 


많은 사람들이 아이델라의 삶을 살아간다. 그저 살아가는 데 충실한 삶, 그 또한 어떤 의미에선 위대한 삶이다. 데이지 여사의 삶도, 호크의 삶도, 많은 이들에겐 상당히 다른 차원의 삶이다. 나는 아직 정하지 못했다. 어떤 삶을 살아갈지, 또 어떤 삶을 살 수 있을지. 부러운 삶은 아이델라의 삶일 것이다. 하지만 살고 싶은 삶은 데이지 여사와 호크의 삶이다. 끊임없이 부딪히고 깨닫고 성장하는 삶 말이다. 괜찮은 삶이길 바란다. 괜찮은 삶이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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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화가의 마지막 그림>


<화가의 마지막 그림> 표지 ⓒ서해문집



여섯 살 때 찾아온 척수성 소아마비, 18살 때 당한 끔찍한 교통사고로 평생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안고 살았던 프리다 칼로. 그녀는 죽기 전 마지막으로 남긴 그림에 '삶이여, 만세'라는 메시지를 남긴다. 오롯이 고통으로 점철된 삶이었기에 오히려 삶에 집착하였던 것이리라. 하지만 그녀가 쓴 일기장의 마지막 페이지에는 '이 외출이 행복하기를.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기를'이라 적혀 있었다 한다. 


화가들 생의 마지막 그림으로 삶을 유추하다


가수는 노래로 말하고, 작가는 글로 말하며, 화가는 그림으로 말한다. 화가가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그린 그림에는 어떤 특별한 뜻이 담겨져 있지 않을까 하는 질문을 생각해봄직하다. 처음 그린 그림보다 마지막으로 그린 그림에 그가 더 많이 담겨져 있음은 자명한 일이다. <화가의 마지막 그림>(서해문집)은 제목 그대로 누구나 알 만한 유명한 화가들의 생의 마지막 그림을 들여다보며 그들의 삶을 유추한다. 


책에 소개되는 19명의 화가들, 그 중에 프리다 칼로의 이야기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가장 고통스럽고 가장 위태롭고 가장 불행했을 듯한 그녀의 삶이, 가장 빛나 보이고 가장 아름답고 가장 행복해 보이기까지 했기에. 그건 아마 그녀의 마지막 그림에 담긴 메시지가 죽음이 아닌 삶을 말했기 때문이다. 다른 18명의 화가들이 남긴 생의 마지막 그림들은 어떨까? 어떤 메시지가 담겨 있을까. 삶이 담겨 있을까, 죽음이 담겨 있을까.


고통스럽고 불행한 삶을 산 화가들


화가 하면 천재가 떠오른다. 천재 하면 고독하지만 화려하고 화창한 삶이었을 것 같다. 그런데 어찌 그리도 하나같이 불행했을까. 책에서 소개하는 19명의 화가들이 물론 수없이 많은 화가들의 삶을 완전히 대변하진 못하지만, 그들은 누가 뭐래도 그 시대를 대표하는 화가들이었다. 


누구나 알 것 같지만 실상 잘 알지 못하는 이중섭의 삶과 죽음을 들여다보자. 이중섭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화가다. 그렇지만 그는 평생 가난에 시달렸다. 그 와중에 일본인 아내를 두었는데 한국 전쟁이 발발해 남쪽으로 피신을 간다. 결국 아내를 일본으로 돌려 보내 전쟁이 끝날 때까지만 잠시 떨어져 있기로 결정하는데, 그것이 마지막이 될 줄은 몰랐다. 이후 그들은 잠깐 만났을 뿐 가난 때문에 다시는 만나지 못한다. 이중섭은 그 때문에 삶을 망치고 허망하게 죽는다. 역동적인 그림을 그리곤 했던 그의 마지막 그림이 굉장히 조용한 이유가 거기에 있다. 절박한 그리움, 기다림. 


또 한 명의 유명 화가, 빈센트 반 고흐. 오랫동안 우리는 그가 자살로 삶을 마감했다고 알고 있었다. 이는 오랫동안 논란거리였다. 저자는 전문가의 최근 연구를 바탕으로 그가 자살로 삶을 마감했을리 없다고 주장한다. 그의 마지막 그림이 중요하게 작용하는데, 일반적으로 고흐의 마지막 그림을 <까마귀가 나는 밀밭>으로 알고 있지만 최근 연구에 따르면 <나무 뿌리> 미완성본이라는 것이다. 그 작품은 다름 아닌 '생명'을 말하고 있는데, 자살을 하려는 사람이 생명의 메시지를 그린다는 게 어딘지 이상하지 않은가. 여러 정황상 동네에 살던 소년 세크레탕에 의한 타살이 유력하다고 한다. 


사랑과 희망이 가난으로 꺾이고 파괴당한 이들이다. 비단 가난 뿐이겠는가. '삶이 곧 고통'이라는, 삶의 변하지 않는 한 면이자 진리를 몸소 보여준 게 아닌가. 누구도 부정하지 못하고 어쩌지 못하는 바, 그저 안타까워하며 기릴 뿐이다. 그래도 그들의 이름은 영원히 남았으니 괜찮다고 해야 할까. 예술은 길고 인생은 짧으니, 예술가로서의 인생을 살다간 그들의 입장에서 보면 괜찮다고 해야 할까. 그토록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을지라도. 


고통스럽지만은 않은 삶과 죽음의 화가들


이처럼 고통스러운 삶과 죽음만 있는 건 아닐 거다. 그러면 어느 누가 살고 싶을까. 어느 누가 예술을 하고 싶어 할까. 어느 누가 화가가 되고 싶어 할까. 20세기 미국 사실주의를 대표하는 화가 에드워드 호퍼는 주로 현대인의 고독을 화폭에 담았지만 그 자신은 헌신적인 아내 덕분에 외롭지 않게 살았다. 그는 아내 조세핀을 만나 그녀의 도움 덕분에 무명화가에서 단숨에 유명화가가 되었다. 조세핀은 호퍼의 반려자이자 모델이자 친구이자 조력자이자 멘토였다. 85세 천수를 누리고 조세핀이 보는 앞에서 임종을 맞이했다. 호퍼의 사망 10개월 후 조세핀 또한 세상을 떠났으니, 이보다 더 좋은 삶이 있을까. 그의 마지막 그림 <두 코미디언>의 모델이 호퍼 자신과 조세핀이었다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하다 하겠다. 


르네상스 시대 최고의 예술가 미켈란젤로, 그는 정확한 인체 비례와 대칭 구도로 조각된 작품들로 균형과 조화를 완벽하게 규현해냈다. 그는 어렸을 때 함께 공부하던 동료와 싸웠는데, 그때 코가 주저 앉는 큰 부상을 당했다. 그 흔적은 평생 그를 따라다니며 외모 콤플렉스를 야기시켰다. 그 때문이었을까. 그는 '미(美)'에 집착한다. 그가 '미적인 표현을 신의 섭리로 보는' 르네상스 신플라톤주의에 감화된 건 우연이 아니었다. 


그는 동성애자이기도 했는데, 당시 동성애는 당연히 시대와 불화할 수밖에 없는 행위였다. 남색은 사형을 받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미켈란젤로는 독실한 그리스도교 신자였다. 아마 평생을 두고 고민했을 것이다. 인간의 아름다움을 향한 시선과 독신할 그리스도교적 믿음 사이에서 말이다. 결국 그는 마지막 그림을 통해 독실한 그리스도교적 믿음을 남긴다. 20대 때 조각한 이상미의 극치 <피에타>와는 완전히 반대되는,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을 상기시키는 <론다니니 피에타>를 통해서. 


그래도 이들은 다른 이들에 비해선 고통스럽지만은 않은 삶과 살았고 죽음을 맞이했다. 미켈란젤로의 경우 이견이 있을 수 있겠지만, 그는 살아생전 금지된 사랑을 당당히 밝히고 살았다. 공공연한 비밀이었으니. 그 또한 호퍼와 마찬가지로 90세의 천수를 누리고 죽음을 맞이하기도 했다. '천수'라는 단어는커녕 화가로서의 능력이 아닌 인간으로서 제대로 누리지도 못한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난 이들이 태반인 19인 중에, 그래도 삶다운 삶을 살다간 이들이다. 


고통스러운 삶과 죽음을 마지막 그림으로 보상받다


우린 죽음보다 삶에 관심이 많고, 그가 천재이자 예술가라면 죽음이나 삶보다 작품에 관심이 많다. 반대인 경우엔, 그의 죽음과 삶이 영화보다 극적일 것이다. 책에 소개된 19인들은 어떠한가. 아마 이 모든 걸 충족시켜 줄 거다. 그의 작품도, 삶도, 죽음도 모두 극적이다. 그런 이들의 마지막 작품이라면 더 말할 게 무엇이랴. 그를 온전히 드러내는 것을 테다. 


나의 마지막은 어떨지 상상해본다. 모든 이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편안하게 숨을 거두는 마지막일까, 가장 사랑하는 사람과 단 둘이 맞는 포근한 마지막일까, 나조차 모르는 새 급작스럽게 맞는 마지막일까, 너무나도 억울하게 맞는 고통스러운 마지막일까. 어렸을 땐 모든 이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편안하게 숨을 거두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 죽음이야말로 하늘이 내려준 최상의 죽음이 아닌가. 


죽음의 형태를 내가 선택할 수 없다면, 이들처럼 죽기 전에 무언가를 남기고 싶다. 나를 온전히 드러낼 수 있는 어떤 것을. 그것으로 나의 삶을 반추해볼 수 있도록. 이 또한 하늘이 내릴 수 있는 것이리라. 그렇다면 이들 19인의 고통스러운 삶과 죽음 또한 마지막 작품으로 보상받을 수 있지 않을까. 이들이라면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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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아메리칸 히스토리 X>


미국의 경우 오랫동안 보다 나은 삶의 기회를 찾아 미국으로 오는 모든 이에게 자유와 풍요를 약속하는 '아메리칸 드림'이 존재했다. 그 이면에는 잘 보이지 않는, 잘 드러내지 않은 큰 문제가 도사리고 있었다. 영화 <아메리칸 히스토리 X> 포스터 ⓒ뉴라인시네마



남 캘리포니아의 스킨헤드 데릭(에드워드 노튼 분)은 자동차를 훔치러 온 흑인들을 향해 무차별 총격을 가한다. 그러곤 신음하는 그들을 무참히 살해한다. 그와 함께 있던 여자친구와 남동생 대니는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충격적으로 시작된 영화 <아메리칸 히스토리 X>는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이야기를 전개한다. 


유럽 난민 사태가 전 세계적인 이슈로 떠오른지 한참이다. 인도적인 차원에서 그들을 수용할 것인지 자국의 이익을 위해 받아들이지 않을 것인지, 논란도 엄청 나고 결정도 쉽지 않다. 안 그래도 전 세계적인 경제 위기가 완전히 사그라들지 않은 시점에, 불황에 허덕이는 자국민들은 그 분노를 이주민에게 돌리기 쉽다. 그 어느 나라도 예외일 수 없다. 


미국의 경우 오랫동안 보다 나은 삶의 기회를 찾아 미국으로 오는 모든 이에게 자유와 풍요를 약속하는 '아메리칸 드림'이 존재했다. 미국의 상징인 '자유의 여신상'이 다름 아닌 아메리칸 드림의 상징과도 같으니 그곳은 정녕 꿈에서나 나올 법한 곳이 아닌가. 수많은 이들이 향했고, 때론 실패했고 때론 성공했다. 그리고 그 이면에는 잘 보이지 않는, 잘 드러내지 않은 큰 문제가 도사리고 있었다. 아메리칸 악몽(나이트메어)이다. 


아메리칸 드림이 아닌, 아메리칸 나이트메어


이 영화를 관통하는 큰 주제가 아메리칸 나이트메어다. 그 중심에는 스킨헤드 데릭이 있다. 영화 <아메리칸 히스토리 X>의 한 장면 ⓒ뉴라인시네마



이 진지한 영화를 관통하는 큰 주제가 바로 그 아메리칸 나이트메어다. 그 중심에는 스킨헤드 데릭이 있다. 그는 3년 전 소방수 아버지를 잃었는데, 다름 아닌 흑인 거주지에서 일을 수행하다가 강도의 손에 죽음을 맞았던 것이다. 그 일을 계기로 백인 우월주의자로의 길을 걷는다. 남동생 대니는 그를 영웅처럼 떠받든다. 


그런데 3년 간의 복역을 끝내고 나온 데릭의 행동이 뭔가 이상한 게 아닌가. 더 이상 스킨헤드의 길을 가지 않겠다고 천명하고는 대니를 설득하고 나선 것이다. 큰 깨달음이 없이는 그 길에서 헤어나오기 쉽지 않다. 대니 역시 그렇다. 결국 데릭은 결심을 하고는 자신이 감옥에서 겪었던 끔찍하지만 감동적인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는 감옥에 가서도 여전히 스킨헤드로 행동한다. 역시나 그곳의 스킨헤드 그룹에 들어가 중추적인 역할을 한다. 한편 흑인 한 명과 같이 일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도 처한다. 그러던 중 스킨헤드 그룹의 대장이 유색인종과 거래를 하는 사실을 알게 된다. 참을 수 없는 데릭은 항의하다가 참혹한 일을 당한다. 그가 갈 곳은 없고, 유색인종 그룹한테 더욱 더 참혹한 일을 당할 것이 분명했다. 그런 그를 지켜준 이가 다름 아닌 그와 함께 일하는 흑인이었다. 그는 큰 깨달음을 얻는다. 


과연 그 깨달음은 다시 뭉쳐 비로소 온전히 잘 살아보려는 그의 가족을 지켜낼 수 있을까? 너무 늦은 게 아닐까? 그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죄를 저질렀다. 흑인 두 명을 살해해 흑인들에게 언제 보복을 당할지 알 수 없다. 또한 복역이 끝나고 돌아와서는 백인 우월주의자들에게도 등을 돌렸다. 백인들한테도 언제 보복을 당할지 알 수 없는 일이다. 특히 대니는 그의 전철을 아주 차근차근 따라가고 있기 때문에 무슨 일을 당해도 할 말이 없는 것이다. 


본노 자체가 아니라, 대상이 잘못 되었다


분노가 생길 수밖에 상황이고, 분노는 반드시 풀어주어야 한다. 그런데 그 대상이 왜 시대와 나라와 위정자가 아니라 약자여야 하는가. 영화 <아메리칸 히스토리 X>의 한 장면 ⓒ뉴라인시네마



활발한 이주민 정책으로 아메리칸 드림이 절정이었을 시기에, 스킨헤드의 활동 역시 절정으로 치닫을 수밖에 없었다. 유색인종의 유입이 급격히 늘어나면서 자연스레 백인의 실업률이 높아질 수밖에 없었고 그에 맞춰 정권은 자유 경쟁을 활성화시키는 보수적 정책을 시행하고 유지했다. 이주민 정책이 활성화될 때에 일자리를 잃게 된 백인 청년들은 그 화살을 이주민들에게 돌렸고, 그 사상의 기반을 백인 우월주의에서 찾았다. 권력에서 소외되고 자본주의 경쟁에서 패배한 그 분노는 대단한 것이었다. 피해자의 입장에서 가해자의 입장으로 변하는, 그 우월한 느낌 또한 무시할 수 없다. 


혐한(嫌韓)으로 유명한 일본의 '재특회(재일 특권을 용납하지 않는 시민 모임)'도 그런 부류다. 장기 불황으로 실업률이 높아지고 많은 청년들이 절망에 빠져 있는 상황에서, 누군가 나서 '적'을 만들고는 그 적은 능력도 없거니와 선천적으로 후지다고 선전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사상으로 똘똘 뭉치게 된다. 자신들은 우월한데, 다수의 적들이 침범해 어쩔 수 없이 자리를 보전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기조다.


그런데 생각해보라. 피해자에서 가해자가 된 그들이지만, 자신들이야말로 피해자라고 약자라고 외친다. 여러모로 피해자였던 건 맞지만, 결코 약자는 아닌 것이다. 문제는 잘 살지 못하는 나라에서 왔을 대부분의 이주민이야말로 약자가 아닌가. 고로 피해를 당해도 그들이 더 많은 피해를 당할 게 아닌가. 


문제는 증오의 대상이 잘못 되었다는 점이다. 그들의 분노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분노가 생길 수밖에 상황이고, 분노는 반드시 풀어주어야 한다. 그런데 그 대상이 왜 시대와 나라와 위정자가 아니라 약자여야 하는가. 그건 명백한 오류다. 


이 영화가 괜찮은 이유


미시적으로 접근했기에 조금의 답을 찾을 수 있었다. 이런 류의 뿌리 깊은 대립은 개인 개인으로 접근해야 한다. 영화 <아메리칸 히스토리 X>의 한 장면 ⓒ뉴라인시네마



이 영화가 괜찮은 이유는 따로 있다. 그런 심각하고 첨예한 논란을 주제로 삼았다는 것도 점수를 듬뿍 줄 수 있겠지만, 그 문제를 굉장히 미시적으로 접근했다는 점이다. 통사적으로 접근했다면 오히려 받아들이기가 힘들었을지 모른다. 또한 조금의 답도 찾을 수 없었을 것이다. 더욱이 영화적으로 의미가 없었을 것이다. 그리하면 다큐멘터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게 된다. 


미시적으로 접근했기에 조금의 답을 찾을 수 있었다. 이런 류의 뿌리 깊은 대립은 개인 개인으로 접근해야 한다. 영화의 한 명대사가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네가 한 행동들이 너의 삶을 좋게 만들었니?" 누구보다 투철한 스킨헤드인 데릭도 그 한 마디에 아무런 대답을 할 수 없었다. 그들이 원하는 건 여하튼 더 좋은 삶일 텐데 말이다. 유색인종을 모두 몰아내고 백인들의 세상을 만드는, 그들의 입장에서는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그런 삶을 만드는 게 목표일 텐데 말이다. 


결국 황폐해질 수밖에 없는 행동을 했다는 것. 아무리 거창한 사상과 목표로 무장하고 있더라도 결코 삶을 더 좋게 만들 수 없다는 깨달음. 조직적인 거창함에서 사적인 삶의 세계로 내려올 때 알게 되는 깨달음이다. 거기엔 사소하지만 위대한 사랑과 우정이 있다.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게 바로 거기에 있다. 그걸 깨닫지 못하고는 이 대립은 영원히 끝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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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genv

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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