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네, 해봤나?" 현대그룹을 만든 고 정주영 명예회장의 유명한 말이다. 기업의 제1의 가치를 '도전'으로 치는 그의 정신이 집약되어 있는 한 마디라 하겠다. 그 한 마디가 지금의 현대를 만들었다는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여기 그의 또 다른 명언들을 보탠다. 현대만이 아니라 가히 지금의 경제대국 대한민국을 만든 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한 사람만이 해낸다." 누구라도 들으면 힘이 나며 '나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할 것 같다. 그리고 기필코 해내고야 말 것 같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말이다. 


그런데, 이 명언은 너무 간 것 같다. 도전과 열정을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 보고 한 말인 것 같다. 너무나도 좋은 의미의 '도전'과 '열정'을 무식하리만치 한 데 모아놨다. "길이 없으면 길을 찾아라. 찾아도 없으면 길을 닦아 나가야 한다." 이 말이 지금도 통용된다는 건, 우린 여전히 전후 1960년대를 살고 있는 것이리라. 


'열정 만수르' '열정의 대명사' 유노윤호




최근 여러 의미로 '열정'이 이슈다. 의욕적으로 일에 매진하던 사람이 극도의 신체적·정신적 피로감을 호소하며 무기력해지는 현상인 '번아웃 신드롬'이 전국민을 강타하며, 출판계에서는 '아무것도 안 하고 싶은' 바람과 생각을 글로 옮긴 책들이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이는 에세이의 강세와 맞물려 앞으로 계속될 전망이다. 


한편, 동방신기 멤버 유노윤호가 '열정 만수르' '열정의 대명사'로 자리잡은 사건(?)이 있었다. 3월 MBC '나 혼자 산다'에 출연해 기상하자마자 바로 춤연습에 돌입하는 모습을 보였고, 10월 JTBC '아는 형님'에 출연해 "열정만 있으면 안 되는 게 없다" "사람의 몸에 가장 안 좋은 해충은 바로 '대충'이라는 벌레다"라는 명언을 내놓았다. 


이후 '나는 유노윤호다'라는 유행어가 한동안 SNS뿐만 아니라 대형포털 검색어 상위권을 장식했다. 번아웃으로 쓰러지기 일보 직전이지만 쓰러질 수 없는 대다수 사람들에게 자조 섞인 주문처럼 받아들였던 것이다. 


지금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어야만 하는 사람들에게 유노윤호는, 그 예전 산업화 시대 때 그야말로 온몸을 바쳐 길을 만들며 앞으로 나아갔던 사람들의 정신적 우상 정주영과 다름 아니다. 시간이 흐르고 시대가 변하지만, 변하지 않는 게 있다면 사람들을 옥죄는 열정이라는 괴물이다. 


'아무것도 안 하고 싶다'고 외치는 에세이




요즘 출판계는 에세이가 대세다. 과거 정말 오랫동안 자기계발이 대세였던 적이 있는데, 직장인들이 필수로 봐야 했던 책이었기 때문이다. 끝없는 자기계발이야말로 회사에서 누구도 넘볼 수 없는 탄탄한 진로를 확립해주는 방법, 그 길이야말로 인생에서 가장 확실한 성공, 다름 아닌 자기계발 책들이 가르쳐주었다. 


이젠, 아니 적어도 지금은 아닌 것 같다. 그런 길이 성공의 길이라는 사실을 부정하는 게 아니라, 과연 성공이 무엇인지 성공을 왜 해야 하는지 궁극적으로 묻는 시기에 와 있는 것이다. 제목만 봐도 느껴지는 반(反)열정의 스멜 <하마터면 열심히 살 뻔했다> <아무것도 안 해도 아무렇지 않구나> <오늘은 이만 좀 쉴게요> 등의 책이 함께 한다. 


작년에는 사표를 내는 과정과 백수로 지내는 모습을 담은 에세이가 유행을 했었다. 사실 에세이라는 게 '쉼'을 매개체로 자신의 이야기를 내보이는 것이 목표인데, 지금의 시대 상황 또는 시대 정신과 잘 맞아들어가는 것이리라. 넓은 의미에서 이 또한 자기계발의 일환이라 할 수도 있겠다. 다만 방향이 정반대일 뿐이다. 


재작년 말 전국민이 직간접적으로 관련된 역사적 사건이 있었다. '촛불혁명', 당시 박근혜 정부의 온갖 개인적·사회적 문제를 두고볼 수 없었던 국민이 자발적으로 집회에 참여하여 결국 박근혜 대통령을 퇴진시키고 비리를 척결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경제 위기를 전면에 내세운 채 돌이킬 수 없는 정치 위기를 몸소 양산해내고 있던 '벌레'를 '퇴치'했다고 하면 너무한 말일까. 


결과적으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긍정적 결과를 도출해냈지만, 국가와 사회가 '알아서' 해야 할 일을 국민이 직접 나서서 할 수밖에 비극인 것 사실이기에 국가 전체가 번아웃에 걸렸을 테다. 큰 일을 치른 후 일상으로 돌아오면 너무나도 힘든 게 자명한 만큼, 이 사회와 개인들은 그야말로 '살' 방법을 찾고 있다. 사회의 미묘하고 세세한 부분들을 캐치하는 걸 잘하는 출판계, 그 대세의 변화는 소소한 일면일 뿐이다. 


적절한 균형


육체적·정신적 건강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게 무엇일까. '균형'이 아닐까. 인간을 이루는 한 개인뿐만 아니라, 이 공동체도 이 사회도 이 국가도 마찬가지다. 겪어본 결과 '열정'은 과하면 절대 안 될 테지만, 없어서도 절대 안 된다. 누구나 최소한의 열정은 가지고 살아가야 한다. 


최소한의 열정에 비례해 나머지를 채울 건 무엇인가. 말그대로 '대충하는 것' '열심히 하지 않는 것'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일까. 거기에 함정이 있다고 본다. '과도한' 모든 것엔 '과도한' 반대급부가 생기기 마련인데, 참으로 오래된 과도한 열정 괴물이 부른 참사나 다름 없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건 답이 될 수 없다. 


'가늘고 길게' 사는 것보다 '짧고 굵게' 사는 게 각광 받아 왔고 여전히 일면에선 각광 받고 있다. 이 '잛고 굵게'에 과도한 열정이 '잘 살아보자'는 말과 함께 그 자체로 자리를 잡고 있을 텐데, 그 반대급부이기도 하지만 적절한 균형에 맞춰 말하고 싶다. '가늘고 길게' 살자고. 아무것도 하지 말자는 프레임이 아닌, 누가 만든 기준인지 모를 '잘' 살 필요는 없다는 프레임에 맞추자는 이야기다. 


일단은 '그냥' 살아보자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예를 들면, 난 그냥 살고 있다. 그냥에는, 열심히 할 때도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도 꾸준히 할 때도 대충할 때도 속해 있다. 어느 한 방면을 '살아가는' 게 아니라 어느 한 방면을 '하는' 것이다. 영원이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어떻게 영원히 열심히 혹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살아가겠는가. 가늘고 길게, 지치지 않고 살아보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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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행복의 나라>


영화 <행복의 나라> 포스터. ⓒ인디스토리



지하철역 플랫폼, 어떤 남자 한 명이 철로로 뛰어든다. 자살을 하려는 것 같다. 옆에 있던 남자가 가방을 집어던지고 곧바로 뛰어든다. 자살하려는 남자를 구하려는 것 같다. 곧이어 열차가 들이닥치고, 구하려는 남자는 죽고 죽으려는 남자는 산다. 그로부터 8년이 지났다. 산 남자 민수는 결혼도 했고 아내가 임신도 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자신을 구하고 죽은 남자 진우의 제삿날 그의 집으로 향한다. 


아들 진우가 죽고 진우가 구한 민수를 아들처럼 생각하는 희자, 그녀의 민수를 향한 애정과 행동은 모두가 이해하지 못하고 이해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가장 꺼려하는 이는 민수이다. 그곳엔 자신을 구하고 대신 죽은 진우의 가족들이 있고, 그때마다 오는 진우의 여자친구였던 세희도 있다. 


민수는 결심한다. 더 이상 진우의 제삿날에 희자네 집으로 오지 않기로. 희자가 말한다. "아직은 이르다고 생각하지 않아?" 아들을 끔찍히도 생각했던 희자는 자신이 죽은 후엔 민수가 진우의 제사를 챙겨야 한다고 생각한다. 민수는 말한다. "그럼 제가 언제까지 와야 되요?" 그동안 할 만큼 했다고 생각하고, 결혼도 했고 아이도 생겼으니 민수도 더 이상 진우가 아닌 민수로 살고 싶다. 


죽고 싶었지만 살게 된 한 남자


영화 <행복의 나라>의 한 장면. ⓒ인디스토리



영화 <행복의 나라>는 죽고 싶었지만 강제로 살게 된 한 남자의 이야기다. 문제는 그를 대신해 죽고 싶지 않았던 한 남자가 죽게 되었다는 것. 그건 민수가 원하지도 않았고 행하지도 않았지만, 죽음보다 절대적으로 우위에 있는 삶 때문에 그는 죄의식을 짊어지고 살아야 한다. 


민수는 살고 싶다. 이렇게 사는 건 죽음보다 못한 것이기에. 민수는 행복하고 싶다. 하지만 희자는 그가 행복하는 걸 바라지 않는 것 같다. 비록 그를 진우의 대신으로 생각하지만 그는 진우가 아니기에. 영화는 삶과 죽음의 충돌, 민수의 죄의식과 삶에의 욕망의 충돌, 민수와 희자의 충돌, 희자의 민수를 향한 진우에 대한 충돌이 주를 이룬다. 


짧고 굵은 이 영화에서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하는 건 희자보다 민수이다. 시종일관 답답하고 축 처진 모습, 그것도 절반 이상 뒷모습만 보이는 그를 통해 죽음보다 더한 삶의 고통과 힘듦을 엿볼 수 있다. 그저 살아가는 것도 힘든데, 죽지 못해 사는 것 이상의 죽을 수도 없는 삶을 살아가는 건 무엇일지 가늠도 되지 않는다. 


생각해본다. 내가 '민수'라면이 아닌 내가 '희자'라면. 단순히 죽고 싶다라는 생각이 아닌 실제로 죽으려고 했던 민수의 생각을 따라가는 건 아무리 해도 힘들다. 감히 생각할 수도 없다. 반면,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세상을 떠났고 그를 대신해 살아난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는 건 가능은 할 것 같다. 


나라도 희자처럼 할 것 같다. '죽으려면 곱게 죽을 것이지 왜 하필 내 아들 앞에서 죽으려고 했느냐'고, 강제로 살려진 죽으려고 했던 이의 입장 따위는 생각하고 싶지도 생각하려고도 하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그게 솔직한 심정이고, 그게 지극히 인간적인 면모가 아닐까 싶다.


내가 '민수'라면. 자살하려는 생각을 따라가는 건 불가능할 테지만, 강제로 살려진 이후의 생각을 따라가는 건 가능은 할 것 같다. 너무나도 억울할 듯하다. 죽고자 했는데 강제로 살려진 것도 모자라 죄의식 속에 살아도 산 게 아닌 삶을 살아가고 있으니. 누가 살려달라고 했나... 희자는 뭘 바라는 걸까, 민수가 어떻게 하길 바라는 걸까. 


누구도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다


영화 <행복의 나라>의 한 장면. ⓒ인디스토리



우린 이 영화의 큰 두 축인 민수와 희자 모두 각각의 입장에 철저히 이해하고 공감하지만, 민수와 희자가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건 절대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럴 땐 한쪽이 사라져야 한다. 외부에서 보면 파국일, 그들이 보면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그 모습이어야 하는 것이다. 


영화 <해바라기>가 묘하게 겹쳐진다. 자신의 개차반 아들을 죽인 오태식이 철저히 교화되어 가석방되자 덕자는 그를 친아들 이상으로 따뜻하게 맞아준다. 태식은 그들과 함께 희망으로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 한다. 하지만, 세상은 그를 가만히 놔두지 않고 결국 파국으로 치닫는다. 그게 그의, 그들의 제자리인 것인가?


<행복의 나라>는 엄연히 다르다. <해바라기>의 태식과 덕자의 파국은 그들 간의 관계가 아닌 외부에서의 공격에 의한 것이지만, <행복의 나라>의 민수와 희자의 파국은 그들 간에 뿌리내려진 피할 수 없는 숙명의 관계에 의한 것이다. 


어느 누가 이들을 구원할 수 있을까. 서로 연락을 끊고 보지 않으면 되지 않느냐고 하지만, 민수가 평생 속죄하며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희자 입장에선 절대 그럴 수 없고 살고 싶고 행복해지고 싶은 민수 입장에선 안 보는 게 능사가 아닌 것이다. 


행복할 수 없는 곳에서, 행복할 수 없는 입장들이 양립하고, 행복할 수 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그들이 그저 불쌍할 뿐이다. 살아있는 그들 중 어느 누구도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다. 그들을 그렇게 만든 건 서로가 아닌, 죽고자 했던 민수를 살리고 죽은 희자의 아들 '진우'가 아닌가... 하지만 진우는 잘못은커녕 영웅적인 일을 했기에 탓할 수 없는 게 아닌가. 살아있는 한 행복이란 요원한 것인가. 그들은 행복할 자격이 없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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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간 책 다시읽기] 김훈 작가의 <칼의 노래>


김훈 작가의 소설 <칼의 노래> 표지 ⓒ문학동네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위대한 위인 세 명을 뽑자면, 고구려의 광개토대왕과 조선의 세종대왕, 이순신을 뽑지 않을까 싶다. 광활한 만주 대륙을 정복하고, 길이 남을 한글을 창제하였으며, 백전 백승으로 나라를 지켰다. 이 세 위인은 드라마(태왕사신기, 뿌리깊은 나무)와 영화(명량)은 물론 소설(뿌리깊은 나무, 칼의 노래)로 잘 알려져 있다. 


두 왕에겐 정치적 내홍이 없었다. 큰아버지 소수림왕이 국가의 틀을 완벽히 잡고 아버지 고국양왕이 잘 이은 와중에 뒷탈 없이 정복 전쟁에만 힘을 쏟은 광개토대왕, 아버지 태종이 대대적 숙청으로 완벽하게 왕권을 강화한 와중에 백성들을 위해 힘을 쏟은 세종대왕. 이러나 저러나 그들은 '왕'이었던 것이다. 


반면, 이순신에게는 평생 정치적 내홍이 뒤따랐다. 나라가 통째로 넘어가게 생긴 마당에 오직 이순신밖에 없을 정도의 위기 상황에서 이순신으로만 향하는, 향할 수밖에 없는 민심을 두려워한 왕(선조)과 왕을 따르는 무리들의 시기와 질투. 이순신은 외부의 적을 절대적으로 막아내야 하는 의무를 수행하는 동시에 내부의 적도 절대 무시할 수 없는 상황을 전쟁 내내 겪어야 했다. 


그는 역사에 길이 남을 절대적 영웅임에 분명하지만, 그러하기에 더더욱 이리저리 휘둘리고 고민하고 자책하고 그러면서도 앞뒤를 막아야 하는, 철저히 발가 벗겨진 인간 이순신을 알아야만 한다. 이 말도 안 되는 사면초가의 상황에서 이순신은 어떻게 해야 했을까. 어떻게 하고 싶었을까. 어떻게 했을까. 김훈 작가의 명작 소설 <칼의 노래>는 영웅 이순신이 아닌 인간 이순신을 알게 하는 좋은 기회를 선사한다. 


이순신이 감당해야 했던 것, 삶과 죽음


소설은 이순신의 백의종군으로부터 시작된다. 때는 1597년 4월 초, 같은 해 1월 일본군을 공격하라는 선조의 명령에 불복한 죄로 파직되어 서울로 압송된 후 고된 신문을 받은 후 3개월 만에 풀려난 것이다. 7월에 칠천량 해전으로 조선 수군이 궤멸되고, 8월 초에 이순신은 삼도수군통제사로 복귀한다. 그에게 남은 함선은 12척뿐이었다. 그는 12척으로 명량해전의 기적을 일으킨다. 


명량의 기적 이전에도 이후에도 그에겐 참으로 비현실적인 고민이 따라다녔다. 어디서, 어떻게 죽어야 하는지. 항상 사지(死地)를 물색했다. 전쟁을 치르며 이순신에겐 가족이 하나둘 죽어갔다. 당시 조선 어느 누가 그러지 않았겠냐마는, 머나먼 곳에서 나라의 명운을 홀로 짊어지고 있는 그에게 가족의 죽음을 생각하고 슬퍼하는 건 일종의 사치와 다름 아니었던 것이다. 


또한 수많은 적들을, 적들이지만 누군가의 가족임에 분명한 그들을 죽음으로 내몰기도 하였고 그 때문에 수많은 백성과 아군들도 죽어나갔다. 그에게 이 세상은 더 이상 유의미한 게 아니었다. 무의미한 세상을 살아가는 이유는 오직 하나였다. '내가 죽으면 조선은 끝장이다'.


사지를 물색한 건 당연한 것일 수도 있다. 적의 완벽한 궤멸과 절대적인 철수를 지켜본 후에야 눈을 감을 수 있었을 테고, 혹시라도 모를 그 이전의 죽음으로 조선 전체가 피로 물들지 않게 또는 덜 물들게 전라도 해안이 아닌 경상도 해안에서 죽어야 했다. 그에게 삶은, 죽음은 무엇이었을까. 


김훈은 이순신을 짓누르는 그 무게를 온전히 느낄 수 있게 1인칭 시점으로 그려낸다. 분명 이순신이라는 무게에, 이순신이 느꼈을 삶과 죽음의 무게에 처참하게 짓눌렸을 텐데, 그것들을 온전히 글로 승화시켜 우리에게 보여준다. 이순신이 감당했어야 할 모든 것들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참으로 많이 힘들고 아팠겠다. 


영웅 아닌 인간 이순신


시종일관 이순신이 염두에 두는 건 적만큼 알 수 없는 임금 선조의 의중이다. 임금은 이순신을 죽여야 사직을 보존할 수 있다고 믿었다. 조선의 국토가 유린당하는 와중에 백전 백승의 그에게로 쏠리는 민심이 두려웠다. 하지만 임금은 이순신을 살려야 사직을 보존할 수 있다는 걸 알았다. 임금은 적에게서 사직을 보존하고 싶었다. 이순신은 살았고 적 덕분에 적 앞에 섰으며 적을 무찌르고 나서는 임금의 손에 죽을 것이었다. 


진정한 절망은, 현재의 좌절에서 오지 않는다. 미래의 희망없음에서 오는 것이다. 이순신에게 미래 따위는 없었다. 결정된 죽음만이 있을 뿐. 그가 할 수 있는 건 그래서 사지를 물색하는 일뿐이었다. 그가 싸운 건 외부의 적(왜)과 내부의 적(임금), 그리고 무의미한 이 세상 그 자체였다. 


이순신은 세상에 칼로 베어버릴 수 없는 것들이 너무 많음에 절망했다. 오직 적들만 베어버릴 수 있었고, 그래서 그는 벨 수 있는 걸 벴다. 하지만 임금을 벨 수 없었고, 무의미를 벨 수 없었다. 악몽도, 끼니도, 자책도, 그 어느 것도 칼로 벨 수 없었다. '인간' 이순신에게 칼로 벨 수 없는 것들은 참으로 힘겹게 다가왔다. 그는 괴로웠다.  


<칼의 노래>에서의 이순신은 인간 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심지어 유약하다고 표현할 수도 있다. 맹렬히 진격하는 적의 칼끝을 피해 물러서기만 반복하다가 매복한 아군과 함께 적을 섬멸하고, 뭍의 적군 포탄이 닿지 않는 곳에서 정박되어 있는 적군 배를 섬멸하고, 물길과 뭍지형을 살펴 적이 스스로 섬멸되게 하고... 그가 행했던 백전백승 전투는 화려하지 않았고, 그의 전쟁은 그 전투들에 있지 않았다. 


이 소설을 기점으로 이순신은 더 이상 절대무력으로 적에게서 완전한 승리를 쟁취한 영웅전설의 주인공이 아니게 되었다. 이순신은 절대적으로 이겨야 하는 상황에서 화려하지 않은 완벽한 승리만을 원해야 했던 망국의 마지막 희망이었다. 완벽과는 거리가 너무도 멀었던 그, 그래서 역설적으로 이순신은 역사상 그 어느 위인보다 추앙받아 마땅하다. 이 책은 완벽히 수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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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슬로우 웨스트>


영화 <슬로우 웨스트> 포스터. ⓒ더 픽쳐스



1870년 미국의 콜로라도 깊숙한 곳, 16살 짜리 소년 제이(코디 스밋 맥피 분)는 사랑하는 애인 로즈를 찾으러 멀고 먼 스코틀랜드에서 왔다. 로즈는 제이의 귀족 친척을 실수로 죽인 아버지와 함께 도망쳤다. 신대륙에서 제이가 처음 마주친 건 마을을 잃고 피신 중인 듯 보이는 원주민들, 그리고 얼마 못 가 마주친 건 인디언 사냥꾼이다. 


발사되지도 않는 총을 가지고 다니는 제이는 그야말로 무방비 상태, 그때 나타난 현상금 사냥꾼 사일러스(마이클 패스벤더 분)가 인디언 사냥꾼을 죽이고는 제이에게서 돈을 받고 '서쪽'으로의 여정을 함께 한다. 미국 서부는 제이에게 희망과 착한 마음이 가득한 곳이고, 사일러스에겐 돈에 눈 먼 악당이 튀어나와 칼을 꽂는 곳이었다. 


이 둘의 여정은 쉬운듯 쉽지 않다. 느긋하기 짝이 없는, 느릿느릿한 속도와 분위기이지만, 가는 곳마다 위협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참으로 다양한 종류의 사람들을 마주친다. 인디언, 인디언 학살자, 현상금 사냥꾼으로 보이는 백인, 굶어 죽기 직전의 스웨덴계 가족, 학자 같아 보이는 독일계 사기꾼, 그리고 한때 사일러스가 몸 담았던 현상금 사냥꾼 패거리까지. 어려움이란 어려움을 다 뚫고 제이는 로즈를 다시 만날 수 있을까? 그저 생존하는 게 목적인듯 보이는 사일러스는?


'아름다운' 웨스턴 영화


영화 <슬로우 웨스트>의 한 장면. ⓒ더 픽쳐스



영화 <슬로우 웨스트>는 독특한 웨스턴 영화이자, 버디 로드 영화이자, 성장 영화이다. 이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장르를 한데 모은 것 자체가 충분히 독특하다 할 만하지만, 이 장르들 모두의 정통 문법에서 조금씩 빛나가거나 어긋나면서도 그것이 '파격의 부미(不美)'의 길을 가지 않는 묘미가 있다. 


즉, 이 영화는 영화 외적으로 파격의 길을 택했다는 측면에서도, 영화 내적으로 폭력과 고통이 기본 장착(?)되어 있는 곳이 배경이라는 점에서도, 결코 아름다울 수 없음에도 또 아름다움과는 하등 거리가 멀어보임에도 시종일관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유지하며 흔적을 남기고 영향을 끼친다. 


그건 다분히 허무맹랑하고 대책 없는 제이 덕분일 것이다. 생존이 전부인 것 같은 곳에서 생존이 전부는 아니라고 하고, 총칼보다 책을 더 소중히 여기고, 남을 죽이지 못하면 자신이 죽는 와중에 남을 죽이고서 죄책감을 느끼고, 보편적인 죽음이 일상화된 곳에서 죽음과 사랑을 동일시하고... 


실제였다면 진작 죽음을 면치 못할 게 분명한 제이는, 아름다운 동화처럼 반짝반짝 빛나는 이 웨스턴 영화에서 그 누구보다 눈에 띈다. 그리고 여러 면에서 파격을 택한 영화 또한 제이를 중심에 두고 제이의 여정과 그로 인한 성장을 기본 축에 둔 것처럼 보인다. 마치 소행성 B612에서 지구로 찾아와 가히 그 순수한 영혼으로 여행 중 많은 이들에게 영향을 끼치는 어린왕자처럼 말이다. 하지만 이 영화의 진정한 주인공은, '성장'의 주인공은 제이가 아닌 사일러스이다. 


산전수전 다 겪은 사일러스의 성장


영화 <슬로우 웨스트>의 한 장면. ⓒ더 픽쳐스



성장에는 필연적으로 변화가 수반된다. 생각해보면, 맹목적인 사랑과 희망, 착한 마음에의 찬가를 고수하는 제이에게 성장이 필요한가? 물론 폭력과 고통과 고난이 지배하는 곳에서 가장 필요없는 것들일지 모른다. 여기서 우린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려 다른 생각을 할 필요가 있다.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고는 총칼로 '침공'해 무차별로 빼앗고 죽인 백인들, 미국 서부 개척은 곧 과거 수백 년 동안 자행된 학살의 반복이다. 그런 배경 하에서 오직 생존에의 길은 수정되고 변화되어야 하는 성질의 것이 아닌가. 즉 성장이 필요하지 않은가 말이다. 그 모습이 당연하다고 하지만, 당연한 게 되어서는 안 되지 않은가. 


사일러스는 제이와의 여정으로 당연하지만 당연해서는 안 되는 자신의 길을 수정한다. 생존이 전부가 아니라는 깨달음을 얻는다. 이곳에서 생존이 전부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깨달음인 것이다. '당연히' 어리고 어리숙하고 어울리지 않는 제이의 성장 스토리라고 생각했지만, 산전수전 다 겪은 사일러스의 성장 스토리라고 생각하니 많은 것들이 보인다. 많은 것들을 생각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여기서 한 발짝 더 들어가볼 필요도 있다. 총칼을 앞세운 무단 통치로 기반은 다질 수 있지만 강력한 저항이 따르는 법, 이후엔 필수적으로 문화 통치가 필요하다. 그렇다면, 총칼 대신 사랑과 희망과 책의 문화로 서부를 개척해야 하는 것인가. 영화는 제이를 통해 그래야 했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인가. 역사적 배경까지 섭렵하여 성장의 주체 반전을 훌륭히 시도한 영화는, 그 때문에 새로운 논란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는 점을 인지할 필요도 있었다고 본다. 


삶과 죽음의 얇팍함


영화 <슬로우 웨스트>의 한 장면. ⓒ더 픽쳐스



영화에서 삶과 죽음은 제이와 사일러스의 여정에 따로 또 같이 한다. 가장 중요하게 다뤄지는 주제이기도 하다. 삶은 짧고 죽음은 길다고 했던가. 하지만 이곳에선 삶은 길고 죽음은 짧은 것 같다. 그저 살아가는 것뿐인 생존이야말로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기 때문인데, 모든 죽음이 하나 같이 허망하거니와 순간이다. 


<슬로우 웨스트>의 죽음은 그래서 전혀 '슬로우'하지 않다. 빠르고 간결하며 피가 난무하는 파티가 벌어지지 않는다. 대신 두 주인공마저 웃음 짓게 하는 죽음도 있다. 그런 죽음은 이곳과 어울리지 않는데, 그런 죽음들은 이곳의 선입견을 바꿔버리기에 충분하다. 죽음을 불사하는 개척정신과 문명을 확대시키려는 탐험정신의 위대함이 사실은 별 게 아니라는 것. 


죽음의 얇팍함은 삶의 얇팍함으로 이어진다. 당연히 이곳에서의 삶을 규정하는 생존 또한 얇팍하기 그지없다는 걸 말한다. 얇팍한 생존을 그저 영위하기 때문에 삶이 길어보인다. 이곳만의 삶을, 생을 지어올려야 한다. 타인을 죽이고 타인에게 죽임을 당하는 와중에 생존에의 삶이 되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이 영화의 대리인 제이가 곳곳에 흔적을 내고 영향을 끼치고 남은 이들에게 부여하려는 것이 다름 아닌 삶이다. 생존 그리고 생존과 대비되는 얇팍한 죽음이 판을 치는 곳의 삶이 아닌, 삶과 죽음 그리고 사랑의 보편적 진리 말이다. 그것들을 다시금 이곳에 뿌리내리는 건 굉장히 느릴 테지만, 반드시 성취될 것이다. 그 주체와 방법과 방향까지 영화가 제시하진 않는다. 혹은 못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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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보리 vs 매켄로>


영화 <보리 vs 매켄로> 포스터. ⓒ㈜엣나인필름



승부를 봐야 하는 스포츠계엔 필연적으로 라이벌이 존재한다. 현존하는 스포츠계 최고의 라이벌은 축구의 메시와 호날두일 것이다. 지난 10년 동안 최고의 남자 축구선수에게 수여하는 발롱도르 상을 5번씩 나눠가졌다. 이 둘을 제외하고는 3회 수상이 최다인 역사에서 5회면 역대 최고의 독재체제나 다름 없지만, 이들은 동시대에 이룩했다. 


남자 테니스로 눈을 돌려보자. 2010년대 세계 테니스엔 독주 체제가 없는, 그렇다고 확고한 라이벌 구도도 없는 춘추전국 시대 또는 'BIG N'에 가깝다. 2000년대엔 단연 로저 페러더와 라파엘 나달이었다. 이들은 2010년대에도 여전히 탑 오브 탑 클래스이다. 1990년대는 누가 뭐래도 피터 샘프라스와 안드레 애거시의 시대였다. 


1968년 테니스 프로화 시대, 이른바 '오픈 시대'가 시작되면서 오픈 시대 전 최강자 로드 레이버가 켄 로즈웰과 세계 테니스계를 양분했다. 그리고 대망의 1970~80년대다. 이때야말로 테니스의 전성기로 지미 코너스, 비외른 보리, 존 매켄로, 이반 렌들이 따로 또 같이 세계 테니스계를 지배했다. 


영화 <보리 vs 매켄로>는 이 레전드들 중 두 명인 비외른 보리와 존 매켄로의 1980 윔블던 결승전을 중심으로 그리는데, 세계 최초로 윔블던 5연패를 노리는 최강자 비외른 보리에게 떠오르는 강자 존 매켄로가 도전하는 형국이었다. 모든 이가 인정하는 최고의 선수들이 펼치는, 테니스 역사상 최고의 명승부이다. 


테니스 역사상 최고의 경기, 1980 윔블던 결승전


영화 <보리 vs 매켄로>의 한 장면. ⓒ㈜엣나인필름



수많은 테니스 대회 중에서도 메이저로 뽑히는 4개 오픈, 윔블던, US, 프랑스, 호주, 그중에서도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윔블던 오픈의 1980년이 시작되었다. 1976년부터 내리 4연패를 달성한 당대 최강자 스웨덴의 비외른 보리(스베리르 구드나손 분)이 단연 우승후보, 거기에 수많은 강자들이 도전한다. 미국의 떠오르는 신예 강자 존 매켄로(샤이아 라보프 분)이 눈에 띈다. 


이 둘은 너무나도 상반된 이미지와 경기 스타일을 지니고 있다. 보리는 차갑게 절제되고 침착하며 냉정한 분위기에 후방 공격형, 매켄로는 '코트의 악몽'이라는 별명을 가진 비신사적 분위기에 자신만만한 전진 공격형이다. 중요한 건 누가 뭐래도 보리와 매켄로는 당대를 넘어서 테니스 역사상 최고의 실력을 가진 이들이라는 것이다. 누가 이기고 누가 져도 이상하지 않은 이 둘의 결승전은 당연한듯, 어떤 경기가 펼쳐질까?


영화는 테니스 역사상 가장 유명한 결승전 경기 실화를 고스란히 다룬다. 당시를 완벽히 되살린 건 물론이다. 생김새, 행동, 복장, 분위기, 실력까지 말이다. 이는 야누스 메츠 패더슨 감독의 공이 큰 듯한데, 일찍이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극사실주의로 담아낸 다큐멘터리 <아르마딜로>로 다큐멘터리 영화로는 최초로 칸 영화제에서 비평가 주간대상을 받으며 세상을 놀라게 한 바 있다. 


남자 테니스 전설 비외른 보리와 존 매켄로에 천착하다


영화 <보리 vs 매켄로>의 한 장면. ⓒ㈜엣나인필름



종종 나오는 스포츠 영화들, 배우들이 해당 스포츠를 무리 없이 완벽히 소화해내는 것부터 쉽지 않다. 그렇기 때문일까, 대부분의 스포츠 영화들은 경기 또는 선수보다 스포츠를 통해 다른 걸 보여주려 한다. 당시의 시대상을 보여주거나, 감동을 주거나. 몇 없는 테니스 소재 영화 중 하나인 <윔블던>처럼 로맨틱 코미디인 경우도 있다. 


<보리 vs 매켄로>는 다른 곳엔 눈을 돌리지 않고 오로지 보리와 매켄로에게 천착한다. 당대를 충실히 재연했을 뿐 그렇게 재연한 당대를 통해 무엇을 전하거나 보여주려 하지 않는다. 감동? 감동은 이 둘의 결승전 재연을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우리는 1980년 당시의 보리와 매켄로가 어떤 심리 상태에 놓여 있었는지 알 수 있다. 


본인에게 철저한 감수를 받아 실화를 완벽하게 옮겼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영화이니 만큼 보고 납득이 가면 되는 것이다. 윔블던 4연패라는 위업을 이미 달성했지만 보리는 여전히 불안하다. 5연패를 하지 못하면 그저 잊힐 거라고, 사람들이 원하는 건 테니스 역사상 최초의 윔블던 5연패가 아닌 차갑고 견고한 영웅의 처참한 패배일 거라고. 


매켄로는 예의 그 판정에 거칠게 항의하는 비신사적인 행위 때문에 '코트의 악몽'이라는 별명뿐만 아니라 '알 카포네 이후 최악의 미국인'이라는 호칭까지 얻었다. 테니스란 신사가 하는 예의 바른 스포츠가 아닌가. 그는 매 경기마다 상대방 선수뿐만 아니라 나름대로 심판의 불공정한 판정, 그리고 엄청나게 쏟아지는 야유의 관중들과 싸워야만 했다. 거기에 그는 당시만 해도 보리에 비해 터무니 없는 애송이였다. 


보리와 매켄로의 삶


영화 <보리 vs 매켄로>의 한 장면. ⓒ㈜엣나인필름



영화는 보리와 매켄로의 현재보다 과거를 더 많이 오간다. 그들이 어떻게 테니스를 시작하게 되어서 어떤 성적을 올리고 어떤 고난을 극복해 이 자리에 오게 되었는지가 아닌, 그들이 어떤 심리 상태로 테니스를 해왔는지 말이다. 또는 어떤 심리 상태가 그들의 삶을 지배해 왔는지. 


'스포츠는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다'라는 말이 있는데, <보리 vs 매켄로>는 그 지점을 정확히 캐치해 영화 내내 지독하게 들여다보고 있는 것이다. 절대 겉으로 감정을 내보이지 않고 속에서 자신과 싸우고 있는 듯한 보리는 물론, 경기에서 자신을 제외한 모든 것들과 싸우고 있는 매켄로조차 들여다보면 결국 자기 자신과 싸우고 있었다는 걸 영화는 말하고 있다. 


영화 초반, 테니스 전설 안드레 애거시의 명언이 보인다. "테니스는 인생의 언어를 사용한다. 어드밴티지, 서비스, 폴트, 브레이크, 러브... 그래서 테니스 경기는 우리 삶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세상의 수많은 맞는 말이 있겠지만, 이 또한 맞는 말이다. 누가 부정하겠는가, 테니스가 곧 인생이라는 말을. 


하지만 이 또한 맞는 말일 것이다. 테니스 경기는 우리 삶의 일부분이라고 말이다.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건 얼핏 보리와 매켄로가 붙은 1980 윔블던 결승전일 테지만, 사실 그보다 중요한 건 보리와 매켄로의 삶이고 인생이 아닌가. 경기를 즐기는 입장에서 그들은 '도구'일지 모르지만, '도구'의 입장에서 그들 스스로는 그 자체로 '목적'인 것이다. 도구와 목적 사이에서 고민하고 싸우는 그들은 진정한 의미의 동료이다. 


우리는 모두 목적임이 분명하지만, 사실 대부분 도구로 살아가고 있다. 우리의 삶을 깊숙이 들여다볼 시간도 없지만 그럴 용기도 부족하다. 거기에서 무엇을 보게 될지... 영화에서 보리와 매켄로는 외부에서 떠들어대는 것과는 다르게 서로가 서로를 알아보는 것 같다, 이해하는 것 같다. 그래서 명승부가 연출되었던 것일까. 자신과 비슷한 서로를 위해 최선을 다했기에. 우리네 인생에도 한 번쯤 명승부가 연출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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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영화 <수성못>


영화 <수성못> 포스터. ⓒ인디스토리



대구 수성구 수성유원지 수성못에서 오리배 아르바이트를 하며 편입 공부를 병행하는 오희정(이세영 분), 그녀는 집안의 도움 없이 홀로 치열하게 분투한다. 어떻게든 이곳을 떠나 서울에 있는 대학으로 가기 위해서다. 그러던 비가 쏟아지던 어느 날, 손님도 없고 해서 쏟아지는 잠을 감당 못하는 사이 중년 남성 한 명이 무단으로 오리배를 탈취해 수성못으로 나아간다. 그러곤 곧 투신자살을 시도한다. 


희정은 오리배 담당자로서 당연히 지급해야 했던 구명조끼를 조느냐고 깜빡했다는 걸 사장이 알게 되면 잘리게 된다는 사실에 질겁한다. 당일 야밤에 몰래 구명조끼를 수성못에 버리려다가 때마침 촬영을 하고 있던 차영목(김현준 분)에게 들킨다. 그는 자살시도자들을 촬영하고 있었던 것. 영목은 희정의 비밀을 빌미로 그녀를 자살센터로 끌어들여 자살시도자 촬영을 도우게 한다. 


한편, 희정에겐 오빠 오희준(남태부 분)이 있다. 그는 아무런 생산적인 일도 하지 않고 아무도 만나지 않은 채 집에서 책만 들여다보고 있다. 그러며 희정에게 '하고 싶은 일도 있어서 좋겠다'고 푸념한다. 그는 자살충동에 못이겨 정신병원을 다니고 있는데, 군대에 가지 않으려는 수작 같기도 하고 군대를 못 가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KAFA 출신 감독의 장편 데뷔작 <수성못>


영화 <수성못>의 한 장면. ⓒ인디스토리



영화 <수성못>은 한국의 영화 사관학교라 불리는 한국영화아카데미(KAFA) 출신의 유지영 감독 장편 데뷔작이다. 이 작품은 KAFA의 2017년 장편데뷔작 기획전에 출품되었는데, 장편제작연구과정 9기의 대표 완성작 중 하나이다. 지난 2009년 시작된 이 과정의 기획전 대표작들을 들여다보면, 입이 떡 벌어진다. 


2010년엔 개인적으로 2000년대 한국 독립영화 중 최고라 할 만한 <파수꾼>이, 2013년엔 <잉투기>와 <들개>가, 2015년엔 <소셜포비아>와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 등을 선보였다. 출중한 데뷔작 이후 이렇다 할 활동을 하지 않는(못하는) 감독들이 상당한 게 마음에 걸리지만 KAFA의 능력에 의문을 품게 하진 않는다. 


<아기와 나> 등과 함께 2017년에 선보인 <수성못>. 3명의 주인공을 통해 보여주는 시선과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두루뭉술한듯 선명하고 식상한듯 신선하다. 청춘의 삶과 죽음, 삶과 죽음에의 치열함, 지방에서 여성으로 살아가는 것 등의 주제가, 수성못이라는 소재로 집결하고 수성못이라는 소재에서 비롯된다. 


'삶'도 '죽음'도, '치열하지 않음'도 치열한 청춘들


영화 <수성못>의 한 장면. ⓒ인디스토리



정녕 '삶'을 치열하게 살아가는 희정, 돈도 열심히 벌고 공부도 열심히 하고 운동도 열심히다. 이 시대, 바로 지금 가장 청춘다운 청춘의 모습이다. 그녀에게로 한 발자국 더 들어가보면, 지방과 여성이 보인다. 지방에선 성공할 수 없다는, 즉 이곳에서 살아선 안 된다는 열망과 함께 여성으로 살기 힘들다는, 즉 더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열망이 합쳐진다. 일반적인 청춘의 치열함보다 더 목적적이다. 


영목이 자살시도자를 촬영하고 그들의 말을 듣는 건 알고보니 사회봉사의 일환이었다. 그는 다름아닌 동반자살클럽회장으로, 동반자살을 주도했다가 실패한 경력이 있다. 정녕 '죽음'을 치열하게 치르려는 영목이다. 그 치열함에서 희정의 치열함이 떠오른다. '그들'의 '목적적'인 치열함 말이다. 그들은 대구를 떠나 서울로 가든 이승을 떠나 저승으로 가든, 지긋지긋한 '이곳'을 떠나 '그곳'으로 가려 한다. 


장강명 작가의 히트작 <한국이 싫어서>(민음사)가 겹쳐진다. '헬조선'을 탈출해 호주로 가려는 청춘들, 하지만 호주도 또 다른 '헬'일 뿐이라는 교훈 아닌 교훈을 던진다. 이 소설이 주로 탈출 이후까지의 이야기를 그리는 반면, <수성못>은 주로 탈출하기까지의 이야기를 그린다. 


삶이든 죽음이든 정녕 쉽지가 않다. 그러다 보니, 그들은 공중에 붕 떠 있는 것 같다. 영화는 그 모습을 수성못에 떠 있는 오리배라고 보았다. 하염없이 떠 다니지만, 절대 수성못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오리배들 말이다. 그 어떤 치열함으로도 대구를, 이승을 떠나지 못하는 그들이 애처롭다. 


그렇다면, '치열하지 않음'을 치열하게 내보이는 희정 오빠 희준은 어떨까. 우리 안에 희정과 영목의 결이 다른 치열함이 공존할 텐데, 당연히 희준의 치열하지 않음의 치열함도 존재할 것이다. 희정과 영목이 애처로운 개인들의 형상이라면, 희준은 그 개인들에게 있는 또 다른 형상이 아닐까. 혹은 있으면 하고 바라는 형상. 


광범위하게 그저 보여준다


영화 <수성못>의 한 장면. ⓒ인디스토리



영화는 삶과 죽음, 무엇을 지향하고 무엇을 지양하라고 가르치지도 가리키지도 않고 설교하지도 선언하지도 않으며 판단하지도 재단하지도 않는다. 그저 보여준다. 때론 우스꽝스러움 속의 진지함으로, 때론 흐리멍덩함 속의 적나라함으로. 


그 모든 모습이 우리의 모습이고 우리 주위의 모습이고 우리 사회의 모습인 게 맞다. 그래서 이 영화 <수성못>은, 독립영화가 흔히 추구하는 '사회의 한 단면'을 적나라하게 작가적 시점으로 파고드는 게 아니라 의외로 꽤나 광범위하게 들여다보고 있다. 


그러다 보니 파괴적인 영화적 재미에선 조금 떨어질 우려가 있는데, 자살이라는 소재와 더불어 극초반에 벌어진 자살미수 사건에서 비롯되는 소소한 미스터리를 흥미 유발의 원천으로 사용한다. 


대체로 적절하고 적정하고 적재적소한 이 영화, 감독의 능력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다만, 더욱 기억에 남는 영화를 남기기 위해선 오히려 이 영화의 장점이었던 적절함과 적정함을 버리고 한 곳을 파고드는 집요함이 필요해 보이기도 한다. 이제 갓 데뷔한 감독한테 흔히 보이는 패기 대신 노련함이 엿보이는 유지영 감독, 오히려 다음 작품에서 패기있는 모습을 보이면 좋겠다는 생각과 함께 그래서 더 기대가 되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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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소공녀>


영화 <소공녀> 포스터. ⓒCGV 아트하우스



<1999, 면회> <족구왕> <범죄의 여왕> 그리고 <소공녀>의 공통점은 무얼까? 한국 독립영화라는 점. 모두 괜찮게 감상했다는 점. 그리고 '광화문 시네마'라는 독립영화 제작사의 작품들이라는 점. 요즘 가장 유명하고 잘 나가는 독립영화 제작사로, 한국예술종합학교 대학원 동창이었던 감독 다섯 명과 프로듀서 한 명이 뭉쳤다고 한다. 


마블 영화의 대표적 아이콘인 '쿠키영상'을 광화문 시네마가 제작한 모든 독립영화에서 볼 수 있는데, 홍보가 쉽지 않은 독립영화의 여건 상 효과적인 방법임에 분명해 보인다. 영화 한 편의 홍보 뿐만 아니라 제작사 브랜드 가치를 높이는 데도 일조하고 있는 것 같다. 또한 독립영화 제작사로서 계속 영화를 찍고 있다는 걸 알리는 데도, 스스로 계속 영화를 찍어야 한다는 의무감(?)을 고취시키는 데도 큰 역할을 할 것이다. 


광화문 시네마는 6명의 한국예술종합학교 대학원 동창 중 전고운 감독과 김태곤 감독이 공동으로 대표를 맡아 이끌어 가고 있다. 김태곤 감독은 <1999, 면회>를 연출했고, 2년 전 <굿바이 싱글>로 흥행감독 반열에 올라섰다. 전고운 감독은 <소공녀>로 장편 데뷔를 했다. 


대한민국의 현시절


영화 <소공녀>의 한 장면. ⓒCGV 아트하우스



광화문 시네마가 제작한 네 번째 영화이자 최신작 <소공녀>는 2018년 현재 대한민국을 휘감는 트렌드들을 상당수 결합하여 '힙하다'고도 할 수 있을 정도의 분위기를 보여줌과 동시에, 3~40년 전 힘들기 짝이 없던 시절이 다시 시작되는 게 아닌가 하는 불안감이 엄습할 정도의 현시절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미소(이솜 분)는 하루 45000원을 벌어 혼자 살아가는 3년 차 가사도우미다. 월세 30만 원 짜리 단칸방에서 살면서, 매일 하루도 빠짐 없이 5000원 짜리 밥을 먹고 12000원 짜리 위스키 한 잔을 마시며 2500원 짜리 담배 한 갑을 피운다. 그런데 집주인이 월세를 5만 원 올려버렸다. 그리고 2015년이 되자 담배가 4500원으로 올라버렸다. 


매일 같이 가계부를 적는 미소는 2015년 새해 벽두 6000원 적자가 나자 포기해야 할 것을 생각한다. 그녀가 포기한 건 위스키 한 잔도, 담배 한 갑도, 빌빌 거리는 남자친구도 아닌 집이다. 그 즉시 집주인에게 밀린 월세를 청산하고 집을 나선다. 우선 대학교 때 함께 밴드 활동을 하며 즐겼던 크루 5명을 찾아가 당분간 신세를 져보려 한다. 


대기업으로 이직하기 위해 점심시간에 셀프 링거까지 맞아가며 일하는 베이스 문영, 30년 동안 중국집을 운영했던 시댁 부모님과 아무 일도 하지 않는 남편에게 형편 없는 음식 솜씨로 욕먹고 사는 키보드 현정, 결혼해서 없는 형편에 무리해서 아파트를 장만하여 20년 동안 돈을 갚아야 하는 이혼 위기남 드럼 대용, 늦은 나이에도 부모님 집에 얹혀 살며 빈둥대는 보컬 록이, 으리으리한 집에서 떵떵거리며 사는 것 같지만 남편 비위 맞추기에 급급할 뿐인 기타 정미. 그리고 웹툰 작가 지망생이자 현재 백수로 재직 중인 남자친구 한솔까지. 


2018년 트렌드와 인간 군상


영화 <소공녀>의 한 장면. ⓒCGV 아트하우스



영화는 'N포'를 기본으로 하는 트렌드들과 다양한 인간 군상을 결합시켰다. 특히 주인공 미소는, '미소 서식 환경, 즉 미생물·곤충 등의 서식에 적합한 곳'이라는 뜻의 영화 제목의 영문명 microhabitat과 '미생물·곤충'을 뜻하는 이름으로 유추해보고 더불어 하루 일당 45000원과 하루 위스키 한 잔, 담배 한 갑, 남자친구만 있으면 더 이상 바랄 게 없다는 말을 생각해볼 때 '소확행'(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의 전형을 보여준다. 


혹자는 그녀가 바라는 행복의 기준이 터무니 없거나 과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아니, 그렇게 생각하고 말하고 있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왜 위스키 한 잔과 담배 한 갑과 남자친구를 포기하지 않고 집을 포기했으냐는 것이다. 그리고 왜 일을 더 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이쯤에선 소확행 트렌드의 '유행적 부분'은 논의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더불어 그녀의 생각과 행동을 가성비가 아닌 가심비, 즉 가격 대비 마음의 만족을 추구하는 소비의 한 행태라고 할 수 있는 트렌드라고 치부할 수 없게, 해선 안 되게 된다. 


우린 잘 알고 있다. 영화도 우리가 아는 걸 잘 이해하고 있는 듯하다. 아무리 열심히 해도 한계가 있다는 걸 말이다. 2015년작 영화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가 보여준 열심·악착의 비극은 이제 포기·행복의 미학으로 변했다. 발전이라고 해야 할까, 퇴행이라고 해야 할까. 사회 전체로 보면 퇴행이겠지만, 개인으로 보면 발전이라고 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유행이 아닌 '삶의 방식'이라는 측면에서 이 트렌드를 바라봐야 하겠다. 


영화는 비단 한 개인의 일만은 아니라고 말한다. 미소가 집을 포기한 것처럼, 그녀가 찾아가는 친구들마다 모두 한 가지 이상은 포기하며 살아가고 있다. 다만, 친구들은 미소처럼 가심비의 트렌드를 따르지 않는, 따를 수 없는, 따를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런 미소를 보고 집이 없어 불쌍하다느니 청년 실업만큼 청년 주거 대책이 시급하다느니 하는 말은 어울리지 않을 수 있다. 이 트렌드는 유행도 아니고 사회정치도 아니다.


'웃픈' 비현재적 부분들


영화 <소공녀>의 한 장면. ⓒCGV 아트하우스



영화는 몇몇 부분, 아니 여러 부분에서 비현실 아닌 비현재적이다. 21세기 세계 경제대국 대한민국의 모습인가, 3~40년 전 경제·사회 과도기 대한민국의 모습인가. 경천동지할 정도로 세상이 바뀌었다지만, 바뀐 건 그걸 잘 받아들인 사람들 뿐이라는 게 씁쓸하게 다가온다. 이 세상의 하늘과 땅의 거리는 점점 벌어진다. 


이 비현재적인 장면들은 그야말로 '웃프다'. 한껏 찌질함을 풍겨 웃기고, 그 찌질함이 너무나도 진지한 자기신념에서 비롯된 것이기에 슬프다. 특히 광화문 시네마의 네 작품에서 모두 얼굴을 비친 페르소나 안재홍이 분한 미소의 남자친구 한솔의 면면은 웃픈 찌질함의 모든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소공녀>는 나에게, 우리에게 확고한 자기 신념과 삶의 방식이라는 트렌드 그 사이 어디쯤에 위치한 새로운 개념을 생각하게 한다. 그것이 나의 신념이자 내가 살아가는 방식이기에 어느 누구의 간섭도 듣지 않고 비난도 무시할 수 있지만, 과연 이 문제가 거기서 마무리 지을 수 있는 성격의 것인가. 아무리 사회정치적인 측면에서 생각하면 안 되는 지극히 개인적인 성격의 것이라고 하지만 말이다. 


배제시켜 단절되는 것과 존중하되 강제하지 않고 범 공동으로 함께 가는 것과는 천지 차이인 것이다. 기성세대는, 사회는, 정부는, 이 미생물·곤충처럼 작은 이들도 존중하고 또한 함께 가야하는 구성원으로 생각해야 하는 의무가 있다. 반면 이들은 어떤가. 이들은 기성세대, 사회, 정부에 반발하고 신념을 지키고 삶의 방식을 영위할 의무가 있는 건 아니지만 권리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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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간 책 다시읽기] 가즈오 이시구로의 <남아 있는 나날>


소설 <남아 있는 나날> 표지 ⓒ민음사



이야기가 옆길로 새는 건, 옆길로 새는 것처럼 느껴지는 데엔 몇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야기의 원류를 제대로 이어나갈 능력이 없거나, 하고 싶은 이야기가 너무나도 많거나, 옆길로 새는 것도 전부 이야기 원류의 거대한 판 안에 있다거나. 대개 하고 싶은 이야기가 너무나도 많으면 차라리 거대한 판을 만들어 버리곤 한다. 


그런데, 여기 오로지 거대한 판을 만든 것도 아니면서 옆길로 새는 것처럼 느끼게끔 하거니와 그것들이 전부 이야기 원류에 포함되어 있게 하는 작가가 있다. 가즈오 이시구로가 그인데, 그가 전하는 이야기는 그 자체보다 샛길의 이야기가 훨씬 재밌거니와 그 샛길이 원류로 이어지기에 결국 이야기 전체의 완성도가 터무니 없이 올라간다. 


아직 그의 소설을 <나를 보내지 마>와 <남아 있는 나날> 두 권밖에 읽지 않았지만 비슷한 느낌을 받았고, 거대한 이야기와 더불어 자잘한 이야기들이 가지는 재미와 인간 본령의 존재를 뒤흔들어 놓는 메시지가 엄청나다는 것도 똑같았다. 한 편으로 팬이 되어버렸고 두 편째를 보지 않을 수 없었으며 세 편째부터는 주기적으로 볼 생각이다. 


그가 궁극적으로 할 말은 정해져 있고, 그걸 제대로 보여주기 위해 무수히 많은 이야기들을 흥미롭게 전해주며, 우린 그저 순간순간을 즐기면 되는 것이다. 어느 순간 빠져 들며 자연스레 목적지에 도달해 생각하고 있었지만 한편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거대한 무엇에 맞닥뜨리고 만다. <남아 있는 나날>이야말로 정확히 그것이다. 


삶과 진실


1956년 영국의 저명한 저택인 달링턴 홀의 집사 스티븐스, 주인의 배려로 생애 첫 여행을 떠난다. 잉글랜드 서부로의 여행, 그 결정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건 주인이 아니라 오래전에 달링턴 홀을 떠난 켄턴 양의 7년 만의 편지였다. 그는 그녀가 돌아오고 싶다고 지레짐작하고는 그녀를 만나러 6일간의 여행길에 오른다. 와중에 자신의 인생을 회상하는 스티븐스이다. 소설은 여행과 회상의 투 트랙으로 진행된다. 


스티븐스는 1920~30년대 달링턴 홀의 주인 달링턴 경을 맹목적으로 모셨다. 그는 진정 '위대한 집사'로, 그것을 위해 아버지의 임종을 지키는 걸 포기했고 켄턴 양에 대한 감정을 억눌렀다. 그의 말마따라 사적인 실존을 포기하고 전문가적인 실존을 택한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위대한 집사의 필수조건. 


하지만 스티븐스의 회상이 거듭됨에 따라 하나둘씩 드러나는 진실은 그로 하여금 정체성의 혼란을 일으키게 한다. 그의 인생과 사랑에 앞서 그를 규정하는 '위대한 집사'라는 정체성 말이다. 그리고 그걸 회상하는 지금은 인생의 황혼기, 회상은 곧 후회와 다름 아니다. 앞으로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의미부여가 쉽지 않다. 


소설은 '남아 있는 나날' 즉 미래에 방점을 둔 제목과는 다르게, 회상과 여행 즉 과거와 현재에 방점을 둔 내용을 전한다. 곧 소설의 지향점은 미래에 있고, 주인공이 가야 할 곳도 결국 미래라는 얘기일 것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건 스티븐스의 정체성 혼란을 일으키는 '진실'일 텐데, 그건 무엇일까. 


인생과 사랑


진실은, 스티븐스가 충분히 알 수도 있었을 것이고 반드시 알아야 하는 것들이다. 그가 위대한 집사의 옷을 입고 맹목적으로 모신 달링턴 경이 나치 지지자였다는 사실과, 그가 위대한 집사의 옷을 입어 자신의 진정한 실존을 가린 결과 떠나보낸 켄턴 양을 사랑했었고 지금도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 개념과 '아이히만'이 생각나지 않을 수 없다. 그저 자신의 일만 성실하게 했을 뿐인 아이히만, 그는 지극히 평범한 인간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가 한 짓은 역사상 최악의 '악'으로 귀결된다. 그 너머의, 그 이면의 진실은 알고자 하지 않았고 알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스티븐스와 겹치는 부분이다.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사랑이라는 개념을 녹여내게 한 켄턴 양의 존재가 가즈오 이시구로표 문학의 진정한 발화점이다. 그녀야말로 스티븐스로 하여금 계속 나아가게 하는 힘의 원천이었거니와, 한편으로 그가 과거를 회상함으로써 정체성의 혼란이라는 필수적인 아픔을 겪게 한 장본인인 것이다. 켄턴 양 덕분에 스티븐스라는 캐릭터는 극히 평면적인 인물에서 입체적인 인물로 변모했다. 


스티븐스는 어떻게 해야 할까. 지나간 시간을 후회하며 살아가야 할까, 어떻게든 앞으로 나아가야 할까. 저자는, 소설은 말한다. 나아가야 한다고. 그의 과오 아닌 과오 또는 명백한 과오를 뒤로 하는 게 아니라 함께 가야 한다고 말이다. 남아 있는 나날은 많지 않을지 모르지만 인생과 사랑을 깨달을 시간과 양식은 충분하다. 


남아 있는 나날 - 10점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송은경 옮김/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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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리뷰] <코코>


<코코> 포스터.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픽사, 디즈니, 혹은 픽사&디즈니는 거의 매해 우리를 찾아와 거의 실망을 안기지 않았다. 세상이 점점 디지털화 되어가는 만큼 최첨단 디지털 기술로 나날이 완벽해가는 애니메이션을 선보이는 동시에, 살아가는 데 기본 중에 기본이 되는 지극한 아날로그적 가치를 선보인다. 그 조화는 가히 환상적이다. 


픽사&디즈니의 애니메이션이 아이들보다 어른들에게 더 와닿는 연유가 역설적으로 거기에 있다 하겠다. 조금이라도 더 어른일수록 조금이라도 더 아날로그적인 습성이 남아 있지 않겠는가. 그걸 접해본 사람이라면 그리워하지 않을 수 없고 말이다. 영화 <코코>의 기본은 '가족' '사랑' '우정' '화해' '기억' 등의 가치이다. 


<코코>는 멕시코라는 이질적이라면 이질적이고 친숙하다면 친숙한 곳의 '죽은 자의 날'이라는 멕시코 전통 명절을 배경으로, 현실과 비현실이 만나고 삶과 죽음이 모이며 흩어진 가족과 멀어진 사랑이 다시 만난다. 그 가장 중요한 키를 '코코'가 지니고 있지만, 그 사이사이를 이어주는 이들은 따로 있다. 


죽은 자의 날, 미구엘의 모험 아닌 모험


죽은 자의 날, 미구엘의 모험 아닌 모험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아빠가 음악가인 한 가족이 있었다. 그들은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즐거운 나날을 보냈다. 하지만 아빠는 꿈을 이루기 위해 가족을 뒤로 하고는 떠나버린다. 홀로 남은 엄마는 살기 위해 신발을 만든다. 그녀는 신발 만드는 법을 온가족에게 퍼뜨리고 집안 자체가 신발 만드는 기업이 된다. 여기 그 아빠와 엄마를 고조할아버지와 고조할머니로 둔 미구엘이 있다. 하지만 그는 음악을 좋아라 한다...


미구엘의 고조할아버지 때문에 멕시코에서 유일하다시피 음악을 멀리하게 된 미구엘의 집안, 그럼에도 그는 멕시코 최고의 음악가 에르네스토 델라 크루즈의 '기회를 잡아라'라는 말을 듣고는 꼭 음악가 광장에서 연주를 하려고 한다. 할머니가 부셔버린 기타 대신 그가 택한 기타는 델라 크루즈 납골당에 전시해놓은 기타. 


하필 그 날은 '죽은 자의 날', 미구엘은 그 기타를 훔쳐 한번 튕기는 순간, 죽은 자의 세계로 가버리고 만다. 미구엘은 다시 산 사람의 세계로 돌아가고자 하는데, 이멜다 고조할머니는 음악을 절대 하지 않는다는 조건 하에 그의 저주를 풀어주고자 한다. 하지만 미구엘은 그런 조건이라면 사절! 우연한 기회에 자신의 고조할아버지라고 믿게된 델라 크루즈에게 축복을 받고자 길을 떠난다. 


기억, 사랑, 통섭...


기억, 사랑, 통섭...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죽은 자의 날'은 스페인의 침략 이전부터 이어져 내려온 멕시코의 전통 명절이다. 해골과 뼈 모양의 조형물이나 사탕을 만들고, 죽은 사람의 사진과 이름을 제단에 올리고는, 여러 종류의 축제를 연다. 이승과 저승이 이때만큼은 한 곳에 모여 어울리는 것이다. 영화에서도 굉장히 중요하게 비치는 바, 제단에 사진과 이름이 올라가 있지 않으면 저승에 있는 이가 이승으로 갈 수 없다. '기억'의 소중함...


멕시코에서 음악은 곧 삶이다. 멕시코인들은 비록 고단한 삶이지만 와중에 '사랑'을 최고의 가치로 치며 스페인 등의 풍습과 문화가 혼합된 특유의 낭만과 열정이 이를 뒷받침한다. 음악은 사랑을 표현하기 위한 최고의 수단인 것이다. 한편 잘 드러내려고 하진 않지만 이면에 항상 있는 슬픔 또한 음악만큼 잘 표현해낼 수 있는 수단이 없다. 미구엘의 가족이 음악으로 흩어졌다지만 반드시 음악으로 다시 뭉칠 수밖에 없을 거다. 


<코코>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가치는 픽사&디즈니가 추구하는 가치와 일맥상통하는 '통섭'이 아닐까 한다. 서로 소통하고, 전체 또는 부분들을 하나로 잇는 것 말이다. 미구엘과 그의 강아지 친구 단테는 참으로 꼬이고 꼬여 대대로 끊어져버린 태초의 끈을, 음악이라는 그 끈을 다름 아닌 음악으로 잇고자 한다. 그 와중에 가족이 있고 사랑이 있고 화해가 있고 기억이 있다. 그 작업은 쉽지 않지만 반드시 해내고 말 것이다. 


삶과 죽음이 하나되는 시간


삶과 죽음이 하나되는 시간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아쉬운 부분도 없지 않아 있다. 가족이라는 명제를 다시 생각해야 하는 시대에 전통적이기 짝이 없는 케케묵은 가족 개념을 선보이고 있다는 점, 살아생전 얼마나 잘 살았냐에 따라 죽어서도 계급이 나뉘어 지는 듯한 모습 등 말이다. 보편적이고 아날로그적인 가치를 전하기 위해 희생할 수밖에 없었다고 하지만, 조금 더 신경 써 주었으면 하는 부분들이다. 


그럼에도 영화는 급기야 20년이 넘은 기억부터 5년 전 기억까지 불러낸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증조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외삼촌이 돌아가셨을 때... 어떤 건 희미해져 한 장면 정도밖에 기억나지 않고, 어떤 건 여전히 생생하기 그지 없어 가슴이 아리고 쓰린 그 기억들이 차례로 떠오른다. 그들이 기억하는 게 그들로 하여금 저승에서조차 사라지지 않게 한다는 영화 속 깨달음. 


한편, 충격이라면 충격일 수 있지만 따뜻하기 그지 없게 다가온 부분도 거기에 있다. 삶과 죽음이 하나되는 장면,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이 한 곳에 모여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며 삶과 죽음 모든 것들을 축복한다. 우리에게 죽음은 너무나도 먼, 무섭고 두려운 무엇이 아닌가. 우리도 제사를 지내며 조상님을 모시지만 그건 굉장히 엄숙한 자리가 아닌가. 멕시코가 부러워지는 것이다, 이 영화 한 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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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의 <히어애프터>


클린트 이스트우드답지 않은 소재를 클린트 이스트우드답게 풀어낸 작품 <히어애프터>. ⓒ워너브라더스코리아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의 수많은 작품 중에서 단연 튀는 작품이 있다. <히어애프터>가 그 작품이다. 그의 연출 특징상 어떤 사건을 다루든 특별할 것 없는 일상에서 벗어나지 않는 느낌을 드러내곤 하는데, 그래서인지 SF나 초자연적인 소재를 다루는 건 상상하기 힘들다. 현실과 비현실 사이에는 건너기 힘든 강이 있지 않은가. 


<히어애프터>는 죽음 이후를 다룬다는 점에서, 다른 누구도 아닌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작품이라는 점에서 특이하다 하겠다. 더 눈길이 가는 건, 비현실적인 소재임에도 마치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한 현실적인 연출이라는 데 있다. 어떻게 비현실에서 현실을 끄집어낼까 자못 궁금하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답지 않은 소재를 가져와 클린트 이스트우드답게 풀어낸 것이리라. 


그의 필모에서 <설리> <아메리칸 스나이퍼> <그랜 토리노> 등의 다분히 문제적이고 약간은 정치적인 성향의 작품 또는 <미스틱 리버> <체인질링> 등의 이야기 중심의 드라마가 아닌, <히어애프터>는 <밀리언 달러 베이비> <인빅터스> 등의 인생 감성을 노래하는 드라마와 결을 같이 한다.


'죽음'이라는 질문에 직면하다


죽음과 직간접적으로 직면한 주인공들. 죽음은 분명 삶과 맞닿아 있다. 하지만 죽음과 삶은 멀디 멀다. ⓒ워너브라더스코리아



마리(세실 드 프랑스 분)는 프랑스에서 휴가를 보내다가 거대한 쓰나미에 쓸려 죽는다. 아니, 죽음의 문턱에 이르렀다가 다시 살아난다. 사지를 헤맨 것이리라. 그곳에서 마리는 믿기 힘든 광경을 목격한다. 흔히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들이 봤다는 광경 말이다. 그녀는 그 광경에서 헤어나오기 힘들고, 사람들은 그녀를 이상하게 생각한다. 


조지(멧 데이먼 분)는 미국에서 공장 노동자로 생활한다. 사실 그는 사후세계를 보고 느끼고 그곳의 사람들과 대화할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영매로 전천후 활동을 했었다. 하지만 그로 인해 무너지는 삶 때문에 환멸을 느끼고 그만두었다. 그때문에 알지 말아야 할 사실들을 알게 되고, 사람들은 그를 멀리한다. 


마커스는 영국에서 술중독자 편모 슬하에서 쌍둥이 형과 함께 생활한다. 형은 그에게 세상 무엇보다 중요한 사람인데, 어느 날 그를 대신해 심부름을 갔다가 교통사고로 비명횡사한다. 믿기 힘든 일을 당한 마커스는 아직 형을 떠나보내지 못했다. 형도 마찬가지일 거라 생각한 그는 거기 어딘가에 있는 형과 말하고 싶다. 


전혀 다른 곳에서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가는 셋은 '죽음'이라는 공통된 질문에 직면한다. 죽음에 다다랐던 사람이나 죽음 이후의 세계를 들여다볼 수 있는 사람이나 눈앞에서 분신을 잃고 죽음 이후의 세계와 대화하고 싶은 사람이나 모두 죽음을 대하는 게 힘들다. 그들은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삶과 죽음은 단절되어 있지 않지만, 서로 건너기 힘든 강을 마주보고 있다. 


'죽음'을 보여주지만 '삶'을 말하다


영화는,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죽음을 통해 삶을 말하고자 한다. ⓒ워너브라더스코리아



영화는, 그러나 죽음을 말하려는 게 아니다. 분명 세 주인공의 세 이야기는 사후, 즉 죽음 이후를 바라보고 향하고 그곳에 다다르려 하지만 그렇게 해서 얻고자 하는 건 결국 '삶'이다. 영화가 우리에게 다다르기 힘들고 상상하기 힘든 '히어애프터'를 단번에 보여주는 건 죽음과 죽음 이후까지 아우르는 삶의 확대를 꽤하기 위해서인 것이다. 


우리는 선천적으로든 의도적으로든 삶에서 죽음을 지워버린다.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 삶을 살아가지만 죽음을 살아갈 순 없기 때문에 자연스레 지워진 것일 테고, 한순간도 경험해보지 못했기 때문에 애초에 생각조차 하기 힘들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죽음을 향해 살아간다. 이 순간에도 계속 죽어간다. 모두들 알고 있다. 


우리 모두 영화의 세 주인공 또는 세 이야기와 어떤 식으로든 연관되어 있다. '사후 세계를 보고 살아 돌아온 사람' 이야기는 은근 수없이 들어왔을 테고, 죽어서 옆에 없는 소중한 사람과 이야기하고 싶지 않은 사람을 없을 테며, 살면서 소중한 사람이 죽지 않은 사람도 없을 거다. 그럼에도 우리 모두 잘 살고자 한다. 


영화가 '웰다잉'을 말하려는 건 아니다. 삶의 연장선상에서 죽음을 직시하고 죽음에 좀 더 관심을 두고자 하는 건 같지만, 죽음을 잘 대비하는 등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말하지는 않는다. 그런 면에서 영화는 오히려 삶에 더 천착한다. 죽음에 가까이 있는 만큼 삶에 감사하게 된 것이다. 


소외된 사람들의 이야기


영화는 한편 소외된 사람들, 즉 죽음에 직면해 삶에서 멀어진 사람들을 조명한다. ⓒ워너브라더스코리아



그럼에도, 삶에서 죽음을 말하는 건 외롭고 고독하다. 경험해보지 않은 것을 머리로는 받아들이되 가슴으로는 받아들일 수 없다. 궁금하고 흥미롭지만 곁에 두고 싶지는 않다. 세 주인공은 하나같이 혼자다. 외롭고 고독해 죽음 이후에서 길을 찾고자 한다. 하지만 그들은 살아 있지 않은가. <히어애프터>는 그래서 생각지도 못한 소외된 사람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마리와 조지는 특별한 경험을 했고 특별한 능력도 가지고 있지만 결국 혼자가 된다. 혼자가 될 수밖에 없는 경험이고 능력이다. 그게 지금 이 세상의 한계일지 모른다. 반대로 그게 이 영화의 특별한 점일 것이다. 특별한 걸 특별한 연출이 아닌 담담한 연출로 다루어 일상에 편입시킨 뒤 소외의 개념으로 치환시킨 점 말이다.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만의 드라마 스타일이 만들어낸 이야기, 캐릭터, 소구점이다. 


이 영화로 삶을 다시 보았는가, 이 영화로 죽음을 다시 생각했는가, 이 영화로 사후 세계에 흥미가 생겼는가. 모두 그랬을지도, 모두 그러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중요한 건 생각의 전환, 시각의 확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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