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보리 vs 매켄로>


영화 <보리 vs 매켄로> 포스터. ⓒ㈜엣나인필름



승부를 봐야 하는 스포츠계엔 필연적으로 라이벌이 존재한다. 현존하는 스포츠계 최고의 라이벌은 축구의 메시와 호날두일 것이다. 지난 10년 동안 최고의 남자 축구선수에게 수여하는 발롱도르 상을 5번씩 나눠가졌다. 이 둘을 제외하고는 3회 수상이 최다인 역사에서 5회면 역대 최고의 독재체제나 다름 없지만, 이들은 동시대에 이룩했다. 


남자 테니스로 눈을 돌려보자. 2010년대 세계 테니스엔 독주 체제가 없는, 그렇다고 확고한 라이벌 구도도 없는 춘추전국 시대 또는 'BIG N'에 가깝다. 2000년대엔 단연 로저 페러더와 라파엘 나달이었다. 이들은 2010년대에도 여전히 탑 오브 탑 클래스이다. 1990년대는 누가 뭐래도 피터 샘프라스와 안드레 애거시의 시대였다. 


1968년 테니스 프로화 시대, 이른바 '오픈 시대'가 시작되면서 오픈 시대 전 최강자 로드 레이버가 켄 로즈웰과 세계 테니스계를 양분했다. 그리고 대망의 1970~80년대다. 이때야말로 테니스의 전성기로 지미 코너스, 비외른 보리, 존 매켄로, 이반 렌들이 따로 또 같이 세계 테니스계를 지배했다. 


영화 <보리 vs 매켄로>는 이 레전드들 중 두 명인 비외른 보리와 존 매켄로의 1980 윔블던 결승전을 중심으로 그리는데, 세계 최초로 윔블던 5연패를 노리는 최강자 비외른 보리에게 떠오르는 강자 존 매켄로가 도전하는 형국이었다. 모든 이가 인정하는 최고의 선수들이 펼치는, 테니스 역사상 최고의 명승부이다. 


테니스 역사상 최고의 경기, 1980 윔블던 결승전


영화 <보리 vs 매켄로>의 한 장면. ⓒ㈜엣나인필름



수많은 테니스 대회 중에서도 메이저로 뽑히는 4개 오픈, 윔블던, US, 프랑스, 호주, 그중에서도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윔블던 오픈의 1980년이 시작되었다. 1976년부터 내리 4연패를 달성한 당대 최강자 스웨덴의 비외른 보리(스베리르 구드나손 분)이 단연 우승후보, 거기에 수많은 강자들이 도전한다. 미국의 떠오르는 신예 강자 존 매켄로(샤이아 라보프 분)이 눈에 띈다. 


이 둘은 너무나도 상반된 이미지와 경기 스타일을 지니고 있다. 보리는 차갑게 절제되고 침착하며 냉정한 분위기에 후방 공격형, 매켄로는 '코트의 악몽'이라는 별명을 가진 비신사적 분위기에 자신만만한 전진 공격형이다. 중요한 건 누가 뭐래도 보리와 매켄로는 당대를 넘어서 테니스 역사상 최고의 실력을 가진 이들이라는 것이다. 누가 이기고 누가 져도 이상하지 않은 이 둘의 결승전은 당연한듯, 어떤 경기가 펼쳐질까?


영화는 테니스 역사상 가장 유명한 결승전 경기 실화를 고스란히 다룬다. 당시를 완벽히 되살린 건 물론이다. 생김새, 행동, 복장, 분위기, 실력까지 말이다. 이는 야누스 메츠 패더슨 감독의 공이 큰 듯한데, 일찍이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극사실주의로 담아낸 다큐멘터리 <아르마딜로>로 다큐멘터리 영화로는 최초로 칸 영화제에서 비평가 주간대상을 받으며 세상을 놀라게 한 바 있다. 


남자 테니스 전설 비외른 보리와 존 매켄로에 천착하다


영화 <보리 vs 매켄로>의 한 장면. ⓒ㈜엣나인필름



종종 나오는 스포츠 영화들, 배우들이 해당 스포츠를 무리 없이 완벽히 소화해내는 것부터 쉽지 않다. 그렇기 때문일까, 대부분의 스포츠 영화들은 경기 또는 선수보다 스포츠를 통해 다른 걸 보여주려 한다. 당시의 시대상을 보여주거나, 감동을 주거나. 몇 없는 테니스 소재 영화 중 하나인 <윔블던>처럼 로맨틱 코미디인 경우도 있다. 


<보리 vs 매켄로>는 다른 곳엔 눈을 돌리지 않고 오로지 보리와 매켄로에게 천착한다. 당대를 충실히 재연했을 뿐 그렇게 재연한 당대를 통해 무엇을 전하거나 보여주려 하지 않는다. 감동? 감동은 이 둘의 결승전 재연을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우리는 1980년 당시의 보리와 매켄로가 어떤 심리 상태에 놓여 있었는지 알 수 있다. 


본인에게 철저한 감수를 받아 실화를 완벽하게 옮겼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영화이니 만큼 보고 납득이 가면 되는 것이다. 윔블던 4연패라는 위업을 이미 달성했지만 보리는 여전히 불안하다. 5연패를 하지 못하면 그저 잊힐 거라고, 사람들이 원하는 건 테니스 역사상 최초의 윔블던 5연패가 아닌 차갑고 견고한 영웅의 처참한 패배일 거라고. 


매켄로는 예의 그 판정에 거칠게 항의하는 비신사적인 행위 때문에 '코트의 악몽'이라는 별명뿐만 아니라 '알 카포네 이후 최악의 미국인'이라는 호칭까지 얻었다. 테니스란 신사가 하는 예의 바른 스포츠가 아닌가. 그는 매 경기마다 상대방 선수뿐만 아니라 나름대로 심판의 불공정한 판정, 그리고 엄청나게 쏟아지는 야유의 관중들과 싸워야만 했다. 거기에 그는 당시만 해도 보리에 비해 터무니 없는 애송이였다. 


보리와 매켄로의 삶


영화 <보리 vs 매켄로>의 한 장면. ⓒ㈜엣나인필름



영화는 보리와 매켄로의 현재보다 과거를 더 많이 오간다. 그들이 어떻게 테니스를 시작하게 되어서 어떤 성적을 올리고 어떤 고난을 극복해 이 자리에 오게 되었는지가 아닌, 그들이 어떤 심리 상태로 테니스를 해왔는지 말이다. 또는 어떤 심리 상태가 그들의 삶을 지배해 왔는지. 


'스포츠는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다'라는 말이 있는데, <보리 vs 매켄로>는 그 지점을 정확히 캐치해 영화 내내 지독하게 들여다보고 있는 것이다. 절대 겉으로 감정을 내보이지 않고 속에서 자신과 싸우고 있는 듯한 보리는 물론, 경기에서 자신을 제외한 모든 것들과 싸우고 있는 매켄로조차 들여다보면 결국 자기 자신과 싸우고 있었다는 걸 영화는 말하고 있다. 


영화 초반, 테니스 전설 안드레 애거시의 명언이 보인다. "테니스는 인생의 언어를 사용한다. 어드밴티지, 서비스, 폴트, 브레이크, 러브... 그래서 테니스 경기는 우리 삶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세상의 수많은 맞는 말이 있겠지만, 이 또한 맞는 말이다. 누가 부정하겠는가, 테니스가 곧 인생이라는 말을. 


하지만 이 또한 맞는 말일 것이다. 테니스 경기는 우리 삶의 일부분이라고 말이다.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건 얼핏 보리와 매켄로가 붙은 1980 윔블던 결승전일 테지만, 사실 그보다 중요한 건 보리와 매켄로의 삶이고 인생이 아닌가. 경기를 즐기는 입장에서 그들은 '도구'일지 모르지만, '도구'의 입장에서 그들 스스로는 그 자체로 '목적'인 것이다. 도구와 목적 사이에서 고민하고 싸우는 그들은 진정한 의미의 동료이다. 


우리는 모두 목적임이 분명하지만, 사실 대부분 도구로 살아가고 있다. 우리의 삶을 깊숙이 들여다볼 시간도 없지만 그럴 용기도 부족하다. 거기에서 무엇을 보게 될지... 영화에서 보리와 매켄로는 외부에서 떠들어대는 것과는 다르게 서로가 서로를 알아보는 것 같다, 이해하는 것 같다. 그래서 명승부가 연출되었던 것일까. 자신과 비슷한 서로를 위해 최선을 다했기에. 우리네 인생에도 한 번쯤 명승부가 연출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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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영화 <수성못>


영화 <수성못> 포스터. ⓒ인디스토리



대구 수성구 수성유원지 수성못에서 오리배 아르바이트를 하며 편입 공부를 병행하는 오희정(이세영 분), 그녀는 집안의 도움 없이 홀로 치열하게 분투한다. 어떻게든 이곳을 떠나 서울에 있는 대학으로 가기 위해서다. 그러던 비가 쏟아지던 어느 날, 손님도 없고 해서 쏟아지는 잠을 감당 못하는 사이 중년 남성 한 명이 무단으로 오리배를 탈취해 수성못으로 나아간다. 그러곤 곧 투신자살을 시도한다. 


희정은 오리배 담당자로서 당연히 지급해야 했던 구명조끼를 조느냐고 깜빡했다는 걸 사장이 알게 되면 잘리게 된다는 사실에 질겁한다. 당일 야밤에 몰래 구명조끼를 수성못에 버리려다가 때마침 촬영을 하고 있던 차영목(김현준 분)에게 들킨다. 그는 자살시도자들을 촬영하고 있었던 것. 영목은 희정의 비밀을 빌미로 그녀를 자살센터로 끌어들여 자살시도자 촬영을 도우게 한다. 


한편, 희정에겐 오빠 오희준(남태부 분)이 있다. 그는 아무런 생산적인 일도 하지 않고 아무도 만나지 않은 채 집에서 책만 들여다보고 있다. 그러며 희정에게 '하고 싶은 일도 있어서 좋겠다'고 푸념한다. 그는 자살충동에 못이겨 정신병원을 다니고 있는데, 군대에 가지 않으려는 수작 같기도 하고 군대를 못 가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KAFA 출신 감독의 장편 데뷔작 <수성못>


영화 <수성못>의 한 장면. ⓒ인디스토리



영화 <수성못>은 한국의 영화 사관학교라 불리는 한국영화아카데미(KAFA) 출신의 유지영 감독 장편 데뷔작이다. 이 작품은 KAFA의 2017년 장편데뷔작 기획전에 출품되었는데, 장편제작연구과정 9기의 대표 완성작 중 하나이다. 지난 2009년 시작된 이 과정의 기획전 대표작들을 들여다보면, 입이 떡 벌어진다. 


2010년엔 개인적으로 2000년대 한국 독립영화 중 최고라 할 만한 <파수꾼>이, 2013년엔 <잉투기>와 <들개>가, 2015년엔 <소셜포비아>와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 등을 선보였다. 출중한 데뷔작 이후 이렇다 할 활동을 하지 않는(못하는) 감독들이 상당한 게 마음에 걸리지만 KAFA의 능력에 의문을 품게 하진 않는다. 


<아기와 나> 등과 함께 2017년에 선보인 <수성못>. 3명의 주인공을 통해 보여주는 시선과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두루뭉술한듯 선명하고 식상한듯 신선하다. 청춘의 삶과 죽음, 삶과 죽음에의 치열함, 지방에서 여성으로 살아가는 것 등의 주제가, 수성못이라는 소재로 집결하고 수성못이라는 소재에서 비롯된다. 


'삶'도 '죽음'도, '치열하지 않음'도 치열한 청춘들


영화 <수성못>의 한 장면. ⓒ인디스토리



정녕 '삶'을 치열하게 살아가는 희정, 돈도 열심히 벌고 공부도 열심히 하고 운동도 열심히다. 이 시대, 바로 지금 가장 청춘다운 청춘의 모습이다. 그녀에게로 한 발자국 더 들어가보면, 지방과 여성이 보인다. 지방에선 성공할 수 없다는, 즉 이곳에서 살아선 안 된다는 열망과 함께 여성으로 살기 힘들다는, 즉 더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열망이 합쳐진다. 일반적인 청춘의 치열함보다 더 목적적이다. 


영목이 자살시도자를 촬영하고 그들의 말을 듣는 건 알고보니 사회봉사의 일환이었다. 그는 다름아닌 동반자살클럽회장으로, 동반자살을 주도했다가 실패한 경력이 있다. 정녕 '죽음'을 치열하게 치르려는 영목이다. 그 치열함에서 희정의 치열함이 떠오른다. '그들'의 '목적적'인 치열함 말이다. 그들은 대구를 떠나 서울로 가든 이승을 떠나 저승으로 가든, 지긋지긋한 '이곳'을 떠나 '그곳'으로 가려 한다. 


장강명 작가의 히트작 <한국이 싫어서>(민음사)가 겹쳐진다. '헬조선'을 탈출해 호주로 가려는 청춘들, 하지만 호주도 또 다른 '헬'일 뿐이라는 교훈 아닌 교훈을 던진다. 이 소설이 주로 탈출 이후까지의 이야기를 그리는 반면, <수성못>은 주로 탈출하기까지의 이야기를 그린다. 


삶이든 죽음이든 정녕 쉽지가 않다. 그러다 보니, 그들은 공중에 붕 떠 있는 것 같다. 영화는 그 모습을 수성못에 떠 있는 오리배라고 보았다. 하염없이 떠 다니지만, 절대 수성못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오리배들 말이다. 그 어떤 치열함으로도 대구를, 이승을 떠나지 못하는 그들이 애처롭다. 


그렇다면, '치열하지 않음'을 치열하게 내보이는 희정 오빠 희준은 어떨까. 우리 안에 희정과 영목의 결이 다른 치열함이 공존할 텐데, 당연히 희준의 치열하지 않음의 치열함도 존재할 것이다. 희정과 영목이 애처로운 개인들의 형상이라면, 희준은 그 개인들에게 있는 또 다른 형상이 아닐까. 혹은 있으면 하고 바라는 형상. 


광범위하게 그저 보여준다


영화 <수성못>의 한 장면. ⓒ인디스토리



영화는 삶과 죽음, 무엇을 지향하고 무엇을 지양하라고 가르치지도 가리키지도 않고 설교하지도 선언하지도 않으며 판단하지도 재단하지도 않는다. 그저 보여준다. 때론 우스꽝스러움 속의 진지함으로, 때론 흐리멍덩함 속의 적나라함으로. 


그 모든 모습이 우리의 모습이고 우리 주위의 모습이고 우리 사회의 모습인 게 맞다. 그래서 이 영화 <수성못>은, 독립영화가 흔히 추구하는 '사회의 한 단면'을 적나라하게 작가적 시점으로 파고드는 게 아니라 의외로 꽤나 광범위하게 들여다보고 있다. 


그러다 보니 파괴적인 영화적 재미에선 조금 떨어질 우려가 있는데, 자살이라는 소재와 더불어 극초반에 벌어진 자살미수 사건에서 비롯되는 소소한 미스터리를 흥미 유발의 원천으로 사용한다. 


대체로 적절하고 적정하고 적재적소한 이 영화, 감독의 능력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다만, 더욱 기억에 남는 영화를 남기기 위해선 오히려 이 영화의 장점이었던 적절함과 적정함을 버리고 한 곳을 파고드는 집요함이 필요해 보이기도 한다. 이제 갓 데뷔한 감독한테 흔히 보이는 패기 대신 노련함이 엿보이는 유지영 감독, 오히려 다음 작품에서 패기있는 모습을 보이면 좋겠다는 생각과 함께 그래서 더 기대가 되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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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소공녀>


영화 <소공녀> 포스터. ⓒCGV 아트하우스



<1999, 면회> <족구왕> <범죄의 여왕> 그리고 <소공녀>의 공통점은 무얼까? 한국 독립영화라는 점. 모두 괜찮게 감상했다는 점. 그리고 '광화문 시네마'라는 독립영화 제작사의 작품들이라는 점. 요즘 가장 유명하고 잘 나가는 독립영화 제작사로, 한국예술종합학교 대학원 동창이었던 감독 다섯 명과 프로듀서 한 명이 뭉쳤다고 한다. 


마블 영화의 대표적 아이콘인 '쿠키영상'을 광화문 시네마가 제작한 모든 독립영화에서 볼 수 있는데, 홍보가 쉽지 않은 독립영화의 여건 상 효과적인 방법임에 분명해 보인다. 영화 한 편의 홍보 뿐만 아니라 제작사 브랜드 가치를 높이는 데도 일조하고 있는 것 같다. 또한 독립영화 제작사로서 계속 영화를 찍고 있다는 걸 알리는 데도, 스스로 계속 영화를 찍어야 한다는 의무감(?)을 고취시키는 데도 큰 역할을 할 것이다. 


광화문 시네마는 6명의 한국예술종합학교 대학원 동창 중 전고운 감독과 김태곤 감독이 공동으로 대표를 맡아 이끌어 가고 있다. 김태곤 감독은 <1999, 면회>를 연출했고, 2년 전 <굿바이 싱글>로 흥행감독 반열에 올라섰다. 전고운 감독은 <소공녀>로 장편 데뷔를 했다. 


대한민국의 현시절


영화 <소공녀>의 한 장면. ⓒCGV 아트하우스



광화문 시네마가 제작한 네 번째 영화이자 최신작 <소공녀>는 2018년 현재 대한민국을 휘감는 트렌드들을 상당수 결합하여 '힙하다'고도 할 수 있을 정도의 분위기를 보여줌과 동시에, 3~40년 전 힘들기 짝이 없던 시절이 다시 시작되는 게 아닌가 하는 불안감이 엄습할 정도의 현시절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미소(이솜 분)는 하루 45000원을 벌어 혼자 살아가는 3년 차 가사도우미다. 월세 30만 원 짜리 단칸방에서 살면서, 매일 하루도 빠짐 없이 5000원 짜리 밥을 먹고 12000원 짜리 위스키 한 잔을 마시며 2500원 짜리 담배 한 갑을 피운다. 그런데 집주인이 월세를 5만 원 올려버렸다. 그리고 2015년이 되자 담배가 4500원으로 올라버렸다. 


매일 같이 가계부를 적는 미소는 2015년 새해 벽두 6000원 적자가 나자 포기해야 할 것을 생각한다. 그녀가 포기한 건 위스키 한 잔도, 담배 한 갑도, 빌빌 거리는 남자친구도 아닌 집이다. 그 즉시 집주인에게 밀린 월세를 청산하고 집을 나선다. 우선 대학교 때 함께 밴드 활동을 하며 즐겼던 크루 5명을 찾아가 당분간 신세를 져보려 한다. 


대기업으로 이직하기 위해 점심시간에 셀프 링거까지 맞아가며 일하는 베이스 문영, 30년 동안 중국집을 운영했던 시댁 부모님과 아무 일도 하지 않는 남편에게 형편 없는 음식 솜씨로 욕먹고 사는 키보드 현정, 결혼해서 없는 형편에 무리해서 아파트를 장만하여 20년 동안 돈을 갚아야 하는 이혼 위기남 드럼 대용, 늦은 나이에도 부모님 집에 얹혀 살며 빈둥대는 보컬 록이, 으리으리한 집에서 떵떵거리며 사는 것 같지만 남편 비위 맞추기에 급급할 뿐인 기타 정미. 그리고 웹툰 작가 지망생이자 현재 백수로 재직 중인 남자친구 한솔까지. 


2018년 트렌드와 인간 군상


영화 <소공녀>의 한 장면. ⓒCGV 아트하우스



영화는 'N포'를 기본으로 하는 트렌드들과 다양한 인간 군상을 결합시켰다. 특히 주인공 미소는, '미소 서식 환경, 즉 미생물·곤충 등의 서식에 적합한 곳'이라는 뜻의 영화 제목의 영문명 microhabitat과 '미생물·곤충'을 뜻하는 이름으로 유추해보고 더불어 하루 일당 45000원과 하루 위스키 한 잔, 담배 한 갑, 남자친구만 있으면 더 이상 바랄 게 없다는 말을 생각해볼 때 '소확행'(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의 전형을 보여준다. 


혹자는 그녀가 바라는 행복의 기준이 터무니 없거나 과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아니, 그렇게 생각하고 말하고 있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왜 위스키 한 잔과 담배 한 갑과 남자친구를 포기하지 않고 집을 포기했으냐는 것이다. 그리고 왜 일을 더 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이쯤에선 소확행 트렌드의 '유행적 부분'은 논의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더불어 그녀의 생각과 행동을 가성비가 아닌 가심비, 즉 가격 대비 마음의 만족을 추구하는 소비의 한 행태라고 할 수 있는 트렌드라고 치부할 수 없게, 해선 안 되게 된다. 


우린 잘 알고 있다. 영화도 우리가 아는 걸 잘 이해하고 있는 듯하다. 아무리 열심히 해도 한계가 있다는 걸 말이다. 2015년작 영화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가 보여준 열심·악착의 비극은 이제 포기·행복의 미학으로 변했다. 발전이라고 해야 할까, 퇴행이라고 해야 할까. 사회 전체로 보면 퇴행이겠지만, 개인으로 보면 발전이라고 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유행이 아닌 '삶의 방식'이라는 측면에서 이 트렌드를 바라봐야 하겠다. 


영화는 비단 한 개인의 일만은 아니라고 말한다. 미소가 집을 포기한 것처럼, 그녀가 찾아가는 친구들마다 모두 한 가지 이상은 포기하며 살아가고 있다. 다만, 친구들은 미소처럼 가심비의 트렌드를 따르지 않는, 따를 수 없는, 따를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런 미소를 보고 집이 없어 불쌍하다느니 청년 실업만큼 청년 주거 대책이 시급하다느니 하는 말은 어울리지 않을 수 있다. 이 트렌드는 유행도 아니고 사회정치도 아니다.


'웃픈' 비현재적 부분들


영화 <소공녀>의 한 장면. ⓒCGV 아트하우스



영화는 몇몇 부분, 아니 여러 부분에서 비현실 아닌 비현재적이다. 21세기 세계 경제대국 대한민국의 모습인가, 3~40년 전 경제·사회 과도기 대한민국의 모습인가. 경천동지할 정도로 세상이 바뀌었다지만, 바뀐 건 그걸 잘 받아들인 사람들 뿐이라는 게 씁쓸하게 다가온다. 이 세상의 하늘과 땅의 거리는 점점 벌어진다. 


이 비현재적인 장면들은 그야말로 '웃프다'. 한껏 찌질함을 풍겨 웃기고, 그 찌질함이 너무나도 진지한 자기신념에서 비롯된 것이기에 슬프다. 특히 광화문 시네마의 네 작품에서 모두 얼굴을 비친 페르소나 안재홍이 분한 미소의 남자친구 한솔의 면면은 웃픈 찌질함의 모든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소공녀>는 나에게, 우리에게 확고한 자기 신념과 삶의 방식이라는 트렌드 그 사이 어디쯤에 위치한 새로운 개념을 생각하게 한다. 그것이 나의 신념이자 내가 살아가는 방식이기에 어느 누구의 간섭도 듣지 않고 비난도 무시할 수 있지만, 과연 이 문제가 거기서 마무리 지을 수 있는 성격의 것인가. 아무리 사회정치적인 측면에서 생각하면 안 되는 지극히 개인적인 성격의 것이라고 하지만 말이다. 


배제시켜 단절되는 것과 존중하되 강제하지 않고 범 공동으로 함께 가는 것과는 천지 차이인 것이다. 기성세대는, 사회는, 정부는, 이 미생물·곤충처럼 작은 이들도 존중하고 또한 함께 가야하는 구성원으로 생각해야 하는 의무가 있다. 반면 이들은 어떤가. 이들은 기성세대, 사회, 정부에 반발하고 신념을 지키고 삶의 방식을 영위할 의무가 있는 건 아니지만 권리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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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간 책 다시읽기] 가즈오 이시구로의 <남아 있는 나날>


소설 <남아 있는 나날> 표지 ⓒ민음사



이야기가 옆길로 새는 건, 옆길로 새는 것처럼 느껴지는 데엔 몇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야기의 원류를 제대로 이어나갈 능력이 없거나, 하고 싶은 이야기가 너무나도 많거나, 옆길로 새는 것도 전부 이야기 원류의 거대한 판 안에 있다거나. 대개 하고 싶은 이야기가 너무나도 많으면 차라리 거대한 판을 만들어 버리곤 한다. 


그런데, 여기 오로지 거대한 판을 만든 것도 아니면서 옆길로 새는 것처럼 느끼게끔 하거니와 그것들이 전부 이야기 원류에 포함되어 있게 하는 작가가 있다. 가즈오 이시구로가 그인데, 그가 전하는 이야기는 그 자체보다 샛길의 이야기가 훨씬 재밌거니와 그 샛길이 원류로 이어지기에 결국 이야기 전체의 완성도가 터무니 없이 올라간다. 


아직 그의 소설을 <나를 보내지 마>와 <남아 있는 나날> 두 권밖에 읽지 않았지만 비슷한 느낌을 받았고, 거대한 이야기와 더불어 자잘한 이야기들이 가지는 재미와 인간 본령의 존재를 뒤흔들어 놓는 메시지가 엄청나다는 것도 똑같았다. 한 편으로 팬이 되어버렸고 두 편째를 보지 않을 수 없었으며 세 편째부터는 주기적으로 볼 생각이다. 


그가 궁극적으로 할 말은 정해져 있고, 그걸 제대로 보여주기 위해 무수히 많은 이야기들을 흥미롭게 전해주며, 우린 그저 순간순간을 즐기면 되는 것이다. 어느 순간 빠져 들며 자연스레 목적지에 도달해 생각하고 있었지만 한편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거대한 무엇에 맞닥뜨리고 만다. <남아 있는 나날>이야말로 정확히 그것이다. 


삶과 진실


1956년 영국의 저명한 저택인 달링턴 홀의 집사 스티븐스, 주인의 배려로 생애 첫 여행을 떠난다. 잉글랜드 서부로의 여행, 그 결정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건 주인이 아니라 오래전에 달링턴 홀을 떠난 켄턴 양의 7년 만의 편지였다. 그는 그녀가 돌아오고 싶다고 지레짐작하고는 그녀를 만나러 6일간의 여행길에 오른다. 와중에 자신의 인생을 회상하는 스티븐스이다. 소설은 여행과 회상의 투 트랙으로 진행된다. 


스티븐스는 1920~30년대 달링턴 홀의 주인 달링턴 경을 맹목적으로 모셨다. 그는 진정 '위대한 집사'로, 그것을 위해 아버지의 임종을 지키는 걸 포기했고 켄턴 양에 대한 감정을 억눌렀다. 그의 말마따라 사적인 실존을 포기하고 전문가적인 실존을 택한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위대한 집사의 필수조건. 


하지만 스티븐스의 회상이 거듭됨에 따라 하나둘씩 드러나는 진실은 그로 하여금 정체성의 혼란을 일으키게 한다. 그의 인생과 사랑에 앞서 그를 규정하는 '위대한 집사'라는 정체성 말이다. 그리고 그걸 회상하는 지금은 인생의 황혼기, 회상은 곧 후회와 다름 아니다. 앞으로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의미부여가 쉽지 않다. 


소설은 '남아 있는 나날' 즉 미래에 방점을 둔 제목과는 다르게, 회상과 여행 즉 과거와 현재에 방점을 둔 내용을 전한다. 곧 소설의 지향점은 미래에 있고, 주인공이 가야 할 곳도 결국 미래라는 얘기일 것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건 스티븐스의 정체성 혼란을 일으키는 '진실'일 텐데, 그건 무엇일까. 


인생과 사랑


진실은, 스티븐스가 충분히 알 수도 있었을 것이고 반드시 알아야 하는 것들이다. 그가 위대한 집사의 옷을 입고 맹목적으로 모신 달링턴 경이 나치 지지자였다는 사실과, 그가 위대한 집사의 옷을 입어 자신의 진정한 실존을 가린 결과 떠나보낸 켄턴 양을 사랑했었고 지금도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 개념과 '아이히만'이 생각나지 않을 수 없다. 그저 자신의 일만 성실하게 했을 뿐인 아이히만, 그는 지극히 평범한 인간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가 한 짓은 역사상 최악의 '악'으로 귀결된다. 그 너머의, 그 이면의 진실은 알고자 하지 않았고 알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스티븐스와 겹치는 부분이다.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사랑이라는 개념을 녹여내게 한 켄턴 양의 존재가 가즈오 이시구로표 문학의 진정한 발화점이다. 그녀야말로 스티븐스로 하여금 계속 나아가게 하는 힘의 원천이었거니와, 한편으로 그가 과거를 회상함으로써 정체성의 혼란이라는 필수적인 아픔을 겪게 한 장본인인 것이다. 켄턴 양 덕분에 스티븐스라는 캐릭터는 극히 평면적인 인물에서 입체적인 인물로 변모했다. 


스티븐스는 어떻게 해야 할까. 지나간 시간을 후회하며 살아가야 할까, 어떻게든 앞으로 나아가야 할까. 저자는, 소설은 말한다. 나아가야 한다고. 그의 과오 아닌 과오 또는 명백한 과오를 뒤로 하는 게 아니라 함께 가야 한다고 말이다. 남아 있는 나날은 많지 않을지 모르지만 인생과 사랑을 깨달을 시간과 양식은 충분하다. 


남아 있는 나날 - 10점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송은경 옮김/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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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코코>


<코코> 포스터.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픽사, 디즈니, 혹은 픽사&디즈니는 거의 매해 우리를 찾아와 거의 실망을 안기지 않았다. 세상이 점점 디지털화 되어가는 만큼 최첨단 디지털 기술로 나날이 완벽해가는 애니메이션을 선보이는 동시에, 살아가는 데 기본 중에 기본이 되는 지극한 아날로그적 가치를 선보인다. 그 조화는 가히 환상적이다. 


픽사&디즈니의 애니메이션이 아이들보다 어른들에게 더 와닿는 연유가 역설적으로 거기에 있다 하겠다. 조금이라도 더 어른일수록 조금이라도 더 아날로그적인 습성이 남아 있지 않겠는가. 그걸 접해본 사람이라면 그리워하지 않을 수 없고 말이다. 영화 <코코>의 기본은 '가족' '사랑' '우정' '화해' '기억' 등의 가치이다. 


<코코>는 멕시코라는 이질적이라면 이질적이고 친숙하다면 친숙한 곳의 '죽은 자의 날'이라는 멕시코 전통 명절을 배경으로, 현실과 비현실이 만나고 삶과 죽음이 모이며 흩어진 가족과 멀어진 사랑이 다시 만난다. 그 가장 중요한 키를 '코코'가 지니고 있지만, 그 사이사이를 이어주는 이들은 따로 있다. 


죽은 자의 날, 미구엘의 모험 아닌 모험


죽은 자의 날, 미구엘의 모험 아닌 모험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아빠가 음악가인 한 가족이 있었다. 그들은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즐거운 나날을 보냈다. 하지만 아빠는 꿈을 이루기 위해 가족을 뒤로 하고는 떠나버린다. 홀로 남은 엄마는 살기 위해 신발을 만든다. 그녀는 신발 만드는 법을 온가족에게 퍼뜨리고 집안 자체가 신발 만드는 기업이 된다. 여기 그 아빠와 엄마를 고조할아버지와 고조할머니로 둔 미구엘이 있다. 하지만 그는 음악을 좋아라 한다...


미구엘의 고조할아버지 때문에 멕시코에서 유일하다시피 음악을 멀리하게 된 미구엘의 집안, 그럼에도 그는 멕시코 최고의 음악가 에르네스토 델라 크루즈의 '기회를 잡아라'라는 말을 듣고는 꼭 음악가 광장에서 연주를 하려고 한다. 할머니가 부셔버린 기타 대신 그가 택한 기타는 델라 크루즈 납골당에 전시해놓은 기타. 


하필 그 날은 '죽은 자의 날', 미구엘은 그 기타를 훔쳐 한번 튕기는 순간, 죽은 자의 세계로 가버리고 만다. 미구엘은 다시 산 사람의 세계로 돌아가고자 하는데, 이멜다 고조할머니는 음악을 절대 하지 않는다는 조건 하에 그의 저주를 풀어주고자 한다. 하지만 미구엘은 그런 조건이라면 사절! 우연한 기회에 자신의 고조할아버지라고 믿게된 델라 크루즈에게 축복을 받고자 길을 떠난다. 


기억, 사랑, 통섭...


기억, 사랑, 통섭...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죽은 자의 날'은 스페인의 침략 이전부터 이어져 내려온 멕시코의 전통 명절이다. 해골과 뼈 모양의 조형물이나 사탕을 만들고, 죽은 사람의 사진과 이름을 제단에 올리고는, 여러 종류의 축제를 연다. 이승과 저승이 이때만큼은 한 곳에 모여 어울리는 것이다. 영화에서도 굉장히 중요하게 비치는 바, 제단에 사진과 이름이 올라가 있지 않으면 저승에 있는 이가 이승으로 갈 수 없다. '기억'의 소중함...


멕시코에서 음악은 곧 삶이다. 멕시코인들은 비록 고단한 삶이지만 와중에 '사랑'을 최고의 가치로 치며 스페인 등의 풍습과 문화가 혼합된 특유의 낭만과 열정이 이를 뒷받침한다. 음악은 사랑을 표현하기 위한 최고의 수단인 것이다. 한편 잘 드러내려고 하진 않지만 이면에 항상 있는 슬픔 또한 음악만큼 잘 표현해낼 수 있는 수단이 없다. 미구엘의 가족이 음악으로 흩어졌다지만 반드시 음악으로 다시 뭉칠 수밖에 없을 거다. 


<코코>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가치는 픽사&디즈니가 추구하는 가치와 일맥상통하는 '통섭'이 아닐까 한다. 서로 소통하고, 전체 또는 부분들을 하나로 잇는 것 말이다. 미구엘과 그의 강아지 친구 단테는 참으로 꼬이고 꼬여 대대로 끊어져버린 태초의 끈을, 음악이라는 그 끈을 다름 아닌 음악으로 잇고자 한다. 그 와중에 가족이 있고 사랑이 있고 화해가 있고 기억이 있다. 그 작업은 쉽지 않지만 반드시 해내고 말 것이다. 


삶과 죽음이 하나되는 시간


삶과 죽음이 하나되는 시간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아쉬운 부분도 없지 않아 있다. 가족이라는 명제를 다시 생각해야 하는 시대에 전통적이기 짝이 없는 케케묵은 가족 개념을 선보이고 있다는 점, 살아생전 얼마나 잘 살았냐에 따라 죽어서도 계급이 나뉘어 지는 듯한 모습 등 말이다. 보편적이고 아날로그적인 가치를 전하기 위해 희생할 수밖에 없었다고 하지만, 조금 더 신경 써 주었으면 하는 부분들이다. 


그럼에도 영화는 급기야 20년이 넘은 기억부터 5년 전 기억까지 불러낸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증조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외삼촌이 돌아가셨을 때... 어떤 건 희미해져 한 장면 정도밖에 기억나지 않고, 어떤 건 여전히 생생하기 그지 없어 가슴이 아리고 쓰린 그 기억들이 차례로 떠오른다. 그들이 기억하는 게 그들로 하여금 저승에서조차 사라지지 않게 한다는 영화 속 깨달음. 


한편, 충격이라면 충격일 수 있지만 따뜻하기 그지 없게 다가온 부분도 거기에 있다. 삶과 죽음이 하나되는 장면,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이 한 곳에 모여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며 삶과 죽음 모든 것들을 축복한다. 우리에게 죽음은 너무나도 먼, 무섭고 두려운 무엇이 아닌가. 우리도 제사를 지내며 조상님을 모시지만 그건 굉장히 엄숙한 자리가 아닌가. 멕시코가 부러워지는 것이다, 이 영화 한 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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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의 <히어애프터>


클린트 이스트우드답지 않은 소재를 클린트 이스트우드답게 풀어낸 작품 <히어애프터>. ⓒ워너브라더스코리아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의 수많은 작품 중에서 단연 튀는 작품이 있다. <히어애프터>가 그 작품이다. 그의 연출 특징상 어떤 사건을 다루든 특별할 것 없는 일상에서 벗어나지 않는 느낌을 드러내곤 하는데, 그래서인지 SF나 초자연적인 소재를 다루는 건 상상하기 힘들다. 현실과 비현실 사이에는 건너기 힘든 강이 있지 않은가. 


<히어애프터>는 죽음 이후를 다룬다는 점에서, 다른 누구도 아닌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작품이라는 점에서 특이하다 하겠다. 더 눈길이 가는 건, 비현실적인 소재임에도 마치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한 현실적인 연출이라는 데 있다. 어떻게 비현실에서 현실을 끄집어낼까 자못 궁금하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답지 않은 소재를 가져와 클린트 이스트우드답게 풀어낸 것이리라. 


그의 필모에서 <설리> <아메리칸 스나이퍼> <그랜 토리노> 등의 다분히 문제적이고 약간은 정치적인 성향의 작품 또는 <미스틱 리버> <체인질링> 등의 이야기 중심의 드라마가 아닌, <히어애프터>는 <밀리언 달러 베이비> <인빅터스> 등의 인생 감성을 노래하는 드라마와 결을 같이 한다.


'죽음'이라는 질문에 직면하다


죽음과 직간접적으로 직면한 주인공들. 죽음은 분명 삶과 맞닿아 있다. 하지만 죽음과 삶은 멀디 멀다. ⓒ워너브라더스코리아



마리(세실 드 프랑스 분)는 프랑스에서 휴가를 보내다가 거대한 쓰나미에 쓸려 죽는다. 아니, 죽음의 문턱에 이르렀다가 다시 살아난다. 사지를 헤맨 것이리라. 그곳에서 마리는 믿기 힘든 광경을 목격한다. 흔히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들이 봤다는 광경 말이다. 그녀는 그 광경에서 헤어나오기 힘들고, 사람들은 그녀를 이상하게 생각한다. 


조지(멧 데이먼 분)는 미국에서 공장 노동자로 생활한다. 사실 그는 사후세계를 보고 느끼고 그곳의 사람들과 대화할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영매로 전천후 활동을 했었다. 하지만 그로 인해 무너지는 삶 때문에 환멸을 느끼고 그만두었다. 그때문에 알지 말아야 할 사실들을 알게 되고, 사람들은 그를 멀리한다. 


마커스는 영국에서 술중독자 편모 슬하에서 쌍둥이 형과 함께 생활한다. 형은 그에게 세상 무엇보다 중요한 사람인데, 어느 날 그를 대신해 심부름을 갔다가 교통사고로 비명횡사한다. 믿기 힘든 일을 당한 마커스는 아직 형을 떠나보내지 못했다. 형도 마찬가지일 거라 생각한 그는 거기 어딘가에 있는 형과 말하고 싶다. 


전혀 다른 곳에서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가는 셋은 '죽음'이라는 공통된 질문에 직면한다. 죽음에 다다랐던 사람이나 죽음 이후의 세계를 들여다볼 수 있는 사람이나 눈앞에서 분신을 잃고 죽음 이후의 세계와 대화하고 싶은 사람이나 모두 죽음을 대하는 게 힘들다. 그들은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삶과 죽음은 단절되어 있지 않지만, 서로 건너기 힘든 강을 마주보고 있다. 


'죽음'을 보여주지만 '삶'을 말하다


영화는,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죽음을 통해 삶을 말하고자 한다. ⓒ워너브라더스코리아



영화는, 그러나 죽음을 말하려는 게 아니다. 분명 세 주인공의 세 이야기는 사후, 즉 죽음 이후를 바라보고 향하고 그곳에 다다르려 하지만 그렇게 해서 얻고자 하는 건 결국 '삶'이다. 영화가 우리에게 다다르기 힘들고 상상하기 힘든 '히어애프터'를 단번에 보여주는 건 죽음과 죽음 이후까지 아우르는 삶의 확대를 꽤하기 위해서인 것이다. 


우리는 선천적으로든 의도적으로든 삶에서 죽음을 지워버린다.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 삶을 살아가지만 죽음을 살아갈 순 없기 때문에 자연스레 지워진 것일 테고, 한순간도 경험해보지 못했기 때문에 애초에 생각조차 하기 힘들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죽음을 향해 살아간다. 이 순간에도 계속 죽어간다. 모두들 알고 있다. 


우리 모두 영화의 세 주인공 또는 세 이야기와 어떤 식으로든 연관되어 있다. '사후 세계를 보고 살아 돌아온 사람' 이야기는 은근 수없이 들어왔을 테고, 죽어서 옆에 없는 소중한 사람과 이야기하고 싶지 않은 사람을 없을 테며, 살면서 소중한 사람이 죽지 않은 사람도 없을 거다. 그럼에도 우리 모두 잘 살고자 한다. 


영화가 '웰다잉'을 말하려는 건 아니다. 삶의 연장선상에서 죽음을 직시하고 죽음에 좀 더 관심을 두고자 하는 건 같지만, 죽음을 잘 대비하는 등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말하지는 않는다. 그런 면에서 영화는 오히려 삶에 더 천착한다. 죽음에 가까이 있는 만큼 삶에 감사하게 된 것이다. 


소외된 사람들의 이야기


영화는 한편 소외된 사람들, 즉 죽음에 직면해 삶에서 멀어진 사람들을 조명한다. ⓒ워너브라더스코리아



그럼에도, 삶에서 죽음을 말하는 건 외롭고 고독하다. 경험해보지 않은 것을 머리로는 받아들이되 가슴으로는 받아들일 수 없다. 궁금하고 흥미롭지만 곁에 두고 싶지는 않다. 세 주인공은 하나같이 혼자다. 외롭고 고독해 죽음 이후에서 길을 찾고자 한다. 하지만 그들은 살아 있지 않은가. <히어애프터>는 그래서 생각지도 못한 소외된 사람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마리와 조지는 특별한 경험을 했고 특별한 능력도 가지고 있지만 결국 혼자가 된다. 혼자가 될 수밖에 없는 경험이고 능력이다. 그게 지금 이 세상의 한계일지 모른다. 반대로 그게 이 영화의 특별한 점일 것이다. 특별한 걸 특별한 연출이 아닌 담담한 연출로 다루어 일상에 편입시킨 뒤 소외의 개념으로 치환시킨 점 말이다.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만의 드라마 스타일이 만들어낸 이야기, 캐릭터, 소구점이다. 


이 영화로 삶을 다시 보았는가, 이 영화로 죽음을 다시 생각했는가, 이 영화로 사후 세계에 흥미가 생겼는가. 모두 그랬을지도, 모두 그러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중요한 건 생각의 전환, 시각의 확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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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은 시인의 성추행 논란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미투 운동을 지지하는 입장에서, 이 글을 지우지 않고 계속 놔두겠습니다. 어떤 식으로든 가치가 있길 바랍니다. 물론, 요청이 있을 시 바로 삭제토록 하겠습니다. 


[편집자가 독자에게] <고은 깊은 곳>


<고은 깊은 곳> 표지 ⓒ아시아



편집자 일을 하면서 가장 기분 좋을 때가 언제인지 아시는지요. 내가 만든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어 수많은 독자들께 읽히는 걸 볼 때, 더 자세히는 길거리에서 내가 만든 책을 누군가가 읽으며 지나가는 걸 볼 때. 저한테는 아직 이 두 상황이 찾아오지 않은 것 같아요. 앞으로 그런 날이 올까요?


그러면, 편집자로서 가장 설레는 건 무엇일까요. 위대한 작가의 원고를 책이 나오기 전에 받아볼 수 있다는 것, 그리고 함께 머리를 맞대고 그 원고를 책으로 만들어 간다는 것. 저는 이 상황에 어느 정도 익숙한대요. 그동안 많은 위대한 작가들의 원고를 책으로 만들어 왔습니다. 


인도의 대문호 '쿠쉬완트 싱'의 <델리>, 중국 최고의 사실주의 작가 '류전윈'의 <말 한 마디 때문에>, 아시아 각국 최고 작가의 최고 작품 모음집 <물결의 비밀>, 한국 노동문학의 대부 '방현석'의 <세월>, 그리고 중앙 아시아 고대 신화까지. 이 정도만 해도 어디가서 빠지지 않는 저자군이지요. 


우리가 잘 알지 못할 수 있는 너무 유명한 '고은'


이번에는, 이 저자군의 품격을 단번에 올려줄 노벨문학상 단골 후보의 작품을 작업하게 되었습니다. 자타공인 '국민시인' 고은 시인과 김형수 작가의 대담집, <고은 깊은 곳>입니다. 끝없는 설렘과 부담감을 품은 채 작업이 진행되었지만 선생님들의 빠르고 정확한 피드백 덕분에 작업을 일단락질 수 있었습니다. 


너무 유명한 대상이 있습니다. 우린 그 대상에 무지한 경향이 있지요. 고은 시인도 그런 경향을 피해갈 순 없었을 것입니다. 상상을 초월하는 수많은 이야기들이 그 삶에 있지만 우린 잘 알 수 없습니다. 그저 '노벨문학상 단골 후보'로 알고 있을 뿐이죠. 이 책에는 김형수 작가에 의한 그런 문제제기도 있습니다. 


200페이지 남짓한 결코 길지 않은 책인데요. 충분히 고은 시인의 '깊은 곳'까지 다다랐다고 봅니다. 누구보다 고은 시인을 잘 알고 또 누구보다 사려깊은 글쓰기와 말하기를 할 줄 아는 김형수 작가가 함께 대담을 진행했기에 가능했다고 생각해요. 두 어른의 대담에서 정서적으로 실용적으로 많은 걸 얻을 수 있었습니다. 


사실, 김형수 작가와는 지난 2014년 <삶은 언제 예술이 되는가>와 2015년 <삶은 어떻게 예술이 되는가>의 '작가 수업' 시리즈로 작업을 했었습니다. 3탄을 준비 중인데, 공교롭게도 위 책들을 낸 후 더 바빠지셔서 늦어지고 있네요. 내년 상반기 출간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안심이 되는 건 물론 기대도 됩니다. 좋은 결과가 나오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다는 믿음 덕분이죠. 


고은 시인의 삶과 시, 그 깊은 곳


사실 이 두 분의 대담이 책으로 엮어 나온 게 처음은 아닙니다. 자그마치 5년 전에 700페이지 가까이 되는 두께의 대담집 <두 세기의 달빛>(한길사)이 나와 많은 이들의 눈을 밝혀주었었죠. 겹치는 부분도 없지 않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책만이 가지는 차별점이 있습니다. 


<두 세기의 달빛>이 1930~50년대를 중심으로 깊이 있게 다루고 있는 반면, 또 같은 출판사의 <바람의 사상>이 고은 시인의 일기를 중심으로 1970년대를 다루고 있는 반면, <고은 깊은 곳>은 고은 시인의 시작부터 지금까지를 두루 다루며 '고은' 그 자체의 깊은 곳을 다루고 있지요. 


이를, 김형수 작가는 고은 시인과 대담하는 내내 그 파동이 울려나오는 곳에 닿고 싶었다고 말씀하셨죠. 그곳이 다름 아닌 '고은 깊은 곳'이며 '고은의 시를 끝없이 다시 보게 만드는 자리'이기도 합니다. 1958년에 데뷔해 내년이면 시(詩)력 60년이 되는 '시인 고은'의 삶과 시, 이 책 하나면 충분할 것입니다. 


고은 시인의 국제 활동에 대해, 이 또한 깊이 있게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합니다. 모국어 너머에 대한 상상력을 가지고 있지 않은 한국문학, 이라는 문제의식 아래 고은 시인의 국제 활동을 조망하죠. 고은의 시적 근원에 자리한 '모국어'라는 존재의식의 장벽을 넘는 행위입니다. 고로, 무엇보다 모국어 한글의 축복이죠. 


<고은 깊은 곳>을 읽는 것은 곧 고은의 시를 읽는 것


고은 시인을 지칭하는 말은 비단 '국민시인'뿐만 아닙니다. 그는 식민지와 전쟁을 겪고 원점으로 돌아갑니다. 이후 오로지 시와 함께 하는 그의 삶은 네 번에 걸친 치열한 자살 시도와 10년에 걸친 승려 생활을 거쳐, 노동자 전태일의 분신자살사건을 결정적 계기로 현실에 대한 시야를 습득하게 됩니다. 


누구보다 앞장서 현실문제에 대응하며 자연스럽게 따라온 상상을 초월하는 심신의 고달픔을 뒤로 하고 '살아남아' 시를 쓰는 고은 시인, 만나뵙게 되어 영광이었고 감히 '함께' 작업을 할 수 있어 더할 나위 없는 영광이었습니다. 부디 독자분께서 이 영광스러운 작업의 수혜를 입었으면 좋겠습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시를 그리 즐기지 않습니다. 소설을 압도적으로 즐기는 편이죠. 그런 가운데 '시인 고은'을 들여다볼 수 있어서 신기하고 또 좋았습니다. 고은 시인의 시로 시에 입문하게 되는 것일까요? 


'나에게서 시를 빼앗으면 나는 뱀 허물이고 거미줄에 걸린 죽은 풍뎅이 껍질'이라고 말하는 고은 시인의 '삶'은 곧 '시'일 것입니다. 그의 삶을 읽는, 즉 <고은 깊은 곳>을 읽는 누군가는 곧 그의 시를 읽는 것과 다름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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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프랑수아 오종 감독의 <프란츠>


파격적 행보를 계속 해왔던 프랑수아 오종 감독의 영화 경력 전환점이 될 만한 작품 <프란츠>. ⓒ찬란



프랑수아 오종은 프랑스가 낳은 작금 세계적인 작가주의 감독이다. 갓 20살이 넘은 1980년대 후반부터 활동했지만 2002년 <8명의 여인들>에 이르러 그 이름을 알렸다. 그 이전까지 그의 작품이 국내에 개봉된 적이 없고, 그 이후로 그의 모든 작품이 국내에 개봉된 사례만 보아도 어림직잠할 수 있다. 물론 하루아침에 뛰어 오른 건 아니고, 1990년대부터 비평계에 그 이름을 드높여 왔다. 


그는 매 작품마다 파격적 소재를 기본 장착하고 개성있는 상상력과 풍자를 선사했다. 비평가들이 좋아마지 않는 영화를 만들었다고 할까. 그렇지만 무엇보다 오종을 상징하는 건 섹슈얼리티 기반의 욕망이다. 한국에 처음 소개된 그의 작품 <스위밍 풀>이 당대를 대표할 만한 섹슈얼 미스터리라는 점도 크게 작용할 것이다.(<8명의 여인들>이 먼저 만들어졌지만, 국내에서는 <스위밍 풀>의 개봉 이후 그 성공으로 <8명의 여인들>이 개봉했다.) 그 전후로도 그는 섹슈얼리티에 천착했다. 


그런 프랑수아 오종 감독이 <프란츠>로 우리를 찾아온 건, 영화가 파격과는 조금 거리가 있기에 또 다른 느낌의 파격으로 다가온다. 영화는 제1차 세계대전 후의 독일과 프랑스를 배경으로 사랑과 용서, 거짓말과 진실, 외면의 정적과 내면의 격동 등에 휩싸인 인간상을 내보인다. 인간은 수많은 감정과 욕망의 소용돌이에 휩싸이면서도 꿋꿋이 살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프랑수아 오종 감독의 영화 경력의 전환점과 같다. 


전쟁 미망인 앞에 나타난 비밀스런 적국민 남자


전쟁으로 약혼자 프란츠를 잃고 아파하는 안나 앞에 적국민 남자가 찾아온다. 무슨 이유로? ⓒ찬란



1919년, 제1차 세계대전 패전 직후의 독일. 안나(폴라 비어 분)는 전쟁으로 약혼자 프란츠를 잃고 실의에 빠져 지내고 있다. 그녀가 버틸 수 있었던 건 아들을 잃고서도 그녀를 딸처럼 생각하고 보살핀 프란츠의 부모님 덕분이다. 아니, 프란츠의 부모님이 그녀 덕분에 버틸 수 있었던 것일 테다. 그런 독일 한복판의, 그것도 프란츠의 묘지에, 한 프랑스인이 나타난다. 


그는 아드리앵(피에르 니네이 분), 전전(戰前)부터 프란츠와 절친한 친구 사이였다고 한다. 프란츠의 마지막도 잘 알고 있는 그는, 프랑스인을 향한 적대감에도 불구하고 프란츠 부모님의 신뢰를 얻는다. 안나도 그에게 차츰 마음을 연다. 하지만 아드리앵의 눈은 자주 흔들리고 프란츠 부모님과 안나와 함께 있을 때 종종 불안해 한다. 알 길 없는 불안한 연유, 비밀을 간직하고 있는 것 같다. 


아드리앵은 돌연 고향인 파리로 돌아간다. 그 직전 더이상 버틸 수 없었던 그는 안나에게 비밀을 털어놓는다. 다소 충격적인 그 비밀은, 그가 프란츠의 오랜 친구가 아니라 전쟁 중에 프란츠를 죽인 독일군 출신이었다는 것이었다. 아드리앵은 프란츠 부모님과 안나에게 용서를 구하고 싶었던 거였다. 


이제 그만 안나가 자신의 삶을 살았으면 하는 마음과 이왕이면 아드리앵과 잘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던 프란츠 부모님은, 안나에게 아드리앵을 찾으라고 조언한다. 안나는 아드리앵의 비밀을 말씀드리지 않고 혼자만 간직한 채 파리로 향한다. 마치 1부가 끝나고 2부로 향하는 느낌이다. 그녀는 그를 찾을 수 있을까? 그녀와 그에게는 어떤 일이 기다리고 있을까? 


아름다운 정적, 영화 전반부


영화의 전반부는 흑백과 컬러를 오가는 와중에 아름다운 정적이 주를 이룬다. ⓒ찬란



비록 적국이지만, 비록 자식을 죽였을지 모를 적국민이지만, 모두 전쟁이 낳은 피해자들이라는 깨달음과 함께 용서를 넘은 포용이 영화의 전반부를 이룬다. 영화 외적인 요소들이 주를 이루기에 지루한 면이 없지 않아 있는데, 아름다운 슬픔과 역설적인 서정이 주는 감정적 호소가 깊이 있다. 영화를 다 본 후에 느낄 수 있는 점이지만, 격정적인 후반부의 느낌과 대조를 이루는 장치였다고 할 수 있겠다. 


감독의 의도가 잔뜩 들어 있는 흑백과 컬러의 조화가 눈길을 끈다. 영화는 흑백이 거의 전부를 차지하고 짧은 순간들만 종종 컬러로 내보이는데, 공통적으로 환희의 순간들이다. 문제는, 그 순간들이 암울한 현실에 비춰 당사자들은 모르지만 상황 상 현실을 더 암울하게 만들 순간들이라는 것이다. 아드리앵이 흔들리는 눈빛에도 불구하고 프란츠와의 거짓된 즐거운 한때를 말하고, 안나가 쓸쓸함이 잔뜩 묻은 목소리로 프란츠와의 즐거운 한때를 회상한다. 


더불어 곳곳에 도사리고 있는, 후반부 연속되는 격정적 사건들의 복선들도 눈에 띈다. 주로 아드리앵의 행동과 눈빛과 대사 등에서 대략이나마 알아차릴 수 있다. 다분히 안나의 시선에서 영화를 보고 느낄 수밖에 없기 때문인데, 그것들을 하나 하나 풀어내고 전에 없는 감정에 흔들리는 안나와 일심동체 되는 나를 느끼게 될 것이다. 


다양한 사건과 격정적 내면, 영화 후반부


안나가 겪는 다양한 사건 중에 내면에 몰아치는 격정들. 영화 후반부를 차지하는 것들이다. 우린 안나와 더불어 참으로 많은 것들을 보고 느끼고 깨닫는다. ⓒ찬란



안나가 아드리앵을 찾아 파리로 떠나면서 시작된다고 할 수 있는 후반부는, 똑바로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놓칠 수 있는 많은 중요 요소들의 모음이다. 거의 모든 장면, 대사, 행동, 표정에 의미가 부여되어 있다.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도 거기에 있고, 영화를 이루는 재미 요소도 거기에 있다. 


아드리앵이 용서를 빌고자 독일을 찾아왔던 전반부는, 안 그래도 정적인 독일이라는 곳에 더해 겉으론 즐겁지만 속은 타들어가는 아드리앵의 정황이 겹쳐 자칫 우울할 정도로 정적일 수밖에 없었다. 반면, 후반부는 프랑스 파리라는 당대 최고의 도시에 더해 전승국이라는 프리미엄을 업고 안나가 겪는 다양한 외적 사건들과 오락가락하는 내면에 의해 격정적이기 짝이 없다.


안나가 겪는, 안나가 프란츠와 겼었고 프란츠 부모님과 겪었고 겪고 있으며 아드리앵과 겪는 모든 것들이 정신없이 휘몰아친다. 그 하나 하나가 모두 의미 있게 다가온다. 사랑, 용서, 거짓, 진실, 회한, 이 모든 걸 이루는 욕망, 그 안에서 외롭게 죽어가는 인간 그리고 그럼에도 살아가는 인간. 순간이 곧 전체이고, 전체가 곧 순간이다. 


영화는 말한다. 인간이 위대한 건 그저 살아 있는 것이라고. 살아갈 이유 따윈 바라지도 않지만 오히려 죽어야 할 이유를 찾았음에도 살아 가는 그들. 생각지도 않은 희망을 주었다고 획기적인 방법으로 절망을 선사해도 살아 가려는 그들. 나도, 우리도 그렇게 살아간다. 그럼에도 살아간다. 안나와 아드리앵, 그리고 프란츠 부모님. 모두 프란츠를 잊으려 하지 않아도 된다. 아니, 잊으면 안 된다. 하지만,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프란츠와만 살아갈 순 없다. 계속 살아가기 위해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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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오래된 리뷰] <열두살 샘>


공고롭게도, 열두살 때 백혈병으로 친구를 잃었다. 영화 <열두살 샘>은 백혈병으로 죽음을 앞둔 열두살 샘의 이야기이다. ⓒ㈜미디어데이



어린 시절, 친구 몇 명을 잃었다. 12살 때 반 친구가 백혈병으로 하늘나라로 갔고, 13살 때 동네 친구가 교통사고로 세상을 떴다. 중학생 때는 함께 놀던 다른 반 친구가 무슨 연유 때문인지 기억내지 않는 이유로 죽었다. 12살 때는 증조할머니도 돌아가셨던 것 같다. 그보다 어렸을 땐 외할머니이 돌아가신 모습도 봤고. 그때마다 충격으로 울음을 감추지 못했었다. 그런데, 그 울음은 슬픔이 아닌 공포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 사람을 다신 볼 수 없다는 슬픔이 아닌, 내가 죽음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는 공포 말이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그 공포는 중학생이 되기도 전부터 나를 괴롭혀 온 것 같다. '죽음이 뭐지, 죽으면 어떻게 되지, 죽으면 어디로 가지' 등, 그 어린 나에게 그보다 두려운 건 아무것도 없었다. 


12살 때 백혈병으로 앓다가 세상을 떠난 친구는 아직도 생생하다. 반에서 함께 공부하던 친구가 어느 날 갑자기 백혈병으로 학교에 나오지 못했고 상태가 호전되지 않는다는 소식을 들었으며 결국 영원히 우리 곁을 떠났다는 소식까지. 우리 반 전체는 친구를 기리며 묵념하고 울었다. 그 친구의 자리에는 꽃이 놓였다. 


죽음을 앞두고도 '용기' 있는 열두살 샘


샘에겐 상상 못할 '용기'가 있다. 삶보다 죽음이 가깝지만, 누구보다 삶과 가까이 있는 듯하기 때문이다. ⓒ㈜미디어데이



영화 <열두살 샘>은 백혈병에 걸려 죽음을 앞둔 12살 샘의 이야기다. 너무 공교롭게도 나의 경험이 반쯤 완벽하게 투영되어 있어 놀라기도 했는데, 한편 그 불편한 기억을 조금은 좋은 쪽으로 희석시킬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이 영화는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죽음과 처절히 싸워 이기는 내용이 아니라, 죽음에 직면해 오히려 삶에 더 가까이 가고자 하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 용기가 영화의 포인트다. 


열두살에 불과한 샘, 백혈병으로 시한부 선보를 받은 상태다. 85%의 완치 확률을 자랑하는(?) 백혈병이지만 샘은 세 번이나 재발했고 두 번 항암치료를 받았다. 그는 완치되지 못했고 1년 안에는 이 세상에 없을 것이다. 샘은 병원에서 만난 절친 펠릭스와 죽기 전에 꼭 해보고 싶은 버킷리스트를 만든다. 


세계 신기록 깨기, 에스컬레이터 거꾸로 올라가기, 공포영화 보기, 담배 피기, 술 마시기, 진하게 키스하기, 여자친구 사귀기, 과학자 되기, 비행선 타기, 귀신 보기, 우주선 타고 별 보기. 샘은 펠릭스와 함께, 혼자서, 아빠와 함께, 여자친구와 함께 결코 쉽지 않을 것 같은 이 모든 버킷리스트를 실행에 옮긴다. 


한편, 가장 마음에 걸리는 건 다름 아닌 '아빠'. 아빠는 아픈 샘을 마치 외계인 보듯이 한다. 아빠의 투철한 이성이 반드시 죽음으로 치닫는 백혈병에 걸린 샘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거기엔 이성이 아닌 감성이 필요한 부분이 있을 텐데 말이다. 과연 샘과 아빠는 선을 넘을 수 있을까? 그리고 먼저 세상을 떠나게 된 펠릭스, 죽음 앞에서도 명랑했던 샘에게 위기가 찾아온다. 잘 이겨내고 끝까지 용기를 지닐 수 있을까?


핵심을 찌르는 한마디, "신파는 아니겠지?"


이 영화, 신파가 아니다. 통통 튀기까지 하는데, 그게 감동을 자아낸다. 묘하다. ⓒ㈜미디어데이



죽어가는 자신의 이야기로 일기를 쓰고 영상으로 남기는 샘, 그 사실을 알게된 아빠와의 단문단답이 의미심장하면서 영화의 핵심을 찌른다. 이런저런 얘기가 끝나고 방을 나가기 전에 아빠가 묻는다. "사랑 무지개로 가득 찬 질질 짜는... 신파는 아니겠지?" 샘이 질색하며 "아니에요."라고 답하니, 아빠가 씨익 웃으며 "다행이다."라고 하고는 나간다. <열두살 샘>은 신파가 아니라는 거다. 


12살 어린 나이의 아이가 죽어가는 데 신파가 아닐 수 있다? 가장 우선적으로 당사자가 대단한 용기를 지녀야 한다. 그런데, 12살이면 나도 그랬듯이 죽음에 대한 공포를 충분히 느낄 수 있는 나이다. 공포로 벌벌 떨며 잠 못이룰 수 있는 나이인 것이다. 그런데 샘은 어찌 죽음에 초연하다 못해 유머러스할 수가 있을까? 영화라서?


먼저, 시간적으로 영화가 시작되기 전에 이미 세 번의 재발과 두 번의 항암치료를 겪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항암치료는 차라리 죽고 싶을 정도로 극심한 고통을 동반한다고 알려져 있기에, 그걸 뚫고온 샘에게 죽음은 차라리 친숙한 존재일수도 있는 것이다. 그건 펠릭스도 마찬가지. 그래서 옆에서 지켜보는 부모님들이 더 힘들어 한다. 


그리고 학교를 가지 못하는 그들을 위해 특수교육가정교사가 주기적으로 오는데, 그 시간이 그들에게 크게 작용한다. 버킷리스트를 작성하고 실행에 옮기는 것도, 샘이 자신의 이야기를 책으로 쓰고 영상으로 옮기는 것도 다 그 시간 덕분인 것이다. 교사는 그들에게 조심스럽지만 결코 숨기지 않고 말해준다. 삶과 죽음에 대해서 말이다. 


"결국 인류는 영원한 삶이란 불가능하단 걸 깨달았지. 하지만 우리는 뭔가를 영원히 남길 수 있단다. 바로 예술 작품이야."


'죽음'이 아닌 '삶'으로의 강한 끌림


결국, '삶'이다. 죽으면 모든 게 끝나니 사랑도 뭣도 필요 없다고 할지 모르지만, 샘은 첫사랑에 설렌다. 내가 나일 수 있는... ⓒ㈜미디어데이



영화는 일종의 파트가 나뉘어져 있는데, 샘이 던지는 정답이 없는 문제와 그에 대한 나름의 답에 따라서다. 죽음에 대해서 어린 아이답지만 굉장히 원론적이고 진지한 질문이다. 예를 들면, '죽으면 아플까?' '사람은 왜 죽어야 할까?' 등이다. 과학적으로 또는 종교적으로 접근하면 나름의 답을 찾을 수 있는 문제들이다. 하지만 정작 죽음에 직면했을 때 그런 답들이 무슨 소용 있겠는가. 그럼에도 답을 찾으려는, 정답이 없는 줄 알면서도 답을 찾으려는 샘의 행동은 삶으로의 강력한 끌림 때문이겠다. 


우린 이 영화로 '죽음'이 아닌 '삶'을 본다. 어린 아이의 치기어린 호기심으로 별 의미 없고 허접한 죽음 이야기를 듣는 게 아니라, 어엿한 인간의 진심어린 고민과 치열하고 고등한 삶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다. 그 어디서도 얻을 수 없는 고귀한 삶의 투쟁을 지켜볼 수 있다. 


그렇다고 이 영화를 보고 삶 또는 죽음에 대한 정답을 찾을 수는 없다. '정답은 없다'는 정답만 찾을 수 있을 뿐이다. 다만, 방향은 어렴풋이 짚어볼 수 있을 것 같다. 일종의 균형 감각이라고 할까. 삶과 죽음, 죽음과 삶을 그 어느 것도 멀리 하지 않고, 모두 끌어안되 내가 나일 수 있는 방법을 계속 강구하고 실행에 옮기는 것이다. 


삶에도 죽음에도 매몰되지 않고 '나'를 이어나간다는 게, 추상적이기도 하거니와 인지한다고 해도 굉장히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영화를 보면, 그게 무엇인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어렴풋이나마 알게 되지 않을까 싶다. 막상 죽음이 닥치면 그게 가능할까 심히 의문이 들지만, 또 못할 게 무언가 싶기도 하게 만드는, 그런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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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캡틴 판타스틱>


숲 속으로 들어간 '캡틴 판타스틱' 벤과 6명의 아이들, 그들에게서 대안적 삶과 교육의 완벽한 모습이 엿보인다. 이들에게 어떤 앞날이 펼쳐질까. ⓒ(주)더쿱



어딘지 알 수 없는 깊은 숲 속, 누군가가 사슴과 대치하고 있다. 달려들어 사슴의 목을 베는 그. 새카맣게 칠한 얼굴에 뭔가 이루었다는 표정이 읽힌다. 곧 근처에서 숨어 있던 사람들이 나온다. 다들 어리다. 그리고는 어른 남자 한 명이 나와 사슴의 심장을 빼낸다. 사슴을 쓰러뜨린 이의 얼굴에 피를 바르며 심장을 먹게 하곤 '이제 비로소 어른이 되었다'는 식의 말을 건넨다. 숲 속 부족의 성인식 같다. 


첫 장면만으로는 영화의 성격을 전혀 알 수 없는 이 영화, <캡틴 판타스틱>이다. 알고 보니 그들은 한 가족, 아버지와 아이들 6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숲 속 부족이 아닌, 숲 속으로 들어간 가족이다. 6명의 아이들은 아버지 '캡틴 판타스틱' 벤의 철처하고 완벽한 통제 교육 하에 훈련, 책읽기, 음악, 토론, 생존 등에서 한계 이상의 능력을 뽐낸다. 그 기저에는 현재 '바깥 세상'에 대한 깊은 불신과 좌파적 이상주의가 깔려 있다. 


아이들을 위한 대안 교육, 올바르고 제대로 된 인생을 위한 대안 삶의 완벽한 모습이 엿보인다. 아무래도 벤이 절대적인 신념 하에 기획하고 결정하고 실행에 옮긴 삶인 듯, 아이들도 군말 없이 힘들고 어렵고 격렬한 아버지의 교육 방식에 따른다. 첫째의 미국 유수 대학 합격 소식과 넷째의 반항아적인 기질이 불안하지만, 캡틴 판타스틱의 카리스마를 따르지 않을 도리가 없어 보인다. 이들에게 어떤 앞날이 펼쳐질까. 


누구나의 '인생 영화'가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재미, 메시지, 연기, 내용, OST, 그리고 결말까지 완벽한 영화 <캡틴 판타스틱>. '인생 영화' 리스트에 올리는 것에 주저함이 없을 줄 안다. ⓒ(주)더쿱


영화를 본격적으로 소개하기에 앞서 말하고자 하는 건, 이 영화가 누구에게나 '인생 영화'가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거다. 출중한 영화적 재미로 시간가는 줄 모르게 보고, 그리 어렵지도 그리 쉽지도 않은 메시지가 단번에 전해지고, 연기와 내용과 OST까지 완벽하며, 무엇보다 너무나도 '조화'로운 결말이 가슴을 치며 깊은 여운을 남길 것이다. 한 콘텐츠에서 파격의 불안감과 혁신의 환희를 엿볼 수 있다는 게 기적이다. 


완벽할 것 같은 이 가족에게도 큰 위기가 닥친다. 어느 정도 예견된 위기인데, 바로 엄마의 부재다. 3주나 넘게 돌아오지 않고 있는 엄마, 비록 아버지의 통제 하에 철저히 시간을 보내고 있기에 걱정 없어 보이지만 아이들은 엄마가 그립다. 벤은 시내로 가서 부인의 소식을 듣는다. 정신병에 걸려 동생 집에 지냈던 부인이 자살했다는 소식을. 


아이들에게 알리는 벤, 울부짓는 아이들, 급기야 넷째는 아버지가 엄마를 죽게 했다며 분노한다. 오랫동안 세상과 동떨어진 삶으로 미쳐서 자살을 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그래도 해야 할 일은 해야 한다. 다시 벤의 통제 하에 교육 받는 아이들. 기존의 한계를 넘는 힘듬에 불안, 불만, 그리움 등이 스며든다. 머지 않아 와해될 것 같은 흔들림이 보인다. 


와중에 부인의 유서를 읽는 벤, 딸의 장례식에 오면 경찰을 부르겠다는 분노 어린 장인어른의 말을 무시하고 아이들과 함께 장례식장으로 향한다. 바깥 세상의 횡포에 맞서, 엄마를 '구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서 엄마를 이해할 수 있는 이들은 그들 뿐이다. 이 행동은 그들의 삶에 턴포인트가 될 것이다. 유서는 '절대 매장은 안 된다. 불교식으로 화장해달라. 뼛가루는 변기에 내려달라'는 내용이었다. 그들은 엄마를 구하는 데 성공할까? 


'버릴 건 버리고 취할 건 취하는 것'의 어려움


완벽해 보이는 벤의 가족들이지만, 그들은 참으로 극단적이다. 바깥 세상 사람들도 그들의 방식을 '틀렸다'고 하지만, 그들 역시 바깥 세상 사람들의 방식을 '틀렸다'고 한다. 다를 바가 없지 않나? ⓒ(주)더쿱


멀고먼 길을 떠난 이 가족, 제대로 된 바깥 세상 구경이 처음인 듯하다. 많은 걸 보고 느끼고 겪는 아이들, 벤이 생각하지 못한 또 다른 교육의 시작이다. 현대인들의 삶과 교육에 대한 벤의 극단적인 대안 방식, 바깥에 나오니 그들이 '틀린' 것 같다. 가족들도 그들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들 또한 바깥 세상을 인정하지 못한다. 자신들이 훨씬 더 우월하고 또한 올바르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잘못된 삶을 살고 잘못된 교육을 받고 있는 것이다.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지 못한 채 더 심한 극단으로 치달을 것만 같다. 


세상에 완벽한 건 없다. 완벽하려고 노력하는 것, 완벽한 듯 보이는 것만 있을 뿐이다. 분명 벤의 가족은 완벽에 가깝다. 육체, 정신, 지혜, 지식 면에서 또래 아이들이 절대 따라올 수 없는 능력을 뽐내고 있는 것이다. 단적으로 첫째가 미국의 최고 대학들에 모두 합격하지 않았는가. 물론 아버지 몰래 따로 교육을 받았겠지만, 그 기반은 분명 아버지의 교육 덕분이지 않은가. 그런데 완벽하진 못하다. 


6명의 아이들 중에서도 모든 면에서 완벽에 가까운 첫째, 그의 바깥 세상 체험은 충격적이었다. 자신이 받은 교육으로는 바깥 세상을 설명할 수도, 바깥 세상에서 잘 살아갈 수도 없는 것이다. 그는 말한다. 책으로 모든 걸 설명할 순 없다고, 아니 정말 사소한 것조차 설명할 수 없을 때가 많다고, 자신은 우물 안 개구리조차 되지 못한다고. '다름'의 대안을 넘어선 '틀림'의 극단이 불러온 폐해다. 


'올바른' 극단이 '올바르지 못한' 극단을 만나 혼란에 빠진다. 곧 수습하고는 더욱더 확고한 올바름으로 나아간다. 하지만 발견해낸다. 아니, 발견해내야 한다. 자신들이 무조건 올바르지 않다는 걸. 올바르고, 올바르지 못한 건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정녕, 굳이, 그들이 올바르다는 걸 증명하려면 스스로 만든 프레임에서 벗어나 '다름'의 시선을 장착해야 한다. 그렇지만 참 어려울 거다. '버릴 건 버리고, 취할 건 취한다'는 게. 


이 영화가 전하려는 '조화'의 모습


이 영화의 위대한 점은 '조화'에 있다. 어느 모로 보나 완벽에 가까워 보이는 가족을 끌어내리는 꼴이 아니라, 성장의 방정식으로 더 완벽해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정녕 어려운 것일 텐데. ⓒ(주)더쿱



끊임없이 소용돌이 치는 머릿속, 어떤 교육이 필요할까.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 벤의 신념이 투영된 교육 방식이 정녕 완벽해 보인다. 비단 교육뿐 아니라 삶까지도. 문명 이전에, 인간 본성에 가까운 삶인 것 같다. 올바르고 훌륭해 보인다. 그런데, 이미 문명은 발달할 대로 발달해 있다. 너무나도 올바르고 훌륭하고 완벽한 그들은 바보가 될지 모른다. 그들은 '위대'하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이 완벽한 '정답'일 수 없다. 


그러면 우리의 삶은, 현대인 대다수의 삶은 어떨까. 누군가는 충만한 행복으로, 누군가는 불만어린 시선으로, 누군가는 회의와 만족의 모순으로 살아간다. 아마 공통적으로, 자신에게, 자신이 속해 있는 사회에게, 인류 문명 전체에게 비웃음을 날릴 것이다. 속물들이라고, 비인간적이라고, 형편없다고. 인류는 결코 만물의 영장일 수 없다고. 그렇지만, 그렇다고, '틀린' 건 아니다. 위대하지도 않고 정답하고는 한참 거리가 멀다고 해도 말이다. 오히려 수많은 사람들의 생각과 고민이 있기에, 극단을 멀리할 수 있다. 균형 감각과 다양성이 있다. 


오래 전부터 '상대적' '조화'라는 말을 신념 비슷한 걸로 삼아왔다. 이를 추구하고 이를 실행에 옮기려고 노력해왔다. 하지만 어떻게? 어떤 식으로? 내가 할 수 있는 게 있을까.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발견했다. 그 방법을, 그 모습을. 다름 아닌 영화 <캡틴 판타스틱>이 전하려는 '조화'의 모습이다. 


버릴 건 버리고 취할 건 취하고. 자신의 극단적 신념에서 '다름'을 '틀림'으로 인지하게 만드는 요소들을 버리고, 그 자리에 '다른 것'들의 괜찮은 요소들을 배치한다. 올바르고 훌륭하고 완벽해 보이는 것들은 가지고 가되, 그로 인해 출현하는 절대적이고 적대적인 배제와 자만심을 버리는 것이다. 그 반대도 가능하다. 특유의 균형 감각과 다양성에 올바르고 훌륭하고 완벽해 보이는 것들을 최대한 흡수하는 것이다. 추상적이고 이상적이라고? 그럼 여기에 디테일하고 회의적인 면을 장착하면 되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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