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리뷰] <세션: 이 남자가 사랑하는 법>


충분한 논란과 충만한 사랑이 공존하는, 직선적인 영화 <세션: 이 남자가 사랑하는 법>. ⓒ20세기폭스코리아



얼마 전 국내 주요 언론들에서 BBC 보도를 인용해 '천사의 손' 논란을 다룬 적이 있다. 천사의 손은 대만의 작은 민간 자선단체로, 성욕을 해결하기 힘든 장애인을 위한 성 서비스를 제공한다. 한 마디로, 간호 자격을 갖춘 성 도우미가 장애인의 수음을 도와주는 것이다. 장애인도 비장애인과 다름 없는 욕구를 가지고 있고 이를 풀어야 하며, 장애인의 식사와 배설을 도와주는 것처럼 성욕도 해소도 도와주어야 한다고 말한다. 


논란의 여지가 다분하다. 매춘 행위와 다를 게 없다는 주장이 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여러 가지 각도에서 들여다볼 필요가 있고, 자연스레 그렇게 된다. 매춘을 바라보는 시각의 차이가 있을 테고, 장애인의 성 욕구를 바라보는 시각의 차이도 존재할 것이다. 무엇보다 '봉사'의 의미로 행해지는 성행위를 바라보는 시각이 가장 중요하게 작용할 것 같다. 


이와 다분히 동일선상에서 대할 순 없겠지만, 비슷한 생각과 논란을 야기시킬 수 있는 소재를 다루는 영화 <세션: 이 남자가 사랑하는 법>가 흥미롭게 눈을 잡아끈다. 소아마비로 인해 얼굴 근육을 제외한 온몸이 자유롭지 못한 중증 장애인의 바람을 들어주기 위해, 그리고 '치유'하기 위해 섹스 테라피스트와 시간을 가진다는 게 주된 내용이다. 1988년 미국에서의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고 한다. 


중증 장애인 마크의 총각 딱지 떼기


중증 장애인 마크는 총각 딱지 떼기를 실현코자 한다. 하지만 현실의 벽은 높다. 다른 사람들을 의식하는 것 따위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넘는 것. ⓒ20세기폭스코리아



마크 오브라이언(존 혹스 분)은 얼굴 근육을 제외한 온몸이 자유롭지 못하다. 6살 때 걸린 소아마비 때문인데, 도우미와 호흡을 도와주는 기계와 도구 없이는 살 수 없다. 그럼에도 그는 시인이자 저널리스트인데, 어느 날 '장애인의 섹스'에 대한 칼럼 제의가 들어 온다. 그러고 보니 38살 평생 섹스는커녕 수음도 해보지 못한 그, 섹스 테라피스트의 도움을 받고자 한다. 그렇게 셰릴 코헨 그린(헬렌 헌트 분)과 마크 오브라이언은 만남을 갖고, 세션 즉 '훈련'에 들어간다. 


자신의 몸을 느끼고, 서로의 몸을 느낀 후, 수음의 단계를 지나, 삽입의 순간 이후, 절정을 느끼는 것이다. 물론 마크는 어떤 행동도 취할 수 없기 때문에 셰릴에 의해서만 단계가 이어진다. 쉽지 않다. 마크는 평생 능동적이든 수동적이든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성에 관한 어떤 행동도 취해 보지 못했던 것이다. 비록 칼럼 때문이기는 했지만, 마크는 그토록 원하던 '총각 딱지 떼기'에 성공할 수 있을까?


한편, 마크가 어디에 가서도 쉽게 꺼내지 못할 자신의 속 깊은 얘기를 브렌단 신부(윌리암 H. 머시 분)에게 한다. 고해성사라고 할 수 있겠는데, 신부가 답해주기엔 맞지 않는 것 같은 성 상담이 대부분이다. 그런 와중, 계속 바뀌는 도우미도 문제다. 자신의 상태를 이해해주는 것 이상으로 한 인간으로 대해주는 도우미를 만날 수 있을 것인지?


영화는 마크 오브라이언을 중심으로 원을 그리듯이 다양한 사람들이 나와 관계를 이어간다. 처음엔 '중증 장애인' 마크가 보일 것이다. '저런 상태로 어떻게 살아갈까' 하는 궁금증이 가장 먼저 인다. 그러다가 어느새 '마크'가 보인다. 그러며 그와 관계를 이어가는 '사람들의 변화'를 엿볼 수 있다. 


섹스와 논란을 넘어 사랑과 관계로


영화 포스터를 볼 때는 '섹스'에 방점을, 일반적으로는 '논란'에 방점이 찍힐 수 있겠다. 하지만 그 행간에 위치한 사랑과 관계를 들여다보자. ⓒ20세기폭스코리아



별다를 게 없는 소소한 일상을 그리는 이 영화, 어디에 방점을 찍느냐에 따라 다양한 시각으로 볼 수 있다. 먼저 포스터를 보니, 배급사는 '섹스'에 방점을 찍은 것 같다. '신부님... 하고 싶은 게 죄가 되나요?'가 메인 카피다.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인 만큼, 어쩔 수 없이 선정성에 최대한 포커스를 맞췄다고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는 영화가 가지는 다양한 초점 중 가장 빗나간 초점일 것이다. 


'섹스'와 비슷한 관점일 텐데, '논란'에 방점을 찍는 게 이 영화를 보는 극히 일반적인 방법이다. 여기엔 두 층위가 있는데, 장애인의 성 욕구와 섹스 테라피스트의 정체다. 장애인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는 경향의 기반 위에서 장애인이 가지는 성 욕구는 더욱 생각하기 힘들다. '장애인 따위가 성 욕구를 가지고 있겠어?'와 '장애인이 무슨 성 욕구를 해소해?'가 있겠는데, 여하튼 이미 여기서 더 나아가지 못하는 것이다. 


글의 처음 소개한 장애인 성 도우미 논란과 연장선상에 있다고 할 수 있는, 섹스 테라피스트의 정체는 사실 혁명의 물결이 전 세계를 휩쓴 60년대에 확립되었다고 한다. 섹스보다 테라피스트 즉 치료와 치유에 방점을 둔 것이다. 단지 그 방법론이 섹스에 있는 것이리라. 이는 본인의 확고하고 당당한 신념이 중요할 듯하다. 


나아가 이 영화를 보는 가장 중요한 관점이자, 이 영화가 진정 말하고자 하는 바는 '사랑'과 '관계'에 있다. 마크를 아는 사람들이 느끼는 오묘한 감정, 그의 인간적인 면에 끌려 진정 사랑하게 되었지만 그의 장애를 극복하지 못하고 떠난 사람도 있고 셰릴처럼 공적인 만남으로 시작했지만 마크의 진심어린 마음과 역시 인간적인 매력에 끌린 사람도 있으며 모든 걸 떠나 오로지 마크라는 인간에 끌려 오랜 시간 함께 한 사람도 있다. 그리고 그의 분신과도 같은 친구와 도우미도 있다. 그들은 모두 '장애인' 마크 때문에 관계를 가졌지만, 모두 '마크'와 함께 하는 게 좋아졌다. 


우리가 이 영화를 보며 수정해야 할 것들


이 괜찮은 영화를 보고 우리는 더욱 괜찮은 생각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충분히 가능하다. ⓒ20세기폭스코리아



나는, 아니 우린 이 영화를 보며 '수정'해야 할 게 많다. 무엇보다 꽉 막힌 머리와 무관심한 가슴이다. 장애인도 당연히 성 욕구가 있고 원한다면 그 욕구를 풀 수 있어야 한다는 것. 할 수 있지만 안 하거나 못 하는 것과, 할 수 없어 안 하거나 못 하는 건 아예 다른 차원의 얘기이기 때문이다. 그걸 받아들이고 나서, 그 욕구를 해소하는 방법을 논해야 한다. 그 방법에는 봉사 또는 치료가 있을 것이다. 


쉽지 않겠지만 장애인의 삶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아니, 이해해야 한다. 그것도 안 되면, 차별하지 말아야 한다. 행동으로 옮기기 전에 가슴 깊이 새겨야 한다는 것이다. '틀린 게 아니라 다르다'는 진부하지만 심플한 명답도 함께. 세상엔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는데, 그들은 단지 몸이 좋지 않은 사람일 뿐이다. 


섹스를 바라보는 시선과 섹스에 대한 생각의 수정이 가장 중요하고 절실할 수도 있겠다. 비록 전라노출과 사실적인 섹스신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를 누구보다 추천하는 대상은 다름 아닌 청소년들인데, 청소년 관람 불가 등급이 아이러니하게 다가온다. 섹스란 불경하고 더럽고 몰래 숨어 즐기는 게 아니라, 이처럼 성스럽고 황홀하고 지적인 대상이다. 더욱이 몰래 숨기는커녕 당당하게 밝히고 응원까지 할 수 있는 것이다. 


영화 내적으로는 완벽한 캐릭터를 부여한데 대해 완벽하게 부합한 연기를 펼친 배우들이 빛났고, 영화 외적으로는 논란의 여지가 다분하지만 이겨낼 필요가 있는 다양한 관점을 드러내놓고 풀어낸 점이 빛났다. 무엇보다 이 모든 것들을 삶의 아름다움으로 묶어낸 점이 가장 밝게 빛났다. 그 어떤 인간도, 그 어떤 순간에도, 모두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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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헤드윅>


개인적으로 오래된 숙원 사업이었던 <헤드윅>. 드디어 풀어냈다. ⓒ백두대간



오래된 숙원 사업이 하나 있다. 영화 <헤드윅>을 소개하는 것인데, 개인적으로 이해하기 힘들기도 했거니와 영화를 볼 때마다 또 다른 것들이 나를 덮쳐와 벅찬 면도 있었다. 소설 <위대한 개츠비>가 이 영화와 더불어 숙원 사업 중 하나였던 적이 있는데 풀어 냈고, 이제 <헤드윅>만 남았다.


기억에 처음 본 게 대학생 때였으니 2004년 쯤이었던 것 같다. '영화와 철학' 비슷한 제목의 교양 과목에서 '젠더' 주제의 타이틀이었다. 그때는 정녕 '충격'으로만 다가와 지금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펼쳤던 것 같다. 두 번째가 2008년 쯤이었다. 이 영화를 극히 좋아하는 친구와 함께 봤는데, '아련'한 느낌으로 남아 있다. 세 번째가 3년 전쯤이었다. 혼자 봤는데, 다시 봐도 '재미'있구나 하고 지나갔다. 


그리고 이번에 네 번째로 아내와 함께 봤다. 스토리는 대략 알고 있으니 행간에 주목하려 했다. 조금은 보이는 것 같았다. '충만'한 기분이었다. 이 영화는 조금이라도 뭔가 보이면 성공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래서 십수 년만에 비로소 이렇게 소개하고자 한다. 충격적이고 재미있고 아련하고 충만하기까지 한 이 영화 <헤드윅>, 그 완벽한듯 허술한듯 한 매력에 흠뻑 빠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특별한듯 이질적인, 그러나 평범한 사랑과 성장 영화


십수 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겉모습만 보면 이질적일 수 있다. 하지만 결단코 이 영화는 평범한 사랑과 성장 영화다. ⓒ백두대간



가난한 록밴드 '앵그리 인치'를 이끌고 변두리 바에서 노래를 부르는 헤드윅(존 캐머런 미첼 분), 남자의 목소리와 여성의 몸매를 가졌다. 너무나도 좋은 노래를 너무나도 잘 부른다. '그녀'에겐 남자 친구 이츠학가 있다. 그런데 그는 여자 목소리를 낼 줄 알며 여자 가발을 몰래 쓰곤 한다. 그들은 맞지 않는 것 같다. 


헤드윅은 노래로 내래이션으로 대화로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베를린장벽이 세워진 1961년 동베를린에서 태어난 그, 한셀은 아버지에게 성추행을 당했던 것 같다. 어머니한테 쫓겨난다. 한셀은 미군 라디오 방송에 심취해 오븐 속에서 락을 듣는다. 엄마가 싫어하기 때문. 그에게 미국으로 갈 기회가 열린다. 그에게 반한 어느 미군 병사가 그와 결혼을 한 것이다. 대신, 그는 성전환수술로 '여자'가 되어야 했다. 하지만 수술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그에겐 일 인치의 살덩어리만 남게 되었다. 


그런 그녀에게도 사랑이 찾아온다. 미군 장군의 아들 토미인데, 그녀와 사랑에 빠진 것인지 그녀의 음악과 사랑에 빠진 것인지 모르겠지만 그들은 함께 한다. 그렇지만 그 문제의 일 인치 살덩어리 때문에 토미는 떠나고 급기야 헤드윅의 노래를 거의 그대로 훔쳐 세계적인 락스타로 발돋움한다. 헤드윅은 다름 아닌 토미를 스토킹하며 콘서트장에 딸린 레스토랑에서 노래를 부르는 것이었다.


<헤드윅>은 특별한듯 이질적인듯 거부감이 느껴질 수 있는 영화이지만, 실상은 평범한 사랑과 성장에 관한 영화다. 본래 사람은 남성와 여성이 한 몸에 있어 네 손과 네 발 달린 형체였는데 신의 노여움을 사 반으로 갈라졌기에, 자신의 반쪽을 찾아야 한다고 말하는 헤드윅. 그게 '사랑의 기원'이라는 것이다. 남자일까, 여자일까. 토미일까, 이츠학일까.  찾을 수 있을까. 


성에 대한 위대한 성취, 모두 맞다


감히 말하지만, 이 영화는 성에 대한 위대한 성취라 할 수 있다. 단순히 위대한 영화를 넘어선 그 무엇이다. ⓒ백두대간



1998년 존 카메론 미첼 주도 하에 만들어진 브로드웨이 뮤지컬 <헤드윅>, 2001년에 영화로 만들어진다. 세계 최고의 독립영화제인 '선댄스 영화제'에서 감독상을 수상하며 전 세계에 이름을 알리는 존 카메론 미첼과 영화 <헤드윅>. 이 영화가 넘어버리는 도식은 일반적인 사람이 생각하기 쉽지 않은 것이다. 특히 우리나라처럼 이분법적 사고가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사회에서는 말이다. 그래서 더욱 특별하다. 


베를린과 독일을 동과 서로 갈라버린 베를린장벽이 세워진 때 태어났다는 상징성을 몸소 보여주는 헤드윅, 남자에서 여자로 되었지만 남자의 흔적이 남아 있다. 그도 그녀도 될 수 없는 헤드윅은 그래서 반쪽을 사랑을 찾아 헤매는 것이다. 그러면 자신이 온전해질 수 있다고 믿는다. 그렇지만 갖가지 이유로 모두 떠난다. 


결론에 이르면 알게 되겠지만, 헤드윅은 자신에게로 돌아간다. 그렇게 깨달은 건 반쪽이 다른 누군가가 아니라 자신 안에 있다는 것. 즉, 젠더퀴어 선언에 이은 인정이다. 세상엔 남성과 여성만 있는 게 아니다. 영화에서 다양한 캐릭터들이 보여주는 성정체성과 사랑에 대한 혼란은, 그래서 틀린 게 아닌 다른 게 된다. 아니, 맞는 게 된다. 그런 혼란은 결코 이상한 게 아니라 정상적인 것이다. 


이어 역시 결론 때문에 혼란스러워지는 궁금해지는 헤드윅이 갖는 여러 정체성들이 있다. 헤드윅은 트랜스젠더, 드래그 퀸, 젠더퀴어로 변천사를 가지고 있다. 그 사이에도 알 수 없는 성정체성 변화와 혼란이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결국 헤드윅은 누구란 말인가? 어떤 성을 가지고 있단 말인가? 우린 답을 원한다. 


그러나 헤드윅은 답하지 않는다. 끊임없이 고민하고 변화하고 혼란스러워 하면서도, 그때그때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답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는 '제3의성'을 인정하는 도식조차 넘어서는 '상대적 성정체성'의 확립이다. 모든 성을 다 가졌다고 자각하는 '팬젠더'나 모든 성을 오가는 '젠더플루이드'가 그나마 비슷할까? 나로서는 더이상의 진척이나 이해는 힘들다. 성에 관한 위대한 성취인 것만은 분명하다. 


'성정체성 따위', 그 자체로 완벽한 한 인간


성정체성이 어쩌구 저쩌구 하는 걸 집어 던져버리자. 그리고 자신으로 들어갔다가 나오자. ⓒ백두대간


이 영화를 보면서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고 스스로를 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굉장히 무섭고 두려운 질문이고 돌아봄인데, 내가 남성이 아닌 다른 성정체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게 '끔찍'하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의 지극히 일반적인 모습이며 이상과 현실의 괴리이다. 이상은 모든 걸 다 인정하고 당연한듯 바라보는 것이지만, 현실은 끔찍하게 여긴다는 것이다. 


정확히는 '자신'이 그러하다고 생각할 때이다. 다른 누군가가 그러하다고 해서 끔찍하다고 여기진 않는다. 여기에는 다분히 교육에 의한 인식전환이 필요한대, 한 걸음씩 진전된 교육이 보이는 것 같다. 물론 오랜 시간이 걸릴 거다. 특히 우리나라에선. 최후의 대상은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될 것이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나여야만 한다. 내가 성정체성의 변화를 받아들일 수 있어야 진정한 인식전환이 가능하다는 말이다. 


헤드윅이 남자친구 이츠악의 변화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헤드윅은 자신의 변화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그 혼란을 정면으로 응시하지 않고 자꾸 밖으로만 눈을 돌렸다. 그렇지만 돌아오는 건 참담한 실패뿐. 결국 자신에게 눈을 돌려 정면으로 응시해 받아들이니 문제를 풀 수 있었다. 


쉽지 않다. 아니, 불가능에 가까울 수도 있다. 이렇게 해보자. 성정체성을 특별하게 보지 말고 '성정체성 따위'로 생각하자. 남자나 여자도 생김새와 성격과 목소리와 행동거지 등으로 완벽한 하나의 개인이 존재하는 것처럼, 수많은 성정체성도 그렇게 생각해보자. 그들도 그저 존재하는 것이다. 하나의 개인으로. 


모든 개인에 무슨 수식어를 붙이지 않는 것처럼 헤드윅은 그저 헤드윅인 거다. 트랜스젠더니 드래그 퀸이니 젠더퀴어니 따위의 수식어는 필요 없다. 이 영화가 궁극적으로 보여주려는 게 바로 그런 모습이 아닌가, 싶다. 그 자체로 완벽한 한 명의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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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클로저>


오랫동안 벼려온 영화 <클로저>. 머리가 커서야 비로소 그 진면목을 알아볼 수 있었다. ⓒ㈜퍼스트런



10여 년 전, 친구의 추천으로 로맨스 영화 한 편을 봤다. 그냥저냥 흔한 로맨스가 아니라고, '진짜 사랑'이 뭔지 생각하게 해줄 거라고, 했던 것 같다. 당시 영화에 막 빠지기 시작해 주로 대중적인 영화를 많이 봤던 나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영화였다. 당연히 재미는 없었고 결국 기억에 남지 않게 되었다. 다만, 뭔지 모를 찜찜한 여운은 남아 있었다. 


10년 전에는 끝까지 보지 못했었는데 몇 년 전에 한 번 더 볼 기회가 있었다. 그런데 그때도 재밌게 보진 못했던 바, 개인적으로 소설 <위대한 개츠비>와 겹친다. 위대한 소설이라 일컬어지는 <위대한 개츠비>를 나는, 10년 넘게 3번에 걸쳐 읽어내지 못하고 2~3년 전쯤 일사천리로 읽었다. 머리가 커야 이해하고 읽어낼 수 있는 소설인듯, 영화 <클로저>도 나에겐 그런 존재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재개봉 열풍의 끝자락 얼마전 12년 만에 재개봉한 영화 <클로저>, 삼수 끝에 비로소 이해하며 분석하며 재미있고 의미있게 볼 수 있었다. 30대는 되어야 볼 수 있을 것 같은 사랑 이야기 <클로저>는, 사실 사랑을 포함한 인간과 인간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어렵기 그지 없다. 그래서 이 영화를 다른 각도로 접근할 필요도 있다. 


얄팍한 인간 관계를 사랑으로 들여다보다


겉으로 보기엔, 별 내용 없고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삼류 로맨스 영화인 것 같다. 하지만 들여다보면 일류다. ⓒ㈜퍼스트런



수많은 사람들이 출근하는 런던 도심의 아침, 댄(주드 로 분)과 앨리스(나탈리 포트만 분)는 첫눈에 반한다. 앨리스가 댄에게 던진 한 마디 '안녕, 낯선 사람'은 이 운명적인 우연 또는 우연적인 운명의 상징이자 시작이다. 댄은 소설가가 꿈인 신문사 부고 기자이고, 앨리스는 뉴욕에서 온 스트립댄서다. 


앨리스의 삶을 소재로 한 소설로 드디어 데뷔를 한 댄, 책 프로필 사진을 찍기 위해 찾은 사진작가 안나(줄리아 로버츠 분)에게 강렬하게 대쉬한다. 그런 댄이 싫지만은 않은 듯하지만 앨리스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멀리하려 한다. 그러곤 그런 안나를 골탕먹이고자 댄이 음란채팅방에서 안나 행세를 해 오프라인 만남까지 성사한 래리(클라이브 오웬 분)와 연인 관계로 발전한다. 


'낯선 사람'이라는 타이틀로 전시회를 연 안나, 댄을 초대한다. 당연히 연인 래리와 댄의 연인 앨리스도 함께 있다. 그럼에도 댄과 안나는 이 전시회를 기점으로 내연 관계로 빠져든다. 이후 안나와 래리는 결혼을 했고 댄과 앨리스는 동거를 시작했다. 1년이라는 시간이 지나, 결국 이들은 파국을 향해 치닫게 되는데...


지극히 우연히 만나 연인 관계, 결혼 관계로까지 발전한 댄과 앨리스, 안나와 래리. 하지만 그만큼 우연히 만나 내연 관계로 발전한 댄과 안나도 있다. 그렇다고 래리와 앨리스도 완전히 아무런 관계가 없는 건 아니다. <클로저>는 이처럼 우연과 낯섬으로 점철된 얄팍한 인간 관계를 사랑의 관점으로 들여다보았다. '사랑'은 수단이고 '관계'과 목적이라 하겠다. 


현대판 <졸업>, 영화 <클로저>


마이크 니콜스 감독은 <졸업>이라는 희대의 명작을 50년 전에 내놓았다. 우린 <클로저>에서 <졸업>을 느낄 수 있다. ⓒ㈜퍼스트런



<클로저>는 2014년에 작고한 마이크 니콜스 감독의 살아생전 마지막에서 두 번째 작품이다. 그는 자그마치 50년 전 <졸업>이라는 20세기 최고의 영화를 데뷔 후 불과 두 번째에 찍어냈다. 불안하고 흔들리는 청춘의 일탈과 허무를 세련되고 설득력 있게 표현한 명작으로, 일반적 로맨스 영화와는 차원이 다른 결을 보여주었다. 


우리는 <졸업>에서 두 남녀 벤자민과 엘레인이 결혼식장에서 도망치는 명장면을 볼 수 있는데, 그 후 버스에서 보이는 두 남녀의 불안과 허무와 걱정과 허탈함이 뒤섞인 표정에서는 영화사에 길이 남을 인간 심리의 정면을 볼 수 있다. 35여 년이 흐른 후 우리는 <클로저>에서 어김없이 순간이 주는 사랑의 허무를 엿볼 수 있다. 


<클로저>는 현대판 <졸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진짜 사랑'일 거라 생각하고 순간의 선택으로 그 상대에 자신을 내던지는 벤자민. 댄, 앨리스, 안나, 래리는 벤자민의 후예와 다름 없다. 과연 그게 진짜 사랑일까? 많은 세월이 흘러 사랑도 진보해야 할 것 같지만, 이들의 행태를 들여다보면 사랑은 퇴보한 게 분명해 보이기까지 한다. 


인간은 '미지(未知)'를 두려워한다. 우리가 가장 알 수 없는 죽음을 가장 두려워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 한편, '미지'에게 끌리는 습성도 있다. 호기심의 발동이다. 그런 면에서 이 영화는 '낯선 사람'에게 끌리는 인간의 천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하겠다. 그러며 질문을 던진다. 그래서 남는 게 뭐지? 계속 낯선 사람에게 옮겨다닐 것인가? 


로맨스 영화의 탈을 쓴, 인간 심리와 관계의 명작


이 영화가 명작인 이유는 로맨스와 사랑에 있지 않다. 그걸 수단으로 하는 인간 관계와 심리에 있다. ⓒ㈜퍼스트런



나라고 이 명제에서 자유롭지 못한다. 누구라도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가깝고 익숙한 것에 편안함을 느끼며 한없이 머무르고 싶어 하는 습성도, 멀고 낯선 것에 희열을 느끼며 한없이 떠나고 싶어 하는 습성도, 인간은 모두 다 지니고 있다. 지니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실천에 옮기고자 한다. 


고인 물은 썩는다고 했다. 그렇다고 한없이 흘러가는 물은 무한정의 좋은 점만 가지고 있는가? <클로저>는 그래서 고인 물을 찬성하고 흘러가는 물을 비난하지 않는다. 흘러가는 물이 고일 때 썩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니까. 그러면 흘러가게 놔둬야 할까. 영화는 그 또한 무자비한 거짓만이 판치는 혼란이 있을 거라 말한다. 


솔직히 어떻게 해야 할지 알지 못하겠다. 영화를 보고는, 어떻게 하라는 건지 조금 짜증도 난다. 로맨스 영화의 탈을 쓰고 인간 천성의 낱낱을 적나라하게 까발려 놓고는 그 어느 쪽도 정답이 될 수 없다고 말하는, 이 지독한 인간 심리와 관계의 명작을 어떤 시각으로 바라봐야 할지 알지 못하겠다. 


<졸업>을 보고 느낀 찜찜함과 내지른 탄성이 <클로저>를 보고도 느껴지고 내질러진다. 내 안에도 이들의 가벼움이 있겠지만, 이들처럼 가볍게 살고 싶진 않다. 그렇지만, 감정이입을 하지 않고 객관적으로 영화만을 볼 때 희대의 명작이라 해도 과찬이 아닐 듯하다. 문제는, 감정이입을 하지 않고 욕을 하지 않고 볼 도리가 없다는 것이다. 다시는 보고 싶은 않은 네 주인공이지만, 주기적으로 다시 보고 싶어질 것 같은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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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그녀>


인공지능과 사랑에 빠진 인간, 그런데 제목이 인공지능 <그녀>인 이유는 뭘까? ⓒ워너브라더스



'4차 산업혁명'이 새로운 시대의 화두다. 인공지능, 로봇기술, 생명과학이 주도하는 차세대 산업혁명, 100여 년을 주기로 일어난 산업혁명이 4차 때는 50년 만에 찾아왔다. '알파고'는 그 상징 중에 하나가 되었는데, 단순히 인간의 능력을 앞서는 것 뿐만 아니라 인간을 대체할 수 있다는 얘기다. 


사실 로봇이나 인공지능이 인간을 대체하기 이전에 인간이 인간을 대체해왔다. 참으로 많은 분야에서 인간이 인간을 대신해 왔는데, '대리사회' '대체시대'라고 명명해도 되지 않을까 싶다. 누구도 대신할 수 없을 것 같은 각각의 인간이 가지는 고유한 감정도 대신해주는 것이다. 이 시대가, 이 사회가, 유토피아인지, 디스토피아인지. 


근 미래를 배경으로 한 대체불가 로맨스 영화 <그녀>는 여자 인공지능과 사랑에 빠진 한 인간 남자의 이야기를 주로 한다. 그러기 위해선 인간도 인간이지만 인공지능이 '감정'을 지녀야 한다. 나아가 상대방에게 감정을 전달해야 한다. 사랑은 혼자 할 수 없는 것이기에. 어찌 가능할까. 그런데 영화는 나름의 방식으로 기가 막히게 그려낸다. 


4차 산업혁명 시대의 신개념 사랑 방식


인공지능 그녀를 사랑하는 인간 테오도르는 너무나도 행복해 보인다. 근미래 누구에게나 도래할 수 있는 사랑의 모습이 아닐까. ⓒ워너브라더스



남들 편지를 대신 써주는 회사에서 일하는 테오도르(호아킨 피닉스 분), 그의 편지들은 하나 같이 의뢰인과 대상과 상황에 완벽히 부합하는 아름다운 글이다. 현실은 아내 캐서린(루니 마라 분)과 이혼을 준비하며 별거 중. 그렇지만 벌써 일 년이 넘었음에도 여전히 캐서린과의 좋은 한 때가 쉼 없이 그를 괴롭힌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봐도 별 다른 진전이 없다. 마냥 우울하게 방황할 뿐이다. 


테오도르는 호기심으로 최신 인공지능 OS를 구입한다. 이왕이면 여자로. 그저 말동무가 필요했을 거다. 심심하거나 마음 정리가 안 될 때면 언제나 불러내 자기 얘기나 들어줄. 그런데 사만다(스칼렛 요한슨 목소리)라는 이름의 이 OS, 심상치가 않다. 목소리부터가 사람을 끄는 마력이 있고, 무엇보다 '리얼'하다. 금방 친해진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괴로울 때나, 언제나 불러내 얘기할 수 있거니와 아는 것이 많아 어떤 이야기도 잘 통하고 자신의 마음을 잘 다독여주기도 하고 심지어 '본인'의 이야기도 건네준다. 분명 그녀는 인간이 아니지만, 그녀와 사랑에 빠진 게 하등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녀는 훌륭하게 인간을 '대체'할 수 있을까? 테오도르는 그녀와의 '사랑'을 잘 지속해나갈 수 있을까? 


그야말로 4차 산업혁명에 걸맞는, 아니 상징하는 신개념 사랑 방식이다. 사람만의, 나아가 생물만의 전유물이라고 생각했던 '사랑'이라는 감정의 궁극체가, 인간이 창조해 낸 비생물에 의해서 현실화된 것이다. 그것도 결정적으로 인간의 일방적인 사랑이 아닌 쌍방 사랑의 모습으로. 이들의 사랑이 너무 예뻐서 지나치기 쉬울 충격이다. 우린 시선을 선택해야 한다. 이들의 '예쁜 사랑'이 우선인지, '충격'이 우선인지. 


인간과 인공지능의 사랑, 충격과 공포


나에게 이들의 예쁜 사랑은 충격과 공포로 다가온다. 아직은 인간들의 사랑을 원한다. ⓒ워너브라더스



감독의 의도는 다분히 이들의 '예쁜 사랑'인 듯하다. 디지털의 최정점에 이른 듯한 전체적 시대상과 사회 모습과 분위기와는 정반대인 듯한 아날로그적 감정선이 영화 전체를 지배한다. 거기에 가장 크게 기여하는 게 영상과 색인데, 배경은 파스텔 톤으로 채도를 높이려 했고 인물은 원색으로 명도를 높이려 한 듯하다. 


거기에 무엇보다 테오도르와 사만다의 대화, 테오도르의 표정, 테오도르의 과거 회상 등의 아날로그에 집중함으로써 완벽한 4차 산업혁명을 이룩한 디지털 사회라는 걸 최대한 알아차리지 못하게 했다. 전반에 깔린 당연한 디지털에 시선이 가는 대신, 테오도르의 감정에 집중하게 된 것이다. 


반면 나는 이들의 '예쁜 사랑'이 오히려 '충격'으로 다가왔다. '씁쓸함'도 함께. 시대가 시대인 만큼, 이런 생각이 굉장히 보수적으로 비춰질 수 있겠다. 인공지능이 인간 삶과 사회를 전반적으로 지배 혹은 함께 하는 시대에, 인간이 인공지능과 사랑에 빠지는 게 전혀 이상할 것 없지 않은가. 문제는 인공지능이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궁극의 감정을 대신할 수 있게 된 점이다. 인간의 노동력이 아닌, 인간 자체를 대신하는 것이다.


제목이 '그녀'인 만큼, 영화가 부각하는 건 인간이 아닌 인공지능이다. 그녀의 변화, 발전, 진화 등. 그렇지만 나에겐 인공지능이 아닌 인간이 계속 보였다. 심지어 인공지능인 그녀가 아닌 인간이 되고 싶어하는 그녀가 보였다. 인간에게 받은 상처를 인공지능에게서 위로 받는 한 인간의 이기적인 면모도 보였다. 그렇다. 나는 최대한 인간을 보려고 애썼다. 그들의 사랑이 '인간과 인간'이면 좋겠다는 무의식의 발로였다. 그렇지만, 결정적으로 그녀는 인간이 아니니만큼 충격은 계속 배로 돌아올 뿐이다. 


더욱더 충격적으로 다가온 건, 그녀가 '인간'이 되고 싶다고 말한 적이 한 번도 없다는 사실이다. 그녀는 몸을 갖고 싶고, 감정을 지니고 싶다고 말했을 뿐이다. 불가능한 게 없는 그녀의 세계에선 그것이 비단 인간 만을 뜻하는 건 아닐 테다. 어디까지 나아갈지 알 수 없을 정도의 그녀, 그 미지가 주는 충격과 공포는 새롭기까지 하다. 


그럼에도 최고의 영화 <그녀>


이 모든 영화 외적인 논의들을 제쳐두면, <그녀>는 최고의 영화다. 그렇지만 계속 씁쓸함이 남기에, 마음 놓고 또 보긴 싫다. ⓒ워너브라더스



사실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명백히 알 수 있다. 현대인의 고독과 외로움과 소통일 것이다. 근 미래가 아니라 현재도 과거에도 우린 똑같이 고독했고 외로웠고 소통의 부족을 느꼈다. 다만, 미래의 우리는 훨씬 더 쉽게 훨씬 더 고도의 비인간 대체자를 찾을 수 있다. 오랜 시간과 공력을 들여 나에게 맞게 대상화하거나 나를 상대에 맞게 타자화할 필요도 없다. 바로 나를 내보일 수 있고 아무 걱정할 필요도 없다. 


아직 우리는 '결국 인간'이라는 불편하지 않은 답을 원한다. 아니, 최소한 나는 그렇다. 그걸 누구보다 잘 아는 감독은 일부러 주체를 인간 '그'가 아닌 인공지능 '그녀'에게 놓고 그녀의 합당한 자가 발전으로 인한 자발적 떠나감으로 인간 그가 결국 인간 그녀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는 구도를 만들었다. 여기서 나는 충격이 조금 가시는 대신 '씁쓸함'을 느꼈다. 굉장히 인간적인 씁쓸함인데, 결국 모든 건 헤어지는구나. 


이 모든 논의를 제쳐두면, 아니 오히려 이런 논의들과 함께 할 때 <그녀>는 단연코 최고의 영화다. 우선 이 영화가 '아름답다'는 데에 이견을 달 만한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시각적으로도, 청각적으로도, 그리고 생각적으로도. 그리고 우린 이 영화로 시대와 사회와 우리 자신을 동시에 들여다볼 수 있다. 보는 이에 따라서 깊게도 얇게도 가능하다. 거기에 가보지 못한 미래를 굉장히 현실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무엇보다 그 어디에서도 보지 못한 형태의 사랑을 느낄 수 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이 영화 하나로 진행할 수 있는 논의의 깊이와 총량이 어마어마하다. 이렇게 방점을 찍는 바, 심지어 <그녀>는 주인공인 '그녀'가 언제쯤 모습을 내보일까 하는 기대감을 끝까지 가지게 하여 긴장감이 촉발하는 즐거움까지 선사한다. 이 작은 영화가 파도 파도 끝이 없으니, 이보다 더 좋은 영화를 찾기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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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케빈에 대하여>


충격도 이런 충격이 없고, 논란도 이런 논란이 없을 영화 <케빈에 대하여>. ⓒ(주)티캐스트



화려한 붉은 물결의 토마토 축제, 그 한가운데 자유로운 영혼의 여행가 에바(틸다 스윈튼 분)가 있다. 하지만 다음 화면에 그 붉은 물결은 끔찍하게 변한다. 더러운 소굴 같은 집안에서 깬 에바는 누군가에 의해 악의적으로 붉게 칠해진 집과 자동차를 마주한다. 이상하리만치 별 반응 없이 차를 타고 에바가 도착한 곳은 한 여행사, 그녀는 화려한 경력에 걸맞지 않은 말단 자리에 발탁된다. 


신나서 집으로 가려는 찰나 길에서 마주친 중년여자가 "좋은 일이라도 생겼나 보네. 신나 죽겠어?"라고 말하더니 대뜸 에바의 뺨을 후려치고는 지옥에나 떨어져 버리라고 악담하면서 가버린다. 지나가던 이가 경찰에 신고한다는 걸 만류하며 에바는 "아니에요. 제 잘못이에요."라고 말하곤 가버린다. 대체 무슨 일인가?


중간 중간 알 길 없는 장면 장면들이 지나간다. 건물을 앞에 두고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울부짖고 있다. 반면 에바는 홀로 그 앞에서 멍하니 지켜볼 뿐. 한편, 에바는 교도소에 갇힌 아들의 면회를 간다. 그런데 엄마와 아들은 말을 하지 않는다. 그들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듯? 대략 유추해보면, 엄마와 아들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고 아들이 무슨 짓을 저질러 교도소에 갇혔으며 엄마는 그때문에 제대로 된 삶을 영위할 수 없게 된 게 아닐까. 가슴 졸이며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영화는 비로소 시작된다. 


'모성'은 당연한 것인가?


세상엔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많은데 그중 하나가 '모성'이다. 이 영화는 모성이 당연한 것인지 충격적으로 묻는다. ⓒ(주)티캐스트



영화 <케빈에 대하여>는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모성'의 전모를 날카롭게 때론 섬뜩하고 끔찍하게 드러낸다. 자식을 향한 엄마의 무조건적인 사랑은 그 어느 상황에서도 가능한가? 반드시 가능해야 하는가? 반론은커녕 물음조차 쉽지 않은 명제인 '모성의 당연함'은 이 영화에서 철저히 해부되고 깨어진다. 


다 크고 나서 엄마한테 들었던 말이 떠오른다. '너 아기일 때 너무 많이 울었어. 정말 힘들었다.' 아기라면 으레 다 집 떠나가라 울어야 정상 아닌가 싶은데, 애초에 결혼은 물론 아기를 원하지 않았던 자유로운 영혼 에바에게는 그렇지 않았던 듯하다. 그녀는 아기 케빈의 울음소리가 세상에서 가장 싫었고, 차라리 공사장 소음 소리가 편했다. 그녀는 애초에 엄마가 되기 싫었고, 스스로 엄마로서의 자격을 박탈해 버린 것이다.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 법, 케빈은 갓난 아기를 벗어나자 엄마를 지극히 적대적으로 대하며 말을 듣지 않는다. 에바는 당연히 케빈이 남자아이라면 다 가지고 있을 성향을 보인다고 생각한다. 한편으론 케빈이 남들보다 떨어지는 게 아닌가 걱정도 되고. 그렇지만, 그보다 더 커서도 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엄마'만'을 향한 적대심이 더 커진 것 같다. 어느 날, 에바는 케빈이 굉장히 똑똑하다는 걸 알게 된다.


노벨문학상 수상자 도레스 레싱의 <다섯째 아이>의 현대판이 아닐까 싶다. 전통으로의 회기를 선택해 대가족화를 밀고 나가는 어느 부모, 그렇게 태어난 일가족을 나락의 구렁텅이로 빠뜨린 다섯째 아이 벤, 이들의 처절하고 끔찍하고 슬픈 이야기다. 이 소설이 시대, 선택, 운명 등의 문학적 장치들을 정교하게 끌어들였다면, 이 영화는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와 심리 등의 현실적 장치들을 집요하게 끌어들였다. 


비극이 찾아오지 않으면 이상한 일


영화는 내내 비극이 찾아온다. 작은 비극들이 모여 큰 비극이 되는데, 이를 반복한다. 보고 있기가 힘들 정도. ⓒ(주)티캐스트



상황이 이럴진대 비극이 찾아오지 않는 게 이상한 일, 영화에서 크나큰 사건은 3번에 걸쳐 일어 난다. 사실 에바가 엄마가 되고 케빈이 태어난 것 자체가 비극이었을지 모른다. 여하튼 그 비극 중 첫 번째는 영화에서 중요 분기점을 형성하기에 충분했다. 적대의 칼날을 갈고 있던 에바와 케빈 사이에 여동생 실리아가 태어난 것이다. 


케빈이 실리아를 싫어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 어느덧 청소년이 된 케빈은 가히 그 똑똑한 머리를 여전히 엄마 에바를 괴롭히는 데 쓴다. 엄마를 직접적으로 괴롭힐 순 없는 노릇이니, 노골적으로 적대적 눈빛이나 행동을 일삼는 건 물론 실리아를 괴롭히는 우회적 타격이나 엄마한테 자위 행위를 들켜도 멈추지 않는 등의 심리적 타격을 일삼는 것이다. 그리고 결국 그 일이 터진다. 


싱크대를 막히게 해서 에바로 하여금 어쩔 수 없이 독극물을 사용하게 만든 후 실비아가 실수로 독극물을 엎어 한 쪽 눈을 실명하게 된 일이다. 겉으론 실비아의 실수, 나아가 에바의 잘못이다. 하지만 에바는 알고 있다. 케빈이 교묘하게 함정을 파놓은 거라는 사실. 그건 에바를 향한 케빈의 처절한 '복수'다. 결국 케빈의 복수는 에바에게 상상조차 하기 싫은 파국을 안긴다. 


영화는 시종일관 에바의 지옥 같은 현실과 지옥보다 더한 강제적 과거 회상, 그리고 에바와 케빈의 적대적 일상만을 보여줄 뿐이다. 에바의 현실은 무덤덤하게, 과거 회상은 몽환적으로, 에바와 케빈의 일상은 사이코틱하게 그린다. 무엇보다 청소년 케빈을 분한 에즈라 밀러의 연기에 기댄 바가 크다. 틸다 스윈튼은 에바 그 자체였다. 


특히, 에바와 케빈의 사이코틱한 일상은 내내 긴장의 연속이다. 분명 잔잔하고 평화롭기까지 한 가족의 모습인데, 잔잔한 물가에 돌멩이 하나가 일으키는 파문이 엄청난 것처럼 이들의 소소한 듯한 티격태격이 섬찟섬찟하다. 그 가중 큰 이유 중 하나가 적나라함에 있을 것이다. 별 것 없는 평범한 것들을 적나라하게 보여줄 때 우린 기괴함을 느낀다. 살얼음판을 걷는 느낌, 언젠가 반드시 큰 일이 있을 것만 같은데 어김없이 큰 일이 일어난다. 생각지도 못한. 


'케빈에 대하여'가 아닌 '에바에 대하여'


이 영화의 주 논란거리는 아마 '케빈'과 '에바'일 거다. 엄마와 자식,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관계에 비극이 들이닥친다면? ⓒ(주)티캐스트



누구의 '잘못'이라고 밝히기가 매우 어렵다. 둘 다 잘못했다고 할 수도 있지만, 그냥 서로 맞지 않았을 뿐이라고 할 수도 있다. 재수가 없었다, 운이 없었다고 치부할 수도 있다는 거다. 하지만, 분명한 건 케빈은 에바와 그녀의 남편 프랭클린의 '선택'이었다는 것. 그들이 조심하지 않았던 못했던, 낳자 낳지 말자 등등 무슨 생각을 했든지 간에 케빈을 낳아 기르기로 한 건 다름 아닌 그들 자신이고 에바 자신이다. 그 이후에 엄마와 자식이 서로 맞지 않는 건 또 다른 문제인 것이다. 


'케빈이 그렇게 된 건 엄마 에바의 사랑이 부족했고 제대로 교육하지 못했기 때문이다'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 그 행간엔 어느 누구도 알 수 없는 그들만의 것들이 있었을 테니까. 그렇지만, 적어도 여기서 '엄마는 사랑할 수 없는 아이, 나쁜 아이를 사랑할 수 있는가'라는 프레임을 적용해선 안 된다. 그 자체로 시선은 '사랑할 수 없는 아이, 나쁜 아이'로 간다. 보다 중요한 건 케빈이 아니라 엄마가 아닐까. 그래서 <케빈에 대하여>가 아닌 <에바에 대하여>가 맞는 것 같다. 


많은 논란이 있을 줄 안다. 내 주장은 형성된 사이코패스가 아니라 사이코패스의 형성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니. 그렇다면, 최소한 에바도 사이코패스일 수 있다는 걸 알았으면 한다. 케빈이 갓난 아기였을 때 보인 에바의 행동을 달리 어떻게 설명할 건가. 그 행동은 단지 아기가 싫다는 이유로 행할 수는 없을 것이다. 


최근에 나온 한국소설 <아몬드>는, 감정이 없이 태어난 윤재가 감정이 풍부하고 교육 열정이 투철한 할머니와 엄마의 사랑과 교육을 듬뿍 받아 결국 감정을 배우는 이야기다. 반면 누구나처럼 풍부한 감정을 지닌 채 태어난 곤이는 어릴 때 받은 폭력 등으로 얼룩진 어둠의 기억 때문에 괴로워 한다. 올바른 감정을 지니기 힘들다. 결국 선천적인 건 없다는 거다. 


이 영화와 맞닿는 부분이 있다. 선천적과 후천적. 아마 에바는 케빈이 선천적으로 나쁘고 사랑할 수 없는 아이로 태어났다고 생각했을 거다. 내(에바)가 아닌 네(케빈) 문제인 것이다. 과연 그럴까? 그 자신, 풍부한 감성과 열정적이고 반듯한 이성으로 케빈을 대했다면 당연히 충분히 달라지지 않았을까. 아니 달라지는 게 아니라, 애초에 잘 크지 않았을까. 한없이 안타깝다. 영화 또한 안타까움만 남을 뿐이다. 엄마와 아들의 슬픈 사랑 이야기와 다름 아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런 마음이 들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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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그 여름>


소설 <그 여름> 표지 ⓒ아시아



'동성애' 이슈는 언제나 뜨거운 감자였지만, 지난 4월 25일 4차 대선후보 토론회에서 홍준표 후보의 질문에 대한 문재인 후보의 확고한 대답에 대선 주요 이슈를 넘어 사회 전체 이슈가 되었다. 동성애를 좋아하지 않고, 동성혼 합법화에 반대하지만, 동성애 차별은 반대한다는 대답. 


감히 말하지만, 위 세 말은 애초에 성립되지 않는다. 어찌 동성애를, 사람과 사람의 사랑을 좋아하거나 하지 않거나 반대하거나 반대하지 않거나 하는 범주 내에서만 말할 수 있을까. 그리고 동성애 차별 또한 동성애를 특별 취급한 말이다. 동성애건 이성애건 어떤 차별에도 반대한다는 대답이 맞지 않은가, 싶다. 동성애자는 특별한 사람이 아니다.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일 뿐이다. 


그동안 수많은 동성애 코드 콘텐츠를 봐왔다. 특히 영화와 소설로. 돌이켜 생각해보니, 대부분 동성애 반대나 혐오를 반대하는 뉘앙스였다. 이제는 그 프레임에서 벗어나 동성애가 이슈화되지 않는, 동성애를 그저 사랑으로 대하는 그런 콘텐츠를 봤으면 했다. 드디어 볼 수 있었다. 작년에 첫 책을 낸, 데뷔 4년차 신인 소설가 최은영의 단편 소설 <그 여름>. 


소설은 두 주인공 김이경, 이수이의 신(新)고전적 서사의 사랑과 연애 이야기다. 이들은 분명 남자와 여자가 아닌 여자와 여자이지만, 우린 어느새 이들이 그런 관계라는 걸 잊고 만다. 그리곤 그저 이들의 사랑을, 청춘을, 서사를 따라갈 뿐이다. 그 기점은 이들의 사랑이 확고해지는 시점이다. 


"사랑을 하면서 이경은 많은 일들을 사랑에 빠진 사람의 입장에서 이해할 수 있었다. 수이의 단단한 사랑을 받고 나니 그렇게 두려워하던 사람들의 시선과 자신에 대한 판단이 예전만큼 겁나지 않았다." (본문 28, 30쪽)


평범한 사람들의 평범한 사랑


이경과 수이는 열여덟 여름에 우연한 사고로 처음 만난다. 수이가 찬 공에 이경의 얼굴이 맞아 안경테가 부러지고 코피까지 났고, 그들은 함께 양호실과 안경점에 갔다. 같은 학교에 다녔지만 이경은 그저 그런 평범한 학생이었던 반면 수이는 축구선수로 활동했다. 둘은 서로 강렬한 끌림이 있었던 것 같진 않다. 그저 어지러운 기분이었고 목소리가 귓가에 계속 맴돌 뿐이었다. 그리고 계속 시선이 갔고 몸이 반응했다. 


스무 살이 되며 둘은 서울로 갔다. 이경은 서울 중심에 있는 대학교에 진학했고 수이는 서울 외곽에 있는 직업학교에서 자동차 정비를 배우기 시작했다. 변함 없을 것 같은 그들의 단단한 사랑은 이경의 예감으로 조금씩 흔들린다. 언젠가 수이와 함께 하지 않을 것 같은 '당연한' 예감. 그 기저에는 언젠가부터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 수이에 대한 이경의 깨달음이 있었다. 


수이가 아닌 다른 사람을 좋아한다는 걸 상상조차 해보지 못한 이경에게 은지가 다가온다. 아니, 이경이 은지에게 강렬하게 끌린다. 이경이 생전처음 사랑을 해본 이는 다름 아닌 수이, 하지만 생전처음 강렬한 끌림을 경험한 당사자는 은지다. 이경과 수이의 사랑이 당연하듯 다가왔듯이, 이경과 은지의 끌림도 당연하게 다가온다. 이들의 삼각관계도 하등 이상할 게 없다. 


소설이 도달한 곳은,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사람들의 평범한 사랑이다. 다만 소설에서 남자를 찾아볼 수 없을 뿐이다. 여자와 여자의 사랑. 학창시절 축구선수로 활동했고 성인이 되어선 자동차 정비 일을 하는 수이가 남자 역할을 하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어쨌든 그녀도 사랑의 당사자일 뿐이다. 


갈 길 먼 인식의 변화, 이 소설로 시작


단편에 메시지가 있기는 쉬운 반면, 서사와 분위기가 존재하긴 힘들다. 구현해 내기 힘들다는 걸 알기에 애초에 시도조차 하지 않기 때문이다. 반면 <그 여름>은 서른넷의 이경이 이십 년이 훌쩍 넘은 옛날의 '그' 여름을 시작으로 십삼 년 전까지의 일을 회고하는 후일담 문학의 형식을 띄기에 서사적일 수밖에 없다. 


우리는 이 서사 덕분에 이들의 사랑에 집중할 수 있다. 집중하다 보면 이들의 '특별한 동성애'적 사랑이 '평범한' 사랑으로 치환되는 걸 발견한다. 특히 이 소설에서는 그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특별한 사랑과 평범한 사랑의 만남이 있다. 이경이 느끼는 사랑, 거기엔 누구나의 사랑도 있고 이경 만의 사랑도 있다. 


"수이를 만나기 전, 세상이 얼마나 삭막하고 외로운 곳이었는지 이경은 기억했다. 자기를 좋아해주는 사람도 없었고, 무리를 이뤄 다니는 아이들과 좀체 어울릴 수 없었던 기억을. 아무리 아이들을 따라 하려고, 비슷해지려고 노력해도 그렇게 되지 않았고, 자기 자신이라는 존재를 애써 바꿔보려 했지만 불가능했으며 그렇다고 바뀌지 않는 자신을 사랑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본문 106쪽)


급기야 '내'가 겪었던 사랑과 다를 바 없다는 것까지 느낄 수 있다. 싸우고 화해하고, 환희를 느끼고 아프고, 만나고 헤어지고... 나를 포함한, 이경과 수이와 은지를 포함한, 누구나의 사랑 이야기다. 이 소설이 동성애적 요소로 동성애가 아닌 '애(愛)'를 말한 건 탁월한 선택이고, 나아가 그 선택을 문학적 실력으로 잘 살려나갔다는 점에 좋은 점수를 주고 싶다. 신인다운 패기가 아닌 신인답지 않은 노련함이 번뜩였다. 


그럼에도 동성애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나라의 인식은, 시대의 인식은 아직 갈 길이 멀다. 논쟁 거리가 될 이유가 될 수 없는 게 동성애인데, 첨예한 논쟁의 한가운데에 있는 게 한심하고 슬프고 안타깝다. 앞으로도 논쟁 거리가 될 수 없는 동성애적 요소가 점철된 평범한 사랑 이야기가 계속되길 바란다. 어쩔 수 없이, 우선 인식이 변화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 여름>이 그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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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제리 맥과이어>


오랫동안 탑스타로 군림하는 톰 크루즈. 그에게 사실 가장 어울리는 옷은 로맨틱코미디가 아닐까? ⓒ피터팬픽처스



1981년 <끝없는 사랑>으로 데뷔하고선 이내 주연으로 올라서 80년대 후반에는 이미 자리를 공고히 한 배우 톰 크루즈. <미션 임파서블>을 위시한 단순 액션 영화를 많이 찍었지만, <레인 맨>이나 <7월 4일생>, <매그놀리아> 등 작품성에 포커스를 맞춘 영화도 많이 찍었다. 모두 톰 크루즈에게 제격이어서, 흥행과 비평 양면에서 대대적인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하지만 그에게 더 잘 맞는 옷은 따로 있었다고 본다. 다름 아닌 로맨틱 코미디인데, 그 대표적인 예가 <제리 맥과이어>겠다. 그의 필모를 들여다보면, 진지한 역이 반 정도이고 유들유들한 역이 반 정도이다. 이 영화에서 그는 유들유들한 역을 제대로 선보이는 바, 직전에 찍었던 <미션 임파서블 1>이나 <뱀파이어와의 인터뷰>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볼 수 있겠다.

한편, 이 영화는 톰과 함께 한 두 주연급 조연에게도 특별하다. 쿠바 구딩 주니어는 이 영화로 아카데미와 미국 내 각종 남우조연상을 휩쓸었는데, 이후 2000년대엔 각종 영화로 최악의 남우주연상 후보에 단골로 올라갈 때를 생각하면 더더욱 그러할 것이다. 르네 젤위거는 당시 무명 배우였는데, 이 영화로 단숨에 유망주 이상의 가치를 지니게 되었고 쿠바 구딩 주니어와는 반대로 2000년대 세계적인 여배우로 우뚝 섰다.

말랑말랑 로코와 감동적인 드라마

<제리 맥과이어>는 기본적으로 로코와 드라마와 합본이다. 말랑말랑하고 감동적인. ⓒ피터팬픽처스



능력과 외모, 성격까지 완벽에 가까운 스포츠 에이전트 제리 맥과이어(톰 크루즈 분), 누구보다 잘 나간다. 그런데 어느 날 그가 담당하는 선수들에게 여러 가지 일들이 한꺼번에 터진다. 어떤 선수는 10대 소녀를 성추행하고, 어떤 선수는 프로잼 카드가 아니라는 이유로 어린 아이의 사인을 거절했다. 결정적으로 어떤 선수는 몇 번이나 부상을 당했는데도 제리가 만류하지 않았는데, 그의 아들이 제리에게 'FUCK YOU'를 날린 것이다. 제리는 스포츠 에이전트라는 처음으로 직업에 회의를 느낀다.

선수들을 그저 '돈'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게 아닌지 하고 말이다. 그것이 맞다는 생각과 함께, 어느 날 그는 회사에 제출할 '중요한 건 돈이 아니라 인간이다'라는 요지의 방대한 제안서를 작성한다. 회사에서 환대를 받는 제리, 하지만 곧 해고 통보를 받고 쫓겨나 1인 에이전트를 세운다. 그때 그를 따라온 유일한 동료는 경리과 도로시 보이드(르네 젤위거 분), 그리고 유일한 선수는 미식축구 로드 티드웰(쿠바 구딩 쥬니어 분). 

제대로 된 홀로서기를 위해선 우선 제대로 된 선수를 잡아야 하는 바, 제리는 그저 그런 무명 선수인 티드웰은 제쳐두고 NFL(미국 미식축구리그) 드래프트 1순위가 확실시 되는 커쉬맨을 잡기 위해 총력을 다한다. 이미 잡은 물고기 로드, 거의 잡은 물고기 커쉬맨. 제리는 행복하다. 하지만, 커쉬맨은 막판에 제리를 배신한다. 제리는 전에 없는 실의에 빠진다. 과연 그만을 보고 따라온 도로시와 로드의 운명은?

<제리 맥과이어>는 얼핏 <머니볼>처럼 지극히 직업적인 색채가 강하고 전문적인 영화라고 생각하기 쉽다. 물론 그것들이 상당 부분을 차지하지만, 전체적으로는 말랑말랑하고 현실적인 로맨틱 코미디(제리와 도로시)와 감동적이고 진취적인 드라마(제리와 로드)의 합본이다. 영화는 이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는다. 

현실적인 로코와 진취적인 드라마

하지만 속내는 마냥 말랑말랑하고 감동적이지만은 않다. 굉장히 현실적이고 진취적인 면모도 보인다. ⓒ피터팬픽처스



먼저 제리와 도로시의 로맨틱 코미디, 이들의 사랑은 말랑말랑하지만 굉장히 현실적이다. 제리에겐 잘 나가던 바로 얼마 전까지 약혼녀가 있었으며, 도로시는 아들 하나가 있는 이혼녀다. 이들이 이어지는 이유는 결코 '사랑'이 아닌 듯한대, 외로움을 극도로 잘 타는 성격의 제리가 자신이 힘들 때 상냥하고 친절하게 잘 대해준 도로시에 '의리'를 지킨 것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그가 회사를 나올 때 유일하게 따라왔다. 

그런 그들의 사랑이 계속 지속될 수 있을까? 돈보다 인간이 중요하다고 울부짖다가 해고 당한 제리 입장에서 또다시 돈 때문에 대형 선수를 잃어버리고 찾은 안식처가 도로시일 텐데, 역설적으로 그 사랑이나 의리는 사람이 아닌 돈에 상처 받은 마음의 약일 것이다. 사람으로 받은 상처는 사람이 치유해줄 수 있지만, 돈으로 받은 상처를 어찌 사람이 치유할 수 있겠는가. 

제리와 로드의 드라마는 어떨까. 역시 모든 걸 다 잃고 마지막 남은 단 하나의 선수, 'SHOW ME THE MONEY'를 외쳐대는 그저 그런 무명의 선수 로드에게 기댈 수밖에 없는 제리. 적어도 그와는 비즈니스 관계에 있기 때문에, 돈으로 받은 상처를 치유해줄 수 있는 가능성은 있겠다. 그러기 위해선 로드이 유명해지고 그래서 고액의 연봉을 받아야 한다. 문제는 그의 실력이 아닌 그의 인성. 

제리는 로드에게 더 좋은 실력을 보여줄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대신 더 나은 인성을 가질 것을 요구한다. 이 지옥같은 경쟁의 장에서 실력이 아닌 인성을 요구하다니? 아무리 이미 출중한 실력을 갖고 있는 로드라고 해도 말이다. 그렇게 제리는 자신이 쓴 제안서가 맞다는 걸 로드를 통해 입증해낸다. 비단 에이전트와 선수 사이의 인간 관계뿐만 아니라, 이 자본주의 세상에서 돈보다 중요한 게 인간 관계라고 말이다. 

자본주의를 벗어나진 못했다

모든 건 자본주의 하에서 이루어진다. 사랑도, 인간 관계의 진전도, 성공한 이후에나 가능하다. ⓒ피터팬픽처스



로맨틱 코미디도 아닌 것이, 드라마도 아닌 것이, 직업인의 세계를 들여다보는 것도 아닌 것이, 영화는 직업인 제리를 중심으로 세 가지 주제가 유기적으로 맞물려 돌아간다. 거기에 맞는 세 가지 주제는 돈, 사랑, 관계라고 보면 될 것이다. 이 주제와 소재들을 모두 포괄하는 이 '세계'는 자본주의다. 

돈이 모든 걸 지배하고, 돈이 사랑도 관계도 넘어서는 세계가 자본주의일진대, 이 영화는 꼭 그렇지만은 않다고 일침을 가한다. '결코' 그렇지 않다고 단호하게 거부하는 게 아니라 '꼭' 그렇지만은 않다고 툭 건드리는 정도로 다가오는 건, 아마도 조금 불편한 결론 때문일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영화의 하이라이트이자 가장 감동적인 장면이다. 돈과 관계와 사랑까지 완벽해지는 그때. 

그런데 여기서 눈여겨보아야 할 게 순서다. 내가 보기에, 돈이 가장 먼저였다. 그보다 앞서 가족의 진심어린 사랑이 있었지만 그게 경우에 따라 돈으로 환원될 수 있겠다. 그 다음이 관계였고, 마지막으로 사랑이었다. 모든 걸 완성시킨 다음에야 비로소 사랑이 보인 것이다. 인간을 가장 인간이게 하는 '사랑'을 말이다. 그래서 난 이 영화가 '자본주의'에서 결코 벗어나지 못했다고 보는 것이다. 

자본주의를 넘어선 사랑이 아닌, 자본주의 안에서의 사랑. 물론, 이 영화가 20년 전 영화라는 걸 간과해서는 안 된다. 자본주의라는 게 최절정기에 있었던 1990년대 중반에 이런 정도의 영화가 나왔다는 게 신기한 거다. 여러 면에서 유려한, 이미 1990년대를 대표하는 명작 중 하나가 된 <제리 맥과이어>. 언제라도 환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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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오래된 리뷰] <호프 스프링즈>


노년의 사랑이 특별할 건 없다. 이 영화는 지극히 평범하고 현실적인 노년의 사랑을 코믹하게 그렸다. 특별함 대신 평범함을 선택했다. ⓒ데이지엔터테인먼트



결혼한 지 30년이 갓 넘은 노부부 케이(메릴 스트립 분)와 아놀드(토미 리 존스 분). 그들은 아놀드가 허리를 다쳤다는 이유로 각방을 쓴다. 케이가 큰 맘 먹고 여자로서의 자존심도 버려 가며 먼저 다가가려 하면 아놀드는 피곤하다며 단칼에 거부한다. 단지 허리를 다친 것 때문이 아닌 것 같다. 사랑이 식어버린 게 아닐까. 


그래도 케이는 매일 아침 출근하는 아놀드를 위해 계란과 베이컨을 대령한다. 신문을 보며 당연한 듯 받아먹는 아놀드, 케이는 짤막한 감사 인사와 가벼운 키스를 원하지만 그마저도 이젠 없다. 케이도 출근하는 건 마찬가지, 이런저런 것들을 따져 봐도 뭔가 문제가 있는 것 같다. 이 부부 생활에 말이다. 뭔가가 빠져 있다. 사랑? 섹스? 


2000년대 이후로 노년의 사랑을 그린 영화가 많이도 나왔다. 전에 없는 풍년인데, 급격한 노령화 때문인 것으로 사료된다. 그렇지만 그런 생각은 자칫 노년의 사랑이 특별하다고만 느끼게 할 수 있는 바, 주의해야 할 필요가 있다. 반면 역시 노년의 사랑을 그린 <호프 스프링즈>는 전 세계 노부부가 느낄 만한 평범한 주제로 특별함을 배제했다. 일명 '섹스리스 부부'. 노년의 섹스리스와 사랑을 코믹하게 그렸다. 


노부부의 섹스리스 문제 풀기


다름 아닌 노부부의 '섹스리스 '문제. 코믹하게 그려내지만, 들여다보면 굉장히 중요하고 심각한 문제. 이 '문제'를 풀어나가는 과정이 자못 진지하다. ⓒ데이지엔터테인먼트



영화는, 섹스에 사랑이 포함될 순 없지만 사랑에 섹스는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한다. 사랑 없는 섹스는 가능하지만 섹스 없는 사랑은 불가능하다는 말, 동의하는가? 플라톤의 <대화> '항연'편에서 비롯된 '플라토닉 러브'는 이를 정면으로 반박할 테지만, 일반적인 견해에서 볼 땐 절대적 진리에 가깝다. 


케이와 아놀드는 지극히 평범하고 일반적인 노부부, 대부분(일 거라고 생각되는) 노부부처럼 그들도 식어버린 사랑과 섹스리스 문제를 겪는다. 특히 케이는 이를 참기 힘들다. 그녀는 질색하는 남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멀리 떨어져 있는 곳에서 진행되는 비싼 상담에 신청한다. 자그마치 4000달러나 하는. 


케이는 그곳으로 떠나는 것 자체가 좋다. 이렇게 둘만의 시간을 갖는 게 얼마만인가. 매일 반복되는 일상을 떠나 일탈하는 게 얼마만인가. 아놀드도 따라왔다는 건 조금이라도 마음을 열었다는 증표가 아닌가. 하지만 순조롭지 않다. 상담박사는 그들에게 '문제'가 있다는 진단을 내리고, 그들에게 해야 할 '숙제'를 준다. 아놀드는 이에 대노하고는 들으려고도 하지 않는다. 케이는 충격을 받는데...


문제 풀기의 제1단계는 문제를 직시하는 것이다. 하지만 많은 경우, 문제를 직시하지도 못한 채 문제 풀기가 끝나버린다. 문제가 있다는 사실 그 자체가 두렵기 때문이다. 그 단계를 지나가면 한층 수월할 터, 영화는 일면 '문제 풀기'의 단계를 하나하나 보여주는 것 같다. 노부부의 섹스리스 문제. 


'우린 문제 없이 잘 살고 있다'고?


우리만 그런 줄 알았다. 뻔히 보이지만 아무 문제 없다고 허풍을 떠는 것 말이다. 특히 '가족'이 된지 오래된 이들에게서 흔히 발견할 수 있다. ⓒ데이지엔터테인먼트



'가족끼리 왜 이래'라고 농담 반 진담 반으로 꺼내는 말이 더 이상 우스갯소리처럼 들리지만은 않게 만든다. 삶의 질을 위해서, 노년의 행복을 위해서 간과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중년, 노년 부부가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사랑'이 아닌 '정'으로 산다고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영화는 중년, 노년 부부들이 '정'으로 사는 게 비단 우리나라 뿐만이 아니라는 걸 알려준다. 서양도 마찬가지인 바, 인류보편적인 삶의 진행인가 보다. 하지만 대부분이 그런 방향으로 간다고 해도 그것이 정답은 아니다. 우리나라 시트콤 <거침없이 하이킥>에 나오는 중년 부부, 비록 현실은 아니지만 박해미와 이준하 부부의 닭살 돋는 모습이 어찌 '비정상적인' 모습이라 할 수 있을까. 


부부상담, 노부부의 섹스리스 문제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정곡을 찌르고 들어가 오랫동안 계속되어 지치고 곪디곪은 사랑의 상처를 치료하고자 한다. 당연히 반발이 심하다. 누구라도 처음엔 반발이 심할 터, '우린 문제 없이 잘 살고 있다'에서 시작해 급기야 상담사를 욕하게 될 것이다. 그 다음엔 상대방을 질타할 것이고. 


서로 자신의 문제점을 인정하고 속시원히 드러내는 건 정말 쉽지 않다. 30년을 넘게 함께 산 '사랑하는 사람'과 라면 말이다. 그렇지만 일단 1단계를 넘어서면 일사천리다. 그야말로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길을 발견한 것. 이제 노력하면 된다. 물론 그 노력이란 게 나이와 세월에 심각하게 가로막힐 수 있겠다. 그러면 '이해'와 '배려'의 2단계에 도달한 거다. 


볼품없는 노부부의 섹스를 응원한다!


우리는 이 영화를 보며 노부부의 섹스를 응원하게 될 것이다. 아니, 궁극적으로는 사랑을. ⓒ데이지엔터테인먼트



영화의 노부부에게도 한 때 서로를 향한 끝모를 갈망이 있었다. 젊었을 때, 지금은 희미한 기억 속에서나마 겨우 존재하고 있는 감정들이 그때는 항상 서로를 감싸고 있었다.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은 남아 있지 않은가? 아니다. 사랑도 나이가 들어 지치고 힘겨워 할 뿐이다. 그래서 본분을 다하지 못하고 있는 거다. 


이 사랑스러운 영화는, 볼품없는 노부부까지도 사랑스럽게 만들고 심지어 그들의 섹스를 응원하게 만드는 이 영화 <호프 스프링즈>는, 그냥 그렇게 자신의 소임을 다한 듯 식어 있는 사랑의 불꽃이 봄에 새싹이 솟아나듯 다시 일 수 있다고 말한다. '정상체위'만을 일삼는(?) 남편에게 아내의 '섹스 판타지'를 선사하고, 자신만이 사랑의 피해자인 줄 알았을 아내에게 남편의 생각지도 못한 피해 사실을 말해주면서. 


현실과 이상은 구분해야 하겠지만, 암울한 현실과 유쾌한 이상 모두를 선사하는 이 영화를 보고 있노라면 그 구분은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 적당히 암울한 게 아닌 정녕 암울한 현실을 보여주며, 충분히 실현 가능하지만 보이지 않는 허름한 벽에 막혀 있을 뿐인 이상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두 눈 꼭 감고 한 번만 해보자. 산전 수전 다 겪은 부부답게 한 번만 해보면 될 일이다. '가족끼리 왜 이래' '우린 아무 문제도 없어'라는, 만병통치약처럼 군림하는 해괴한 주장은 집어치우고 그저 해보면 된다. 도대체 뭘 하느냐고? 영화를 보면 되겠다. 아주 상세하게 알려줄 것이다. 아마 하지 않고는 못 배길듯, 한 번 하면 또 하고 싶어 할듯. 참고로 영화는 '청불', 상상은 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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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톰 포드의 <녹터널 애니멀스>


<싱글맨>으로 엄청난 데뷔를 한 디자이너 출신 감독 톰 포드의 두 번째 작품 <녹터널 애니멀스>. 이번엔 어떤 영화를 선보였을까? ⓒUPI 코리아



호화스러운 레스토랑에서 호화스러운 옷을 입고 홀로 앉아 있는 수잔(에이미 아담스 분), 계속해서 입을 축이고 출입구만 바라볼 뿐이다. 아마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듯, 하지만 그 누군가는 오지 않는 것 같다. 레스토랑은 점점 비고, 수잔의 눈도 점점 공허해진다. 그녀는 누구를, 왜 기다리는 것일까. 


이어지는 상상초월 비만 체형 여자들의 나체쇼, 그리고 전시. 아트디렉터인 수잔의 작품이다. 그녀는 자타공인 모든 걸 다 가진 여자, 하지만 스스로 불행하다고 생각한다. 그 연유는 무엇일까. 어느 날, 전남편 에드워드가 감수해달라고 그녀를 생각하면서 지었다는 소설 한 편을 보내온다. 제목은 <녹터널 애니멀스>, '야행성 동물'이다. 


소설은 세 가족이 텍사스로 휴가를 떠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밤새도록 달리는 차, 그들 앞을 두 개의 차가 가로막는다. 대항하는 토니, 실랑이가 시작된다. 이어지는 이야기는 돌이킬 수 없는 파국. 아무것도 아닐 수 있는 일들이 엄청난 파국을 일으킨다. 수잔은 이 폭력적이지만 슬픈 이야기를 읽으며 에드워드를, 그리고 에드워드와의 과거를 떠올린다. 그녀의 현재, 그녀와 에드워드와의 과거, 소설은 무슨 관계일까?


여러모로 완벽한 영화 


영화는 여러모로 완벽한 모습을 선보인다. 원작의 완벽한 플래쉬백을 중심으로 색감, 배경, 음악, 연기까지 완벽한다. 미장셴? 물론 완벽하다. ⓒUPI 코리아



'퀴어 영화'라는 장치로 '상실'의 무서움을 관능적인 색감으로 표현해 낸 데뷔작 <싱글맨>으로 전 세계적인 호평을 받으며 대가의 길을 걷게 된 '톰 포드'의 두 번째 장편 <녹터널 애니멀스>다. 오스틴 라이트의 1993년 작 <토니와 수잔>을 원작으로, 본래 지닌 색감의 장점에 더해 원작이 가진 자연스럽기도 하면서 지극히 상징적인 플래쉬백, 액자 구성을 완벽하게 조화시켰다. 거기에 배경과 음악과 연기까지 완벽했다. 얼마나?


영화는 세 곳의 배경을 오간다. 수잔의 현재 LA, 수잔이 회상하는 에드워드와의 과거 뉴욕, 에드워드의 소설 속 텍사스. 세 곳의 질감은 물론 색감은 완전히 다르다. LA는 겉으로는 화려하기 그지없지만 속으로는 공허하기 짝이 없는 수잔의 삶을 대변한다. 뉴욕은 에드워드와의 핑크빛 사랑의 추억이 남아 있어 눈발이 날리는 중에도 따뜻하게 보인다. 텍사스는... 수잔으로부터 에드워드가 느꼈던 치욕을 생각나게 한다. 


배경에 따라 음악과 연기 또한 그 결이 완전히 다르다. 말 없이 허공만을 응시하며 소설을 읽는 수잔은 왠지 굉장히 늙어 보이고 배경에 깔리는 음악은 우울하기 짝이 없다. 뉴욕에서의 수잔과 에드워드는 특별할 게 없다. 그저 사랑이 있을 뿐. 하지만 그것도 오래가지 않는다. 텍사스의 토니는 끔찍하고 처참한 상황을 겪었기에 세상을 다 산 느낌이다. 하지만 그는 약해빠졌다. 음악은 우울하고 날카롭고 괴롭고 허허롭다.


굴지의 디자이너 출신 감독 톰 포드의 완벽주의자적인 면모를 엿볼 수 있는 것들이다. 전작에서 보여준 미장셴은 스케일이 훨씬 커졌음에도 불구하고 그 밀도가 줄어들지 않았다. 미시적인 미장셴과 더불어 거시적인 미장셴도 선보일 수 있으니, 정녕 영화 미장셴 거장의 진정한 탄생이다. 불과 두 편만에 말이다. 


치가 떨리는 메타포, '치명적 복수'


영화 속 소설 제목이 <녹터널 애니멀스>다. 이 소설은 그 자체로 치가 떨리는 메타포이자 수잔을 향한 에드워드의 치명적 복수다. ⓒUPI 코리아



본래, 소설 속 소설이었을 영화 속 소설 <녹터널 애니멀스>는 그 자체로 완벽한 스토리와 캐릭터를 지녔다. 수잔도 읽고 빠져들었는데, 나 또한 빠져들지 않고는 못 배기는 그런 소설이다. 사실, 스토리는 별다를 게 없는데 그 분위기가 사람을 들었다놨다 하는 것 같다. 야밤에 일어난 끔찍한 사건, 날새고 밝혀진 참혹한 현장, 시간이 흐를 수록 소설 외의 것이 보이기 시작하는데 바로 소설 속 토니와 수잔과의 연관점이다. 


토니는 사실 에드워드의 분신인 바, 소설은 에드워드가 '수잔을 위해' 쓴 것이다. 정확히는 '수잔을 향해' 날리는 치명적인 복수라고 해야 할까. 이토록 치가 떨리는 메타포는 소설, 영화를 통틀어 정녕 오랜만에 느껴본다. 일찍이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서 느껴보았는데, 그보다 더한 과격함을 느꼈다. 


그렇다, 과격. 수잔이 읽게 된 소설, 수잔을 향한 복수의 칼, "네가 한 짓으로 내가 받은 상처는 이 소설의 주인공이자 나의 분신 토니가 받은 지독한 상처보다 더 한 것이었어."라고 말하는 것 같다. 그녀가 도대체 무슨 짓을 햇길래? 사랑하는 사람끼리 줄 수 있는 최악의 상처가 무엇일지?


우리가 알 수 있는, 에드워드에게 수잔이 준 상처의 수위는 높지 않다. 아마도 원작에는 자세히 나와 있을 건데, 영화에서는 극도의 편집술을 동원해 살짝씩 보여주며 그 치명적인 면모를 부각시켰다. 모든 걸 뒤로 한 채 '사랑'을 택한 그들, 하지만 수잔은 다른 것도 아닌 바로 그 '사랑'을 뒤로 한 것이다. 


사랑에 있어서는 사소한 걸로도 절망을 맛볼 수 있다


사랑은 굉장히 긍정적이다.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지 않은가. 하지만 그만큼 치명적이고 절망적일 수 있다. 사소한 걸로도 말이다. 이 영화는 그 면모를 잘 보여준다. ⓒUPI 코리아



'사랑이 전부다.' '사랑은 수단일 뿐이다.' '사랑은 아무것도 아니다.' 어떤 명제가 정답일까. '정답은 없다'는 명제가 정답일 것이다. 그렇지만 이거 하나만은 맞다. '사랑'이 없으면 삶 또한 없다고 말이다. 전부건 수단이건 아무것도 아니건, 우린 사랑을 할 수밖에 없다. 심지어 사랑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언젠가 있었을 사랑의 배신 때문에, 오지 않을 것 같은 사랑의 무관심 때문에 그리 생각할 것이다. 


사랑만큼 겉으로 표현되지 않는 감정도 드물다. 기쁘고 슬프고 즐겁고 아프고 활기차고 억울하고, 거의 모든 감정들이 누가 봐도 알만큼 겉으로 드러난다. 하지만 사랑은 모든 감정들이 얽히고설켜 있지 않은가. 무심코 냇물에 던진 돌멩이에 개구리가 큰 상처를 입거나 죽을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개구리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돌멩이를 던진 이는 알 수가 없다. 


말 한 마디, 동작 하나, 표정 하나로도 사랑하는 사람을 절망의 구렁텅이로 빠뜨릴 수 있는 것이다. 당사자는 절대 모를, 아니 당사자는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그런 종류의 것들이, 상대방에게는 치명적으로 작용하곤 한다. 수잔은 에드워드가 보내준 소설을 읽으며, 과거 그녀가 그에게 한 짓들을 되새긴다. 그전까진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카메라의 구도, 전체적인 분위기, 특유의 오프닝과 엔딩은 전작의 영향을 짙게 받았다는 걸 알게 한다. 미장셴과 스케일의 확장, 조금 더 심도 있게 짜맞춘 스토리라인 등은 그가 성장하고 있음을 알려주지만, 앞엣것들은 주의할 필요가 있겠다. 확장하고 깊숙이 들어갈 것들은 그리하고, 전작의 영향을 너무 짙게 받을 수 있을 요소들은 옅게 하는 데 집중해야 하겠다. 가히 후속작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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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


우리를 찾아온 지 어언 10여 년이 되어가는 이 영화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를 이제야 보게 되었다. ⓒ주)노바미디어



비가 장대같이 쏟아지는 날, 소년이 얼굴을 찌푸리며 숨을 몰아쉬고는 토를 하며 울고 있다. 지나가던 여자가 토사물을 치우고 소년을 토닥인 후 자신의 집으로 이끈다. 그러곤 목욕을 하게끔 한다. 집에 돌아가 진찰해보니 성홍열이란다. 몇 달을 요양하고 감사의 말을 전하기 위해 여자의 집으로 향한다. 이후에도 계속 찾아간다. 훔쳐본다. 


소년 마이클에게는 무슨 꿍꿍이속이 있는 것 같다. 눈빛이 예사롭지 않다. 여자 한나는? 어느 날 그녀는 마이클에게 일을 시키고는 목욕을 하게끔 한다. 그러고는 전라의 몸으로 그를 유혹한다. "이럴려고 온 거 아니야?" 마이클은 그럴려고 간 거였다. "당신, 정말 아름다워요." 둘은 사랑을 나눈다. 잠깐, 그들이 사랑을 나누기 전에 하는 것이 있다. 일종의 의식처럼 되었는데, '책 읽기'다. 마이클이 한나에게 책을 읽어준다. 


영화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는 오랫동안 다가가기 힘들었다. 30대 여성과 10대 남성의 성관계를 동반한 사랑이 가장 먼저 떠올랐기 때문인데, 생각해보면 참 어이없는 이유다. 다 보고 나서야 하는 얘기지만, 사랑은 정녕 모든 걸 초월할 수 있다. 사랑은 모든 걸 다 받아들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넘어야 할 장애물이 엄청난 경우가 있는데, 이 영화에서 그 장애물이라는 건 상상을 초월한다. 감당할 수 있겠는가?


'근본'은 변할 수 있는가?


나치 협력자라는 '근본', 변할 수 있을까? 그저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라는 한나의 경우는? 영화는 계속해서 생각하게 만든다. ⓒ주)노바미디어



영화는 현재인 1995년에서 마이클이 과거 1950~60년대를 회상하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한나와의 짧지만 강렬한 만남, 마이클에겐 첫경험이기에 그의 자아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수십 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아니 변할 수 없는 근본이다. 여기서 중요한 질문을 던져야 한다. 근본은 변할 수 있는가?


사무직으로 승진해 어쩔 수 없이 떠나게 된 한나, 마이클에겐 말도 하지 않고 떠나게 되어 마이클은 충격에 휩싸인다. 시간이 흘러 법대생이 된 마이클, 실습의 일환으로 나치 전범 재판을 참관한다. 그곳에 떡 하니 앉아 있는 한나, 마이클은 다시 한 번 충격에 휩싸인다. 그녀가 나치 협력자일 줄은... 하지만 충격은 계속된다. 


시종일관 계속되는 마이클의 충격, 그건 모두 한나에 의해서다. 그 이면에는 '나치'가 있다. 한나로 대변되는 나치 협력자, 즉 전쟁 세대와 마이클로 대변되는 전후 세대. 마이클 동료 중 한 명은 재판을 할 필요도 없이 그들을 총으로 쏴죽여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마이클은 한나를 사랑했던 바, 그런 식으로 그녀를 대할 수 없다. 사랑 앞에선 나치 범죄도 한낱 과거의 일일 뿐인가?


이제 답해야 한다. 근본은 변할 수 있는가? 나치 협력자라는 근본이 변할 수 있는가? 인류 최악의 범죄가 용서받을 수 있는 종류인가? 하지만 한나는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자신이 한 짓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지 못한 채, 그저 시키는 대로 충실하게 시행했을 뿐... 악마인가, 충실한 일꾼인가, 의도된 연출인가, 한나 아렌트가 주창한 '악의 평범성'을 대변하는 인물인가. 답이 아직 나오지 않았다. 


끊임없이 생각해야 한다, '죄'에 대해서


우린 계속 생각해야 한다. '죄'에 대해서 말이다. 영화에서는 나치의 죄다. 힘겹지만 후세가 지니고 가야 할 숙명. ⓒ주)노바미디어



인류 역사상 수많은 전쟁이 있었다. 수많은 인종학살, 즉 인종대청소도 있었다. 우리가 알지 못할 뿐이다. 나치는 전쟁을 일으켜 수많은 이들을 죽음으로 내몰았고, 역사상 가장 잔인한 인종학살을 일으켰다. 독일인이 가장 월등한 민족이고 유대인이야말로 없어져야 할 민족이라는 명목 하에. 


여기서 '많은 인종학살이 있었는데, 왜 나치만 갖고 그래?'라고 생각할 수 있겠다. 나아가 '수많은 악마 같은 이들도 떵떵거리며 살아가는데, 왜 한나만 갖고 그래?'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그건 그들의 죄를 단 1%도 다시 생각하게 하지 않는다. '죄'는 각각의 고유성을 지니고 있어 다른 어떤 '죄'와도 한통속으로 묶을 수 없는 것이다. 각각의 '죄'는 각각 처벌 받아야 한다. 


영화가 던지는 질문이 이것과 일맥상통하진 않는다. 다만, '죄'를 생각할 때, 나치 전범이라는 사상 최악의 죄를 생각할 때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사항이다. 그렇지만 마이클의 동료가 말했듯이, 나치를 모조리 악마로 묘사하며 지상에서 없애버려 독일의 어두웠던 과거를 청산해버리는 것이 옳은 것인지 생각해봐야 한다. '죄'에 대한 심판도 거치지 않고 말이다. 심적으론 100% 동의한다. 모조리 죽여버리고 싶다. 


하지만 전후 세대는 야만과 비이성의 시대를 딛고 이성의 시대를 열어 과거 청산에 기치를 내걸었다. 그 와중에 다시 야만과 비이성이 들고 일어선다면, 그들과 우리를 구분짓는 결과를 초래할 수밖에 없게 된다. 역사상 그런 경우가 많았다. 하나 같이 안타까운 일만 초래했을 뿐이다. 제대로 된 심판이 필요한 바, 하지만 한나 같은 경우는 심히 어렵고 괴로울 수 있겠다. 끊임없이 생각해봐야 한다. 그것이 후세가 지니고 가야 할 필연적 숙제이자 사명이다. 


'사랑'과 '죄'의 메시지를 기가 막히게 조화시키다


영화는 '죄'에 대한 무거운 통찰과 함께 '사랑'을 얘기한다. '사랑은 모든 걸 초월한다'는 명제가 이를 관통한다. 과연 어떨까? ⓒ주)노바미디어


영화는 파릇파릇 즐거운 짧은 사랑이 지나고, 형용할 수 없는 아이러니와 무너짐의 시련을 지나, 기다림과 참회와 진정한 사랑의 깨달음으로 이어진다. 지극한 사랑이야기, 그것이 이 영화의 실체라면 실체다. 그 이면에 도사리고 있는 '나치'라는 존재가 워낙 강하기에 그곳으로 시선이 쏠릴 수밖에 없다. 그리고 영화를 관통하는 한나의 속사정, 그건 '책 읽기'와 관련이 있다. 


사랑이 받아들일 수 있는 건 어디까지인가. 인류 최악의 범죄보다 더 숨기고 싶은 사실은 무엇인가. 나치 협력이라는 근본은 절대불변의 악마적 소행인가. 내가 마이클이라면, 내가 한나라면? 내가 전쟁 세대라면, 내가 전후 세대라면? 심판하고 심판받고, 용서하고 용서받고, 책임을 나누고 책임을 받아들이고. 너무 받아들이기 힘들고 싫은 것들 뿐이지만 그러지 않을 수 없다. 영화는 수많은 질문을 던지고 수많은 생각을 하게끔 한다. 하나 같이 머리 아픈 것들. 그렇지만 반드시 필요한 것들. 


정면으로 받아들이는 게 답이 아닐까. 이실직고 용서를 구하고, 깨끗하게 심판하고 받아들이고, '나'의 책임은 아니지만 '우리'의 책임으로 인지하고 책임을 나누고, 후대에게 이 모든 걸 거짓 없이 전달하고. 영화는 사랑이야기라는 실체와 더불어 또 다른 실체인 '역사 의식'을 일깨운다. 그래서 다큐멘터리적으로 각이 지지 않고 유려하고 아름답기 그지 없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란 없다'라는 말과 '사랑은 모든 걸 초월한다'라는 말을, 둘이 맞붙을 때 상충되지 않을 수 없는 메시지들을, 그야말로 기가 막히게 조화시켜 놓는다. 한나가 자신의 치욕적 비밀과 최악의 범죄 사이에서 고민하고, 마이클이 법과 사랑 사이에서 고민한 결과였다. 마이클은 진정 한나를 사랑했고, 한나는 치욕적 비밀을 지킨 끝에 죗값을 받았다. 지극한 사랑, 비밀의 사랑적 승화, 합당한듯 합당하지 않은듯한 죗값. '죄'에 대해선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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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genv

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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