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리뷰] <번지점프를 하다>


영화 <번지점프를 하다> 포스터. ⓒ눈엔터테인먼트



1983년 여름의 비가 쏟아지던 어느 날, 버스를 기다리고 있던 서인우(이병헌 분)의 우산 속으로 젊은 여인이 달려 들어온다. 첫눈에 반한 게 분명한 인우는 왼쪽 어깨가 젖어가는 줄도 모른 채 멍한 표정이다. 그렇게 헤어지고는 매일 같이 그 자리에서 우산을 들고 기다리는 인우다. 


다시 한 번 어느 날, 학교 교정에서 그녀를 발견한다. 국문학과 서인우와 조소과 안태희(이은주 분)의 만남이 시작된다. 급속도로 친해져 사귀게 된 그들, 여타 커플과 다를 게 없어 보인다. 하지만, 인우가 군대를 가게 되었을 때 태희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들의 관계는 그렇게 끝이 났다. 


17년이 지나 인우는 고등학교 국어 선생님이 되었다. 가정을 꾸리고 딸까지 있는 그인데, 태희를 아직 잊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그가 담임으로 있는 반의 임현빈(여현수 분)이라는 학생이 자꾸 태희를 연상시키는 것이다. 처음에는 그럴 수 있다는 정도로 넘어 갔지만, 너무나도 디테일한 부분까지 계속 보임에 인우는 현빈이 태희임을 알아보는데... 17년 전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 현빈이 태희일까? 


판타지적 장르가 섞인 멜로/로맨스 영화


영화 <번지점프를 하다>의 한 장면. ⓒ눈엔터테인먼트



2000년대가 시작되기 바로 직전까지 <접속> <약속> <8월의 크리스마스> <미술관 옆 동물원> <연풍연가> <내 마음의 풍금> 등의 주옥같은 멜로/로맨스 영화가 쏟아져 나왔다. 그 기세는 2000년대 초반까지 계속되는데, 와중에 정통이 아닌 판타지 장르가 조금 섞인 멜로/로맨스 영화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동감> <시월애> <번지점프를 하다> <클래식> <내 여자친구를 사랑합니다> <인어 공주> 등이 기억에 남는다. 영화 <번지점프를 하다>는 2000년대 초반의 판타지적 장르가 섞인 멜로/로맨스 영화 판도에서 꽤 큰 비중을 차지한다. 이 영화에서 판타지적 장르는 지극히 수단일 뿐이다. 


영화는 1/3을 정말 소소하고 평범한 사랑의 시작을 보여준다. 분명 거기에는 일부러 보여주지 않고 감춘 절절함이 있을 텐데, 아니나 다를까 17년 후를 다룬 후반부에서 하나하나 회상하며 강도를 높여가는 특별하고 본질적인 사랑의 행태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다. <번지점프를 하다>는 '본질'에 관한 영화이다. 거기에 '사랑' 정도를 덧붙일 수 있겠다. 사랑의 모습은 '남자와 여자' '남자와 남자' '인간 대 인간'까지 나아간다.


사랑의 외연 그리고 본질


영화 <번지점프를 하다>의 한 장면. ⓒ눈엔터테인먼트



영화를 처음 보면 특별할 것 없는 초반 1/3 보다 후반 2/3을 눈여겨볼 수밖에 없다. 판타지적 장르를 수단으로 썼듯이, 동성애적 코드도 수단으로 써버리면서까지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있을 것이다. 그 메시지가 2001년 당시에는 꽤 파격적이었고 지금에 와서는 여러 사랑의 정의 중 한 방면의 정석이라 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외연 상 인우가 남학생 현빈에게 마음이 가는 건 당연히 동성애적 끌림이라 볼 수 있다. 그가 태희를 연상시키는 것도 모자라 태희 그 자체라는 확신이 선다 해도 말이다. 다분히 판타지적 설정임에 분명하기 때문인데, 이 부분에서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사랑의 정의가 드러난다. 사랑은 외연이 아닌 본질이라는 것 말이다. 


인우에게 현빈은 현빈이 아닌 태희다. 평생 단 한 사람만을 사랑한다는 그의 마음 속에 영원히 남아 있는 그녀 태희 말이다. '남학생' 현빈은 껍데기일 뿐이라는 등식이 성립됨과 동시에, 그들의 사랑이 아주아주 오래 전부터 이어졌을 거라는 등식도 성립된다. 아주아주 오랜 후에도 계속될 거라는 등식도 역시. 


절벽에서 바다에 떨어지면 기적이 벌어지지 않는 이상 죽고 말지만, 같은 절벽에서 번지점프를 하면 기적이 벌어지지 않는 이상 살아 돌아와 다시 만난다. '본질'이라는 사랑의 정의에 만나는 사람은 반드시 헤어지게 되어 있고 떠난 자는 반드시 돌아오게 되어 있다는 '회자정리 거자필반'의 불교 색체가 덧붙여졌다고 할 수 있겠다. 


인간 대 인간의 사랑


영화 <번지점프를 하다>의 한 장면. ⓒ눈엔터테인먼트



영화가 말하는 '본질'의 사랑의 정의는 태희의 현빈화가 전부는 아니다. 또 다른 차원까지 나아갈 수 있는데, 남자를 사랑한다는 외연과 여자를 사랑한다는 본질적 외연을 넘어서 인간을 사랑하는 본질까지 내다본 것이리라. 인우가 남학생의 모습을 한 태희를 사랑한다는 건, 여자 태희가 아닌 인간 태희 그 자체를 사랑한다는 반증이다.


굳이 등식화 하자면 남자 현빈->여자 태희->인간 태희인데, 그 스스로도 남자 인우, 가장 인우, 동성애자 인우 등의 정체성을 넘어선 인간 인우가 되는 순간이다. 이 영화는 사랑의 정의를 이 정도까지 진척시켰고 이 정도에서 멈췄다. 현빈이 그저 남학생 정도로 나왔으니 망정이지, 동물이나 벌레로 나왔으면 어쨌겠는가. 


결혼하기도 한참 전 지금의 아내랑 막 사귀기 시작했을 때 그녀가 자주 물어봤었다. "나 사실 남자야. 나이도 엄청 많아. 그런데도 나랑 사귈 거야?" 나는 그때마다 "그래. 당연하지."라고 답했다. 그땐 반은 장난이고 반은 진짜일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시간이 흘러 결혼하고 나서 그때를 돌이켜 보면서, 아내가 '나라는 인간을 사랑하는 건지' 시험해본 거라고 말했다. 


흔히 "다음 생애에도 지금의 남편 혹은 배우자와 다시 만날 거나?"라고 묻곤 한다. 그때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반 장난 반 진담으로 "훨씬 예쁘거나 멋있고 훨씬 돈 많은 사람과 만날 거다."라고 말하곤 한다. 그러며 '운명의 상대'를 찾는 것이다. 이 영화는 바로 그 운명의 상대가 다름 아닌 아주 오래 전부터 만나왔던 단 한 사람이고, 그 어떤 모습을 하고 나타나도 그 역시 그 한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다. 


지금 사랑하는 사람과 살고 있는지? 사랑할 수밖에 없는 사람과 살고 있는지? 그 인연의 끈, 그 형용할 수 없이 길고 끝과 끝이 만날 수 있는 비현실적인 확률을 되새기며, 극 중 서인우의 대사를 읊어본다. "이 줄은 세상인데 이 세상 아무 곳에다 작은 바늘 하나를 세우고 하늘에서 아주 작은 밀씨 하나를 뿌렸을 때 그게 그 바늘에 꽃일 확률... 그 계산도 안 되는 확률로 만나는 게 인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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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랩 걸>

 

 

<랩 걸> 표지 ⓒ알마


 

'과학책'의 진화가 계속되고 있다. 본래 과학책은 잘 읽히지 않았다. 인류 발전에 없어서는 안 됨에도 불구하고 어렵고 재미없는 과학을 다룬 책이라면 역시 어렵고 재미없다고 생각하는 게 당연한 거 아닌가. 그래서 누군가가 대중화에 앞장섰다. 칼 세이건, 스티븐 제이 굴드 등이 과학의 대중화에 앞장섰다면, 올리버 색스 등은 의학의 대중화에 앞장섰다고 할 수 있겠다.

 

앞서 언급한 세 명이 모두 세상을 떠난 지금에 와서는, 알파고의 출현이나 4차 산업 혁명의 도래 등의 트렌드에 맞춰 과학의 대중화가 상당히 진척된 느낌이다. 그 총체적 접근법은 역시 책이다. '과학책' 말이다. 과학 자체를 대중의 입맛에 맞게 소개하기도 하고, 과학자를 색다르게 대중에게 소개하기도 하며, 때론 그저 과학자가 썼을 뿐 과학과 연결된 게 없는 것 같은 이야기를 건네기도 한다.

 

미국의 저명한 여성 식물학자이자 교수 호프 자런의 <랩 걸>(알마)은 과학자가 썼을 뿐 얼핏 과학과 연결된 게 없는 것 같은 이야기를 중구난방 건네는 책이다. 식물에 대한 다층적이고 다방면인 단편, 종종 드러내는 내외면의 깊숙한 이야기, 그리고 과학자로서 치열하게 사투하는 자전적 에세이까지. 저자는 치밀하게 구성한듯, 마음대로 느슨하게 구성한듯, 크게 세 이야기들을 오가며 식물, 과학, 사랑, 인간을 말한다.

 

식물에서 과학으로

 

저자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나무는 은청가문비라고 한다. 그 나무는 모질고 긴 겨울 내내 초록색을 자랑하며 우뚝 서서 푸른 빛을 발한다. 팔십 년을 넘게 살고는 어느 해 치명적인 실수를 범해 죽고 만다. 때아닌 5월의 폭설 때문이었다. 저자는 그때 비로소 나무가 살아 있는 생명이라는 것을 완전히 이해하게 되었다고 한다. 나무는 삶을 살고 있었다. 사람의 삶과 비슷하면서도 다르게. 고비를 넘겨 최고의 시간을 누리고 시간에 따라 변화했다. 


나무에게서 과학의 정수를 발견했다. 과학은 가르쳐주었다. 모든 것이 처음 추측하는 것보다 복잡하다는 것, 무엇을 발견하는 데서 행복을 느끼는 것이야말로 아름다운 인생을 위한 레시피라는 것, 한때 벌어졌거나 존재했지만 이제 존재하지 않는 모든 중요한 것을 주의 깊게 적어두는 것이야말로 망각에 대한 유일한 방어라는 것을.


사람은 식물과 같다. 빛을 향해 자라난다는 의미에서 말이다. 저자가 과학을 선택한 것은 과학이 저자가 필요로 하는 것을 줄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가장 기본적인 의미의 집, 다시 말해 안전함을 느끼는 장소를 저자에게 제공해준 것이 다름 아닌 과학이었다. 저자의 식물을 향한 관심이 곧 저자의 과학에 대한 깨달음과 이해로 나아간 것이다. 그녀는 식물학자가 될 운명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남자 아닌 여자였다. 그녀는 아빠와 같아지기를 절실히 원하기는 했지만 동시에 극복할 수 없는 큰 산과 같은 엄마의 연장이어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대학 생활은 문학 전공으로 시작했지만 얼마 가지 않아 과학이야말로 진정 속한 분야라는 것을 깨달았다. 머지 않아 과학계에 만연한 성차별을 받게 될 운명. 


과학계 내 성차별은 복잡하고 다양한 요소로 이루어져 있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고 한다. 하지만 저자가 경험한 바에 따르면 성차별은 굉장히 단순하다. 그건 "저 여자가? 그럴 리가."와 같이 지금의 네가 절대 진짜 너일 리 없다는 말을 끊임없이 듣고, 그 경험이 축적되어 짓누르는 무거운 짐이 되는 것이다. 


인간에서 사랑으로


책은, 인간과 사랑에 대한 심오하지 않은 에세이적 고찰, 그래서 훨씬 마음에 와 닿는 고찰로 나아간다. 거의 1년 365일 실험실에 틀어박혀 생활하는 그녀에게도 평생 친구가 생기고, 또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갖는다. 평생 친구는 다름 아닌 빌, 함께 실험실을 꾸려가는 동료이기도 하다. 


빌은 오른손 일부가 없는 장애를 가지고 있기도 하다. 졸업무도회도 가본 적 없다는 그, 저자와 함께 액슬하이버그 섬에 도착해 연구를 할 때 아무도 없는 그곳에서 춤을 추다. 저자는 빌의 바로 앞에 앉아 고개를 쳐들고 그를 바라본다. 빌이 지금 하고 있는 일, 빌이라는 인간, 그 순간의 모든 것을 똑바로 목격하는 증인으로서. 


저자는 야외에서 간단하게 피크닉하는 자리에서 클린트를 만난다. 그들은 사랑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사랑하게 되었고, 서로 사랑하기 위해 노력하지도 희생하지도 않았다. 사랑은 너무 쉬웠고 달콤했다. 인간으로서 가장 행복한 때가 아닐까. 머지 않아 저자는 사랑의 결정체, 임신을 한다. 하지만 임신은 그녀의 일생에서 가장 힘든 일이었다. 그녀는 조울증을 앓았는데 당연히 약을 먹을 수 없었다. 의사와 간호사들은 그녀의 조울증을 설명할 수도 해결할 수도 없었고, 그저 함께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임신 기간 동안 여러 어려움을 겪었음에도 정상적이고 건강한 분만을 했다. 그녀는 아이의 어머니가 아닌 아버지가 될 것을 결심한다. 그게 얼마나 이상한 생각이라는 걸 생각하지 않은 채 그를 사랑할 것이고, 그도 그녀를 사랑할 것이고, 모든 게 괜찮을 거라 생각한다. 훗날 그녀는 아이의 엄마라고 말할 수 있는 날이 온다. 


그녀는 아들이 태어나기 전에는 아이를 사랑할 수 있을까 걱정했고, 태어난 후에는 그녀의 사랑이 아이가 이해하기에 너무 큰 게 아닐까 걱정한다고 한다. 그리고 비로소 깨닫는다. 아들이야말로 그녀가 기다리는 줄도 모르고 기다렸던 기다림의 끝이라는 것, 그 아이는 불가능한 동시에 불가피했다는 것, 누군가의 엄마가 될 단 한 번의 기회가 한 번 그녀에게 주어졌다는 것을 말이다. 


모든 게 과학이고 과학의 눈으로 보면서도 과학은 일이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인간은 빛을 향해 자라난다는 점에서 식물과 같지만, 식물은 중대하고도 기초적인 면에서 인간과 같지 않다. 사랑은, "널 사랑해"라는 말을 어떻게 할지는 모르지만 행동으로 어떻게 보여줄지는 아는 것과 같다. 형체가 없어 만질 수는 없지만 항상 함께 있다는 걸 믿고 느낄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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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


영화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 포스터 ⓒ이십세기폭스코리아



기예르모 델 토로는 알폰소 쿠아론,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와 더불어 멕시코를 대표하는 감독 중 하나이다. 그는 명성에 비해 많은 영화를 연출하진 않았는데, 대표작 <헬보이> <판의 미로> <퍼시픽 림> 등으로 그만의 공고한 판타지적 세계를 구축하였다. 그러면서도 현실과 밀접하게 또는 현실의 이면을 그려내어 비평적으로 많은 찬사와 함께 대중적으로는 마니아층을 공고히 했다. 


그는 2008년 <헬보이 2> 이후 5년 여 동안 연출이 아닌 주로 제작에 전념했는데, 이후 <호빗> 시리즈의 각본을 책임지고는 다시 연출에 살짝 발을 담군 모양새다. 굳이 언급하지 않고 필모만 훑어도 드러나는 그의 천재성은, 이번에 작심하고 제작 원안, 각본 연출을 모두 섭렵한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으로 다시 한 번 만개했다. 


<셰이프 오브 워터>는 제74회 베니스 국제 영화제에서 영예의 황금사자상, 제75회 글든글러브 2관왕을 위시한 수많은 국제 영화제를 휩쓸었다. 그리고 제90회 아카데미 13개 부문에 노미네이트되어 다관왕을 노리고 있다. 최소 작품상과 여우주연상 이상의 수상이 점쳐진다. 평단의 극찬을 받으며 많은 상을 수상했다고 해서 모두 볼 만한 영화 내지 훌륭한 영화라고 할 순 없지만 차고 넘칠 여건은 마련한 셈. 


수많은 것들을 완벽히 다루는 솜씨


수많은 것들을 완벽히 다루는 솜씨. 영화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의 한 장면. ⓒ이십세기폭스코리아



1960년대 중반, 세계를 반으로 가르는 냉전 시대 한복판 미국의 항공우주센터 비밀실험실에서 일하는 청소부 엘라이자(샐리 호킨스 분), 그녀는 언어장애를 지녀 말을 하지 못한다. 그런 그녀를 집에서는 이웃집의 가난한 화가 자일스(리차드 젠킨스 분)가, 일터에서는 젤다(옥타비아 스펜서 분)가 함께 한다. 


어느 날, 비밀실험실로 물고기 형상의 괴생명체가 보안책임자 스트릭랜드(마이클 섀넌 분)와 함께 온다. '그것'은 아마존에서 잡아왔는데 원주민들이 신처럼 떠받든다고 한다. 엘라이자는 누구도, 심지어 보안책임자도 함부로 가까이 하지 못하는 그것과 교감하고 소통하며 점차 사랑을 키워간다. 


그 모습을 보게된 호프스테들러 박사(마이클 스털버그 분)는 그것에게 지능뿐만 아니라 교감과 소통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한편, 스트릭랜드는 그 능력들을 높이사 해부하여 러시아와의 우주 전쟁에 이용하려고 한다. 당시 미국은 우주선에 개를 실어 날려서 조롱을 받고 있었다. 이에 엘라이자는 그것을 항공우주센터 비밀실험실에서 탈출시키려 하는데... 과연 성공할까? 성공한 다음에는 어떻게 할 것인가?


영화는 냉전시대라는 불통·부교감의 상징, 1960년대 절정의 미국적 낭만, 냉전을 승리로 이끌어야 하는 막중한 임무를 맡은 미국 항공우주센터의 백인 엘리트와 청소부(언어장애인과 흑인)의 대립, 언어장애인과 괴생명체 간의 사랑, 소외·차별당하는 이들 간의 연대를 복합적으로 다루면서 로맨스, 스릴러, 판타지, 드라마는 물론 시대극과 정치극까지 아우르는 광폭 행보를 완벽히 소화해냈다. 


혐오의 시대, 사랑의 모양


혐오의 시대, 사랑의 모양. 영화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의 한 장면. ⓒ이십세기폭스코리아



단연 중심은 '사랑'이다. 제목과 부제에서 엿볼 수 있는, '사랑의 모양'. 사랑은 물과 같다. 그 어떤 모양으로도 변할 수 있고 그 어떤 것도 받아들일 수 있지만, 어떤 것을 받아들이냐에 따라 변하는 모양은 천차만별이다. 언어장애를 가진 엘라이자와 괴생명체 그것의 사랑은 일면 판타지적이고 정상처럼 보이지 않지만, 물의 성질을 가진 '사랑' 하에서는 당연하고 일반적인 모양이다. 


영화의 전반부를 장식하는 낭만어린 재즈풍의 선율, 흑백 TV에서 보이는 1960년대 미국의 대표적 콘텐츠, 뮤지컬스러운 엘라이자와 자일스의 동작, 시각을 지배하는 진한 원색의 집 안팎의 모습들은 엘라이자의 사랑을 암시한다. 그녀의 사랑이 어떤 모양이든 사랑 그 자체를 응원하는 것 같다. 50년 전 낭만의 한 부분이다.


가난한 화가 자일스의 당시로서는 특별한 사랑의 모양도 한 부분이다. 그는 파이집 주인 남자에게 호감을 갖는다. 그 파이는 정말 맛이 없지만 엘라이자를 데리고 그곳을 찾는 이유다. 그리고 스트릭랜드가 있다. 그는 두 아들과 예쁜 아내를 둔 엘리트다. 남부러울 것 없는 가족, 하지만 그는 집에서 무표정한 로봇 같다. 아내와 성관계를 가질 때에는 아내 입을 막아버리고 소리조차 내지 않게 한다. 


다양한 사람의 다양한 사랑의 모양새가 당대 낭만의 표면과 이면에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기예르모 델 토로는 그런 예전 낭만을 상당히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그려내었다. 사랑은커녕 혐오로 물들고 있는 지금 이때에 꼭 필요한 영화가 아닌가 싶다. 우리 다시 사랑할 수 있을까? 


차별과 소외의 시대, 연대의 모양


차별과 소외의 시대, 연대의 모양. 영화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의 한 장면. ⓒ이십세기폭스코리아



영화는 소외의 '연대'를 말한다. 여기엔 수많은 소외된 사람들이 등장한다. 언어장애를 지닌 엘라이자, 동성애 성향의 자일스, 흑인 젤다, 러시아 스파이 호프스테들러 박사, 그리고 비인간 괴생명체 그것. 소외된 이들끼리 뭉치는 건 얼핏 당연하고 또 쉬워보이지만 절대 불가능에 가깝다. 소외된 이들끼리 뭉쳐보았자 할 수 있는 건 없다시피 하고, 많은 소외된 이들이 다른 길을 통해 비소외에의 길을 가고자 한다. 


그래서 <셰이프 오브 워터>에서의 소외의 연대는 이 영화의 판타지적인 요소에서 가장 큰 지분을 차지하는 것이다. 단순히 괴생명체와의 사랑이 판타지적 요소의 전부가 아니다. 그럼에도 영화에서 사랑과 더불어 연대가 가장 중요하게 다뤄지는 건 스트릭랜드라는 백인남성우월주의자, 엘리트주의자의 상징, 공공의적이라는 존재 덕분이다. 그는 냉전이 낳은 정석적 괴물, 오직 연대만이 괴물의 마수를 피할 수 있다. 


여전히 차별이 만연한 차별과 소외의 시대에 이 영화가 던지는 메시지는 출중하다. 사랑이 감성이 낳은 것이라면, 연대는 이성이 낳았다. 감성만으로는 물질적 나아감에 한계가 있고, 이성만으로는 진정한 공감과 협력에 한계가 있다. 사랑과 연대, 감성과 이성의 합이야말로 함께 나아감에 있어 최적의 조건인 것이다. 


위대한 게 사실 별 게 아니다. 무시하고 지나쳐도 될 것의 성질이라는 얘기가 아니고, 우리 주위에서도 찾아볼 수 있고 누구나 행할 수 있다는 얘기다. 위대한 것이라는 게. 사랑도 연대도 위대하다고 하는 것들 중 하나인 건 분명하다. 우리 모두 어떤 식으로든 행하고 있거니와 행하고 있는 걸 흔히 볼 수 있다. 이제 그 둘을 함께 할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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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간 책 다시읽기] 가즈오 이시구로의 <남아 있는 나날>


소설 <남아 있는 나날> 표지 ⓒ민음사



이야기가 옆길로 새는 건, 옆길로 새는 것처럼 느껴지는 데엔 몇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야기의 원류를 제대로 이어나갈 능력이 없거나, 하고 싶은 이야기가 너무나도 많거나, 옆길로 새는 것도 전부 이야기 원류의 거대한 판 안에 있다거나. 대개 하고 싶은 이야기가 너무나도 많으면 차라리 거대한 판을 만들어 버리곤 한다. 


그런데, 여기 오로지 거대한 판을 만든 것도 아니면서 옆길로 새는 것처럼 느끼게끔 하거니와 그것들이 전부 이야기 원류에 포함되어 있게 하는 작가가 있다. 가즈오 이시구로가 그인데, 그가 전하는 이야기는 그 자체보다 샛길의 이야기가 훨씬 재밌거니와 그 샛길이 원류로 이어지기에 결국 이야기 전체의 완성도가 터무니 없이 올라간다. 


아직 그의 소설을 <나를 보내지 마>와 <남아 있는 나날> 두 권밖에 읽지 않았지만 비슷한 느낌을 받았고, 거대한 이야기와 더불어 자잘한 이야기들이 가지는 재미와 인간 본령의 존재를 뒤흔들어 놓는 메시지가 엄청나다는 것도 똑같았다. 한 편으로 팬이 되어버렸고 두 편째를 보지 않을 수 없었으며 세 편째부터는 주기적으로 볼 생각이다. 


그가 궁극적으로 할 말은 정해져 있고, 그걸 제대로 보여주기 위해 무수히 많은 이야기들을 흥미롭게 전해주며, 우린 그저 순간순간을 즐기면 되는 것이다. 어느 순간 빠져 들며 자연스레 목적지에 도달해 생각하고 있었지만 한편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거대한 무엇에 맞닥뜨리고 만다. <남아 있는 나날>이야말로 정확히 그것이다. 


삶과 진실


1956년 영국의 저명한 저택인 달링턴 홀의 집사 스티븐스, 주인의 배려로 생애 첫 여행을 떠난다. 잉글랜드 서부로의 여행, 그 결정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건 주인이 아니라 오래전에 달링턴 홀을 떠난 켄턴 양의 7년 만의 편지였다. 그는 그녀가 돌아오고 싶다고 지레짐작하고는 그녀를 만나러 6일간의 여행길에 오른다. 와중에 자신의 인생을 회상하는 스티븐스이다. 소설은 여행과 회상의 투 트랙으로 진행된다. 


스티븐스는 1920~30년대 달링턴 홀의 주인 달링턴 경을 맹목적으로 모셨다. 그는 진정 '위대한 집사'로, 그것을 위해 아버지의 임종을 지키는 걸 포기했고 켄턴 양에 대한 감정을 억눌렀다. 그의 말마따라 사적인 실존을 포기하고 전문가적인 실존을 택한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위대한 집사의 필수조건. 


하지만 스티븐스의 회상이 거듭됨에 따라 하나둘씩 드러나는 진실은 그로 하여금 정체성의 혼란을 일으키게 한다. 그의 인생과 사랑에 앞서 그를 규정하는 '위대한 집사'라는 정체성 말이다. 그리고 그걸 회상하는 지금은 인생의 황혼기, 회상은 곧 후회와 다름 아니다. 앞으로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의미부여가 쉽지 않다. 


소설은 '남아 있는 나날' 즉 미래에 방점을 둔 제목과는 다르게, 회상과 여행 즉 과거와 현재에 방점을 둔 내용을 전한다. 곧 소설의 지향점은 미래에 있고, 주인공이 가야 할 곳도 결국 미래라는 얘기일 것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건 스티븐스의 정체성 혼란을 일으키는 '진실'일 텐데, 그건 무엇일까. 


인생과 사랑


진실은, 스티븐스가 충분히 알 수도 있었을 것이고 반드시 알아야 하는 것들이다. 그가 위대한 집사의 옷을 입고 맹목적으로 모신 달링턴 경이 나치 지지자였다는 사실과, 그가 위대한 집사의 옷을 입어 자신의 진정한 실존을 가린 결과 떠나보낸 켄턴 양을 사랑했었고 지금도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 개념과 '아이히만'이 생각나지 않을 수 없다. 그저 자신의 일만 성실하게 했을 뿐인 아이히만, 그는 지극히 평범한 인간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가 한 짓은 역사상 최악의 '악'으로 귀결된다. 그 너머의, 그 이면의 진실은 알고자 하지 않았고 알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스티븐스와 겹치는 부분이다.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사랑이라는 개념을 녹여내게 한 켄턴 양의 존재가 가즈오 이시구로표 문학의 진정한 발화점이다. 그녀야말로 스티븐스로 하여금 계속 나아가게 하는 힘의 원천이었거니와, 한편으로 그가 과거를 회상함으로써 정체성의 혼란이라는 필수적인 아픔을 겪게 한 장본인인 것이다. 켄턴 양 덕분에 스티븐스라는 캐릭터는 극히 평면적인 인물에서 입체적인 인물로 변모했다. 


스티븐스는 어떻게 해야 할까. 지나간 시간을 후회하며 살아가야 할까, 어떻게든 앞으로 나아가야 할까. 저자는, 소설은 말한다. 나아가야 한다고. 그의 과오 아닌 과오 또는 명백한 과오를 뒤로 하는 게 아니라 함께 가야 한다고 말이다. 남아 있는 나날은 많지 않을지 모르지만 인생과 사랑을 깨달을 시간과 양식은 충분하다. 


남아 있는 나날 - 10점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송은경 옮김/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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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코코>


<코코> 포스터.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픽사, 디즈니, 혹은 픽사&디즈니는 거의 매해 우리를 찾아와 거의 실망을 안기지 않았다. 세상이 점점 디지털화 되어가는 만큼 최첨단 디지털 기술로 나날이 완벽해가는 애니메이션을 선보이는 동시에, 살아가는 데 기본 중에 기본이 되는 지극한 아날로그적 가치를 선보인다. 그 조화는 가히 환상적이다. 


픽사&디즈니의 애니메이션이 아이들보다 어른들에게 더 와닿는 연유가 역설적으로 거기에 있다 하겠다. 조금이라도 더 어른일수록 조금이라도 더 아날로그적인 습성이 남아 있지 않겠는가. 그걸 접해본 사람이라면 그리워하지 않을 수 없고 말이다. 영화 <코코>의 기본은 '가족' '사랑' '우정' '화해' '기억' 등의 가치이다. 


<코코>는 멕시코라는 이질적이라면 이질적이고 친숙하다면 친숙한 곳의 '죽은 자의 날'이라는 멕시코 전통 명절을 배경으로, 현실과 비현실이 만나고 삶과 죽음이 모이며 흩어진 가족과 멀어진 사랑이 다시 만난다. 그 가장 중요한 키를 '코코'가 지니고 있지만, 그 사이사이를 이어주는 이들은 따로 있다. 


죽은 자의 날, 미구엘의 모험 아닌 모험


죽은 자의 날, 미구엘의 모험 아닌 모험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아빠가 음악가인 한 가족이 있었다. 그들은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즐거운 나날을 보냈다. 하지만 아빠는 꿈을 이루기 위해 가족을 뒤로 하고는 떠나버린다. 홀로 남은 엄마는 살기 위해 신발을 만든다. 그녀는 신발 만드는 법을 온가족에게 퍼뜨리고 집안 자체가 신발 만드는 기업이 된다. 여기 그 아빠와 엄마를 고조할아버지와 고조할머니로 둔 미구엘이 있다. 하지만 그는 음악을 좋아라 한다...


미구엘의 고조할아버지 때문에 멕시코에서 유일하다시피 음악을 멀리하게 된 미구엘의 집안, 그럼에도 그는 멕시코 최고의 음악가 에르네스토 델라 크루즈의 '기회를 잡아라'라는 말을 듣고는 꼭 음악가 광장에서 연주를 하려고 한다. 할머니가 부셔버린 기타 대신 그가 택한 기타는 델라 크루즈 납골당에 전시해놓은 기타. 


하필 그 날은 '죽은 자의 날', 미구엘은 그 기타를 훔쳐 한번 튕기는 순간, 죽은 자의 세계로 가버리고 만다. 미구엘은 다시 산 사람의 세계로 돌아가고자 하는데, 이멜다 고조할머니는 음악을 절대 하지 않는다는 조건 하에 그의 저주를 풀어주고자 한다. 하지만 미구엘은 그런 조건이라면 사절! 우연한 기회에 자신의 고조할아버지라고 믿게된 델라 크루즈에게 축복을 받고자 길을 떠난다. 


기억, 사랑, 통섭...


기억, 사랑, 통섭...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죽은 자의 날'은 스페인의 침략 이전부터 이어져 내려온 멕시코의 전통 명절이다. 해골과 뼈 모양의 조형물이나 사탕을 만들고, 죽은 사람의 사진과 이름을 제단에 올리고는, 여러 종류의 축제를 연다. 이승과 저승이 이때만큼은 한 곳에 모여 어울리는 것이다. 영화에서도 굉장히 중요하게 비치는 바, 제단에 사진과 이름이 올라가 있지 않으면 저승에 있는 이가 이승으로 갈 수 없다. '기억'의 소중함...


멕시코에서 음악은 곧 삶이다. 멕시코인들은 비록 고단한 삶이지만 와중에 '사랑'을 최고의 가치로 치며 스페인 등의 풍습과 문화가 혼합된 특유의 낭만과 열정이 이를 뒷받침한다. 음악은 사랑을 표현하기 위한 최고의 수단인 것이다. 한편 잘 드러내려고 하진 않지만 이면에 항상 있는 슬픔 또한 음악만큼 잘 표현해낼 수 있는 수단이 없다. 미구엘의 가족이 음악으로 흩어졌다지만 반드시 음악으로 다시 뭉칠 수밖에 없을 거다. 


<코코>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가치는 픽사&디즈니가 추구하는 가치와 일맥상통하는 '통섭'이 아닐까 한다. 서로 소통하고, 전체 또는 부분들을 하나로 잇는 것 말이다. 미구엘과 그의 강아지 친구 단테는 참으로 꼬이고 꼬여 대대로 끊어져버린 태초의 끈을, 음악이라는 그 끈을 다름 아닌 음악으로 잇고자 한다. 그 와중에 가족이 있고 사랑이 있고 화해가 있고 기억이 있다. 그 작업은 쉽지 않지만 반드시 해내고 말 것이다. 


삶과 죽음이 하나되는 시간


삶과 죽음이 하나되는 시간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아쉬운 부분도 없지 않아 있다. 가족이라는 명제를 다시 생각해야 하는 시대에 전통적이기 짝이 없는 케케묵은 가족 개념을 선보이고 있다는 점, 살아생전 얼마나 잘 살았냐에 따라 죽어서도 계급이 나뉘어 지는 듯한 모습 등 말이다. 보편적이고 아날로그적인 가치를 전하기 위해 희생할 수밖에 없었다고 하지만, 조금 더 신경 써 주었으면 하는 부분들이다. 


그럼에도 영화는 급기야 20년이 넘은 기억부터 5년 전 기억까지 불러낸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증조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외삼촌이 돌아가셨을 때... 어떤 건 희미해져 한 장면 정도밖에 기억나지 않고, 어떤 건 여전히 생생하기 그지 없어 가슴이 아리고 쓰린 그 기억들이 차례로 떠오른다. 그들이 기억하는 게 그들로 하여금 저승에서조차 사라지지 않게 한다는 영화 속 깨달음. 


한편, 충격이라면 충격일 수 있지만 따뜻하기 그지 없게 다가온 부분도 거기에 있다. 삶과 죽음이 하나되는 장면,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이 한 곳에 모여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며 삶과 죽음 모든 것들을 축복한다. 우리에게 죽음은 너무나도 먼, 무섭고 두려운 무엇이 아닌가. 우리도 제사를 지내며 조상님을 모시지만 그건 굉장히 엄숙한 자리가 아닌가. 멕시코가 부러워지는 것이다, 이 영화 한 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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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웜 바디스>


2010년을 전후해 전성 시대를 열었던 패러노멀 로맨스의 마지막 흥행작이라 할 수 있는 <웜 바디스>. ⓒCJ엔터테인먼트




트와일라잇 시리즈가 시작이었던 것 같다. 판타지적인 캐릭터가 인간과 사랑에 빠지는 '패러노멀 로맨스'의 현대 시작점이 말이다. 이후 <렛 미 인> <늑대소년> <웜 바디스> 등이 잇달아 우리를 찾아왔다. 내년 초에는 길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최고 기대작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도 찾아올 예정이다. 거의 30여 년 전에 전 세계를 강타한 팀 버튼의 <가위손>도 생각난다. 


'결국 사랑이다'라고 말하는 이 영화들, 각종 장르의 탈을 쓴 로맨스 영화들이라고 할 수 있다. 더불어 그 대상이 어른도 아닌 어린이도 아닌 청소년들이다. 영화 산업의 변화와 함께 시대의 흐름까지 엿볼 수 있다. 적어도 이 영화들이 한창 나왔던 2010년 전후는 10대들의 시대였다는 것. 


<웜 바디스>는 패러노멀 로맨스 전성 시대의 사실상 마지막 흥행작이다. 흥행작이면서 괜찮은 평을 얻었던 작품이기도 하고 말이다. 현대적 공포물의 대명사격인 좀비가 인간과 사랑에 빠져 로맨스를 펼친다는 설정에 더 이상 어떤 패러노멀 로맨스가 나설 수 있겠는가. 물론 무수한 영화들이 나 몰래 찾아왔다가 스쳐지나 갔을 것이다. 


좀비 1인칭 시점의 파격


좀비 1인칭 시점이라는 파격을 훌륭히 소화한다. ⓒCJ엔터테인먼트



자기가 누구였는지 알 길이 없는 좀비 R(니콜라스 홀트 분)은 좀비 뿐인 공항에서 생활한다. 그의 집은 멈춰버린 비행기 안, 그래도 전(前) 인간다운 생활을 영위하고 있는 듯하다. 좀비들이 하는 생각은 배고프다는 생각, 하는 일은 인간 사냥이다. 그날도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좀비 사냥을 온 인간들과 대면한다. 


치열한 싸움 끝에 R은 어느 젊은 남자를 죽이고 뇌를 먹는다.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의 뇌를 먹을 때면 그 인간의 기억이 고스란히 전해져와 좀비인 자신도 한때 인간이었다는 걸 잊지 않게 한다. 그러곤 남아 있는 젊은 여자에게로 향하는 R, 하필 그 여자가 방금 먹은 뇌의 주인의 여자친구 줄리(테레사 팔머 분)가 아닌가. 


그 때문인지, 아니면 잠깐 인간의 기억이 들어왔을 때 그녀에게 반한 건지 R은 줄리를 죽이는 대신 보호한다. 피냄새로 인간과 좀비를 판별하는 좀비의 특성을 이용해, 그녀에게 죽은 인간의 피를 묻힌 것이다. R과 줄리는 비행기 안에서 기거하기 시작한다. R은 인간의 감성이 완전히 없어진 것 같진 않고 말도 더듬더듬 할 줄 안다. 무엇보다 줄리를 아끼고 사랑하게 된 것 같다. 그들의 앞날이 예견되기에 과정이 궁금하다. 


영화는 거의 좀비 R의 1인칭 시점으로 진행된다. 기본적으로 죽은 인간이기 때문에 생각 같은 걸 하는 게 말이 안 되지만, 이미 그런 걸 포함한 여러 개연성은 포기한 채 시작한 영화이기에 그런 영화라는 걸 익히 잘 알고 있기에 코믹하고 사랑스럽게 다가올 뿐이다. '이게 말이 돼?'라고 묻는 건 의미없는 일이다. 


좀비의 인간 되기


좀비의 인간 되기 프로젝트라는 파격도 역시 훌륭히 소화한다. ⓒCJ엔터테인먼트



좀비 대 인간의 구도, 좀비 콘텐츠의 시작부터 절대적으로 지켜져야 할 선이다. 좀비한테 물려 좀비가 되거나, 아예 좀비조차 되지 못하고 죽거나. 결국 인간으로서 계속 살아가기 위한 투쟁인 것이다. 좀비는 어떨까. 좀비라고 좀비가 되고 싶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무래도 다시 인간이 되길 바라고 있지 않을까. 


이 영화의 판타지적 로맨스의 이면에는 좀비의 인간 되기 프로젝트가 있다. 역으로 그 프로젝트의 필수적 요소가 다름 아닌 로맨스인 것이다. 그렇게 죽어버린 심장이 다시 뛰고 점점 인간이 되어가는 좀비들이다. 휴머니즘으로 넘어가는 건 자연스러운 수순이리라. 그럴 때면 당연하게도 공공의 적이 있어야 한다. 


<웜 바디스>에도 등장한다, 공공의 적이자 궁극의 적. 그들은 인간의 형체가 아닌 뼈의 형태만을 가진, 인간은 물론 같은 좀비들한테도 무서운 존재인 '보니'들이다. 그들이야말로 인간의 적인 건 물론, 인간이 되고자 하는 좀비들의 적이다. 휴머니즘의 가장 큰 걸림돌. 그들이 없으면 휴머니즘의 의미와 목적과 연대가 옅어지지만, 그들이 없어야만 휴머니즘으로의 길을 갈 수 있다. 


인간이 되는 길은 어려운 듯하면서도 쉽고 험난한 듯하면서도 평탄하다. 제목 그대로 몸에 피가 돌고 심장이 뛰어 체온을 유지하게 되면 되는 것이다. 인간으로선 살아가는 데 '당연한' 이치, 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어렵고 신비하기까지 한 일인지는 부연하지 않아도 될 듯하다. 거기엔 육체적인 필요뿐 아니라 정신적 필요도 있어야 한다. 


가장 애틋하고 절실한 로맨스


파격의 결정체, 좀비와 인간이 사랑에 빠진다는 설정마저 '로미오와 줄리엣'이 연상될 정도로 잘 소화해낸다. ⓒCJ엔터테인먼트



영화는 명명백백 '로미오와 줄리엣'을 연상시킨다. 서로 죽고 못사는 앙숙인 몬태규 가문과 캐플릿 가문, 그리고 첫눈에 반해 버린 몬태규의 로미오와 캐플릿의 줄리엣. 당연한 집안의 엄청난 반대에 결국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하는 두 사람. 로미오의 R, 줄리엣의 줄리는 이보다 더 끔찍한 태생적 반대에 부딪힌다. 좀비와 인간. 


이보다 더 애틋하고 절실한 로맨스가 이 세상 어디에 있겠는가. 달달한 틴에이저의 로맨스, 현실에서 절대 일어날 수 없을 것 같은 몇 겹의 판타지적 로맨스 외피 안에는 사랑의 100% 가능성을 향한 강력한 주장이 있는 것이다. '이것도 사랑일까'라고 자문하고 고민하는 것도 사치인 그의 사랑, 좀비의 사랑. 


많고 많은 로맨스 영화들을 우리는 '판타지'라고 부른다. 거기엔 '저런 사랑이 현실에서 가능한가. 절대 말도 안 된다'라는 비꼼의 정서가 담겨 있다. 그때부턴 사랑의 고귀함과 위대함, 사랑의 가능성은 사라지고 오락만 남을 뿐이다. 반면 이 영화는 어떤가. 오히려 오락에서 시작해 사랑의 본질로 나아가는 것 같지 않은가. 


그런 로맨스의 외피를 쓴 판타지 영화보단 차라리 이런 판타지의 외피를 쓴 로맨스가 낫지 않은가,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물론 이 영화로 진정한 사랑을 논하긴 힘들 것이다. 판타지적 외연이 주는 포스가 워낙 강렬하니까 말이다. 그럼에도, 굳이 가져다 붙이는 것이 아닌 그 자체로 이 영화의 로맨스가 사랑의 본질을 조금이나마 보여주고 있다고 본다. 만듦새야 어떻든 우리가 진정 행해야 할 사랑의 모습이 거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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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고스트 스토리>


2017년 최고의 영화 중 하나라고 극찬 받는 <고스트 스토리>. ⓒ리틀빅픽쳐스



한적한 교외의 작은 집에서 단란하게 둘이 살아가는 작곡가 C와 M. 어느 날 집 앞에서 불의의 교통사고로 황망하게 세상을 뜬 C. 그는 영안실에서 유령이 되어 깨어나 돌아다닌다. 그러곤 당연한듯 집으로 향하고 M을 지켜본다. M은 C, 그리고 C와 함께한 시간을 추억하며 견뎌낸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M은 새로운 사랑을 하고 그 사랑 역시 상실한다. 급기야 M은 집을 떠나고 C는 홀로 남는다. 집은 계속해서 새로운 주인들을 맞이한다.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오가도 C는 계속 그 집을 지킨다. 아니, 그 집에서 M을 기다리고 있다. 


그는 모르는 걸까. 한번 떠난 집에 그녀는 결코 오지 않을 거라는 걸. 무수히 많은 시간이 흘렀기에 그녀는 올 수 없다는 걸. 그럼에도 그는 그 집과 함께 끝을 알 수 없는 여정을 계속하고 있다. 그가 지극히 한정된 말과 몸으로만 표현해내는 이야기는 무엇일까. 사랑일까, 시간일까, 공간일까. 


'유령' '이야기'


영화는 '유령'의 '이야기'다. 유령도 중요하고 이야기도 중요하다. ⓒ리틀빅픽쳐스



2018년 해가 뜬 지도 열흘이 되었지만, 2017년에서 완전히 헤어나올 수 없는 건 2017년 말에 나온 좋은 영화들 때문이겠다. <고스트 스토리>도 나의 발목을 잡는 그런 영화들 중 하나다. 별 내용 없이 온전히 '감각'으로만 영화를 채우는 솜씨가 기막히다. 그 감각은 사랑과 시간과 공간이라는 큰 개념들을 아우른다. 


'유령 이야기'라는 상투적이고 예측가능한 제목은 이 영화의 노림수이자 전체적인 주제 및 느낌 등과 부합한다. 화려하고 예측불가능한 건 눈길을 가게 만들지만 몰입하고 집중하게 만드는 데 도움을 주진 못한다. 반면, 전형적인 건 신경이 사방으로 뻗지 않고 한 곳으로 모이는 결과를 도출한다. 이 영화는 그걸 실현시킨다. 


그런 면에서 아이러니하게도 유령 그 자체는 중요하지 않다. 대신 유령의 '이야기'가 중요하다. 그런데 그 이야기가 성립되기 위해서는 그가 '유령'이어야 한다. 일념을 가진 채, 영원불변한 존재여야 이 이야기가 만들어질 수 있고 우리가 그 이야기를 통해 여러가지를 성찰할 수 있는 것이다. 


독특하게 눈에 띄는 것들


화면비율이나 롱테이크와 같은 감각적 영화 기술이 눈에 띈다. ⓒ리틀빅픽쳐스



이 영화를 두고 '독특하다'고 말하고 싶다. 아니, 그렇게밖에 말할 수 없는 것도 같다. 초반부터 눈에 띄는 것들이 있다. 우선 화면 비율이다. 1.33:1 비율이라는데, 네 모서리가 둥그스름하게 처리되어 있다. 의식하지 못하게 클래식한 느낌을 전하며 시간이라는 개념을 상기시키려는 의도가 아닐까 생각한다. 


집요한 무동(無動) 롱테이크와 절제된 대사는 이 영화의 가장 큰 특징이다. 현재 롱테이크의 대가라 하면, 알폰소 쿠아론이나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 등을 뽑는다. 그들은 완벽한 동선에 따라 인물의 움직임에 맞춰 카메라가 따라다니는 롱테이크로 유명하다. 대단한 기술과 연기에 감탄을 보낸다. 


반면 이 영화의 롱테이크는 가만히 있는 카메라가 기본이다. 거기에 일면 아무것도 아닌 장면이, 영화에서 하등 중요하지 않을 것 같은 장면이 길게 등장한다. 어떨 때는 정물화를 찍은 듯 아무런 움직임도 소리도 없는 장면이 등장하기도 한다. 이는 절제된 대사와 함께 조만간 행해질 움직임과 대사에 집중하게 만든다. 한편, 유령답게(?) 한순간 시공간을 뛰어넘는 전개는 앞엣것들과 대조를 이루며 또다른 몰입을 불러온다. 


이렇게 완성된 몰입과 집중은 감독이 내보인 감각의 결과이며 감각을 만들어낸 장본인이기도 하다. 영화에서 감각이란 무엇일까. 여러 예술 콘텐츠 중에서 영화만 보여줄 수 있는 그 무엇이 아닐까. <고스트 스토리>의 대다수 장면들은 영화가 아닌 다른 콘텐츠로 표현할 방법이 없을 것 같다. 


사랑, 그리고 시공간의 덧없음


사랑과 더불어 시공간의 덧없음이 영화의 주를 이루고 맥을 형성한다. ⓒ리틀빅픽쳐스



고스트가 된 C가 할 수 있는 건 뭘까. M에게 말을 건넬 수도 M의 몸을 만질 수도 M의 머릿속이나 꿈을 통해서 표현할 수도 없다. 그저 가만히 바라볼 뿐이다. 기다릴 뿐이다. 그는 그저 작별인사를 하고 싶은 게 아닐까, 이대로는 이별다운 이별이 될 수 없지 않은가. C는 M에게서 말을 듣고 싶은 것이다. C는 M이 남기고 간 쪽지를 봐야 한다. 


시간의 덧없음은 사랑과 이 영화의 또 다른 주제라 할 수 있다. 인간과는 완전히 다른 시간 체계 속에서 살아가는(?) 고스트 C, 그에게 시간은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과는 정반대로 아무 의미가 없다. 하지만, 인간 개개인이 아닌 인간사 나아가 최초와 최후의 역사로 보면 또한 시간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게 아닌가. 결국 최후에는 모든 게 사라질 운명이라면 말이다. 무한의 시간을 가진 고스트도 언젠가 사라지는 것이다. 


그들의 집이 수없이 다른 무엇으로 변하는 것도 시간의 덧없음과 일맥상통한다. 사랑도 시간도 공간도 다 부질없는 것인가. 그 와중에 고스트 C는 시공간을 초월하는 사랑을 이어나간다. 그게 사랑이 아니고 무언가. 오직 사랑뿐이다. 


영화는 엄청난 여백을 자랑한다. 더불어 많은 궁금증을, 영화가 끝나도 풀어지지 않는 궁금증들을 남겨두었다.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고 다양한 방법으로 감상할 수 있으며 다양한 깨달음을 얻을 수도 있다. '시공간의 덧없음을 이겨내는 무모하고 절절한 사랑'이라는 필자의 해석은 아주 협소한 것이라 말할 수 있다. 사랑의 힘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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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나의 서른에게>


퇴색되긴 했지만, 여전히 시선이 갈 수밖에 없는 '서른'. ⓒBoXoo 엔터테인먼트



'서른'이라는 나이, 솔직히 지금에 와선 그 의미가 많이 퇴색되긴 했다. 백세 시대에 서른이 갖는 의미가 클 수 없는 것이다. 예전 삼십대가 인생의 최절정기라고 했다면, 요즘 삼십대는 이제 막 세상에 한 발을 내딛는 시기라고 해도 무방하다. 그럼에도 서른에게 여전히 관심을 갖고 의미부여를 하려는 건 예전부터 이어온 관념 때문이다. 


서른이라는 말이 들어간 콘텐츠는 소설, 시, 노래, 영화 등 부지기수이다. 1992년 최영미 시인의 <서른, 잔치는 끝났다>는 시대를 관통하는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1994년 고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는 시대를 뛰어넘는 국민가요가 되었다. 이들은 '서른'이라는 나이의 상징성을 특유의 감정선으로 내보내 만민의 호응을 얻었다. 


요즘 서른에 투여하는 바는 많이 다르다. 일례로 얼마전 출간되어 꽤 호응을 얻고 있는 손원평 작가의 <서른의 반격>은 서른이라는 나이에 상징성을 부여하는 게 아닌 삼십대가 된 주인공을 내세워 청춘세대론을 설파하고 있다. 와중에 홍콩에서 날아온 영화 <나의 서른에게>가 눈길을 끈다. 예전의 서른과 요즘의 서른을 바라보는 시선과 의미부여를 적절히 섞은 듯한 느낌이랄까. 


29살, 슬픔과 행복 사이에서


서른을 앞둔 시기는 '서른'이라는 숫자에 의미부여를 하지 않더라도 방황하는, 즉 충분히 의미부여가 가능한 시기다. ⓒBoXoo 엔터테인먼트



괜찮은 직장에 다니고 오랫동안 사귄 사랑하는 남자친구가 있으고 매사에 최선을 다하며 미래를 준비하는 괜찮은 외모를 가진 '29살' 임약군, 그녀는 여자 나이 서른이면 끝이라는 사람들의 말을 믿지 않는다.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녀는 정말 괜찮은 걸까. 서른을 앞두고 그녀에게 온갖 일들이 생긴다. 


팀장으로 승진한 그녀에겐 당연히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많은 일들이 주어진다. 친한 친구의 '서른 살' 생일 축하 파티를 소소하게 해주며 서른 살 여자에 대해 이런저런 긍정적이지만은 이야기를 나눈다. 치매가 부쩍 심해진 아버지이지만 병원에 가라는 말만 할 뿐이다. 오래 사귄 남자친구와는 부쩍 소원해진 느낌이다. 집주인의 일방적인 통보로 갑작스럽게 집에서 나가야 하는 게 결정적이다. 


갈 곳 잃은 임약군이 향한 곳은 일면식 없는 이가 잠시 내놓은 집. 그곳은 황천락이라는 동갑내기가 파리로 잠시 여행을 떠나면서 빌려준 집이다. 영화는 임약군의 이야기에서 황천락의 이야기로 선회한다. 그녀의 스물아홉에서 서른 사이는 임약군처럼 다사다난하지 않다. 그녀는 10년 동안 음반 가게에서 점원으로 일하다가 서른을 맞이해 처음 비행기를 타고 파리로 여행을 가려는 듯하다. 


서로 전혀 다른 외모에, 가정환경에, 능력에, 삶을 산 임약군과 황천락. 하지만 그들은 같은 날 서른이 된다. 그런데 임약군은 슬픔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황천락은 행복에 겨워 웃음꽃 위에 두둥실 떠 있는 것 같다. 어째서일까?


조금 더 자신을 들여다보고 사랑했으면


영화는 이왕이면 보다 행복한 서른을 맞이했으면 하는 마음을 29살에게 보낸다. ⓒBoXoo 엔터테인먼트



영화의 원제는 <29+1>이다. 영화 제목처럼 30이 주(主)라기보다 30이 되기 전의 20에서의 마지막이 주(主)라고 할 수 있다. 막상 되면 전과 아무것도 변한 게 없다는 걸 알게 되지만, 그 전까지는 알 수 없는 미래와 엄청난 변화가 함께 올 것 같은 미래에 대한 불안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임약군은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었다. 나름 남부럽지 않은 삶을 살아간다고 생각했는데, 다른 누가 봐도 그녀의 삶은 괜찮은데, 그건 오로지 남에게 보여지는 삶의 부분 부분들 뿐이었다. 그 부분들을 괜찮게 보이려고 그녀는 누구보다 노력했다. 하지만, 그녀 자신은 돌보지 못했던 것이다. 


황천락은 특별한 게 없다. 아니, 남들만큼 못한 삶이니 특별하다고 할 수 있나. 여튼 직장도 변변치 않고 남자친구도 없다. 가끔은 자신이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하찮게 느껴진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의 모든 걸 기록하기로 한다. 그 모든 게 그녀의 것이고 그녀의 인생이니까. 


여기에 옳고 그름은 통용되지 않는다. 임약군은 정녕 열심히 노력했고 잘했다. 그녀가 굳이 잘못한 게 있다면 자신을 돌보지 않은 것. 그리고 그녀는 그저 지쳤을 뿐이다. 황천락 같은 삶을 살라는 게 아니다. 황천락처럼 자신을 좀 더 돌보고 자신의 삶을 좀 더 들여다보고 무엇보다 사랑하라는 거다. 남을 사랑하는 것보다 훨씬 힘들다는 걸 잘 알지만... 다들 비슷한 선에서 출발했다면 29, 30이면 누구나 그럴 나이이고, 그래야만 하는 나이이다. 


흔하디 흔한 우리네 삶


영화를 통해 또 다른 나를 만나보는 시간을 갖는 건 어떨까. ⓒBoXoo 엔터테인먼트



영화는 탁월한 통찰력으로 핵심을 찌르는 깨달음을 주지는 않는다. 임약군의 이야기도, 황천락의 이야기도 전혀 새롭지 않다. 서로가 서로의 삶과 멀리 있다고 느낄 뿐, 우리가 보기에 그들의 삶은 흔하디 흔한 삶이다. 영화가 노린 점이 바로 그 점이 아닐까 싶다. 만인의 서른이 이 영화에 있는 것이다. 


보편적 삶의 궤적을 따라가다보면 만나게 되는 '나'. 그리고 누군가에게는 저런 삶도 한 번 살아보고 싶게 만드는 흔한 워너비 커리어 우먼 또는 자유로운 영혼의 보편적 전형. 솔직담백한 이 영화에 참으로 적당한 배치라 아니할 수 없다. 


영화는 후반부에 판타지적 요소를 가미해 현실에서 탈피해 지난 삶을 돌아보며 서른을 준비하려는 모습을 우회적으로 표현한다. 그러며 진정 소중한 게 무엇인지 질문하고 자문한다. 하지만 답을 내보이며 규정하진 않는다. 각자 다른 답이 있는 것이니까. 다만, 이왕이면 '함께' 답을 찾아보면 어떨까 하고 운을 뗀다. 그건 괜찮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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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리뷰] <당신과 함께한 순간들>


단조로운 내레이션에 숨은 어려운 삶에의 철학이 돋보이는 영화 <당신과 함께한 순간들> ⓒ싸이더스



내가 태어나기도 훨씬 전에, 아버지조차 말도 못 할 아기 시절에 돌아가신 할머니를 내가 기억할리는 없다. 그런 할머니가 나는 익숙하고 그런 할머니의 형상이 그려지는 건 누군가로부터 전해들었을 할머니에 대한 기억을 아버지한테 전해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은 그렇게 누군가의 기억 속에 살아 있다.


하지만, 그 기억들이 모두 정확할리 만무하다. 머릿속 어딘가엔 정확한 기억이 있지만 능력 상 꺼내지 못하는 것이든, 애초에 걸러서 기억하거나 어느 한 순간 또는 마지막 순간만 기억하는 것이든, 원본의 기억이 아닌 편집본의 기억이라는 것이다. 마치 역사와 같지 않은가. 사실도출에의 노력을 추구하지만, 영원히 그렇게는 불가능하다.


영화 <당신과 함께한 순간들>은 기억의 취사선택과 기억의 이어짐이라는 다분히 추상적인 주제를 가장 앞에 둔다. 여기에 역시 추상적이기 짝이 없는 관계라든지, 가족이라든지, 사랑이라든지 하는 주제를 따르게 한다. 하지만, 한 사람에 대한 기억의 순간을 눈앞에 실증적으로 불러내는 인간 형상 홀로그램이, 이 잔잔한 이야기에 심심한 파동을 일으켜 많은 주제들의 추상이 형상화된다.


인간 홀로그램


인간 형상의 홀로그램에 기억을 심어 마치 그때 그 사람과 얘기하는 듯한 느낌. 이 영화의 주요 볼거리다. ⓒ싸이더스



여든다섯의 할머니 마조리(로이스 스미스 분) 곁에는, 원하면 언제든지 불러낼 수 있는 홀로그램이 있다. '그'는 15년 전 세상을 떠난 남편 월터(존 햄 분)의 젊은 시절 모습을 하고 있다. 기억을 심어주면 영원히 그 기억을 그대로 간직할 그는, 기억을 되살리거나 기억을 공유하며 마음을 달래주는 친구 또는 대체자로서 완벽한 존재다. 


그런 그를 마조리의 딸 테스(지나 데이비스 분)는 싫어한다. 자신보다 그를 더 찾고 그에게 더 의지하는 엄마가 싫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인간 아닌 존재가 인간을 아주 잘 대체하고 있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다. 반면, 테스의 남편 존(팀 로빈스 분)은 적극 찬성하는 쪽이다. 다른 모든 걸 제쳐두고 마조리의 상태를 호전시키는 데 아주 좋은 친구가 아닌가. 그건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이 아닌가. 


그렇게 잃어버린 형상들과 기억들 때문에 괴로웠던 마조리의 마지막 나날들은 다분히 월터의 홀로그램 덕분에 치유받는다. 월터의 형상이 눈앞에 있고 월터와 함께 했던 화려한 젊은날의 기억 또한 되살릴 수 있다. 


하지만, 그건 월터에게 날조된 기억, 사실이지만 기분 좋은 기억과 사실이 아닌 기분 좋은 기억을 심어준 덕분이다. 기억하기 싫은, 기억에서 지워버린 기억은 아예 심어주지 않았다. 예를 들어, 마조리가 세계 8위의 테니스 선수 대신 월터를 선택했다고 거짓말하고 자살로 생을 마감한 아들 데미안에 대한 기억은 아예 전해주지 않으려 한다. 


이 영화의 핵심, 기억


인간 형상 홀로그램이 이 영화의 주요 볼거리라면, 기억과 관계는 이 영화의 핵심 주제이다. ⓒ싸이더스



영화는 연극을 원작으로 한 만큼 굉장히 정적이다. 90% 이상의 장면이 그들이 기거하는 집안이며, 역시 90% 이상의 장면이 그들 중 2인 또는 3인의 대화이다. 그들의 대화가 즉 영화이기에, 대화를 깊숙이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거기에서 우린 '기억' '관계' 등의 핵심 주제를 찾아 엿볼 수 있다. 


존은 기억이란 뇌 안의 퇴적층과 같아서 기억하지 못할 뿐 거기에 있다고 말한다. 어떤 식으로든 꺼내어 되살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그가 홀로그램 월터의 존재를 옹호하며, 그로 하여금 마조리의 기억을 되살리게 하거나 마조리의 기억 한 부분을 차지하게 하는 게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은 이치겠다. 


반면 테스는 기억이란 우물이나 서랍장 같은 게 아니라고 말한다. 무언가를 기억할 때는 기억 그 자체가 아니라 기억한 마지막 순간을 기억하는 것뿐이라는 것이다. 복사본의 복사본처럼 계속 희미해질 뿐 절대 생생해지거나 선명해지지 않는다. 이는 홀로그램 월터의 존재가 마조리 기억을 되살리거나 생생하게 하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그녀의 주장을 뒷받침한다. 


아마도, 테스의 주장 또는 이론이 맞을 것이다. 기억은 점점 쇠퇴해 언젠가는 소실할 거라는 건 누구나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모두들 몸소 실천하고 있다. 하지만, 심정적으로 존의 말을 믿고 싶다. 할 수만 있다면 서랍장에 기억을 보관하고 언제든 꺼내 눈앞에 놓고 싶단 말이다. 인류가 낳은 최고 천재 아인슈타인도 그건 불가능하지 않을까. 


관계, 그리고 기억


모든 건 기억에서 비롯된다. ⓒ싸이더스



관계는 기억과 함께 한다. 기억들이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다. 기억이 사라지면 관계 또한 사라진다. 마조리로부터 받은 한없이 작은 사랑, 마조리로부터 받은 적이 없다시피한 사랑의 기억으로 괴로워하는 테스이지만 마조리는 모른다. 알지 못하는 것이다. 일방적인 기억이 아닌 서로 간의 기억이야말로 사실상 그(그녀)와 나의 전부다. 


시간을 어김없이 흐르고, 기억은 쇠퇴하여 사라지고, 생명은 죽어 자연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누군가에 대한 기억은 계속 남아 있다. 영화에서 홀로그램이 상징하는 건 바로 그 누군가에 대한 기억의 영속성이다. 이는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게, 영화가 좀 더 힘을 실어주는 주장이, 앞서 테스가 아닌 존의 말에 있다는 걸 증명한다. 


누군가에 대한 기억은 그동안 글, 그림, 사진, 영상 등으로 전해져왔다. 이젠 홀로그램이 가능해진 시대, 그 누군가를 눈앞에 데려와 함께 기억을 직접 공유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 영화는 미래형 SF적 요소가 있지만 SF영화라 칭할 수 없다. 인류는 그 무엇보다 우선적으로 기억, 기록을 남기는 데 전력을 다한다. 


비단 월터 홀로그램만 존재하진 않을 것이다. 마조리, 존, 테스의 홀로그램이 다른 산 사람을 위해 존재하게 될 것이다. 그 와중에 '나에겐 많은 시간이 있으니까'라고 말하는 월터 홀로그램과 '얼마나 좋아.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었다니'라고 말하는 마조리 인간, 그리고 마조리 홀로그램의 한 마디가 기억에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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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시인의 사랑>


능력과 의욕 상실의 찌질한 시인이 무엇을 하겠는가. 무엇을 해야만 하겠는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사랑? ⓒCGV아트하우스



제주도 토박이 시인(양익준 분)은 등단만 했을 뿐 동인 합평회에서 심심찮게 까이는 수준의 재능을 지녔다. 겨우 방과후교실 선생님으로 활동하지만 아이들에게도 무시당하는 입장이다. 그야말로 시인으로서의 능력도 없고 가장으로서의 능력도 없다. 대신 가정을 이끌다시피하는 아내(전혜진 분)가 아이를 가지고 싶다고 해서 늦은 나이가 걱정되어 병원에 갔는데, 아내의 노산은 걱정할 필요가 없고 시인의 정자감소증이 문제가 된다. 급기야 남자로서의 능력도 없는 것이다. 


모든 면에서 능력과 의욕 상실의 시인은 어느 날 아내가 건네준 도넛을 먹고 눈이 번쩍 뜨인다. 환상적인 도넛 맛에 감동을 금치 못한 것, 매일 같이 동네에 새로 생긴 도넛 가게로 달려가 도넛을 무지막지하게 먹어댄다. 그 힘 덕분일까? 동인 합평회에서 소소한 합격점을 성취한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도넛 가게 화장실에서 도넛 가게 알바생 소년(정가람 분)이 어느 소녀와 섹스를 하는 장면을 목격한다. 


시인은 그 장면을 잊을 수 없다. 정녕 오랜만에 수음도 하고 정자수도 증가했단다. 뭔가를 느낀다. 사랑일까. 그런데 뭔가 좀 이상하다. 심상치 않다. 그 대상이 소녀인지 소년인지 잘 모르겠다. 아무래도 소년인 것 같다. 어느 날 술취해 밖에서 잠을 청하는 소년에게 다가가고 함께 소년의 집으로 향한다. 하루종일 일만 하는 엄마 대신 다 죽어가는 아빠를 보살피는 소년, 점점 그에게 뭔지 모를 감정을 느껴가는 시인. 


시인의 사랑은 어떨까


시인의 사랑은 특별할까? 아니, 시인이라는 존재가 특별한가? ⓒCGV아트하우스



누구나 가슴 속에 시 한 편은 품고 살고, 누구나 시인을 동경해 마지 않으며, 누구에게나 금지된 사랑에의 욕망을 품고 살 테다. 영화 <시인의 사랑>은 평범 이하의 시인의 삶을 통해 이런저런 드러낼 수 없는 것들을 조심스럽게 드러내 오히려 채워주는 역할을 수행한다. 


시인의 사랑은 어떨까. 아니, 이전에 시인이란 누구이며 무엇일까. 시인이 아니라서 재단할 수 없지만, 누구나 시인일 수 있다는 점에서 시인이라고 다를 바 없으며 누구나 시인이 될 수는 없다는 점에서 시인은 특별할 것이다. 즉, 시인도 다양한 사람들 중 하나이겠다. 시인의 사랑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시인에겐 관찰력, 상상력, 집중력 등이 필요할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 영화에서 보여주는 시인의 사랑 양태는 셋 다 충족해야 한다. 대상에 대한 관찰력, 대상으로부터 날갯짓하는 상상력, 대상을 향한 집중력까지. 그렇다면 소년에의 시인의 사랑은 특별할 게 없다. 아주 자연스러운 것이다. 


영화가 훌륭히 소화해내는 것들


영화는 복잡한 내러티브와 아슬아슬한 경계의 감정선에서 흔들리지 않는 중심을 지키며 잘 소화해낸다. ⓒCGV아트하우스



자연스러운 '시인의 사랑'을 시인만의 특별함에 가둬 생각할 수밖에 없는 현실의 벽은 높다. 시인에겐 찌질하게 그지없는 자신을 누구보다 사랑해주고 시인이 도저히 이끌 수 없는 가정을 대신 이끄는 아내가 있다. 그리고 천신만고 끝에 임신한 아내 아닌가. 그녀를 뒤로 하고 소년에게 마음이 가는 건 시인만의 사랑으로서도 용납하기 힘들다. 


시작된 지 오래지 않아 영화는 벌써부터 복잡한 내러티브를 선사한다. 시인의 사랑과 시인만의 사랑의 층위 위에, 그 자체로 이상할 게 없는 정상적인 사랑과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비정상적인 사랑의 층위가 겹친다. 동성애 코드는 덤에 불과할 정도다. 영화는 시인에서 시인과 아내, 시인과 소년으로 집중하는 시선을 옮겨가며 복잡한 내러티브를 나름 훌륭히 소화한다. 


무엇보다 훌륭히 소화하고 또한 훌륭한 점은, 아슬아슬한 경계에서 어느 쪽으로도 선을 넘지 않고 나아가는 감정선에 있다. 시인과 소년은 서로를 사랑하는 것인지, 연민하고 이용해먹는 것인지, 그저 지긋지긋한 현실에서 도망가고자 또는 조금은 타파해보고자 잠시잠깐 다녀오는 수준의 대상인지 알 수 없는 것이다. 영화가 완전히 끝날 때까지 알 수 없다. 


천재가 만든 영화


한끗 차이로 졸작이 아닌 수작으로 '판명'난 <시인의 사랑>, 여러 면에서 가히 천재의 영화라 할 수 있다. ⓒCGV아트하우스



시인의 여성성이라기 보다 여성적인 시인의 단면을 보여주는 이 영화의 시인, 다분히 남성적인 역할을 하는 아내와 다르게 성격이든 신체든 섬세하고 소극적이다. 하지만 그는 남자이기에 한없이 찌질하고 능력없는 이로 보인다. 그런 그가 어려운 환경에서 살아가는 소년에게는 뭐라도 해줄 수 있는 게 있다. 남성의 발로일까, 여성만이 할 수 있는 행보일까. 여기에서도 복잡한 내러티브와 아슬아슬한 경계가 엿보인다. 


그런 점에서 영화는 또한 수작과 졸작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걸어가고 있는 듯 보인다. 여러 코드와 층위를 나열할 뿐 정리하고 해결하지 못해 쓸데없는 상상력만 소진하게 할 뿐 무슨 얘기를 하고자 하는 것인지 알 수 없다고 느낄 수도 있는 반면, 산발한 코드와 층위 사이를 때론 발 빠르게 때론 정면으로 우직하게 지나가며 그것들을 이용해 상상력에 살을 붙여 평범함 위에 특별함으로 느낄 수도 있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졸작보단 수작에 가까운 작품이 아니었나 싶다. 최소한 동성애 코드 위에 우리가 생각하는 '시인'의 사랑이 아닌 '여성적인' 시인의 층위를 입힌 건 아주 참신했다. 거기에 배우들의 열연으로 빚어낸 코믹과 진지함의 병렬과 긴장감 어린 경계에서의 나아감은 최고의 감각을 선물한다. 얼핏 허술한듯 보이는 전체적 이미지 이면엔 그 어느 영화보다 촘촘하고 꼼꼼하게 직조된 경계들의 조합이 보인다. 천재의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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