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리뷰] <그녀>


인공지능과 사랑에 빠진 인간, 그런데 제목이 인공지능 <그녀>인 이유는 뭘까? ⓒ워너브라더스



'4차 산업혁명'이 새로운 시대의 화두다. 인공지능, 로봇기술, 생명과학이 주도하는 차세대 산업혁명, 100여 년을 주기로 일어난 산업혁명이 4차 때는 50년 만에 찾아왔다. '알파고'는 그 상징 중에 하나가 되었는데, 단순히 인간의 능력을 앞서는 것 뿐만 아니라 인간을 대체할 수 있다는 얘기다. 


사실 로봇이나 인공지능이 인간을 대체하기 이전에 인간이 인간을 대체해왔다. 참으로 많은 분야에서 인간이 인간을 대신해 왔는데, '대리사회' '대체시대'라고 명명해도 되지 않을까 싶다. 누구도 대신할 수 없을 것 같은 각각의 인간이 가지는 고유한 감정도 대신해주는 것이다. 이 시대가, 이 사회가, 유토피아인지, 디스토피아인지. 


근 미래를 배경으로 한 대체불가 로맨스 영화 <그녀>는 여자 인공지능과 사랑에 빠진 한 인간 남자의 이야기를 주로 한다. 그러기 위해선 인간도 인간이지만 인공지능이 '감정'을 지녀야 한다. 나아가 상대방에게 감정을 전달해야 한다. 사랑은 혼자 할 수 없는 것이기에. 어찌 가능할까. 그런데 영화는 나름의 방식으로 기가 막히게 그려낸다. 


4차 산업혁명 시대의 신개념 사랑 방식


인공지능 그녀를 사랑하는 인간 테오도르는 너무나도 행복해 보인다. 근미래 누구에게나 도래할 수 있는 사랑의 모습이 아닐까. ⓒ워너브라더스



남들 편지를 대신 써주는 회사에서 일하는 테오도르(호아킨 피닉스 분), 그의 편지들은 하나 같이 의뢰인과 대상과 상황에 완벽히 부합하는 아름다운 글이다. 현실은 아내 캐서린(루니 마라 분)과 이혼을 준비하며 별거 중. 그렇지만 벌써 일 년이 넘었음에도 여전히 캐서린과의 좋은 한 때가 쉼 없이 그를 괴롭힌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봐도 별 다른 진전이 없다. 마냥 우울하게 방황할 뿐이다. 


테오도르는 호기심으로 최신 인공지능 OS를 구입한다. 이왕이면 여자로. 그저 말동무가 필요했을 거다. 심심하거나 마음 정리가 안 될 때면 언제나 불러내 자기 얘기나 들어줄. 그런데 사만다(스칼렛 요한슨 목소리)라는 이름의 이 OS, 심상치가 않다. 목소리부터가 사람을 끄는 마력이 있고, 무엇보다 '리얼'하다. 금방 친해진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괴로울 때나, 언제나 불러내 얘기할 수 있거니와 아는 것이 많아 어떤 이야기도 잘 통하고 자신의 마음을 잘 다독여주기도 하고 심지어 '본인'의 이야기도 건네준다. 분명 그녀는 인간이 아니지만, 그녀와 사랑에 빠진 게 하등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녀는 훌륭하게 인간을 '대체'할 수 있을까? 테오도르는 그녀와의 '사랑'을 잘 지속해나갈 수 있을까? 


그야말로 4차 산업혁명에 걸맞는, 아니 상징하는 신개념 사랑 방식이다. 사람만의, 나아가 생물만의 전유물이라고 생각했던 '사랑'이라는 감정의 궁극체가, 인간이 창조해 낸 비생물에 의해서 현실화된 것이다. 그것도 결정적으로 인간의 일방적인 사랑이 아닌 쌍방 사랑의 모습으로. 이들의 사랑이 너무 예뻐서 지나치기 쉬울 충격이다. 우린 시선을 선택해야 한다. 이들의 '예쁜 사랑'이 우선인지, '충격'이 우선인지. 


인간과 인공지능의 사랑, 충격과 공포


나에게 이들의 예쁜 사랑은 충격과 공포로 다가온다. 아직은 인간들의 사랑을 원한다. ⓒ워너브라더스



감독의 의도는 다분히 이들의 '예쁜 사랑'인 듯하다. 디지털의 최정점에 이른 듯한 전체적 시대상과 사회 모습과 분위기와는 정반대인 듯한 아날로그적 감정선이 영화 전체를 지배한다. 거기에 가장 크게 기여하는 게 영상과 색인데, 배경은 파스텔 톤으로 채도를 높이려 했고 인물은 원색으로 명도를 높이려 한 듯하다. 


거기에 무엇보다 테오도르와 사만다의 대화, 테오도르의 표정, 테오도르의 과거 회상 등의 아날로그에 집중함으로써 완벽한 4차 산업혁명을 이룩한 디지털 사회라는 걸 최대한 알아차리지 못하게 했다. 전반에 깔린 당연한 디지털에 시선이 가는 대신, 테오도르의 감정에 집중하게 된 것이다. 


반면 나는 이들의 '예쁜 사랑'이 오히려 '충격'으로 다가왔다. '씁쓸함'도 함께. 시대가 시대인 만큼, 이런 생각이 굉장히 보수적으로 비춰질 수 있겠다. 인공지능이 인간 삶과 사회를 전반적으로 지배 혹은 함께 하는 시대에, 인간이 인공지능과 사랑에 빠지는 게 전혀 이상할 것 없지 않은가. 문제는 인공지능이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궁극의 감정을 대신할 수 있게 된 점이다. 인간의 노동력이 아닌, 인간 자체를 대신하는 것이다.


제목이 '그녀'인 만큼, 영화가 부각하는 건 인간이 아닌 인공지능이다. 그녀의 변화, 발전, 진화 등. 그렇지만 나에겐 인공지능이 아닌 인간이 계속 보였다. 심지어 인공지능인 그녀가 아닌 인간이 되고 싶어하는 그녀가 보였다. 인간에게 받은 상처를 인공지능에게서 위로 받는 한 인간의 이기적인 면모도 보였다. 그렇다. 나는 최대한 인간을 보려고 애썼다. 그들의 사랑이 '인간과 인간'이면 좋겠다는 무의식의 발로였다. 그렇지만, 결정적으로 그녀는 인간이 아니니만큼 충격은 계속 배로 돌아올 뿐이다. 


더욱더 충격적으로 다가온 건, 그녀가 '인간'이 되고 싶다고 말한 적이 한 번도 없다는 사실이다. 그녀는 몸을 갖고 싶고, 감정을 지니고 싶다고 말했을 뿐이다. 불가능한 게 없는 그녀의 세계에선 그것이 비단 인간 만을 뜻하는 건 아닐 테다. 어디까지 나아갈지 알 수 없을 정도의 그녀, 그 미지가 주는 충격과 공포는 새롭기까지 하다. 


그럼에도 최고의 영화 <그녀>


이 모든 영화 외적인 논의들을 제쳐두면, <그녀>는 최고의 영화다. 그렇지만 계속 씁쓸함이 남기에, 마음 놓고 또 보긴 싫다. ⓒ워너브라더스



사실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명백히 알 수 있다. 현대인의 고독과 외로움과 소통일 것이다. 근 미래가 아니라 현재도 과거에도 우린 똑같이 고독했고 외로웠고 소통의 부족을 느꼈다. 다만, 미래의 우리는 훨씬 더 쉽게 훨씬 더 고도의 비인간 대체자를 찾을 수 있다. 오랜 시간과 공력을 들여 나에게 맞게 대상화하거나 나를 상대에 맞게 타자화할 필요도 없다. 바로 나를 내보일 수 있고 아무 걱정할 필요도 없다. 


아직 우리는 '결국 인간'이라는 불편하지 않은 답을 원한다. 아니, 최소한 나는 그렇다. 그걸 누구보다 잘 아는 감독은 일부러 주체를 인간 '그'가 아닌 인공지능 '그녀'에게 놓고 그녀의 합당한 자가 발전으로 인한 자발적 떠나감으로 인간 그가 결국 인간 그녀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는 구도를 만들었다. 여기서 나는 충격이 조금 가시는 대신 '씁쓸함'을 느꼈다. 굉장히 인간적인 씁쓸함인데, 결국 모든 건 헤어지는구나. 


이 모든 논의를 제쳐두면, 아니 오히려 이런 논의들과 함께 할 때 <그녀>는 단연코 최고의 영화다. 우선 이 영화가 '아름답다'는 데에 이견을 달 만한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시각적으로도, 청각적으로도, 그리고 생각적으로도. 그리고 우린 이 영화로 시대와 사회와 우리 자신을 동시에 들여다볼 수 있다. 보는 이에 따라서 깊게도 얇게도 가능하다. 거기에 가보지 못한 미래를 굉장히 현실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무엇보다 그 어디에서도 보지 못한 형태의 사랑을 느낄 수 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이 영화 하나로 진행할 수 있는 논의의 깊이와 총량이 어마어마하다. 이렇게 방점을 찍는 바, 심지어 <그녀>는 주인공인 '그녀'가 언제쯤 모습을 내보일까 하는 기대감을 끝까지 가지게 하여 긴장감이 촉발하는 즐거움까지 선사한다. 이 작은 영화가 파도 파도 끝이 없으니, 이보다 더 좋은 영화를 찾기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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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케빈에 대하여>


충격도 이런 충격이 없고, 논란도 이런 논란이 없을 영화 <케빈에 대하여>. ⓒ(주)티캐스트



화려한 붉은 물결의 토마토 축제, 그 한가운데 자유로운 영혼의 여행가 에바(틸다 스윈튼 분)가 있다. 하지만 다음 화면에 그 붉은 물결은 끔찍하게 변한다. 더러운 소굴 같은 집안에서 깬 에바는 누군가에 의해 악의적으로 붉게 칠해진 집과 자동차를 마주한다. 이상하리만치 별 반응 없이 차를 타고 에바가 도착한 곳은 한 여행사, 그녀는 화려한 경력에 걸맞지 않은 말단 자리에 발탁된다. 


신나서 집으로 가려는 찰나 길에서 마주친 중년여자가 "좋은 일이라도 생겼나 보네. 신나 죽겠어?"라고 말하더니 대뜸 에바의 뺨을 후려치고는 지옥에나 떨어져 버리라고 악담하면서 가버린다. 지나가던 이가 경찰에 신고한다는 걸 만류하며 에바는 "아니에요. 제 잘못이에요."라고 말하곤 가버린다. 대체 무슨 일인가?


중간 중간 알 길 없는 장면 장면들이 지나간다. 건물을 앞에 두고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울부짖고 있다. 반면 에바는 홀로 그 앞에서 멍하니 지켜볼 뿐. 한편, 에바는 교도소에 갇힌 아들의 면회를 간다. 그런데 엄마와 아들은 말을 하지 않는다. 그들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듯? 대략 유추해보면, 엄마와 아들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고 아들이 무슨 짓을 저질러 교도소에 갇혔으며 엄마는 그때문에 제대로 된 삶을 영위할 수 없게 된 게 아닐까. 가슴 졸이며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영화는 비로소 시작된다. 


'모성'은 당연한 것인가?


세상엔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많은데 그중 하나가 '모성'이다. 이 영화는 모성이 당연한 것인지 충격적으로 묻는다. ⓒ(주)티캐스트



영화 <케빈에 대하여>는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모성'의 전모를 날카롭게 때론 섬뜩하고 끔찍하게 드러낸다. 자식을 향한 엄마의 무조건적인 사랑은 그 어느 상황에서도 가능한가? 반드시 가능해야 하는가? 반론은커녕 물음조차 쉽지 않은 명제인 '모성의 당연함'은 이 영화에서 철저히 해부되고 깨어진다. 


다 크고 나서 엄마한테 들었던 말이 떠오른다. '너 아기일 때 너무 많이 울었어. 정말 힘들었다.' 아기라면 으레 다 집 떠나가라 울어야 정상 아닌가 싶은데, 애초에 결혼은 물론 아기를 원하지 않았던 자유로운 영혼 에바에게는 그렇지 않았던 듯하다. 그녀는 아기 케빈의 울음소리가 세상에서 가장 싫었고, 차라리 공사장 소음 소리가 편했다. 그녀는 애초에 엄마가 되기 싫었고, 스스로 엄마로서의 자격을 박탈해 버린 것이다.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 법, 케빈은 갓난 아기를 벗어나자 엄마를 지극히 적대적으로 대하며 말을 듣지 않는다. 에바는 당연히 케빈이 남자아이라면 다 가지고 있을 성향을 보인다고 생각한다. 한편으론 케빈이 남들보다 떨어지는 게 아닌가 걱정도 되고. 그렇지만, 그보다 더 커서도 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엄마'만'을 향한 적대심이 더 커진 것 같다. 어느 날, 에바는 케빈이 굉장히 똑똑하다는 걸 알게 된다.


노벨문학상 수상자 도레스 레싱의 <다섯째 아이>의 현대판이 아닐까 싶다. 전통으로의 회기를 선택해 대가족화를 밀고 나가는 어느 부모, 그렇게 태어난 일가족을 나락의 구렁텅이로 빠뜨린 다섯째 아이 벤, 이들의 처절하고 끔찍하고 슬픈 이야기다. 이 소설이 시대, 선택, 운명 등의 문학적 장치들을 정교하게 끌어들였다면, 이 영화는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와 심리 등의 현실적 장치들을 집요하게 끌어들였다. 


비극이 찾아오지 않으면 이상한 일


영화는 내내 비극이 찾아온다. 작은 비극들이 모여 큰 비극이 되는데, 이를 반복한다. 보고 있기가 힘들 정도. ⓒ(주)티캐스트



상황이 이럴진대 비극이 찾아오지 않는 게 이상한 일, 영화에서 크나큰 사건은 3번에 걸쳐 일어 난다. 사실 에바가 엄마가 되고 케빈이 태어난 것 자체가 비극이었을지 모른다. 여하튼 그 비극 중 첫 번째는 영화에서 중요 분기점을 형성하기에 충분했다. 적대의 칼날을 갈고 있던 에바와 케빈 사이에 여동생 실리아가 태어난 것이다. 


케빈이 실리아를 싫어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 어느덧 청소년이 된 케빈은 가히 그 똑똑한 머리를 여전히 엄마 에바를 괴롭히는 데 쓴다. 엄마를 직접적으로 괴롭힐 순 없는 노릇이니, 노골적으로 적대적 눈빛이나 행동을 일삼는 건 물론 실리아를 괴롭히는 우회적 타격이나 엄마한테 자위 행위를 들켜도 멈추지 않는 등의 심리적 타격을 일삼는 것이다. 그리고 결국 그 일이 터진다. 


싱크대를 막히게 해서 에바로 하여금 어쩔 수 없이 독극물을 사용하게 만든 후 실비아가 실수로 독극물을 엎어 한 쪽 눈을 실명하게 된 일이다. 겉으론 실비아의 실수, 나아가 에바의 잘못이다. 하지만 에바는 알고 있다. 케빈이 교묘하게 함정을 파놓은 거라는 사실. 그건 에바를 향한 케빈의 처절한 '복수'다. 결국 케빈의 복수는 에바에게 상상조차 하기 싫은 파국을 안긴다. 


영화는 시종일관 에바의 지옥 같은 현실과 지옥보다 더한 강제적 과거 회상, 그리고 에바와 케빈의 적대적 일상만을 보여줄 뿐이다. 에바의 현실은 무덤덤하게, 과거 회상은 몽환적으로, 에바와 케빈의 일상은 사이코틱하게 그린다. 무엇보다 청소년 케빈을 분한 에즈라 밀러의 연기에 기댄 바가 크다. 틸다 스윈튼은 에바 그 자체였다. 


특히, 에바와 케빈의 사이코틱한 일상은 내내 긴장의 연속이다. 분명 잔잔하고 평화롭기까지 한 가족의 모습인데, 잔잔한 물가에 돌멩이 하나가 일으키는 파문이 엄청난 것처럼 이들의 소소한 듯한 티격태격이 섬찟섬찟하다. 그 가중 큰 이유 중 하나가 적나라함에 있을 것이다. 별 것 없는 평범한 것들을 적나라하게 보여줄 때 우린 기괴함을 느낀다. 살얼음판을 걷는 느낌, 언젠가 반드시 큰 일이 있을 것만 같은데 어김없이 큰 일이 일어난다. 생각지도 못한. 


'케빈에 대하여'가 아닌 '에바에 대하여'


이 영화의 주 논란거리는 아마 '케빈'과 '에바'일 거다. 엄마와 자식,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관계에 비극이 들이닥친다면? ⓒ(주)티캐스트



누구의 '잘못'이라고 밝히기가 매우 어렵다. 둘 다 잘못했다고 할 수도 있지만, 그냥 서로 맞지 않았을 뿐이라고 할 수도 있다. 재수가 없었다, 운이 없었다고 치부할 수도 있다는 거다. 하지만, 분명한 건 케빈은 에바와 그녀의 남편 프랭클린의 '선택'이었다는 것. 그들이 조심하지 않았던 못했던, 낳자 낳지 말자 등등 무슨 생각을 했든지 간에 케빈을 낳아 기르기로 한 건 다름 아닌 그들 자신이고 에바 자신이다. 그 이후에 엄마와 자식이 서로 맞지 않는 건 또 다른 문제인 것이다. 


'케빈이 그렇게 된 건 엄마 에바의 사랑이 부족했고 제대로 교육하지 못했기 때문이다'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 그 행간엔 어느 누구도 알 수 없는 그들만의 것들이 있었을 테니까. 그렇지만, 적어도 여기서 '엄마는 사랑할 수 없는 아이, 나쁜 아이를 사랑할 수 있는가'라는 프레임을 적용해선 안 된다. 그 자체로 시선은 '사랑할 수 없는 아이, 나쁜 아이'로 간다. 보다 중요한 건 케빈이 아니라 엄마가 아닐까. 그래서 <케빈에 대하여>가 아닌 <에바에 대하여>가 맞는 것 같다. 


많은 논란이 있을 줄 안다. 내 주장은 형성된 사이코패스가 아니라 사이코패스의 형성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니. 그렇다면, 최소한 에바도 사이코패스일 수 있다는 걸 알았으면 한다. 케빈이 갓난 아기였을 때 보인 에바의 행동을 달리 어떻게 설명할 건가. 그 행동은 단지 아기가 싫다는 이유로 행할 수는 없을 것이다. 


최근에 나온 한국소설 <아몬드>는, 감정이 없이 태어난 윤재가 감정이 풍부하고 교육 열정이 투철한 할머니와 엄마의 사랑과 교육을 듬뿍 받아 결국 감정을 배우는 이야기다. 반면 누구나처럼 풍부한 감정을 지닌 채 태어난 곤이는 어릴 때 받은 폭력 등으로 얼룩진 어둠의 기억 때문에 괴로워 한다. 올바른 감정을 지니기 힘들다. 결국 선천적인 건 없다는 거다. 


이 영화와 맞닿는 부분이 있다. 선천적과 후천적. 아마 에바는 케빈이 선천적으로 나쁘고 사랑할 수 없는 아이로 태어났다고 생각했을 거다. 내(에바)가 아닌 네(케빈) 문제인 것이다. 과연 그럴까? 그 자신, 풍부한 감성과 열정적이고 반듯한 이성으로 케빈을 대했다면 당연히 충분히 달라지지 않았을까. 아니 달라지는 게 아니라, 애초에 잘 크지 않았을까. 한없이 안타깝다. 영화 또한 안타까움만 남을 뿐이다. 엄마와 아들의 슬픈 사랑 이야기와 다름 아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런 마음이 들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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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그 여름>


소설 <그 여름> 표지 ⓒ아시아



'동성애' 이슈는 언제나 뜨거운 감자였지만, 지난 4월 25일 4차 대선후보 토론회에서 홍준표 후보의 질문에 대한 문재인 후보의 확고한 대답에 대선 주요 이슈를 넘어 사회 전체 이슈가 되었다. 동성애를 좋아하지 않고, 동성혼 합법화에 반대하지만, 동성애 차별은 반대한다는 대답. 


감히 말하지만, 위 세 말은 애초에 성립되지 않는다. 어찌 동성애를, 사람과 사람의 사랑을 좋아하거나 하지 않거나 반대하거나 반대하지 않거나 하는 범주 내에서만 말할 수 있을까. 그리고 동성애 차별 또한 동성애를 특별 취급한 말이다. 동성애건 이성애건 어떤 차별에도 반대한다는 대답이 맞지 않은가, 싶다. 동성애자는 특별한 사람이 아니다.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일 뿐이다. 


그동안 수많은 동성애 코드 콘텐츠를 봐왔다. 특히 영화와 소설로. 돌이켜 생각해보니, 대부분 동성애 반대나 혐오를 반대하는 뉘앙스였다. 이제는 그 프레임에서 벗어나 동성애가 이슈화되지 않는, 동성애를 그저 사랑으로 대하는 그런 콘텐츠를 봤으면 했다. 드디어 볼 수 있었다. 작년에 첫 책을 낸, 데뷔 4년차 신인 소설가 최은영의 단편 소설 <그 여름>. 


소설은 두 주인공 김이경, 이수이의 신(新)고전적 서사의 사랑과 연애 이야기다. 이들은 분명 남자와 여자가 아닌 여자와 여자이지만, 우린 어느새 이들이 그런 관계라는 걸 잊고 만다. 그리곤 그저 이들의 사랑을, 청춘을, 서사를 따라갈 뿐이다. 그 기점은 이들의 사랑이 확고해지는 시점이다. 


"사랑을 하면서 이경은 많은 일들을 사랑에 빠진 사람의 입장에서 이해할 수 있었다. 수이의 단단한 사랑을 받고 나니 그렇게 두려워하던 사람들의 시선과 자신에 대한 판단이 예전만큼 겁나지 않았다." (본문 28, 30쪽)


평범한 사람들의 평범한 사랑


이경과 수이는 열여덟 여름에 우연한 사고로 처음 만난다. 수이가 찬 공에 이경의 얼굴이 맞아 안경테가 부러지고 코피까지 났고, 그들은 함께 양호실과 안경점에 갔다. 같은 학교에 다녔지만 이경은 그저 그런 평범한 학생이었던 반면 수이는 축구선수로 활동했다. 둘은 서로 강렬한 끌림이 있었던 것 같진 않다. 그저 어지러운 기분이었고 목소리가 귓가에 계속 맴돌 뿐이었다. 그리고 계속 시선이 갔고 몸이 반응했다. 


스무 살이 되며 둘은 서울로 갔다. 이경은 서울 중심에 있는 대학교에 진학했고 수이는 서울 외곽에 있는 직업학교에서 자동차 정비를 배우기 시작했다. 변함 없을 것 같은 그들의 단단한 사랑은 이경의 예감으로 조금씩 흔들린다. 언젠가 수이와 함께 하지 않을 것 같은 '당연한' 예감. 그 기저에는 언젠가부터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 수이에 대한 이경의 깨달음이 있었다. 


수이가 아닌 다른 사람을 좋아한다는 걸 상상조차 해보지 못한 이경에게 은지가 다가온다. 아니, 이경이 은지에게 강렬하게 끌린다. 이경이 생전처음 사랑을 해본 이는 다름 아닌 수이, 하지만 생전처음 강렬한 끌림을 경험한 당사자는 은지다. 이경과 수이의 사랑이 당연하듯 다가왔듯이, 이경과 은지의 끌림도 당연하게 다가온다. 이들의 삼각관계도 하등 이상할 게 없다. 


소설이 도달한 곳은,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사람들의 평범한 사랑이다. 다만 소설에서 남자를 찾아볼 수 없을 뿐이다. 여자와 여자의 사랑. 학창시절 축구선수로 활동했고 성인이 되어선 자동차 정비 일을 하는 수이가 남자 역할을 하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어쨌든 그녀도 사랑의 당사자일 뿐이다. 


갈 길 먼 인식의 변화, 이 소설로 시작


단편에 메시지가 있기는 쉬운 반면, 서사와 분위기가 존재하긴 힘들다. 구현해 내기 힘들다는 걸 알기에 애초에 시도조차 하지 않기 때문이다. 반면 <그 여름>은 서른넷의 이경이 이십 년이 훌쩍 넘은 옛날의 '그' 여름을 시작으로 십삼 년 전까지의 일을 회고하는 후일담 문학의 형식을 띄기에 서사적일 수밖에 없다. 


우리는 이 서사 덕분에 이들의 사랑에 집중할 수 있다. 집중하다 보면 이들의 '특별한 동성애'적 사랑이 '평범한' 사랑으로 치환되는 걸 발견한다. 특히 이 소설에서는 그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특별한 사랑과 평범한 사랑의 만남이 있다. 이경이 느끼는 사랑, 거기엔 누구나의 사랑도 있고 이경 만의 사랑도 있다. 


"수이를 만나기 전, 세상이 얼마나 삭막하고 외로운 곳이었는지 이경은 기억했다. 자기를 좋아해주는 사람도 없었고, 무리를 이뤄 다니는 아이들과 좀체 어울릴 수 없었던 기억을. 아무리 아이들을 따라 하려고, 비슷해지려고 노력해도 그렇게 되지 않았고, 자기 자신이라는 존재를 애써 바꿔보려 했지만 불가능했으며 그렇다고 바뀌지 않는 자신을 사랑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본문 106쪽)


급기야 '내'가 겪었던 사랑과 다를 바 없다는 것까지 느낄 수 있다. 싸우고 화해하고, 환희를 느끼고 아프고, 만나고 헤어지고... 나를 포함한, 이경과 수이와 은지를 포함한, 누구나의 사랑 이야기다. 이 소설이 동성애적 요소로 동성애가 아닌 '애(愛)'를 말한 건 탁월한 선택이고, 나아가 그 선택을 문학적 실력으로 잘 살려나갔다는 점에 좋은 점수를 주고 싶다. 신인다운 패기가 아닌 신인답지 않은 노련함이 번뜩였다. 


그럼에도 동성애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나라의 인식은, 시대의 인식은 아직 갈 길이 멀다. 논쟁 거리가 될 이유가 될 수 없는 게 동성애인데, 첨예한 논쟁의 한가운데에 있는 게 한심하고 슬프고 안타깝다. 앞으로도 논쟁 거리가 될 수 없는 동성애적 요소가 점철된 평범한 사랑 이야기가 계속되길 바란다. 어쩔 수 없이, 우선 인식이 변화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 여름>이 그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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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제리 맥과이어>


오랫동안 탑스타로 군림하는 톰 크루즈. 그에게 사실 가장 어울리는 옷은 로맨틱코미디가 아닐까? ⓒ피터팬픽처스



1981년 <끝없는 사랑>으로 데뷔하고선 이내 주연으로 올라서 80년대 후반에는 이미 자리를 공고히 한 배우 톰 크루즈. <미션 임파서블>을 위시한 단순 액션 영화를 많이 찍었지만, <레인 맨>이나 <7월 4일생>, <매그놀리아> 등 작품성에 포커스를 맞춘 영화도 많이 찍었다. 모두 톰 크루즈에게 제격이어서, 흥행과 비평 양면에서 대대적인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하지만 그에게 더 잘 맞는 옷은 따로 있었다고 본다. 다름 아닌 로맨틱 코미디인데, 그 대표적인 예가 <제리 맥과이어>겠다. 그의 필모를 들여다보면, 진지한 역이 반 정도이고 유들유들한 역이 반 정도이다. 이 영화에서 그는 유들유들한 역을 제대로 선보이는 바, 직전에 찍었던 <미션 임파서블 1>이나 <뱀파이어와의 인터뷰>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볼 수 있겠다.

한편, 이 영화는 톰과 함께 한 두 주연급 조연에게도 특별하다. 쿠바 구딩 주니어는 이 영화로 아카데미와 미국 내 각종 남우조연상을 휩쓸었는데, 이후 2000년대엔 각종 영화로 최악의 남우주연상 후보에 단골로 올라갈 때를 생각하면 더더욱 그러할 것이다. 르네 젤위거는 당시 무명 배우였는데, 이 영화로 단숨에 유망주 이상의 가치를 지니게 되었고 쿠바 구딩 주니어와는 반대로 2000년대 세계적인 여배우로 우뚝 섰다.

말랑말랑 로코와 감동적인 드라마

<제리 맥과이어>는 기본적으로 로코와 드라마와 합본이다. 말랑말랑하고 감동적인. ⓒ피터팬픽처스



능력과 외모, 성격까지 완벽에 가까운 스포츠 에이전트 제리 맥과이어(톰 크루즈 분), 누구보다 잘 나간다. 그런데 어느 날 그가 담당하는 선수들에게 여러 가지 일들이 한꺼번에 터진다. 어떤 선수는 10대 소녀를 성추행하고, 어떤 선수는 프로잼 카드가 아니라는 이유로 어린 아이의 사인을 거절했다. 결정적으로 어떤 선수는 몇 번이나 부상을 당했는데도 제리가 만류하지 않았는데, 그의 아들이 제리에게 'FUCK YOU'를 날린 것이다. 제리는 스포츠 에이전트라는 처음으로 직업에 회의를 느낀다.

선수들을 그저 '돈'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게 아닌지 하고 말이다. 그것이 맞다는 생각과 함께, 어느 날 그는 회사에 제출할 '중요한 건 돈이 아니라 인간이다'라는 요지의 방대한 제안서를 작성한다. 회사에서 환대를 받는 제리, 하지만 곧 해고 통보를 받고 쫓겨나 1인 에이전트를 세운다. 그때 그를 따라온 유일한 동료는 경리과 도로시 보이드(르네 젤위거 분), 그리고 유일한 선수는 미식축구 로드 티드웰(쿠바 구딩 쥬니어 분). 

제대로 된 홀로서기를 위해선 우선 제대로 된 선수를 잡아야 하는 바, 제리는 그저 그런 무명 선수인 티드웰은 제쳐두고 NFL(미국 미식축구리그) 드래프트 1순위가 확실시 되는 커쉬맨을 잡기 위해 총력을 다한다. 이미 잡은 물고기 로드, 거의 잡은 물고기 커쉬맨. 제리는 행복하다. 하지만, 커쉬맨은 막판에 제리를 배신한다. 제리는 전에 없는 실의에 빠진다. 과연 그만을 보고 따라온 도로시와 로드의 운명은?

<제리 맥과이어>는 얼핏 <머니볼>처럼 지극히 직업적인 색채가 강하고 전문적인 영화라고 생각하기 쉽다. 물론 그것들이 상당 부분을 차지하지만, 전체적으로는 말랑말랑하고 현실적인 로맨틱 코미디(제리와 도로시)와 감동적이고 진취적인 드라마(제리와 로드)의 합본이다. 영화는 이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는다. 

현실적인 로코와 진취적인 드라마

하지만 속내는 마냥 말랑말랑하고 감동적이지만은 않다. 굉장히 현실적이고 진취적인 면모도 보인다. ⓒ피터팬픽처스



먼저 제리와 도로시의 로맨틱 코미디, 이들의 사랑은 말랑말랑하지만 굉장히 현실적이다. 제리에겐 잘 나가던 바로 얼마 전까지 약혼녀가 있었으며, 도로시는 아들 하나가 있는 이혼녀다. 이들이 이어지는 이유는 결코 '사랑'이 아닌 듯한대, 외로움을 극도로 잘 타는 성격의 제리가 자신이 힘들 때 상냥하고 친절하게 잘 대해준 도로시에 '의리'를 지킨 것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그가 회사를 나올 때 유일하게 따라왔다. 

그런 그들의 사랑이 계속 지속될 수 있을까? 돈보다 인간이 중요하다고 울부짖다가 해고 당한 제리 입장에서 또다시 돈 때문에 대형 선수를 잃어버리고 찾은 안식처가 도로시일 텐데, 역설적으로 그 사랑이나 의리는 사람이 아닌 돈에 상처 받은 마음의 약일 것이다. 사람으로 받은 상처는 사람이 치유해줄 수 있지만, 돈으로 받은 상처를 어찌 사람이 치유할 수 있겠는가. 

제리와 로드의 드라마는 어떨까. 역시 모든 걸 다 잃고 마지막 남은 단 하나의 선수, 'SHOW ME THE MONEY'를 외쳐대는 그저 그런 무명의 선수 로드에게 기댈 수밖에 없는 제리. 적어도 그와는 비즈니스 관계에 있기 때문에, 돈으로 받은 상처를 치유해줄 수 있는 가능성은 있겠다. 그러기 위해선 로드이 유명해지고 그래서 고액의 연봉을 받아야 한다. 문제는 그의 실력이 아닌 그의 인성. 

제리는 로드에게 더 좋은 실력을 보여줄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대신 더 나은 인성을 가질 것을 요구한다. 이 지옥같은 경쟁의 장에서 실력이 아닌 인성을 요구하다니? 아무리 이미 출중한 실력을 갖고 있는 로드라고 해도 말이다. 그렇게 제리는 자신이 쓴 제안서가 맞다는 걸 로드를 통해 입증해낸다. 비단 에이전트와 선수 사이의 인간 관계뿐만 아니라, 이 자본주의 세상에서 돈보다 중요한 게 인간 관계라고 말이다. 

자본주의를 벗어나진 못했다

모든 건 자본주의 하에서 이루어진다. 사랑도, 인간 관계의 진전도, 성공한 이후에나 가능하다. ⓒ피터팬픽처스



로맨틱 코미디도 아닌 것이, 드라마도 아닌 것이, 직업인의 세계를 들여다보는 것도 아닌 것이, 영화는 직업인 제리를 중심으로 세 가지 주제가 유기적으로 맞물려 돌아간다. 거기에 맞는 세 가지 주제는 돈, 사랑, 관계라고 보면 될 것이다. 이 주제와 소재들을 모두 포괄하는 이 '세계'는 자본주의다. 

돈이 모든 걸 지배하고, 돈이 사랑도 관계도 넘어서는 세계가 자본주의일진대, 이 영화는 꼭 그렇지만은 않다고 일침을 가한다. '결코' 그렇지 않다고 단호하게 거부하는 게 아니라 '꼭' 그렇지만은 않다고 툭 건드리는 정도로 다가오는 건, 아마도 조금 불편한 결론 때문일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영화의 하이라이트이자 가장 감동적인 장면이다. 돈과 관계와 사랑까지 완벽해지는 그때. 

그런데 여기서 눈여겨보아야 할 게 순서다. 내가 보기에, 돈이 가장 먼저였다. 그보다 앞서 가족의 진심어린 사랑이 있었지만 그게 경우에 따라 돈으로 환원될 수 있겠다. 그 다음이 관계였고, 마지막으로 사랑이었다. 모든 걸 완성시킨 다음에야 비로소 사랑이 보인 것이다. 인간을 가장 인간이게 하는 '사랑'을 말이다. 그래서 난 이 영화가 '자본주의'에서 결코 벗어나지 못했다고 보는 것이다. 

자본주의를 넘어선 사랑이 아닌, 자본주의 안에서의 사랑. 물론, 이 영화가 20년 전 영화라는 걸 간과해서는 안 된다. 자본주의라는 게 최절정기에 있었던 1990년대 중반에 이런 정도의 영화가 나왔다는 게 신기한 거다. 여러 면에서 유려한, 이미 1990년대를 대표하는 명작 중 하나가 된 <제리 맥과이어>. 언제라도 환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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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오래된 리뷰] <호프 스프링즈>


노년의 사랑이 특별할 건 없다. 이 영화는 지극히 평범하고 현실적인 노년의 사랑을 코믹하게 그렸다. 특별함 대신 평범함을 선택했다. ⓒ데이지엔터테인먼트



결혼한 지 30년이 갓 넘은 노부부 케이(메릴 스트립 분)와 아놀드(토미 리 존스 분). 그들은 아놀드가 허리를 다쳤다는 이유로 각방을 쓴다. 케이가 큰 맘 먹고 여자로서의 자존심도 버려 가며 먼저 다가가려 하면 아놀드는 피곤하다며 단칼에 거부한다. 단지 허리를 다친 것 때문이 아닌 것 같다. 사랑이 식어버린 게 아닐까. 


그래도 케이는 매일 아침 출근하는 아놀드를 위해 계란과 베이컨을 대령한다. 신문을 보며 당연한 듯 받아먹는 아놀드, 케이는 짤막한 감사 인사와 가벼운 키스를 원하지만 그마저도 이젠 없다. 케이도 출근하는 건 마찬가지, 이런저런 것들을 따져 봐도 뭔가 문제가 있는 것 같다. 이 부부 생활에 말이다. 뭔가가 빠져 있다. 사랑? 섹스? 


2000년대 이후로 노년의 사랑을 그린 영화가 많이도 나왔다. 전에 없는 풍년인데, 급격한 노령화 때문인 것으로 사료된다. 그렇지만 그런 생각은 자칫 노년의 사랑이 특별하다고만 느끼게 할 수 있는 바, 주의해야 할 필요가 있다. 반면 역시 노년의 사랑을 그린 <호프 스프링즈>는 전 세계 노부부가 느낄 만한 평범한 주제로 특별함을 배제했다. 일명 '섹스리스 부부'. 노년의 섹스리스와 사랑을 코믹하게 그렸다. 


노부부의 섹스리스 문제 풀기


다름 아닌 노부부의 '섹스리스 '문제. 코믹하게 그려내지만, 들여다보면 굉장히 중요하고 심각한 문제. 이 '문제'를 풀어나가는 과정이 자못 진지하다. ⓒ데이지엔터테인먼트



영화는, 섹스에 사랑이 포함될 순 없지만 사랑에 섹스는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한다. 사랑 없는 섹스는 가능하지만 섹스 없는 사랑은 불가능하다는 말, 동의하는가? 플라톤의 <대화> '항연'편에서 비롯된 '플라토닉 러브'는 이를 정면으로 반박할 테지만, 일반적인 견해에서 볼 땐 절대적 진리에 가깝다. 


케이와 아놀드는 지극히 평범하고 일반적인 노부부, 대부분(일 거라고 생각되는) 노부부처럼 그들도 식어버린 사랑과 섹스리스 문제를 겪는다. 특히 케이는 이를 참기 힘들다. 그녀는 질색하는 남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멀리 떨어져 있는 곳에서 진행되는 비싼 상담에 신청한다. 자그마치 4000달러나 하는. 


케이는 그곳으로 떠나는 것 자체가 좋다. 이렇게 둘만의 시간을 갖는 게 얼마만인가. 매일 반복되는 일상을 떠나 일탈하는 게 얼마만인가. 아놀드도 따라왔다는 건 조금이라도 마음을 열었다는 증표가 아닌가. 하지만 순조롭지 않다. 상담박사는 그들에게 '문제'가 있다는 진단을 내리고, 그들에게 해야 할 '숙제'를 준다. 아놀드는 이에 대노하고는 들으려고도 하지 않는다. 케이는 충격을 받는데...


문제 풀기의 제1단계는 문제를 직시하는 것이다. 하지만 많은 경우, 문제를 직시하지도 못한 채 문제 풀기가 끝나버린다. 문제가 있다는 사실 그 자체가 두렵기 때문이다. 그 단계를 지나가면 한층 수월할 터, 영화는 일면 '문제 풀기'의 단계를 하나하나 보여주는 것 같다. 노부부의 섹스리스 문제. 


'우린 문제 없이 잘 살고 있다'고?


우리만 그런 줄 알았다. 뻔히 보이지만 아무 문제 없다고 허풍을 떠는 것 말이다. 특히 '가족'이 된지 오래된 이들에게서 흔히 발견할 수 있다. ⓒ데이지엔터테인먼트



'가족끼리 왜 이래'라고 농담 반 진담 반으로 꺼내는 말이 더 이상 우스갯소리처럼 들리지만은 않게 만든다. 삶의 질을 위해서, 노년의 행복을 위해서 간과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중년, 노년 부부가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사랑'이 아닌 '정'으로 산다고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영화는 중년, 노년 부부들이 '정'으로 사는 게 비단 우리나라 뿐만이 아니라는 걸 알려준다. 서양도 마찬가지인 바, 인류보편적인 삶의 진행인가 보다. 하지만 대부분이 그런 방향으로 간다고 해도 그것이 정답은 아니다. 우리나라 시트콤 <거침없이 하이킥>에 나오는 중년 부부, 비록 현실은 아니지만 박해미와 이준하 부부의 닭살 돋는 모습이 어찌 '비정상적인' 모습이라 할 수 있을까. 


부부상담, 노부부의 섹스리스 문제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정곡을 찌르고 들어가 오랫동안 계속되어 지치고 곪디곪은 사랑의 상처를 치료하고자 한다. 당연히 반발이 심하다. 누구라도 처음엔 반발이 심할 터, '우린 문제 없이 잘 살고 있다'에서 시작해 급기야 상담사를 욕하게 될 것이다. 그 다음엔 상대방을 질타할 것이고. 


서로 자신의 문제점을 인정하고 속시원히 드러내는 건 정말 쉽지 않다. 30년을 넘게 함께 산 '사랑하는 사람'과 라면 말이다. 그렇지만 일단 1단계를 넘어서면 일사천리다. 그야말로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길을 발견한 것. 이제 노력하면 된다. 물론 그 노력이란 게 나이와 세월에 심각하게 가로막힐 수 있겠다. 그러면 '이해'와 '배려'의 2단계에 도달한 거다. 


볼품없는 노부부의 섹스를 응원한다!


우리는 이 영화를 보며 노부부의 섹스를 응원하게 될 것이다. 아니, 궁극적으로는 사랑을. ⓒ데이지엔터테인먼트



영화의 노부부에게도 한 때 서로를 향한 끝모를 갈망이 있었다. 젊었을 때, 지금은 희미한 기억 속에서나마 겨우 존재하고 있는 감정들이 그때는 항상 서로를 감싸고 있었다.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은 남아 있지 않은가? 아니다. 사랑도 나이가 들어 지치고 힘겨워 할 뿐이다. 그래서 본분을 다하지 못하고 있는 거다. 


이 사랑스러운 영화는, 볼품없는 노부부까지도 사랑스럽게 만들고 심지어 그들의 섹스를 응원하게 만드는 이 영화 <호프 스프링즈>는, 그냥 그렇게 자신의 소임을 다한 듯 식어 있는 사랑의 불꽃이 봄에 새싹이 솟아나듯 다시 일 수 있다고 말한다. '정상체위'만을 일삼는(?) 남편에게 아내의 '섹스 판타지'를 선사하고, 자신만이 사랑의 피해자인 줄 알았을 아내에게 남편의 생각지도 못한 피해 사실을 말해주면서. 


현실과 이상은 구분해야 하겠지만, 암울한 현실과 유쾌한 이상 모두를 선사하는 이 영화를 보고 있노라면 그 구분은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 적당히 암울한 게 아닌 정녕 암울한 현실을 보여주며, 충분히 실현 가능하지만 보이지 않는 허름한 벽에 막혀 있을 뿐인 이상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두 눈 꼭 감고 한 번만 해보자. 산전 수전 다 겪은 부부답게 한 번만 해보면 될 일이다. '가족끼리 왜 이래' '우린 아무 문제도 없어'라는, 만병통치약처럼 군림하는 해괴한 주장은 집어치우고 그저 해보면 된다. 도대체 뭘 하느냐고? 영화를 보면 되겠다. 아주 상세하게 알려줄 것이다. 아마 하지 않고는 못 배길듯, 한 번 하면 또 하고 싶어 할듯. 참고로 영화는 '청불', 상상은 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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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톰 포드의 <녹터널 애니멀스>


<싱글맨>으로 엄청난 데뷔를 한 디자이너 출신 감독 톰 포드의 두 번째 작품 <녹터널 애니멀스>. 이번엔 어떤 영화를 선보였을까? ⓒUPI 코리아



호화스러운 레스토랑에서 호화스러운 옷을 입고 홀로 앉아 있는 수잔(에이미 아담스 분), 계속해서 입을 축이고 출입구만 바라볼 뿐이다. 아마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듯, 하지만 그 누군가는 오지 않는 것 같다. 레스토랑은 점점 비고, 수잔의 눈도 점점 공허해진다. 그녀는 누구를, 왜 기다리는 것일까. 


이어지는 상상초월 비만 체형 여자들의 나체쇼, 그리고 전시. 아트디렉터인 수잔의 작품이다. 그녀는 자타공인 모든 걸 다 가진 여자, 하지만 스스로 불행하다고 생각한다. 그 연유는 무엇일까. 어느 날, 전남편 에드워드가 감수해달라고 그녀를 생각하면서 지었다는 소설 한 편을 보내온다. 제목은 <녹터널 애니멀스>, '야행성 동물'이다. 


소설은 세 가족이 텍사스로 휴가를 떠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밤새도록 달리는 차, 그들 앞을 두 개의 차가 가로막는다. 대항하는 토니, 실랑이가 시작된다. 이어지는 이야기는 돌이킬 수 없는 파국. 아무것도 아닐 수 있는 일들이 엄청난 파국을 일으킨다. 수잔은 이 폭력적이지만 슬픈 이야기를 읽으며 에드워드를, 그리고 에드워드와의 과거를 떠올린다. 그녀의 현재, 그녀와 에드워드와의 과거, 소설은 무슨 관계일까?


여러모로 완벽한 영화 


영화는 여러모로 완벽한 모습을 선보인다. 원작의 완벽한 플래쉬백을 중심으로 색감, 배경, 음악, 연기까지 완벽한다. 미장셴? 물론 완벽하다. ⓒUPI 코리아



'퀴어 영화'라는 장치로 '상실'의 무서움을 관능적인 색감으로 표현해 낸 데뷔작 <싱글맨>으로 전 세계적인 호평을 받으며 대가의 길을 걷게 된 '톰 포드'의 두 번째 장편 <녹터널 애니멀스>다. 오스틴 라이트의 1993년 작 <토니와 수잔>을 원작으로, 본래 지닌 색감의 장점에 더해 원작이 가진 자연스럽기도 하면서 지극히 상징적인 플래쉬백, 액자 구성을 완벽하게 조화시켰다. 거기에 배경과 음악과 연기까지 완벽했다. 얼마나?


영화는 세 곳의 배경을 오간다. 수잔의 현재 LA, 수잔이 회상하는 에드워드와의 과거 뉴욕, 에드워드의 소설 속 텍사스. 세 곳의 질감은 물론 색감은 완전히 다르다. LA는 겉으로는 화려하기 그지없지만 속으로는 공허하기 짝이 없는 수잔의 삶을 대변한다. 뉴욕은 에드워드와의 핑크빛 사랑의 추억이 남아 있어 눈발이 날리는 중에도 따뜻하게 보인다. 텍사스는... 수잔으로부터 에드워드가 느꼈던 치욕을 생각나게 한다. 


배경에 따라 음악과 연기 또한 그 결이 완전히 다르다. 말 없이 허공만을 응시하며 소설을 읽는 수잔은 왠지 굉장히 늙어 보이고 배경에 깔리는 음악은 우울하기 짝이 없다. 뉴욕에서의 수잔과 에드워드는 특별할 게 없다. 그저 사랑이 있을 뿐. 하지만 그것도 오래가지 않는다. 텍사스의 토니는 끔찍하고 처참한 상황을 겪었기에 세상을 다 산 느낌이다. 하지만 그는 약해빠졌다. 음악은 우울하고 날카롭고 괴롭고 허허롭다.


굴지의 디자이너 출신 감독 톰 포드의 완벽주의자적인 면모를 엿볼 수 있는 것들이다. 전작에서 보여준 미장셴은 스케일이 훨씬 커졌음에도 불구하고 그 밀도가 줄어들지 않았다. 미시적인 미장셴과 더불어 거시적인 미장셴도 선보일 수 있으니, 정녕 영화 미장셴 거장의 진정한 탄생이다. 불과 두 편만에 말이다. 


치가 떨리는 메타포, '치명적 복수'


영화 속 소설 제목이 <녹터널 애니멀스>다. 이 소설은 그 자체로 치가 떨리는 메타포이자 수잔을 향한 에드워드의 치명적 복수다. ⓒUPI 코리아



본래, 소설 속 소설이었을 영화 속 소설 <녹터널 애니멀스>는 그 자체로 완벽한 스토리와 캐릭터를 지녔다. 수잔도 읽고 빠져들었는데, 나 또한 빠져들지 않고는 못 배기는 그런 소설이다. 사실, 스토리는 별다를 게 없는데 그 분위기가 사람을 들었다놨다 하는 것 같다. 야밤에 일어난 끔찍한 사건, 날새고 밝혀진 참혹한 현장, 시간이 흐를 수록 소설 외의 것이 보이기 시작하는데 바로 소설 속 토니와 수잔과의 연관점이다. 


토니는 사실 에드워드의 분신인 바, 소설은 에드워드가 '수잔을 위해' 쓴 것이다. 정확히는 '수잔을 향해' 날리는 치명적인 복수라고 해야 할까. 이토록 치가 떨리는 메타포는 소설, 영화를 통틀어 정녕 오랜만에 느껴본다. 일찍이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서 느껴보았는데, 그보다 더한 과격함을 느꼈다. 


그렇다, 과격. 수잔이 읽게 된 소설, 수잔을 향한 복수의 칼, "네가 한 짓으로 내가 받은 상처는 이 소설의 주인공이자 나의 분신 토니가 받은 지독한 상처보다 더 한 것이었어."라고 말하는 것 같다. 그녀가 도대체 무슨 짓을 햇길래? 사랑하는 사람끼리 줄 수 있는 최악의 상처가 무엇일지?


우리가 알 수 있는, 에드워드에게 수잔이 준 상처의 수위는 높지 않다. 아마도 원작에는 자세히 나와 있을 건데, 영화에서는 극도의 편집술을 동원해 살짝씩 보여주며 그 치명적인 면모를 부각시켰다. 모든 걸 뒤로 한 채 '사랑'을 택한 그들, 하지만 수잔은 다른 것도 아닌 바로 그 '사랑'을 뒤로 한 것이다. 


사랑에 있어서는 사소한 걸로도 절망을 맛볼 수 있다


사랑은 굉장히 긍정적이다.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지 않은가. 하지만 그만큼 치명적이고 절망적일 수 있다. 사소한 걸로도 말이다. 이 영화는 그 면모를 잘 보여준다. ⓒUPI 코리아



'사랑이 전부다.' '사랑은 수단일 뿐이다.' '사랑은 아무것도 아니다.' 어떤 명제가 정답일까. '정답은 없다'는 명제가 정답일 것이다. 그렇지만 이거 하나만은 맞다. '사랑'이 없으면 삶 또한 없다고 말이다. 전부건 수단이건 아무것도 아니건, 우린 사랑을 할 수밖에 없다. 심지어 사랑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언젠가 있었을 사랑의 배신 때문에, 오지 않을 것 같은 사랑의 무관심 때문에 그리 생각할 것이다. 


사랑만큼 겉으로 표현되지 않는 감정도 드물다. 기쁘고 슬프고 즐겁고 아프고 활기차고 억울하고, 거의 모든 감정들이 누가 봐도 알만큼 겉으로 드러난다. 하지만 사랑은 모든 감정들이 얽히고설켜 있지 않은가. 무심코 냇물에 던진 돌멩이에 개구리가 큰 상처를 입거나 죽을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개구리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돌멩이를 던진 이는 알 수가 없다. 


말 한 마디, 동작 하나, 표정 하나로도 사랑하는 사람을 절망의 구렁텅이로 빠뜨릴 수 있는 것이다. 당사자는 절대 모를, 아니 당사자는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그런 종류의 것들이, 상대방에게는 치명적으로 작용하곤 한다. 수잔은 에드워드가 보내준 소설을 읽으며, 과거 그녀가 그에게 한 짓들을 되새긴다. 그전까진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카메라의 구도, 전체적인 분위기, 특유의 오프닝과 엔딩은 전작의 영향을 짙게 받았다는 걸 알게 한다. 미장셴과 스케일의 확장, 조금 더 심도 있게 짜맞춘 스토리라인 등은 그가 성장하고 있음을 알려주지만, 앞엣것들은 주의할 필요가 있겠다. 확장하고 깊숙이 들어갈 것들은 그리하고, 전작의 영향을 너무 짙게 받을 수 있을 요소들은 옅게 하는 데 집중해야 하겠다. 가히 후속작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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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


우리를 찾아온 지 어언 10여 년이 되어가는 이 영화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를 이제야 보게 되었다. ⓒ주)노바미디어



비가 장대같이 쏟아지는 날, 소년이 얼굴을 찌푸리며 숨을 몰아쉬고는 토를 하며 울고 있다. 지나가던 여자가 토사물을 치우고 소년을 토닥인 후 자신의 집으로 이끈다. 그러곤 목욕을 하게끔 한다. 집에 돌아가 진찰해보니 성홍열이란다. 몇 달을 요양하고 감사의 말을 전하기 위해 여자의 집으로 향한다. 이후에도 계속 찾아간다. 훔쳐본다. 


소년 마이클에게는 무슨 꿍꿍이속이 있는 것 같다. 눈빛이 예사롭지 않다. 여자 한나는? 어느 날 그녀는 마이클에게 일을 시키고는 목욕을 하게끔 한다. 그러고는 전라의 몸으로 그를 유혹한다. "이럴려고 온 거 아니야?" 마이클은 그럴려고 간 거였다. "당신, 정말 아름다워요." 둘은 사랑을 나눈다. 잠깐, 그들이 사랑을 나누기 전에 하는 것이 있다. 일종의 의식처럼 되었는데, '책 읽기'다. 마이클이 한나에게 책을 읽어준다. 


영화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는 오랫동안 다가가기 힘들었다. 30대 여성과 10대 남성의 성관계를 동반한 사랑이 가장 먼저 떠올랐기 때문인데, 생각해보면 참 어이없는 이유다. 다 보고 나서야 하는 얘기지만, 사랑은 정녕 모든 걸 초월할 수 있다. 사랑은 모든 걸 다 받아들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넘어야 할 장애물이 엄청난 경우가 있는데, 이 영화에서 그 장애물이라는 건 상상을 초월한다. 감당할 수 있겠는가?


'근본'은 변할 수 있는가?


나치 협력자라는 '근본', 변할 수 있을까? 그저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라는 한나의 경우는? 영화는 계속해서 생각하게 만든다. ⓒ주)노바미디어



영화는 현재인 1995년에서 마이클이 과거 1950~60년대를 회상하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한나와의 짧지만 강렬한 만남, 마이클에겐 첫경험이기에 그의 자아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수십 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아니 변할 수 없는 근본이다. 여기서 중요한 질문을 던져야 한다. 근본은 변할 수 있는가?


사무직으로 승진해 어쩔 수 없이 떠나게 된 한나, 마이클에겐 말도 하지 않고 떠나게 되어 마이클은 충격에 휩싸인다. 시간이 흘러 법대생이 된 마이클, 실습의 일환으로 나치 전범 재판을 참관한다. 그곳에 떡 하니 앉아 있는 한나, 마이클은 다시 한 번 충격에 휩싸인다. 그녀가 나치 협력자일 줄은... 하지만 충격은 계속된다. 


시종일관 계속되는 마이클의 충격, 그건 모두 한나에 의해서다. 그 이면에는 '나치'가 있다. 한나로 대변되는 나치 협력자, 즉 전쟁 세대와 마이클로 대변되는 전후 세대. 마이클 동료 중 한 명은 재판을 할 필요도 없이 그들을 총으로 쏴죽여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마이클은 한나를 사랑했던 바, 그런 식으로 그녀를 대할 수 없다. 사랑 앞에선 나치 범죄도 한낱 과거의 일일 뿐인가?


이제 답해야 한다. 근본은 변할 수 있는가? 나치 협력자라는 근본이 변할 수 있는가? 인류 최악의 범죄가 용서받을 수 있는 종류인가? 하지만 한나는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자신이 한 짓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지 못한 채, 그저 시키는 대로 충실하게 시행했을 뿐... 악마인가, 충실한 일꾼인가, 의도된 연출인가, 한나 아렌트가 주창한 '악의 평범성'을 대변하는 인물인가. 답이 아직 나오지 않았다. 


끊임없이 생각해야 한다, '죄'에 대해서


우린 계속 생각해야 한다. '죄'에 대해서 말이다. 영화에서는 나치의 죄다. 힘겹지만 후세가 지니고 가야 할 숙명. ⓒ주)노바미디어



인류 역사상 수많은 전쟁이 있었다. 수많은 인종학살, 즉 인종대청소도 있었다. 우리가 알지 못할 뿐이다. 나치는 전쟁을 일으켜 수많은 이들을 죽음으로 내몰았고, 역사상 가장 잔인한 인종학살을 일으켰다. 독일인이 가장 월등한 민족이고 유대인이야말로 없어져야 할 민족이라는 명목 하에. 


여기서 '많은 인종학살이 있었는데, 왜 나치만 갖고 그래?'라고 생각할 수 있겠다. 나아가 '수많은 악마 같은 이들도 떵떵거리며 살아가는데, 왜 한나만 갖고 그래?'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그건 그들의 죄를 단 1%도 다시 생각하게 하지 않는다. '죄'는 각각의 고유성을 지니고 있어 다른 어떤 '죄'와도 한통속으로 묶을 수 없는 것이다. 각각의 '죄'는 각각 처벌 받아야 한다. 


영화가 던지는 질문이 이것과 일맥상통하진 않는다. 다만, '죄'를 생각할 때, 나치 전범이라는 사상 최악의 죄를 생각할 때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사항이다. 그렇지만 마이클의 동료가 말했듯이, 나치를 모조리 악마로 묘사하며 지상에서 없애버려 독일의 어두웠던 과거를 청산해버리는 것이 옳은 것인지 생각해봐야 한다. '죄'에 대한 심판도 거치지 않고 말이다. 심적으론 100% 동의한다. 모조리 죽여버리고 싶다. 


하지만 전후 세대는 야만과 비이성의 시대를 딛고 이성의 시대를 열어 과거 청산에 기치를 내걸었다. 그 와중에 다시 야만과 비이성이 들고 일어선다면, 그들과 우리를 구분짓는 결과를 초래할 수밖에 없게 된다. 역사상 그런 경우가 많았다. 하나 같이 안타까운 일만 초래했을 뿐이다. 제대로 된 심판이 필요한 바, 하지만 한나 같은 경우는 심히 어렵고 괴로울 수 있겠다. 끊임없이 생각해봐야 한다. 그것이 후세가 지니고 가야 할 필연적 숙제이자 사명이다. 


'사랑'과 '죄'의 메시지를 기가 막히게 조화시키다


영화는 '죄'에 대한 무거운 통찰과 함께 '사랑'을 얘기한다. '사랑은 모든 걸 초월한다'는 명제가 이를 관통한다. 과연 어떨까? ⓒ주)노바미디어


영화는 파릇파릇 즐거운 짧은 사랑이 지나고, 형용할 수 없는 아이러니와 무너짐의 시련을 지나, 기다림과 참회와 진정한 사랑의 깨달음으로 이어진다. 지극한 사랑이야기, 그것이 이 영화의 실체라면 실체다. 그 이면에 도사리고 있는 '나치'라는 존재가 워낙 강하기에 그곳으로 시선이 쏠릴 수밖에 없다. 그리고 영화를 관통하는 한나의 속사정, 그건 '책 읽기'와 관련이 있다. 


사랑이 받아들일 수 있는 건 어디까지인가. 인류 최악의 범죄보다 더 숨기고 싶은 사실은 무엇인가. 나치 협력이라는 근본은 절대불변의 악마적 소행인가. 내가 마이클이라면, 내가 한나라면? 내가 전쟁 세대라면, 내가 전후 세대라면? 심판하고 심판받고, 용서하고 용서받고, 책임을 나누고 책임을 받아들이고. 너무 받아들이기 힘들고 싫은 것들 뿐이지만 그러지 않을 수 없다. 영화는 수많은 질문을 던지고 수많은 생각을 하게끔 한다. 하나 같이 머리 아픈 것들. 그렇지만 반드시 필요한 것들. 


정면으로 받아들이는 게 답이 아닐까. 이실직고 용서를 구하고, 깨끗하게 심판하고 받아들이고, '나'의 책임은 아니지만 '우리'의 책임으로 인지하고 책임을 나누고, 후대에게 이 모든 걸 거짓 없이 전달하고. 영화는 사랑이야기라는 실체와 더불어 또 다른 실체인 '역사 의식'을 일깨운다. 그래서 다큐멘터리적으로 각이 지지 않고 유려하고 아름답기 그지 없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란 없다'라는 말과 '사랑은 모든 걸 초월한다'라는 말을, 둘이 맞붙을 때 상충되지 않을 수 없는 메시지들을, 그야말로 기가 막히게 조화시켜 놓는다. 한나가 자신의 치욕적 비밀과 최악의 범죄 사이에서 고민하고, 마이클이 법과 사랑 사이에서 고민한 결과였다. 마이클은 진정 한나를 사랑했고, 한나는 치욕적 비밀을 지킨 끝에 죗값을 받았다. 지극한 사랑, 비밀의 사랑적 승화, 합당한듯 합당하지 않은듯한 죗값. '죄'에 대해선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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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리뷰] <컨택트>


그 명성은 오래전부터 익히 들어왔던 대작 <컨택트>. 제목이 바뀐 건 조금 이해가 안 가지만, 감독이 '드니 빌뇌브'이니 아무렴 어떠랴. 믿고 보면 된다. ⓒUPI코리아



비극적으로 끝날 것만 같은 OST와 평화로워 보이는 장면들의 부조화가 간담을 서늘하게 한다. 무슨 일이 일어날 듯한, 인생을 송두리째 바꿀 듯한, 그런 분위기. 아니나 다를까. 어느 날 갑자기 전 세계적으로 나타난 의문의 물체, 친숙한 UFO라고 하기엔 뭔가 이질적인, 12개의 그것은 '쉘'이라 불린다. 알 수 없는 신호를 보내고, 18시간마다 문이 열린다. 그때 비로소 그들과 접촉할 수 있다. 


언어학자 루이스 박사(에이미 아담스 분)는 정부에서 파견된 콜로넬 대령(포레스트 휘태커 분)과 함께 쉘에 근접해 있는 기지로 간다. 이론물리학자 이안 박사(제레미 레너 분)도 합류한다. 도대체 그들은 누구인지, 원하는 게 무엇인지, 어디서 왔는지 등을 언어학적으로, 과학적으로 풀어내는 게 이들의 임무다. 그렇지 않으면 전지구적인 전쟁이 시작될 것이었다. 


영화 <컨택트>는 보다시피 SF영화이다. 그렇지만 그건 수단, 목적은 굳이 말하자면 인문에 가깝다. <그래비티> <마션> <인터스텔라>로 이어진 일련의 '지적 SF' 계보를 따르면서, 한 발 더 나아가 인문적인 깨달음까지 선사한다. 거기엔 소통, 시간, 사랑의 키워드가 존재한다. 어디에서도 접하기 힘든 SF영화, 아니 영화임이 분명하다. 


그렇다고 SF적 요소, 즉 비쥬얼에 신경을 쓰지 않았냐 하면 전혀 그렇지 않다. 이 영화도 앞엣것들이 보여준 신기원적인 비쥬얼에 버금가는 비쥬얼을 선보인다. 상대적으로 가려졌을 뿐이다. 그 중 압권은 단연 '쉘', 그리고 '소통'의 장면들. 지극히 압도하는 장엄한 비쥬얼을 목도할 준비가 되었는지?


'소통', 해낼 수 있겠는가?


외계인의 출현, 분명 SF 영역에 속하는 영화. 하지만 그 자체가 목적은 전혀 아니다. 영화는 다른 걸 말하고자 한다. 가장 중요한 키워드는 '소통'. ⓒUPI코리아



외계인인지 새로운 인류인지도 불분명한 상황, 그들이 누구인지 무엇 때문에 나타난 것인지 알기 위해선 우선 대화가 통해야 한다. 루이스는 우선 자신이 누구인지 밝힌다. '루이스', 이름부터 밝히는 게 순서. 그녀는 단순한 번역자가 아닌듯, 언어가 가지는 가치와 의미를 잘 알고 있다. 


그렇지만 말이 통해야 뭐라도 하지 않겠는가. 급기야 그녀는 자신을 내놓는다. 혹시 모를 바이러스에 대비해 꼼꼼하게도 차려 입은(?) 팀원들의 경고와 만류를 뒤로 하고 맨몸으로 다가서는 것이다. 언어란 말만으로 구성되어 있지 않다는 걸 몸소 보여준다. 마음, 행동, 눈빛, 분위기도 언어인 거다. 


이질적인 무엇이 눈 앞에 있을 때 우리가 하는 행동은 '적으로 상정하기', '눈살 찌푸리기', '두려움에 떨기', '눈 돌리기', '멀찌감치 떨어지기'. 즉, 너와는 대화는커녕 눈도 마주치기 싫다는 뜻이다. 당연히 상대방도 나를 똑같이 대할 것이다. 그 순간 벽이 생기고 그 벽은 깨지지 않는다. 


우리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아는 것과 실천하는 건 완전히 다르다. 실천해야만 하는 100가지 중에 한 가지만 실천해도 세상은 많이 바뀌겠지만, 그 한 가지도 실천하기 쉽지 않다. 루이스는 그 한 가지를 실천한 것뿐. 그 한 가지 한 가지가 모두 '위대한 능력'이다. '소통', 해낼 수 있겠는가?


정해진 불행, '사랑'으로 나아간다


'소통'과 더불어 이 영화의 또 다른 중요 키워드는 '사랑'이다. 단순한 사랑이 아닌, 엄청난 불행을 그것도 정해진 불행을 뚫고 나가는 그런 사랑. ⓒUPI코리아



영화는 루이스와 딸아이의 장면 장면으로 시작된다. 아이가 세상에 처음 나왔을 때, 사랑스러운 모습으로 커갔을 때, 사춘기를 오롯이 보냈을 때, 그리고... 사랑스러운 아이와의 마지막. 이 장면들은 과거인가, 현재인가, 미래인가. 


이질적인 존재와의 대화 도중 떠오르는 장면들, 다름 아닌 아이의 모습이다. 그런데, 적어도 현재 그녀는 아이가 없는 것 같다. 그렇다고 남편이 있는 것 같지도 않다. 그런 걸 보여줄 겨를도 없이 바로 현장에 투입되었으니 알 도리가 없다. 적어도 현재는 아닌 바, 왠지 미래의 모습인 것 같다. 


과거의 모습이 회상되는 거라면 별다른 특별할 게 없다. 반면, 미래의 모습이라고 한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다름 아닌 아이가 죽음을 맞이할 게 아닌가. 그녀는 그 사실을 알고 있지 않은가. 그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그런 삶을 택하게 될 게 아닌가. 이보다 더 가혹한 게 무얼까. 


그녀가 미래를 볼 수 있다면 영웅이 될 순 있겠다. 전 지구를 구할 순 있겠다. 다만, 그 끝엔 정해진 미래가 있다. 예정된 불행으로의 미래가 말이다. 그래도 그녀는 그 길을 갈 것이다. 다름 아닌 '사랑'이 있으니까. 후회없이 사랑할 자신이 있으니까. 사랑을 한다면 여한이 없으니까. 도망치는 건 의미가 없으니까. 


영역의 고전이 될 영화


결단코 이 영화는 최소 일정 영역의 고전이 될 것이다. 인류보편적 키워드들을 이와 같이 풀어낸 영화는 일찍이 없었다. 무엇보다 감독의 차기작이 기대된다. ⓒUPI코리아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이런 영화는 처음 봤다. 최근 SF 영화를 선도한 '지적 SF'도 하찮게 보일 정도다. 기존 SF의 수준을 몇 단계 높였다거나 SF의 새로운 경지를 열었다는 경지가 아니다. 아예 새로운 영화를 만들어냈다. 새로운 SF 영화가 아니라.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나 <블레이드 러너>처럼 영역의 고전이 될 게 분명하다. 


고전이 되기 위해선 장르를 벗어던지고서도 통할 수 있는 줄기가 있어야 한다. 장르를 발판삼거나 또는 장르를 목적으로 삼는다면 기껏 해당 장르의 고전이 될 것이다. 반면, 장르를 수단으로 삼아 장르가 주는 재미를 한껏 취하면서도 진정 하고자 하는 얘기를 잘 풀어낸다면 만인의 고전이 될 수 있다. <컨택트>는 그런 여지가 있다. 


소통, 시간, 사랑 등은 지극히 인류보편적인 키워드들이다. 그만큼 풀어내기 쉽지만, 충족시키기는 불가능에 가깝다. 이 영화는 그 불가능을 장르의 힘을 빌어 해결한 것이다. 드니 빌뇌브 감독이 선택했던 건 주로 드라마였는데, 점차 외연을 넓혀 스릴러, 미스터리, 그리고 SF까지 왔다. 


차기작은 그 유명한 <블레이드 러너>의 속편인 <블레이드 러너 2049>. 올해 개봉할 예정이다. 아마도 그의 절정 작품일 듯한대, 과연 어떤 작품을 선사할지 지극히 기대된다. <컨택트>로 확인한 수준 정도라도 가히 또 하나의 인생작일 것 같다. 우린 또 한 명의 거장 탄생을 목격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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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여교사>


궁금하게 만드는 매력이 있는 영화다. 과연 그 기대에 부응할지는 모르겠지만, <거인>의 김태용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다는 점도 큰 매력으로 다가온다. ⓒCJ E&M Pictures



1987년생, 이제 갓 서른 살이 된 젊은 감독 김태용은 지난 2014년 장편데뷔작 <거인>을 내놓았다. 수많은 영화제에서 신인감독상 후보에 올랐고, 청룡영화상과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에서 수상했다. 이 독립영화는 2만 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하며 흥행에서도 좋은 반응을 이끌어 냈다. 흥행과 비평에서 성공하며 차기작을 기대케 했다. 


가슴 먹먹하게 하는 데 일가견이 있는 김태용 감독, 2년 여만에, 햇수로는 3년 만에 김하늘과 함께 돌아 왔다. 제대로 들여다보기 전에는 <만추>의 김태용 감독이겠거니 생각했는데, 스타일 상 이런 류의 영화를 연출할 것 같진 않았기에 다시 보게 되었다. 더군다나 그는 장편상업영화를 연출할 때 각본도 쓰지 않는가. 


연출과 각본을 함께 하는 건 젊은 김태용 감독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더욱 기대되었던 바, 영화 <여교사>다. 영어 원제를 들여다볼 필요가 있는데, 'misbehavior' 즉 '부정 행위' '불량 행동'이라는 뜻이다. 추측컨대, 여교사가 학교에서 행하는 부정 행위 또는 불량 행동이 영화의 주된 내용이지 않을까. 일단 여기까지는 나쁘지 않아 보인다. 


두 여교사와 한 남학생의 '부정 행위'


영어 원제가 '부정 행위'를 뜻하는 'misbehavior'인데, 과연 여교사의 부정 행위는 무엇일까. 그게 무엇인지는 영화 초반에 드러난다. 궁금증은 그렇게 풀리고 이야기는 완전히 다른 곳으로 향한다. ⓒCJ E&M Pictures



계약직 교사 효주(김하늘 분)는 박봉에 야근은 둘째 치고 불안한 현재와 미래가 걱정이다. 어떻게든 정직원 교사가 되어야 하는 상황, 그래도 다음 정직원 발령이 그녀 차례이기에 나쁘지 않다. 와중에 이사장 딸 혜영(유인영 분)이 갑자기 나타나 하루 아침에 정직원 자리를 꿰찬다. 효주로서는 황당하기 그지 없는 낙하산 발령. 그런데 혜영이 해맑은 웃음을 앞세우고 자신이 대학 후배라며 효주에게 들이대는 게 아닌가. 기억에도 없을 뿐더러 그녀의 존재 자체가 싫은 효주는 과하다 싶게 매몰차게 대한다. 


한편 효주는 임시로 맡게 된 학급의 재하(이원근 분)라는 발레특기생을 찾아 간다. 처음엔 뭘 하는 애일까 궁금해서, 두 번째는 연습 잘 하고 있나 궁금해서, 세 번째는 알 수 없는 두근거림으로. 두 번째 방문에서 재하는 술에 취해 효주에게 키스했고, 세 번째 방문에서 효주는 재하와 혜영이 육체적 관계를 맺고 있는 장면을 목격한다. 


효주는 다음 날 당장 혜영을 불러 목격한 장면을 폭로하고는 교사답게 처신하라고 협박한다. 그러고 재하에게는 체육관 대신 학원을 선사한다. 그 이면에는 그녀 만의 꿍꿍이속이 있는 것 같다. 다름 아닌, 혜영에게 말한 '교사답게 처신해라'를 정면으로 위반하는 행위. 과연 이 여교사 둘과 학생 하나 사이에는 어떤 일이 일어날까. 


<거인>에 이어 이 작품에서도 우린 가슴 먹먹함을 일부 느낄 수 있다. 다만, 그를 훨씬 뛰어넘는 '기분 나쁨'을 느끼게 될 것인데, 이는 명백한 감독의 '착오'가 아니었다 생각해본다. '기분 나쁨'에만 천착해 그것이 마치 '수작'의 좋은 방편인 양 생각한 것 같다. 그렇지만 대놓고 드러내면 수작이 될 수 없다. 자연스레 드러나 관객들이 알아차리게 만드는 게 진짜 어려운 일이고 또 더욱 괜찮은 방법이다. 


파격 사랑 이야기 또는 치밀한 권력 암투기


완전히 다른 곳으로 향한 이야기, 파격적인 사랑 이야기다. 하지만 분명 감독은 그 이면에 인간 본성의 치밀한 무엇을 상정해놓은 것 같은데... 알아차리기 쉽지 않다. ⓒCJ E&M Pictures



영화의 극초반, 정직원이 되려는 계약직 앞에 나타난 이사장 딸을 봤을 때는 치밀한 권력 암투와 잔인한 살인 방조가 판을 치는 장면들을 예상했다. 그렇지만 채 10분도 안 되어 이사장 딸과 학생의 관계가 있고 나선 완전히 다른 이야기가 펼쳐진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이 영화는 '사랑' 이야기이다. 그 앞에 붙는 단어는 '파격'.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다. 더 좋은 건 이것 또는 저것을 드러내놓고 말하면서 그 이면에는 저것 또는 이것을 숨겨놓는 것. 감독은 분명 이를 의도한 것이겠다. 파격적인 사랑 이야기 또는 인간 본성에 투철한 권력 암투기. 그런데 영화를 보고는 감독의 의도를 잘 알아차리지 못할 것이다. 아마 숨겨놓은 걸 알아차리지 못할 텐데, 굳이 알아차리지 못해도 하등 상관없는 수준이다. 


이는 '능력 미숙'이라기 보다는 '방향 설정 미스'라고 보는 게 맞다. 이번 영화에서 감독은 그 명성에 걸맞은 '전술'을 선보인 반면, '전략'에선 실망을 안겼다. 효주와 혜영의 대비되는 옷차림과 표정, 효주의 옷차림 변화, 효주와 혜영과 재하의 대면 장면에서의 구도 등이 보여주는 미장셴은 상당한 수준이었다.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상징적으로 잘 표현해냈다. 


수많은 전투에서 승리해도 전쟁에서 승리하라는 보장은 없다. 전투에만 승리하면 되는 때는 그 옛날 중국의 춘추시대 이전이다. 제대로 나라가 형성된 이후에는, 나라 대 나라로 벌어지는 전쟁에서 이겨야 하는 것이다. 영화 또한 마찬가지다. 몇몇 장면과 캐릭터가 대단하다고 한들 명작이 될 수 없다.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시나리오와 의도와 메시지가 튼튼해야 한다. <여교사>는 줄기가 튼튼하지 못한 상태에서 여기저기 잎사귀에 많은 에너지를 투입하려 했다. 


명작과 망작 사이에


'한 끗 차이', 명작과 망작의 사이에 위치한 이 영화 <여교사>. 시나리오에 신경을 썻을 게 분명하지만, 영화는 시나리오가 아닌 다른 곳에 중점을 둔 듯 보인다. 패착이다. ⓒCJ E&M Pictures



영화는 참 애매모호하다. 명작과 망작은 한 끗 차이라고 하는데, 이 영화에 해당하는 말인 듯하다. 시나리오와 분위기는 더할 나위 없는데 반해, 편집과 연기가 점수를 다 깎아먹었다. 요즘 영화치곤 러닝타임이 짧은 편인데, 편집을 과도하게 한 결과이겠다. 편집은 반드시 필요하지만, 과하면 논리적 전개에 치명상을 입힐 수 있다. 


이 영화는 시나리오에 가장 많은 신경을 썼을 게 분명한 바, 캐릭터들의 감정선 하나하나가 예민하게 반응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선 최소한 영화에서 보여진 것보단 조금 더 많은 설명이 필요했다. 반면 영화는 감정선을 극의 흐름이 아닌 분위기, 구도, 옷차림 등으로 표현하려 했다. 그게 패착이 되지 않았나 싶다. 


이는 연기에서도 다를 바가 없다. 캐릭터보다 그밖의 다른 것들에 더 많은 신경을 쓴 것 같다. 문제는, 그렇다고 미장셴이 전에 없이 훌륭하다는 생각이 들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결국 각본까지 담당한 감독은 시나리오에 가장 중점을 둘 것이 분명하기에. 배우들의 연기도 눈에 띄지 않았지만, 연기를 끌어내는 감독의 의도가 불분명했던 게 더 문제였다고 생각한다. 


한마디로 이도 저도 아닌 연출 의도가 영화를 다른 의미로 치명적이게 만든 것 같다. 충분히 치명적이게 매력적인 영화로 만들 수 있었을 것인데, 치명적이게 기분 나쁘기만 한 영화가 되고 말았다. <거인>으로 받은 기대가 상당히 꺾여 안타깝다. 그럼에도 여전히 기대하는 감독임은 분명하다. 나이와 경력이 아직은 단출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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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렛 미 인>


하찮게 소모되던 뱀파이어, 와중에 뱀파이어 영화의 신세계를 연 작품이 <렛 미 인>이다. 토마스 알프레드슨 감독의 최고 데뷔작. ⓒ씨네그루 다우기술



1994년 <뱀파이어와의 인터뷰>의 대성공 이후 다양하게 재생산된 뱀파이어. <블레이드> <언더월드> <트와일라잇> 시리즈로 대변되는 액션 판타지의 주인공이 되어 참 많이도 고생했다. 그 중심에는 항상 영원한 삶과 가공할 만한 힘이 있었다. 찬란하게 시작된 현대판 뱀파이어물은 그렇게 하찮게 소모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와중에 뱀파이어 영화의 신세계를 연 작품이 있다. 북유럽에서 건너 온 잔혹하고 몽환적인 사랑과 성장 이야기.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로 격조 높은 스파이 이야기를 선보였던 토마스 알프레드슨 감독의 2008년 작 <렛 미 인>이다. 이 영화는 자그마치 그의 장편 영화 데뷔작이다. 데뷔와 동시에 최고의 감독으로 칭송받는다. 


스웨덴 출신의 감독이, 스웨덴을 배경으로, 정녕 스웨덴스럽게 연출해 낸 <렛 미 인>. 우리가 생각하는 북유럽 스웨덴 그 자체에, 그동안의 액션 판타지 마사지 때문에 우리가 생각하기 어려운 풍의 뱀파이어 이야기를 완벽히 입혔다. 하얀 설국과 빨간 피의 대비는 잊지 못할 최고의 조화다. 그 자체로 하나의 완벽한 미장셴. 영화를 그 미장셴으로만 보아도, 그 미장셴으로만 기억해도 충분할 정도이다. 


그 미장셴은 장면으로만 남지 않는 바, 영화를 관통하는 상징과 메시지 중 하나를 말하는 매개체이다. 하얀색은 무엇이고, 빨간색은 무엇일까. 아무래도 영화의 두 주인공인 인간 오스칼과 뱀파이어 이엘리를 상징할 텐데, 감독은 그들에게서 어떤 이야기를 끄집어냈을까. 우린 그 이야기에서 세상의 어떤 모습을 반추할 수 있을까. 


괴롭힘을 당하는 아이, 그에게 접근하는 뱀파이어


'돼지'라 불리며 괴롭힘을 당하는 12살 오스칼, 그에게 접근하는 12살 모습의 뱀파이어 이엘리. 그들은 어떤 모습을 보여줄까. ⓒ씨네그루 다우기술



12살 오스칼은 학교에서 '돼지'라고 불리며 괴롭힘을 당한다. 그는 집에 와서는 칼로 집 앞 나무에 해코지하며 자신을 괴롭히는 일당을 죽이는 꿈을 꾼다. 오스칼은 엄마와 단 둘이 사는데, 동성애자 아빠를 더 좋아한다. 그는 참으로 힘도 없고 의욕도 없는 무기력한 아이다. 그의 금발과 새하얀 피부가 잘 어울린다.


한편 12살 이엘리는 아버지처럼 보이는 이의 보살핌으로 살아간다. 그 보살핌이란 다름 아닌 어린 아이를 죽여 뽑아낸 피를 먹이는 것. 그녀가 뱀파이어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직접 사냥에 나서면 위험하기 때문에 누군가 대신해줄 필요가 있는 것 같은데, 그렇다면 아버지처럼 보이는 이는 뱀파이어가 아니라는 얘기. 그는 인간인 듯 보인다. 아버지는 아닌 것 같다. 그들은 어떤 관계일까? 


우연히 만난 오스칼과 이엘리, 하필이면 오스칼이 칼을 들고 나무를 해코지할 때다. 그 모습을 보고 이에리가 한 생각은, '이제부터 이 아이가 나를 먹여 살릴 것이다'. 반면 오스칼은 이엘리를 좋아하게 된다. 아버지처럼 보이는 이는 이엘리를 12세 때 만나 수십 년 동안 사랑하며 함께 해왔던 것. 오스칼이 그를 대신할 재목이다. 


이보다 아름답고 숭고한 사랑이 어디 있을까


영화는 두 주인공인 오스칼도 이엘리도 아닌 이엘리를 수십 년 동안 사랑해왔던 한 남자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렛 미 인(Let me in)', 들어가게 해줘. 이엘리의 사랑 방식이자, 이엘리를 사랑하는 방식이다.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사람을 죽여야 하는 그녀의 입장이 되어, 대신 사람을 죽여 피를 가져오는 극단적 사랑. 


이 기괴하고 잔혹한 사랑은 언젠가 반드시 파멸로 끝맺음을 낼 것이다. 이엘리의 전 사람도 그럴 것이고, 오스칼도 그러지 않을까. 그렇지만 '아름답다'고 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이보다 더 '숭고'한 사랑이 어디 있을까.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사랑한다는 건 이런 게 아닐까. 


그는 단순히 그 자신으로서 사람을 죽여 피를 가져오는 게 아니다. 그가 아닌 다른 이가 되어, 즉 이엘리가 되어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사람을 죽여 피를 가져오는 것이다. 모든 것에 앞서 자신을 버린 '희생'으로서의 사랑이다. 사랑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 중 가장 높은 경지의, 가장 하기 힘든, 비인간적이기까지 한 사랑의 방식이 희생 아닌가. 아마 그의 마지막은 이엘리에게 자신을 바치는 것이리라. 


약한 이의 본능을 깨우는, 다른 사랑 방식


숭고하고 아름다운 희생으로의 사랑과는 다르게, 오스칼과 이엘리의 사랑은 뭔가 다르다. 오스칼의 본능을 이용한 '계약' 같다고 할까. ⓒ씨네그루 다우기술



오스칼과 이엘리, 이엘리와 오스칼. 그들은 곧 사귄다. 하지만 오스칼이 이엘리의 정체를 알아차린다. 이엘리를 멀리 하는 오스칼, 상처 받는 이엘리. 뱀파이어다운 극단적 행동으로 오스칼의 본능을 자극해 더욱 가까워지는 그들. 이엘리는 이때다 싶어, 예의 그 '렛 미 인'을 시도한다. 교감을 마친 그들, 그들은 곧 하나다. 


이엘리와 이엘리의 전 남자의 렛 미 인 교감이 오랜 시간의 '사랑'이라면, 이엘리와 오스칼의 교감은 사랑 이전에 오스칼의 본능을 깨우는 것으로 시작된다. 무기력하기 짝이 없지만 반대급부로 살인의 욕망이 엄청난 오스칼의 본능을 이엘리가 교감을 통해 이끌어 낸 것이다. 난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사람을 죽여, 너에겐 그들을 죽이고 싶은 마음이 있지, 나를 대신해 그들을 죽이면 되겠네. 


여기서 하얀색과 빨간색의 극명하고 아름다운 대비가 떠오른다. 아무것도 없는 흰색의 오스칼에게 욕망으로 가득 찬 빨간색의 이엘리가 들어온 것이다. 어느 날 그를 괴롭히는 패거리의 수장을 다짜고짜 막대기로 때려 고막을 파열시키는 오스칼, 그러고 나서 히죽히죽 웃는 그의 모습에서 미래가 보인다. 이엘리를 위해서인지 자신의 본능에 의해서인지 둘 다인지 알 수 없는 걸로 사람을 죽여 피를 뽑아 이엘리를 먹여 살리는 그의 모습을. 


'사랑'이라 할 수 있을까. 아니, 일종의 '계약'처럼 보인다. 내 안에 있는 거대한 욕망 덩어리를 끄집어내게 해주면서 양심의 가책도 줄여주는 대신, 너를 내 평생 책임지고 먹여 살리겠다. 누군가는 '결혼'을 그런 식으로 생각할지 모르겠다. 그 또한 사랑의 또 다른 모습일까. 무조건 아니라고 할 수 없는, 한 번쯤 생각하게 한다. 그건 내가 이상한 걸까, 이 세상이 그렇게 만든 걸까, 자연스러운 걸까. 


'성장'하는 오스칼과 '소수·소외'의 상징 이엘리 


영화에서 오스칼은 '성장'한다. 본능을 깨우고 세상을 알아간다. 이엘리는 성장과 거리가 멀다. 그녀는 겉모습과는 달리 이미 늙을 대로 늙은듯. 다만, 그녀는 세상과 절대 어울릴 수 없는 '소수 소외'의 상징이다. ⓒ씨네그루 다우기술


이엘리는 겉모습은 12살이지만 이미 엄청나게 오래 살았다. 그녀에게 '성장'이란 단어는 어울리지 않는다. 반면, 오스칼에게 '성장'은 당면한 현실이자 반드시라고 할 만큼 치러야 할 대상이다. 그는 이엘리를 만나 단번에 너무도 큰 성장을 한 것 같다. '힘'이자 '권력'의 달콤함, 양육강식의 세계를 알아버린 것. 


남에게 괴롭힘을 당하며 아래에서 굽신굽신대다가 한순간에 남 위에 군림하는 그 희열을 안 것이다. 누구는 평생 가도 하지 못하는 걸 그는 어릴 때 한순간에 알아버렸다. 그가 한없이 가여워지는 순간이다. 


한편, 영화를 보는 내내 이엘리가 가엽고 불쌍했다. 어불성설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그녀는 정녕 이 시대 '소수·소외 계층'의 상징과도 같지 않은가. 이 세상에 자신을 알아줄 이 하나 없고, 자신에게 관심을 가져주는 이 하나 없다. 또한 다른 누구의 도움 없이는 먹고 살아가기 힘든 '취약 계층'의 상징과도 같다. 자신이 직접 먹고 살아가기엔 이 세상이 너무 위험(?)하다. 


그 이유는 그녀가 다르기 때문. 그녀는 단지(?) '사람의 피'를 원하는 것 뿐이다. 다른 무엇도 바라지 않는다. 그녀는 피를 마시지 않으면 죽지도 못한 채 영원히 고통 속에서 살아갈 것이다. 하지만 과연 세상이 용인할까? 물론 그 '다름'의 성질이 너무도 괴이쩍긴 하지만, 용인하지 '못하는' 게 아니라 '안하는' 것만은 확실하다. 


만약 신인류가 나타났다고 치자. 그것이 세상을 파멸로 이끌 수도 있는 능력을 가졌다고 치자. 물론 그건 능력의 유무이고 반드시 한다는 게 아니다. 뱀파이어가 사람을 죽일 능력을 가진 것과, 살기 위해 사람을 죽여 피를 마시는 것과는 별개인 것처럼 말이다. 우린 어떻게 할까? 세상은? 아마 무슨 짓을 써서라도 없애버리고자 할 것이다. 그것이 우리와 다른 이질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고 그렇게 조화로운 세상으로 나아가는 건 꿈에서나 가능한 말일까. 너무도 당연하고, 식상하지만 이렇게 또다시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계속 말해도 세상은 바뀌지 않으니까. 세상이 바뀔 때까지 말하고 또 말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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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genv

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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