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코코>


<코코> 포스터.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픽사, 디즈니, 혹은 픽사&디즈니는 거의 매해 우리를 찾아와 거의 실망을 안기지 않았다. 세상이 점점 디지털화 되어가는 만큼 최첨단 디지털 기술로 나날이 완벽해가는 애니메이션을 선보이는 동시에, 살아가는 데 기본 중에 기본이 되는 지극한 아날로그적 가치를 선보인다. 그 조화는 가히 환상적이다. 


픽사&디즈니의 애니메이션이 아이들보다 어른들에게 더 와닿는 연유가 역설적으로 거기에 있다 하겠다. 조금이라도 더 어른일수록 조금이라도 더 아날로그적인 습성이 남아 있지 않겠는가. 그걸 접해본 사람이라면 그리워하지 않을 수 없고 말이다. 영화 <코코>의 기본은 '가족' '사랑' '우정' '화해' '기억' 등의 가치이다. 


<코코>는 멕시코라는 이질적이라면 이질적이고 친숙하다면 친숙한 곳의 '죽은 자의 날'이라는 멕시코 전통 명절을 배경으로, 현실과 비현실이 만나고 삶과 죽음이 모이며 흩어진 가족과 멀어진 사랑이 다시 만난다. 그 가장 중요한 키를 '코코'가 지니고 있지만, 그 사이사이를 이어주는 이들은 따로 있다. 


죽은 자의 날, 미구엘의 모험 아닌 모험


죽은 자의 날, 미구엘의 모험 아닌 모험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아빠가 음악가인 한 가족이 있었다. 그들은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즐거운 나날을 보냈다. 하지만 아빠는 꿈을 이루기 위해 가족을 뒤로 하고는 떠나버린다. 홀로 남은 엄마는 살기 위해 신발을 만든다. 그녀는 신발 만드는 법을 온가족에게 퍼뜨리고 집안 자체가 신발 만드는 기업이 된다. 여기 그 아빠와 엄마를 고조할아버지와 고조할머니로 둔 미구엘이 있다. 하지만 그는 음악을 좋아라 한다...


미구엘의 고조할아버지 때문에 멕시코에서 유일하다시피 음악을 멀리하게 된 미구엘의 집안, 그럼에도 그는 멕시코 최고의 음악가 에르네스토 델라 크루즈의 '기회를 잡아라'라는 말을 듣고는 꼭 음악가 광장에서 연주를 하려고 한다. 할머니가 부셔버린 기타 대신 그가 택한 기타는 델라 크루즈 납골당에 전시해놓은 기타. 


하필 그 날은 '죽은 자의 날', 미구엘은 그 기타를 훔쳐 한번 튕기는 순간, 죽은 자의 세계로 가버리고 만다. 미구엘은 다시 산 사람의 세계로 돌아가고자 하는데, 이멜다 고조할머니는 음악을 절대 하지 않는다는 조건 하에 그의 저주를 풀어주고자 한다. 하지만 미구엘은 그런 조건이라면 사절! 우연한 기회에 자신의 고조할아버지라고 믿게된 델라 크루즈에게 축복을 받고자 길을 떠난다. 


기억, 사랑, 통섭...


기억, 사랑, 통섭...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죽은 자의 날'은 스페인의 침략 이전부터 이어져 내려온 멕시코의 전통 명절이다. 해골과 뼈 모양의 조형물이나 사탕을 만들고, 죽은 사람의 사진과 이름을 제단에 올리고는, 여러 종류의 축제를 연다. 이승과 저승이 이때만큼은 한 곳에 모여 어울리는 것이다. 영화에서도 굉장히 중요하게 비치는 바, 제단에 사진과 이름이 올라가 있지 않으면 저승에 있는 이가 이승으로 갈 수 없다. '기억'의 소중함...


멕시코에서 음악은 곧 삶이다. 멕시코인들은 비록 고단한 삶이지만 와중에 '사랑'을 최고의 가치로 치며 스페인 등의 풍습과 문화가 혼합된 특유의 낭만과 열정이 이를 뒷받침한다. 음악은 사랑을 표현하기 위한 최고의 수단인 것이다. 한편 잘 드러내려고 하진 않지만 이면에 항상 있는 슬픔 또한 음악만큼 잘 표현해낼 수 있는 수단이 없다. 미구엘의 가족이 음악으로 흩어졌다지만 반드시 음악으로 다시 뭉칠 수밖에 없을 거다. 


<코코>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가치는 픽사&디즈니가 추구하는 가치와 일맥상통하는 '통섭'이 아닐까 한다. 서로 소통하고, 전체 또는 부분들을 하나로 잇는 것 말이다. 미구엘과 그의 강아지 친구 단테는 참으로 꼬이고 꼬여 대대로 끊어져버린 태초의 끈을, 음악이라는 그 끈을 다름 아닌 음악으로 잇고자 한다. 그 와중에 가족이 있고 사랑이 있고 화해가 있고 기억이 있다. 그 작업은 쉽지 않지만 반드시 해내고 말 것이다. 


삶과 죽음이 하나되는 시간


삶과 죽음이 하나되는 시간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아쉬운 부분도 없지 않아 있다. 가족이라는 명제를 다시 생각해야 하는 시대에 전통적이기 짝이 없는 케케묵은 가족 개념을 선보이고 있다는 점, 살아생전 얼마나 잘 살았냐에 따라 죽어서도 계급이 나뉘어 지는 듯한 모습 등 말이다. 보편적이고 아날로그적인 가치를 전하기 위해 희생할 수밖에 없었다고 하지만, 조금 더 신경 써 주었으면 하는 부분들이다. 


그럼에도 영화는 급기야 20년이 넘은 기억부터 5년 전 기억까지 불러낸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증조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외삼촌이 돌아가셨을 때... 어떤 건 희미해져 한 장면 정도밖에 기억나지 않고, 어떤 건 여전히 생생하기 그지 없어 가슴이 아리고 쓰린 그 기억들이 차례로 떠오른다. 그들이 기억하는 게 그들로 하여금 저승에서조차 사라지지 않게 한다는 영화 속 깨달음. 


한편, 충격이라면 충격일 수 있지만 따뜻하기 그지 없게 다가온 부분도 거기에 있다. 삶과 죽음이 하나되는 장면,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이 한 곳에 모여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며 삶과 죽음 모든 것들을 축복한다. 우리에게 죽음은 너무나도 먼, 무섭고 두려운 무엇이 아닌가. 우리도 제사를 지내며 조상님을 모시지만 그건 굉장히 엄숙한 자리가 아닌가. 멕시코가 부러워지는 것이다, 이 영화 한 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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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오래된 리뷰] <웜 바디스>


2010년을 전후해 전성 시대를 열었던 패러노멀 로맨스의 마지막 흥행작이라 할 수 있는 <웜 바디스>. ⓒCJ엔터테인먼트




트와일라잇 시리즈가 시작이었던 것 같다. 판타지적인 캐릭터가 인간과 사랑에 빠지는 '패러노멀 로맨스'의 현대 시작점이 말이다. 이후 <렛 미 인> <늑대소년> <웜 바디스> 등이 잇달아 우리를 찾아왔다. 내년 초에는 길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최고 기대작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도 찾아올 예정이다. 거의 30여 년 전에 전 세계를 강타한 팀 버튼의 <가위손>도 생각난다. 


'결국 사랑이다'라고 말하는 이 영화들, 각종 장르의 탈을 쓴 로맨스 영화들이라고 할 수 있다. 더불어 그 대상이 어른도 아닌 어린이도 아닌 청소년들이다. 영화 산업의 변화와 함께 시대의 흐름까지 엿볼 수 있다. 적어도 이 영화들이 한창 나왔던 2010년 전후는 10대들의 시대였다는 것. 


<웜 바디스>는 패러노멀 로맨스 전성 시대의 사실상 마지막 흥행작이다. 흥행작이면서 괜찮은 평을 얻었던 작품이기도 하고 말이다. 현대적 공포물의 대명사격인 좀비가 인간과 사랑에 빠져 로맨스를 펼친다는 설정에 더 이상 어떤 패러노멀 로맨스가 나설 수 있겠는가. 물론 무수한 영화들이 나 몰래 찾아왔다가 스쳐지나 갔을 것이다. 


좀비 1인칭 시점의 파격


좀비 1인칭 시점이라는 파격을 훌륭히 소화한다. ⓒCJ엔터테인먼트



자기가 누구였는지 알 길이 없는 좀비 R(니콜라스 홀트 분)은 좀비 뿐인 공항에서 생활한다. 그의 집은 멈춰버린 비행기 안, 그래도 전(前) 인간다운 생활을 영위하고 있는 듯하다. 좀비들이 하는 생각은 배고프다는 생각, 하는 일은 인간 사냥이다. 그날도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좀비 사냥을 온 인간들과 대면한다. 


치열한 싸움 끝에 R은 어느 젊은 남자를 죽이고 뇌를 먹는다.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의 뇌를 먹을 때면 그 인간의 기억이 고스란히 전해져와 좀비인 자신도 한때 인간이었다는 걸 잊지 않게 한다. 그러곤 남아 있는 젊은 여자에게로 향하는 R, 하필 그 여자가 방금 먹은 뇌의 주인의 여자친구 줄리(테레사 팔머 분)가 아닌가. 


그 때문인지, 아니면 잠깐 인간의 기억이 들어왔을 때 그녀에게 반한 건지 R은 줄리를 죽이는 대신 보호한다. 피냄새로 인간과 좀비를 판별하는 좀비의 특성을 이용해, 그녀에게 죽은 인간의 피를 묻힌 것이다. R과 줄리는 비행기 안에서 기거하기 시작한다. R은 인간의 감성이 완전히 없어진 것 같진 않고 말도 더듬더듬 할 줄 안다. 무엇보다 줄리를 아끼고 사랑하게 된 것 같다. 그들의 앞날이 예견되기에 과정이 궁금하다. 


영화는 거의 좀비 R의 1인칭 시점으로 진행된다. 기본적으로 죽은 인간이기 때문에 생각 같은 걸 하는 게 말이 안 되지만, 이미 그런 걸 포함한 여러 개연성은 포기한 채 시작한 영화이기에 그런 영화라는 걸 익히 잘 알고 있기에 코믹하고 사랑스럽게 다가올 뿐이다. '이게 말이 돼?'라고 묻는 건 의미없는 일이다. 


좀비의 인간 되기


좀비의 인간 되기 프로젝트라는 파격도 역시 훌륭히 소화한다. ⓒCJ엔터테인먼트



좀비 대 인간의 구도, 좀비 콘텐츠의 시작부터 절대적으로 지켜져야 할 선이다. 좀비한테 물려 좀비가 되거나, 아예 좀비조차 되지 못하고 죽거나. 결국 인간으로서 계속 살아가기 위한 투쟁인 것이다. 좀비는 어떨까. 좀비라고 좀비가 되고 싶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무래도 다시 인간이 되길 바라고 있지 않을까. 


이 영화의 판타지적 로맨스의 이면에는 좀비의 인간 되기 프로젝트가 있다. 역으로 그 프로젝트의 필수적 요소가 다름 아닌 로맨스인 것이다. 그렇게 죽어버린 심장이 다시 뛰고 점점 인간이 되어가는 좀비들이다. 휴머니즘으로 넘어가는 건 자연스러운 수순이리라. 그럴 때면 당연하게도 공공의 적이 있어야 한다. 


<웜 바디스>에도 등장한다, 공공의 적이자 궁극의 적. 그들은 인간의 형체가 아닌 뼈의 형태만을 가진, 인간은 물론 같은 좀비들한테도 무서운 존재인 '보니'들이다. 그들이야말로 인간의 적인 건 물론, 인간이 되고자 하는 좀비들의 적이다. 휴머니즘의 가장 큰 걸림돌. 그들이 없으면 휴머니즘의 의미와 목적과 연대가 옅어지지만, 그들이 없어야만 휴머니즘으로의 길을 갈 수 있다. 


인간이 되는 길은 어려운 듯하면서도 쉽고 험난한 듯하면서도 평탄하다. 제목 그대로 몸에 피가 돌고 심장이 뛰어 체온을 유지하게 되면 되는 것이다. 인간으로선 살아가는 데 '당연한' 이치, 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어렵고 신비하기까지 한 일인지는 부연하지 않아도 될 듯하다. 거기엔 육체적인 필요뿐 아니라 정신적 필요도 있어야 한다. 


가장 애틋하고 절실한 로맨스


파격의 결정체, 좀비와 인간이 사랑에 빠진다는 설정마저 '로미오와 줄리엣'이 연상될 정도로 잘 소화해낸다. ⓒCJ엔터테인먼트



영화는 명명백백 '로미오와 줄리엣'을 연상시킨다. 서로 죽고 못사는 앙숙인 몬태규 가문과 캐플릿 가문, 그리고 첫눈에 반해 버린 몬태규의 로미오와 캐플릿의 줄리엣. 당연한 집안의 엄청난 반대에 결국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하는 두 사람. 로미오의 R, 줄리엣의 줄리는 이보다 더 끔찍한 태생적 반대에 부딪힌다. 좀비와 인간. 


이보다 더 애틋하고 절실한 로맨스가 이 세상 어디에 있겠는가. 달달한 틴에이저의 로맨스, 현실에서 절대 일어날 수 없을 것 같은 몇 겹의 판타지적 로맨스 외피 안에는 사랑의 100% 가능성을 향한 강력한 주장이 있는 것이다. '이것도 사랑일까'라고 자문하고 고민하는 것도 사치인 그의 사랑, 좀비의 사랑. 


많고 많은 로맨스 영화들을 우리는 '판타지'라고 부른다. 거기엔 '저런 사랑이 현실에서 가능한가. 절대 말도 안 된다'라는 비꼼의 정서가 담겨 있다. 그때부턴 사랑의 고귀함과 위대함, 사랑의 가능성은 사라지고 오락만 남을 뿐이다. 반면 이 영화는 어떤가. 오히려 오락에서 시작해 사랑의 본질로 나아가는 것 같지 않은가. 


그런 로맨스의 외피를 쓴 판타지 영화보단 차라리 이런 판타지의 외피를 쓴 로맨스가 낫지 않은가,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물론 이 영화로 진정한 사랑을 논하긴 힘들 것이다. 판타지적 외연이 주는 포스가 워낙 강렬하니까 말이다. 그럼에도, 굳이 가져다 붙이는 것이 아닌 그 자체로 이 영화의 로맨스가 사랑의 본질을 조금이나마 보여주고 있다고 본다. 만듦새야 어떻든 우리가 진정 행해야 할 사랑의 모습이 거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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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고스트 스토리>


2017년 최고의 영화 중 하나라고 극찬 받는 <고스트 스토리>. ⓒ리틀빅픽쳐스



한적한 교외의 작은 집에서 단란하게 둘이 살아가는 작곡가 C와 M. 어느 날 집 앞에서 불의의 교통사고로 황망하게 세상을 뜬 C. 그는 영안실에서 유령이 되어 깨어나 돌아다닌다. 그러곤 당연한듯 집으로 향하고 M을 지켜본다. M은 C, 그리고 C와 함께한 시간을 추억하며 견뎌낸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M은 새로운 사랑을 하고 그 사랑 역시 상실한다. 급기야 M은 집을 떠나고 C는 홀로 남는다. 집은 계속해서 새로운 주인들을 맞이한다.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오가도 C는 계속 그 집을 지킨다. 아니, 그 집에서 M을 기다리고 있다. 


그는 모르는 걸까. 한번 떠난 집에 그녀는 결코 오지 않을 거라는 걸. 무수히 많은 시간이 흘렀기에 그녀는 올 수 없다는 걸. 그럼에도 그는 그 집과 함께 끝을 알 수 없는 여정을 계속하고 있다. 그가 지극히 한정된 말과 몸으로만 표현해내는 이야기는 무엇일까. 사랑일까, 시간일까, 공간일까. 


'유령' '이야기'


영화는 '유령'의 '이야기'다. 유령도 중요하고 이야기도 중요하다. ⓒ리틀빅픽쳐스



2018년 해가 뜬 지도 열흘이 되었지만, 2017년에서 완전히 헤어나올 수 없는 건 2017년 말에 나온 좋은 영화들 때문이겠다. <고스트 스토리>도 나의 발목을 잡는 그런 영화들 중 하나다. 별 내용 없이 온전히 '감각'으로만 영화를 채우는 솜씨가 기막히다. 그 감각은 사랑과 시간과 공간이라는 큰 개념들을 아우른다. 


'유령 이야기'라는 상투적이고 예측가능한 제목은 이 영화의 노림수이자 전체적인 주제 및 느낌 등과 부합한다. 화려하고 예측불가능한 건 눈길을 가게 만들지만 몰입하고 집중하게 만드는 데 도움을 주진 못한다. 반면, 전형적인 건 신경이 사방으로 뻗지 않고 한 곳으로 모이는 결과를 도출한다. 이 영화는 그걸 실현시킨다. 


그런 면에서 아이러니하게도 유령 그 자체는 중요하지 않다. 대신 유령의 '이야기'가 중요하다. 그런데 그 이야기가 성립되기 위해서는 그가 '유령'이어야 한다. 일념을 가진 채, 영원불변한 존재여야 이 이야기가 만들어질 수 있고 우리가 그 이야기를 통해 여러가지를 성찰할 수 있는 것이다. 


독특하게 눈에 띄는 것들


화면비율이나 롱테이크와 같은 감각적 영화 기술이 눈에 띈다. ⓒ리틀빅픽쳐스



이 영화를 두고 '독특하다'고 말하고 싶다. 아니, 그렇게밖에 말할 수 없는 것도 같다. 초반부터 눈에 띄는 것들이 있다. 우선 화면 비율이다. 1.33:1 비율이라는데, 네 모서리가 둥그스름하게 처리되어 있다. 의식하지 못하게 클래식한 느낌을 전하며 시간이라는 개념을 상기시키려는 의도가 아닐까 생각한다. 


집요한 무동(無動) 롱테이크와 절제된 대사는 이 영화의 가장 큰 특징이다. 현재 롱테이크의 대가라 하면, 알폰소 쿠아론이나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 등을 뽑는다. 그들은 완벽한 동선에 따라 인물의 움직임에 맞춰 카메라가 따라다니는 롱테이크로 유명하다. 대단한 기술과 연기에 감탄을 보낸다. 


반면 이 영화의 롱테이크는 가만히 있는 카메라가 기본이다. 거기에 일면 아무것도 아닌 장면이, 영화에서 하등 중요하지 않을 것 같은 장면이 길게 등장한다. 어떨 때는 정물화를 찍은 듯 아무런 움직임도 소리도 없는 장면이 등장하기도 한다. 이는 절제된 대사와 함께 조만간 행해질 움직임과 대사에 집중하게 만든다. 한편, 유령답게(?) 한순간 시공간을 뛰어넘는 전개는 앞엣것들과 대조를 이루며 또다른 몰입을 불러온다. 


이렇게 완성된 몰입과 집중은 감독이 내보인 감각의 결과이며 감각을 만들어낸 장본인이기도 하다. 영화에서 감각이란 무엇일까. 여러 예술 콘텐츠 중에서 영화만 보여줄 수 있는 그 무엇이 아닐까. <고스트 스토리>의 대다수 장면들은 영화가 아닌 다른 콘텐츠로 표현할 방법이 없을 것 같다. 


사랑, 그리고 시공간의 덧없음


사랑과 더불어 시공간의 덧없음이 영화의 주를 이루고 맥을 형성한다. ⓒ리틀빅픽쳐스



고스트가 된 C가 할 수 있는 건 뭘까. M에게 말을 건넬 수도 M의 몸을 만질 수도 M의 머릿속이나 꿈을 통해서 표현할 수도 없다. 그저 가만히 바라볼 뿐이다. 기다릴 뿐이다. 그는 그저 작별인사를 하고 싶은 게 아닐까, 이대로는 이별다운 이별이 될 수 없지 않은가. C는 M에게서 말을 듣고 싶은 것이다. C는 M이 남기고 간 쪽지를 봐야 한다. 


시간의 덧없음은 사랑과 이 영화의 또 다른 주제라 할 수 있다. 인간과는 완전히 다른 시간 체계 속에서 살아가는(?) 고스트 C, 그에게 시간은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과는 정반대로 아무 의미가 없다. 하지만, 인간 개개인이 아닌 인간사 나아가 최초와 최후의 역사로 보면 또한 시간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게 아닌가. 결국 최후에는 모든 게 사라질 운명이라면 말이다. 무한의 시간을 가진 고스트도 언젠가 사라지는 것이다. 


그들의 집이 수없이 다른 무엇으로 변하는 것도 시간의 덧없음과 일맥상통한다. 사랑도 시간도 공간도 다 부질없는 것인가. 그 와중에 고스트 C는 시공간을 초월하는 사랑을 이어나간다. 그게 사랑이 아니고 무언가. 오직 사랑뿐이다. 


영화는 엄청난 여백을 자랑한다. 더불어 많은 궁금증을, 영화가 끝나도 풀어지지 않는 궁금증들을 남겨두었다.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고 다양한 방법으로 감상할 수 있으며 다양한 깨달음을 얻을 수도 있다. '시공간의 덧없음을 이겨내는 무모하고 절절한 사랑'이라는 필자의 해석은 아주 협소한 것이라 말할 수 있다. 사랑의 힘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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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나의 서른에게>


퇴색되긴 했지만, 여전히 시선이 갈 수밖에 없는 '서른'. ⓒBoXoo 엔터테인먼트



'서른'이라는 나이, 솔직히 지금에 와선 그 의미가 많이 퇴색되긴 했다. 백세 시대에 서른이 갖는 의미가 클 수 없는 것이다. 예전 삼십대가 인생의 최절정기라고 했다면, 요즘 삼십대는 이제 막 세상에 한 발을 내딛는 시기라고 해도 무방하다. 그럼에도 서른에게 여전히 관심을 갖고 의미부여를 하려는 건 예전부터 이어온 관념 때문이다. 


서른이라는 말이 들어간 콘텐츠는 소설, 시, 노래, 영화 등 부지기수이다. 1992년 최영미 시인의 <서른, 잔치는 끝났다>는 시대를 관통하는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1994년 고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는 시대를 뛰어넘는 국민가요가 되었다. 이들은 '서른'이라는 나이의 상징성을 특유의 감정선으로 내보내 만민의 호응을 얻었다. 


요즘 서른에 투여하는 바는 많이 다르다. 일례로 얼마전 출간되어 꽤 호응을 얻고 있는 손원평 작가의 <서른의 반격>은 서른이라는 나이에 상징성을 부여하는 게 아닌 삼십대가 된 주인공을 내세워 청춘세대론을 설파하고 있다. 와중에 홍콩에서 날아온 영화 <나의 서른에게>가 눈길을 끈다. 예전의 서른과 요즘의 서른을 바라보는 시선과 의미부여를 적절히 섞은 듯한 느낌이랄까. 


29살, 슬픔과 행복 사이에서


서른을 앞둔 시기는 '서른'이라는 숫자에 의미부여를 하지 않더라도 방황하는, 즉 충분히 의미부여가 가능한 시기다. ⓒBoXoo 엔터테인먼트



괜찮은 직장에 다니고 오랫동안 사귄 사랑하는 남자친구가 있으고 매사에 최선을 다하며 미래를 준비하는 괜찮은 외모를 가진 '29살' 임약군, 그녀는 여자 나이 서른이면 끝이라는 사람들의 말을 믿지 않는다.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녀는 정말 괜찮은 걸까. 서른을 앞두고 그녀에게 온갖 일들이 생긴다. 


팀장으로 승진한 그녀에겐 당연히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많은 일들이 주어진다. 친한 친구의 '서른 살' 생일 축하 파티를 소소하게 해주며 서른 살 여자에 대해 이런저런 긍정적이지만은 이야기를 나눈다. 치매가 부쩍 심해진 아버지이지만 병원에 가라는 말만 할 뿐이다. 오래 사귄 남자친구와는 부쩍 소원해진 느낌이다. 집주인의 일방적인 통보로 갑작스럽게 집에서 나가야 하는 게 결정적이다. 


갈 곳 잃은 임약군이 향한 곳은 일면식 없는 이가 잠시 내놓은 집. 그곳은 황천락이라는 동갑내기가 파리로 잠시 여행을 떠나면서 빌려준 집이다. 영화는 임약군의 이야기에서 황천락의 이야기로 선회한다. 그녀의 스물아홉에서 서른 사이는 임약군처럼 다사다난하지 않다. 그녀는 10년 동안 음반 가게에서 점원으로 일하다가 서른을 맞이해 처음 비행기를 타고 파리로 여행을 가려는 듯하다. 


서로 전혀 다른 외모에, 가정환경에, 능력에, 삶을 산 임약군과 황천락. 하지만 그들은 같은 날 서른이 된다. 그런데 임약군은 슬픔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황천락은 행복에 겨워 웃음꽃 위에 두둥실 떠 있는 것 같다. 어째서일까?


조금 더 자신을 들여다보고 사랑했으면


영화는 이왕이면 보다 행복한 서른을 맞이했으면 하는 마음을 29살에게 보낸다. ⓒBoXoo 엔터테인먼트



영화의 원제는 <29+1>이다. 영화 제목처럼 30이 주(主)라기보다 30이 되기 전의 20에서의 마지막이 주(主)라고 할 수 있다. 막상 되면 전과 아무것도 변한 게 없다는 걸 알게 되지만, 그 전까지는 알 수 없는 미래와 엄청난 변화가 함께 올 것 같은 미래에 대한 불안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임약군은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었다. 나름 남부럽지 않은 삶을 살아간다고 생각했는데, 다른 누가 봐도 그녀의 삶은 괜찮은데, 그건 오로지 남에게 보여지는 삶의 부분 부분들 뿐이었다. 그 부분들을 괜찮게 보이려고 그녀는 누구보다 노력했다. 하지만, 그녀 자신은 돌보지 못했던 것이다. 


황천락은 특별한 게 없다. 아니, 남들만큼 못한 삶이니 특별하다고 할 수 있나. 여튼 직장도 변변치 않고 남자친구도 없다. 가끔은 자신이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하찮게 느껴진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의 모든 걸 기록하기로 한다. 그 모든 게 그녀의 것이고 그녀의 인생이니까. 


여기에 옳고 그름은 통용되지 않는다. 임약군은 정녕 열심히 노력했고 잘했다. 그녀가 굳이 잘못한 게 있다면 자신을 돌보지 않은 것. 그리고 그녀는 그저 지쳤을 뿐이다. 황천락 같은 삶을 살라는 게 아니다. 황천락처럼 자신을 좀 더 돌보고 자신의 삶을 좀 더 들여다보고 무엇보다 사랑하라는 거다. 남을 사랑하는 것보다 훨씬 힘들다는 걸 잘 알지만... 다들 비슷한 선에서 출발했다면 29, 30이면 누구나 그럴 나이이고, 그래야만 하는 나이이다. 


흔하디 흔한 우리네 삶


영화를 통해 또 다른 나를 만나보는 시간을 갖는 건 어떨까. ⓒBoXoo 엔터테인먼트



영화는 탁월한 통찰력으로 핵심을 찌르는 깨달음을 주지는 않는다. 임약군의 이야기도, 황천락의 이야기도 전혀 새롭지 않다. 서로가 서로의 삶과 멀리 있다고 느낄 뿐, 우리가 보기에 그들의 삶은 흔하디 흔한 삶이다. 영화가 노린 점이 바로 그 점이 아닐까 싶다. 만인의 서른이 이 영화에 있는 것이다. 


보편적 삶의 궤적을 따라가다보면 만나게 되는 '나'. 그리고 누군가에게는 저런 삶도 한 번 살아보고 싶게 만드는 흔한 워너비 커리어 우먼 또는 자유로운 영혼의 보편적 전형. 솔직담백한 이 영화에 참으로 적당한 배치라 아니할 수 없다. 


영화는 후반부에 판타지적 요소를 가미해 현실에서 탈피해 지난 삶을 돌아보며 서른을 준비하려는 모습을 우회적으로 표현한다. 그러며 진정 소중한 게 무엇인지 질문하고 자문한다. 하지만 답을 내보이며 규정하진 않는다. 각자 다른 답이 있는 것이니까. 다만, 이왕이면 '함께' 답을 찾아보면 어떨까 하고 운을 뗀다. 그건 괜찮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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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당신과 함께한 순간들>


단조로운 내레이션에 숨은 어려운 삶에의 철학이 돋보이는 영화 <당신과 함께한 순간들> ⓒ싸이더스



내가 태어나기도 훨씬 전에, 아버지조차 말도 못 할 아기 시절에 돌아가신 할머니를 내가 기억할리는 없다. 그런 할머니가 나는 익숙하고 그런 할머니의 형상이 그려지는 건 누군가로부터 전해들었을 할머니에 대한 기억을 아버지한테 전해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은 그렇게 누군가의 기억 속에 살아 있다.


하지만, 그 기억들이 모두 정확할리 만무하다. 머릿속 어딘가엔 정확한 기억이 있지만 능력 상 꺼내지 못하는 것이든, 애초에 걸러서 기억하거나 어느 한 순간 또는 마지막 순간만 기억하는 것이든, 원본의 기억이 아닌 편집본의 기억이라는 것이다. 마치 역사와 같지 않은가. 사실도출에의 노력을 추구하지만, 영원히 그렇게는 불가능하다.


영화 <당신과 함께한 순간들>은 기억의 취사선택과 기억의 이어짐이라는 다분히 추상적인 주제를 가장 앞에 둔다. 여기에 역시 추상적이기 짝이 없는 관계라든지, 가족이라든지, 사랑이라든지 하는 주제를 따르게 한다. 하지만, 한 사람에 대한 기억의 순간을 눈앞에 실증적으로 불러내는 인간 형상 홀로그램이, 이 잔잔한 이야기에 심심한 파동을 일으켜 많은 주제들의 추상이 형상화된다.


인간 홀로그램


인간 형상의 홀로그램에 기억을 심어 마치 그때 그 사람과 얘기하는 듯한 느낌. 이 영화의 주요 볼거리다. ⓒ싸이더스



여든다섯의 할머니 마조리(로이스 스미스 분) 곁에는, 원하면 언제든지 불러낼 수 있는 홀로그램이 있다. '그'는 15년 전 세상을 떠난 남편 월터(존 햄 분)의 젊은 시절 모습을 하고 있다. 기억을 심어주면 영원히 그 기억을 그대로 간직할 그는, 기억을 되살리거나 기억을 공유하며 마음을 달래주는 친구 또는 대체자로서 완벽한 존재다. 


그런 그를 마조리의 딸 테스(지나 데이비스 분)는 싫어한다. 자신보다 그를 더 찾고 그에게 더 의지하는 엄마가 싫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인간 아닌 존재가 인간을 아주 잘 대체하고 있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다. 반면, 테스의 남편 존(팀 로빈스 분)은 적극 찬성하는 쪽이다. 다른 모든 걸 제쳐두고 마조리의 상태를 호전시키는 데 아주 좋은 친구가 아닌가. 그건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이 아닌가. 


그렇게 잃어버린 형상들과 기억들 때문에 괴로웠던 마조리의 마지막 나날들은 다분히 월터의 홀로그램 덕분에 치유받는다. 월터의 형상이 눈앞에 있고 월터와 함께 했던 화려한 젊은날의 기억 또한 되살릴 수 있다. 


하지만, 그건 월터에게 날조된 기억, 사실이지만 기분 좋은 기억과 사실이 아닌 기분 좋은 기억을 심어준 덕분이다. 기억하기 싫은, 기억에서 지워버린 기억은 아예 심어주지 않았다. 예를 들어, 마조리가 세계 8위의 테니스 선수 대신 월터를 선택했다고 거짓말하고 자살로 생을 마감한 아들 데미안에 대한 기억은 아예 전해주지 않으려 한다. 


이 영화의 핵심, 기억


인간 형상 홀로그램이 이 영화의 주요 볼거리라면, 기억과 관계는 이 영화의 핵심 주제이다. ⓒ싸이더스



영화는 연극을 원작으로 한 만큼 굉장히 정적이다. 90% 이상의 장면이 그들이 기거하는 집안이며, 역시 90% 이상의 장면이 그들 중 2인 또는 3인의 대화이다. 그들의 대화가 즉 영화이기에, 대화를 깊숙이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거기에서 우린 '기억' '관계' 등의 핵심 주제를 찾아 엿볼 수 있다. 


존은 기억이란 뇌 안의 퇴적층과 같아서 기억하지 못할 뿐 거기에 있다고 말한다. 어떤 식으로든 꺼내어 되살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그가 홀로그램 월터의 존재를 옹호하며, 그로 하여금 마조리의 기억을 되살리게 하거나 마조리의 기억 한 부분을 차지하게 하는 게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은 이치겠다. 


반면 테스는 기억이란 우물이나 서랍장 같은 게 아니라고 말한다. 무언가를 기억할 때는 기억 그 자체가 아니라 기억한 마지막 순간을 기억하는 것뿐이라는 것이다. 복사본의 복사본처럼 계속 희미해질 뿐 절대 생생해지거나 선명해지지 않는다. 이는 홀로그램 월터의 존재가 마조리 기억을 되살리거나 생생하게 하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그녀의 주장을 뒷받침한다. 


아마도, 테스의 주장 또는 이론이 맞을 것이다. 기억은 점점 쇠퇴해 언젠가는 소실할 거라는 건 누구나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모두들 몸소 실천하고 있다. 하지만, 심정적으로 존의 말을 믿고 싶다. 할 수만 있다면 서랍장에 기억을 보관하고 언제든 꺼내 눈앞에 놓고 싶단 말이다. 인류가 낳은 최고 천재 아인슈타인도 그건 불가능하지 않을까. 


관계, 그리고 기억


모든 건 기억에서 비롯된다. ⓒ싸이더스



관계는 기억과 함께 한다. 기억들이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다. 기억이 사라지면 관계 또한 사라진다. 마조리로부터 받은 한없이 작은 사랑, 마조리로부터 받은 적이 없다시피한 사랑의 기억으로 괴로워하는 테스이지만 마조리는 모른다. 알지 못하는 것이다. 일방적인 기억이 아닌 서로 간의 기억이야말로 사실상 그(그녀)와 나의 전부다. 


시간을 어김없이 흐르고, 기억은 쇠퇴하여 사라지고, 생명은 죽어 자연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누군가에 대한 기억은 계속 남아 있다. 영화에서 홀로그램이 상징하는 건 바로 그 누군가에 대한 기억의 영속성이다. 이는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게, 영화가 좀 더 힘을 실어주는 주장이, 앞서 테스가 아닌 존의 말에 있다는 걸 증명한다. 


누군가에 대한 기억은 그동안 글, 그림, 사진, 영상 등으로 전해져왔다. 이젠 홀로그램이 가능해진 시대, 그 누군가를 눈앞에 데려와 함께 기억을 직접 공유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 영화는 미래형 SF적 요소가 있지만 SF영화라 칭할 수 없다. 인류는 그 무엇보다 우선적으로 기억, 기록을 남기는 데 전력을 다한다. 


비단 월터 홀로그램만 존재하진 않을 것이다. 마조리, 존, 테스의 홀로그램이 다른 산 사람을 위해 존재하게 될 것이다. 그 와중에 '나에겐 많은 시간이 있으니까'라고 말하는 월터 홀로그램과 '얼마나 좋아.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었다니'라고 말하는 마조리 인간, 그리고 마조리 홀로그램의 한 마디가 기억에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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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시인의 사랑>


능력과 의욕 상실의 찌질한 시인이 무엇을 하겠는가. 무엇을 해야만 하겠는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사랑? ⓒCGV아트하우스



제주도 토박이 시인(양익준 분)은 등단만 했을 뿐 동인 합평회에서 심심찮게 까이는 수준의 재능을 지녔다. 겨우 방과후교실 선생님으로 활동하지만 아이들에게도 무시당하는 입장이다. 그야말로 시인으로서의 능력도 없고 가장으로서의 능력도 없다. 대신 가정을 이끌다시피하는 아내(전혜진 분)가 아이를 가지고 싶다고 해서 늦은 나이가 걱정되어 병원에 갔는데, 아내의 노산은 걱정할 필요가 없고 시인의 정자감소증이 문제가 된다. 급기야 남자로서의 능력도 없는 것이다. 


모든 면에서 능력과 의욕 상실의 시인은 어느 날 아내가 건네준 도넛을 먹고 눈이 번쩍 뜨인다. 환상적인 도넛 맛에 감동을 금치 못한 것, 매일 같이 동네에 새로 생긴 도넛 가게로 달려가 도넛을 무지막지하게 먹어댄다. 그 힘 덕분일까? 동인 합평회에서 소소한 합격점을 성취한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도넛 가게 화장실에서 도넛 가게 알바생 소년(정가람 분)이 어느 소녀와 섹스를 하는 장면을 목격한다. 


시인은 그 장면을 잊을 수 없다. 정녕 오랜만에 수음도 하고 정자수도 증가했단다. 뭔가를 느낀다. 사랑일까. 그런데 뭔가 좀 이상하다. 심상치 않다. 그 대상이 소녀인지 소년인지 잘 모르겠다. 아무래도 소년인 것 같다. 어느 날 술취해 밖에서 잠을 청하는 소년에게 다가가고 함께 소년의 집으로 향한다. 하루종일 일만 하는 엄마 대신 다 죽어가는 아빠를 보살피는 소년, 점점 그에게 뭔지 모를 감정을 느껴가는 시인. 


시인의 사랑은 어떨까


시인의 사랑은 특별할까? 아니, 시인이라는 존재가 특별한가? ⓒCGV아트하우스



누구나 가슴 속에 시 한 편은 품고 살고, 누구나 시인을 동경해 마지 않으며, 누구에게나 금지된 사랑에의 욕망을 품고 살 테다. 영화 <시인의 사랑>은 평범 이하의 시인의 삶을 통해 이런저런 드러낼 수 없는 것들을 조심스럽게 드러내 오히려 채워주는 역할을 수행한다. 


시인의 사랑은 어떨까. 아니, 이전에 시인이란 누구이며 무엇일까. 시인이 아니라서 재단할 수 없지만, 누구나 시인일 수 있다는 점에서 시인이라고 다를 바 없으며 누구나 시인이 될 수는 없다는 점에서 시인은 특별할 것이다. 즉, 시인도 다양한 사람들 중 하나이겠다. 시인의 사랑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시인에겐 관찰력, 상상력, 집중력 등이 필요할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 영화에서 보여주는 시인의 사랑 양태는 셋 다 충족해야 한다. 대상에 대한 관찰력, 대상으로부터 날갯짓하는 상상력, 대상을 향한 집중력까지. 그렇다면 소년에의 시인의 사랑은 특별할 게 없다. 아주 자연스러운 것이다. 


영화가 훌륭히 소화해내는 것들


영화는 복잡한 내러티브와 아슬아슬한 경계의 감정선에서 흔들리지 않는 중심을 지키며 잘 소화해낸다. ⓒCGV아트하우스



자연스러운 '시인의 사랑'을 시인만의 특별함에 가둬 생각할 수밖에 없는 현실의 벽은 높다. 시인에겐 찌질하게 그지없는 자신을 누구보다 사랑해주고 시인이 도저히 이끌 수 없는 가정을 대신 이끄는 아내가 있다. 그리고 천신만고 끝에 임신한 아내 아닌가. 그녀를 뒤로 하고 소년에게 마음이 가는 건 시인만의 사랑으로서도 용납하기 힘들다. 


시작된 지 오래지 않아 영화는 벌써부터 복잡한 내러티브를 선사한다. 시인의 사랑과 시인만의 사랑의 층위 위에, 그 자체로 이상할 게 없는 정상적인 사랑과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비정상적인 사랑의 층위가 겹친다. 동성애 코드는 덤에 불과할 정도다. 영화는 시인에서 시인과 아내, 시인과 소년으로 집중하는 시선을 옮겨가며 복잡한 내러티브를 나름 훌륭히 소화한다. 


무엇보다 훌륭히 소화하고 또한 훌륭한 점은, 아슬아슬한 경계에서 어느 쪽으로도 선을 넘지 않고 나아가는 감정선에 있다. 시인과 소년은 서로를 사랑하는 것인지, 연민하고 이용해먹는 것인지, 그저 지긋지긋한 현실에서 도망가고자 또는 조금은 타파해보고자 잠시잠깐 다녀오는 수준의 대상인지 알 수 없는 것이다. 영화가 완전히 끝날 때까지 알 수 없다. 


천재가 만든 영화


한끗 차이로 졸작이 아닌 수작으로 '판명'난 <시인의 사랑>, 여러 면에서 가히 천재의 영화라 할 수 있다. ⓒCGV아트하우스



시인의 여성성이라기 보다 여성적인 시인의 단면을 보여주는 이 영화의 시인, 다분히 남성적인 역할을 하는 아내와 다르게 성격이든 신체든 섬세하고 소극적이다. 하지만 그는 남자이기에 한없이 찌질하고 능력없는 이로 보인다. 그런 그가 어려운 환경에서 살아가는 소년에게는 뭐라도 해줄 수 있는 게 있다. 남성의 발로일까, 여성만이 할 수 있는 행보일까. 여기에서도 복잡한 내러티브와 아슬아슬한 경계가 엿보인다. 


그런 점에서 영화는 또한 수작과 졸작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걸어가고 있는 듯 보인다. 여러 코드와 층위를 나열할 뿐 정리하고 해결하지 못해 쓸데없는 상상력만 소진하게 할 뿐 무슨 얘기를 하고자 하는 것인지 알 수 없다고 느낄 수도 있는 반면, 산발한 코드와 층위 사이를 때론 발 빠르게 때론 정면으로 우직하게 지나가며 그것들을 이용해 상상력에 살을 붙여 평범함 위에 특별함으로 느낄 수도 있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졸작보단 수작에 가까운 작품이 아니었나 싶다. 최소한 동성애 코드 위에 우리가 생각하는 '시인'의 사랑이 아닌 '여성적인' 시인의 층위를 입힌 건 아주 참신했다. 거기에 배우들의 열연으로 빚어낸 코믹과 진지함의 병렬과 긴장감 어린 경계에서의 나아감은 최고의 감각을 선물한다. 얼핏 허술한듯 보이는 전체적 이미지 이면엔 그 어느 영화보다 촘촘하고 꼼꼼하게 직조된 경계들의 조합이 보인다. 천재의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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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킬러의 보디가드>


2015년 <킹스맨>과 2016년 <데드풀>의 만남이자 두 영화 2편의 사전 맛보기라 할 수 있겠다. ⓒ제이앤씨미디어그룹



저급하리만치 돼먹지 못한 말들의 향연에 의한 코믹, 지극한 사실성과 과도한 잔인성을 앞세워 오히려 현실감 없이 재밌게만 느껴지는 액션의 극단적이고 모순적인 조합의 영화가 최근 전 세계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2015년 <킹스맨>과 2016년 <데드풀>이 그 대표격이라 할 수 있는데, B급의 메이저화 또는 메이저의 B급화이겠다. 


공교롭게도, 아니 의도한 것이겠지만 두 영화에서 극단적 조합에 결정적 역할을 한 두 배우가 한 영화에서 뭉쳤다. 제목에서부터 범상치 않은 기운이 흐르는, <킬러의 보디가드>. <킹스맨>의 라이언 레이놀즈와 <데드풀>의 사무엘 L. 잭슨이 그들인데, 성공적 캐릭터를 거의 그대로 가져 왔다. 


백인과 흑인의 버디 케미 코믹 액션은 1980~90년대 <리셀웨폰> 시리즈, 1990~2000년대 <러시아워> 시리즈로 상종가를 쳤다. 자신의 한계를 완벽히 깨닫고 그 한계 내에서 자기 위치성을 뽐내며 시대가 원하는, 즉 대중이 원하는 입맛에 취합하기도 하고 오히려 대중의 입맛을 사로잡기도 했다. <킬러의 보디가드> 역시 다분히 킬링타임용 일회성 무비라 칭하겠지만 가히 역대급의 자기 위치성을 뽐냈다. 현재 비슷한 시기에 나와 훨씬 월등한 위용을 뽐내는 <청년 경찰>과 비교해보는 것도 한 재미겠다. 


복잡한듯, 단조로운


내용은 뭐, 적당히 꼬아서 적당히 마무리 한다. ⓒ제이앤씨미디어그룹



내용은 복잡한듯 단조롭다. 가타부타 자세한 설명을 생략하고 바로 인물의 사연과 함께 캐릭터성을 선보인다. 자칭 '트리플 A'급 보디가드 마이클 브라이스(라이언 레이놀즈 분)는 특급 고객을 지키지 못해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진다. 그는 마약에 쩔은 변호사 보디가드나 하고 있을 뿐이다. 


한편 재판석에 앉게 된 벨라루스 대통령이자 독재자 두코비치(게리 올드만 분), 그는 악행을 증언하려는 증인들을 계속 암살해 무죄로 풀려나고자 한다. 그 와중에 인터폴은 아내의 사면을 조건으로 내밀며 사상 최고 최악의 킬러 다리우스 킨케이드(사무엘 L. 잭슨 분)를 증인으로 내세우고자 한다. 하지만 역시나 두코비치의 표적이 되어 재판이 열리는 국제형사재판소로 향하는 길이 만만치 않다. 


이에 킨케이드 운반 책임자이자 브라이스의 옛 연인 아멜리아는 브라이스의 트리플 A급 복귀를 돕겠다는 조건으로 브라이스에게 도움을 청한다. 하지만 브라이스와 킨케이드는 30번 가까이 서로를 죽이고자 했었던 철천지 원수지간, 서로에게 위협이 되는 존재가 유일하게 서로인 만큼 실력 하나는 최고인 사이. 과연 이들은 모든 악연을 뒤로 하고 서로를 지키며 안전하게 국제형사재판소로 가서 두코비치를 끌어내리는 결정적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까?


두 주인공의 다양한 합(合), 케미


모든 게 완전히 다른 두 주인공의 합(合)이 영화의 모든 걸 이룬다. ⓒ제이앤씨미디어그룹



영화는 브라이스와 킨케이드의 합(合)으로 거의 모든 걸 처리한다. 전작에서 엄청난 말빨을 선보였던 그들의 녹슬지 않은 욕의 향연의 합, 길지 않았지만 절정 고수들인 그들간의 맨몸 액션의 합, 정반대라고 해도 될 정도로 다른 성격이지만 서로가 서로를 의지하게 되는 극단끼리 통하는 합, 그리고 절묘하진 않지만 적어도 삐그덕거리지는 않는 시나리오의 합까지. '케미'는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게 아닐까 싶다. 


이중에서 이 영화가 재미있는 결정적 이유는 다름 아닌 시종일관 쉬지 않고 나불대는 말 대결에 있다. 한마디 한마디 절대로 빠지지 않는 쌍욕은 덤이다. 그리고 그에 상반되는 느낌의 액션도 중요하다. 모든 액션이 다 그렇진 않지만, 상당히 진중하고 굉장히 사실적이다. 잔인하다는 얘기다. 


<킹스맨>과 <데드풀>은 이 지점에서 다시금 불려나온다. 관객은 이 두 영화 덕분에 수많은 전작에서 로맨틱하고 진중한 분위기를 선사한 이 두 영화배우가 이토록 코믹하고 잔인한 모순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에 하등 기시감을 느끼지 못한다. 아주 친근한 것이다. 


결정적으로, 이 둘은 여자와의 관계로 서로에게 마음을 열고 서로를 돕는다. 악의 화신이라 할 만한 킨케이드는 사랑의 화신이고, 고객을 지키는 게 일인 브라이스는 자기 여자 하나 지키지 못한다. 이 영화를 이루는 여러 모순적 재미들의 모습이 여기에도 통용되는 것이다. 


결국 사랑이다


B급 정서가 다분한 '바퀴벌레'의 사랑을 보여주는, 그들만의 사랑 방정식이다. ⓒ제이앤씨미디어그룹



그렇다면, 여러 의미로 살인마(?)들인 이들이 꼼짝 못하는 여인들은 영화에서 어떻게 비춰질까? 죽음과 함께 하는 '바깥' 일을 하는 남자에 비해 여자는? 여자도 마찬가지로 죽음과 함께 한다. 즉 동종업계에서 일하는 이들이다. 비록 영화 전체적으로는 조력자에 불과하지만, 이 남자들보다 훨씬 더 강단 있는 모습을 비롯해 좌중을 압도하는 모습도 선보인다. 


전쟁 중에도 사랑은 꽃핀다고 했던가. 자칫 증언 허락 시간에 늦어 두코비치가 풀려날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 속에서도 자기만의 방식으로 수줍게 사랑을 고백하는 브라이스나 두코비치의 암살자들이 맹렬히 쫓아오는 와중에도 여유롭게 브라이스의 속마음을 전해주는 킨케이드의 모습은, 상황에 맞지 않는 어이없음을 전해주기보다 은은한 웃음꽃을 전해주기에 충분하다. 


결국 사랑이다. 이 영화에서 사랑은, 특히 킨케이드 부부의 사랑은 다분히 영화의 병맛적인 느낌을 극도로 살리기 위한 장치일지 모르나 그럼에도 얼굴이 찌뿌려지지 않고 박장대소에 가까운 웃음이나마 보낼 수 있는 건, 우리 모두 사랑을 향한 열망이 그만큼 크고 사랑을 대하는 방식과 눈이 그만큼 유하다는 반증이겠다. 


이 영화에서 뭔가를 끄집어내는 건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반면 이 영화를 통해 내 안의 무엇을 끄집어내는 건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저 마음 놓고 영화를 따라가다 보면 하나씩 하나씩 나오지 않을까 싶다. 그게 욕이든, 웃음이든, 환희든, 살인 충동이든, 사랑 열망이든, 무엇이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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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프랑수아 오종 감독의 <프란츠>


파격적 행보를 계속 해왔던 프랑수아 오종 감독의 영화 경력 전환점이 될 만한 작품 <프란츠>. ⓒ찬란



프랑수아 오종은 프랑스가 낳은 작금 세계적인 작가주의 감독이다. 갓 20살이 넘은 1980년대 후반부터 활동했지만 2002년 <8명의 여인들>에 이르러 그 이름을 알렸다. 그 이전까지 그의 작품이 국내에 개봉된 적이 없고, 그 이후로 그의 모든 작품이 국내에 개봉된 사례만 보아도 어림직잠할 수 있다. 물론 하루아침에 뛰어 오른 건 아니고, 1990년대부터 비평계에 그 이름을 드높여 왔다. 


그는 매 작품마다 파격적 소재를 기본 장착하고 개성있는 상상력과 풍자를 선사했다. 비평가들이 좋아마지 않는 영화를 만들었다고 할까. 그렇지만 무엇보다 오종을 상징하는 건 섹슈얼리티 기반의 욕망이다. 한국에 처음 소개된 그의 작품 <스위밍 풀>이 당대를 대표할 만한 섹슈얼 미스터리라는 점도 크게 작용할 것이다.(<8명의 여인들>이 먼저 만들어졌지만, 국내에서는 <스위밍 풀>의 개봉 이후 그 성공으로 <8명의 여인들>이 개봉했다.) 그 전후로도 그는 섹슈얼리티에 천착했다. 


그런 프랑수아 오종 감독이 <프란츠>로 우리를 찾아온 건, 영화가 파격과는 조금 거리가 있기에 또 다른 느낌의 파격으로 다가온다. 영화는 제1차 세계대전 후의 독일과 프랑스를 배경으로 사랑과 용서, 거짓말과 진실, 외면의 정적과 내면의 격동 등에 휩싸인 인간상을 내보인다. 인간은 수많은 감정과 욕망의 소용돌이에 휩싸이면서도 꿋꿋이 살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프랑수아 오종 감독의 영화 경력의 전환점과 같다. 


전쟁 미망인 앞에 나타난 비밀스런 적국민 남자


전쟁으로 약혼자 프란츠를 잃고 아파하는 안나 앞에 적국민 남자가 찾아온다. 무슨 이유로? ⓒ찬란



1919년, 제1차 세계대전 패전 직후의 독일. 안나(폴라 비어 분)는 전쟁으로 약혼자 프란츠를 잃고 실의에 빠져 지내고 있다. 그녀가 버틸 수 있었던 건 아들을 잃고서도 그녀를 딸처럼 생각하고 보살핀 프란츠의 부모님 덕분이다. 아니, 프란츠의 부모님이 그녀 덕분에 버틸 수 있었던 것일 테다. 그런 독일 한복판의, 그것도 프란츠의 묘지에, 한 프랑스인이 나타난다. 


그는 아드리앵(피에르 니네이 분), 전전(戰前)부터 프란츠와 절친한 친구 사이였다고 한다. 프란츠의 마지막도 잘 알고 있는 그는, 프랑스인을 향한 적대감에도 불구하고 프란츠 부모님의 신뢰를 얻는다. 안나도 그에게 차츰 마음을 연다. 하지만 아드리앵의 눈은 자주 흔들리고 프란츠 부모님과 안나와 함께 있을 때 종종 불안해 한다. 알 길 없는 불안한 연유, 비밀을 간직하고 있는 것 같다. 


아드리앵은 돌연 고향인 파리로 돌아간다. 그 직전 더이상 버틸 수 없었던 그는 안나에게 비밀을 털어놓는다. 다소 충격적인 그 비밀은, 그가 프란츠의 오랜 친구가 아니라 전쟁 중에 프란츠를 죽인 독일군 출신이었다는 것이었다. 아드리앵은 프란츠 부모님과 안나에게 용서를 구하고 싶었던 거였다. 


이제 그만 안나가 자신의 삶을 살았으면 하는 마음과 이왕이면 아드리앵과 잘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던 프란츠 부모님은, 안나에게 아드리앵을 찾으라고 조언한다. 안나는 아드리앵의 비밀을 말씀드리지 않고 혼자만 간직한 채 파리로 향한다. 마치 1부가 끝나고 2부로 향하는 느낌이다. 그녀는 그를 찾을 수 있을까? 그녀와 그에게는 어떤 일이 기다리고 있을까? 


아름다운 정적, 영화 전반부


영화의 전반부는 흑백과 컬러를 오가는 와중에 아름다운 정적이 주를 이룬다. ⓒ찬란



비록 적국이지만, 비록 자식을 죽였을지 모를 적국민이지만, 모두 전쟁이 낳은 피해자들이라는 깨달음과 함께 용서를 넘은 포용이 영화의 전반부를 이룬다. 영화 외적인 요소들이 주를 이루기에 지루한 면이 없지 않아 있는데, 아름다운 슬픔과 역설적인 서정이 주는 감정적 호소가 깊이 있다. 영화를 다 본 후에 느낄 수 있는 점이지만, 격정적인 후반부의 느낌과 대조를 이루는 장치였다고 할 수 있겠다. 


감독의 의도가 잔뜩 들어 있는 흑백과 컬러의 조화가 눈길을 끈다. 영화는 흑백이 거의 전부를 차지하고 짧은 순간들만 종종 컬러로 내보이는데, 공통적으로 환희의 순간들이다. 문제는, 그 순간들이 암울한 현실에 비춰 당사자들은 모르지만 상황 상 현실을 더 암울하게 만들 순간들이라는 것이다. 아드리앵이 흔들리는 눈빛에도 불구하고 프란츠와의 거짓된 즐거운 한때를 말하고, 안나가 쓸쓸함이 잔뜩 묻은 목소리로 프란츠와의 즐거운 한때를 회상한다. 


더불어 곳곳에 도사리고 있는, 후반부 연속되는 격정적 사건들의 복선들도 눈에 띈다. 주로 아드리앵의 행동과 눈빛과 대사 등에서 대략이나마 알아차릴 수 있다. 다분히 안나의 시선에서 영화를 보고 느낄 수밖에 없기 때문인데, 그것들을 하나 하나 풀어내고 전에 없는 감정에 흔들리는 안나와 일심동체 되는 나를 느끼게 될 것이다. 


다양한 사건과 격정적 내면, 영화 후반부


안나가 겪는 다양한 사건 중에 내면에 몰아치는 격정들. 영화 후반부를 차지하는 것들이다. 우린 안나와 더불어 참으로 많은 것들을 보고 느끼고 깨닫는다. ⓒ찬란



안나가 아드리앵을 찾아 파리로 떠나면서 시작된다고 할 수 있는 후반부는, 똑바로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놓칠 수 있는 많은 중요 요소들의 모음이다. 거의 모든 장면, 대사, 행동, 표정에 의미가 부여되어 있다.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도 거기에 있고, 영화를 이루는 재미 요소도 거기에 있다. 


아드리앵이 용서를 빌고자 독일을 찾아왔던 전반부는, 안 그래도 정적인 독일이라는 곳에 더해 겉으론 즐겁지만 속은 타들어가는 아드리앵의 정황이 겹쳐 자칫 우울할 정도로 정적일 수밖에 없었다. 반면, 후반부는 프랑스 파리라는 당대 최고의 도시에 더해 전승국이라는 프리미엄을 업고 안나가 겪는 다양한 외적 사건들과 오락가락하는 내면에 의해 격정적이기 짝이 없다.


안나가 겪는, 안나가 프란츠와 겼었고 프란츠 부모님과 겪었고 겪고 있으며 아드리앵과 겪는 모든 것들이 정신없이 휘몰아친다. 그 하나 하나가 모두 의미 있게 다가온다. 사랑, 용서, 거짓, 진실, 회한, 이 모든 걸 이루는 욕망, 그 안에서 외롭게 죽어가는 인간 그리고 그럼에도 살아가는 인간. 순간이 곧 전체이고, 전체가 곧 순간이다. 


영화는 말한다. 인간이 위대한 건 그저 살아 있는 것이라고. 살아갈 이유 따윈 바라지도 않지만 오히려 죽어야 할 이유를 찾았음에도 살아 가는 그들. 생각지도 않은 희망을 주었다고 획기적인 방법으로 절망을 선사해도 살아 가려는 그들. 나도, 우리도 그렇게 살아간다. 그럼에도 살아간다. 안나와 아드리앵, 그리고 프란츠 부모님. 모두 프란츠를 잊으려 하지 않아도 된다. 아니, 잊으면 안 된다. 하지만,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프란츠와만 살아갈 순 없다. 계속 살아가기 위해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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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드니 빌뇌브 감독의 <그을린 사랑>


포스터의 홍보문구가 이토록 와닿는 경우가 많지 않다. 이 영화는 '모든 것을 다 갖춘 영화'이자 '한 여인의 위대한 여정'을 그렸다. ⓒ티캐스트


완벽에 가까운 영화를 보고 난 후 느끼는 참혹함을 아는가? 그때만큼은 다른 어떤 영화도 보지 못할 것 같은 두려움이 엄습한다. 적어도 그때만큼은 '이제 영화를 졸업해야 하는 건가?' 같은 황당무계한 생각이 드는 것이다. 영화를 좋아하고 즐겨보는 이라면 한 번쯤 겪어봤을 테다. 


드니 빌뇌브 감독의 <그을린 사랑>이 나에게 그런 경험을 선사해주었다. 일찍이 느껴보지 못한 당혹감인데, 다름 아닌 감독의 면을 보니 어느 정도 이해가 되었다. 드니 빌뇌브는 불과 서른한 살의 나이에 첫 장편영화를 내놓는다. 전 세계적인 호평 일색. 이어 내놓은 작품들도 마찬가지. 2010년에 내놓은 <그을린 사랑>부터 본격적으로 국내에도 소개된다. 하나 같이 명감독의 걸작들이다.


2010년대에 <프리즈너스> <시카리오: 암살자의 도시> <컨택트>는 전 세계적으로 큰 호평을 받았고 슬슬 흥행에도 시동을 거는 느낌이다. 올해 말에는 고전 SF 명작 <블레이드 러너>의 속편 <블레이드 러너 2049>를 35년 만에 내놓아 정점을 맞이할 예정이다. 그럼에도 <그을린 사랑>이 준 충격과 전율은 무엇도 따라하지 못할 그 영화만의 것이 아니겠는가, 생각한다. 


역사와 전쟁과 운명의 아픔조차 품어내는 한 여인


일개 개인이 맞서기에는 너무나도 큰 것들, 역사와 전쟁과 운명. 그러나 이 영화에서 한 여인 나왈 마르완은 자신의 모든 걸 걸고 맞선다. 아니, 품는다. ⓒ티캐스트



영화의 시작은 황당하고, 이어지는 전개는 조금 지루하다. 진도가 팍팍 빠지진 않는 듯하다. 그럼에도 시종일관 눈을 떼지 못하는 건, 기막힌 연출력과 꽉 짜인 각본에 있는 것 같다. 쌍둥이 남매 잔느와 시몽, 공증인에게 어머니 나왈 마르완의 유언을 듣는다. 죽은 줄 알았던 아버지와 그 존재도 모르는 형제를 찾아 자신의 편지를 전하라는 것. 그전까진 절대 장례를 치르지 말라는 유언이자 약속이었다. 쌍둥이는 어머니의 뿌리와 흔적을 찾아 중동으로 향한다. 


한편 나왈 마르완의 충격적 옛일을 들여다본다. 중동에서 기독교와 회교도의 전쟁이 한창인 1970년대, 기독교 집안의 딸 나왈, 회교도 집안의 아들과 사랑에 빠진다. 나왈 집안의 오빠들은 절대 용서받지 못할 그 사랑의 댓가로 그를 죽이고 그녀 또한 죽이려 한다. 할머니의 중재로 살아난 나왈, 하지만 그녀는 그의 아기를 임신한 상태다. 그 또한 용서받지 못할 대죄, 결국 아기는 태어나자마자 고아원으로 보내진다. 그녀는 아기를 반드시 찾을 것을 다짐하고 약속한다. 


도시에 있는 친척네로 보내진 나왈, 그곳에서 기독교도임에도 불구하고 회교도 난민들의 입장에 서서 활동한다. 이내 탈출해 목숨을 걸고 아기를 찾아나서는데, 끝내 찾지 못한다. 돌아오는 길, 회교도인 척 하고 차를 얻어탄다. 하지만 기독교도 민병대에 습격당해 몰살 당하고, 나왈은 다시 기독교도로 돌아와 홀로 살아남는다. 여기서 나왈은 결심한 듯하다. 기독교를 용서치 않겠노라고. 


계속되는 비극의 고리는 그녀를 놔주지 않는다. 이미 충분히 참혹한 비극이 그녀를 찾아 왔다고 생각했지만, 더욱 더 원형적이고 원초적이며 지옥불 같은 비극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다. 파괴적인 역사와 전쟁의 소용돌이가 주는 아픔보다 그녀를 더욱 옥죄는 건 인간의 힘으론 털 끝 하나도 어찌할 수 없는 운명의 소용돌이다. 그럼에도 우린 역사와 전쟁과 운명의 아픔조차 품어내는 한 여인을 볼 수 있다. 


사랑과 약속에서 비롯되는 비극의 고리 끊기


끊임없이 계속될 것이 분명한 비극을 마주하고, 사랑과 약속이라는 더없이 순결무구하고 위대한 것들과 맹세한 바를 지키고자 한다. ⓒ티캐스트



영화는 대번에 오이디푸스 신화를 우리 앞에 불러온다. 왕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하리라는 신탁 때문에 버려지는 오이디푸스. 우여곡절 끝에 살아남아 이웃 나라의 왕자로 성장해 결국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한다. 이 영화의 주인공 중 한 명이 오이디푸스의 현현이라 하겠다. 


고로 이 영화를 역대급 반전이 주는 쾌감과 감동과 전율로 포장하는 건 너무나도 쉬운 일이다. 하지만 굳이 그럴 이유가 없는 건, 그렇게 하지 않아야 하는 건 과정에서 보여주는 한 여인의 위대함 때문이리라. 오이디푸스가 아닌 오이디푸스의 어머니에게로 시선을 돌려야 한다. 결과의 반전이 아닌, 과정의 서사에 천착해야 한다. 


그녀에게서 '비극의 고리 끊기'의 한 단면을 볼 수 있다. 형용할 수 없이 넓고 깊은 품과 지극한 자기 희생이 바탕되지 않으면 절대로 불가능한 이 결단은, 영화 <똥파리> <우리를 침범하는 것들> 등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엿볼 수 있다. 하지만 이 여인은 차원을 달리하는바, 인간의 존재가치와 존엄성 파괴의 한복판에서 이루어낸 업적이다. 


그 모든 건 태초의 '사랑'과 사랑에의 '약속'에서 비롯된다. 반드시 널 찾아내 내 사랑을 줄 것을 약속한 것이다. 중심에 이 두 요소를 자리잡고는 그 어떤 것에도 흔들리지 않고 나아간다. 일찍이 이런 사랑은 목격한 적이 없다. 이리도 숭악한 것들 사이에 피어난 이리도 숭고한 사랑의 꽃을 본 적이 없다. 그렇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사랑의 주체도 객체도 당사자도 되기 싫다. 너무 그을린 사랑은 너무 아프다. 


포용, 조화, 그리고 함께 하기


무조건적인 끌어안음, 그리고 역시 무조건적인 함께 하기. 이는 영웅이라면 할 수 없고, 무명의 개인에게는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려 있다. ⓒ티캐스트



영화는 다름 아닌 인간 역사의 가장 오래되고 가장 치열한 전쟁을 배경으로 한다. 혹자가 보기에는 가장 쓸데 없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종교'가 그것인데, 종교라고 하는 숭고한 존재가 내뿜는 잔혹한 파멸을 이해할 수 없다. 그 안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빨려들어가 허무하게 존재를 말살당한다. 나왈은 사랑과 약속에의 '약속'으로 종교마저 헤쳐나간다. 자신이 자신일 수 있게 하는 집안과 가문과 종족과 나라의 기반인 종교를 저멀리 치워버리는 것이다. 그래야만 그나마 나아갈 수 있다. 


그렇게 그녀는 누군가에게는 입에도 올리기 싫은 비겁자가 되고, 누군가에게는 치를 떠는 가해자가 되며, 누군가에게는 가장 잔혹한 짓의 대상이 되는 피해자가 된다. 그렇게 될 걸 모를리 없지만, 이 역사와 전쟁의 한복판에 던져진 일개 개인으로서 '살아남는' 방법이 그것밖에 없었을 것이다. 자신을 포함해 모든 걸 내려놓고 버림으로써 비로소 얻는 생존. 그리고 앞으로 얻게 될 날을 손꼽게 될 사랑. 


그녀가 궁극적인 얻고자 했던 건 무얼까. 감독이 말하고자 했던 건 무얼까. 나왈이 끝의 끝까지 손에 쥔 채 놓지 않았던 생존과 사랑과 약속으로 얻고자 했던 게 도대체 무엇일까. 포용, 조화, 함께 하기가 그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녀가 받아들였는데 어느 누가 받아들이지 않을 쏘냐. 그녀가 어울리고자 하는데 어느 누가 엇나가려 하겠는가. 그녀가 함께 하길 바라는데 어느 누가 등을 돌리겠는가 말이다. 


결국 영화는 수천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종교 대립과 전쟁을 비판하는 방법론으로, 한 여인의 파란만장하고 기가 막히고 잔혹하기 그지 없는 인생사를 택한 것이다. 자신의 모든 것이라 할 수 있는 종교와 자신 자체를 저버리면서까지 지켜낸 것을 빗대어, 종교 대립과 전쟁도 그만둘 수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아울러 영웅과는 거리가 한참 먼 일개 연약한 인간이 이토록 위대할 수 있구나를 말하며, 그런 인간도 행할 수 있는 포용과 조화와 함께 하기를 한 집단, 한 종족, 한 나라가 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야말로 완벽에 가장 가까운 영화 중 하나다. 영화 따위가 이런 깨달음을 주고 이런 메시지를 던질 수 있다는 걸 눈앞에서 목격하고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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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지랄발광 17세>


입소문 덕분에, 또는 때문에 DVD로 직행할 운명이었던 <지랄발광 17세>가 개봉해 맹위를 떨쳤다. ⓒ소니 픽쳐스



"선생님, 시간을 뺏고 싶진 않은데 저 자살할 거예요."


네이든이 귀중한 점심 시간을 빼앗으면서까지 담임 선생님을 찾아와 다짜고짜 이런 황당무계한 말을 하게 된 연유는 무엇일까. 담임은 "나도 지금 막 유서를 쓰는 중이었어"라며 네이든을 세차게 나무라는데, 그래도 거기에 사랑이 묻어나 있어 다행이다. 


네이든은 어렸을 때 학교에서 따돌림을 당했다. 당연히 학교를 가기 싫어 했는데, 아빠는 다정하기 그지 없게 그녀를 대해주었던 반면 엄마는 마구잡이였다. 그런 그녀에게 천사같은 친구 크리스타가 다가왔는데, 이후 몇 년간 그녀의 말마따나 최고의 나날들이었다. 하지만 찾아오는 아빠의 죽음으로 최악의 나날이 시작된다. 


엄마는 집안의 어른이랍시고 간섭을 일삼지만 사실 가족에겐 관심이 없다. 그저 잘 커준 오빠 데리언에게만 의지할 뿐이다. 데리언은 잘 생기고 키도 크고 공부도 잘 하고 착하게 컸다. 반면 네이든은 자신이 너무 싫어한다. 못 생기고 몸매도 별로고 공부는 꽝이고 성격은 개차반이다. 그래도 그녀에겐 크리스타가 있다. 


하지만 데리언이 친구들을 초대해 파티를 연 어느 날 크리스타와 눈이 맞는다. 이보다 더 최악이 있을까. 더해 네이든은 소년원을 다녀온 노는 오빠에게 한눈에 반해 추파를 던지는데 거들떠도 안 본다. 자주 찾아가 상담을 받을라치면 매몰차게 대꾸하는 담임은 어떻고? 정말 살 맛 안 난다. 가장 끔찍한 건 오빠 데리언과는 정반대의 이런 외모로 평생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아무래도 죽어야겠다. 


우리나라에선 찾기 힘든 할리우드 하이틴 영화


우리나라에선 이제 더이상 하이틴 영화를 찾기 힘들다. 반면 할리우드에선 매년 찾아온다. <지랄발광 17세>는 할리우드에서도 찾기 힘든 수작 하이틴 영화다. ⓒ소니 픽쳐스


매년 빠지지 않고 찾아오는 장르 중 하나가 '하이틴'이다. 10대 후반쯤에 누구나 겪는 통과의례를 다양한 방식으로 보여주어 흥미와 공감을 이끄는 데 목적이 있다 하겠다. 하지만 요근래에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아예 씨가 말랐고, 할리우드에서는 흥행과 비평에 망조가 낄 것 알면서도 개봉할 수밖에 없다. 자연스레 우리나라엔 수입되기 힘든 것이다. 


와중에 <지랄발광 17세>라는 파격 제목의 하이틴 영화가 찾아왔다. 북미에서는 작년에 개봉했으니 반년 이상의 시간차로 개봉한 것인데, 아마 우여곡절이 많았을 거라 생각한다. 비슷한 시기에 7년 만에 개봉한 <플립>과 영화 외적으로 겹치는 부분이 있지 않을까. 관객들이 원해서 개봉에 성공하는 케이스가 많아지면 좋겠다, 싶다. 


이 영화는 그럼에도 흔한 하이틴 영화의 서사 방식과 캐릭터 구성을 따른다. 재기발랄하고 톡톡 튀는 주인공, 코미디 요소가 적절한 좌절을 겪고 감동적인 코드가 다분한 성장을 완성한다. 그 사이, 모든 게 해결되기 직전에 상당히 극단적인 선택과 그에 따른 위기가 함께 한다. 누구나 그런 때가 있었지 하며 공감하는 것이다. 


공감의 판타지 


'공감'이 최종 목표일 것이다. 다만, 그 과정이 상당히 판타지적이다. 이 영화는 그 부분들이 예쁘다. ⓒ소니 픽쳐스



네이든의 담임 브루너가 네이든을 좋아하는 어윈의 존재가 눈에 띈다. 네이든이 심심하면 찾아가 시비를 거는듯 노는듯 고민을 상담하는 대상인 담임. 대개 성장에 있어 굉장히 중요하기 때문에 진지한 문답이 오가곤 한다. 하지만 이들의 문답은 선문답 내지 동문서답에 가깝다. 여타 하이틴 영화에 비해 비현실적인 모습에 가까운데, 공감을 목적으로 하지만 결국 판타지에 가까운 하이틴 영화에 맞는 것 같다. 


어윈 또한 네이든의 깨달음과 성장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한다. 집도 무지막지하게 좋고 공부도 잘 하는데 친구도 많고 만화도 잘 그리고 영화제에 출품도 할 정도의 실력 있는 감독이기도 한... 그런 어윈이 별 것 없는 네이든을 좋아한다는 사실보다, 그런 어윈도 네이든과 똑같은 고민을 한다는 것. 그 나이에는 고민과 사랑이 전부라는 것. 


네이든의 좌절과 성장과 깨달음은 하나에서 파생된다. 그녀는 말한다. 자신이 특별한 존재였는 줄 알았는데, 그래서 '지랄발광'을 하며 다녔는데, 사실 평범하기 짝이 없는 존재였다는 것이다. 그걸 담임과 어윈에게서, 그리고 극단적인 경험을 하고서 깨닫는다. 평범함의 진리가 주는 성장, 평범함이야말로 특별함이 모여 평균을 이룬 집합체라는 깨달음, 모든 이들이 자신만의 고민을 떠앉고 있다는 눈물겨움.


평범함의 진리를 깨닫는 씁쓸함


결국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건 평범함의 진리. 평균이 가장 보기 좋다는 주장. 틀린 말은 아니나 씁쓸하다. ⓒ소니 픽쳐스



무진장 재미있고 상당한 깨달음과 먹먹한 감동이 함께 한 <지랄발광 17세>, 이 영화가 주는 깨달음과 감동에 동의하지만 씁쓸한 건 어쩔 수 없다. 그게 우리가 누구나 거쳐야 할 통과의례야 한다는 게 슬프기까지 하다. 사랑받고 싶고, 주목받아 주인공이 되고 싶어 하지만 그럴 수만은 없다는 사실, 나만의 고민과 깨달음이 사실 모두 하고 있고 했었다는 사실 말이다. 


우물 안 개구리가 우물 밖으로 나와 비로소 세상을 겪게 되었을 때의 환희도 존재하겠지만, 반드시 세상에 편입되어야만 비로소 한 인간으로서 제대로 된 구실을 할 수 있다는 건 너무 슬프지 않은가. 그게 결코 틀린 말이 아니라는 것, 그거야말로 세상을 구성하고 인간의 삶을 규정하는 기본 진리라는 것이 더욱 슬프다. 


어렸을 땐 누구나 자신이 특별한 줄 알았고, 당연히 특별한 사람이 될 줄 알았다. 하지만 특별하기는커녕 평범하기조차 힘들다는 걸 깨달았고, 언제부턴가 평범해지는 게 꿈이 되었다. 대표적인 성장 소설이자 수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데미안> <호밀밭의 파수꾼>이 모두 평범함으로의 나아감을 모토로 한다. 이 세상에 온 걸 환영한다. 남들을 본받고 남들을 따라하고 남들에게 인정을 받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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