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플립>


북미 개봉 폭망 이후, 7년 만에 압도적인 지지로 국내 개봉에 성공한 <플립>. ⓒ팝엔터테인먼트



'드디어'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의 소식이다. 영화 <플립>의 북미 개봉 7년 만에 국내 개봉(재개봉이 아니다)이 그것인데, 그동안 국내 팬들의 압도적인 지지 속에서도 꿋꿋하게 개봉을 하지 않았었다. 이유는 북미에서의 압도적인 폭망 때문일 텐데, 2010년 개봉 당시 1400만 불이라는 적지 않은 제작비를 들이고서 1/10 정도의 흥행 성적을 올렸으니, '북미 박스오피스 1위' 타이틀을 밥먹듯이 써먹는 배급사들 입장에선 들여올 이유가 없을 만도 하다. 더욱이 압도적인 지지로 이미 DVD 등으로 볼 사람은 다 봤을 거란 계산도 충분히 가능하다. 


그럼에도 이 영화를 극장에서 보고 싶은 이들이 참으로 많았던 것 같다. 나를 포함해서 말이다. 흔히 말하는 '인생영화' 리스트에서 종종 봐왔으니. 감독 롭 라이너는 올해로 70세가 되었다. 2010년에도 이미 60대였던 건데, 어쩜 이런 달달하고 귀엽고 풋풋한 영화를 만들었는지. 그의 필모를 잠깐만 들여다봐도 적지 않게 이해를 도울 수 있다. 일단 2007년의 <버킷리스트>를 차치하고서라도, 1990년대를 화려하게 수놓은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 <미저리> <어 퓨 굿 맨>이 그의 작품이다. 


로코의 시초가 만든 첫사랑 로맨스의 전형


롭 라이너 감독은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로 '로코' 장르를 개척했다. 그런 그의 첫사랑 로맨스가 기대되지 않는가? ⓒ팝엔터테인먼트


'전형적'이라는 말은 부정적인 단어에 속하는데, 여기서 태초의 '전형'을 만들기란 쉽지 않다. 불가능에 가깝지 않을까 싶은데, 누군가는 만들어낼 것이다. 롭 라이너가 1989년 내놓은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가 바로 그 태초의 전형이다. 이후 1990년대를 넘어 2000년대는 물론 2010년대까지 영화세계를 주름잡는 장르 중 하나인 '로맨틱 코미디'의 시초이다. 


그야말로 감각적인 감독이라 할 수 있는데, 그의 다른 작품들도 해당 장르를 개척하다시피 했다 말할 수 있겠다. 영화 <플립>은 그의 감각적인 노련함이 극대화된 작품으로, '전형적이다' '식상하다'라는 말을 들을 요지가 있을지언정 그 사랑스러움으로 모든 걸 충분히 커버할 수 있다. 마냥저냥 기분이 좋아진다고 할까?


길 건너에 이사온 브라이스를 보고 첫 눈에 반하는 7살 여자아이 줄리. 특히 그의 눈이 마음에 들었다. 첫만남부터 적극적으로 다가가지만, 브라이스는 달갑지 않고 부담스러운 눈치다. 그런 관계가 자그마치 6년이나 계속된 가운데, 브라이스는 어떻게든 줄리의 마음을 돌려 놓으려 노력한다. 대놓고 여자친구를 사귀고, 그녀의 간절한 도움 요청을 저버린다. 뭐든 함께 하자는 그녀의 요청을 저버리는 건 일상이다. 


어느 날부터 줄리가 암탉을 키우게 되었는데, 무수히 많은 달걀을 감당하지 못하고 브라이스네로 매일 같이 가져다주었다. 실은 브라이스를 보기 위해서 였지만, 아무튼 브라이스는 이 달걀들을 받는 족족 버렸다. 그녀가 닭을 키우는 곳이 더럽다는 이유 같지 않은 이유였다. 하지만 우연히 그 모습을 줄리에게 들키고 만다. 이후 줄리는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모습, 브라이스를 피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때부터 였나, 브라이스도 지금까지와는 다른 모습, 줄리가 신경 쓰이는 모습을 보인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이후로도 한두 번 줄리에게 큰 실수를 저지르고 그때마다 줄리가 브라이스를 피하는 모양새가 더 커진다. 역시 그때마다 브라이스가 줄리를 신경 쓰는 모양새도 더 커지고. 이제 브라이스가 줄리를 쫓아다닐 때다. 첫사랑의 풋풋하고 알콩달콩한 로맨스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첫사랑 로맨스를 대하는 할리우드와 우리나라


우리나라의 첫사랑 대명사, <클래식< <건축학개론>. 여기에 <플립>은? ⓒ팝엔터테인먼트



우리나라에서 첫사랑 로맨스의 대명사들이 있다. 2003년작 <클래식>과 2012년작 <건축학개론>이 그것이다. 우린 이 영화들에서 아련하고 아픈 첫사랑의 추억을 엿볼 수 있다. 그래서인가, 첫사랑은 이루어질 수 없다는 아픔, 그럼에도 그렇기 때문에 평생 생각하게 된다는 공식이 생겼다. 


미국은 그렇지 않은가 보다. 할리우드에는 물론 수많은 첫사랑 로맨스의 정석들이 있겠지만, 최신작 중에 우리들에게 <플립>이 차지하는 비중은 남다르다. 그래서 이 영화가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첫사랑 로맨스라고 말하기가 좀 그렇지만, 적어도 우리에게 와닿는 건 엄청나다는 걸 알기에 비교해도 손색없음을 말하고 싶다. 


이들의 첫사랑은 시기가 훨씬 빠르다. 10대를 전후 하기에, 아픔이 끼어들 자리가 없다. 제3자의 입장에서 느끼는 것이겠지만, 마냥 풋풋하고 귀엽고 앙증맞기까지 하다. 물론 좌충우돌, 갈등과 오해와 증오와 사과가 계속된다. 그건 어느 관계에서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우리와 다른 점은 이것들을 푸는 과정과 결과에 있다. 


우리는 채 풀지 못하고 여전히 오해와 어느 정도의 증오가 남은 채 시간이 흐른다. 그건 때로 단순 아픔을 넘어 한으로 남는다. 그리고 신파로 흐를 여지가 다분하다. 반면, 이들은 가차 없이 풀어버린다. 한 점 여지를 남기지 않는다. 그래서 사실 잘 들여다보면 해결하는 과정에서의 미비한 개연성과 결말 부분에서 정작 해결하지 못한 자잘한 것들이 눈에 띈다. 우리의 첫사랑 로맨스가 더 현실적인 것이다. 


로맨스 그리고 인생 성장 메시지


북미의 경우인지, 이 영화만의 경우인지, 첫사랑 로맨스에 로맨스만 들어가는 게 아니다. 거기엔 첫사랑 연령의 성장도 있다. ⓒ팝엔터테인먼트



오직 로맨스에 천착하기 십상인 우리네 첫사랑 영화와는 다르게 이들이 잊지 않고 넣는 게 있다면, 어리디 어린 이들을 위한 인생 성장 메시지이다. 브라이스와 줄리에게 다른 점이 있다면 집안 사정인데, 단도직입적으로 간단명료하게 말해 브라이스네는 잘 살고 줄리네는 잘 못산다. 


그렇지만 속사정은 많이 다른 듯, 브라이스네는 브라이스가 배울 만한 게 없고 줄리네는 줄리가 배울 만한 게 넘쳐난다. 물론 그건 왠만한 학교 공부 따위에서 배울 수 있는 정형화된 배움이 아니다. 그야말로 인생이 무엇인지 알 수 있는 배움이다. 줄리는 아버지에게서, 작은 아버지에게서, 오빠들에게서, 엄마에게서, 심지어 브라이스네 할아버지와 닭들에게서도 배운다. 


그녀는 크나큰 아름드리 나무에 올라가 누구도 보기 힘든 세상을 보았고, 직접 닭을 키우며 손수 달걀을 얻어 돈을 주고 팔고 고마움의 표시로 드리는 기쁨과 환희를 맛보았고, 지체장애인인 작은 아버지의 모습에서 인생의 또다른 면을 들여다보았다. 음악을 하고 싶어 하고 또 잘하는 오빠들에게서는 세상의 다양하고 넓은 품을 엿보았고, 브라이스네 할아버지와 함께 정원을 만드며 편견과 고정관념을 저버려야 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무엇보다 아이러니하게 아버지와 어머니의 부부싸움과 이후의 합리적이고 사랑스러운 대응을 통해 현실을 깨우칠 수 있었다. 


<플립>은 마냥 첫사랑 로맨스 영화만은 아니다. 성장 영화이기도 하다. 사랑과 성장이 사이좋게 한 발씩 나아가고 있는 느낌이다. 그래서 더 사랑스럽게 느껴지는 게 아닌지 모르겠다. 또 우리나라에선 이런 류의 영화를 찾아보기 힘들기에 미국보다 훨씬 엄청난 인기를 누리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한다. 이참에 '인생영화' 리스트에 <플립>도 추가하는 게 어떠신지? 후회는 없을 거라 자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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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헤드윅>


개인적으로 오래된 숙원 사업이었던 <헤드윅>. 드디어 풀어냈다. ⓒ백두대간



오래된 숙원 사업이 하나 있다. 영화 <헤드윅>을 소개하는 것인데, 개인적으로 이해하기 힘들기도 했거니와 영화를 볼 때마다 또 다른 것들이 나를 덮쳐와 벅찬 면도 있었다. 소설 <위대한 개츠비>가 이 영화와 더불어 숙원 사업 중 하나였던 적이 있는데 풀어 냈고, 이제 <헤드윅>만 남았다.


기억에 처음 본 게 대학생 때였으니 2004년 쯤이었던 것 같다. '영화와 철학' 비슷한 제목의 교양 과목에서 '젠더' 주제의 타이틀이었다. 그때는 정녕 '충격'으로만 다가와 지금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펼쳤던 것 같다. 두 번째가 2008년 쯤이었다. 이 영화를 극히 좋아하는 친구와 함께 봤는데, '아련'한 느낌으로 남아 있다. 세 번째가 3년 전쯤이었다. 혼자 봤는데, 다시 봐도 '재미'있구나 하고 지나갔다. 


그리고 이번에 네 번째로 아내와 함께 봤다. 스토리는 대략 알고 있으니 행간에 주목하려 했다. 조금은 보이는 것 같았다. '충만'한 기분이었다. 이 영화는 조금이라도 뭔가 보이면 성공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래서 십수 년만에 비로소 이렇게 소개하고자 한다. 충격적이고 재미있고 아련하고 충만하기까지 한 이 영화 <헤드윅>, 그 완벽한듯 허술한듯 한 매력에 흠뻑 빠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특별한듯 이질적인, 그러나 평범한 사랑과 성장 영화


십수 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겉모습만 보면 이질적일 수 있다. 하지만 결단코 이 영화는 평범한 사랑과 성장 영화다. ⓒ백두대간



가난한 록밴드 '앵그리 인치'를 이끌고 변두리 바에서 노래를 부르는 헤드윅(존 캐머런 미첼 분), 남자의 목소리와 여성의 몸매를 가졌다. 너무나도 좋은 노래를 너무나도 잘 부른다. '그녀'에겐 남자 친구 이츠학가 있다. 그런데 그는 여자 목소리를 낼 줄 알며 여자 가발을 몰래 쓰곤 한다. 그들은 맞지 않는 것 같다. 


헤드윅은 노래로 내래이션으로 대화로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베를린장벽이 세워진 1961년 동베를린에서 태어난 그, 한셀은 아버지에게 성추행을 당했던 것 같다. 어머니한테 쫓겨난다. 한셀은 미군 라디오 방송에 심취해 오븐 속에서 락을 듣는다. 엄마가 싫어하기 때문. 그에게 미국으로 갈 기회가 열린다. 그에게 반한 어느 미군 병사가 그와 결혼을 한 것이다. 대신, 그는 성전환수술로 '여자'가 되어야 했다. 하지만 수술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그에겐 일 인치의 살덩어리만 남게 되었다. 


그런 그녀에게도 사랑이 찾아온다. 미군 장군의 아들 토미인데, 그녀와 사랑에 빠진 것인지 그녀의 음악과 사랑에 빠진 것인지 모르겠지만 그들은 함께 한다. 그렇지만 그 문제의 일 인치 살덩어리 때문에 토미는 떠나고 급기야 헤드윅의 노래를 거의 그대로 훔쳐 세계적인 락스타로 발돋움한다. 헤드윅은 다름 아닌 토미를 스토킹하며 콘서트장에 딸린 레스토랑에서 노래를 부르는 것이었다.


<헤드윅>은 특별한듯 이질적인듯 거부감이 느껴질 수 있는 영화이지만, 실상은 평범한 사랑과 성장에 관한 영화다. 본래 사람은 남성와 여성이 한 몸에 있어 네 손과 네 발 달린 형체였는데 신의 노여움을 사 반으로 갈라졌기에, 자신의 반쪽을 찾아야 한다고 말하는 헤드윅. 그게 '사랑의 기원'이라는 것이다. 남자일까, 여자일까. 토미일까, 이츠학일까.  찾을 수 있을까. 


성에 대한 위대한 성취, 모두 맞다


감히 말하지만, 이 영화는 성에 대한 위대한 성취라 할 수 있다. 단순히 위대한 영화를 넘어선 그 무엇이다. ⓒ백두대간



1998년 존 카메론 미첼 주도 하에 만들어진 브로드웨이 뮤지컬 <헤드윅>, 2001년에 영화로 만들어진다. 세계 최고의 독립영화제인 '선댄스 영화제'에서 감독상을 수상하며 전 세계에 이름을 알리는 존 카메론 미첼과 영화 <헤드윅>. 이 영화가 넘어버리는 도식은 일반적인 사람이 생각하기 쉽지 않은 것이다. 특히 우리나라처럼 이분법적 사고가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사회에서는 말이다. 그래서 더욱 특별하다. 


베를린과 독일을 동과 서로 갈라버린 베를린장벽이 세워진 때 태어났다는 상징성을 몸소 보여주는 헤드윅, 남자에서 여자로 되었지만 남자의 흔적이 남아 있다. 그도 그녀도 될 수 없는 헤드윅은 그래서 반쪽을 사랑을 찾아 헤매는 것이다. 그러면 자신이 온전해질 수 있다고 믿는다. 그렇지만 갖가지 이유로 모두 떠난다. 


결론에 이르면 알게 되겠지만, 헤드윅은 자신에게로 돌아간다. 그렇게 깨달은 건 반쪽이 다른 누군가가 아니라 자신 안에 있다는 것. 즉, 젠더퀴어 선언에 이은 인정이다. 세상엔 남성과 여성만 있는 게 아니다. 영화에서 다양한 캐릭터들이 보여주는 성정체성과 사랑에 대한 혼란은, 그래서 틀린 게 아닌 다른 게 된다. 아니, 맞는 게 된다. 그런 혼란은 결코 이상한 게 아니라 정상적인 것이다. 


이어 역시 결론 때문에 혼란스러워지는 궁금해지는 헤드윅이 갖는 여러 정체성들이 있다. 헤드윅은 트랜스젠더, 드래그 퀸, 젠더퀴어로 변천사를 가지고 있다. 그 사이에도 알 수 없는 성정체성 변화와 혼란이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결국 헤드윅은 누구란 말인가? 어떤 성을 가지고 있단 말인가? 우린 답을 원한다. 


그러나 헤드윅은 답하지 않는다. 끊임없이 고민하고 변화하고 혼란스러워 하면서도, 그때그때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답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는 '제3의성'을 인정하는 도식조차 넘어서는 '상대적 성정체성'의 확립이다. 모든 성을 다 가졌다고 자각하는 '팬젠더'나 모든 성을 오가는 '젠더플루이드'가 그나마 비슷할까? 나로서는 더이상의 진척이나 이해는 힘들다. 성에 관한 위대한 성취인 것만은 분명하다. 


'성정체성 따위', 그 자체로 완벽한 한 인간


성정체성이 어쩌구 저쩌구 하는 걸 집어 던져버리자. 그리고 자신으로 들어갔다가 나오자. ⓒ백두대간


이 영화를 보면서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고 스스로를 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굉장히 무섭고 두려운 질문이고 돌아봄인데, 내가 남성이 아닌 다른 성정체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게 '끔찍'하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의 지극히 일반적인 모습이며 이상과 현실의 괴리이다. 이상은 모든 걸 다 인정하고 당연한듯 바라보는 것이지만, 현실은 끔찍하게 여긴다는 것이다. 


정확히는 '자신'이 그러하다고 생각할 때이다. 다른 누군가가 그러하다고 해서 끔찍하다고 여기진 않는다. 여기에는 다분히 교육에 의한 인식전환이 필요한대, 한 걸음씩 진전된 교육이 보이는 것 같다. 물론 오랜 시간이 걸릴 거다. 특히 우리나라에선. 최후의 대상은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될 것이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나여야만 한다. 내가 성정체성의 변화를 받아들일 수 있어야 진정한 인식전환이 가능하다는 말이다. 


헤드윅이 남자친구 이츠악의 변화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헤드윅은 자신의 변화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그 혼란을 정면으로 응시하지 않고 자꾸 밖으로만 눈을 돌렸다. 그렇지만 돌아오는 건 참담한 실패뿐. 결국 자신에게 눈을 돌려 정면으로 응시해 받아들이니 문제를 풀 수 있었다. 


쉽지 않다. 아니, 불가능에 가까울 수도 있다. 이렇게 해보자. 성정체성을 특별하게 보지 말고 '성정체성 따위'로 생각하자. 남자나 여자도 생김새와 성격과 목소리와 행동거지 등으로 완벽한 하나의 개인이 존재하는 것처럼, 수많은 성정체성도 그렇게 생각해보자. 그들도 그저 존재하는 것이다. 하나의 개인으로. 


모든 개인에 무슨 수식어를 붙이지 않는 것처럼 헤드윅은 그저 헤드윅인 거다. 트랜스젠더니 드래그 퀸이니 젠더퀴어니 따위의 수식어는 필요 없다. 이 영화가 궁극적으로 보여주려는 게 바로 그런 모습이 아닌가, 싶다. 그 자체로 완벽한 한 명의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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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제89회 아카데미 작품상 <문라이트>


제89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의 쾌거를 올렸다. 더욱이 사상 최초로 남여조연상을 흑인이 휩쓸었는데, 그 중 한 명이 <문라이트>의 메허샬레하쉬바즈 엘리다. ⓒ오드(AUD)



지상 최대 영화 '축제'인 '제89회 아카데미 시상식'이 지난 2월 26일 미국 LA에서 열렸다. 언제나처럼 쟁쟁한 후보들을 앞세운 사전 마케팅이 활개를 쳤는데, 이번엔 싱겁게 끝나버린 경향이 없지 않아 있다. 다름 아닌 <라라랜드> 때문인데, 일찍이 골든글러브 6관왕으로 역대 최다 수상을 하였고 아카데미에도 14개 노미네이트로 역대 최다를 기록한 바 싹쓸이가 예상되었었다. 제목 'la la land'도 아카데미의 성지 LA를 그대로 차용하지 않았는가. 그야말로 아카데미를 위한 영화였으니. 하지만 고작(?) 6관왕에 그치고 말았다. 그것도 메인 상 중 감독상과 여우주연상만 탔다. 


한편 8개 노미네이트 <문라이트>와 <컨택트>가 뒤를 따랐는데, 둘 중에는 <문라이트>가 압승을 거두었다. 수상 개수를 떠나, <문라이트>가 작품상을 탔기 때문이다. 일찍이 전 세계 영화제에서 <라라랜드>를 저멀리 따돌리는 수의 상을 탔는데, 한때 158관왕으로 많은 언론에 오르락내리락 했다. 급기야 아카데미 3관왕으로 175관왕을 넘어섰다고 한다. 사실상 <라라랜드>와 <문라이트>의 각축전이었던 거다. 


여기엔 '흑과 백'이라는, 결코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요소가 도사리고 있다. <라라랜드>가 백인의 꿈을 티끌없이 아름답게 그려냈다면, <문라이트>는 흑인 소수자의 성장을 어둡고 아픈 아름다움으로 그려냈다. 둘 다 치명적이게 아름답다. 다만 그 방식이 완연히 다른 바, 머리는 <라라랜드>를 보고 싶어 하지만 가슴은 <문라이트>를 보고 싶어 한다. 나는 가슴이 시키는 말을 듣고 <문라이트>를 보았다.


짧은 시간에 한 인간의 성장을 담다


평균 이하의 짧은 러닝타임에 한 인간의 성장을 오롯이 담았다. 한 시기의 순간순간을 담았을 뿐인데 오롯이 담았다고 느껴진 이유는, 그 순간에 담긴 모습이 완벽히 그 시기를 담아냈다는 것일 테다. ⓒ오드(AUD)



배경은 미국 마이애미 흑인 지구의 마약 소굴, 미국이 결코 좋아할 만한 내용은 아니다. 영화는 '리틀', '샤이론', '블랙'의 3부로 구성되어 있다. 샤이론의 유년, 소년, 청년 시절을 상징하는 별명들이다. '호모새끼'라고 놀림을 받는 한 작고 힘 없는 흑인 아이, 리틀. 여전히 놀림 받는 힘 없는 소년이지만 자신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알게 되는 샤이론. 과거를 청산하고 빈민가 출신 흑인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며 살아가는 블랙. 


우리는 짧은 시간에 한 인간의 성장을 지켜볼 수 있다. 물론 모든 면을 볼 순 없다. 그건 영화 사상 성장의 시간을 가장 완벽히 담아 냈던 <보이 후드>도 해낼 수 없었다. 무수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 자신을 만들고, 깨닫고, 변화하는 장면들만 볼 뿐이다. 그거면 충분하지 않을까 싶다. 아니, 이 영화라서 충분하지 않았을까. 


마약쟁이 엄마와 함께 살아가는 '리틀', 오직 케빈이라는 친구만 있을 뿐이다. 한없이 작고 힘 없는 아이는 호모라고 놀림 받는다. 도망가다가 마약 소굴로 들어가게 되었는데, 우연히 후안이 발견한다. 그는 일대를 주름잡는 마약상. 기댈 곳 없는 리틀은 엄마 대신 후안과 후안의 여자친구 테레사와 급격히 가까워진다. 이후 리틀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끼치는 후안. 빈민가 흑인이 지녀야 할 생각과 마음가짐, 행동을 일깨운다. 


'언젠가는 뭐가 될지 스스로 결정해야 해' '넌 지금 세상 한 가운데 있어' '달빛 속에선 흑인 아이들도 파랗게 보이지' '나도 엄마가 싫었지. 하지만 지금은 미칠듯이 그리워' 등 주옥같은 명대사를 리틀에게 전하는 후안. 상당히 도식적인 전개와 장면이지만, 꾸밈없이 다가오니 그저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 어두워야 빛이 존재하는 게 아니다. 그러면 그들은 한 몸이 아니지 않은가. 어둠을 뚫고 빛이 나오는 게 아닐까. 어둠과 빛은 한 몸인 것이다. 후안도, 리틀도 어둠이자 빛이다.


가장 들추기 싫은 모습, 하지만 너무나도 아름답다


희망도, 슬픔도 없는 공허로운 눈의 샤이론. 꿈과 희망의 나라 미국이 가장 덮고 싶어 하는 모습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감독은 이를 너무나도 아름답게 그려냈다. 이를 어찌하나. ⓒ오드(AUD)



리틀에게 희망이라는 게 있는 걸까. 그에겐 단순히 '소외된 사람'이라는 타이틀을 붙여주기가 민망하다. 소외라는 단어에 함축된 엄청난 무게를 감안하고라도 말이다. 사회로부터의 단절과 고립과 격리, 스스로에 대한 포기 등이 소외를 뜻하는 거라 한다면, 그는 소외의 모든 걸 지니고 있다 하겠다. 집안은 가난과 폭력이 난무하고, 무력감과 공허함과 혼란과 무의미가 몸을 휘감으며, 모두가 나를 업신여기고 놀리고 못살게 구는 것 같아 어디에도 눈을 둘 수 없다. 허공을 바라볼 뿐이다. 거기엔 슬픔도 없다. 


'희망'과 '꿈'의 나라 미국에서 가장 들추기 싫은 모습일 것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정작 영화는 너무나도 아름답다. 누구에게나 아름다운 순간이 다가오고, 순간이 영원같을 때가 있다. 리틀이 비로소 샤이론이 되는 순간, 샤이론은 인생의 지침이 된 후안의 '달빛 아래선 흑인도 파랗게 보이는' 체험을 한다. 그저 순간에 자신을 맡기는, 그때만큼은 난 껍데기의 내가 아닌 본질적 내가 된다. 


그러나 인생이 순탄치만은 않다. 샤이론은 본질이 파괴되는 수모를 겪고 또 다른 껍데기를 입을 수밖에 없는 선택을 한다. 이제 '샤이론'이라는 샤이론의 본모습은 아주 단단한 껍데기에 몇 겹이고 둘러싸여 절대 밖으로 내보일 수 없게 되었다. 그는 '블랙'으로 살아간다. 그가 아는 가장 단단한 껍데기 후안의 모습을 하고서. 


그렇지만 머지 않아 그의 본질이 다시금 도전을 받을 위기에 직면한다. 그의 본질을 일깨워준 순간과의 조우, 그의 얼굴엔 '블랙'이 아닌 '샤이론'이 비추고 자신감 없고 움츠러든 표정과 말 본새가 드러나며 슬픔조차 찾기 힘든 공허하기 짝이 없는 두 눈이 영화를 지배한다. 그는, 다시금 달빛 아래서 파랗게 보이는 체험을 할 수 있을까. 


이보다 더 아름다운 영화는 없다


이 '아름다운' 위대한 영화, 또는 아름다운 '위대한' 영화. 나는 이보다 더 아름다운 영화를 본 적이 없다. 앞으로도 이런 류의 아름다움을 이렇게 표현해낼 영화가 있을까? ⓒ오드(AUD)



영화는 상당 부분 헤르만 헤세의 세기의 베스트셀러이자 현대 성장 소설의 시초와도 같은 작품 <데미안>을 생각나게 한다. 그렇지만 단언컨대 그보다 더 위대한 성장을 다뤘다고 말할 수 있는 건, 한 아이의 성장이 뚫고 가야 할 것들이 너무나도 지독했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첩첩산중, 다 말하기도 힘들거니와 늘어놓는다해도 완전히 드러낼 수 없을 거다. 그럼에도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는 것도 그 위대함을 말해준다. 


절대 잊히지 않을 한 가지가 있다. 리틀과 샤이론과 블랙의 그 '두 눈'. 얼마나 캐스팅에 공을 들였을지 느껴질 만한 세 사람의 놀라운 싱크로율은 뒤로 하고서라도, 세 사람의 시기에 따른 두 눈의 공허함은 가히 치명적이다. 아무런 감정을 찾을 수 없는 두 눈은 모든 걸 말해준다. 이건 '경지'라고밖에 말할 수 없다. 이런 연기는 처음 본다. 


순간을 이끄는 색감과 OST는 영화의 품격을 한껏 높이는 데 일조했다. 특히 색감은 이 영화가 아름답다고 느끼는 데에 절대적 공헌을 했다. 블랙톤에 가까운 파스텔 톤의 색들이 영화의 중요한 순간 순간을 수놓는다. 블랙을 돋보이게도, 그렇다고 블랙을 묻히게도 하지 않고 조화를 이룬다. 우린 이 영화의 포스터부터 눈길을 떼지 못한다. 일정한 톤의 OST도 역시 중요한 순간을 일깨우는데, 안정감보단 긴장감을 느끼게 한다. 일종의 영화적 장치, 단조로울 수 있는 영화에 색깔을 입혔다. 


<와호장룡>은 '무협영화'에게 갖는 선입관에 철퇴를 내렸었다. 이토록 아름답고 철학적인 무협이 있다니. 무협에는 인간이 존재하지 않는 줄 알았는데 말이다. 부끄럽지만 <문라이트>는 '흑인영화'에게 갖는 선입관에 징벌을 내린 것 같은 충격을 내게 주었다. 누구나 편견 어린 시선을 가질 수밖에 없는 데 말이다. 이보다 아름다운 영화는 이전에도 이후에도 찾기 힘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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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오래된 리뷰] <렛 미 인>


하찮게 소모되던 뱀파이어, 와중에 뱀파이어 영화의 신세계를 연 작품이 <렛 미 인>이다. 토마스 알프레드슨 감독의 최고 데뷔작. ⓒ씨네그루 다우기술



1994년 <뱀파이어와의 인터뷰>의 대성공 이후 다양하게 재생산된 뱀파이어. <블레이드> <언더월드> <트와일라잇> 시리즈로 대변되는 액션 판타지의 주인공이 되어 참 많이도 고생했다. 그 중심에는 항상 영원한 삶과 가공할 만한 힘이 있었다. 찬란하게 시작된 현대판 뱀파이어물은 그렇게 하찮게 소모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와중에 뱀파이어 영화의 신세계를 연 작품이 있다. 북유럽에서 건너 온 잔혹하고 몽환적인 사랑과 성장 이야기.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로 격조 높은 스파이 이야기를 선보였던 토마스 알프레드슨 감독의 2008년 작 <렛 미 인>이다. 이 영화는 자그마치 그의 장편 영화 데뷔작이다. 데뷔와 동시에 최고의 감독으로 칭송받는다. 


스웨덴 출신의 감독이, 스웨덴을 배경으로, 정녕 스웨덴스럽게 연출해 낸 <렛 미 인>. 우리가 생각하는 북유럽 스웨덴 그 자체에, 그동안의 액션 판타지 마사지 때문에 우리가 생각하기 어려운 풍의 뱀파이어 이야기를 완벽히 입혔다. 하얀 설국과 빨간 피의 대비는 잊지 못할 최고의 조화다. 그 자체로 하나의 완벽한 미장셴. 영화를 그 미장셴으로만 보아도, 그 미장셴으로만 기억해도 충분할 정도이다. 


그 미장셴은 장면으로만 남지 않는 바, 영화를 관통하는 상징과 메시지 중 하나를 말하는 매개체이다. 하얀색은 무엇이고, 빨간색은 무엇일까. 아무래도 영화의 두 주인공인 인간 오스칼과 뱀파이어 이엘리를 상징할 텐데, 감독은 그들에게서 어떤 이야기를 끄집어냈을까. 우린 그 이야기에서 세상의 어떤 모습을 반추할 수 있을까. 


괴롭힘을 당하는 아이, 그에게 접근하는 뱀파이어


'돼지'라 불리며 괴롭힘을 당하는 12살 오스칼, 그에게 접근하는 12살 모습의 뱀파이어 이엘리. 그들은 어떤 모습을 보여줄까. ⓒ씨네그루 다우기술



12살 오스칼은 학교에서 '돼지'라고 불리며 괴롭힘을 당한다. 그는 집에 와서는 칼로 집 앞 나무에 해코지하며 자신을 괴롭히는 일당을 죽이는 꿈을 꾼다. 오스칼은 엄마와 단 둘이 사는데, 동성애자 아빠를 더 좋아한다. 그는 참으로 힘도 없고 의욕도 없는 무기력한 아이다. 그의 금발과 새하얀 피부가 잘 어울린다.


한편 12살 이엘리는 아버지처럼 보이는 이의 보살핌으로 살아간다. 그 보살핌이란 다름 아닌 어린 아이를 죽여 뽑아낸 피를 먹이는 것. 그녀가 뱀파이어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직접 사냥에 나서면 위험하기 때문에 누군가 대신해줄 필요가 있는 것 같은데, 그렇다면 아버지처럼 보이는 이는 뱀파이어가 아니라는 얘기. 그는 인간인 듯 보인다. 아버지는 아닌 것 같다. 그들은 어떤 관계일까? 


우연히 만난 오스칼과 이엘리, 하필이면 오스칼이 칼을 들고 나무를 해코지할 때다. 그 모습을 보고 이에리가 한 생각은, '이제부터 이 아이가 나를 먹여 살릴 것이다'. 반면 오스칼은 이엘리를 좋아하게 된다. 아버지처럼 보이는 이는 이엘리를 12세 때 만나 수십 년 동안 사랑하며 함께 해왔던 것. 오스칼이 그를 대신할 재목이다. 


이보다 아름답고 숭고한 사랑이 어디 있을까


영화는 두 주인공인 오스칼도 이엘리도 아닌 이엘리를 수십 년 동안 사랑해왔던 한 남자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렛 미 인(Let me in)', 들어가게 해줘. 이엘리의 사랑 방식이자, 이엘리를 사랑하는 방식이다.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사람을 죽여야 하는 그녀의 입장이 되어, 대신 사람을 죽여 피를 가져오는 극단적 사랑. 


이 기괴하고 잔혹한 사랑은 언젠가 반드시 파멸로 끝맺음을 낼 것이다. 이엘리의 전 사람도 그럴 것이고, 오스칼도 그러지 않을까. 그렇지만 '아름답다'고 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이보다 더 '숭고'한 사랑이 어디 있을까.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사랑한다는 건 이런 게 아닐까. 


그는 단순히 그 자신으로서 사람을 죽여 피를 가져오는 게 아니다. 그가 아닌 다른 이가 되어, 즉 이엘리가 되어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사람을 죽여 피를 가져오는 것이다. 모든 것에 앞서 자신을 버린 '희생'으로서의 사랑이다. 사랑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 중 가장 높은 경지의, 가장 하기 힘든, 비인간적이기까지 한 사랑의 방식이 희생 아닌가. 아마 그의 마지막은 이엘리에게 자신을 바치는 것이리라. 


약한 이의 본능을 깨우는, 다른 사랑 방식


숭고하고 아름다운 희생으로의 사랑과는 다르게, 오스칼과 이엘리의 사랑은 뭔가 다르다. 오스칼의 본능을 이용한 '계약' 같다고 할까. ⓒ씨네그루 다우기술



오스칼과 이엘리, 이엘리와 오스칼. 그들은 곧 사귄다. 하지만 오스칼이 이엘리의 정체를 알아차린다. 이엘리를 멀리 하는 오스칼, 상처 받는 이엘리. 뱀파이어다운 극단적 행동으로 오스칼의 본능을 자극해 더욱 가까워지는 그들. 이엘리는 이때다 싶어, 예의 그 '렛 미 인'을 시도한다. 교감을 마친 그들, 그들은 곧 하나다. 


이엘리와 이엘리의 전 남자의 렛 미 인 교감이 오랜 시간의 '사랑'이라면, 이엘리와 오스칼의 교감은 사랑 이전에 오스칼의 본능을 깨우는 것으로 시작된다. 무기력하기 짝이 없지만 반대급부로 살인의 욕망이 엄청난 오스칼의 본능을 이엘리가 교감을 통해 이끌어 낸 것이다. 난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사람을 죽여, 너에겐 그들을 죽이고 싶은 마음이 있지, 나를 대신해 그들을 죽이면 되겠네. 


여기서 하얀색과 빨간색의 극명하고 아름다운 대비가 떠오른다. 아무것도 없는 흰색의 오스칼에게 욕망으로 가득 찬 빨간색의 이엘리가 들어온 것이다. 어느 날 그를 괴롭히는 패거리의 수장을 다짜고짜 막대기로 때려 고막을 파열시키는 오스칼, 그러고 나서 히죽히죽 웃는 그의 모습에서 미래가 보인다. 이엘리를 위해서인지 자신의 본능에 의해서인지 둘 다인지 알 수 없는 걸로 사람을 죽여 피를 뽑아 이엘리를 먹여 살리는 그의 모습을. 


'사랑'이라 할 수 있을까. 아니, 일종의 '계약'처럼 보인다. 내 안에 있는 거대한 욕망 덩어리를 끄집어내게 해주면서 양심의 가책도 줄여주는 대신, 너를 내 평생 책임지고 먹여 살리겠다. 누군가는 '결혼'을 그런 식으로 생각할지 모르겠다. 그 또한 사랑의 또 다른 모습일까. 무조건 아니라고 할 수 없는, 한 번쯤 생각하게 한다. 그건 내가 이상한 걸까, 이 세상이 그렇게 만든 걸까, 자연스러운 걸까. 


'성장'하는 오스칼과 '소수·소외'의 상징 이엘리 


영화에서 오스칼은 '성장'한다. 본능을 깨우고 세상을 알아간다. 이엘리는 성장과 거리가 멀다. 그녀는 겉모습과는 달리 이미 늙을 대로 늙은듯. 다만, 그녀는 세상과 절대 어울릴 수 없는 '소수 소외'의 상징이다. ⓒ씨네그루 다우기술


이엘리는 겉모습은 12살이지만 이미 엄청나게 오래 살았다. 그녀에게 '성장'이란 단어는 어울리지 않는다. 반면, 오스칼에게 '성장'은 당면한 현실이자 반드시라고 할 만큼 치러야 할 대상이다. 그는 이엘리를 만나 단번에 너무도 큰 성장을 한 것 같다. '힘'이자 '권력'의 달콤함, 양육강식의 세계를 알아버린 것. 


남에게 괴롭힘을 당하며 아래에서 굽신굽신대다가 한순간에 남 위에 군림하는 그 희열을 안 것이다. 누구는 평생 가도 하지 못하는 걸 그는 어릴 때 한순간에 알아버렸다. 그가 한없이 가여워지는 순간이다. 


한편, 영화를 보는 내내 이엘리가 가엽고 불쌍했다. 어불성설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그녀는 정녕 이 시대 '소수·소외 계층'의 상징과도 같지 않은가. 이 세상에 자신을 알아줄 이 하나 없고, 자신에게 관심을 가져주는 이 하나 없다. 또한 다른 누구의 도움 없이는 먹고 살아가기 힘든 '취약 계층'의 상징과도 같다. 자신이 직접 먹고 살아가기엔 이 세상이 너무 위험(?)하다. 


그 이유는 그녀가 다르기 때문. 그녀는 단지(?) '사람의 피'를 원하는 것 뿐이다. 다른 무엇도 바라지 않는다. 그녀는 피를 마시지 않으면 죽지도 못한 채 영원히 고통 속에서 살아갈 것이다. 하지만 과연 세상이 용인할까? 물론 그 '다름'의 성질이 너무도 괴이쩍긴 하지만, 용인하지 '못하는' 게 아니라 '안하는' 것만은 확실하다. 


만약 신인류가 나타났다고 치자. 그것이 세상을 파멸로 이끌 수도 있는 능력을 가졌다고 치자. 물론 그건 능력의 유무이고 반드시 한다는 게 아니다. 뱀파이어가 사람을 죽일 능력을 가진 것과, 살기 위해 사람을 죽여 피를 마시는 것과는 별개인 것처럼 말이다. 우린 어떻게 할까? 세상은? 아마 무슨 짓을 써서라도 없애버리고자 할 것이다. 그것이 우리와 다른 이질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고 그렇게 조화로운 세상으로 나아가는 건 꿈에서나 가능한 말일까. 너무도 당연하고, 식상하지만 이렇게 또다시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계속 말해도 세상은 바뀌지 않으니까. 세상이 바뀔 때까지 말하고 또 말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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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500일의 썸머>


명작의 재개봉이 열풍을 넘어섰다. 여기, 6년 만에 재개봉한 영화가 있다. 기 개봉 당시의 기록을 넘어섰다. 수많은 재개봉 명작을 넘어선 것, 그것들과 어깨를 나란히 한 것, 무엇보다 겨우 6년 만에 명작의 반열에 올라 재개봉하게 된 연유가 궁금하다. 영화 <500일의 썸머> 포스터. ⓒ폭스 서치라이트 픽처스


명작의 재개봉이 열풍을 넘어섰다. 재개봉을 하지 않은 영화는 명작이 아니라는 등식이 생겨날 것 같은 지경이다. 본래 재개봉은 개봉 당시 큰 사랑을 받지 못했는데 입소문이 퍼져 열화와 같은 성원에 팬서비스 차원에서 시행하는 의미가 크다. 이제는 재개봉작이 큰 반향을 일으키는 경우가 많다. 2015년에는 <이터널 션사인>이 30만 명 이상을 동원하는 소위 '대박'을 터뜨렸고, 2016년에는 <인생을 아름다워>가 10만 명 이상을 동원했다. 


그리고 여기, 겨우 6년 만에 재개봉한 영화 <500일의 썸머>가 있다. 14만 명 정도 동원했던 6년 전 기 개봉 당시의 기록을 넘어섰다. 현재까지 모든 재개봉 영화 중 2위에 해당한다고 한다. 수많은 재개봉 명작을 넘어선 것, 그것들과 어깨를 나란히 한 것, 무엇보다 겨우 6년 만에 명작의 반열에 올라 재개봉하게 된 연유가 궁금하다. 


6년 동안 입소문이 퍼지며 끊임없이 재조명된 게 가장 큰 이유일 테지만, 감독과 배우들의 인지도 수직 상승도 큰 몫을 차지했다. 감독 '마크 웹'은 이 영화로 데뷔했고 이후 <어메이징 스파이더맨> 시리즈로 단번에 이름값을 올렸다. 영화의 질까지 따라간 건 의문이지만. 극 중에서 주인공의 여동생으로 잠깐 잠깐 얼굴을 비추는 '클레이 모레츠'는 어떤가. 영화 고르는 눈이 아직 모자라서 그런지, 흥행에서는 계속 미끄러지지만 여러 영화를 통해 그 얼굴과 이름을 전 세계에 알렸다. 


무엇보다 주연 배우 '조셉 고든 레빗'의 변화가 눈에 띈다. 그는 이 영화가 개봉할 당시만 해도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그렇지만 이후 <인셉션> <다크 나이트 라이즈>로 전 세계적인 인지도를 얻었다. 특히 한국에서는 '조토끼'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 이제는 어엿한 '원톱' 주연 배우로 우뚝 섰다. 아마 <500일의 썸머> 재개봉에 가장 큰 역할을 한 이가 바로 그일 것이다. 


100명이든 1000명이이든 모두 공감할 수 있는 영화 


영화는 만인의 만인에 대한 연애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100명이든 1000명이이든 이 영화를 보면 모두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 <500일의 썸머>의 한 장면. ⓒ폭스 서치라이트 픽처스



톰은 운명의 상대를 '기다린다'. 어느 날 회사에서 운명의 짝으로 확신할 만한 이를 보게 되는데, 사장 비서 썸머다. 그는 딱히 어떤 행동을 취하지 않고 기다린다. 소심해서 그런건지, 그래서 소심해진 건지는 아직 모른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썸머는 운명을 기다리지 않는다. 그렇다고 운명을 믿지도 않는데, 자유로운 연애를 추구한다. 어릴 때 이혼한 부모님의 영향이 크다고 한다. 


썸머도 톰이 호감이었나 보다. 톰이 충분히 먼저 다가갈 수 있었을 텐데, 썸머가 음악 취향을 물으며 먼저 다가간다. 그렇게 시작된 이들의 관계는 항상 톰의 기다림과 망설임, 썸머의 다가감과 되돌아옴이다. 그러면서 썸머가 조금이라도 다가오지 않는 걸 느꼈을 때 심하게 자책하며 친구들과 동생에게 고민을 털어 놓는다. 이 사랑이 너무 힘들다고. 썸머는 조금씩 '나쁜 년'이 되어 간다. 


정녕 찌질한 톰, 장담하건대 톰 같은 남자들 정말 많다. 필자도 그중 하나였다는 사실을 밝히지 않을 수 없다. 필자를 포함한 톰 같은 남자들, 이 영화를 보고 100% 공감하며 썸머에게 욕을 퍼부었을 게 분명하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톰을 가지고 논 거냐고, 말과 행동이 너무 다르지 않느냐고. 


영화는 감각적으로 톰의 썸머와의 500일을 보여준다. 그중 절반 정도는 썸머와 함께, 절반 정도는 썸머와 헤어진 후다. 사실 일상다반사의 하나인 만나고 헤어지는 과정을 보여줬을 뿐인데, 이 영화가 특별한 건 보는 이에 따라, 보는 이의 상황에 따라, 보는 이의 기분에 따라 다르게 느끼기 때문이다. 톰의 시선에서 보면 썸머가 나쁜 년이고, 썸머의 시선에서 보면 톰이 나쁜 놈이다. 제3자의 입장에서 보면 평범한 연애 이야기이기도 하면서, 어느새 자기 이야기가 된다. 결정적으로 같은 사람이 봤어도 연애 초보일 때 보는 것과, 시간이 흘러 연애 고수 또는 연애를 잘 이어나가고 있을 때 보는 게 완전히 다르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연애 이야기라고 할까. 100명이든 1000명이이든 이 영화를 보면 모두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톰의 시선, 썸머의 시선, 제3자의 시선


톰의 시선에서 보면 썸머가 나쁜 년이고, 썸머의 시선에서 보면 톰이 나쁜 놈이다. 제3자의 입장에서 보면 평범한 연애 이야기이기도 하면서, 어느새 자기 이야기가 된다. 이 영화는 반드시 두 번 이상 봐야 한다. 영화 <500일의 썸머>의 한 장면. ⓒ폭스 서치라이트 픽처스



톰의 시선에서, 톰을 옹호하는 목소리를 들어보자. 톰은 사실 잘못한 게 없다. 그는 단지 소심한 것 뿐이다. 소심해서 망설였고 기다렸다. 더해 운명을 믿었기에 굳이 행동을 할 필요가 없다고 느꼈다. 운명이란 내가 무엇을 하지 않아도 언젠가는 저절로 나타나는 게 아닌가. 내가 무엇을 하려 한다면 그건 더 이상 운명이 아니지 않는가. 그렇기에 톰은 아무 것도 하지 않았던 것이지, 콧대가 하늘을 찌르거나 한 게 아니었다. 


썸머의 시선에서, 썸머를 옹호하는 목소리를 들어봐야 한다. 영화는 오로지 톰의 시선만 볼 수 있기에 지나치기 쉽다. 그렇지만 썸머의 입장을 들여다봐야 영화가 완성된다. 썸머는 어릴 때 겪은 부모님의 이혼으로 사랑에 대해, 운명에 대해 평생 지울 수 없는 낙인이 따라 다닌다. 진정한 운명도 없고 사랑도 없다. 자유롭게 만나고 연애하고 헤어지면 되는 거다. 진지할 필요가 어디 있나. 


그런데 그런 그녀야말로 누구보다 사랑을 갈망한다. 독립적이고 진취적이고 자유로운 삶과 사랑의 방식을 추구하기에 먼저 다가가는 걸 꺼리지 않는다. 먼저 다가갔기에 먼저 발을 빼는 것도 꺼리지 않을 뿐이다. 그녀가 겪었던 대부분의 연애가 그렇게 시작되어 그렇게 끝난다. 그녀는 나쁜 년이 되기 일쑤다. 그녀라고 그렇게만 흘러가길 바라겠나? 만약 그녀가 다가가기 전에 한 발 빨리 다가오는 이가 있다면? 적어도 그녀가 나쁜 년이 되는 경우는 적을 거다. 


제3자의 객관적이고 일반적인 시선으로 보자. 누구에게 감정을 이입하지 않고 보면, 톰은 소심하고 찌질하다. 보기에 따라서 나쁜 놈이라고 할 수도 있다. 도무지 뭘 하려고 들지 않고 뭘 하지 못한다. 그 와중에 큰소리 치는 건 그라니, 그는 그녀를 사랑하는 게 아니라 그녀를 사랑하는 자신을 사랑하는 게 아닐까 싶다. 썸머는 오히려 불쌍하다. 시작부터 먼저 다가간 이후 매번 먼저 다가간다. 심지어 톰이 잘못을 했을 때도 썸머가 먼저 다가갔다. 그러니 지칠 수밖에. 그녀가 지쳤을 때 톰은 역정을 낸다. 그녀가 불쌍할 따름이다. 그런데 그녀의 그런 모습이 보는 이에 따라서 천차만별로 비추니, 더더욱 불쌍하다. 그녀가 불쌍하지 않다면, 그건 연애 초보 또는 연애에 무지한 소심하고 찌질한 운명론자일 뿐이다. 시간이 많이 흘러 이 영화를 다시 보시라. 


수많은 연인들에게 축복이 되길...


수많은 찌질한 남자들의 성장을 도모했다면, 영화는 수많은 연인들에게 축복이 될 것이다. 서로가 서로를 조금씩 알아가고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영화 <500일의 썸머>의 한 장면. ⓒ폭스 서치라이트 픽처스



제대로 된 연애를 해보지 못했던 때에 이 영화를 봤었다. 오래 있지 않아 정확히 톰과 썸머처럼 연애를 시작했고 연애를 했다. 그리고 그들처럼 헤어질 뻔 했다.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만큼 누구나 겪는 일상다반사처럼 말이다. 다행히 바로 그 분과 결혼을 했고 그녀에게 줬던 수많은 아픔들을 속죄하며 갚아나가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녀는 나에게 끊임없이 다가왔고 기회를 줬고 신호를 보냈고 실망을 했지만 돌아왔다. 이제야 조금씩 깨달아가는 나, 평생 다가갈 거라 다짐해본다. 


그렇게 찌질했던 때 본 <500일의 썸머>, 조금씩 깨달아가는 지금 재개봉에 맞춰 그녀와 함께 다시 보았다. 나는 두 번째로, 그녀는 처음으로 보는 거다. 나는 비로소 영화의 진면목을 그리고 썸머의 본 모습을 깨달았고, 그녀는 단번에 모든 걸 꿰뚫어 보았다. 이 영화는 톰의 성장과 나의 성장을, 그리고 수많은 찌질한 남자들을 도모했다. 


수많은 찌질한 남자들의 성장을 도모했다면, 영화는 수많은 연인들에게 축복이 될 것이다. 비로소 서로가 서로를 조금씩 알아가고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톰은 썸머가 비틀즈에서 링고 스타를 좋아한다는 걸 도무지 이해하지 못했는데, 삶의 궤적이 바뀌면서 영화를 적어도 두 번 정도 보았을 이들은 그걸 이해했을 것이다. 톰이 그걸 이해하지 못했다는 사실 자체가 머릿속으로 들어 오고,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고 이해해야 한다는 사실까지 도달한다. 


비록 만나고 연애하고 헤어지는 게 일상다반사라지만, 마음이 아픈 건 변함 없다. 그러니 부디 이 영화가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과거를 후회하더라도 '아, 그랬구나. 그랬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 현재와 미래를 위해 '아, 그렇게 해야 겠다. 그러면 후회 없이 행복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 말이다. 사랑은 서로가 서로를 생각하고 이해하려 하고 측은하게 여기면 되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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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드라이빙 미스 데이지>


깐깐하고 꽉 막힌 상류와 서글서글하고 활달한 하류의 잘못된 만남과 영원한 우정 또는 사랑 이야기는 굉장히 흔하다. <드라이빙 미스 데이지>도 그 흔한 이야기의 하나다. 영화 <드라이빙 미스 데이지> 포스터 ⓒ워너 브라더스



깐깐하고 꼬장꼬장한 전직 교사 출신 유태인 70대 할머니 데이지, 어느 누구도 그녀를 어찌 할 수 없다. 공장을 운영하고 있는 아들 불리, 그의 깐깐하고 성깔 있는 아내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그렇게 살아 왔고, 바뀌지 않을 거고, 굳이 바뀔 필요도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소소한 사고가 난다. 차를 끌고 장을 보러 가려다가 기어를 잘못 조작해 사고를 낸 것이다. 불리는 곧 흑인 기사 호크를 고용한다. 


가난했던 옛생각만 하며 부자가 된 현재의 모습을 뽐내길 싫어하고, 자신도 유태인으로 차별을 당하면서 흑인에 대한 나쁜 선입견을 가지고 있고, 종교에 대한 지나치게 확고한 신념으로 다른 종교(기독교)를 깍아내리는 데이지가 호크를 아니꼽게 보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가 뭘하든 사사건건 참견하며 하지 못하게 하고 그가 운전하는 차에 타지 않으려 한다. 동네 사람들의 시선 때문에 어거지로 차에 탄다. 



깐깐하고 꼬장꼬장한 전직 교사 출신 유태인 70대 할머니 데이지, 어느 누구도 그녀를 어찌 할 수 없다. 그녀는 그렇게 살아 왔고, 바뀌지 않을 거고, 굳이 바뀔 필요도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소소한 사고가 나 불리는 곧 흑인 기사 호크를 고용한다. 영화 <드라이빙 미스 데이지>의 한 장면 ⓒ워너 브라더스



인생의 황혼기에 완전히 바뀌는 특별한 경험


깐깐하고 꽉 막힌 상류와 서글서글하고 활달한 하류의 잘못된 만남과 영원한 우정 또는 사랑 이야기는 굉장히 흔하다. 모르긴 몰라도 인류 역사를 관통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드라이빙 미스 데이지>도 그 흔한 이야기의 하나다. 다만 이 영화만 같는 특장점이 있다. 


인간은 30세가 넘어가면 잘 바뀌지 않는다고 한다. 자신이 의도하지 않아도 그동안 체화한 것들이 겉으로 드러날 정도라는 것이다. 공자가 말씀하시길 30세면 '이립'이라 하여 '마음이 확고하게 도덕 위에 서서 움직이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는가. 하물며 70세라야? 70세면 뜻대로 행해도 어긋나지 않는 경지다. 


데이지 여사는 살아 왔던 대로 계속 살아가면 되는 나이에 있었다. 아무도 그녀를 탓하지 않는다. 그냥 그런 사람인가보다 하고 말 것이다. 그런 그녀가 180도 바뀐다. 성격이 아니라 세상을 대하는 눈이 달라진다. 거의 불가능에 가깝지는 그녀는 '해낸다'. 인생의 황혼기에 다달아 완전히 바뀌는 특별한 경험은, 보는 이에게도 특별한 경험으로 다가온다. 


데이지 여사는 살아 왔던 대로 계속 살아가면 되는 나이에 있었다. 그녀가 180도 바뀐다. 성격이 아니라 세상을 대하는 눈이 달라진다. 인생의 황혼기에 완전히 바뀌는 특별한 경험은, 보는 이에게도 특별한 경험으로 다가온다. 영화 <드라이빙 미스 데이지>의 한 장면 ⓒ워너 브라더스



그녀는 유태인이다. 자신도 미국의 백인 사회에서 알게 모르게 차별을 당한다. 사실상 흑인인 호크와 다를 바가 없다. 호크와 함께 삼촌 댁에 가는 도중 잠시 길 옆에 차를 세워두었을 때 경찰 두 명이 와서 '이 고급차를 왜 너같은 흑인이 타고 있냐'는 식으로 얘기한다. 그녀는 알지 못한다. 그들이 그녀에게도 유태인이라는 이유로 차별의 시선을 날린 것을. 그녀가 가던 회당이 KKK로 예측되는 이들에게 폭탄 테러를 당하는 일까지 당하게 된다. 흑인에 대한 나쁜 선입견으로 호크를 도둑으로 몰았던 일도 있다. 


그녀는 자신이 피해자라는 걸 몰랐을까. 아니면 피해자라는 걸 애써 감추고 살았을까. 알면서도 모른 채 살았을까. 그녀의 머릿속엔 유태인이라는 단어가 그런 식으로 비춰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대신 다른 게 들어 있다. 과거의 가난과 현재의 부자. 그녀가 흑인 가정부를 아끼는 이유가 힘들었던 지난 날을 함께 해왔기 때문인 것과 같은 맥락이다. 그런 시절을 함께 하지 않은 호크는 그녀에게 그냥 흑인일 뿐이다. 


괜찮은 삶, 끊임없이 부딪히고 깨닫고 성장하는 삶


영화는 20년의 세월을 그린다. 이미 초로의 노인인 데이지 여사는 치매에 걸려 요양원에서 지내고 호크는 운전을 할 수 없어 손녀딸이 태워주는 차에 타고 다니게 된다. 아이델라는 세상을 떠났고, 아들도 늙고 바빠 잘 챙기지 못하며, 며느리는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말로만 안부를 전하니, 그녀에게 남은 이는 호크밖에 없었다. 한순간 정신을 차린 데이지 여사는 호크에게 진심을 전한다. 


"자네는 나의 친구야, 가장 친한 친구."


보다시피 영화는 의외로 성장 영화다. 초로의 여인 데이지 여사의 성장기. 그 성장에 차별 철폐, 우정, 화해, 진심이 담겨 있다. 그 성장을 죽을 때까지 멈추지 않는다. 흔하디 흔하지만 특별한, 그래서 특별함을 많은 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었다. 어떤 사건사고 없이 몇몇의 대화로만 이루어진 이 단조로운 영화가 와 닿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그런 사실을 인지하게 되었을 때 직시하고 올바른 쪽으로 바꿔나가는 것이야말로 괜찮은 삶이고 잘 산 삶일 것이다. 그들이 부러운 듯 '운이 좋았다'고 말한 아이델라의 삶이 아니고. 영화 <드라이빙 미스 데이지>의 한 장면 ⓒ워너 브라더스



그들은 죽은 아이델라를 두고 '운이 좋았다'라고 표현한다. 왜 그렇게 말했을까. 그녀가 좋아하는 드라마를 보다가 죽음을 맞이해서? 고통스럽지 않게 자신도 모르는 새 죽음을 맞이해서? 말년의 비참한 꼴을 보지 않고 죽음을 맞이해서? 생각해봐도 그들이 그렇게 말한 정확한 이유를 모르겠다. 다만 영화의 맥락을 통해 이해해 볼라치면, '흑인의 삶치곤 괜찮은 삶이었다' 정도겠다. 씁쓸하다.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 자신이 차별 당하고 있는 사실을 이해하려고도 하지 않고 이해하지도 못한 채 '분수에 맞는' 삶을 사는 게 괜찮은 삶이고 잘 산 삶일까. 물론 그런 사실을 인지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체념한 채 살아가는 것보다는 괜찮은 삶이겠다. 여기서는 '아는 게 힘'이라기보다 '모르는 게 약'이지 않을까. 


그렇다면 그런 사실을 인지하게 되었을 때 체념하는 게 아니라 정확히 직시하고 올바른 쪽으로 바꿔나가는 것이야말로 괜찮은 삶이고 잘 산 삶일 것이다. 데이지 여사, 그리고 호크의 삶이 바로 그런 삶이다. 그들이 부러운 듯 '운이 좋았다'고 말한 아이델라의 삶이 아니고. 그녀의 삶은 '충실했다'고 표현하는 게 맞지 않을까. 결이 조금 다른. 


많은 사람들이 아이델라의 삶을 살아간다. 그저 살아가는 데 충실한 삶, 그 또한 어떤 의미에선 위대한 삶이다. 데이지 여사의 삶도, 호크의 삶도, 많은 이들에겐 상당히 다른 차원의 삶이다. 나는 아직 정하지 못했다. 어떤 삶을 살아갈지, 또 어떤 삶을 살 수 있을지. 부러운 삶은 아이델라의 삶일 것이다. 하지만 살고 싶은 삶은 데이지 여사와 호크의 삶이다. 끊임없이 부딪히고 깨닫고 성장하는 삶 말이다. 괜찮은 삶이길 바란다. 괜찮은 삶이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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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대표 소설 읽기] <무진기행>


<무진기행> 표지 ⓒ민음사


주인공 윤회중은 서울의 복잡한 일을 피해 고향 '무진'을 찾는다. 배경 좋고 돈 많은 부인과 제약회사 사장인 장인, 그 회사에서 전무 승진을 위해 벌어질 수밖에 없는 귀찮고 복잡하고 마음에 맞지 않는 일을 피해서였다. 속물 근성이 판을 치는 속세를 떠나 잠시 머리를 식히러 왔다고 하면 맞을 것이다. 


무진은 윤회중이 나이가 든 뒤로 몇 차례 찾았던 곳이다. 서울에서의 실패로부터 도망쳐야 할 때나 새출발이 필요할 때였다. 그렇지만 무진이라고 하면, 윤회중은 어둡던 청년 시절이 생각나곤 했다. 긴장이 풀리고 느슨해지지만 말이다. 


여행으로 전근대와 근대의 대립을 느끼고 성장을 한다


누구나의 고향이 다 그럴까. 떠나온 지 얼마 되지 않는 나의 고향은 무진과 비슷하다. 30년 가까이 지낸 그곳은 높디높은 고지대에 위치해 있어, 무진의 안개처럼 먼 곳에 있는 것으로부터 사람들을 떼어 놓았던 것이다. 그곳에 가면 왠지 긴장이 풀리고 느슨해지곤 했는데, 오히려 윤회중이 무진에서 그랬던 것처럼 더러운 옷차림과 누런 얼굴로 방에 처박혀 있곤 했다. 그건 비단 나뿐만이 아니었고 내 동생 또한 그러했다. 


김승옥의 대표작이자 1960년대의 대표작인 <무진기행>은 여러 형태로 읽힌다. 무진을 다녀오는 여행 소설, 짧은 여행임에도 성장을 경험하는 성장 소설, 전근대와 근대가 각축을 벌이는 역사 소설로 말이다. 이들은 얽히고설켜 맞물려 있다. 여행으로 전근대와 근대의 대립을 느끼고 성장을 한다고 할 수 있겠다. 


윤회중은 끊임없이 서울과 무진의 대립되는 이미지를 상기한다. 서울의 도시, 햇빛, 현재, 근대가 무진의 시골, 안개, 과거, 전근대와 대립한다. 그 대립의 향연 안에서 그는 고민하고 갈등한다. 자신의 진짜 모습이 무엇인지, 어디에서 어떻게 찾을 수 있는지, 결국 그는 무진을 떠나 서울로 가면서 부끄러움을 느낀다. 속세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무기력함을 깨닫은 것이다. 성장을 했다. 


주인공 윤회중의 과거, 현재, 그리고 지금


그가 무진에서 만나는 박, 조, 하인숙은 그가 말하는 것처럼 또 다른 그다. 중학교 후배이자 모교 국어교사로 있는 박은 과거의 그다. 순수하고 진지하지만 가난하고 비현실적이다. '무진'이라고 할 수 있겠다. 동창이자 세무서장으로 있는 조는 그의 현재다. 지극히 세속적이고 출세지향적이다. '서울'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하인숙은 조금 특별하다. 그녀는 서울에서 음대를 나와 박과 같은 중학교 교사로 있다. 성악을 공부해 졸업 연주회 때 '나비부인'의 <어떤 개인 날>을 불렀다고 한다. 하지만 현실은 흔한 유행가 <목포의 눈물>이다. 그녀가 부르는 <목포의 눈물>은 이전에는 없었던 새로운 양식의 노래였다. '서울'과 '무진' 사이 어딘가겠다. 그가 처한 지금의 상황과 가장 맞닿아 있는 인물이다. 


"그 양식은 유행가가 내용으로 한느 청승맞음과는 다른, 좀 더 무자비한 청승맞음을 포함하고 있었고 <어떤 개인 날>의 그 절규보다도 훨씬 높은 옥타브의 절규를 포함하고 있었고, 그 양식에는 머리를 풀어헤친 광녀의 냉소가 스며 있었고 무엇보다도 시체가 썩어 가는 듯한 무진의 그 냄새가 스며 있었다." (본문 46쪽 중에서)


도망치더라도 최소한의 '부끄러움'을 느꼈으면


이 소설은 방황하는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고민하는 존재를 그렸다. 현실은 서울로 대변되는 것들이고 이상은 무진으로 대변되는 것들인데, 문제는 무진이 마냥 이상으로 그려지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곧 전근대와 근대의 대립으로 나타난다. 자본주의의 대두로 근대가 출현해 많은 사람들이 축복을 받지만 자신을 돌아보며 근대, 즉 속세를 버리는 이도 있다. 윤회중은 버리지는 못하고 가끔 도망만 치는 겁쟁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가 도망치는 무진은 그에게 어두운 과거를 상기시키고 우울하게 하고 혼란스럽게 만들기까지 하는 것이다. 어느 곳에도 적을 둘 수 없고 어느 곳에서도 진정한 자신을 찾을 수 없다. 


그렇게 보면 이 소설은 반(反)근대를 내세운 것 같지 않다. 얼핏 봤을 땐 그렇게 느껴질 수 있지만, 전근대와 근대의 대립에서 방황하는 이를 그리며 오히려 근대 쪽으로 더 기울어졌으면 기울어졌지 반근대는 아닌 것이다. 그렇지만 근대 쪽으로 기울어지는 자신을 보며 부끄러움을 느끼는 걸 보면 또 그렇지도 않다. 


그래서 윤회중은 하인숙에게 특별한 감정을 느꼈나 보다. 자기 자신을 보는 것 같아서. 그럼에도 그는 하인숙을 구출해줄 수도 구원해줄 수도 없다. 부끄러운 그곳으로 돌아가 혼란스럽지도 어둡지도 않은 일상을 즐겨야 하기 때문이다. 


나라고 해도 돌아왔음직하다. 그러면서 또 그곳으로 도망쳤을 것이다. 반복과 후회와 성장. 이 루틴은 아마도 평생 계속되지 않을까. 그때마다 최소한 '부끄러움'은 느끼는, 그런 삶이길 바랄 뿐이다. 그것마저도 안 되면 내가 정말 싫어질 것 같다. 이 불안의 줄타기를 계속하는 게 가능할까? 지금은 알 수 없다. 그때그때 잘 이겨내는 수밖에. 


<무진기행>(민음사)의 여러 단편 중 '무진기행' 한 편에 대한 서평입니다. 

앞으로도 '한국 대표 소설 읽기' 시리즈는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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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브루클린>


영화 <브루클린> 포스터 ⓒ이십세기폭스코리아


1950년대 아일랜드에서 미국으로 이민을 간 여성의 삶에서 무엇을 느끼고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무료한 일상을 뒤로 한 채 막연하게 더 나은 삶을 찾아 떠났거니와 집과 가족과 일과 사랑 사이에서 방황하는 모습은 흔히 볼 수 있겠지만, 거기에 인생을 건 절박함과 필사적인 모습이 비춰지지 않을 것이기에 쉽게 공감하기 힘들지 않을까. 


영화 <브루클린>은 대략 그런 정도의 단펵적인 정보를 얻은 후에 본다면, 훨씬 큰 재미와 감동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눈물을 짜내는 절박함 대신 공감 어린 성장 스토리가 있고, 지극히 개인적인 사랑놀음과 고민 대신 가족과 집 그리고 사랑 사이에서 고민하는 진정한 휴먼 스토리가 존재한다. 큰 갈등 없이 잔잔하지만, 그렇다고 전혀 우울하지 않은, 하지만 눈물샘을 자극하며 미소까지 짓게 만드는 그런 영화다. 


아일랜드 시골 소녀의 미국 상경 성공기


한 마디로 아일랜드 시골 소녀의 미국 상경 성공기라고 표현할 수 있겠는데, 요즘 영화 스타일에서는 좀처럼 나올 수 없는 비쥬얼과 스토리인 것 같다. 평범한 아일랜드 소녀 에일리스가 언니의 주선으로 미국에 가게 된다. 도착도 하기 전에 엄청난 고생을 하는데, 그건 도착해서 생활하고 일을 할 때도 마찬가지다. 특히 향수병은 어찌해볼 도리가 없는 불치병과 같은 것이다. 


10여 년 전, 나도 먼 타국 땅에서 1여 년간 살아본 적이 있다. 호주 브리즈번. 미국 브루클린과 이름뿐만 아니라 여러가지로 비슷한 느낌이랄까. 나도 에일리스처럼 초반에 고생을 많이 했고 향수병으로 극심한 우울을 겪었다. 아무리 그곳에 동향 사람들이 많아 '고향' 같은 느낌이 들었지만, 결코 '집'은 될 수 없었다. 참 많이 울었고 나를 달래기 위해 술도 참 많이 마셨다. 


영화 <브루클린>의 한 장면. ⓒ이십세기폭스코리아



에일리스는 향수병을 사랑으로 치유해 나간다. 아일리쉬 파티에서 우연히 이탈리아계 청년 토니를 만나 금세 사랑에 빠지게 된 것이다. 더할 나위 없이 순수하고 착하고 잘생기고 성실한 토니에게 에일리스는 조금씩 마음을 연다. 하지만 외로운 타국 땅에서는 사랑과 외로움을 착각하기 쉽다. 에릴리스는 고민 끝에 진심을 전한다. 사랑한다고. 


사랑을 하면 그곳이 곧 '집'


사람은 어디서든 사랑을 한다. 사랑을 하면 그곳이 '집'처럼 느껴진다. 가족들과 함께 하는 집이 집 같지 느껴지지 않는다면, 가족들끼리 사랑의 감정을 주고받지 못하고 느끼지 못하며 오히려 불편하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타국 땅에서는 또는 외롭고 힘든 사람들끼리 있을 때는, 불편한 감정보다 서로 의지하고 아끼는 감정을 주고받곤 한다. 나 또한 그러했고 많은 사람들도 그렇게 제2의 고향, 제2의 집을 만들어 간다. 


에일리스 또한 점점 아일랜드를 잊고 브루클린을 집으로 생각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사랑과 일과 인간관계에서 절정의 행복을 맛보게 되는 그 때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식을 듣는다. 언니의 갑작스런 죽음. 에일리스는 고민에 휩싸인다. 이제는 집이 되어 버린 이곳을 두고 다시 그곳으로 돌아갈 것인가. 비록 금방 다시 돌아올 거라고 약속을 하겠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다시 돌아갈 수밖에 없다. 다른 도리가 없다. 


영화 <브루클린>의 한 장면. ⓒ이십세기폭스코리아



다른 이유가 없으니 어쩔 수 없이 갔다가 금방 다시 돌아온다는 건, 말은 쉽지만 실행은 일생을 두고 고민해야 할 문제다. 인생이란 정녕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르는 것이기에, 심사숙고하는 것도 모자라 하늘에 맡겨야 한다는 생각까지 하게 만든다. 더구나 1950년대라면 무게가 지금보다 훨씬 더 나갈 것이리라. 


사랑스럽고 아름답다


<브루클린>은 이 봄날에 연인과 함께 보기 더할 나위 없는 영화다. 사랑스럽고 아름답다는 진부하지만 가슴치는 표현이 적절할 듯하다. 여자주인공의 표정과 몸가짐의 변화에서 오는 확연한 성장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뿌듯함을 금치 못할 것이다. 누구나의 한때를 보는 것 같다 가슴 먹먹하고 흐뭇해진다. 


남자주인공이야말로 이 영화가 갖는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분위기에 방점을 찍는다. 그처럼 순수하고 착하고 성실한 청년이라면 누구나 좋아할 것이다. 또한 한 여자만을 바라보며 사랑하고 기다리는 남자는 참으로 멋있다. 그로 인해 에일리스는 힘을 내 웃음을 되찾고 비로소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 다름 아닌 그곳에서. 그렇게 영화에 빛이 살아난다. 


영화 <브루클린>의 한 장면. ⓒ이십세기폭스코리아



대부분의 삶이 단조롭고 소소하다. 바로 그 단조롭고 소소한 것에 진짜 삶이 있을지 모른다. <브루클린>은 심지어 사소하기까지 하다. 성장과 사랑과 죽음과 헤어짐과 만남, 그 얼마나 사소한 조각들인가. 삶에 있어 누구나 한 번쯤은 해보고 겪어봤을 것들이 아닌가. 그래서 그것들로만 이루어진 영화는 더 이상 찾아보기 힘든 것이 아닌가. 그럼에도 이 영화가 가슴을 울리는 건, 우리가 여전히 그것들을 찾고 갈망하고 곁에 두고 싶어한다는 증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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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4등>


영화 <4등> 포스터 ⓒCGV아트하우스



4등은 참 애매하다. 특히 스포츠에선 애매하다못해 잔인하다. 1, 2, 3등만 시상식에 오를 수 있다. 그래서 누구는 4등이나 꼴등이나 매한가지라고 생각한다. 누구는 4등이라서 다른 누구보다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이것이 4등이 참으로 잔인한 이유다. '희망고문'이라고 할까. 


영화 <4등>은 자타공인 수영에 소질이 있지만 대회만 나갔다 하면 4등을 면치 못하는, 즉 메달을 목에 걸지 못하는 소년 준호의 이야기다. 그에겐 누구보다도 그를 챙겨주고 걱정하고 괴롭히는 극성스러운 엄마가 있다. 그녀에겐 4등이 꼴등과 다를 바 없지만, 그래도 준호가 소질이 있다는 걸 알거니와 하필 4등이기 때문에 미련을 버리지 못한다. 그녀는 어떻게든 메달을 따게 해준다는 코치를 찾아간다. 


한편 준호는 왜 1등을 해야 하는지도 모르고 굳이 1등을 하고 싶은 마음도 없다. 수영에 소질이 있는 건 알지만, 수영이 좋고 물이 좋은 것 뿐이다. 물에 있을 때 편안하고 좋은데, 자꾸만 1등을 하라고 하면 그건 체질에 맞지 않는다. 그래도 이왕이면 메달을 따는 것도 나쁘진 않을 테니 엄마 따라 코치에게 배워보고자 한다. 신기하다. 성적이 올랐다. 그런데 이 코치가 사정없이 때리는 게 아닌가. 


영화 <4등>의 한 장면. ⓒCGV아트하우스



오로지 1등을 위해서


영화는 이처럼 세 축을 중심으로 흘러간다. '아들 준호를 위해서' 오로지 1등을 외치는 엄마, 역시 '준호를 위해서'라면 당연히 체벌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코치 광수, 그리고 이들 사이에서 갈피를 못 잡고 흔들리지만 수영이 하고 싶다는 것 하나는 잘 알고 있는 준호. 코치 광수는 때려야만 몸이 체득하고 말을 잘 듣고 악이 생겨 잘 할 수 있게 된다고 말하고, 준호는 1등하는 건 싫진 않지만(1등을 해야 하는 이유를 잘 모르겠다) 맞는 건 싫다고 말하며, 엄마는 아들이 맞는 건 싫지만 맞아서 1등을 하면 나쁠 것 없다고 말한다. 


"형, 1등하면 기분 좋아요? 그런데 왜 1등을 하려는 거예요?"


누가 옳고 누가 틀린 걸까. 여기에 옳고 그름이 존재하는 걸까. 중요한 건 당사자인 준호의 마음일 텐데, 또 그렇지만도 못한 현실이다. 엄마 입장에서는 아들이 커서 제 구실을 못할까봐 걱정이다. 경쟁의 정점인 스포츠에서 순위권에 들지 못하고 어떻게 제 구실을 할 거란 말인가. 극 중 엄마의 모습에 마냥 너무하다고만 생각할 수 없는 부분이다. 


영화 <4등>의 한 장면. ⓒCGV아트하우스



코치 광수의 경우엔 조금 다르다. 그는 가해자임에 분명하지만, 논란의 여지가 있는 이유로 인해 가해를 했다. 또한 그도 피해자다. 그는 오래 전 아시아 신기록까지 이뤄낸 적이 있는 천재였다. 하지만 술도 마시고 노름도 하는 등 방탕한 생활을 일삼았고, 그 천재성에도 불구하고 감독에게 체벌을 받아 그 분을 참지 못하고 대표팀을 뛰쳐 나왔다. 참으로 안타까운 사연인데, 그에겐 굳이 스승이 필요없었을 것이다. 여하튼 그렇게 체벌(폭력)이 되물림 되었다. 


<위플래쉬>와 <4등>


이쯤에서 1년 전 개봉해 많은 인기와 논란을 불러 일으켰던 <위플래쉬>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악마와 같은 인신 공격과 한계를 뛰어 넘는 스파르타식 훈련으로 천재성을 끄집어내는 플래처의 방식은 광수와 비슷하다. 그리고 그 방식을 뿌리치고 그만둬버리지만, 열정과 관심을 뒤로 돌리지 못하고 자신 만의 방식으로 자신의 천재성을 끄집어내는 앤드류는 준호를 연상시킨다. 


영화 <위플래쉬> 포스터 ⓒ소니 픽처스 클래식스



개인적으로 <4등>이 훨씬 유려하게 풀어낸 것 같다. 앤드류는 플래처를 뛰어 넘는 엄청난 연습으로 플래처 앞에서 보란듯이 훌륭한 연주를 선보이지만, 준호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연습을 한다. 그게 좋은 성적으로 이어지는 건 어쩌면 당연할 것이다. 거기에 엄마와 코치가 한 몫 했다고 할 수 있을까?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들의 방식이 잘못되었다는 걸 깨닫지 않았다면, 그래서 한동안이나마 수영을 그만둘 수밖에 없지 않았다면, 그렇게 수영을 좋아한다는 걸 깨닫지 못했을 수도 있으니까. 


대표팀 감독이 광수를 체벌하고 광수가 준호를 체벌하고 급기야 준호가 동생을 때리는(체벌하는 것처럼) 장면을 보고 있자니, 폭력의 되물림이라는 것이 얼마나 지독하다는 걸 새삼 깨닫게 된다. 윤종빈 감독과 배우 하정우의 데뷔작인 <용서받지 못한 자>를 보면 군대 내에서의 폭력의 되물림이 두 명을 죽음으로 몰고가는데, <4등>에서는 두 명의 수영 인생을 망치거나 망칠 뻔 했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폭력의 되물림, 정확히는 스포츠계에서의 체벌의 일상화와 되물림 또한 이 영화가 전하는 메시지일 것이다. 


어려운 문제인 아이 교육, 답은 있을까?


영화는 참으로 중대하고 풀기 어렵고 심각한 문제들을 복합적으로 다뤘다. 도무지 풀 수 없을 것만 같은, 차라리 아이가 없었으면 생각할 정도로 어려운 문제다. 다들 문제는 인식하고 있지만, 막상 닥치면 누구라도 준호의 엄마처럼 또는 그에 준하는 모습을 보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영화 <4등>의 한 장면. ⓒCGV아트하우스



"엄마, 내가 맞더라도 1등을 하는 게 좋아?


영화는 소년의 훌륭한 성장담을 유려하게 풀어내며 답을 제시한다. 문제를 풀 수 있는 답은 다른 누구도 아닌 당사자에 있다는 것이다. 부모들이 아이의 앞날을 걱정해 1등을 외치는 것만은 아닐 것이다. 부모 자신들의 위신도 그 1등에 달려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 부모들부터 여유를 갖고 중심을 지키는 게 중요하다. 문제는 영화에서 준호가 지니고 있는 '천재성'인데, 대부분의 아이들은 평범하다는 걸 알아야 한다. 


하지만 아이에게 모든 걸 떠 맡기고, "너의 삶이니 너가 알아서 해라"하는 건 답이 될 수 없다. 이것도 완전한 답이 될 수는 없겠지만, 여유를 갖고 "한 번 해봐"라는 마음가짐을 갖는 것이다. 그리고 관심을 갖고 지켜보며 칭찬해주고 지원해주는 것이다. 그럴 때 아이들은 비로소 자신의 길을 찾아갈 준비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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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룸>



영화 <룸> 포스터 ⓒA24 필름스


영화가 시작되고 엄마와 아이는 잠에서 깨어 눈을 뜬다. 아이의 다섯 번째 생일, 같이 케이크를 만들어 먹는다. 초도 없이. 아이는 초를 달라고 떼쓰지만 안타깝게도 엄마는 초를 줄 수 없다. 초라니 언감생심이다. 초는 살아가는 데 필수적인 게 아니니까. 좁디 좁은 방에서 살아가기 위해선 초 따위는 필요 없다. 엄마는 미안하다며 아이를 달랜다. 


그렇다. 엄마 조이와 아이 잭은 좁은 방에 갇혀 있다. 엄마가 아이에게 사실을 말해준다. 7년 전 누군지 알 수 없는 이에게 납치 당해 이곳, 헛간으로 끌려 왔고 2년 뒤에 아이를 낳아 지금에 이르게 되었다고. 정황 상 아이는 납치범 닉의 아이로 보인다. 


잭은 계속 조이에게 묻는다. 무엇이 진짜이고, 무엇이 가짜인지. 천장으로 보이는 하늘로 미루어 보아 이곳과는 다른 곳이 존재할 텐데, 그곳은 어떤지. 그렇지만 잭은 그 좁은 방에 완벽히 적응한 모습이다. 그곳에서 태어나 다른 어느 곳에도 가지 못한 채 5년을 지냈으니, 그곳이 곧 세상의 전부로 인식되었을 것이다. 그게 당연하다. 


조이는 잭에게 벽 너머의 또 다른 세상을 말한다. 납치 당하기 전, 자신이 속했던 세상을 말한다. 그렇게 탈출 시도가 시작된다. 함께 탈출할 수 없으니 잭을 탈출하게끔 하려는 것이다. 처음에는 잭이 아프다는 구실로, 마지막으로는 잭이 죽었다는 구실로. 우여곡절 끝에 결국 잭은 탈출에 성공하고, 조이도 탈출에 성공할 수 있었다. 



영화 <룸>의 한 장면 ⓒA24 필름스



7년 만에 방에서 탈출, 형벌과도 같은 바깥 생활


영화 <룸>의 초중반부 스토리이다. 이게 초중반부라고? 방에서 탈출하는 이야기가 주된 것이 아니었던가? 영화를 보기 전엔 그렇게 생각하기 쉽다. 7년 동안의 감금을 현실적이고 강렬하게 그리면서, 안에서의 성찰과 깨달음, 그리고 극적인 탈출을 보여줄 거라고 말이다. 그 이후에는 행복한 삶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을 게 당연하다. 


하지만 이 영화는 그렇지 않다. 전혀 그렇지 않다. 예를 들어, 영화 <캐스트 어웨이>가 무인도에 불시착하는 과정과 무인도에서의 삶과 성찰, 그리고 탈출의 경위를 아주 자세히 보여주고 난 후 돌아와서의 삶은 상대적으로 짧게 처리하는 것과는 다르다. 척 놀랜드(톰 행크스 분)가 십자가 모양의 사거리의 한복판에 서 있는 모습으로 처리했다. 굉장히 의미 있고 함축적인 장면이다. 


반면 <룸>은 어떤가. 초중반부에서 이미 탈출에 성공한 모자(母子)는 어찌 보면 훨씬 더 큰 어려움에 봉착한다. 사람들의 지대한 관심, 미디어의 과도한 액션, 잭을 둘러싼 조이와 부모님들 간의 갈등. 그들은 다시금 방에 갇힐 수밖에 없게 되었다. 적어도 전의 그 방에선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 쓸 필요가 없었고, 엄마와 아이와의 갈등 이외엔 어느 갈등도 존재하지 않았다. 물론 조이는 닉과의 갈등이 있었지만, 닉은 조이와 잭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었다. 과연 어떤 '방'이 더 좋을까. 잭은 할머니와의 대화에서 다음의 한마디를 건넨다. 할머니의 가슴을 후벼 파는 한마디이면서, 보는 이의 가슴도 한껏 때리는 한마디이다. 


"가끔 그 방이 그리워요."



영화 <룸>의 한 장면 ⓒA24 필름스


얼마나 바깥 세상이 불편하고 싫었으면, 5년이나 한 발자국조차 내딛지 못했던 그 작은 방이 그리워질까. 한편으론 오직 엄마와의 오붓한 시간을 보냈던 그곳이 그립다는 말이기도 하겠다. 그곳에서 나오는 순간부터 잭은 더 이상 엄마하고만 지낼 수 없게 되었다. 혼자서, 엄마 아닌 다른 누군가와, 엄마와 다른 누군가와 함께 지내야만 하는 것이다. 그건 잭에게 있어 최악의 형벌과 다름없었다. 


극악무도한 사건 대신 한 아이의 성장에 초점을 맞추다


영화의 배경은 분명 극악무도한 사건이다. 누구라도 그 사건에 초점을 맞출 것이다. 영화 안에서 모자를 보는 이들이나, 영화 밖에서 모자를 보이는 이들이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적어도 영화 자체는 그 사건에 초점을 맞추지 않으려 한다. 그 대신 잭의 시선과 심리에 초점을 맞추려 한다. 작은 방 안에서의 세상에 대한 생각과 상상, 세상으로 나왔을 때 비춰지는 다양한 사람들과 그 밖의 모든 것들에 대한 심정을 곳곳에 독백으로 처리했다. 그렇게 하니 사건은 가려지고 대신 한 아이의 성장이 자리 잡았다. 


문제는 어쩌면 바로 그 부분에 있다 하겠다. 시종일관 아이의 시선에 초점을 맞추려 한 건 잘한 것 같지만, 사건도 사건이거니와 이 영화를 끌고 나가는 이가 아이만 있지 않다는 걸 간과할 수 없는 것이다. 아이만큼 중요한 이가 엄마 조이다. 그리고 조이의 부모님. 초점은 아이지만, 다양한 이야기들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기에 모자가 세상에 나온 뒤에는 영화가 조금은 어수선해진다.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명확하게 알 수 없고, 조이와 부모님이 갈등을 빚는 요소가 정확하게 전달되지 않아 답답했다. 



영화 <룸>의 한 장면 ⓒA24 필름스



이 모든 걸 커버하는 요소가 있는데, 배우들의 연기다. 이 영화로 2016년 무수히 많은 유수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휩쓴 조이 역의 브리 라슨, 더불어 생애 두 번째 영화임에도 만만치 않은 영화제에서 수상한 잭 역의 제이콥 트렘블레이, 그리고 조이의 엄마 역의 조안 알렌. 이들은 각자 역할 그 자체였다. 특히 특별한 배경의 캐릭터가 영화 내내 조금씩 변해가는 모습을 완벽하게 보여준 데에는 여지없이 찬사를 보내고 싶다. 영화는 안 보고 이들만 봤다는 느낌이 든다. 실제로도 그랬고. 배우는 살고 영화는 죽은 그런 사례라고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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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genv

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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