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델마>


영화 <델마> 포스터. ⓒ그린나래미디어



언 강을 장총 든 아빠와 딸이 함께 건넌다. 맞은편 숲에 도착한 그들, 아빠는 조심스레 사슴의 목숨을 노린다. 곧 죽을지 모를 사슴을 지켜보는 딸, 아빠는 사슴을 향한 총구를 돌려 딸에게 향한다. 하지만 차마 방아쇠를 당기진 못하고 사슴은 도망간다. 이들에겐 어떤 사연이 있는 걸까. 그 사연의 총량이 결코 작아보이지 않는다. 


딸 델마는 어느덧 대학생이 되었다. 그날도 어김없이 도서관에서 공부를 시작한 그녀, 갑자기 새 한 마리가 도서관 창문으로 맹렬히 날아오더니 부딪혀 떨어지고 동시에 델마는 손이 떨리기 시작하더니 발작을 일으키며 쓰러진다. 당일 밤 뱀이 목을 조르는 꿈을 꾸고 다음 날 수영장에서 안부를 묻는 안자를 만나 페이스북 친구가 된다. 


곧 친해지는 그녀들, 하지만 델마는 부모님의 전화로 급히 빠져나온다. 그러곤 당일, 안자는 자기도 모르게 델마를 찾아가게 되고 그들은 한 침대에서 함께 잠을 잔다. 델마는 안자에게 연심을 품은 듯 보인다. 이후 그들은 함께 술, 담배를 하고 키스도 한다. 델마는 아버지께 최소한의 일탈을 고백하고 신앙심을 다시금 고취해보려 하지만, 안자를 향한 마음을 접을 길이 없다. 그리고 계속되는 발작... 


21세기판 <캐리>의 북유럽 버전


영화 <델마>의 한 장면. ⓒ그린나래미디어



재작년 <라우더 댄 밤즈>로 우리나라에 처음 소개된 요아킴 트리에 감독은 최신작 <델마>로 찾아왔다. 영화는 초자연적 미스터리 스릴러 형식을 띤, 한 소녀의 성장 이야기이다. 감독은 전작에 이어 한 가족의 '폭탄보다 더 큰 소리'가 나는 사연과 비밀에 대해 이야기한다. 


단연 생각나는 건 스티븐 킹 원작, 브라이언 드 팔마 감독의 1978년작 <캐리>, 독실한 신자인 엄마 밑에서 순결을 강요받으며 내성적이고 소심한 학교 생활을 하다가 끔찍한 따돌림을 당하고선 초능력으로 복수를 감행하는 캐리. 그리고 과거의 비밀과 딸의 배신에 뒤엉켜 목을 졸리게 된 엄마는 딸을 향한 광적인 분노를 표출한다. 


<델마>는 21세기판 <캐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만, 초자연적 힘과 광적이고 화려하다고 할 만한 비쥬얼이 주가 되는 대신, 보다 신화적이고 은유적이고 관능적이다. 그리고 배경이 북유럽이다 보니 특유의 자제된 서늘함이 높은 비중을 차지한다. 


이쯤에서 <렛 미 인>이 생각나는 건 비단 나뿐일까. 섹슈얼한 공포를 유발시키는 설(雪)의 향연이 <델마>에서는 배우들의 몸짓과 눈빛에 자연스레 스며들어 있다. 이런 면에서 <캐리>의 북유럽 버전이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델마의 발작과 초자연적 현상, 그리고 억압과 금기


영화 <델마>의 한 장면. ⓒ그린나래미디어



델마의 발작은 그녀로 하여금 일어나는 것 같은 초자연적 현상과 연관이 있어 보인다. 단순히 그녀의 가족 중 누군가가 같은 병력을 가지고 있었을 거라는 추측과 확신에만 시선이 가지는 않는 이유다. 그러면서도 가족력의 비밀이 중요하게 다뤄지게 되는 건 감독의 탁월한 연출력 덕분이겠다. 


영화는 이야기들과 비유, 상징들이 겹겹이 쌓여 있다. 델마의 성장의 고됨과 어려움을 비유적으로 표현하면서도 그 자체로 훌륭한 기승전결이 있는 이야기로 기능한다. 투철한 기독교 집안의 꽉 막히고 고지식한 자제의 세상 알아 가기. 그 교육이 결코 '잘못'되었다고 할 순 없지만, 본능을 이길 소지는 없다. 


그런 면에서 델마의 발작은 그녀가 하나하나 풀어가는 억압과 금기의 실타래와도 연관이 있어 보인다. 그녀의 끔찍한 내적 갈등과 싸움이 표출되는 것이리라. 그녀는 전혀 싸울 준비가 되어 있지 않지만 그 갈등의 한복판으로 가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발작과 함께 찾아오는 초자연적 현상은 그녀의 본능이 폭발하는 모습일 것이다. 


이 설명할 길 없는 초자연적 현상은 델마의 어린 시절도 돌아가 그녀 가족의 사연과 직결된다. 독실한 기독교 집안으로서가 아닌 그 현상 때문에 억압되어야만 했던 그녀의 사연, 첫 장면에서 아버지가 총구를 사슴 아닌 델마로 향했던 사연 등. 그렇지만 어느 순간이 되면 그 모든 것들이 실제인지 상상인지 공상인지 알 수 없게 된다. 마치 델마의 성장 이야기에 편입된 거대한 세계의 조각조각난 일부분인 것처럼. 


델마의 성장 이야기


영화 <델마>의 한 장면. ⓒ그린나래미디어



영화를 델마의 성장에 맞춰서 볼 필요도 있겠다. 그럼 모든 일들이 더 뚜렷하고 더 명확하고 더 다채롭게 다가온다. 그 자체로 더할 나위 없는 모양새를 띠지만 사실상 아무 의미가 없는 반면, 진짜를 얻기 위해 엄청난 껍질 손질을 해야 하는 밤송이처럼. 


<델마>의 완벽하리만치 직조된 이야기와 비유, 상징들의 타래는 그 자체로 훌륭하지만 영화가 던지는 의미를 찾기 위해선 그 모든 매력적인 것들을 헤치고 들어가 델마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녀는 누군가에 의해 평생 길들여지고 교육된 정중동의 삶의 입방체에서 스스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친다. 


영화 <송곳니>에서 완벽하게 '잘못' 교육받은 큰딸이 큰 결심과 행동 끝에 빙퉁그러진 세계에서 탈출하고, 소설 <데미안>에서의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는 구절처럼 말이다. 힘들고 가혹한 탈출의 투쟁이 <델마>에서는 곧 험학한 발작과 끔찍한 초자연적 현상이다. 


델마는 자신을 억압하는 모든 금기를 깨뜨리고 벗어나 새로운 세계에서 새로운 나로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인생 처음으로 맞이하는 통과의례를 남들보다 늦게 힘겹게 지날 수 있을까. 이 세상 모든 델마를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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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홈>


영화 <홈> 포스터. ⓒ리틀빅픽처스



열네 살 준호는 축구를 좋아하는 평범한 중학생이다. 하지만 학교에서는 괴롭힘을 당하고 집에서는 그리 예쁨을 받진 못하는 것 같다. 준호에게는 어린 동생 성호가 있다. 귀엽고 똘망똘망한 동생을 돌볼 때면 이런저런 시름을 잃는다. 아빠는 없는 듯하고 엄마 선미는 있다. 보험일에 치여 집안을 잘 돌보지 못한다. 


그런 엄마마저도 준호와 성호의 눈앞에서 교통사고로 의식이 없다. 그녀와 함께 사고를 당한 이는 그녀가 바람핀 유부남 강원재의 부인이다. 원재는 보살펴줄 이 없는 성호를 딸 지영이 있는 자기 집으로 데려간다. 성호는 준호와 성호의 엄마와 강원재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이다. 준호의 아버지는 따로 있다. 


이 세상에 홀로 남겨진 준호다. 선미는 상태가 좋지 않고, 원재는 준호를 보살필 법적 의무는 없다. 심적 의무는 더욱 없어보인다. 하지만, 성호의 성화에 못이기는 척 당분간만 함께 살고자 한다. 점점 가족의 형태를 띄어가는 그들이지만, 선미만 세상을 떠나고 강원재의 부인은 살아날 기미를 보이며 더 이상 영위해나갈 수 없을 것 같다. 원재는 어떤 판단을 내릴까, 준호의 앞날은 어떨까. 


독립영화 제작사 아토ATO의 야심작


영화 <홈>의 한 장면. ⓒ리틀빅픽처스



영화 <홈>은 지난 2016년 <우리들>과 2017년 <용순>에 이은 관계&성장 3부작의 마지막이다. 한국 최고의 독립영화 제작사로 우뚝 서고 있는 '광화문시네마'와는 다른 시선의 독립영화를 내놓고 있는 '아토ATO'의 세 번째 야심작이기도 하다. 아토ATO는 한국예술종합학교 대학원 동창끼리 합심해 만든 광화문시네마처럼,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기획 전공 출신 프로듀서들이 모여 만든 제작사라고 한다. 


김종우 감독은 이 영화 이전의 두 단편을 통해 끔찍한 상황에 처한 이들의 이야기를 내보였다. 소외된 이들이라고 할 수도 있을 텐데, 한국 독립영화 계보에서 가장 특출난 이야기를 양산해내는 소재와 주제가 바로 소외이다. <홈> 또한 끔찍한 상황에 처한 소외된 이의 이야기일 것이다. 


주지했다시피 아토ATO가 내놓은 작품들은 모두 관계와 성장을 주요 테마로 내세웠다. <홈>도 그 범주 안에 있는데, <우리들>이 '권력'을 <용순>이 '심리'를 또 하나의 주요 테마에 상정한 것처럼 <홈>은 '가족'을 또 하나의 주요 테마에 상정했다. <우리들>이 대대적인 성공을, 그에 반해 <용순>에 실패에 가까운 퍼포먼스를 선보였는데, <홈>은 어떨까? 


아이들과 어른들


영화 <홈>의 한 장면. ⓒ리틀빅픽처스



러시아의 대문호 레프 톨스토이의 대표작 <안나 카레니나>의 유명한 첫 구절은 다음과 같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고만고만하지만 무릇 불행한 가정은 나름나름으로 불행하다." 그래서 가족이나 가정을 콘텐츠화시켜 보여줄 때는 행복이 아닌 불행으로 점철된 이야기를 만드는가 보다. 


영화 <홈>은 열네 살 준호가 주인공으로 그의 순수한 두 동생들과 함께 천진난만한 세계를 구축하며 더할 나위 없는 행복한 가정을 영위하려 한다. 엄마 선미의 무관심에 가까운 행태에도 성호를 잘 보살펴온 준호다. 그런 그에게 우유부단하지만 착한 면이 있는 원재, 그리고 동생들의 존재는 그 자체로 충분한 것이다. 


하지만 그들을 그렇게 만든 어른들의 세계는 그야말로 막장이다. 선미는 결혼해 준호를 낳았고 바람을 펴 원재와의 사이에서 성호를 낳았고 원재는 부인과의 사이에서 지영을 낳았다. 준호의 아빠는 떠났고 선미 혼자 준호와 성호를 키우는 와중 원재의 부인이 찾아와 함께 어디론가 가는 도중 동반 교통사고가 나 의식불명이 된 것이다. 


그럼에도 원재와 준호와 성호와 지영은 한 가족을 이룰 수 있을까? 영화의 제목이 'house' 아닌 'home'이라는 점에 어떤 방점이 찍히는 것일까? 단순한 객체로서의 '집'이 아닌 가족이 사는 주체로서의 '집' 말이다. 막장과 천진난만함 사이에서 길을 잃고 방황하는 준호가 아닌, 이어질 수 없을 것 같은 이 둘 사이를 잇는 유일한 끈으로서의 준호가 되길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이런 가족도, 이런 집도 있는 법이다. 


관계와 가족


영화 <홈>의 한 장면. ⓒ리틀빅픽처스



어른들과 아이들, 가족과 가족, 학교와 집, 준호는 그 사이 어딘가에서 끊임없이 맴돌 뿐이다. 열네 살이라는 어른도 아닌 아이도 아닌 나이, 죽어가는 엄마 선미 하나로 이어질 뿐인 가족의 끈, 자기를 괴롭히는 친구들이 있는 학교와 자기가 보살펴야 하는 동생들이 있는 집. 그 경계에서 준호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게 별로 없다.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관계'란 준호라는 경계인이 겪는 사면초가 상황에서의 끔찍한 관계 형성인 것이고,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관계 외의 또 다른 메인 테마인 '가족'은 막장이라는 지반 위에 또는 막장 뒤에 숨겨진 천진난만함에 있다. 


찰리 채플린이 말했던가.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고. 이 가족의, 이 아이들의 천진난만함은 분명 희극처럼 보일 수 있다. 보기만 해도 웃음꽃이 피어나는 모습이 희극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하지만 조금만 더 들여다보면 비극도 이런 비극이 없다. 희극의 장본인인 이 아이들이야말로 비극의 씨앗인 것이다.


비극의 씨앗이 두루두루 잉태한 불행한 가족, 하지만 이 가족은 겉으로는 또는 멀리서 보면 희극이자 행복이다. 희극이자 행복은 천진난만의 아이들의 것이어야 하고, 비극과 불행은 막장의 어른들이 감당해야 할 몫이다. 그 경계에 있는 준호라고 하지만, 최소한 그에게 어른들이 비극과 불행의 끄트머리에라도 경험하게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건 그가 조금이라도 감당해야 할 몫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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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슬로우 웨스트>


영화 <슬로우 웨스트> 포스터. ⓒ더 픽쳐스



1870년 미국의 콜로라도 깊숙한 곳, 16살 짜리 소년 제이(코디 스밋 맥피 분)는 사랑하는 애인 로즈를 찾으러 멀고 먼 스코틀랜드에서 왔다. 로즈는 제이의 귀족 친척을 실수로 죽인 아버지와 함께 도망쳤다. 신대륙에서 제이가 처음 마주친 건 마을을 잃고 피신 중인 듯 보이는 원주민들, 그리고 얼마 못 가 마주친 건 인디언 사냥꾼이다. 


발사되지도 않는 총을 가지고 다니는 제이는 그야말로 무방비 상태, 그때 나타난 현상금 사냥꾼 사일러스(마이클 패스벤더 분)가 인디언 사냥꾼을 죽이고는 제이에게서 돈을 받고 '서쪽'으로의 여정을 함께 한다. 미국 서부는 제이에게 희망과 착한 마음이 가득한 곳이고, 사일러스에겐 돈에 눈 먼 악당이 튀어나와 칼을 꽂는 곳이었다. 


이 둘의 여정은 쉬운듯 쉽지 않다. 느긋하기 짝이 없는, 느릿느릿한 속도와 분위기이지만, 가는 곳마다 위협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참으로 다양한 종류의 사람들을 마주친다. 인디언, 인디언 학살자, 현상금 사냥꾼으로 보이는 백인, 굶어 죽기 직전의 스웨덴계 가족, 학자 같아 보이는 독일계 사기꾼, 그리고 한때 사일러스가 몸 담았던 현상금 사냥꾼 패거리까지. 어려움이란 어려움을 다 뚫고 제이는 로즈를 다시 만날 수 있을까? 그저 생존하는 게 목적인듯 보이는 사일러스는?


'아름다운' 웨스턴 영화


영화 <슬로우 웨스트>의 한 장면. ⓒ더 픽쳐스



영화 <슬로우 웨스트>는 독특한 웨스턴 영화이자, 버디 로드 영화이자, 성장 영화이다. 이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장르를 한데 모은 것 자체가 충분히 독특하다 할 만하지만, 이 장르들 모두의 정통 문법에서 조금씩 빛나가거나 어긋나면서도 그것이 '파격의 부미(不美)'의 길을 가지 않는 묘미가 있다. 


즉, 이 영화는 영화 외적으로 파격의 길을 택했다는 측면에서도, 영화 내적으로 폭력과 고통이 기본 장착(?)되어 있는 곳이 배경이라는 점에서도, 결코 아름다울 수 없음에도 또 아름다움과는 하등 거리가 멀어보임에도 시종일관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유지하며 흔적을 남기고 영향을 끼친다. 


그건 다분히 허무맹랑하고 대책 없는 제이 덕분일 것이다. 생존이 전부인 것 같은 곳에서 생존이 전부는 아니라고 하고, 총칼보다 책을 더 소중히 여기고, 남을 죽이지 못하면 자신이 죽는 와중에 남을 죽이고서 죄책감을 느끼고, 보편적인 죽음이 일상화된 곳에서 죽음과 사랑을 동일시하고... 


실제였다면 진작 죽음을 면치 못할 게 분명한 제이는, 아름다운 동화처럼 반짝반짝 빛나는 이 웨스턴 영화에서 그 누구보다 눈에 띈다. 그리고 여러 면에서 파격을 택한 영화 또한 제이를 중심에 두고 제이의 여정과 그로 인한 성장을 기본 축에 둔 것처럼 보인다. 마치 소행성 B612에서 지구로 찾아와 가히 그 순수한 영혼으로 여행 중 많은 이들에게 영향을 끼치는 어린왕자처럼 말이다. 하지만 이 영화의 진정한 주인공은, '성장'의 주인공은 제이가 아닌 사일러스이다. 


산전수전 다 겪은 사일러스의 성장


영화 <슬로우 웨스트>의 한 장면. ⓒ더 픽쳐스



성장에는 필연적으로 변화가 수반된다. 생각해보면, 맹목적인 사랑과 희망, 착한 마음에의 찬가를 고수하는 제이에게 성장이 필요한가? 물론 폭력과 고통과 고난이 지배하는 곳에서 가장 필요없는 것들일지 모른다. 여기서 우린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려 다른 생각을 할 필요가 있다.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고는 총칼로 '침공'해 무차별로 빼앗고 죽인 백인들, 미국 서부 개척은 곧 과거 수백 년 동안 자행된 학살의 반복이다. 그런 배경 하에서 오직 생존에의 길은 수정되고 변화되어야 하는 성질의 것이 아닌가. 즉 성장이 필요하지 않은가 말이다. 그 모습이 당연하다고 하지만, 당연한 게 되어서는 안 되지 않은가. 


사일러스는 제이와의 여정으로 당연하지만 당연해서는 안 되는 자신의 길을 수정한다. 생존이 전부가 아니라는 깨달음을 얻는다. 이곳에서 생존이 전부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깨달음인 것이다. '당연히' 어리고 어리숙하고 어울리지 않는 제이의 성장 스토리라고 생각했지만, 산전수전 다 겪은 사일러스의 성장 스토리라고 생각하니 많은 것들이 보인다. 많은 것들을 생각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여기서 한 발짝 더 들어가볼 필요도 있다. 총칼을 앞세운 무단 통치로 기반은 다질 수 있지만 강력한 저항이 따르는 법, 이후엔 필수적으로 문화 통치가 필요하다. 그렇다면, 총칼 대신 사랑과 희망과 책의 문화로 서부를 개척해야 하는 것인가. 영화는 제이를 통해 그래야 했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인가. 역사적 배경까지 섭렵하여 성장의 주체 반전을 훌륭히 시도한 영화는, 그 때문에 새로운 논란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는 점을 인지할 필요도 있었다고 본다. 


삶과 죽음의 얇팍함


영화 <슬로우 웨스트>의 한 장면. ⓒ더 픽쳐스



영화에서 삶과 죽음은 제이와 사일러스의 여정에 따로 또 같이 한다. 가장 중요하게 다뤄지는 주제이기도 하다. 삶은 짧고 죽음은 길다고 했던가. 하지만 이곳에선 삶은 길고 죽음은 짧은 것 같다. 그저 살아가는 것뿐인 생존이야말로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기 때문인데, 모든 죽음이 하나 같이 허망하거니와 순간이다. 


<슬로우 웨스트>의 죽음은 그래서 전혀 '슬로우'하지 않다. 빠르고 간결하며 피가 난무하는 파티가 벌어지지 않는다. 대신 두 주인공마저 웃음 짓게 하는 죽음도 있다. 그런 죽음은 이곳과 어울리지 않는데, 그런 죽음들은 이곳의 선입견을 바꿔버리기에 충분하다. 죽음을 불사하는 개척정신과 문명을 확대시키려는 탐험정신의 위대함이 사실은 별 게 아니라는 것. 


죽음의 얇팍함은 삶의 얇팍함으로 이어진다. 당연히 이곳에서의 삶을 규정하는 생존 또한 얇팍하기 그지없다는 걸 말한다. 얇팍한 생존을 그저 영위하기 때문에 삶이 길어보인다. 이곳만의 삶을, 생을 지어올려야 한다. 타인을 죽이고 타인에게 죽임을 당하는 와중에 생존에의 삶이 되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이 영화의 대리인 제이가 곳곳에 흔적을 내고 영향을 끼치고 남은 이들에게 부여하려는 것이 다름 아닌 삶이다. 생존 그리고 생존과 대비되는 얇팍한 죽음이 판을 치는 곳의 삶이 아닌, 삶과 죽음 그리고 사랑의 보편적 진리 말이다. 그것들을 다시금 이곳에 뿌리내리는 건 굉장히 느릴 테지만, 반드시 성취될 것이다. 그 주체와 방법과 방향까지 영화가 제시하진 않는다. 혹은 못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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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일급 살인>


영화 <일급 살인> 포스터. ⓒ워너브라더스



미국 캘리포니아 로스앤젤레스 앞바다 한 가운데에 있는 알카트라즈 섬, 1934년 그곳에 알카트라즈 연방 교도소가 문을 연다. 갱들이 한창 위세를 떨치던 때에 선전용으로 문을 열었다고 하는 이곳은 인류 역사상 가장 유명한 교도소라고 할 만한데, 미국에서 활동한 이탈리아계 마피아 거물 알 카포네가 수감되었었고 1963년 폐쇄될 때까지 단 한 명도 탈출하지 못했으며 재소자의 권리보장이 최악이었다.


폐쇄 후 몇 년 간 방치하였다가 1972년 이곳을 국립공원으로 지정하고 지금까지 관광지로 활용하고 있는데, 생전(?)의 그 유명함으로 소설, 게임, 영화, 드라마, 만화 등수많은 콘텐츠에 등장하였다. 마이클 베이의 유일하다시피 한 명작 액션영화 <더 록>에서 정부에 의해 토사구팽 당한 특수대원들이 탈취해 요새화한 곳이 바로 이 곳이다. '더 록'은 알카트라즈 교도소의 별칭이기도 하다. 


<더 록>과 거의 비슷한 시기에 나온 명작 법정영화 <일급 살인> 또한 이곳이 주요 배경이라 할 만하다. 교도소의 기능이 구금과 교정에 있는 만큼, '가장 유명한 교소도' 알카트라즈는 탈옥 절대 불가의 철통 경비와 함께 재소자의 재활과 교육과 교화를 가장 투철하게 시행하는 곳이어야 마땅하겠다. 과연 그랬을까?


일급살인죄


영화 <일급 살인>의 한 장면. ⓒ워너브라더스



영화는 주인공 헨리 영(케빈 베이컨 분)을 비롯한 4명의 재소자들이 알카트라즈 탈옥을 하다가 실패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이로 인해 두 명은 현장에서 사살되고 맥케인은 밀고하여 추가 처벌을 받지 않고 헨리 영은 독방에 갇혀 3년 동안 있는다. 알카트라즈의 독방 정책은 19일 이상 감금 금지였다. 


영은 가끔씩 방문하는 소장의 독방 실태를 점검으로 풀려나 일반 감방으로 이동한다. 하지만 이미 그는 너무나도 오래된 독방 생활로 정신이 이상해져 있었던 바, 식사시간 때 어디선가 들려오는 목소리를 따라 배신자 맥케인을 죽인다. 그는 곧 정상참작의 여지가 없는 일급 살인으로 기소된다. 


초짜 국선 변호사 제임스 스탬필(크리스찬 슬레이터 분)가 영을 변호하게 된다. 스탬필은 그를 돕고자 하지만, 영은 자신이 반드시 죽게 될 거라는 사실을 알고는 일절 자신을 변호하려 하지 않는다. 아니, 그는 죽는 것보다 완전히 무혐의가 되기 전까지 그곳으로 돌아가 있는 것이 훨씬 더 두려웠던 것이다. 이에 스탬필은 다른 루트로 조사를 이어 나가고, 영이 처참하기 이를 데 없는 환경의 독방에서 3년 동안 있었고 그로 인해 살인을 저질렀다는 결론에 이른다. 


대상과 인간


영화 <일급 살인>의 한 장면. ⓒ워너브라더스



영화는 '탈옥자 재활을 위한 독방과 참작의 여지 없는 일급 살인자' 대 '규정을 어긴 처참한 독방 환경과 그로 인한 정신 이상 하에서의 살의 없는 살인'이라는 프레임의 대결이라는 외향을 띤다. 교도소 입장에서 재소자는 교화와 재활의 '대상'일 뿐이고, 스탬필 입장에서 영은 엄연히 인권을 지니고 있는 '인간'이다. 


여기에 일절 요지부동의 '옳고 그름'이라는 재단기를 이용할 순 없을 것이다. 이 두 집단이 내세우고 있는 주장의 요지에 '틀린' 말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두 팽행선에는 모든 걸 포괄하면서도 또 다른 개념을 재단기로 써야 한다. 이 실화를 영화로 옮기면서 선택한 궁극적 재단기는 다름 아닌 '존엄성'이 아닌가 싶다. 


스탬필이 주장하는 인권은 교도소가 주장하는 인권 없는 탈옥범의 교화 및 재활이라는 프레임을 완벽히 이길 수가 없다. 반면, 인간의, 생명의 존엄성은 영에게만 적용된, 저지른 죄에 비해 터무니 없는 죗값의 비애와 만나 시너지를 일으킬 여지가 있다. 인간의 존엄성이란 모든 인간에게 적용되어야 할 의무를 지니지 않는가. 개인적으로 동의하진 않지만, 심지어 명백히 인간 이하라 할 만한 인간들에게까지도 말이다. 


더불어 영화가 저격하려는 대상은 영의 살인이 아닌 알카트라즈의 비(非) 교도소적인 생태이다. 이는 극 중에서 스탬필이 (보는 이에 따라선) 영악하게 기존의 프레임 전쟁을 이탈해 새로운 프레임을 만드는 전략이기도 한데, 영은 그 자신은 물론 가정이나 나라나 사회에 의해서가 아닌 알카트라즈 교도소에 의해 살인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 사실'만' 맞는 건 아니겠지만, 이 사실 '또한' 맞는 건 분명하다. 


영과 스탬필 이야기


영화 <일급 살인>의 한 장면. ⓒ워너브라더스



이 영화가 20년의 세월이 지나서도 명작의 칭호를 달고 있는 건, 비단 단순 법정영화에서 보이는 프레임 너머 또는 이면까지를 들여다봐서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거기엔 두 주인공 헨리 영과 제임스 스탬필의 이야기가 있다. 그들은 비슷한 나이에 둘 다 소싯적에 5불을 훔쳐봤지만, 한 명은 교도소에 와 있고 한 명은 변호사가 되어 있다. 


스탬필은 영을 위해, 아니 영으로 투영되는 '정의'를 위해 참으로 많은 것을 포기한다. 영은 자신을 위해, 아니 자신의 3년 독방 생활로 투영되는 '삶보다 나은 죽음'을 위해 삶을 포기한다. 그렇게 영은 자신의 삶을 살릴 스탬필이 아닌 친구 스탬필을 원하지만, 스탬필은 결국 자신이 추구하는 인생관의 열망과 추구를 위해 의뢰인 영을 원하는 것이다. 영화는 그런 피상적인 관계에서 인간적인 관계로 나아가는 이들을 보여준다.


더불어 영화는 스탬필과 영의 성장 이야기이기도 하다. 인생에 있어서 인생관 추구와 함께 모든 이가 추구할 것 같은 정의의 실현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스탬필이 깨닫고, 행동하는 것도 그에 반응하는 것도 심지어 죽음까지도 두려움 없이 본인의 의사에 의해 시행할 수 있다는 것을 영이 깨닫는 것 말이다.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승리였다. 


영화 내내 시종일관 입을 열지 않았던, 아니 못했던 헨리 영은 스탬필의 바람대로 보는 우리의 기대대로 '왜 맥케인을 죽였는지' '알카트라즈 독방에서 어떤 짓을 당했는지' 자세히는커녕 대략도 이야기하지 않는다. 하지만 본인이 직접 증인석에 서서 죽음도 불사하는 엄청난 두려움을 뚫고 위대한 한마디를 입에 올린다. 


"저는 무기 대용이었지만 살인자는 아닙니다. 살인자는 그들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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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가와세 나오미의 <빛나는>


일본이 자랑스럽게 내놓는 거장 '가와세 나오미'의 최신작 <빛나는>. ⓒ그린나래미디어(주)



장편 연출 데뷔 20주년, 세계 유수의 영화제들이 열광하는 일본 최고의 감독 중 하나 '가와세 나오미'는 그 명성에 비해 우리나라에선 비교적 최근에 대중적으로 유명해졌다. 그녀는 장편 데뷔와 동시에 칸영화제와 로테르담영화제에서 수상하며 세계에 이름을 알렸는데, 이후로도 그녀만의 확고한 스타일을 고수하고 있다. 


<너를 보내는 숲>은 칸영화제 심사위원대상을 수상했고, 최근에 우리나라에서도 개봉해 많은 인기를 얻어 비로소 가와세 나오미라는 이름을 알린 <소년, 소녀 그리고 바다>와 <앙: 단팥 인생 이야기> 또한 칸영화제는 물론 수많은 유수 영화제에 초청되는 영광을 누렸다. 얼마전 개봉한 <빛나는> 또한 마찬가지다. 


가와세 나오미의 영화들은 하나같이 지극한 해석이 필요하다. 그 행간과 자간을 읽어낼 수 없거나 읽어내고 싶은 마음이 없다면, 그 자체로 결코 스무스하고 재미있게 또 거리낌 없이 볼 수 있는 영화가 아니다. 호불호가 갈린다는 말이다. <앙>과 <빛나는>에 와서는 그런 상대적으로 소소한 단점들도 해소한 느낌이다. 완벽에 가까워졌달까.


앞을 볼 수 없는 이들을 위한 영화 음성 해설


시각장애인을 위한 영화 음성 해설을 쓰는 작가와 시각장애인의 만남이라는 흥미로운 소재가 눈에 띈다. 감독은 무엇을 끄집어낼 것인가. ⓒ그린나래미디어(주)



미사코(미사키 아야메 분)는 앞을 볼 수 없는 이들을 위한 영화 음성 해설을 만드는 작가이다. 주기적으로 시각장애인 모니터링단과 함께 해설 감수 모임을 하는데, 초보 작가에 불과한 미사코에게 날카로운 지적들이 향한다. 특히 과거 유명 사진작가였다가 이젠 거의 시력을 잃은 나카모리(나가세 마사토시 분)가 예리하다. 


나카모리의 지적에 동조하지 못하는 미사코는 반발하지만, 다른 이들은 나카모리의 의견에 동조하고 미사코는 여지없이 수용하고 물러설 수밖에 없다. 그녀는 새삼 앞을 볼 수 없는 이들을 위한 해설의 어려움을 느끼며, 그들의 상상력이 최대한 발현되면서도 자신의 주관이 그 상상력을 방해하지 않도록 균형의 어려운 길을 간다. 


그녀는 도움을 받기 위해 이해하기 위해 나카모리의 집을 찾아간다. 우연히 마주치기도 한다. 그러며 차츰 알게 된다. 그가 말한 것들이 어떤 의미인지를, 그가 처한 상황이 어떠한지를. 그녀로선 상상하기 힘든 실체를 눈앞에서 목격하고 이해하고 부정하고 반발하고 상처받고 다시 이해하고 깨닫는 과정을 겪는다. 


영화는 아픈 이들의 연대를 말하고자 한다. '관계'다. 잃어버리는 순간의 허망함과 두려움과 슬픔과 분노를 말하고자 한다. '상실'이다. 지적당해 수긍하고 부정당해 반발하고 큰 실수로 쫓겨나고 절치부심해 일어나고 결국 궁극적인 이해로의 길을 말하고자 한다. '성장'이다. 


관계, 상실, 성장의 하모니


영화는 관계와 상실과 성장이라는 추상적 개념들을 잘 풀어낸다. ⓒ그린나래미디어(주)



나카모리는 영화 초반 아주 약소하지만 시력이 남아 있다. 미사코에게 더 예리하고 날카로운 지적을 해줄 수 있다. 그러나 급속도로 나빠져 시력을 잃을 지경이 된다. 그는 미사코가 자신을 절대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미사코에게도 비슷한 아픔이 있다. 아빠는 없고 엄마는 없는 아빠가 돌아올 거라 믿는다. 그녀는 아빠를 그리워하며 엄마를 보살피는 게 쉽지 않다. 나카모리와 미사코는 연대의 끈이 존재한다.


말도 안 되는 비교일지 모르나, 원래부터 시력이 없던 이와 시력을 잃어가는 이의 상실감은 차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을 정도일 것이다. 눈이 심장만큼의 중요성을 띠는 사진작가에게는 더더욱 말이다. 그 두려운 상실감은 상상불가다. 미사코는 어떤가. 그녀는 자신의 사상 중심, 희망에의 찬가를 부정당한다. 그 부정에의 상실감 또한 평생 짊어져야 할 트라우마로서 당사자만 알 수 있는 상상불가의 영역이다. 


내가 앞으로 나아가는 것, 안에서 밖으로 나아가는 것만이 성장의 길은 아니다. 내가 다른 이의 내면으로 들어가는 것, 밖에서 안으로 천착해 심연을 들여다보는 것 또한 성장의 길이라 할 수 있다. 미사코는 수없이 부정당하면서도 밖으로 나아가지 않고 오히려 안으로 들어갔다. 반면 시력을 잃어가는 나카모리는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안전한 성장의 길이라 할 수 있지만, 밖으로 나가 미사코에게로 나아가려 한다. 


빛나는 순간들


영화를 보면, 우리에게도 참으로 빛나는 순간들이 있었지 싶은 생각이 들게 한다. ⓒ그린나래미디어(주)



관계, 상실, 성장 등의 추상적 소재들은 <빛나는>에서 그야말로 메시지와 캐릭터를 빛나게 해준다. 심오하면서도 보편적인 삶의 면면을 우리에게 내보이게 해준다. 다만, 이해하기 힘든 스토리상 맥락의 불친절함이 곳곳에 눈에 띈다. 끊임없이 유추하고 해석하고 생각해야 하는 수고로움이 힘들다. 


그럼에도, 이 영화는 마냥 아름답다. 옛날 어느 때, 어느 순간을 그리게 되고 현재의 이 순간을 붙잡고 싶어지며 미래의 그때 그 순간을 기다리게 한다. 빛은 우리가 살아 있을 동안 영원히 존재할 것이지만, 그래서 우린 그 존재의 고마움을 모른다. 더이상 앞을 볼 수 없게된 이들에게 빛은 가장 그리운 존재일 것이다. 


빛이 우리는 비출 때의 그 순간을, 그 순간을 아름답게 잡아내는 건 너무나도 힘든 일이다. 그만큼 그건 숭고한 일이고 반드시 해내고 싶은 일이다. 영화는 그 무엇보다 빛을 잡아 기록해두고 싶은 열망의 집합체이다. 영화에서 몇 번이고 언급되는 대사 "눈앞에서 사라져버리는 것만큼 아름다운 건 없어"는 여러 가지 면에서 중의적이지만, 가장 해당되는 건 다름아닌 '빛'일 것이다. 


가만히, 현실의 모든 것을 뒤로 한 채, 머리를 들어 하늘을 보고, 떠올려보자. 머릿속에 남아 있는 순간들을, 그 잔영들을. 흐릿하기도, 또렷하기도, 잔잔하기도, 화려하기도, 아름답기도, 슬프기도... 그 빛나는 순간들을 떠올리자. 그리고 반드시 다시 지금으로 돌아오자. 거기에도 역시 빛나는 순간들이 있을 거다. 나란 존재는 그렇게 나아간다. 우리 모두 그렇게 나아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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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아기와 나>


이제 갓 제대한 도일 앞에 있는 건 아기 예준, 그리고 아내가 될 순영. 갑자기 순영이 사라졌다? ⓒCGV아트하우스



군대 전역을 앞두고 말년 휴가를 나온 도일, 엄마와 아내가 될 순영과 이제 갓 세상에 나온 아기 예준이 있는 집으로 향한다. 고아 출신인 순영이 엄마와 모녀지간처럼 지내는 건 좋은데, 합세해서 날라오는 잔소리는 듣기 힘들다. 도일은 결혼도 해야 하고 아이도 키워야 하는 가장인 것이다. 


엄마와 순영이 일을 나간 사이 예준이가 아파 병원에 갔다가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듣는다. 예준이의 혈액형이 자신과 순영 사이에서 절대 나올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도일은 이 사실을 순영에게 차마 얘기하지 못하지만, 운은 뗀다. 다음날 갑자기 순영이 사라졌다. 전화도 안 되는 건 물론, 평소 친하게 지내던 친구들까지 모른댄다. 


아는 사람들한테 부탁을 해 예준이를 하루이틀씩 맡기고 도일은 순영을 찾아 삼만리를 감행한다. 순영이에 대해 몰랐던 사실들을 하나둘씩 알게 되고, 마음은 조금씩 차가워진다. 예준이를 보는 스킬은 늘어나지만, 현실적으로 생각할 때 이대로 계속 지낼 수는 없다는 생각도 한다. 도일은 순영이를 찾을 수 있을까? 예준이는?


아기를 통해 성장해가는 나


세상에 갓 나온 아기, 역시 세상에 갓 나온 얼마전까지 군인이었던 나. 이 조합은? ⓒCGV아트하우스



영화 <아기와 나>는 단편영화계에서 인정 받은 손태겸 감독의 장편데뷔작이다. 엄마 뱃속에 있다가 세상에 나온지 얼마 되지 않은 '아기', 그리고 역시 군대라는 울타리 안에 있다가 세상에 나온지 얼마 되지 않은 '나'의 조합이 의미심장하고 또 자못 흥미진진하게 다가오는 영화다. 


10여 년 전쯤 나온 장근석 주연의 아기와의 명량동거를 다룬 영화 <아기와 나>, 20여 년 전쯤 나온 부모님을 잃은 주인공이 아기인 동생을 돌보며 일어나는 그린 애니메이션 <아기와 나>가 자연스레 생각나기에, 말 그대로 세상에 아기와 나뿐만 남은 암울한 와중에 현실을 헤쳐나가는 코믹&드라마를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영화는 아기와 '함께' 성장해가는 주인공의 이야기라기보다 아기를 '통해' 성장해가는 주인공의 이야기라고 하겠다. 이제 갓 군대를 전역한 어린 나이임에도, 자신이 '저질러놓은' 일을 자신이 직접 책임져야 한다는 엄혹한 현실. 아니, 그건 엄혹한 게 아니다. 세상에 나온 건 자신의 선택이 아니지만, 그 이후부턴 수많은 선택의 연속일 뿐이다. 현실은 그 선택과 결과일 뿐이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최악의 상황, 어른이 되는 통과의례


최악의 상황에서 맞이한 결혼, 출산, 육아의 어른이 되는 통과의례. ⓒCGV아트하우스



영화의 포커스는, 감독의 시선은 도일에게로 맞춰져 있다. 특히 제목과 조금 맞지 않는듯한, 그래서 으레 그러려니 했던 식상한 기대와는 달리, 도일이 사라진 순영을 찾는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물론 그 사이에, 그 와중에 예준이가 차지하는 비중이 커지는 게 사실이다. 결국 도일은 예준이를 택하게 될 거라는 결말이 눈에 선하고 말이다. 


흔히,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고 직접 길러봐야 비로소 어른이 된다고 말한다. 일종의 통과의례라고 할까. 그만큼 결혼과 출산과 육아가 인간에게 가장 무게감 있게 다가오고 가장 막중한 부담감으로 짓눌려 오거니와 가장 처절하게 힘든 순간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오직 그것만이 어른이 되는 방법은 아닐 테지만 말이다. 


영화는 그 힘든 통과의례를 그야말로 최악의 상황에 처한 어른아이 한 명이 어떻게 헤처나갈 것인지 함께 기대하고 절망하고 응원하고 답답해 하며 보여준다. 확실한 감정이입을 선사하는 동시에, 절대 주인공처럼은 되기 싫거니와 되지 말아야겠다는 교훈(?)도 선사한다. 


아기가 없더라도 살아가기 힘든 막막한 현실, 앞날이 창창한 청춘이기에 무서울 게 없을 것 같지만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청춘이기에 무섭지 않은 게 없기도 하다. 그 옆에 아기란 차라리 판타지의 영역이다. 자신을 버리고 아기를 위해 살아가는 인생이 되는 건 가능하지만, 그럼에도 진정 아기를 생각한다면 자신의 손에서 떠나보내야 하지 않겠는가? 하고 생각하게 만드는 또다른 냉혹한 현실 앞에서 치를 떨며 무릎을 꿇는다.


수작은 아닐지언정 기대감은 들게 한다


기대감을 들게 하는 게 수작이라고 인정받는 것보다 좋을지도? ⓒCGV아트하우스



저예산 독립영화 중에 유난히 수작이라고 평가맞는 것들이 많다. 지극히 감각적이고 시대와 소통하는 작가와 연출자의 시각이 고스란히 담겨있기 때문일 테다. <아기와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길이남을 수작, 한 해 또는 한 시대를 대표하는 수작 독립영화라 말할 순 없다. 많은 생각을 하게 하지도 않는다. 


대신, 감독이나 배우들에게 기대감을 들게 한다. 수많은 감독들과 배우들이 길이남을 명작 한 작품만을 남기고 홀연히 자취를 감추는 경우가 다반사인데 반해, 이들은 앞으로도 자주 또는 종종 모습을 드러내 이전보다 더 좋은 모습을 보일 것 같은 기대를 주는 것이다. 그런 기대감을 가장 확실하게 심어준 장면이 마지막 장면인데, 그 프로페셔널한 롱테이크가 기억에 남는다. 


인생에 길이남을 큰일로 세상을 이제 막 경험한 이들의 마지막 장면은, 그 뒤에 이어질 수없이 많은 질곡들을 암시한다. 개인적으로 얼마전에 큰일을 저질렀고 누군가의 도움 아닌 도움으로 간신히 저지할 수 있었지만 아직 완전히 해결된 건 아니다. 엄청난 압박이었는데, 실현할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배운 게 많다. 


누구나 이렇게 살아간다. 겪고 겪고 또 겪으면서. 그 와중에 뭐라도 얻으면 좋으련만 대부분 남는 건 상처 뿐이다. 그래도 잊어서는 안 되는 건, 그 자체가 성장의 일면이라는 것이다. 이 영화가 수작(秀作)이 아니라도 좋다. 이 영화는 나에게 손수 경험해보지 못한, 경험해보지 못할 경험을 건네준 수작(手作)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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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딸에 대하여>


소설 <딸에 대하여> 표지 ⓒ민음사



일찍 남편을 보내고 요양원에서 요양보호사로 일하는 '나', 남편이 유일하게 남긴 유산인 집에 서른을 훌쩍 넘었어도 제대로 자리 잡지 못하고 대학교 시간강사로 살아가는 '딸애'를 들인다. 딸애는 7년 간 사귀어 왔다는 '그 애'와 함께다. 나로선 정녕 상상하기도 싫고 어려운 그들과의 동거지만, 딸애의 부탁을 져버릴 순 없지 않은가. 서로를 그린과 레인으로 부르는 그들은 레즈비언 커플이다. 


딸애는 안 그래도 어렵게 살아가는 시간강사의 삶 위에 학교를 상대로 시위를 하는 삶을 얹혀 놓았다. 딸애처럼 레즈비언 시간 강사가 레즈비언이라는 이유로 학교에서 쫓겨났기 때문인데, 나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사람의 일로 딸애가 그러는 걸 이해할 수 없다. 그건 내가 요양원에서 보살피는 무연고 치매노인 '젠'을 보면서, 그녀의 삶을 돌아보면서 뼛속 깊이 느낀 것이다. 


젠은 젊은 시절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공부를 하고 한국계 입양아들을 위해 일해왔다. 한국에 돌아와서는 이주노동자들을 후원했다. 평생 자신과 하등 상관없는 이들을 위해 헌신해 왔지만, 지금은 치매에 걸려 요양원에서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아무도 그녀를 찾지 않는다. 


'나', '딸애'와 '그 애', '젠'의 이야기 <딸에 대하여>는 여성의, 여성에 의한, 여성을 위한 소설이다. 그 안엔 현시대를 가로지르는 첨예한 사항부터 시대와 상관 없이 오래도록 당연시 되어온 문제까지, 주로 소수자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동성애자 시간강사, 홀몸의 중년여인, 무연고자 치매노인, 모두 소수자이기에 앞서 모두 여성이기에 삶의 고단함을 향한 이중부과가 매겨져 있는 느낌이다. 


'딸에 대하여'보다 '여성에 대하여'


소설은 '딸에 대하여'라는 제목에서도 유추할 수 있듯이, 동성애자이자 시간강사로 '평범하고 제대로 된' 삶을 살지 못하는 딸에 대한 이야기를 중심에 놓고 있다. 아니, 제목을 앞세워 그렇게 포장한 것이리라. 실상, 딸보다 '나'와 '젠'에 대하여 즉 엄마와 여성에 대한 이야기인 게 맞다. 여기서 나에겐 젠이 딸애와 겹쳐 보이니, 결국 '여성에 대하여'가 궁극적으로 올바른 제목이라 하겠다. 


어떤 여성을 말하고자 함인가. 소설에선 남성이 주인공으로 일절 등장하지 않는다. 그래서일까? 전통적 보수의 전형과도 같은 나는 딸애가 남성으로서의 사회적 성공과 여성으로서의 결혼적 성공을 동시에 바란다. 소설은 그 정도에 머물러 있는 내가 여러 일들을 겪으면서 깨닫게 되는 깨달을 수밖에 없게 되는 '성장' 매커니즘을 따른다. 그 끝에는 '여성'이 아닌 '공동체'가 있다. 


한편, 소설에서 가장 첨예한 이슈가 될 수 있는 '퀴어' 소재의 주인공들인 딸애와 그 애는 그 이슈를 가슴으로는 생각조차 하지 않고 당연하게 받아들이지만 현실상 머리로는 항상 생각하고 있어야 하는 이중의 삶을 살고 있다. 그들은 왜 당연한 삶의 결정체로 물질적 정신적으로 직간접적 피해를 받아야 하는 것인가? 하지만 소설은 퀴어의 당위성에 집착하는 대신 객관적 사회문제로 격상시키는 묘수를 발휘한다. 


'젠'은 소설의 모든 것에 거리를 두고 있는 느낌으로 와서 소설의 모든 것에 가장 밀접한 관계가 있는 느낌으로 떠나간다. 그녀의 지난 젊은 시절은 딸애를 보는 것 같고, 그녀의 현 시절은 나의 미래를 보는 것 같다. 소설은 한국 모든 여성의 미래와 한국 늙은 여성의 현재, 그 한 단면을 젠을 통해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공동체를 향한 깨달음과 이해


남성은 여성의 삶을 상상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단순히 보이는 삶과 행동, 생각보다 훨씬 많은 것들이 그녀들을 감싸고 있고 그녀들을 향해 일방적으로 보내고 있으며 그녀들을 얽매기도 하면서 조종하기도 한다. 반면, 남성은 여성이 상상하는 딱 그 정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것이다. 


내가 종국에 만나게 되는 공동체란 상상할 수 없는 여성의 삶도 상상할 수 있는 남성의 삶도 뛰어 넘는 연대다. 자신의 일과 딸애의 일에서 겪게 되는 '나의 일이 될 수 있는, 아니 나의 일과 다름 없는 남의 일'의 정체를 깨닫고, 딸애의 성향을 이해할 순 없지만 딸애의 상상불가 위의 상상불가의 어려움은 이해하게 된 것이다. 


단 하나의 가족인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정도는커녕 혐오를 하는 딸애가, 나 아닌 다른 이들에겐 얼마나 크나큰 혐오와 배제의 대상이 될 것인지 불 보듯 뻔하지 않은가. 그런 매커니즘의 이해야말로 가족만이 할 수 있는 것이리라. 나의 깨달음과 성장이 거기서 멈추지 않기를 바란다. 


거기서 파생된 '가족 아닌 자'인 젠을 향한 마음 또한 크나큰 깨달음과 성장의 한 면이다. 가족만이 가능하다고 생각한 이해가, 가족이 아닌 자를 향하고 있지 않은가. 그 자체가 공동체의 발로다. 그 모든 게 '딸에 대하여' 생각한 끝에 나아가게 된 이 시대 평범 평균의 여성의 깨달음이다. 이제 '위대'라는 뜻의 수정이 필요할 때다. 위대라는 단어에 '보수로 대변되는 완벽'이 아닌 '진보로 대변되는 나아감'이 대신해야 하는 것이다. 이 여성들은 진실로 위대하다. 


딸에 대하여 - 10점
김혜진 지음/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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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몬스터 콜>


삶의 진리와 사랑으로 귀결되는, 인생에 대한 다양한 은유의 결정체 <몬스터 콜>. ⓒ롯데엔터테인먼트



2년 전 개봉해 찬사를 받은 명품 애니메이션 <칼릴 지브란의 예언자>. 무스타파라는 현자가 말하는 삶의 진리와 사랑 이야기를 9명의 아티스트가 참여해 최대한의 시너지로 풀어내었다. 직설적으로 전달되는 진리의 향연이 90여 분이라는 길지도 짧지도 않은 시간 내내 계속되기에 그저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다른 생각을 할 수 없다. 


애니메이션은 아니지만, 현자 같은 이(몬스터)가 이야기를 들려주고 그 이야기는 애니메이션화되어 이해를 도우며 결국 삶의 진리와 사랑으로 귀결된다는 점에서 <칼릴 지브란의 예언자>가 생각나게 하는 <몬스터 콜>은 다양한 은유의 결정체다. 현재를 기반으로 하되 다분히 판타지, 그것도 다크 판타지적인 세계관이 이를 가능케 한다. 


'성장'과 '가족'을 주요 키워드로, 인생과 작별과 마음 등의 키워드가 뒤를 받힌다. 데인 드한이 생각나게 하는 연기를 펼친 루이스 맥더겔이 주인공 코너를, 익숙한 이름들인 펠리시티 존스와 시고니 위버가 코너의 엄마, 할머니 역을 맡아 영화의 품격을 높혔다. 무엇보다 목소리만으로 극의 중심을 잡은 리암 니슨은 CG로만 이루어지지 않은 몬스터에 확실한 활기를 불어넣기에 충분했다. 


진실 뒤에 찾아오는 거대한 슬픔과 깨달음


어린 나이, 하지만 너무도 힘든 삶의 코너. 그는 진실을 말해야 한다. 그것이 성장통이자 통과의례다. ⓒ롯데엔터테인먼트



집에선 암에 걸려 죽어가는 엄마가 있고, 학교에는 사정없이 괴롭히는 놈들이 있다. 그 때문인지 코너는 자기만의 세계에 갇혀 있는 것 같다. 또래와는 뭔가 다른 표정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어느 날 믿기지 않는 일이 일어난다. 집에서 멀리 보이는, 공동 묘지 한가운데의 큰 나무가 몬스터로 변해 집으로 들이닥친다. 그러곤 세 가지 이야기를 들려줄 테니 다 듣고 나서는 코너보고는 진실된 네 번째 이야기를 해야 한단다. 


코너에게는 사이가 별로 좋지 않은 외할머니가 있다. 할머니는 코너를 데려가고자 한다. 아무래도 딸에게 큰 가망이 있는 것 같진 않다는 걸 인지하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코너는 그게 너무나 싫다. 엄마가 죽는다는 건 상상조차 하기 싫은 거다. 아니 그는 엄마가 금방 나을 거라는 굳은 믿음을 갖고 있다. 


밤 12시 7분이면 찾아오는 몬스터가 들려주는 세 가지 이야기는 코너의 일상과 묘한 병렬을 이룬다. 코너에게 깨달음을 주려는 걸까. 몬스터는 진짜일까 그저 꿈 속의 환상일까. 코너 안에 내재된 또 하나의 코너일까. 그런 와중에 엄마의 병은 악화되고 코너는 점점 엇나간다. 할머니는 물론 이혼한 아빠와도 멀어지는 느낌이다. 


그런 코너를 이끄는 건 할머니도 엄마도 아빠도 선생님도 친구도 아닌 몬스터다. 코너도 그걸 느꼈는지 몬스터를 만날 12시 7분을 기다리는 것도 모자라 시계를 돌려 몬스터를 억지로 불러낸다. 그리고 코너는 결국 네 번째 이야기를 꺼낼 수 밖에 없게 되는데... 거기엔 감당할 수 없는 슬픔과 그 후에 찾아오는 깊은 깨달음이 있다. 


불행이 우리를 덮칠 때


어마어마한 불행이 덮치려 한다. 헤어나올 수 없다. 마주볼 수 있을까? 마주보아야 한다. ⓒ롯데엔터테인먼트



불행이 우리를 덮칠 때, 불행은 다른 무엇도 아닌 불행 자체로 나타난다. 우린 대부분 저항할 생각도 못한 채 넋 놓고 불행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그리곤 곧 불행을 덮어둔 채 시선은 불행이 덮친 나를 향한다. 하지만 그건 이미 내가 아니다. 불행한 나일 뿐이다. 애초에 잘못된 것이다. 


불행이 우리를 덮칠 때 우선 불행을 마주보아야 한다. 나중에야 이미 불행한 나로 시선을 향하기 전에 말이다. 하지만 쉽지 않다. 아니, 일단 불행이 덮치면 모든 게 달라지므로 불가능에 가깝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럼 어떻게 하란 말인가. 훈련이라도 하란 말인가. 그건 너무 가혹하지 않은가. 


영화는 말한다. 자신과 대화하며 자신을 들여다보고, 다른 누군가와 대화하며 공유해야 한다고 말이다. 즉, 기쁨은 함께 하고 슬픔은 나누라는 말일 테다. 어렵기는커녕 지극히 쉬운 이 명제를 영화는 소년의 눈높이에 맞게, 그렇지만 유치하지 않게 그려낸다. 코너가 대화해야 하고 대화하게 되는, 슬픔을 나누어야 하는 대상들이 어른들이기 때문에 그 어른들 또한 나름의 성장을 하는 것이다. 


코너가 말해야 하는 네 번째 이야기는 영화의 하이라이트에 해당한다. 뭔가 크나큰 비밀이 있는 것일까. 절대 말할 수 없는 잔인하고 기가 막힌 비밀일까. 불행과 슬픔, 모순적 마음, 성장에 관련된 마음 속 깊숙히 숨겨놓은 코너만의 비밀이라고만 말해둔다. 당연히 죽어가는 엄마와 항상 불안에 떨고 불편하고 불만에 차 있는 코너의 표정과도 연관이 있을 것이다. 


그래도 살아가리라


불행은 곧 작별이다. 작별 뒤엔 무엇이 있을까. 그래도 저래도 '삶'이 있다. 우리는 살아가야 한다. ⓒ롯데엔터테인먼트



코너의 엄마는 죽어 간다. 죽는 게 확실하다. 그 자신도 알고 코너의 할머니도 알고 코너도 안다. 즉, (죽음에 의한) 영원한 작별이 멀지 않다는 걸 다들 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작별을 받아들이기 어렵다. 이미 누군가와의 작별을 해봤을 게 분명한 어른들도, 누군가와의 작별이 무슨 의미인지조차 잘 모르는 아이도, 마찬가지다. 


인생에서 반드시 당면하게 될 건 다름 아닌 '작별'이다. 분신과도 같은 사람과의 작별이라도 그건 명백한 진실, 하지만 맞닥뜨리면 외면하고 도망치고 싶은 진실이기도 하다. 몬스터는 그 모든 게 인간이 인간일 수 있게 하는 인간적인 마음에서 파생된 자연스러운 진실이라고 말한다. 


우린 사실 이 영화의 처음과 끝, 그리고 과정까지도 모두 꿰뚫을 수 있다. 아니, 이미 꿰뚫고 있을 것이다. 다양한 삶의 요소들이 변주되고 은유로 표현되는 장면 장면들은 이 영화의 것만도 코너의 것만도 아니다. 그럼에도 영화가 잔잔하게 그러나 묵직하게 그리고 새롭게 다가오는 건, 영화를 보는 우리들 현재 삶의 결이 영화 주인공들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래도 살아가야 한다. 잊지 않고 좋은 일 슬픈 일 모든 걸 기억해야 한다. 또한 그 기억을 공유해야 한다. 우린 혼자가 아니다. 그 기억을 공유하는 누군가와 함께 살아갈 것이다. 그렇지만 누구보다 자신을 들여다보는 일에 소홀히 해선 안 된다. 그곳엔 나에게 있어 무엇보다 중요한 '나'라는 우주를 구성하는 핵심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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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리뷰] <로우>


우리나라에 개봉될 게 요원한 프랑스산 호러공포영화 <로우>. 근래 본 공포영화 중 최고라 할 수 있으니, 안타깝다... ⓒ포커스 월드



완고한 채식주의자 부모님 밑에서 채식주의자로 살아가는 쥐스틴, 어쩐지 불안한 심리와 어딘지 불편한 몸의 상태가 엿보인다. 그들은 함께 쥐스틴이 입학할 생텍쥐베리 수의학교로 향한다. 그곳은 다름 아닌 쥐스틴의 부모님이 다녔던 데는 물론 언니 알렉스도 다니고 있는 데다. 그녀에겐 광란에 찬 오리엔테이션과 혹독한 신고식이 기다리고 있었는데, 동물의 피를 흠뻑 뒤집어쓴 채 토끼 생간을 먹어야 했다. 하지만 쥐스틴은 채식주의자가 아닌가? 채식주의자일 언니 알렉스는?


칸, 토론토, 런던, 선댄스, 시체스 영화제 등 세계 유수 영화제를 섬렵하고 한국의 부천 영화제에 상륙해 호평을 받은 영화 <로우>의 시작이다. 프랑스 태생인 이 영화는 자그마치 '줄리아 듀코나우' 감독의 장편 데뷔작이다. 흔치 않은 프랑스 호러공포 영화로, 할리우드와는 차원을 달리하는 제목 그대로 '날 것'의 공포를 선사한다. 


최근 다시금 활발히 활동하는 프랑스 최고의 국민배우 '이자벨 위페르' 덕분에 생전 접하지 않았던 프랑스 영화를 몇 번 잇따라 보았는데, 그때마다 느꼈던 것들을 <로우>에서도 느낄 수 있었다. 그 어떤 장르에서도 보는 이의 말초신경을 자극하려는 의도가 다분히 보이는 미국 할리우드 영화와 정반대랄까. 최대한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려하되, 대신 그 자체에 충분한 접함점이 있어 더 빨려들어 더 집중하게 되는 측면이 있다.


성장, 그리고 억압에서 해방되어 얻은 자유


<로우>는 공포, 그중에서도 식인공포의 탈을 쓴 '성장' 영화다. ⓒ포커스 월드



신입생이라면 반드시 치러야 할 신고식이거니와 이행하지 않을 땐 전교적 왕따가 될 수 있기에 쥐스틴은 살아생전 처음으로 육식의 대상인 토끼 생간을 먹는다. 당연히 뒤탈이 날 수밖에. 그녀는 온몸에 심한 피부질환을 앓는다. 마치 육식을 시작한 이라면 반드시 치러야 할 신고식처럼. 이후 그녀는 육식에의 충동과 욕망에 휩싸인다. 


영화는 크게 쥐스틴 개인의 성장이라는 측면과 쥐스틴의 변화로 상징되는 억압에서 해방되어 자유를 얻고 진정한 자신을 찾는다는 도식의 측면으로 나눠 바라볼 수 있다. 부모님과 언니가 걸어간 길을 그녀 또한 걸어간다. 넘을 수 없을 것만 같은 선을 넘어 또 다른 세계로 나아간다. 지극히 협소한 성장 개념이지만 최소한의 의미는 있다. 


쥐스틴은 채식을 선택하지 않았다. 부모님의 유산으로, 채식이든 육식이든 잡식이든 자신의 본능을 겪을 시간이나 기회를 박탈당한 채, 그저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런 그녀가 육체가 도처에 깔린 수의학과에 와서 본능의 해방을 경험한다. 처음은 타인에 의한 강제였지만, 이후의 선택은 오롯이 그녀의 몫이다. 


물론 그녀가 휩싸인 충동과 욕망이 오롯이 그녀의 선택이고 몫이라고 할 순 없다. 하지만 경험을 하지 못한 것에 대한 선택은 그 누구라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특정인에게만 해당되는 건 아니다. 그녀는 이제 한 번이라도 육식을 경험한 후이니, 적어도 육식에의 충동과 욕망은 그녀의 선택이고 몫이라 하겠다. 그때 그녀는 자유를 얻고 진정한 자신을 찾을지도 모르겠다. 


인육보다 무서운, 욕망의 덩어리


억압되어 있던 '욕망의 분출'이 단순 성장을 넘어 인간의 근원 탐구로 나아간다. 자못 심오하다. ⓒ포커스 월드



문제는, 채식주의자였던 그녀가 단순히 육식을 원했다는 것에 있지 않다. 그녀는 그 너머, '인육'을 향한 욕망에 휩싸인다. 거기엔 어떤 인자가 있을 터, 알고 보니 언니 알렉스도 인육을 먹었던 것이다. 가족력인가? 알 수 없다. 어쨋든 쥐스틴은 다시 자신을 억압하려 한다. 그건 되돌릴 수 없는 죄악이니 말이다. 물론 쉽지 않다. 반면 알렉스는 이미 주최할 수 없을 만큼 멀리 가버린 듯하다. 


쥐스틴이 인육에 눈을 뜨며 함께 나온 게 있다. 한 번도 남자 경험이 없는 그녀에게 찾아온 이성에의 눈이다. 하지만 그녀에게 육식에의 욕망 이상의 것이 곧바로 찾아온 것처럼, 그녀에게 이성에의 눈 이상의 '섹슈얼리티'가 찾아온 것 같다. 그야말로 욕망 이상의 욕망으로, 채식이라는 극단에서 발화한 정반대의 극단이 아닌가 싶다.


욕망은 사람을 삼켜버리기 일쑤다. 우린 종종 욕망에 몸과 마음과 머리를 맡겨버리곤 하는 것이다. 누구에게나 DNA 깊숙이 박혀 있기에 하찮은 이성으로 중심을 잡긴 힘들지 않을까. 쥐스틴과 알렉스는 거기서 파생된 억압하는 이성과 표류하는 감성의 표본과 같다. 쥐스틴은 이성으로 그 엄청난 것들을 잡기 위해 고군분투하지만 정말 쉽지 않다. 반면 알렉스는 포기한듯 즐기는듯 자신의 모든 걸 욕망에 맡겨버렸다. 


이 영화에서 인상 깊고 무서운 건, 그래서 인육을 먹는 장면 따위가 아니다. 쥐스틴과 알렉스가 욕망에 몸부림치는 장면들, 욕망에 이끌려가는 장면들, 욕망과 한 마음 한 뜻이 되는 장면들이다. 특히 한없이 여리고 어리바리했던 쥐스틴의 표정에 짙은 갈망이 점차 묻어가 급기야 코피까지 흘리는 장면은 압권이다. 거기엔 인육과 섹스와 지배에의 욕망이 도사리고 있었다. 


시나리오, 연기, 카메라 그리고 영화 외적인 것들


이 작은 영화는 기술적으로도 뒤지지 않는다. 어느 하나 빠지는 게 없다고 할까. ⓒ포커스 월드



쥐스틴과 알렉스는 정반대의 인물로 시작되지만 점차 가까워지는 것 같다. 그러다가도 어김없이 정반대의 습성이 가지는, 자신만의 표시를 가차없이 상대에 가한다. 한 핏줄로서 가지는 극도의 모순을 날 것으로 표현해낸 시나리오에 찬사를 보내며, 역시 날 것으로 연기해낸 배우들에게 기대에 찬 박수를 보낸다. 


쥐스틴의 오락가락하는 이성과 감성의 싸움 덕분에, 강렬한 순간과 정적인 순간이 교차된다. 그 순간들의 교차가 물 흘러가듯 보이는 건 다분히 카메라 덕분이겠다. 숏워킹과 롱테이크가 기술적으로 한 점 오차 없이 선보이는데, 전혀 위화감이 없다. 적재적소라는 말은 이런 것을 위함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공포가 단순히 감정적 최전선의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장르가 아님을 이 영화를 통해 알게 되었다. 공포를 느낄 때는 물론이고 그 전후로 우리가 느끼고 깨닫고 다시금 생각해봐야 할 것들이 참으로 많다. 아무래도 문제는 공포가 아닌 공포 '영화'겠지. 영화 외적인 것들이 영화를 잠식하는 '구조'겠지. 그런 구조 안에서 '공포'의 본질을 떠들어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아마 <로우>는 우리나라에서 정식 극장 개봉하진 못할 것이다. 자극의 강도가 아닌 자극의 층위와 역할이 할리우드의 그것과는 완연히 다르기 때문이다. 만약 그리해준다면 무한한 영광으로 알고 극장을 찾으며 관계자분들께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겠다. 20년 가까이 된 '식인 영화' <양들의 침묵>에 비추어 보아, 조금의 기대를 보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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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플립>


북미 개봉 폭망 이후, 7년 만에 압도적인 지지로 국내 개봉에 성공한 <플립>. ⓒ팝엔터테인먼트



'드디어'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의 소식이다. 영화 <플립>의 북미 개봉 7년 만에 국내 개봉(재개봉이 아니다)이 그것인데, 그동안 국내 팬들의 압도적인 지지 속에서도 꿋꿋하게 개봉을 하지 않았었다. 이유는 북미에서의 압도적인 폭망 때문일 텐데, 2010년 개봉 당시 1400만 불이라는 적지 않은 제작비를 들이고서 1/10 정도의 흥행 성적을 올렸으니, '북미 박스오피스 1위' 타이틀을 밥먹듯이 써먹는 배급사들 입장에선 들여올 이유가 없을 만도 하다. 더욱이 압도적인 지지로 이미 DVD 등으로 볼 사람은 다 봤을 거란 계산도 충분히 가능하다. 


그럼에도 이 영화를 극장에서 보고 싶은 이들이 참으로 많았던 것 같다. 나를 포함해서 말이다. 흔히 말하는 '인생영화' 리스트에서 종종 봐왔으니. 감독 롭 라이너는 올해로 70세가 되었다. 2010년에도 이미 60대였던 건데, 어쩜 이런 달달하고 귀엽고 풋풋한 영화를 만들었는지. 그의 필모를 잠깐만 들여다봐도 적지 않게 이해를 도울 수 있다. 일단 2007년의 <버킷리스트>를 차치하고서라도, 1990년대를 화려하게 수놓은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 <미저리> <어 퓨 굿 맨>이 그의 작품이다. 


로코의 시초가 만든 첫사랑 로맨스의 전형


롭 라이너 감독은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로 '로코' 장르를 개척했다. 그런 그의 첫사랑 로맨스가 기대되지 않는가? ⓒ팝엔터테인먼트


'전형적'이라는 말은 부정적인 단어에 속하는데, 여기서 태초의 '전형'을 만들기란 쉽지 않다. 불가능에 가깝지 않을까 싶은데, 누군가는 만들어낼 것이다. 롭 라이너가 1989년 내놓은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가 바로 그 태초의 전형이다. 이후 1990년대를 넘어 2000년대는 물론 2010년대까지 영화세계를 주름잡는 장르 중 하나인 '로맨틱 코미디'의 시초이다. 


그야말로 감각적인 감독이라 할 수 있는데, 그의 다른 작품들도 해당 장르를 개척하다시피 했다 말할 수 있겠다. 영화 <플립>은 그의 감각적인 노련함이 극대화된 작품으로, '전형적이다' '식상하다'라는 말을 들을 요지가 있을지언정 그 사랑스러움으로 모든 걸 충분히 커버할 수 있다. 마냥저냥 기분이 좋아진다고 할까?


길 건너에 이사온 브라이스를 보고 첫 눈에 반하는 7살 여자아이 줄리. 특히 그의 눈이 마음에 들었다. 첫만남부터 적극적으로 다가가지만, 브라이스는 달갑지 않고 부담스러운 눈치다. 그런 관계가 자그마치 6년이나 계속된 가운데, 브라이스는 어떻게든 줄리의 마음을 돌려 놓으려 노력한다. 대놓고 여자친구를 사귀고, 그녀의 간절한 도움 요청을 저버린다. 뭐든 함께 하자는 그녀의 요청을 저버리는 건 일상이다. 


어느 날부터 줄리가 암탉을 키우게 되었는데, 무수히 많은 달걀을 감당하지 못하고 브라이스네로 매일 같이 가져다주었다. 실은 브라이스를 보기 위해서 였지만, 아무튼 브라이스는 이 달걀들을 받는 족족 버렸다. 그녀가 닭을 키우는 곳이 더럽다는 이유 같지 않은 이유였다. 하지만 우연히 그 모습을 줄리에게 들키고 만다. 이후 줄리는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모습, 브라이스를 피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때부터 였나, 브라이스도 지금까지와는 다른 모습, 줄리가 신경 쓰이는 모습을 보인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이후로도 한두 번 줄리에게 큰 실수를 저지르고 그때마다 줄리가 브라이스를 피하는 모양새가 더 커진다. 역시 그때마다 브라이스가 줄리를 신경 쓰는 모양새도 더 커지고. 이제 브라이스가 줄리를 쫓아다닐 때다. 첫사랑의 풋풋하고 알콩달콩한 로맨스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첫사랑 로맨스를 대하는 할리우드와 우리나라


우리나라의 첫사랑 대명사, <클래식< <건축학개론>. 여기에 <플립>은? ⓒ팝엔터테인먼트



우리나라에서 첫사랑 로맨스의 대명사들이 있다. 2003년작 <클래식>과 2012년작 <건축학개론>이 그것이다. 우린 이 영화들에서 아련하고 아픈 첫사랑의 추억을 엿볼 수 있다. 그래서인가, 첫사랑은 이루어질 수 없다는 아픔, 그럼에도 그렇기 때문에 평생 생각하게 된다는 공식이 생겼다. 


미국은 그렇지 않은가 보다. 할리우드에는 물론 수많은 첫사랑 로맨스의 정석들이 있겠지만, 최신작 중에 우리들에게 <플립>이 차지하는 비중은 남다르다. 그래서 이 영화가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첫사랑 로맨스라고 말하기가 좀 그렇지만, 적어도 우리에게 와닿는 건 엄청나다는 걸 알기에 비교해도 손색없음을 말하고 싶다. 


이들의 첫사랑은 시기가 훨씬 빠르다. 10대를 전후 하기에, 아픔이 끼어들 자리가 없다. 제3자의 입장에서 느끼는 것이겠지만, 마냥 풋풋하고 귀엽고 앙증맞기까지 하다. 물론 좌충우돌, 갈등과 오해와 증오와 사과가 계속된다. 그건 어느 관계에서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우리와 다른 점은 이것들을 푸는 과정과 결과에 있다. 


우리는 채 풀지 못하고 여전히 오해와 어느 정도의 증오가 남은 채 시간이 흐른다. 그건 때로 단순 아픔을 넘어 한으로 남는다. 그리고 신파로 흐를 여지가 다분하다. 반면, 이들은 가차 없이 풀어버린다. 한 점 여지를 남기지 않는다. 그래서 사실 잘 들여다보면 해결하는 과정에서의 미비한 개연성과 결말 부분에서 정작 해결하지 못한 자잘한 것들이 눈에 띈다. 우리의 첫사랑 로맨스가 더 현실적인 것이다. 


로맨스 그리고 인생 성장 메시지


북미의 경우인지, 이 영화만의 경우인지, 첫사랑 로맨스에 로맨스만 들어가는 게 아니다. 거기엔 첫사랑 연령의 성장도 있다. ⓒ팝엔터테인먼트



오직 로맨스에 천착하기 십상인 우리네 첫사랑 영화와는 다르게 이들이 잊지 않고 넣는 게 있다면, 어리디 어린 이들을 위한 인생 성장 메시지이다. 브라이스와 줄리에게 다른 점이 있다면 집안 사정인데, 단도직입적으로 간단명료하게 말해 브라이스네는 잘 살고 줄리네는 잘 못산다. 


그렇지만 속사정은 많이 다른 듯, 브라이스네는 브라이스가 배울 만한 게 없고 줄리네는 줄리가 배울 만한 게 넘쳐난다. 물론 그건 왠만한 학교 공부 따위에서 배울 수 있는 정형화된 배움이 아니다. 그야말로 인생이 무엇인지 알 수 있는 배움이다. 줄리는 아버지에게서, 작은 아버지에게서, 오빠들에게서, 엄마에게서, 심지어 브라이스네 할아버지와 닭들에게서도 배운다. 


그녀는 크나큰 아름드리 나무에 올라가 누구도 보기 힘든 세상을 보았고, 직접 닭을 키우며 손수 달걀을 얻어 돈을 주고 팔고 고마움의 표시로 드리는 기쁨과 환희를 맛보았고, 지체장애인인 작은 아버지의 모습에서 인생의 또다른 면을 들여다보았다. 음악을 하고 싶어 하고 또 잘하는 오빠들에게서는 세상의 다양하고 넓은 품을 엿보았고, 브라이스네 할아버지와 함께 정원을 만드며 편견과 고정관념을 저버려야 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무엇보다 아이러니하게 아버지와 어머니의 부부싸움과 이후의 합리적이고 사랑스러운 대응을 통해 현실을 깨우칠 수 있었다. 


<플립>은 마냥 첫사랑 로맨스 영화만은 아니다. 성장 영화이기도 하다. 사랑과 성장이 사이좋게 한 발씩 나아가고 있는 느낌이다. 그래서 더 사랑스럽게 느껴지는 게 아닌지 모르겠다. 또 우리나라에선 이런 류의 영화를 찾아보기 힘들기에 미국보다 훨씬 엄청난 인기를 누리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한다. 이참에 '인생영화' 리스트에 <플립>도 추가하는 게 어떠신지? 후회는 없을 거라 자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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