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프랑수아 오종 감독의 <프란츠>


파격적 행보를 계속 해왔던 프랑수아 오종 감독의 영화 경력 전환점이 될 만한 작품 <프란츠>. ⓒ찬란



프랑수아 오종은 프랑스가 낳은 작금 세계적인 작가주의 감독이다. 갓 20살이 넘은 1980년대 후반부터 활동했지만 2002년 <8명의 여인들>에 이르러 그 이름을 알렸다. 그 이전까지 그의 작품이 국내에 개봉된 적이 없고, 그 이후로 그의 모든 작품이 국내에 개봉된 사례만 보아도 어림직잠할 수 있다. 물론 하루아침에 뛰어 오른 건 아니고, 1990년대부터 비평계에 그 이름을 드높여 왔다. 


그는 매 작품마다 파격적 소재를 기본 장착하고 개성있는 상상력과 풍자를 선사했다. 비평가들이 좋아마지 않는 영화를 만들었다고 할까. 그렇지만 무엇보다 오종을 상징하는 건 섹슈얼리티 기반의 욕망이다. 한국에 처음 소개된 그의 작품 <스위밍 풀>이 당대를 대표할 만한 섹슈얼 미스터리라는 점도 크게 작용할 것이다.(<8명의 여인들>이 먼저 만들어졌지만, 국내에서는 <스위밍 풀>의 개봉 이후 그 성공으로 <8명의 여인들>이 개봉했다.) 그 전후로도 그는 섹슈얼리티에 천착했다. 


그런 프랑수아 오종 감독이 <프란츠>로 우리를 찾아온 건, 영화가 파격과는 조금 거리가 있기에 또 다른 느낌의 파격으로 다가온다. 영화는 제1차 세계대전 후의 독일과 프랑스를 배경으로 사랑과 용서, 거짓말과 진실, 외면의 정적과 내면의 격동 등에 휩싸인 인간상을 내보인다. 인간은 수많은 감정과 욕망의 소용돌이에 휩싸이면서도 꿋꿋이 살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프랑수아 오종 감독의 영화 경력의 전환점과 같다. 


전쟁 미망인 앞에 나타난 비밀스런 적국민 남자


전쟁으로 약혼자 프란츠를 잃고 아파하는 안나 앞에 적국민 남자가 찾아온다. 무슨 이유로? ⓒ찬란



1919년, 제1차 세계대전 패전 직후의 독일. 안나(폴라 비어 분)는 전쟁으로 약혼자 프란츠를 잃고 실의에 빠져 지내고 있다. 그녀가 버틸 수 있었던 건 아들을 잃고서도 그녀를 딸처럼 생각하고 보살핀 프란츠의 부모님 덕분이다. 아니, 프란츠의 부모님이 그녀 덕분에 버틸 수 있었던 것일 테다. 그런 독일 한복판의, 그것도 프란츠의 묘지에, 한 프랑스인이 나타난다. 


그는 아드리앵(피에르 니네이 분), 전전(戰前)부터 프란츠와 절친한 친구 사이였다고 한다. 프란츠의 마지막도 잘 알고 있는 그는, 프랑스인을 향한 적대감에도 불구하고 프란츠 부모님의 신뢰를 얻는다. 안나도 그에게 차츰 마음을 연다. 하지만 아드리앵의 눈은 자주 흔들리고 프란츠 부모님과 안나와 함께 있을 때 종종 불안해 한다. 알 길 없는 불안한 연유, 비밀을 간직하고 있는 것 같다. 


아드리앵은 돌연 고향인 파리로 돌아간다. 그 직전 더이상 버틸 수 없었던 그는 안나에게 비밀을 털어놓는다. 다소 충격적인 그 비밀은, 그가 프란츠의 오랜 친구가 아니라 전쟁 중에 프란츠를 죽인 독일군 출신이었다는 것이었다. 아드리앵은 프란츠 부모님과 안나에게 용서를 구하고 싶었던 거였다. 


이제 그만 안나가 자신의 삶을 살았으면 하는 마음과 이왕이면 아드리앵과 잘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던 프란츠 부모님은, 안나에게 아드리앵을 찾으라고 조언한다. 안나는 아드리앵의 비밀을 말씀드리지 않고 혼자만 간직한 채 파리로 향한다. 마치 1부가 끝나고 2부로 향하는 느낌이다. 그녀는 그를 찾을 수 있을까? 그녀와 그에게는 어떤 일이 기다리고 있을까? 


아름다운 정적, 영화 전반부


영화의 전반부는 흑백과 컬러를 오가는 와중에 아름다운 정적이 주를 이룬다. ⓒ찬란



비록 적국이지만, 비록 자식을 죽였을지 모를 적국민이지만, 모두 전쟁이 낳은 피해자들이라는 깨달음과 함께 용서를 넘은 포용이 영화의 전반부를 이룬다. 영화 외적인 요소들이 주를 이루기에 지루한 면이 없지 않아 있는데, 아름다운 슬픔과 역설적인 서정이 주는 감정적 호소가 깊이 있다. 영화를 다 본 후에 느낄 수 있는 점이지만, 격정적인 후반부의 느낌과 대조를 이루는 장치였다고 할 수 있겠다. 


감독의 의도가 잔뜩 들어 있는 흑백과 컬러의 조화가 눈길을 끈다. 영화는 흑백이 거의 전부를 차지하고 짧은 순간들만 종종 컬러로 내보이는데, 공통적으로 환희의 순간들이다. 문제는, 그 순간들이 암울한 현실에 비춰 당사자들은 모르지만 상황 상 현실을 더 암울하게 만들 순간들이라는 것이다. 아드리앵이 흔들리는 눈빛에도 불구하고 프란츠와의 거짓된 즐거운 한때를 말하고, 안나가 쓸쓸함이 잔뜩 묻은 목소리로 프란츠와의 즐거운 한때를 회상한다. 


더불어 곳곳에 도사리고 있는, 후반부 연속되는 격정적 사건들의 복선들도 눈에 띈다. 주로 아드리앵의 행동과 눈빛과 대사 등에서 대략이나마 알아차릴 수 있다. 다분히 안나의 시선에서 영화를 보고 느낄 수밖에 없기 때문인데, 그것들을 하나 하나 풀어내고 전에 없는 감정에 흔들리는 안나와 일심동체 되는 나를 느끼게 될 것이다. 


다양한 사건과 격정적 내면, 영화 후반부


안나가 겪는 다양한 사건 중에 내면에 몰아치는 격정들. 영화 후반부를 차지하는 것들이다. 우린 안나와 더불어 참으로 많은 것들을 보고 느끼고 깨닫는다. ⓒ찬란



안나가 아드리앵을 찾아 파리로 떠나면서 시작된다고 할 수 있는 후반부는, 똑바로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놓칠 수 있는 많은 중요 요소들의 모음이다. 거의 모든 장면, 대사, 행동, 표정에 의미가 부여되어 있다.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도 거기에 있고, 영화를 이루는 재미 요소도 거기에 있다. 


아드리앵이 용서를 빌고자 독일을 찾아왔던 전반부는, 안 그래도 정적인 독일이라는 곳에 더해 겉으론 즐겁지만 속은 타들어가는 아드리앵의 정황이 겹쳐 자칫 우울할 정도로 정적일 수밖에 없었다. 반면, 후반부는 프랑스 파리라는 당대 최고의 도시에 더해 전승국이라는 프리미엄을 업고 안나가 겪는 다양한 외적 사건들과 오락가락하는 내면에 의해 격정적이기 짝이 없다.


안나가 겪는, 안나가 프란츠와 겼었고 프란츠 부모님과 겪었고 겪고 있으며 아드리앵과 겪는 모든 것들이 정신없이 휘몰아친다. 그 하나 하나가 모두 의미 있게 다가온다. 사랑, 용서, 거짓, 진실, 회한, 이 모든 걸 이루는 욕망, 그 안에서 외롭게 죽어가는 인간 그리고 그럼에도 살아가는 인간. 순간이 곧 전체이고, 전체가 곧 순간이다. 


영화는 말한다. 인간이 위대한 건 그저 살아 있는 것이라고. 살아갈 이유 따윈 바라지도 않지만 오히려 죽어야 할 이유를 찾았음에도 살아 가는 그들. 생각지도 않은 희망을 주었다고 획기적인 방법으로 절망을 선사해도 살아 가려는 그들. 나도, 우리도 그렇게 살아간다. 그럼에도 살아간다. 안나와 아드리앵, 그리고 프란츠 부모님. 모두 프란츠를 잊으려 하지 않아도 된다. 아니, 잊으면 안 된다. 하지만,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프란츠와만 살아갈 순 없다. 계속 살아가기 위해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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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서평] <동물들의 인간 심판>


<동물들의 인간 심판> 표지 ⓒ책공장더불어



어렸을 때 집에는 놀 만한 게 없었다. 엄마가 직접 나와 저녁 먹으라고 부르실 때까지 밖에서 놀았다. 친구들과 놀 건 정말 많았는데, 우리집에서 조금만 가면 얕은 산을 낀 공원이 있어 그곳에 자주 갔다. 그러곤 매미, 잠자리, 사마귀, 메뚜기, 개미 등의 곤충을 잡았고, 잡아 놓고 아무것도 하지 않아 그저 죽어가는 곤충이 있는 반면 잡아 괴롭히는 데 온 정성을 쏟는 곤충이 있었다.  


그 행위는 우리들에겐 흔한 놀이였고, 어른들에겐 자연 학습이었다. 그때보다 훨씬 자연과 덜 친숙한 지금, 모르긴 몰라도 그런 경향은 더 심해졌을 것이다. 아이들에게나 어른들에게나 그건 그 무엇보다 학습적인 놀이이다. 물론 그 곤충의 입장에서 생각할 이유나 여지 따위는 없다. 그러나, 그 곤충은 이 세상의 모든 크고 작은 생물들 중 하나임에 분명하다. 그런 짓이 생태계 파괴에 일조하는 거라고 왜 그땐 몰랐을까.


<동물들의 인간 심판>(책공장더불어)은 동물을 향해 호모 사피엔스(인간)이 저지른 하찮고 작은 행동부터 엄청나고 크나큰 행동들, 그로 인해 일어났던 혹은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낱낱이 까발린다. 너무 많이 접해왔던 계몽서 느낌이라고? 천만에. 이 책은 전적으로 동물들의 시점에서, 끔찍한 범죄를 저지른 인간을 재판에 올려 법정을 여는 스토리로 전개된다. 그 죄는 동물들에 대한 비방과 중상, 학대, 그리고 대량학살이다. 


동물들에 대한 인간의 죄


생태계에는 양육강식 법칙이 존재한다. 이른바 생존 게임, 먹잇감을 두고 경쟁도 하고 발톱을 세우고 독을 뿜으며 사냥을 한다. 하지만 거기에는 중요한 핵심이 있다. 서로 존중하고 공정한 규칙에 따라 자신과 상대의 존엄성을 지키는 것이다. 인간 세상에도 양육강식 법칙이 엄연히 존재한다. 


하지만 그곳의 양육강식은 '살아남는 자가 이기는 것'이라는 말 아래, 존중이고 규칙이고 존엄성이고 나발이고 같은 인간과 온갖 창조물을 헐뜯어 명예를 실추시키는 데 열중하는 걸 뜻한다. 인간은 인간을 욕할 때 하필이면 동물을 빗대는데, 그 자체로 이유없이 동물을 비방하고 중상하는 것이다. '개의 새끼'는 천하의 나쁜놈을 뜻하고, '숫염소'는 성(性)에 관한 부정적이기 짝이 없는 단어다. '닭의 대가리'나 '금붕어'는 멍청하다는 말과 동의어이고, '뱀'은 교활하다는 뜻이고... 정녕 끝이 없다. 


인간의 두 번째, 세 번째 죄는 이에 비할 바가 아니다. 최근에 개봉해 많은 이슈를 뿌렸던 영화 <옥자>가 이 두 죄를 한 번에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우리가 흔히 접하는 동물에 개, 돼지, 소, 말, 고양이 정도가 있다. 이중 개와 고양이는 반려의 대상이 되고, 소는 젖을 주고 밭을 갈며, 말은 유흥의 대상이다. 하지만 돼지는? 내가 알기론 오로지 식용의 대상일 뿐이다. 그래서 돼지는 태어나서 인간의 식용 대상으로 키워질 뿐이다.


옥자가 전 세계 각지의 좋은 환경에서 자란 건 양질의 고기를 위해서다. 책에서 법정의 증인으로 나온 돼지 장브누아르의 증언은 정녕 끔찍하다. 우리가 생각하는 '더러운' 돼지의 이미지가 만들어지는 과정은 곧 식용 돼지로의 과정이다. 그들은 비좁고 더럽기만한 곳에서 아무런 희망 없이 그저 먹기만 할 뿐이다. 그러곤 곧 도살장으로 향해 죽어간다. 옥자가 달랐던 건 '더 맛있는 고기'를 위해 스트레스를 적게 받은 환경에서 자란 돼지였을 뿐, 그 끝이 도살장에서의 죽음, 그리고 식탁 위인 건 똑같다. 


인간의 부유함은 곧 다른 동물의 가난


수많은 종류의 크고 작은 동물들이 증언하는 내용은 상상 이상의 끔찍함을 동반한다. 동시에 생각하기 힘든 역발상과 인간이 제대로 마주칠 수 없는 인간의 본 모습도 제공하는데, 그 모든 게 실랄하게 정확해 보인다. 동물들은 인간이 절대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늘 원한다고 말한다. 그건 '소유 게임'이라는 것인데, 인간들은 그걸 '경제'라고 부르며, 가능한 한 많은 물질을 얻는 걸 목적으로 몇 가지 점수를 정확히 매겨서 계층을 나눈다. 그 기준은 '돈'이다. 


"호모 사피엔스가 더 가지려고 하는 다양한 게임은 모두에게 재앙입니다. 지구라는 공간은 제한적인데 인간의 탐욕은 끝이 없습니다. 문제는 70억 명의 인간이 먹고 살아야 하는 게 아니라 '누가 더 가졌는지'를 결정하는 거대한 경기에 참여하는 선수가 70억 명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들이 더 가지면 분명 우리(동물)는 당연히 덜 갖게 되니까요. 물도, 깨끗한 공기도, 식량도, 살 공간까지 줄어드는 겁니다. 한 마디로 인간의 부유함은 곧 우리의 가난을 의미합니다." (본문 192쪽)


우리는, 인간은 이 사실을 아주 잘 안다. 결국에는 인간 자신을 포함한 모두의 파멸만 기다리고 있다는 걸. 하지만 그 기저에는 '나만 아니면 돼'라는 마인드가 똬리를 틀고 있다. 나만, 내 가족만, 내 나라만, 내 세대만, 종국에는 인간만 아니면 되는 것이다. 다른 인간도 염두에 두지 않는 이 간악한 마인드에 다른 종이 들어설 여지가 있겠는가? 더욱이 이 세상은 변화하고 진보되고 나아진다고들 하지만 사실 퇴보만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걸 다들 아는 이상 글러먹었다. 


돌이킬 수 없는 죄를 저지른 인간에게 내려질 판결이 궁금하다. 물론 법정인 만큼 희대의 범죄자 인간에게도 변호인이 있는바, 적어도 동물에 대한 생각의 변화는 진보하고 있다는 것도 누구나 인정하는 것 같다. 그런 인간도 대다수가 아닌 소수에 불과하지만 말이다. 비록 늦었지만 깨달음의 꾸준한 나아감일까, 일시적이고 단편적이며 소수의 현인적 깨달음의 반복일까. 


아직은 알 수 없다. 그리고 어떤 판결이 나온다 해도 그것이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았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없다. 일단은 자기 죄가 무엇인지도 모를 대다수의 인간들에게,  '네 죄를 네가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동물들의 인간 심판, 그 처벌의 모양새도 그 일환이겠다. 진짜 끔찍한 건 수많은 동물들이 법정에 나와 증언한 수많은 끔찍한 죄들을 다시금 저지를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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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크리스토퍼 놀란의 <덩케르크>


나오는 작품마다 끝없는 기대를 불러일으킴과 동시에 그에 충족하는 작품을 들고 나오는 몇 안 되는 감독 크리스토퍼 놀란의 신작 <덩케르크>. ⓒ워너브라더스코리아



크리스토퍼 놀란은 작가주의 감독이 아니다. 분명 그의 영화엔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와 보여주고자 하는 바가 명명백백하게 담겨 있지만, 많은 부분들이 영화를 만드는 이와 영화를 보는 이에게 맞춰져 있는 듯하다. 영화 산업에 종사하는 이 중 하나로서, 놀란은 굉장히 사려 깊은 사람이라 할 수 있겠다. 


그래서 그의 영화들에는, 특히 그가 단독으로 각본을 맡은 영화들은 사실 이야기를 이야기답게 즐길 수 있는 요소가 많지 않다. 대신 그 빈자리를 제대로 된 영화적 감각으로 채워 모자람이 없게 한다. 배경, 촬영, 음악, 음향, 편집, 캐릭터, 상황 등 영화에는 수많은 요소들이 있지 않은가. 놀란은 누구보다 잘 활용할 줄 안다. 


그 와중에도 그는 반드시 무엇 하나를 던진다. 절대 장황하지 않게, 아주 짧은 한 문장 정도의 물음이나 명제를 우리에게 제시하는 것이다. 그게 영화 내적일 때가 더 많기에, 우린 정확히 놀란의 '이야기'보다 '영화'에 열광한다. 그의 영화를 소비하고 향유하다 보면, 자연스레 이야기가 수면 위로 올라오는 형태다. 


역사에 길이 남을 '덩케르크 철수 작전'


전쟁에서 '철수'는 곧 '패퇴'다. 불명예로 남을 게 분명하다. 하지만 '덩케르크 철수 작전'은 그 과정과 그 이후를 생각했을 때 정녕 위대한 철수다. ⓒ워너브라더스코리아



<덩케르크>는 그의 19년 경력 동안 불과 10번째 작품이다. 동시에 <미행>과 <인셉션>에 이은 3번째 단독 각본 작품이다. 그의 필모를 살펴보면 알겠지만, 그의 1번째 실화 바탕 작품이기도 하다. 사실 그의 전작들에서 어떤 작품에서도 비슷한 결을 찾을 수 없지만, 그나마 <인셉션>과 <인터스텔라>가 비슷하다 하겠다. 인간 존재를 훨씬 초월하는 상황에서의 인간을 그렸다는 점에서 말이다. 


한국에서라면 알 만한 사람이 그리 많지 않지만, 영국에서라면 모르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을 제2차 세계대전 초기의 '덩케르크 철수 작전'. <덩케르크>는 이 작전을 기반으로 한다. 제2차 세계대전 발발 후 독일군과 영프 연합군은 꽤 오래 대치만 한다. 그러던 1940년 5월 독일군의 대대적인 공격이 시작된다. 연합군은 독일군의 기만에 속아 프랑스 북동부 해안에 갇혀 포위당하고 전멸될 위기에 처한다. 그리고 다른 항구들은 모두 독일군이 점령, 덩케르크만 남은 상황이 된다. 


영화는 덩케르크만 남은 상황에서 처절한 철수작전이 시작되고 있던 시점에서 시작된다. 덩케르크에는 자그마치 영국군과 프랑스군이 자그마치 34여 만 명이 남은 상황, 어떻게 해서든 영국으로 철수해야 한다. 이제 곧 독일군의 총공세가 시작될 상황이었다. 남아 있는 이들만으로는 절대 철수가 불가능한대, 어떻게 철수할 것인가?


윈스턴 처칠 수상은 그 유명한 연설, “우리는 자신감과 힘을 길러내어 하늘에서 싸울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영국을 지켜낼 것입니다. 우리는 해변에서 싸울 것입니다. 우리는 상륙지점에서 싸울 것입니다. 우리는 들판에서, 또 거리에서 싸울 것입니다. 우리는 언덕에서 싸울 것입니다. 우리는 절대로 항복하지 않을 것입니다”를 덩케르크 철수 작전이 성공한 직후 했다고 한다. 


놀란은 이 작전에서 영화의 모티브를 얻었을 게 분명하지만, 다름 아닌 이 연설에서 영화의 얼개를 얻었을 게 분명하다. 영프 연합군 보병들의 생존 투쟁을 그린 육지 해안에서의 일주일, 영국 어부들의 목숨 건 연합군 철수 도움을 그린 바다에서의 하루, 영국 공군의 독일 공군과의 필사적인 전투를 그린 하늘에서의 한 시간. 영화가 덩케르크 철수 작전을 바라본 시간과 공간과 사람들이다. 여기에 이 영화의 모든 것이 담겨 있다. 


전쟁과 재난의 상관 관계


<덩케르크>는 전쟁영화의 꼴을 한 재난영화다. 전쟁 자체가 재난이라는 말이기도 할 것이다. 재난은 전쟁의 비인간적인 면모를 부각시키기 위한 역수단이다. ⓒ워너브라더스코리아



<덩케르크>를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마디씩 했음직한, '이 영화는 전쟁영화가 아니다. 재난영화다'. 누구보다 전쟁영화를 많이 봤다고 자부할 수 있는 필자의 눈에도 완벽한 재난생존영화 그 자체였다. 대부분의 전쟁영화는 '전쟁'이라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엄연히 실제해 눈에 보이고 예상이 가능한 위협을 주는 상황 하에 놓인 여러 인간 군상을 말하고자 한다. 아니면 부조리하고 무의미한 '전쟁' 그 자체를 논하거나. 


반면 이 영화는 도무지 예측불가능하고 예외없이 무차별적이며 상황은 미시적으로 보여주지만 상황에 처한 인간들은 거시적으로 보여주는 등 전형적이고 실제적인 재난재해의 무서움을 역설한다. 보병들의 육지 해안에서의 생존 투쟁이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데, 오히려 결국 말하고자 하는 건 재난재해가 아닌 전쟁이 아닌가 싶다. 전쟁을 수단으로 재난을 보여주고, 다시 재난을 역수단으로 전쟁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전쟁에 처한 말단 병사들의 생각(집에 가고 싶다)과 행동(그저 살고 싶을 뿐)이 재난재해에 처한 사람과 똑같다고 말함으로써, 전쟁의 비인간적이고 무차별적인 면모를 부각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 와중에 영국의 일반인 어부가 목숨을 걸어가면서 지옥이 펼쳐지는 덩케르크로 향하여 '아이들'을 구하고자 하는 마음이, 전쟁의 비인간성을 폭로하는 데 크게 작용하고 있다. 


너무나도 휴머니즘적인 요소들의 향연, 자칫 감상적인 전쟁으로서의 역주행 가능성을 놀란은 한스 짐머의 음악으로 완전히 급반전 시킨다. 신디사이저를 이용해 귀는 물론 가슴을 꾸준히 묵직하게 짓누르는 음악으로 생존 투쟁과 죽음의 한복판의 전장에 몰입하게 만드는 것이다. '여기는 전쟁의 한 가운데다'라는 걸 깊이 새길 수밖에 없게 만드는 음악들, 이 영화의 태반을 차지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비인간적인 전쟁을 이기는 건 인간적인 숭고함


결국 '인간'이다. 가장 무자비하고 비인간적인 폭력인 전쟁 앞에서도 무너지지 않고 오히려 숭고함을 더하는 인간이란... <덩케르크>를 보면 알 수 있다. ⓒ워너브라더스코리아



전쟁의 비인간성을 폭로함과 동시에 인간 존재를 부각시키고자 한 게 <덩케르크>의 목표인 듯하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그저 철수만 기다리고 있는 수많은 이름 없는 연합군 병사들의 겉모습과 툭툭 던지는 말엔 한없는 자기혐오의 그림자가 어려 있다. 그들은 자타공인 패전병이기 때문이다. 


반면 독일군은 총소리, 대포소리, 폭탄소리로만 대변될 뿐 그 모습조차 잘 찾아볼 수 없다. 이는 재난재해에 빗댈 정도의 비인간적이고 무차별적인 전쟁의 면면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처참할 정도로 힘없는 연합군에 반해 당시 최강최악의 힘을 자랑하는 독일군의 대단함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철수할 수밖에 없는 상황 하에서 철수하는 자의 비참함과 살고 싶어하는 자의 비애감을 동시에 보여준다. 이 극대화된 모순의 자장 안에서 '철수'가 '패퇴' 아닌 '생존'으로 이어진다. 곧 '감성'이 '이성'으로 '감성적인 승화'를 이룩하는 순간이다. 질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든 건, 생존 투쟁을 한 이들이 아닌 덩케르크에서는 볼 수도 없는 이들이다. 그런 사실상의 사면초가 상황에서 살아 돌아온 건 위대한 승리라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영화는 그런 면면들까지도 우리가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게, 친절하다면 친절하게 보여준다. 비인간적인 전쟁을 이기는 건, 더욱 비인간적인 무기와 역시 철두철미하게 비인간적인 작전이 아닌, 지극히 인간적인 숭고함이 아닌가. 영화는 그런 인간성들을 곳곳에 뿌리째 박아 놓는다. 절대 흔들리지 않는 그 뿌리들은 육지에서, 바다에서, 하늘에서 수많은 이들을 생존으로 이끈다. 영화를 보고난 후 한동안 우리의 오감은 오롯이 그곳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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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간 책 다시읽기] 마쓰모토 세이초의 <점과 선>


소설 <점과 선> 표지 ⓒ모비딕



히가시노 게이고와 미야베 미유키, 일본을 대표하는 소설가(추리소설가가 아닌)들이다. 추리, 미스터리, 서스펜스 장르 소설을 읽지 않는다는 독자도 이들의 소설 한 편쯤은 접해봤음직하다. 30여 년 동안 정상의 인기를 구가하고 있다. 


더욱 대단한 건 장르 작가의 선입견을 뛰어넘는 대접을 받고 있다는 거다. 영화와 마찬가지로 장르 소설을 제외한 소설이 거의 죽다시피 한 일본 소설계의 특이점이라고 할 수 있겠고, 장르 소설을 엄연히 소설의 주류로 받아들이는 일본 소설계의 넓은 아량(?)을 엿볼 수 있겠다고도 하겠다. 


이 둘에게는 공통점이 있는데, 우리는 이들을 '사회파 소설가'라 칭한다. 추리를 위한 추리, 미스터리를 위한 미스터리가 아닌, 사회 구조를 테마로 하되 그 방법론으로 추리를 적용하여 더 자연스럽고 자유롭게 진실에 다가가고자 한 것이다. 그 끝에는 결국 '인간'이 있다. 그리하여 이들을 단순히 추리소설가로 폄하할 수 없는 노릇이다. 


사실, 사회파 소설의 시초는 따로 있다. 궁핍과 차별을 뛰어넘어 늦게 작가의 길에 들어서는 등 그 자체의 파란만장한 삶으로도, 글에 대한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가공할 만한 집념으로도, 일본 역사상 가장 인기 있는 작가 중 한 사람으로서도 유명한 '마쓰모토 세이초'다. 그리고 그의 첫 장편소설 1958년작 <점과 선>은 오늘날 사회파 소설의 시작이라 할 수 있겠다. 


사회 부조리와 인간을 묘사하는 목적에의 추리


10년도 더 전에, 그야말로 추리소설에 푹 빠져 개걸스럽게 섭렵하고 있었을 때 당연히 이 소설도 접했다. 당시의 나에게 추리소설이란, '추리를 위한 추리'가 중심에 있어야 했다. 하지만 이 소설에서 추리는, 그 출중하고 복잡하고 완벽한 트릭에도 불구하고 수단에 불과했다. 사회의 부조리와 그 안에 갇힌 인간을 묘사하는 목적에의 수단. 


더군다나 이제껏 본 적 없는 복잡한 시간과 숫자들의 맞물림은 나를 지치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 모든 것들이 지금 완벽히 해결되었다. 근래 들어 이렇게 빨리 읽은 소설도 드문데, 이토록 어렵고 치밀한 트릭과 추리를 이토록 완벽하게 이해하고 넘어갈 수 있다니. 그동안 머리가 큰 것도 있겠고, 번역의 차이도 있겠지만, 애초에 이 소설이 완벽한 게 아니었나 싶다. 


관청 납품으로 급성장한 회사의 오너 야스다 다쓰오는 요정 '고유키'에 자주 들렀다. 그가 올 때마다 오토키가 담당하다시피 했는데, 어느 날엔가 그녀가 아닌 다른 이들 둘과 함께 저녁을 먹는다. 평소 그답지 않게 말이다. 그러곤 그들은 도쿄역으로 함께 가는데, 그곳에서 다름 아닌 오토키가 하카타행 특급에 오르는 걸 목격한다. 그녀는 중앙 관청 부정부패 사건으로 이름이 거론되고 있는 과장대리 사야마 겐이치와 함께 있었다. 여러 말들이 오가던 중 6일 후 후쿠오카 가시이 해안에서 그 둘은 시신으로 발견된다. 누가 보아도 동반 자살한 것으로 보이는 모습이었다. 


문제는 이제 시작이다.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은 이 동반 자살 건을 후쿠오카 경찰서의 베테랑 형사 도리카이 준타로가 의심을 갖고, 경기청에서 부정부패 사건을 조사하던 미하라 기이치 경위가 의문을 던진다. 자살이 아닌 타살이 아닐까 하는 의심과 의문. 이후 미하라는 끊임없는 의심과 의문, 섬광 같이 번뜩이는 깨달음, 상사인 가사이 경감의 전폭적인 지지와 함께 사건을 차근차근 해결해 나간다. 


종국에는 일본의 끝과 끝인 훗카이도와 규슈를 오가는 종횡무진 끝에 애당초 점 찍은(?) 용의자를 색출하는 데 성공한다. 그 방법론으로 극도의 리얼리티를 첨가한 추리 기법을 선보이는데, 열차 시간을 시작으로 당대의 항공, 배, 숙박 시간을 모조리 완벽히 꿰어 맞춘 트릭과 알리바이들이었다. 그 사이에 1950~60년대 일본 사회의 시대상을 오밀조밀하게 그려내고, 부조리를 대범하게 드러낸다. 


이 소설 <점과 선>의 흥미점과 위대함


우린 이 소설에서 몇 가지의 흥미점을 찾을 수 있다. 추리소설 팬이라면 광분할 만한 트릭이 그 중 하나이다. 아직도 기억나는 환상적인 트릭이 있다. <오페라의 유령>으로 유명한 가스통 르루의 <노란방의 비밀>이 보여준 세계 최초의 밀실 미스터리,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로 유명한 아가사 크리스티의 <오리엔트 특급살인>이 보여준 완벽한 알리바이 깨기 등. <점과 선>의 열차 시간표를 이용한 완벽한 트릭 깨기도 이에 결코 뒤떨어지지 않는 재미를 선사한다. 일상생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이기에 더 와닿는 무엇이 있을 것이다. 


이 트릭과 추리에 이어지는 깨달음도 있다. 미하라 경위가 계속해서 순간적으로 깨닫는 것들이 그것인데, 다름 아닌 '맹점'이다. 모르는 사이에 작용하는 선입관으로 당연하다고 지나치는 것들을 범인이 이용한 것인데, 이 만성이 된 상식이야말로 정녕 무서운 것이라고 소설은 말하고 있다. 그래서 수사에 임할 땐 당연한 상식이라도 일단 출발점으로 되돌아가서 검토해야 한다는 것이다. 일상생활에 굉장히 도움이 되는 흥미점이다. 위의 트릭과 마찬가지로 일상생활과 연관되어 있는 걸 알 수 있다. 


마지막으로, 무엇보다 이 소설의 위대함을 드러내주는 점으로, 부정부패 사건으로 얼룩진 사회의 부조리와 어두운 내면을 고발하고자 하는 장면이다. 이 소설의 주요 사건은 부정부패 사건을 덮으려는 더러운 목적에서 시작된 것이다. 작가는 이 부분을 그냥 지나치지 않는데, 대형 비리 사건에서 모든 걸 짊어지고 자살을 택하는 사람이 꼭 정통 실무자인 과장 대리급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들은 출세에 희망이 보이니 상관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할 준비가 되어 있고, 결국 자신의 보신보다 출세를 위해 상관의 뜻에 엽합해서 협력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게 인정이고, 관청은 그런 인정이 얽혀 있는 동네라고 못 박는다. 


6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수많은 비리, 부정부패, 자살을 빙자한 타살 사건들이 판을 치며 세상을 속이려 한다. 사실 개 중엔 소설에서처럼 고위층이 연류된 사건이 상당할 것이다. 그렇지만 결국 그들이 아닌 그들을 따른 이가 대신 책임 지고 인생이 파멸에 이르며, 그들은 다른 어딘가로 가 이전보다 더 나은 생활을 하곤 한다. 이는 더 이상 소설도 아니고 영화도 아니고 설도 아니고 사실이다. 우리는 이런 사실 속에서 살고 있다. 괜찮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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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오래된 리뷰] <공기인형>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공기인형>은 나에게는 '이제야 비로소 보이는 영화'의 전형이다. ⓒCJ엔터테인먼트



뭘 잘 몰랐던 시절, 즉 영화에 대한 지식이 짧았던 시절, 지금 생각하면 황당하지만 나름 이해는 가는 이유 때문에 좋은 영화를 '쓰레기' 취급했었다. 모르긴 몰라도 그건 뭘 좀 안다는 지금도 마찬가지일 것이고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열린 마음을 갖고 남의 말에 휘둘리지 않는 안목을 키워나가는 수밖에 없다. 


일본에서는 2009년에 우리나라에서는 2010년에 개봉한 영화 <공기인형>이 나한텐 그런 케이스 중 하나이다. 당시에는 당연히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을 아예 몰랐었고, 그야말로 전형적으로 좋은 영화만을 진짜 좋은 영화로 치부하고 있었다. 그 '전형적'에는 '야하지 않은' 영화가 속해 있었다. 이 영화는 상당히 특이한 형식에 과감한 노출신이 꽤 나온다. 당시 나의 기준에서 탈락이었다. 


불과 7년 만에 안목이 얼마나 늘었을지는 모르겠지만, 이 영화가 최소한 나쁜 영화가 아니라는 건 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워낙 수작, 명작들만 내놓아서 상대적으로 성이 차지 않는 느낌이 들지만, 대표작 중 하나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의 좋은 영화라고 해도 틀린 건 아니다. 무엇보다 '배두나'라는 배우의 발견, 그녀는 공기인형 그 자체였다. 그녀가 아니면 안 되는, 그런 영화였다. 


인간 아닌 것의 인간 되기


공기인형 노조미는 어느 날 갑자기 아무 없유도 없이 인간의 마음을 갖게 된다. 왜? ⓒCJ엔터테인먼트



레스토랑에서 웨이터로 일하는 히데오(이타오 이츠지 분), 여자친구와 헤어진 그는 솔로다. 그런데 집에 무엇인가가 있다. 다름 아닌 공기인형 노조미(배두나 분), 외로운 남자들의 성욕을 채워주는 섹스 토이다. 그는 노조미와 대화를 나누고, 애무와 섹스를 한다. 뒤처리도 직접 한다. 그에게 노조미는 몸과 마음을 나누는 대상이다. 


어느 날 갑자기 노조미에게 인간의 마음이 생긴다. '그녀'는 몸이 공기로 이루어진 것만 빼고는 완전한 인간이 된 것이다. 옷을 입고 밖을 돌아다니며 인간의 말과 행동을 배운다. 우연히 들어간 비디오 가게, 점원 준이치(아라타 분)에게 첫눈에 반한 노조미, 그곳에서 일을 시작한다. 이후 아침이면 평범한 인간처럼 비디오 가게에 출근하고, 저녁에 히데오가 퇴근할 때쯤이 되면 집으로 돌아가 인형이 된다. 


준이치와의 사랑을 키워나가는 노조미, 그녀는 행복한가? 마음을 가졌지만 속이 텅 비었기에 인간이 될 수 없고 마음을 가졌으니 인형이 될 수도 없다. 그러던 어느 날 사건이 연속으로 터진다. 물건을 정리하다가 모서리에 팔이 찢겨 몸에서 공기가 빠져나가게 된 것이다. 그 모습을 준이치가 보고 만다. 그리고 노조미는 준이치와 사귀면서 계속 히데오 집 구석에 숨어 있었는데, 어느 날 보니 히데오가 다른 공기인형을 데려다 놓은 게 아닌가? 노조미는 자신이 마음을 가졌다는 걸 히데오에게 알린다. 또 노조미는 자신을 만든 이를 찾아가 공기인형의 탄생과 죽음을 듣기도 한다. 


영화 <공기인형>은 '인간 아닌 것의 인간 되기' 이야기다. 일일이 열거할 순 없지만, 우린 동화 <피노키오>를 필두로 이런 이야기들을 많이 접해왔다. 소설이자 영화인 <바이센테니얼 맨>도 생각난다. 모두 인간에 의해서 만들어지고, 요정의 도움으로 인간의 실수로 인간처럼 된다. 다만, 공기인형 노조미는 아무 이유 없이 인간의 마음을 갖게 된다. 이 사실이 해석하기 나름으로 크게 작용했다고 본다. 


인간의 속이 비었다는 역설로 인간을 말하다


인간의 마음을 가진 것이 점점 아픔과 슬픔으로 다가오는 노조미. 그건 인간에 대한 조롱이 아닌 위로의 일환이다. ⓒCJ엔터테인먼트



인간은 태초부터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왜 태어났는가' '우리는 어떻게 태어났는가'를 물어왔다. 아마 과학적으로는 입증이 되었을 것이다. 종교적으로도 마찬가지고. 하지만 인간 본질을 탐구하는 철학적으로는 답을 내기 힘들지 않을까. 그래서 인간은 그저 '던져진 존재'다. 누군가에 의해서도 우연에 의해서도 아니다. 


여기서 공기인형 노조미가 마음을 갖게 된 '이유 없는 이유'가 겹쳐진다. 나아가 그녀는 속만 텅 비었을 뿐 '인간'이 된 것이다. 영화는 그녀를 인간처럼 이유 없는 이유로 인간을 만들어 놓고, '속이 텅 빈' 것도 채워 사실상 완벽한 인간으로 만든다. 어떤 식으로? 노조미의 물질적인 채워짐이 아니라, 인간의 속이 비었다는 역설로. 


노조미가 마음을 갖고는 밖을 돌아다니다가 높은 고층 빌딩 앞에 앉아 있는 노인과 대화를 하게 된다. 속이 텅 빈 것에 대해서 말이다. 노인은 자신의 속이 텅 비었다는 노조미의 말에, 속이 텅 빈 인간이 많다고 말한다. 저 앞의 높은 고층 빌딩에 사는 인간들처럼. 이에 노조미는 당연히 그 비유적인 표현을 직접적으로 받아들여 자신처럼 인간의 마음을 가진 공기인형이 많이 있다고 잘못 알게 된다. 동시에 그때만큼은 그녀는 완벽한 인간이 된 것이다. 스스로도, 또 스스로가 생각하는 세상 안에서도. 


영화는 이처럼 공기인형 노조미를 점점 더 완벽한 인간으로 만들면서, 한편 인간을 속이 텅 빈 공기인형으로 치환한다. 그렇지만 이는 '반(反) 인간'은 아니다. 오히려 인간을 불쌍하게 보고, 인간이 사는 이 세상을 비판하고 있다. 노조미가 인간의 마음을 가져서 너무 힘들다고 말하는 건, 그런 마음을 가진 인간을 조롱하는 게 아니라 위로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시' <공기인형>


일본을 대표하는 영화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많지 않은 작품들. 그중에 <공기인형>은 '시'에 해당되지 않을까 싶다. ⓒCJ엔터테인먼트



개인적으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팬이 되어가는 중이다. 그의 영화를 작년 초에 처음 접했는데, 당시 최신작이었던 <바닷마을 다이어리>였다. 전형적으로 잔잔한 일본풍 영화의 느낌과 형식 위에, 은근한 파격이 계속 되었던 기억이 있다. 그게 조화를 이루는 모습이 더욱 파격적으로 다가왔다. 올해 초에는 그의 장편 데뷔작 <환상의 빛>을 보았는데, 20년 동안 크게 다르지 않은 느낌이 들었다. 이미 데뷔 때부터 자신 만의 세계를 구축해놓았다고 할까?


어디선가 본 적이 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세 작품을 문학 장르로 비교해놓았는데, 공감이 갔다. <걸어도 걸어도>가 소설, <공기인형>이 시, <바닷마을 다이어리>가 에세이라고 말이다. 아직 <걸어도 걸어도>를 접하지 못했는데, 다른 두 작품을 접한 이 시점에서 적절한 비유라고 생각한다. 전형적으로 잔잔한 일본풍의 느낌과 형식 위에 파격을 입히고 조화를 이룩한 그의 스타일에, 쉽지 않은 비유와 상징까지 심어두었으니 이를 '시'라 하지 않고 무엇이라 하겠는가. 


노조미의 '나는 인간의 마음을 얻었습니다'로 시작하는 내레이션들을 모아 놓기만 해도 충분히 시가 된다. 제목도 이미 정해져 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수많은 걸작들, 사실 그가 만든 모든 영화들이 걸작이라 할 만한대, 그중에서도 <공기인형>은 4대 대표작이라 칭할 수 있지 않을까. 여기서 대표작은 그가 구축한 세계를 세분화할 때 각각을 대표할 수 있는 작품이라 할 것이다.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를 또다른 문학 장르인 '영화'에 놓고 싶다. 


아직 보지 못한 그의 작품이 최소 일곱 작품은 남아 있다. 왠지 비슷한 느낌의 영화들일 것 같은 불길한듯 황홀한듯 한 예감이 드는데, 반드시 다 보게 될 것이다. <공기인형>은 그의 영화를 접하는 시작으로는 맞지 않는 것 같다. 그보다 최신의 영화들을 보고 그 다음 접하는 게, 여러 모로 도움이 될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나의 이번 시도는 실패인가? 그렇지만도 않다. 매도 빨리 맞는 게 낫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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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헤드윅>


개인적으로 오래된 숙원 사업이었던 <헤드윅>. 드디어 풀어냈다. ⓒ백두대간



오래된 숙원 사업이 하나 있다. 영화 <헤드윅>을 소개하는 것인데, 개인적으로 이해하기 힘들기도 했거니와 영화를 볼 때마다 또 다른 것들이 나를 덮쳐와 벅찬 면도 있었다. 소설 <위대한 개츠비>가 이 영화와 더불어 숙원 사업 중 하나였던 적이 있는데 풀어 냈고, 이제 <헤드윅>만 남았다.


기억에 처음 본 게 대학생 때였으니 2004년 쯤이었던 것 같다. '영화와 철학' 비슷한 제목의 교양 과목에서 '젠더' 주제의 타이틀이었다. 그때는 정녕 '충격'으로만 다가와 지금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펼쳤던 것 같다. 두 번째가 2008년 쯤이었다. 이 영화를 극히 좋아하는 친구와 함께 봤는데, '아련'한 느낌으로 남아 있다. 세 번째가 3년 전쯤이었다. 혼자 봤는데, 다시 봐도 '재미'있구나 하고 지나갔다. 


그리고 이번에 네 번째로 아내와 함께 봤다. 스토리는 대략 알고 있으니 행간에 주목하려 했다. 조금은 보이는 것 같았다. '충만'한 기분이었다. 이 영화는 조금이라도 뭔가 보이면 성공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래서 십수 년만에 비로소 이렇게 소개하고자 한다. 충격적이고 재미있고 아련하고 충만하기까지 한 이 영화 <헤드윅>, 그 완벽한듯 허술한듯 한 매력에 흠뻑 빠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특별한듯 이질적인, 그러나 평범한 사랑과 성장 영화


십수 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겉모습만 보면 이질적일 수 있다. 하지만 결단코 이 영화는 평범한 사랑과 성장 영화다. ⓒ백두대간



가난한 록밴드 '앵그리 인치'를 이끌고 변두리 바에서 노래를 부르는 헤드윅(존 캐머런 미첼 분), 남자의 목소리와 여성의 몸매를 가졌다. 너무나도 좋은 노래를 너무나도 잘 부른다. '그녀'에겐 남자 친구 이츠학가 있다. 그런데 그는 여자 목소리를 낼 줄 알며 여자 가발을 몰래 쓰곤 한다. 그들은 맞지 않는 것 같다. 


헤드윅은 노래로 내래이션으로 대화로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베를린장벽이 세워진 1961년 동베를린에서 태어난 그, 한셀은 아버지에게 성추행을 당했던 것 같다. 어머니한테 쫓겨난다. 한셀은 미군 라디오 방송에 심취해 오븐 속에서 락을 듣는다. 엄마가 싫어하기 때문. 그에게 미국으로 갈 기회가 열린다. 그에게 반한 어느 미군 병사가 그와 결혼을 한 것이다. 대신, 그는 성전환수술로 '여자'가 되어야 했다. 하지만 수술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그에겐 일 인치의 살덩어리만 남게 되었다. 


그런 그녀에게도 사랑이 찾아온다. 미군 장군의 아들 토미인데, 그녀와 사랑에 빠진 것인지 그녀의 음악과 사랑에 빠진 것인지 모르겠지만 그들은 함께 한다. 그렇지만 그 문제의 일 인치 살덩어리 때문에 토미는 떠나고 급기야 헤드윅의 노래를 거의 그대로 훔쳐 세계적인 락스타로 발돋움한다. 헤드윅은 다름 아닌 토미를 스토킹하며 콘서트장에 딸린 레스토랑에서 노래를 부르는 것이었다.


<헤드윅>은 특별한듯 이질적인듯 거부감이 느껴질 수 있는 영화이지만, 실상은 평범한 사랑과 성장에 관한 영화다. 본래 사람은 남성와 여성이 한 몸에 있어 네 손과 네 발 달린 형체였는데 신의 노여움을 사 반으로 갈라졌기에, 자신의 반쪽을 찾아야 한다고 말하는 헤드윅. 그게 '사랑의 기원'이라는 것이다. 남자일까, 여자일까. 토미일까, 이츠학일까.  찾을 수 있을까. 


성에 대한 위대한 성취, 모두 맞다


감히 말하지만, 이 영화는 성에 대한 위대한 성취라 할 수 있다. 단순히 위대한 영화를 넘어선 그 무엇이다. ⓒ백두대간



1998년 존 카메론 미첼 주도 하에 만들어진 브로드웨이 뮤지컬 <헤드윅>, 2001년에 영화로 만들어진다. 세계 최고의 독립영화제인 '선댄스 영화제'에서 감독상을 수상하며 전 세계에 이름을 알리는 존 카메론 미첼과 영화 <헤드윅>. 이 영화가 넘어버리는 도식은 일반적인 사람이 생각하기 쉽지 않은 것이다. 특히 우리나라처럼 이분법적 사고가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사회에서는 말이다. 그래서 더욱 특별하다. 


베를린과 독일을 동과 서로 갈라버린 베를린장벽이 세워진 때 태어났다는 상징성을 몸소 보여주는 헤드윅, 남자에서 여자로 되었지만 남자의 흔적이 남아 있다. 그도 그녀도 될 수 없는 헤드윅은 그래서 반쪽을 사랑을 찾아 헤매는 것이다. 그러면 자신이 온전해질 수 있다고 믿는다. 그렇지만 갖가지 이유로 모두 떠난다. 


결론에 이르면 알게 되겠지만, 헤드윅은 자신에게로 돌아간다. 그렇게 깨달은 건 반쪽이 다른 누군가가 아니라 자신 안에 있다는 것. 즉, 젠더퀴어 선언에 이은 인정이다. 세상엔 남성과 여성만 있는 게 아니다. 영화에서 다양한 캐릭터들이 보여주는 성정체성과 사랑에 대한 혼란은, 그래서 틀린 게 아닌 다른 게 된다. 아니, 맞는 게 된다. 그런 혼란은 결코 이상한 게 아니라 정상적인 것이다. 


이어 역시 결론 때문에 혼란스러워지는 궁금해지는 헤드윅이 갖는 여러 정체성들이 있다. 헤드윅은 트랜스젠더, 드래그 퀸, 젠더퀴어로 변천사를 가지고 있다. 그 사이에도 알 수 없는 성정체성 변화와 혼란이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결국 헤드윅은 누구란 말인가? 어떤 성을 가지고 있단 말인가? 우린 답을 원한다. 


그러나 헤드윅은 답하지 않는다. 끊임없이 고민하고 변화하고 혼란스러워 하면서도, 그때그때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답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는 '제3의성'을 인정하는 도식조차 넘어서는 '상대적 성정체성'의 확립이다. 모든 성을 다 가졌다고 자각하는 '팬젠더'나 모든 성을 오가는 '젠더플루이드'가 그나마 비슷할까? 나로서는 더이상의 진척이나 이해는 힘들다. 성에 관한 위대한 성취인 것만은 분명하다. 


'성정체성 따위', 그 자체로 완벽한 한 인간


성정체성이 어쩌구 저쩌구 하는 걸 집어 던져버리자. 그리고 자신으로 들어갔다가 나오자. ⓒ백두대간


이 영화를 보면서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고 스스로를 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굉장히 무섭고 두려운 질문이고 돌아봄인데, 내가 남성이 아닌 다른 성정체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게 '끔찍'하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의 지극히 일반적인 모습이며 이상과 현실의 괴리이다. 이상은 모든 걸 다 인정하고 당연한듯 바라보는 것이지만, 현실은 끔찍하게 여긴다는 것이다. 


정확히는 '자신'이 그러하다고 생각할 때이다. 다른 누군가가 그러하다고 해서 끔찍하다고 여기진 않는다. 여기에는 다분히 교육에 의한 인식전환이 필요한대, 한 걸음씩 진전된 교육이 보이는 것 같다. 물론 오랜 시간이 걸릴 거다. 특히 우리나라에선. 최후의 대상은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될 것이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나여야만 한다. 내가 성정체성의 변화를 받아들일 수 있어야 진정한 인식전환이 가능하다는 말이다. 


헤드윅이 남자친구 이츠악의 변화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헤드윅은 자신의 변화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그 혼란을 정면으로 응시하지 않고 자꾸 밖으로만 눈을 돌렸다. 그렇지만 돌아오는 건 참담한 실패뿐. 결국 자신에게 눈을 돌려 정면으로 응시해 받아들이니 문제를 풀 수 있었다. 


쉽지 않다. 아니, 불가능에 가까울 수도 있다. 이렇게 해보자. 성정체성을 특별하게 보지 말고 '성정체성 따위'로 생각하자. 남자나 여자도 생김새와 성격과 목소리와 행동거지 등으로 완벽한 하나의 개인이 존재하는 것처럼, 수많은 성정체성도 그렇게 생각해보자. 그들도 그저 존재하는 것이다. 하나의 개인으로. 


모든 개인에 무슨 수식어를 붙이지 않는 것처럼 헤드윅은 그저 헤드윅인 거다. 트랜스젠더니 드래그 퀸이니 젠더퀴어니 따위의 수식어는 필요 없다. 이 영화가 궁극적으로 보여주려는 게 바로 그런 모습이 아닌가, 싶다. 그 자체로 완벽한 한 명의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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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그녀>


인공지능과 사랑에 빠진 인간, 그런데 제목이 인공지능 <그녀>인 이유는 뭘까? ⓒ워너브라더스



'4차 산업혁명'이 새로운 시대의 화두다. 인공지능, 로봇기술, 생명과학이 주도하는 차세대 산업혁명, 100여 년을 주기로 일어난 산업혁명이 4차 때는 50년 만에 찾아왔다. '알파고'는 그 상징 중에 하나가 되었는데, 단순히 인간의 능력을 앞서는 것 뿐만 아니라 인간을 대체할 수 있다는 얘기다. 


사실 로봇이나 인공지능이 인간을 대체하기 이전에 인간이 인간을 대체해왔다. 참으로 많은 분야에서 인간이 인간을 대신해 왔는데, '대리사회' '대체시대'라고 명명해도 되지 않을까 싶다. 누구도 대신할 수 없을 것 같은 각각의 인간이 가지는 고유한 감정도 대신해주는 것이다. 이 시대가, 이 사회가, 유토피아인지, 디스토피아인지. 


근 미래를 배경으로 한 대체불가 로맨스 영화 <그녀>는 여자 인공지능과 사랑에 빠진 한 인간 남자의 이야기를 주로 한다. 그러기 위해선 인간도 인간이지만 인공지능이 '감정'을 지녀야 한다. 나아가 상대방에게 감정을 전달해야 한다. 사랑은 혼자 할 수 없는 것이기에. 어찌 가능할까. 그런데 영화는 나름의 방식으로 기가 막히게 그려낸다. 


4차 산업혁명 시대의 신개념 사랑 방식


인공지능 그녀를 사랑하는 인간 테오도르는 너무나도 행복해 보인다. 근미래 누구에게나 도래할 수 있는 사랑의 모습이 아닐까. ⓒ워너브라더스



남들 편지를 대신 써주는 회사에서 일하는 테오도르(호아킨 피닉스 분), 그의 편지들은 하나 같이 의뢰인과 대상과 상황에 완벽히 부합하는 아름다운 글이다. 현실은 아내 캐서린(루니 마라 분)과 이혼을 준비하며 별거 중. 그렇지만 벌써 일 년이 넘었음에도 여전히 캐서린과의 좋은 한 때가 쉼 없이 그를 괴롭힌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봐도 별 다른 진전이 없다. 마냥 우울하게 방황할 뿐이다. 


테오도르는 호기심으로 최신 인공지능 OS를 구입한다. 이왕이면 여자로. 그저 말동무가 필요했을 거다. 심심하거나 마음 정리가 안 될 때면 언제나 불러내 자기 얘기나 들어줄. 그런데 사만다(스칼렛 요한슨 목소리)라는 이름의 이 OS, 심상치가 않다. 목소리부터가 사람을 끄는 마력이 있고, 무엇보다 '리얼'하다. 금방 친해진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괴로울 때나, 언제나 불러내 얘기할 수 있거니와 아는 것이 많아 어떤 이야기도 잘 통하고 자신의 마음을 잘 다독여주기도 하고 심지어 '본인'의 이야기도 건네준다. 분명 그녀는 인간이 아니지만, 그녀와 사랑에 빠진 게 하등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녀는 훌륭하게 인간을 '대체'할 수 있을까? 테오도르는 그녀와의 '사랑'을 잘 지속해나갈 수 있을까? 


그야말로 4차 산업혁명에 걸맞는, 아니 상징하는 신개념 사랑 방식이다. 사람만의, 나아가 생물만의 전유물이라고 생각했던 '사랑'이라는 감정의 궁극체가, 인간이 창조해 낸 비생물에 의해서 현실화된 것이다. 그것도 결정적으로 인간의 일방적인 사랑이 아닌 쌍방 사랑의 모습으로. 이들의 사랑이 너무 예뻐서 지나치기 쉬울 충격이다. 우린 시선을 선택해야 한다. 이들의 '예쁜 사랑'이 우선인지, '충격'이 우선인지. 


인간과 인공지능의 사랑, 충격과 공포


나에게 이들의 예쁜 사랑은 충격과 공포로 다가온다. 아직은 인간들의 사랑을 원한다. ⓒ워너브라더스



감독의 의도는 다분히 이들의 '예쁜 사랑'인 듯하다. 디지털의 최정점에 이른 듯한 전체적 시대상과 사회 모습과 분위기와는 정반대인 듯한 아날로그적 감정선이 영화 전체를 지배한다. 거기에 가장 크게 기여하는 게 영상과 색인데, 배경은 파스텔 톤으로 채도를 높이려 했고 인물은 원색으로 명도를 높이려 한 듯하다. 


거기에 무엇보다 테오도르와 사만다의 대화, 테오도르의 표정, 테오도르의 과거 회상 등의 아날로그에 집중함으로써 완벽한 4차 산업혁명을 이룩한 디지털 사회라는 걸 최대한 알아차리지 못하게 했다. 전반에 깔린 당연한 디지털에 시선이 가는 대신, 테오도르의 감정에 집중하게 된 것이다. 


반면 나는 이들의 '예쁜 사랑'이 오히려 '충격'으로 다가왔다. '씁쓸함'도 함께. 시대가 시대인 만큼, 이런 생각이 굉장히 보수적으로 비춰질 수 있겠다. 인공지능이 인간 삶과 사회를 전반적으로 지배 혹은 함께 하는 시대에, 인간이 인공지능과 사랑에 빠지는 게 전혀 이상할 것 없지 않은가. 문제는 인공지능이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궁극의 감정을 대신할 수 있게 된 점이다. 인간의 노동력이 아닌, 인간 자체를 대신하는 것이다.


제목이 '그녀'인 만큼, 영화가 부각하는 건 인간이 아닌 인공지능이다. 그녀의 변화, 발전, 진화 등. 그렇지만 나에겐 인공지능이 아닌 인간이 계속 보였다. 심지어 인공지능인 그녀가 아닌 인간이 되고 싶어하는 그녀가 보였다. 인간에게 받은 상처를 인공지능에게서 위로 받는 한 인간의 이기적인 면모도 보였다. 그렇다. 나는 최대한 인간을 보려고 애썼다. 그들의 사랑이 '인간과 인간'이면 좋겠다는 무의식의 발로였다. 그렇지만, 결정적으로 그녀는 인간이 아니니만큼 충격은 계속 배로 돌아올 뿐이다. 


더욱더 충격적으로 다가온 건, 그녀가 '인간'이 되고 싶다고 말한 적이 한 번도 없다는 사실이다. 그녀는 몸을 갖고 싶고, 감정을 지니고 싶다고 말했을 뿐이다. 불가능한 게 없는 그녀의 세계에선 그것이 비단 인간 만을 뜻하는 건 아닐 테다. 어디까지 나아갈지 알 수 없을 정도의 그녀, 그 미지가 주는 충격과 공포는 새롭기까지 하다. 


그럼에도 최고의 영화 <그녀>


이 모든 영화 외적인 논의들을 제쳐두면, <그녀>는 최고의 영화다. 그렇지만 계속 씁쓸함이 남기에, 마음 놓고 또 보긴 싫다. ⓒ워너브라더스



사실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명백히 알 수 있다. 현대인의 고독과 외로움과 소통일 것이다. 근 미래가 아니라 현재도 과거에도 우린 똑같이 고독했고 외로웠고 소통의 부족을 느꼈다. 다만, 미래의 우리는 훨씬 더 쉽게 훨씬 더 고도의 비인간 대체자를 찾을 수 있다. 오랜 시간과 공력을 들여 나에게 맞게 대상화하거나 나를 상대에 맞게 타자화할 필요도 없다. 바로 나를 내보일 수 있고 아무 걱정할 필요도 없다. 


아직 우리는 '결국 인간'이라는 불편하지 않은 답을 원한다. 아니, 최소한 나는 그렇다. 그걸 누구보다 잘 아는 감독은 일부러 주체를 인간 '그'가 아닌 인공지능 '그녀'에게 놓고 그녀의 합당한 자가 발전으로 인한 자발적 떠나감으로 인간 그가 결국 인간 그녀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는 구도를 만들었다. 여기서 나는 충격이 조금 가시는 대신 '씁쓸함'을 느꼈다. 굉장히 인간적인 씁쓸함인데, 결국 모든 건 헤어지는구나. 


이 모든 논의를 제쳐두면, 아니 오히려 이런 논의들과 함께 할 때 <그녀>는 단연코 최고의 영화다. 우선 이 영화가 '아름답다'는 데에 이견을 달 만한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시각적으로도, 청각적으로도, 그리고 생각적으로도. 그리고 우린 이 영화로 시대와 사회와 우리 자신을 동시에 들여다볼 수 있다. 보는 이에 따라서 깊게도 얇게도 가능하다. 거기에 가보지 못한 미래를 굉장히 현실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무엇보다 그 어디에서도 보지 못한 형태의 사랑을 느낄 수 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이 영화 하나로 진행할 수 있는 논의의 깊이와 총량이 어마어마하다. 이렇게 방점을 찍는 바, 심지어 <그녀>는 주인공인 '그녀'가 언제쯤 모습을 내보일까 하는 기대감을 끝까지 가지게 하여 긴장감이 촉발하는 즐거움까지 선사한다. 이 작은 영화가 파도 파도 끝이 없으니, 이보다 더 좋은 영화를 찾기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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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랜드 오브 마인>


제2차 세계대전에 수많은 입장들이 존재한다. 전쟁 전, 중, 후에도 마찬가지. <랜드 오브 마인>은 전쟁 후의 어떤 입장이다. ⓒ싸이더스




영화 <랜드 오브 마인>은 제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한 만큼, 전쟁영화의 외형을 띠고 있다. 정확히는 전쟁을 반대하는 반전영화겠다. 거기엔 가해자와 피해자가 뒤바뀌는 세상살이의 도식이 존재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오직 피해자만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피해자만 양산하는 전쟁 따위를 왜 해야 하는가.


수많은 제2차 세계대전 관련 영화가 미국, 영국, 소련의 손에 만들어졌다. 승전국이자, 피해자라 할 수 있는 입장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물론 패전국이자 가해자인 독일, 일본 입장에서도 만들어졌다. 가해를 정당화하거나 반대로 가해 사실을 공표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진 않는다. 일본은 종종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여 비난 받아왔다. 많은 경우, 진정한 가해자의 손에 피해를 입은 자국민들이나 성숙하기 전에 전쟁에 투입되었던 소년병들을 다루곤 한다.


그렇게, 제2차 세계대전은 수많은 입장들을 대변하는 수많은 콘텐츠를 양산해 왔고 앞으로도 계속 양산할 것이다. <랜드 오브 마인>은 그동안 종종 보아왔던 독일군 소년병 포로들의 이야기를 조심스럽게 다룬다. 그것도 종전 후의 이야기이다. 종전 70년이 지나가는 시기에서, 전쟁 '중'의 이야기가 아니라 전쟁 '후'의 이야기가 나오고 있는 것 같다.


전쟁의 잔해를 제거하는 임무를 맡은 소년들


패전국 나치독일, 그들이 전쟁 중에 남긴 치명적인 잔해들을 소년병들이 목숨 걸고 치운다. ⓒ싸이더스



1939년 9월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발발한 제2차 세계대전, 이듬해 4월에는 덴마크와 노르웨이를 침공한다. 덴마크는 즉시 항복, 독일은 덴마크 서해안 전역에 방어선을 구축한다. 연합군의 상륙을 저지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연합군의 상륙은 프랑스였고, 덴마크 서해안 방어선은 종전 후에도 그대로 남는다.


나치독일이 저지른 전쟁의 잔해, 덴마크는 나치독일 포로들에게 지뢰 제거 임무를 맡긴다. 그 중 상당수가 소년병이었다고 하는데, 영화는 다름 아닌 소년병들의 지뢰 제거 임무를 주로 삼는다. 그 어떤 도구도 사용할 수 없는, 맨손과 막대기 하나에 의존한 지뢰 제거. 그야말로 목숨과 바꾼 임무다.


엄청나게 위험한 작업인 만큼 사전 연습부터 철저해야 한다. 사전 연습도 실전처럼, 연습에서도 죽고, 실전에서도 죽어 나간다. 이 임무를 맡은 덴마크군의 칼 상사는 처음에는 눈도 깜짝하지 않지만, 시간이 갈수록 계속해서 죽어 나갈수록 느낀다. 이 아이들은 전쟁에 투입되어 명백한 죄를 저질렀지만, 지뢰 제거 임무를 맡아야 할 건 최소한 이 아이들은 아니라고.


그렇지만, 그런 생각은 누구한테건 씨알도 안 먹힐 것이다. 그들이 전쟁 중에 저지른 '짓'을 보면 그런 생각을 할 수 있겠는가? 아무리 그들이 성숙하지 못한 상태에서 오로지 명령에 따라 한 행동이었다고 해도 말이다. 그들이 저지른 짓을 합당화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그들의 총탄에 쓰러진 수많은 이들을 생각해서라도.


그런 식의 '방법'과 그런 '방향'은 잘못 되었다


복수를 하는 건 좋다. 승전국이니만큼 어느 정도의 것들은 예상된다. 하지만 명백히 방법과 방향이 틀린 게 존재한다. 이 영화는 그걸 보여준다. ⓒ싸이더스



여기서, 단순히 가해자와 피해자는 없고 그저 고통만 있었다는 식으로 풀어갈 순 없다. 이 나치독일 소년병 포로들이 가해자였다는 걸 부정할 수 없다. 종전 후의 모습만, 그것도 포로가 된 모습만 보여주기 때문에 선량해보일 수 있을지 모르지만, 전쟁 중에 그들이 잔악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고 말 못할 것이다. 미성숙을 앞세워, 잔악한 명령을 그 누구보다 앞서 실행했을지 모를 일이다.


문제는 그들이 아닌 그들에게 말도 안 되는 일을 시킨 이들의 모습이다. 감독이 의도한 것일 수 있겠는데, 종전 후 나치독일 포로들에게 덴마크군이 보이는 행동은 나치독일이 보여준 잔악함 못지 않았다. 그들의 행동은 '방향'과 '방법'이 잘못된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최소한 소년병 포로들에게 그런 일을 시키면 안 되는 것이었고, 아무런 제대로된 도구 없이 굶어 죽을 듯이 일을 시키면 안 되는 것이었다.


범죄에는, 주범이라는 게 존재한다. 주도하고 기획하고 결정하고 명령을 내리고 책임지고 가장 많은 것들을 얻을 수 있는 존재 말이다. 제2차 세계대전의 경우, 종전 후 주범 중 상당수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전쟁 중에 혹은 내분으로 인해 죽었다. 물론 많은 주범들이 사형 당했다. 그렇지만 그 바로 밑의 이들에겐 아마 정치적일 거라 예상되는 이유로 무죄 판결이 내려지기도 했다.


누구는 주범이 아니라는 이유로 무죄 판결을 내려 잘 살아가고, 누구는 종전 후에도 전쟁 중보다 더 죽음에 직면한 작업을 계속해 나가야 하는 게 말이 되느냐고 말하려는 게 아니다. 각각 저지른 짓에 따른 각각의 속죄가 필요할 테니까. 그리고 결정적으로 세상은 불공평하니까. 문제는 그렇게 내려온 죄의 무게를, 왜 가장 '인간'에 가까울 이들이 짊어져야 하느냐는 것이다. '악마' 같은 이들이 해결해야 할 사항이 아닌가. 설사 그들이 짊어져야 한다고 쳐도, 그런 식으로라면 얘기가 되지 않는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으로 맞대응하면 똑같이 된다는 건 너무도 당연한 얘기가 아닌가. 더욱이 덴마크는 저항 한 번 하지 않고 곧바로 항복했다.


그들을 인간으로 대해야만, 그들은 뉘우칠 수 있다


마냥 인간적인 차원에서 그들을 인간으로 대해줘야 하는 건 아니다. 그들을 인간으로 대해주어야만, 그들은 스스로를 인간이 아닌 병사라고 생각한다. 그래야만 뉘우칠 수 있다. ⓒ싸이더스



감정적으로 이해는 한다. 누구라도 그 상황이었다면 그렇게 대응했을 것이다. 내 국토와 내 가족를 무참히 짓밟은 이들. 대상의 구체적 물상을 들여다볼 필요도 없이 대상이 속해 있는 집단의 악마성에 분노를 터뜨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게 인간이니까. 그렇지만 그 시간이 지나고 들여다볼 수 있는 상황이 되었을 때, 보여야 한다. 용서할 순 없더라도 인정은 해야 한다는 걸. 그들도 우리와 같은 인간이라는 걸 말이다.


영화는 인간을 보여주려 애쓴다. 아니, 애쓸 필요도 없다. 인간이라 할 수 없는 나치독일이 남긴 잔해를 인간들이 처리하고 있는 것과 다름 없다. 아름다운 해안을 뒤로 하고 무참하게 죽어가는 건 광포에 휩싸인 병사들이 아닌 두려움과 배고픔에 벌벌 떨고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인간들 뿐이다. 그들을 그렇게 대하는 순간, 과거는 사라지고 없는 것이다.


만약 그들을 포로답게 대했다면 오히려 그들을 인간이 아닌 병사로 생각했을 듯하다. 이런 비인간적인 처사를 통해 그들의 인간성을 발현시키지 않았다면, 그들은 자신의 잘못을 계속해서 떠올렸을 것이다. 잘못을 뉘우치던가 계속해서 광기에 휩싸였던가 하는 건 그 이후의 일이겠다. 그것이 오히려 '이쪽'을 위한 길이 아니었을까, 싶다.


매우 힘든 일이었겠지만 이성적으로 대처했다면 방향과 방법을 달리했을 것이고, 그들은 자신의 죄 이상으로 지독했던 전쟁 이후의 기억이 아닌 자신이 저지른 죄를 생각하며 살아갔을 테다. 그들을 병사가 아닌 인간으로 인정하고 인간으로 대할 수밖에 없게 한 파렴치한 짓은 정말 바보 같았다.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고 가해자가 피해자가 되는 도식을 넘어, 미성숙한 이들에게 저지른 잔혹한 행위의 부당위성을 넘어, 그들도 인간이라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는 점까지 넘어, 즉 선악의 개념을 넘어 그들에게 행한 행위의 무뇌아적 지점을 지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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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사일런스>


영화계의 거장 마틴 스콜세지가 일본이 낳은 거장 엔도 슈사쿠의 소설 <침묵>을 스크린으로 옮겼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메인타이틀 픽쳐스



17세기 중반 일본, 천주교 박해가 한창이다. 그 한가운데에서 떨고 있는 페레이라 신부(리암 니슨 분). 그의 표정을 보니 흔들리는 것 같다. 그렇게 그의 소식은 끊겨버렸다. 몇 년이 흘렀다. 페레이라 신부의 제자들인 로드리게스(앤드류 가필드 분)와 가르페(아담 드라이버 분)가 스승의 부정적 소문을 두 눈으로 확인하고자 일본으로 떠난다. 물론 복음 전파의 목적도 있었다. 


페레이라 신부의 부정적 소문은 다름 아닌 '배교'였다. 불교로 개종하고는 일본 여자와 결혼해 아이를 낳고 살아간다는 것이었다. 두 신부는 마카오에서 일본인 안내책 키치지로를 만나 함께 일본으로 향한다. 그들을 맞이한 건 철저히 종교적 신념을 숨기며 살아가는 독실한 천주교도들이었다. 모두 일본인으로, 두 신부를 철저히 숨기며 극진히 대접한다. 두 신부의 복음 전파 목적은 이룰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이를 두고볼 일본 정부가 아니었다. 그들에게 위기가 다가오고 있었다. 


세계적인 거장 마틴 스콜세지가 <더 울프 오브 월 스트리트> 이후 3년 만에 <사일런스>로 신작 나들이를 했다. 러닝타임은 20분이나 줄었지만, 묵직함은 족히 20배는 늘었다. 일본이 낳은 거장 엔도 슈사쿠의 1966년작 <침묵>을 원작으로, 스콜세지가 1988년부터 30여 년을 준비했다고 한다. 무슨 말이 필요할까. 그저 두 거장이 만든 침묵 속으로 조용히 들어가면 될 일이다. 


'믿음'과 '배신'의 아이콘, 그저 '인간'일 뿐


'믿음'의 로드리게스 신부. 하지만 그는 끝없이 의심한다. 침묵하는 신의 존재를. 그것도 응답의 일종일까. ⓒ메인타이틀 픽쳐스



영화에는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출현한다. 포르투갈 출신의 두 신부, 그들이 찾고자 하는 페레이라 신부를 제외하면 전부 일본인이다. 모두 독실한 천주교도. 그 중에서도 로드리게스 신부와 키치지로가 극 전체를 이끈다. 절대적 믿음의 아이콘 로드리게스, 배신의 아이콘 키치지로. 


이 둘의 모습은 예수와 베드로 또는 유다를 연상시킨다. 정작 우리가 그들을 통해 보게될 인상 깊은 모습은 '믿음'과 '배신'이 아니다. 로드리게스는 눈앞에 펼쳐지는 지옥에서 믿음 못지 않은 의심을 품는다. '이 고통의 순간에 신은 왜 침묵하십니까.' 키치지로는 오직 살기 위해 몇 번이고 신을 배신하지만 그때마다 로드리게스를 찾아와 고해성사를 한다. '신부님, 용서해 주십시오.' 


그럴 때마다 그들에겐 '인간'의 본능이 선한다. 나 때문에 누군가가 죽는 걸 볼 수 없다. 천주교 박해의 중심에 있는 일본인 총독은 로드리게스는 놔둔 채 일본인 신자들만 죽인다. 그들이 살 수 있는 방법은 로드리게스의 신의 부정. 즉, 일본인 신자들은 로드리게스 때문에 죽어가는 것이다. 도대체 어떻게 하란 말인가. 


신을 부정하지 못하고 죽어가는 수많은 일본인 신자들 옆에서 간단히 신을 부정하고 살아서 도망치는 키치지로. 그 나름대로 마음 속에선 끊임없는 신을 향한 의지가 불타지만 겉으로는 살기 위해 신을 부정할 뿐이다. 그 누구도 그를 무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죽고 싶은 인간이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은 세상이었다. 삶이 곧 지옥이 그들은 죽어서 천국에 가길 원할 뿐이다. 


믿음과 믿음, 신념과 신념의 가학적 충돌


참으로 무섭다. 종교의 우산 아래에서 믿음과 믿음, 신념과 신념이 충돌하는 모양이. 그 모양새란 게 정말 잔인하다. ⓒ메인타이틀 픽쳐스



로드리게스를 분한 앤드류 가필드의 열연이 돋보인다. 지난 2월 22일에 개봉한 <핵소 고지>에서도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종교에 입각한 기적의 신념을 보여준 데스몬드 의무병을 연기한 그다. 고통과 절망에 빠진 이들 앞에서 데스몬드는 자신 한 몸을 던지는 의지를 선보이고, 로드리게스는 신을 찾아 울부짖으며 기도를 드린다. 


영화는 박해 받는 천주교도의 여러 군상들을 그저 보여준다. 장황한 설명보다 직접적인 행동과 나름의 생각들을 앞세운다. 죽음 앞에서 초연한 이들, 그들은 현세의 지옥보다 사후의 천국을 원한다. 불교 행세를 하는 독실한 신자들, 대다수를 차지하는 그들은 정부의 단속을 피해 자신의 믿음을 이어가고자 한다. 


그리고 키치지로를 위시한 배교·배신과 복귀·믿음을 반복하는 자들. 적어도 완전한 배교·배신은 없는 것처럼 보인다. 이 점이 조금 거슬리는 부분인 바, 어떻게 한 명도 완전한 배교·배신을 시행하지 않는 것인지? 키치지로가 가롯 유다를 상징하는 거라면, 그는 회개가 아닌 지극히 인간적인 후회를 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베드로를 상징하는 거라면, 후회가 아닌 회개가 맞을 것이다. 이 부분을 애매하게 보여주었기에 조금의 아쉬움이 남는다. 


반면 당시 일본의 국교인 불교에 대해선 로드리게스의 통역관과 총독이 그야말로 장황하게 설명을 가한다. '우리는 우리만의 종교가 있다. 왜 여기에 너네 종교를 퍼트리려 하느냐.' '일본 땅에 천주교를 선교하려는 이기심 때문에 일본인들이 죽어가는데, 그걸 바라느냐.' 등이다. 이 또한 절대적으로 맞는 말인 것 같다. 


믿음과 믿음의 충돌. 단순히 생각하면 선교를 포기하면 될 일이다. 하지만 그건 종교적 신념에 어긋나는 일.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면 될 일이다. 하지만 그건 국가적 신념에 어긋나는 일. 불가능하다. 어떤 신념이 옳고 어떤 신념이 그르다고 말할 수 없는 상황. 그저 그렇게 사람이 죽어갈 뿐이다. 


의아한 모습들, 그럼에도 침묵에 응답하려는 신앙의 위대함


논란의 요지가 여기저기 산재해 있지만, 신앙인만이 보일 수 있는 모습엔 논란의 여지가 없다. 위대하다. ⓒ메인타이틀 픽쳐스



천주교 미화 영화로 비춰질 요지가 다분하다. 신의 침묵에 의심을 품고, 신의 침묵을 질타하고, 신을 부정하고 살아남는 것도 괜찮다고 말하고 있는 것 같지만, 결국 신은 다 괜찮다고 말한다. 그 모든 게 다 신이 그린 큰 그림 안에 있다. 이 지옥보다 더 한 고통과 절망, 죽음조차도 말이다. 


몇몇 장면들에서는 의아한 모습들이 포착된다. 적어도 기독교 입장에서는 말이다. 예수가 그려진 판은 밟지만 마리아가 그려진 판에는 침을 뱉지 못하고 죽음을 당하는 모습. 일본인 신자들이 신부를 보자 환호하며 그를 마치 신처럼 떠받드는 것 같은 모습. 그리고 오로지 신부를 통해서만 자신의 죄를 뉘우치는 고해성사를 할 수 있는 모습. 


그럼에도 영화가 주는 메시지는 숭고하다. 모든 의구심과 논란을 뒤로 하고, 로드리게스 신부에 집중해보자. 신앙인이 아닌 이도 '신앙'이 같는 위대함을 조금은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정확히는 신앙을 갖는 '신앙인'의 위대함이라고 해야 할까. 믿음의 근본인 신이 '침묵'함에도 불구하고, 그 침묵에조차 충실히 '응답'하려는 의지 말이다. 침묵에 대한 응답에의 의지는, 그 자체로 '믿음'에 다름 아닌 것이다. 비록 거기에 끝모를 '의심'이 함께 한다고 해도. 


실망하지 않은 대단한 영화, 또 보긴 싫다


참으로 어려운 영화였다. 어느 한 쪽으로만 생각을 치우칠 수 없게 만드는 바, 만든 이들의 숙고와 노력이 각인되어 오래토록 지워지지 않을 것 같다. 대단한 '의미'를 동반한 반면, 대단한 '재미'는 동반하지 못했다. 완벽한 배경과 연기와 연출에도 불구하고, 기억에 남는 영화가 되진 않을 것 같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영화는, 언제든 다시 보고 영화에 대해 꺼리낌 없이 말하고 계속해 재해석할 수 있는 영화이다. 


실망을 했다는 차원과는 전혀 다르다. 오히려 마틴 스콜세지 감독과 앤드류 가필드에 대한 호감도는 상승했고, 그들의 차기작도 기대된다. 이런 류의 영화를 이 정도로 찍고 연기할 수 있다면 상대적으로 일반적인 영화에서는 어떤 모습을 선보일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렇지만 일견(一見)을 권하진 못하겠다. 완벽한 연출과 연기와 배경보다 신앙과 종교가 더 많이 다가올 수밖에 없는데, 다름 아닌 그 부분이 거슬릴 요지가 다분하다. 영화를 포함한 모든 콘텐츠엔 '장르'가 존재하지만, 거기에 종교와 신앙이 앞세워지면 모든 것들을 흡수해버린다. 예를 들어 '전쟁 영화'는 엄연히 장르를 구분하는 용어가 아니다. 소재를 나타내는 용어이지만, '전쟁'이 모든 걸 흡수해버린다. 정확히는 액션, 드라마 정도일 것이다. 종교와 신앙도 마찬가지라고 보면 된다. 이 영화도 거기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애초에 그걸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상관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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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간 책 다시 읽기] 우라사와 나오키의 <몬스터>


만화 <몬스터> 표지 ⓒ서울문화사



뇌리에 박혀 한 장면, 어쩌면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될지 모르는 한 장면, 누구에게나 그런 한 장면이 있을 테다. 나에게도 여러 장면이 있는데, 그 중 한 장면이 만화책에 관한 것이다. 여전히 만화책은(만화가 아닌 만화책이다) 내 인생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바, 그 장면이 종종 생각난다. 


막 중학생이 되었을 때 쯤이었나, 그때는 아직 동네에 도서대여점이 성행 중이었다. 반경 500미터 안에만 족히 5개는 있었을 것이다. 여하튼 당시 내가 주로 보는 장르는 학원물, 스포츠물, 판타지물 등이었다. 그야말로 그 나이에 걸맞는 장르가 아닌가. 그런데 한두 살 정도나 많은 형이, 당시 내가 전혀 생각지도 못하고 전혀 보고 싶지도 않은 장르의 만화책을 빌려가는 게 아닌가. 우라사와 나오키의 <몬스터>였다. 


한두 번이었으면 그러려니 했을 텐데, 우연히 계속 보게 되었다. 한두 권이 아니라 18권이나 되었으니까. 뭔가 어려워 보이고, 뭔가 수준 높아 보이는 그런 만화책. 왠지 내가 좀 수준 낮아 보여 그 형이 <몬스터>를 빌려갈 때면 난 기다렸다가 한참 뒤에 빌려가곤 했다. 내가 <몬스터>를 보게 된 건 스무 살이 넘어 어른이 되었을 때다. 


우라사와 나오키 만화 중 가장 애착이 가는 작품 <몬스터>


시간이 흘러 이제는 내가 접한 모든 콘텐츠 중에서 가장 상위권에 위치해 있는 '우라사와 나오키의 만화', 내가 읽는 그의 작품은 <파인애플 아미> <마스터 키튼> <몬스터> <20세기 소년> <플루토> <빌리 배트>, 즉 국내에 나온 그의 작품 대부분을 접한 것이다. 그중 가장 좋아하는 작품은 <마스터 키튼>, 가장 애착이 가는 작품은 <몬스터>.


내용은 굉장히 미드스럽다. 안 그래도 미드로 제작 중에 있다고 하는데, 언제 나올지는 미지수다. 일본 국적의 독일의료계 신성 텐마는 천재뇌외과의사로 명성이 자자하다. 병원장 딸과 연애도 하고 있는 바, 차기 병원장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다. 그는 병원 정치에 발을 내딛고 있기에 온갖 술수에 희생양이자 앞장이가 될 수밖에 없다. 자신의 논문을 병원장 이름으로 내고, 터키인보다 오페라 가수를 살리는 게 우선이다.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고 있던 찰나 사건이 터진다. 망명 온 동독의 고문 가족이 피살당한다. 부모는 죽고 쌍둥이 아이들은 살았지만 남자 아이가 머리에 총상을 입어 중태에 빠진 것. 텐마는 이 아이의 담당으로 배정되지만, 뒤이어 실려온 시장의 담당으로 다시 배정된다. 고민하는 텐마, 결국 그는 병원장의 명령을 어기고 아이를 살려낸다. 반면 중요한 인물이었던 시자은 죽고 만다. 텐마는 곧바로 치프 자리를 빼앗긴다. 


살려놓은 아이 '요한' 앞에서 병원장과 끄나풀들의 죽음을 간절히 바란 텐마, 며칠 뒤 거짓말처럼 병원 고위층이 한 자리에서 독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그러고는 감쪽같이 사라진 요한과 여동생 안나. 새로 부임한 병원장은 텐마를 외과과장에 앉히고, 그렇게 10년이 흘러간다. 어느 날, 우연한 사건으로 텐마는 자신이 살려낸 요한이 돌이킬 수 없는 짓을 일삼는 괴물임을 알고 그를 죽이기 위해 모든 걸 내려놓고는 길을 나선다. 아울러 그는 연쇄살인사건의 중요참고인 혹은 용의자로 수배된다. 


이 만화의 무궁무진한 포인트와 등장인물들


이 만화의 포인트는 무궁무진하다. 억울한 누명을 쓴 채 쫓기는 천재외과의사, 그는 나락으로 떨어진 인생은 둘째치고 자신이 살려낸 괴물을 죽이고자 외로운 길을 떠난다. 그가 쫓는 괴물 요한의 정체는? 그의 쌍둥이 여동생 니나와의 접점은? 이 괴물은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존재하는 또 하나의 인격인가, 누군가에 의해서 만들어진 괴물, 즉 피해자인가. 그가 궁극적으로 하고자 하는 건 무엇인가. 


까도 까도 끝없이 까지는 양파처럼 이 만화에는 수많은 포인트뿐만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이 등장한다. 하나하나가 인간 군상의 개개인을 상징하고 있는 바 그냥 지나칠 수 있는 캐릭터가 없다. 결국 모든 게 괴물 요한이라는 포인트로 수렴되지만 모두 자신들만의 이야기를 지니고 있어 공감이 간다. 


요한은 수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괴물, 그뿐이랴? 그는 궁극의 혼란, 궁극의 파괴, 궁극의 고독을 원한다. 그런데 그에게 가까이 갈수록 슬픔을 느낀다. 그것이 과연 그가 원하는 것일까. 그가 원하도록 만들어진 게 아닐까. 그 부분이 이 이야기가 가지는 매력이자 힘이다. 


'의사' 텐마가 요한을 죽이려는 건 결국 그를 '치료'하고자 하는 게 아닐까 싶다. 또한, 그를 찾아내어 처치하려는 것 자체가 엄청난 모험인데, 도중에 만나는 사람들도 치료한다. '네가 태어난 의미는 반드시 있어. 네가 살아갈 의미도 있어. 포기하지마. 희망을 가져.' 많은 이들이 요한으로 인해 남에게 피해를 끼치고 삶을 포기하려 하는데, 텐마는 그들에게 삶의 의미를 부여하고 희망을 불어넣는다. 


우리가 고전 서사를 즐기는 이유, <몬스터>를 즐기는 이유


우리는 여전히 고전 서사를 즐긴다. 거기엔 인간의 전형이 있기 때문이다. 고전 서사를 변형한 콘텐츠도 부지기수인데, <몬스터> 또한 고전 서사의 변형으로도 볼 수 있다. 모든 걸 원상태로 되돌려 놓기 위한 한 인간의 사투, 자신이 되살려 놓은 악을 섬멸하기 위해 세상의 모든 짐을 홀로 짊어진 채 떠나는 한 인간의 모험, 악의 근원은 계속해서 거슬러 올라가고 선의 근원은 지금 이 자리에서 시작되어 내려가는 순환. 


이처럼 <몬스터>는 서사가 가지는 힘을 잘 알고 그를 극대화시켜 내보낼 줄 아는 작가의 능력이 극대화된 콘텐츠라 하겠다. 거기에 오그라들 만하지만 빠져들 수밖에 없는 장치들을 곳곳에 배치해놓았다. 노소를 불문하고 말이다. 캐릭터들의 생각이나 행동은 소년에게, 당대 정세나 상황 설정은 장년에게 먹힐 만하다. 


이 세상에 나홀로 남게 되었을 때 가장 견디기 힘든 건 무얼까. 아무도 나의 이름을 불러주지 않는 거라고 만화는 말한다. 그건 비단 진정 이 세상에 아무도 없지 않아도 가능하다. 이 세상에 수많은 사람이 있지만 나를 아는 사람은 한정되어 있는 바, 나를 아는 사람이 모두 죽으면 나는 자연스레 존재하지 않는 게 되지 않을까. 요한이 본 '종말'이 바로 그런 모습, 그가 모든 이에게 선사하고 싶은 바도 그런 모습. 


'세상이 만들어낸 슬픈 몬스터', 요한에게도 통용되는 말일까. 그가 가진 몬스터의 요소 중 하나일뿐, 온전히 설명하는 요소는 아닌 것 같다. 우린 이 만화에서 '몬스터'보다 '인간'에게 눈길이 갈 것이다. 몬스터의 슬픔보다 인간의 희망에 기대를 걸게 될 것이다. '포기하지마'라는 전언이 깊이 새겨질 것이다. 그 전언이 몬스터도 용서하고 포용할 수 있는 큰 배를 만드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우린 그런 배를 만들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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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genv

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