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랜드 오브 마인>


제2차 세계대전에 수많은 입장들이 존재한다. 전쟁 전, 중, 후에도 마찬가지. <랜드 오브 마인>은 전쟁 후의 어떤 입장이다. ⓒ싸이더스




영화 <랜드 오브 마인>은 제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한 만큼, 전쟁영화의 외형을 띠고 있다. 정확히는 전쟁을 반대하는 반전영화겠다. 거기엔 가해자와 피해자가 뒤바뀌는 세상살이의 도식이 존재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오직 피해자만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피해자만 양산하는 전쟁 따위를 왜 해야 하는가.


수많은 제2차 세계대전 관련 영화가 미국, 영국, 소련의 손에 만들어졌다. 승전국이자, 피해자라 할 수 있는 입장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물론 패전국이자 가해자인 독일, 일본 입장에서도 만들어졌다. 가해를 정당화하거나 반대로 가해 사실을 공표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진 않는다. 일본은 종종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여 비난 받아왔다. 많은 경우, 진정한 가해자의 손에 피해를 입은 자국민들이나 성숙하기 전에 전쟁에 투입되었던 소년병들을 다루곤 한다.


그렇게, 제2차 세계대전은 수많은 입장들을 대변하는 수많은 콘텐츠를 양산해 왔고 앞으로도 계속 양산할 것이다. <랜드 오브 마인>은 그동안 종종 보아왔던 독일군 소년병 포로들의 이야기를 조심스럽게 다룬다. 그것도 종전 후의 이야기이다. 종전 70년이 지나가는 시기에서, 전쟁 '중'의 이야기가 아니라 전쟁 '후'의 이야기가 나오고 있는 것 같다.


전쟁의 잔해를 제거하는 임무를 맡은 소년들


패전국 나치독일, 그들이 전쟁 중에 남긴 치명적인 잔해들을 소년병들이 목숨 걸고 치운다. ⓒ싸이더스



1939년 9월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발발한 제2차 세계대전, 이듬해 4월에는 덴마크와 노르웨이를 침공한다. 덴마크는 즉시 항복, 독일은 덴마크 서해안 전역에 방어선을 구축한다. 연합군의 상륙을 저지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연합군의 상륙은 프랑스였고, 덴마크 서해안 방어선은 종전 후에도 그대로 남는다.


나치독일이 저지른 전쟁의 잔해, 덴마크는 나치독일 포로들에게 지뢰 제거 임무를 맡긴다. 그 중 상당수가 소년병이었다고 하는데, 영화는 다름 아닌 소년병들의 지뢰 제거 임무를 주로 삼는다. 그 어떤 도구도 사용할 수 없는, 맨손과 막대기 하나에 의존한 지뢰 제거. 그야말로 목숨과 바꾼 임무다.


엄청나게 위험한 작업인 만큼 사전 연습부터 철저해야 한다. 사전 연습도 실전처럼, 연습에서도 죽고, 실전에서도 죽어 나간다. 이 임무를 맡은 덴마크군의 칼 상사는 처음에는 눈도 깜짝하지 않지만, 시간이 갈수록 계속해서 죽어 나갈수록 느낀다. 이 아이들은 전쟁에 투입되어 명백한 죄를 저질렀지만, 지뢰 제거 임무를 맡아야 할 건 최소한 이 아이들은 아니라고.


그렇지만, 그런 생각은 누구한테건 씨알도 안 먹힐 것이다. 그들이 전쟁 중에 저지른 '짓'을 보면 그런 생각을 할 수 있겠는가? 아무리 그들이 성숙하지 못한 상태에서 오로지 명령에 따라 한 행동이었다고 해도 말이다. 그들이 저지른 짓을 합당화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그들의 총탄에 쓰러진 수많은 이들을 생각해서라도.


그런 식의 '방법'과 그런 '방향'은 잘못 되었다


복수를 하는 건 좋다. 승전국이니만큼 어느 정도의 것들은 예상된다. 하지만 명백히 방법과 방향이 틀린 게 존재한다. 이 영화는 그걸 보여준다. ⓒ싸이더스



여기서, 단순히 가해자와 피해자는 없고 그저 고통만 있었다는 식으로 풀어갈 순 없다. 이 나치독일 소년병 포로들이 가해자였다는 걸 부정할 수 없다. 종전 후의 모습만, 그것도 포로가 된 모습만 보여주기 때문에 선량해보일 수 있을지 모르지만, 전쟁 중에 그들이 잔악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고 말 못할 것이다. 미성숙을 앞세워, 잔악한 명령을 그 누구보다 앞서 실행했을지 모를 일이다.


문제는 그들이 아닌 그들에게 말도 안 되는 일을 시킨 이들의 모습이다. 감독이 의도한 것일 수 있겠는데, 종전 후 나치독일 포로들에게 덴마크군이 보이는 행동은 나치독일이 보여준 잔악함 못지 않았다. 그들의 행동은 '방향'과 '방법'이 잘못된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최소한 소년병 포로들에게 그런 일을 시키면 안 되는 것이었고, 아무런 제대로된 도구 없이 굶어 죽을 듯이 일을 시키면 안 되는 것이었다.


범죄에는, 주범이라는 게 존재한다. 주도하고 기획하고 결정하고 명령을 내리고 책임지고 가장 많은 것들을 얻을 수 있는 존재 말이다. 제2차 세계대전의 경우, 종전 후 주범 중 상당수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전쟁 중에 혹은 내분으로 인해 죽었다. 물론 많은 주범들이 사형 당했다. 그렇지만 그 바로 밑의 이들에겐 아마 정치적일 거라 예상되는 이유로 무죄 판결이 내려지기도 했다.


누구는 주범이 아니라는 이유로 무죄 판결을 내려 잘 살아가고, 누구는 종전 후에도 전쟁 중보다 더 죽음에 직면한 작업을 계속해 나가야 하는 게 말이 되느냐고 말하려는 게 아니다. 각각 저지른 짓에 따른 각각의 속죄가 필요할 테니까. 그리고 결정적으로 세상은 불공평하니까. 문제는 그렇게 내려온 죄의 무게를, 왜 가장 '인간'에 가까울 이들이 짊어져야 하느냐는 것이다. '악마' 같은 이들이 해결해야 할 사항이 아닌가. 설사 그들이 짊어져야 한다고 쳐도, 그런 식으로라면 얘기가 되지 않는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으로 맞대응하면 똑같이 된다는 건 너무도 당연한 얘기가 아닌가. 더욱이 덴마크는 저항 한 번 하지 않고 곧바로 항복했다.


그들을 인간으로 대해야만, 그들은 뉘우칠 수 있다


마냥 인간적인 차원에서 그들을 인간으로 대해줘야 하는 건 아니다. 그들을 인간으로 대해주어야만, 그들은 스스로를 인간이 아닌 병사라고 생각한다. 그래야만 뉘우칠 수 있다. ⓒ싸이더스



감정적으로 이해는 한다. 누구라도 그 상황이었다면 그렇게 대응했을 것이다. 내 국토와 내 가족를 무참히 짓밟은 이들. 대상의 구체적 물상을 들여다볼 필요도 없이 대상이 속해 있는 집단의 악마성에 분노를 터뜨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게 인간이니까. 그렇지만 그 시간이 지나고 들여다볼 수 있는 상황이 되었을 때, 보여야 한다. 용서할 순 없더라도 인정은 해야 한다는 걸. 그들도 우리와 같은 인간이라는 걸 말이다.


영화는 인간을 보여주려 애쓴다. 아니, 애쓸 필요도 없다. 인간이라 할 수 없는 나치독일이 남긴 잔해를 인간들이 처리하고 있는 것과 다름 없다. 아름다운 해안을 뒤로 하고 무참하게 죽어가는 건 광포에 휩싸인 병사들이 아닌 두려움과 배고픔에 벌벌 떨고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인간들 뿐이다. 그들을 그렇게 대하는 순간, 과거는 사라지고 없는 것이다.


만약 그들을 포로답게 대했다면 오히려 그들을 인간이 아닌 병사로 생각했을 듯하다. 이런 비인간적인 처사를 통해 그들의 인간성을 발현시키지 않았다면, 그들은 자신의 잘못을 계속해서 떠올렸을 것이다. 잘못을 뉘우치던가 계속해서 광기에 휩싸였던가 하는 건 그 이후의 일이겠다. 그것이 오히려 '이쪽'을 위한 길이 아니었을까, 싶다.


매우 힘든 일이었겠지만 이성적으로 대처했다면 방향과 방법을 달리했을 것이고, 그들은 자신의 죄 이상으로 지독했던 전쟁 이후의 기억이 아닌 자신이 저지른 죄를 생각하며 살아갔을 테다. 그들을 병사가 아닌 인간으로 인정하고 인간으로 대할 수밖에 없게 한 파렴치한 짓은 정말 바보 같았다.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고 가해자가 피해자가 되는 도식을 넘어, 미성숙한 이들에게 저지른 잔혹한 행위의 부당위성을 넘어, 그들도 인간이라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는 점까지 넘어, 즉 선악의 개념을 넘어 그들에게 행한 행위의 무뇌아적 지점을 지적한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블로그 이미지

singenv

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리뷰]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사일런스>


영화계의 거장 마틴 스콜세지가 일본이 낳은 거장 엔도 슈사쿠의 소설 <침묵>을 스크린으로 옮겼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메인타이틀 픽쳐스



17세기 중반 일본, 천주교 박해가 한창이다. 그 한가운데에서 떨고 있는 페레이라 신부(리암 니슨 분). 그의 표정을 보니 흔들리는 것 같다. 그렇게 그의 소식은 끊겨버렸다. 몇 년이 흘렀다. 페레이라 신부의 제자들인 로드리게스(앤드류 가필드 분)와 가르페(아담 드라이버 분)가 스승의 부정적 소문을 두 눈으로 확인하고자 일본으로 떠난다. 물론 복음 전파의 목적도 있었다. 


페레이라 신부의 부정적 소문은 다름 아닌 '배교'였다. 불교로 개종하고는 일본 여자와 결혼해 아이를 낳고 살아간다는 것이었다. 두 신부는 마카오에서 일본인 안내책 키치지로를 만나 함께 일본으로 향한다. 그들을 맞이한 건 철저히 종교적 신념을 숨기며 살아가는 독실한 천주교도들이었다. 모두 일본인으로, 두 신부를 철저히 숨기며 극진히 대접한다. 두 신부의 복음 전파 목적은 이룰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이를 두고볼 일본 정부가 아니었다. 그들에게 위기가 다가오고 있었다. 


세계적인 거장 마틴 스콜세지가 <더 울프 오브 월 스트리트> 이후 3년 만에 <사일런스>로 신작 나들이를 했다. 러닝타임은 20분이나 줄었지만, 묵직함은 족히 20배는 늘었다. 일본이 낳은 거장 엔도 슈사쿠의 1966년작 <침묵>을 원작으로, 스콜세지가 1988년부터 30여 년을 준비했다고 한다. 무슨 말이 필요할까. 그저 두 거장이 만든 침묵 속으로 조용히 들어가면 될 일이다. 


'믿음'과 '배신'의 아이콘, 그저 '인간'일 뿐


'믿음'의 로드리게스 신부. 하지만 그는 끝없이 의심한다. 침묵하는 신의 존재를. 그것도 응답의 일종일까. ⓒ메인타이틀 픽쳐스



영화에는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출현한다. 포르투갈 출신의 두 신부, 그들이 찾고자 하는 페레이라 신부를 제외하면 전부 일본인이다. 모두 독실한 천주교도. 그 중에서도 로드리게스 신부와 키치지로가 극 전체를 이끈다. 절대적 믿음의 아이콘 로드리게스, 배신의 아이콘 키치지로. 


이 둘의 모습은 예수와 베드로 또는 유다를 연상시킨다. 정작 우리가 그들을 통해 보게될 인상 깊은 모습은 '믿음'과 '배신'이 아니다. 로드리게스는 눈앞에 펼쳐지는 지옥에서 믿음 못지 않은 의심을 품는다. '이 고통의 순간에 신은 왜 침묵하십니까.' 키치지로는 오직 살기 위해 몇 번이고 신을 배신하지만 그때마다 로드리게스를 찾아와 고해성사를 한다. '신부님, 용서해 주십시오.' 


그럴 때마다 그들에겐 '인간'의 본능이 선한다. 나 때문에 누군가가 죽는 걸 볼 수 없다. 천주교 박해의 중심에 있는 일본인 총독은 로드리게스는 놔둔 채 일본인 신자들만 죽인다. 그들이 살 수 있는 방법은 로드리게스의 신의 부정. 즉, 일본인 신자들은 로드리게스 때문에 죽어가는 것이다. 도대체 어떻게 하란 말인가. 


신을 부정하지 못하고 죽어가는 수많은 일본인 신자들 옆에서 간단히 신을 부정하고 살아서 도망치는 키치지로. 그 나름대로 마음 속에선 끊임없는 신을 향한 의지가 불타지만 겉으로는 살기 위해 신을 부정할 뿐이다. 그 누구도 그를 무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죽고 싶은 인간이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은 세상이었다. 삶이 곧 지옥이 그들은 죽어서 천국에 가길 원할 뿐이다. 


믿음과 믿음, 신념과 신념의 가학적 충돌


참으로 무섭다. 종교의 우산 아래에서 믿음과 믿음, 신념과 신념이 충돌하는 모양이. 그 모양새란 게 정말 잔인하다. ⓒ메인타이틀 픽쳐스



로드리게스를 분한 앤드류 가필드의 열연이 돋보인다. 지난 2월 22일에 개봉한 <핵소 고지>에서도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종교에 입각한 기적의 신념을 보여준 데스몬드 의무병을 연기한 그다. 고통과 절망에 빠진 이들 앞에서 데스몬드는 자신 한 몸을 던지는 의지를 선보이고, 로드리게스는 신을 찾아 울부짖으며 기도를 드린다. 


영화는 박해 받는 천주교도의 여러 군상들을 그저 보여준다. 장황한 설명보다 직접적인 행동과 나름의 생각들을 앞세운다. 죽음 앞에서 초연한 이들, 그들은 현세의 지옥보다 사후의 천국을 원한다. 불교 행세를 하는 독실한 신자들, 대다수를 차지하는 그들은 정부의 단속을 피해 자신의 믿음을 이어가고자 한다. 


그리고 키치지로를 위시한 배교·배신과 복귀·믿음을 반복하는 자들. 적어도 완전한 배교·배신은 없는 것처럼 보인다. 이 점이 조금 거슬리는 부분인 바, 어떻게 한 명도 완전한 배교·배신을 시행하지 않는 것인지? 키치지로가 가롯 유다를 상징하는 거라면, 그는 회개가 아닌 지극히 인간적인 후회를 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베드로를 상징하는 거라면, 후회가 아닌 회개가 맞을 것이다. 이 부분을 애매하게 보여주었기에 조금의 아쉬움이 남는다. 


반면 당시 일본의 국교인 불교에 대해선 로드리게스의 통역관과 총독이 그야말로 장황하게 설명을 가한다. '우리는 우리만의 종교가 있다. 왜 여기에 너네 종교를 퍼트리려 하느냐.' '일본 땅에 천주교를 선교하려는 이기심 때문에 일본인들이 죽어가는데, 그걸 바라느냐.' 등이다. 이 또한 절대적으로 맞는 말인 것 같다. 


믿음과 믿음의 충돌. 단순히 생각하면 선교를 포기하면 될 일이다. 하지만 그건 종교적 신념에 어긋나는 일.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면 될 일이다. 하지만 그건 국가적 신념에 어긋나는 일. 불가능하다. 어떤 신념이 옳고 어떤 신념이 그르다고 말할 수 없는 상황. 그저 그렇게 사람이 죽어갈 뿐이다. 


의아한 모습들, 그럼에도 침묵에 응답하려는 신앙의 위대함


논란의 요지가 여기저기 산재해 있지만, 신앙인만이 보일 수 있는 모습엔 논란의 여지가 없다. 위대하다. ⓒ메인타이틀 픽쳐스



천주교 미화 영화로 비춰질 요지가 다분하다. 신의 침묵에 의심을 품고, 신의 침묵을 질타하고, 신을 부정하고 살아남는 것도 괜찮다고 말하고 있는 것 같지만, 결국 신은 다 괜찮다고 말한다. 그 모든 게 다 신이 그린 큰 그림 안에 있다. 이 지옥보다 더 한 고통과 절망, 죽음조차도 말이다. 


몇몇 장면들에서는 의아한 모습들이 포착된다. 적어도 기독교 입장에서는 말이다. 예수가 그려진 판은 밟지만 마리아가 그려진 판에는 침을 뱉지 못하고 죽음을 당하는 모습. 일본인 신자들이 신부를 보자 환호하며 그를 마치 신처럼 떠받드는 것 같은 모습. 그리고 오로지 신부를 통해서만 자신의 죄를 뉘우치는 고해성사를 할 수 있는 모습. 


그럼에도 영화가 주는 메시지는 숭고하다. 모든 의구심과 논란을 뒤로 하고, 로드리게스 신부에 집중해보자. 신앙인이 아닌 이도 '신앙'이 같는 위대함을 조금은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정확히는 신앙을 갖는 '신앙인'의 위대함이라고 해야 할까. 믿음의 근본인 신이 '침묵'함에도 불구하고, 그 침묵에조차 충실히 '응답'하려는 의지 말이다. 침묵에 대한 응답에의 의지는, 그 자체로 '믿음'에 다름 아닌 것이다. 비록 거기에 끝모를 '의심'이 함께 한다고 해도. 


실망하지 않은 대단한 영화, 또 보긴 싫다


참으로 어려운 영화였다. 어느 한 쪽으로만 생각을 치우칠 수 없게 만드는 바, 만든 이들의 숙고와 노력이 각인되어 오래토록 지워지지 않을 것 같다. 대단한 '의미'를 동반한 반면, 대단한 '재미'는 동반하지 못했다. 완벽한 배경과 연기와 연출에도 불구하고, 기억에 남는 영화가 되진 않을 것 같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영화는, 언제든 다시 보고 영화에 대해 꺼리낌 없이 말하고 계속해 재해석할 수 있는 영화이다. 


실망을 했다는 차원과는 전혀 다르다. 오히려 마틴 스콜세지 감독과 앤드류 가필드에 대한 호감도는 상승했고, 그들의 차기작도 기대된다. 이런 류의 영화를 이 정도로 찍고 연기할 수 있다면 상대적으로 일반적인 영화에서는 어떤 모습을 선보일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렇지만 일견(一見)을 권하진 못하겠다. 완벽한 연출과 연기와 배경보다 신앙과 종교가 더 많이 다가올 수밖에 없는데, 다름 아닌 그 부분이 거슬릴 요지가 다분하다. 영화를 포함한 모든 콘텐츠엔 '장르'가 존재하지만, 거기에 종교와 신앙이 앞세워지면 모든 것들을 흡수해버린다. 예를 들어 '전쟁 영화'는 엄연히 장르를 구분하는 용어가 아니다. 소재를 나타내는 용어이지만, '전쟁'이 모든 걸 흡수해버린다. 정확히는 액션, 드라마 정도일 것이다. 종교와 신앙도 마찬가지라고 보면 된다. 이 영화도 거기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애초에 그걸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상관없이.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블로그 이미지

singenv

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지나간 책 다시 읽기] 우라사와 나오키의 <몬스터>


만화 <몬스터> 표지 ⓒ서울문화사



뇌리에 박혀 한 장면, 어쩌면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될지 모르는 한 장면, 누구에게나 그런 한 장면이 있을 테다. 나에게도 여러 장면이 있는데, 그 중 한 장면이 만화책에 관한 것이다. 여전히 만화책은(만화가 아닌 만화책이다) 내 인생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바, 그 장면이 종종 생각난다. 


막 중학생이 되었을 때 쯤이었나, 그때는 아직 동네에 도서대여점이 성행 중이었다. 반경 500미터 안에만 족히 5개는 있었을 것이다. 여하튼 당시 내가 주로 보는 장르는 학원물, 스포츠물, 판타지물 등이었다. 그야말로 그 나이에 걸맞는 장르가 아닌가. 그런데 한두 살 정도나 많은 형이, 당시 내가 전혀 생각지도 못하고 전혀 보고 싶지도 않은 장르의 만화책을 빌려가는 게 아닌가. 우라사와 나오키의 <몬스터>였다. 


한두 번이었으면 그러려니 했을 텐데, 우연히 계속 보게 되었다. 한두 권이 아니라 18권이나 되었으니까. 뭔가 어려워 보이고, 뭔가 수준 높아 보이는 그런 만화책. 왠지 내가 좀 수준 낮아 보여 그 형이 <몬스터>를 빌려갈 때면 난 기다렸다가 한참 뒤에 빌려가곤 했다. 내가 <몬스터>를 보게 된 건 스무 살이 넘어 어른이 되었을 때다. 


우라사와 나오키 만화 중 가장 애착이 가는 작품 <몬스터>


시간이 흘러 이제는 내가 접한 모든 콘텐츠 중에서 가장 상위권에 위치해 있는 '우라사와 나오키의 만화', 내가 읽는 그의 작품은 <파인애플 아미> <마스터 키튼> <몬스터> <20세기 소년> <플루토> <빌리 배트>, 즉 국내에 나온 그의 작품 대부분을 접한 것이다. 그중 가장 좋아하는 작품은 <마스터 키튼>, 가장 애착이 가는 작품은 <몬스터>.


내용은 굉장히 미드스럽다. 안 그래도 미드로 제작 중에 있다고 하는데, 언제 나올지는 미지수다. 일본 국적의 독일의료계 신성 텐마는 천재뇌외과의사로 명성이 자자하다. 병원장 딸과 연애도 하고 있는 바, 차기 병원장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다. 그는 병원 정치에 발을 내딛고 있기에 온갖 술수에 희생양이자 앞장이가 될 수밖에 없다. 자신의 논문을 병원장 이름으로 내고, 터키인보다 오페라 가수를 살리는 게 우선이다.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고 있던 찰나 사건이 터진다. 망명 온 동독의 고문 가족이 피살당한다. 부모는 죽고 쌍둥이 아이들은 살았지만 남자 아이가 머리에 총상을 입어 중태에 빠진 것. 텐마는 이 아이의 담당으로 배정되지만, 뒤이어 실려온 시장의 담당으로 다시 배정된다. 고민하는 텐마, 결국 그는 병원장의 명령을 어기고 아이를 살려낸다. 반면 중요한 인물이었던 시자은 죽고 만다. 텐마는 곧바로 치프 자리를 빼앗긴다. 


살려놓은 아이 '요한' 앞에서 병원장과 끄나풀들의 죽음을 간절히 바란 텐마, 며칠 뒤 거짓말처럼 병원 고위층이 한 자리에서 독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그러고는 감쪽같이 사라진 요한과 여동생 안나. 새로 부임한 병원장은 텐마를 외과과장에 앉히고, 그렇게 10년이 흘러간다. 어느 날, 우연한 사건으로 텐마는 자신이 살려낸 요한이 돌이킬 수 없는 짓을 일삼는 괴물임을 알고 그를 죽이기 위해 모든 걸 내려놓고는 길을 나선다. 아울러 그는 연쇄살인사건의 중요참고인 혹은 용의자로 수배된다. 


이 만화의 무궁무진한 포인트와 등장인물들


이 만화의 포인트는 무궁무진하다. 억울한 누명을 쓴 채 쫓기는 천재외과의사, 그는 나락으로 떨어진 인생은 둘째치고 자신이 살려낸 괴물을 죽이고자 외로운 길을 떠난다. 그가 쫓는 괴물 요한의 정체는? 그의 쌍둥이 여동생 니나와의 접점은? 이 괴물은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존재하는 또 하나의 인격인가, 누군가에 의해서 만들어진 괴물, 즉 피해자인가. 그가 궁극적으로 하고자 하는 건 무엇인가. 


까도 까도 끝없이 까지는 양파처럼 이 만화에는 수많은 포인트뿐만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이 등장한다. 하나하나가 인간 군상의 개개인을 상징하고 있는 바 그냥 지나칠 수 있는 캐릭터가 없다. 결국 모든 게 괴물 요한이라는 포인트로 수렴되지만 모두 자신들만의 이야기를 지니고 있어 공감이 간다. 


요한은 수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괴물, 그뿐이랴? 그는 궁극의 혼란, 궁극의 파괴, 궁극의 고독을 원한다. 그런데 그에게 가까이 갈수록 슬픔을 느낀다. 그것이 과연 그가 원하는 것일까. 그가 원하도록 만들어진 게 아닐까. 그 부분이 이 이야기가 가지는 매력이자 힘이다. 


'의사' 텐마가 요한을 죽이려는 건 결국 그를 '치료'하고자 하는 게 아닐까 싶다. 또한, 그를 찾아내어 처치하려는 것 자체가 엄청난 모험인데, 도중에 만나는 사람들도 치료한다. '네가 태어난 의미는 반드시 있어. 네가 살아갈 의미도 있어. 포기하지마. 희망을 가져.' 많은 이들이 요한으로 인해 남에게 피해를 끼치고 삶을 포기하려 하는데, 텐마는 그들에게 삶의 의미를 부여하고 희망을 불어넣는다. 


우리가 고전 서사를 즐기는 이유, <몬스터>를 즐기는 이유


우리는 여전히 고전 서사를 즐긴다. 거기엔 인간의 전형이 있기 때문이다. 고전 서사를 변형한 콘텐츠도 부지기수인데, <몬스터> 또한 고전 서사의 변형으로도 볼 수 있다. 모든 걸 원상태로 되돌려 놓기 위한 한 인간의 사투, 자신이 되살려 놓은 악을 섬멸하기 위해 세상의 모든 짐을 홀로 짊어진 채 떠나는 한 인간의 모험, 악의 근원은 계속해서 거슬러 올라가고 선의 근원은 지금 이 자리에서 시작되어 내려가는 순환. 


이처럼 <몬스터>는 서사가 가지는 힘을 잘 알고 그를 극대화시켜 내보낼 줄 아는 작가의 능력이 극대화된 콘텐츠라 하겠다. 거기에 오그라들 만하지만 빠져들 수밖에 없는 장치들을 곳곳에 배치해놓았다. 노소를 불문하고 말이다. 캐릭터들의 생각이나 행동은 소년에게, 당대 정세나 상황 설정은 장년에게 먹힐 만하다. 


이 세상에 나홀로 남게 되었을 때 가장 견디기 힘든 건 무얼까. 아무도 나의 이름을 불러주지 않는 거라고 만화는 말한다. 그건 비단 진정 이 세상에 아무도 없지 않아도 가능하다. 이 세상에 수많은 사람이 있지만 나를 아는 사람은 한정되어 있는 바, 나를 아는 사람이 모두 죽으면 나는 자연스레 존재하지 않는 게 되지 않을까. 요한이 본 '종말'이 바로 그런 모습, 그가 모든 이에게 선사하고 싶은 바도 그런 모습. 


'세상이 만들어낸 슬픈 몬스터', 요한에게도 통용되는 말일까. 그가 가진 몬스터의 요소 중 하나일뿐, 온전히 설명하는 요소는 아닌 것 같다. 우린 이 만화에서 '몬스터'보다 '인간'에게 눈길이 갈 것이다. 몬스터의 슬픔보다 인간의 희망에 기대를 걸게 될 것이다. '포기하지마'라는 전언이 깊이 새겨질 것이다. 그 전언이 몬스터도 용서하고 포용할 수 있는 큰 배를 만드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우린 그런 배를 만들어야 한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블로그 이미지

singenv

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오래된 리뷰] 좀비 영화의 대부 <28일 후>


현대 좀비영화의 시초격이자 최고의 좀비영화라 할 만한 <28일 후>. 대니 보일 감독만이 선보인 액션과 영상을 집대성하였다. 거기에 인간에 대한 메시지가 훌륭하게 조화되었다. ⓒFox Searchlight Pictures



지난 여름 한국을 강타했던 영화 <부산행>. 한국형 좀비 영화의 새 지평을 열며 흥행뿐만 아니라 열렬한 호평이 잇따랐다. 전 세계적인 호평도 잇따랐다고 하는데, 좀비 영화가 지녀야 할 덕목(?)을 빠짐 없이 갖추었기 때문일 것이다. <부산행>은 기본적으로 '좀비'하면 떠오르는 공포, 공포에 대적하는 액션, 인류애, 그리고 좀비보다 더 무서운 인간의 악랄한 모습을 두루두루 잘 보여줬다. 


좀비물로서 영화는 조지 로메로 감독의 1968년작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이, 소설로는 리처드 매드슨 작가의 1954년작 <나는 전설이다>가 그 시작이다. 지극히 현대적인 콘텐츠로 인식되고 있는 좀비물의 비하인드 스토리라고도 할 수 있겠다. 그런 좀비물은 2000년대 들어서 대 호황을 이루었는데, 현대 좀비 영화의 대표로는 두 편을 들 수 있겠다. 잭 스나이더의 2004년작 <새벽의 저주>, 대니 보일의 2002년작 <28일 후>. 


<새벽의 저주>는 굉장히 빠른 전개와 그에 맞춘 잔인한 장면의 연속, 호쾌한 액션으로 엄청난 호응을 얻었다. 그야말로 '좀비 영화' 하면 생각나는 가장 대중적인 영화임에 분명하다. 평단보다 관객에게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다고 할까. 반면 그보다 2년 전에 개봉한 <28일 후>는 관객도 관객이지만 평단에게 압도적인 지지를 받은 작품이다. '뛰어다니는 좀비'를 출현시켜 공포와 액션 두 마리 토끼를 사로잡았으며, '좀비보다 더 무서운 인간'을 출현시켜 인간이란 무엇인지를 심오하게 탐색했다. 


최고의 좀비 영화 <28일 후>


개인적으로 좀비 영화를 그리 많이 챙겨보진 않았지만, 그럼에도 <28일 후>가 최고의 좀비 영화라고 단정할 수 있는 건 감독이 대니 보일인 이유가 크게 작용할 것이다. 그는 이 길지 않은 영화에서 좀비 영화가 보여줄 수 있는 모든 걸 보여줬다고 할 수 있는데, 전작 <트레스포팅>으로 보여줬던 속도감 있는 액션과 <비치>로 보여줬던 인간이 주는 실망, 그리고 후작 <127시간>으로 보여줄 감각적인 영상을 집대성하였다. 


총을 든 무장 단체 일원들이 연구시설을 습격한다. 시설 안에는 영장류들만 갖혀 있고, 그들은 하나같이 분노에 휩싸여 있다. 시설을 습격한 이들은 다름 아닌 동물 보호 단체의 일원, 영장류들을 가둬놓고 불법으로 실험을 일삼는 이들을 습격한 것이다. 그들은 연구원의 말을 무시하고 영장류를 풀어주는데, 곧 영장류들은 이들을 습격한다. 일명 '분노 바이러스'의 방출. 불과 28일 만에 영국은 분노 바이러스에 점령당한다.  

영화 초반, 아무도 없는 거리를 활보하는 주인공의 모습이 꽤 오래 비춰진다. 이 영화가 보여주는 또 하나의 무서움이 바로 이 장면이 아닐까 싶다. '외로움'이랄까. ⓒFox Searchlight Pictures



한편 교통사고로 의식을 잃었던 짐은 병원에서 깨어난다. 아무도 없는 병원, 아무도 없는 도로, 아무도 없는 런던. 헤매다가 성당에 들린 짐, 멀리서 다가오는 신부에게 말을 걸려한다. 하지만 신부는 두 눈이 빨갛게 물들어 짐을 쫓아오고, 짐은 영문도 알지 못한 채 도망간다. 그런 그를 도와주는 셀레나와 마크. 


마크도 곧 감염 당해 셀레나에게 죽고, 그들은 길을 떠난다. 길을 가던 도중 만나게 된 부녀, 프랭크와 해나. 이들은 생존을 보장한다는 군인의 방송을 듣고 무작정 맨체스터로 향한다. 하지만 그곳에서 알게 되고 겪게 되는 군인들의 끔찍한 실체는 좀비보다 더 무서운 것이었으니... 과연 이들의 앞날은 어떨까. 항상 되풀이되는 좀비 영화 결말의 논쟁을 이 영화는 빚겨갈 수 있을까.


좀비가 주는 공포, 그에 대적하는 액션, 그리고 인간


'좀비'는 되살아난 시체를 말한다. 좀비의 탄생을 비중 있게 다루는 작품도 있는데, 그 원인을 찾아내어 이 사태를 해결하려는 의도에서이다. 한편 <28일 후>를 위시한 많은 작품에서는 좀비의 탄생보다 그 이후를 비중 있게 다루며, 그에 따른 액션과 공포, 그리고 인간을 말하고자 한다. 결국 말하고자 하는 건 좀비가 아니지 않은가. 좀비 같은 인간, 아니 좀비보다 더 한 인간이 이 세상을 활개한다는 것이다. 


영화는 좀비로 인한 공포, 그에 대적하는 액션을 짧고 굵게 보여준다. 좀비보다 더 무서운 존재인 인간이 있기 때문이다. 분노 바이러스에 걸린 인간이 좀비 아닌가. ⓒFox Searchlight Pictures



이 영화는 이에 절반씩을 할애했다. 좀비가 주는 공포와 그에 대적하는 액션, 그리고 좀비보다 더 한 인간들과의 사투. 이 둘 간의 연계가 자연스럽고 또 각기 심혈을 기울여 모난 곳이 없기에 더욱 대단하다고 느껴지는 작품이다. 다만, 상대적으로 뒤엣것보다 앞엣것에서 단순한 영화적 재미를 더 느낄 수 있기에 누군가에게는 뒤로 갈수록 몰입도가 떨어질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그건 단순히 앞과 뒤를 비교했을 때 순수하게 좀비가 주는 재미 부분이고, 대니 보일이 선사하는 영화적 재미는 영화를 느보는 내내 느낄 수 있을 거라고 확신한다. 아니, 영화의 마지막 부분은 장르 영화가 줄 수 있는 최고의 장면들이다. 더불어 그 장면들을,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OST는 최고다. 


그러면서도 인간 세계에 던지는 확고한 메시지도 가려지지 않으니 그야말로 순도 연출 100%의 힘이다. 연출의 신이라고 불러야 마땅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인데, 영화적 재미와 영화적 메시지가 서로 믿기지 않을 만큼 조화를 잘 이루며 상응하고 있다. 


<28일 후>의 '히어로'(?)는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이 아닌 분노 바이러스에 먹힌 '뛰어다니는 좀비'에게 돌아갈 듯하다. 그가 아니었다면 속도감 있는 액션도, 감각적인 영상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또 그것들과 상응해야 더욱 빛을 발하는 '인간에 대한 실망'이란 메시지도 없었을 것이다. 탁월한 선택이거니와 대니 보일만이 해낼 수 있을 소재였다. 


작금의 인간 세계에 주는 강력한 경고, 분노 바이러스 좀비


분노 바이러스 설정은 탁월했다. 그 메시지는 이 영화가 단순한 공포액션 좀비 영화의 격을 훨씬 뛰어넘게 해주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Fox Searchlight Pictures



'분노 바이러스'에 걸린 좀비라는 설정은 그 자체로 작금의 인간 세계에 주는 강력한 경고이다. 누군가는 이 세상이 돌아가는 꼴을 보고 가만히 있으면 안 된다고 하며 '분노하라!'를 외치지만, 이 영화를 보면 이미 세상은 분노로 가득 차 점차 헤어나올 수 없는 수렁에 빠지고 있다는 사실을 직시할 것이다. 세상을 올바르게 바꾸려는 의도라지만 분노가 가장 위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해 사람들을 조종하게 할 수는 없지 않나.


분노에 휩싸이지 않은 이들을 '사람'이라 하고 분노에 휩싸인 이들을 '좀비'라 하니, 좀비라도 되어서 사람들의 세상을 또는 이미 좀비들의 세상을 바꿔야 한다는 것인가. 그건 어느 모로 보나 '일단 바꾸고 보자'는 무책임한 말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반대로 분노하지 않으면 이미 분노한 이들이 꾸리는 세상에 승차하게 될 텐데, 과연 그것은 옳은 것인가 하는 의견도 나올 수 있다. 그건 가만히 앉아서 아무것도 못한 채 내 인생을 송두리째 바치는 것밖에 안 될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영화는 그에 대한 답을 얼핏 던진다. 분노하라, 그러나 사람임을 잊지 마라. 무엇보다 희망을 잃지 마라. 분노는 그 이상의 분노로 다스릴 수 있다고 말한다. 분노가 사람을 조종하는 게 아닌, 사람이 분노를 조종하는 것. 문제는 어떻게 사람임을 잊지 않을 수 있는가. 그것이 숙제라면 숙제겠다. 


애초에 분노에 휩싸이지 않은 세상을 구축하면 되는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그건 쉽지 않은 일, 아니 사실 이미 당면한 일, 이제와서 그런 생각을 해본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문제가 있을 때는 해결책을 마련하고, 그와 더불어 훗날 반드시 또다시 생길 동일한 문제의 원인을 생각하며 매뉴얼을 만들어야 하겠다. 그게 안 되서 문제이고, 그게 안 되서 인류사가 반복되는 것이지만.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블로그 이미지

singenv

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오래된 리뷰] <멋진 하루>


하정우가 아직 신인이었을 당시, 베테랑 전도연과의 만남으로 많은 기대를 받은 작품 <멋진 하루>. 역시, 최고의 한국 영화 중 하나다. ⓒ스폰지 Ent



가끔 '한국 영화'가 보고 싶을 때가 있다. 다른 어느 나라 영화도 아닌 한국 영화가 말이다. 중국이나 일본 영화와는 달리 한국 영화는 '풍'이 확고하지는 않은 것 같다. 미국을 위시한 외세의 영향을 많이 받아서 일까. 굳이 뽑아보자면 한이 서려 있는 풍이 한국 영화의 풍이랄까. 그래서 일명 '국뽕' 영화가 많이 만들어 지고 또 많은 인기를 얻는 게 아닌가 생각해본다.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한국 영화의 풍은 섬세한 멜로를 기반으로 멜랑꼴리와 유머와 현실 감각이 조금씩 섞인 장르인 것 같다. 이 또한 영향을 받을 것일 수 있지만, 그래도 가장 한국 영화 같지 않을까. 내가 가끔 '한국 영화'가 보고 싶을 땐 바로 이런 풍의 영화가 보고 싶을 것을 게다. 


전도연과 하정우가 멋들어지게 연기한 2008년작 <멋진 하루>는 비록 원작은 일본 소설이지만 한국 영화 같은 느낌을 자아내는 영화다. 모르긴 몰라도 일본풍이 강할 수밖에 없을 단편 소설을 훌륭하게 재단해낸 각본의 힘이겠다. 이제 막 신인을 벗어난 하정우는 날아다니고, 베테랑 전도연은 자신을 낮추고 모든 걸 받아주었다. 이 둘의 서울에서의 하루를 멋지게 그려냈다. 다시 봐도 정녕 괜찮은 영화다. 


왠지 '멋진 하루'일 것 같은 이들의 하루


영화는 지나가는 행인들의 일상적 이야기를 포착하며 시작한다. 두 번째, 세 번째에 비로소 우리의 주인공 희수(전도연 분)가 등장한다. 카메라는 이제 그녀에게 집중한다. 여타 영화와는 다른, 신선한 시작이다. 희수가 있는 곳은 경마장이다. 그녀는 어슬렁거리며 누군가를 찾고 있는 듯하다. 어디선가 들리는 익숙한 목소리, 그에게로 가 반가워하는 그의 얼굴에 대해 대뜸 '돈 갚아'라고 한마디 한다. 


희수의 싸늘한 한마디와 병운(하정우 분)의 천연덕스러운 반응은 이 영화의 앞날을 예견한다. 시종 일관 계속될 이 둘의 티격태격이 눈 앞에 그려지는 듯하다. 희수가 병운에게 받아야 할 돈은 350만 원, 참으로 애매한 액수다. 병운은 당장 갚을 돈이 없어 빌리러 가야 한다고 말한다. 며칠 뒤에 붙여준다는 병운을 믿지 못하는 희수, 오늘 당장 받아야 한다고 하며 병운을 따라 나선다. '멋진 하루'의 시작이다. 


과연 멋진 하루일까. 굳이 끝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 같다. 멋진 하루는커녕 우울하기 짝이 없는 하루가 될 거라고. 꿔준 돈을 받기 위해, 돈 꾸는 현장을 따라나서야 하다니. 영어 제목인 'My Dear Enemy'에서도 풍기는 이 정반대 콤비의 모순적인 하루. 그런데 병운의 천연덕스러움, 그가 돈을 꾸러다니는 풍경,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가 생각나게 하는 OST까지, 마치 설렘 가득한 산책을 가는 기분이다. 왠지 이들의 하루가 '멋진 하루'일 것 같다. 싱숭생숭한 기분은 어딘가로 가버리고 설렘만 남는다.


여성에 대한 천착에서 인간에 대한 섬세한 시선까지


영화는 이윤기 감독이 오랫동안 천착해왔던 여성에 대한 천착을 간직한 채, 인간에 대한 섬세한 시선까지 보여준다. 한국 영화의 발전 양상을 보는 것 같다. ⓒ스폰지 Ent



그럴 때가 종종 있다. 정말 가기 싫은 곳을 어쩔 수 없이 억지로 따라 가서 시종 일관 인상을 쓰며 빨리 이곳을 빠져나가고 싶다는 생각만 하며 있었는데 막상 떠나면서는 뭔가 괜찮았다는 기분이 들 때가 말이다. 희수가 느낀 감정이 그렇지 않았을까 싶다. 내 돈 내가 돌려받겠다는데, 왜 내가 모르는 사람이랑 함께 말 같지도 않은 말을 듣고 있어야 하는지. 병운은 그게 다 너한테 돈 갚으려고 하는 거고 또 좋은 게 좋은 거 아니냐고 둘러대니 더더욱 마음에 안 들고 인상이 찌뿌려진다. 


와중에 이윤기 감독은 오랫동안 천착해왔던 여성에 대한 섬세한 시선을 놓치지 않는다. 형식은 두 남녀의 좌충우돌 로드무비지만, 병운이 돈을 꾸러 다니는 사람들이 하나 같이 여성이기 때문이다. 골프장을 운영하는 듯한 회장님, 이혼하고 홀로 딸을 키우며 마트 일을 하는 여자, 밤일 하는 여자, 주차요원으로 일하는 여자, 어디를 다쳤는지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는 듯한 여자 등, 그야말로 다양한 여성군이다. 


희수가 보기엔 병운이 여자들의 돈을 뜯어 먹는다기 보다 여자들이 병운에게 돈을 가져다 바치는 것처럼 보인다. 그게 역겨워 보였는지 밤일 하는 여자한테 해서는 안 될 말을 하고 만다. 곧 사과를 하는 희수, 그녀는 여자들을 향한 분노를 병운에게 돌린다. 반반한 얼굴과 사람 기분 좋게 하는 입담으로 여자들 돈 뜯어 먹는 놈. 


그렇지만 그녀가 그에 대해 무엇을 알겠는가. 그들은 그저 오래전 헤어진 연인일 뿐인데. 일 년 사이에도 몇 번이나 180도 바뀌는 게 인생 아닌가. 다시 보니 병운과 그녀들은 서로를 돕고 살아가고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해본다. 분명 그녀들이 어려울 때 병운은 두 발 벗고 도와줬을 것이다. 감독의 여성에 대한 천착은 이렇게 인간에 대한 천착, 인간에 대한 섬세한 시선으로 발전했다. 


내 영화 인생에 나타난 특별한 영화 한 편


잘 기억나진 않지만 아마 개봉한 지 오래지 않아서 이 작품을 봤을 것이다. 당시에는 별 생각 없이 두 주연 배우 때문에 봤을 텐데, 묘하게도 근 10년이 지나도록 가끔 생각이 났다. 이 영화가 풍기는 분위기가 정녕 어디 서도 느끼기 힘들기 때문일 텐데, 묘하게 위로해주는 기분이랄까. 거기에 병운으로 분한 하정우의 천연덕스러운 연기는 처음부터 끝까지 기분을 좋게 해준다. 더군다나 영화가 진행되면서 자연스러워지는 게 눈에 보이는데, 기특하다는 생각까지 들게 만드는 게 아닌가. 


자꾸 떠오르는 영화는 또 보게 마련이지만, 또 보게 되었을 때 실망할 여지가 많다. 그때 그 영화를 봤을 때 나의 상황과 나를 둘러싼 환경과 영화를 둘러싼 환경 등이 변했을 것이기 자명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이 세상이 변했을 테니 말이다. 하다 못해 예전의 것이기에 촌스럽고 유치하고 예상되고 지루하고 재미 없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기억 속 옛 연인을 다시 한 번 보고 싶은 마음은 알겠지만, 막상 보고 난 후 실망을 금치 못하느니 안 보는 게 낳다는 느낌이랄까. 


<멋진 하루>는 어땠나. 그런 기시감은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그때 못 봤던 것들(영화 스킬, 장면, 영화 제목의 반어법)이 보이고, 그때 느끼지 못했던 감정(병운이 돈 꾸러 다니는 여자들의 감정)이 보이는 게 아닌가. 그땐 참 '빈약한' 영화인 줄 알았는데, 이렇게 '풍부한' 영화일 줄이야. 살아가면서 보고 또 보게 될 영화인 것 같은데, 몇 년 뒤에 또 보게 되면 또 어떤 것들이 되살아나 내 눈 앞으로 다가올지 기대된다. 내 영화 인생에 특별한 영화 한 편이 나타났다. 


전도연과 하정우에게 특별하게 다가올 영화


영화의 두 주연배우 전도연과 하정우. 그리고 이윤기 감독. <멋진 하루>는 감독뿐만 아니라 두 배우에게도 큰 의미로 다가왔을 것이다. 그들의 조합을 다시 보고 싶다. ⓒ스폰지 Ent



이 작품은 무엇보다 두 주연 배우 전도연과 하정우에게, 특히 하정우에게 큰 의미로 다가올 것 같다. 전도연은 2007년 <밀양>으로 역사적인 '칸의 여왕'이 되어 한국 영화계에 깊은 족적을 남겼는데, 바로 다음 작품으로 이 <멋진 하루>를 선택했다. 전작에서 모든 걸 다 바친 듯한 연기를 선보였다면 이 작품에선 모든 걸 다 내려 놓고 후배 하정우에게 모든 걸 다 넘겨준 듯한 연기를 선보인다. 그녀의 필모그래피를 볼 때, 이 작품으로 말미암아 진정한 완성형 연기자가 된 듯한 느낌이다. 


한편 하정우는 2008년이 특별할 것이다. <추적자>로 필모 최고의 연기를 선보이고, <비스티 보이즈>로 윤종빈 감독과 다시 만나 열연을 펼쳤으며, <멋진 하루>로 비로소 '하정우표' 연기를 완성시켰다. 하정우표 연기의 시작이 <용서받지 못한 자>였다면, <멋진 하루>는 최근 <터널>까지 이어진 그의 연기의 정점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왠지 그도 이 작품에서의 병운이라는 캐릭터를 가장 좋아할 듯하다. 


연기를 잘하는 건 둘째 치고 배우 필모그래피 전체에서 터닝포인트가 되는 작품들이 있을 텐데, 전도연과 하정우 두 배우에게 <멋진 하루>가 상징하는 바는 남다를 것이 분명하다. 비단 두 주연 배우뿐만 아니라 이윤기 감독에게도 마찬가지이지 않을까. 2005년 <여자, 정혜>로 데뷔하자마자 많은 주목을 받았던 그, 계속해서 많은 사랑을 받다가 <멋진 하루>로 정점을 찍었다. 이후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로 비평과 흥행에서 참패, 작년엔 <남과 여>로 돌아왔지만 흥행에서 참패했다. 


물론 이윤기 감독의 작품들이 흥행에서 좋은 성적을 거둔 적은 없지만, 적어도 비평에선 좋은 점수를 얻었던 바 최근의 행보가 조금 아쉬운 건 사실이다. 연출도 연출이지만 그만의 색채가 묻어나는 각본을 다시 접하고 싶다. <멋진 하루>가 생각나는 멋진 이야기를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난해 11월에 개봉할 예정이었던 <어느날>의 개봉 소식이 들려오지 않는 게 아쉽다. 후반작업 때문이라고 하는데 하루 빨리 보고 싶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블로그 이미지

singenv

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오래된 리뷰] <천공의 성 라퓨타>


일본이 전 세계에 자랑하는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의 1986년 작이자 '지브리 스튜디오'의 첫 작품 <천공의 성 라퓨타> ⓒ대원 C&A 홀딩스



일본이 전 세계에 자랑하는 거장이 많을 텐데, 소설에서는 무라카미 하루키가, 영화 에서는 고 구라사와 아키라가 있을 거다. 그렇다면 일본이 자랑하는 콘텐츠인 애니메이션에서는 누구나 알 만한 거장에 누가 있을까? 미야자키 하야오가 아닐까 생각한다. 적어도 전 세계인들이 알 만해야 하니, 위 세 명에 논란의 여지는 없을 듯하다. 


미야자키 하야오, 여전히 현역으로 활동 중인 75세 초로의 노 연출가. 여러 논란에도 불구하고 애니메이션 영화 그 자체로 더할 나위 없는 수준을 보여주는 거장이다. 지난 2013년 <바람이 분다>를 끝으로 '진짜' 은퇴를 선언했지만 2020년 '애벌레 보로'라는 캐릭터를 가지고 다시 돌아온다고 한다. <천공의 성 라퓨타> 이후 30년 간 5번의 은퇴를 선언했지만 매번 다시 돌아온 특이한 이력을 갖고 있는 그다. 


하야오 세계와 지브리 월드의 시작 <천공의 성 라퓨타>


올해 2016년은 미야자키 하야오에게 있어, 그의 분신과도 같은 지브리 스튜디오에 있어 특별하다고 할 수 있는 해일 것이다. 1984년에 세운 지브리 스튜디오의 첫 작품 <천공의 성 라퓨타>가 올해 30주년을 맞이했기 때문이다. 1984년 <바람의 계곡 나우시카>가 상업적으로 큰 성공을 거둔 후 세운 지브리 스튜디오, 첫 작품 <천공의 성 라퓨타>의 연이은 성공으로 미야자키 하야오는 그만의 세계를 만들어냈다. 하야오 세계, 지브리 월드.


<천공의 성 라퓨타>는 분명 30년 전의 애니메이션이다. 하지만 도무지 믿을 수도 없고 믿고 싶지 않기까지 하다. 현재의 애니메이션이 퇴보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게 만들기 때문이다. 옛스러운 느낌이 드는 그림체가 지금 보기엔 조금 부자연스러울 뿐, 기시감을 찾아볼 수 없다. 완벽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분명 '30년 전'의 애니메이션인 이 작품은, 완벽 그 자체다. 캐릭터, 서사, 메시지 어느 것 하나 빠질 게 없다. ⓒ대원 C&A 홀딩스



가장 눈에 띄는 건 의외로 '캐릭터'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들에는 공통적으로 나오는 캐릭터가 있는데, 여기 나오는 '돌라'가 대표적이다. 그녀는 다양한 애니메이션에서 다양한 캐릭터로 분한다. 여기서는 해적 일당의 대모로 분했는데, 세계적인 만화 <원피스>가 생각나지 않을 수 없다. 특유의 자유분방함과 보물에 대한 욕망, 그들만의 의리와 어디로 튈지 모를 개성 등이 그들을 구성한다. 정녕 캐릭터다운 캐릭터다. 그들의 좌충우돌을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보는 재미가 충분하다. 


물흐르듯 전개되는 서사와 더 없이 확실한 메시지는 백미다. 슬픈 눈을 가진 소녀가 군인 집단으로 보이는 이들과 함께 어디론가 가고 있는 듯 보인다. 거기엔 정부에서 보낸 밀사도 있다. 그때 해적이 출물해 소녀를 노린다. 군인 집단, 정부 밀사, 해적 일당이 노리는 건 다름 아닌 소녀가 간직한 '비행석'이다. 무엇이든 하늘을 날게 해주는 막대한 힘을 지닌 돌. 기계의 힘을 빌리지 않고 하늘을 나는 건 인간 근원의 욕망이다.


막간을 노려 탈출을 시도하는 소녀 시타, 비행석의 놀라운 힘으로 천사같은 모습을 하고 탄광에서 일하는 소년 파즈에게 온다. 그들은 곧 친해지는데, 오래지 않아 군인 집단, 정부 밀사, 해적 일당이 일제히 시타를 노리고 쳐들어 온다. 그들끼리 치고박는 틈에 도망가보지만 결국 시타는 군인 집단과 정부 밀사에게 잡히고 만다. 그들은 전설의 천공의 성 라퓨타를 제압하려 시타의 비행석을 탐냈던 것이다. 그녀는 다름 아닌 라퓨타족의 마지막 공주였다. 그녀를 앞세우려는 수작이다. 


한편 파즈는 해적 일당에게 붙잡히는데, 곧 각자의 원하는 바가 같아 손을 잡고 시타를 구출하러 떠난다. 전과는 완연히 다른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드는 구간으로, 대지에서의 행복하고 단란한 느낌은 온데간데 없고 창공에서의 욕망의 뒤엉킴과 불손함이 지배한다. 그렇지만 파즈에게는 라퓨타라는 존재 자체가 아버지를 상징하고 생각나게 하는 가장 큰 것이기에 또 다른 느낌이 드는 것이다. 과연 시타와 파즈는 다시 만날 수 있을까? 그들의 앞날엔 어떤 여정이 펼쳐질까? 천공의 성 라퓨타의 운명은?


아무리 강한 무기가 있어도, 땅을 떠나서는 살 수 없다!


미야자키 하야오가 특히 신경 쓰는 건 '메시지'다. 전반적으로 비슷한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하는데, 이번엔 '자연' 그리고 '인간의 욕망'이다. ⓒ대원 C&A 홀딩스



캐릭터와 서사를 애니메이션이 갖는 성격이라고 생각되는 것에 가장 잘 맞게 꾸려 놓고선, 그야말로 확실하고 확고한 메시지를 던지는 미야자키 하야오. <천공의 성 라퓨타>를 통해서도 마찬가지다. 그 메시지를 대사를 통해 대놓고 직설적으로 던지는 장면이 있는데, 시타가 정부 밀사 무스카의 계략에 휘말려 위기에 처했음에도 강력히 주장한다. 


"아무리 강한 무기가 있어도, 수많은 로보트를 조종해도, 땅을 떠나서는 살 수 없는 거예요!"


엄청난 힘을 가진 천공의 종족 공주가 '하늘'이 아닌 '대지'를 중요시 여기고 있는 것이다. 자연과 더불어 사는 삶이 중요하다는 뜻으로 보이는데, 천공의 종족이 하는 말이라서 더욱 중요하고 깊이 있게 들린다. 일종의 겸손함까지 엿보인다. 이는 대지의 종족인 인간이 천공의 성을 침범해 보물을 훔치고 지배하려 드는 모습과 완벽히 대비된다. 인간의 끝간데 모를 욕망, 그 끝엔 자연이 있다. 다분히 미야자키 하야오가 만들어낸 구조겠다. 그들이 침범하는 곳은 결국 자연인 것이다. 


그들은 곧 자연에게 큰 벌을 받게 되어 있다. 그건 익히 알고 있는 서사 패턴, 하지만 그걸 어떤 식으로 보여줄지, 어떤 식으로 보여줘야 확실히 각인 되어 잊지 않게 할지는 만드는 이의 선택이자 역량이다. 특히 이 분야(?)에서 탁월함을 보이는 미야자키 하야오는 유감없이 그 실력을 발휘한다. 아마도 이 애니메이션을 보고난 후 풀 한 포기라도 아껴야 겠다, 함부로 재물을 탐하지 말아야겠다, 하는 생각이 들 것이다. 


30년 전부터 환경파괴와 환경보호가 애니메이션의 주된 내용으로 부각될 정도이니, 현재는 어떨지 상상도 되지 않는다. 이미 지구는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이 되어버리지나 않았는지... 새삼스레 자연을 보호하자는 교훈을 던지고 싶진 않다. 누구나 인지하고 있는 것이기에 오히려 부작용이 일 수 있다. 그럼에도 후손들을 생각하면 그런 교훈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말로 하는 대신 다른 방법이 있다. <천공의 성 라퓨타>를 보면 될 것. '백문이 불여일견' 아닌가.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블로그 이미지

singenv

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지나간 책 다시 읽기] 박범신<은교>


소설 <은교> 표지 ⓒ문학동네



소녀는 데크의 의자에 앉은 채 잠들어 있었다. 이적요 시인은 소녀에게 낯선 감정을 느낀다. 그건 저돌적이기 그지 없는 '욕망'. 그는 우주의 비밀을 본 것 같다고 말한다. 소녀의 이름은 '은교', 머지 않은 곳에 사는 17살 아이다. 그 아이는 이적요의 서재를 청소하게 되었다. 소설 <은교>(문학동네)의 모든 건 은교의 출현에서 비롯된다. 


소설은 이적요 시인이 남긴 노트와 그의 제자 서지우 작가가 남긴 일기, 그리고 시인의 후견인이라 할 수 있는 Q변호사의 현재 시점이 번갈아 가면서 진행된다. 진정한 주인공이라 할 만한 은교의 시점은 끝내 비춰지지 않는다. 


시작은 '시인이 마지막 남긴 노트'인데, 이곳에 소설 전체를 관통하는 사건 전체가 담겨 있다. 소설은 시작하며 그 모든 걸 풀어 놓는다. 스스로 스포일러를 푼 것이다. 이적요 시인은 은교를 사랑했고 서지우를 죽였으며 자신 또한 죽음으로 내몰았다. 남들은 변태적인 애욕이라 부르는 '사랑'과 '욕망' 그리고 누구도 막지 못할 '운명'의 결과물이다.


사건 자체에 반전은 없다. 그대로이다. 다만, 사건의 진행 과정에서 수많은 반전들이 있다. 이적요 시인과 은교, 은교와 서지우 작가, 이적요 시인과 서지우 작가. 얽히고 설킨 삼각 관계, 전쟁을 방불케 하는 심리 스릴러, 관능적인 섹스 판타지까지. 


처참한 영화, 수불석권 소설


소설보다 영화로 먼저 접했다. 영화 <은교>는 개봉도 하기 전에 역시 '노출'로 엄청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배우 김고은이 이 영화로 데뷔했는데, 헤어 노출을 감행한다. 더불어 박해일은 대역이었다고 하지만 성기 노출을 감행한다. 영화를 안 볼 수 없게 하는 치졸한 언론 플레이였는데, 135만 명 정도의 성적을 거두었을 뿐이다. 영화 자체가 소설에 비해 별 거 없었단 뜻이다. 


조금이라도 박범신 작가의 원작에 그 화살이 돌아갈 순 없지만, 공교롭게도 그의 최신작의 영화 성적이 상당히 별로인 것 같다. <은교>도 은교지만, 최근에 개봉한 <고산자>는 100만 명도 안 되는 처참한 성적을 거두었다. 박범신 작가의 야심작 '욕망 3부작'의 멀티 유즈가 사실상 모조리 실패한 것이다. <촐라체>는 연극으로, <고산자>와 <은교>는 영화로 나왔는데, 큰 반향도 큰 감동도 큰 흥행도 일으키지 못했다. 


영화를 보고선 소설을 보고 싶은 마음이 싹 달아났는데, 우연히 잡아들게 된 소설은 가히 '수불석권'하게 되는 마력이 있었다. 결코 얇지 않은, 아니 상당히 두꺼운 소설이었는데 욕망의 점점들을 그 끝에 파국이 있을 줄 알면서도 따라갈 수밖에 없다. 마치 불에 뛰어드는 부나방 같다고 할까. 


가끔씩 이런 장르적 글쓰기가 가미된 소설을 읽곤 하는데, 잘못 선택하면 소설에 초점이 맞춰지는 게 아니라 내 자신에게 초점이 맞춰진다. 이런 소설을 보고 있는 나의 파국이 눈앞에 선하기 때문이다. '오래지 않아 책을 덮고 다신 거들떠도 안 보겠구나.' <은교>는 '오래지 않아 소설이 끝나겠구나. 한동안 헤어나오지 못하겠구나. 어서 다른 소설을 꺼내들어야지.' 하는 생각이 들게끔 했다. 결코 흔치 않은 경우다. 


노인의 사랑은 특별한가, 당연한가


소설에서 가장 눈살을 찌뿌리게 하면서도 가장 가슴을 친 이는 다름 아닌 초로의 노린 이적요이다. 그의 나이가 되려면 족히 40년은 필요한데 어찌 나는 그에게 매료되었는가. 그의 욕망이, 은교를 향한 변태적인 애욕이자 '사랑'이, 역시 제자 서지우를 향한 삐뚫어진 '사랑'이, 누구나 느낄 수 있는 아니 누구나 느낄 만하기 때문이다. 작가는 '누구나'에서 가장 수요가 적은 노인을 택해 극적 요소를 극대화했을 뿐이다. 


이적요의 사랑은 특별했는가. 먼저 생각해봐야 할 건 그가 노인이라는 점이다. 노인은 사랑을 하지 '못한다' 라는 생각보다 하면 '안된다' 라는 생각이 앞선다. 거기에 어떤 이유가 필요하겠는가. 노인이 사랑을 하면 추태인 거다. 그런 와중에 10대 여자 아이를 '사랑'한다고? 절대로 용인할 수 없을 거다. 


그럼 노인의 10대 여자 아이를 향한 사랑은 어떠한가. 노인이 아니더라도 10대 여자 아이를 향한 사랑은 쉽게 용인하기 힘들다. 여자 '아이'이기 때문인데, 100% 변태로 찍힐 것이다. 이 또한 사랑이라는 단어를 꺼내들 수 없다. 이적요는 사랑이라는 단어를 꺼내들기 어려운 두 개의 요소를 가지고 사랑이라 말한다.


여기에 제자 서지우가 있다. 이적요와 서지우는 단순한 사제 지간은 아니다. 서지우는 이적요를 스승 이상으로, 아버지처럼 모신다. 시중이나 비서 같은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문학적 신과 다름 없지 않을까? 그렇지만 인간으로서의 이적요도 꿰뚫어보고 있기 때문에 그 이상으로 마음을 주지 못한다. 이적요는 그런 서지우를 탐탁지 않게 생각한다. 그에게서 문학적 심성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도 아들보다 더 아들처럼 자신을 대해주는 그에게 인간적으로 호감을 갖지 않을 수 없다. '문학'과 '인간'이라는, 가깝지만 먼 두 개체의 소용돌이가 이들 사이에서 요동친다. 


연애소설? 예술소설!


<은교>는 어느 모로 봐도 연애소설이다. 사랑이(라고 주장하는) 소설의 주요 골격을 이루고, 사랑이라는 뿌리에서 모든 이야기의 줄기가 뻗어 나오기 때문이다. 하지만 거기엔 사랑이라는 욕망과 다른 것들이 있다. 노인의 '사랑'도 있지만 '노인'의 사랑도 있기 때문이다. 노인에 초점을 맞추면, 삶과 죽음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죽으면 끝인데 내 마음대로 사랑이라 외치고 사랑을 실컷 해봐야 하지 않겠나 싶다가도, 죽고 나서 영원히 남는 이름인데 살아생전 쌓아올린 명성을 무너뜨릴 순 없겠다 싶은 거다. 죽음에 대한 생각이 확연히 갈리는 부분이다. 거기엔 삶도 있다. 


또한 이적요는 소설에서 한국을 대표하는 시인이기에, 문학이란 무엇인지 시란 무엇인지를 말하기도 한다. 공대생 출신인 서지우로선 절대로 제대로 된 시를 쓰지 못할 거란 강한 믿음과 그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다. 그러며 이적요가 쓴 소설로 엄청난 인기를 끌게 된 서지우를 보면서 이적요가 갖는 복잡한 심리를 통해 '문학 동네'의 생태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기도 한다. 문학이 별개 아니게 느껴지기도 한다. 


더이상 연애소설로만 볼 순 없지 않을까. 이정도면 예술소설이라 불러도 무방하지 않을까. 다만 한 가지 걸리는 부분은 '이 소설은 단순히 연애소설이 아닙니다. 예술소설을 표방하고 있죠.'라고 대놓고 말하는 듯한 뉘앙스가 소설 전체에 깔려 있어 불편하다는 점이다. 에돌아 은은하게 깔려 자연스럽게 알면 훨씬 좋았으리라. 작가의 실력이 모자랐을까? 그렇진 않은 듯하다. '노인도 사랑을 할 수 있다'고 외치듯이 '이 소설은 예술소설이다'라고 당당히 외치는 노작가의 기백이 느껴진다. 이 소설은 다름 아닌 박범신의 소설이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블로그 이미지

singenv

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서평] <지구빙해사기>


<지구빙해사기> 표지 ⓒ미우



먼 미래의 지구, 제8기 빙하기 시대는 전 지구가 얼어붙었다. 어비스 메갈로폴리스 가넷 지역 지하에 시블 자원 개발 공사 석탄 채굴 기지 털파가 있다. 석탄 매장량이 거의 바닥나기 시작했고, 여기저기 고장나 기지를 통째로 바꾸지 않는 한 다람쥐 쳇바퀴 같은 나날이 이어질 뿐이다. 


타케루는 시블 자원 개발 공사 사장의 서자다. 꼬이고 꼬인 그의 성향은, 어비스에서 쫓겨나게 했고 털파에서조차 설 자리를 잃게 만들었다. 위태로운 상황이지만 그는 개의치 않는 듯하다. 와중에 사고로 털파의 소장이 죽고 타케루가 소장이 된다. 하지만 타케루는 술에 쩔어 하루하루를 보낼 뿐이다. 한편, 자연이 선사하는 대재앙이 눈앞에 왔다. 한 달이나 빨리 한겨울이 시작된 것이다. 털파는 식량도 다 떨어져 가는 상황에서 자칫 갇혀버릴 위험에 처하는데...


빙하기, 간빙기 시대를 배경으로 한 SF 만화


<고독한 미식가> 등으로 유명한 세계적인 만화가 '타니구치 지로'의 유일무이한 SF 만화 <지구빙해사기>다. 일반 만화책보다 큰 판형에 조금 많은 페이지까지, 방대한 SF 세계를 그리기에는 다소 부족해 보이는 스펙에도 불구하고 기대를 하게끔 만드는 그다. 또한 <투모로우> <설국열차>로 대표되는 빙하기 SF 또는 빙하기 재난 영화의 면면도 믿음을 갖게 하는 이유다. 


만화의 배경은 먼 미래의 빙하기, 간빙기 시대다. 언젠가는 반드시 빙하기 시대가 도래할 것이라는 예상 하에 만드어졌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는 어떤 시대일까? 학생 때 지구과학 시간에 많이 배웠을 텐데, 우리는 신생대 제4기 후빙기 시대에 살고 있다고 한다. 신생대의 마지막 빙기가 종료된 약 1만 년전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의 지질시대다. 


하지만 오늘날 지구의 기온 상승 추세는 예사롭지 않다. 북극 빙하의 감소가 그 대표적 예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가 후빙기가 아닌 간빙기라고 추측할 수 있는 강력한 이유다. 만약 그렇다면 빙하기 시대의 도래가 멀지 않았다. 간빙기를 짧게 유지하다 빙하기를 맞이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만화를 보면 빙하기에서 순식간에 간빙기로 진입한다. 타케루를 한결 같이 지지해주던 이들의 죽음으로 정신을 차리고 각성한 타케루가 지상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기 시작한 건지 알기 위해 여행을 떠나면서 겪게 되는 엄청난 재난이 그 때문이라는 것이다. 긴 빙하기가 끝나고 간빙기가 다시 찾아오는 바로 그 시기, 지구는 요동치고 지구의 온갖 생물이 다음 종을 형성한다. 왠지 지금이 바로 그 시기인 듯하다. 


'전형적'으로 훌륭한 고전적인 이야기


상, 하로 나눠 진행되는 <지구빙해사기>는 상권이 빙하기 시대의 털파 기지를 다루고, 하권이 간빙기 시대의 타케루 일행 모험을 다룬다. 스케일은 하권의 내용이 크지만, 상권의 내용이 훨씬 더 잘 짜여져 있고 재밌고 흥미롭다. SF 치고 절대적인 양에서 부족한 것이 뒤로 갈수록 힘이 부치는 결과를 낳은 것 같다. 작가도 후기를 통해 드러내고 있는 바, 그런 부분이 상당히 아쉽지만 전체적으로 볼 만 하다. 


만화는 인간이 만들어 낸 기계문명과 자연의 대립, 그리고 인간과 자연을 이어주는 구원자의 출현과 성장이 주를 이룬다. 아주 고전적인 이야기인데, 이 만화가 만들어진 때가 1990년 전후인 만큼 그럴 만도 하겠다 싶다. 스토리 라인의 짜임새는 훌륭하다. 죽음과 그에 따른 눈물로 인간이란 존재가 천진함의 마지막 잔재를 씻어내는, 즉 성장하는 모양새를 잘 이끌어냈다. 거기에 성장해 구원자가 된 그를 매개자이자 현자 또는 멘토가 나와 도와주는 것도 '전형적'으로 훌륭하다. 


작화(그림) 솜씨는 뛰어날 대로 뛰어나 SF에 제격이다. 스토리에 아쉬움이 남아도, 만화인 만큼 작화를 감상하는 것으로도 충분하다 하겠다. 특히 섬세하기 이를 데 없는 장면 장면을 대하다 보면, 요즘 만화들에선 찾아보기 힘든 90년대 감수성을 느낄 수 있다. 만화의 전성기라고도 할 수 있는 그때인데, 실험 정신 넘치는 대범함과 자신감으로 중무장한 채 그리고자 하는 세계를 거침없이 만들어낸 사례의 수혜자가 아닐까.


공상은 공상으로만 그치길...


많은 이들이 관심을 갖고 구상하고 이야기를 지어내는 것엔 다 이유가 있을 거다. 그중 단연 압권은 '자연과 인간'일 거다. '대립'일 때도 있고, '조화'일 때도 있고, '공존'일 때도 있다. 인간사를 보면, 18세기에 본격적으로 기계 문명을 일으키며 자연과의 대립을 시작했다. 기계 문명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자연은 파괴될 때로 파괴되었다. 그러고나선 보란듯이 재난·재해가 인간 사회를 덮쳤다. 오롯이 '인재'인 경우도 있었고, '자연 재해'인 경우도 있었다. 이제야 정신을 차린 인간은 자연과의 조화와 공존을 꿈꾸지만 과연 성공할 수 있을지 미지수다. 


<지구빙해사기>는 상권에서 빙하기를 배경으로 자연의 무차별 공습에 기계로 연명하는 인간을 그렸고, 하권에서는 간빙기를 배경으로 폭주하는 기계에 대응해 자연과 인간이 연합하는 모습을 그렸다. 일반적인 일대일 구도와는 조금 다른, 반 기계·반 문명의 다층적인 면을 지향한다. 기계와 자연의 조화는 불가능한 것일까. 인간과 자연의 연합이라는, 생소한 모습에 위안을 삼아야 할까. 


어느덧 5년이 지난, 인류사에 길이 남을 대재앙 '동일본 대지진'. 대지진이야 인류사에 수없이 많았지만, 동일본 대지진이 특별한 이유는 '원전 사고' 때문이다.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 낸 문명의 최고봉이라 할 수 있는 바, 자연의 일격에 한순간 무너졌다. 그리고 5년이 지나 그 여파가 우리나라까지 미쳐서,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강력한 지진을 선사했다. 정녕 거짓말 같은 시나리오가 아닌가. 그렇지만 눈앞에서 이루어졌다. 


공상은 공상으로 그쳤으면 좋겠다는 바람이다. 수많은 이들의 예상과 예측이 빗나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렇지만 이대로 흘러가면 공상은 반드시 현실이 되고, 예상과 예측은 여지 없이 적중할 것이다.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저 언젠가 들이닥칠 그 무엇을 어렴풋이 생각하며 살아가면 되는 걸까.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는다. 아무도 귀담아 듣지 않는다. 아무도 다음 세대를 생각하지 않는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블로그 이미지

singenv

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리뷰] 톰 포드의 <싱글맨>


세계적인 패션 디자이너 '톰 포드'의 데뷔작 <싱글맨>. 그만이 가진 장기를 유감 없이 발휘했다. 새로운 색감의 대가이다. 그걸 감상하는 것만으로도 황홀하다. ⓒ와인스타인 컴퍼니



짧고 잔잔한 영화 한 편으로 인생의 한 부분이나마 이야기하는 건 정녕 어려운 일이다. 인생뿐이랴. 인생을 말하고자 영상과 색감을 알게 모르게 이용하는 건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쉬지 않고 타는 듯한 느낌이 들게 한다. 문자로 보여주기 어려운, 영상으로만 가능하고 상대적으로 쉬운 부분이니 만큼 어찌 보면 당연하다 하겠지만, 그만큼 심여를 기울여야 한다. 어설프면 안 하느니 못하지 않겠나. 


영화 <싱글맨>은 이를 완벽에 가깝게 해냈다. 스토리야 완벽에 가까운 원작이 있으니 크게 우려할 부분이 없겠지만, 그걸 영상으로 어떻게 표현하느냐에 엄청난 부담이 지어졌을 게 분명하다. 자연스레 감독이 궁금해진다. 색감의 대가 웨스 앤더슨 감독이나 박찬욱 감독이 생각났다. <싱글맨>의 감독은 누구일까. 


'톰 포드'라고 한다. 어디서 들어본 것 같더라니, 패션 디자이너란다. 내리막길을 걷고 있었던 세계적인 명품 브랜드 '구찌'를 부활시킨 장본인. 그가 10년 넘게 몸담은 구찌를 나와 '성장'과 '진화'를 거듭하고자 하는, 그 신호탄 중 하나가 영화 <싱글맨>이다. 구찌에 도시적이고 젊은 관능성을 장착시켜 부활시켰듯이, 영화를 통해서도 그의 디자인 철학을 엿볼 수 있다. 


다른 모든 걸 덮어버리는 '상실'에 대하여


1960년대 초 미국, 오래된 연인의 죽임에 한 없이 힘들어 하는 대학교수 조지(콜린 퍼스 분)가 있다. 아침에 눈을 뜨기 싫다. 아침에 눈을 뜨면 보이기 시작하는 연인의 모습. 자그마치 16년이다. 어느 날 문득 혼자가 되어 과거 속에서만 살아가는 조지, 하루하루가 순간순간이 고역이다.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들이 부유할 뿐이다. 


그는 다름 아닌 동성애자다. 그가 할 수 있는 게 무엇이 있을까. 살아생전 연인 짐을 열렬히 사랑할 순 있었겠지만, 그의 죽음 앞에선... 그를 더욱 절망 속으로 밀어넣은 건, 짐의 죽음을 함께 할 수 없었다는 것일 테다. 16년 간 함께 해왔지만, 조지는 짐의 '가족'일 수 없었다. 조지는 누구한테고 드러낼 수 없는 슬픔과 절망을 안고 홀로 속절없이 무너질 뿐이었다. 


<싱글맨>은 퀴어 영화이지만, 굉장히 보편적인 감정을 말하고자 하는 영화다. 다름 아닌 '상실'. 이 영화는 상실에 대한 영화다. ⓒ와인스타인 컴퍼니



<싱글맨>은 분명 퀴어 영화지만, 동성애가 조지의 '상실'을 극대화하기 위한 장치로 작동하고 있다는 느낌이 다분하다. 비단 여자 연인이었더라도 가족이었더라도 반려동물이었더라도 상실의 슬픔은 어마어마하게 덮쳐 오지 않겠나. 그렇지만 시대의 특성 상, '동성애'가 갖는 특성 상 그 상실의 슬픔은 다른 무엇을 뛰어 넘을 거다. <싱글맨>은 다른 모든 걸 덮어 버리는 '상실'에 대한 영화다. 


상실은 무엇으로 대체할 수 있을까. 상실을 무엇으로 '치료'할 수 있을까. 그 자리를 다른 무엇으로 채울 수 있긴 한 걸까. 그저 '다음 버스를 기다리면' 되는 것일까. 그렇게 간단하면 소설, 영화로 끊임없이 재창조되어 사람들을 '괴롭'히고, 당사자를 죽음으로까지 몰고 가는 게 설명되지 않는다. 이 영화를 보면 상실이 한없이 무서워진다. 


우울함에서 생기가 감도는 색감 영상으로


조지에게 그 하루는 특별하다. 권총과 총알을 준비한다. 상실의 슬픔이 결국 삶을 무너뜨린 것이다. 인생을 끝내기로 한다. 그래도 하루를 온전히 보내야 한다. 다른 날과 다름 없는 하루를 시작하고 사람들도 만나야 한다. 아무런 의미도 없고 감흥도 없다. 오직 순간순간 덮쳐오는 짐과의 기억만 의미가 있고 감흥이 있다. 


한순간 눈에 띄는 이가 있지만 지나갈 뿐이다. 짐을 대신할 수 없다. 죽음을 결심한 시간이 다가왔다. 자신의 처지를 아는 유일한 사람인 찰리의 전화가 그 결심을 중지시킨다. '그녀'와의 약속 시간이다. 그녀와 과거 한때 사랑을 '노력'해보려 했지만 실패하고 지금은 친구로 지내고 있다. 그녀와의 만남은, 그녀와의 불가능한 사랑을 다시금 확인하는 시간이었을 뿐이다. 혼란스런 그에 눈에 누군가가 띈다. 제자인 케니. 우연히 만난 '그'와 충동적인 하룻밤을 보내고자 하는데...


영화는 색감으로 주인공의 심경 변화를 보여준다. 아주 명확하고 선명하게. 우울함이 지배했던 초반의 무채색 색감은 후반부에 생기가 감도는 감도 높은 단도 영상으로 변한다. 무엇을 뜻하는 걸까. ⓒ와인스타인 컴퍼니



영화는 시종일관 우울함이 지배하는 영상을 선보인다. 조지의 심경을 그래도 투영한 듯 무채색이다. 조지가 도무지 살아 있는 인간으로 보이지 않을 정도다. 그날따라 그에게 많은 '살아 있는' 것들이 보여 감상한다. 죽음을 결심한, '살아 있지 않은' 이에게만 보이는 살아 있음의 결정체인가 보다. 그 장면들을 슬로우 모션으로 처리해 살아 있음을 극대화했다. 보는 이에 따라 작위적으로 비춰질 수 있겠다. 


케니가 그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 지는 따로 설명이 불필요하다. 색감을 보면 되니까. 우울함이 지배하는 무채색 영상이 생기가 감도는 감도 높은 단도 영상이 된 것이다. 조지의 얼굴에 미소가 번지고 심지어 '색깔'이라는 게 감돈다. 케니에게도 집에도 마찬가지다. 감독이기 이전에 디자이너 톰 포드의 디자인 철학이 바로 여기에서 발휘된다. '내가 톰 포드요 '하면서. 우린 거기에서 젊은 관능성을 엿볼 수 있다. 


실로 오랜만에 상실을 제대로 느껴보다


2015년 <킹스맨>에서 수트의 진면목을 선보인 바 있는 콜린 퍼스, 그 이전에 2010년 <킹스 스피치>가 있었다. '영국 신사의 수트란 이런 것이다'를 제대로 보여줬다 하겠다. 그런데 그 앞에 2009년 <싱글맨>이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가. 그야말로 세계 최고의 패션 디자이너 톰 포드의 수트를 입은 게 아니겠는가. 그 어떤 영화보다 멋있는, 남자가 봐도 한눈에 반할 수트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싱글맨>이다. 여자가 아닌 남자에게서도 '관능'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상실로 영혼을 잃은 껍데기. 수트는 그 껍데기를 완벽히 커버한다. 그래서 더 돋보이는 면도 있다. '수트 입은 남자란 이런 것이다'가 아닌 '수트란 이런 것이다' ⓒ와인스타인 컴퍼니



역설적으로 상실의 슬픔이 관능을 극대화시킨 것 같다. 모든 걸 내려놓은 채 수트에 의지한 영혼 잃은 껍데기. 껍데기를 완벽하게 커버하는 수트의 미학이다. 물론 모든 걸 가진 이의 수트도 뭐라 말 할 수 없이 멋있지만 수트가 빛을 발 할 때도 있다. 옷이 날개일 때도 있지만, 허름한 옷을 걸쳐도 돋보이는 사람이 있지 않은가. 이 영화는 디자인만이 갖는 것을 극대화 했다. 


우린 사실 상실의 시대에 살고 있지 않다. 이보다 풍요로운 시대가 언제 있었을까 싶은, 그런 시대에 살고 있다. 물론 '군중 속의 고독'처럼 '풍요 속의 빈곤'이 점점 그 세를 불리고 있지만, 상실만큼은 상실 그대로 받아들일 만한 여지가 없다. 의도하지 않아도 곧바로 다른 무엇이 채워지니까. <싱글맨>을 통해 오랜만에 상실을 제대로 느껴봤다. '오랜만'이라고 표현한 건, 기억에서 흐려졌지만 언젠간 그 무엇의 상실을 뼛속 깊이 슬퍼했던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언젠가는 한 번 더 느껴볼 때가 있을까. 비록 치명적일지 몰라도, '내가 인간이구나'라는 걸 제대로 느껴볼 수 있지 않을까.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블로그 이미지

singenv

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서평] <해피엔딩>


<해피엔딩> 표지 ⓒ엔자임헬스



10년도 훌쩍 넘은 것 같다. '웰빙'이라는 거의 모든 곳에서 쓰였던 적이 있다. 단순히 먹고 사는 시대를 지나 잘 먹고 잘 사는 시대에 진입했다는 뜻이기도 했을 것이다. 혹은 오로지 물질적인 풍요와 성공만을 강요하는 시대를 지나 정신적인 풍요와 성공이 삶의 진정한 척도로 부상했다는 뜻이기도 했을 거다. 


웰빙의 뜻은 점차 확대 되었다. 이제는 잘 먹고 잘 사는 문제만이 아닌 '잘 죽는 것'도 웰빙에 포함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게 말하기 시작한지도 10년이 넘은 줄 안다. 일명 '웰다잉'이다. 말이 쉬워 웰다잉이지, 누구도 쉽게 말할 수 있는 개체가 아니었다.  

우리나라에서 웰다잉이 사회적으로 퍼진 건 '고 김수환 추기경' 연명 치료 중단 판결 덕분이다. 2009년 선종한 그는 병세가 악화되기 시작한 2008년 말부터 기계적 치료에 의한 생명 연장을 거부해왔고, 법원은 환자의 연명 치료를 중단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이후 웰다잉과 관련된 중요한 논쟁인, '존엄사' '안락사'에 대한 말들이 오갔다. 


죽음에 조금 더 긍정적으로 접근해본다


'죽음'이라는 단어가 여기저기에서 들려 온다. 시류에 은근히 민감한 출판도 예외는 아니어서, 죽음을 주제로 하는 책이 많이 출간되고 있다. 제목에서 죽음이 물씬 풍기는 <해피엔딩>도 그중 하나다. 영화, 소설에서나 봤음직한 '해피엔딩' 즉, 행복한 죽음이 가능할까 싶다. 


죽음은 인간이 절대적으로 피할 수 없는 것들 중 하나라고 한다. 인간은 살기 위해서 반드시 음식을 섭취해야 하고 반드시 자야 한다. 그리고 반드시 죽는다. 문제는 죽음을 대하는 태도다. 죽음을 생각하면 오싹해지며 한기가 흐르고 온갖 부정적인 생각이 꼬리를 문다. 막연한 두려움이랄까. 


책은 죽음에 조금 더 긍정적으로 접근해보려 한다.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라는 격언이 여기에 해당할까, '어떻게 죽음을 맞이할 것인가'가 중요하다고 말한다. 나아가 '아름다운 죽음이 가능할까'까지 도출해보려 한다. 산증인이 필요하다. 아름다운 죽음을 실천한 이들이 있다면 가능하다 하겠다. 


김수환 추기경이 대표적이다. 그는 죽음에 저항하지 않고 '감사하고 사랑한다'는 말을 남기고 우리 곁을 떠났다. 책에는 그런 죽음들이 나온다. 죽음에 이르러서 화해하고 화합하는 현장. '사랑해요, 고마워요, 미안해요' 차마 하지 못했던 말을 죽음 앞에서 하는 것이다. 또한 죽음 앞에서 비로소 욕심 없이 모든 걸 비울 수 있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죽음이 축복이고, 행복한 죽음이 가능하다. 


죽음을 이야기하지만 결국 삶의 이야기


책을 보면서 내가 죽음 앞에 서게 되었을 때, 내 가족이나 지인이 죽음 앞에 서게 되었을 때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평소에는 생각지 못했지만, 내 가족이나 지인이 죽는 게 더 참지 못할 순간이 될 것 같다. 반면 내가 죽는 건, 너무 두렵지만 심적으로 이전보다 충분히 행복할 수 있을 것 같다. 제대로 된 삶을 살았다고 자부할 수 있다면. 


그렇다. 죽음은 삶의 연장선에 있기 때문에, 삶의 마지막이기 때문에, 죽음과 삶을 따로 떼어낼 수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따로 떼어낸 채 살고 있지만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있는 사람의 얘기를 들어보면 전혀 그렇지 않다. 그들은 죽음 앞에 와서야 비로소 삶을 후회하고 삶을 축복하고 삶을 찬양한다. 제대로 된 삶을 살아야 행복한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 


책은 죽음을 이야기하지만 결국 삶에 대한 이야기다. 어떤 삶을 살았는지가 죽음에 큰 영향을 끼친다는 거다. 그렇다고 괜찮지 않은 삶이 행복한 죽음을 막진 않는다. 누구나 행복한 죽음에 이를 수 있다. 다만, 삶의 '소중함'을 인지하고 정녕 후회 없이 살다가 마지막을 맞이하면 더 행복하지 않을까 싶은 것이다. 제대로 된 삶을 산다기 보다, 삶의 소중함을 아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게 맞지 싶다. 


책에는 행복하지 못한 죽음의 사례가 많이 등장한다. 예기치 않은 갑작스러운 죽음, 억울하기 그지 없는 죽음, 쓸쓸히 혼자 맞이하는 죽음 등. 삶을 돌아보고, 정리하고 죽음을 생각하기가 불가능한 죽음이다. 가족을 비롯해 그 죽음을 그나마 챙겨주고 보살피는 이들이 있어 다행이다. 


최후의 순간에 인간이 인간일 수 있게 하는, 존엄사


일명 '연명치료결정법'이 통과 되어 2018년부터 시행된다. 자세한 사항을 숙지할 필요가 있지만, 자신의 죽음을 자신이 결정하게 된 첫 걸음이다. 사전연명의료의향서가 그것인데, 더 이상 회생의 가능성이 없을 때 생명 연장 혹은 특정 치료 여부에 대한 본인의 의사를 사전에 서류로 작성해 놓는 것이다.  그건 곧 내 죽음을, 내 삶을 내 손으로 맞이하겠다는 표시이다. 


물론 여전히 연명치료와 존엄사에 대한 논란은 거세다. 함부로 말할 수 있는 개체가 아니다. 그러나 그런 인식 자체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의 발로가 아닌가 싶다. 그건 '똥밭에 굴러도 저승보단 이승이 낫다'라는 옛말이 무색하게, 회생불능의 환자에게 고통만을 가해 살게 할 때 할 말은 아닌 것이다. 존엄사를 자살과 동일시 하는 건 '틀린' 생각이다. 존엄사는 최후의 순간에 인간이 인간일 수 있게 하는 방법이다. 


책은 소개한다. 무한긍정 에너지로 마지막을 살다가 간 어느 할머니의 이야기를. 그녀는 살아생전 후회 없이 열심히 즐겁게 살았고, 죽음을 목전에 두고서도 여전히 열심히 즐겁게 '살았다'. 정말 큰 축볼인진데, 그런 '죽음'이 부러운 게 아니라 그런 '삶'이 부럽다. 그녀는 마지막까지 삶을 살았다. 


죽음에 대한 보다 깊이 있고 심오한 걸 원했다. 하지만 죽음 자체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은 상황에서 어찌 훨씬 나아간 고찰이 있을 수 있겠나 싶다. 죽음을 '홍보'하는 것만으로도 그 역할을 다 했다 하겠다. 죽음이 제대로 자리를 찾았으면 하는 마음이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블로그 이미지

singenv

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티스토리 툴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