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리뷰] <번지점프를 하다>


영화 <번지점프를 하다> 포스터. ⓒ눈엔터테인먼트



1983년 여름의 비가 쏟아지던 어느 날, 버스를 기다리고 있던 서인우(이병헌 분)의 우산 속으로 젊은 여인이 달려 들어온다. 첫눈에 반한 게 분명한 인우는 왼쪽 어깨가 젖어가는 줄도 모른 채 멍한 표정이다. 그렇게 헤어지고는 매일 같이 그 자리에서 우산을 들고 기다리는 인우다. 


다시 한 번 어느 날, 학교 교정에서 그녀를 발견한다. 국문학과 서인우와 조소과 안태희(이은주 분)의 만남이 시작된다. 급속도로 친해져 사귀게 된 그들, 여타 커플과 다를 게 없어 보인다. 하지만, 인우가 군대를 가게 되었을 때 태희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들의 관계는 그렇게 끝이 났다. 


17년이 지나 인우는 고등학교 국어 선생님이 되었다. 가정을 꾸리고 딸까지 있는 그인데, 태희를 아직 잊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그가 담임으로 있는 반의 임현빈(여현수 분)이라는 학생이 자꾸 태희를 연상시키는 것이다. 처음에는 그럴 수 있다는 정도로 넘어 갔지만, 너무나도 디테일한 부분까지 계속 보임에 인우는 현빈이 태희임을 알아보는데... 17년 전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 현빈이 태희일까? 


판타지적 장르가 섞인 멜로/로맨스 영화


영화 <번지점프를 하다>의 한 장면. ⓒ눈엔터테인먼트



2000년대가 시작되기 바로 직전까지 <접속> <약속> <8월의 크리스마스> <미술관 옆 동물원> <연풍연가> <내 마음의 풍금> 등의 주옥같은 멜로/로맨스 영화가 쏟아져 나왔다. 그 기세는 2000년대 초반까지 계속되는데, 와중에 정통이 아닌 판타지 장르가 조금 섞인 멜로/로맨스 영화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동감> <시월애> <번지점프를 하다> <클래식> <내 여자친구를 사랑합니다> <인어 공주> 등이 기억에 남는다. 영화 <번지점프를 하다>는 2000년대 초반의 판타지적 장르가 섞인 멜로/로맨스 영화 판도에서 꽤 큰 비중을 차지한다. 이 영화에서 판타지적 장르는 지극히 수단일 뿐이다. 


영화는 1/3을 정말 소소하고 평범한 사랑의 시작을 보여준다. 분명 거기에는 일부러 보여주지 않고 감춘 절절함이 있을 텐데, 아니나 다를까 17년 후를 다룬 후반부에서 하나하나 회상하며 강도를 높여가는 특별하고 본질적인 사랑의 행태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다. <번지점프를 하다>는 '본질'에 관한 영화이다. 거기에 '사랑' 정도를 덧붙일 수 있겠다. 사랑의 모습은 '남자와 여자' '남자와 남자' '인간 대 인간'까지 나아간다.


사랑의 외연 그리고 본질


영화 <번지점프를 하다>의 한 장면. ⓒ눈엔터테인먼트



영화를 처음 보면 특별할 것 없는 초반 1/3 보다 후반 2/3을 눈여겨볼 수밖에 없다. 판타지적 장르를 수단으로 썼듯이, 동성애적 코드도 수단으로 써버리면서까지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있을 것이다. 그 메시지가 2001년 당시에는 꽤 파격적이었고 지금에 와서는 여러 사랑의 정의 중 한 방면의 정석이라 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외연 상 인우가 남학생 현빈에게 마음이 가는 건 당연히 동성애적 끌림이라 볼 수 있다. 그가 태희를 연상시키는 것도 모자라 태희 그 자체라는 확신이 선다 해도 말이다. 다분히 판타지적 설정임에 분명하기 때문인데, 이 부분에서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사랑의 정의가 드러난다. 사랑은 외연이 아닌 본질이라는 것 말이다. 


인우에게 현빈은 현빈이 아닌 태희다. 평생 단 한 사람만을 사랑한다는 그의 마음 속에 영원히 남아 있는 그녀 태희 말이다. '남학생' 현빈은 껍데기일 뿐이라는 등식이 성립됨과 동시에, 그들의 사랑이 아주아주 오래 전부터 이어졌을 거라는 등식도 성립된다. 아주아주 오랜 후에도 계속될 거라는 등식도 역시. 


절벽에서 바다에 떨어지면 기적이 벌어지지 않는 이상 죽고 말지만, 같은 절벽에서 번지점프를 하면 기적이 벌어지지 않는 이상 살아 돌아와 다시 만난다. '본질'이라는 사랑의 정의에 만나는 사람은 반드시 헤어지게 되어 있고 떠난 자는 반드시 돌아오게 되어 있다는 '회자정리 거자필반'의 불교 색체가 덧붙여졌다고 할 수 있겠다. 


인간 대 인간의 사랑


영화 <번지점프를 하다>의 한 장면. ⓒ눈엔터테인먼트



영화가 말하는 '본질'의 사랑의 정의는 태희의 현빈화가 전부는 아니다. 또 다른 차원까지 나아갈 수 있는데, 남자를 사랑한다는 외연과 여자를 사랑한다는 본질적 외연을 넘어서 인간을 사랑하는 본질까지 내다본 것이리라. 인우가 남학생의 모습을 한 태희를 사랑한다는 건, 여자 태희가 아닌 인간 태희 그 자체를 사랑한다는 반증이다.


굳이 등식화 하자면 남자 현빈->여자 태희->인간 태희인데, 그 스스로도 남자 인우, 가장 인우, 동성애자 인우 등의 정체성을 넘어선 인간 인우가 되는 순간이다. 이 영화는 사랑의 정의를 이 정도까지 진척시켰고 이 정도에서 멈췄다. 현빈이 그저 남학생 정도로 나왔으니 망정이지, 동물이나 벌레로 나왔으면 어쨌겠는가. 


결혼하기도 한참 전 지금의 아내랑 막 사귀기 시작했을 때 그녀가 자주 물어봤었다. "나 사실 남자야. 나이도 엄청 많아. 그런데도 나랑 사귈 거야?" 나는 그때마다 "그래. 당연하지."라고 답했다. 그땐 반은 장난이고 반은 진짜일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시간이 흘러 결혼하고 나서 그때를 돌이켜 보면서, 아내가 '나라는 인간을 사랑하는 건지' 시험해본 거라고 말했다. 


흔히 "다음 생애에도 지금의 남편 혹은 배우자와 다시 만날 거나?"라고 묻곤 한다. 그때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반 장난 반 진담으로 "훨씬 예쁘거나 멋있고 훨씬 돈 많은 사람과 만날 거다."라고 말하곤 한다. 그러며 '운명의 상대'를 찾는 것이다. 이 영화는 바로 그 운명의 상대가 다름 아닌 아주 오래 전부터 만나왔던 단 한 사람이고, 그 어떤 모습을 하고 나타나도 그 역시 그 한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다. 


지금 사랑하는 사람과 살고 있는지? 사랑할 수밖에 없는 사람과 살고 있는지? 그 인연의 끈, 그 형용할 수 없이 길고 끝과 끝이 만날 수 있는 비현실적인 확률을 되새기며, 극 중 서인우의 대사를 읊어본다. "이 줄은 세상인데 이 세상 아무 곳에다 작은 바늘 하나를 세우고 하늘에서 아주 작은 밀씨 하나를 뿌렸을 때 그게 그 바늘에 꽃일 확률... 그 계산도 안 되는 확률로 만나는 게 인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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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기획] <모노노케 히메>로 환경을 생각해보다


<모노노케 히메> 포스터. ⓒ월트 디즈니 코리아



북쪽과 동쪽 사이의 어디쯤 에미시 일족이 사는 마을에 재앙신이 출물한다. 차기 족장 '아시타카'는 마을을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활을 날려 물리치지만 오른팔에 재앙신의 각인이 새겨져 죽을 운명에 처한다. 마을의 무녀 히이님으로부터 서쪽에서 불길한 일이 일어나고 있고 재앙신의 출몰도 그곳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라는 말을 듣고 아시타카는 서쪽으로 여정을 떠난다. 중간에 만나게 된 지코보, 그는 지코보에게 사정을 털어놓는데 지코보는 그에게 서쪽 끝에 있는 '사슴신'과 신들의 숲 이야기를 해준다. 


한편, 타타라바 마을은 '에보시'의 탁월한 지도 아래 여자들은 철을 생산하고 남자들은 그 철로 쌀을 거래해 오는 등의 체계로 작지만 탄탄하게 꾸려나가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더 안정되고 지속적이고 잘 돌아가는 마을을 위해 근처 숲뿐만 아니라 사슴신이 사는 신들의 숲까지 파괴하고자 한다. 아시타카에게 저주를 내린 재앙신도 사실 에보시의 총에 맞아 죽어간 멧돼지신이었던 것이다. 아시타카는 이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한다. 여자들뿐 아니라 나병 환자한테도 차별없이 대하는 마을이 아닌가. 


모노노케 히메 '산'은 들개신과 함께 숲에서 살아가며 인간으로부터 숲을 지키기 위해 타타라바 마을의 에보시를 죽이려 한다. 그녀는 아시타카와도 얽히는데, 아시타카가 그녀의 목숨을 구해주기도 하였거니와 어쨌든 아시타카는 타타라바 마을로 대표되는 다분히 '인간' 편은 아닌 것이다. 물론 산도 인간인 만큼 '자연' 그 자체라고 할 순 없다. 아시타카는 인간과 자연의 공존을 꿈꾼다. 과연 그의 바람은 이뤄질까. 


에코니즘과 페미니즘 사이


<모노노케 히메>의 한 장면. ⓒ월트 디즈니 코리아



일본 애니메이션계에 영원히 남을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의 1997년작 <모노노케 히메>, 일본 현지에서 당대 최고의 흥행과 비평을 거머쥔 명작 중의 명작이다. 자그마치 1984년작인 <바람의 계곡 나우시카>와 더불어 미야자키 하야오의 에코니즘(자연주의) 대표작이라 할 만한 이 작품은 일본 신화에서 모티브를 따온 시대극이다. 


일본 특유의 원령 신화, 일본의 원주민 아이누 신화와 북방계 샤머니즘 신화 등이 혼합된 복합적 일본 신화 체계를 가져다 놓았는데, 그래서 <모노노케 히메>를 통해 일본 신화를 들여다보는 해석 작업도 활발했다. 하지만 미야자키 하야오를 영화의 중심에 놓는다면, 일본 신화보단 에코니즘이 더 정면에 나와야 하지 않나 싶다. 


한편, 에코니즘과 더불어 영화가 추구하는 큰 틀은 페미니즘이다. 전 세계적으로 미투·위드유 운동이 활발한 와중에 유독 일본에서만 잘 되지 않고 있다지 않은가. 그런 일본의 중세시대에 여자는 그저 남자의 소유물일 뿐이었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그런 모습이나 개념을 찾아볼 수 없다. 


타타라바 마을을 움직이는 핵심 인사 에보시는 물론, 핵심 물품인 철을 만드는 이들 모두 여자이다. 남자들도 물론 그 철을 가지고 쌀로 거래를 해오고 전쟁에도 참여하는 등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지만, 여자인 에보시가 진두지휘를 하고 여자들도 전쟁에 참여한다. '자연'의 입장에서 본 '인간'을 상징하는 타타라바 마을을 무작정 매도할 수도 무작정 적대시할 수 없게 만든다. 


에코니즘


<모노노케 히메>의 한 장면. ⓒ월트 디즈니 코리아



그 와중에, 그 사이에 에코니즘이 있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이 영화를 통해 에코페미니즘을 통합해 말하고자 하는 것이지만, 영화 속에서 페미니즘을 행하는 인간들이 정작 에코니즘은 적대시하는 것이다. 아시타카는 이 둘의 공존을 홀로 외롭게 외치고 있고 말이다. 사실 이 영화에서 말하고자 하는 에코니즘은 큰 개념이 아니다. 그렇다고 '자연을 사랑하자' 따위의 단순한 개념도 아니다. 


우선, 자연(신)은 인간의 인간만을 위한 이기심 때문에 터전을 잃었다. 그래서 터전을 다시 찾기 위해 인간과의 전쟁을 이어간다. 설령 그 전쟁이 모두를 파멸로 이끄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이에 인간도 손놓고 있을 순 없다. 그들도 자신의 터전을 지키기 위한 전쟁을 치른다. 


이 폭력의 순환은 인간의 손에서 시작되었다. 지금 우리네 지구를 보자. 인간이 지구상에 출현하기 전, 아니 인간이 농경혁명으로 정착하여 모든 것을 바꾸기 시작하기 전과 비교해 살 만한 곳이 되었는가? 그렇다. 인간의 입장에서 보면, 인간의 터전이 확립되고 인간을 위한 문명이 들어서고 인간답게 살아가기 위한 모든 것이 정립되고 있다.


반면, 자연의 입장에서 보면 어떤가. 인간에게 터전을 빼앗겨 왔고 빼앗기고 있으며 빼앗길 예정이다. 수많은 동식물들이 멸종되고 있으며 '자연환경'이라는 말은 옛말, 촌스러운 말이 되었다. 인간과 자연의 공존? 공생? 아니, 전쟁을 하면 공평하겠지만 이건 일방적인 학살 수준이다. 


진정한 에코니즘


<모노노케 히메>의 한 장면. ⓒ월트 디즈니 코리아



<모노노케 히메>에 나오는 사슴신은 얼핏 인간인 아닌 자연의 편인 것 같다. 하지만 그는 누구의 편도 아니다. 그에겐 회생과 죽음의 능력이 공존하는데, 이른바 '대자연'이라 칭할 수 있을 것 같다. 천재지변이 인간에게만 피해를 주는 게 아닌 자연에게도 큰 피해를 주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이 대자연이 건네는 회생과 죽음의 섭리가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답이라 해도 무방하다. 인간과 자연, 각자의 절대적인 사연 때문에 절대 물러설 수 없다. 그것이야말로, 이치라면 이치이다.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더 이상의 논의 따윈 없다. 인정 후에, 함께 살 방도를 찾아야 한다는 개념 탑재가 수순인 것이다. 그 자체로, 인간에 의해 시작된 전쟁이기에 인간에게 유리하다 해도 어쩔 수 없다. 


그렇기에, '자연을 사랑하자' '자연을 원래대로 돌려놓자'는 일차원적인 개념도 안 된다. 그건 다분히 인간의 입장에서, 인간 위주의 생각이다. 여기엔, 총체적이고 통합적인 자연환경의 입장과 개념과 생각이 필요하다. 주체가 '인간' 또는 '자연'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서로 양보할 건 양보하고 함께 할 건 함께해야 한다. 


문제는, 인간은 자연이라는 게 입장이 없고 생각이란 걸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는 것에 있다. 그래서 자연의 입장을 추측하고 재단한 뒤 실행에 옮겨버린다. 그 자체로 또 하나의 인간 입장일 뿐이다. 사실 일반적인 에코니즘은 여기서 한 발자국도 벗어날 수 없다. 그런 면에서 <모노노케 히메>는 탁월하다. 


만화로서만 표현할 수 있을 테고, 만화이기에 오히려 유치하지 않게 보일 수 있을 텐데, 인간의 입장과 생각만큼 자연의 입장과 생각을 내보이고 있다. 멧돼지와 들개가 말을 하고 또 신이기도 한, 황당하고 낯설지만 그러하기에 오히려 매우 설득력 있는 진정한 에코니즘의 방증이라 하겠다. 


에코니즘에 대해 말할 땐 더 이상 '우린' 또는 '인간'으로 시작하는 구호를 내지 말자. 물론 그것이 어렵다는 걸 알기에, 거기에 최소한의 의미 부여는 하되 절대적인 의미 부여는 하지 말자. 이 대자연에는 우리 인간만이 있는 게 아니지 않은가. 자연도 있다. 우선, 그 사실을 인지하는 것부터 시작하자. 인간과 자연의 존재. 그리고 인간과 자연의 공존으로 나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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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랩 걸>

 

 

<랩 걸> 표지 ⓒ알마


 

'과학책'의 진화가 계속되고 있다. 본래 과학책은 잘 읽히지 않았다. 인류 발전에 없어서는 안 됨에도 불구하고 어렵고 재미없는 과학을 다룬 책이라면 역시 어렵고 재미없다고 생각하는 게 당연한 거 아닌가. 그래서 누군가가 대중화에 앞장섰다. 칼 세이건, 스티븐 제이 굴드 등이 과학의 대중화에 앞장섰다면, 올리버 색스 등은 의학의 대중화에 앞장섰다고 할 수 있겠다.

 

앞서 언급한 세 명이 모두 세상을 떠난 지금에 와서는, 알파고의 출현이나 4차 산업 혁명의 도래 등의 트렌드에 맞춰 과학의 대중화가 상당히 진척된 느낌이다. 그 총체적 접근법은 역시 책이다. '과학책' 말이다. 과학 자체를 대중의 입맛에 맞게 소개하기도 하고, 과학자를 색다르게 대중에게 소개하기도 하며, 때론 그저 과학자가 썼을 뿐 과학과 연결된 게 없는 것 같은 이야기를 건네기도 한다.

 

미국의 저명한 여성 식물학자이자 교수 호프 자런의 <랩 걸>(알마)은 과학자가 썼을 뿐 얼핏 과학과 연결된 게 없는 것 같은 이야기를 중구난방 건네는 책이다. 식물에 대한 다층적이고 다방면인 단편, 종종 드러내는 내외면의 깊숙한 이야기, 그리고 과학자로서 치열하게 사투하는 자전적 에세이까지. 저자는 치밀하게 구성한듯, 마음대로 느슨하게 구성한듯, 크게 세 이야기들을 오가며 식물, 과학, 사랑, 인간을 말한다.

 

식물에서 과학으로

 

저자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나무는 은청가문비라고 한다. 그 나무는 모질고 긴 겨울 내내 초록색을 자랑하며 우뚝 서서 푸른 빛을 발한다. 팔십 년을 넘게 살고는 어느 해 치명적인 실수를 범해 죽고 만다. 때아닌 5월의 폭설 때문이었다. 저자는 그때 비로소 나무가 살아 있는 생명이라는 것을 완전히 이해하게 되었다고 한다. 나무는 삶을 살고 있었다. 사람의 삶과 비슷하면서도 다르게. 고비를 넘겨 최고의 시간을 누리고 시간에 따라 변화했다. 


나무에게서 과학의 정수를 발견했다. 과학은 가르쳐주었다. 모든 것이 처음 추측하는 것보다 복잡하다는 것, 무엇을 발견하는 데서 행복을 느끼는 것이야말로 아름다운 인생을 위한 레시피라는 것, 한때 벌어졌거나 존재했지만 이제 존재하지 않는 모든 중요한 것을 주의 깊게 적어두는 것이야말로 망각에 대한 유일한 방어라는 것을.


사람은 식물과 같다. 빛을 향해 자라난다는 의미에서 말이다. 저자가 과학을 선택한 것은 과학이 저자가 필요로 하는 것을 줄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가장 기본적인 의미의 집, 다시 말해 안전함을 느끼는 장소를 저자에게 제공해준 것이 다름 아닌 과학이었다. 저자의 식물을 향한 관심이 곧 저자의 과학에 대한 깨달음과 이해로 나아간 것이다. 그녀는 식물학자가 될 운명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남자 아닌 여자였다. 그녀는 아빠와 같아지기를 절실히 원하기는 했지만 동시에 극복할 수 없는 큰 산과 같은 엄마의 연장이어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대학 생활은 문학 전공으로 시작했지만 얼마 가지 않아 과학이야말로 진정 속한 분야라는 것을 깨달았다. 머지 않아 과학계에 만연한 성차별을 받게 될 운명. 


과학계 내 성차별은 복잡하고 다양한 요소로 이루어져 있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고 한다. 하지만 저자가 경험한 바에 따르면 성차별은 굉장히 단순하다. 그건 "저 여자가? 그럴 리가."와 같이 지금의 네가 절대 진짜 너일 리 없다는 말을 끊임없이 듣고, 그 경험이 축적되어 짓누르는 무거운 짐이 되는 것이다. 


인간에서 사랑으로


책은, 인간과 사랑에 대한 심오하지 않은 에세이적 고찰, 그래서 훨씬 마음에 와 닿는 고찰로 나아간다. 거의 1년 365일 실험실에 틀어박혀 생활하는 그녀에게도 평생 친구가 생기고, 또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갖는다. 평생 친구는 다름 아닌 빌, 함께 실험실을 꾸려가는 동료이기도 하다. 


빌은 오른손 일부가 없는 장애를 가지고 있기도 하다. 졸업무도회도 가본 적 없다는 그, 저자와 함께 액슬하이버그 섬에 도착해 연구를 할 때 아무도 없는 그곳에서 춤을 추다. 저자는 빌의 바로 앞에 앉아 고개를 쳐들고 그를 바라본다. 빌이 지금 하고 있는 일, 빌이라는 인간, 그 순간의 모든 것을 똑바로 목격하는 증인으로서. 


저자는 야외에서 간단하게 피크닉하는 자리에서 클린트를 만난다. 그들은 사랑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사랑하게 되었고, 서로 사랑하기 위해 노력하지도 희생하지도 않았다. 사랑은 너무 쉬웠고 달콤했다. 인간으로서 가장 행복한 때가 아닐까. 머지 않아 저자는 사랑의 결정체, 임신을 한다. 하지만 임신은 그녀의 일생에서 가장 힘든 일이었다. 그녀는 조울증을 앓았는데 당연히 약을 먹을 수 없었다. 의사와 간호사들은 그녀의 조울증을 설명할 수도 해결할 수도 없었고, 그저 함께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임신 기간 동안 여러 어려움을 겪었음에도 정상적이고 건강한 분만을 했다. 그녀는 아이의 어머니가 아닌 아버지가 될 것을 결심한다. 그게 얼마나 이상한 생각이라는 걸 생각하지 않은 채 그를 사랑할 것이고, 그도 그녀를 사랑할 것이고, 모든 게 괜찮을 거라 생각한다. 훗날 그녀는 아이의 엄마라고 말할 수 있는 날이 온다. 


그녀는 아들이 태어나기 전에는 아이를 사랑할 수 있을까 걱정했고, 태어난 후에는 그녀의 사랑이 아이가 이해하기에 너무 큰 게 아닐까 걱정한다고 한다. 그리고 비로소 깨닫는다. 아들이야말로 그녀가 기다리는 줄도 모르고 기다렸던 기다림의 끝이라는 것, 그 아이는 불가능한 동시에 불가피했다는 것, 누군가의 엄마가 될 단 한 번의 기회가 한 번 그녀에게 주어졌다는 것을 말이다. 


모든 게 과학이고 과학의 눈으로 보면서도 과학은 일이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인간은 빛을 향해 자라난다는 점에서 식물과 같지만, 식물은 중대하고도 기초적인 면에서 인간과 같지 않다. 사랑은, "널 사랑해"라는 말을 어떻게 할지는 모르지만 행동으로 어떻게 보여줄지는 아는 것과 같다. 형체가 없어 만질 수는 없지만 항상 함께 있다는 걸 믿고 느낄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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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오직 사랑뿐>


영화 <오직 사랑뿐> 포스터. ⓒ팝엔터테인먼트



러브스토리는 인간 역사에서 만고불변의 중심축이다. 당연히 인간이 만든 대부분의 콘텐츠에서도 가장 많이 다뤄진다. 심지어 인간을 만들었다는 신들의 이야기인 신화에서도 단연 중심이 되는 게 다름 아닌 사랑인 것이다. 누구나 한 번쯤은 사랑에 울고, 누구나 한 번쯤은 사랑에 웃는, 그것이 바로 사랑 아니겠는가. 


영국 최초 개봉 2년여만에 한국에 소개되는 영화 <오직 사랑뿐>은 사랑 하나로 모든 걸 헤쳐나가는 두 남녀의 실화를 다루었다. 지금으로부터 70년 전, 전쟁의 시대는 끝났지만 차별의 시대는 여전한 그때 흑인 남자와 백인 여자가 사랑에 빠졌다. 문제는, 흑인 남자는 한 나라의 대통령이 되고 백인 여자는 퍼스트 레이디가 된다는 것. 


영화는 달달하지만 때론 끔찍한 사랑의 모습만으로 스크린을 채우진 않는다. 대신 두 사람의 꿋꿋한 사랑으로 수많은 갈등을 헤쳐나가는 모습이 주를 이룬다. 사실 그들이 사랑하는 것 자체가 그 시대에서는 '위험'과 '위대함'이 수반되는 행위였다. 그래서 그들의 사랑을 지금에 와서 다시 들여다보는 건 사랑이라는 식상함 이상의 의미가 있는 것이다. 사랑과 맞물리는 시대를 엿보는 것. 


사랑 하나로 모든 걸 헤쳐나가다


영화 <오직 사랑뿐>의 한 장면. ⓒ팝엔터테인먼트



1947년 전후의 영국, 세레체 카마(데이빗 오예로워 분)와 루스 윌리엄스(로자먼드 파이크 분)는 어느 댄스파티에서 우연히 만나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그들은 흑인과 백인, 사방에서 보는 시선이 곱지 않다. 더욱이 세레체는 당시 영국보호령이었던 베추아날란드의 왕자, 조국으로 돌아가야 한다. 루스는 세레체의 프로포즈를 받아들인다. 


그들의 사랑은 이제 막 시작되었지만, 시련 또한 시작된다. 인종분리정책을 앞세운 영국, 베추아날란드를 호시탐탐 노리는 남아프리카연방, 그리고 세레체 카마의 삼촌 즉, 베추아날란드까지. 전 세계가 그들의 사랑을 반대하는 것이나 다름 없었다. 그래도 그들이 가야할 곳은, 정착해야 할 곳은 영국이 아닌 베추아날란드. 


그들이 넘어야 할 산은 너무 많았다. 삼촌을 비롯한 가족, 베추아날란드 국민, 영국과 남아프리카연방, 언론, 루스에게는 생소하기 짝이 없는 아프리카까지. 오직 사랑 하나로 헤쳐나가기엔 너무나도 험했지만, 그들은 그야말로 오직 사랑 하나로 모든 걸 헤쳐나간다. 사랑이 삶이 되고 삶이 사상이 되고 사상이 세상이 되는 순간을 목격한다. 


한편으론 정치적, 한편으론 로맨틱·드라마틱


영화 <오직 사랑뿐>의 한 장면. ⓒ팝엔터테인먼트



영화는 멜로와 드라마와 다큐멘터리를 오간다. <셀마>에서 위대한 마틴 루터 킹 목사로 열연했던 데이빗 오예로워가 이성과 감성을 울리는 연설과 한없이 달달한 눈빛으로 또 다른 위대함을 선보였고, <나를 찾아줘>에서 그야말로 무서운 아내로 열연했던 로자먼드 파이크가 한없이 여려 보이지만 한없이 강한 아프리카 최초의 백인 퍼스트 레이디의 파란만장함을 선보였다. 


한국 개봉 제목인 <오직 사랑뿐>이 멜로에 중점을 두었다면, 원제인 <A United Kingdom>은 드라마와 다큐멘터리에 중점을 두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영화의 중심에는 두 사람의 절절한 사랑이 위치하지만, 그 이면에 복잡하기 그지 없는 국내외 정치 정세가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종국에 말하고자 하는 건 '베추아날란드'라는 나라가 아닌가. 영화는 이 두 마리 혹은 수십 마리 토끼를 한 번에 잡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느낌이다. 


그건 세레체와 루스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그들의 개인적 사랑과 나라의 공인적 독립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고자 하기 때문이다. 폭압적 시대를 빗겨가려는 또는 정면으로 돌파하려는 그들의 선택들이 서로 떼려야 뗄 수 없게 맞물려 있는 건 참으로 정치적이지만 한편으론 한없이 로맨틱하고 드라마틱하다. 


세계사적 흐름과 내부 및 개인의 선택


영화 <오직 사랑뿐>의 한 장면. ⓒ팝엔터테인먼트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들의 이야기 또한 역사의 한 부분, 역사를 들여다봄에 있어 중요한 건 세계사적 흐름과 내부 및 개인의 선택을 모두 아우르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 영화는 꽤나 탁월한 조망을 보여준다. '사랑'으로 대표되는 멜로를 끝까지 놓지 않은 채 그에 관한 다양한 목소리를 촘촘히 채워나가는 것이다. 


나중에 보츠와나 공화국이 되는 베추아날란드의 면면, 보츠와나 공화국 초대 대통령과 초대 퍼스트 레이디가 되는 세레체와 루스의 면면, 거기에 영국 내부에서도 격렬히 또는 점잖게 오가는 정치적·인도적 차원의 입장에 따른 공방까지. 영화는 전체적으로 차분한 와중에 격정을 토로하고 감성적인 와중에 대단한 이성을 구축하는 한 인간, 나아가 한 나라의 모습 그 자체를 그려내는 것 같다. 


결국 돌고 돌아 사랑이다. 다시 생각해봐도 사랑인 것 같다. 세레체와 루스였기에 그 모든 것이 그들 앞을 가로막았지만, 세레체와 루스가 아니었다면 그 모든 것이 가능했을까. 이 점이 이 영화를 결코 가볍게만 볼 수 없으면서도, 일면 '세기의 로맨스'처럼 가십거리로 봐도 나름대로 의미를 지니는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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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에 몰아보기 딱 좋은 드라마] <하얀거탑>


명작 드라마 <하얀거탑>. ⓒmbc



2000년대 들어서 한국 드라마는 '전형적인 캐릭터', '개연성이 무시된 이야기', '남녀 주인공의 천편일률적인 짝짓기 놀음' 등으로 점철되어 시청자들의 외면을 받아왔다. '시간 때우기'로 전락해버린 것이다. 그걸 타파하기 위해선 '리얼한 직업 세계의 생생한 현장감'과 '살아있는 인간 이야기' 조합에 따른 드라마 패러다임 재판이 필요하다. 


드라마 <하얀거탑>은 2007년 새해 벽두에 드라마 패러다임을 바꾸고자 하는 거창하면서도 명백한 기획의도를 가지고 시작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의 주제로 수렴될 이 명작의 기획의도와 방향은 돌이켜보면 참으로 대단한 도전이고 자기확신에 찬 포부였다. 한국 드라마계의 새로운 기준이자 하나의 혁명과 다름아니었다고 본다. 


물론, 10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방송 3사의 드라마는 <하얀거탑>이 확언한, 시청자들이 외면하는 '시간 때우기'용이 대부분이다. 거기에 옳고 그름의 잣대를 댈 수는 없지만, '드라마'라는 생명체의 시선에서 보면 그른 게 확실하다. 10년 사이에 방송 3사가 아닌 종편과 케이블 채널들이 수없이 생기며 드라마 또한 다양화가 실시되어 <하얀거탑>이 바꾼 드라마의 패러다임을 수용하고 있는 것 같아 한편 다행인 마음도 든다. 


이 드라마는 빈틈과 군더더기 따위는 찾아볼 수 없는 스피디한 전개, 치밀한 복선과 파격적 임기응변이 함께 하는 다양한 장르의 향연, 현실적이고 인간적이며 입체적이기까지 한 캐릭터와 자못 드라마틱하고 한편 비인간적이라고까지 할 수 있는 캐릭터들의 조화 등이 시작부터 끝까지 유기적으로 맞물려 눈을 뗄 수 없게 만들 것이다. 그야말로 한번에 몰아볼 수 있는, 몰아보기에 용의한 드라마라 아니할 수 없다. 


편, MBC 사장이 교체됨과 동시에 드라마의 혁신을 위하여 시간이 필요하던 차에 한국 드라마계 혁신의 대명사 <하얀거탑>을 UHD로 다시 만날 기회를 얻었다. 지난 1월 22일부터 주중 미니시리즈가 시작될 3월초까지 매주 월~목 10시에 만나볼 수 있다. 여러모로 이번 설 연휴가 <하얀거탑> 몰아보기에 적합한 때가 아닐까 싶다. 


인간군상의 집합체 


인간군상의 집합체. <하얀거탑>의 한 장면. ⓒmbc



<하얀거탑>은 온갖 인간군상들의 집합체이다. 이 드라마를 '야망에 불타는 한 천재 외과의의 질주와 파멸'이라 정리해도 될 만큼, 김명민이 분한 장준혁은 지극히 핵심적 인물이다. 그는 흙수저 출신으로 오로지 실력 하나로 국내 굴지의 대학병원 외과 부교수 자리에 올랐거니와 간담췌 분야의 세계적 실력자로 군림하고 있다. 하지만 그에겐 더 큰 야망이 있으니, 일단 외과 과장이 되는 것이다. 그는 끝없는 질주를 시작한다. 


장준혁과는 학생일 때 과에서 1, 2등을 다툴 정도로 수재이지만 정반대의 삶의 기조를 지니고 있는 소화기내과의 최도영(이선균 분) 부교수가 있다. 그는 형제 모두가 줄줄이 의사로 있는 의사 집안 출신으로 오로지 환자를 생각할 뿐 자리에 운운하거나 권력에의 의지 또는 야망 따위는 없다. 장준혁에 비해 덜 인간적이고 덜 입체적인 인물이지만, 장준혁의 인물상을 부각시키는 데 탁월한 역할을 한다. 


한편, 가장 현실적이고 가장 입체적이며 동시에 가장 드라마틱한 인물이 있다. 일명 '고매한 성품의 소유자'이자 4대째 의사로 있는 이주완(이정길 분) 외과 과장. 정년퇴임을 앞두고 '휴머니즘이 없는' 장준혁이를 10년 동안 자신을 모셨음에도 후계자로 두지 않으려 한다. 하지만 그야말로 누구보다 위선적이고 비열하기 짝이 없는 인물이기도 하다. 이 세상의 중심이 자신이어야 하는 것이다. 


이밖에도 외과 과장 이주완의 딸이지만 자신의 위치 같은 건 생각 않고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고 하는 마음과 정신의 소유자 이윤진, 돈이라면 모든 걸 좌지우지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장준혁의 장인어른 민충식 원장, 겉으로는 명분을 내세우고 속으로는 철저하게 이해득실을 따지는 진료 부원장이자 소화기 내과 과장 우용길, 절대 타협 불가의 대쪽 같은 성격의 소유자 병리학과 석좌교수 오경환, 장준혁 말이라면 불에라도 뛰어들 외과 의국장 박건하, 장준혁과 비슷한 환경에서 자라났지만 절대 장준혁처럼 될 수 없는 전임의 염동일 등이 드라마를 탄탄하게 채운다. 


이 드라마에 몰입하게 되는 이유


이 드라마에 몰입하게 되는 이유. <하얀거탑>의 한 장면. ⓒmbc



이 드라마는 몇 번을 봐도 혼란을 불러 일으킨다. 나는 이중에 누구인가, 또는 누구와 맞대응 되겠는가. 말하기 부끄럽지만 그나마 겉과 속이 다른 이주완 과장 또는 비슷한 맥락에서 겉으로는 명분을 내세우지만 속으로는 이해득실을 따지는 우용길 부원장에 가장 가깝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과 함께, 다른 누군가에게 감정을 이입하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그 인물은 볼 때마다 바뀌고, 상황이 바뀜에 따라 역시 바뀐다. 


그게 이 드라마에 가장 큰 장점이라 할 수 있겠는데, 아무래도 장준혁에게 감정을 이입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가 외과 과장이 되는 험난한 길을 거쳐, 치명적이면서 필연적인 실수로 기나긴 법정 공방을 치르고, 와중에 많은 신호가 오지만서도 무시해버린 결과 돌이킬 수 없는 병 때문에 죽음으로 치닫게 되는... 그의 너무도 치열한 삶 앞에서 고개가 숙여지면서도 한숨이 나오는 건 '인생무상'이라는 말 때문이겠다. 


피도 눈물도 없이 모든 걸 뒤로 하고 오로지 앞과 위만 보고 질주하는 것 같은 장준혁이지만, 그에겐 이 세상 누구보다 중요한 어머니가 계시고 속 깊은 모든 얘기를 건네고 위로 받을 수 있는 애인이 있으며 때론 옆도 뒤도 돌아볼 수 있게 만드는 친구 최도영이 있다. 하지만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싶게 만드는 비극적 종말이다. 


그래서 얼핏 보면 선(최도영 등)과 악(장준혁 등)의 대립과 그에 따른 권선징악의 수순이 그려지고 있는 것 같지만, 애초에 선과 악이 명확하게 구분되어 있는지조차 의문스럽게 만드는 대목과 인물들이 매순간 우리를 찾아온다. 더군다나 장준혁이 법정 공방을 치르게 될 때 보란듯이 합심해 정의 편이 아닌 장준혁 편을 드는 대학병원 의사들의 꼬락서니는 더더욱 그런 생각을 들게 만든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이란 무엇인가. <하얀거탑>의 한 장면. ⓒmbc



인생무상, 선과 악의 모호함과 그에 따른 혼란 등은 '인간이란 무엇인가'로의 주제로 수렴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다. 이는 자연스럽게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로 넘어간다. 한두 번 정도 보는 걸로는 절대 답을 낼 수 없는 만큼, 몇 번이고 그것도 한번에 몰아봐야 약간의 답길이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 


이런 생각들, '인간'이라는 한 단어로 이 드라마의 궁극적 물음을 요약할 수 있게 되었을 때 비로소 <하얀거탑>의 진정학 명작화가 시행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 전까지 <하얀거탑>은 그저 굉장히 흥미진진하고 잘 만든 드라마일 뿐이다. 그 이후 <하얀거탑>은 드라마 따위를 뛰어넘는 시대불문 '명작' 콘텐츠가 된다. 


아직 한 번도 접하지 못한 분들께 드리는 경고(?)는, 이 드라마가 결코 의학 드라마가 아니라는 점이다. 여기서 의학은 정치, 법정 공방의 수단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거의 모든 등장 인물이 의사인 이상 의사 세계의 단면을 기가 막히게 그려내고 있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하얀거탑>은 의사 세계도 역시 사람 사는 세계라고 말하며 의사들을 하야디 하얀 순백의 탑에서 지상으로 끌어내린다. 적어도 이 드라마에서는 더 이상 그들만의 세상이 아닌 것이다. <하얀거탑>의 또 다른 위대한 점이 바로 여기에 있고, 우리가 시대를 뛰어넘는 공감을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으며, 드라마로서 보여줄 수 있는 최대치를 뛰어넘거나 본연의 임무를 다한 모습이 여기에 있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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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웜 바디스>


2010년을 전후해 전성 시대를 열었던 패러노멀 로맨스의 마지막 흥행작이라 할 수 있는 <웜 바디스>. ⓒCJ엔터테인먼트




트와일라잇 시리즈가 시작이었던 것 같다. 판타지적인 캐릭터가 인간과 사랑에 빠지는 '패러노멀 로맨스'의 현대 시작점이 말이다. 이후 <렛 미 인> <늑대소년> <웜 바디스> 등이 잇달아 우리를 찾아왔다. 내년 초에는 길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최고 기대작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도 찾아올 예정이다. 거의 30여 년 전에 전 세계를 강타한 팀 버튼의 <가위손>도 생각난다. 


'결국 사랑이다'라고 말하는 이 영화들, 각종 장르의 탈을 쓴 로맨스 영화들이라고 할 수 있다. 더불어 그 대상이 어른도 아닌 어린이도 아닌 청소년들이다. 영화 산업의 변화와 함께 시대의 흐름까지 엿볼 수 있다. 적어도 이 영화들이 한창 나왔던 2010년 전후는 10대들의 시대였다는 것. 


<웜 바디스>는 패러노멀 로맨스 전성 시대의 사실상 마지막 흥행작이다. 흥행작이면서 괜찮은 평을 얻었던 작품이기도 하고 말이다. 현대적 공포물의 대명사격인 좀비가 인간과 사랑에 빠져 로맨스를 펼친다는 설정에 더 이상 어떤 패러노멀 로맨스가 나설 수 있겠는가. 물론 무수한 영화들이 나 몰래 찾아왔다가 스쳐지나 갔을 것이다. 


좀비 1인칭 시점의 파격


좀비 1인칭 시점이라는 파격을 훌륭히 소화한다. ⓒCJ엔터테인먼트



자기가 누구였는지 알 길이 없는 좀비 R(니콜라스 홀트 분)은 좀비 뿐인 공항에서 생활한다. 그의 집은 멈춰버린 비행기 안, 그래도 전(前) 인간다운 생활을 영위하고 있는 듯하다. 좀비들이 하는 생각은 배고프다는 생각, 하는 일은 인간 사냥이다. 그날도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좀비 사냥을 온 인간들과 대면한다. 


치열한 싸움 끝에 R은 어느 젊은 남자를 죽이고 뇌를 먹는다.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의 뇌를 먹을 때면 그 인간의 기억이 고스란히 전해져와 좀비인 자신도 한때 인간이었다는 걸 잊지 않게 한다. 그러곤 남아 있는 젊은 여자에게로 향하는 R, 하필 그 여자가 방금 먹은 뇌의 주인의 여자친구 줄리(테레사 팔머 분)가 아닌가. 


그 때문인지, 아니면 잠깐 인간의 기억이 들어왔을 때 그녀에게 반한 건지 R은 줄리를 죽이는 대신 보호한다. 피냄새로 인간과 좀비를 판별하는 좀비의 특성을 이용해, 그녀에게 죽은 인간의 피를 묻힌 것이다. R과 줄리는 비행기 안에서 기거하기 시작한다. R은 인간의 감성이 완전히 없어진 것 같진 않고 말도 더듬더듬 할 줄 안다. 무엇보다 줄리를 아끼고 사랑하게 된 것 같다. 그들의 앞날이 예견되기에 과정이 궁금하다. 


영화는 거의 좀비 R의 1인칭 시점으로 진행된다. 기본적으로 죽은 인간이기 때문에 생각 같은 걸 하는 게 말이 안 되지만, 이미 그런 걸 포함한 여러 개연성은 포기한 채 시작한 영화이기에 그런 영화라는 걸 익히 잘 알고 있기에 코믹하고 사랑스럽게 다가올 뿐이다. '이게 말이 돼?'라고 묻는 건 의미없는 일이다. 


좀비의 인간 되기


좀비의 인간 되기 프로젝트라는 파격도 역시 훌륭히 소화한다. ⓒCJ엔터테인먼트



좀비 대 인간의 구도, 좀비 콘텐츠의 시작부터 절대적으로 지켜져야 할 선이다. 좀비한테 물려 좀비가 되거나, 아예 좀비조차 되지 못하고 죽거나. 결국 인간으로서 계속 살아가기 위한 투쟁인 것이다. 좀비는 어떨까. 좀비라고 좀비가 되고 싶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무래도 다시 인간이 되길 바라고 있지 않을까. 


이 영화의 판타지적 로맨스의 이면에는 좀비의 인간 되기 프로젝트가 있다. 역으로 그 프로젝트의 필수적 요소가 다름 아닌 로맨스인 것이다. 그렇게 죽어버린 심장이 다시 뛰고 점점 인간이 되어가는 좀비들이다. 휴머니즘으로 넘어가는 건 자연스러운 수순이리라. 그럴 때면 당연하게도 공공의 적이 있어야 한다. 


<웜 바디스>에도 등장한다, 공공의 적이자 궁극의 적. 그들은 인간의 형체가 아닌 뼈의 형태만을 가진, 인간은 물론 같은 좀비들한테도 무서운 존재인 '보니'들이다. 그들이야말로 인간의 적인 건 물론, 인간이 되고자 하는 좀비들의 적이다. 휴머니즘의 가장 큰 걸림돌. 그들이 없으면 휴머니즘의 의미와 목적과 연대가 옅어지지만, 그들이 없어야만 휴머니즘으로의 길을 갈 수 있다. 


인간이 되는 길은 어려운 듯하면서도 쉽고 험난한 듯하면서도 평탄하다. 제목 그대로 몸에 피가 돌고 심장이 뛰어 체온을 유지하게 되면 되는 것이다. 인간으로선 살아가는 데 '당연한' 이치, 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어렵고 신비하기까지 한 일인지는 부연하지 않아도 될 듯하다. 거기엔 육체적인 필요뿐 아니라 정신적 필요도 있어야 한다. 


가장 애틋하고 절실한 로맨스


파격의 결정체, 좀비와 인간이 사랑에 빠진다는 설정마저 '로미오와 줄리엣'이 연상될 정도로 잘 소화해낸다. ⓒCJ엔터테인먼트



영화는 명명백백 '로미오와 줄리엣'을 연상시킨다. 서로 죽고 못사는 앙숙인 몬태규 가문과 캐플릿 가문, 그리고 첫눈에 반해 버린 몬태규의 로미오와 캐플릿의 줄리엣. 당연한 집안의 엄청난 반대에 결국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하는 두 사람. 로미오의 R, 줄리엣의 줄리는 이보다 더 끔찍한 태생적 반대에 부딪힌다. 좀비와 인간. 


이보다 더 애틋하고 절실한 로맨스가 이 세상 어디에 있겠는가. 달달한 틴에이저의 로맨스, 현실에서 절대 일어날 수 없을 것 같은 몇 겹의 판타지적 로맨스 외피 안에는 사랑의 100% 가능성을 향한 강력한 주장이 있는 것이다. '이것도 사랑일까'라고 자문하고 고민하는 것도 사치인 그의 사랑, 좀비의 사랑. 


많고 많은 로맨스 영화들을 우리는 '판타지'라고 부른다. 거기엔 '저런 사랑이 현실에서 가능한가. 절대 말도 안 된다'라는 비꼼의 정서가 담겨 있다. 그때부턴 사랑의 고귀함과 위대함, 사랑의 가능성은 사라지고 오락만 남을 뿐이다. 반면 이 영화는 어떤가. 오히려 오락에서 시작해 사랑의 본질로 나아가는 것 같지 않은가. 


그런 로맨스의 외피를 쓴 판타지 영화보단 차라리 이런 판타지의 외피를 쓴 로맨스가 낫지 않은가,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물론 이 영화로 진정한 사랑을 논하긴 힘들 것이다. 판타지적 외연이 주는 포스가 워낙 강렬하니까 말이다. 그럼에도, 굳이 가져다 붙이는 것이 아닌 그 자체로 이 영화의 로맨스가 사랑의 본질을 조금이나마 보여주고 있다고 본다. 만듦새야 어떻든 우리가 진정 행해야 할 사랑의 모습이 거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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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간 책 다시읽기] 가즈오 이시구로의 <나를 보내지 마>


소설 <나를 보내지 마> 표지 ⓒ민음사



많은 소설을 읽다 보면, '이건 진짜다' 하고 감탄하고 가슴 속에 깊숙이 저장시키는 작품이 있다. 그런 소설은 언젠가 반드시 다시 읽게 되어 있는데, 나의 영혼이 뒤바뀌거나 몸에서 나가버리지 않는 이상 한 번 영혼을 건드린 작품은 앞으로도 더욱 거대한 무엇을 선사할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너무나 부끄럽지만, 얼마 전 발표한 노벨문학상 수상으로 그 이름을 처음 듣게 된 가즈오 이시구로의 2005년작 <나를 보내지 마>는 이제야 나에게 그런 작품, 나의 영혼을 건드렸을 뿐 아니라 앞으로도 거대한 흔적을 남길 게 분명한 작품이 되었다. 그 우아하고 세련된 문체와 분위기, 압도적이기까지 한 세밀한 심리묘사는 이전까진 느끼지 못한 그것이었다. 


현실을 기반으로 하되 분명 다른 세상에서 살아가는 그들의 이야기는 분명 SF적 요소가 다분한 성장 소설로 분류할 만하다. 거기엔 스펙터클한 사건이나 사상 초유의 반전이 기다리고 있지는 않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 작품에서 참으로 많은 걸 느끼고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이 작품이 주는 여운에 한동안 잠식당할 게 분명하다. 


너무나도 인간적인 비인간 존재들


'헤일셤'이라는 기숙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 여느 학교를 다니는 학생들과 다를 바 없는 것 같다. 당연히 학교도 별다른 게 없다. 우리가 보기엔 그곳은 지극히 평범하다. 그런데 사실 그들의 정체는 인간이 아닌 클론, 인간에게 장기이식을 하는 목적으로 복제되어 태어나 살아가는 존재다. 헤일셤은 클론만을 위한 학교인 것이다. 


지금, 캐시는 그곳 헤일셤에서 학창 시절을 보내고 코티지에서 간병사 교육을 받은 후 회복 센터에서 간병사로 활동하고 있다. 그녀가 간병하는 대상은 다름 아닌 장기이식을 한 클론으로, 그녀는 학창 시절 가장 친하게 진했던 루스와 토미를 간호하고 또 여지 없이 떠나보낸다. 그녀도 결국 장기이식 후 죽음을 맞게 될 운명이다. 


소설은 캐시의 지금과 캐시가 회상하는 헤일셤, 코티지, 회복 센터 간병사 시절을 오간다. 그녀와 함께 한 이들은 그녀가 간병하고 또 떠나보낸 루스와 토미다. 그들은 함께 클론으로선 절대 얻지 못할 평범한 생활에서 기인한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그렇기 때문에 끊임없이 피어오르는 의혹들로 힘들어하고 괴로워하고 체념한다. 그럼에도 그들은 나아간다, 살아간다. 그들은 인간이 아니지만 참으로 인간적인 울림을 준다...


그들이, 클론들이 인간적으로 보일수록 인간적인 울림을 줄수록 미안하고 부끄럽고 슬픈, 복잡하기 그지없는 마음이다. 그들은 절대 바꿀 수 없는 정해진 길, 죽음을 향해 나아갈 뿐이다. 인간의 영원한 생을 위해 자신을 내주어야 할 존재일 뿐이다. 우리는 이 소설을 통해, 소설로만 볼 수 있는 완전히 다른 존재의 삶을 엿본다. 그들은, 아름답게 슬프고 슬프게 아름다운, 너무나도 인간적인 비인간 존재다. 


정녕 특별한 소설


우리는 인간이 만들어 낸 존재에 관한 작품을 무수히 봐왔다. 그 작품들에서 그들은 여지없이 다양한 형태의 존재부정, 현실부정을 통해 일종의 혁명을 일으키고자 한다. <바이센테니얼 맨>에서는 인간이 되려 하고, <아일랜드>에서는 탈출을 하려 하는 게 그 대표적 모양새다. 


하지만, 그런 존재 부각의 모양새는 오히려 그들의 존재 주체의 측면에 소홀하기 쉽다. 그들은 거대 담론과 논쟁의 소모품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들을 들여다보려 하지 않는다. 반면, 가즈오 이시구로가 그려내는 <나를 보내지 마> 속 클론들의 삶은 다른 무엇의 수단이 아닌 그 자체로 의미를 가진다. 


충분히 격렬한 논쟁의 한 담론을 도출해낼 수 있으면서도 그런 방향성을 견지 하지 않고 다분히 안으로 안으로 천착함으로써 궁극적인 성찰의 단계로 나아갈 수 있었다. 우리는 클론의 시선을 통해 소외된 모든 존재, 보이지 않는 모든 존재, 그리고 나만이 들여다볼 수 있는 나라는 존재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된다. 


그들을 위해 해줄 수 있는 게 무얼까 생각해본다, 아니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들은 다른 누구도 아닌 인간을 위해, 인간이 만든 존재이니까. 그들을 그들의 손이 아닌 인간의 손에 맡길 의무가 인간에게 있고, 그들을 신의 손에 맡길 권리는 인간에게 없다. 그런데, 그들에게 평범한 삶을 줄 수 있는 방법도 능력도 없다. 


그들에게 '학창시절'의 추억을 준 헤일셤의 존재는 그래서 특별하다. 우리가 그들의 학창시절을 '성장'의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해준 작가의 능력 또한 특별하다. 이 소설로 조금은 세상을 '다르게' 사유할 수 있다면, 우리 또한 특별할 것이다. 특별한 존재이지만 평범함을 소원하는 클론들도 평범하기에 가능할 수 있는 특별함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나를 보내지 마>는 정녕 특별한 소설이다. 


나를 보내지 마 - 10점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김남주 옮김/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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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당신과 함께한 순간들>


단조로운 내레이션에 숨은 어려운 삶에의 철학이 돋보이는 영화 <당신과 함께한 순간들> ⓒ싸이더스



내가 태어나기도 훨씬 전에, 아버지조차 말도 못 할 아기 시절에 돌아가신 할머니를 내가 기억할리는 없다. 그런 할머니가 나는 익숙하고 그런 할머니의 형상이 그려지는 건 누군가로부터 전해들었을 할머니에 대한 기억을 아버지한테 전해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은 그렇게 누군가의 기억 속에 살아 있다.


하지만, 그 기억들이 모두 정확할리 만무하다. 머릿속 어딘가엔 정확한 기억이 있지만 능력 상 꺼내지 못하는 것이든, 애초에 걸러서 기억하거나 어느 한 순간 또는 마지막 순간만 기억하는 것이든, 원본의 기억이 아닌 편집본의 기억이라는 것이다. 마치 역사와 같지 않은가. 사실도출에의 노력을 추구하지만, 영원히 그렇게는 불가능하다.


영화 <당신과 함께한 순간들>은 기억의 취사선택과 기억의 이어짐이라는 다분히 추상적인 주제를 가장 앞에 둔다. 여기에 역시 추상적이기 짝이 없는 관계라든지, 가족이라든지, 사랑이라든지 하는 주제를 따르게 한다. 하지만, 한 사람에 대한 기억의 순간을 눈앞에 실증적으로 불러내는 인간 형상 홀로그램이, 이 잔잔한 이야기에 심심한 파동을 일으켜 많은 주제들의 추상이 형상화된다.


인간 홀로그램


인간 형상의 홀로그램에 기억을 심어 마치 그때 그 사람과 얘기하는 듯한 느낌. 이 영화의 주요 볼거리다. ⓒ싸이더스



여든다섯의 할머니 마조리(로이스 스미스 분) 곁에는, 원하면 언제든지 불러낼 수 있는 홀로그램이 있다. '그'는 15년 전 세상을 떠난 남편 월터(존 햄 분)의 젊은 시절 모습을 하고 있다. 기억을 심어주면 영원히 그 기억을 그대로 간직할 그는, 기억을 되살리거나 기억을 공유하며 마음을 달래주는 친구 또는 대체자로서 완벽한 존재다. 


그런 그를 마조리의 딸 테스(지나 데이비스 분)는 싫어한다. 자신보다 그를 더 찾고 그에게 더 의지하는 엄마가 싫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인간 아닌 존재가 인간을 아주 잘 대체하고 있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다. 반면, 테스의 남편 존(팀 로빈스 분)은 적극 찬성하는 쪽이다. 다른 모든 걸 제쳐두고 마조리의 상태를 호전시키는 데 아주 좋은 친구가 아닌가. 그건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이 아닌가. 


그렇게 잃어버린 형상들과 기억들 때문에 괴로웠던 마조리의 마지막 나날들은 다분히 월터의 홀로그램 덕분에 치유받는다. 월터의 형상이 눈앞에 있고 월터와 함께 했던 화려한 젊은날의 기억 또한 되살릴 수 있다. 


하지만, 그건 월터에게 날조된 기억, 사실이지만 기분 좋은 기억과 사실이 아닌 기분 좋은 기억을 심어준 덕분이다. 기억하기 싫은, 기억에서 지워버린 기억은 아예 심어주지 않았다. 예를 들어, 마조리가 세계 8위의 테니스 선수 대신 월터를 선택했다고 거짓말하고 자살로 생을 마감한 아들 데미안에 대한 기억은 아예 전해주지 않으려 한다. 


이 영화의 핵심, 기억


인간 형상 홀로그램이 이 영화의 주요 볼거리라면, 기억과 관계는 이 영화의 핵심 주제이다. ⓒ싸이더스



영화는 연극을 원작으로 한 만큼 굉장히 정적이다. 90% 이상의 장면이 그들이 기거하는 집안이며, 역시 90% 이상의 장면이 그들 중 2인 또는 3인의 대화이다. 그들의 대화가 즉 영화이기에, 대화를 깊숙이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거기에서 우린 '기억' '관계' 등의 핵심 주제를 찾아 엿볼 수 있다. 


존은 기억이란 뇌 안의 퇴적층과 같아서 기억하지 못할 뿐 거기에 있다고 말한다. 어떤 식으로든 꺼내어 되살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그가 홀로그램 월터의 존재를 옹호하며, 그로 하여금 마조리의 기억을 되살리게 하거나 마조리의 기억 한 부분을 차지하게 하는 게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은 이치겠다. 


반면 테스는 기억이란 우물이나 서랍장 같은 게 아니라고 말한다. 무언가를 기억할 때는 기억 그 자체가 아니라 기억한 마지막 순간을 기억하는 것뿐이라는 것이다. 복사본의 복사본처럼 계속 희미해질 뿐 절대 생생해지거나 선명해지지 않는다. 이는 홀로그램 월터의 존재가 마조리 기억을 되살리거나 생생하게 하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그녀의 주장을 뒷받침한다. 


아마도, 테스의 주장 또는 이론이 맞을 것이다. 기억은 점점 쇠퇴해 언젠가는 소실할 거라는 건 누구나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모두들 몸소 실천하고 있다. 하지만, 심정적으로 존의 말을 믿고 싶다. 할 수만 있다면 서랍장에 기억을 보관하고 언제든 꺼내 눈앞에 놓고 싶단 말이다. 인류가 낳은 최고 천재 아인슈타인도 그건 불가능하지 않을까. 


관계, 그리고 기억


모든 건 기억에서 비롯된다. ⓒ싸이더스



관계는 기억과 함께 한다. 기억들이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다. 기억이 사라지면 관계 또한 사라진다. 마조리로부터 받은 한없이 작은 사랑, 마조리로부터 받은 적이 없다시피한 사랑의 기억으로 괴로워하는 테스이지만 마조리는 모른다. 알지 못하는 것이다. 일방적인 기억이 아닌 서로 간의 기억이야말로 사실상 그(그녀)와 나의 전부다. 


시간을 어김없이 흐르고, 기억은 쇠퇴하여 사라지고, 생명은 죽어 자연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누군가에 대한 기억은 계속 남아 있다. 영화에서 홀로그램이 상징하는 건 바로 그 누군가에 대한 기억의 영속성이다. 이는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게, 영화가 좀 더 힘을 실어주는 주장이, 앞서 테스가 아닌 존의 말에 있다는 걸 증명한다. 


누군가에 대한 기억은 그동안 글, 그림, 사진, 영상 등으로 전해져왔다. 이젠 홀로그램이 가능해진 시대, 그 누군가를 눈앞에 데려와 함께 기억을 직접 공유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 영화는 미래형 SF적 요소가 있지만 SF영화라 칭할 수 없다. 인류는 그 무엇보다 우선적으로 기억, 기록을 남기는 데 전력을 다한다. 


비단 월터 홀로그램만 존재하진 않을 것이다. 마조리, 존, 테스의 홀로그램이 다른 산 사람을 위해 존재하게 될 것이다. 그 와중에 '나에겐 많은 시간이 있으니까'라고 말하는 월터 홀로그램과 '얼마나 좋아.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었다니'라고 말하는 마조리 인간, 그리고 마조리 홀로그램의 한 마디가 기억에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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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리뷰] 프랑수아 오종 감독의 <프란츠>


파격적 행보를 계속 해왔던 프랑수아 오종 감독의 영화 경력 전환점이 될 만한 작품 <프란츠>. ⓒ찬란



프랑수아 오종은 프랑스가 낳은 작금 세계적인 작가주의 감독이다. 갓 20살이 넘은 1980년대 후반부터 활동했지만 2002년 <8명의 여인들>에 이르러 그 이름을 알렸다. 그 이전까지 그의 작품이 국내에 개봉된 적이 없고, 그 이후로 그의 모든 작품이 국내에 개봉된 사례만 보아도 어림직잠할 수 있다. 물론 하루아침에 뛰어 오른 건 아니고, 1990년대부터 비평계에 그 이름을 드높여 왔다. 


그는 매 작품마다 파격적 소재를 기본 장착하고 개성있는 상상력과 풍자를 선사했다. 비평가들이 좋아마지 않는 영화를 만들었다고 할까. 그렇지만 무엇보다 오종을 상징하는 건 섹슈얼리티 기반의 욕망이다. 한국에 처음 소개된 그의 작품 <스위밍 풀>이 당대를 대표할 만한 섹슈얼 미스터리라는 점도 크게 작용할 것이다.(<8명의 여인들>이 먼저 만들어졌지만, 국내에서는 <스위밍 풀>의 개봉 이후 그 성공으로 <8명의 여인들>이 개봉했다.) 그 전후로도 그는 섹슈얼리티에 천착했다. 


그런 프랑수아 오종 감독이 <프란츠>로 우리를 찾아온 건, 영화가 파격과는 조금 거리가 있기에 또 다른 느낌의 파격으로 다가온다. 영화는 제1차 세계대전 후의 독일과 프랑스를 배경으로 사랑과 용서, 거짓말과 진실, 외면의 정적과 내면의 격동 등에 휩싸인 인간상을 내보인다. 인간은 수많은 감정과 욕망의 소용돌이에 휩싸이면서도 꿋꿋이 살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프랑수아 오종 감독의 영화 경력의 전환점과 같다. 


전쟁 미망인 앞에 나타난 비밀스런 적국민 남자


전쟁으로 약혼자 프란츠를 잃고 아파하는 안나 앞에 적국민 남자가 찾아온다. 무슨 이유로? ⓒ찬란



1919년, 제1차 세계대전 패전 직후의 독일. 안나(폴라 비어 분)는 전쟁으로 약혼자 프란츠를 잃고 실의에 빠져 지내고 있다. 그녀가 버틸 수 있었던 건 아들을 잃고서도 그녀를 딸처럼 생각하고 보살핀 프란츠의 부모님 덕분이다. 아니, 프란츠의 부모님이 그녀 덕분에 버틸 수 있었던 것일 테다. 그런 독일 한복판의, 그것도 프란츠의 묘지에, 한 프랑스인이 나타난다. 


그는 아드리앵(피에르 니네이 분), 전전(戰前)부터 프란츠와 절친한 친구 사이였다고 한다. 프란츠의 마지막도 잘 알고 있는 그는, 프랑스인을 향한 적대감에도 불구하고 프란츠 부모님의 신뢰를 얻는다. 안나도 그에게 차츰 마음을 연다. 하지만 아드리앵의 눈은 자주 흔들리고 프란츠 부모님과 안나와 함께 있을 때 종종 불안해 한다. 알 길 없는 불안한 연유, 비밀을 간직하고 있는 것 같다. 


아드리앵은 돌연 고향인 파리로 돌아간다. 그 직전 더이상 버틸 수 없었던 그는 안나에게 비밀을 털어놓는다. 다소 충격적인 그 비밀은, 그가 프란츠의 오랜 친구가 아니라 전쟁 중에 프란츠를 죽인 독일군 출신이었다는 것이었다. 아드리앵은 프란츠 부모님과 안나에게 용서를 구하고 싶었던 거였다. 


이제 그만 안나가 자신의 삶을 살았으면 하는 마음과 이왕이면 아드리앵과 잘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던 프란츠 부모님은, 안나에게 아드리앵을 찾으라고 조언한다. 안나는 아드리앵의 비밀을 말씀드리지 않고 혼자만 간직한 채 파리로 향한다. 마치 1부가 끝나고 2부로 향하는 느낌이다. 그녀는 그를 찾을 수 있을까? 그녀와 그에게는 어떤 일이 기다리고 있을까? 


아름다운 정적, 영화 전반부


영화의 전반부는 흑백과 컬러를 오가는 와중에 아름다운 정적이 주를 이룬다. ⓒ찬란



비록 적국이지만, 비록 자식을 죽였을지 모를 적국민이지만, 모두 전쟁이 낳은 피해자들이라는 깨달음과 함께 용서를 넘은 포용이 영화의 전반부를 이룬다. 영화 외적인 요소들이 주를 이루기에 지루한 면이 없지 않아 있는데, 아름다운 슬픔과 역설적인 서정이 주는 감정적 호소가 깊이 있다. 영화를 다 본 후에 느낄 수 있는 점이지만, 격정적인 후반부의 느낌과 대조를 이루는 장치였다고 할 수 있겠다. 


감독의 의도가 잔뜩 들어 있는 흑백과 컬러의 조화가 눈길을 끈다. 영화는 흑백이 거의 전부를 차지하고 짧은 순간들만 종종 컬러로 내보이는데, 공통적으로 환희의 순간들이다. 문제는, 그 순간들이 암울한 현실에 비춰 당사자들은 모르지만 상황 상 현실을 더 암울하게 만들 순간들이라는 것이다. 아드리앵이 흔들리는 눈빛에도 불구하고 프란츠와의 거짓된 즐거운 한때를 말하고, 안나가 쓸쓸함이 잔뜩 묻은 목소리로 프란츠와의 즐거운 한때를 회상한다. 


더불어 곳곳에 도사리고 있는, 후반부 연속되는 격정적 사건들의 복선들도 눈에 띈다. 주로 아드리앵의 행동과 눈빛과 대사 등에서 대략이나마 알아차릴 수 있다. 다분히 안나의 시선에서 영화를 보고 느낄 수밖에 없기 때문인데, 그것들을 하나 하나 풀어내고 전에 없는 감정에 흔들리는 안나와 일심동체 되는 나를 느끼게 될 것이다. 


다양한 사건과 격정적 내면, 영화 후반부


안나가 겪는 다양한 사건 중에 내면에 몰아치는 격정들. 영화 후반부를 차지하는 것들이다. 우린 안나와 더불어 참으로 많은 것들을 보고 느끼고 깨닫는다. ⓒ찬란



안나가 아드리앵을 찾아 파리로 떠나면서 시작된다고 할 수 있는 후반부는, 똑바로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놓칠 수 있는 많은 중요 요소들의 모음이다. 거의 모든 장면, 대사, 행동, 표정에 의미가 부여되어 있다.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도 거기에 있고, 영화를 이루는 재미 요소도 거기에 있다. 


아드리앵이 용서를 빌고자 독일을 찾아왔던 전반부는, 안 그래도 정적인 독일이라는 곳에 더해 겉으론 즐겁지만 속은 타들어가는 아드리앵의 정황이 겹쳐 자칫 우울할 정도로 정적일 수밖에 없었다. 반면, 후반부는 프랑스 파리라는 당대 최고의 도시에 더해 전승국이라는 프리미엄을 업고 안나가 겪는 다양한 외적 사건들과 오락가락하는 내면에 의해 격정적이기 짝이 없다.


안나가 겪는, 안나가 프란츠와 겼었고 프란츠 부모님과 겪었고 겪고 있으며 아드리앵과 겪는 모든 것들이 정신없이 휘몰아친다. 그 하나 하나가 모두 의미 있게 다가온다. 사랑, 용서, 거짓, 진실, 회한, 이 모든 걸 이루는 욕망, 그 안에서 외롭게 죽어가는 인간 그리고 그럼에도 살아가는 인간. 순간이 곧 전체이고, 전체가 곧 순간이다. 


영화는 말한다. 인간이 위대한 건 그저 살아 있는 것이라고. 살아갈 이유 따윈 바라지도 않지만 오히려 죽어야 할 이유를 찾았음에도 살아 가는 그들. 생각지도 않은 희망을 주었다고 획기적인 방법으로 절망을 선사해도 살아 가려는 그들. 나도, 우리도 그렇게 살아간다. 그럼에도 살아간다. 안나와 아드리앵, 그리고 프란츠 부모님. 모두 프란츠를 잊으려 하지 않아도 된다. 아니, 잊으면 안 된다. 하지만,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프란츠와만 살아갈 순 없다. 계속 살아가기 위해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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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동물들의 인간 심판>


<동물들의 인간 심판> 표지 ⓒ책공장더불어



어렸을 때 집에는 놀 만한 게 없었다. 엄마가 직접 나와 저녁 먹으라고 부르실 때까지 밖에서 놀았다. 친구들과 놀 건 정말 많았는데, 우리집에서 조금만 가면 얕은 산을 낀 공원이 있어 그곳에 자주 갔다. 그러곤 매미, 잠자리, 사마귀, 메뚜기, 개미 등의 곤충을 잡았고, 잡아 놓고 아무것도 하지 않아 그저 죽어가는 곤충이 있는 반면 잡아 괴롭히는 데 온 정성을 쏟는 곤충이 있었다.  


그 행위는 우리들에겐 흔한 놀이였고, 어른들에겐 자연 학습이었다. 그때보다 훨씬 자연과 덜 친숙한 지금, 모르긴 몰라도 그런 경향은 더 심해졌을 것이다. 아이들에게나 어른들에게나 그건 그 무엇보다 학습적인 놀이이다. 물론 그 곤충의 입장에서 생각할 이유나 여지 따위는 없다. 그러나, 그 곤충은 이 세상의 모든 크고 작은 생물들 중 하나임에 분명하다. 그런 짓이 생태계 파괴에 일조하는 거라고 왜 그땐 몰랐을까.


<동물들의 인간 심판>(책공장더불어)은 동물을 향해 호모 사피엔스(인간)이 저지른 하찮고 작은 행동부터 엄청나고 크나큰 행동들, 그로 인해 일어났던 혹은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낱낱이 까발린다. 너무 많이 접해왔던 계몽서 느낌이라고? 천만에. 이 책은 전적으로 동물들의 시점에서, 끔찍한 범죄를 저지른 인간을 재판에 올려 법정을 여는 스토리로 전개된다. 그 죄는 동물들에 대한 비방과 중상, 학대, 그리고 대량학살이다. 


동물들에 대한 인간의 죄


생태계에는 양육강식 법칙이 존재한다. 이른바 생존 게임, 먹잇감을 두고 경쟁도 하고 발톱을 세우고 독을 뿜으며 사냥을 한다. 하지만 거기에는 중요한 핵심이 있다. 서로 존중하고 공정한 규칙에 따라 자신과 상대의 존엄성을 지키는 것이다. 인간 세상에도 양육강식 법칙이 엄연히 존재한다. 


하지만 그곳의 양육강식은 '살아남는 자가 이기는 것'이라는 말 아래, 존중이고 규칙이고 존엄성이고 나발이고 같은 인간과 온갖 창조물을 헐뜯어 명예를 실추시키는 데 열중하는 걸 뜻한다. 인간은 인간을 욕할 때 하필이면 동물을 빗대는데, 그 자체로 이유없이 동물을 비방하고 중상하는 것이다. '개의 새끼'는 천하의 나쁜놈을 뜻하고, '숫염소'는 성(性)에 관한 부정적이기 짝이 없는 단어다. '닭의 대가리'나 '금붕어'는 멍청하다는 말과 동의어이고, '뱀'은 교활하다는 뜻이고... 정녕 끝이 없다. 


인간의 두 번째, 세 번째 죄는 이에 비할 바가 아니다. 최근에 개봉해 많은 이슈를 뿌렸던 영화 <옥자>가 이 두 죄를 한 번에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우리가 흔히 접하는 동물에 개, 돼지, 소, 말, 고양이 정도가 있다. 이중 개와 고양이는 반려의 대상이 되고, 소는 젖을 주고 밭을 갈며, 말은 유흥의 대상이다. 하지만 돼지는? 내가 알기론 오로지 식용의 대상일 뿐이다. 그래서 돼지는 태어나서 인간의 식용 대상으로 키워질 뿐이다.


옥자가 전 세계 각지의 좋은 환경에서 자란 건 양질의 고기를 위해서다. 책에서 법정의 증인으로 나온 돼지 장브누아르의 증언은 정녕 끔찍하다. 우리가 생각하는 '더러운' 돼지의 이미지가 만들어지는 과정은 곧 식용 돼지로의 과정이다. 그들은 비좁고 더럽기만한 곳에서 아무런 희망 없이 그저 먹기만 할 뿐이다. 그러곤 곧 도살장으로 향해 죽어간다. 옥자가 달랐던 건 '더 맛있는 고기'를 위해 스트레스를 적게 받은 환경에서 자란 돼지였을 뿐, 그 끝이 도살장에서의 죽음, 그리고 식탁 위인 건 똑같다. 


인간의 부유함은 곧 다른 동물의 가난


수많은 종류의 크고 작은 동물들이 증언하는 내용은 상상 이상의 끔찍함을 동반한다. 동시에 생각하기 힘든 역발상과 인간이 제대로 마주칠 수 없는 인간의 본 모습도 제공하는데, 그 모든 게 실랄하게 정확해 보인다. 동물들은 인간이 절대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늘 원한다고 말한다. 그건 '소유 게임'이라는 것인데, 인간들은 그걸 '경제'라고 부르며, 가능한 한 많은 물질을 얻는 걸 목적으로 몇 가지 점수를 정확히 매겨서 계층을 나눈다. 그 기준은 '돈'이다. 


"호모 사피엔스가 더 가지려고 하는 다양한 게임은 모두에게 재앙입니다. 지구라는 공간은 제한적인데 인간의 탐욕은 끝이 없습니다. 문제는 70억 명의 인간이 먹고 살아야 하는 게 아니라 '누가 더 가졌는지'를 결정하는 거대한 경기에 참여하는 선수가 70억 명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들이 더 가지면 분명 우리(동물)는 당연히 덜 갖게 되니까요. 물도, 깨끗한 공기도, 식량도, 살 공간까지 줄어드는 겁니다. 한 마디로 인간의 부유함은 곧 우리의 가난을 의미합니다." (본문 192쪽)


우리는, 인간은 이 사실을 아주 잘 안다. 결국에는 인간 자신을 포함한 모두의 파멸만 기다리고 있다는 걸. 하지만 그 기저에는 '나만 아니면 돼'라는 마인드가 똬리를 틀고 있다. 나만, 내 가족만, 내 나라만, 내 세대만, 종국에는 인간만 아니면 되는 것이다. 다른 인간도 염두에 두지 않는 이 간악한 마인드에 다른 종이 들어설 여지가 있겠는가? 더욱이 이 세상은 변화하고 진보되고 나아진다고들 하지만 사실 퇴보만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걸 다들 아는 이상 글러먹었다. 


돌이킬 수 없는 죄를 저지른 인간에게 내려질 판결이 궁금하다. 물론 법정인 만큼 희대의 범죄자 인간에게도 변호인이 있는바, 적어도 동물에 대한 생각의 변화는 진보하고 있다는 것도 누구나 인정하는 것 같다. 그런 인간도 대다수가 아닌 소수에 불과하지만 말이다. 비록 늦었지만 깨달음의 꾸준한 나아감일까, 일시적이고 단편적이며 소수의 현인적 깨달음의 반복일까. 


아직은 알 수 없다. 그리고 어떤 판결이 나온다 해도 그것이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았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없다. 일단은 자기 죄가 무엇인지도 모를 대다수의 인간들에게,  '네 죄를 네가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동물들의 인간 심판, 그 처벌의 모양새도 그 일환이겠다. 진짜 끔찍한 건 수많은 동물들이 법정에 나와 증언한 수많은 끔찍한 죄들을 다시금 저지를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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