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몬몬몬 몬스터>


영화 <몬몬몬 몬스터> 포스터. ⓒ더쿱



'대만영화', 어느새 우리에게도 익숙해졌다. 2000년대 <말할 수 없는 비밀>을 필두로, 2010년대 괜찮은 청춘영화가 우후죽순 우리를 찾아왔다.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 <나의 소녀시대> <카페, 한 사람을 기다리다> 등, 우리나라 감성과 맞닿아 있는 대만 감성이 두드러진 작품들이다. 


하지만, '진짜' 대만영화는 이미 오래전에 시작되었다. 대만 출신의 세계적인 감독들과 작품들이 있다. 허우 샤오시엔의 <비정성시>, 에드워드 양의 <하나 그리고 둘>, 리안 감독의 <결혼 피로연>, 차이밍량의 <애정만세> 등. 이들은 1980~90년대 대만영화의 새로운 시작을 알린 일명 '뉴 웨이브'의 기수들이다. 이들의 감각적이고 예술적인 경향이 지금의 대만영화에 끼친 영향은 지대하다. 비단 대만청춘영화뿐만 아니라. 


최근에 우리를 찾아온 강렬한 영화 <몬몬몬 몬스터> 또한 영향을 많이 받은 듯하다. 2010년대 대만청춘영화의 시작을 알린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의 감독이자 <카페, 한 사람을 기다리다>의 원작, 각본, 제작을 맡았던 이른바, '대만청춘영화'의 기수 구파도의 신작이다. 젊은 감독의 '청춘' 사랑은 여전하지만, 일찍이 볼 수 없었던 다채로운 수단과 방법이 이채롭다. 거기엔 청춘은 물론 공포, 스릴러, 코믹까지 있다. 


괴물 같은 인간과 괴물의 한판


영화 <몬몬몬 몬스터>의 한 장면. ⓒ더쿱



린슈웨이는 런하오 일당에게 괴롭힘을 당한다. 거기에 반 친구들은 한 명도 빠짐없이 동조한다. 심지어 담임 선생님도 피해자 린슈웨이가 아닌 가해자 런하오를 두둔한다. 복도에서 홀로 수업을 듣고 밥을 먹는 왕따이자 아웃 오브 안중인 여자 학생만 그를 위할 뿐이다. 자기처럼 되지 말라고. 하지만 린슈웨이 또한 그녀를 왕따시키는 학생일 테니, 그녀의 위로를 거들떠도 보지 않는 게 당연하다. 


한편 노숙자들과 독거노인들만 사는 곳엔 '괴물 자매'가 산다. 그들은 사람을 잡아먹는데, 어느 날 사냥하러 나왔다고 차에 치이고는 우연히 근처에 있던 런하오 일당에게 붙잡힌다. 그때 거기엔 린슈웨이도 있었다. 그들은 동생 괴물을 자신들의 아지트로 데려와서는 하염없이 괴롭힌다. 린슈웨이가 찾아보니 그 괴물들은 원래 사람이었다. 돈을 노린 누군가에 의해 그렇게 된 것이다. 


이렇게 된 이상 런하오 일당과 언니 괴물은 한판 붙어야 한다. 사람을 잡아먹고 살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된 괴물과 사람을 죽도록 괴롭히면서 사람이었던 괴물을 아무 이유 없이 잡아와 한없이 괴롭히는 사람. 사람으로서 사람을 응원하지만, 사람이니까 괴물을 응원해야 할 것도 같다. 


장르 폭풍이 선사하는 재미


영화 <몬몬몬 몬스터>의 한 장면. ⓒ더쿱



영화 <몬몬몬 몬스터>는 생각지도 못한 재미를 선사한다. 영화로만 느낄 수 있을 쾌감 어린 재미는 물론, '진짜 괴물은 누구인가'를 묻는 은근 철학적 질문으로 재미를 반감시키는 게 아닌 배가시킨다. 우선 재미 요소에는 위에서도 언급한 이 영화의 장르 폭풍이 있다. 청춘, 코믹, 공포, 스릴러 등. 


학교에서 벌어지는 왕따 이야기, 흔히 거기에는 가해자와 피해자의 이야기가 있고 다시 가해자가 되는 피해자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가해자가 된 피해자는 또 다른 피해자를 물색하거나, 간혹 다른 루트로 본래의 가해자에게 피해를 입히기도 한다. 하지만 이 영화는 가해자가 된 피해자가 명백한 가해자인 괴물을 상대로 가해자가 된다는 설정이 특이하다. 


괴물이 나오면서 장르는 자연스레 공포와 스릴러로 옮겨간다. 혐오스러운 몰골은 존재 자체로만으로도 공포를 유발하며, 언제 갑자기 튀어나올지 모르는 긴장감 어린 순간들은 스릴러의 세계에 한 발을 들여다놓게 한다. 


구파도 감독의 전매특허인 청춘과 더불어 코믹이 빠질 수 없다. 특히 그가 제작, 원작, 각본을 맡은 <카페, 한 사람을 기다리다>의 황당무계한 판타지 코믹이 이 영화에도 살짝살짝 묻어난다. 그런 코믹들이 공인된 청춘 장르는 물론 공포와 스릴러와도 잘 어울리니 더할 나위 없이 잘 빠진 영화가 될 수밖에 없다. 


누가 진짜 괴물인가


영화 <몬몬몬 몬스터>의 한 장면. ⓒ더쿱



런하오 일당은 이 영화의 공공의 적이자 겉으로 드러나는 문제들의 궁극적 원인이다. 왠지 그 누구도 살아남지 못하고 싸그리 죽을 것만 같은 느낌을 풍기는 영화에서, 런하오 일당이 린슈웨이를 괴롭히지 않았다면 또 동생 괴물을 납치해오지 않았다면 이 지경이 되지는 않았을지 모른다. 


하지만 실상은 어떨까. 겉 아닌 속은 어떨까. 결국 런하오 일당 또한 언젠가 피해자였을 테고 언젠가 피해자가 될 운명이 아닐까. 그들도 이 강자와 약자가 나뉘어져 있는 거대한 시스템의 약자 측에 속해 더 절대적 약자를 괴롭히고 있는 게 아닐까. 약자들의 세계에서 가해자가 피해자가 되고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는 피눈물 나는 모습들을 이 영화의 처음부터 끝까지 접할 수 있다. 


영화의 시작, 정신지체아와 가게를 꾸려 나가는 노인에게 물세례를 맞은 노숙자는 다른 노숙자와 경찰의 눈을 피해 더 깊숙히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갔다가 괴물 자매에게 잡아먹힌다. 하지만 정작 괴물 자매는 그보다 더 깊숙한 곳에서 박스 하나에 의존한 채 살아간다. 그런 괴물이 런하오 일당에게 잡히고, 런하오 일당은 린슈웨이를 괴롭히는 한편 함께 하는데, 린슈웨이는 다시 가게의 정신지체아를 향해 폭언을 하고... 


'누가 진짜 가해자인가'라는 질문을 넘어, '누가 진짜 괴물인가'를 말하려는 이 영화, 런하오 일당이 어떤 식으로든 '괴물'이라는 건 인정한다. 그렇다면, 린슈웨이는? 그 사이를 오가며 자신하지 못하는 그는, 어찌 보면 정녕 인간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이리 저리 휘둘리고 끝없이 고민하지만 결정하지 못하는 인간적인 인간. 하지만 그는 명백히 런하오 일당에 동조하고 함께 행동했다. 런하오 일당이 괴물이라면 그도 괴물이 아닌가? 영화가 질문하는 '누가 진짜 괴물인가'의 대상은 런하오 일당이 아닌 린슈웨이다. 그리고 우린 대부분 린슈웨이처럼 생각하고 행동한다. 그렇다면 우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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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편집자가 독자에게] 장강명 작가의 <팔과 다리의 가격>


<팔과 다리의 가격> 표지 ⓒ아시아



장강명 작가는 여러 차례 언론 인터뷰를 통해 북한 문제에 관심이 많다고 밝혔습니다. 북한 인권 단체에 후원을 하기도 하고, 북한 문제에 대해 계속 글을 쓰고 싶다고도 했죠. 일종의 사명감이랄까요. <팔과 다리의 가격>(아시아)는 장강명의 사명감을 가장 잘 표현해낸 첫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년 전 나온 소설 <우리의 소원은 전쟁>(예담)이 있습니다만, 장강명이 사명감을 갖고 있는 북한 인권 문제를 다루진 않았죠. 


그는 문학계에서 독특한 위치에 있습니다. 전무후무할 네 개의 문학공모전 수상으로 문학계의 ‘적자’임이 분명하지만, 한편으론 순문학 아닌 장르문학 또는 대중문학에 천착한 ‘서자’ 느낌이 물씬 풍깁니다. 10년 넘게 사회부 기자로 일하며 터득한 건조한 문체에, 그때그때 들여다본 현실을 비판하고 조명하는 데 ‘장르’를 도구로 사용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 그가 글을 쓰는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일까 생각해봅니다. 궁극적 이유가 무엇일까요. 전업작가가 되면서 재미있지만 날카로운 현실 비판 소설을 내놓았고 최근 들어선 더욱 직접적으로 현실을 비판하고 화두를 던지는 논픽션을 내놓았습니다. 그에게서 ‘조지 오웰’의 스멜(?)이 나는 건 비단 저뿐인가요? 그 방향은 다를지 몰라도 길의 종류는 같은 것 같습니다. 


조지 오웰은 풍자와 투철한 비판 정신에 입각해 제국주의와 파시즘을 비판하는 글을 여럿 발표했죠. 르포와 소설과 에세이를 오갔고, 라디오 프로그램을 제작하기도 했으며 신문사 편집장으로 일하기도 했습니다. 그의 삶이, 그의 글이 나아가는 그 끝엔 ‘전체주의’가 있었습니다. 그것이 그가 글을 쓰는 가장 큰 이유이자 궁극적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장강명 작가의 '북한 문제'


장강명에게 조지 오웰의 '전체주의'는 ‘북한 문제’일까요. 그가 그동안 내놓은 책들, 『표백』 『한국이 싫어서』 『댓글부대』 『당선, 합격, 계급』 등으로 한국의 기막힌 현실을 다방면으로 비판해왔던 건 ‘빅픽쳐’였던 것일까요. 현실 비판 작가로서의 확고한 자리매김. 비판의 방향을 북한으로 틀어도 자연스러워 보입니다. 아니, 굉장히 영리해 보입니다. 한국 비판=북한 옹호, 북한 비판=한국 옹호의 구도를 생각하기 쉬운데, 그 구도를 깨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거기엔 북한 ‘인권’ 문제라는, 인권이 붙고 인권은 곧 ‘인간’이 됩니다. 그가 바라보는 궁극적인 대상은 인간 또는 개인이 되는 것이고, 비판의 대상은 사회 혹은 국가가 되는 것입니다. 


여하튼 그는 그걸, 즉 북한 문제에 대한 생각을 숨긴 적이 없습니다. <팔과 다리의 가격>에서 대상이 되는 ‘이 사람’ 지성호 씨의 경우, 장강명 작가가 기자 시절 때인 5년 전에 인터뷰를 하면서 알게 되었다고 하죠. 그는 북한인권단체이자 북한이탈주민 지원단체 NAUH의 대표로, 북한의 실상과 인권 문제를 알리며 북한이탈주민 구출 사업을 한다고 합니다. 


이 책은 지성호의 소년 시절 이야기이자 동시대 ‘고난의 행군’ 실상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장강명이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북한 문제’의 일환이긴 하지만, 거기에 스며있을 수밖에 없는 직접적 정치·이념의 사항과는 거리가 멉니다. 아니, 저자 본인이 이 책이 그런 길로 가지 않았으면 한다고 밝히죠. 


제목에서 암시하듯 지성호 씨는 한쪽 팔과 다리가 없습니다. 고난의 행군 시절, 오직 생존을 위해 기차에서 석탄을 훔치고는 제때 뛰어내리지 못하고 전봇대에 부딪친 결과라고 합니다. 고난의 행군이 낳은 피해를 떠앉고 진정한 고난으로 나아간 모습이랄까요. 저자가 묘사한 그때 그곳에서의 소년 지성호의 처참한 모습은 치가 떨리고 모골이 송연합니다. 


'고난의 행군'과 소년 지성호의 이야기


이 책을 통해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건 고난의 행군 당시 소년 지성호와 가족의 파란만장한 여정은 아닙니다. 그들의 여정, 특히 소년 지성호의 여정을 통해 본 ‘고난의 행군’, 나아가 고난의 행군을 통해 본 ‘북한 실상’이죠. 그래서 책의 성격이 조금 특이합니다. 인물 논픽션이자 실상을 파헤치는 르포이기도 한 것이죠. 


저자는 소년을 소개하고, 소년이 당한 사고를 소개하기 전에 ‘…… 대하여’ 3탄을 준비합니다. 마치 소년이 이 책의 진짜 주인공이고, 소년을 소개하기에 앞서 이야기하려는 게 부가적인 것 인양 배치를 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것들은 ‘굶을 때 생기는 일’ ‘탄광마을의 삶’ 그리고 ‘미공급 사태’입니다. 보편적 실상, 북한의 실상, 고난의 행군 실상을 차례로, 그리고 점점 더 디테일하게 보여줍니다. 


개인적으로 가장 충격적으로 다가왔던 건 다름 아닌 보편적 실상, 굶을 때 생기는 일이었습니다. 매우 배가 고파지는 현상에서 시작해 먹을 것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게 되며 결국에는 필히 죽고 마는... 고난의 행군, 즉 미공급 사태 당시 알려진 바에 따르면 최소 33만 명 이상이 죽은 이유가 바로 굶어 죽은 것, 아사(餓死)였던 것이죠. 


탄광마을의 삶은 소년 지성호와 맞닿아 있습니다. 그런 한편 1990년대 북한의 생생한 실상을, 20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 것 같은 실상을 내보입니다. 특권계층에 속한 소년의 장래 희망은 노동당 간부가 아니라 군인이었다고 합니다. 전쟁을 일으켜 남한을 공산화시키고 싶었기 때문이라죠. 일상 전체가 잿빛은 아니었던 바, 착하고 순박한 마을 사람들과의 추억은 보편을 기반에 두고 있습니다. 


미공급 사태는 수많은 이들이 눈앞에서 굶어죽는 상상초월의, 상상불가의, 상상불허의 현장입니다. 완벽한 통제, 감시 사회에서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난 재앙은, 통제와 감시만이 선사하는 최악의 일이었습니다. 그곳에 조금의 자유라도 있었다면 절대까지는 아니라도 그 정도의 죽음까지는 일어나지 않았었을 테죠. 모든 걸 떠나서 너무나도 안타깝고 치가 떨리는 죽음입니다. 


인간의 존엄에 대해 생각하기 


장강명 작가가 주목한 부분이 바로 여기입니다. 한국 사람들은 고난의 행군에 대해서, 그때의 참혹함에 대해서 잘 모릅니다, 잘 알고 싶어 하지도 않고요. 저자는 말하죠. 저 멀리 아프리카에서 굶어 죽어가는 이들에겐 국가적, 사회적, 개인적인 관심을 촉구하고 그에 맞춰 관심을 가지는 반면, 눈앞에서 굶어 죽어간 동포들에겐 어떻게 이리도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있느냐고요. 동포 아닌 인류적 차원에서 관심을 가지는 게 당연한 게 아니냐고 말이죠. 


그 대상이 ‘북한’이기에, 고난의 행군에서 살아남아 북한을 탈출해 남한으로 내려와 북한의 실상을 폭로하는 ‘북한이탈주민’이기에, 남한의 보수와 정치·이념 지향점이 맞닿을 수밖에 없기에, 관심을 가질 수 없던 이들이 많았을 테고 관심을 가졌어도 내색할 수 없던 이들이 많았을 테며 관심을 가지기 싫었던 이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저자의 바람과는 별개로 솔직히 정치·이념적으로 생각의 물꼬가 자연스레 터지지 않기가 힘듭니다. 우리 모두 한국 사람이고, 한국 사회를 구성하고 있기 때문이죠. 저자의 말마따나 한국 사회의 정치·이념 지형에서 북한 문제는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만큼 진영 간 정쟁 소재로 소모되다가 갈피를 잃지 않나요. 


다만, 이 책이 저자의 바람대로 그런 길을 걷지 않는다면, 지극히 객관적인 시선으로 고난의 행군 시기 속절없이 굶어 죽어간 인민들의 존엄만을 생각하는 데만 그 몫을 다한다면, 우리 한국 사회는 비로소 바람직한 사회로 진입했다고 생각해도 될 것 같습니다. 이해하고 공감하고 인정하는 사회, 우리 모두가 바라지만 너무나도 진입하기 힘든 사회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팔과 다리의 가격>은 이 남북 해빙 시기에 오히려 더 많이 읽혀야 할 책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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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간 책 다시읽기] 김훈 작가의 <칼의 노래>


김훈 작가의 소설 <칼의 노래> 표지 ⓒ문학동네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위대한 위인 세 명을 뽑자면, 고구려의 광개토대왕과 조선의 세종대왕, 이순신을 뽑지 않을까 싶다. 광활한 만주 대륙을 정복하고, 길이 남을 한글을 창제하였으며, 백전 백승으로 나라를 지켰다. 이 세 위인은 드라마(태왕사신기, 뿌리깊은 나무)와 영화(명량)은 물론 소설(뿌리깊은 나무, 칼의 노래)로 잘 알려져 있다. 


두 왕에겐 정치적 내홍이 없었다. 큰아버지 소수림왕이 국가의 틀을 완벽히 잡고 아버지 고국양왕이 잘 이은 와중에 뒷탈 없이 정복 전쟁에만 힘을 쏟은 광개토대왕, 아버지 태종이 대대적 숙청으로 완벽하게 왕권을 강화한 와중에 백성들을 위해 힘을 쏟은 세종대왕. 이러나 저러나 그들은 '왕'이었던 것이다. 


반면, 이순신에게는 평생 정치적 내홍이 뒤따랐다. 나라가 통째로 넘어가게 생긴 마당에 오직 이순신밖에 없을 정도의 위기 상황에서 이순신으로만 향하는, 향할 수밖에 없는 민심을 두려워한 왕(선조)과 왕을 따르는 무리들의 시기와 질투. 이순신은 외부의 적을 절대적으로 막아내야 하는 의무를 수행하는 동시에 내부의 적도 절대 무시할 수 없는 상황을 전쟁 내내 겪어야 했다. 


그는 역사에 길이 남을 절대적 영웅임에 분명하지만, 그러하기에 더더욱 이리저리 휘둘리고 고민하고 자책하고 그러면서도 앞뒤를 막아야 하는, 철저히 발가 벗겨진 인간 이순신을 알아야만 한다. 이 말도 안 되는 사면초가의 상황에서 이순신은 어떻게 해야 했을까. 어떻게 하고 싶었을까. 어떻게 했을까. 김훈 작가의 명작 소설 <칼의 노래>는 영웅 이순신이 아닌 인간 이순신을 알게 하는 좋은 기회를 선사한다. 


이순신이 감당해야 했던 것, 삶과 죽음


소설은 이순신의 백의종군으로부터 시작된다. 때는 1597년 4월 초, 같은 해 1월 일본군을 공격하라는 선조의 명령에 불복한 죄로 파직되어 서울로 압송된 후 고된 신문을 받은 후 3개월 만에 풀려난 것이다. 7월에 칠천량 해전으로 조선 수군이 궤멸되고, 8월 초에 이순신은 삼도수군통제사로 복귀한다. 그에게 남은 함선은 12척뿐이었다. 그는 12척으로 명량해전의 기적을 일으킨다. 


명량의 기적 이전에도 이후에도 그에겐 참으로 비현실적인 고민이 따라다녔다. 어디서, 어떻게 죽어야 하는지. 항상 사지(死地)를 물색했다. 전쟁을 치르며 이순신에겐 가족이 하나둘 죽어갔다. 당시 조선 어느 누가 그러지 않았겠냐마는, 머나먼 곳에서 나라의 명운을 홀로 짊어지고 있는 그에게 가족의 죽음을 생각하고 슬퍼하는 건 일종의 사치와 다름 아니었던 것이다. 


또한 수많은 적들을, 적들이지만 누군가의 가족임에 분명한 그들을 죽음으로 내몰기도 하였고 그 때문에 수많은 백성과 아군들도 죽어나갔다. 그에게 이 세상은 더 이상 유의미한 게 아니었다. 무의미한 세상을 살아가는 이유는 오직 하나였다. '내가 죽으면 조선은 끝장이다'.


사지를 물색한 건 당연한 것일 수도 있다. 적의 완벽한 궤멸과 절대적인 철수를 지켜본 후에야 눈을 감을 수 있었을 테고, 혹시라도 모를 그 이전의 죽음으로 조선 전체가 피로 물들지 않게 또는 덜 물들게 전라도 해안이 아닌 경상도 해안에서 죽어야 했다. 그에게 삶은, 죽음은 무엇이었을까. 


김훈은 이순신을 짓누르는 그 무게를 온전히 느낄 수 있게 1인칭 시점으로 그려낸다. 분명 이순신이라는 무게에, 이순신이 느꼈을 삶과 죽음의 무게에 처참하게 짓눌렸을 텐데, 그것들을 온전히 글로 승화시켜 우리에게 보여준다. 이순신이 감당했어야 할 모든 것들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참으로 많이 힘들고 아팠겠다. 


영웅 아닌 인간 이순신


시종일관 이순신이 염두에 두는 건 적만큼 알 수 없는 임금 선조의 의중이다. 임금은 이순신을 죽여야 사직을 보존할 수 있다고 믿었다. 조선의 국토가 유린당하는 와중에 백전 백승의 그에게로 쏠리는 민심이 두려웠다. 하지만 임금은 이순신을 살려야 사직을 보존할 수 있다는 걸 알았다. 임금은 적에게서 사직을 보존하고 싶었다. 이순신은 살았고 적 덕분에 적 앞에 섰으며 적을 무찌르고 나서는 임금의 손에 죽을 것이었다. 


진정한 절망은, 현재의 좌절에서 오지 않는다. 미래의 희망없음에서 오는 것이다. 이순신에게 미래 따위는 없었다. 결정된 죽음만이 있을 뿐. 그가 할 수 있는 건 그래서 사지를 물색하는 일뿐이었다. 그가 싸운 건 외부의 적(왜)과 내부의 적(임금), 그리고 무의미한 이 세상 그 자체였다. 


이순신은 세상에 칼로 베어버릴 수 없는 것들이 너무 많음에 절망했다. 오직 적들만 베어버릴 수 있었고, 그래서 그는 벨 수 있는 걸 벴다. 하지만 임금을 벨 수 없었고, 무의미를 벨 수 없었다. 악몽도, 끼니도, 자책도, 그 어느 것도 칼로 벨 수 없었다. '인간' 이순신에게 칼로 벨 수 없는 것들은 참으로 힘겹게 다가왔다. 그는 괴로웠다.  


<칼의 노래>에서의 이순신은 인간 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심지어 유약하다고 표현할 수도 있다. 맹렬히 진격하는 적의 칼끝을 피해 물러서기만 반복하다가 매복한 아군과 함께 적을 섬멸하고, 뭍의 적군 포탄이 닿지 않는 곳에서 정박되어 있는 적군 배를 섬멸하고, 물길과 뭍지형을 살펴 적이 스스로 섬멸되게 하고... 그가 행했던 백전백승 전투는 화려하지 않았고, 그의 전쟁은 그 전투들에 있지 않았다. 


이 소설을 기점으로 이순신은 더 이상 절대무력으로 적에게서 완전한 승리를 쟁취한 영웅전설의 주인공이 아니게 되었다. 이순신은 절대적으로 이겨야 하는 상황에서 화려하지 않은 완벽한 승리만을 원해야 했던 망국의 마지막 희망이었다. 완벽과는 거리가 너무도 멀었던 그, 그래서 역설적으로 이순신은 역사상 그 어느 위인보다 추앙받아 마땅하다. 이 책은 완벽히 수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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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일급 살인>


영화 <일급 살인> 포스터. ⓒ워너브라더스



미국 캘리포니아 로스앤젤레스 앞바다 한 가운데에 있는 알카트라즈 섬, 1934년 그곳에 알카트라즈 연방 교도소가 문을 연다. 갱들이 한창 위세를 떨치던 때에 선전용으로 문을 열었다고 하는 이곳은 인류 역사상 가장 유명한 교도소라고 할 만한데, 미국에서 활동한 이탈리아계 마피아 거물 알 카포네가 수감되었었고 1963년 폐쇄될 때까지 단 한 명도 탈출하지 못했으며 재소자의 권리보장이 최악이었다.


폐쇄 후 몇 년 간 방치하였다가 1972년 이곳을 국립공원으로 지정하고 지금까지 관광지로 활용하고 있는데, 생전(?)의 그 유명함으로 소설, 게임, 영화, 드라마, 만화 등수많은 콘텐츠에 등장하였다. 마이클 베이의 유일하다시피 한 명작 액션영화 <더 록>에서 정부에 의해 토사구팽 당한 특수대원들이 탈취해 요새화한 곳이 바로 이 곳이다. '더 록'은 알카트라즈 교도소의 별칭이기도 하다. 


<더 록>과 거의 비슷한 시기에 나온 명작 법정영화 <일급 살인> 또한 이곳이 주요 배경이라 할 만하다. 교도소의 기능이 구금과 교정에 있는 만큼, '가장 유명한 교소도' 알카트라즈는 탈옥 절대 불가의 철통 경비와 함께 재소자의 재활과 교육과 교화를 가장 투철하게 시행하는 곳이어야 마땅하겠다. 과연 그랬을까?


일급살인죄


영화 <일급 살인>의 한 장면. ⓒ워너브라더스



영화는 주인공 헨리 영(케빈 베이컨 분)을 비롯한 4명의 재소자들이 알카트라즈 탈옥을 하다가 실패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이로 인해 두 명은 현장에서 사살되고 맥케인은 밀고하여 추가 처벌을 받지 않고 헨리 영은 독방에 갇혀 3년 동안 있는다. 알카트라즈의 독방 정책은 19일 이상 감금 금지였다. 


영은 가끔씩 방문하는 소장의 독방 실태를 점검으로 풀려나 일반 감방으로 이동한다. 하지만 이미 그는 너무나도 오래된 독방 생활로 정신이 이상해져 있었던 바, 식사시간 때 어디선가 들려오는 목소리를 따라 배신자 맥케인을 죽인다. 그는 곧 정상참작의 여지가 없는 일급 살인으로 기소된다. 


초짜 국선 변호사 제임스 스탬필(크리스찬 슬레이터 분)가 영을 변호하게 된다. 스탬필은 그를 돕고자 하지만, 영은 자신이 반드시 죽게 될 거라는 사실을 알고는 일절 자신을 변호하려 하지 않는다. 아니, 그는 죽는 것보다 완전히 무혐의가 되기 전까지 그곳으로 돌아가 있는 것이 훨씬 더 두려웠던 것이다. 이에 스탬필은 다른 루트로 조사를 이어 나가고, 영이 처참하기 이를 데 없는 환경의 독방에서 3년 동안 있었고 그로 인해 살인을 저질렀다는 결론에 이른다. 


대상과 인간


영화 <일급 살인>의 한 장면. ⓒ워너브라더스



영화는 '탈옥자 재활을 위한 독방과 참작의 여지 없는 일급 살인자' 대 '규정을 어긴 처참한 독방 환경과 그로 인한 정신 이상 하에서의 살의 없는 살인'이라는 프레임의 대결이라는 외향을 띤다. 교도소 입장에서 재소자는 교화와 재활의 '대상'일 뿐이고, 스탬필 입장에서 영은 엄연히 인권을 지니고 있는 '인간'이다. 


여기에 일절 요지부동의 '옳고 그름'이라는 재단기를 이용할 순 없을 것이다. 이 두 집단이 내세우고 있는 주장의 요지에 '틀린' 말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두 팽행선에는 모든 걸 포괄하면서도 또 다른 개념을 재단기로 써야 한다. 이 실화를 영화로 옮기면서 선택한 궁극적 재단기는 다름 아닌 '존엄성'이 아닌가 싶다. 


스탬필이 주장하는 인권은 교도소가 주장하는 인권 없는 탈옥범의 교화 및 재활이라는 프레임을 완벽히 이길 수가 없다. 반면, 인간의, 생명의 존엄성은 영에게만 적용된, 저지른 죄에 비해 터무니 없는 죗값의 비애와 만나 시너지를 일으킬 여지가 있다. 인간의 존엄성이란 모든 인간에게 적용되어야 할 의무를 지니지 않는가. 개인적으로 동의하진 않지만, 심지어 명백히 인간 이하라 할 만한 인간들에게까지도 말이다. 


더불어 영화가 저격하려는 대상은 영의 살인이 아닌 알카트라즈의 비(非) 교도소적인 생태이다. 이는 극 중에서 스탬필이 (보는 이에 따라선) 영악하게 기존의 프레임 전쟁을 이탈해 새로운 프레임을 만드는 전략이기도 한데, 영은 그 자신은 물론 가정이나 나라나 사회에 의해서가 아닌 알카트라즈 교도소에 의해 살인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 사실'만' 맞는 건 아니겠지만, 이 사실 '또한' 맞는 건 분명하다. 


영과 스탬필 이야기


영화 <일급 살인>의 한 장면. ⓒ워너브라더스



이 영화가 20년의 세월이 지나서도 명작의 칭호를 달고 있는 건, 비단 단순 법정영화에서 보이는 프레임 너머 또는 이면까지를 들여다봐서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거기엔 두 주인공 헨리 영과 제임스 스탬필의 이야기가 있다. 그들은 비슷한 나이에 둘 다 소싯적에 5불을 훔쳐봤지만, 한 명은 교도소에 와 있고 한 명은 변호사가 되어 있다. 


스탬필은 영을 위해, 아니 영으로 투영되는 '정의'를 위해 참으로 많은 것을 포기한다. 영은 자신을 위해, 아니 자신의 3년 독방 생활로 투영되는 '삶보다 나은 죽음'을 위해 삶을 포기한다. 그렇게 영은 자신의 삶을 살릴 스탬필이 아닌 친구 스탬필을 원하지만, 스탬필은 결국 자신이 추구하는 인생관의 열망과 추구를 위해 의뢰인 영을 원하는 것이다. 영화는 그런 피상적인 관계에서 인간적인 관계로 나아가는 이들을 보여준다.


더불어 영화는 스탬필과 영의 성장 이야기이기도 하다. 인생에 있어서 인생관 추구와 함께 모든 이가 추구할 것 같은 정의의 실현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스탬필이 깨닫고, 행동하는 것도 그에 반응하는 것도 심지어 죽음까지도 두려움 없이 본인의 의사에 의해 시행할 수 있다는 것을 영이 깨닫는 것 말이다.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승리였다. 


영화 내내 시종일관 입을 열지 않았던, 아니 못했던 헨리 영은 스탬필의 바람대로 보는 우리의 기대대로 '왜 맥케인을 죽였는지' '알카트라즈 독방에서 어떤 짓을 당했는지' 자세히는커녕 대략도 이야기하지 않는다. 하지만 본인이 직접 증인석에 서서 죽음도 불사하는 엄청난 두려움을 뚫고 위대한 한마디를 입에 올린다. 


"저는 무기 대용이었지만 살인자는 아닙니다. 살인자는 그들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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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트루먼 쇼>


영화 <트루먼 쇼> 포스터. ⓒ파라마운트 픽쳐스



'굿모닝, 미리 인사하죠. 굿 애프터눈, 굿 이브닝, 굿 나이트.' 성격 좋고 무난한 트루먼 버뱅크(짐 캐리 분)는 조그마한 섬에서 살며 보험회사에 다니는 평범한 직장인이다. 그는 대학 동창 메릴과 결혼했고 역시 대학 동창 말론과 절친 사이다. 트루먼은 대학 때 잠깐 만났다가 황망하게 헤어진 로렌을 만나러 피지로 여행을 가려 한다. 하지만 그는 어렸을 때 바다에서 아버지를 잃고 물 공포증을 앓고 있다. 


그런 와중에 이상한 일들이 벌어진다. 하늘에서 조명기구가 떨어지질 않나, 죽은 줄로만 알았던 아버지를 만났는데 갑자기 누군가가 와서 끌고가버리질 않나, 차를 타고 가는데 라디오에서 자신의 이동경로를 고스란히 생중계하고 있질 않나. 하지만 엄마와 아내는 그의 말을 전혀 믿어주질 않고, 말론은 그의 말을 믿는 대신 자신을 믿어야 한다며 위로의 말을 함께 건넨다. 


한편, 트루먼은 태어나기도 전부터 전 세계 수백만 명 시청자에게 완전한 리얼리티 삶을 보여주는 '트루먼 쇼'의 주인공이다. 그가 사는 섬은 그 자체로 거대하기 이를 데 없는 세트장이고, 그와 관련된 모든 사람과 섬에 사는 모든 사람이 연기자이다. 이를 총괄기획한 크리스토프는 '트루먼 쇼'를 진짜 삶이자 특별한 삶이라 믿는다. 그리고 모든 게 완벽하게 만들어진 그곳을 천국이라 믿는다. 


거장과 최고의 도전이 빚어낸 최고의 작품


영화 <트루먼 쇼>의 한 장면. ⓒ파라마운트 픽쳐스



영화 <트루먼 쇼>는 1990년대 최고의 인기를 구사한 짐 캐리의 대표작 중 대표작이다. 그의 필모에서 <마스크> <덤 앤 더머> <에이스 벤츄라> 등의 코미디와 <이터널 선샤인>이라는 드라마를 잇는 코미디 드라마라고 할 수 있는데, 이후 <마제스틱> <예스맨> 등으로 이어졌다. 


한편 피터 위어 감독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일찍이 70년대에 칸영화제를 섭렵하며 호주의 거장으로 이름 높은 그는 잘 알려진 명작 <죽은 시인의 사회>,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수작 로맨틱 코미디 <그린 카드>로 유명세를 떨쳤다. <트루먼 쇼>라는 코미디가 가미된 드라마로 정점을 찍었고 이후 <마스터 앤드 커맨더>와 <웨이 백>이라는 대작 느낌이 물씬 풍기는 두 작품을 끝으로 더 이상의 활동을 하지 않고 있다. 


영화는 피터 위어라는 거장의 작가정신과 여유, 짐 캐리라는 당대 최고의 '코미디' 배우의 도전 아닌 도전이 빚어낸 최고의 작품이다. 몇 번을 봐도 '재미'를 보장하는 이 영화는, 지금은 일상화되어 있거니와 그래도 여전히 열광하는 몰래카메라 또는 리얼리티 프로그램와 연결되어 있다. 제작진의 주장에 따르면, 트루먼의 진짜 인생이다. 


몇 번을 보면 보이는 '논란'의 부딪힘은, 트루먼 쇼를 만든 크리스토프의 철학과 믿음과 연결되어 있다. 그는 한 사람의 인생을 송두리째 좌지우지 하는 이른바 '신'과 같은 위치에 있다고 할 수 있는데, 다분히 '비인간적인' 방송 철학과 맞닿아 있는 그의 '인간적인' 믿음이 현대사회의 모순적인 병폐를 상징하는 것 같다. 


매스미디어 병폐의 우화


영화 <트루먼 쇼>의 한 장면. ⓒ파라마운트 픽쳐스



모든 것이 만들어지고 조작되어진 이 세계, '트루먼 쇼'의 세계에서 트루먼이 갖는 의미는 무엇일까. 크리스토프는 말한다. 그가 특별한 삶을 살고 있다고, 우리가 사는 곳은 역겹지만 그가 사는 곳 씨헤이븐은 천국이라고 말이다. 더욱이 트루먼은 가짜가 아닌 진짜 삶을 살고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거기엔 '진실'이 없다. '트루먼 쇼'에서 트루먼만이 진실을 모르고 있는 것이다. 


'트루먼(truman)'이라는 이름을 들여다보자. '트루', 즉 진실(true)라는 단어에서 추출했다는 게 명백하다. 트루먼은 진실을 알아야 할 권리가 있고, 결국 이 트루먼 쇼의 결말은 트루먼이 진실을 찾아 가는 것으로 결말이 날 공산이 크다. 그게 비록 그의 삶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결과를 초래할지라도 말이다. 


한편, 이 영화를 지탱하는 다른 큰 축 크리스토프(christof)가 갖는 의미는 무엇일까. 그의 이름은 전지전능하신 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christ)에서 온 게 분명하다. 그는 트루먼의 인생뿐만 아니라, 트루먼이 사는 세계와 그 세계에서 일하는 연기자 모두에게 자신의 철학을 주입시켰다. 그들은 모두, 특히 트루먼의 아내와 절친은 사생활과 사회생활이 따로 없는 인생을 영위하고 있고 그게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오히려 모든 게 진짜 인생의 일부분이고 숭고하며 축복받았다고 생각한다. 


'완벽한 통제'를 '약간의 통제'라고 생각하는 그들의 믿음은 크리스토프의 철학에 기초한 것이고 그 철학에 쉼없이 숨을 불어 넣고 있다. 가히 '방송 예술'이라 칭할 만한 이 작태는, 수많은 광고가 딸려 있는 시청률과도 맞닿아 있는 바 현대사회를 지탱하면서도 파괴시키고 있는 여러 병폐 중 하나인 '매스미디어 병폐'를 신랄하게 꼬집고 있는 우화이기도 하다. 


누구도 매스미디어를 피해갈 수 없다


영화 <트루먼 쇼>의 한 장면. ⓒ파라마운트 픽쳐스



매스미디어 병폐 중에서도 가장 큰 병폐는 통합, 통제 등의 전체주의 잔재들이다. '통합'이라는 긍정적인 단어는 '통제'와 함께 할 땐 더할 나위 없이 악랄한 단어가 되고 만다. 영화에서 그것은 크리스토프가 만들어낸 가상임에 분명한 진짜 세계에 블랙홀처럼 모든 걸 쓸어담아버리는 걸 뜻한다. 


'천국'이라 명명되어진 그곳은 크리스토프의 명명백백한 철학과 그 철학을 뒷받침하는 어마어마한 시청률 아래에서 모든 것이 허용되고 가능하다. 그건 작은 나라의 예산과 맞먹는 엄청난 돈과 인력이 투입되어 철저하게(누군가 생각하기로는 약간의) 통제가 실시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매스미디어를 접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세상 어딜 가든 매스미디어가 우릴 반기고 유혹하고 협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누구도 매스미디어를 피해갈 수 없다. 거기에 아무런 생각없이 그저 즐기기만 하는 사람도, 거기에 그 무엇도 비할 수 없는 심각성을 느끼고 비판적인 시각으로 보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크리스토프의 말마따나 우리 모두 거기에 어떤 식으로든 익숙하고 안주하기 때문인 것이다. 


방법은 '진실'뿐인가. 매스미디어가 어떤 식으로 만들어져 우리 눈앞에 보여지는지 속속들히 아는 것인가. 아니, 그 이후에 크나큰 절망감을 느낄 게 자명하다. 트루먼이 '트루먼 쇼'의 진실을 알고 그 세계를 탈출하게 된다고 해서 그는 그의 진짜 삶, 스타가 아닌 평범한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 우리가 매스미디어의 진실을 안다고 해서 달라질 게 있을까? 


이 재미있는 영화는 끝까지 그 재미를 놓치지 않은 채 거대하고 진지하고 속절없는 물음만 던져놓는다. 우리는 그 막막한 물음 앞에 한동안만 멍하니 생각하다가 아무렇지도 않게 그리고 당연한듯이 다른 매스미디어를 찾을 것이다. '트루먼 쇼'가 아닌 또 다른 재미있는 프로그램을 찾아 채널을 돌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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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번지점프를 하다>


영화 <번지점프를 하다> 포스터. ⓒ눈엔터테인먼트



1983년 여름의 비가 쏟아지던 어느 날, 버스를 기다리고 있던 서인우(이병헌 분)의 우산 속으로 젊은 여인이 달려 들어온다. 첫눈에 반한 게 분명한 인우는 왼쪽 어깨가 젖어가는 줄도 모른 채 멍한 표정이다. 그렇게 헤어지고는 매일 같이 그 자리에서 우산을 들고 기다리는 인우다. 


다시 한 번 어느 날, 학교 교정에서 그녀를 발견한다. 국문학과 서인우와 조소과 안태희(이은주 분)의 만남이 시작된다. 급속도로 친해져 사귀게 된 그들, 여타 커플과 다를 게 없어 보인다. 하지만, 인우가 군대를 가게 되었을 때 태희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들의 관계는 그렇게 끝이 났다. 


17년이 지나 인우는 고등학교 국어 선생님이 되었다. 가정을 꾸리고 딸까지 있는 그인데, 태희를 아직 잊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그가 담임으로 있는 반의 임현빈(여현수 분)이라는 학생이 자꾸 태희를 연상시키는 것이다. 처음에는 그럴 수 있다는 정도로 넘어 갔지만, 너무나도 디테일한 부분까지 계속 보임에 인우는 현빈이 태희임을 알아보는데... 17년 전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 현빈이 태희일까? 


판타지적 장르가 섞인 멜로/로맨스 영화


영화 <번지점프를 하다>의 한 장면. ⓒ눈엔터테인먼트



2000년대가 시작되기 바로 직전까지 <접속> <약속> <8월의 크리스마스> <미술관 옆 동물원> <연풍연가> <내 마음의 풍금> 등의 주옥같은 멜로/로맨스 영화가 쏟아져 나왔다. 그 기세는 2000년대 초반까지 계속되는데, 와중에 정통이 아닌 판타지 장르가 조금 섞인 멜로/로맨스 영화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동감> <시월애> <번지점프를 하다> <클래식> <내 여자친구를 사랑합니다> <인어 공주> 등이 기억에 남는다. 영화 <번지점프를 하다>는 2000년대 초반의 판타지적 장르가 섞인 멜로/로맨스 영화 판도에서 꽤 큰 비중을 차지한다. 이 영화에서 판타지적 장르는 지극히 수단일 뿐이다. 


영화는 1/3을 정말 소소하고 평범한 사랑의 시작을 보여준다. 분명 거기에는 일부러 보여주지 않고 감춘 절절함이 있을 텐데, 아니나 다를까 17년 후를 다룬 후반부에서 하나하나 회상하며 강도를 높여가는 특별하고 본질적인 사랑의 행태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다. <번지점프를 하다>는 '본질'에 관한 영화이다. 거기에 '사랑' 정도를 덧붙일 수 있겠다. 사랑의 모습은 '남자와 여자' '남자와 남자' '인간 대 인간'까지 나아간다.


사랑의 외연 그리고 본질


영화 <번지점프를 하다>의 한 장면. ⓒ눈엔터테인먼트



영화를 처음 보면 특별할 것 없는 초반 1/3 보다 후반 2/3을 눈여겨볼 수밖에 없다. 판타지적 장르를 수단으로 썼듯이, 동성애적 코드도 수단으로 써버리면서까지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있을 것이다. 그 메시지가 2001년 당시에는 꽤 파격적이었고 지금에 와서는 여러 사랑의 정의 중 한 방면의 정석이라 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외연 상 인우가 남학생 현빈에게 마음이 가는 건 당연히 동성애적 끌림이라 볼 수 있다. 그가 태희를 연상시키는 것도 모자라 태희 그 자체라는 확신이 선다 해도 말이다. 다분히 판타지적 설정임에 분명하기 때문인데, 이 부분에서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사랑의 정의가 드러난다. 사랑은 외연이 아닌 본질이라는 것 말이다. 


인우에게 현빈은 현빈이 아닌 태희다. 평생 단 한 사람만을 사랑한다는 그의 마음 속에 영원히 남아 있는 그녀 태희 말이다. '남학생' 현빈은 껍데기일 뿐이라는 등식이 성립됨과 동시에, 그들의 사랑이 아주아주 오래 전부터 이어졌을 거라는 등식도 성립된다. 아주아주 오랜 후에도 계속될 거라는 등식도 역시. 


절벽에서 바다에 떨어지면 기적이 벌어지지 않는 이상 죽고 말지만, 같은 절벽에서 번지점프를 하면 기적이 벌어지지 않는 이상 살아 돌아와 다시 만난다. '본질'이라는 사랑의 정의에 만나는 사람은 반드시 헤어지게 되어 있고 떠난 자는 반드시 돌아오게 되어 있다는 '회자정리 거자필반'의 불교 색체가 덧붙여졌다고 할 수 있겠다. 


인간 대 인간의 사랑


영화 <번지점프를 하다>의 한 장면. ⓒ눈엔터테인먼트



영화가 말하는 '본질'의 사랑의 정의는 태희의 현빈화가 전부는 아니다. 또 다른 차원까지 나아갈 수 있는데, 남자를 사랑한다는 외연과 여자를 사랑한다는 본질적 외연을 넘어서 인간을 사랑하는 본질까지 내다본 것이리라. 인우가 남학생의 모습을 한 태희를 사랑한다는 건, 여자 태희가 아닌 인간 태희 그 자체를 사랑한다는 반증이다.


굳이 등식화 하자면 남자 현빈->여자 태희->인간 태희인데, 그 스스로도 남자 인우, 가장 인우, 동성애자 인우 등의 정체성을 넘어선 인간 인우가 되는 순간이다. 이 영화는 사랑의 정의를 이 정도까지 진척시켰고 이 정도에서 멈췄다. 현빈이 그저 남학생 정도로 나왔으니 망정이지, 동물이나 벌레로 나왔으면 어쨌겠는가. 


결혼하기도 한참 전 지금의 아내랑 막 사귀기 시작했을 때 그녀가 자주 물어봤었다. "나 사실 남자야. 나이도 엄청 많아. 그런데도 나랑 사귈 거야?" 나는 그때마다 "그래. 당연하지."라고 답했다. 그땐 반은 장난이고 반은 진짜일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시간이 흘러 결혼하고 나서 그때를 돌이켜 보면서, 아내가 '나라는 인간을 사랑하는 건지' 시험해본 거라고 말했다. 


흔히 "다음 생애에도 지금의 남편 혹은 배우자와 다시 만날 거나?"라고 묻곤 한다. 그때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반 장난 반 진담으로 "훨씬 예쁘거나 멋있고 훨씬 돈 많은 사람과 만날 거다."라고 말하곤 한다. 그러며 '운명의 상대'를 찾는 것이다. 이 영화는 바로 그 운명의 상대가 다름 아닌 아주 오래 전부터 만나왔던 단 한 사람이고, 그 어떤 모습을 하고 나타나도 그 역시 그 한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다. 


지금 사랑하는 사람과 살고 있는지? 사랑할 수밖에 없는 사람과 살고 있는지? 그 인연의 끈, 그 형용할 수 없이 길고 끝과 끝이 만날 수 있는 비현실적인 확률을 되새기며, 극 중 서인우의 대사를 읊어본다. "이 줄은 세상인데 이 세상 아무 곳에다 작은 바늘 하나를 세우고 하늘에서 아주 작은 밀씨 하나를 뿌렸을 때 그게 그 바늘에 꽃일 확률... 그 계산도 안 되는 확률로 만나는 게 인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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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모노노케 히메>로 환경을 생각해보다


<모노노케 히메> 포스터. ⓒ월트 디즈니 코리아



북쪽과 동쪽 사이의 어디쯤 에미시 일족이 사는 마을에 재앙신이 출물한다. 차기 족장 '아시타카'는 마을을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활을 날려 물리치지만 오른팔에 재앙신의 각인이 새겨져 죽을 운명에 처한다. 마을의 무녀 히이님으로부터 서쪽에서 불길한 일이 일어나고 있고 재앙신의 출몰도 그곳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라는 말을 듣고 아시타카는 서쪽으로 여정을 떠난다. 중간에 만나게 된 지코보, 그는 지코보에게 사정을 털어놓는데 지코보는 그에게 서쪽 끝에 있는 '사슴신'과 신들의 숲 이야기를 해준다. 


한편, 타타라바 마을은 '에보시'의 탁월한 지도 아래 여자들은 철을 생산하고 남자들은 그 철로 쌀을 거래해 오는 등의 체계로 작지만 탄탄하게 꾸려나가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더 안정되고 지속적이고 잘 돌아가는 마을을 위해 근처 숲뿐만 아니라 사슴신이 사는 신들의 숲까지 파괴하고자 한다. 아시타카에게 저주를 내린 재앙신도 사실 에보시의 총에 맞아 죽어간 멧돼지신이었던 것이다. 아시타카는 이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한다. 여자들뿐 아니라 나병 환자한테도 차별없이 대하는 마을이 아닌가. 


모노노케 히메 '산'은 들개신과 함께 숲에서 살아가며 인간으로부터 숲을 지키기 위해 타타라바 마을의 에보시를 죽이려 한다. 그녀는 아시타카와도 얽히는데, 아시타카가 그녀의 목숨을 구해주기도 하였거니와 어쨌든 아시타카는 타타라바 마을로 대표되는 다분히 '인간' 편은 아닌 것이다. 물론 산도 인간인 만큼 '자연' 그 자체라고 할 순 없다. 아시타카는 인간과 자연의 공존을 꿈꾼다. 과연 그의 바람은 이뤄질까. 


에코니즘과 페미니즘 사이


<모노노케 히메>의 한 장면. ⓒ월트 디즈니 코리아



일본 애니메이션계에 영원히 남을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의 1997년작 <모노노케 히메>, 일본 현지에서 당대 최고의 흥행과 비평을 거머쥔 명작 중의 명작이다. 자그마치 1984년작인 <바람의 계곡 나우시카>와 더불어 미야자키 하야오의 에코니즘(자연주의) 대표작이라 할 만한 이 작품은 일본 신화에서 모티브를 따온 시대극이다. 


일본 특유의 원령 신화, 일본의 원주민 아이누 신화와 북방계 샤머니즘 신화 등이 혼합된 복합적 일본 신화 체계를 가져다 놓았는데, 그래서 <모노노케 히메>를 통해 일본 신화를 들여다보는 해석 작업도 활발했다. 하지만 미야자키 하야오를 영화의 중심에 놓는다면, 일본 신화보단 에코니즘이 더 정면에 나와야 하지 않나 싶다. 


한편, 에코니즘과 더불어 영화가 추구하는 큰 틀은 페미니즘이다. 전 세계적으로 미투·위드유 운동이 활발한 와중에 유독 일본에서만 잘 되지 않고 있다지 않은가. 그런 일본의 중세시대에 여자는 그저 남자의 소유물일 뿐이었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그런 모습이나 개념을 찾아볼 수 없다. 


타타라바 마을을 움직이는 핵심 인사 에보시는 물론, 핵심 물품인 철을 만드는 이들 모두 여자이다. 남자들도 물론 그 철을 가지고 쌀로 거래를 해오고 전쟁에도 참여하는 등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지만, 여자인 에보시가 진두지휘를 하고 여자들도 전쟁에 참여한다. '자연'의 입장에서 본 '인간'을 상징하는 타타라바 마을을 무작정 매도할 수도 무작정 적대시할 수 없게 만든다. 


에코니즘


<모노노케 히메>의 한 장면. ⓒ월트 디즈니 코리아



그 와중에, 그 사이에 에코니즘이 있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이 영화를 통해 에코페미니즘을 통합해 말하고자 하는 것이지만, 영화 속에서 페미니즘을 행하는 인간들이 정작 에코니즘은 적대시하는 것이다. 아시타카는 이 둘의 공존을 홀로 외롭게 외치고 있고 말이다. 사실 이 영화에서 말하고자 하는 에코니즘은 큰 개념이 아니다. 그렇다고 '자연을 사랑하자' 따위의 단순한 개념도 아니다. 


우선, 자연(신)은 인간의 인간만을 위한 이기심 때문에 터전을 잃었다. 그래서 터전을 다시 찾기 위해 인간과의 전쟁을 이어간다. 설령 그 전쟁이 모두를 파멸로 이끄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이에 인간도 손놓고 있을 순 없다. 그들도 자신의 터전을 지키기 위한 전쟁을 치른다. 


이 폭력의 순환은 인간의 손에서 시작되었다. 지금 우리네 지구를 보자. 인간이 지구상에 출현하기 전, 아니 인간이 농경혁명으로 정착하여 모든 것을 바꾸기 시작하기 전과 비교해 살 만한 곳이 되었는가? 그렇다. 인간의 입장에서 보면, 인간의 터전이 확립되고 인간을 위한 문명이 들어서고 인간답게 살아가기 위한 모든 것이 정립되고 있다.


반면, 자연의 입장에서 보면 어떤가. 인간에게 터전을 빼앗겨 왔고 빼앗기고 있으며 빼앗길 예정이다. 수많은 동식물들이 멸종되고 있으며 '자연환경'이라는 말은 옛말, 촌스러운 말이 되었다. 인간과 자연의 공존? 공생? 아니, 전쟁을 하면 공평하겠지만 이건 일방적인 학살 수준이다. 


진정한 에코니즘


<모노노케 히메>의 한 장면. ⓒ월트 디즈니 코리아



<모노노케 히메>에 나오는 사슴신은 얼핏 인간인 아닌 자연의 편인 것 같다. 하지만 그는 누구의 편도 아니다. 그에겐 회생과 죽음의 능력이 공존하는데, 이른바 '대자연'이라 칭할 수 있을 것 같다. 천재지변이 인간에게만 피해를 주는 게 아닌 자연에게도 큰 피해를 주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이 대자연이 건네는 회생과 죽음의 섭리가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답이라 해도 무방하다. 인간과 자연, 각자의 절대적인 사연 때문에 절대 물러설 수 없다. 그것이야말로, 이치라면 이치이다.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더 이상의 논의 따윈 없다. 인정 후에, 함께 살 방도를 찾아야 한다는 개념 탑재가 수순인 것이다. 그 자체로, 인간에 의해 시작된 전쟁이기에 인간에게 유리하다 해도 어쩔 수 없다. 


그렇기에, '자연을 사랑하자' '자연을 원래대로 돌려놓자'는 일차원적인 개념도 안 된다. 그건 다분히 인간의 입장에서, 인간 위주의 생각이다. 여기엔, 총체적이고 통합적인 자연환경의 입장과 개념과 생각이 필요하다. 주체가 '인간' 또는 '자연'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서로 양보할 건 양보하고 함께 할 건 함께해야 한다. 


문제는, 인간은 자연이라는 게 입장이 없고 생각이란 걸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는 것에 있다. 그래서 자연의 입장을 추측하고 재단한 뒤 실행에 옮겨버린다. 그 자체로 또 하나의 인간 입장일 뿐이다. 사실 일반적인 에코니즘은 여기서 한 발자국도 벗어날 수 없다. 그런 면에서 <모노노케 히메>는 탁월하다. 


만화로서만 표현할 수 있을 테고, 만화이기에 오히려 유치하지 않게 보일 수 있을 텐데, 인간의 입장과 생각만큼 자연의 입장과 생각을 내보이고 있다. 멧돼지와 들개가 말을 하고 또 신이기도 한, 황당하고 낯설지만 그러하기에 오히려 매우 설득력 있는 진정한 에코니즘의 방증이라 하겠다. 


에코니즘에 대해 말할 땐 더 이상 '우린' 또는 '인간'으로 시작하는 구호를 내지 말자. 물론 그것이 어렵다는 걸 알기에, 거기에 최소한의 의미 부여는 하되 절대적인 의미 부여는 하지 말자. 이 대자연에는 우리 인간만이 있는 게 아니지 않은가. 자연도 있다. 우선, 그 사실을 인지하는 것부터 시작하자. 인간과 자연의 존재. 그리고 인간과 자연의 공존으로 나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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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랩 걸>

 

 

<랩 걸> 표지 ⓒ알마


 

'과학책'의 진화가 계속되고 있다. 본래 과학책은 잘 읽히지 않았다. 인류 발전에 없어서는 안 됨에도 불구하고 어렵고 재미없는 과학을 다룬 책이라면 역시 어렵고 재미없다고 생각하는 게 당연한 거 아닌가. 그래서 누군가가 대중화에 앞장섰다. 칼 세이건, 스티븐 제이 굴드 등이 과학의 대중화에 앞장섰다면, 올리버 색스 등은 의학의 대중화에 앞장섰다고 할 수 있겠다.

 

앞서 언급한 세 명이 모두 세상을 떠난 지금에 와서는, 알파고의 출현이나 4차 산업 혁명의 도래 등의 트렌드에 맞춰 과학의 대중화가 상당히 진척된 느낌이다. 그 총체적 접근법은 역시 책이다. '과학책' 말이다. 과학 자체를 대중의 입맛에 맞게 소개하기도 하고, 과학자를 색다르게 대중에게 소개하기도 하며, 때론 그저 과학자가 썼을 뿐 과학과 연결된 게 없는 것 같은 이야기를 건네기도 한다.

 

미국의 저명한 여성 식물학자이자 교수 호프 자런의 <랩 걸>(알마)은 과학자가 썼을 뿐 얼핏 과학과 연결된 게 없는 것 같은 이야기를 중구난방 건네는 책이다. 식물에 대한 다층적이고 다방면인 단편, 종종 드러내는 내외면의 깊숙한 이야기, 그리고 과학자로서 치열하게 사투하는 자전적 에세이까지. 저자는 치밀하게 구성한듯, 마음대로 느슨하게 구성한듯, 크게 세 이야기들을 오가며 식물, 과학, 사랑, 인간을 말한다.

 

식물에서 과학으로

 

저자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나무는 은청가문비라고 한다. 그 나무는 모질고 긴 겨울 내내 초록색을 자랑하며 우뚝 서서 푸른 빛을 발한다. 팔십 년을 넘게 살고는 어느 해 치명적인 실수를 범해 죽고 만다. 때아닌 5월의 폭설 때문이었다. 저자는 그때 비로소 나무가 살아 있는 생명이라는 것을 완전히 이해하게 되었다고 한다. 나무는 삶을 살고 있었다. 사람의 삶과 비슷하면서도 다르게. 고비를 넘겨 최고의 시간을 누리고 시간에 따라 변화했다. 


나무에게서 과학의 정수를 발견했다. 과학은 가르쳐주었다. 모든 것이 처음 추측하는 것보다 복잡하다는 것, 무엇을 발견하는 데서 행복을 느끼는 것이야말로 아름다운 인생을 위한 레시피라는 것, 한때 벌어졌거나 존재했지만 이제 존재하지 않는 모든 중요한 것을 주의 깊게 적어두는 것이야말로 망각에 대한 유일한 방어라는 것을.


사람은 식물과 같다. 빛을 향해 자라난다는 의미에서 말이다. 저자가 과학을 선택한 것은 과학이 저자가 필요로 하는 것을 줄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가장 기본적인 의미의 집, 다시 말해 안전함을 느끼는 장소를 저자에게 제공해준 것이 다름 아닌 과학이었다. 저자의 식물을 향한 관심이 곧 저자의 과학에 대한 깨달음과 이해로 나아간 것이다. 그녀는 식물학자가 될 운명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남자 아닌 여자였다. 그녀는 아빠와 같아지기를 절실히 원하기는 했지만 동시에 극복할 수 없는 큰 산과 같은 엄마의 연장이어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대학 생활은 문학 전공으로 시작했지만 얼마 가지 않아 과학이야말로 진정 속한 분야라는 것을 깨달았다. 머지 않아 과학계에 만연한 성차별을 받게 될 운명. 


과학계 내 성차별은 복잡하고 다양한 요소로 이루어져 있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고 한다. 하지만 저자가 경험한 바에 따르면 성차별은 굉장히 단순하다. 그건 "저 여자가? 그럴 리가."와 같이 지금의 네가 절대 진짜 너일 리 없다는 말을 끊임없이 듣고, 그 경험이 축적되어 짓누르는 무거운 짐이 되는 것이다. 


인간에서 사랑으로


책은, 인간과 사랑에 대한 심오하지 않은 에세이적 고찰, 그래서 훨씬 마음에 와 닿는 고찰로 나아간다. 거의 1년 365일 실험실에 틀어박혀 생활하는 그녀에게도 평생 친구가 생기고, 또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갖는다. 평생 친구는 다름 아닌 빌, 함께 실험실을 꾸려가는 동료이기도 하다. 


빌은 오른손 일부가 없는 장애를 가지고 있기도 하다. 졸업무도회도 가본 적 없다는 그, 저자와 함께 액슬하이버그 섬에 도착해 연구를 할 때 아무도 없는 그곳에서 춤을 추다. 저자는 빌의 바로 앞에 앉아 고개를 쳐들고 그를 바라본다. 빌이 지금 하고 있는 일, 빌이라는 인간, 그 순간의 모든 것을 똑바로 목격하는 증인으로서. 


저자는 야외에서 간단하게 피크닉하는 자리에서 클린트를 만난다. 그들은 사랑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사랑하게 되었고, 서로 사랑하기 위해 노력하지도 희생하지도 않았다. 사랑은 너무 쉬웠고 달콤했다. 인간으로서 가장 행복한 때가 아닐까. 머지 않아 저자는 사랑의 결정체, 임신을 한다. 하지만 임신은 그녀의 일생에서 가장 힘든 일이었다. 그녀는 조울증을 앓았는데 당연히 약을 먹을 수 없었다. 의사와 간호사들은 그녀의 조울증을 설명할 수도 해결할 수도 없었고, 그저 함께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임신 기간 동안 여러 어려움을 겪었음에도 정상적이고 건강한 분만을 했다. 그녀는 아이의 어머니가 아닌 아버지가 될 것을 결심한다. 그게 얼마나 이상한 생각이라는 걸 생각하지 않은 채 그를 사랑할 것이고, 그도 그녀를 사랑할 것이고, 모든 게 괜찮을 거라 생각한다. 훗날 그녀는 아이의 엄마라고 말할 수 있는 날이 온다. 


그녀는 아들이 태어나기 전에는 아이를 사랑할 수 있을까 걱정했고, 태어난 후에는 그녀의 사랑이 아이가 이해하기에 너무 큰 게 아닐까 걱정한다고 한다. 그리고 비로소 깨닫는다. 아들이야말로 그녀가 기다리는 줄도 모르고 기다렸던 기다림의 끝이라는 것, 그 아이는 불가능한 동시에 불가피했다는 것, 누군가의 엄마가 될 단 한 번의 기회가 한 번 그녀에게 주어졌다는 것을 말이다. 


모든 게 과학이고 과학의 눈으로 보면서도 과학은 일이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인간은 빛을 향해 자라난다는 점에서 식물과 같지만, 식물은 중대하고도 기초적인 면에서 인간과 같지 않다. 사랑은, "널 사랑해"라는 말을 어떻게 할지는 모르지만 행동으로 어떻게 보여줄지는 아는 것과 같다. 형체가 없어 만질 수는 없지만 항상 함께 있다는 걸 믿고 느낄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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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오직 사랑뿐>


영화 <오직 사랑뿐> 포스터. ⓒ팝엔터테인먼트



러브스토리는 인간 역사에서 만고불변의 중심축이다. 당연히 인간이 만든 대부분의 콘텐츠에서도 가장 많이 다뤄진다. 심지어 인간을 만들었다는 신들의 이야기인 신화에서도 단연 중심이 되는 게 다름 아닌 사랑인 것이다. 누구나 한 번쯤은 사랑에 울고, 누구나 한 번쯤은 사랑에 웃는, 그것이 바로 사랑 아니겠는가. 


영국 최초 개봉 2년여만에 한국에 소개되는 영화 <오직 사랑뿐>은 사랑 하나로 모든 걸 헤쳐나가는 두 남녀의 실화를 다루었다. 지금으로부터 70년 전, 전쟁의 시대는 끝났지만 차별의 시대는 여전한 그때 흑인 남자와 백인 여자가 사랑에 빠졌다. 문제는, 흑인 남자는 한 나라의 대통령이 되고 백인 여자는 퍼스트 레이디가 된다는 것. 


영화는 달달하지만 때론 끔찍한 사랑의 모습만으로 스크린을 채우진 않는다. 대신 두 사람의 꿋꿋한 사랑으로 수많은 갈등을 헤쳐나가는 모습이 주를 이룬다. 사실 그들이 사랑하는 것 자체가 그 시대에서는 '위험'과 '위대함'이 수반되는 행위였다. 그래서 그들의 사랑을 지금에 와서 다시 들여다보는 건 사랑이라는 식상함 이상의 의미가 있는 것이다. 사랑과 맞물리는 시대를 엿보는 것. 


사랑 하나로 모든 걸 헤쳐나가다


영화 <오직 사랑뿐>의 한 장면. ⓒ팝엔터테인먼트



1947년 전후의 영국, 세레체 카마(데이빗 오예로워 분)와 루스 윌리엄스(로자먼드 파이크 분)는 어느 댄스파티에서 우연히 만나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그들은 흑인과 백인, 사방에서 보는 시선이 곱지 않다. 더욱이 세레체는 당시 영국보호령이었던 베추아날란드의 왕자, 조국으로 돌아가야 한다. 루스는 세레체의 프로포즈를 받아들인다. 


그들의 사랑은 이제 막 시작되었지만, 시련 또한 시작된다. 인종분리정책을 앞세운 영국, 베추아날란드를 호시탐탐 노리는 남아프리카연방, 그리고 세레체 카마의 삼촌 즉, 베추아날란드까지. 전 세계가 그들의 사랑을 반대하는 것이나 다름 없었다. 그래도 그들이 가야할 곳은, 정착해야 할 곳은 영국이 아닌 베추아날란드. 


그들이 넘어야 할 산은 너무 많았다. 삼촌을 비롯한 가족, 베추아날란드 국민, 영국과 남아프리카연방, 언론, 루스에게는 생소하기 짝이 없는 아프리카까지. 오직 사랑 하나로 헤쳐나가기엔 너무나도 험했지만, 그들은 그야말로 오직 사랑 하나로 모든 걸 헤쳐나간다. 사랑이 삶이 되고 삶이 사상이 되고 사상이 세상이 되는 순간을 목격한다. 


한편으론 정치적, 한편으론 로맨틱·드라마틱


영화 <오직 사랑뿐>의 한 장면. ⓒ팝엔터테인먼트



영화는 멜로와 드라마와 다큐멘터리를 오간다. <셀마>에서 위대한 마틴 루터 킹 목사로 열연했던 데이빗 오예로워가 이성과 감성을 울리는 연설과 한없이 달달한 눈빛으로 또 다른 위대함을 선보였고, <나를 찾아줘>에서 그야말로 무서운 아내로 열연했던 로자먼드 파이크가 한없이 여려 보이지만 한없이 강한 아프리카 최초의 백인 퍼스트 레이디의 파란만장함을 선보였다. 


한국 개봉 제목인 <오직 사랑뿐>이 멜로에 중점을 두었다면, 원제인 <A United Kingdom>은 드라마와 다큐멘터리에 중점을 두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영화의 중심에는 두 사람의 절절한 사랑이 위치하지만, 그 이면에 복잡하기 그지 없는 국내외 정치 정세가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종국에 말하고자 하는 건 '베추아날란드'라는 나라가 아닌가. 영화는 이 두 마리 혹은 수십 마리 토끼를 한 번에 잡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느낌이다. 


그건 세레체와 루스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그들의 개인적 사랑과 나라의 공인적 독립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고자 하기 때문이다. 폭압적 시대를 빗겨가려는 또는 정면으로 돌파하려는 그들의 선택들이 서로 떼려야 뗄 수 없게 맞물려 있는 건 참으로 정치적이지만 한편으론 한없이 로맨틱하고 드라마틱하다. 


세계사적 흐름과 내부 및 개인의 선택


영화 <오직 사랑뿐>의 한 장면. ⓒ팝엔터테인먼트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들의 이야기 또한 역사의 한 부분, 역사를 들여다봄에 있어 중요한 건 세계사적 흐름과 내부 및 개인의 선택을 모두 아우르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 영화는 꽤나 탁월한 조망을 보여준다. '사랑'으로 대표되는 멜로를 끝까지 놓지 않은 채 그에 관한 다양한 목소리를 촘촘히 채워나가는 것이다. 


나중에 보츠와나 공화국이 되는 베추아날란드의 면면, 보츠와나 공화국 초대 대통령과 초대 퍼스트 레이디가 되는 세레체와 루스의 면면, 거기에 영국 내부에서도 격렬히 또는 점잖게 오가는 정치적·인도적 차원의 입장에 따른 공방까지. 영화는 전체적으로 차분한 와중에 격정을 토로하고 감성적인 와중에 대단한 이성을 구축하는 한 인간, 나아가 한 나라의 모습 그 자체를 그려내는 것 같다. 


결국 돌고 돌아 사랑이다. 다시 생각해봐도 사랑인 것 같다. 세레체와 루스였기에 그 모든 것이 그들 앞을 가로막았지만, 세레체와 루스가 아니었다면 그 모든 것이 가능했을까. 이 점이 이 영화를 결코 가볍게만 볼 수 없으면서도, 일면 '세기의 로맨스'처럼 가십거리로 봐도 나름대로 의미를 지니는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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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에 몰아보기 딱 좋은 드라마] <하얀거탑>


명작 드라마 <하얀거탑>. ⓒmbc



2000년대 들어서 한국 드라마는 '전형적인 캐릭터', '개연성이 무시된 이야기', '남녀 주인공의 천편일률적인 짝짓기 놀음' 등으로 점철되어 시청자들의 외면을 받아왔다. '시간 때우기'로 전락해버린 것이다. 그걸 타파하기 위해선 '리얼한 직업 세계의 생생한 현장감'과 '살아있는 인간 이야기' 조합에 따른 드라마 패러다임 재판이 필요하다. 


드라마 <하얀거탑>은 2007년 새해 벽두에 드라마 패러다임을 바꾸고자 하는 거창하면서도 명백한 기획의도를 가지고 시작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의 주제로 수렴될 이 명작의 기획의도와 방향은 돌이켜보면 참으로 대단한 도전이고 자기확신에 찬 포부였다. 한국 드라마계의 새로운 기준이자 하나의 혁명과 다름아니었다고 본다. 


물론, 10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방송 3사의 드라마는 <하얀거탑>이 확언한, 시청자들이 외면하는 '시간 때우기'용이 대부분이다. 거기에 옳고 그름의 잣대를 댈 수는 없지만, '드라마'라는 생명체의 시선에서 보면 그른 게 확실하다. 10년 사이에 방송 3사가 아닌 종편과 케이블 채널들이 수없이 생기며 드라마 또한 다양화가 실시되어 <하얀거탑>이 바꾼 드라마의 패러다임을 수용하고 있는 것 같아 한편 다행인 마음도 든다. 


이 드라마는 빈틈과 군더더기 따위는 찾아볼 수 없는 스피디한 전개, 치밀한 복선과 파격적 임기응변이 함께 하는 다양한 장르의 향연, 현실적이고 인간적이며 입체적이기까지 한 캐릭터와 자못 드라마틱하고 한편 비인간적이라고까지 할 수 있는 캐릭터들의 조화 등이 시작부터 끝까지 유기적으로 맞물려 눈을 뗄 수 없게 만들 것이다. 그야말로 한번에 몰아볼 수 있는, 몰아보기에 용의한 드라마라 아니할 수 없다. 


편, MBC 사장이 교체됨과 동시에 드라마의 혁신을 위하여 시간이 필요하던 차에 한국 드라마계 혁신의 대명사 <하얀거탑>을 UHD로 다시 만날 기회를 얻었다. 지난 1월 22일부터 주중 미니시리즈가 시작될 3월초까지 매주 월~목 10시에 만나볼 수 있다. 여러모로 이번 설 연휴가 <하얀거탑> 몰아보기에 적합한 때가 아닐까 싶다. 


인간군상의 집합체 


인간군상의 집합체. <하얀거탑>의 한 장면. ⓒmbc



<하얀거탑>은 온갖 인간군상들의 집합체이다. 이 드라마를 '야망에 불타는 한 천재 외과의의 질주와 파멸'이라 정리해도 될 만큼, 김명민이 분한 장준혁은 지극히 핵심적 인물이다. 그는 흙수저 출신으로 오로지 실력 하나로 국내 굴지의 대학병원 외과 부교수 자리에 올랐거니와 간담췌 분야의 세계적 실력자로 군림하고 있다. 하지만 그에겐 더 큰 야망이 있으니, 일단 외과 과장이 되는 것이다. 그는 끝없는 질주를 시작한다. 


장준혁과는 학생일 때 과에서 1, 2등을 다툴 정도로 수재이지만 정반대의 삶의 기조를 지니고 있는 소화기내과의 최도영(이선균 분) 부교수가 있다. 그는 형제 모두가 줄줄이 의사로 있는 의사 집안 출신으로 오로지 환자를 생각할 뿐 자리에 운운하거나 권력에의 의지 또는 야망 따위는 없다. 장준혁에 비해 덜 인간적이고 덜 입체적인 인물이지만, 장준혁의 인물상을 부각시키는 데 탁월한 역할을 한다. 


한편, 가장 현실적이고 가장 입체적이며 동시에 가장 드라마틱한 인물이 있다. 일명 '고매한 성품의 소유자'이자 4대째 의사로 있는 이주완(이정길 분) 외과 과장. 정년퇴임을 앞두고 '휴머니즘이 없는' 장준혁이를 10년 동안 자신을 모셨음에도 후계자로 두지 않으려 한다. 하지만 그야말로 누구보다 위선적이고 비열하기 짝이 없는 인물이기도 하다. 이 세상의 중심이 자신이어야 하는 것이다. 


이밖에도 외과 과장 이주완의 딸이지만 자신의 위치 같은 건 생각 않고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고 하는 마음과 정신의 소유자 이윤진, 돈이라면 모든 걸 좌지우지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장준혁의 장인어른 민충식 원장, 겉으로는 명분을 내세우고 속으로는 철저하게 이해득실을 따지는 진료 부원장이자 소화기 내과 과장 우용길, 절대 타협 불가의 대쪽 같은 성격의 소유자 병리학과 석좌교수 오경환, 장준혁 말이라면 불에라도 뛰어들 외과 의국장 박건하, 장준혁과 비슷한 환경에서 자라났지만 절대 장준혁처럼 될 수 없는 전임의 염동일 등이 드라마를 탄탄하게 채운다. 


이 드라마에 몰입하게 되는 이유


이 드라마에 몰입하게 되는 이유. <하얀거탑>의 한 장면. ⓒmbc



이 드라마는 몇 번을 봐도 혼란을 불러 일으킨다. 나는 이중에 누구인가, 또는 누구와 맞대응 되겠는가. 말하기 부끄럽지만 그나마 겉과 속이 다른 이주완 과장 또는 비슷한 맥락에서 겉으로는 명분을 내세우지만 속으로는 이해득실을 따지는 우용길 부원장에 가장 가깝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과 함께, 다른 누군가에게 감정을 이입하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그 인물은 볼 때마다 바뀌고, 상황이 바뀜에 따라 역시 바뀐다. 


그게 이 드라마에 가장 큰 장점이라 할 수 있겠는데, 아무래도 장준혁에게 감정을 이입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가 외과 과장이 되는 험난한 길을 거쳐, 치명적이면서 필연적인 실수로 기나긴 법정 공방을 치르고, 와중에 많은 신호가 오지만서도 무시해버린 결과 돌이킬 수 없는 병 때문에 죽음으로 치닫게 되는... 그의 너무도 치열한 삶 앞에서 고개가 숙여지면서도 한숨이 나오는 건 '인생무상'이라는 말 때문이겠다. 


피도 눈물도 없이 모든 걸 뒤로 하고 오로지 앞과 위만 보고 질주하는 것 같은 장준혁이지만, 그에겐 이 세상 누구보다 중요한 어머니가 계시고 속 깊은 모든 얘기를 건네고 위로 받을 수 있는 애인이 있으며 때론 옆도 뒤도 돌아볼 수 있게 만드는 친구 최도영이 있다. 하지만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싶게 만드는 비극적 종말이다. 


그래서 얼핏 보면 선(최도영 등)과 악(장준혁 등)의 대립과 그에 따른 권선징악의 수순이 그려지고 있는 것 같지만, 애초에 선과 악이 명확하게 구분되어 있는지조차 의문스럽게 만드는 대목과 인물들이 매순간 우리를 찾아온다. 더군다나 장준혁이 법정 공방을 치르게 될 때 보란듯이 합심해 정의 편이 아닌 장준혁 편을 드는 대학병원 의사들의 꼬락서니는 더더욱 그런 생각을 들게 만든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이란 무엇인가. <하얀거탑>의 한 장면. ⓒmbc



인생무상, 선과 악의 모호함과 그에 따른 혼란 등은 '인간이란 무엇인가'로의 주제로 수렴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다. 이는 자연스럽게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로 넘어간다. 한두 번 정도 보는 걸로는 절대 답을 낼 수 없는 만큼, 몇 번이고 그것도 한번에 몰아봐야 약간의 답길이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 


이런 생각들, '인간'이라는 한 단어로 이 드라마의 궁극적 물음을 요약할 수 있게 되었을 때 비로소 <하얀거탑>의 진정학 명작화가 시행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 전까지 <하얀거탑>은 그저 굉장히 흥미진진하고 잘 만든 드라마일 뿐이다. 그 이후 <하얀거탑>은 드라마 따위를 뛰어넘는 시대불문 '명작' 콘텐츠가 된다. 


아직 한 번도 접하지 못한 분들께 드리는 경고(?)는, 이 드라마가 결코 의학 드라마가 아니라는 점이다. 여기서 의학은 정치, 법정 공방의 수단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거의 모든 등장 인물이 의사인 이상 의사 세계의 단면을 기가 막히게 그려내고 있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하얀거탑>은 의사 세계도 역시 사람 사는 세계라고 말하며 의사들을 하야디 하얀 순백의 탑에서 지상으로 끌어내린다. 적어도 이 드라마에서는 더 이상 그들만의 세상이 아닌 것이다. <하얀거탑>의 또 다른 위대한 점이 바로 여기에 있고, 우리가 시대를 뛰어넘는 공감을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으며, 드라마로서 보여줄 수 있는 최대치를 뛰어넘거나 본연의 임무를 다한 모습이 여기에 있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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