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리뷰] <아메리칸 사이코>



영화 <아메리칸 사이코> 포스터 ⓒ21세기 엔터테인먼트


하얀 바탕으로 진한 빨간 색의 피가 흐른다. 하얀 바탕은 곧 접시가 되고 피는 곧 먹음직스러운 스테이크의 핏물이 된다. 그곳은 상류층이 즐비한 레스토랑이다. 종업원인지 셰프인지 손님들에게 요리를 내주며 코스를 설명한다. 상류층으로 보이는 손님들은 경청한다. 나만 그렇게 보이는가? 그들의 행세가 매우 지질해 보인다. 그들의 학력은 매우 높을 테고 매우 잘 살고 있으며 또 사회적 지위와 명망도 높을 테지만. 


세상에서 가장 지질한 상류층 인간


영화 <아메리칸 사이코>는 이처럼 메시지를 던지며 시작된다. 피와 핏물의 동질성, 상류층의 지질함. 그리고 그걸 보는 제3자의 시선까지. 주인공 패트릭 베이트만(크리스찬 베일 분) 또한 이 상류층의 일원이다. 그는 아버지가 사장으로 있는 월스트리트 중심가 금융사 P&P의 부사장이다. 27세의 젊은이로, 학력도 높고 잘 생기고 돈도 많으며 무엇보다 자신을 잘 가꿀 줄 안다. 


패트릭은 여지 없이 초고층의 거의 꼭대기에서 근무하며, 순백색의 잘 가꿔진 집에서 산다. 그는 자신을 매우 사랑하고, 그런 자신을 내세우기 좋아하며, 그 이상으로 남에게 지는 걸 싫어한다. 영화가 시작되면 패트릭의 그런 일련의 특징들을 죽 보여준다. 


규칙적인 운동 후에 웬만한 여성보다 더 많은 스킨 케어 화장품으로 자신을 가꾼다. 그는 그런 자신을 누구보다 사랑한다. 그러곤 자신과 같은 부류의 사람들, 즉 아버지를 잘 둔 젊은 부사장들 모임에 참여해 그야말로 쓸 데 없는 이야기로 시간을 축 낸다. 하지만 그들 자신에게는 그런 것들이 중요하다. 하나라도 더 아는 채 하려는 것. 


남에게 지는 걸 싫어하는 특징을 가장 잘 드러내는 장면이 나오는데, 다름 아닌 명함 자랑이다. 형압으로 팠다느니, 계란 껍질을 이용했다느니, 그 어느 것보다도 예쁜 색깔이라느니. 명함을 건네는 것도 아니고 단순히 이번에 명함을 새로 장만했다고 자랑하고 있는 것이다. 완전한 허세다. 그런데 패트릭 만이 각각의 명함 등급을 알아보고 혼자 손을 떨고 식은땀을 흘린다. 자신의 것보다 더 좋은 명함들을 보고서. 



영화 <아메리칸 사이코>의 한 장면. ⓒ21세기 엔터테인먼트



우월함의 증명, 세상에 대한 증오, 결국 살인까지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이런 증세(?)들을 겪고 있을 것이다. 자신을 가꿔서 내놓아 자랑하고 싶고 또 그 중에 제일이 되고 싶어하는 마음. 그러면서 절대 지지 않고 싶고, 졌다는 걸 알고 내색하지 않으려는 의지. 일반적으로 같은 증세라도 해도 상류층이면 상류층다운 증세를 가지고 있을 거라 생각하지만, 영화는 정반대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상류층답게 지질의 급도 높다고 해야 할까. 참 한심하다. 실제로도 그럴까.


패트릭은 같은 일원이지만 제3자적 시선을 드러낸다. 그들은 상류층이면서도 급 높은 지질함을 자랑하지만, 자신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80년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만큼 80년대의 유수 노래들이 많이 나오는데, 모두 패트릭이 신봉해 마지 않는 노래들이다. 패트릭은 수많은 노래들을 듣고 비평한다. 이것은 그가 다른 이들보다 우월하다고 믿는 증거 중 하나이다. 


이 격렬한 증세들과 더불어 우월주의는 결국 살인으로까지 이어진다. 노숙자를 살인하면서 시작된 살인 행각은 여성들로 이어진다. 그러는 와중에 돈으로 산 여자들과 섹스 비디오를 찍기도 하는데, 여지 없이 나르시시즘의 모습을 보이고 자기 과욕이 극에 달한 모습을 보인다. 자신이 우월하다는 걸 증명해 보이려는 수작이 아닌가 싶다. 



영화 <아메리칸 사이코>의 한 장면. ⓒ21세기 엔터테인먼트



영화는 중반 이후가 되면서 패트릭의 엽기적인 살인 행각에 초점을 맞춘다. 자신도 자신을 컨트롤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고, 그걸 자각하지만 더 이상 손 쓸 도리가 없다. 같은 상류층에 위치한 이들에 대한 증오와 함께 자신보다 아래에 위치한 이들에 대한 증오, 즉 세상에 대한 증오가 뿌리 깊어진 것이다. 그는 어쩌다가 그렇게 된 것일까. 감독이 의도한 바는 무엇일까, 영화가 던지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피해자도 많아졌고, 괴물도 많아졌다


제목에서 어느 정도 유추해볼 수 있겠다. 아메리칸 사이코, 즉 미국인 정신병자. 때는 80년대 냉정 막바지. 미국은 세계 패권을 거의 손에 넣었다고 볼 수 있겠다. 승리자가 된 것이다. 그런 곳에서도 상류층인 이들이 누리는 호사는 상상을 초월한다. 돈, 명예, 명성, 특권 등. 거기에 영화는 약물과 여자를 추가한다. 문제는 이들이 제대로 된 교육을 받았느냐는 점이다. 여기서 교육이라 함은 '인성' 교육을 말한다. 돈이면 모든 것이 해결되는 곳에서 인성 따위가 무슨 소용이 있겠냐는 생각이 든다. 받지 않았을 거라 추측된다. 


그런 상태로 최고의 위치에 오른다면 당연히 어떤 문제고 생기지 않을 수 없다. 그의 살인 행각은, 그것도 아주 엽기적인 살인 행각은 그렇게 생겨난 문제의 최악의 표출이라 할 수 있겠다. 인성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자신에 대한 사랑만이 드높고 드러내는 것만 익숙하다. 그러면서 같은 부류의 이들과 행하는 지질하지만 진지한 경쟁, 그 경쟁에서 이기지 못한 채 아래 부류의 이들과 행하는 자기 우월 표출 의식. 결국 경쟁과 우월 표출이 살인으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패트릭도 피해자일까. 이 시대가, 이 사회가 만들어낸 괴물일까. 그의 행각 자체를 두둔할 생각은 추호도 없지만, 그렇다고 볼 수 있겠다. 자본주의가 무너지고 있는 이 시점에서, 이 영화가 던지는 중요하지만 협소한 메시지는 더욱 중요해지고 더 확대되었다. 피해자도 많아졌고, 괴물도 많아졌으며, 피해자이자 괴물인 이들도 많아졌다. 개인적으로 피해자이자 괴물인 이들은, 그것도 하류층이 아닌 상류층이 이들은 피해자임에도 가차 없이 처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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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김씨 표류기>




한강 다리에서 떨어져 내려 자살하려는 한 남자 김씨가 있다. 뛰어 내린다. 그런데 죽지 않았다. 대신 밤섬에 표류 된다. 죽었다 살아난 김씨는 이곳을 떠나 살던 곳으로 가고자 한다. 하지만 이 섬에는 아무도 없다. 아무도 들락거리지 않는다. 즉, 나갈 수 있는 방법이 없다. 그는 눈앞에 고층 빌딩이 보이는 이곳에서 꼼짝 없이 살아야 한다. 


영화 <김씨 표류기>는 얼핏 <캐스트 어웨이>를 생각나게 한다. 설정 상 어쩔 수 없이 그럴 진대, 실상은 완전히 다른 영화이다. <캐스트 어웨이>가 생존과 인생, 방황과 고독에 관한 이야기라면 <김씨 표류기>는 행복과 아픔, 관계와 욕망에 관한 이야기이다. 전자가 공감을 일으킨다면, 후자는 생각할 거리를 많이 던진다. 


버림받은 존재, 고독으로 다시 태어나다


먼저 김씨가 자살하려 했던 이유를 보자. 그는 뭘 해도 안 되는,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존재이다. 누가 보기엔 하찮다고 할 수 있겠지만 그에겐 큰 이유이다. 그렇게 그는 버림받았고 자살을 통해 이번엔 자신이 세상을 버리려고 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고, 아무도 없는 섬에 표류 됨으로써 다시 한 번 버림 받는다. 눈 앞에 보이는 도시를 향해 아무리 소리치고 울고 불고 난리 쳐도 아무도 알아봐 주지 않는다. 


그는 그곳에서 다시금 자살을 시도한다. 그런데 하필 그 순간 참을 수 없는 생리 현상이 발생한다. 그는 대변을 봤고, 목이 너무 말랐기에 또 하필 그 앞에 있던 꽃으로 목을 축인다. 그는 형용할 수 없는 복합적 감정 때문에 서러운 울음을 터뜨린다. 그는 그렇게 다시 태어난 것이다. 이제 그는 살아가기 위해 발버둥 치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더할 나위 없는 완벽한 심심함도 맛본다. 서서히 아무도 없는 완벽한 고독에 적응되어 간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섬이 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섬이 있다'라는 싯말이 있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설명할 때 가장 적합한 구절 중 하나라고 생각하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섬에서 더 이상 나가기 힘들어 할 것이다. 섬에서 나가 그 사람에게로 가게 되었을 때 일으켜지는 반작용은 온갖 것들의 집합이다. 마냥 좋을 수도 마냥 싫을 수도 있다. 그 온갖 것들의 집합 자체로도 충분히 힘들다. 그럴 바엔 차라리 혼자다. 차라리 섬에서 나가기 싫다. 


히키코모리, 즉 은둔형 외톨이는 그런 반작용을 병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이다. <김씨 표류기>의 또 다른 주인공인 여자 김씨는 남자 김씨가 밤섬에 홀로 표류 되어 있는 것처럼, 자신의 방에 표류 되어 있다. 엄밀히 말해 그녀는 표류 되어 있는 게 아니라 표류한 것이리라. 그래서 그녀는 그곳에서 나갈 마음이 전혀 없다. 남자 김씨는 나가려 하고 여자 김씨는 나가지 않으려 한다. 홀로 섬에 갇혀 있는 건 같지만.





자신도 모르게 고독에서 나와 소통을 원하다 


여자 김씨가 유일하게 하는 건 인터넷을 통한 가상 현실 체험인데, 그곳에서 그녀는 아주 멋지고 예쁜 여성이다. 누구와도 접촉하지 않은 채 살아가는 실제와 달리, 그곳에서 여자 김씨는 완벽한 인기인이다. 그녀에게는 취미가 하나 있는데, 밤에 달을 관찰하는 것이다. 그리고 민방위 훈련이 시작되어 아무도 없는 공간을 관찰하고 사진 찍는 취미도 있다. 그녀는 정녕 완벽한 고독의 세계를 원하는 것일까. 


그러던 중 우연히 남자 김씨를 발견한다. 변태 같고 이상하기 짝이 없는 알 수 없는 남자. 그녀는 점차 그의 일거수 일투족이 궁금해졌고, 그동안 지켜왔던 고독의 세계에 조금씩 금이 가는 걸 발견한다. 그녀는 그와의 소통을 갈망하게 된다. 인간이 완벽한 고독의 세계를 갈망하면서도 누군가와의 소통을 꿈꾸는, 아이러니이자 딜레마다. 정답이 없기에 끊임없이 방황한다. 그 속에서 행복을 느끼고 아픔을 느낀다. 


인간 관계에 있어 모든 면에서 동일하게 적용될 것이다. 연인 관계, 친구 관계, 부모와 자식 관계, 상사와 부하 관계 등. 서로를 필요로 하지만, 또 서로를 극도로 증오하기도 한다. 서로를 누구보다 사랑하고 아끼지만, 그러면서 서로를 누구보다 경멸하고 아프게 한다. <김씨 표류기>에서 남자 김씨와 여자 김씨도 그렇다. 서로를 알아감에 있어 많은 감정들이 소용돌이친다. 그럼에도 그들은 서로를 알고자 한다. 자신도 모르게 고독에서 나와 소통을 원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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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프라이드 그린 토마토>



영화 <프라이드 그린 토마토> 포스터 ⓒ유니버셜 픽쳐스



오랫동안 풀지 않았던 숙제를 푼 기분이다. 오랜 숙원을 푼 기분이다. 영화 <프라이드 그린 토마토>를 본 후 느낀 기분이다. 영화를 즐겨 보는 만큼, 추천도 받고 추천도 많이 해준다.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영화를 추천 받아 볼 때는 마치 새로운 세상을 맛 본 것 같다. 추천해준 이가 대단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좋은 영화 한 편에는 뭔가 있는 게 분명하다.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분께 영화 추천을 받는 경우가 드문데, 두 분께 받은 두 편의 영화가 생각 난다. 중학교 2학년 때 큰이모부께서 추천해주셨던 영화, <포레스트 검프>. 이 영화 덕분에 톰 행크스를 좋아하게 되었고, 이후 그의 영화를 챙겨봤었다. 그리고 <포레스트 검프>는 그야말로 내 인생 최고의 영화로 남아 있고, 앞으로도 그럴 것 같다. 


그리고 15년 이후 첫 회사의 사장님께서 추천해주셨던 영화, <프라이드 그린 토마토>. 몇 번에 걸쳐 꼭 보라고 하셨다. 하지만 나름 영화에 대한 지식이 많이 쌓였다고 자부하고 있던 터에 뜬금없이 추천을 받았던 탓인지, 아니면 회사 사장님에 대한 반발 때문이었는지, 애써 무시하고 오랫동안 보지 않았다. 그거 아니고도 봐야 할 영화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지 않던가? 


과연 명불허전, 또 하나의 내 인생 영화


애써 무시하고 외면했지만 너무 오랫동안 묵혀 두는 건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하던 차에 무심코 보게 되었다. 가벼운 마음으로. 다 보고 나서 드는 생각은 '어른이 추천해준 영화는 반드시 봐야겠구나.' 그 오랜 경험과 연륜의 관문을 통과한 영화란, 과연 명불허전이었다. 이 영화 또한 내 인생의 영화가 될 게 분명하다.


에블린(케시 베이츠 분)은 남편한테 사랑 받지 못해 괴롭다. 더구나 양로원에 있는 숙모를 주기적으로 찾아가는데, 갈 때마다 그녀만 쫓겨나곤 한다. 여성 강좌에 나가기도 하는데 잘 되지 않는다. 이런저런 스트레스 때문에 식성은 늘어나고 여자로서 나아가 인간으로서 자괴감까지 드는 것이다. 그때 80대의 노파 닌니가 다가와 집안의 옛 이야기를 꺼낸다. 


때는 1900년대 초중반 미국의 남부. 10대 초반의 잇지는 말광량이다. 그녀는 오빠 버드를 세상에서 가장 사랑한다. 그런 버드가 사랑하는 이가 루스였는데 셋이 어울리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루스의 모자가 바람에 휘날려 기찻길로 날아간다. 버드는 모자를 낚아 채지만 발이 기찻길에 껴 기차를 피하지 못하고 죽고 만다. 이후부터 잇지는 당시 정상적인 여자의 모습을 벗어난 생활을 한다. 



영화 <프라이드 그린 토마토>의 한 장면 ⓒ유니버셜 픽쳐스



어느 날 다시 나타난 루스. 루스는 잇지를 바른 길(?)로 인도하라는 명을 받은 상태였다. 잇지에게 천천히 다가가는 그녀. 그런데 루스는 잇지를 인도하지는 못할 망정 그녀에게 빠지고 만다. 그녀의 행동은 여성스럽지만 않을 뿐이었지 굉장히 멋있었고 또 나쁘지만 의로운 행동이었다. 


하지만 루스는 부모님이 정해준 상대인 결혼을 해야 했다. 그 결혼 생활은 어땠을까? 루스를 찾아간 잇지는 루스의 얼굴에 있는 상처를 발견하고 얼마 안 있어 임신한 그녀를 데려온다. 그러곤 '휫슬 스탑'이라는 카페를 만들어 함께 운영한다. 


여성의 참정권 요구 운동과 흑인 폭력 문제


1900년대 초기, 여성은 태어나기를 여성으로 태어나 죽기까지 여성으로 존재해야 했다. 100년이 지난 지금 천지개벽할 변화가 있지만, 적어도 의식의 변화는 크지 않다. 17~18세기 유럽의 시민혁명으로 민주주의가 대두 되면서 모든 사람들에게 '참정권'이 주어졌다. 하지만 여성은 여성으로서의 역할만 강요 당할 뿐, 민주주의 세계에서 제일 중요한 권리인 참정권은 주어지지 않았다. 


이에 여성의 참정권 요구 운동이 시작된다. 각 영역에서 여성의 해방을 목표로 하는 페미니즘 운동의 일환이기도 했다. 영화의 배경이 되는 미국의 경우 1920년에 비로소 남녀에게 동등하게 투표권이 주어졌다. 남녀평등의 시발점이다. 이 영화는 그런 면에서 한 여성 또는 두 여성의 삶을, 그것도 여성 참정권이 주어진 즈음의 시대를 서사로 풀면서 그 자체로 페미니즘을 외치고 있는 듯 보인다. 


문제는 이들이 흑인들을 고용하는 것도 모자라 흑인들에게 음식을 대접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여성이라는 한계를 뛰어 넘는 행동을 보여 왔던 잇지 였지만, 흑인들과 관련된 건 문제의 소지가 있었다. 위험했던 거였다. 결국 일이 터지고 만다. 루스의 남편이 KKK단과 함께 흑인을 문제 삼으며 테러를 가한 것이다.  


남북 전쟁 이후 남부의 백인우월주의자들에 의한 흑인 폭력이 1960년대까지 계속되었는데, 그 한 가운데 1866년 조직된 '쿠 쿠룩스 클랜(KKK)'가 있었다. 그럼에도 잇지는 흑인 친구들을 버리지 않았다. 여전히 사내 대장부 같은 포스를 뿜으며 카페를 꾸려 나갔고 모두를 지켰다. 



영화 <프라이드 그린 토마토>의 한 장면 ⓒ유니버셜 픽쳐스



평등과 자유에의 투쟁은 사랑으로 귀결된다


이 영화가 페미니즘 만을 외치는 영화가 아니라는 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평등이라는 큰 틀 안에서 페미니즘 뿐만 아니라 흑인과 백인의 평등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흑인 평등에 관한 법이라면 가볍게 무시하는 남부를 배경으로 말이다. 남부에서의 흑인의 삶이란 링컨의 역사적인 노예 해방 때로부터 100년이 지나가도록 나아진 게 없었다. 오히려 백인들의 위협으로 나빠지면 나빠진 상황이었다. 


단적인 예로, 백인과 흑인은 같은 학교에 다닐 수 없었고 화장실도 같이 쓸 수 없었다. 어딜 가서 무엇을 하든 웬만한 것들을 같이 이용할 수 없었다. 그런 남부에서 흑인 평등에 관한 법률이 강화되기 전인 1900년대 초중반을 배경으로, 그것도 남자가 아닌 여자가 그런 일을 한다는 것은 목숨이 몇 개라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영화는 그런 모습을 감동적으로 그려낸다. 



영화 <프라이드 그린 토마토>의 한 장면 ⓒ유니버셜 픽쳐스



닌니로부터 일련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에블린은 변화해 나간다. 처음엔 여자로서 보일 수 있는 최대한의 진취성을, 그리고 나서는 그 이상의 자유롭고 깨어 있는 발상을, 궁극적으로는 인간이 인간에게 보일 수 있는 최대한의 사랑을. 


결국 잇지가 보여준 평등과 자유에의 투쟁은 사랑으로 귀결된다고 생각한다. 그녀가 그렇게 살아가게 된 이유 중 제일 큰 게 바로 가장 사랑하는 이의 죽음이었기 때문이리라. 그 사랑을 누군가에게 후회 없이 쏟아붓고 싶었던 게 아닐까. 그 대상이 누구든지 간에. 여자와 남자, 흑인과 백인, 정상인과 장애인, 부자와 거지를 차별하지 않고 동등하게 인간으로 사랑하는 걸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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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아름다운 세상을 위하여>



영화 <아름다운 세상을 위하여> 포스터 ⓒ워너브라더스



중학교에 입학하게 된 트레버(할리 조엘 오스먼트 분). 첫 느낌이 좋지는 않다. 이 학교는 제대로 된 게 없는 것 같다. 그는 첫날부터 몇 명에게 둘러싸여 위기에 처한 친구를 구해준다. 첫날 첫 수업은 사회 시간. 그런데 사회 선생님 시모셋(케빈 스페이시 분)도 이상한 것 같다. 얼굴 하관 쪽이 화상으로 일그러졌는데, 그건 그렇다 치고 첫날부터 이상한 과제를 내주는 게 아닌가? 


'세상을 바꿀 아이디어를 내고 실천에 옮길 것!'


이 과제에 특별한 관심을 가진 트레버는 궁리 끝에 빈민가를 찾아가 노숙자 한 명을 집으로 데려온 후 먹고 씻고 자게 해준다. 도대체 무슨 꿍꿍이일까? 아무래도 세상을 바꿀 아이디어로 노숙자를 데려온 것 같은데, 뒷감당을 어떻게 하려고?


한편 기자 크리스는 범죄 현장에 갔다가 범인에 의해 차가 박살이 나는 참사를 당한다. 침울해 하고 있는 그에게 어떤 중년 신사가 오더니 고가의 재규어를 선뜻 내주는 게 아닌가? 크리스는 말도 안 되는 이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기자다운 근성으로 끈질긴 취재에 돌입한다. 알고 보니 그 중년 신사는 거물급 변호사였는데, 어떤 이한테 큰 도움을 받았고 그로부터 3명한테 무조건적인 도움을 줘야 한다고 전언을 받았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크리스한테 아무런 조건 없이 도움을 주었다 라는 이야기. 


'3명 도와주기'로 세상을 바꾸자!


영화 <아름다운 세상을 위하여>는 2가지 이야기가 병렬식으로 진행된다. 하나는 트레버 이야기이고, 하나는 크리스의 취재 이야기이다. 트레버는 시모셋 선생님의 과제를 위해 '3명 도와주기'를 방법론으로 제시한다. 내가 3명을 도와주면 3명 각각이 3명 씩을 도와주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무한대의 도움주기가 가능하다. 그렇게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생각이다. 


크리스가 취재하는 사람들이 하나같이 하는 말도 이 '3명 도와주기'였다. 그들은 자신에게 큰 도움을 준 사람이 남긴 말을 실천할 뿐이다. 무조건 3명을 도와주라는 말. 크리스는 이 '운동'의 시작을 알기 위해 계속해서 나아간다. 변호사를 찾아갔다가, 감옥을 찾아가기도 하는 한편, 빈민가를 찾아가기도 한다. 



영화 <아름다운 세상을 위하여>의 한 장면 ⓒ워너브라더스



트레버의 순수한 마음에서 시작된 3명 도와주기는 과연 가능할까? 이를 현실에 대입해 실천해 보고자 하니, 생각만 해도 너무나 아름다울 것 같다. 지금 세계는 연대가 약해져 어떤 상황에서도 '도움'을 주는 법이 없다. 도움을 주려 하면 옆 사람이 '네 앞가림이나 잘해. 지금이 어떤 상황인데 남을 도우려고 하냐?'라며 핀잔을 줄 것이다. 또 '도움'을 청하는 법도 없다. 도움을 청하려 하면 마음 속에서 '괜히 도움을 청했다가 이상하게 얽혀서 오히려 손해를 보게 되는 게 아닐까?'라는 목소리가 들려오곤 한다. 


신자유주의가 경제를 최고치로 올려 놓으면서, 그 과정에서 개인으로 포커스가 맞춰졌다. 그 전에는 경제가 좋지 않아도 개인보다 사회가 중요했다. 그래서 개인이 홀로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을 수 있었다. 서로가 서로를 봐주는 일종의 그물망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이제는 그런 그물망이 존재하지 않는다. 최고치를 찍은 경제의 앞에는 내리막 길 밖에 존재하지 않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3명 도와주기'가 가능하다면 그 자체로 세상을 바꾸는 게 확실하다. 하지만 역시 쉽지 않다. 트레버도 번번이 실패한다. 제일 먼저 빈민가에서 데려온 캐리를 도와주려 했다. 그에게 얼마의 돈을 쥐어 주었고 일자리도 얻게 되었다. 하지만 결국 그는 마약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두 번째로 시모셋 선생님을 도우려 했다. 엄마 알린(헬렌 헌트 분)을 소개 시켜줘서 다친 마음을 치료하고 앞으로는 좋은 시절을 주려 했다. 하지만 미숙하고 섣부른 진행으로 실패했다. 세 번째는 매일 같이 괴롭힘을 당하는 친구 아담을 구하고자 했다. 하지만 그에게는 3명을 물리칠 힘이 없었다. 구경만 했어야 했고 실패하고 만다. 


명백한 실패로 보인다. 성공하려면 세상을 바꾸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아주 사소한 도움만 주어야 하는 걸까? 그런 형식적인 도움은 아무런 의미도 없을 것이 아닌가. 이런 식으로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건 그야말로 '유토피아'에서나 가능한 것일까? 반 친구들이 말하듯 허황된 꿈인 것일까? 


도와주기는 실패했지만, 그 방법과 생각은 계속된다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트레버가 스스로 실패했다고 자책한 후에 나온다. 트레버로부터 도움을 받고 그의 설명을 자세히 들은 이들이 시간이 흐른 후에 자신도 모르게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고 있는 것이다. 빈민가 캐리의 경우, 눈앞에서 자살하려는 젊은 여성에게 다가가 오히려 '부탁이에요. 날 구제해 주세요.'라며 도움을 청하는 동시에 도움을 준다. 


큰 맘 먹고 도움을 주려 할 때 상대방이 흔히 하는 말이 있다. '당신은 나에 대해 아무 것도 몰라. 당신이 뭔데 나를 도와? 어떻게 도울 건데? 어설픈 도움은 필요 없으니까 꺼져.'하는 식이다. 이럴 때 오히려 도움을 청한다면? 도움을 받는 것보다 도움을 청하는 게 더 어렵다고 하며, 또 도움을 줄 때 자신의 존재 가치를 더 높일 수 있다고 한다. 그러하기에 캐리의 방법은 상당히 적절했다고 할 수 있다. 



영화 <아름다운 세상을 위하여>의 한 장면 ⓒ워너브라더스



무조건적인 도움이 무조건적으로 좋다고 할 수는 없다. 영화에서도 나오듯이 어설프게 도와주려 했다가 오히려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게 되는 경우도 있고, 자신에게 상처가 되는 경우도 있다. 그렇게 되면 트라우마가 생겨 다시는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는 경우도, 도움을 받는 경우도 없게 될지 모른다. 그리고 도움에 실패하게 되면, 자신의 능력에 의심을 품으며 자책할 수도 있겠다. 


그렇지만 영화에서 말하는 '3명 도움주기'는 '세상을 바꾸기 위한' 방법론이다.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희생이 따를 텐데, 위엣것들은 그 희생의 모습들일 것이다. 그런 이해 하에서 '3명 도움주기'는 상당히 매력적인 방법이다. 나의 도움은 실패했더라도 그 방법 자체는 전해질 수 있을 것인데, 그렇다면 내가 도우려 했다가 실패한 그 사람은 그 방법을 가지고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려 할 수 있다. 즉, 어떤 올바른 생각이 공유되고 전파될 때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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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플레전트빌>



영화 <플레전트빌> 포스터 ⓒ뉴라인 시네마



영화 <플레전트빌>은 판타지 동화 같은 분위기와 설정으로 시작된다. 이혼한 편모 슬하에 있는 전혀 다른 성격의 남매 데이빗(토비 맥과이어 분)과 제니퍼(리즈 위더스푼 분). 오빠 데이빗은 '플레전트빌'이라는 프로그램에 푹 빠져 지내는 자칫 찌질해 보이는 학생이고, 제니퍼는 성적으로 굉장히 개방적이고 괄괄한 성격의 학생이다. 그들은 같은 시간에 다른 TV 프로그램을 보겠다고 싸우다가 리모컨을 고장 낸다. 


마침 근처를 지나가다가 들렀다는 수리 기사가 전해주는 마술 리모컨. 설마 하니 그 리모컨은 '플레전트빌' 프로그램 속으로 그들을 데려다 주었다. 암울한 현재와는 다른 1958년을 배경으로 하는 그 프로그램은 모든 것들이 완벽했다. 완벽한 가정은 물론이었다. 하지만 데이빗에게는 파라다이스, 제니퍼에게는 지옥과 같은 곳이었다. 


시궁창 같은 현실과는 다른 완벽한 세계


'현시창'이라는 인터넷 신조어가 있다. 풀어 쓰면 '현실은 시궁창'이란 뜻인데, 대한민국 청년의 현재를 표현하고 있다. 현실이 이러니 스스로에 대한 조치가 필요하다. 요즘 들어 대대적으로 광고도 하는 등 모바일 게임의 인기가 치솟고 있는데, 이것도 일종의 현상일까. 시궁창 같은 현실과는 다른 완벽한 세계, 그리고 언제든 내가 최고가 될 수 있는 세계. 그곳으로 가고 싶다. 


현실과 가상현실의 경계 파괴에서 오는 문제는 비단 IT의 고속 성장 때문 만은 아닐 것이다. 영화에서도 나오지만, 미래는 현재보다 더더욱 암울할 것이라 한다. 경제는 추락하고, 환경은 안 좋아지며, 어떻게 하든 죽을 확률은 계속해서 높아질 것이다. 도망치고 싶은데 어디로 도망칠 수 있을까? 무엇이든 가능할 것 같은 가상현실? 아니면 암울한 현실이나 미래가 아닌 과거? '플레전트빌'은 이 두 개를 충족시킨다. 



영화 <플레전트빌>의 한 장면 ⓒ뉴라인 시네마



데이빗과 제니퍼가 가게 된 가상현실 공간 '플레전트빌'의 시간적 배경은 40년 전 과거인 1958년이다. 미국에게 있어 1950년대는 평화와 번영, 그리고 보수의 시대이다. 제2차 세계대전의 승전국이자 유럽과는 달리 직접적인 피해가 전무했던 미국은, 50년대에 유례 없는 완벽한 시기를 보낸다. 그런 시대에 뚝 떨어진 데이빗과 제니퍼였던 것이다. 


흑백 세계에 나타난 '색깔'


데이빗은 이 세계를 잘 알고 있다. 완벽한 세계. 모든 것이 가능한 세계. 흑백 세계. 변화가 전무한 세계. 그래서 그는 이 세계의 변화를 원치 않는다. 이상한 것들 투성이지만 이해하려 한다. 반면 제니퍼는 도저히 참을 수 없다. 그녀는 먼저 남자들에게 섹스의 욕망을 뿌린다. 그것 하나로도 이 세계는 바뀌기 시작한다. 흑백 세계에 '색깔'이 나타난 것이다. 변화는 겉잡을 수 없다. 



영화 <플레전트빌>의 한 장면 ⓒ뉴라인 시네마



"평소처럼 퇴근해서 현관으로 들어가서 외투를 벗고 가방을 내려놓고는 '여보, 나왔어' 라고 외쳤는데 아무도 없었어요. 아내도 없고 불은 꺼져 있었고 저녁도 안 차려 놨더군. 오븐을 열어 봤는데 아무것도 없더군요. 그녀는 사라졌어요. 사방으로 찾았는데 어디에도 없었어요."


영화는 1950년대 나타났던 저항과 반문화를 답습한다. 소설 <호밀밭의 파수꾼>, 영화 <이유 없는 반항> 등으로 대표 되는 이 문화는 당시 한편에서는 전에 없던 열렬한 환호를 받고 한편에서는 최악의 반대에 부딪힌다. 영화에서는 데이빗과 제니퍼가 그 역할을 한다. 데이빗은 내면에 잠재된 진짜 모습을 끄집어 내려 하고, 제니퍼는 잠자고 있던 욕망을 깨우려 한다. 


그렇지만 당시 미국에서는 '메카시즘'으로 대표 되는 좌파 색출 마녀사냥이 시작되었다. 순응하지 않는 모든 이들에게 공산주의자 딱지를 붙여 철저히 색출하는 것이다. 그야말로 생존 아니면 죽음의 시대가 도래한다. 변화는 죽음을, 순응과 불변은 생존을 뜻했다. 선택이 필요했다. 


변화 그리고 선택


영화에서는 변화한 이들은 흑백이었던 몸에 색이 생기고, 불변을 선택한 이들은 여전히 흑백으로 남아 있게 된다. 처음에 그들은 서로를 배척하지 않고 한때 어울린다. 다를 뿐이지 틀린 건 아니니까. 하지만 위정자들은 변화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어디까지 변할지 알 수 없는 그들을 보고 '가만 두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 결과 '유색 인종'들은 폭력을 당하고, 모든 색깔 있는 것들은 파괴 당하며, 사람들의 생각을 변화 시킬 수 있는 책이 보관된 도서관은 폐쇄된다. 유채색 그림은 금지 당하며, 유쾌한 노래만 허락된다. 


"진짜 비가 내리고 있어요. 저절로 치유되는 병균이 아니오. 마을이 변했소. 그 이유는 모두 알겠죠? 결정을 내립시다. 우리가 뭉쳐야만 이 난국을 풀 수 있습니다."


영화는 이렇게 현실 도피에서 변화의 단계를 넘어 선택의 단계에 다다른다. 변화라는 개념조차 갖춰지지 않은 이들에게 '변화'를 심어줬을 때 비로소 그들은 선택을 할 수 있다. 변화냐 불변이냐. 그 대표적인 장면이 데이빗과 제니퍼의 변화, 그리고 선택이다. 



영화 <플레전트빌>의 한 장면 ⓒ뉴라인 시네마



데이빗은 처음엔 '플레전트빌' 세계에 순응하고 세계의 불변을 외치지만 결국엔 변화를 선택하고 그것이 자신의 진짜 모습임을 알게 된다. 반면 제니퍼는 처음엔 앞장서서 '플레전트빌' 세계의 변화를 외치고 그런 모습이 진짜 자신이라고 생각했지만 알고 보니 남자에게 관심 없고 오히려 공부에 적성과 소질이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렇게 그들은 자신의 진짜 모습을 발견한다. 


보수까지 포용할 수 있어야 진보다


그런데 여기에서 조금 헷갈리는 건 제니퍼의 변화이다. 변화를 추구하는 게 진보라 한다면, 초반의 제니퍼는 진보의 선봉과 같았다. 그러던 제니퍼가 진짜 자신의 모습인 보수적이고 순응하는 여인으로 '변화'한다. 진보가 보수로 '변화'했으니 이 또한 진보인 것인지? 진보의 입장에서 봤을 때, 진보가 보수로 '역행'했으니 이는 보수인 것인지? 


영화는 변화 자체를 진보라고 보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그 변화를 진짜 자신의 모습을 찾는 것으로 치환하고 있다. 진보라고 한다면 그 모든 것들을 포용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세상에는 더 좋은 게 많습니다. 어리석고, 섹시하고, 위험하고, 간단한 것들이죠. 이러한 모든 것들은 여러분 모두에게 잠재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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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퍼펙트 센스>



영화 <퍼펙트 센스> 포스터 ⓒKT&G 상상마당



사랑에 대한 영화, 정말 많다. 사랑에 대한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왜의 모든 걸 다루었다. 이제는 더 이상 할 이야기가 없을 듯하지만 여전히 사랑은 모든 콘텐츠의 핵심이다. 인간은 사랑 만으로 살 수 있는가? 인간은 사랑 없이 살 수 있는가? 개인적인 생각으로 인간은 사랑 만으로 살 수 있고, 사랑 없이는 살 수 없는 것 같다. 


여기서 뜬금없이 질병 창궐에 대해 말해 본다. 알 수 없는 질병에 관한 영화 또한 무수히 많다. 질병 때문에 인류가 망해가고, 질병 때문에 사람들이 좀비로 변해간다. 인류는 생존을 위해 싸운다. 여기에 사랑이 낄 틈은 없어 보인다. 일단 살아야 하니까. 


감각의 실종, 그리고 사랑


영화 <퍼펙트 센스>는 전혀 무관할 것 같은 '사랑'과 '질병'을 소재로 썼다. 아픈 상처로 인해 더 이상 사람을, 사랑을 믿지 못하는 두 사람이 만나 이제껏 해보지 못한 그들만의 진정한 사랑을 만끽한다. 하지만 알 수 없는 질병이 창궐해 사람들의 감각을 앗아간다. 후각이 마비되고, 미각이 마비되고, 청각이 마비된다. 그리고 감각의 실종은 계속된다. 과연 그들의 사랑은 어떻게 될까?


마이클(이완 맥그리거 분)은 레스토랑 셰프다. 그는 과거의 아픈 상처로 인해 더 이상 제대로 된 사랑을 할 수 없는 상태이다. 결혼하려고 했던 여자친구가 병에 걸려 많이 아팠을 때 견디지 못하고 그녀한테서 도망쳤다. 그리고 그녀가 죽었고 그는 점차 잊어갔다. 수잔(에버 그린 분)은 인류를 위협하는 알 수 없는 질병을 연구하는 과학자이다. 그녀는 언니의 사촌들이 가끔 너무나 싫다. 난소에 이상이 있어 애를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그들이 만나 사랑을 키워간다. 


때마침 알 수 없는 질병이 창궐한다. 참을 수 없는 슬픔이 밀어닥치고 그로 인해 후각이 사라진다. 마이클의 레스토랑은 당연히 사람들의 발길이 뚝 끊긴다. 그래도 삶은 계속된다. 후각을 잃은 이들을 위한 음식을 개발한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질병은 공포를 불러일으킨다. 공포는 곧 참을 수 없는 허기로 변해 사람들로 하여금 닥치는 대로 먹게 한다. 그리고 미각을 앗아간다. 이제 사람들은 살기 위해서 밀가루와 지방 만을 필요로 하게 된다. 그래도 삶과 사랑은 계속된다. 



영화 <퍼펙트 센스>의 한 장면. ⓒKT&G 상상마당



기존의 질병 창궐 영화와는 다르다


영화는 기존의 질병 창궐 영화와는 큰 차별점을 둔다. 다름 아닌 질병의 설정인데, '감각의 상실'이라는 기막힌 설정이 그것이다. 최소한 필자가 본 영화 중에 이런 소재는 없었다. 아마도 그만큼 감각의 상실 이후의 연기를 하기가 힘들 것이기 때문이다. 후각이, 미각이, 청각이 사라지면 도대체 어떤 느낌일까. 그런 상상력의 연기가 쉽지 않을 뿐더러, 보이는 이로 하여금 잘 전달 받을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그걸 완벽하게 해낸 것 같다. 감각이 하나씩 사라질 때마다 소름이 돋을 지경이다. 미각이 사라지자 비누를 게걸스럽게 먹는 장면은 잊히지 않는다. 그리고 감각이 사라지기 전에 전초적으로 보여지는 증상들이 잘 표현되어 있다. 슬픔이 후각 마비, 공포와 허기가 미각 마비, 분노가 청각 마비를. 


무엇보다 잘 표현된 건 '그래도 삶은 계속된다'는 걸 보여주는 장면들이다. 영화는 그걸 레스토랑을 통해 보여주는데, 후각과 미각을 잃은 사람들을 위해 지방과 밀가루 그 이상의 것을 만들고 청각이 사라져도 종이에 글을 써가며 다시 일을 시작한다. 그렇지만 사랑을 지속하기가 쉽지 않다. 


마이클과 수잔의 사랑은 감각이 하나씩 사라질 때마다 위협 받는다. 최대의 위기는 청각을 잃기 전의 증상인 분노, 화, 증오가 찾아 왔을 때인데, 그들은 서로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기는 말과 행동을 남긴다. 그리고 청각을 잃게 되고 서로를 찾기 힘들어 진다. 얼마 후면 시각이 사라질 것이 뻔한 상황에서 이들의 사랑은 어떻게 될지...



영화 <퍼펙트 센스>의 한 장면. ⓒKT&G 상상마당



그래도 삶은 계속될까? 사랑이 계속될 수 있을까?


그래도 삶은 계속될까? 사랑이 계속될 수 있을까? 최악의 상황이 계속해서 일어나는 때에도? 언제 시각이 사라져 암흑 천지가 될지 모르는 이때에도? 영화는 말한다. 그래도 사람들은 최선을 희망한다고. 그저 살아 있다는 것에 감사한다고. 모든 감각을 다 잃게 되어도, 따듯함, 이해, 포용력, 용서, 사랑을 얻게 될 거라고. 


영화가 보내는 메시지는 다큐멘터리 형식의 수잔이 하는 내레이션으로 진행되는데, 영화의 핵심이다. 그때마다 같이 하는 OST가 일품이다. 듣고 만 있어도 가슴이 먹먹해진다. 희망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다. 그렇지만 두렵다. 그런 상황이 찾아온다면 과연 삶을 포기하지 않고 지속할 수 있을까. 감동적인 한편 이렇게도 무서운 영화는 일찍이 접하지 못했다. 


한편 드는 생각은 아파도 견딜 수 있고 아파도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걸 보여주는 게 마음에 걸린다. 분명 감동적이기는 하나, 버티기만 하는 삶이 정답은 아니지 않나 하는 생각 때문이다. 영화를 보면 최악을 준비하고 최선을 희망하는 사람들만이 정답인 것처럼 나오는데, 뭘 할지 몰라하는 사람들과 또한 세상에 종말이 올 거라고 믿는 사람들이 틀린 건 아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최악의 상황에서 삶을 계속하는 것 뿐만 아니라 삶을 포기할 수 있는 선택을 할 수 있지 않을까. 그게 결코 '틀린' 건 아니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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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포스터 ⓒ스폰지 ENT



일본 영화는 잔잔한 드라마가 강한 것 같다. 그럼에도 등장인물들의 캐릭터가 죽지 않는다. 갈등이 심화되지 않는 잔잔한 드라마에서 어떻게 등장인물들이 묻히지 않을 수 있을까? 스토리에 과한 조미료를 치지 않고, 영상에 힘을 실으며, 절제된 각본을 통해 여운을 짙게 남기려 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물론 일본의 모든 드라마 장르 영화가 그렇지는 않다. 그 중에는 작정하고 관객들을 울리는 일명 '최루성 영화' 들도 존재한다. 우리나라는 이런 영화가 점점 더 많이 만들어지고 있다. 웃음보다 더한 힐링이 바로 울음이라는 걸 아는 제작자는 최루성 영화가 관객을 끌어들일 거라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개인적으로 이런 최루성 영화도 킬링타임용이라고 생각하는데, 보면서 아무 생각 없이 울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잔잔함과 여운으로 승부를 보다


반면 시종일관 지루함을 동반한 잔잔함으로 관객들에게 엄청난 어필을 하지 못하는 영화들은 길고 짙게 남는 여운으로 승부를 본다. 이런 영화들은 거의 필히 2~3번 이상 보게 되는데, 처음 봤을 때는 빨려 들어갈 듯 보지 못했기에 다시 보면 전에는 보이지 않던 장면들과 대사들이 보이기 때문이다. 일본의 2003년 작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이 바로 이런 영화의 대표격이라 할 수 있다.


영화는 굉장히 그리고 지극히 잔잔하게 시작하고 그렇게 흘러간다. 심지어 여자의 벗은 모습조차 잔잔하게 보여질 만큼. 밤에는 마작게임방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대학생 츠네오는 우연히 조제와 마주친다. 조제는 두 다리를 못쓰는 장애인이고 할머니와 같이 산다. 할머니는 조제가 산책을 나가고 싶어하면 유모차에 실어 다닐 만큼 남들에게 보이지 않게 하며, 조제는 그런 할머니의 영향 탓인지 낯선 사람을 극도로 불신한다. 낯선 사람이 보이면 다짜고짜 칼을 휘두를 만큼. 사람들은 그들에게 해를 끼치기도 한다. 


조제를 도와준 츠네오는 그녀의 집으로 초대를 받게 되어 아주 맛있는 식사를 한다. 집에서 나가지 못하는 대신 남들이 버린 책들을 엄청 주워와 읽은 덕분에 박학다식을 자랑한다. 츠네오는 조제의 그런 모습을 가슴에 담아 두고 종종 찾아간다. 츠네오는 그 와중에도 여자친구와 좋은 시간을 가지곤 한다. 하지만 한 번 두 번 찾아가고, 조제가 읽고 싶어하는 책도 구해주고, 복지과에 말해 조제의 집도 고쳐주고, 유모차와 보드를 합쳐 세상 구경도 시켜준다. 



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의 한 장면 ⓒ스폰지 ENT



여기까지는 츠네오가 장애인인 조제를 동정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을 것이다. 그건 조제 또한 마찬가지인데, 대부분의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게 자신에게 호의적으로 대해주는 츠네오를 그저 고맙게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건 장애인과 일반인이 아닌 일반인과 일반인 사이에서도 자주 보이는 관계이다. 


그러던 어느 날 이들의 관계가 사랑이라는 걸 확인 시켜 주는 사건(?)이 생긴다. 복지과에 말해 조제의 집을 고쳐준 뒤, 복지과에서 후속 조치를 취해줄 때였다. 때마침 츠네오의 여자친구가 찾아온 것이다. 그녀의 전공이 복지였기 때문인데, 이 어색한 기류에서 그녀가 츠네오의 여자친구라는 걸 알아챈 조제는 실망감을 감추지 않는다. 그리고 며칠 후 찾아온 츠네오를 단호히 거절한다. 


하지만 츠네오는 조제가 계속 생각난다. 여자친구와 같이 있어도 생각난다. 조제를 생각나게 하는 결정적인 무엇도 있었다. 그러다가 일전에 복지과 과장과 친해져 면접까지 보게 되었는데, 그로부터 조제의 소식을 듣게 된다. 조제의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것과 조제가 혼자 살기 힘들게 되었다는 것. 츠네오는 그 자리를 박차고 조제에게로 향한다. 그리고 그 둘은 서로의 사랑을 확인한다. 그렇게 그들은 1년을 지낸다.


복선과 상징으로 가득 차다


이 영화는 복선으로 가득 차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츠네오는 영화에서 총 3명의 여자와 만나게 되는데, 그것은 즉 그가 언제든지 조제를 떠날 수 있다는 걸 암시한다. 조제는 프랑소와즈 사강의 소설『한 달 후 일 년 후』을 굉장히 좋아하는데, 거기에 어떤 구절을 읊는다. "언젠가 그를 사랑하지 않는 날이 올 거야. 베르나르는 조용히 말했다. 그리고 언젠가는 나도 당신을 사랑하지 않겠지. 우린 또다시 고독해지고, 모든 게 다 그래. 그냥 흘러간 일 년의 세월이 있을 뿐이지." 일 년을 함께 보내고 바뀐 모습을 암시한다. 



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의 한 장면 ⓒ스폰지 ENT



또한 이 영화는 극명한 상징을 띄고 있기도 하다. 제목에서 볼 수 있는 호랑이와 물고기들이 그것인데, 둘 다 조제의 대사로 유추해볼 수 있다. 먼저 조제는 츠네오와 함께 호랑이를 보며 말한다. 


"좋아하는 남자가 생기면 제일 무서운 걸 보고 싶었어. 남자가 안 생기면 호랑이는 평생 못 봐도 상관 없다고, 그렇게 생각했는데 이렇게 보게 되네." 


그녀는 본래 세상을 두려워하고 사람들을 무서워 했다.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해주는 울타리이자 보호막인 할머니. 하지만 할머니는 조제를 인간이 아닌 장애인으로 대했다. 조제는 인간으로서의 삶을 살 수도, 사랑을 할 수도 없었던 것이다. 그러던 할머니가 돌아가시니 조제는 혼자 살아가기가 벅찼다. 그 앞에 나타난 츠네오. 츠네오 덕분에 조제는 인간으로 사랑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츠네오와 함께 제일 무서워 했던 호랑이, 즉 세상과 조우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제목에서 보이는 물고기들은 조제 자신이라고 할 수 있다. 츠네오와의 여행에서 뭔가를 느낀 조제. 그녀는 여관에서 사랑을 나눈 후 츠네오에게 말하는 듯 혼잣말인 듯 말을 한다. 


"깊고 깊은 바닷속, 나는 거기서 헤엄쳐 나왔어... 나는 두 번 다시 거기로 돌아가진 못할 거야. 언젠가 네가 사라지고 나면 난 길 잃은 조개껍질처럼 혼자 깊은 해저에서 데굴데굴 굴러 다니겠지. 그것도 그런대로 나쁘진 않아."


이 또한 츠네오와의 사랑을 통해 얻게 된 인간으로서의 당당한 삶을 의미한다. 장애인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천대 받을 걸 두려워해 집안 구석에서만 지내온 조제는 츠네오를 만나 사랑을 하면서 세상 밖으로 나왔다. 하지만 그녀는 알고 있었던 걸까. 언젠가 츠네오가 떠나갈 거라는 걸. 그렇지만 그녀는 이미 변화했다. 온전한 인간으로. 


인간, 사랑, 변화에 대한 충분한 공감


얼핏 보면 장애인과 일반인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다루고 있다고 보이는 이 영화는, 곱씹어 보면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 2~3번 다시 보면 더더욱 잘 보일 것이다. 지극히 일반적인 사랑 이야기이다. 사랑을 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그런 경험이 있지 않을까. 혼자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 사랑하는 누군가와 같이 라면 못할 게 없어지는 경험. 그러며 조금씩 변해가는 자신의 모습. 이건 어느 한 사람만의 경험이 아닌 쌍방의 경험. 단지 이 영화에서는 조제의 변화가 눈에 띄는 것 뿐이다. 



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의 한 장면 ⓒ스폰지 ENT



물론 이 영화를 '장애인의 떳떳한 인간으로서 성장하기'와 같이 보아도 무방하다. 그 단적인 예로서의 장면이 츠네오의 전 여자친구와 조제의 만남인데, 그녀들은 서로 동등하게 뺨을 때린다. 별 것 아닌 장면으로 자신의 남자친구를 뺏어간 여자에게 복수 아닌 복수를 해주고자 하는 걸로 단순하게 비춰질 수 있지만, 조제의 당당한 모습은 전과 확연히 다르다. 장애인으로서의 모습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오래도록 사랑 받는 영화의 조건을 두루 갖춘 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인간에 대해, 사랑에 대해, 변화에 대해 성찰까지는 아니더라도 충분한 공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일본 특유의 잔잔한 드라마, 그 진면목도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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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더 헌트>



영화 <더 헌트> ⓒ노르디스크 필름



덴마크의 한적한 마을, 루카스는 그곳에서 유치원 교사로 일하고 있다. 도시에서 결혼해 일하고 있던 그는 아내와 이혼하고 고향으로 내려온 것이다. 산 좋고 물 좋고 공기 좋은 한적한 고향 땅에는 친한 친구들도 있어서 마음을 다잡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다. 다들 그의 사정을 잘 알고 있기에 마음의 부담이 없다. 다만 한 가지 그의 마음 속에 부담으로 남아 있는 건 아들 마커스다. 이혼한 아내가 쉽게 아들을 만나게 해주지 않는다. 아들이 자신을 보고 싶어하는 데도 말이다. 


그런 그에겐 가족 같이 친한 친구 테오가 있다. 테오에겐 딸 클라라가 있는데, 루카스가 유치원에서 보살핀다. 클라라는 걸핏하면 싸우는 테오 부부보다 자상하고 친절한 루카스가 더 좋다. 나이를 떠나 서로 외로운 처지에 있으니 마음이 통했나 보다. 몇 번 같이 유치원에 오가다 보니 클라라에게 어떤 마음이 생겼나 보다. 클라라는 루카스에게 안기고 뽀뽀하고 선물까지 준다. 그런데 루카스는 그 선물을 다른 아이에게 가져다주라고 말한다. 클라라에겐 일생 최초의 고백이었고 최초의 거절이었다. 큰 상처를 받는다. 


말 한 마디 때문에 꼬이는 인생


영화 <더 헌트>의 극 초반 내용이다. 굳이 말하자면 1/10 지점까지 인데, 여기서 영화는 급격하게 선회한다. 큰 상처를 받은 클라라는 유치원 원장에게 말도 되지 않는 거짓말을 한다. 물론 아무 생각 없이. 언젠가 오빠가 지나가다 보여준 남자의 성기를 기억해낸 클라라는 확실하지 않은 투로 원장에게 루카스의 성기를 봤다고 말한다. 그러며 루카스에게 준 선물을 루카스가 준 선물이라 거짓말한다. 


이 한 마디 때문에 루카스의 인생이, 그리고 마을 전체가 꼬이기 시작한다. 하룻밤 사이, 루카스에겐 나디아라는 새로운 연인이 생겼고, 마커스를 다시 볼 수 있게 되었지만, 클라라에게도 큰 상처를 준 것이다. 그 한 마디를 그냥 지나치지 못했던 원장은 이를 루카스에게 알리고 전문가를 불러 클라라와 대질 시킨다. 이제 와서 거짓말이었다고 하면 혼날 것이 불 보듯 뻔하고 원장이 믿지도 않을 것이기에, 어찌 되었든 루카스가 클라라를 성폭행 했다는 건 기정사실화 된 거였다. 작은 마을은 순식간에 루카스와 클라라 사건에 휘말린다. 루카스에게는 그야말로 마른 하늘에 날벼락을 맞은 격이었다. 



영화 <더 헌트>의 한 장면 ⓒ노르디스크 필름



영화는 이렇듯 루카스에게 진실이 있고 클라라에게 거짓이 있다는 걸 천명한 채로 진행된다. 그렇다면 그 진실이 어떻게 묻히고 거짓이 어떻게 진실로 둔갑하는 지의 과정, 그리고 거짓이 진실로 둔갑한 이후 피해자의 삶, 이를 타개하려는 피해자의 행동 등이 포인트가 될 것이다. 


진실만큼 약하고 허무맹랑한 게 없다


유치원 원장은 거짓이 진실이 되는 과정에게 제일 가는 공로를 보인, 연결 고리의 핵심이다. 그녀는 '아이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아이는 본 것을 그대로 말한다' 등의 명제를 바탕으로 논리를 전개하고 클라라가 루카스에게 성적으로 학대를 당했다고 폭로한다.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유치원생들 모두를 대상으로 조사를 해서 루카스가 클라라 뿐만 아니라 많은 아이들에게 손을 댔다는 사실을 폭로한다. 루카스는 하루 아침에 유치원생들을 성적으로 학대한 인간 쓰레기 유치원 교사가 되었다. 


루카스가 할 일은 해명 밖에 없다. 마을 전체가 그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지만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진실은 '아이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라는 한 마디에 무너져 버렸다. 진실은 위대하다고 하는데, 진실만큼 약한 게 없다. 누구든 진실을 입에 달고 살아가지만, 진실만큼 허무맹랑한 게 없다. 루카스를 몰아 붙이는 마을 전체가 거짓으로 점철된 진실을 말하지만, 사실 거짓이 아닌가 말이다. 



영화 <더 헌트>의 한 장면 ⓒ노르디스크 필름



영화가 한적하고 작은 마을을 배경으로 한 건 탁월한 선택이었다. 서로 서로 모르는 게 없이 모두 아주 각별한 사이인 만큼, 한 마음 한 뜻으로 한 곳을 노리는 집중 또한 엄청난 것이다. 곧 '집단 폭력'이다. 진상은 알지 못한 채 들려온 말 한 마디에 마을 모든 사람들은 루카스에게 전에 없는 폭력을 휘두른다. 


집단은 진실이고 개인은 거짓이 되는 마녀 사냥


여기서 생각나는 게 '마녀 사냥'이다. 과거 백년 전쟁 때 이단으로 몰리고 남장을 했다는 혐의로 처형된 잔 다르크가 대표적이다. 한번 밑 보여 부정적인 말이 퍼지면 곧 치명적인 독으로 변하고 만다. 마녀사냥의 양상은 참으로 다양한데, 전체주의의 산물이자 집단 히스테리의 산물 그리고 정상이 아닌 것들에 대한 가혹한 처사, 집단의 개인에 대한 무차별적인 탄압 행위 등이다. 그야말로 개인은 절대로 집단을 이길 수 없는 것이다. 이럴 때 집단은 진실이고, 개인은 거짓이 된다. 


영화에서 보여주는 집단의 광기는 루카스 개인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것이었다. 클라라의 아버지이자 루카스의 제일 친한 친구인 테오보다도, 다른 친구들이나 마을 사람들이 더 난리를 치니 말이다. 오히려 테오가 말리고 있지 않는가. 집단의 폭력은 테오의 아들 마커스에게도 심지어 반려견에게도 미친다. 과연 진실의 개인은 거짓의 집단에게 대항해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우리는 살아가면서 진실의 개인일 때도, 거짓의 집단에 속해 있을 때도 많을 것이다. 작게는 가정, 학교, 직장 나아가 인터넷 상, 국가, 세계까지. 이 작은 나라에서는 몇 개의 주요 언론이 거짓된 같은 기사를 쓰면 국민 모두가 믿곤 한다. 그에 반하는 주장을 하면 곧 '빨갱이'의 낙인이 찍힌다. 



영화 <더 헌트>의 한 장면 ⓒ노르디스크 필름



집단은 개인에게 무엇을 원하는가? 자신들이 내세우는 거짓을 진실로 받아들이고 거짓말을 한 것에 대해 속죄하게 살아가라는 것이다. 그러면 쫓아내지 않고 같이 살게는 해준다는 것이다. 그럴 때 개인은 대부분 포기하고 만다. 그리고 휩쓸리고 만다. 자신의 생각이 진실에서 거짓된 진실로 바뀌고, 자신의 입에서 거짓을 진실인 양 말하게 된다. 그리고 곧 집단으로 편입된다. 


거짓된 집단에 대항하는 개인의 방법?


세월호, 밀양 송전탑, 쌍용차 해고, 땅콩회항 사건 등에서 개인의 진실은 쉽게 묻히고 만다. 자본 집단, 권력 집단, 국가 집단의 거짓과 폭력이 아무렇지도 않게 개인의 진실을 압도해 버린다. 그리고 한번 묻힌 진실은 다시 진실의 권위를 찾기 힘들다. 집단의 진실 아닌 진실을 상쇄할 그 무엇을 찾기란 힘들다. 


그래도 루카스는 포기하지 않는다. 자신이 잘못이 없는 걸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자신이 알고 아들이 알고 가족이 알기에 물러서지 않는다. 대신 그의 방법은 집단 대 개인이 아니다. 사건의 당사자와 개인 대 개인으로 진실을 어필한다. 제일 현명한 방법이자 어쩔 수 없는 방법이기도 할 것이다. 과연 우리는 그나마 이런 방법이 통하는 나라에서 살고 있는가? 그런 조직에 몸담고 있는가? 그런 가정에서 태어났는가? 그리고 무엇보다 내 자신이 진실과 거짓을 올바르게 판명할, 거짓된 집단에서 과감히 몸을 돌릴 수 있는 사람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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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오래된 리뷰] <바람>



영화 <바람> ⓒfilm the days



20대 중반, 과거에 대한 후회와 미래에 대한 불안, 현재에 대한 불만이 겹쳐 우울증 비슷한 감정을 느꼈던 적이 있었다. 어느 누구의 위로도 그 모든 감정들을 추스를 수는 없었다. 단지 현재로부터 도망가고 싶었다. 미래로 도망치는 건 불가능하니 과거로 도망치게 되었던 것 같다.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에서 주인공이 갑갑하고 불편한 현실에서 도망쳐 과거로 천착하게 되는 것과 비슷한 이치랄까.

 

지금은 20대 중반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당시에는 어떤 과거로 돌아가고 싶었을까? 몇몇 시절들을 꼽아본다. 대학교 2학년 군대 가기 전, 고등학교 1학년 때, 중학교 3학년 때, 초등학교 6학년 때, 유치원 때. 그리고 우울증을 느꼈던 20대 중반의 그때. 이들 시절에는 어김없이 내 옆에 친구들이 있었다. 지금 내 옆에 있는 친구들 또한 이 당시의 친구들이다.

 

지금 내 옆에는 그 어느 때보다 소중한 친구가 있다. 그럼에도 나는 지금 힘들어 한다. 그 친구 덕분에 지금의 이 어려움들을 견디고 있지만 가끔은 과거로 돌아가고 싶을 때가 있다. 하지만 이제는 알고 있다. 지금 또한 미래의 나에겐 돌아가고 싶은 과거라는 걸.

 

돌아가고 싶은 그때 그 시절


영화 <바람>은 한 남자의 돌아가고 싶은 과거인 고등학교 시절을 그리고 있다. 그리고 그가 원했던 고등학교 시절은 누구보다 폼 나는 시절이었다. 과연 그는 그 ‘바람’을 이룰 수 있을까? 이 영화의 모티브는 <응답하라 1994>의 주인공 쓰레기 역 ‘정우’의 실제 이야기이다. 자연스레 영화 <바람>의 주인공은 배우 정우가 맡았다.



영화 <바람>의 한 장면. 돌아가고 싶은 그때 그 시절. ⓒfilm the days


 

짱구(정우 분)는 엄한 집안의 엄한 아버지 밑에서 자랐지만, 폼 나는 학창시절을 보내게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그럼 ‘바람’이 통했는지 집안에서 유일하게 명문고가 아닌 골칫덩이 고등학교로 진학하게 된다. 부산 바닥에서 폭력 학교로 유명한 광춘상고에 진학하게 된 짱구는, 불법폭력써클 ‘몬스터’에 들어가고 싶어 안달이다. 어떻게 해서든 그 무리들과 함께 하게 된다면, 편한 학교생활은 물론이고 그토록 바라던 폼 나는 생활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내가 돌아가고 싶은 고등학교 1학년 때는 짱구처럼 폼 나는 바람은 아니다. 하지만 당시를 회고해보면 분명히 짱구의 바람과 똑같은 바람이 존재했었다. 주위에 남학생들만이 존재하는 남고에서, 편안한 학교생활을 넘어 ‘제대로 된’ 학교생활을 해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것은 싸움 잘하는 친구들과 어울리고 폼 잡으면서 학교를 활보하고 싶다는 욕망으로 이어졌다. 짱구의 바람은 곧 나의 바람이기도 했었다.

 

폼에 살고 폼에 죽는 학창시절


하지만 짱구는 신학기 조회 시간에 거행되는 몬스터의 후임 물색 작업에서 ‘간택’되지 않았다. 인상을 찌푸리며 카리스마를 내뿜으려 해봤지만 타고난 폼이 폭력과는 거리가 멀었던 모양이다. 그런데도 포기하지 않는 짱구. 중학교 때부터 알고 지내던 소위 잘 나가고 싸움 잘했던 형이 같은 학교에 있었기에, 학교생활은 편했지만 성에 차지 않았다.

 

그러다가 엉겁결에 몬스터와 다른 불법폭력써클 간의 싸움에 휘말리게 된다. 결국 짱구를 비롯한 친구들은 유치장 신세를 지게 되고, 이로 인해 몬스터의 러브콜을 받게 된다. 그토록 바라마지 않던 학교 ‘일진’이 된 짱구. 아무리 봐도 순박하고 착한 짱구인데, 엄연히 폭력써클의 일원이 되었기에 어깨에 힘이 들어간다. 그 부적절한 합이 얼마나 웃음을 자아내는지. 그의 능청스러운 연기가 빛이 난다.



영화 <바람>. 폼에 살고 폼에 죽는 학창시절. ⓒfilm the days


 

1997년 데뷔한 ‘젝스키스’의 노래 중에 <폼생폼사>라는 노래가 있다. 폼에 살고 폼에 죽는 사나이라면 사랑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된다는 내용인데, 이는 당시 고등학생 사이에서 폭발적인 호응을 불러일으켰다. 사랑뿐만 아니라 생활 전반에서 ‘허세’와 ‘폼’을 중요시했던 학창 시절을 대변하는 노래였다고 할 수 있겠다. 이를 단순히 웃어넘길 수 없는 것이, 당시(1997년 당시가 아닌 모든 이들의 학창시절)에는 허세와 폼이 하나의 문화였고 모든 것이었다. 다른 모든 것을 포기해도 그것만은 지키고 싶었던 것이다. 영화 <바람>은 그런 바람을 한 치의 ‘오버’나 ‘부족함’없이 보여주기에 공감을 불러일으키기 충분했다.

 

잘 나가던 짱구. 무서웠던 선배들이 졸업하고 자신이 직접 조회 시간에 후임을 물색하는 위치가 되었다. 세월 참 빠르고 ‘찌질했던’ 옛날이 생각나게 만든다. 그런데 진짜 옛날이 생각나게 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아버지가 쓰러졌다는 긴급 전화. 당장에 집으로 뛰어간다. 그 뒤를 급하게 뒤쫓는 친구들. 곧 아버지가 간경화로 쓰러졌다는 소식을 듣는다. 건강에 치명상을 입은 아버지. 시무룩해지고 아버지 눈치를 보느라 학교생활을 제대로 못하게 되는 짱구. 하지만 아버지가 당장의 급한 상황을 넘기게 되자 짱구는 다시금 돌아가게 된다.

 

나의 진짜 '바람'은 소중한 가족


사람은 정작 닥쳐보지 않으면 모른다. 일이 닥쳤을 때의 슬픔과 두려움과 밀려드는 후회를. 짱구도 그런 사실을 몰랐다. 그리고 어릴 때 자신을 ‘짱구 박사’라고 부르곤 했던 아버지의 아빠 미소와 다정한 모습을 잊어먹고 있었다. 그렇게 따랐던 아빠였는데. 지금은 왜 그리도 싫은지. 왜 그리도 불편한지.

 

결국 짱구의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만다. 그리고 짱구의 학창시절도 끝나고 만다. 허세와 폼을 최우선의 가치로 생각했던 그 학창시절이 말이다. 남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씁쓸한 기억 뿐. 단, 소중한 친구들과 소중한 가족들이 남았다.

 

학창시절 짱구의 ‘바람’은 폼 나는 폭력써클의 일원이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니, 폼은 허세의 다른 말일 뿐이었다. 당시에는 허세도 폼으로 읽혔지만 말이다. 반면 짱구에게 가족은 폼의 반대말이었다. 엄격한 집안에서 유일하게 공부 못하고 촐싹거리기만 하는 막내아들인 짱구가 폼 날일이 어디 있겠는가. 하루 빨리 독립하고 싶고 여차하면 가출이라고 하고 싶지만, 그럴 수 없으니 학교생활에서라도 폼 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 짱구에게 아버지의 죽음은 곧 가족의 소중함을 알려주는 슬픈 매개체였다. 실제 이야기를 모티브로 하였지만, 또 영화로써도 거의 필수적인 상황이었다. 그래서 감독이 원래 짰던 시나리오를 던져버리고 완전히 다시 썼다는 것도 수긍이 간다. 그 정도로 학창시절의 ‘바람’은 그 무엇으로도 쉽게 떨쳐낼 수 없던 그 무엇이었던 것이다. 짱구가 아버지의 장례식에서 아버지에 대한 꿈을 꾸며 꿈속에서 말하는 장면이 생생하다.



영화 <바람>의 한 장면. 나의 진짜 '바람'은 소중한 가족. ⓒfilm the days



“아빠... 내가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었는데... 못했다. 아빠... 아빠... 사랑한다.”

 

그때 그 시절, 참 힘들었다. 매일같이 하루에 10시간을 넘게 공부에 매진하고, 그러면서도 양육강식의 남자들 세계에서 살아남으려고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그리고 정치적으로 발버둥치고, 점점 멀어져 가는 가족들과의 관계에 괴로워하고, 어김없이 과거를 후회하고 미래를 불안해하고 현재에 대해 불만에 차 있었다. 과연 지금 그때 그 시절 그곳으로 돌아간다면 어떤 ‘바람’을 갖고서 살아가게 될까. 영화는 그 정답이 ‘가족’이라고 말한다. 반면 나는 대학교 때까지는 ‘공부’였다. 하지만 지금은 ‘가족’으로 바뀐 것 같다. 그리고 앞으로 그 바람은 더욱 더 확고해질 것 같다. 가족(지금의 가족, 앞으로의 가족)만큼 나를 이해해주고 나를 아껴주고 나를 생각해주는 이는 없다. 나 또한 마찬가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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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마이너리티 리포트>



영화 <마이너리티 리포트> ⓒ 20세기 폭스



평소 SF 장르에 관심이 없거나 필립 K. 딕을 모르더라도, 심지어 영화를 잘 보지 않더라도 영화 <매트릭스>, <토탈 리콜> 등을 들어는 보았을 것이다. 이 밖에도 <이퀄리브리엄>, <블레이드 러너>, <마이너리티 리포트> 등의 영화까지, 모두 필립 K. 딕의 SF 장·단편 소설을 원작으로 또는 직접적인 영향을 받아 제작되었다. 이들 영화는 1980년대, 1990년대, 2000년대의 작품들로, 그의 소설은 꾸준히 사랑받으며 시간이 지날수록 그 가치가 더욱 커지고 있다.

 

그의 소설들은 SF 장르가 갖는 특성에도 불구하고 결코 킬링타임 용으로 읽을 수 만은 없다. 생전(1928~1982)에는 마니아층에서만 사랑을 받은 작가에 불과하였다고 전해지지만, 20세기 후반에 와서 포스트모더니즘 비평가들에게 재평가를 받아 많은 사랑을 받았다. 그 대표격이 영화인 것이다.

 

<마이너리티 리포트> 또한 그의 단편 소설을 기반으로 한 영화이다. 2054년 미국 워싱턴. 범죄를 예측해 사전에 막는다는 설정. 이는 세 명의 예지자의 능력을 바탕으로 한 프리크라임(precrime) 시스템이 있기에 가능하다. 존 앤더튼(톰 크루즈 분)은 이 시스템을 관장하는 예방범죄국(프리크라임)의 반장이다. 그는 6년 전 유괴로 아들을 잃은 슬픔으로 수사관이 되었고, 천부적 감각과 능력으로 프리크라임 시스템의 완벽함에 일조한다.

 

존 앤더튼이 예지자들의 영상을 보며 열심히 작업하고 있을 때 흘러나오는 슈베르트의 ‘미완성’ 교향곡. 긴박한 넘치는 액션과 스릴의 SF 특성과는 맞지 않을 듯한 클래식 음악이지만, ‘미완성’ 교향곡은 이 영화의 주제에 잘 부합되는 듯하다. 완벽하다고 믿고 신봉하다시피 하는 프리크라임 시스템의 미완성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어김없이 세 명의 예지자들이 범죄를 예측한 어느 날, 앤더튼은 뜻밖의 예상 범죄자를 본다. 그 예상 범죄자는 바로 그 자신인 존 앤더튼. 그는 믿을 수 없는 사실 앞에 실망을 금치 못하고 도망치기에 이른다. 그의 앞을 막는 연방정보국 수사관 대니 워트워(콜린 파렐 분). 앤더튼은 워트워가 꾸민 함정이라고 굳게 믿고 그의 미래를 위한 여정을 떠난다.

 

앤더튼은 동료였던 수사관들의 끈질긴 추격을 겨우 물리치고, 프리크라임 시스템을 만든 아이리스 하인먼을 찾아간다. 그녀에게서 여러 가지 충격적인 사실들을 접하고, 예방범죄국 안으로 잠입해 세 예지자 중 한 명인 아가사를 데려와 그녀 안의 내재된 앤더튼에 대한 정보를 얻으려 한다.

 

영화는 곳곳에 예상치 못한 웃음 코드를 장착시켜 놓았다. 감독인 스티븐 스필버그의 아이디어인지는 알 수 없지만, 뜻밖의 행동으로 몇몇 장면에서 웃음이 뿜어져 나왔다. 주로 앤더튼의 행동에서 비롯되는데, 완벽함을 추구하는 앤더튼에게도 불완전한 모습이 있다는 걸 보여주고자 했던 것일까. 그래서 프리크라임 시스템의 완벽함을 믿고 신봉하기까지 했던 앤더튼의 불완전한 모습과 프리크라임 시스템의 불완전함을 대치 시키려 했던 의도일까. 아니면 SF 특유의 진지함과 무게감을 유머로 풀어보려 했던 것일까.

 


영화 <마이너리티 리포트>의 한 장면 ⓒ 20세기 폭스


 

앤더튼이 아이리스 하인먼에게서 들었던 프리크라임 시스템에 대한 충격적인 내용은 ‘마이너리티 리포트’의 존재였다. 즉, 하나의 범죄에 대해 세 명의 예지자가 모두 동일한 예측을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떨 때는 다른 예측들을 한다는 것이다. 고위층은 이를 알고 있음에도 시스템의 완벽함을 지키기 위해 무시한다는 것이었다. 앤더튼은 이런 생각을 해본 적도 해보려고 했던 적도 없었다. 어찌 보면 너무나 당연한 것인데도 말이다.

 

영화는 앤더튼이 자신의 미래를 보기 위해서 예지자가 예측한 대로의 범죄 현장까지 가기에 이른다. 그리고 그는 그곳에서 또 한 번의 충격적인 사실을 듣는다. 앤더튼의 예상 범죄가 조작되었다는 사실이었다. 6년 전에 잃었던 아들을 유괴했다는 거짓말로 앤더튼으로 하여금 가짜 유괴범을 죽이게끔 한 것이다.

 

이후 영화의 전개는 급변한다. 이때부턴 원작과는 상당히 다른 양상의 전개를 띠기 시작한다. 또한 원작이 ‘마이너리티 리포트’가 상징하는 ‘소수의 의견’에 더 중점을 둔 반면, 영화는 어느 정도의 액션과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추리적 기법을 차용한 심리 싸움에 치중한다. SF를 위시한 범죄액션스릴러에 가깝다.

 

과연 앤더튼은 무서운 진실에 맞닥뜨려 무릎을 꿇을 것인가. 이겨낼 것인가. 완벽할 것만 같았던 프리크라임 시스템. ‘범죄 없는 세상’을 꿈꾸며 좋은 취지로 시작한 시스템의 추악한 인간의 ‘오류’ 내지 ‘결점’이 침투하여 상처를 내고 결국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낳고 말 것인가.

 

원작이 말하고자 하는 바에 더해 더욱 많은 걸 담아내려 했던 영화 <마이너리티 리포트>. 스피디한 전개에도 불구하고 2시간이 넘는 러닝 타임은 조금 과한 것 같기도 하다. 또한 영화를 보다 보면 생각할 거리들이 너무 많아짐을 느낀다. 철학적인 질문을 던지며 답까지 해야 하고, 액션과 범죄 스릴러의 범위까지 아울러야 했으니, 욕심이 지나쳤다고 생각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큰 결점 없이 군더더기 없는 전개에, 역시 스티븐 스필버그구나 하는 말이 나온다. 한 번 보고 또 보고 싶어지는, 그리고 또 봐야 이해가 될 것 같은 영화였다. 감독인 스티븐 스필버그와 주연 배우인 톰 크루즈에 있어, 큰 영광도 그렇다고 큰 해악도 끼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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