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리뷰] <드라이빙 미스 데이지>


깐깐하고 꽉 막힌 상류와 서글서글하고 활달한 하류의 잘못된 만남과 영원한 우정 또는 사랑 이야기는 굉장히 흔하다. <드라이빙 미스 데이지>도 그 흔한 이야기의 하나다. 영화 <드라이빙 미스 데이지> 포스터 ⓒ워너 브라더스



깐깐하고 꼬장꼬장한 전직 교사 출신 유태인 70대 할머니 데이지, 어느 누구도 그녀를 어찌 할 수 없다. 공장을 운영하고 있는 아들 불리, 그의 깐깐하고 성깔 있는 아내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그렇게 살아 왔고, 바뀌지 않을 거고, 굳이 바뀔 필요도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소소한 사고가 난다. 차를 끌고 장을 보러 가려다가 기어를 잘못 조작해 사고를 낸 것이다. 불리는 곧 흑인 기사 호크를 고용한다. 


가난했던 옛생각만 하며 부자가 된 현재의 모습을 뽐내길 싫어하고, 자신도 유태인으로 차별을 당하면서 흑인에 대한 나쁜 선입견을 가지고 있고, 종교에 대한 지나치게 확고한 신념으로 다른 종교(기독교)를 깍아내리는 데이지가 호크를 아니꼽게 보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가 뭘하든 사사건건 참견하며 하지 못하게 하고 그가 운전하는 차에 타지 않으려 한다. 동네 사람들의 시선 때문에 어거지로 차에 탄다. 



깐깐하고 꼬장꼬장한 전직 교사 출신 유태인 70대 할머니 데이지, 어느 누구도 그녀를 어찌 할 수 없다. 그녀는 그렇게 살아 왔고, 바뀌지 않을 거고, 굳이 바뀔 필요도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소소한 사고가 나 불리는 곧 흑인 기사 호크를 고용한다. 영화 <드라이빙 미스 데이지>의 한 장면 ⓒ워너 브라더스



인생의 황혼기에 완전히 바뀌는 특별한 경험


깐깐하고 꽉 막힌 상류와 서글서글하고 활달한 하류의 잘못된 만남과 영원한 우정 또는 사랑 이야기는 굉장히 흔하다. 모르긴 몰라도 인류 역사를 관통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드라이빙 미스 데이지>도 그 흔한 이야기의 하나다. 다만 이 영화만 같는 특장점이 있다. 


인간은 30세가 넘어가면 잘 바뀌지 않는다고 한다. 자신이 의도하지 않아도 그동안 체화한 것들이 겉으로 드러날 정도라는 것이다. 공자가 말씀하시길 30세면 '이립'이라 하여 '마음이 확고하게 도덕 위에 서서 움직이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는가. 하물며 70세라야? 70세면 뜻대로 행해도 어긋나지 않는 경지다. 


데이지 여사는 살아 왔던 대로 계속 살아가면 되는 나이에 있었다. 아무도 그녀를 탓하지 않는다. 그냥 그런 사람인가보다 하고 말 것이다. 그런 그녀가 180도 바뀐다. 성격이 아니라 세상을 대하는 눈이 달라진다. 거의 불가능에 가깝지는 그녀는 '해낸다'. 인생의 황혼기에 다달아 완전히 바뀌는 특별한 경험은, 보는 이에게도 특별한 경험으로 다가온다. 


데이지 여사는 살아 왔던 대로 계속 살아가면 되는 나이에 있었다. 그녀가 180도 바뀐다. 성격이 아니라 세상을 대하는 눈이 달라진다. 인생의 황혼기에 완전히 바뀌는 특별한 경험은, 보는 이에게도 특별한 경험으로 다가온다. 영화 <드라이빙 미스 데이지>의 한 장면 ⓒ워너 브라더스



그녀는 유태인이다. 자신도 미국의 백인 사회에서 알게 모르게 차별을 당한다. 사실상 흑인인 호크와 다를 바가 없다. 호크와 함께 삼촌 댁에 가는 도중 잠시 길 옆에 차를 세워두었을 때 경찰 두 명이 와서 '이 고급차를 왜 너같은 흑인이 타고 있냐'는 식으로 얘기한다. 그녀는 알지 못한다. 그들이 그녀에게도 유태인이라는 이유로 차별의 시선을 날린 것을. 그녀가 가던 회당이 KKK로 예측되는 이들에게 폭탄 테러를 당하는 일까지 당하게 된다. 흑인에 대한 나쁜 선입견으로 호크를 도둑으로 몰았던 일도 있다. 


그녀는 자신이 피해자라는 걸 몰랐을까. 아니면 피해자라는 걸 애써 감추고 살았을까. 알면서도 모른 채 살았을까. 그녀의 머릿속엔 유태인이라는 단어가 그런 식으로 비춰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대신 다른 게 들어 있다. 과거의 가난과 현재의 부자. 그녀가 흑인 가정부를 아끼는 이유가 힘들었던 지난 날을 함께 해왔기 때문인 것과 같은 맥락이다. 그런 시절을 함께 하지 않은 호크는 그녀에게 그냥 흑인일 뿐이다. 


괜찮은 삶, 끊임없이 부딪히고 깨닫고 성장하는 삶


영화는 20년의 세월을 그린다. 이미 초로의 노인인 데이지 여사는 치매에 걸려 요양원에서 지내고 호크는 운전을 할 수 없어 손녀딸이 태워주는 차에 타고 다니게 된다. 아이델라는 세상을 떠났고, 아들도 늙고 바빠 잘 챙기지 못하며, 며느리는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말로만 안부를 전하니, 그녀에게 남은 이는 호크밖에 없었다. 한순간 정신을 차린 데이지 여사는 호크에게 진심을 전한다. 


"자네는 나의 친구야, 가장 친한 친구."


보다시피 영화는 의외로 성장 영화다. 초로의 여인 데이지 여사의 성장기. 그 성장에 차별 철폐, 우정, 화해, 진심이 담겨 있다. 그 성장을 죽을 때까지 멈추지 않는다. 흔하디 흔하지만 특별한, 그래서 특별함을 많은 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었다. 어떤 사건사고 없이 몇몇의 대화로만 이루어진 이 단조로운 영화가 와 닿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그런 사실을 인지하게 되었을 때 직시하고 올바른 쪽으로 바꿔나가는 것이야말로 괜찮은 삶이고 잘 산 삶일 것이다. 그들이 부러운 듯 '운이 좋았다'고 말한 아이델라의 삶이 아니고. 영화 <드라이빙 미스 데이지>의 한 장면 ⓒ워너 브라더스



그들은 죽은 아이델라를 두고 '운이 좋았다'라고 표현한다. 왜 그렇게 말했을까. 그녀가 좋아하는 드라마를 보다가 죽음을 맞이해서? 고통스럽지 않게 자신도 모르는 새 죽음을 맞이해서? 말년의 비참한 꼴을 보지 않고 죽음을 맞이해서? 생각해봐도 그들이 그렇게 말한 정확한 이유를 모르겠다. 다만 영화의 맥락을 통해 이해해 볼라치면, '흑인의 삶치곤 괜찮은 삶이었다' 정도겠다. 씁쓸하다.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 자신이 차별 당하고 있는 사실을 이해하려고도 하지 않고 이해하지도 못한 채 '분수에 맞는' 삶을 사는 게 괜찮은 삶이고 잘 산 삶일까. 물론 그런 사실을 인지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체념한 채 살아가는 것보다는 괜찮은 삶이겠다. 여기서는 '아는 게 힘'이라기보다 '모르는 게 약'이지 않을까. 


그렇다면 그런 사실을 인지하게 되었을 때 체념하는 게 아니라 정확히 직시하고 올바른 쪽으로 바꿔나가는 것이야말로 괜찮은 삶이고 잘 산 삶일 것이다. 데이지 여사, 그리고 호크의 삶이 바로 그런 삶이다. 그들이 부러운 듯 '운이 좋았다'고 말한 아이델라의 삶이 아니고. 그녀의 삶은 '충실했다'고 표현하는 게 맞지 않을까. 결이 조금 다른. 


많은 사람들이 아이델라의 삶을 살아간다. 그저 살아가는 데 충실한 삶, 그 또한 어떤 의미에선 위대한 삶이다. 데이지 여사의 삶도, 호크의 삶도, 많은 이들에겐 상당히 다른 차원의 삶이다. 나는 아직 정하지 못했다. 어떤 삶을 살아갈지, 또 어떤 삶을 살 수 있을지. 부러운 삶은 아이델라의 삶일 것이다. 하지만 살고 싶은 삶은 데이지 여사와 호크의 삶이다. 끊임없이 부딪히고 깨닫고 성장하는 삶 말이다. 괜찮은 삶이길 바란다. 괜찮은 삶이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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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오래된 리뷰] <브로크백 마운틴>


'이 세상에 둘밖에 없으면 어떨까' 하는 질문은 '이 세상에 우리 둘밖에 없었으면 좋았겠다'로 바뀐다. 이 영화가 보여주는 사랑의 위대함과 길고긴 여운은 그 지점의 연장선이다. 영화 <브로크백 마운틴> 포스터. ⓒCJ엔터테인먼트



약관 20세의 두 청년 잭(제이크 질렌할 분)과 에니스(히스 레져 분), 함께 브로크백 마운틴에서 양떼를 몬다. 광활한 대지에 두 사람뿐이라 어색하다. 그것도 잠시, 어느새 친해져 브로맨스를 선보이는 두 사람. 어느 날 잭은 밖에서 오들오들 떨면서 자는 에니스에게 텐트에 들어 오라고 한다. 새벽녘 그들은 격정적인 사랑을 나눈다. 


없었던 일로 하자는 에니스, 받아들이는 잭. 그들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자신은 게이가 아니라고 말한다. 이미 그들의 친밀감은 전에 없이 높아져 있었다. 갑작스레 철수하게 되는 그들, 이제 현실로 돌아가야 하는 그들은 주체할 수 없는 혼란으로 서로가 서로에게 상처를 입힌다. 그들은 헤어진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처럼. 


이 영화가 보여주는 사랑의 위대함


에니스는 말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어. 가끔 만나서 몰래 사랑할 수밖에 없다고." 영화 <브로크백 마운틴>의 한 장면. ⓒCJ엔터테인먼트



영화 <브로크백 마운틴>은 광활한 대자연에 던져진 두 청년의 혼란에서 시작한다. '이 세상에 둘밖에 없으면 어떨까' 하는 질문을 하게 만든다. 그 질문은 영화가 끝날 무렵 '이 세상에 우리 둘밖에 없었으면 좋았겠다'로 바뀐다. 이 영화가 보여주는 사랑의 위대함은 그 지점에서 발현되고, 이 영화의 길고긴 여운은 그 지점의 연장선이다. 


그렇다. 이 영화의 주요 소재와 주제는 남성 간의 로맨스, 즉 동성애다. 그런데 그들은 격정적인 로맨스를 한 차례 겪은 후 이성과 결혼하고 아이도 낳아 기른다. 그들의 인생에서 거의 처음 겪어보는 사랑의 감정이 남성을 향했을 뿐이니, 젊은 날의 경험이라고 치부하며 넘어갔을 수 있겠다. 기나긴 인생에서 스쳐지나간 금지된 사랑을 그린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가 생각나는 지점이다. 


그들의 사랑은 헤어진 지 4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다. 각자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현실에 안주하며 살고 있은 지도 한참이 흘렀음에도 말이다. 4년 만에 만난 그들은 그 자리에서 격한 키스를 나누고 가족에겐 거짓말을 한 후엔 사랑도 나눈다. 그런데,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 사랑을 재확인 했으니만큼 이제라도 같이 살며 모든 걸 초월한 진정한 사랑의 앞날을 도모할 것인가? 에니스는 말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다고. 가끔 만나서 몰래 사랑할 수밖에 없다고. 


어느 사랑보다 절절한 사랑, 잔잔하게


그들의 삶은 평범하게 흘러간다. 겉으로 보기엔 남과 다르지 않다. 다만, 어쩔 수 없는 게 있다. 사랑하는 사람이 따로 있다 보니 아내와 가족들에게선 멀리 있을 수밖에 없다. 영화 <브로크백 마운틴>의 한 장면. ⓒCJ엔터테인먼트



영화의 주 배경은 1960~70년도이다. 더구나 그들은 서부 사나이들이고. 잭은 가장 사나이다운 직업인 로데오 카우보이가 되고자 한다. 에니스는 어릴 때 아버지가 동성애자를 죽여서 버린 모습을 생생히 기억한다. 태생적으로, 사회적으로 그들은 서로를 사랑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어떻게든 이성과 결혼을 한 거고. 그 와중에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는 걸 숨기지 않은 것만해도 엄청난 부담이었다. 


그들의 삶은 평범하게 흘러간다. 겉으로 보기엔 남과 다르지 않다. 다만, 어쩔 수 없는 게 있다. 사랑하는 사람이 따로 있다 보니 아내와 가족들에게선 멀리 있을 수밖에 없다. 만약 사랑하는 사람이 남자가 아니라 여자였다면, 욕을 먹더라도 '사랑'으로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이 남자였기에 그럴 수 없었다. 남자가 남자를 사랑했다는 이유로, 그들의 삶은 평탄치 않았고 가시밭길이었다. 


영화는 어느 사랑보다 절절한 그들의 사랑을 얼핏 전혀 절절하게 보여주지 않는다. 오히려 너무 담담해 지루하다 싶을 만큼 잔잔하게 보여준다. 그래서 영화를 보는 내내 '영화니까 가능한 거지, 영화잖아.'라는 말을 꺼내지 못했다. 그들의 사랑은 결코 로맨틱하지 못했으니까, 로맨틱한 연출은 그들의 사랑에 방해가 되지 않는가. 


상황에 맞는 OST가 거의 깔리지 않는 게 한 몫 했다. 대부분의 영화에서 분위기를 살리는 데는 시의적절한 OST가 큰 몫을 차지하는데, 이 영화는 오히려 그러지 않았기에 분위기를 살릴 수 있었다. 그들의 감정선을 오롯이 따라가는 데 초점을 맞춘 것이고, 보는 이 또한 그러했다. 그 덕분에 치기 어리고 혼란스러운 첫 경험에서 시작해 20년 간 지속되는 사랑의 절절함이 폭발하는 감정의 선율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때 터진 울음은 영화가 끝나고서도 한참을 간다. 시종일관 터져 나오는 울음으로 끝나는 여타 영화에서는 느끼기 힘든 바다. 


그저 브로크백 마운틴으로 보여줄 뿐이다


영화는 동성애를 옹호하고 울부짖지 않는다. 브로크백 마운틴으로 보여줄 뿐이다. 그들의 사랑을 보호해줘야 한다는 것을. 그들의 사랑이 아름답다는 것을. 그들의 사랑도 사랑이라는 것을. 영화 <브로크백 마운틴>의 한 장면. ⓒCJ엔터테인먼트



금지된 사랑을 하는 이들은 누구나 '우리 아무도 없는 곳으로 떠나자'라고 말한다. 그런데 잭과 에니스는 이미 그런 곳에서 주기적으로 만난다. 다름 아닌 '브로크백 마운틴'이다. 그들의 사랑이 시작된 그곳, 그들에겐 이상향과도 같은 그곳, 그들의 도피처이자 그들에게 유일하게 남은 그곳이다. 


참으로 슬프고 쓸쓸한 곳이기도 하다. 아무도 없이 오직 그들만 있어 자유롭지만 극도로 폐쇄적이고 고독한 곳이 아닌가. 그들은 도대체 왜 그곳에서만 사랑을 확인하고 사랑을 나눌 수 있는 것인가. 그들이 잘못한 게 있어서? 그들이 죄를 지어서? 반면에 누구나 자유롭고 평등하다는 곳에서는 그렇지 못한 것인가. 


영화는 직접적으로 동성애를 옹호하고 울부짖지 않는다. 브로크백 마운틴으로 보여줄 뿐이다. 그들의 사랑을 보호해줘야 한다는 것을. 그들의 사랑이 아름답다는 것을. 그들의 사랑도 사랑이라는 것을.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데 그 어떤 게 필요할까. 그저 사랑, 사랑, 사랑만 있으면 되지 않을까. 그거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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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아메리칸 히스토리 X>


미국의 경우 오랫동안 보다 나은 삶의 기회를 찾아 미국으로 오는 모든 이에게 자유와 풍요를 약속하는 '아메리칸 드림'이 존재했다. 그 이면에는 잘 보이지 않는, 잘 드러내지 않은 큰 문제가 도사리고 있었다. 영화 <아메리칸 히스토리 X> 포스터 ⓒ뉴라인시네마



남 캘리포니아의 스킨헤드 데릭(에드워드 노튼 분)은 자동차를 훔치러 온 흑인들을 향해 무차별 총격을 가한다. 그러곤 신음하는 그들을 무참히 살해한다. 그와 함께 있던 여자친구와 남동생 대니는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충격적으로 시작된 영화 <아메리칸 히스토리 X>는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이야기를 전개한다. 


유럽 난민 사태가 전 세계적인 이슈로 떠오른지 한참이다. 인도적인 차원에서 그들을 수용할 것인지 자국의 이익을 위해 받아들이지 않을 것인지, 논란도 엄청 나고 결정도 쉽지 않다. 안 그래도 전 세계적인 경제 위기가 완전히 사그라들지 않은 시점에, 불황에 허덕이는 자국민들은 그 분노를 이주민에게 돌리기 쉽다. 그 어느 나라도 예외일 수 없다. 


미국의 경우 오랫동안 보다 나은 삶의 기회를 찾아 미국으로 오는 모든 이에게 자유와 풍요를 약속하는 '아메리칸 드림'이 존재했다. 미국의 상징인 '자유의 여신상'이 다름 아닌 아메리칸 드림의 상징과도 같으니 그곳은 정녕 꿈에서나 나올 법한 곳이 아닌가. 수많은 이들이 향했고, 때론 실패했고 때론 성공했다. 그리고 그 이면에는 잘 보이지 않는, 잘 드러내지 않은 큰 문제가 도사리고 있었다. 아메리칸 악몽(나이트메어)이다. 


아메리칸 드림이 아닌, 아메리칸 나이트메어


이 영화를 관통하는 큰 주제가 아메리칸 나이트메어다. 그 중심에는 스킨헤드 데릭이 있다. 영화 <아메리칸 히스토리 X>의 한 장면 ⓒ뉴라인시네마



이 진지한 영화를 관통하는 큰 주제가 바로 그 아메리칸 나이트메어다. 그 중심에는 스킨헤드 데릭이 있다. 그는 3년 전 소방수 아버지를 잃었는데, 다름 아닌 흑인 거주지에서 일을 수행하다가 강도의 손에 죽음을 맞았던 것이다. 그 일을 계기로 백인 우월주의자로의 길을 걷는다. 남동생 대니는 그를 영웅처럼 떠받든다. 


그런데 3년 간의 복역을 끝내고 나온 데릭의 행동이 뭔가 이상한 게 아닌가. 더 이상 스킨헤드의 길을 가지 않겠다고 천명하고는 대니를 설득하고 나선 것이다. 큰 깨달음이 없이는 그 길에서 헤어나오기 쉽지 않다. 대니 역시 그렇다. 결국 데릭은 결심을 하고는 자신이 감옥에서 겪었던 끔찍하지만 감동적인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는 감옥에 가서도 여전히 스킨헤드로 행동한다. 역시나 그곳의 스킨헤드 그룹에 들어가 중추적인 역할을 한다. 한편 흑인 한 명과 같이 일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도 처한다. 그러던 중 스킨헤드 그룹의 대장이 유색인종과 거래를 하는 사실을 알게 된다. 참을 수 없는 데릭은 항의하다가 참혹한 일을 당한다. 그가 갈 곳은 없고, 유색인종 그룹한테 더욱 더 참혹한 일을 당할 것이 분명했다. 그런 그를 지켜준 이가 다름 아닌 그와 함께 일하는 흑인이었다. 그는 큰 깨달음을 얻는다. 


과연 그 깨달음은 다시 뭉쳐 비로소 온전히 잘 살아보려는 그의 가족을 지켜낼 수 있을까? 너무 늦은 게 아닐까? 그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죄를 저질렀다. 흑인 두 명을 살해해 흑인들에게 언제 보복을 당할지 알 수 없다. 또한 복역이 끝나고 돌아와서는 백인 우월주의자들에게도 등을 돌렸다. 백인들한테도 언제 보복을 당할지 알 수 없는 일이다. 특히 대니는 그의 전철을 아주 차근차근 따라가고 있기 때문에 무슨 일을 당해도 할 말이 없는 것이다. 


본노 자체가 아니라, 대상이 잘못 되었다


분노가 생길 수밖에 상황이고, 분노는 반드시 풀어주어야 한다. 그런데 그 대상이 왜 시대와 나라와 위정자가 아니라 약자여야 하는가. 영화 <아메리칸 히스토리 X>의 한 장면 ⓒ뉴라인시네마



활발한 이주민 정책으로 아메리칸 드림이 절정이었을 시기에, 스킨헤드의 활동 역시 절정으로 치닫을 수밖에 없었다. 유색인종의 유입이 급격히 늘어나면서 자연스레 백인의 실업률이 높아질 수밖에 없었고 그에 맞춰 정권은 자유 경쟁을 활성화시키는 보수적 정책을 시행하고 유지했다. 이주민 정책이 활성화될 때에 일자리를 잃게 된 백인 청년들은 그 화살을 이주민들에게 돌렸고, 그 사상의 기반을 백인 우월주의에서 찾았다. 권력에서 소외되고 자본주의 경쟁에서 패배한 그 분노는 대단한 것이었다. 피해자의 입장에서 가해자의 입장으로 변하는, 그 우월한 느낌 또한 무시할 수 없다. 


혐한(嫌韓)으로 유명한 일본의 '재특회(재일 특권을 용납하지 않는 시민 모임)'도 그런 부류다. 장기 불황으로 실업률이 높아지고 많은 청년들이 절망에 빠져 있는 상황에서, 누군가 나서 '적'을 만들고는 그 적은 능력도 없거니와 선천적으로 후지다고 선전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사상으로 똘똘 뭉치게 된다. 자신들은 우월한데, 다수의 적들이 침범해 어쩔 수 없이 자리를 보전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기조다.


그런데 생각해보라. 피해자에서 가해자가 된 그들이지만, 자신들이야말로 피해자라고 약자라고 외친다. 여러모로 피해자였던 건 맞지만, 결코 약자는 아닌 것이다. 문제는 잘 살지 못하는 나라에서 왔을 대부분의 이주민이야말로 약자가 아닌가. 고로 피해를 당해도 그들이 더 많은 피해를 당할 게 아닌가. 


문제는 증오의 대상이 잘못 되었다는 점이다. 그들의 분노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분노가 생길 수밖에 상황이고, 분노는 반드시 풀어주어야 한다. 그런데 그 대상이 왜 시대와 나라와 위정자가 아니라 약자여야 하는가. 그건 명백한 오류다. 


이 영화가 괜찮은 이유


미시적으로 접근했기에 조금의 답을 찾을 수 있었다. 이런 류의 뿌리 깊은 대립은 개인 개인으로 접근해야 한다. 영화 <아메리칸 히스토리 X>의 한 장면 ⓒ뉴라인시네마



이 영화가 괜찮은 이유는 따로 있다. 그런 심각하고 첨예한 논란을 주제로 삼았다는 것도 점수를 듬뿍 줄 수 있겠지만, 그 문제를 굉장히 미시적으로 접근했다는 점이다. 통사적으로 접근했다면 오히려 받아들이기가 힘들었을지 모른다. 또한 조금의 답도 찾을 수 없었을 것이다. 더욱이 영화적으로 의미가 없었을 것이다. 그리하면 다큐멘터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게 된다. 


미시적으로 접근했기에 조금의 답을 찾을 수 있었다. 이런 류의 뿌리 깊은 대립은 개인 개인으로 접근해야 한다. 영화의 한 명대사가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네가 한 행동들이 너의 삶을 좋게 만들었니?" 누구보다 투철한 스킨헤드인 데릭도 그 한 마디에 아무런 대답을 할 수 없었다. 그들이 원하는 건 여하튼 더 좋은 삶일 텐데 말이다. 유색인종을 모두 몰아내고 백인들의 세상을 만드는, 그들의 입장에서는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그런 삶을 만드는 게 목표일 텐데 말이다. 


결국 황폐해질 수밖에 없는 행동을 했다는 것. 아무리 거창한 사상과 목표로 무장하고 있더라도 결코 삶을 더 좋게 만들 수 없다는 깨달음. 조직적인 거창함에서 사적인 삶의 세계로 내려올 때 알게 되는 깨달음이다. 거기엔 사소하지만 위대한 사랑과 우정이 있다.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게 바로 거기에 있다. 그걸 깨닫지 못하고는 이 대립은 영원히 끝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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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왕가위 감독의 <중경삼림>


<중경삼림>은 '시간과 공간'에 관한 영화이다. . 영화 <중경삼림> 포스터. ⓒ엔드플러스



왕가위 감독을 세계적인 거장 반열에 오르게 한 영화 중 하나인 <중경삼림>. 제목을 이야기하지 않고 영화를 이야기하기 힘들다. 중경삼림을 영어로 바꾸면 'Chungking Express'이다. 홍콩에 가면 Chungking Mansion(重慶大廈: 중경대하)이 있다고 하는데, 처음 지어질 당시에는 고급 아파트였던 것이 현대에는 외국인 노동자들이 사는 소란스럽고 낡은 건물이 되었다고 한다. 왕가위 감독은 그곳을 중심으로 <중경삼림>을 찍었다.


또 하나, Express는 영화에서 주된 장소로 등장하는 패스트푸드점의 이름이다. 많은 사람들이 왔다가 머무르지 않고 떠나곤 하는 곳이다. '급행의' '신속한' '속달'의 의미를 지닌 Express와 일맥상통한다. 영화에서는 사랑을 잃고 방황하는 이들이 찾아와 외로움과 고독을 놓고 가곤 한다. 그러며 그곳에서 또다른 사랑을 찾는다. 


<중경삼림>은 이처럼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제목에서 어느 정도 유추할 수 있다. 은유와 상징이 상당한, 그래서 난해하고 지루할 수 있는 이 영화를 보기 전에 말하고자 하는 바를 알 수 있다면, 그건 스포일러 등의 방해가 아닌 도움이 될 것이다. <중경삼림>은 '시간과 공간'에 관한 영화이다. 


이 영화는 홍콩이 반환되기 3년 전에 만들어졌다. 그래서 그 시기 만들어진 많은 홍콩영화가 그렇듯이 홍콩 사회의 불안과 혼란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하기 쉽다. 물론 이 영화에 그런 점이 없다고 할 순 없다. 다분히 있다. 반환을 앞두고 불안과 혼란에 빠진 홍콩사회를 사랑을 잃고 방황하는 청춘들의 모습으로 보여주고 있다고 해도 무방한 것이다. 그렇지만 그건 분명 너무도 뻔한 도식이다. 애초에 실화도 아니고 사회를 보여주려고도 하지 않는다. 


기억이 통조림에 들어있다면 유통기한이 끝나지 않기를


"기억이 통조림에 들어있다면 유통기한이 끝나지 않기를, 만일 유통기한을 꼭 적어야 한다면 만 년 후로 적어야겠다." 영화 <중경삼림>의 한 장면. ⓒ엔드플러스



영화는 두 개의 이야기로 이루어진다. 사복경찰 223(금성무 분)은 매일 Chungking Express에서 만우절에 거짓말처럼 헤어진 옛 애인에게 전화를 건다. 그녀가 좋아했던 파인애플 통조림을 사들이며 자신의 생일이자 이별 한 달 째가 되는 5월 1일까지 연락이 안 오면 그녀를 잊겠다고 다짐한다. 결국 그녀한테서 연락은 오지 않고 223은 파인애플 통조림 30개를 모조리 먹어치우며 그녀를 잊는다. 비로소 이별이다. 


파인애플 통조림의 유통기한은 곧 223과 옛 애인 간의 사랑의 유통기한이다. 그가 매일 사들인 유통기한 5월 1일자 파인애플 통조림을 유통기한이 지나기 전에 다 먹어치운 이유는, 자신의 사랑이 쓰레기 취급 받기 싫어서 라는 순수한 이유 때문이다. 하지만 그 순수함은 비웃음을 사는 게 아닌 감동을 불러 일으킨다. 


그는 무작정 새로운 사랑을 찾으려 한다. 그렇게 만나게 된 이(임청하 분)와의 하룻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223의 순수함이 뚝뚝 묻어난다. 그가 왜 사랑을 잃었는지 왠지 수긍이 가게 되는 장면이지만, 세상은 그런 이의 사랑이 있기에 청량하고 아름답다. 급기야 그는 그 스쳐지나간 사람의 생일 축하한다는 한 마디에 "난 그녀를 잊지 못할 것이다. 기억이 통조림에 들어있다면 유통기한이 끝나지 않기를, 만일 유통기한을 꼭 적어야 한다면 만 년 후로 적어야겠다."고 독백한다. 


특별한 공간 '집', 그녀의 사랑 방식


사랑하는 이와 함께 했던 공간에 다른 이가 들어온 걸 견디긴 힘들 것 같다. 그래도 정성을 다해 집을 꾸며주고 사랑으로 다친 상처를 치유해주려는 그녀의 노력을 알아주지 않을까. 영화 <중경삼림>의 한 장면. ⓒ엔드플러스



정복경찰 663(양조위 분)은 223처럼 매일 Chungking Express에서 애인이 좋아하는 샐러드를 사간다. 하지만 애인은 곧 이별을 고하고 Chungking Express 점원 페이(왕페이 분)에게 편지와 열쇠를 건넨다. 663은 실의에 빠진다. 밖에서는 멀쩡해보이지만, 집에서는 어딘가 나사가 빠진 느낌이다. 물이 떨어지는 수건에 자신을 이입해 울지말라고 위로하고, 인형이나 비누를 붙잡고 하소연한다. 


한편 페이는 매일 663의 집에 몰래 가 663의 옛 애인의 흔적을 지워나간다. 그렇게 663이 자신도 모르게 이별을 해나가게 도와주는 것이다. 그러며 자신도 그곳에서 힐링을 받는다. 663이 받아줄지는 미지수이지만, 그것이 페이의 사랑 방식이다. 


언젠가는 663이 애인이 집에 돌아온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달려 들어온다. 그런데 잡그지 않은 수돗물이 넘쳐 집이 물바다가 된 게 아닌가. 663은 집을 치우며 "이 집은 점점 감정을 가진다. 강한 줄 알았는데 이렇게 많이 울 줄은 몰랐다."며 급기야 집에 자신을 이입한다. 그녀와의 특별한 공간인 집이 우는 건 아직 그가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다. 


그런 집에 페이가 몰래 침입한 사실을 알게 된 663은 어떤 마음일까. 가택침입죄를 물어 감방에 쳐 넣을 것 같지는 않지만, 사랑하는 이와 함께 했던 특별한 공간에 다른 이가 들어온 걸 견디긴 힘들 것 같다. 그래도 정성을 다해 집을 꾸며주고 사랑으로 다친 상처를 치유해주려는 그녀의 노력을 알아주지 않을까. 


시간이 흘러 비로소 알게 된 사랑 혹은 시간이 흘러도 변치 않는 사랑


<중경삼림>의 이야기는 곧 우리들의 이야기다. 그때가 과거로 머물지 않고 매순간 현재화 되어 지금까지 이어져 왔다는 사실이 새삼 신기하다. 영화 <중경삼림>의 한 장면. ⓒ엔드플러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영화는 시간과 공간을 주제로 한다. 그렇다면 223과 663의 이야기가 각각 시간과 공간에 관한 것일까? 많은 이들이 그렇게 볼 것 같은데, 꼭 그렇지만도 않다. 223과 663의 이야기 모두 시간과 공간을 말하고 있다. 두 이야기에 공통으로 나오는 Chungking Express라는 공간, 223의 이야기를 관통하는 '사랑의 유통기한', 663의 이야기를 관통하는 '특별한 공간, 집'과 시간이 흘러 비로소 알게 된 사랑 혹은 시간이 흘러도 변치 않는 사랑이 그것이다. 


이 영화를 이렇게 한 마디로 정의하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는, 모순적으로 이 영화는 한 마디로 정의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양가위 감독의 비서사적이면서 상징과 은유로 꽉 찬, 그러며 형용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영상미가 그러하다. '감성의 자유로운 표현이나 놀이의 요소를 도입한 사고 방식이나 표현 수법'이라는 뜻의 '포스트모던' 스타일의 대가 양가위의 대표작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영화를 꿰뚫는 무엇을 말하라면 단연 'California Dreaming'을 들겠다. 극 중에서 페이가 가장 좋아하는 노래인데, 황금빛 낙원 캘리포니아를 근심 있고 우울한 감정선으로 처리했다. 그건 곧 <중경삼림>과 일맥상통한다. 영화는 순수함과 불안이 공존하고 시종일관 우울한 듯하지만, 결국 해피엔딩을 이룬다. 


이름도 나오지 않는 이들(남자 주인공)의 도시 홍콩은 이들에게 불안과 혼란을 주지만, 불안과 혼란에서만 잉태되는 설렘과 꿈을 청춘에게만 허용되는 방황을 준다. 20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지워지지 않는 <중경삼림>의 이야기는 곧 우리들의 이야기다. 그때가 과거로 머물지 않고 매순간 현재화 되어 지금까지 이어져 왔다는 사실이 새삼 신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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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뱀파이어와의 인터뷰>


영화 <뱀파이어와의 인터뷰>는 여러 모로 뱀파이어 콘텐츠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영화 <뱀파이어와의 인터뷰> 포스터 ⓒ워너브라더스


아무런 생각도 해보지 못했다. 죽음을 맞이할 것인가, 영원한 삶을 얻을 것인가. 너무 극과 극에 있지 않은가. 누구라도 영원한 삶을 선택할 것 같다. 나 또한 그럴 것 같다. 광활한 중국 대륙을 최초로 통일한 진시황도 그랬고, 중세의 연금술사들도 그랬다. 많은 종교 또한 그러하다. 


그래서 인간은 죽음 못지않게 영원한 삶에 대해 수많은 콘텐츠들을 양산해냈다. 그 중 하나가 '뱀파이어'다. 그들은 햇빛에 노출되지 않거나 동족에게 죽임을 당하지 않는 이상, 영원한 삶을 보장받는다. (그들의 신체 능력은 발군을 자랑하기에 동족이 아니면 상대가 되지 않는다) 


더욱이 뱀파이어가 된 당시보다 더 젊고 아름다운 모습을 계속 유지하기에, 경우에 따라 영원한 '젊음'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정녕 뱀파이어에게 물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은 사람이 많을 줄 안다. 그러면 뱀파이어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린다. 영원한 삶과 죽음, 한 번 선택하면 돌이킬 수 없다. 


영생의 삶, 축복일지 저주일지 모를 삶을 살게 되다


1994년 나온 <뱀파이어와의 인터뷰>는 여러 모로 뱀파이어 콘텐츠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이전 뱀파이어 콘텐츠에서 통용되었던(브람 스토커가 <드라큘라>로 집대성한 결과물들이다) 통념들을 조금 무너뜨렸다. 그렇지만 그 '조금'이 상당한 차이로 다가온다. 성수나 마늘, 십자가를 무서워하지 않으며, 무엇보다 뱀파이어에게 물린다고 무조건 뱀파이어가 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 작품에서는 뱀파이어가 인간의 피를 빨고 뱀파이어의 피를 그 인간에게 줘야, 비로소 뱀파이어가 될 수 있다. 이전보다 뱀파이어가 되기 힘들어졌지만, 일단 되기만 하면 거의 약점이 없는 것이다. 


영화는 200살 된 뱀파이어인 루이스 드 포인트 두 락(브래드 피트 분)이 기자와 인터뷰하며 시작된다. 그는 자신이 뱀파이어란 걸 밝히고, 탄생부터 현재까지의 연대기를 이야기한다. 아내와 아이를 잃고 절망에 빠져 죽음을 갈망하는 그를 뱀파이어 레스타트 드 라이온카운트(톰 크루즈 분)가 물어버린다. 그러곤 그에게 선택을 강요한다. 영생인가, 죽음인가. 죽음을 갈망하는 루이스는, 정작 죽음을 택하지 못하고 영생을 택한다. 새로운 삶, 축복일지 저주일지 모를 삶을 살게 된 것이다. 


영생인가, 죽음인가. 죽음을 갈망하는 루이스는, 정작 죽음을 택하지 못하고 영생을 택한다. 영화 <뱀파이어와의 인터뷰>의 한 장면. ⓒ워너브라더스



뱀파이어는 신선한 피가 없이 살 수 없다. 그 중에 제일은 인간의 피다. 하지만 루이스는 인간의 감정을 가진 드문 뱀파이어가 되어, 레스타트의 강요와 회유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피를 한사코 거부한다. 그때부터 그에게 뱀파이어의 삶은 지옥으로 다가온다. 더불어 영원한 삶 또한 축복이 아닌 저주가 되었다. 완벽한 뱀파이어인 레스타트와 같이 있는 것 또한 견딜 수 없다. 하지만 그는 자신을 만들어 준 아버지이고, 그 없이는 뱀파이어로 살아가기 힘든 게 현실이다. 


그 와중에 엄마를 잃은 고아 클로디아(커스틴 던스트 분)를 만난다. 레스타트는 루이스의 마음을 속단하고 클로디아를 뱀파이어로 만들어 셋이 가족을 꾸린다. 클로디아는 레스타트를 잘 따라 완벽한 뱀파이어가 되어간다. 하지만 그녀의 외모는 언제나 어린 소녀, 그녀는 그 모습이 영원히 계속될 거라는 사실이 견딜 수 없다. 결국 루이스와 함께 그녀를 만든 레스타트를 죽이고 길을 떠나게 되는데... 


'영생'이라는 아름다운 지옥, 택할 것인가?


영화는 참으로 생각할 거리가 많다. 뱀파이어가 나오는 많은 콘텐츠가 추구하는 판타지적 요소를 최대한 배제하고 다분히 철학적으로 접근한다. 루이스와 클로디아의 시선을 쫓으며, 영원한 삶이 결코 축복이 될 수 없다고 말한다. 오히려 지옥 같다는 것이다. 언제나 어둠 속에서만 살 수 있고, 언제나 그 모습 그대로이며, 인간이나 동물의 피를 먹어야 하지만 엄연히 소수이기 때문에 대놓고 대응할 수도 없다. 그야말로 영원히 쥐 죽은 듯 살아가야 한다. 


삶의 근원, 삶의 시작에 대한 성찰 또한 계속 된다. 처음엔 뱀파이어가 되어 새로운 삶을 얻게 된 걸 감사하고 신기하게 생각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지옥 같은 나날이 계속되면서 자신을 왜 뱀파이어로 만들었는지 자신이 왜 뱀파이어가 되겠다고 했는지 반항과 후회가 이어지는 것이다. 급기야 아버지를 죽이거나 아버지와 헤어지면서 자신의 근원을 부정해보려 하지만 쉽지 않다. 


삶의 근원, 삶의 시작에 대한 성찰 또한 계속 된다. 영화 <뱀파이어와의 인터뷰>의 한 장면. ⓒ워너브라더스



한편, 이 영화에 유난히 '브로맨스' 혹은 '동성애'로까지 비춰지는 분위기와 장면들이 나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루이스가 거부하고자 하는 건 뱀파이어의 삶이 아니라 동성애자로의 삶인 것인가. 분위기에 편승하여 그렇게 생각해볼 수도 있겠지만, 너무 멀리까지 나간 생각인 것 같다. 그건 아마도 뱀파이어가 되면 더욱더 아름답고 신비로운 모습으로 바뀌기 때문일 것이다. 일면 그들의 사랑 형태가 궁금해진다. 


영화를 보고 나면, 영생인가 죽음인가의 말도 되지 않는 선택에서 어떤 걸 택할 지 조금은 망설여진다. 그만큼 영생의 지옥도를 잘 표현해냈다. 그것도 과하지 않고 아름답고 매력적으로 말이다. 그 모순이야말로 영생과 죽음의 기로에서 가장 어려운 부분이 아닐까. '아름다운 지옥', 지옥이라도 아름답다면 갈 수도 있을 것 같다. 어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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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영화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포스터 ⓒ외유내강


2000년대 초반, 영화 <친구>를 필두로 일명 '조폭 영화'가 범람한다. 수요가 있으니 공급이 있는 법, 그만큼 인기도 많이 끌어서 나오는 족족 흥행에 성공한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한국 영화의 파이가 커진 게 그쯤이 아닌가 싶다. 개중엔 조폭을 미화한 경우가 많았는데, 사회적 반향이 작지 않았다. 그만큼 영화가 차지하는 비중이 커진 것이었다. 즉, 필수적이리만치 리얼리즘에 반할 수밖에 없었다. 


이미 1990년대에 훨씬 날 것의 조폭 영화가 있었다. <초록 물고기>다. 물론 대형 스타들이 즐비했기에 완전한 날 것을 연출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회는 좋아하지만, 날 것의 영화는 좋아하기 쉽지 않다. 날 것은 생활에서 접할 수 있겠지만, 영화에서까지 접할 필요가 있겠는가. 영화는 영화다워야 한다면 할 말이 없다. <초록 물고기>를 티끌 하나 없는 접시에 놓인 맛있는 회로 비유하자면, 2000년대 이후에 나온 조폭 영화들은 티끌 하나 없는 접시에 놓인 맛있는 회무침으로 비유할 수 있을까? 회를 초장 맛으로 먹는 사람이 은근히 많거니와 한 번 그 맛에 발을 들여놓으면 헤어나오기가 쉽지 않다. 


그렇다면 2000년에 나온 류승완 감독의 장편 데뷔작이자 류승범의 데뷔작인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은 더럽다기 보다는 깨끗하지 않은 접시에 놓인 싱싱하기 그지없는 회로 비유할 수 있을 것 같다. 초장 같은 건 필요 없다. 회 그 자체로 맛이 일품이니까. 다만 쉽게 접하기 힘들다. 날 것의 비릿함이나 미끈함을 즐기지 않을 수도 있고, 회만이 갖는 그 어떤 카리스마에 주눅이 들 수도 있겠다.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는 과연 어떤 영화일까.


돌아올 수 없는 치명적 비극으로의 길


영화는 4개의 짧은 단편 연작 형식으로 이루어졌다. 각각의 제목은 '패싸움' '악몽' '현대인'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인데, 이 비극의 시작은 사소했다. '패싸움'. 당구장에서 공고생 석환(류승완 분)과 성빈은 예고 학생들에게 '공돌이'라고 비웃음을 받고 있다. 이에 분노를 터뜨리는 석환과 말리는 성빈. 그때 후배가 피투성이가 된 채 당구장으로 들어온다. 누가 그랬냐는 질문에 예고 학생의 두목 격인 현수를 가리킨다. 즉시 석환에 의해 패싸움이 시작되고, 실수로 성빈이 현수를 살해하게 된다. 



영화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의 한 장면 ⓒ외유내강



'악몽' 출소하게 된 성빈과 강력계 형사가 된 석환. 성빈은 매일 밤 죽은 현수가 나오는 악몽에 시달린다. 카센터 일을 하며 성실하게 살아보려 하지만, 의도치 않게 건달의 길을 가게 되는 성빈. 그런 오래된 친구 성빈을 피하는 석환. 더 벌어진 이들의 관계는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을 불러오는 씨앗이 된다. 


'현대인' 아무도 없는 공사장에서 마주친 성빈의 두목과 석환의 물러설 수 없는 싸움. 이들의 싸움을 보고 있노라면, 누가 형사고 누가 깡패인지 분간할 수 없다. 그들 말마따라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이고, 할 수 있는 게 싸움밖에 없어서 그 길을 택한 거다. 다만, 한 명은 국가의 테두리 안에서 합법적으로 다른 한 명은 법의 테두리 밖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보면 한 끗 차이라고 할까.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꿈 없이 살아가는 양아치 고등학생 상환(류승범 분). 그는 석환의 동생이다. 매일 하는 일 없이 싸움질이나 하러 다니는 상환은 잘 나가는 건달이 된 성빈을 보고 한 눈에 반해 그의 조직에 가입한다. 성빈은 그가 석환의 동생이라는 걸 알고 고민한다. 그 고민은 이 비극의 결정적 한 방이었다. 이 비극의 결말은 무엇일까. 



영화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의 한 장면 ⓒ외유내강



지금 이런 류의 영화는 찾아보기 힘들다


허술하기 짝이 없는 연기와 세트로 시작되는 영화는 뒤로 갈수록 무엇을 말하려는지 무엇을 전하려는지 점점 명확해지면서 그야말로 환골탈태한다. 회가 너무 맛있기 때문에 그걸 담은 그릇이 어떤 상태인지 잊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회가 맛있는 건 기본이고, 담은 그릇의 질과 데코레이션의 화려함 그리고 회를 서빙할 때의 친절함, 조명, 분위기, 냄새까지 완벽해야 하는 요즘과는 확연히 다른 시대의 것이라는 게 느껴진다. 정확히는 회만 맛있으면 승부를 걸어볼 만한 여건이 되었던 시대의 것이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하는 게, 이 영화가 만들어진 때다. 류승완 감독이 아직 조감독인 시절 사제를 들여 만든 단편들이 있는데 그것이 장편데뷔작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중 앞의 3편이고, 그때가 1990년 후반이다. 거의 20년 전인 만큼 지금의 시각으로 보면 제대로 된 감정을 할 수 없다. 특히 조폭 영화가 막 범람하려는 그 시기에 이런 류의 조폭 영화는 모험이자 혁명이다. 


날 것의 액션은 '현대인'에서 극에 달한다. 류승완 감독이 앞으로 보여줄 영화들의 액션 방향을 확실히 보여준 예라고 할 수 있겠다. 대역 없이 액션을 소화하는 건 신기하다는 감정과 함께 감탄을 불러 일으키고, 순수한 타격의 연속이 보는 이로 하여금 '무섭다'고 느낄 정도인 것이다. '진짜'가 '가짜'보다 더 무서운 법이다. 



영화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의 한 장면 ⓒ외유내강



한편, 영화는 형사나 깡패가 하는 짓이 거기서 거기라는 걸 보여주면서도 깡패는 할 짓이 못 된다는 걸 확연히 보여준다. 깡패라는 게 조폭 영화에서 보듯 멋있지 않다는 걸 보여준다고나 할까. 성빈은 조폭 생활을 하고 싶어서 한 게 아니고, 두목이 되어서도 '전쟁' 대기를 허름한 분식집에서 하며, 경찰뿐만 아니라 각 국가 공무원 집단의 시달림(?)을 받아야 한다. 두목이 되기도 전에 '칼받이'로 개죽음 당하기 일쑤이다. 그럼 그냥 인생이 끝나는 것이다. 영화 제목대로, 깡패가 되어 조직폭력배 생활을 하는 건 죽는 거 아니면 그에 버금가는 나쁜 결과밖에 도출되지 않는다. 


지금 이런 류의 영화는 찾아보기 힘들다. 독립 영화들에서조차 날 것의 맛을 맛보기 힘들다. 독립 영화도 더 많이 알려 관객들을 불러모아야 하는 의무가 있기 때문인데, 그러기 위해선 적은 자본이 허락하는 한 최고의 포장이 필요하다. 오히려 상업 영화보다 더 치밀하고 꼼꼼한 포장이 필요할 것이다. 상업 영화는 두 말 하면 이름 아프고. 예전이 그립다기 보다는 관객의 입장에서 현실이 가슴 아프다. 우리는 더 다양한 종류의 영화를 볼 수 있는 권리를 빼앗긴 게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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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아메리칸 사이코>



영화 <아메리칸 사이코> 포스터 ⓒ21세기 엔터테인먼트


하얀 바탕으로 진한 빨간 색의 피가 흐른다. 하얀 바탕은 곧 접시가 되고 피는 곧 먹음직스러운 스테이크의 핏물이 된다. 그곳은 상류층이 즐비한 레스토랑이다. 종업원인지 셰프인지 손님들에게 요리를 내주며 코스를 설명한다. 상류층으로 보이는 손님들은 경청한다. 나만 그렇게 보이는가? 그들의 행세가 매우 지질해 보인다. 그들의 학력은 매우 높을 테고 매우 잘 살고 있으며 또 사회적 지위와 명망도 높을 테지만. 


세상에서 가장 지질한 상류층 인간


영화 <아메리칸 사이코>는 이처럼 메시지를 던지며 시작된다. 피와 핏물의 동질성, 상류층의 지질함. 그리고 그걸 보는 제3자의 시선까지. 주인공 패트릭 베이트만(크리스찬 베일 분) 또한 이 상류층의 일원이다. 그는 아버지가 사장으로 있는 월스트리트 중심가 금융사 P&P의 부사장이다. 27세의 젊은이로, 학력도 높고 잘 생기고 돈도 많으며 무엇보다 자신을 잘 가꿀 줄 안다. 


패트릭은 여지 없이 초고층의 거의 꼭대기에서 근무하며, 순백색의 잘 가꿔진 집에서 산다. 그는 자신을 매우 사랑하고, 그런 자신을 내세우기 좋아하며, 그 이상으로 남에게 지는 걸 싫어한다. 영화가 시작되면 패트릭의 그런 일련의 특징들을 죽 보여준다. 


규칙적인 운동 후에 웬만한 여성보다 더 많은 스킨 케어 화장품으로 자신을 가꾼다. 그는 그런 자신을 누구보다 사랑한다. 그러곤 자신과 같은 부류의 사람들, 즉 아버지를 잘 둔 젊은 부사장들 모임에 참여해 그야말로 쓸 데 없는 이야기로 시간을 축 낸다. 하지만 그들 자신에게는 그런 것들이 중요하다. 하나라도 더 아는 채 하려는 것. 


남에게 지는 걸 싫어하는 특징을 가장 잘 드러내는 장면이 나오는데, 다름 아닌 명함 자랑이다. 형압으로 팠다느니, 계란 껍질을 이용했다느니, 그 어느 것보다도 예쁜 색깔이라느니. 명함을 건네는 것도 아니고 단순히 이번에 명함을 새로 장만했다고 자랑하고 있는 것이다. 완전한 허세다. 그런데 패트릭 만이 각각의 명함 등급을 알아보고 혼자 손을 떨고 식은땀을 흘린다. 자신의 것보다 더 좋은 명함들을 보고서. 



영화 <아메리칸 사이코>의 한 장면. ⓒ21세기 엔터테인먼트



우월함의 증명, 세상에 대한 증오, 결국 살인까지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이런 증세(?)들을 겪고 있을 것이다. 자신을 가꿔서 내놓아 자랑하고 싶고 또 그 중에 제일이 되고 싶어하는 마음. 그러면서 절대 지지 않고 싶고, 졌다는 걸 알고 내색하지 않으려는 의지. 일반적으로 같은 증세라도 해도 상류층이면 상류층다운 증세를 가지고 있을 거라 생각하지만, 영화는 정반대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상류층답게 지질의 급도 높다고 해야 할까. 참 한심하다. 실제로도 그럴까.


패트릭은 같은 일원이지만 제3자적 시선을 드러낸다. 그들은 상류층이면서도 급 높은 지질함을 자랑하지만, 자신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80년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만큼 80년대의 유수 노래들이 많이 나오는데, 모두 패트릭이 신봉해 마지 않는 노래들이다. 패트릭은 수많은 노래들을 듣고 비평한다. 이것은 그가 다른 이들보다 우월하다고 믿는 증거 중 하나이다. 


이 격렬한 증세들과 더불어 우월주의는 결국 살인으로까지 이어진다. 노숙자를 살인하면서 시작된 살인 행각은 여성들로 이어진다. 그러는 와중에 돈으로 산 여자들과 섹스 비디오를 찍기도 하는데, 여지 없이 나르시시즘의 모습을 보이고 자기 과욕이 극에 달한 모습을 보인다. 자신이 우월하다는 걸 증명해 보이려는 수작이 아닌가 싶다. 



영화 <아메리칸 사이코>의 한 장면. ⓒ21세기 엔터테인먼트



영화는 중반 이후가 되면서 패트릭의 엽기적인 살인 행각에 초점을 맞춘다. 자신도 자신을 컨트롤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고, 그걸 자각하지만 더 이상 손 쓸 도리가 없다. 같은 상류층에 위치한 이들에 대한 증오와 함께 자신보다 아래에 위치한 이들에 대한 증오, 즉 세상에 대한 증오가 뿌리 깊어진 것이다. 그는 어쩌다가 그렇게 된 것일까. 감독이 의도한 바는 무엇일까, 영화가 던지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피해자도 많아졌고, 괴물도 많아졌다


제목에서 어느 정도 유추해볼 수 있겠다. 아메리칸 사이코, 즉 미국인 정신병자. 때는 80년대 냉정 막바지. 미국은 세계 패권을 거의 손에 넣었다고 볼 수 있겠다. 승리자가 된 것이다. 그런 곳에서도 상류층인 이들이 누리는 호사는 상상을 초월한다. 돈, 명예, 명성, 특권 등. 거기에 영화는 약물과 여자를 추가한다. 문제는 이들이 제대로 된 교육을 받았느냐는 점이다. 여기서 교육이라 함은 '인성' 교육을 말한다. 돈이면 모든 것이 해결되는 곳에서 인성 따위가 무슨 소용이 있겠냐는 생각이 든다. 받지 않았을 거라 추측된다. 


그런 상태로 최고의 위치에 오른다면 당연히 어떤 문제고 생기지 않을 수 없다. 그의 살인 행각은, 그것도 아주 엽기적인 살인 행각은 그렇게 생겨난 문제의 최악의 표출이라 할 수 있겠다. 인성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자신에 대한 사랑만이 드높고 드러내는 것만 익숙하다. 그러면서 같은 부류의 이들과 행하는 지질하지만 진지한 경쟁, 그 경쟁에서 이기지 못한 채 아래 부류의 이들과 행하는 자기 우월 표출 의식. 결국 경쟁과 우월 표출이 살인으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패트릭도 피해자일까. 이 시대가, 이 사회가 만들어낸 괴물일까. 그의 행각 자체를 두둔할 생각은 추호도 없지만, 그렇다고 볼 수 있겠다. 자본주의가 무너지고 있는 이 시점에서, 이 영화가 던지는 중요하지만 협소한 메시지는 더욱 중요해지고 더 확대되었다. 피해자도 많아졌고, 괴물도 많아졌으며, 피해자이자 괴물인 이들도 많아졌다. 개인적으로 피해자이자 괴물인 이들은, 그것도 하류층이 아닌 상류층이 이들은 피해자임에도 가차 없이 처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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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김씨 표류기>




한강 다리에서 떨어져 내려 자살하려는 한 남자 김씨가 있다. 뛰어 내린다. 그런데 죽지 않았다. 대신 밤섬에 표류 된다. 죽었다 살아난 김씨는 이곳을 떠나 살던 곳으로 가고자 한다. 하지만 이 섬에는 아무도 없다. 아무도 들락거리지 않는다. 즉, 나갈 수 있는 방법이 없다. 그는 눈앞에 고층 빌딩이 보이는 이곳에서 꼼짝 없이 살아야 한다. 


영화 <김씨 표류기>는 얼핏 <캐스트 어웨이>를 생각나게 한다. 설정 상 어쩔 수 없이 그럴 진대, 실상은 완전히 다른 영화이다. <캐스트 어웨이>가 생존과 인생, 방황과 고독에 관한 이야기라면 <김씨 표류기>는 행복과 아픔, 관계와 욕망에 관한 이야기이다. 전자가 공감을 일으킨다면, 후자는 생각할 거리를 많이 던진다. 


버림받은 존재, 고독으로 다시 태어나다


먼저 김씨가 자살하려 했던 이유를 보자. 그는 뭘 해도 안 되는,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존재이다. 누가 보기엔 하찮다고 할 수 있겠지만 그에겐 큰 이유이다. 그렇게 그는 버림받았고 자살을 통해 이번엔 자신이 세상을 버리려고 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고, 아무도 없는 섬에 표류 됨으로써 다시 한 번 버림 받는다. 눈 앞에 보이는 도시를 향해 아무리 소리치고 울고 불고 난리 쳐도 아무도 알아봐 주지 않는다. 


그는 그곳에서 다시금 자살을 시도한다. 그런데 하필 그 순간 참을 수 없는 생리 현상이 발생한다. 그는 대변을 봤고, 목이 너무 말랐기에 또 하필 그 앞에 있던 꽃으로 목을 축인다. 그는 형용할 수 없는 복합적 감정 때문에 서러운 울음을 터뜨린다. 그는 그렇게 다시 태어난 것이다. 이제 그는 살아가기 위해 발버둥 치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더할 나위 없는 완벽한 심심함도 맛본다. 서서히 아무도 없는 완벽한 고독에 적응되어 간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섬이 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섬이 있다'라는 싯말이 있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설명할 때 가장 적합한 구절 중 하나라고 생각하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섬에서 더 이상 나가기 힘들어 할 것이다. 섬에서 나가 그 사람에게로 가게 되었을 때 일으켜지는 반작용은 온갖 것들의 집합이다. 마냥 좋을 수도 마냥 싫을 수도 있다. 그 온갖 것들의 집합 자체로도 충분히 힘들다. 그럴 바엔 차라리 혼자다. 차라리 섬에서 나가기 싫다. 


히키코모리, 즉 은둔형 외톨이는 그런 반작용을 병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이다. <김씨 표류기>의 또 다른 주인공인 여자 김씨는 남자 김씨가 밤섬에 홀로 표류 되어 있는 것처럼, 자신의 방에 표류 되어 있다. 엄밀히 말해 그녀는 표류 되어 있는 게 아니라 표류한 것이리라. 그래서 그녀는 그곳에서 나갈 마음이 전혀 없다. 남자 김씨는 나가려 하고 여자 김씨는 나가지 않으려 한다. 홀로 섬에 갇혀 있는 건 같지만.





자신도 모르게 고독에서 나와 소통을 원하다 


여자 김씨가 유일하게 하는 건 인터넷을 통한 가상 현실 체험인데, 그곳에서 그녀는 아주 멋지고 예쁜 여성이다. 누구와도 접촉하지 않은 채 살아가는 실제와 달리, 그곳에서 여자 김씨는 완벽한 인기인이다. 그녀에게는 취미가 하나 있는데, 밤에 달을 관찰하는 것이다. 그리고 민방위 훈련이 시작되어 아무도 없는 공간을 관찰하고 사진 찍는 취미도 있다. 그녀는 정녕 완벽한 고독의 세계를 원하는 것일까. 


그러던 중 우연히 남자 김씨를 발견한다. 변태 같고 이상하기 짝이 없는 알 수 없는 남자. 그녀는 점차 그의 일거수 일투족이 궁금해졌고, 그동안 지켜왔던 고독의 세계에 조금씩 금이 가는 걸 발견한다. 그녀는 그와의 소통을 갈망하게 된다. 인간이 완벽한 고독의 세계를 갈망하면서도 누군가와의 소통을 꿈꾸는, 아이러니이자 딜레마다. 정답이 없기에 끊임없이 방황한다. 그 속에서 행복을 느끼고 아픔을 느낀다. 


인간 관계에 있어 모든 면에서 동일하게 적용될 것이다. 연인 관계, 친구 관계, 부모와 자식 관계, 상사와 부하 관계 등. 서로를 필요로 하지만, 또 서로를 극도로 증오하기도 한다. 서로를 누구보다 사랑하고 아끼지만, 그러면서 서로를 누구보다 경멸하고 아프게 한다. <김씨 표류기>에서 남자 김씨와 여자 김씨도 그렇다. 서로를 알아감에 있어 많은 감정들이 소용돌이친다. 그럼에도 그들은 서로를 알고자 한다. 자신도 모르게 고독에서 나와 소통을 원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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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프라이드 그린 토마토>



영화 <프라이드 그린 토마토> 포스터 ⓒ유니버셜 픽쳐스



오랫동안 풀지 않았던 숙제를 푼 기분이다. 오랜 숙원을 푼 기분이다. 영화 <프라이드 그린 토마토>를 본 후 느낀 기분이다. 영화를 즐겨 보는 만큼, 추천도 받고 추천도 많이 해준다.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영화를 추천 받아 볼 때는 마치 새로운 세상을 맛 본 것 같다. 추천해준 이가 대단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좋은 영화 한 편에는 뭔가 있는 게 분명하다.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분께 영화 추천을 받는 경우가 드문데, 두 분께 받은 두 편의 영화가 생각 난다. 중학교 2학년 때 큰이모부께서 추천해주셨던 영화, <포레스트 검프>. 이 영화 덕분에 톰 행크스를 좋아하게 되었고, 이후 그의 영화를 챙겨봤었다. 그리고 <포레스트 검프>는 그야말로 내 인생 최고의 영화로 남아 있고, 앞으로도 그럴 것 같다. 


그리고 15년 이후 첫 회사의 사장님께서 추천해주셨던 영화, <프라이드 그린 토마토>. 몇 번에 걸쳐 꼭 보라고 하셨다. 하지만 나름 영화에 대한 지식이 많이 쌓였다고 자부하고 있던 터에 뜬금없이 추천을 받았던 탓인지, 아니면 회사 사장님에 대한 반발 때문이었는지, 애써 무시하고 오랫동안 보지 않았다. 그거 아니고도 봐야 할 영화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지 않던가? 


과연 명불허전, 또 하나의 내 인생 영화


애써 무시하고 외면했지만 너무 오랫동안 묵혀 두는 건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하던 차에 무심코 보게 되었다. 가벼운 마음으로. 다 보고 나서 드는 생각은 '어른이 추천해준 영화는 반드시 봐야겠구나.' 그 오랜 경험과 연륜의 관문을 통과한 영화란, 과연 명불허전이었다. 이 영화 또한 내 인생의 영화가 될 게 분명하다.


에블린(케시 베이츠 분)은 남편한테 사랑 받지 못해 괴롭다. 더구나 양로원에 있는 숙모를 주기적으로 찾아가는데, 갈 때마다 그녀만 쫓겨나곤 한다. 여성 강좌에 나가기도 하는데 잘 되지 않는다. 이런저런 스트레스 때문에 식성은 늘어나고 여자로서 나아가 인간으로서 자괴감까지 드는 것이다. 그때 80대의 노파 닌니가 다가와 집안의 옛 이야기를 꺼낸다. 


때는 1900년대 초중반 미국의 남부. 10대 초반의 잇지는 말광량이다. 그녀는 오빠 버드를 세상에서 가장 사랑한다. 그런 버드가 사랑하는 이가 루스였는데 셋이 어울리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루스의 모자가 바람에 휘날려 기찻길로 날아간다. 버드는 모자를 낚아 채지만 발이 기찻길에 껴 기차를 피하지 못하고 죽고 만다. 이후부터 잇지는 당시 정상적인 여자의 모습을 벗어난 생활을 한다. 



영화 <프라이드 그린 토마토>의 한 장면 ⓒ유니버셜 픽쳐스



어느 날 다시 나타난 루스. 루스는 잇지를 바른 길(?)로 인도하라는 명을 받은 상태였다. 잇지에게 천천히 다가가는 그녀. 그런데 루스는 잇지를 인도하지는 못할 망정 그녀에게 빠지고 만다. 그녀의 행동은 여성스럽지만 않을 뿐이었지 굉장히 멋있었고 또 나쁘지만 의로운 행동이었다. 


하지만 루스는 부모님이 정해준 상대인 결혼을 해야 했다. 그 결혼 생활은 어땠을까? 루스를 찾아간 잇지는 루스의 얼굴에 있는 상처를 발견하고 얼마 안 있어 임신한 그녀를 데려온다. 그러곤 '휫슬 스탑'이라는 카페를 만들어 함께 운영한다. 


여성의 참정권 요구 운동과 흑인 폭력 문제


1900년대 초기, 여성은 태어나기를 여성으로 태어나 죽기까지 여성으로 존재해야 했다. 100년이 지난 지금 천지개벽할 변화가 있지만, 적어도 의식의 변화는 크지 않다. 17~18세기 유럽의 시민혁명으로 민주주의가 대두 되면서 모든 사람들에게 '참정권'이 주어졌다. 하지만 여성은 여성으로서의 역할만 강요 당할 뿐, 민주주의 세계에서 제일 중요한 권리인 참정권은 주어지지 않았다. 


이에 여성의 참정권 요구 운동이 시작된다. 각 영역에서 여성의 해방을 목표로 하는 페미니즘 운동의 일환이기도 했다. 영화의 배경이 되는 미국의 경우 1920년에 비로소 남녀에게 동등하게 투표권이 주어졌다. 남녀평등의 시발점이다. 이 영화는 그런 면에서 한 여성 또는 두 여성의 삶을, 그것도 여성 참정권이 주어진 즈음의 시대를 서사로 풀면서 그 자체로 페미니즘을 외치고 있는 듯 보인다. 


문제는 이들이 흑인들을 고용하는 것도 모자라 흑인들에게 음식을 대접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여성이라는 한계를 뛰어 넘는 행동을 보여 왔던 잇지 였지만, 흑인들과 관련된 건 문제의 소지가 있었다. 위험했던 거였다. 결국 일이 터지고 만다. 루스의 남편이 KKK단과 함께 흑인을 문제 삼으며 테러를 가한 것이다.  


남북 전쟁 이후 남부의 백인우월주의자들에 의한 흑인 폭력이 1960년대까지 계속되었는데, 그 한 가운데 1866년 조직된 '쿠 쿠룩스 클랜(KKK)'가 있었다. 그럼에도 잇지는 흑인 친구들을 버리지 않았다. 여전히 사내 대장부 같은 포스를 뿜으며 카페를 꾸려 나갔고 모두를 지켰다. 



영화 <프라이드 그린 토마토>의 한 장면 ⓒ유니버셜 픽쳐스



평등과 자유에의 투쟁은 사랑으로 귀결된다


이 영화가 페미니즘 만을 외치는 영화가 아니라는 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평등이라는 큰 틀 안에서 페미니즘 뿐만 아니라 흑인과 백인의 평등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흑인 평등에 관한 법이라면 가볍게 무시하는 남부를 배경으로 말이다. 남부에서의 흑인의 삶이란 링컨의 역사적인 노예 해방 때로부터 100년이 지나가도록 나아진 게 없었다. 오히려 백인들의 위협으로 나빠지면 나빠진 상황이었다. 


단적인 예로, 백인과 흑인은 같은 학교에 다닐 수 없었고 화장실도 같이 쓸 수 없었다. 어딜 가서 무엇을 하든 웬만한 것들을 같이 이용할 수 없었다. 그런 남부에서 흑인 평등에 관한 법률이 강화되기 전인 1900년대 초중반을 배경으로, 그것도 남자가 아닌 여자가 그런 일을 한다는 것은 목숨이 몇 개라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영화는 그런 모습을 감동적으로 그려낸다. 



영화 <프라이드 그린 토마토>의 한 장면 ⓒ유니버셜 픽쳐스



닌니로부터 일련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에블린은 변화해 나간다. 처음엔 여자로서 보일 수 있는 최대한의 진취성을, 그리고 나서는 그 이상의 자유롭고 깨어 있는 발상을, 궁극적으로는 인간이 인간에게 보일 수 있는 최대한의 사랑을. 


결국 잇지가 보여준 평등과 자유에의 투쟁은 사랑으로 귀결된다고 생각한다. 그녀가 그렇게 살아가게 된 이유 중 제일 큰 게 바로 가장 사랑하는 이의 죽음이었기 때문이리라. 그 사랑을 누군가에게 후회 없이 쏟아붓고 싶었던 게 아닐까. 그 대상이 누구든지 간에. 여자와 남자, 흑인과 백인, 정상인과 장애인, 부자와 거지를 차별하지 않고 동등하게 인간으로 사랑하는 걸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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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아름다운 세상을 위하여>



영화 <아름다운 세상을 위하여> 포스터 ⓒ워너브라더스



중학교에 입학하게 된 트레버(할리 조엘 오스먼트 분). 첫 느낌이 좋지는 않다. 이 학교는 제대로 된 게 없는 것 같다. 그는 첫날부터 몇 명에게 둘러싸여 위기에 처한 친구를 구해준다. 첫날 첫 수업은 사회 시간. 그런데 사회 선생님 시모셋(케빈 스페이시 분)도 이상한 것 같다. 얼굴 하관 쪽이 화상으로 일그러졌는데, 그건 그렇다 치고 첫날부터 이상한 과제를 내주는 게 아닌가? 


'세상을 바꿀 아이디어를 내고 실천에 옮길 것!'


이 과제에 특별한 관심을 가진 트레버는 궁리 끝에 빈민가를 찾아가 노숙자 한 명을 집으로 데려온 후 먹고 씻고 자게 해준다. 도대체 무슨 꿍꿍이일까? 아무래도 세상을 바꿀 아이디어로 노숙자를 데려온 것 같은데, 뒷감당을 어떻게 하려고?


한편 기자 크리스는 범죄 현장에 갔다가 범인에 의해 차가 박살이 나는 참사를 당한다. 침울해 하고 있는 그에게 어떤 중년 신사가 오더니 고가의 재규어를 선뜻 내주는 게 아닌가? 크리스는 말도 안 되는 이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기자다운 근성으로 끈질긴 취재에 돌입한다. 알고 보니 그 중년 신사는 거물급 변호사였는데, 어떤 이한테 큰 도움을 받았고 그로부터 3명한테 무조건적인 도움을 줘야 한다고 전언을 받았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크리스한테 아무런 조건 없이 도움을 주었다 라는 이야기. 


'3명 도와주기'로 세상을 바꾸자!


영화 <아름다운 세상을 위하여>는 2가지 이야기가 병렬식으로 진행된다. 하나는 트레버 이야기이고, 하나는 크리스의 취재 이야기이다. 트레버는 시모셋 선생님의 과제를 위해 '3명 도와주기'를 방법론으로 제시한다. 내가 3명을 도와주면 3명 각각이 3명 씩을 도와주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무한대의 도움주기가 가능하다. 그렇게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생각이다. 


크리스가 취재하는 사람들이 하나같이 하는 말도 이 '3명 도와주기'였다. 그들은 자신에게 큰 도움을 준 사람이 남긴 말을 실천할 뿐이다. 무조건 3명을 도와주라는 말. 크리스는 이 '운동'의 시작을 알기 위해 계속해서 나아간다. 변호사를 찾아갔다가, 감옥을 찾아가기도 하는 한편, 빈민가를 찾아가기도 한다. 



영화 <아름다운 세상을 위하여>의 한 장면 ⓒ워너브라더스



트레버의 순수한 마음에서 시작된 3명 도와주기는 과연 가능할까? 이를 현실에 대입해 실천해 보고자 하니, 생각만 해도 너무나 아름다울 것 같다. 지금 세계는 연대가 약해져 어떤 상황에서도 '도움'을 주는 법이 없다. 도움을 주려 하면 옆 사람이 '네 앞가림이나 잘해. 지금이 어떤 상황인데 남을 도우려고 하냐?'라며 핀잔을 줄 것이다. 또 '도움'을 청하는 법도 없다. 도움을 청하려 하면 마음 속에서 '괜히 도움을 청했다가 이상하게 얽혀서 오히려 손해를 보게 되는 게 아닐까?'라는 목소리가 들려오곤 한다. 


신자유주의가 경제를 최고치로 올려 놓으면서, 그 과정에서 개인으로 포커스가 맞춰졌다. 그 전에는 경제가 좋지 않아도 개인보다 사회가 중요했다. 그래서 개인이 홀로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을 수 있었다. 서로가 서로를 봐주는 일종의 그물망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이제는 그런 그물망이 존재하지 않는다. 최고치를 찍은 경제의 앞에는 내리막 길 밖에 존재하지 않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3명 도와주기'가 가능하다면 그 자체로 세상을 바꾸는 게 확실하다. 하지만 역시 쉽지 않다. 트레버도 번번이 실패한다. 제일 먼저 빈민가에서 데려온 캐리를 도와주려 했다. 그에게 얼마의 돈을 쥐어 주었고 일자리도 얻게 되었다. 하지만 결국 그는 마약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두 번째로 시모셋 선생님을 도우려 했다. 엄마 알린(헬렌 헌트 분)을 소개 시켜줘서 다친 마음을 치료하고 앞으로는 좋은 시절을 주려 했다. 하지만 미숙하고 섣부른 진행으로 실패했다. 세 번째는 매일 같이 괴롭힘을 당하는 친구 아담을 구하고자 했다. 하지만 그에게는 3명을 물리칠 힘이 없었다. 구경만 했어야 했고 실패하고 만다. 


명백한 실패로 보인다. 성공하려면 세상을 바꾸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아주 사소한 도움만 주어야 하는 걸까? 그런 형식적인 도움은 아무런 의미도 없을 것이 아닌가. 이런 식으로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건 그야말로 '유토피아'에서나 가능한 것일까? 반 친구들이 말하듯 허황된 꿈인 것일까? 


도와주기는 실패했지만, 그 방법과 생각은 계속된다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트레버가 스스로 실패했다고 자책한 후에 나온다. 트레버로부터 도움을 받고 그의 설명을 자세히 들은 이들이 시간이 흐른 후에 자신도 모르게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고 있는 것이다. 빈민가 캐리의 경우, 눈앞에서 자살하려는 젊은 여성에게 다가가 오히려 '부탁이에요. 날 구제해 주세요.'라며 도움을 청하는 동시에 도움을 준다. 


큰 맘 먹고 도움을 주려 할 때 상대방이 흔히 하는 말이 있다. '당신은 나에 대해 아무 것도 몰라. 당신이 뭔데 나를 도와? 어떻게 도울 건데? 어설픈 도움은 필요 없으니까 꺼져.'하는 식이다. 이럴 때 오히려 도움을 청한다면? 도움을 받는 것보다 도움을 청하는 게 더 어렵다고 하며, 또 도움을 줄 때 자신의 존재 가치를 더 높일 수 있다고 한다. 그러하기에 캐리의 방법은 상당히 적절했다고 할 수 있다. 



영화 <아름다운 세상을 위하여>의 한 장면 ⓒ워너브라더스



무조건적인 도움이 무조건적으로 좋다고 할 수는 없다. 영화에서도 나오듯이 어설프게 도와주려 했다가 오히려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게 되는 경우도 있고, 자신에게 상처가 되는 경우도 있다. 그렇게 되면 트라우마가 생겨 다시는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는 경우도, 도움을 받는 경우도 없게 될지 모른다. 그리고 도움에 실패하게 되면, 자신의 능력에 의심을 품으며 자책할 수도 있겠다. 


그렇지만 영화에서 말하는 '3명 도움주기'는 '세상을 바꾸기 위한' 방법론이다.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희생이 따를 텐데, 위엣것들은 그 희생의 모습들일 것이다. 그런 이해 하에서 '3명 도움주기'는 상당히 매력적인 방법이다. 나의 도움은 실패했더라도 그 방법 자체는 전해질 수 있을 것인데, 그렇다면 내가 도우려 했다가 실패한 그 사람은 그 방법을 가지고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려 할 수 있다. 즉, 어떤 올바른 생각이 공유되고 전파될 때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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