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리뷰] <프라이멀 피어>


전혀 생각지도 못한 결말에서 오는 충격과 쾌감, '반전 영화'. 그 기라성 같은 영화 중에서도 <프라이멀 피어>는 단연 최고급에 든다. ⓒ파라마운트 픽처스



90년대 중반에서 2000년대 초반까지 우후죽순 격으로 쏟아져 나왔던 영화 장르가 있다. 일명 '반전(反轉) 영화'인데, 전혀 생각지도 못한 결말을 선사해주는 경우가 많다. 나도 한때 반전 영화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할 때가 있었다. 그 충격에서 오는 쾌감 하나를 위해 영화를 보곤 했다.그래서 영화는 기억나지 않고 반전만 기억나는 경우가 허다하다. 


많은 이들이 그런 우를 범했을 텐데, 제대로 된 반전 영화란 반전 자체가 장르가 되어서는 안 되고 영화가 가진 장르 안에 반전이 자연스레 스며들어야 한다. 특성상 공포, 스릴러, 범죄 장르가 많다. 몇몇 완벽한 반전 영화가 생각난다. <유주얼 서스펙트> <세븐> <식스 센스> <파이트 클럽> <메멘토> <디 아더스> <아이덴티티> <데이비드 게일> <쏘우> <맨 프롬 어스> 등. 


2010년대 이후에 생각나는 반전 영화는 거의 없다. 어떤 반전을 선보여도 10년, 20년 전에 나온 영화들의 클리셰가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인 것이다. 전쟁 영화가 거의 만들어지지 않는 이유와 같다. 그렇지만 아쉬워 할 필요는 없다. 지나간 영화들을 보면 되니까, 더불어 그 영화들만 보면 충분하니까. 


법률 영화로도 흠잡을 데 없는 '반전' 영화


이번에 다룰 영화는 1996년작 <프라이멀 피어>다. 엄연히 영화의 한 장르인 '법률 영화'로, 존경받는 카톨릭 대주교 살해 용의자로 지목된 아론 스탬플러(에드워드 노튼 분)를 둘러 싸고 벌어지는 법정 공방을 다뤘다. 최고의 실력을 자랑하는 최악의 범죄 변호사 마틴 베일(리차드 기어 분)과 그의 옛 애인이자 검사 동료였던 자넷 베너블(로라 리니)의 공방이 주를 이룬다. 


살해 현장에서 피해자의 피를 온몸에 도배한 채 도피해 모든 이들이 범인이라고 당연한 듯 지목한 아론, 하지만 그는 한사코 순진하기 그지 없는 얼굴과 행동으로 범행 사실을 부인한다. 그러며 그 자리에 제3자가 있었다는 것이다. 얼마 후 그가 그렇게 말한 이유가 밝혀진다. 그는 '해리성 인격장애(이인증)'를 앓고 있었다. 범인은 아론 자신이 아니라 또 다른 인격인 로이라고 말한다. 법정 공방은 2라운드를 알린다. 


법률 영화로서도 흠잡을 곳이 없다. 하지만 반전에 반전을 '당하고' 보면, 모든 기억이 사라지며 멍해질 뿐이다. ⓒ파라마운트 픽처스



영화는 법률 영화로서 흠잡을 곳이 없다. 검사로 재직하다가 나쁜 짓을 저지르는 걸 참을 수 없어 통칭 사기꾼이라고 알려진 변호사의 길을 가게 되었다는 베일의 고뇌, 그는 꼭 나쁜 놈들만 범죄를 저지르는 건 아니라는 지론을 갖고 있다. 치명적인 아론의 변호도 그렇게 맡게 된 것이다. 그런 한편, 모든 것들이 그가 살인자라는 걸 증명하고 있지만 결정적으로 동기를 찾을 수 없어 원고 측에선 확고한 승리를 장담할 수 없다. 와중에 원고 측에게 치명적이지만, 확실한 동기가 되는 걸 찾게 되는데...


역시 베일과 자넷의 끝없는 설전은 이 법률 영화의 묘미 중 하나다. 나라면 누구의 변호를 하고 있을까, 저 국면을 어떻게 타개할 수 있을까, 누가 이기게 될까 등. 휴정 기간에 오가는 뒷공작도 빼놓지 않는다. 사실 그때 이루어지는 설전과 공작이 진짜 싸움이라는 걸 알 것이다. 영화는 반전에 힘을 쏟는답시고 영화 자체를 허투루 하는 우를 범하진 않는다. 그건 그렇고 반전은 언제쯤? 이인증도 충분히 충격이었는데.


정신병이면 무조건 무죄?


'빌리 밀리건'이라는 사람이 있다. 1970년대 후반, 수많은 범죄를 저질러 체포되기에 이른다. 변호 과정에서 정신 심리 검사를 받았고, 영화에서처럼 해리성 인격장애로 판명된다. 자그마치 24개의 인격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 결국 그는 정신 이상을 이유로 모든 사건에 대해 무죄 판결을 받고 치료에 들어 간다. 10년 후 자유의 몸이 되었다고 한다. 그의 몸이 범죄를 저지른 건 사실이지만, 그의 인격이 범죄를 저지른 건 아니라고 본 것이다. 더불어 그를 죗값을 치러야 할 범죄자 이전에 치료해야 마땅한 환자로 보았다. 


영화는 아무래도 이 유명한 사건에서 영향을 받은 듯, 동일한 양상으로 흘러간다. 정신의학자까지 증인으로 나서서 아론을 환자로 두둔한다. 그렇지만 결코 쉽지 않다. 누가 봐도 믿기 힘들고 설령 믿는다 하더라도 논란의 여지가 너무나도 크기 때문이다. 내 몸이 살인을 저지른 건 맞는데, 범인은 내가 아니고 내 몸에 함께 있는 또 다른 이라는 것이다. 또 다른 '나'가 아니고. 


정신병이 있으면 무조건 무죄일까? 특히 이 영화의 정신병인 '해리성 인격장애'는 인권까지 건드린다. 실제로 무죄 판결을 받은 사례도 있다. 어떤 판결을 내려야 할까. ⓒ파라마운트 픽처스



'유정무죄'라는 신조어가 있다. 정신병이 있으면 무조건 무죄 판결을 받는다는 상황을 비꼰 거다. 최근 들어 여기저기에서 그런 소식들이 들려온다. 하다못해 술을 진탕 마시고 벌인 범죄도 무죄가 되곤 하는데, 그 사례 또한 술 취한 상태는 온전한 정신이 아니라는 판단 하에서 내린 판결이다. 악용될 소지도 충분하거니와, 그럼 정신병에 걸리면 아무렇게나 살아도 된다는 말인지 심히 의문이 간다. 


영화에서는 원고 또한 돌이킬 수 없는 죄를, 그것도 피고에게 행했기 때문에 논란의 파장은 훨씬 커질 수 있다. 어느 누가 완벽한 판정을 내릴 수 있겠냐만은, 이런 경우는 완벽의 근처도 가지 못할 것 같다. 한편, 이토록 완벽한 딜레마를 조성해 놓은 영화의 감독 및 작가에게 찬사를 보낸다. 이 영화의 진정한 반전이 무엇인지 아는가? 바로 이 <프라이멀 피어>가 할리우드 대표 연기파 배우 '에드워드 노튼'의 데뷔작이라는 사실이다. 다시 한 번 에드워드 노튼을 데뷔시킨 감독 및 작가에게 찬사를 보낸다. 


완벽한 장르 영화이자 반전 영화, 이런 영화 또 나올까?


'한 편의 잘 짜인 영화를 본 것 같다'는 말을 종종 한다. 다름 아닌 이 영화를 두고 한 말이 아닌가 싶을 만큼 잘 만들어진 영화다. 반전 영화라는 걸 공시한 이상, 마지막 5분까지도 긴장을 느춰선 안 된다는 걸 알려드린다. 하지만 영화에 푹 빠져 있다 보면 자연스레 긴장이 풀리는 순간이 올 테다. 영화는 바로 그때를 놓치지 않는다. 


세월이 흘러도 또 찾는 반전 영화는 드물다. 개인적으로 반전 자체는 최고지만 한 번 보고 다시 찾지 않는 영화가 있다. <식스 센스> <디 아워스> <아이덴티티> 같은 류, 반전을 위한 반전 영화라 하겠다. 영화 전체가 오직 반전을 향해 달려간다. <유주얼 서스펙트> <맨 프롬 어스>도 그런 종류지만, 이야기 자체가 너무 재미있다. <세븐> <파이트 클럽> <데이비드 게일> 그리고 <프라이멀 피어>는 반전을 빼고 영화 자체를 즐겨도 하나의 완벽한 장르 영화로 손색이 없다. 보고 또 보게 되는 영화들이다. 


반전을 생각하지 않고 그저 영화를 즐겨도, 충분하다. 충분히 완벽하다. 그래도 계속 기다린다, 반전을. 반전 영화를. ⓒ파라마운트 픽처스



이런 류의 영화, 완벽한 장르 영화이자 그 모든 걸 뒤엎고도 남을 충격적인 반전을 아주 기묘한 타이밍에 선사하는 영화를 다시 볼 수 있을까. 많은 이들이 사랑하기 때문에 계속 만들어질 거다. 하지만 그만큼 눈이 높아졌기에 기대를 충족시킬지는 의문이다. 그러다 보니 주류에서 상당히 밀려난 느낌이다. 나온다 해도 마니아적인 냄새가 물씬 풍기는 영화가 나올 것이다. 


안타깝지만 기다려야 할 것 같다. 역사가 돌고 도는 것처럼 영화도 돌고 도는 법. 시대의 조류가 다시 반전의 손을 잡아 끌 때가 올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참신한 도전이 계속되어야 한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그런 종류의 반전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종류의 반전. 응원하며 기다리고, 찾아보며 비평하고, 반가워하며 다음을 기약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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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오래된 리뷰] <풀 메탈 자켓>


스탠리 큐브릭의 <풀 메탈 자켓>은 한창 전쟁 영화에 빠져 있던 당시의 나에겐 아무런 감흥을 주지 못했다. 10년만에 다시 찾으니, 그동안 봐왔던 수많은 전쟁 영화를 한 번에 정리해버렸다. ⓒ워너브라더스



군대 가기 전이었다. 온갖 전쟁 영화를 다 챙겨 봤다. 비록 드라마지만 웬만한 영화 이상가는 퀄리티를 자랑하는 <밴드 오브 브라더스>를 필두로 한 번쯤 들어봤을 만한 전쟁 대작 <라이언 일병 구하기> <씬 레드 라인>, 70~80년대를 대표하는 <지옥의 묵시록> <플래툰>, 그보다 윗 세대의 <패튼 대전차 군단> <콰이강의 다리>까지. 그리고 반드시 봐야 하는 영화 중 하나인 <전함 포템킨>도. 이밖에 수없이 많은 전쟁 영화를 챙겨봤다. 지금은? 신작은 안 보고 예전 전쟁 영화를 가끔 보곤 한다. 


전쟁 영화는 몇 가지 분류로 나눌 수 있다. 일명 '국봉(?)'. 나라를 위해 희생하는 숭고한 이들의 헌신을 다룬다. 주로 이데올로기 얘기가 들어가 있다. '반전'. 전쟁의 참상과 허무함과 쓸 데 없음을 사실적이고 때론 풍자적으로 보여줌으로써 전쟁을 반대하거나 전쟁의 불필요함을 역설한다. '액션'. 전쟁이 가지는 블록버스터적인 요소를 끄집어 내어 극대화 한다. '고민'. 전쟁에 대한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고민하다 죽거나 병신이 되어 살아남는 이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운다. 주로 가해자와 피해자의 얽힘을 얘기한다. 


액션에 눈이 가게 마련이다. 거기에 적당한 고민이 섞이면 괜찮다. 반전 요소가 있으면 아이러니하게도 액션이 더 풍부하다. 전쟁을 더 참혹하게 더 사실적으로 보여줘야 하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전쟁 영화 하면 <라이언 일병 구하기>를 생각하는 게 그런 이유에서다. 나도 어김 없이 그랬다. 


전쟁 영화 재밌게 봐왔지? 이제 그만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풀 메탈 자켓>은 그 당시 나에게 아무런 감흥을 주지 않았다. 수많은 영화인들에게 극찬을 받은 작품이라지만, 전투신다운 전투신 하나 없는 이 영화가 과연 제대로 된 전쟁 영화인지 보는 내내 의문만 들었을 뿐이다. 시간이 지나 다시 본 이 작품은 그동안 봐왔던 수많은 전쟁 영화를 정리해주었다. '그동안 전쟁 영화 재밌게 봐왔지? 이걸로 이제 그만.'


영화는 크게 2부로 나눌 수 있다. 도입부라고도 할 수 있는 1부는 베트남전쟁 당시 미 해병대 신병교육대 이야기다. 신병들을 인간 병기로 개조한다는 취지 하에 신병들을 인간 쓰레기 취급하는 하트만 상사, 나름 순조롭게 그들은 미해병대 인간 병기로 거듭난다. 한 명만 빼고. 


일명 '뚱땡이' 레오나드 로렌스는 무슨 수를 써도 몸이 따라주지 않는다. 정신력도 꽝이다. 하트만은 그를 동기 조커에게 맡긴다. 한동안 잘 하는 듯했지만, 다시 돌아온 뚱땡이. 결국 하트만은 특단의 조치를 내린다. 뚱땡이가 사고를 칠 때마다 동기 전체가 벌을 받게끔 한 것이다. 이후 사건이 벌어지고 뚱땡이는 환골탈태를 하게 되는데...


아무것도 모르는 '뚱땡이'가 살인 기계가 되어간다. 그의 환골탈태는 어떤 결과를 낳을 것인가, 어떤 의미가 있는가. ⓒ워너브라더스



묻고 싶다. 감독은 이 신병교육대 이야기를 통해서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 아마 감독도 묻고 싶을 거다. 이 신병교육대에서 도대체 그 어떤 '전쟁'을 발견할 수 있는 걸까? 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어린애 장난 같은 이 교육들이 피와 살점이 난무하는 전쟁에 도대체 어떤 도움이 될 것인가? 하트만의 말처럼 킬러가 되면 되는 걸까. 누구를 죽이든 상관 없이. 특등 사수의 예를 365m 높이에서 14명을 쏴죽인 살인마로 든 걸 보면 알 수 있다. 나아가 베트남전쟁의 의미까지 유추할 수 있다. 


허무하고 애처롭고 참혹하다


"어떻게 여자와 어린 아이를 죽일 수 있습니까?"

"쉽지. 느리니까 그냥 갈기면 돼. 그럼 죽어. 크하하하."


종군기자가 된 조커 병장이 헬리콥터를 타고 전선으로 떠나면서 기관총 사수한테 물어본다. 어떻게 여자와 어린 아이를 죽일 수 있느냐고, 그러면 안 되지 않느냐는 말이 생략되어 있다. 그런데 돌아온 답은 죽이기 쉽다는 말이다. why에 해당하는 물음에 how로 답하는, 그의 머리엔 오로지 '살(殺)'만 있다. 신병교육대에서 배운 게 그런 걸까. 베트남전쟁의 목적이 그런 걸까. 


후방의 지루함을 참지 못하고 포성과 총성을 듣고 싶어 하는 조커, 허세로 중무장한 그가 원하던 대로 전선에 와 있다. 그곳엔 온갖 허세로 완전 무장한 이들이 득시글하다. 그들이 전쟁을 알까. 말본새나 행동 거지를 봐선 제대로 된 전투를 치러보지 못한 듯하다. 알면 어떻게 또 모르면 어떠랴. 베트남전쟁 자체가 아무 짝에도 쓸데 없거니와 일어나선 안 되는 전쟁이었던 것을. 


그 어떤 전쟁 영화보다도 포성이나 총성, 피와 살점이 난무하지 않지만, 그 어떤 전쟁 영화보다 참혹하다. 고수의 손길이 느껴진다. ⓒ워너브라더스



허무하고 애처롭고 참혹하다. 이 영화를 보고 나니 다시는 전쟁 영화를 보지 못할 것만 같다. 그 어떤 전쟁 영화보다 약한 장면들이 나오지만, 그 어떤 전쟁 영화보다 참혹하다. 포성과 총성이 끊임없이 오가고, 피와 살점이 휫날리는 참혹한 장면을 보여주지 않아도 된다. 충분히 구역질 나는 전쟁의 참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것이다. '전쟁이란 이런 것이다'를 일반적이지 않은 방법으로 보여주는, 그리하여 전쟁에 진심으로 치를 떨게 만든다. 영화적으로 생각하면 고수의 손길이 느껴진다. 


스탠리 큐브릭의 사실상 마지막 작품


20세기 최고의 거장이라 일컬어 지는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후기작 <풀 메탈 자켓>. 그는 이 작품을 마지막으로 10년 넘게 영화를 만들지 않았고, 이후 <아이드 와이즈 셧> 편집본을 넘기고는 타계했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의 살아생전 마지막 작품이라고 할 수 있을 이 영화에도 역시 그의 완벽한 사실주의가 살아 있다. 


배경 한 컷, 소품 한 점 하나 소홀히 하지 않은 티가 난다. 재현한 건 물론이고 연기 또한 가감이 없다. 과하지도 모나지도 않다. 부담이 없다는 거다. 하물며 분위기랴? 베트남전쟁 당시를 그대로 옮겨놓은 거나 다름 없다. 전쟁은 인간 본성을 극치로 보여주게 만든다. 죽음의 공포가 눈앞에 그려지는데, 본성을 억누르긴 힘들 게 아닌가. 감독은 만들어진 인간상이 아닌 인간 군상 그 자체를 옮긴 것이다. 


영화는 시종일관 풍자다. 그런데 스탠리 큐브릭 감독은 극사실주의의 거장, 베트남전쟁을 그대로 보여줬을 뿐이다. 그대로가 풍자라니... ⓒ워너브라더스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풍자 일색이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풍자다. 하지만 개중에 사실 아닌 것이 없다는 게 참으로 슬프다. 과장되지도 않게 모나지도 않게 사실 그대로를 옮겼을 뿐인데 그것이 풍자라니. 그것이 베트남전쟁의 인간 군상 그 자체라니. 그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아이러니, 수많은 사람의 인생을 아작낸 전쟁의 비극이다. 엄연한 역사지만 지우고 싶다. 역겨워 구역질이 나고 슬퍼서 웃음이 날 지경이다. 그런 한편 빼놓을 수 없는 생각 한 가지, '스탠리 큐브릭 감독은 역시 대단하구나'


역사는 되풀이 되고, 인간의 실수 또한 수없이 되풀이 된다. 역사를 통해 우린 많은 걸 알고 있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 똑같은 짓을 반복한다. 아마 전쟁은 영원히 계속될 것이고, 베트남전쟁 같은 의미없는 짓도 계속할 것이다. 무엇 때문에? 누군가가 자신을 위해서. 그 피해를 누가 입게 되는 지는 굳이 말하지 않겠다. 이제 더 이상 이런 짓을 하지 않길 바란다는 말은 못 하겠다. 다만, 진실은 가려지지 않아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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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원 데이>


시간과 사랑의 방정식을 훌륭하게 보여준다. 20년 넘는 7월 15일 하루를 보여주며 소개하는 그들만의 특별한 사랑, 영화 <원 데이> ⓒ(주)팝 파트너스



대학 졸업식 날, 엠마와 덱스터는 우연히 하룻밤을 같이 보낸다. 그렇게 그들은 연인이 아닌 친구가 된다. 1988년 7월 15일이었다. 달라도 너무 다른 둘. 엠마는 소설가를 꿈꾸는 다부지고 당찬 여인이다. 다만, 사랑엔 조금 서툴다. 덱스터는 부잣집 도련님으로 방탕하고 자유로운 생활을 즐긴다. 모든 여자에게 사랑을 고백할 수 있는 바람둥이다. 그래도 그들은 인연의 끈을 붙잡고 놓치 않는다.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가지만. 


많은 로맨스 영화들이 사랑을 보여줄 때 요긴하게 쓰는 게 '시간'이다. 시간 덕분에 우정이 사랑이 되고, 시간 때문에 사랑이 식기도 하며, 시간이 사랑을 아프게 한다. 무수히 많은 러브스토리를 양산해낼 수 있게 한다. 영화 <원 데이>도 시간과 사랑의 방정식을 아주 훌륭하게 보여준 작품 중 하나다. 1988년부터 2011년까지 20년이 넘는 7월 15일 하루를 보여주며 그 둘만의 특별한 사랑을 소개한다. 


이들의 사랑 방정식, '따로 또 같이'


'따로 또 같이'만큼 이들의 사랑을 잘 표현한 말이 없다. 이들의 사랑 뿐일까? 사랑이란 본래 '따로'만 존재하지도 그렇다고 '같이'만 존재할 수도 없다. 변화무쌍할 것까진 없지만 기본적으로 변화를 내포하고 있다. 영화 <봄날은 간다>의 유명한 대사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를 생각하면 오산이다. 사랑이 변하는 게 아니라, 변하는 사랑인 거다. 사랑은 변하지 않을 거라 믿는다. 


'사랑이 변하니?'에 대한 그들만의 답.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변하지 않는 게 있다면, 서로를 향한 알듯 모를듯한 사랑. ⓒ(주)팝 파트너스



엠마와 덱스터의 사랑은 어떨까. '사랑은 다시 돌아오는 거야!'에 가깝다.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 서로를 궁금해 하고 서로의 안부를 묻고 가끔은 서로를 의지한다. 누가 봐도 사랑하는 것 같은데 그들은 결코 사랑을 속삭이지 않는다. 서로의 마음을 확인할 순간이 몇 번 찾아오지만 번번이 놓치고 망치고 밀친다. 


삶은 계속되는 법. 그들은 서로를 마음에 또는 속 깊이 또는 전체에 두고 각자의 길을 간다. 엠마는 소설가의 꿈을 간직한 채 일을 계속한다. 현재에 두 발을 굳건히 디딘 채 미래를 준비하는 것이다. 느리지만 차근차근. 덱스터는 연예계에 발을 들여놓는다. 바람둥이끼는 여전하며 허영심은 극에 달해 있다. 


영화는 매년 7월 15일만을 보여준다. 둘의 모습은 알게 모르게 바뀌고 상황은 알아차릴 만큼 바뀐다. 변하지 않는 게 있다면 서로를 향한 알듯 모를듯한 사랑이다.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변하지 않는 사랑의 애뜻함과 애절함을 그린다. 시간과 사랑의 방정식을 적절하게 풀어낸 것 같다. 


마음처럼 쉽지 않은 소울메이트의 사랑법


영화의 본판은 '사랑과 우정 사이' 또는 '밀고 당기기(밀당)'이라고 할 수 있다. 흔하디 흔한 사랑의 모습 중 하나인 것이다. 거기에 풍덩 빠질 것인가 휙 돌아서 갈 것인가 하는 건 공감과 카타르시스의 여부에 있겠다. 엠마와 덱스터는 영혼의 단짝이라 할 수 있는데 '소울메이트'라고 하면 알맞겠다. 영화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가 보여준 평생동안 잊히지 않는 단 한 번의 만남과 헤어짐이 강렬하다면, 이 영화는 잔잔하다. 이들도 그렇게 우연히 하룻밤을 보낸 후 헤어지고는 다시 못볼 수도 있었다. 


소울메이트끼리의 사랑은 '또 다른 나'를 찾아가는 여정이지 않을까. 그건 그거대로 또 사랑은 사랑대로 해야 하지 않을까. ⓒ(주)팝 파트너스



여기서 소울메이트의 사랑법을 논하지 않을 수 없다. 소울메이트는 소울메이트로 평생을 살아가는 게 좋을까, 같이 살며 끊임없이 서로를 확인하고 사랑하는 게 좋을까. 어디서도 소울메이트끼리 서로의 마음을 안 후 합일을 이룩하고는 잘 되었다는 걸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내가 오롯이 그(그녀)를 사랑하고 있는 건가 하는 의구심이 들 수도 있을 것이다. 그(그녀)는 또 다른 나이기에, 그(그녀)를 사랑하는 건 나를 사랑하는 것과 다름이 아닐까?


소울메이트끼리의 합일은 비추천이다. '따로 또 같이'가 아니라 '같이'만으론 오래 이어가기가 힘들다는 거다. 인생이 '또 다른 나'를 찾아가는 여정이라 하지만, 그건 그거대로 사랑은 사랑대로 해야 하지 않을까. 문제는 딜레마가 반드시 찾아올 거라는 거다. 인생에서 소울메이트를 찾는 게 힘들지만, 찾고 나서 더 힘들다. 어떻게 해야 할까? 같이? 따로? 따로 또 같이? 그게 마음처럼 쉽지 않다. 


이런 논리라면 지금 내 옆에 있는 사람은 소울메이트가 아닌가. 아닐 수도 있고 맞을 수도 있다. 둘 다 좋다. 아니라면 아닌데로 난 온전히 그 사람을 사랑할 수 있을 거다. 맞다면 그렇게 서로가 서로를 자신같이 사랑할 수 있을 거다. 다만, 명심해야겠지. '따로 또 같이'라는 말을. 


촉촉해지고 훈훈해지는 센스 있고 아름다운 영화


영화의 여러 요소들이 조화를 이루었다. 장면 하나하나에 힘을 불어 넣은 듯, 오랫동안 서로를 사랑했음에도 항상 같이 있지 못한 그들을 잘 표현한 듯. ⓒ(주)팝 파트너스



음악, 배경, 의상, 배우, 대사, 분위기가 이렇게 조화를 이루기 힘들다. 거기에 일 년에 단 하루만을 배치해 앞뒤 상황을 전달하고 마음을 보여주기란 정말 힘들었을 거다. 그걸 해냈기에 참으로 센스 있고 아름다운 영화가 탄생했다. 모든 면에서 과하지 않고 적절한 조화가 주는 센스와 아름다움이다. 


사실 로맨스 영화가 적절하기 쉼지 않다. 그래서 아름답기 쉽지 않다. 많은 로맨스 영화들이 눈물 바다를 선사하기 때문인데, 거기엔 과한 설정이 뒤따른다. <원 데이>도 보는 이에 따라 과하고 말도 안 되는 설정이라 하기 쉽다. 20년 이상 이어지는 '사랑과 우정 사이'라. 그렇지만, 그 20년을 '기다림'으로 채웠기에 과하다는 생각 전에 그들의 이야기에 빠져드는 것이다. 일년에 하루만 보여주는 설정도 한몫 했다. 


마음이 잔잔했다가 파도쳤다가 가라앉았다가 촉촉해진다. 촉촉하게 적셨으면 그건 좀 과한 건데, 이 영화는 적시지 않는다. 촉촉해지고 또 훈훈해진다. 결국엔 모든 걸 다 잊고 '나도 저런 사랑을 해보고 싶다'로 귀결될 것이다. 공감과 카타르시스를 넘어선, 강점이입이자 바람일까. 


그들의 사랑을 한마디로 정의내려 본다면, '엠마는 덱스터를 사람이 되게 하였고, 덱스터는 엠마를 행복하게 했다.' 지금 나의 사랑도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사랑의 방식이 모두 다르듯, 사랑을 주고 받고 그 사랑을 어떻게 체화하는지도 모두 다를 것이다. 중요한 건 사랑을 하라는 것, 사랑을 찾아 떠나라는 것, 사랑을 지키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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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멧 데이먼의 <리플리>


우연히 상류층의 일원으로 보여진 '톰' 그는 특출난 재능으로 빠르게 상류층의 일원이 된다. 그렇지만 그건 분명 거짓된 삶이었으니... 그는 어떻게 될까? ⓒ미라맥스



아름다운 피아노 선율과 소프라노의 노랫소리가 울려 퍼지는 어느 파티석상. 연주가 끝나자 선박 회사를 운영하는 부호 그린리프 부부가 다가와 톰 리플리에게 칭찬을 건넨다. 그러곤 그가 프리스턴 재킷을 입은 걸 보고 자신의 아들 이야기로 넘어간다. 톰은 '디키, 잘 있죠?'하며 아는 척 하고 그린리프 부부의 환심을 산다. 


톰은 피아니스트도 아니고 프리스턴을 졸업하지도 않았다. 그는 피아노 선율사이자 호텔 보이일 뿐이다. 다만, 그때는 친구를 대신해 돈을 받고 프리스턴 대학교를 나온 피아니스트인 척했던 것이다. 그린리프는 톰에게 1000달러를 보장하며 이탈리아로 가서 디키를 설득해 들어오게끔 한다. 톰은 디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전혀 모르는 재즈를 공부하고는 이탈리아로 날아간다. 


상류층이 되고 싶은 '재능'의 거짓된 삶


톰이 동경해 마지 않는 상류층의 삶 그자체인 디키. 톰은 차원이 다른 그의 사고와 행동과 여유와 씀씀이를 따라할 수 있을까? ⓒ미라맥스



영화 <리플리>는 이런저런 부차적 설명을 과감히 생략하고 본론으로 넘어간다. 톰이 어떤 삶을 살아 왔는지를 단 몇 장면으로 보여주고는 곧바로 새로운 거짓된 삶이 나오는 것이다. 영화가 이야기하려는 건 톰의 거짓된 삶에 있다. 비천한 삶이 상류층의 삶으로 둔갑하면서 톰은 헤어나올 수 없는 늪에 빠졌다. 숨어서 동경해왔던, 언제든 준비가 된, 그러나 거짓되었다는, 그래서 불안하기 짝이 없는 삶. 


재능이 출중하지 않다면 일련의 일을 벌이지 못했을 거다. 그렇다. 톰은 상류층이 되기에 충분한 '재능'이 있었다. 뭐든 금방 따라해서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재능 말이다. 물론 뿌리 깊은 상류층의 의식과 행동과는 근본적으로 이질감이 느껴지긴 하겠지만. 


그렇지만 그가 절대 가질 수 없는 게 있었다. 출신 성분이라고 해야 할까. 머나먼 윗세대부터 내려오는 뿌리 깊은 가문의 성분 말이다. 거기에는 여러 가지가 필요하다. 가문, 학력, 돈, 명예, 지위 등. 디키는 선박 부호를 아버지로 두었고 돈은 엄청나게 많으며 프리스턴 대학교 출신이었다. 여기에 상류층다운 여유와 씀씀이, 차원이 다른 스케일을 소유하고 있다. 톰이 이런 것들까지 따라할 수 있을까?


시대가 낳은 괴물이자 피해자일까, 사이코패스이자 미친놈일까


'초라한 현실보단 멋진 거짓이 낫다'는 생각으로 끔찍한 짓을 하고 끔찍한 현실을 버티는 톰. 그는 시대가 낳은 괴물이자 피해자일까, 사이코패스이자 미친놈일까. ⓒ미라맥스



톰(멧 데이먼 분)은 디키(주드 로 분), 디키의 연인 마지(기네스 팰트로 분)와 즐겁고 행복한 시간을 보낸다. 디키와 마지가 톰을 잘 대해주고 톰은 그들을 동경하며 잘 따랐다. 무엇보다 톰에게는 평생 다시 없을 상류층의 삶을 맛보는 나날이었으니 더 말해 무엇하랴. 마치 자신이 진짜 상류층이 된 듯한 착각에 빠졌을 것이다. 


어느 날 상류층 친구 프레디가 찾아온다. 그는 디키와의 친분을 과시하며 빌붙어 사는 게 좋냐고 톰을 놀려댄다. 톰은 적의에 불탔지만 이내 좌절하고 프레디는 그런 톰을 계속 놀려대고 디키는 톰을 조금 멀리하고 마지는 그런 톰을 위로한다. 그린리프 씨와의 계약 만료가 다가오고 디키와 톰은 함께 여행을 떠난다. 바다 한 가운데에서 디키는 톰에게 강력하게 전달한다. 따분하고 싫증났다고, 가난뱅이 빈대에 찰거머리라고, 계집애 같다고. 다툼 끝에 톰은 돌이킬 수 없는 짓을 저지르고 만다...


영화의 또 다른 시작을 알리는 사건이다. 이 모든 게 시작되었을 때처럼 우연치 않게 디키로 오해받은 톰은 아예 디키 행세를 한다. 그렇게 그는 디키가 되어 '진짜' 상류층이 된다. 영화는 더욱 긴박하게 돌아간다. 몇몇 장면은 심장을 쫄깃하게 만든다. 톰이 누군가에겐 톰이고 누군가에겐 디키이기 때문인데, 그 누군가들이 전부 상류층으로 서로 잘 알고 있다. 톰이 원하는 건 뭘까. 


톰은 '초라한 현실보단 멋진 거짓이 낫다'는 생각을 하며 살아 왔고 멋진 거짓을 현실로 옮겼으며 끔찍하지만 멋진 현실을 버텨 왔다. '배부른 돼지보다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낫다'를 생각나게 하는 이 생각은, 그러나 결국 진짜 상류층, 그가 바라는 멋진 삶을 주진 못한 것 같다. 그는 시대가 낳은 괴물이자 피해자일까. 흔히 있는 사이코패스이자 미친놈일까.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고, 나를 온전히 드러낼 수 있는 사회라면...


상류층만이 상류층을 인정하는, 참으로 슬픈 풍토다. 영화에서 그들은 어쩔 수 없다고 말한다. 상류층만이 상류층을 이해할 수 있고, 말이 통한다고. 이같은 풍토를 바꿀 순 없을까? ⓒ미라맥스



"과거를 창고에 꼭꼭 숨겨 두고 자물쇠를 채우고픈... 그 안은 어둡고 더러워. 그 추잡함을 들키면..." 


누구나 거짓된 삶을 사는 건 아니겠지만, 많은 거짓과 비밀을 마음속 깊이 묻어두고 산다.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알려주고 싶지만, 그 더럽고 추잡한 사실을 들키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다. 그렇게 평생을 사는 것이다. 톰 리플리, 그는 우리 모두의 또 다른 모습이다. 너도 될 수 있고 나도 될 수 있고 어느 누구라도 될 수 있다. 미친놈이라기보단 괴물에 가깝지 않을까. 


때는 1950년대 미국, 위기와 전쟁을 지나 자본주의 최대 호황의 시대를 맞이했다. 빈부격차가 심화되며 상류층의 삶의 양식이 정착되었다. 비천한 이가 감히 상상하기 힘들지만 기회가 주어진다면 마다하기 쉽지 않을 거다. 누가 그에게 돈을 던질 수 있을까? 상류층이라면 돈을 던질 수 있을까. 오르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라고. 


이 영화가 원작으로 삼은 <재능 있는 리플리씨>에서 나온 '리플리 증후군'은 톰이 잘 보여준 반사회적 인격장애의 일종인데, 참으로 애잔하고 슬프기까지 하다. 만약 현실이 비참하지 않다면? 자신이 비참하다고 느끼는 건 누군가와 차별되는 삶을 살고 있다는 건데, 그런 차별이 없는 사회라면? 영화에서처럼 상류층만 상류층을 인정하는 풍토가 없다면? 리플리 증후군 따위는 없을 거다. 


자만심으로 풍만한 상류층과 자격지심으로 똘똘 뭉친 하류층의 더럽고 슬픈 합작품. 누구나 그것에 노출되어 있고 빠지기 쉽다는 게 안타깝고 두려울 뿐이다. 나도 그런 경험이 있고 아마 지금도 그런 삶을 살고 있을 거다. 내가 의도했거나, 나도 모르게. 


사회를 바꿔가는 수밖에 없다. '나'라는 중심을 확고히 세우고 '나'를 사랑하고 '나'만의 길을 걸어가려는 노력이 필요하겠다. 그렇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나만 노력한다고 될 수 있는 건 아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관심을 갖는 게 필요하다. 자칫 서로에 대한 무관심으로 나아갈 수 있는데, 역효과를 불러올 것이다. 적어도 사랑하는 사람에겐 나를 온전히 드러낼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지금은 그것조차 허락되지 않는 사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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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하와이언 레시피>


하와이의 작은 마을 호노카아, 태평하기 그지 없는 그곳에 젊은 청년 레오가 찾아온다. 무작정 쉬러 온 곳, 잘 적응할 수 있을까. 영화 <하와이언 레시피> 포스터 ⓒ㈜영화사 진진



하와이 섬 북쪽 끝의 작은 마을 호노카아, 나이 지긋한 미국계 일본인들이 모여 산다. 세상 어디에도 그런 곳은 없을 듯하다. 느리고 말 없고 태평하다. 딱히 뭘 하고 있는 사람이 없다. 그곳에 젋디 젊은 청년 레오가 찾아온다. 그 또한 느리고 태평한 듯하기에 큰 무리 없이 스며든다. 


마을에 하나밖에 없는 영화관에서 일하게 된 레오, 곧 동네사람들과 친해진다. 그들은 하나같이 천하태평하고 무미건조한 삶을 사는 것 같지만, 사실 누구나 부러워할 만한 여유롭고 안정된 삶이다. 여자를 밝히지만 파킨슨병에 걸린 아내만을 바라보며 사는 코이치, 팝콘 기계 옆에 앉아 기계가 돌아가기만 하면 잠을 자는 제임스, 먹는 걸 너무너무 좋아하는 영화관 주인 에델리, 과묵한 레오의 상사 버즈, 딱딱 맞는 말만 하는 미용사 미즈에, 그리고 천상 소녀같은 비이. 


명장면, 명대사, 명분위기의 향연


영화 <하와이언 레시피>는 명장면, 명대사, 명분위기의 향연이 펼쳐진다. 가본 적도 없는 하와이의 눈부신 하늘과 바다를 비롯한 거의 모든 장면들이 명장면이다. 그 장면들만으로도 '힐링'이 되는 듯하다. 느릿느릿하고 여유로운 삶의 모습들이 장면장면 짙게 배어 있다. '급할 수록 돌아가라'라는 말이 무색하게, '급할 게 뭐가 있나'를 보여준다. 처음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고 답답하고 짜증까지 났지만, 그게 곧 극도의 부러움이 표출된 거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된다. 나중엔 조금이나마 여유롭게 받아들일 수 있다. 


그곳에 의외로 '사랑' 있다. 아마 레오와 누군가의 사랑일 텐데, 나이가 지긋하신 분들밖에 없는 곳에서 어떻게? 영화 <하와이언 레시피>의 한 장면 ⓒ㈜영화사 진진



영화를 관통하는 스토리 라인에는 예상 외로 '사랑'이 있다. 누구와 누구의 사랑일까? 아마 레오와 누군가의 사랑일 것이다. 그런데 그곳에는 나이가 지긋하신 분들밖에 없다. 이 잔잔한 영화에서 그런 분위기를 연출하긴 쉽지 않을 듯한데, 어김없이 레오 또래의 여인 머라이어가 등장한다. 그들은 급속도로 친해지는데, 그들을 보고 비이가 심상치 않은 모습을 보인다. 비이는 50여 년 전 젊은 시절에 남편과 사별했다고 한다. 


딱히 이야기 선을 찾기 힘든 이 영화에서 레오와 머라이어와 비이의 삼각 관계는, 단순히 중심이 되는 이야기일 뿐만 아니라 중요한 상징으로 자리매김한다. 사실 머라이어는 중요하지 않다. 레오와 비이의 관계 때문이다. 비이의 입장에서 보면 이야기가 달라 보인다. 


사랑을 하는 사람의 욕망, 그리고 쉼의 위대함


노인은 '사랑'을 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할 수 없다고도 생각할 것이다.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경우도 있다. 여하튼 노인과 사랑은 한 통속으로 묶기 힘들다. 영화는 바로 그 지점을 건드린다. 그것도 노인들이 주를 이루는 작은 마을을 배경으로. 노인도 사랑의 감정을 느낄 수 있고 느끼고 싶고 느끼며 산다. 비이는 젊은 레오에게 '여자'이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그와 함께 있을 땐 목소리며 몸짓이며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진다. 천상 여자, 아니 소녀의 그것이라고 할까. 레오는 알 길이 없지만. 


그런 면에서 상당히 파격적인 설정일 테다. 분위기는 천지 차이지만, 영화 <은교>가 생각나기도 한다. 노인의 욕망을 그렸다는 점에서 말이다. 다만 <은교>에서 이적요가 '사랑'이 아닌 '욕망'의 화신이었다는 점에서는 다르다. 그는 은교의 '젊음'에 심취했던 것이다. 반면 비이는 자신을 변화시킨다. 그러며 레오에게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요리를 선사한다. '노인'의 욕망이 아닌 '사랑을 하는 사람'의 욕망인 것이다. 


쉼이야말로 살아 있는 것의 위대함을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모습일 거다. 영화 <하와이언 레시피>의 한 장면 ⓒ㈜영화사 진진



한편 비이를 비롯한 마을 사람들 모습에서 또 다른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대단한 일은커녕 아무런 일도 하지 않는, 얼핏 무지렁이 같은 이들의 집합소 같은 그곳에도 삶다운 삶이 생동하고 있다는 사실 말이다. 잘 보면 그들 모두 항상 무언가를 하고 있다. 음식을 만들고, 먹고, 졸고, 일하고, 멍 때리고, 앉아 있고. 


우린 삶을 오해한다. 무엇이든 열심히 해야 하고 쉬는 건 용납되지 않는다. 열심히 한 만큼 그에 비례해 쉴 수 있다. 그렇지만 쉼이 함께 하지 않는 삶은 지옥 같은 것이 분명하다. 그러지 않다고 반박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본능을 억제한 채 너무 오래 살아왔기 때문이라고 확신한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쉼이 함께 할 때 비로소 일의 능률이 오를 거라고 조언하고 싶다. 쉼이야말로 살아 있는 것의 위대함을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모습일 것이다. 


삶이 삶을 지탱하고, 사람이 사람을 지켜준다


"육체는 말과 생각의 이유에 지나지 않아"


극 중 코이치 할아버지의 말이다. 생각나는 여러 명대사 중 하나인데, 깊이 생각하게 만든다. 영화 중반부가 넘어가면서 코이치를 비롯해 동네 사람들이 하나둘 레오 곁을 떠난다. '레오 곁을 떠난다'고 말한 이유는, 그곳에선 당연한 '떠남'이 레오에겐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곳은 그런 곳이고, 우리 인생도 다를 바가 없다. 애써 외면하고 있을 뿐이다. 당연한 걸 당연하게 받아 들이지 못하고 있다. 


변한 건 없다. 그대로이다. 다만 그때 그 사람들만 없을뿐. 그게 인생 아닐까. 영화 <하와이언 레시피>의 한 장면 ⓒ㈜영화사 진진



결국엔 레오도 1년 동안 정든 그곳을 떠난다. 그러곤 1년 후에 다시 찾는다. 변한 건 없다. 그곳은 그곳에 그대로 있다. 다만 사람들만 없을 뿐. 그게 인생 아닐까. 너무도 당연한 진리. 만나고 설레고 사랑하고 헤어지고 아파하고 추억하고 성장하는, 그런 당연한 진리를 영화는 찬찬히 보여준다. 


영화가 끝나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호노카아 마을의 전경과 사람들이. 10여 년 전, 호주 브리즈번에서 지냈던 1년과 많은 것들이 겹친다. 그 분위기와 전경들, 나름 치열했던 궤적도 떠오른다. 그 모든 것이 삶이다. 다름 아닌 삶이 삶을 지탱하고, 사람이 사람을 지켜주는 게 아닐까. 레오의 앞으로의 삶에는 호노카아 마을 사람들이 함께 할 것이다. 모든 이들의 삶에 모든 이들이 함께 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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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제임스 카메론의 <어비스>


'흥행의 신' 제임스 카메론에게도 '흑역사'가 있으니 1989년 작 <어비스>다. 상종가를 달린 그에게 폭스사가 전례없는 큰 투자를 했는데 흥행에서 참패했다. 평단의 평가도 호불호가 갈렸거니와 그의 과도한 완벽주의가 영화계에 악명을 떨치기도 했다. 영화 <어비스> 포스터 ⓒ20세기폭스



<아바타>와 <타이타닉>으로 영화 흥행 역사의 신기원을 이룩한 '제임스 카메론' 감독. <타이타닉>이 12년 동안 가지고 있던 세계 영화 흥행 1위를 <아바타>로 갈아치웠던 바 있다. 작년, 4편이 여기에 도전장을 내밀었지만 <스타워즈> 정도가 근처까지 도달했을 뿐이다. 


제임스 카메론 감독은 30여 년 전 일찌감치 흥행감독의 싹을 보였는데, <터미네이터 1, 2> <에일리언 2> <트루 라이즈>가 그 영화들이다. 그들은 흥행뿐만 아니라 평단의 호평도 받아서 지금까지도 반드시 봐야 할 영화에 뽑히곤 한다. 그야말로 완벽에 가깝다고 해야 할까. <타이타닉>으로 제70회 아카데미 감독상과 작품상 등 11개 부문을 휩쓴 적도 있으니 말이다. 


제임스 카메론의 '흑역사'이자 최고의 영화


그런 그에게도 '흑역사'가 있으니 1989년 작 <어비스>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터미네이터>와 <에일리언 2>로 상종가를 달린 그에게 폭스사가 전례없는 큰 투자를 했는데 흥행에서 참패했다(2년 뒤 <터미네이터 2>로 재기에 성공한다). 평단의 평가도 호불호가 갈렸거니와 그의 과도한 완벽주의가 영화계에 악명을 떨치기도 했다. 영화를 찍는 도중에 이혼을 하기도 했다. 여러모로 제임스 카메론의 영화 인생에 큰 획을 그은 영화라 하겠다. 


30여 년이 지난 지금은 제임스 카메론 최고의 영화 중 하나로 뽑히는 <어비스>. 나아가 영화 기술도 최소 몇 차원은 끌어올렸다. 이 영화를 찍었을 때 그에게 영화는 예술이 아니고 과학이었던 걸까. 장장 4편까지 기획되어 있다는 흥행과 3D의 신기원 <아바타> 시리즈는 하루아침에 나온 게 아니었던 거다. 보는 이에겐 여러모로 믿기 힘든 영화라 하겠다. 사실, 보기도 쉽지 않다. 


30여 년이 지난 지금은 제임스 카메론 최고의 영화 중 하나로 뽑히는 <어비스>. 나아가 영화 기술도 최소 몇 차원은 끌어올렸다. 이 영화를 찍었을 때 그에게 영화는 예술이 아니고 과학이었던 걸까. 영화 <어비스>의 한 장면. ⓒ20세기폭스



영화는 미국의 핵잠수함이 침몰하면서 시작된다. 소련에 의한 것이 아니라 정체불명의 무엇에 의한 것이었다. 미해군은 생존자 수색의 명목 하에 네이비실을 파견하며 민간석유시추선 딥코어와 연합작전을 펼친다. 딥코어 책임자 버드와 직원들은 터무니 없는 작전에 반색을 표하지만, 미해군의 반 협박 반 회유에 어쩔 수 없이 참여한다. 


한편 버드는 하필 가장 함께 하기 싫은 사람과 함께 하게 되는데, 다름 아닌 전 부인 린지였다. 린지는 딥코어를 만든 이였고, 그 누구보다 바닷속을 잘 아는 전문가였다. 미해군은 그녀를 네이비실과 함께 투입한다. 이 작전에 큰힘이 될 것이 분명했지만 버드 입장에서 껄끄러운 것만은 분명했다. 역경을 함께 이겨내면 가까워 지는 법, 이들의 관계는 어떻게 흘러갈까?


제임스 카메론이 하고자 했던 무궁무진한 이야기들


장장 2시간 30분이 넘는 러닝타임을 자랑하는 이 영화는 크게 3부분으로 나뉜다. 너무 평화로워 지루하기까지 한 초반을 지나 예상못한 태풍으로 사고를 당해 딥코어가 심해로 추락하는 부분까지, 네이비실 책임자 커피 중위가 은밀한 임무에 과도하게 몰입되어 딥코어 일행과 격렬하게 대립해 상당한 문제를 야기시키는 부분까지, 그리고 커피 중위가 야기시킨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죽음을 무릅쓰고 한계를 넘어서는 심해까지 내려가는 버드와 그 이후의 이야기까지. 


제임스 카메론은 이 영화로 정녕 무궁무진한 이야기를 하고자 했던 것 같다. '사랑의 위대함', '인간들끼리 싸우지 말라', '심연의 공포' 등. 과연 잘 전해졌을까? 영화 <어비스>의 한 장면. ⓒ20세기폭스



제임스 카메론은 이 영화로 정녕 무궁무진한 이야기를 하고자 했던 것 같다. 가장 직접적인 메시지는 '인간들끼리 싸우지 말라'는 것인데, 그건 '사랑의 위대함'이라는 메시지와 함께 영화를 다 보고 나서야 비로소 알 수 있다. 다만 그 부분이 영화 전체에 해당해서 자세히 언급하기가 꺼려지고, 또 다름 아닌 그 부분이 이 영화에 대한 호불호에 많은 영향을 끼치기 때문에 지나가도록 하겠다. 


다른 하나는 제목에 따라 '심연의 공포' 정도가 되겠다. 영화 절반 이상이 물속인데, 영화를 보고 있으면 정녕 물속에서 허우적대는 느낌이다. 답답하다가 공포가 밀려오기도 한다. 제대로 살렸다. 끝이 보이지 않는 우주나 망망대해에서 표류하는 기분이랑은 정반대의 공포이다. 


영화에서는 네이비실 책임자 커피 중위의 행동으로 나타난다. 윗선과의 연락이 끊긴 상태에서 극비 임무를 수행해야 하는 상황에 처했다. 극비 임무에 대한 부담감, 눈앞에 보이는 적인 소련에 대한 맹목적 반감, 과도한 수압과 폐쇄된 공간으로 인한 정신분열 증세까지. 오랜 세월 심해에서 작업해왔던 이들도 힘들어하는 상황, 아무리 특수부대 책임자라지만 그곳에서는 평범한 사람이기에 그는 돌아버린다. 


한편 강인한 정신력과 리더십의 소유자인 버드도 한 유형을 대표한다. 극단의 상황에 처할수록 더더욱 강해지는 그의 모습에서 우리는 지극히 이상적인 인간상을 발견할 수 있다. 그는 급기야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모두를 살리고자 하는 것이다. 이런 모습에 감명받지 않을 이가 누구인가. 동물도 인간도 심지어 외계인도 감명받지 않을까.


심연을 너무 깊게 들여다보지 말라


제임스 카메론은 이 영화를 만들면서 너무 깊게 들여다본 것 같다. 영화를 너무 완벽하게 만드려 했다. 실로 영화는 여러 면에서 완벽하게 나왔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공감하지 못했던 듯하다. 영화 <어비스>의 한 장면. ⓒ20세기폭스



누구나 한 번쯤 '심연'을 경험해본 적이 있을 것이다. 굳이 깊은 바닷속으로 들어갈 필요도 없다. 살아가면서 순간순간 들어가기도 하고 오랫동안 들어가기도 한다. 누구는 들어갔다가 평생 나오지 못하기도 한다. 또한 누구한테는 그곳에서의 경험이 더할 나위 없이 좋게 작용하기도 하고, 치유하지 못할 상처를 남기기도 한다. 당연히 전자라면 좋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평범하기에 좋게만 작용하기 힘들다. 어떤 식으로 경험했든 그 기억이 평생 결코 좋지만은 않게 따라 다닌다. 그때마다 어떻게든 잘 이겨내야 하는 게 우리들의 숙명이다. 그나마 해줄 수 있는 건 한 마디 뿐이다. 영화가 시작되면서 프리드리히 니체의 말을 인용하는데, 그 말과 비슷하다. '심연을 너무 깊게 들여다보지 말라'는 것이다. 그만큼 심연도 당신을 깊게 들여다보려 할 거니까. 


제임스 카메론은 이 영화를 만들면서 너무 깊게 들여다본 것 같다. 영화를 너무 완벽하게 만드려 했다. 실로 영화는 여러 면에서 완벽하게 나왔다. 그 방면의 심연을 정녕 깊게 들여다봤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공감하지 못했던 듯하다. 그 중 1인이 본인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만약 영화가, 백 번 양보해 상업 영화가 아니었다면 어땠을까. 다큐멘터리였다면? 아마 방향을 조금만 틀었어도 가능했을 것이다. 그것도 완벽하게. 실제로 그는 <어비스>를 만든 25년 후 내셔널지오그래픽과 함께 <제임스 카메론스 딥씨 챌린지>라는 다큐멘터리를 만들며 그야말로 제대로 심연을 들여다봤다. 그는 그곳에서 어떤 걸 보고 느꼈을까? 반가웠을까, 씁쓸했을까, 후련했을까, 두려웠을까, 기가 막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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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드라이빙 미스 데이지>


깐깐하고 꽉 막힌 상류와 서글서글하고 활달한 하류의 잘못된 만남과 영원한 우정 또는 사랑 이야기는 굉장히 흔하다. <드라이빙 미스 데이지>도 그 흔한 이야기의 하나다. 영화 <드라이빙 미스 데이지> 포스터 ⓒ워너 브라더스



깐깐하고 꼬장꼬장한 전직 교사 출신 유태인 70대 할머니 데이지, 어느 누구도 그녀를 어찌 할 수 없다. 공장을 운영하고 있는 아들 불리, 그의 깐깐하고 성깔 있는 아내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그렇게 살아 왔고, 바뀌지 않을 거고, 굳이 바뀔 필요도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소소한 사고가 난다. 차를 끌고 장을 보러 가려다가 기어를 잘못 조작해 사고를 낸 것이다. 불리는 곧 흑인 기사 호크를 고용한다. 


가난했던 옛생각만 하며 부자가 된 현재의 모습을 뽐내길 싫어하고, 자신도 유태인으로 차별을 당하면서 흑인에 대한 나쁜 선입견을 가지고 있고, 종교에 대한 지나치게 확고한 신념으로 다른 종교(기독교)를 깍아내리는 데이지가 호크를 아니꼽게 보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가 뭘하든 사사건건 참견하며 하지 못하게 하고 그가 운전하는 차에 타지 않으려 한다. 동네 사람들의 시선 때문에 어거지로 차에 탄다. 



깐깐하고 꼬장꼬장한 전직 교사 출신 유태인 70대 할머니 데이지, 어느 누구도 그녀를 어찌 할 수 없다. 그녀는 그렇게 살아 왔고, 바뀌지 않을 거고, 굳이 바뀔 필요도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소소한 사고가 나 불리는 곧 흑인 기사 호크를 고용한다. 영화 <드라이빙 미스 데이지>의 한 장면 ⓒ워너 브라더스



인생의 황혼기에 완전히 바뀌는 특별한 경험


깐깐하고 꽉 막힌 상류와 서글서글하고 활달한 하류의 잘못된 만남과 영원한 우정 또는 사랑 이야기는 굉장히 흔하다. 모르긴 몰라도 인류 역사를 관통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드라이빙 미스 데이지>도 그 흔한 이야기의 하나다. 다만 이 영화만 같는 특장점이 있다. 


인간은 30세가 넘어가면 잘 바뀌지 않는다고 한다. 자신이 의도하지 않아도 그동안 체화한 것들이 겉으로 드러날 정도라는 것이다. 공자가 말씀하시길 30세면 '이립'이라 하여 '마음이 확고하게 도덕 위에 서서 움직이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는가. 하물며 70세라야? 70세면 뜻대로 행해도 어긋나지 않는 경지다. 


데이지 여사는 살아 왔던 대로 계속 살아가면 되는 나이에 있었다. 아무도 그녀를 탓하지 않는다. 그냥 그런 사람인가보다 하고 말 것이다. 그런 그녀가 180도 바뀐다. 성격이 아니라 세상을 대하는 눈이 달라진다. 거의 불가능에 가깝지는 그녀는 '해낸다'. 인생의 황혼기에 다달아 완전히 바뀌는 특별한 경험은, 보는 이에게도 특별한 경험으로 다가온다. 


데이지 여사는 살아 왔던 대로 계속 살아가면 되는 나이에 있었다. 그녀가 180도 바뀐다. 성격이 아니라 세상을 대하는 눈이 달라진다. 인생의 황혼기에 완전히 바뀌는 특별한 경험은, 보는 이에게도 특별한 경험으로 다가온다. 영화 <드라이빙 미스 데이지>의 한 장면 ⓒ워너 브라더스



그녀는 유태인이다. 자신도 미국의 백인 사회에서 알게 모르게 차별을 당한다. 사실상 흑인인 호크와 다를 바가 없다. 호크와 함께 삼촌 댁에 가는 도중 잠시 길 옆에 차를 세워두었을 때 경찰 두 명이 와서 '이 고급차를 왜 너같은 흑인이 타고 있냐'는 식으로 얘기한다. 그녀는 알지 못한다. 그들이 그녀에게도 유태인이라는 이유로 차별의 시선을 날린 것을. 그녀가 가던 회당이 KKK로 예측되는 이들에게 폭탄 테러를 당하는 일까지 당하게 된다. 흑인에 대한 나쁜 선입견으로 호크를 도둑으로 몰았던 일도 있다. 


그녀는 자신이 피해자라는 걸 몰랐을까. 아니면 피해자라는 걸 애써 감추고 살았을까. 알면서도 모른 채 살았을까. 그녀의 머릿속엔 유태인이라는 단어가 그런 식으로 비춰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대신 다른 게 들어 있다. 과거의 가난과 현재의 부자. 그녀가 흑인 가정부를 아끼는 이유가 힘들었던 지난 날을 함께 해왔기 때문인 것과 같은 맥락이다. 그런 시절을 함께 하지 않은 호크는 그녀에게 그냥 흑인일 뿐이다. 


괜찮은 삶, 끊임없이 부딪히고 깨닫고 성장하는 삶


영화는 20년의 세월을 그린다. 이미 초로의 노인인 데이지 여사는 치매에 걸려 요양원에서 지내고 호크는 운전을 할 수 없어 손녀딸이 태워주는 차에 타고 다니게 된다. 아이델라는 세상을 떠났고, 아들도 늙고 바빠 잘 챙기지 못하며, 며느리는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말로만 안부를 전하니, 그녀에게 남은 이는 호크밖에 없었다. 한순간 정신을 차린 데이지 여사는 호크에게 진심을 전한다. 


"자네는 나의 친구야, 가장 친한 친구."


보다시피 영화는 의외로 성장 영화다. 초로의 여인 데이지 여사의 성장기. 그 성장에 차별 철폐, 우정, 화해, 진심이 담겨 있다. 그 성장을 죽을 때까지 멈추지 않는다. 흔하디 흔하지만 특별한, 그래서 특별함을 많은 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었다. 어떤 사건사고 없이 몇몇의 대화로만 이루어진 이 단조로운 영화가 와 닿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그런 사실을 인지하게 되었을 때 직시하고 올바른 쪽으로 바꿔나가는 것이야말로 괜찮은 삶이고 잘 산 삶일 것이다. 그들이 부러운 듯 '운이 좋았다'고 말한 아이델라의 삶이 아니고. 영화 <드라이빙 미스 데이지>의 한 장면 ⓒ워너 브라더스



그들은 죽은 아이델라를 두고 '운이 좋았다'라고 표현한다. 왜 그렇게 말했을까. 그녀가 좋아하는 드라마를 보다가 죽음을 맞이해서? 고통스럽지 않게 자신도 모르는 새 죽음을 맞이해서? 말년의 비참한 꼴을 보지 않고 죽음을 맞이해서? 생각해봐도 그들이 그렇게 말한 정확한 이유를 모르겠다. 다만 영화의 맥락을 통해 이해해 볼라치면, '흑인의 삶치곤 괜찮은 삶이었다' 정도겠다. 씁쓸하다.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 자신이 차별 당하고 있는 사실을 이해하려고도 하지 않고 이해하지도 못한 채 '분수에 맞는' 삶을 사는 게 괜찮은 삶이고 잘 산 삶일까. 물론 그런 사실을 인지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체념한 채 살아가는 것보다는 괜찮은 삶이겠다. 여기서는 '아는 게 힘'이라기보다 '모르는 게 약'이지 않을까. 


그렇다면 그런 사실을 인지하게 되었을 때 체념하는 게 아니라 정확히 직시하고 올바른 쪽으로 바꿔나가는 것이야말로 괜찮은 삶이고 잘 산 삶일 것이다. 데이지 여사, 그리고 호크의 삶이 바로 그런 삶이다. 그들이 부러운 듯 '운이 좋았다'고 말한 아이델라의 삶이 아니고. 그녀의 삶은 '충실했다'고 표현하는 게 맞지 않을까. 결이 조금 다른. 


많은 사람들이 아이델라의 삶을 살아간다. 그저 살아가는 데 충실한 삶, 그 또한 어떤 의미에선 위대한 삶이다. 데이지 여사의 삶도, 호크의 삶도, 많은 이들에겐 상당히 다른 차원의 삶이다. 나는 아직 정하지 못했다. 어떤 삶을 살아갈지, 또 어떤 삶을 살 수 있을지. 부러운 삶은 아이델라의 삶일 것이다. 하지만 살고 싶은 삶은 데이지 여사와 호크의 삶이다. 끊임없이 부딪히고 깨닫고 성장하는 삶 말이다. 괜찮은 삶이길 바란다. 괜찮은 삶이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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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오래된 리뷰] <브로크백 마운틴>


'이 세상에 둘밖에 없으면 어떨까' 하는 질문은 '이 세상에 우리 둘밖에 없었으면 좋았겠다'로 바뀐다. 이 영화가 보여주는 사랑의 위대함과 길고긴 여운은 그 지점의 연장선이다. 영화 <브로크백 마운틴> 포스터. ⓒCJ엔터테인먼트



약관 20세의 두 청년 잭(제이크 질렌할 분)과 에니스(히스 레져 분), 함께 브로크백 마운틴에서 양떼를 몬다. 광활한 대지에 두 사람뿐이라 어색하다. 그것도 잠시, 어느새 친해져 브로맨스를 선보이는 두 사람. 어느 날 잭은 밖에서 오들오들 떨면서 자는 에니스에게 텐트에 들어 오라고 한다. 새벽녘 그들은 격정적인 사랑을 나눈다. 


없었던 일로 하자는 에니스, 받아들이는 잭. 그들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자신은 게이가 아니라고 말한다. 이미 그들의 친밀감은 전에 없이 높아져 있었다. 갑작스레 철수하게 되는 그들, 이제 현실로 돌아가야 하는 그들은 주체할 수 없는 혼란으로 서로가 서로에게 상처를 입힌다. 그들은 헤어진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처럼. 


이 영화가 보여주는 사랑의 위대함


에니스는 말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어. 가끔 만나서 몰래 사랑할 수밖에 없다고." 영화 <브로크백 마운틴>의 한 장면. ⓒCJ엔터테인먼트



영화 <브로크백 마운틴>은 광활한 대자연에 던져진 두 청년의 혼란에서 시작한다. '이 세상에 둘밖에 없으면 어떨까' 하는 질문을 하게 만든다. 그 질문은 영화가 끝날 무렵 '이 세상에 우리 둘밖에 없었으면 좋았겠다'로 바뀐다. 이 영화가 보여주는 사랑의 위대함은 그 지점에서 발현되고, 이 영화의 길고긴 여운은 그 지점의 연장선이다. 


그렇다. 이 영화의 주요 소재와 주제는 남성 간의 로맨스, 즉 동성애다. 그런데 그들은 격정적인 로맨스를 한 차례 겪은 후 이성과 결혼하고 아이도 낳아 기른다. 그들의 인생에서 거의 처음 겪어보는 사랑의 감정이 남성을 향했을 뿐이니, 젊은 날의 경험이라고 치부하며 넘어갔을 수 있겠다. 기나긴 인생에서 스쳐지나간 금지된 사랑을 그린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가 생각나는 지점이다. 


그들의 사랑은 헤어진 지 4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다. 각자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현실에 안주하며 살고 있은 지도 한참이 흘렀음에도 말이다. 4년 만에 만난 그들은 그 자리에서 격한 키스를 나누고 가족에겐 거짓말을 한 후엔 사랑도 나눈다. 그런데,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 사랑을 재확인 했으니만큼 이제라도 같이 살며 모든 걸 초월한 진정한 사랑의 앞날을 도모할 것인가? 에니스는 말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다고. 가끔 만나서 몰래 사랑할 수밖에 없다고. 


어느 사랑보다 절절한 사랑, 잔잔하게


그들의 삶은 평범하게 흘러간다. 겉으로 보기엔 남과 다르지 않다. 다만, 어쩔 수 없는 게 있다. 사랑하는 사람이 따로 있다 보니 아내와 가족들에게선 멀리 있을 수밖에 없다. 영화 <브로크백 마운틴>의 한 장면. ⓒCJ엔터테인먼트



영화의 주 배경은 1960~70년도이다. 더구나 그들은 서부 사나이들이고. 잭은 가장 사나이다운 직업인 로데오 카우보이가 되고자 한다. 에니스는 어릴 때 아버지가 동성애자를 죽여서 버린 모습을 생생히 기억한다. 태생적으로, 사회적으로 그들은 서로를 사랑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어떻게든 이성과 결혼을 한 거고. 그 와중에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는 걸 숨기지 않은 것만해도 엄청난 부담이었다. 


그들의 삶은 평범하게 흘러간다. 겉으로 보기엔 남과 다르지 않다. 다만, 어쩔 수 없는 게 있다. 사랑하는 사람이 따로 있다 보니 아내와 가족들에게선 멀리 있을 수밖에 없다. 만약 사랑하는 사람이 남자가 아니라 여자였다면, 욕을 먹더라도 '사랑'으로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이 남자였기에 그럴 수 없었다. 남자가 남자를 사랑했다는 이유로, 그들의 삶은 평탄치 않았고 가시밭길이었다. 


영화는 어느 사랑보다 절절한 그들의 사랑을 얼핏 전혀 절절하게 보여주지 않는다. 오히려 너무 담담해 지루하다 싶을 만큼 잔잔하게 보여준다. 그래서 영화를 보는 내내 '영화니까 가능한 거지, 영화잖아.'라는 말을 꺼내지 못했다. 그들의 사랑은 결코 로맨틱하지 못했으니까, 로맨틱한 연출은 그들의 사랑에 방해가 되지 않는가. 


상황에 맞는 OST가 거의 깔리지 않는 게 한 몫 했다. 대부분의 영화에서 분위기를 살리는 데는 시의적절한 OST가 큰 몫을 차지하는데, 이 영화는 오히려 그러지 않았기에 분위기를 살릴 수 있었다. 그들의 감정선을 오롯이 따라가는 데 초점을 맞춘 것이고, 보는 이 또한 그러했다. 그 덕분에 치기 어리고 혼란스러운 첫 경험에서 시작해 20년 간 지속되는 사랑의 절절함이 폭발하는 감정의 선율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때 터진 울음은 영화가 끝나고서도 한참을 간다. 시종일관 터져 나오는 울음으로 끝나는 여타 영화에서는 느끼기 힘든 바다. 


그저 브로크백 마운틴으로 보여줄 뿐이다


영화는 동성애를 옹호하고 울부짖지 않는다. 브로크백 마운틴으로 보여줄 뿐이다. 그들의 사랑을 보호해줘야 한다는 것을. 그들의 사랑이 아름답다는 것을. 그들의 사랑도 사랑이라는 것을. 영화 <브로크백 마운틴>의 한 장면. ⓒCJ엔터테인먼트



금지된 사랑을 하는 이들은 누구나 '우리 아무도 없는 곳으로 떠나자'라고 말한다. 그런데 잭과 에니스는 이미 그런 곳에서 주기적으로 만난다. 다름 아닌 '브로크백 마운틴'이다. 그들의 사랑이 시작된 그곳, 그들에겐 이상향과도 같은 그곳, 그들의 도피처이자 그들에게 유일하게 남은 그곳이다. 


참으로 슬프고 쓸쓸한 곳이기도 하다. 아무도 없이 오직 그들만 있어 자유롭지만 극도로 폐쇄적이고 고독한 곳이 아닌가. 그들은 도대체 왜 그곳에서만 사랑을 확인하고 사랑을 나눌 수 있는 것인가. 그들이 잘못한 게 있어서? 그들이 죄를 지어서? 반면에 누구나 자유롭고 평등하다는 곳에서는 그렇지 못한 것인가. 


영화는 직접적으로 동성애를 옹호하고 울부짖지 않는다. 브로크백 마운틴으로 보여줄 뿐이다. 그들의 사랑을 보호해줘야 한다는 것을. 그들의 사랑이 아름답다는 것을. 그들의 사랑도 사랑이라는 것을.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데 그 어떤 게 필요할까. 그저 사랑, 사랑, 사랑만 있으면 되지 않을까. 그거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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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아메리칸 히스토리 X>


미국의 경우 오랫동안 보다 나은 삶의 기회를 찾아 미국으로 오는 모든 이에게 자유와 풍요를 약속하는 '아메리칸 드림'이 존재했다. 그 이면에는 잘 보이지 않는, 잘 드러내지 않은 큰 문제가 도사리고 있었다. 영화 <아메리칸 히스토리 X> 포스터 ⓒ뉴라인시네마



남 캘리포니아의 스킨헤드 데릭(에드워드 노튼 분)은 자동차를 훔치러 온 흑인들을 향해 무차별 총격을 가한다. 그러곤 신음하는 그들을 무참히 살해한다. 그와 함께 있던 여자친구와 남동생 대니는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충격적으로 시작된 영화 <아메리칸 히스토리 X>는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이야기를 전개한다. 


유럽 난민 사태가 전 세계적인 이슈로 떠오른지 한참이다. 인도적인 차원에서 그들을 수용할 것인지 자국의 이익을 위해 받아들이지 않을 것인지, 논란도 엄청 나고 결정도 쉽지 않다. 안 그래도 전 세계적인 경제 위기가 완전히 사그라들지 않은 시점에, 불황에 허덕이는 자국민들은 그 분노를 이주민에게 돌리기 쉽다. 그 어느 나라도 예외일 수 없다. 


미국의 경우 오랫동안 보다 나은 삶의 기회를 찾아 미국으로 오는 모든 이에게 자유와 풍요를 약속하는 '아메리칸 드림'이 존재했다. 미국의 상징인 '자유의 여신상'이 다름 아닌 아메리칸 드림의 상징과도 같으니 그곳은 정녕 꿈에서나 나올 법한 곳이 아닌가. 수많은 이들이 향했고, 때론 실패했고 때론 성공했다. 그리고 그 이면에는 잘 보이지 않는, 잘 드러내지 않은 큰 문제가 도사리고 있었다. 아메리칸 악몽(나이트메어)이다. 


아메리칸 드림이 아닌, 아메리칸 나이트메어


이 영화를 관통하는 큰 주제가 아메리칸 나이트메어다. 그 중심에는 스킨헤드 데릭이 있다. 영화 <아메리칸 히스토리 X>의 한 장면 ⓒ뉴라인시네마



이 진지한 영화를 관통하는 큰 주제가 바로 그 아메리칸 나이트메어다. 그 중심에는 스킨헤드 데릭이 있다. 그는 3년 전 소방수 아버지를 잃었는데, 다름 아닌 흑인 거주지에서 일을 수행하다가 강도의 손에 죽음을 맞았던 것이다. 그 일을 계기로 백인 우월주의자로의 길을 걷는다. 남동생 대니는 그를 영웅처럼 떠받든다. 


그런데 3년 간의 복역을 끝내고 나온 데릭의 행동이 뭔가 이상한 게 아닌가. 더 이상 스킨헤드의 길을 가지 않겠다고 천명하고는 대니를 설득하고 나선 것이다. 큰 깨달음이 없이는 그 길에서 헤어나오기 쉽지 않다. 대니 역시 그렇다. 결국 데릭은 결심을 하고는 자신이 감옥에서 겪었던 끔찍하지만 감동적인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는 감옥에 가서도 여전히 스킨헤드로 행동한다. 역시나 그곳의 스킨헤드 그룹에 들어가 중추적인 역할을 한다. 한편 흑인 한 명과 같이 일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도 처한다. 그러던 중 스킨헤드 그룹의 대장이 유색인종과 거래를 하는 사실을 알게 된다. 참을 수 없는 데릭은 항의하다가 참혹한 일을 당한다. 그가 갈 곳은 없고, 유색인종 그룹한테 더욱 더 참혹한 일을 당할 것이 분명했다. 그런 그를 지켜준 이가 다름 아닌 그와 함께 일하는 흑인이었다. 그는 큰 깨달음을 얻는다. 


과연 그 깨달음은 다시 뭉쳐 비로소 온전히 잘 살아보려는 그의 가족을 지켜낼 수 있을까? 너무 늦은 게 아닐까? 그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죄를 저질렀다. 흑인 두 명을 살해해 흑인들에게 언제 보복을 당할지 알 수 없다. 또한 복역이 끝나고 돌아와서는 백인 우월주의자들에게도 등을 돌렸다. 백인들한테도 언제 보복을 당할지 알 수 없는 일이다. 특히 대니는 그의 전철을 아주 차근차근 따라가고 있기 때문에 무슨 일을 당해도 할 말이 없는 것이다. 


본노 자체가 아니라, 대상이 잘못 되었다


분노가 생길 수밖에 상황이고, 분노는 반드시 풀어주어야 한다. 그런데 그 대상이 왜 시대와 나라와 위정자가 아니라 약자여야 하는가. 영화 <아메리칸 히스토리 X>의 한 장면 ⓒ뉴라인시네마



활발한 이주민 정책으로 아메리칸 드림이 절정이었을 시기에, 스킨헤드의 활동 역시 절정으로 치닫을 수밖에 없었다. 유색인종의 유입이 급격히 늘어나면서 자연스레 백인의 실업률이 높아질 수밖에 없었고 그에 맞춰 정권은 자유 경쟁을 활성화시키는 보수적 정책을 시행하고 유지했다. 이주민 정책이 활성화될 때에 일자리를 잃게 된 백인 청년들은 그 화살을 이주민들에게 돌렸고, 그 사상의 기반을 백인 우월주의에서 찾았다. 권력에서 소외되고 자본주의 경쟁에서 패배한 그 분노는 대단한 것이었다. 피해자의 입장에서 가해자의 입장으로 변하는, 그 우월한 느낌 또한 무시할 수 없다. 


혐한(嫌韓)으로 유명한 일본의 '재특회(재일 특권을 용납하지 않는 시민 모임)'도 그런 부류다. 장기 불황으로 실업률이 높아지고 많은 청년들이 절망에 빠져 있는 상황에서, 누군가 나서 '적'을 만들고는 그 적은 능력도 없거니와 선천적으로 후지다고 선전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사상으로 똘똘 뭉치게 된다. 자신들은 우월한데, 다수의 적들이 침범해 어쩔 수 없이 자리를 보전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기조다.


그런데 생각해보라. 피해자에서 가해자가 된 그들이지만, 자신들이야말로 피해자라고 약자라고 외친다. 여러모로 피해자였던 건 맞지만, 결코 약자는 아닌 것이다. 문제는 잘 살지 못하는 나라에서 왔을 대부분의 이주민이야말로 약자가 아닌가. 고로 피해를 당해도 그들이 더 많은 피해를 당할 게 아닌가. 


문제는 증오의 대상이 잘못 되었다는 점이다. 그들의 분노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분노가 생길 수밖에 상황이고, 분노는 반드시 풀어주어야 한다. 그런데 그 대상이 왜 시대와 나라와 위정자가 아니라 약자여야 하는가. 그건 명백한 오류다. 


이 영화가 괜찮은 이유


미시적으로 접근했기에 조금의 답을 찾을 수 있었다. 이런 류의 뿌리 깊은 대립은 개인 개인으로 접근해야 한다. 영화 <아메리칸 히스토리 X>의 한 장면 ⓒ뉴라인시네마



이 영화가 괜찮은 이유는 따로 있다. 그런 심각하고 첨예한 논란을 주제로 삼았다는 것도 점수를 듬뿍 줄 수 있겠지만, 그 문제를 굉장히 미시적으로 접근했다는 점이다. 통사적으로 접근했다면 오히려 받아들이기가 힘들었을지 모른다. 또한 조금의 답도 찾을 수 없었을 것이다. 더욱이 영화적으로 의미가 없었을 것이다. 그리하면 다큐멘터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게 된다. 


미시적으로 접근했기에 조금의 답을 찾을 수 있었다. 이런 류의 뿌리 깊은 대립은 개인 개인으로 접근해야 한다. 영화의 한 명대사가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네가 한 행동들이 너의 삶을 좋게 만들었니?" 누구보다 투철한 스킨헤드인 데릭도 그 한 마디에 아무런 대답을 할 수 없었다. 그들이 원하는 건 여하튼 더 좋은 삶일 텐데 말이다. 유색인종을 모두 몰아내고 백인들의 세상을 만드는, 그들의 입장에서는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그런 삶을 만드는 게 목표일 텐데 말이다. 


결국 황폐해질 수밖에 없는 행동을 했다는 것. 아무리 거창한 사상과 목표로 무장하고 있더라도 결코 삶을 더 좋게 만들 수 없다는 깨달음. 조직적인 거창함에서 사적인 삶의 세계로 내려올 때 알게 되는 깨달음이다. 거기엔 사소하지만 위대한 사랑과 우정이 있다.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게 바로 거기에 있다. 그걸 깨닫지 못하고는 이 대립은 영원히 끝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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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왕가위 감독의 <중경삼림>


<중경삼림>은 '시간과 공간'에 관한 영화이다. . 영화 <중경삼림> 포스터. ⓒ엔드플러스



왕가위 감독을 세계적인 거장 반열에 오르게 한 영화 중 하나인 <중경삼림>. 제목을 이야기하지 않고 영화를 이야기하기 힘들다. 중경삼림을 영어로 바꾸면 'Chungking Express'이다. 홍콩에 가면 Chungking Mansion(重慶大廈: 중경대하)이 있다고 하는데, 처음 지어질 당시에는 고급 아파트였던 것이 현대에는 외국인 노동자들이 사는 소란스럽고 낡은 건물이 되었다고 한다. 왕가위 감독은 그곳을 중심으로 <중경삼림>을 찍었다.


또 하나, Express는 영화에서 주된 장소로 등장하는 패스트푸드점의 이름이다. 많은 사람들이 왔다가 머무르지 않고 떠나곤 하는 곳이다. '급행의' '신속한' '속달'의 의미를 지닌 Express와 일맥상통한다. 영화에서는 사랑을 잃고 방황하는 이들이 찾아와 외로움과 고독을 놓고 가곤 한다. 그러며 그곳에서 또다른 사랑을 찾는다. 


<중경삼림>은 이처럼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제목에서 어느 정도 유추할 수 있다. 은유와 상징이 상당한, 그래서 난해하고 지루할 수 있는 이 영화를 보기 전에 말하고자 하는 바를 알 수 있다면, 그건 스포일러 등의 방해가 아닌 도움이 될 것이다. <중경삼림>은 '시간과 공간'에 관한 영화이다. 


이 영화는 홍콩이 반환되기 3년 전에 만들어졌다. 그래서 그 시기 만들어진 많은 홍콩영화가 그렇듯이 홍콩 사회의 불안과 혼란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하기 쉽다. 물론 이 영화에 그런 점이 없다고 할 순 없다. 다분히 있다. 반환을 앞두고 불안과 혼란에 빠진 홍콩사회를 사랑을 잃고 방황하는 청춘들의 모습으로 보여주고 있다고 해도 무방한 것이다. 그렇지만 그건 분명 너무도 뻔한 도식이다. 애초에 실화도 아니고 사회를 보여주려고도 하지 않는다. 


기억이 통조림에 들어있다면 유통기한이 끝나지 않기를


"기억이 통조림에 들어있다면 유통기한이 끝나지 않기를, 만일 유통기한을 꼭 적어야 한다면 만 년 후로 적어야겠다." 영화 <중경삼림>의 한 장면. ⓒ엔드플러스



영화는 두 개의 이야기로 이루어진다. 사복경찰 223(금성무 분)은 매일 Chungking Express에서 만우절에 거짓말처럼 헤어진 옛 애인에게 전화를 건다. 그녀가 좋아했던 파인애플 통조림을 사들이며 자신의 생일이자 이별 한 달 째가 되는 5월 1일까지 연락이 안 오면 그녀를 잊겠다고 다짐한다. 결국 그녀한테서 연락은 오지 않고 223은 파인애플 통조림 30개를 모조리 먹어치우며 그녀를 잊는다. 비로소 이별이다. 


파인애플 통조림의 유통기한은 곧 223과 옛 애인 간의 사랑의 유통기한이다. 그가 매일 사들인 유통기한 5월 1일자 파인애플 통조림을 유통기한이 지나기 전에 다 먹어치운 이유는, 자신의 사랑이 쓰레기 취급 받기 싫어서 라는 순수한 이유 때문이다. 하지만 그 순수함은 비웃음을 사는 게 아닌 감동을 불러 일으킨다. 


그는 무작정 새로운 사랑을 찾으려 한다. 그렇게 만나게 된 이(임청하 분)와의 하룻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223의 순수함이 뚝뚝 묻어난다. 그가 왜 사랑을 잃었는지 왠지 수긍이 가게 되는 장면이지만, 세상은 그런 이의 사랑이 있기에 청량하고 아름답다. 급기야 그는 그 스쳐지나간 사람의 생일 축하한다는 한 마디에 "난 그녀를 잊지 못할 것이다. 기억이 통조림에 들어있다면 유통기한이 끝나지 않기를, 만일 유통기한을 꼭 적어야 한다면 만 년 후로 적어야겠다."고 독백한다. 


특별한 공간 '집', 그녀의 사랑 방식


사랑하는 이와 함께 했던 공간에 다른 이가 들어온 걸 견디긴 힘들 것 같다. 그래도 정성을 다해 집을 꾸며주고 사랑으로 다친 상처를 치유해주려는 그녀의 노력을 알아주지 않을까. 영화 <중경삼림>의 한 장면. ⓒ엔드플러스



정복경찰 663(양조위 분)은 223처럼 매일 Chungking Express에서 애인이 좋아하는 샐러드를 사간다. 하지만 애인은 곧 이별을 고하고 Chungking Express 점원 페이(왕페이 분)에게 편지와 열쇠를 건넨다. 663은 실의에 빠진다. 밖에서는 멀쩡해보이지만, 집에서는 어딘가 나사가 빠진 느낌이다. 물이 떨어지는 수건에 자신을 이입해 울지말라고 위로하고, 인형이나 비누를 붙잡고 하소연한다. 


한편 페이는 매일 663의 집에 몰래 가 663의 옛 애인의 흔적을 지워나간다. 그렇게 663이 자신도 모르게 이별을 해나가게 도와주는 것이다. 그러며 자신도 그곳에서 힐링을 받는다. 663이 받아줄지는 미지수이지만, 그것이 페이의 사랑 방식이다. 


언젠가는 663이 애인이 집에 돌아온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달려 들어온다. 그런데 잡그지 않은 수돗물이 넘쳐 집이 물바다가 된 게 아닌가. 663은 집을 치우며 "이 집은 점점 감정을 가진다. 강한 줄 알았는데 이렇게 많이 울 줄은 몰랐다."며 급기야 집에 자신을 이입한다. 그녀와의 특별한 공간인 집이 우는 건 아직 그가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다. 


그런 집에 페이가 몰래 침입한 사실을 알게 된 663은 어떤 마음일까. 가택침입죄를 물어 감방에 쳐 넣을 것 같지는 않지만, 사랑하는 이와 함께 했던 특별한 공간에 다른 이가 들어온 걸 견디긴 힘들 것 같다. 그래도 정성을 다해 집을 꾸며주고 사랑으로 다친 상처를 치유해주려는 그녀의 노력을 알아주지 않을까. 


시간이 흘러 비로소 알게 된 사랑 혹은 시간이 흘러도 변치 않는 사랑


<중경삼림>의 이야기는 곧 우리들의 이야기다. 그때가 과거로 머물지 않고 매순간 현재화 되어 지금까지 이어져 왔다는 사실이 새삼 신기하다. 영화 <중경삼림>의 한 장면. ⓒ엔드플러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영화는 시간과 공간을 주제로 한다. 그렇다면 223과 663의 이야기가 각각 시간과 공간에 관한 것일까? 많은 이들이 그렇게 볼 것 같은데, 꼭 그렇지만도 않다. 223과 663의 이야기 모두 시간과 공간을 말하고 있다. 두 이야기에 공통으로 나오는 Chungking Express라는 공간, 223의 이야기를 관통하는 '사랑의 유통기한', 663의 이야기를 관통하는 '특별한 공간, 집'과 시간이 흘러 비로소 알게 된 사랑 혹은 시간이 흘러도 변치 않는 사랑이 그것이다. 


이 영화를 이렇게 한 마디로 정의하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는, 모순적으로 이 영화는 한 마디로 정의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양가위 감독의 비서사적이면서 상징과 은유로 꽉 찬, 그러며 형용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영상미가 그러하다. '감성의 자유로운 표현이나 놀이의 요소를 도입한 사고 방식이나 표현 수법'이라는 뜻의 '포스트모던' 스타일의 대가 양가위의 대표작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영화를 꿰뚫는 무엇을 말하라면 단연 'California Dreaming'을 들겠다. 극 중에서 페이가 가장 좋아하는 노래인데, 황금빛 낙원 캘리포니아를 근심 있고 우울한 감정선으로 처리했다. 그건 곧 <중경삼림>과 일맥상통한다. 영화는 순수함과 불안이 공존하고 시종일관 우울한 듯하지만, 결국 해피엔딩을 이룬다. 


이름도 나오지 않는 이들(남자 주인공)의 도시 홍콩은 이들에게 불안과 혼란을 주지만, 불안과 혼란에서만 잉태되는 설렘과 꿈을 청춘에게만 허용되는 방황을 준다. 20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지워지지 않는 <중경삼림>의 이야기는 곧 우리들의 이야기다. 그때가 과거로 머물지 않고 매순간 현재화 되어 지금까지 이어져 왔다는 사실이 새삼 신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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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genv

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